DMZ를 홀로 걷는 한 마리 벌레에게


벌레 한 마리,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걷는다. 강원도 고성에서 임진각까지 약 380km의 길을 열하루 동안 걷는다. 병상에 눕는 대신 걷는 것을 택한다. 걸어야 그 상처가 아물고 새로운 지혜를 얻겠기에….


길거리와 광장에서 사람을 부르던 그 “지혜”(호크모트, 잠언 1:20)가 이번에는 잘린 허리 상처 난 길에서 그를 부른다. 최선을 다하고도 배신과 절망과 좌절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영혼을 지혜는 인적 드문 비무장지대로 불러낸다. 지혜는 하나님의 현신이다(욥기 28:27). 성지교회에서 가까운 인천에도 불러낼 곳이 많은데, 가까이 서울에도, 경기도 인근에 도 불러낼 곳이 없지 않은데, 지혜는 행정구역이 아닌, 여전히 긴장이 감도는 분단을 실감하게 하는 현장으로 그를 불러낸다.


그는 늘 어떤 어려움도 잘 참고 이겨내고 오히려 더 잘 선용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가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나는 사람도 아닌 벌레, 사람들의 비방거리, 백성의 모욕거리 일 뿐”(시편 22:6)이라고 하는 시편 시인의 한탄을 그에게서 들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늙은 시므온이 마리아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를 가리켜 “장차 이 아기는 성장한 다음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비방을 받는 표징”이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마리아에게 “당신의 아들이 비방 받는 표징이 될 때 당신은 가슴이 칼에 찔리듯 할 것”(누가복음 2:35)이라고 한 말이 생각나면서, 오히려 큰 위로가 이상하게 물밀 듯 밀려오기도 한다.


한희철 목사는 DMZ를 따라 걸으며 기도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 했다고 하지만, 그 DMZ의 열하루는 그가 뭘 간구하는 “기도”의 시공(時空)이었기보다는 분단의 역사 현장에서 그분과 만나 인간 역사와 하나님의 통치를 명상한 대화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열하루 동안 DMZ를 걸으며 그에게 수납(受納)된 말씀이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치환(置換)되기까지의 그 시간은 누구도 계산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받은 말씀을 그는 두고두고 음미하여 끝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 우리의 문법으로 그 말씀을 전달해주기까지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열하루 동안의 DMZ 380km 도보횡단은 그의 말대로 “무탈”(頉)로 끝나긴 했지만 “무리”(無理)한 시도였음이 틀림없다. 굴곡된 쾌락에 자신을 내맡기는 자학(自虐)으로, 혹은 무모한 반항(反抗)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는 계획이었는데, 그를 인도하시는 분께서는 당신의 종을 위해 한 천사를 시켜 로드맵을 준비시키신다. 한 마리 벌레와 동행하며 그 피조물을 지켜주시려는 그분의 첫 번째 배려는 바로 이 로드맵 작성으로 시작된다.


“지혜”가 보낸 이 로드맵 천사는 걷는 이가 걷기를 마칠 때까지 원격조정을 하며 지켜보고 있다. “걸어서 휴전선”이란 로드맵을 작성하여 걷는 이에게 주고 줄곧 교신하는 그는 걷는 이에게 자기를 “컨트롤 타워”로 생각하라고 한다. “걸어서 휴전선”이란 로드맵을 보고 있으면, 별도의 지도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것 같다. 누구나 이것 하나 만으로도 휴전선 따라 도보 동서횡단을 시도해볼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각자가 자기의 한계를 고려하여 횡단기간을 20일 혹은 30일로 늘려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걷기 체험기를 읽으면서 나는 휴전선 동서횡단 도상실습을 함께 한다.


한 마리 벌레처럼 기어가는 길, 부디 그분이 불쌍히 여기시기를 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길, 그럴수록 그분이 동행하시기를 바란다. 길에서 만나게 될 모든 한계상황들, 길 끝에서 그분을 구체적으로 만나기를 기대한다(「한 마리 벌레처럼」에서).


이 말을 듣고 나니, 안심이 된다. 


“너 지렁이 같은 야곱아, 벌레 같은 이스라엘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돕겠다. 나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이 너를 속량한다’고 하셨다”(이사야 41:14).


그는 이사야의 이 신탁을 확신하고 있다. 그가 DMZ를 걸으면서, 이사야의 이 신탁 말고, 호세아의 비전도 공유했을까?


“그 날에는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하고,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벌레와 언약을 맺고, 활과 칼을 꺾어버리며 땅에서 전쟁을 없애 어,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 놓고 살 수 있게 하겠다”(호세아 2:18).




아직 나는 이 책의 첫 부분을 읽고 있을 뿐이다. 그와 함께 걸어 본다. 그의 배낭에는 필기를 할 수 있는 세 권의 노트가 들어 있다. 들리는 말씀을 받아 적어야 하니까 노트는 넉넉해야 안심이 될 터. 가벼운 휴대용 노트북 생각은 안 했을까? 간단한 메모는 휴대폰의 노트패드를 이용할 생각도 안 하고? 하지만 더 편한 것이 수기노트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도 걱정도 하던데, 민통선이나 비무장지대 근방에서는 휴대폰에 여러 지도가 뜨지 않는가? 민통선 부근에서 내비게이션 작동이 멈춘 경험은 내게도 있다. 그가 열하루 길을 걸으면서 같은 기간 동안 머물 숙소를 예약하지 않았다는 것은, 길을 떠나서 숙소를 찾는 것이 시간 낭비뿐 아니라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가를 알기에, 숙소를 예약하지 않는 여정이 나로서는 가장 긴장되는 대목이었다. 아마도 도보여행이었기에 어떤 변수를 미리 예상한 조치였을지도 모르겠지만.


다행히 그는 열하루 동안 혼자 걷는 길에서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지는 않았다. 바울은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였다고 회고하고 있다(고린도후서 11:26). 그러나 우리의 보행자는 “길을 떠나니 길 떠난 자를 만나고”, 그들은 하나같이 모두가 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었다며, 그들을 만나 도움과 위로와 격려를 받은 이야기를 군데군데서 하고 있다. 그러나 그를 혼자 보낸 어머니와 아내, 자식들과 성도들이 얼마나 마음 졸였을까 하는 것을 우리의 보행자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낯선 길을 걷는 이에게 주어지는 은총 중 하나는 뜻밖의 만남이 허락된다는 것임을 배운 날이었다. 농막에서 물을 마시며 나눈 이야기나 정자에 앉아 심마니와 나눈 이야기는 분명 내 마음속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을 것이었다. 아름답고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내 마음을 더욱 풍요롭게 해 줄 것이다”(「심마니의 자존심」)라고 말하면서 한껏 여유를 부린다.


나의 경우, 늙은 어머니가 혼자서 바깥출입을 하거나 먼 기차여행을 할 때는 늘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지금 내 나이보다도 더 젊은 어머니였는데…. “어머니, 길을 나서시면 늘 조심하세요. 차도 조심, 사람도 조심….” “얘야 걱정마라. 밖에 나가면, 니 아나? 좋은 사람들뿐이 대이. 차는 비키 가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친절하고, 바깥에 좋은 사람 들 숱하게 많은 거, 니 모르제? 걱정하지 마라. 내 잘 다녀 올끼구만.” 어머니가 목사 아들을 위로한 말이었다. 그렇지만 한희철 목사의 글을 읽으니, 지금도 길을 나서면 길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특히 DMZ 부근에서는.아마도 그의 도보행군의 첫 번째 위협은 진부령에서 만난 폭우와 우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옆에서 보고 있는 나로서는 힘겹게 고개를 넘는 한 나그네를 환영하시는, 하나님이 마련하신, 축제행사로 보이기도 한다. 그 이유에 대해 내가 겪은 경험을 통해 말해본다. IMF 이후 중단되었던 대한항공 서울-텔아비브 노선이 10년 만인 2008년 9월에 재취항 하던 날, 나는 그 첫 비행기 시승에 초대받았고, 마침내 그 비행기는 텔아비브 벤구리온 공항에 착륙했다. 그때 살수차(撒水車)들이 우리가 타고 간 비행기를 뺑 둘러싸고 물 폭탄을 퍼붓던 것이 기억난다. 그것은 비행기 재취항과 첫 승객을 환영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공항 환영행사였다. 기내 방송이 미리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우리가 탑승했던 비행기에 화재가 발생하여 그것을 진압하려 소방차 가 출동한 줄 알고 놀랐을 것이다. 그 생각이 나면서 한희철 목사가 진부령에서 겪은 폭우, 우박, 천둥, 번개는 얼마나 화려한 환영식이었을 까! 생각해본다. 출발부터 느낌이 좋다.


그는 걸으면서 땅을 발견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하늘과 땅 을]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창세기 1:1-2). 진부령을 오를 때는 폭우와 우박과 천둥과 번개가 동반하는 물을 체험하고, 다음 날 이른 아침 진부령에서 용대리로 내려가는 길에서는, 위로 하늘을 바라보고, 아래로 땅을 딛고, 하나님에게서 불어오는 바람을[‘루악흐 엘로힘’ “하나님의 바람” “강한 바람”] 가르며 걷는다. 걷는 길 앞, 뒤, 왼쪽, 오른쪽으로 각종 열매가 달린 야생 식물, 각종 날짐승, 이미 그는 저 아득한 태초로 시간 여행을 하고 있다.



그가 혼자서 DMZ 길을 한 마리 벌레처럼 외롭게 기어가는 고행(苦行)을 하는 동안, 그를 아끼고 염려하는 교회 성도들의 마음도 그들의 목사와 함께 DMZ 위를 걷고 있다. 더러는 시간이나 장소 등 만날 곳을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니고, 미리 행선지를 알려 준 것도 아닌데, 목사가 걷는 길 위에 성지교회 성도들은 불쑥 불쑥 나타났다. 목사로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만남이었을 것이다. 장로들이, 권사들이 새벽 일찍 길을 떠나 그가 걷고 있을 것 같은 길을 짐작하며 역(逆)으로 달려오기도 한다. 그 모습에 순례자는 감격하고 만다.


벌써 몇 번째인가, 열하루 길을 걷는 동안 장로님은 여러 번 먼 길을 달려왔다. 폭우에 젖은 발을 위해 신발을 사가지고, 행여 쓰러질까 고기를 사주시려, 물집이 잡힌 발을 감싼 인민군식 발싸개를 보고는 안쓰러워, 그리고 마지막 날 저녁 숙소까지(「마지막 걸음」에서).


이렇게 고마울수가! 한 권사가 이것저것 먹을 것을 챙겨왔기 때문에 잠시 동안의 동행자들은 길가 바닥에 앉아 그들의 목사와 함께 “드문 만남이 주는 은총”을 마음껏 누리기도 한다. 뭉클한 장면이다. 목사 의 배터리가 100퍼센트 충전되는 순간이기도 했으리라! 이렇게 듬뿍 사랑을 받게 해주시면서도 같은 목회 현장에서 동시에 아물지 않는 상처까지 함께 받게 하시는 그분의 뜻은 무엇일까? 어느 교회나 목사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베푸는 성도도 있고, 본인들은 몰라도 자신들의 의도하지 않은 언행이 목사에게 상처를 주는 역할을 하는 성도도 있기 마련이다. 이 모든 성도들이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니, 목사는 그들을 차별할 수가 없다. 그들을 진정으로 다 가슴에 품으려고 한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꼬!


DMZ 횡단 도중 “평화의 댐”을 지나면서는 역대 한 정권의 위장된 안보를 회고하면서도, 세계 30여 개의 분쟁지역에서 수거한 탄피를 녹여 만들었다는 “평화의 종” 앞에서 우리의 순례자는 “평화의 댐” 일대를 내려다보며 “한 줌의 기도”를 바친다.


이 평화의 종 제작에 당시 정갑철 화천군수의 참여가 크게 기여했다는 말을 현지에서 들었다. 우연한 기회에 우리 내외는 한희철 목사의 감신대 동기 목회자들과 함께 화천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 일행은 화천 교외의 한 리조트에서 1박을 했는데, 그 펜션 거실에는 소비에트연방 마지막 대통령, 냉전을 종식시킨 인물로서 1990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은 고르바초프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2009년 5월 그는 평화의 종 제막식에 귀빈으로 참석했었다고 한다. 그가 한국 중앙 정부의 초청이 아닌, 한 군수의 초청을 받고 평화의 종 제막식에 참석했다는 것이나, 이 행사에 참석하는 동안 화천의 한 평범한 펜션에서 숙박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다음날 정갑철 군수를 방문했을 때 나는 그에게 평화의 종 공원을 조성한 일을 격려하면서, 한편 평화의 종 제막식에 고르바초프 같은 인물을 초청하여 동네 펜션에서 재우는 등 그런 중요한 인연이 있는데도, 화천군 안에 왜 ‘고르바초프 거리’ 혹은 ‘고르비 거리’ 하나 만들지 않았느냐고 물었던 것이 기억난다.


비무장지대 부근에는 순교자들이 있다. 순례자는 남북 분단과 순교 이야기, 그러나 망각된 이야기, 기억해 주는 이들마저 없어진 이야기를 안타깝게 찾는다. 1950년 6월 24일, 전쟁이 일어나기 하루 전 북한엔 기독교 목사들에 대한 마지막 일대 검거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하지만 여러 기독교 지도자들은 여전히 교회를 지키고 있었다. 당시 북한 정권이 볼 때 그들은 아주 위험한 집단이었을 것이다. 순례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선 우익 엘리트들이 다 월남했는데도 그들은 가지 않았다. 그들은 공산정치를 방해하면서도 주민들의 정신적 지도자 노릇을 하 는 자가 많았다. 유사시 그들은 반공전선에 뛰어들 가능성이 있었 다. 북한은 이 ‘잠재적 적’을 전쟁을 전개하기 전 대청소할 필요를 느꼈던 것 같았다. 연천, 철원, 김화, 금성 일대에서 목사, 전도사 장로들이 줄줄이 묶여갔다. 그리고 대부분 돌아오지 않았다(「그날 주일 종은 울리지 않았다」에서).


상세한 역사가 망각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음을 우리의 순례자는 안타까워한다. 순례가 거의 끝날 무렵 순례자는 길 위에 나타난 구십 세의 노모를 만난다. 수고한 아들을 안아주려고,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장한 아들의 개선을 축하하려고 길을 나선 아들의 어머니다. 당신이 남편 따라 단신으로 월남했던 그 길 위에서의 모자상봉은 우리 독자들에게도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것이다.


순례자는 인적이 드문 길가 논 옆에서, 피사리를 하는 할머니들을 만난다. 순례자는 반가워서 먼저 말을 건다. 몰골이 말이 아닌 키다리 가 강원도 고성에서 걷기를 시작해서 임진각까지 가는 길이란 말을 들은 할머니들은 깜짝 놀란다. 그 중 한 할머니가 묻는다. “어디 아파요?” 그렇지! 아프지, 아프니까 집 떠나 걷고 있지. 피살이 하던 할머니는 걷는 이의 정곡을 찔렀다.


우리의 순례자가 순례의 끝에서 받은 마지막 질문은 “아직도 아프니?”라는 주님의 질문이다. 걷기를 끝낸 그에게 나도 묻고 싶다. 그 아픔이 어디 치유되라고 있는 것인가? 그 아픔 그대로 지니고 견디라는 아픔 아닌가! 여러 성도들이 그렇게 큰 사랑을 베푼 것은, 아니, 그보다도 주님께서 친히 열 하룻길을 특별히 동행해 주신 것은, 그 아픔 그대로 지니고 이 역사에서,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를 증언하라는 부르심에 순종하라는 격려가 아니던가!


마지막 날은 평생의 동반자인 아내와 아들의 마중을 받는다. 아내는 장모의 사랑도 함께 운반한다. 순례자에게 제일 약한 부분이 가족이다. 가족 때문에 떳떳할 수 있고, 가족 때문에 비굴할 수도 있다. 가족 때문에 부르심을 거절할 수도 있다. 동시에 제일 강한 부분이 가족이기도 하다. 한희철 목사는 평생 아픔과 상처를 지닌 채 단강에서,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천에서 부름 받은 삶에 헌신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아내를 비롯한 가족의 힘이 뒷받침 되고 있기 때문이리라.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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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발로 선 시간의 은총


한희철 목사가 DMZ 380km를 열하루 동안 걸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얼마나 괴로웠으면…’이었다. 그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주일까지도 길 위에 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심증이 확증이 되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구나. 글의 도입부를 읽으면서 가슴이 저릿해졌다. ‘이 착한 사람이 견디기 어려웠구나.’ 다른 이들의 아픔과 고통은 그 너른 가슴으로 덥석 품어 안더니, 벽 같은 현실 앞에서 얼마나 괴로웠으면 이런 무모한 여정에 나선 것일까. 그것도 사람들이 선호하는 올레길이나 순례길이 아니라 분단의 상흔이 고스란히 새겨진 접경 지역을 말이다. 왠지 그 아픔을 알 것도 같기에 선뜻 그 글을 읽어나갈 수가 없었다.


미루고 미루다가 글을 읽기 시작했고, 멈출 수가 없었다. 앉은 자리에서 글을 다 읽고 나니 리베카 솔닛의 말이 떠올랐다. 리베카는 걷기는 “가장 철학적이고 예술적이고 혁명적인 인간의 행위”라고 말한다.


“걸어가는 사람이 바늘이고 걸어가는 길이 실이라면, 걷는 일은 찢어진 곳을 꿰매는 바느질입니다. 보행은 찢어짐에 맞서는 저항입니다.”


이 책은 바로 이 문장이 진실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의 등을 떠민 것은 절벽 같은 현실과 그로 인해 마음에 드리운 무거운 구름이었다. 폭우 속을 걷고, 또 폭양 속을 타박타박 걷는다는 것, 그것은 자기 육체를 극한의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 일이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정도의 상황에 처했을 때,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속으로 삼키며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딛는 이에게 길은 언제나 숨기고 있던 오의를 드러내기도 한다. 아름다운 풍경, 예기치 않았던 이들과의 만남, 어떤 깨달음 말이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면서 그는 삶의 여정 가운데 만난 수많은 이들을 기억 속에 호출한다. 그들의 이름을 호명하는 순간 그들은 시간을 거슬러 그곳에 현존한다. 걷는 사람은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다. 바람처럼 스쳐간 인연이라 해도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얼굴을 떠올리고 함께 겪었던 시간을 회상하는 것 자체가 기도이다. 걷는 기도를 통해 호흡이 가지런해졌을 때 한희철 목사는 자기 발이 땅에 닿은 것 같았다고 말한다.


성실하기 이를 데 없는 그가 의무의 감옥에 갇혀 사람들을 대했을 리는 만무하지만, 그래도 그는 허공 위를 허정거리는 것 같은 아찔함을 느꼈던 것일까? 그런데 이제 그의 발이 땅에 닿았다. 가속의 시간 속을 걸어가느라 허둥거리던 발걸음이 자연의 흐름을 따르는 발걸음으로 변하자, 적절한 삶의 속도를 깨닫게 되었다.


“오래 걸으니 비로소 내 발이 내 땅에 닿았다.

오래 걸으니 비로소 제대로 된 속도가 보였다.”


걷는 이에게 주어지는 복이 이런 것일 게다. 홀로 걷는 이가 누리는 복은 또 있다. 마주 잡을 손이 있다는 사실이 주는 느꺼움 말이다. 나희덕은 <산속에서>라는 시에서 길을 잃어본 사람만이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의 따뜻함을” 소중히 여긴다고 노래한다.


막무가내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얼마나 새로운 발견인지

산속에서 밤을 맞아본 사람은 알리라


맞잡을 손 하나가 있다는 것, 그것처럼 위로가 되는 일이 또 있을까? 터벅터벅 갈라진 땅을 깁고, 찢어진 마음을 깁는 이의 마음을 헤아리기에 불원천리 하고 찾아와 함께 만남의 기쁨을 나눴던 사람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손이 된 이들이 아니겠는가.


길을 걸었기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절벽과도 같은 현실은 여전히 지속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온 몸으로 그 먼 길을 걸었던 이는 더 이상 그 현실 앞에서 울지 않을 것이다. 그 길 위에서 그는 홀로인 줄 알았지만, 하나님이 내내 동행하고 계심을 알았을 테니 말이다.


글을 읽는 내내 탄식시를 떠올렸다. 평범한 행복을 구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바람이지만, 세상은 그런 우리의 바람을 뒤흔들고 때로는 흉포하게 찢어놓는다. 자기 힘으로 어찌 해볼 수 없는 궁지에 몰렸을 때 히브리 시인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억눌린 함성을 토해냈다. ‘어찌하여’ 혹은 ‘언제까지’ 이런 일이 지속되는 것이냐고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푸념은 언제나 가장 곤고했던 시간에 동행해주시던 하나님에 대한 기억으로 이끌었고, 그 기억이 회복되었을 때 팥죽처럼 들끓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새로운 신뢰가 선물처럼 주어졌다. ‘Solviture Ambulando’, ‘걸으면 해결된다’는 뜻이다.


햇볕에 바래고 이끼가 달라붙은 낡은 표지판을 보며 한희철 목사가 드렸던 ‘어느 날의 기도’가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폭풍 속 흔들려도

꺾이지 않게 하시고

외발로 선 시간

막막하지 않게 하소서.


그를 두고 지금 내가 주님께 바치는 기도이다. 그는 기도의 마지막 연에서 이런 염원을 아뢰고 있다.


머무는 이 없어도 좋습니다.

초라하면 어떻습니까.

갈림길 끝

길을 찾는 누군가에게

가야 할 곳 제대로 가리키는

바른 표지판이게 하소서.


아우 한희철 목사, 그대가 누군가에게는 그런 표지판이라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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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을 계속 읽어야 할 이유


19권의 저서와 10권의 번역서를 낸 김기석 목사가 스무 번째 책을 출간했습니다. “무심한 듯 지나치는 것 같으면서도 깊숙이 응시 하는 성찰의 힘”에서 나오는 문장에 많은 이들이 공감했기에 가능한 일이지 싶습니다. ‘김기석 표 문장의 아름다움’을 생략한 서평이나 독후감을 아직 보지 못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최근에 나온 《인생은 살만한가》에서 김기석 목사는 “바늘로 우물 파는 행위에 빗대 설명했”던 오르한 파묵의 목소리를 빌려, ‘무모한 열정의 글쓰기’와 그것이 가져다 줄 ‘바위에서 솟아오를 샘물에 대한 기대’를 말했습니다. 그렇게 글을 써왔으니 아름답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모두가 김기석의 문장을 이야기하다보니 이젠 그런 찬사가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걸 알면서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문장 앞에 멈춰 섰던 순간들을 완전히 지우고 이 글을 쓸 수는 없었지만 말입니다. 편집자가 허락한다면 이 서평의 나머지 부분을 김기석이라는 작가의 문장으로만 채우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인생은 살만한가》는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아내, 딸, 신학대학 동창, 청년 등과 나눈 12편의 ‘대화’가 3분의 2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11편의 ‘편지’입니다. ‘대화’와 ‘편지’를 읽을 때 제 몸은 다르게 반응했습니다. 저자가 12편의 대화는 안단테 템포로, 11편의 편지는 그보다 조금 빠른 안단티노나 모데라토로 템포를 지정한 것처럼 책을 읽었습니다. 대화편에서 왜 몸이 더디게 움직였는지는 책을 덮을 때까지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사실 김기석 목사는 느림이 “우리의 문명병을 치유해주는 가장 소중한 요소”라는 점을 거듭 말해왔습니다. 이 책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시대의 점점 더 빨라지는 템포가 “전체에 대한 매혹과 어울림의 감성을 빼앗아 갔”다면서 ‘바로 이런 것이 타락’(245쪽)이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문명의 템포에서 타락을 읽어내는 저자이기에 우리 독자들은 가장 느린 아다지오나 라르고 템포로 이 책을 읽어야 할까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내와 산행 중에 주고받았던 “나는 내가 당신의 영웅인 줄 알았는데… 아이구, 참 내. 그래요. ‘당신을 나의 영웅으로 임명합니다.’(204쪽)란 발랄한 대목까지 안단테로 읽을 독자는 없겠지요.


김기석을 계속 읽어야 할 이유로 그의 빼어난 문장을 꼽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저는 그런 주장에 머리를 끄덕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미문(美文)이 아니라 그 문장에 담긴, 어디서든 쉽게 들을 수 없는 목소리가 더 귀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원색적인 이원론은 물론 교묘하게 자신을 위장한 변종 이원론에 격렬하게 휘둘렸던 교인들에게 ‘모든 이원론적 선택에는 억압이 내포되어 있다’(83쪽)는 목소리는 거의 복음처럼 들립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은 사람이 있고,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터에서도 사랑의 노래를 지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야. (중략) 고통 받는 사람들의 아픔에 함께 아파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불러야 할 아름다운 노래를 포기해서는 안 돼.(17쪽)


저는 오히려 현실이 난마처럼 얽혀든 시대일수록 경전을 깊이 파고드는 이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102쪽)


김기석을 읽어야 할 두 번째 이유는 그의 글이 모두가 멈춘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는 지네딘 지단과 함께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피에르 신부의 《단순한 기쁨》에서 자살을 기도했던 청년 조르주가 새 인생을 살게 된 과정이 소개됩니다. 조르주는 피에르 신부가 자신에게 돈이든 일이든 그저 베푼 게 아니라 자기에게 꼭 필요했던 “살아갈 방편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를 가르쳐줬기 때문에 자살의 충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김기석은 이 감동적인 이야기 끝에 “인간은 누구나 ‘원본’으로 태어났다”는 랍비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의 말을 상기시킵니다. “남과 구별되길 원하면서도, 같아지지 않으면 불안”해 하는 사람들에게 “이 우주 가운데 나와 똑같은 존재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느끼는 경이감을 전한 것입니다(236쪽).


그리고 ‘기억과 망각 사이’는 한국 개신교가 거짓 종교의 특징인 망각의 전략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왜곡된 기억의 주입을 경고하는 글입니다. “친일파들이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역사의 변방에 유폐”되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의 역사적 소명은 ‘망실된 기억의 복원’과 ‘왜곡된 기억의 바로잡음’이라는 것입니다(158쪽). 김기석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과거는 과거로 흘러가 버리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보이지 않게 우리 삶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야.(159쪽)


저는 이 책에서 이 시대에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장 소중한 가치로 ‘아낌’을 말하는 대목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기석은 생태계의 파괴가 가속화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아낌’을 절실한 도전으로 인식합니다. ‘아낌’이 예수가 보여준 삶의 핵심이고, 사람을 아끼는 것이 참 삶의 시작(313쪽)이라는 것입니다. 김기석은 아낌이야말로 우리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지름길이라면서 “예수의 마음, 즉 ‘아낌’이라는 단어 하나를 화두처럼 붙들고 살라”(317쪽)는 부탁으로 마침표를 찍습니다. 노자가 오래 전에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데는 아낌만 한 것이 없다’는 말을 한 건 맞지만 현직 목사가 성경에 나오지 않는 단어나 개념을 차용하지 않고 예수가 보여준 삶의 핵심을 이야기한 부분이 고맙고 놀라웠습니다. 이 책을 덮으면서 끊어낼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이들로 인해 생겼던 어두운 일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이 고마운 이유입니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관계망이야말로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기도 합니다. 일상은 우리를 넘어뜨리는 걸림돌일 수도 있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디딤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주고받는 사소한 눈짓, 몸짓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명멸하는 불빛입니다. 그 불빛들이 모여 생을 이루는 것이겠지요?(275쪽)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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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과 허비의 사이, 영혼이 따라올 시간

- 김기석 목사님 신간 《인생은 살만한가》를 읽고 -


서평을 부탁 받고 책을 읽기 전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저자의 글쓰기였다. 김 목사님을 생각할 때면 늘 떠올라 내게 반성과 분발로 겸손히 허리를 굽히게 하는 그분의 일상적 성실성(誠實性). 그것은 사실상 글쓰기에 앞선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 일관된 절제의 태도다. 차라리 10년이 지나도 못 쫓아오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우스개가 들어맞지 그분을 가외(可畏)케 할 후생(後生)이 있을까.


가끔 만나 뵈면 이렇게 함께 쉬어 가는가 모종의 안심이 될듯 싶은데, 보이지도 않는 말(馬)과 능히 경주라도 하는 듯 또 저만치 앞서 달음질을 놓으신다. 날짜와 시간과 날씨와 컨디션을 망라한 일체의 핑계가 소용에 닿지 않는 이 가혹한(!) 성실성. 이것이 그분의 진정한 설교의 출처로서 그 모든 부분 일관되게 게으른 후생들로 거기에 대면하면 일체의 변명을 깨끗이 포기하고 기꺼이 항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마치 공부 못하는 학생이 방학을 만난 듯 오히려 그 앞에 후련해지는 항복이다. 나로 말하면 여전히 게으른 채로 항복했으면서도 탐내며 존경하고 있는. 첫 장을 펼치니 그런 내 첩경에 미리 가 있는 것처럼 이런 말씀을 하신다.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모래 속에 묻힌 사금을 찾는 것과 유사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의 경험을 체로 거르고 또 거르는 일이고, 글쓰기의 보람은 인식의 지평에 떠오른 낯선 광휘와 마주치는 것이다. 어둠을 밝히는 그 빛과 마주치는 순간,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깨단하게 된다”(5쪽).


‘깨단하다’(어떻게 이런 말들을 깨알같이 알고 계시는지)는 찾아보니 ‘오래 생각나지 않다가 어떠한 실마리로 말미암아 깨닫고 분명히 알다’라고 돼있다. 모래 속에 묻힌 사금, 특별할 것 없는 일상, 거르고 거르는 체질, 거기서 떠오른 금빛 광휘와의 낯선 만남, 그러니 그의 글쓰기(삶의 전체적 성실성)란 계속하여 이 사람들의 생활이라는 것 속에서 오래 생각나지 않는 중인 어떤 것을 생각하는 중인 것이고, 그것이 걸러져 마음에 남은 금알갱이의 반짝임처럼 떠올라 그것이 금(金)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되는 보람을 위한 끝없는 체질인 것. 떠오른다 했지만 실은 연금(鍊金)이고 제련(製鍊)인 끝없는 노동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것쯤은 알고 있다. 그 성실성이나 인식의 지평 위에 떠오른 금싸라기의 보람이란 여전한 체질의 과정인 일상의 부분이지 그것의 한가로운 열매가 아니라는 것을. (물론 가소로운 말이지만)정말 나로선 여기서 문맥(文脈)을 놓치면 영 놓치게 되어 따라가기는커녕 딴 길로 가리라는 것 정도는 간파했다고 믿고 싶다. 스스로 속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이 얼마나 잘 속는지!) 이 문맥은 그렇게 쓰여진 글의 맥락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이의 절제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속이는 사람도 없는 데 속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역시 깨단함이 없기 때문이고, 거르고 걸러 오래 생각나지 않다가 어떠한 실마리로 말미암아 깨닫고 분명히 알게 되는 살아감에 관한 실사구시(實事求是)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일껏 보여주었는데도 못 보고 기껏 보고서도 도루묵인.


“텔레비전을 통해 정치인들을 보면 괜히 우울해져요. 그들은 절망과 환멸을 확대재생산하는 것을 자기들의 역사적 소임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들을 정치인이 아닌 맨 얼굴의 이웃으로 만나도 마찬가지 느낌일까요? 그들은 가족들 앞에서도 그런 가면을 쓰고 살아갈까요?”


“글쎄다. 하지만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우리가 어떤 사람들에 대해 말할 때 전칭명제로 말하는 것은 옳지 않아.”


“아빠도 그렇게 말씀하실 때가 있잖아요?”


“그랬나? 하지만 그것은 일반화의 오류인 동시에 정신적 폭력이야. 감정적으로는 나도 어떤 집단의 사람들을 한통속으로 몰아붙이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고, 또 그렇게 할 때도 있지만 그건 나의 미성숙의 증거일 뿐이야.”


“하지만 사람이 이것저것 다 가리면서 어떻게 살아요? 가끔 실수도 하고, 오버도 하면서 사는 거지요.”


“물론 그래. 하지만 타인이 숨 쉴 수 있는 여백을 만드는 일을 소홀히 하면 안 돼. 그의 가면 속에는 분명 말랑말랑한 맨얼굴이 있지 않겠니? 게다가 시간의 지평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진실의 실체를 온전히 보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거든.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모든 근본주의의 뿌리야. 타자에 대한 폭력은 흔히 자기 생각의 절대화에서 비롯되는 걸 거야.”(「가면과 맨 얼굴」, 24쪽)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그것들은 다 한 사람에게서 나온 것 같다(전도서 12:11).


젊은 날에도 그랬지만 지금까지도 나는 누군가의 말에 양심이 찔려 의기가 소침해지고 약간의 항거를 하고 싶지만 결국 기가 꺾이는 경험을 자주 한다. 그런 말들은 사람도 사람 나름이라서 아는 사람이라면 되려 가소롭거나 아니꼬워 내 기가 살고 양심이 담대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카운터 펀치를 허락하고 의문의 여지없는 일패를 더하기도 한다. 며칠씩 혹은 더 긴 날들을 절치부심으로 끙끙 앓으며 내 의기와 양심 사이에서 괴로워했던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나는 이제 수락을 괴로워하지도 않고 의기와 양심 사이의 갈등을 고통스러워하진 않게 됐다. 괴로웠던 것은 내가 수락할 준비가 안 됐기 때문이고 고통스러운 것은 그것이 타인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이기 때문이다.


소소하다면 소소한 이런 대화 속에서 나는 나의 오랜 분투의 핵심을 깨단하게 된다. 가면과 맨 얼굴이 타자들의 얼굴에 관한 게 아니라 내 얼굴에 관한 것임을 깨닫게 되기까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내 근본주의의 뿌리이며 내 사고의 절대화에서 나는 벗어나질 못했던 것이 아니던가. 더 높고 중한 하나님의 원리에는 둔감하고 알량한 내 자존과 아집의 위상만을 걱정해온 게 나의 의기소침이고 항거가 아니었던가. 하여 나는 이런 말을 듣기만 했지 이런 말을 해 본 일이 없고, 대개 이런 말들을 불신만 했지 내 영혼에 닿는 채찍으로 수락할 줄 몰랐던 것이다.



김 목사님에게는 진리의 첨예함에 입각해 있는 진보성과 함께 얼핏 보수적으로 느껴지는 고전성이 있다. 진보적이면 일반화의 오류나 정신적 폭력에 편벽되기 쉽고(아니 편벽되고 싶고) 고전적이면 위선적이거나 고루하기 쉽다. 나는 아마 그런 모양만 보고 그런 가운데 어느 한쪽으로 늘 치우치는 경향을 주체 못하며 나이를 먹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반성이나 성찰의 여지없이 그 길로 쭉 나가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대개는 선배들에게서 발견할 수 없었던 그 모든 진보성과 보수성의 고루함에서 벗어난 모종의 가능성을 발견할 때 나는 나의 결과를 알면서도 멈추고 싶지 않은 편협으로의 행진을 기꺼이 자발적으로 멈추고 싶어진다. 이쯤 되면 나는 아마 이런 것이 내겐 없는 것으로 내게 주어진 선물처럼 그것을 탐내보려 하는 것 같다. 허허(虛虛)! 선물을 탐내다니.


가령 또 이런 부분.


“다만 내가 겪어왔던 어려움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거지. ‘당신들 때문에 내가 몹시 힘들다. 두 분 다 소중한 분들이지만, 이런 점은 공동체에 부담이 된다.’ 그러면 그분들은 처음으로 자기들의 틀을 깨고 제3자를 의식하게 돼. 그게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말이야.”(「영성의 깊이란 무엇인가」 35쪽)


교회에서 각자 충성스럽고 소중한 두 사람이 싸우고 반목할 때 누구의 편을 들 것인가. 옳고 그름도 있을 테고 옳음과 그름의 우열도 있을 터이다. 이럴 때가 내게도 있다. 이럴 때 나는 대개 기계적 중립의 태도를 취했다. 그러면서 분명 옳고 그름에 대한 내 나름의 분명함을 어떡하든지 어필하려고 했을 것이다. 아니 나타내지 않으려 노력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태도는 내겐 불가피한 처신으로 일종의 자기를 부인하는 희생적이고 의로운 태도로 까지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왜 ‘당신들 때문에 내가 몹시 힘들다. 두 분 다 소중한 분들이지만, 이런 점은 공동체에 부담이 된다.’라는 말을 해보지 못했을까? 혹은 나는 왜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엡 4:25)라는 말씀을 담대히 믿지 못했을까? 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하노라는 나의 용기는 사실 과장이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흔들리지 않는 생의 토대는 결국 진실일 텐데, 우리가 진실한 걸까?”(38쪽).


김 목사님은 ‘흔들리지 않는 생의 토대는 결국 진실이다’라는 말을 ‘진실일텐데, 우리가 진실한 걸까?’라고 하시는 분이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생의 토대는 결국 진실입니다’라고 말한다.


연전 내가 몹시 앓고 있을 때 목사님으로부터 안부를 묻고 위로하는 문자를 받은 적이 있다. 그 날은 비가 내렸고 날씨만큼이나 내 심경은 복잡하고 우울했다. 목사님의 곡진한 위로의 몇 마디가 나를 흔들었던 것일까? 나는 응석처럼 구구절절의 편지를 써 보냈다. 한 번 더 내 마음을 위로해 줄 곡진한 말씀을 내심 기다렸던가. 그러나 목사님으로부터는 ‘마음과 몸 잘 추스르시라’는 간단한 답신이 왔다. 그때 나는 뭔가 내둥 안 하던 짓을 처음 해놓고 막급의 후회를 하는 사람의 심정이 되어 약간은 참담하기까지 했다. 고백건대 나는 사실 누군가에게 내 괴로움을 토로해 본적이 별로 없다. 


‘인생은 혼자 가는 먼 길’이라 아내에게도 내 괴로움에 대해 속속들이 알려 하지 말라고 권한다. 직업상 타인들의 괴로운 고민을 듣고 성실로 답변을 하기도 하지만 정작 내 대답이 답변이 되리라 믿질 않는다. 그렇게 믿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나를 속이는 것이므로. 결국 해답은 당사자 자신에게서 나와야하는 것이고 어차피 겪을 것은 온전히 자신이 겪어야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내가 왜 이미 문자를 받고 또 뭔가를 갈구하는 글을 써 보냈던 것인가 말이다. 아내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아내는 나를 위해 서운한 모양이었다. 아픈 남편에게 위로가 가득한 답신을 보내주셨으면 좋았을 걸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 알았던 것이다. 김 목사님의 짧은 답신. ‘마음과 몸 잘 추스르시고 빨리 일어나시라’는 그 말씀의 의미와 그 의미의 진실과 그 진실을 지키려는 노력과 그 노력의 고뇌와 그 고뇌의 외로움과 그 외로움의 슬픔 같은 것? 그렇다! 그것은 모든 고통하고 괴로워하는 존재들에 대한, 그리고 그것이 결국은 그 자신들이 감당하고 가야하는 진실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동병(同病)의 아픈 연민이자 상련(相憐)의 깊은 슬픔. 그러니 내 맘이 부끄러운 건 내 맘의 굳세지 못함 때문이지 김 목사님의 문자 때문이 아니라고 아내를 달래주었다. 병으로 쇠약해진 나를 본래 나의 태도로 다시 일으켜 주는 안수의 말씀으로.


“결국 인간은 최악의 고통에서만이 진실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이, 추운 사람이, 질병의 아픔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결코 점잖을 수도 없고, 성스러울 수도 없고, 거룩할 수도, 인자할 수도, 위엄이나 용기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를 찾는 자는 제 목에 오랏줄이 감긴 그 사람뿐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사람은 심신의 고통을 지금 맛보고 있는 그 사람뿐입니다. 가장 절실한 인간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장군이나 성직자가 아닙니다. 지금 배고픈 사람, 지금 추위에 얼어 죽어가는 사람, 지금 병으로 괴로워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 온갖 괴로움 속에 허덕이는 사람만이 진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밤을 사람들은 각양각색으로 새우고 있을 것입니다. 밤은 평안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수치와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고통의 시간이기도 한 것입니다”(이 오덕, 권정생 선생 서간집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에서 인용, 「영성의 깊이란 무엇인가」, 39쪽).


권정생 선생의 말이라는 이 말을 인용하신 뜻은 고통하는 사람에 대한 옹호와 지지일지라도 그의 자존(自尊)을 자기의 의로서 위해하게 되는 그런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게 아닐까. 내 일찍이 ‘문장의 핵심은 함축’이라는 말을 들었거니와 이쯤 이르면 ‘인생 전반에 대한 태도의 핵심이 함축’이 아닐까 싶다. 모든 과장과 헛된 위로의 갈구를 간파한 침묵의 응축으로서의 함축. “거기에 비하면 정치인이나 학자들의 말은 너무나 창백해 보여.” 같은 문장을 만나면 나는 웃음이 난다. 그 정도라면 나 같았으면 ‘정치인이나 학자들의 말은 죄다 거짓말 같아, (혹은)거짓말이야.’라고 ‘쾅쾅쾅’ 못을 박지 않았을까 싶어서다. 또 이런 고백에 이르면 그 절제의 함축과 성실성이 한가로운 사색의 낭만이 아니라 가혹한 노동이라는 내 짐작이 증명된다.


“그랬나? 어쩌면 성실함에 대한 과도한 집착 때문이었는지도 몰라. 나는 일을 적당히, 얼렁뚱땅 하는 걸 싫어하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스스로 만든 내 이미지에 자승자박 당한 꼴이었던 것 같아. 성실한 건 좋은데 그게 고스란히 스트레스로 바뀐 게 문제지. 나는 스스로 그런 문제를 잘 풀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몸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야”(「슬픈 몸 고마운 몸」, 47쪽).


“나는 덜 떫은 우리 젊은이들을 보면 좀 안타깝더라.”


“그래도 좀 떫게 굴면 싫어하시잖아요?”


“그건 그래. 그런데 명심해야 할 것은 상생을 위한 떫음이 아니라 자기 욕망충족을 위해 떫다가는 버림을 받기 십상이 라는 거지. 떫음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는 말이야. 가을이 되면 단맛을 품어야지. 인생의 가을이 되었는데도 떫기만 한 사람들도 있거든.”


“작정한다고 단맛이 품어지는 것은 아니겠지요?”(「경계를 넘어」, 91쪽)


흥미로운 대목이다. 떫음에는 상생을 위한 떫음과 자기 욕망 충족을 위한 떫음이 있다는 이 분류법은 떫음의 반듯한 필요와 그 필요의 분명한 목표를 제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도덕선생의 훈계처럼 윤리적인 게 아니라 시인의 시구처럼 시적이다. 나는 궁금해진다. 가을이 되어 단맛을 품기는 사람은 누굴까? 가을이 됐음에도 떫기만 한 사람은 누구일까? 갑자기 땡감의 식감이 느껴지면서 목울대가 꽉 메인다.


“겸손은 자존심의 무게로부터 우리를 해방해주고, 봉사는 강박관념을 씻어주고, 공부는 자기 자신을 텍스트로 삼아야 한다고 하셨지요?”(「쉼 평화의 시작」, 111쪽)


여기에 이르러 꽉 막힌 듯한 목이 스르르 풀어진다. 이런 문장을 만나면 스스로가 대견해지는 법이다. 겸손이 해방이라니, 봉사가 자유라니, 책은 자기라니. 쉼이면서 평화인 곳 언저리에 나도 이른 것 같기도 한 안심에 나도 좀 쉼이 되고 평화가 되는 것이다.


“양해하겠지요.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겨운지 알면 제가 알아서 자리를 비워줘야지요. 그건 그렇고 아까부터 왜 자꾸 한숨을 내쉬세요, 산에까지 오셔서?”


집사인 듯한 성도는 목사와 산을 오른다. 매사 불만스러운 그녀는 쉴목에 앉아 쉬어가자는 말에 그런 쉼조차 산새들을 방해하는 것이라 불평을 토한다. 도저한 평화주의자이자 의로운 심판관이지만 그 도저함과 의로움으로 다함없는 불만족과 긍휼 없는 짜증을 되돌려 받고 있는. 목사는 여유로운 위트로 성도의 조급한 마음의 숨을 돌린다. 그리고 마지막엔 이렇게 말한다.


“그래요, 이제 일어나 가지요. 해 지겠어요”(「인생은 살만한가」, 134쪽).


“그런 경우를 저도 간혹 본답니다. 전 이렇게 생각해요. 진리의 길에서 멀어진 사람일수록 남의 허물을 잘 들추어낸다고요. 깨끗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지만, 더러운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더러운 법이거든요. 예수님에게는 버릴 사람이 하나도 없었지만, 스스로 의로운 체하는 이들은 모두 못마땅하게 여겼어요. 그런 사람들은 점점 무분별하게 되고, 헛된 말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불의한 행실로 세상을 어지럽혀요. 그들은 가증하고 완고하고 선에 무능력한 사람들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삶이잖아요? 사람의 앞모습보다 뒷모습이 정직할 때가 많아요.”(「타락한 영혼의 징표」, 184쪽)


옛날 같았으면 불만스런 성서해석이 됐을 것 같다. 아니 아직도 그런 불만이 다 해소된 건 아니다. 마치 이미 훌륭한 사회인이 된 사람이 초등학교 성적에 불만족스러워하듯이. 그것은 간혹 보이는 김 목사님의 보수적 단호함에 대한 오해가 아닐까 싶다. 금방 잊어버렸던 것이다. ‘겸손은 자존심의 무게로부터 우리를 해방해주고, 봉사는 강박관념을 씻어주고, 공부는 자기 자신을 텍스트로 삼아야 한다’던 말을. 이 모든 말들이 김 목사님 자신이라는 텍스트를 통과해 나온 자기 제련의 체질에서 얻은 일상의 성실이 걸러낸 경건의 광휘인 것을. 그러니 이런 말씀을 흔히 홍수 때 마시지 못할 물처럼 범람하는 교훈가(敎訓家)들의 도덕설교로 듣게 되는 건 곤란하다.


“나는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에게서 가장 긍정적인 것은 자기가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고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기억이 다 사라지기 전에 세계민들 앞에 서서 그는 자기의 병세를 고했고, 사람들의 이해를 구했어. 나는 그것이야말로 그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고귀한 메시지라고 생각해. 그는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인간은 결국 유한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자신의 몸으로 증언한 셈이지.”(「우리는 신성함을 믿어야 한다」, 210쪽)


그리하여 이런 진리에 이른다.


“망설임은 성실성의 증거이고 확신은 사기의 증거라지요?”(「일상으로 그리는 이야기」, 272쪽)


“만물이 일어나도 막지 않고, 생겨도 잡아두지 않으며, 행하고도 자랑하지 않고, 공을 이루어도 머물지 않는다〔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크리소스토모스를 그리워하며」, 283쪽).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데는 아낌만한 것이 없으니 무릇 아낌을 일컬어 빨리 돌아감이라 한다. 빨리 돌아감을 일컬어 덕을 거듭 쌓는다고 한다. 나는 이군처럼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젊은이들이 이 답답한 세상에 작은 틈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몇 해 전에 텔레비전에서 수십 년을 한결같이 바위를 쪼며 우물을 파들어 가는 할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언젠가는 값진 보화를 얻으리라는 그분의 바람은 허망해 보였지만 그분의 수도자적인 몸짓에서 나는 서늘한 감동을 느꼈습니다”(「아낌 만한 것이 없다」, 315쪽).


최근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를 ‘허비(虛費)(혹은 탕진)’로 설명하는 설교를 했었다. 그런데 김 목사님은 그것을 ‘아낌’으로 표현하고 있다. 허비든 아낌이든 같은 말이지만 이 두 표현법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결이 다름을 발견하게 된다. 허비이면서 아낌인, 허비와 아낌의 사이, 자기 자신에게는 허비인 듯 하지만 세상과 타인을 향해서는 아낌으로 옮아가려는 나를 본다. 그것은 수십 년 바위를 쪼아 우물을 파들어 가는 이의 허망 같은 어리석음이나 자기 공에 머물지 않고 자연과 우주를 따르려 망설이는 수도자의 경건이리라.


본문 어딘가에서 김 목사님은 인디언들이 가던 길을 쉬며 기다리는 이유는 영혼이 따라올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라고 썼다. ‘인생은 살만한가?’ 대답은 영혼이 따라올 때까지 기다려주는 시간, 기다림의 지체(遲滯)에 있으리라.


“어리석음이 없으면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존중받고, 모든 피조물들이 자기 생명의 몫을 누리는 참 세상을 이루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들의 꿈을 하늘이 외면하지는 않겠지요. 나는 이군의 답답한 마음을 일시에 해결해줄 수 있는 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답은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다만 그 길에서 나는 이군이 예수의 마음, 즉 ‘아낌’이라는 단어 하나를 화두처럼 붙들고 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평화를 빕니다”(「아낌만한 것이 없다」, 317쪽).


‘나도 님과 같은 인생을’하는 노래가 있었지. 정말, 나도 그런 평화를 사모한다.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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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왕조사회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갑질의 향연만 반복된다. 갑질…, 결국 그건 ‘왕질’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지적하는 저자는 우리 사회의 왕조적인 모습을 이렇게 풀어간다. “우리의 공화정 도입이 시민들의 주체적이고 자발적 행위와 자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순식간에 이식되었다는 사실이 우리 사회의 특징을 잘 설명해 주기도 한다. 서구 사회가 프랑스 혁명(1789~1794)이라는, 시민의 힘으로 왕정을 종식시킨, 역사적 경험을 소유한 것에 반해, 우리는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강대국이 주도한 세계 체제 재편 과정의 하나로 타력에 의해 공화제가 시작되었을 뿐이다. 그러니 여전히 우리 사회 대부분의 마인드와 에토스는 임금을 모시던 때의 역사적 경험과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왕조 사회의 어르신 이데올로기’와 세월호 참사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저자는 “개신교는 ‘자영업’에 가깝다. 한국 개신교회는 사회적으로 공적 조직과 연 닿아있지 않다. 그래서 운영에 관한 일체를 신자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전형적인 자영업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천주교의 경우는 전형적인 외국계 지사의 모습을 보인다. 천주교는 개신교처럼 자영업 마인드가 아니다. 뒤에 바티칸이라는 든든한 언덕이 있기 때문일까? 국내에서 영업이 좀 시원찮아도 자금력 두둑한 본사 덕분에 몇 년은 거뜬히 버틸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인지 한국 천주교의 경우 신자들에 대한 독려 행위가 개신교보다는 약하다. 반면 불교는 전형적인 공기업 마인드이다. 업무의 효율이나 생산성에 목매지 않아도 꼬박꼬박 때만 되면 계좌에 입금되는 월급의 유혹은 달콤하다”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종교의 상황은 그 종교가 기득권화되어 있고 그걸 지켜내고 확대하는 것에 일차적 관심을 쏟아왔기 때문이며 정작 해야 할 종교 수련의 길보다는 손쉬운(?) 세속적 영향력 확대의 길을 택하게 되고, 힘(權力)으로, 돈으로, 수(數)의 힘으로!”라는 슬로건으로 밀어 붙인다.

 

이러한 종교에서 현실에 대한 냉철한 비판과 성찰, 자기 자신에 대한 엄격함, 대중의 욕망에 대해 질타한다. 결국 종교는 기득권을 움켜쥐는 과정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종교의 사망선고가 내려진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 곳곳에 스며있는 유교의 흔적을 살피면서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곤 한다는 저자는 그때마다 서슴없이 “유교!”라고 답한다. 결혼을 고리로 이어진 가족주의에 기초한 유교란 종교의 가치관은 지금도 강력하다. 명절 때마다, 집안의 대소사 때마다 발길을 원적(原籍)으로 돌리게 하는 가장 강력한 에토스는 불교도, 그리스도교도 아닌 바로 유교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교는 이를 사회적 제도 속에 깊이 각인시켜 놓았다. 그뿐인가? 설날이나 추석 같은 큰 명절에 집안 식구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며 가문의 영생을 축하하는 의례, 그것이 바로 제사이다. 이러한 유교의 에토스는 지금도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매우 강력한 힘으로 작동되고 있다. 그러니 유교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라고 할 수 밖에.

 

이에 덧붙여 한국종교가 민족주의와 어떻게 결부되어있는지, 각 종교의 경전읽기는 연애편지를 읽는 것과 유사한 성질의 것인지, 역사 속에서 종교는 어떤 행태로 파렴치하게 친일 행각을 벌였는지, 우리나라 최대 종교는 ‘수능교’라는 우스갯말까지 나올정도로 왜 ‘공부는 구도행위’가 되었는지 등등을 풀어가면서 보통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나쁜 종교’이고 ‘좋은 종교’일까? 이 물음에 대해 보통 사람이 생활세계에서 대하는 종교가 어떤가에 대해서 재밌는 에피소드를 통해 소개한다.

 

“야 니 어떤 기 참말로 좋은 종굔지 아나?”
“뭔데?”
“통일교 아이가!”
“우째서?”
“통일교는 교인이 되믄 장가보내준다 아이가!”
“참말로?”
“하모. 그라고 장가가믄 집도 준다 카더라!”
“집도??!! …야야, 그 참말로 좋은 종교네.”


“그럼 개신교는?”
“음… 그건 쪼매 애매하다. 교회 가믄 장가는 보내주는데… 뭘 쫌 마
이 내야 된다 카더라~”
“뭐를?”
“헌금! 헌금내야 된다 아이가! 교회는 기본으로 드는 돈이 장난이 아
니라 카더라.”
“그래도 장가는 보내주나?”
“하모 그래도 장가는 보내주니까 괜찮다 아이가!”

“집은?”
“… 집은 없다드라.”


“천주교는?”
“그거도 개신교랑 쪼매 비슷하다 카더라.”
“근데 문제는 신부하고 수녀는 결혼을 안 한다 안카나~”
“내는 그기 쫌 맘에 걸린다.”
“결혼을 안해보믄 사람 속을 잘 모른다 아이가.”


“그래 그람 다른 종교는 없나?”
“느그 대순진리회는 가지 마래이~”
“와?”
“거기는 장가도 엄꼬, 집도 엄꼬, 대신 들어갈 때부터 돈만 진탕 낸다 
아이가!”
“참말이가?”
“하모!”
“음… 그람 거는 안 되겠네!”

한국 사회는 왕조사회다

 

5년제 비정규직 공무원에 지나지 않는 대통령이 제왕적 군주가 되어 백성 위에 군림하고, 그의 임명을 받은 고위직 공무원들은 공복이 아니라 지배자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이런 심정적 정황 가운데 정작 주권자요 납세자인 시민은 계몽적 군주만 손꼽아 기다리는 왕조의 백성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96쪽)

 

왕조 사회 속 갑질 문화

 

우리 사회 곳곳에서 갑질의 향연만 반복된다. 갑질…, 결국 그건 ‘왕질’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여전히 사회적 에토스가 왕조적 마인드에 묶여 있다 보니 갑의 언사는 임금의 그것이 되어 어명처럼 서민의 심부를 찔러댄다. 이런 현상은 세월호 참사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스스로 갑이라 생각하는 이들은 이 역사적 사건을 단순 교통사고로 폄하하면서, 간단히 돈으로 해결하려고만 한다. 갑의 온정으로 두둑이 챙겨 줄 테니 이쯤에서 목소리를 낮추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투의 훈계이다.(104, 106쪽)

 

왕조 사회의 어르신 이데올로기

 

한국 사회는 여전히 ‘왕조국가’적 성격이 강하다. 교종과 추기경에 대해 보여준 한국 사회의 반응은 왕의 즉위를 환영하거나, 혹은 왕의 승하를 슬퍼하는 왕조 사회 신민의 모습과 매우 닮아있다.(112쪽)

 

페스트, 메르스, 그리고 희생양

 

중세인들이 페스트의 공포를 유대인 죽이기로 상쇄하려 했던 것처럼, 우리 사회도 메르스가 가져온 불안을 누군가를 공격함으로 무마시키려 했다. 그리고 대부분 그런 공격의 대상들은 사회의 약자들이다. 안 그래도 소외되고, 배척받으며, 그 때문에 고통 속에 신음하는 이들에게 사회의 다수는 날카로운 침과 바늘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21세기에도 이런 모습의 폭력을 만나니, 중세 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희생양 찾기는 변함이 없어 보인다. 감염병의 문제는 의학과 그에 기반을 둔 정책과 시스템으로 풀어야 한다. 이를 신앙으로 섣불리 ‘해석’하려 드는 것 자체가 우리가 넘어서야 할 또 다른 감염병일 수 있다.(117쪽)

 

공부는 구도행위

우리는 공부를 종교적 구도행위의 하나로 각인하며 살아왔다. 이미 오래도록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우리 집안 누군가가 똘똘한 머리를 지녔다면 그에게 모든 것을 몰아주는 데 전혀 거리낌 없는 에토스 속에 살아왔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생을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유교 사회에서 공부는 일종의 구도 행위이다.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그가 공부로 성공해야 가문의 구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과거’라는 국가시험을 통해 현실이 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한국 사회는 공부에 대한 공동체적 신앙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제 공부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개인의 신앙적 책무가 된다. 왜? 그래야 영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은 한국에서는 신앙의 문제이다. 매번 입시철만 되면 이 땅위의 모든 종교를 대동단결하는 힘이 신앙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우리나라 최대 종교는 ‘수능교’라는 우스갯말까지 나올 지경이다.(157, 159쪽)

  

한국 교회와 샤머니즘

한국 교회는 편한 마음으로 샤머니즘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도구, 혹은 희생타로 이용해 왔음을 시인해야 할 것이다. 개화되고, 문명화되고, 심지어 정보화에도 앞서가고 있는 한국 사회에 오히려 샤머니즘이 더욱 성행하고 있다는 이 엄연한 현실. 이것이 우리 사회와 한국 교회에 웅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문제 앞에 오히려 한국의 샤머니즘은 한국 교회로서는 배척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타산지석의 대상으로 삼아야할 것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 교회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샤머니즘이 보이는 부정적 장면이 아니라 긍정의 그림들이다. 그것들에 대한 진지한 접근과 이해의 자세가 문제를 푸는 고갱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201-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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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소리가 내 속에서 고동쳤다


이 책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여성들 중에서 30여 명을 불러내어 오늘의 독자와 다시 대면시킨다. 초고를 보고 반가웠다. 퍽 오래 전이긴 했지만,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는 하는데 말이 없는 한 여성” 호세아의 아내 고멜을 변호하고 그의 남편 호세아를 호되게 나무란 적이 있었다. 그 후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변호했던 성서의 여성들이 김순영 박사에게 새롭게 초대받아 새 변호인의 변호를 받으며 다시 활기차게 살아나고 있고, 성경 독자들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러시아의 여성 시인 안나 아흐마또바(1889-1966)의 <롯의 아내>라는 시가 있다. 고향 소돔을 떠나게 하는 천사의 강제이주 명령은 잔인하다. 도시를 떠나는 자가 뒤를 돌아보았다가는 죽고 만단다. 그러나 천사의 말에,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에 여인은 순종할 수 없다.


“고향 소돔의 붉은 탑/ 노래 부르던 광장/ 뛰어놀던 뜨락/ 사랑하는 남편의 아이를 낳던 곳/ 가족과 함께 살던 집/ 텅 빈 집에 매달린 열린 창문”을 끝내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버린 이 여인을 두고서, 원하지 않았던 이주를 체험했던 러시아의 시인은 절규한다.


누가 이 여인을 위해 슬퍼할까/ 조금이나마 그녀의 상실감을 생각해 줄 이 누구인가/ 잊을 수가 없구나/ 순간의 시선에 삶을 바친 그녀를!


폴란드의 여성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1923-2012) 역시 같은 제목의 시를 남겼다. 그는 롯의 아내가 떠나온 집을 멀리서나마 되돌아 볼 수밖에 없었던 떳떳한 이유를 무려 서른 가지가 넘게 나열한다.


아마도 호기심 때문에 뒤를 돌아봤을 것이다./ 어쩌면 호기심 말고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었다./ 은그릇에 미련이 남아서./ 샌들의 가죽 끈을 고쳐 매다가 나도 몰래 그만./ 내 남편, 롯의 완고한 뒤통수를 더 이상 쳐다볼 수가 없어서….


폴란드의 시인은 추모한다. 결국 이 착하디착한 여인은 애향(愛鄕)과 강제이주에 저항하여 살던 곳만 바라보고 자기 목숨을 내놓았다고.


우리나라의 시인 이향아(李鄕莪, 1938-)는 롯의 아내를 추모하면서, 제목을 아예 <돌아다보리>라고 한다.


그렇지만 나는 돌아다보리/ 취한 밤의/ 검은 물이랑처럼/ 망해가는 세상의/ 향내나는 손길/ 내 이름 불러서/ 나는 못 가리/ … 벙어리처럼 두 팔 쳐들고/ 돌기둥/ 소금기둥/ 서서 죽으리




이제 우리 앞에 김순영이 나타났다. 그는 말한다.


기독교 정경으로서의 구약본문에는 억압의 굴레를 탈피하고 자기 목소리를 낸 여성들의 의외성(意外性)이 존재했고, 위계적 질서를 정당화시켜 주지 않는 목소리들이 숨통을 열어주곤 했다. 강자의 목소리가 진리가 되는 어제와 오늘의 타락한 질서에 해독제를 살포한 것 같은 고대 이스라엘 여성들의 소리가 내 속에서 고동쳤다.


독자에게 양해를 구하기도 한다.


때로는 ‘불편한 지적(指摘)질’을 하게 되는데, 불편함을 제기하는 것은 사소한 트집이 아니다. 거기서 질문이 생기고, 어쩌면 정곡을 찌르는 답을 얻을 수도 있다. 나의 글에 다소 불편함을 느끼는 독자도 있겠지만, 부디 끝까지 읽고 ‘안전한’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다르게 읽기를 시도한 것이라고 생각해주시기를 바란다.


저자가 비록 이렇게 부드럽게 말하더라도 독자들은, 특히 남성 독자들은 방심해선 안 된다. 놀랄 일이 벌어지고, 몰랐던 것에 눈이 뜨이고, 여성들이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구실을 했는지, 할 것인지를 발견하는 이들은 남자로 여자로 거듭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한 이들 가운데서 여성 주역들의 이름을 지우려하는 남성들이 어쩌면 그 때나 지금이나 그렇게 끈질긴지 암담하다. 저자는 드보라 이야기를 기독교 여성의 지도력 문제를 풀어가는 하나의 길잡이로 제안한다. 왜 기독교만이겠는가? 여성 국방부장관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다.


다말 이야기를 하는 대목에서 저자는 우리말 번역 성경의 번역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우리말 성경 번역은 일반 창녀를 말하는 히브리어 ‘조나’와 제사(祭祀)에서 성행위(性行爲) 의식을 연출하는 신전창녀인 ‘크데샤’를 구별하지 않은 것을 지적한다. 이것은 독자의 알 권리를 지켜준 것일 뿐 아니라 앞으로 계속될 성경 번역에서도 공헌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저자는 시스라 장군의 어머니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아들을 기다리며 한 말 중에 여성비하 발언이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말 번역만으로는 그것의 심각성이 잘 나타나 있지 않다. 저자가 히브리어 본문의 맨 뜻을 알려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 발언의 심각성을 알게 된다.


지배계급에 속한 시스라 장군의 어머니는 전쟁터에서 비참하게 짓밟혀 전리품 취급당하는 여성들의 운명을 당연시한다. 전쟁터로 떠난 아들을 기다리는 애타는 심정의 평범한 어머니의 말이 아니다. 그녀는 특정한 신체 부위를 지목하며 여성비하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한두 처녀”라는 표현은 거친 군사들의 희롱하는 말로서 “한두 개의 자궁”을 순화시킨 말이다. 구약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말이다. 여성이 남성 영웅들의 탈취 대상이었던 증거다.


사사기 5장 30절 히브리어 ‘락함 락하마타임 르로쉬 게베르’(“a womb or two for each man”)가 들어 있는 본문의 대강의 뜻은 “사내놈들마다 처녀(혹은 여자) 한 둘은 차지했을 것이다”이다. 아마도 성경에서는 이렇게 밖에, 달리 번역할 수가 없다. 어느 언어, 어느 성서 번역도 여성 성기를 직접 일컫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여 번역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화적 정상성(nomalcy)은 경전 번역에서 이러한 저속한 표현은 완곡어법으로 처리하도록 유도할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번역판들의 완곡어법이 지닌 문자적 뜻이 실제로는 “심히 저급한 표현”임을 과감하게 지적한다. 이것은 저자의 공헌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단순히 저급한 표현임을 지적한 것만이 아니고 번역에서 이 본문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 지금처럼 완곡어법으로 표현할 것인지, 각주에 본문의 뜻을 사실대로 밝힐 것인지, 그 수위는 어느 정도로 할 것인지, 새로운 과제를 주었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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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강, 생명의 강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참 위험한 일이다. 교양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읽는다면 모를까, 그 속에서 진정한 삶의 길을 찾고자 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성경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우리가 애써 가꿔온 삶의 토대와 자아 정체성을 사정없이 흔들거나 허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뜻한 위안을 구하는 이들에게 성경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낯선 세계를 향해 자기를 개방하는 일이다. 삶의 방식을 바꿀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야 성경과 참으로 만날 수 있다.


성경은 매끈한 텍스트가 아니라 주름 잡힌 텍스트이다. 인류의 오랜 경험과 시간이 성경 이야기 속에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름과 주름 사이의 갈피를 잘 살필 때 성경의 진미가 우러나온다. 이반 일리치는 <텍스트의 포도밭>이라는 책에서 수도사들의 책 읽기에 대해 말한다. 수도사들은 포도밭에서 딴 포도 한 알 한 알의 맛을 음미하듯이 성경을 읽어 거룩한 이해의 달콤함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성경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텍스트가 되었지만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가 쉽지는 않다. 자칫 잘못하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자기들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한 전거로 삼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텍스트의 미로를 헤치고 나가면서 그 속에 숨어 있는 보물을 보여주는 좋은 길 안내자를 만나야 한다.



김순영 박사의 원고를 읽으며 여러 대목에서 감탄했다. 남성인 내가 그동안 애써 직조해왔던 인식의 그물망에 걸리지 않았던 부분들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처럼 사람은 저마다의 편견을 가지고 성경을 읽는다. 그렇기에 다른 시각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 저자가 주목하는 이들은 여성이다. 


김순영 박사는 가부장적인 질서 속에서 ‘그림자’ 혹은 ‘하나의 몸짓’으로 취급받던 여성들의 이름을 호명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 구원 사역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일깨우고 있다. 그들은 힘의 위계 질서가 작동되고 있던 세계에 작은 틈을 만들어 변화의 물꼬를 트곤 했다. “새 일은 늘/틈에서 벌어진다”(김지하). 폭력적 배제와 혐오의 대상이 되거나, 무시 당하던 여성들이 역사 변혁의 주체로 세워지는 과정은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마르크 샤갈의 성서화 가운데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이삭 희생 이야기를 소재로 그린 그림이 떠올랐다. 벌거벗기운 채 장작더미 위에 눕혀진 이삭의 표정은 고요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그를 죽여야 하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얼굴에는 혼란과 아픔, 그리고 안도감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천사가 나타나 그의 행동을 제지했기 때문이다. 그 그림의 위쪽에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의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다. 샤갈은 죄 없이 죽임을 당해야 했던 이삭과 예수를 연결시키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림의 좌측 하단에 등장하는 한 인물이다. 숫양 한마리가 걸려 있는 나무 저편에 한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사라이다. 무릎을 꿇고 있는 양손의 손가락은 놀람과 안타까움으로 경직되어 있다. 화등잔만하게 열린 두 눈에는 공포와 슬픔이 담겨 있다.


샤갈은 왜 성경 텍스트의 이 장면에 등장하지 않는 사라를 굳이 등장시킨 것일까? 아브라함은 이삭의 희생에 대해 사라와 상의한 적이 있을까?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서는 그런 상의 과정이 불필요한 것일까? 샤갈은 그런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의 우측 상단에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비탄에 빠진 여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슬픔과 아픔이라는 인간 경험의 지층을 통해 두 시대가 만나고 있는 것이다.


김순영 박사는 텍스트에 대한 꼼꼼한 주석 과정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시적·역사적 상상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발람의 나귀가 말을 하는 것처럼 성경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마치 저자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성경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신산스러웠던 삶의 이야기는 우리 시대의 아픔과 무관하지 않다. 저자의 글 속에서 성경 이야기와 고난당하는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가 합류하여 슬픔의 강을 이룬다. 그런데 그 강은 어느 순간 생명의 강이 되어 흐른다. 그 물을 떠마시는 것은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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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번째 날의 호랑이

- 김기석 <<끙끙 앓는 하나님>> 중에서 -


호랑이 한 마리가 숲에서 잡혀와 우리에 갇혔습니다. 조련사는 호랑이를 길들이려고 했지만 호랑이는 끈질기게 으르렁대며 우리의 쇠창살을 이빨로 물어뜯으려고 했습니다. 호랑이는 자유로운 존재였고 숲의 기억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련사는 호랑이를 굶김으로써 대응했습니다. 그는 여유롭게 중얼거렸습니다.


“무척 사나운 호랑이로군. 하지만 당나귀처럼 굴게 될 거야. 내가 먹이를 갖고 있는데 주지 않을 테니까.”


호랑이는 배가 고파졌고, 조련사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했습니다. 조련사는 고양이처럼 야옹거리면 고기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호랑이는 거절했습니다. 그는 호랑이지 고양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틀 후 굶주림에 굴복한 호랑이는 조련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고양이처럼 야옹거렸습니다. 하지만 조련사는 그걸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호랑이가 먹이를 달라고 하자 조련사는 당나귀처럼 히힝거리라고 요구했습니다. 백수의 왕으로서의 체신 때문에 호랑이는 그 제안을 거부했고, 며칠을 먹지 않고 버텼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배가 고파서 결국 호랑이는 당나귀처럼 히힝댔습니다. 그날이 호랑이가 우리에 갇힌 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호랑이가 히힝대는 소리를 들은 조련사는 고기가 아닌 한 더미의 건초를 던져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더 이상 호랑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숲의 기억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팔레스타인과 한국의 대화》에 나오는 자카리아 무함마드의 <열 번째 날의 호랑이> 중에서, 165-166쪽).




이 슬프고 참담한 이야기는 시리아 작가인 자카리아 타메르의 <열 번째 날의 호랑이>라는 단편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팔레스타인 작가인 자카리아 무함마드는 이 글을 인용하면서 이스라엘은 투옥, 검문소, 모독, 고문, 폭격과 학살, 굶주림을 동원해 사람들을 굴복시키려는 조련사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당나귀처럼 히힝거리는 사람도 있지만, 싸우고 저항하면서 자기 영혼을 불모지로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나는 내 영혼이 증오와 어둠의 바다에서 헤엄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즉각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욕망 충족’이라는 건초더미를 들고 우리에게 히힝거리라고 말합니다. 타락이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도록 부름 받은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열 번째 날의 호랑이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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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람들에게, 혹은 이 세상할 때 우리들에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늘 생각하며 사십시오. 물질도 나누고, 지식도 나누고, 시간도 나누고, 정도 나누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리스도의 몸은 자랍니다. 그렇게 가운데서 악의 영토는 줄어들고, 선의 영토는 늘어날 것입니다. 주님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더러 들려 바다에 빠지라 해도 그대로 된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산을 움직이는 믿음은 사실은 나를 움직이는 믿음입니다. 산보다도 더 무거운 내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로 옮겨 놓을 때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내 배만 불리려는 비뚤어진 사랑 때문에 세상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제 진짜 사랑을 시작해야 합니다. 주는 기쁨, 함께 하는 기쁨을 누리려 할 때 돌연 삶은 축제가 됩니다. 성도는 <열 번째 날의 호랑이>가 되기를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이 자부심으로 일어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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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와 나눈 무궁무진한 대화의 한 단편


예레미야에게는 말이 찾아오곤 한다. 언어도 문법도 확인할 수 없는데, 곱씹을수록 메시지가 들린다. 신탁이란 것이 늘 이렇다. 혼자서만 듣고 말 그런 말이 아니다. 그 때마다 예레미야는 바룩을 불러,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며, 자기에게 들린 말을 바룩에게 다시 들려준다. 들려 온 말을 히브리어로 바꾸어, 히브리어 어법에 맞게, 히브리어 문법을 입혀서, 히브리어 언중이면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받은 바 그 메시지를 바룩에게 먼저 전달한다. 예언자에게 수납된 계시는 대필자代筆者 amanuensis에게서 “기록”으로 바뀐다. 예언자의 계시수납 과정에서 이미 한 번 형태가 치환置換된 신탁이 대필자에게서 문학적으로 완성된다.


예레미야는 계시의 수납과 선포 과정에서 왜 기록을 대필자에게 맡길까? 예언자는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나? 말로 외친 신탁과 글로 적은 신탁의 발생 순서를 묻는 것이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우리가 읽고 있는 예레미야서를 문학적으로 고찰할 때 그것이 예레미야의 작품인가 바룩의 작품인가?




우리 앞에는 또 한 사람이 있다. 예레미야서를 가지고 우리 독자에게 말을 걸어오는 《끙끙 앓는 하나님》의 저자 김기석이다. 그런데 그도 혼자가 아니다. 낯선 사람들을 함께 데리고 독자 앞에 나타난다. 이 세상 어느 예레미야 해설서를 보아도 예레미야를 설명하면서, 예레미야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이들, 곧 신영복, 에드워드 사이즈, 우석영, 정경옥, 빅터 프랭클, 루미, 노자, 임철규, 플라톤, 헤로도토스, 에릭 메택시스, 이승우, 김상환, 모레스 마이모니데스, 앙드레 말로, 스베틀라나 알레시예비치, 레이첼 카슨, 아베 피에르 등을 데리고 다니는 저자는 김기석 말고는 없을 것이다.


김기석은 목사요 설교자다. 현학적이지 않고, 실존적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열어보려고 혼자서 끙끙대지 않고, 삶의 체험이 다양하고 삶에 대한 관찰이 심오한 시인과 소설가와 철학자와 신학자와 인문학자들과 옛 성현들을 친구삼아 함께 다니며, 그들에게서 언어를 배우고, 지혜를 터득하고, 지식을 전수 받아, 예레미야가 말하고 바룩이 쓰고 교회가 전수한, 예언자 예레미야와 나눈 무궁무진한 대화의 한 단편을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 말씀을 받는 사람과, 말씀에 뼈와 살을 입히는 사람과, 말씀을 번역하는 사람과, 말씀을 이야기 하는 사람과, 말씀을 듣는 사람, 이들이 혼연일체가 되는 것이 진정한 독서 체험일 것 같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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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예레미야인가?


어둠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여기에 가담하거나 또는 앞장서고 있는 세력 가운데 하나가 한국의 교회들이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으로 서야 할 교회가 세속의 권력과 손을 잡고 역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명백히 죄악이다. 선지자의 목소리를 내야할 이들이 권력과 재물의 옹호자가 되고 있고,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에게 난폭한 자들의 편이 되고 있다. 이들은 한마디로 우상숭배자들이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가리기 위한 장식으로 존재할 따름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는 자들이다.


이 시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삼고 하나님의 뜻을 깊게 새기고 있는 김기석 목사가 욥(《아! 욥》)에 이어 예레미야에 대한 책을 냈다. 역시 기대 이상이다. 문학도이기도 한 그가 써내려가는 글들은 여기서 그 어떤 수식도 거부하고 있다. 명쾌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본질을 담고 있기 때문에 흔들림 없이 핵심으로 육박해 들어간다. 그래서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움직이게 한다. 예레미야의 심장 한 복판으로 우리를 이끌어 준다. 눈물과 탄식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한 위대한 선지자의 육성을 우리에게 고스란히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보는 예레미야는 예를 들어 이러하다. “예언자는 말씀을 전하는 자이기도 하지만 ‘보는 자’이다. 예언자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나비’ 혹은 ‘로에’는 ‘선견자’라는 뜻을 내포한다. 예언자는 하늘의 눈으로 인간의 역사를 주석하는 자이다(아브라함 조수아 헤셀). 그들은 역사의 이면에서 전개되는 하나님의 구원사를 꿰뚫어본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질서, 아니 차라리 보려 하지 않는 질서를 본다. 그렇기에 그들은 고통스럽다.” 김기석 목사 또한 이 책을 고통스럽게 썼을 것이다. 세상은 자신의 욕망으로 현실을 보려들고 있고, 선지자는 그로 인해 숨겨지고 있는 진실을 향해 우리의 눈을 뜨게 하려한다. 그건 어둠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과의 맹렬한 격투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은 예레미야가 일깨운 전투지침에 대한 길잡이인 셈이다.


악을 이기려면 잘 싸워야한다. 말씀으로 바르게 훈련된 이들이 아니고서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은 어렵다. 자칫 유혹에 넘어가거나 혼란에 빠지거나 아니면 굴복하고 만다. 세상은 지금 어떠한가? 대다수가 주류에 속하고자 기를 쓴다. 그걸 위해 악과 손을 잡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악마는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다. 어둠이 기승을 부릴 수 있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당대의 주변부적 존재였던 예레미야는 주류질서와 맞선다. 하나님을 버리고 생명의 근원을 외면한 채, 물을 담을 수 없는 웅덩이를 제 손으로 판 자들의 기만과 허위를 폭로한다.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결국 멸망하고 말 것을 예고한다. 새로운 시대의 탄생을 내다보게 한다.


지금 우리는 예레미야를 읽어야한다. 달콤한 말로 우리의 뇌와 가슴을 마비시키고 있는 자들의 덫에 걸리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펄펄 끓는 물처럼 우리의 온 몸이 들끓어 오르게 하는 말씀과 만나야 한다. 악마와도 주저 없이 한 통속이 되면서까지 주류에 속하려는 욕망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깨우쳐야 한다. 거짓을 격파하고 진실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을 열어야 한다. 예언서로 말씀을 전하는 교회가 사라지고 있는 시대에, 예레미야를 우리에게 전하는 김기석 목사가 고맙다. 그의 책이 이 시대를 강타하기를 바란다. 가증스러운 자들이 모두 몰락하고, 비천하다고 업신여김을 받은 이들이 우뚝 서는 그런 세상을 기원한다면.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그 빛의 근원을 보는 이는 복되다.


김민웅/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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