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왕조사회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갑질의 향연만 반복된다. 갑질…, 결국 그건 ‘왕질’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지적하는 저자는 우리 사회의 왕조적인 모습을 이렇게 풀어간다. “우리의 공화정 도입이 시민들의 주체적이고 자발적 행위와 자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순식간에 이식되었다는 사실이 우리 사회의 특징을 잘 설명해 주기도 한다. 서구 사회가 프랑스 혁명(1789~1794)이라는, 시민의 힘으로 왕정을 종식시킨, 역사적 경험을 소유한 것에 반해, 우리는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강대국이 주도한 세계 체제 재편 과정의 하나로 타력에 의해 공화제가 시작되었을 뿐이다. 그러니 여전히 우리 사회 대부분의 마인드와 에토스는 임금을 모시던 때의 역사적 경험과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왕조 사회의 어르신 이데올로기’와 세월호 참사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저자는 “개신교는 ‘자영업’에 가깝다. 한국 개신교회는 사회적으로 공적 조직과 연 닿아있지 않다. 그래서 운영에 관한 일체를 신자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전형적인 자영업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천주교의 경우는 전형적인 외국계 지사의 모습을 보인다. 천주교는 개신교처럼 자영업 마인드가 아니다. 뒤에 바티칸이라는 든든한 언덕이 있기 때문일까? 국내에서 영업이 좀 시원찮아도 자금력 두둑한 본사 덕분에 몇 년은 거뜬히 버틸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인지 한국 천주교의 경우 신자들에 대한 독려 행위가 개신교보다는 약하다. 반면 불교는 전형적인 공기업 마인드이다. 업무의 효율이나 생산성에 목매지 않아도 꼬박꼬박 때만 되면 계좌에 입금되는 월급의 유혹은 달콤하다”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종교의 상황은 그 종교가 기득권화되어 있고 그걸 지켜내고 확대하는 것에 일차적 관심을 쏟아왔기 때문이며 정작 해야 할 종교 수련의 길보다는 손쉬운(?) 세속적 영향력 확대의 길을 택하게 되고, 힘(權力)으로, 돈으로, 수(數)의 힘으로!”라는 슬로건으로 밀어 붙인다.

 

이러한 종교에서 현실에 대한 냉철한 비판과 성찰, 자기 자신에 대한 엄격함, 대중의 욕망에 대해 질타한다. 결국 종교는 기득권을 움켜쥐는 과정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종교의 사망선고가 내려진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 곳곳에 스며있는 유교의 흔적을 살피면서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곤 한다는 저자는 그때마다 서슴없이 “유교!”라고 답한다. 결혼을 고리로 이어진 가족주의에 기초한 유교란 종교의 가치관은 지금도 강력하다. 명절 때마다, 집안의 대소사 때마다 발길을 원적(原籍)으로 돌리게 하는 가장 강력한 에토스는 불교도, 그리스도교도 아닌 바로 유교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교는 이를 사회적 제도 속에 깊이 각인시켜 놓았다. 그뿐인가? 설날이나 추석 같은 큰 명절에 집안 식구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며 가문의 영생을 축하하는 의례, 그것이 바로 제사이다. 이러한 유교의 에토스는 지금도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매우 강력한 힘으로 작동되고 있다. 그러니 유교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라고 할 수 밖에.

 

이에 덧붙여 한국종교가 민족주의와 어떻게 결부되어있는지, 각 종교의 경전읽기는 연애편지를 읽는 것과 유사한 성질의 것인지, 역사 속에서 종교는 어떤 행태로 파렴치하게 친일 행각을 벌였는지, 우리나라 최대 종교는 ‘수능교’라는 우스갯말까지 나올정도로 왜 ‘공부는 구도행위’가 되었는지 등등을 풀어가면서 보통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나쁜 종교’이고 ‘좋은 종교’일까? 이 물음에 대해 보통 사람이 생활세계에서 대하는 종교가 어떤가에 대해서 재밌는 에피소드를 통해 소개한다.

 

“야 니 어떤 기 참말로 좋은 종굔지 아나?”
“뭔데?”
“통일교 아이가!”
“우째서?”
“통일교는 교인이 되믄 장가보내준다 아이가!”
“참말로?”
“하모. 그라고 장가가믄 집도 준다 카더라!”
“집도??!! …야야, 그 참말로 좋은 종교네.”


“그럼 개신교는?”
“음… 그건 쪼매 애매하다. 교회 가믄 장가는 보내주는데… 뭘 쫌 마
이 내야 된다 카더라~”
“뭐를?”
“헌금! 헌금내야 된다 아이가! 교회는 기본으로 드는 돈이 장난이 아
니라 카더라.”
“그래도 장가는 보내주나?”
“하모 그래도 장가는 보내주니까 괜찮다 아이가!”

“집은?”
“… 집은 없다드라.”


“천주교는?”
“그거도 개신교랑 쪼매 비슷하다 카더라.”
“근데 문제는 신부하고 수녀는 결혼을 안 한다 안카나~”
“내는 그기 쫌 맘에 걸린다.”
“결혼을 안해보믄 사람 속을 잘 모른다 아이가.”


“그래 그람 다른 종교는 없나?”
“느그 대순진리회는 가지 마래이~”
“와?”
“거기는 장가도 엄꼬, 집도 엄꼬, 대신 들어갈 때부터 돈만 진탕 낸다 
아이가!”
“참말이가?”
“하모!”
“음… 그람 거는 안 되겠네!”

한국 사회는 왕조사회다

 

5년제 비정규직 공무원에 지나지 않는 대통령이 제왕적 군주가 되어 백성 위에 군림하고, 그의 임명을 받은 고위직 공무원들은 공복이 아니라 지배자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이런 심정적 정황 가운데 정작 주권자요 납세자인 시민은 계몽적 군주만 손꼽아 기다리는 왕조의 백성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96쪽)

 

왕조 사회 속 갑질 문화

 

우리 사회 곳곳에서 갑질의 향연만 반복된다. 갑질…, 결국 그건 ‘왕질’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여전히 사회적 에토스가 왕조적 마인드에 묶여 있다 보니 갑의 언사는 임금의 그것이 되어 어명처럼 서민의 심부를 찔러댄다. 이런 현상은 세월호 참사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스스로 갑이라 생각하는 이들은 이 역사적 사건을 단순 교통사고로 폄하하면서, 간단히 돈으로 해결하려고만 한다. 갑의 온정으로 두둑이 챙겨 줄 테니 이쯤에서 목소리를 낮추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투의 훈계이다.(104, 106쪽)

 

왕조 사회의 어르신 이데올로기

 

한국 사회는 여전히 ‘왕조국가’적 성격이 강하다. 교종과 추기경에 대해 보여준 한국 사회의 반응은 왕의 즉위를 환영하거나, 혹은 왕의 승하를 슬퍼하는 왕조 사회 신민의 모습과 매우 닮아있다.(112쪽)

 

페스트, 메르스, 그리고 희생양

 

중세인들이 페스트의 공포를 유대인 죽이기로 상쇄하려 했던 것처럼, 우리 사회도 메르스가 가져온 불안을 누군가를 공격함으로 무마시키려 했다. 그리고 대부분 그런 공격의 대상들은 사회의 약자들이다. 안 그래도 소외되고, 배척받으며, 그 때문에 고통 속에 신음하는 이들에게 사회의 다수는 날카로운 침과 바늘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21세기에도 이런 모습의 폭력을 만나니, 중세 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희생양 찾기는 변함이 없어 보인다. 감염병의 문제는 의학과 그에 기반을 둔 정책과 시스템으로 풀어야 한다. 이를 신앙으로 섣불리 ‘해석’하려 드는 것 자체가 우리가 넘어서야 할 또 다른 감염병일 수 있다.(117쪽)

 

공부는 구도행위

우리는 공부를 종교적 구도행위의 하나로 각인하며 살아왔다. 이미 오래도록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우리 집안 누군가가 똘똘한 머리를 지녔다면 그에게 모든 것을 몰아주는 데 전혀 거리낌 없는 에토스 속에 살아왔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생을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유교 사회에서 공부는 일종의 구도 행위이다.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그가 공부로 성공해야 가문의 구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과거’라는 국가시험을 통해 현실이 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한국 사회는 공부에 대한 공동체적 신앙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제 공부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개인의 신앙적 책무가 된다. 왜? 그래야 영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은 한국에서는 신앙의 문제이다. 매번 입시철만 되면 이 땅위의 모든 종교를 대동단결하는 힘이 신앙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우리나라 최대 종교는 ‘수능교’라는 우스갯말까지 나올 지경이다.(157, 159쪽)

  

한국 교회와 샤머니즘

한국 교회는 편한 마음으로 샤머니즘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도구, 혹은 희생타로 이용해 왔음을 시인해야 할 것이다. 개화되고, 문명화되고, 심지어 정보화에도 앞서가고 있는 한국 사회에 오히려 샤머니즘이 더욱 성행하고 있다는 이 엄연한 현실. 이것이 우리 사회와 한국 교회에 웅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문제 앞에 오히려 한국의 샤머니즘은 한국 교회로서는 배척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타산지석의 대상으로 삼아야할 것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 교회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샤머니즘이 보이는 부정적 장면이 아니라 긍정의 그림들이다. 그것들에 대한 진지한 접근과 이해의 자세가 문제를 푸는 고갱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201-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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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소리가 내 속에서 고동쳤다


이 책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여성들 중에서 30여 명을 불러내어 오늘의 독자와 다시 대면시킨다. 초고를 보고 반가웠다. 퍽 오래 전이긴 했지만,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는 하는데 말이 없는 한 여성” 호세아의 아내 고멜을 변호하고 그의 남편 호세아를 호되게 나무란 적이 있었다. 그 후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변호했던 성서의 여성들이 김순영 박사에게 새롭게 초대받아 새 변호인의 변호를 받으며 다시 활기차게 살아나고 있고, 성경 독자들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러시아의 여성 시인 안나 아흐마또바(1889-1966)의 <롯의 아내>라는 시가 있다. 고향 소돔을 떠나게 하는 천사의 강제이주 명령은 잔인하다. 도시를 떠나는 자가 뒤를 돌아보았다가는 죽고 만단다. 그러나 천사의 말에,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에 여인은 순종할 수 없다.


“고향 소돔의 붉은 탑/ 노래 부르던 광장/ 뛰어놀던 뜨락/ 사랑하는 남편의 아이를 낳던 곳/ 가족과 함께 살던 집/ 텅 빈 집에 매달린 열린 창문”을 끝내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버린 이 여인을 두고서, 원하지 않았던 이주를 체험했던 러시아의 시인은 절규한다.


누가 이 여인을 위해 슬퍼할까/ 조금이나마 그녀의 상실감을 생각해 줄 이 누구인가/ 잊을 수가 없구나/ 순간의 시선에 삶을 바친 그녀를!


폴란드의 여성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1923-2012) 역시 같은 제목의 시를 남겼다. 그는 롯의 아내가 떠나온 집을 멀리서나마 되돌아 볼 수밖에 없었던 떳떳한 이유를 무려 서른 가지가 넘게 나열한다.


아마도 호기심 때문에 뒤를 돌아봤을 것이다./ 어쩌면 호기심 말고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었다./ 은그릇에 미련이 남아서./ 샌들의 가죽 끈을 고쳐 매다가 나도 몰래 그만./ 내 남편, 롯의 완고한 뒤통수를 더 이상 쳐다볼 수가 없어서….


폴란드의 시인은 추모한다. 결국 이 착하디착한 여인은 애향(愛鄕)과 강제이주에 저항하여 살던 곳만 바라보고 자기 목숨을 내놓았다고.


우리나라의 시인 이향아(李鄕莪, 1938-)는 롯의 아내를 추모하면서, 제목을 아예 <돌아다보리>라고 한다.


그렇지만 나는 돌아다보리/ 취한 밤의/ 검은 물이랑처럼/ 망해가는 세상의/ 향내나는 손길/ 내 이름 불러서/ 나는 못 가리/ … 벙어리처럼 두 팔 쳐들고/ 돌기둥/ 소금기둥/ 서서 죽으리




이제 우리 앞에 김순영이 나타났다. 그는 말한다.


기독교 정경으로서의 구약본문에는 억압의 굴레를 탈피하고 자기 목소리를 낸 여성들의 의외성(意外性)이 존재했고, 위계적 질서를 정당화시켜 주지 않는 목소리들이 숨통을 열어주곤 했다. 강자의 목소리가 진리가 되는 어제와 오늘의 타락한 질서에 해독제를 살포한 것 같은 고대 이스라엘 여성들의 소리가 내 속에서 고동쳤다.


독자에게 양해를 구하기도 한다.


때로는 ‘불편한 지적(指摘)질’을 하게 되는데, 불편함을 제기하는 것은 사소한 트집이 아니다. 거기서 질문이 생기고, 어쩌면 정곡을 찌르는 답을 얻을 수도 있다. 나의 글에 다소 불편함을 느끼는 독자도 있겠지만, 부디 끝까지 읽고 ‘안전한’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다르게 읽기를 시도한 것이라고 생각해주시기를 바란다.


저자가 비록 이렇게 부드럽게 말하더라도 독자들은, 특히 남성 독자들은 방심해선 안 된다. 놀랄 일이 벌어지고, 몰랐던 것에 눈이 뜨이고, 여성들이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구실을 했는지, 할 것인지를 발견하는 이들은 남자로 여자로 거듭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한 이들 가운데서 여성 주역들의 이름을 지우려하는 남성들이 어쩌면 그 때나 지금이나 그렇게 끈질긴지 암담하다. 저자는 드보라 이야기를 기독교 여성의 지도력 문제를 풀어가는 하나의 길잡이로 제안한다. 왜 기독교만이겠는가? 여성 국방부장관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다.


다말 이야기를 하는 대목에서 저자는 우리말 번역 성경의 번역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우리말 성경 번역은 일반 창녀를 말하는 히브리어 ‘조나’와 제사(祭祀)에서 성행위(性行爲) 의식을 연출하는 신전창녀인 ‘크데샤’를 구별하지 않은 것을 지적한다. 이것은 독자의 알 권리를 지켜준 것일 뿐 아니라 앞으로 계속될 성경 번역에서도 공헌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저자는 시스라 장군의 어머니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아들을 기다리며 한 말 중에 여성비하 발언이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말 번역만으로는 그것의 심각성이 잘 나타나 있지 않다. 저자가 히브리어 본문의 맨 뜻을 알려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 발언의 심각성을 알게 된다.


지배계급에 속한 시스라 장군의 어머니는 전쟁터에서 비참하게 짓밟혀 전리품 취급당하는 여성들의 운명을 당연시한다. 전쟁터로 떠난 아들을 기다리는 애타는 심정의 평범한 어머니의 말이 아니다. 그녀는 특정한 신체 부위를 지목하며 여성비하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한두 처녀”라는 표현은 거친 군사들의 희롱하는 말로서 “한두 개의 자궁”을 순화시킨 말이다. 구약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말이다. 여성이 남성 영웅들의 탈취 대상이었던 증거다.


사사기 5장 30절 히브리어 ‘락함 락하마타임 르로쉬 게베르’(“a womb or two for each man”)가 들어 있는 본문의 대강의 뜻은 “사내놈들마다 처녀(혹은 여자) 한 둘은 차지했을 것이다”이다. 아마도 성경에서는 이렇게 밖에, 달리 번역할 수가 없다. 어느 언어, 어느 성서 번역도 여성 성기를 직접 일컫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여 번역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화적 정상성(nomalcy)은 경전 번역에서 이러한 저속한 표현은 완곡어법으로 처리하도록 유도할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번역판들의 완곡어법이 지닌 문자적 뜻이 실제로는 “심히 저급한 표현”임을 과감하게 지적한다. 이것은 저자의 공헌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단순히 저급한 표현임을 지적한 것만이 아니고 번역에서 이 본문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 지금처럼 완곡어법으로 표현할 것인지, 각주에 본문의 뜻을 사실대로 밝힐 것인지, 그 수위는 어느 정도로 할 것인지, 새로운 과제를 주었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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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강, 생명의 강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참 위험한 일이다. 교양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읽는다면 모를까, 그 속에서 진정한 삶의 길을 찾고자 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성경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우리가 애써 가꿔온 삶의 토대와 자아 정체성을 사정없이 흔들거나 허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뜻한 위안을 구하는 이들에게 성경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낯선 세계를 향해 자기를 개방하는 일이다. 삶의 방식을 바꿀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야 성경과 참으로 만날 수 있다.


성경은 매끈한 텍스트가 아니라 주름 잡힌 텍스트이다. 인류의 오랜 경험과 시간이 성경 이야기 속에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름과 주름 사이의 갈피를 잘 살필 때 성경의 진미가 우러나온다. 이반 일리치는 <텍스트의 포도밭>이라는 책에서 수도사들의 책 읽기에 대해 말한다. 수도사들은 포도밭에서 딴 포도 한 알 한 알의 맛을 음미하듯이 성경을 읽어 거룩한 이해의 달콤함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성경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텍스트가 되었지만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가 쉽지는 않다. 자칫 잘못하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자기들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한 전거로 삼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텍스트의 미로를 헤치고 나가면서 그 속에 숨어 있는 보물을 보여주는 좋은 길 안내자를 만나야 한다.



김순영 박사의 원고를 읽으며 여러 대목에서 감탄했다. 남성인 내가 그동안 애써 직조해왔던 인식의 그물망에 걸리지 않았던 부분들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처럼 사람은 저마다의 편견을 가지고 성경을 읽는다. 그렇기에 다른 시각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 저자가 주목하는 이들은 여성이다. 


김순영 박사는 가부장적인 질서 속에서 ‘그림자’ 혹은 ‘하나의 몸짓’으로 취급받던 여성들의 이름을 호명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 구원 사역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일깨우고 있다. 그들은 힘의 위계 질서가 작동되고 있던 세계에 작은 틈을 만들어 변화의 물꼬를 트곤 했다. “새 일은 늘/틈에서 벌어진다”(김지하). 폭력적 배제와 혐오의 대상이 되거나, 무시 당하던 여성들이 역사 변혁의 주체로 세워지는 과정은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마르크 샤갈의 성서화 가운데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이삭 희생 이야기를 소재로 그린 그림이 떠올랐다. 벌거벗기운 채 장작더미 위에 눕혀진 이삭의 표정은 고요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그를 죽여야 하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얼굴에는 혼란과 아픔, 그리고 안도감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천사가 나타나 그의 행동을 제지했기 때문이다. 그 그림의 위쪽에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의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다. 샤갈은 죄 없이 죽임을 당해야 했던 이삭과 예수를 연결시키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림의 좌측 하단에 등장하는 한 인물이다. 숫양 한마리가 걸려 있는 나무 저편에 한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사라이다. 무릎을 꿇고 있는 양손의 손가락은 놀람과 안타까움으로 경직되어 있다. 화등잔만하게 열린 두 눈에는 공포와 슬픔이 담겨 있다.


샤갈은 왜 성경 텍스트의 이 장면에 등장하지 않는 사라를 굳이 등장시킨 것일까? 아브라함은 이삭의 희생에 대해 사라와 상의한 적이 있을까?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서는 그런 상의 과정이 불필요한 것일까? 샤갈은 그런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의 우측 상단에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비탄에 빠진 여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슬픔과 아픔이라는 인간 경험의 지층을 통해 두 시대가 만나고 있는 것이다.


김순영 박사는 텍스트에 대한 꼼꼼한 주석 과정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시적·역사적 상상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발람의 나귀가 말을 하는 것처럼 성경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마치 저자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성경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신산스러웠던 삶의 이야기는 우리 시대의 아픔과 무관하지 않다. 저자의 글 속에서 성경 이야기와 고난당하는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가 합류하여 슬픔의 강을 이룬다. 그런데 그 강은 어느 순간 생명의 강이 되어 흐른다. 그 물을 떠마시는 것은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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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번째 날의 호랑이

- 김기석 <<끙끙 앓는 하나님>> 중에서 -


호랑이 한 마리가 숲에서 잡혀와 우리에 갇혔습니다. 조련사는 호랑이를 길들이려고 했지만 호랑이는 끈질기게 으르렁대며 우리의 쇠창살을 이빨로 물어뜯으려고 했습니다. 호랑이는 자유로운 존재였고 숲의 기억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련사는 호랑이를 굶김으로써 대응했습니다. 그는 여유롭게 중얼거렸습니다.


“무척 사나운 호랑이로군. 하지만 당나귀처럼 굴게 될 거야. 내가 먹이를 갖고 있는데 주지 않을 테니까.”


호랑이는 배가 고파졌고, 조련사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했습니다. 조련사는 고양이처럼 야옹거리면 고기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호랑이는 거절했습니다. 그는 호랑이지 고양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틀 후 굶주림에 굴복한 호랑이는 조련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고양이처럼 야옹거렸습니다. 하지만 조련사는 그걸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호랑이가 먹이를 달라고 하자 조련사는 당나귀처럼 히힝거리라고 요구했습니다. 백수의 왕으로서의 체신 때문에 호랑이는 그 제안을 거부했고, 며칠을 먹지 않고 버텼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배가 고파서 결국 호랑이는 당나귀처럼 히힝댔습니다. 그날이 호랑이가 우리에 갇힌 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호랑이가 히힝대는 소리를 들은 조련사는 고기가 아닌 한 더미의 건초를 던져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더 이상 호랑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숲의 기억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팔레스타인과 한국의 대화》에 나오는 자카리아 무함마드의 <열 번째 날의 호랑이> 중에서, 165-166쪽).




이 슬프고 참담한 이야기는 시리아 작가인 자카리아 타메르의 <열 번째 날의 호랑이>라는 단편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팔레스타인 작가인 자카리아 무함마드는 이 글을 인용하면서 이스라엘은 투옥, 검문소, 모독, 고문, 폭격과 학살, 굶주림을 동원해 사람들을 굴복시키려는 조련사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당나귀처럼 히힝거리는 사람도 있지만, 싸우고 저항하면서 자기 영혼을 불모지로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나는 내 영혼이 증오와 어둠의 바다에서 헤엄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즉각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욕망 충족’이라는 건초더미를 들고 우리에게 히힝거리라고 말합니다. 타락이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도록 부름 받은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열 번째 날의 호랑이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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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람들에게, 혹은 이 세상할 때 우리들에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늘 생각하며 사십시오. 물질도 나누고, 지식도 나누고, 시간도 나누고, 정도 나누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리스도의 몸은 자랍니다. 그렇게 가운데서 악의 영토는 줄어들고, 선의 영토는 늘어날 것입니다. 주님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더러 들려 바다에 빠지라 해도 그대로 된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산을 움직이는 믿음은 사실은 나를 움직이는 믿음입니다. 산보다도 더 무거운 내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로 옮겨 놓을 때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내 배만 불리려는 비뚤어진 사랑 때문에 세상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제 진짜 사랑을 시작해야 합니다. 주는 기쁨, 함께 하는 기쁨을 누리려 할 때 돌연 삶은 축제가 됩니다. 성도는 <열 번째 날의 호랑이>가 되기를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이 자부심으로 일어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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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와 나눈 무궁무진한 대화의 한 단편


예레미야에게는 말이 찾아오곤 한다. 언어도 문법도 확인할 수 없는데, 곱씹을수록 메시지가 들린다. 신탁이란 것이 늘 이렇다. 혼자서만 듣고 말 그런 말이 아니다. 그 때마다 예레미야는 바룩을 불러,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며, 자기에게 들린 말을 바룩에게 다시 들려준다. 들려 온 말을 히브리어로 바꾸어, 히브리어 어법에 맞게, 히브리어 문법을 입혀서, 히브리어 언중이면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받은 바 그 메시지를 바룩에게 먼저 전달한다. 예언자에게 수납된 계시는 대필자代筆者 amanuensis에게서 “기록”으로 바뀐다. 예언자의 계시수납 과정에서 이미 한 번 형태가 치환置換된 신탁이 대필자에게서 문학적으로 완성된다.


예레미야는 계시의 수납과 선포 과정에서 왜 기록을 대필자에게 맡길까? 예언자는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나? 말로 외친 신탁과 글로 적은 신탁의 발생 순서를 묻는 것이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우리가 읽고 있는 예레미야서를 문학적으로 고찰할 때 그것이 예레미야의 작품인가 바룩의 작품인가?




우리 앞에는 또 한 사람이 있다. 예레미야서를 가지고 우리 독자에게 말을 걸어오는 《끙끙 앓는 하나님》의 저자 김기석이다. 그런데 그도 혼자가 아니다. 낯선 사람들을 함께 데리고 독자 앞에 나타난다. 이 세상 어느 예레미야 해설서를 보아도 예레미야를 설명하면서, 예레미야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이들, 곧 신영복, 에드워드 사이즈, 우석영, 정경옥, 빅터 프랭클, 루미, 노자, 임철규, 플라톤, 헤로도토스, 에릭 메택시스, 이승우, 김상환, 모레스 마이모니데스, 앙드레 말로, 스베틀라나 알레시예비치, 레이첼 카슨, 아베 피에르 등을 데리고 다니는 저자는 김기석 말고는 없을 것이다.


김기석은 목사요 설교자다. 현학적이지 않고, 실존적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열어보려고 혼자서 끙끙대지 않고, 삶의 체험이 다양하고 삶에 대한 관찰이 심오한 시인과 소설가와 철학자와 신학자와 인문학자들과 옛 성현들을 친구삼아 함께 다니며, 그들에게서 언어를 배우고, 지혜를 터득하고, 지식을 전수 받아, 예레미야가 말하고 바룩이 쓰고 교회가 전수한, 예언자 예레미야와 나눈 무궁무진한 대화의 한 단편을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 말씀을 받는 사람과, 말씀에 뼈와 살을 입히는 사람과, 말씀을 번역하는 사람과, 말씀을 이야기 하는 사람과, 말씀을 듣는 사람, 이들이 혼연일체가 되는 것이 진정한 독서 체험일 것 같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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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예레미야인가?


어둠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여기에 가담하거나 또는 앞장서고 있는 세력 가운데 하나가 한국의 교회들이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으로 서야 할 교회가 세속의 권력과 손을 잡고 역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명백히 죄악이다. 선지자의 목소리를 내야할 이들이 권력과 재물의 옹호자가 되고 있고,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에게 난폭한 자들의 편이 되고 있다. 이들은 한마디로 우상숭배자들이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가리기 위한 장식으로 존재할 따름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는 자들이다.


이 시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삼고 하나님의 뜻을 깊게 새기고 있는 김기석 목사가 욥(《아! 욥》)에 이어 예레미야에 대한 책을 냈다. 역시 기대 이상이다. 문학도이기도 한 그가 써내려가는 글들은 여기서 그 어떤 수식도 거부하고 있다. 명쾌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본질을 담고 있기 때문에 흔들림 없이 핵심으로 육박해 들어간다. 그래서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움직이게 한다. 예레미야의 심장 한 복판으로 우리를 이끌어 준다. 눈물과 탄식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한 위대한 선지자의 육성을 우리에게 고스란히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보는 예레미야는 예를 들어 이러하다. “예언자는 말씀을 전하는 자이기도 하지만 ‘보는 자’이다. 예언자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나비’ 혹은 ‘로에’는 ‘선견자’라는 뜻을 내포한다. 예언자는 하늘의 눈으로 인간의 역사를 주석하는 자이다(아브라함 조수아 헤셀). 그들은 역사의 이면에서 전개되는 하나님의 구원사를 꿰뚫어본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질서, 아니 차라리 보려 하지 않는 질서를 본다. 그렇기에 그들은 고통스럽다.” 김기석 목사 또한 이 책을 고통스럽게 썼을 것이다. 세상은 자신의 욕망으로 현실을 보려들고 있고, 선지자는 그로 인해 숨겨지고 있는 진실을 향해 우리의 눈을 뜨게 하려한다. 그건 어둠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과의 맹렬한 격투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은 예레미야가 일깨운 전투지침에 대한 길잡이인 셈이다.


악을 이기려면 잘 싸워야한다. 말씀으로 바르게 훈련된 이들이 아니고서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은 어렵다. 자칫 유혹에 넘어가거나 혼란에 빠지거나 아니면 굴복하고 만다. 세상은 지금 어떠한가? 대다수가 주류에 속하고자 기를 쓴다. 그걸 위해 악과 손을 잡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악마는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다. 어둠이 기승을 부릴 수 있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당대의 주변부적 존재였던 예레미야는 주류질서와 맞선다. 하나님을 버리고 생명의 근원을 외면한 채, 물을 담을 수 없는 웅덩이를 제 손으로 판 자들의 기만과 허위를 폭로한다.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결국 멸망하고 말 것을 예고한다. 새로운 시대의 탄생을 내다보게 한다.


지금 우리는 예레미야를 읽어야한다. 달콤한 말로 우리의 뇌와 가슴을 마비시키고 있는 자들의 덫에 걸리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펄펄 끓는 물처럼 우리의 온 몸이 들끓어 오르게 하는 말씀과 만나야 한다. 악마와도 주저 없이 한 통속이 되면서까지 주류에 속하려는 욕망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깨우쳐야 한다. 거짓을 격파하고 진실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을 열어야 한다. 예언서로 말씀을 전하는 교회가 사라지고 있는 시대에, 예레미야를 우리에게 전하는 김기석 목사가 고맙다. 그의 책이 이 시대를 강타하기를 바란다. 가증스러운 자들이 모두 몰락하고, 비천하다고 업신여김을 받은 이들이 우뚝 서는 그런 세상을 기원한다면.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그 빛의 근원을 보는 이는 복되다.


김민웅/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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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의 마음을 깊은 곳으로 이끄는 힘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사일런스>는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여기서 ‘침묵’에 대한 해석은 이중적이다. 17세기 에도 막부 시대에 (로마 가톨릭)기독교인들은 큰 박해를 받았다. 정권은 기독교인들을 색출하기 위해서 동판이나 목판에 예수나 마리아 상을 새겨 만든 후미에를 밟게 했다. 순교 당하는 이들 앞에서 침묵하는 하나님, 또는 후미에를 밟고 살아난 이들까지 비밀한 방식으로 용납하는 하나님을 엔도가 말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오늘 대한민국에서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한다. 2017년 부활절인 4월16일은 마침 세월호 참사 3주년 되는 날이다. 이런 참사가 일어났다는 사실 앞에서 목사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한다고 선포할 수 있을까? 매주일 강단에서 하나님은 살아 있다고, 하나님은 정의롭다고,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진정성 있게 설교할 수 있을까?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솔직한 게 아닐는지. 이럴 때마다 나는 『욥기』 와 『예레미야』에 손이 간다. 마침 작년 연말에 욥기를 주제로 한 《아! 욥》을 펴낸 김기석 목사가 이어서 예레미야를 고유한 시각으로 주석하고 설교한 책을 냈다. 기원전 587년 바벨론에 의해서 초토화되는 예루살렘을 온몸으로 겪은 예레미야의 심정을 김기석 목사도 세월호 참사에서 그대로 느낀 것인지 모르겠다. 본인이 의식했던, 의식하지 못했든지. 그래서 제목을 ‘끙끙 앓는 하나님’이라 했을까.




김기석 목사의 책을 비교적 여러 번 접했던 터라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호흡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 여기서 그 내용을 간추리거나 분석하지 않겠다. 좀더 일반적인 관점에서 그의 글을 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특히 설교자들이 왜 읽어야하는지만 간략하게 짚겠다. 속되게 표현해서 목사는 말과 글로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닌가. 김기석 목사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성경을 어떻게 읽고 해석하고 오늘의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하는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김기석 목사의 글은 술술 읽힌다. 마치 영적인 에세이처럼 독자들의 마음을 깊은 곳으로 이끄는 힘이 있다. 이런 글을 쓰는 건 쉽지 않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하나는 자신에게 충분히 소화된 내용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걸 전달할 수 있는 언어 구사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목사들이 성경의 세계를 알고 설교하는 경우가 얼마나 되는가. 그러다보니 짜깁기 식으로 글을 쓰고 설교한다. 김기석 목사의 글은 마치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를 신들린 듯 노련하게 부르는 바리톤 가수의 노래처럼 잔잔하지만 울림이 강하다. 이런 글을 자주 읽다보면 우리도 글을 쓰고 싶어질 것이며,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저절로 배우게 될 것이다.


독자들은 그의 글에서 번뜩이는 신학적 착상을 발견하는 일이 적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메시지 11, 예언자’의 앞 대목에서 그는 예언자의 정체성을 이렇게 진단한다.


“예언자들은 불행한 운명을 타고 난 사람들입니다. 예언의 성공은 예고한 일이 그대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예언한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언자의 말을 받아들여서 자기들의 삶의 방식을 돌이켜 재앙을 면하는 것이 예언의 성공입니다. 예언의 말이 그대로 성취되면 실패한 예언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보내신 것은 백성을 구원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순 속에 살기에 그는 불행합니다.”


이 한 구절만 잘 이해해도 독자들은 그의 책을 읽기 위해서 들인 노고를 충분히 보상받을 것이다.


나는 김기석 목사의 영혼을 통과해서 이 땅에 모습을 보인 ‘끙끙거리는 하나님’이 비굴하고 처연하며, 하나님의 위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목회자요 설교자로 살아가는 목사들, 그리고 그런 심정으로 함께 길을 가고 있는 모든 깨어 있는 평신도 기독교인들 역시 이 현실에 저항하고 버텨내고 희망하는 데 힘이 되어 주리라 확신한다.


정용섭/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대구샘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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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메시지를 감수할 수 있을까



예레미야서는 예언서들 중에서 가장 어려운 책으로 통한다. 예레미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들 중에 이 책의 내용이 뒤죽박죽이어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책이라고까지 말한 이도 있는 지경이다.


1장에서 25장까지는 운문이 주를 이루고 26장부터 52장까지는 산문이 주를 이루지만 운문 중에 산문이 섞여 있기도 하고 반대로 산문 중에 운문이 섞여 있기도 하다. 모빙켈이라는 구약학자가 1-25장의 운문은 예레미야가 직접 한 말(이른바 A 자료)이고 26-52장의 산문은 그의 제자이며 서기(scribe)였던 바룩이 쓴 예레미야의 전기자료(B 자료)와 예레미야서를 편집한 신명기사가의 기록(C 자료)이라고 구분한 이래 오랫동안 그의 자료설이 학계의 지지를 받아왔다. 하지만 잘 읽어보면 운문 내에도 일정한 통일성을 찾아보기 힘들고 산문의 경우에도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가 번갈아 등장할 뿐 아니라 서술이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도 않기 때문에 예레미야서는 해석하기가 매우 어려운 책으로 ‘악명’이 높다. 근래에는 예레미야서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주제와 구조를 갖고 있는 통일된 이야기로 읽으려는 경향이 점차 힘을 얻고 있지만 예레미야서 전체를 어떻게 읽고 해석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뚜렷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런 예레미야서를 한 절 한 절 읽어가면서 꼼꼼하게 해석을 가한 저자의 노력에 경탄하면서 이 책을 읽었다. 이 작업은 예레미야서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도 하기 힘든 일임을 잘 알기에 더욱 경탄해 마지않았다. 저자는 맑고 밝은 눈으로 본문을 꼼꼼히 읽을 뿐 아니라 해당 구절과 연관이 있는 문학과 인문학 저자들의 글을 인용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이 책이 쓰였던 때 한국사회의 현실을 말씀에 비춰보면서 진정한 예레미야서의 독자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어떤 선택을 어떻게 내리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다. 이런 성격의 성서해설서는 저자 자신이 본문을 깊이 읽을 뿐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특정한 사회 안에서 신앙인으로서 올바르게 살고자 치열하게 고민하고 고뇌하며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성찰하며 살지 않으면 쓰일 수 없는 책임에 분명하다.



예레미야서는 오래 작업 중인 내 논문의 텍스트이기도 하다. 특별히 26-29장은 내 논문이 다루는 주요 본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서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에 대한 본문인 23장과 26-29장을 다룬 부분을 집중해서 읽었다. 저자는 이 어려운 본문을 술술 읽히도록 쉽게 풀어놓았다. ‘메시지’ 부분에서는 다양한 예를 들어가면서 오늘날 참 예언자의 메시지는 어떤 것이며 수많은 사람들을 현혹하는 거짓 예언자의 메시지는 어떤 것인지를 흥미롭게 서술했다. 이 책에서 이 부분을 가장 매력적으로 읽은 까닭은 비단 내 논문의 주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끊임없이 고뇌하고 때로는 하나님에게 속았다고까지 탄식했던 예레미야를 가장 괴롭혔던 게 무엇이었을지 생각해본다. 자기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이 좀처럼 실현되지 않아서? 백성들이 자기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아서? 왕을 비롯한 권력자들과 예언자들에게서 목숨을 위협받았을 정도로 정치적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물론 그는 이런 것 때문에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가장 괴롭힌 사실은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열심히 전해도 결국 백성들은 회개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결국 유다는 바빌론에 의해 멸망당하리라는 걸 예레미야는 알고 있었기에, 그래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그의 메시지는 ‘실패한’ 선언이 될 것이란 사실이 그를 괴롭혔으리란 얘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너 세대 후에는, 또는 70년이 경과한 후에는 하나님께서 포로로 잡혀간 이들을 돌아오게 하시고 다시금 새롭게 시작하게 만들어 주시리라는 희망이 그로 하여금 ‘실패한’ 메시지를 감수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는 자기 메시지가 ‘실패’하리라는 사실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나는 이 글을 박근혜의 탄핵 여부를 결정하는 헌법재판소의 심의가 끝나고 인용과 기각 여부를 결정하는 평결에 들어간 시점에 썼다. 예레미야서의 메시지에 비추어보면 탄핵이 인용되더라도 그것은 끝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겨레의 ‘포로시기’가 끝나감을 보여주는 징조일 뿐이다. 새로운 시작을 이번엔 실수 없이 하려면 지금부터 2,500년 전에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신 메시지를 오늘날 어떻게 새롭게 되살려 낼 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런 고민에 대한 하나의 대답을 얻는데 이 책이 큰 도움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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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 사로잡힌 자의 운명



말씀 기근의 시절에 “말씀에 사로잡힌 자의 운명”은 어떠할까? 글을 읽는 내내 마치 같은 이의 모습을 보듯 예레미야와 저자가 겹쳐 다가왔다. 얼굴을 직접 대면하고 알게 된 지 수년, 김기석 목사님은 자꾸 여위어만 간다. 혹 어디 아프신 건 아닌가, 염려하여 여쭈려했는데, 이 글을 읽다보니 알 것도 같다. “아이고, 배야. 창자가 뒤틀려서 견딜 수 없구나. 아이고, 가슴이야. 심장이 몹시 뛰어서, 잠시도 있을 수가 없구나!” 하나님을 잊은 시절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시각으로 세상을, 사람을 바라보자니 어찌 고통이 없을까.


그의 언어들은 예레미야의 저 처절한 표현만큼 직설적이지 않지만, 아니 오히려 너무나 아름답고 따듯하고 부드러워 읽는 이가 얼른 그 고통을 즉각적으로 느끼지 못하지만, 실은 모두가 다 신음 소리이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의 말처럼 “하늘의 눈으로 인간의 역사를 주석하는 자”가 예언자라면, 목사요 신앙인으로 하늘의 눈을 가진 그가 이 시절을 지내며 끙끙 앓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닌가. 실은 하나님을 알고 믿는 모든 신앙인은 예언자여야 하리라.



우리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하고 듣는 것을 듣지 못한 채, 하나님 없는 반생명의 질서를 지어놓고 ‘문명’이라 자족하는 이들과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는데 어찌 앓지 않으랴. 실존적인 위험을 당할 수밖에 없는 불행한 운명의 사람들, 그러나 예수는 예언자적 삶을 선택하는 이들을 복되다 했다. makarios! 존재로 복된 이들, 이들의 존재함은 오늘 이 땅에서 “뿌리 뽑힌 이들에게 샬롬의 매개”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기석 목사님은 복되다. 그의 글을 읽는 사람들도 복되다.


김기석 목사님의 글은 여러 면에서 ‘넘나듦’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수천 년 전 예레미야의 삶의 자리와 21세기 우리가 사는 공간이 타임머신을 타고 이동하듯 순식간에 넘나들며 하나가 된다. 성서 텍스트와 문학, 사회학, 인문학 텍스트 사이에서도 스스럼없이 흐르는 듯 연결된 넘나듦이 있다. 동양과 서양, 고전과 현대 문헌 사이에서도 그러하다.


그는 우리말을 가장 아름답고 적절하게 길어 올리는 작가이기도 하다. 김 목사님만의 풍부하고 생생한 묘사로 살아난 글귀들을 읽으며 독자들은 예레미야와 함께 환상을 보고, 끌려가고, 묶이고, 갇히고,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오를 거다. 태어난 날을 저주할 만큼의 깊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다시 일어서서 하나님의 비전을 전할 힘을 함께 얻을 거다. 지나가는 나그네의 옷을 벗긴 것은 강한 북풍이 아니라 따듯한 해님이었듯이, 김기석 목사님의 언어들은 포근하지만 우리의 비양심과 욕망의 껍질을 스르륵 벗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의 예레미야’를 읽으며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 ‘이드거니’(시간이 좀 걸리면서 분량이 좀 많게), ‘지며리’(차분하게, 꾸준히) 하는 법을 배우리라. 자카리아 무함마드의 우화처럼, 그리스도인은 생존을 위해 당나귀 울음을 울다 건초더미를 받는 “열 번째 날의 호랑이”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니겠나.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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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파토스


예레미야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부서지고 상한 마음, 분노와 실망, 쓰러지고 넘어지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좌절감과 이스라엘의 회개에 강렬한 열망이 오케스트라처럼 조율되는 책이다.




김기석 목사의 ‘예레미야 산책’은 당신의 신부이자 언약백성 이스라엘의 배반과 변심에 당혹해하시는 하나님의 상처 입은 내면을 탐조하는 데 주력한다. 이 책은 전통적인 주석이나 강해서 형식을 취하지는 않았으나 모든 장들이 예레미야서의 핵심 메시지로 독자들을 이끌어가며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하도록 도와준다. 주제별 본문 강해는 본문의 의미를 규명하는 데 주력하고, 각 단원의 마지막에 배치된 17개의 메시지는 예레미야서 본문에 내장된 하나님의 신적 복합 감정인 파토스를 더욱 현실성 있게 공감하도록 도와준다. 메시지는 오늘 21세기 독자들의 삶의 자리에 반향을 일으키는 예레미야의 육성을 재생시키려고 한다.


저자는 예레미야서의 각장의 대지와 핵심을 잘 드러내면서도 인문학적 독서에 단련된 독자들에게는 한층 더 의미 깊은 강해를 시도했다. 시, 소설, 영화, 역사, 철학 등 저자가 독서와 삶의 경험을 통해 길어 올린 통찰들과 성찰의 편린들은 예레미야서의 본문을 더욱 실감나게 복구하는 데 각주나 부록처럼 제공한다. 이 부분은 김기석 목사의 성경강해 만이 누리는 독서의 기쁨을 준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 아내, 그리고 백성에게 배반당하고 외면당하면서도 포기할 줄 모르는 신적 집요성과 견고성으로 육화된다는 점을 가슴 깊이 깨닫게 해준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왜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선물로 주셨는지 하나님의 내적 논리를 터득하게 될 것이다. 


김회권/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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