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파토스


예레미야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부서지고 상한 마음, 분노와 실망, 쓰러지고 넘어지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좌절감과 이스라엘의 회개에 강렬한 열망이 오케스트라처럼 조율되는 책이다.




김기석 목사의 ‘예레미야 산책’은 당신의 신부이자 언약백성 이스라엘의 배반과 변심에 당혹해하시는 하나님의 상처 입은 내면을 탐조하는 데 주력한다. 이 책은 전통적인 주석이나 강해서 형식을 취하지는 않았으나 모든 장들이 예레미야서의 핵심 메시지로 독자들을 이끌어가며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하도록 도와준다. 주제별 본문 강해는 본문의 의미를 규명하는 데 주력하고, 각 단원의 마지막에 배치된 17개의 메시지는 예레미야서 본문에 내장된 하나님의 신적 복합 감정인 파토스를 더욱 현실성 있게 공감하도록 도와준다. 메시지는 오늘 21세기 독자들의 삶의 자리에 반향을 일으키는 예레미야의 육성을 재생시키려고 한다.


저자는 예레미야서의 각장의 대지와 핵심을 잘 드러내면서도 인문학적 독서에 단련된 독자들에게는 한층 더 의미 깊은 강해를 시도했다. 시, 소설, 영화, 역사, 철학 등 저자가 독서와 삶의 경험을 통해 길어 올린 통찰들과 성찰의 편린들은 예레미야서의 본문을 더욱 실감나게 복구하는 데 각주나 부록처럼 제공한다. 이 부분은 김기석 목사의 성경강해 만이 누리는 독서의 기쁨을 준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 아내, 그리고 백성에게 배반당하고 외면당하면서도 포기할 줄 모르는 신적 집요성과 견고성으로 육화된다는 점을 가슴 깊이 깨닫게 해준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왜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선물로 주셨는지 하나님의 내적 논리를 터득하게 될 것이다. 


김회권/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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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의 《아! 욥》을 읽고

 

 

김기석 목사님(이하 김 목사)이 최근에(2016년 12월10일) 귀한 책을 꽃자리 출판사에서 내셨다. 몇 달 전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를 통한 잔잔한 감동이 채 가시기 전에 다시 이 책을 받아드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제목은 《아! 욥》이고 ‘욥기 산책’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부제는 마음에 안 든다. 욥기는 산책하면서 읽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원제가 욥기 읽기에 딱 어울린다. 욥기 앞에서 ‘아!’ 이외에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소리는 없으니 말이다. 이 ‘아!’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깊은 깨달음이요, 다른 하나는 깊은 탄식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여기에 덧붙여도 좋으리라. 나는 김 목사의 책을 읽으면서 바로 이 ‘아!’가 주는 충격과 기쁨과 아득함을 다시 한 번 더 절감했다. 저자와 출판사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성경 교사로서 목사에게 욥기는 시지푸스의 바위와 같다. 감당할 수 없는 짐이며, 어쩔 수 없이 감당한다 해도 청중들이 원하는 시원한 답을 찾기도 어렵다. 목사가 놓인 딜레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할 목사의 운명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없다는 불가능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포해야 한다는 당위 사이에 끼어 있다는 바르트의 진술도 목사의 이런 영적 딜레마를 가리킨다. 김 목사도 욥기를 해설하면서 그걸 절감하고 있다.

 

욥의 심정을 이렇게 전한다. 이게 바로 김 목사 자신의 마음일 것이다. ‘말의 부질없음을 이미 절감한 터이지만 다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413쪽).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욥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연습을 해보고 싶’(10쪽)다는 것이다. 그 눈은 세상의 고통을 향해 열린 것이다. 김 목사에게 ‘욥은 그런 이들 곁에 지금도 머물고 있’(424쪽)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에 김 목사는 저 고통의 나락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성경 교사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다. 마지막 단락에서 시몬느 베이유의 말을 인용하여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사랑할 것이라곤 없는 이 어둠 속에서’, 그리고 ‘텅 빈 가운데서도 영혼은 계속 사랑하거나 적어도 사랑하기를 원해야 한다.’(424쪽).

 

 

나는 김 목사의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나사렛 예수가 생각났다. 구약에서 욥이 가장 처참한 인생을 경험한 인물이라면 신약에서는 예수가 바로 그다. 하나님이 정의롭고 사랑과 능력이 무한하지만 인간에게 대재앙은 부단히 발생한다. 사람을 구별하지 않는다. 착한 사람이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불행을 피할 수 없다. 그게 세상 이치다. 오죽했으면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고 했겠는가. 나사렛 예수는 욥보다 더 큰 저주를 받은 자다. 욥은 어느 정도 나이라도 먹었고, 행복한 시절을 보낸 적이 있지만 예수는 결혼도 하지 않은 삼십대 젊은 나이에 로마 형법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했다.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자다. 마태의 수난전승에 따르면 예수는 십자가 처형 순간에 하나님으로부터 유기를 경험한 뒤에 크게 단발마의 소리를 지르면서 숨을 거두었다(마태복음 27:46, 50). 바울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했다(고린도전서 1:23).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이를 그리스도로 믿는다.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 무기력한 전능자! 이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나. 그렇다. 무죄한 자의 고난을 다루는 신정론(神正論)은 우리에게 영원한 아포리아다. 이걸 생각할 때마다 숨이 막힌다.

 

김 목사는 욥기가 가리키고 이 현실 앞에서 절망하거나 신앙적인 나르시시즘 속으로 도피하거나 신학적으로 계몽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무죄한 이의 고통을 직시하고 그들과 연대하고, 그 고통 속으로 들어가자고 독자들에게 호소한다. 이 시대의 욥기인 ‘세월호 참사’를 여러 번 반복해서 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도는 다를지언정 지금 이 땅에도 수많은 욥들이 있습니다. 그저 있다기보다는 발생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그러하고 직장에서 쫓겨난 이들이 그러합니다’(423쪽). 기복주의와 승리주의 신앙이 여전히 득세하는 오늘 한국교회에 김 목사의 《아! 욥》은 죽비다. 일독을 권한다.

 

정용섭/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샘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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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산책길에서 만난 길벗들

 

 

초대받은 사람들

 

김기석을 따라 같이 욥기산책을 하다보면 동서고금의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 중에는 욥기 전문가는 별로 없는데, 욥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이들도 수두룩하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이들이 한 때 어디선가 한 말이 독자들의 욥기 이해에 얼마나 큰 빛을 비추는 지를 꾸준히 밝히면서, 그들을 일일이 소개한다. 이 책을 다 읽는 동안 독자들은 적어도 90여명 이상의 길벗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초청을 받은 이들 중에는 단연 시인들이 많다(다니카와 슌타로, 단테,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소동파, 엘리어트, 파블로 네루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호메로스, 횔덜린, 구상, 기형도, 김승희, 도종환, 박두진, 윤동주, 윤석산, 이문재, 이정록, 정진규, 정현종, 정호승, 한하운, 황동규).

 

그 다음이 철학자들(괴테, 노자, 마사 너스바움, 막스 피카르트, 맹자, 비트겐슈타인,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에밀 시오랑, 에픽테투스, 임마누엘 칸트, 자끄 데리다, 장자, 칼 야스스, 토머스 홉스, 하이데커)이고, 극작가나 소설가들(니코스 카잔차키스, 로버트 자레츠키, 밀란 쿤데라, 비르질 게오르규, 사무엘 베케트, 알베르 카뮈, 엔도 슈샤쿠, 외젠 이오네스코, 제임스 힐턴, 카프카, 크리스토퍼 에릭 히친스)이 그 뒤를 잇는다. 또한 인문학 교수들(강상중, 김흥호, 신영복, 카렌 다위샤), 실학자(박지원), 신학자들(김민웅, 마틴 루터, 송천성, 수스따보 구티에레츠, 스티븐 보우머 프레디거,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 어거스틴, 월터 브루그만, 칼빈, 폴 틸리히), 작곡가들(헨델, 비발디), 화가들(마크 로스코, 미켈란제로, 조르주 피에르 쇠라), 과학자들(미다스 데커스, 제레드 다이아몬드, 리처드 도킨스), 문명 비평가들(루이스 멈퍼드, 테리 이글턴, 함석헌), 정치가들(넬슨 만델라, 바츨라프 하벨), 종교지도자(데스몬드 투투 대주교), 작가들(로버트 자레츠키, 에릭 스프링스티드, 엘리 위젤, 크리스토퍼 에릭 히친스, 파커 파머), 의사(올리버 색스), 유대문학자(피쉬베인) 등도 저자의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 신화, 주역, 농가월령가, 회심곡에 이르기까지, 저자 자신이 욥기 이해의 여정에서 만난 지적 유산의 전승들이 모두 언급되며, 인용되고 있다.

 

 

 

 

김기석의 욥기산책에 참여하는 독자에게 이토록 많은 인물과 전승들은 어떤 구실을 할까? 독자들의 욥기 이해를 돕는다? 아니다! 욥기의 세계를, 자신의 삶의 경험과는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응시하거나, 그것도 혼자서 흥미삼아 관광을 하기보다는,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의 축적을 가지고, 여러 사람의 경험을 함께 나누고, 그들과 함께 사귀면서, 욥기의 세계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독자들이 욥과 그의 네 친구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논쟁 같은 대화에 한 번 끼어들어 보기도 하고,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도 듣지만 말고, 하나님에게도 사탄에게도 말을 걸어 독자 자신의 견해를 밝혀보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 사이에 왜 서로 다른 견해들이 생기는지도 조금은 심층적으로 파헤쳐보고, 우주가 인간 중심으로 돌아가는 곳이 아니라 온갖 피조물이 함께 사는 곳임을, 창조주 하나님은 단순히 사람과만 교제하시는 인격적인 대상으로 제한할 수 없는 분임을, 그리고 욥을 둘러싼 세계는 지금도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이고 우리의 삶일 수도 있음을, 학제간學制間의 여러 인물을 만나 듣고 생각해 보기도 하면서…. 김기석이 깔아놓은 이 마당에서 놀이의 주인공이 되어보기도 할 일이다.

 

구태여 현학적인 본문상호관련성intertextuality이네 다중본문융합多衆本文融合이네, 이 따위 너스레는 떨지 않겠다. 저자가 독자에게 소개하는 길벗들 중 몇몇은 욥에 관해서 주목할 만한 발언을 한 이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독서에 초대받은 대다수는 각자 자기 분야에서는 전문가들이지만, 욥이나 욥기에 관한 한 우리 일반 독자처럼 주인공 욥이나, 그의 이름으로 된 욥기란 책에는 별 관심이 없는 이들이다. 다만 우리의 저자 김기석은 그들을 욥의 세계로 끌어 들이고 그의 독자들과 만나게 중재할 뿐이다. 그들이 필연적으로 욥기 산책에 함께할 까닭은 없다. 저자가 그들을 초대하고 그들의 글을 인용하는 것도 저자의 욥기 이해나 어떤 주장에 대해 무슨 증거를 가져다 대려고 그들을 증인들로 소환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욥기산책 길에서 욥 이야기를 같이 하자고 초청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저자를 따라 산책을 하다보면, 김기석의 책에 언급된 그 90여 명의 동서양의 인물들은 마치 욥기 이해를 위해 뭉친 저자들과 독자들의 컨소시엄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모두가 제각기 자기 위치에서 자기 재능을 따라 공동 작업을 한 것 같은 결실을 얻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김기석의 ‘욥기 산책’으로 나온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바쁠 게 없는 초대 손님들

 

이 책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도 나에게 와서 너무 지체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 책의 출판이 좀 늦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죄송스러움이 있다. 그러나 결코 리뷰 필자인 나 자신의 잘못이란 누명을 혼자 뒤집어쓰고 싶지는 않다. 까닭인즉, 김기석의 소개로 만난 이들과의 개인적 대화가 너무 길어질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이 흥미 있는 길손들과도 전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나를 장시간 붙잡고 놓아주지 않은 이들이 있다. 그 중 두 사람이 카렌 다위샤와 프랜시스 톰슨이다. 아마 독자에 따라서는 이들 말고 다른 길벗들과의 특별한 만남이 있을 것인데, 아마도 그들과 함께 욥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새로운 체험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특별히 마주하며 오래 얘기를 나누게 만든 두 사람에 대해 얘기해 본다. 저자는 욥기 8-9장에 나오는 빌닷의 신학이 자칫하면 지금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이들의 현실을 정당화 해주는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의 사다리 윗단까지 오른 사람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에 그 자리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탈세와 권력형 뇌물 수수의 결과로 그렇게 된 것을 정당화시키는 오류를 지적하면서, 러시아 대통령 푸틴과 그의 일당 110명이 러시아 금융재산의 35%를 도적질한 것을 폭로하는 카렌 다위샤 교수의 저서 《푸틴의 클렙토크라시(도적지배체제)》를 소개한다. 카렌 다위샤의 이 저서는 지난 두 달(2016년 10월과 11월)에 터진 청와대 스캔들의 러시아판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범죄권력집단의 범죄 실태와 그 구성원들의 역할이 다 공개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크렘린과 청와대가 같은 시기에 같은 연배의 주인공들이 유사한 범죄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 때문에 그와의 대화는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또 한 사람은 <하늘나라의 사냥개>라는 시를 쓴 노숙자 출신 시인 프랜시스 톰슨인데, 그의 시는 낭독하는 데만 10분 30초가 걸린다. 하나님으로부터 도피에 실패하는 그의 경험이 감동으로 다가오자 나는 그를 쉽게 놓아줄 수가 없었다. 저자 김기석은 욥이 체험하는 하나님 부재와 욥을 단련시키는 하나님의 임재 체험이 고백된 본문(욥기 23:8-12)을 설명하면서, 프랜시스 톰슨의 이 시를 부분적으로 인용한다. “나는 그분에게서 도망쳤다. 밤과 낮의 그늘 속으로,/나는 그분에게서 도망쳤다. 수많은 세월 동안을./나는 그분에게서 도망쳤다. 마음의 미로 속으로.” 그러나 끝내 이 시인은 하나님께서 “서두르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는 걸음걸이”로 시인 자신을 찾아오셨다고 고백한다. 저자는 시의 이 대목을 인용하면서, 이 시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달아나는 인간과 그를 끝없이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숨바꼭질을 장대하게 펼쳐 보여준다는 점을 밝힌다. 프랜시스 톰슨이 경험한 어둠은 사랑으로 내미신 하나님의 손 그림자였다는 것을 저자는 욥의 유사 경험과 대조시키고 있다.

 

욥기 산책길에서 잠시 벗어나 이 두 인물과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낸 것은, 이 책의 독자로서 나 개인의 일탈이었음이 분명하지만, 나는 감히 독자들에게도 확언할 수 있게 됐다. 저자가 초대한 90여 명의 손님과 함께 산책하는 동안 독자는 도중에 이 산책을 중단하고, 초대받은 이들 중 어느 누구와 외길로 빠져 들어가 또 다른 세계로 가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초대 손님을 선별한 김기석에게 욥에 대해서 더 진지하게 고민했던 바흐친, 지라르, 융, 지젝, 멜빌, 라캉, 윌리엄 블레이크 등은 왜 부르지 않았느냐고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또 다른 질문

 

「욥기」는 「잠언」과 「전도서」와 함께 구약성서에서도 지혜문학으로 구별되는 책이다. 이 세 책의 성격이 현격하게 다르다. 「잠언」은 전통적인 지혜를 수집해 놓은 책이다. 「전도서」는 꼭 잠언을 염두에 두고 그것에 저항할 목적으로 수집 편찬된 것은 아니지만, 전통적 지혜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독자들은 자신들의 인생체험에 따라 이 두 서로 다른 지혜에 대해 긴장을 느끼면서도 둘 다 수용할 수 있다. 더욱이 이것이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의 세 종교의 경전의 일부가 되면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지니게 되었고 여기에서 독자들은 믿음과 실천의 규범을 찾는다. 그러나 욥기는 좀 복잡하다. 이 책이 경전 안에 들어오면서 욥기를 경전으로 읽는 독자는 혼란을 겪게 된다. 이것은 욥기를 경전으로 대하지 않고 한 종류의 문학작품으로만 대할 수 있는 독자들과는 또 다른 체험이다.

 

기독교의 경전 「성경전서」(66권)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어 있다는 것이 전제된 말이기 때문에, 단순히 직접화법의 화자가 하나님이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란 것은 더 이상 재론의 여지가 없다. 특히 시편과 같은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람들의 찬양과 감사와 기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직접화법 (“하나님이/여호와께서 가라사대…”)이 없어도 「시편」을 경전으로 받아들이는 견지에서 보면 「시편」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과는 달리, 욥기는, 욥기 저자의 지문이나 편집구를 제외하고서는, 등장인물들 사이의 대화이고 논쟁이다. 등장인물로는 하나님, 사탄, 욥, 엘리바스, 빌닷, 소발, 엘리후 등이 번갈아 나온다. 각 등장인물이 화자로 나오고, 그들의 직접화법이 길게 또는 짧게 전개된다. 욥기를 읽을 때 독자들은 어떤 화법에 대해서는 누가 누구에게 언제 왜 그런 말을 하는 지를 예의주시해야 한다. 화자들의 말은 지혜전승의 인용이고 편집이고 선별된 전승에 근거한 자기주장이다. 욥기에서 화자 표시를 다 제거하고, 문맥을 다 무시해 버리고, 언급된 지혜전승만 나열해버린다면, 어떤 부분은 「잠언」 같고 어떤 부분은 「전도서」 같을 것이다. 그러나 욥기가 그런 지혜의 수집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하나님의 직접화법만 하나님의 말씀이고, 욥의 경우 좀 불손 불경한 표현이 나오더라도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욥기 1:1)로 하나님께서 친히 인정하신 자인만큼 하나님의 직접화법 다음으로 그의 말은 존중받아야 하고, 사탄의 말은 일고의 가치도 없고, 엘리바스, 빌닷, 소발, 엘리후, 이들 네 친구는 그들이 말한 것 때문에 하나님께 꾸중을 받은 것이니(욥기 42:7-8), 그들의 직접적인 말들도 실은 성경에 적혀는 있어도 “성경말씀”이라고는 볼 수 없고… 이런 식으로 재단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욥기산책의 저자가 욥기 독자에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1강의 결론 부분은 이 책만의 공헌이라고 판단된다. 이것은 위에서 밝힌 평자의 기우를 넘어서는 적극적으로 욥기를 읽는 자세이다. 그는 독자에게 네 가지를 당부한다.

 

첫째, 욥기를 읽어나갈 때 하나님 편에 서서 사태를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이 태도는 욥의 친구들의 기본적인 태도였고, 그것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꾸중을 받았기 때문이다. 짐짓 하나님 편을 드는 것 같은 전통적인 응보의 교리를 가지고는 더 이상 욥의 경우를 설명하지 못한다. 서구 신학의 틀을 가지고 세월호 사건을 해석하려할 때 그것이 작동할 수 없었던 것도 똑같은 이치다.

 

둘째, 욥기를 읽으면서 사람들이 당혹감을 느끼는 까닭이 무엇인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것은 욥의 말보다 친구들의 말이 더 은혜스럽게 들리는 경우가 잦기 때문이다. 욥의 말이라고 다 맞는 것도 아니지만, 친구들의 말이라고 다 그른 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하라고 한다. 다만, 말의 옳고 그름의 척도로 욥과 친구들의 논쟁에 접근하면 욥기의 본질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발화된 말의 내용에 집중해야 할 때도 있지만, 그 말이 발설되는 상황이나 심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부탁이다.

 

셋째, 욥기의 주제를 무고한 자의 고난과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이라고 규정해버리는 것은 다의적으로 읽을 수 있는 텍스트에 굴레를 씌우는 일임을 상기시킨다. 김기석은 욥기가 독자들에게 정답 없는 삶을 살아갈 용기가 있느냐고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한다.

 

마지막으로 김기석은, 욥을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과거의 인물로 규정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현재의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가 지금도 많은 ‘욥’들을 양산하는 체제라는 점을 주목하게 한다. 이렇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김기석의 장치가 욥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독자를 도울 것이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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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가 전하는 열두 개의 에피소드

 

사람들을 오랫동안 하느님을 알려고 애써왔다. 그래서 얼마나 알게 됐을까? 사람이 하느님에 대해서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하느님은 ‘알 수 없는 분’(the Unknowable)이란 말이 있다.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일 사람이 적지 않을 터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하느님을 알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성서(유대교에서는 ‘구약’이란 말을 쓰지 않지만)는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과 자신을 알리고자 하는 하느님이 다양한 상황에서 만난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다. 그 중에서도 창세기는 하느님과 사람이 처음으로 만난 이야기다. 처음으로 만났으니 모든 게 새로웠고 서툴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익숙해졌다.

 

하느님과 사람이 만난 이야기는 매우 역동적이다. 이야기에서 살아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하느님과 사람 모두가 역동적이고 이야기마다 둘의 성격이 다 다르다. 따라서 하느님과 사람이 만나는 이야기에서 영원한 본질을 찾거나 만고불변의 진리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얻으려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이 책은 창세기가 전하는 열두 개의 에피소드에서 하느님이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는지, 사람은 그런 하느님의 어떤 분으로 인식했는지를 살펴본다. 구약성서의 하느님은 폭력적인 전제군주 같다고 말들 한다. 정말 그럴까? 하느님은 진정 ‘갑질’하는 신일까? ‘갑질’하는 하느님을 믿었던 사람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에게 복종했을까? 이 책은 아담과 하와가, 가인과 아벨이, 노아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은 그런 하느님과 어떻게 역동적으로 만났는지를 알기 쉽고 읽기 편하게, 하지만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어떤 내용인가

 

이 책은 창세기에 전해지는 여러 에피소드 중에서 열두 개를 골라서 그것을 하느님과 다양한 사람들이 만난 이야기(narrative)로 읽고 해석한다. 그리스도교는 성서에 근거해서 교리를 세웠다고 말하지만 각각의 이야기에 전제되고 표현된 하느님 상은 많은 경우 교리의 그것과 다르다. 물론 교리의 하느님 상은 성서가 전하는 다양한 이야기에서 추출하여 고도로 추상화한 것이므로 그럴 수 있지만 거기에만 초점을 맞추면 성서 이야기가 전하는 역동적인 하느님의 모습을 놓치기 십상이다. 이 책은 창세기 설화들에서 역동적이고 살아 움직이는 하느님과 사람의 모습을 포착하여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1장 - 선악과와 갑질하는 하느님

 

에덴동산에서 하느님과 첫 사람 아담, 하와가 만난 이야기를 다룬다. 에덴에서 일어난 사건이 그리는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인지, 그리스도교 신관의 핵심인 ‘유일신’을 에덴 이야기는 어떻게 풀어내는지를 살펴본다.

 

2장 - 문명충돌? 아니, 원초적 살인의 추억!

 

가인에 의한 아벨 살해사건을 다룬다. 해석하기 어려운 요소들이 산재한 이 이야기를 유목문화와 농경문화의 충돌이라는 식으로 상투적으로 읽지 말고 달리 읽을 수 있음을 주장한다.

 

3장 - 우리 하느님이 달라졌어요!

 

노아시대의 홍수 이야기를 새롭게 읽는다. 특히 2014년 영화 <노아>와 비교해 가면서 노아가 겪었을 고뇌와 홍수 후에도 남아 있었을 트라우마를 그려보면서 노아와 하느님의 가슴 속에 몰아쳤을 풍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4장 - 흩어져! 흩어지라니까!!

 

바벨탑 이야기를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사람을 향한 하느님의 첫 명령, “생육하고 번성하려 땅에 충만하라”에 비추어 해석한다. 바벨탑 이야기가 전하는 메시지는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사람들의 교만에 대한 경고라기보다는 흩어져 땅에 충만하기를 그치고 한 곳에 정착하려는 사람들의 시도를 하느님이 좌절시킨 것으로 이해한다.

 

5장 - 아무리 그래도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니…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얘기가 어떤 의미에서 아브라함에 대한 ‘시험’이었는지,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어떻게 응답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힌다.

 

6장 - 자신을 묶은 야훼, 너무나 약한 아브라함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언약(covenant) 맺는 이야기를 다룬다. 언약 맺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로 인해 하느님과 아브라함(및 그의 후손들)은 어떤 관계에 들어가는지를 서술한다.

 

7장 - 이삭의 트라우마

 

이삭 이야기를 다룬다. 이삭은 이스라엘의 다른 조상들이 비해서 소홀히 취급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장은 모리야산 사건(아브라함이 그를 하느님에게 번제로 바치려던 사건) 이후에 그가 겪었을 영혼의 상처를 ‘생존의 수수께끼’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이해한다.

 

8장 - 나도 그랬으면 좋겠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도망치는 길에 베델에서 천사가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환상을 본 얘기를 다룬다. 이 이야기가 전체 야곱 전승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신약성서 요한복음은 이 에피소드를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살펴본다.

 

9장 - 강간당했다고 몰살해?

10장 - 다말, 몸으로 울었다!

 

9장과 10장은 곤혹스런 두 이야기, 곧 누이동생이 이방인에게 강간당했다고 오빠들이 성읍 남자들을 몰살한 이야기와 며느리가 창녀로 변장해서 시아버지와 동침해서 아들을 낳은 이야기를 다룬다. 구약성서가 숨기고 싶었을 얘기를 왜 전했는지를 따져본다.

 

11장 - 요셉, 철없는 어린아이인가 지혜의 화신인가?

12장 - 미시즈(Mrs) 보디발, 남자에게 들이댄 유일한 여자

13장 - 나 찾아봐라!

 

11장에서 13장까지는 요셉 이야기를 다룬다. 단일 설화로는 구약성서에서 가장 긴 이 이야기는 어떤 문화적, 종교적 분위기를 전제하고 있는지, 왜 이 이야기는 하느님을 말하는 방식이 여타 이야기들과 다른지 따져본다.

 

부록 - 성서는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부록은 동성애와 성소수자에 대해서 성서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주제로 한 설교문이다. 최근 교회 안에서 첨예한 대립을 일으키는 이 문제를 성서는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어떤 점을 강조해서 말하고 어떤 점에 대해서는 침묵하는지, 동성애에 관한 계명의 존재이유와 목적은 무엇인지를 해당구절들을 꼼꼼하게 읽어가면서 풀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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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왕조사회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갑질의 향연만 반복된다. 갑질…, 결국 그건 ‘왕질’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지적하는 저자는 우리 사회의 왕조적인 모습을 이렇게 풀어간다. “우리의 공화정 도입이 시민들의 주체적이고 자발적 행위와 자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순식간에 이식되었다는 사실이 우리 사회의 특징을 잘 설명해 주기도 한다. 서구 사회가 프랑스 혁명(1789~1794)이라는, 시민의 힘으로 왕정을 종식시킨, 역사적 경험을 소유한 것에 반해, 우리는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강대국이 주도한 세계 체제 재편 과정의 하나로 타력에 의해 공화제가 시작되었을 뿐이다. 그러니 여전히 우리 사회 대부분의 마인드와 에토스는 임금을 모시던 때의 역사적 경험과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왕조 사회의 어르신 이데올로기’와 세월호 참사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저자는 “개신교는 ‘자영업’에 가깝다. 한국 개신교회는 사회적으로 공적 조직과 연 닿아있지 않다. 그래서 운영에 관한 일체를 신자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전형적인 자영업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천주교의 경우는 전형적인 외국계 지사의 모습을 보인다. 천주교는 개신교처럼 자영업 마인드가 아니다. 뒤에 바티칸이라는 든든한 언덕이 있기 때문일까? 국내에서 영업이 좀 시원찮아도 자금력 두둑한 본사 덕분에 몇 년은 거뜬히 버틸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인지 한국 천주교의 경우 신자들에 대한 독려 행위가 개신교보다는 약하다. 반면 불교는 전형적인 공기업 마인드이다. 업무의 효율이나 생산성에 목매지 않아도 꼬박꼬박 때만 되면 계좌에 입금되는 월급의 유혹은 달콤하다”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종교의 상황은 그 종교가 기득권화되어 있고 그걸 지켜내고 확대하는 것에 일차적 관심을 쏟아왔기 때문이며정작 해야 할 종교 수련의 길보다는 손쉬운(?) 세속적 영향력 확대의 길을 택하게 되고, 힘(權力)으로, 돈으로, 수(數)의 힘으로!”라는 슬로건으로 밀어 붙인다.

 

이러한 종교에서 현실에 대한 냉철한 비판과 성찰, 자기 자신에 대한 엄격함, 대중의 욕망에 대해 질타한다. 결국 종교는 기득권을 움켜쥐는 과정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종교의 사망선고가 내려진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 곳곳에 스며있는 유교의 흔적을 살피면서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곤 한다는 저자는 그때마다 서슴없이 “유교!”라고 답한다. 결혼을 고리로 이어진 가족주의에 기초한 유교란 종교의 가치관은 지금도 강력하다. 명절 때마다, 집안의 대소사 때마다 발길을 원적(原籍)으로 돌리게 하는 가장 강력한 에토스는 불교도, 그리스도교도 아닌 바로 유교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교는 이를 사회적 제도 속에 깊이 각인시켜 놓았다. 그뿐인가? 설날이나 추석 같은 큰 명절에 집안 식구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며 가문의 영생을 축하하는 의례, 그것이 바로 제사이다. 이러한 유교의 에토스는 지금도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매우 강력한 힘으로 작동되고 있다. 그러니 유교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라고 할 수 밖에.

 

이에 덧붙여 한국종교가 민족주의와 어떻게 결부되어있는지, 각 종교의 경전읽기는 연애편지를 읽는 것과 유사한 성질의 것인지, 역사 속에서 종교는 어떤 행태로 파렴치하게 친일 행각을 벌였는지, 우리나라 최대 종교는 ‘수능교’라는 우스갯말까지 나올정도로 왜 ‘공부는 구도행위’가 되었는지 등등을 풀어가면서 보통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나쁜 종교’이고 ‘좋은 종교’일까? 이 물음에 대해 보통 사람이 생활세계에서 대하는 종교가 어떤가에 대해서 재밌는 에피소드를 통해 소개한다.

 

“야 니 어떤 기 참말로 좋은 종굔지 아나?”
“뭔데?”
“통일교 아이가!”
“우째서?”
“통일교는 교인이 되믄 장가보내준다 아이가!”
“참말로?”
“하모. 그라고 장가가믄 집도 준다 카더라!”
“집도??!! …야야, 그 참말로 좋은 종교네.”


“그럼 개신교는?”
“음… 그건 쪼매 애매하다. 교회 가믄 장가는 보내주는데… 뭘 쫌 마
이 내야 된다 카더라~”
“뭐를?”
“헌금! 헌금내야 된다 아이가! 교회는 기본으로 드는 돈이 장난이 아
니라 카더라.”
“그래도 장가는 보내주나?”
“하모 그래도 장가는 보내주니까 괜찮다 아이가!”

“집은?”
“… 집은 없다드라.”


“천주교는?”
“그거도 개신교랑 쪼매 비슷하다 카더라.”
“근데 문제는 신부하고 수녀는 결혼을 안 한다 안카나~”
“내는 그기 쫌 맘에 걸린다.”
“결혼을 안해보믄 사람 속을 잘 모른다 아이가.”


“그래 그람 다른 종교는 없나?”
“느그 대순진리회는 가지 마래이~”
“와?”
“거기는 장가도 엄꼬, 집도 엄꼬, 대신 들어갈 때부터 돈만 진탕 낸다
아이가!”
“참말이가?”
“하모!”
“음… 그람 거는 안 되겠네!”

한국 사회는 왕조사회다

 

5년제 비정규직 공무원에 지나지 않는 대통령이 제왕적 군주가 되어 백성 위에 군림하고, 그의 임명을 받은 고위직 공무원들은 공복이 아니라 지배자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이런 심정적 정황 가운데 정작 주권자요 납세자인 시민은 계몽적 군주만 손꼽아 기다리는 왕조의 백성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96쪽)

 

왕조 사회 속 갑질 문화

 

우리 사회 곳곳에서 갑질의 향연만 반복된다. 갑질…, 결국 그건 ‘왕질’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여전히 사회적 에토스가 왕조적 마인드에 묶여 있다 보니 갑의 언사는 임금의 그것이 되어 어명처럼 서민의 심부를 찔러댄다. 이런 현상은 세월호 참사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스스로 갑이라 생각하는 이들은 이 역사적 사건을 단순 교통사고로 폄하하면서, 간단히 돈으로 해결하려고만 한다. 갑의 온정으로 두둑이 챙겨 줄 테니 이쯤에서 목소리를 낮추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투의 훈계이다.(104, 106쪽)

 

왕조 사회의 어르신 이데올로기

 

한국 사회는 여전히 ‘왕조국가’적 성격이 강하다. 교종과 추기경에 대해 보여준 한국 사회의 반응은 왕의 즉위를 환영하거나, 혹은 왕의 승하를 슬퍼하는 왕조 사회 신민의 모습과 매우 닮아있다.(112쪽)

 

페스트, 메르스, 그리고 희생양

 

중세인들이 페스트의 공포를 유대인 죽이기로 상쇄하려 했던 것처럼, 우리 사회도 메르스가 가져온 불안을 누군가를 공격함으로 무마시키려 했다. 그리고 대부분 그런 공격의 대상들은 사회의 약자들이다. 안 그래도 소외되고, 배척받으며, 그 때문에 고통 속에 신음하는 이들에게 사회의 다수는 날카로운 침과 바늘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21세기에도 이런 모습의 폭력을 만나니, 중세 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희생양 찾기는 변함이 없어 보인다. 감염병의 문제는 의학과 그에 기반을 둔 정책과 시스템으로 풀어야 한다. 이를 신앙으로 섣불리 ‘해석’하려 드는 것 자체가 우리가 넘어서야 할 또 다른 감염병일 수 있다.(117쪽)

 

메르스가 던지는 메시지

 

병원 쇼핑이라는 독특한 한국의 의료 환경이 메르스를 괴물로 만들었다. 헌데 어디 우리 사회가 병원만 쇼핑하던가? 종교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반성 없고, 사색 없는, 그래서 신학(교학)마저 영혼이 빠져버린 한국의 종교계는 이미 오래전에 메르스에 점령당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니 병원 쇼핑 못지않게, 종교 쇼핑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주제라 하겠다.(122쪽)

 

공부는 구도행위

 

우리는 공부를 종교적 구도행위의 하나로 각인하며 살아왔다. 이미 오래도록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우리 집안 누군가가 똘똘한 머리를 지녔다면 그에게 모든 것을 몰아주는 데 전혀 거리낌 없는 에토스 속에 살아왔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생을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유교 사회에서 공부는 일종의 구도 행위이다.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그가 공부로 성공해야 가문의 구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과거’라는 국가시험을 통해 현실이 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한국 사회는 공부에 대한 공동체적 신앙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제 공부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개인의 신앙적 책무가 된다. 왜? 그래야 영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은 한국에서는 신앙의 문제이다. 매번 입시철만 되면 이 땅위의 모든 종교를 대동단결하는 힘이 신앙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우리나라 최대 종교는 ‘수능교’라는 우스갯말까지 나올 지경이다.(157, 159쪽)

 

 

한국 교회와 샤머니즘

한국 교회는 편한 마음으로 샤머니즘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도구, 혹은 희생타로 이용해 왔음을 시인해야 할 것이다. 개화되고, 문명화되고, 심지어 정보화에도 앞서가고 있는 한국 사회에 오히려 샤머니즘이 더욱 성행하고 있다는 이 엄연한 현실. 이것이 우리 사회와 한국 교회에 웅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문제 앞에 오히려 한국의 샤머니즘은 한국 교회로서는 배척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타산지석의 대상으로 삼아야할 것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 교회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샤머니즘이 보이는 부정적 장면이 아니라 긍정의 그림들이다. 그것들에 대한 진지한 접근과 이해의 자세가 문제를 푸는 고갱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201-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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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흙내음으로 태어난 ‘칠칠한’ 옛말

 

 

‘속담(俗談)’은 “예부터 민간에 내려오는 쉬운 격언이나 잠언”이라고 합니다. ‘민간(民間)’은 “여느 사람들 사이”를 가리키고, ‘격언(格言)’은 “겪은 이야기”를 가리키며, ‘잠언(箴言)’은 “가르치는 말”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런데 곰곰이 살펴보면 옛날부터 여느 사람들 사이에 내려오던 말이란 ‘시골에서 살며 흙을 만지는 일을 하는 동안 내려오던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속담 = 시골말’인 셈이요, ‘시골 이야기’인 셈입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진 말이요,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겪은 이야기예요.

 

“칠칠하지 못해서 야단을 맞았다면 칠칠하면 되었을 텐데, 왜 우리는 칠칠하지 못하다는 야단만 맞았을 뿐 칠칠함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했던 것일까”(31쪽).

 

“그가 돌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 좀 보세요. 바위옷이 이쁘잖아요? 지금은 말랐지만 물을 주면 다시 살아날지도 몰라요.” ‘바위옷’이라고 했다”(58쪽).

 

시골마을에서 목사로 일하는 한희철 님이 쓴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를 읽습니다. 한희철 님은 ‘속담’이라는 말보다는 ‘옛글’이라는 말을 씁니다. 197가지 옛글을 놓고 오늘날 삶을 돌아보는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시골에서 살며 손수 시골일(흙일)을 하기도 하면서 옛글(속담)을 되새긴다고 합니다. 시골에서 사는 사람들한테 ‘살아가는 뜻’을 교회에서 들려주려고 옛글을 되읽는다고 해요.

 

“한숨도 버릇되는 것이라면 절망도 원망도 슬픔도 버릇 아닐까? 웃음도 희망도 사랑도 버릇일지 모른다. 타고난 성품으로서가 아니라 순간순간 내가 가진 마음의 결과가 켜켜 쌓여 만든 결과일 것이다”(75쪽).

 

“어느새 우리들의 삶은 농사와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비가 올 때마다 아름다운 우리말 몇 개쯤은 떠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84쪽).

 

‘시루에 물은 채워도 사람의 욕심은 못 채운다’라든지 ‘늘 쓰는 가래는 녹이 슬지 않는다’라든지 ‘호미 빌려간 놈이 감자 캐 간다’ 같은 말은 모두 시골말입니다. ‘썩은 감자 하나가 섬 감자를 썩힌다’나 ‘윗논에 물이 있으면 아랫논도 물 걱정 않는다’ 같은 말은 모두 시골말이에요. 시골에서 시골일을 하는 동안 시골사람이 스스로 겪은 삶을 짤막한 말로 남겨서 흘러온 이야기예요.

 

 

오늘 우리는 흔히 ‘속담·격언·잠언’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를 곰곰이 따진다면 ‘시골말’이나 ‘시골슬기’나 ‘흙말’이나 ‘흙슬기’ 같은 새 이름을 붙여 볼 만하구나 싶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말은 시골에서 태어났고, 흙에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속(俗)’이나 ‘옛’이라는 이름하고는 사뭇 다른 자리에서 흐르는 말이지 싶어요.

 

시골에서 살며 시골일을 하는 시골사람은 ‘논밭’이라 말합니다. ‘콩’하고 ‘팥’을 말합니다. ‘호미·낫·쟁기’를 말합니다. ‘봄·여름·가을·겨울’을 말합니다. ‘씨앗·가을걷이·설·한가위’를 말합니다. ‘도랑·고랑’을 말합니다. ‘날씨’를 말하고 ‘바람·하늘·비·눈’을 말합니다. 가만히 살피면, 이런 시골말을 놓고 도시에서는 으레 ‘한자로 옷을 입힌 다른 말’을 쓰기 마련입니다. 흙을 만지지 않는 관청 일꾼도 시골말을 잘 안 써 버릇합니다.

 

“‘돌이’와 관련된 말 중에 ‘돌이마음’이란 것이 있다. “사심을 돌려 바르고 착한 길로 들어서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마음을 돌려먹는다” 해서 ‘돌이마음’이라 하지 않았을까 싶다”(136쪽)

 

‘옹달’이란 말이 들어가는 낱말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옹달솥’은 “작고 오목한 솥”이란 뜻이다. ‘옹달시루’란 “작고 오목한 시루”라는 뜻이요, ‘옹달우물’은 “작고 오목한 우물”이란 뜻이다(146쪽).

 

한희철 님은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라는 책을 빌어서 ‘돌이마음’이나 ‘바위옷’이나 ‘옹달’이나 ‘겉볼안’이나 ‘언구럭’이나 ‘도사리’ 같은 시골말을 새롭게 살려서 오늘날에도 넉넉히 쓸 만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흙을 가꾸면서 살림을 짓던 오래된 말마디마다 깃든 따사로운 슬기를 돌아보자고 이야기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시골이 아닌 도시에서 매우 많이 살고, 흙을 만지기보다는 흙하고 멀어진 일을 하더라도, 누구나 밥을 먹는 살림인 만큼 ‘밥이 태어난 흙자리’를 되새기는 말(슬기로운 말)을 마음에 얹어 보자고 이야기합니다.

 

“어디에 사느냐 하는 것보다도 무엇을 바라보며 사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일러주는 말이다”(291-292쪽).

 

“다 같이 듣고 있어도 어떤 마음으로 듣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귓등’으로 들을 수도 있고, ‘귀담아’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314쪽).

 

옛날부터 흔히 썼기에 ‘옛말’입니다. 옛말이라 해서 오늘날에 안 쓰는 말이 아닙니다. ‘삶(살다)·사랑·살림·사랑·슬기’ 같은 낱말은 아주 오래된 한국말인데, 이 말을 쓰면서 ‘오래된 말’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없지 싶어요. 예나 이제나 즐겁게 쓰고 새롭게 쓰기도 해요.

 

그러나 어떤 말이든 오늘 이곳에서 새롭게 쓰지 않으면 쉽게 잊히고 쉽게 사라지지 싶습니다. 이런 뜻에서 ‘옛말(어제 말)’을 되새기면서 ‘새말(오늘 말)’을 짓는 살림으로 나아가는 슬기로 북돋우지 싶습니다. 어른이 아이한테 말을 가르치는 살림도 ‘옛말(어른 말)’을 듣고 받아들이는 아이들이 ‘새말(아이 말)’을 가꾸어 씩씩하고 튼튼하게 자라도록 이끌려는 뜻이라고 느낍니다.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라는 책에서 첫머리에 다루는 ‘칠칠하다’를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참말 ‘칠칠하지 못하다’나 ‘칠칠치 못하다’ 꼴로만 흔히 쓸 뿐입니다. “넌 참 칠칠하구나.”라든지 “우리 칠칠하게 살림을 지어요.”처럼 말하는 일이 매우 드물지 싶어요.

 

칠칠하다

 

1. 나무, 풀, 머리털이 잘 자라서 알차고 길다

2. 주접이 들지 않고 깨끗하고 얌전하다

3. 결이나 일 매무새가 반듯하고 야무지다

 

“칠칠한 나무”나 “칠칠한 나물”이나 “칠칠한 머리카락”처럼 “칠칠한 차림새”나 “칠칠한 사람”이나 “칠칠한 나라”로 나아가는 길을 헤아려 봅니다. 칠칠하지 ‘못한’ 모습이 아닌, ‘칠칠한’ 아름다움을 기쁘게 찾는 길을 생각해 봅니다. ‘못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한다’는 생각으로 칠칠한 말과 넋과 삶으로 거듭나는 길을 걸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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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은 물’에는 생명이 없다

 

김교신은 세상 시스템을 ‘얕은 바다’라는 은유로 표현했다. 은급 제도, 보험제도, 교육, 기업경영 등의 ‘안전한’ 디딜 곳을 만들어 물의 깊이를 얕게 하는 것, 하여 손으로 바닥을 짚고 수영하듯 편안하게 힘 안들이고 살다 가는 인생을 “땅 짚고 헤엄치기”라고 했다. 땅을 짚었으니 빠져 죽을 염려는 없을 터이다. 인생살이가 불안하기는커녕 삶의 자세는 얼마나 여유롭고 당당하겠는가!

 

이리 사는 사람들은 제 생명 이 위태롭지 않으니 자연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앙망仰望’이 있을 리 없다. 뭐든 ‘내 손 안에’ 있으니… 그리 오래 살다보면 자기가 신神인 것도 같아 어디서나 이웃 생명들을 향해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려 한다. 사회적 생명은 물론 물리적 생명조차 살리고 죽이는 결정이 “땅 짚고 헤엄치는” 자들에 의해서 원칙 없이, 자비 없이 행해진다.

 

오늘날 그러하고, 오늘날만 그러하지 않던 일이다. 그러나 김교신이 단언하듯이, 물의 깊이가 얕은 곳에서 들리는 소리는 “기계 윤전의 마찰 소리”일 뿐이다. 그 곳에는 생명이 약동하는 기쁨의 노래가 없다. ‘안전한 삶’을 대가로, 태어난 대로의 생명이 누려야 할 자유를 빼앗긴 삶이니 말이다. 그것이 ‘기독교(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해도 인간들이 만든 ‘얕은 물’에는 생명이 없다.

 

《버리지 마라 생명이다》

‘망해도, 살아내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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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라는 쇠항아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사는 이들은 다른 이들의 아픔에 공감할 수 없는 법입니다. ‘저 너머’의 눈으로 삶과 현실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아주 조금씩 자아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됩니다. 초월은 나의 나 됨을 우리라는 더 큰 지평 속에서 재정의하도록 해줍니다. 바로 이것이 삶의 인간화의 길이 아닌지요? 기존 질서에 의문부호를 붙이는 동시에 자기 삶을 늘 초월의 지평과 연결시킬 수 있어야 우리는 지난한 투쟁 속에서도 고갈되지 않을 수 있을 겁니다. 예수의 삶의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문광훈 교수는 《가면들의 병기창》에서 “예수에게 신분이나 계급, 지위나 재산은 금지해야 할 우상과도 같았고, 사랑과 너그러움과 자유는 우상 너머에 자리하는 실천적 덕목이었다. 사랑과 진실은 계급이나 지위, 신분과 권력 같은 세속적 우상을 넘어서지 못하면 도달될 수 없다. 완전한 객관성은 부정성 속에서 우상 없이 오직 영적 진실을 염두에 두는 가운데 얻을 수 있다”(505쪽)고 말합니다.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정반대의 길로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분, 계급, 지위, 재산을 열정적으로 추구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가 한사코 뿌리쳤던 우상을 교회는 온 힘을 다해 붙잡으려 합니다.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세속적 우상과의 싸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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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사람에게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던 아버지는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들이 보고 싶을 때면 편지를 쓰곤 하셨다. 잘 지내느냐는 안부 인사와 간단한 용건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자중자애 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 전부였지만 아버지의 편지는 아버지의 존재나 다를 바 없었다. 구불구불 써내려간 가전체의 편지를 받아드는 순간 아버지의 정 깊은 눈이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호롱불 밑에서 한 자 한 자 정성껏 쓰신 그 편지는 아버지와 분리할 수 없는 일체였다. 그 편지는 고향의 냄새였고 아버지의 품이었다. 지금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세들어 살고 있던 집 대문에 걸린 우체통에서 익숙한 아버지의 손글씨를 발견하는 날이면 천하를 얻은 듯 든든했다. 그 편지를 받아들고 눈물짓던 기억은 또렷하다. 외로웠기 때문일 것이다. 편지는 아버지와 나 사이에 그 아득한 거리를 일거에 좁혀주곤 했다.

 

 

연애 시절에 주고받던 편지가 떠오른다.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을 빌어 주고 받던 편지, 지금 생각하면 낯간지럽기 이를 데 없지만 속 깊은 생각을 나누는 데는 그만한 게 없었다. 군대에서 훈련 받을 때, 집에서 온 편지는 휴가나 마찬가지였다. 같은 내무반의 동료들이 연인의 편지를 읽고 또 읽다가 모포를 뒤집어쓰고 훌쩍이던 모습도 눈에 선하다. 공무를 위해 쓰는 편지는 논외로 한다면 편지를 쓴다는 것은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뜻이리라. 그리움은 '너'의 빈자리가 강하게 환기시킨 마음의 공허이다. 그리움의 대상을 향해 편지를 쓰는 순간 그 그리움의 대상은 우리 앞에 현전한다.

 

편지 쓰기는 사유의 훈련이기도 했다. 편지는 우리의 영혼이 발하는 발신음이다. 편지를 읽어줄 그대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시대에 대해 울분을 터뜨리기도 하고, 불시에 찾아오는 공허감이 빚어낸 어지러움을 호소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우리 젊은 날을 풍요롭게 해주던 이들이 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횔덜린의 《히페리온》을 거듭 읽으면서 쓸쓸하고 적막한 삶을 응시했고, 12세기의 아름다운 두 연인이 주고받은 편지인 《엘로이즈와 아벨라르》를 읽으며 가슴 시린 사랑을 꿈꾸기도 했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옥중서간》이나 안토니오 그람시의 《옥중수고》, 문익환 목사의 옥중서한집인 《꿈이 오는 새벽녘》, 서준식의 《옥중서한》,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 또 읽으며 격절된 장소에서 빚어진 사유의 향연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편지의 대가는 사도 바울이다. 신약성서 27권 가운데 그가 쓴 편지 혹은 그의 이름을 빌어 쓴 편지는 13권이나 된다. 바울의 서신은 ‘경經’이라는 이름에 값을 하고도 남는다. 지금처럼 인쇄매체가 발전하지 않았던 시기에 그는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함축적이면서도 정교한 언어에 담아냈다. 혼신의 힘으로 일으켜 세웠던 교회 공동체가 그릇된 가르침으로 인해 흔들릴 때마다 그는 편지를 써서 벗들과 소통하려 했다. 그렇기에 그의 서신은 곡진하고, 열정적이고, 애정에 가득 차 있다. 그의 편지를 회람하면서 초대 교회 공동체는 구부러진 길에서 돌이킬 수 있었다. 바울은 믿는 이들을 일러 하나님이 쓰신 편지라 했다. 강렬한 표현이다. 오늘 나라고 하는 편지는 누군가에게 기쁜 소식인가, 불쾌한 소식인가? 허나 그 어느 경우든 나의 있음은 그 자체로 발신음이 되어 누군가의 가슴에 가 닿게 마련이다.

 

삶은 만남이다. 누구를 만나고, 어떤 방식으로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질과 내용이 결정된다. 만남은 관계의 다른 이름이다. ‘관關’은 ‘빗장’이다. 열 수도 있고 닫을 수도 있다. ‘계는 잇는 것이다. 엶과 닫음을 통해 유기적으로 만들어진 만남의 양태가 관계이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과의 접촉과 저항을 통해 자기를 형성해가는 과정이다. 모든 만남이 다 기쁠 수는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모든 만남은 우리 속에 어떤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이 가시적으로 드러날 때도 있지만 감춰질 때도 있다. 감춰졌던 흔적이 슬그머니 드러나기도 한다. 삶은 오묘하다.

 

이 책은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의 흔적이다. 한 주에 한 번씩 꽃자리 웹진(fzari.com)에 글을 쓰기로 작정한 후, 매 주일 나의 삶의 지평 속에 등장했던 이들과의 만남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 혹은 삶이 불러일으킨 정서 혹은 생각을 정직하게 직시했다. 그들 중 아픔이 없는 사람은 없었다.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맥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자기 삶을 의미 있게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이 책은 내게 다가와 자기 삶의 이야기를 나눠준 그 멋진 벗들이 들려준 고민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어떤 경우에도 내가 답을 제시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고민을 함께 나누고 싶었을 뿐이다. 충실하게 살기 위해서는 묻고 또 묻는 수밖에 없다. 그 모든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들에게 사랑의 빚을 졌다. 그들이 있어 나도 있다. 참 삶을 향해 나아가는 길 위에서 그들과 만났던 것은 나의 복이다. 나와의 만남이 그들에게도 복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책의 모양을 갖춰준 멋진 벗 한종호 목사와 표지를 구성해주신 임종수 목사님께 감사드린다. 임 목사님은 맑고 올곧은 정신을 유지하고자 노력한다면 세속의 나이의 많음과는 상관없이 사유는 녹슬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 아닌 몸으로 증언하는 분이시다. 40년 전에 만난 후 한결같은 신뢰와 사랑으로 나의 동행이 된 희우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 병에 담아 물 위에 띄워 보내는 편지처럼 이 조촐한 글이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 그들의 가슴을 따스하게 만들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 길 위에서 이 편지를 기쁘게 받아 읽어줄 당신에게도 감사드린다.

 

복사골 서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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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이 그리운 것은

 

이른바 조선의 지식인으로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지 않으면 인간 대접을 받기도 힘들었던 1930년대의 정신 풍토에서 김교신은 특이한 존재였다. 민족의 해방을 지상의 목표로 세우고 그렇게들 살아가는 틈바구니 속에서 외로이 “인간의 해방”을 고집하던 그는 200명이 넘지 않은 독자들을 상대로 15년 동안 월간지 <성서조선>을 발행하여 온 인물이다.

 

 

 

 

“조선을 알고 조선을 먹고 조선을 숨 쉬다가 그 흙으로 돌아간 김교신, “함석헌의 ‘조선 역사 수난의 5백년’ 교정을 보다가 인쇄소 공원들 곁에서 눈물을 씻던” 김교신, “한 발 앞서 얼굴을 보여 주시면 힘이 되겠다”는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의 영원한 스승이었던 김교신,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1년여의 투옥 생활을 마친 후, 고향 근처인 흥남에서 한 질소비료공장의 계장으로 근무하던 당시, 전염병 발진티푸스가 돌던 시절, 밤낮없이 투병하는 노동자들을 돌보다가 감염 되어” 45세의 나이에 하직한 김교신, 그는 어떻게 초월 신앙과 참여적 삶을 책임적으로 살아낼 수 있었을까? 왜 구태여 “다시 김교신이 그리운 시절”인가? 방법론의 난무가 인간을 시들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교육이든 심지어 종교까지 전략가가 가장 귀한 대우를 받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숱한 법들이 골목과 골목을 누비고 그 법의 망을 뚫는 또 다른 ‘법’들이 시궁창과 시궁창 사이를 드나들게 되었다. 방법들의 무도회는 교회 안에서도 활개를 친다. 교인 수 늘리는 법, 전도하는 법, 목회에 성공하는 법, 교세를 확장하는 법….

 

김교신이 그리운 것은 오늘 거짓의 횡포가 너무 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짓은 또 다른 거짓을 낳고 그러니 서로 믿을 수 없고, 믿을 수 없으니 만사를 거짓으로 처리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람들은 자기 자신도 속이고 만다. 청천 하늘 눈부신 태양 아래서 거인이 된 거짓은 자기 눈을 가리고 역사의 바퀴를 역회전 시킨다. 거기에서 우리는 증오의 신이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것을 본다. 연기는 퍼져 나가 눈먼 사람들을 알 수 없는 증오의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는다.

 

이 까마득한 절망의 심연에서 희망의 피리를 불어 줄 이는 어디 있는가? 모든 것이 죽었을 때 살았다고 소리치는 “새벽의 사람”은 어디 있는가? 성공! 성공! 모두가 성공을 목표로 삼아 남의 어깨를 무자비하게 밟고 올라서는데 “성공은 너희나 가져가라 나는 이 장난이나 칠란다!” 하고 주섬주섬 보따리 싸며 뒤틀린 사회의 궤도에서 스스로 이탈하는 이는 어디 있는가?

 

 

 

그리워라! 김교신, 그대는 외토리였고 그래서 기껏 친구를 삼는다는 게 한센인이었고 200여명이 넘지 못하는 독자들과 서신을 교환하듯 잡지를 내었고 이해 관계가 없는 일, 곧 무용한 일에만 흥분하였으니….

 

시대가 각박할수록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여유”다. 밤이 깜깜할수록 요구되는 것은 “빛”이다. 답답할수록 요구되는 것은 몸부림이 아니라 “웃음”이다. 누가 알고 있었으랴! 두꺼운 땅거죽을 뚫고 연하디 연한 새싹이 솟아오를 줄을. 누가 알았으랴 산천초목이 얼어붙은 겨울의 추위를 견디고 연약한 개구리 서너 마리가 기어 다니리라는 것을….

 

작년 늦은 가을 이래로 새로운 기도터가 생겼었다. 층암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가느다란 폭포 밑에 작은 담(潭)을 형성한 곳에 평탄한 반석 하나 담 속에 솟아나서 한 사람이 꿇어앉아서 기도하기에는 하늘이 만든 성전이다.

이 반상에서 혹은 가늘게 혹은 크게 기구(祈求)하며 또한 찬송하고 보면 전후좌우로 엉금엉금 기어오는 것은 담 속에서 암색에 적응하여 보호색을 이룬 개구리들이다. 산중에 대변사가 생겼다는 표정으로 신래(新來)의 객에 접근하는 친구 와군들. 때로는 5-6마리, 때로는 7-8마리

늦은 가을도 지나서 담상에 엷은 얼음이 붙기 시작함에 따라서 와군들의 기동이 일부일 완만하여지다가, 나중에 두꺼운 얼음이 투명을 가리운 후로는 기도와 찬송의 음파가 저들의 이막(耳膜)에 닿는지 안 닿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렇게 격조(隔阻)하기 무릇 수개월여.

봄비가 쏟아지던 날 새벽, 이 바위틈의 빙괴(氷塊)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래간만에 친구 와군들의 안부를 살피고자 담 속을 구부려 찾앗더니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세 마리 담 꼬리에 부유하고 있지 않은가! 짐작컨대 지난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작은 담수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런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동사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潭底)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 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이것은 그의 「성서조선」으로 하여금 최후의 진통과 함께, 한 떨기 촛불이었다가 겨울 밤 하늘의 영원한 샛별이게 만든 마지막 권두언인 “조와弔蛙” 전문이다. 이 글로 인해 김교신, 함석헌 일행 12명이 전국 독자와 함께 검속(檢束)된 유명한 “성서조선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밤은 낮을 용납할 수 없으며 어둠은 빛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몇 마리 개구리의 시체를 묻어 준 것이 죄였을까? 아니다. 죄라면 개구리가 모두 숨어든 외로움 위에 걸터앉아 자기의 소리가 그들의 귀청을 울리는지 아니 울리는지도 모르면서 기도한 것이 죄 아니겠는가.

 

누가 이 황량한 역사의 무덤 위에 앉아 홀로 찬송하고 기도할 것인가? 누가 버티고 앉아 이 어둠을 견뎌 내 줄 것인가? 그리하여 문득 봄비 쏟아지는 날 죽은 개구리와 산 개구리를 따뜻한 손으로 맞이해 줄 것인가.

 

다시, 김교신을 만나기 위해 <버리지 마라, 생명이다>의 저자 백소영 교수는 다시금 우리를 불러낸다.

 

"김교신이 쓰고 엮은 「성서조선」과 그의 일기를 찬찬히 읽으며 그리운 ‘사람’ 김교신을 만나고, 그의 신앙고백과 인생의 가치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 이야기를 담았다. 거의 한 세기 전에 “한 세기 후의 동지”를 기다리고 그리워했던 사람 김교신에게, 기꺼이 동지 되기를 응답하는 21세기 친구들을 기다리며, 초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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