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과 영화의 만남 3


홍해를 호랑이와 건너다?

시편 136:1-26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모든 신들 가운데 가장 크신 하나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모든 주 가운데 가장 크신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홀로 큰 기적을 일으키신 분께 감사하여라.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지혜로 하늘을 만드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물 위에 땅을 펴 놓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큰 빛들을 지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낮을 다스릴 해를 지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밤을 다스릴 달과 별을 지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이집트의 맏아들을 치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이스라엘을 그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이스라엘을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이끌어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홍해를 두 동강으로 가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이스라엘을 그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바로와 그의 군대를 뒤흔들어서 홍해에 쓸어버리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자기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하여 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위대한 왕들을 치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힘센 왕들을 죽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아모리 왕 시혼을 죽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바산 왕 옥을 죽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그들의 땅을 유산으로 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그들의 땅을 당신의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우리가 낮아졌을 때에 우리를 기억하여 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우리를 우리의 원수들에게서 건져 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먹거리를 주시는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시편 136편과 ‘축의 시대’의 영성


시편 136편은 150편에 달하는 시편들 가운데 이스라엘이 자기네 역사를 회고하면서 바친 대표적인 감사의 노래입니다. 이 시편은 감사하는 내용을 예배인도자가 읽은 후에 예배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라고 읽게 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은 네 부분을 나눌 수 있습니다. 1절부터 3절까지는 인도자가 하느님께 ‘감사하여라.’라는 명령문으로 회중을 부르는 부분이고 4절부터 22절까지는 감사할 내용을 열거한 부분이며 23절에서 26절은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노래를 부르는 시점에서 예배자들이 바치는 감사의 노래가 되겠습니다.


중간 부분인 4절부터 22절까지도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4절부터 9절까지는 하늘과 땅,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신 하느님의 창조에 대한 감사의 노래입니다. 하느님은 홀로 큰 기적, 곧 창조의 기적을 일으킨 분으로서 지혜로 하늘을 만드셨고 물 위에 땅을 펼쳐놓으셨으며 해와 달과 별을 지으셔서 낮과 밤을 밝히셨다고 노래합니다. 10절부터 15절까지는 출애굽 사건에 대한 감사의 노래입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셨을 때 이집트의 모든 장자들을 치신 얘기와 홍해를 두 동강으로 갈라서 이스라엘이 그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셨고 바로의 군대를 홍해에서 몰살하신 기적을 노래합니다. 마지막으로 16절에서 22절까지는 광야에서 자기들을 인도해주신 은총을 노래합니다. 하느님께서 자기들 앞길을 가로막은 왕들을 죽이시고 그들의 땅을 이스라엘이 차지하게 하셨다고 노래합니다.


저는 이 시편의 노랫말을 여러 번 읽으면서 두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습니다. 첫째는 감사의 이유를 열거한 대목 가운데 창조질서를 노래한 부분과 출애굽 및 광야유랑을 노래한 부분 사이에는 상당한 신학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창조질서 부분은 사람을 포함한 삼라만상과 우주 전체를 시야에 담고 노래하는데 반해서 출애굽과 광야유랑 부분은 ‘오직’ 이스라엘만을 시야에 넣고 노래입니다. 창조질서의 ‘보편성’과 출애굽 및 광야유랑의 ‘국지성’ 또는 ‘특수성’이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제게는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출애굽 때 이집트의 모든 장자는 죽임을 당했고 바로의 군대는 홍해에 빠져 죽었으며 광야 유랑 시에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방해한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이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창조질서를 노래한 부분의 시야는 넓고 보편적인데 반해 출애굽 및 광야 유랑을 노래한 부분의 시야는 오로지 이스라엘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한 노래에 이토록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신학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말입니다.


요즘 저는 카렌 암스트롱이 쓴 《축의 시대》란 책을 재미나게 읽고 습니다. 그녀는 기원전 9백년 경에서 2백년 경 사이에 중국, 인도, 그리스, 팔레스타인의 네 문명권에서 인류의 정신에 지속적인 자양분이 될 위대한 철학과 종교 전통이 탄생했다고 주장합니다. 각각의 문명권이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선과 자비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상이 그 시기에 탄생했다는 겁니다. 자기중심주의와 탐욕, 폭력과 무례를 버리고 자비의 영성을 개발하기 시작한 때도 그때였다는 그녀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시편의 작성 시기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시편은 문자로 기록되기 훨씬 전부터 구전으로 전해지며 불렸을 수 있기 때문에 처음으로 문자화된 시기와 작성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 시편 도 언제 지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여기에는 암스트롱이 말한 ‘축의 시대 영성’은 보이지 않습니다.


홍해 사건의 두 가지 버전


두 번째 문제는 홍해에서 벌어진 일을 노래하는 대목입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낸 후에 곧바로 그걸 후회하고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추격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는 이집트 군대가 몰려오는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이때 모세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 지팡이로 홍해를 쳤고 그러자 홍해는 둘로 갈라져 이스라엘 백성은 무사히 건넜지만 바로의 군대는 바다가 다시 합쳐지는 바람에 몰살당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가장 오래된 노래인 출애굽기 15장 1절의 미리암의 노래도 이 사건을 노래합니다. “내가 주님을 찬송하련다. 그지없이 높으신 분, 말과 기병을 바다에 처넣으셨다.”


제가 어렸을 때는 찰톤 헤스톤이 모세 역을 맡았던 <십계>를 감동적으로 봤는데 몇 년 전에 이 영화가 다시 만들어졌습니다. 노아 시대의 심판을 다룬 영화 <노아>가 사건을 성서의 서술과는 달리 해석해서 물의를 일으킨 것과는 달리 최근에 만들어진 <십계>는 성서의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따라갑니다. 이전 영화와 다른 점은 CG를 이용해서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을 엄청나게 스펙터클하게 만들었다는 정도입니다.



홍해바다 사건은 오래 전부터 성서학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였습니다. 논란의 주제는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느냐 여부입니다. 한편에서는 홍해 바다가 갈라진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주장하고 다른 편에서는 성경이 그랬다면 그런 줄 알지 왜 시비를 거느냐고 주장합니다. 우리나라 진도 앞바다도 갈라지는데 홍해라고 갈라지지 말라는 법이 있냐고 목청을 높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사건을 보도하는 성서구절을 잘 읽어보면 그 안에도 몇 가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대목이 있습니다. 우선 이스라엘의 출애굽 행로와 홍해를 건넌 사건은 서로 맞지 않습니다.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이집트에서 나와서 가나안으로 가려면 홍해 쪽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둘째로, 성서에는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을 다룬 두 버전의 얘기가 있는데 이것들이 서로 맞지 않습니다. 널리 알려진 버전은 모세가 지팡이로 바다를 치자 쩍 하고 바다가 갈라졌다는 것인데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다른 버전인 출애굽기 14장에는 “야훼께서 밤새도록 거센 동풍을 일으켜 바닷물을 밀어내시자 바다가 마른땅이 되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모세가 지팡이로 내리치자 당장 바다가 갈라졌다는 버전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셋째로, 우리말 성서가 ‘홍해’ 곧 ‘red sea’로 번역한 단어가 원문에는 ‘얌숩’ 곧 ‘갈대바다’(reed sea)라고 되어 있습니다. 갈대바다는 홍해가 아니라 수에즈만 북쪽 끝에 위치한 갈대가 무성한 늪지대의 호수를 가리킨다는 주장이 오래 전부터 있어왔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건넌 곳이 홍해가 아니라 갈대바다였다는 겁니다. 요즘 구약학자들 가운데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럼 왜 그렇게 노래했을까?


하지만 분명한 점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홍해가 갈라졌다고 믿고 그렇게 노래했다는 사실입니다. 홍해사건 얘기는 성서 여기저기에 상당히 자주 등장합니다. 시편에도 여러 번 등장하는데 그 어느 곳에서도 홍해가 아니라 갈대바다였다고 노래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와 맞닥뜨려 진퇴양난이었을 때 기적적으로 바다를 갈라서 자기들을 구원해주셨다고 노래한 겁니다. 오늘의 본문도 하느님이 홍해를 두 동강으로 가르셨다지 않습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걸까요? 그들이 건넌 곳은 갈대바다입니까, 홍해입니까? 저는 이 물음을 포함해서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겪는 다양한 사건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할지의 물음에 대한 ‘하나의’ 대답을, ‘유일한’ 대답이 아닌 ‘하나의’ 대답을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읽었습니다.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던 파이의 가족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동물들을 배에 싣고 이민을 가던 도중 거센 폭풍우를 만나 배가 침몰하는 사고를 당합니다. 가족들은 다 죽고 파이만 혼자 살아남아 구명보트에 올라타서 다친 얼룩말과 굶주린 하이에나와 오랑우탄과 함께 표류합니다. 하지만 보트 아래에는 진짜 주인공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동물들은 결국 서로 공격하다가 다 죽고 보트에는 파이와 호랑이만 살아남아 둘이 표류하며 온갖 일들을 겪은 끝에 227일 만에 구조되는 것이 이 영화의 스토리입니다.


영화는 얀 마텔의 소설 <파이 이야기>를 원작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원작 소설은 무려 40여 개 나라에서 번역되어 7백만 부 이상 팔렸고 영국의 부커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책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자 많은 감독과 제작사가 영화화하려 했지만 소설이 담고 있는 중층적 의미와 놀라운 상상력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기가 어려워 착수하지 못했는데 그걸 이안 감독이 해낸 겁니다. 영화를 보신 분은 느끼셨겠지만 CG인 줄 알면서도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화면이 아름답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마지막 반전 장면에서 소름이 끼쳤습니다. 구조된 후 파이는 일본 보험회사 사람들에게 자기가 겪은 일을 다 얘기했지만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미어캣이 사는 둥둥 떠다니는 식인섬 얘기도 믿지 않았고 바나나는 물에 뜨지 않는다면서 오랑우탄이 바나나를 타고 왔다는 얘기도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파이에게 자기들이 회사로부터 바보 취급당하지 않도록 ‘진실’을 얘기해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파이는 다른 얘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선원과 주방장이 살아남았고 어머니가 바나나를 타고 왔다고 얘기했습니다. 주방장은 선원을 죽여서 그걸 물고기를 잡는 미끼로 썼고 주방장과 다툰 어머니는 상어 밥이 되어 죽었으며 자기는 그 주방장을 죽였다는 얘기였습니다. 보험회사 사람들은 이 얘기를 자기들이 바보 취급당하지 않을 ‘진실한’ 얘기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얘기를 듣고 있던 작가, 곧 파이의 예기를 소설로 쓸 작가는 하이에나가 주방장이고 그에게 죽은 얼룩말이 선원이며 바나나를 타고 온 오랑우탄이 어머니이고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다름 아닌 파이 자신임을 알아 듣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더 맘에 듭니까?


얘기를 다 끝낸 후 파이는 작가에게 “어떤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나요?”라고 묻습니다. 얼룩말과 하이에나와 오랑우탄과 벵골 호랑이가 등장하는 얘기가 더 마음에 드는지, 아니면 주방장과 선원과 어머니가 등장하는 얘기가 더 마음에 드는지 묻는 겁니다. 호랑이가 등장하는 얘기가 더 마음에 든다고 작가가 답하자 파이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십니까? 그는 ‘고맙다’고 말합니다. 제 가슴을 때린 대사입니다. 왜 그는 고맙다고 말했을까요? 자기 말을 믿어줘서일까요? 정말 그뿐일까요?


히브리 노예들의 이집트 탈출과 홍해바다 사건에도 두 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기적적으로 탈출한 노예가 남자만 60만 명이고 이들은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기적과 하느님이 보내준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면서, 돌을 치니까 물이 터지는 기적을 겪으면서 40년 동안 광야를 유랑하면서 야훼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훈련을 했고 결국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는 얘기가 한 버전입니다. 다른 버전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히브리인 수백 명이 밤을 노려 도망쳐 나왔는데 추격하는 이집트 군대를 얕은 늪지대인 갈대바다에서 어찌어찌 따돌려서 광야에 접어들었고 거기서 갈 바를 몰라 40년 동안 정처 없이 헤맨 끝에 가까스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니 거기에는 이미 오랫동안 자리 잡고 살고 있던 일곱 부족이 있어서 그들과 2백 년 동안 갈등하고 싸우기도 하고 타협도 하면서 겨우 겨우 인적이 드문 산악지대에 자리 잡았다는 얘기입니다. 전자는 성서가 전하는 버전이고 후자는 성서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이 자료에 근거해서 만든 버전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버전이 더 마음에 듭니까? 이스라엘은 홍해가 둘로 갈라져서 바닷길이 났다는 버전을 택해서 후대에 전했습니다. 현대인의 생각으로는 현실성이 낮은 버전이지만 그들은 그 버전을 택했습니다. 그들이라고 해서 모두 이 버전을 현실성 있게 받아들이지는 않았겠지만 좌우간 그들은 이 버전을 선택했습니다. 주방장과 선원과 어머니가 등장하는 버전이 아닌 하이에나와 얼룩말과 오랑우탄과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등장하는 버전을 받아들였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야기의 힘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에는 힘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저는 그 주장을 크기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매주일 설교라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이야기의 힘을 신뢰하지 않는다니 말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제 스승 안병무 선생님과 가까워지고 ‘의기투합’하게 된 계기도 어떤 점에서는 이야기에 관한 생각이 같았기 때문입니다. 1986년에 서울 향린교회에 새 담임목사를 청빙하는 과정에서 한 모임에서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목사는 설교를 잘 하는 목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때 분명히 ‘우리 교회에서’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 사회에서’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목사는 설교만 번지르르하게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의 변혁을 위해 실천할 사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 생각이 스승님의 그것과 일치했던 겁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를 쓰시렵니까?


저는 지금도 제 설교가 여러분에게 큰 영향을 주거나 감명을 주거나 은혜를 끼칠 거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제 설교를 듣고 사람이 변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인격은 말 몇 마디에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의 고집이 얼마나 강고합니까. 그래서 저는 이야기의 힘을 크게 신뢰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야기가 인격을 바꿀 거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하물며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을 이야기 따위가 바꿀 거라고는 더더욱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저는 이야기의 힘은 의심하지만 사람이 갖고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힘’만은 신뢰하고 있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이야기가 무슨 힘을 발휘할 거라고는 크게 신뢰하지 않지만 만일 누군가가 의미 있고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면 그 사람은 할 수 있는 것이 많다고 믿습니다.


세상은 완제품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재료’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꿀 수 없는 ‘완제품’도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반제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꿀 여지가 있는 물건,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물건이 될 수 있는 ‘반제품’ 같은 것이란 겁니다. 세상만 그런 게 아닙니다. 내 인생도 역시 마찬가지로 완제품 아닌 반제품입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영화에서 어느 버전이 진실일까요? 저는 주방장과 선원과 어머니가 등장하는 버전이 실제로 파이가 겪은 ‘날 것’의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의미 있는 진실은 호랑이와 하이에나, 얼룩말과 오랑우탄이 등장하는 ‘만들어낸’ 진실입니다. 만일 파이가 그 얘기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면 그는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가 살아남았기에 호랑이 버전이 진실이 됐다고 저는 믿습니다.


파이는 마지막으로 작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이젠 당신의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젠 이 얘기는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쓰시렵니까?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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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과 영화의 만남 2

아버지의 상처

창세기 22:1-19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를 부르셨다.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니 아브라함은 “예,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하느님이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아브라함이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나귀의 등에 안장을 얹었다. 그는 두 종과 아들 이삭에게도 길을 떠날 준비를 시켰다. 번제에 쓸 장작을 다 쪼개어 가지고서 그는 하느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그 곳으로 길을 떠났다. 사흘 만에 아브라함은 고개를 들어서 멀리 그 곳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종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아이와 저리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너희에게로 함께 돌아올 터이니 그 동안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장작을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챙긴 다음에 두 사람은 함께 걸었다. 이삭이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그가 “아버지!” 하고 부르자 아브라함이 “얘야,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이삭이 물었다.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느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걸었다. 그들이, 하느님이 말씀하신 그 곳에 이르러서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제단 위에 장작을 벌려 놓았다. 그런 다음에 제 자식 이삭을 묶어서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손에 칼을 들고서 아들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 때에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예, 여기 있습니다.”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느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 아브라함이 고개를 들고 살펴보니 수풀 속에 숫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다. 가서 그 숫양을 잡아다가 아들 대신에 그것으로 번제를 드렸다. 이런 일이 있었으므로 아브라함이 그 곳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주님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는 말을 한다.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불러서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친히 맹세한다. 네가 이렇게 너의 아들까지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내가 반드시 너에게 큰 복을 주며 너의 자손이 크게 불어나서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하겠다. 너의 자손은 원수의 성을 차지할 것이다. 네가 나에게 복종하였으니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자손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왔다. 그들은 브엘세바 쪽으로 길을 떠났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살았다(창세기 22:1-19).


처음에는 부녀 사이인 줄…….


오늘은 아버지주일(Father’s Day)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난 주일부터 ‘시편과 영화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설교하고 있어서 가급적이면 아버지날과 이 주제를 맞춰서 성서본문을 택하려 했는데 그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편 가운데서 본문 택하기를 포기하고 창세기 22장을 본문으로 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려 했던 이야기 말입니다. 구약성서 이야기들 중에서 에덴동산의 선악과 얘기와 더불어 가장 널리 알려진 얘기가 이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이 얘기는 읽을 때마다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오늘 얘기할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 주연을 맡은 <밀리언 달러 베이비>입니다. 저는 1990년대 이전에 만들어진 그의 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 이후의 영화들, 특히 그가 감독, 주연을 동시에 맡은 영화들 중에는 좋아하는 영화가 여럿 있습니다. 그 중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제일 좋아하는데 이 영화는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까지 네 개의 아카데미상을 받았습니다. 저는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매기가 프랭키의 숨겨진 딸인데 나중에 가서 밝혀지는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갈 줄 알았습니다. 제가 한국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던 거죠. 



한 허름한 권투 체육관을 운영하는 프랭키와 거기서 청소하면서 생활하는 스크랩은 과거에 권투경기 중에 지혈사와 선수 사이였습니다. 스크랩이 타이틀전을 하는 도중에 눈 주위에 출혈이 심해서 프랭키는 경기를 중단시켰어야 했습니다. 스크랩의 트레이너는 전날 과음을 해서 경기에 나서지 못했으므로 그 결정은 프랭키가 내려야 했는데 그는 경기를 중단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크랩은 피가 눈으로 흘러들어가 한쪽 눈을 실명하고 맙니다.


이 체육관에 서른한 살짜리 여자 매기가 한쪽 구석에서 묵묵히 운동을 합니다. 프랭키는 여자는 기르지 않는다며 냉정하게 그녀를 물리쳤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혼자 묵묵히 운동을 합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일찍 죽었고 오빠는 감옥에 가있고 어머니와 여동생과 조카가 트레일러에서 정부보조에 의존해서 살아갑니다. 매기는 열세 살부터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손님들이 남긴 음식을 몰래 가져다가 먹으면서 번 돈으로 살아갑니다. 번 돈의 일부를 가족들에게 보내주면서 말입니다.


서른한 살 나이에 권투를 시작하는 건 너무 늦었다는 말에 매기는 “그럼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라고 응대하고 누가 뭐라 하든 상관하지 않고 훈련에 몰두합니다. 결국 스크랩이 슬쩍슬쩍 도와준 데 힘입어서 그녀는 프랭키의 지도를 받아 선수가 됩니다. 그렇게 둘은 파트너가 되어 시합에 나가기만 하면 연전연승했고 결국 타이틀전을 벌이는데 거기서 매기는 상대방의 반칙으로 하반신이 마비되는 부상을 당합니다. 병상에 누운 그녀는 다리가 썩어 들어가 한쪽 다리를 잘라내기까지 합니다. 그녀는 프랭키에게 자기를 죽여 달라고 사정하지만 그는 차마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없어 거절합니다. 그러자 그녀는 두 번이나 혀를 깨물어 자살을 기도합니다. 그녀는 말도 못하게 된 겁니다. 이에 프랭키는 고민하다 그녀의 부탁대로 어느 날 밤에 몰래 병실에 가서 산소 호흡기를 떼어냅니다.


영화와 성서이야기가 교차하는 지점


이 영화에는 중간 중간에 의미 있는 장면들이 많습니다. 제가 보기에 영화가 하려는 얘기는 매기와 프랭키가 연전연승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녀가 하반신마비가 되어 병상에 눕게 된 이후에 담겨 있습니다. 그 중 매기의 아버지가 관련된 두 가지 얘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오늘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매기가 돈을 벌어 어머니와 가족들에게 집을 사서 선물합니다. 하지만 집을 가지면 정부보조금이 끊긴다는 이유로 어머니는 노골적으로 싫어합니다. 매기는 가족들과 다투고 나서 돌아오는 길에 어렸을 때 아버지가 기르던 개를 묻어준 이야기를 프랭키에게 합니다. 하루는 다리를 다쳐서 절뚝거리는 개를 아버지가 차에 싣고 나갔는데 거기 삽이 들어 있더라는 얘기였습니다. 훗날 자기를 죽여 달라고 부탁할 걸 미리 암시한 장면으로 보였습니다. 또 그녀가 병상에 누웠을 때 프랭키에게 자기가 태어났을 때 심각한 저체중이어서 살아남지 못할 줄 알았다는 얘기를 아버지에게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 역시 자기가 오래 살지 못하고 죽을 걸 암시한 얘기였고 거기에 프랭키가 아버지 캐릭터로 연결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영화는 프랭키와 매기를 부녀 사이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영화와 아브라함, 이삭 이야기에는 연결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죽여야 하는 상황을 그린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차이점들이 있긴 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얘기에는 단순한 아버지와 자식 관계를 넘어서는 지점이 있습니다. 이삭이 하느님의 약속에 의해서 부모가 매우 늙었을 때, 그래서 많은 사람의 축복 속에서 기적적으로 태어났던 데 반해서 매기는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나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떴고 남은 가족들은 가족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막장입니다. 하반신마비로 병상에 누워있는 매기를 찾아와 돈 문제 서류에 사인하라고 들이대는 사람들을 가족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아브라함, 이삭 얘기는 서두에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고 해서 사건의 목적을 분명히 밝힌 데 반해, 영화는 아무 이유나 목적이 없이 우연히 사건이 벌어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두 얘기 사이의 차이를 찾으라면 더 길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제 책 《알 수 없는 분》에서 창세기 22장을 각각 아브라함과 이삭의 시각에서 읽고 해석해서 썼으므로 오늘 반복하지는 않겠고 오늘은 한 가지에만 집중해서 얘기하겠습니다.


침묵의 언어들


아브라함, 이삭 얘기의 정수(精髓)는 모리아 산에 이르러 수행했던 종들을 뒤에 남겨놓고 칼과 불을 든 아브라함과 장작을 멘 이삭, 둘만 산 위로 오르는 대목입니다. 이삭은 “아버지!”라고 아브라함을 불렀고 아브라함은 “얘야, 왜 그러느냐?”라고 말합니다. 우리말로 자연스럽게 들리게 이렇게 번역했지만 원문은 “내가 여기에 있다.”(Here I am)입니다. 이삭은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라도 묻습니다. 참 난처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받고 아브라함은 잠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침묵한 다음 이렇게 대답합니다.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느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또 아무 말 하지 않고 걸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번제물을 마련하시리라는 아브라함의 대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장차 일어날 일을 이미 내다보고 그렇게 말했을까요? 아니면 엉겁결에 둘러댔을까요? 두 가지 모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은 두 가지 감정을 모두 갖고 대답했을 거라는 얘기입니다. 그는 사흘 길을 아들과 함께 걸으면서, 그리고 종들을 남겨두고 단 둘이 산에 오르면서 수백, 수천 번 생각했을 겁니다. 하느님은 대체 왜 이러시는 걸까? 약속의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니!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정말 아들을 번제로 바쳐야 하나? 이 녀석도 이상하다고 눈치 챘을 텐데 왜 이 녀석은 아무 말도 안 하는 걸까? 아들이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겠지요.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정수(精髓)는 사고 난 이후에 전개되는 이야기라고 앞에서 얘기했습니다. 상영시간도 그 부분이 절반 정도 차지합니다. 창세기 22장의 얘기는 15장에 나오는 얘기와 연관시켜서 읽어야 합니다. 15장에는 하느님과 아브라함이 언약 맺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거기서 하느님은 제물의 몸통을 둘로 쪼개서 서로 마주보게 차려놓으라고 아브라함에게 명하셨습니다. 밤이 되자 연기 나는 화덕이 나타나서 쪼개놓은 제물 사이로 지나갔답니다. 이 얘기는 언약을 깨는 편은 쪼개진 제물처럼 처참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일은 하느님이 약속을 지키리라는 걸 어떻게 믿겠냐고 의문을 제기한 아브라함의 요청에 의해 벌어졌습니다. 곧 하느님이 약속을 지킨다는 증표를 아브라함이 보여 달라고 해서 벌어진 일이란 겁니다. 그렇다면 약속을 깨뜨리면 쪼개질 제물 꼴이 될 쭉은 누구입니까? 물론 양편 모두 같은 신세가 되겠지만 그래도 징표를 원한 쪽이 아브라함이므로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 이 꼴이 될 쪽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자신이 약속을 깨면 쪼개진 짐승 꼴이 될 거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15장을 잘 읽어보면 이렇게 볼 수밖에 없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갑니다. 심지어 학자들도 이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지 않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설마 하느님이 그런 꼴이 되겠어? 그게 말이 되나?’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합니다. 창세기 22장을 15장과 연관해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15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시험했다면 22장에서는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할 차례이기 때문입니다.


프랭키의 자리에 아브라함과 하느님을 대입해보다


매기와 프랭키를 창세기 22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입해봤습니다. 이삭은 매기에게, 아브라함은 프랭키에게 대입시켜 본 겁니다. 프랭키는 1년 반 동안 가까이서 매기를 지켜봤습니다. 그녀는 서른한 살이란 나이는 권투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말에 “서른한 살이 늦었다면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뭘 보나 권투는 그녀의 전부였습니다. 돈 때문이긴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매우 불행한 처지에서 살다가 드디어 자기가 잘 하는 걸 찾아낸 겁니다. 그녀 곁에서 아버지처럼 돌봐주는 사람도 있었는데 자기에게 권투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바로 그였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이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었습니다. 병상을 찾아와 막장을 부린 가족들은 그녀가 퇴원하면 돌아갈 현실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매기는 프랭키에게 자기를 죽여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하지만 프랭키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는 거절합니다. 자기는 그렇게 못 한다고……. 그러자 그녀는 두 번이나 혀를 깨물어 자살을 시도합니다. 이젠 말도 하지 못합니다. 결국 프랭키는 밤중에 준비를 하고 병원으로 갑니다. 그녀에게서 산소 호흡기를 떼어내고 더 빨리 잠들라고 혈관에 충분한 양의 주사액을 주입합니다.


다음으로 저는 프랭키의 자리에 하느님을 대입해봤습니다. 하느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살리면 되지!’라고 대답할 사람과는 더 할 말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뭐든 할 수 있는 ‘전능한’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을 벌어지기도 전에 모든 걸 미리 아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려고 아들을 바치라고 명령합니다. 자기 명령을 수행하는지 안 하는지 알아보려 했던 겁니다. 시험을 하기 전에는 하느님도 몰랐다는 겁니다. 시험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하느님은 “내가 이제 알았다!”(Now I know)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하느님이 프랭키였다면 어떻게 하셨을지는 여러분 각자 생각해보시고 답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뭘까요? 대체 ‘믿음’이란 게 뭡니까?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가리켜서 믿음이 있다고도 하고 없다고도 하는데, 대체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그게 없는 사람입니까? 또 사람들은 믿음이 ‘크다’ 또는 ‘깊다’거나 믿음이 ‘작다’ 또는 ‘얕다’고 말하는데 어떤 사람이 믿음이 크거나 깊으며 작거나 얕습니까? ‘하느님이 이런 것까지도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것까지는 못 할 거야.’라거나 ‘내가 믿는 하느님이 옳고 네가 믿는 하느님은 틀렸어!’라거나 ‘내 하느님이 더 힘이 세거든!’ 따위의 생각을 올바른 믿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초등학생도 아닌데 말입니다.


믿음이 깊어진다는 것은 하느님의 심정을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하느님의 깊은 곳에 있는 마음과 생각과 심정을 조금씩이나마 알고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는 것, 그것을 가리켜서 믿음이 자란다고 부릅니다. 흔히 사람들은 하느님이 어떻게 아버지더러 아들을 자기에게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맞습니다. 그런 명령은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명령을 하는 하느님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떤 심정으로 그런 명령을 하셨을까? 조폭 두목이 부하의 충성심을 시험해보려고 누굴 죽이라고 명령하는 그런 심정으로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명령하셨을까요?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어떤 심정이었을지 생각해보는 것, 그래서 그 마음의 작은 한 구석이라도 붙잡아보는 것, 그게 믿음이라는 겁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특히 마지막에 프랭키가 말도 못하는 매기의 눈을 바라보면서 산소 호흡기를 떼어내고 주사를 놓는 장면을 보면서 이삭을 향해 칼을 든 아브라함의 심정을, 더 나아가서 그런 명령을 아브라함에게 내린 하느님의 심정을 생각해봤습니다. 그것들은 다르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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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과 영화의 만남 1


노래하는 이유, 찬양하는 까닭

시편 145:1-13


“나의 임금님이신 하나님, 내가 주님을 높이며 주님의 이름을 영원토록 송축하렵니다. 내가 날마다 주님을 송축하며 영원토록 주님의 이름을 송축하렵니다. 주님은 위대하시니 그지없이 찬양받으실 분이시다. 그 위대하심은 측량할 길이 없다. 주님께서 하신 일을 우리가 대대로 칭송하고 주님의 위대한 행적을 세세에 선포하렵니다. 주님의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내가 가슴 깊이 새기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두려운 권능을 말하며 나는 주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렵니다. 사람들은 한량없는 주님의 은혜를 기념하면서 주님의 의를 노래할 것입니다. 주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다. 주님은 모든 만물을 은혜로 맞아 주시며 지으신 모든 피조물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주님, 주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이 주님께 감사 찬송을 드리며 주님의 성도들이 주님을 찬송합니다. 성도들이 주님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주님의 위대하신 행적을 말하는 것은 주님의 위대하신 위엄과 주님의 나라의 찬란한 영광을 사람들에게 알리려 함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며 주님의 다스리심은 영원무궁 합니다”(시편 145:1-13).


하느님은 창조 전엔 뭘 하셨을까?


하느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기 전에 뭘 하고 계셨을까요? 저는 이런 게 궁금할 때가 있는데 여러분은 안 그렇습니까? 요즘은 이럴 때 다들 구글(google)을 검색하지요. 그래서 저도 해봤는데 실망했습니다. 구글은 성서 이곳저곳을 인용하는 것 외에 별다른 답을 주지 않더군요. 그것들은 구글이 내린 대답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대답을 구글이 모아놓은 것이지만 말입니다. 예컨대 요한복음 1장 첫 구절,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말씀’(Logos)인 예수님이 천지창조 이전에도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는 글을 소개하더군요. 또 창세기 1장 첫 구절,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느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를 인용하면서 ‘하느님의 영’은 신약성서의 ‘성령’과 같다면서 창조 이전에 하느님은 성령과 함께 계셨다는 등의 답이 고작이었습니다. 창세기 1장의 ‘하느님의 영’(루하흐 엘로힘)을 보혜사 성령과 동일시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해석입니다. 구글이 인용한 두 구절을 합치면 삼위일체가 되어 성부 하느님은 성자 예수님(로고스), 성령 하느님(하느님의 영)과 함께 계셨다는 얘기가 됩니다. 제 질문은 창조 이전에 하느님이 ‘누구와 함께’ 계셨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 인데 그에 대해서 구글은 답을 주지 않습니다. 구글이 모르는 것도 있네요.


유대인들 농담 중에 이런 게 있답니다. 한 아이가 랍비에게 “하느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기 전에 뭘 하고 계셨어요?”라는, 제가 가진 것과 똑같은 물음을 했더니 랍비는 “너 같이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녀석 맴매하려고 회초리를 만들고 계셨단다.”라고 대답했답니다. 아이의 물음에 성의껏 대답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비교육적이지만 이것은 단순한 농담은 아니고 ‘나름의’ 신학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인이 되기 전에 아이들이 쓸데없는 상상이나 추측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읽지 못하게 하는 성서구절들이 있는데 창세기 1장 1절도 그 중 하나라고 합니다. 오래 전에 그 명단을 본 적이 있는데 지금은 기억나는 게 별로 없습니다. 창세기 1장 첫 절 외에 에스겔의 여러 구절이 거기 포함된다고 기억합니다. 그 구절들을 못 읽게 한다는 말은 공식적인 예배 때 읽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이들이 개인적으로 읽는 것이야 막을 수 없지요. 금지하면 더 하고 싶은 법이니 개인적으로는 더 많이 읽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성서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말하는가?


흔히 성서가 말하는 창조를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n out of nothing, 라틴어로 creatio ex nihilo)라고 부릅니다. 하느님이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오랫동안 그렇게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성서가 정말 그것을 말하는지는 의문입니다.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도 많았는데 이들은 창세기 첫 장 첫 절만 봐도 성서의 창조가 ‘무로부터의 창조’가 아님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느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욥이 “제가 왜 이렇게 정당하지 않은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라고 하느님께 따져 물었을 때 하느님은 욥에게 이렇게 반문하셨습니다. “네가 천지가 창조될 때 그 자리에 있었느냐?” 이렇게 물으면 그렇다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창조 때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으니 말입니다.


성서의 창조이야기에 따르면 창조 때 아무도(nobody) 없었던 것은 맞지만 아무 것도(nothing) 없지는 않았습니다. 창세기 1장 첫 절에 나오는 ‘혼돈’ ‘공허’ ‘어둠’ ‘깊음’ 등의 말은 추상명사이니까 제쳐두더라도 ‘땅’과 ‘물’은 명백하게 물질명사입니다. 성서는 창조 때 “‘땅’이 혼돈하고… 하느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창조 이전에도 뭔가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적어도 ‘땅’과 ‘물’은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서의 창조를 ‘무로부터의 창조’라고 보는 데는 문제가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는 초대교부들이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 내놓은 주장으로서 성서의 창조이야기와는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믿어온 ‘무로부터의 창조’와 다른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상당히 일찍부터 있었습니다. 이들 주장에 따르면 창세기 1장의 창조는 말하자면 일종의 ‘가르기’와 ‘질서 세우기’입니다. 창조 첫째 날에 하느님은 빛과 어둠을 나눴고 둘째 날에는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나눴으며 셋째 날에는 육지와 바다를 나눴고 넷째 날에는 낮과 밤을 나눴으며 다섯 째 날에는 동물들을 공중동물, 육지동물, 바다동물을 나누는 등, 창조는 혼돈스럽게 뒤섞여 있던 것들을 구별해서고 나누어 질서를 세워나가는 과정이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창조가 7일 만에 완성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창조는 과거 어느 한 때에 완전한 모습으로 완성된 게 아니라 현재도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는 일종의 ‘과정’이라는 겁니다. 세상은 과거에 완성된 채로 우리 앞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지금도 만들어져가는 중입니다. 오래 전 서울에 살 때 한 서점에 갔다가 제목을 보고 깜짝 놀라서 거금을 주고 구입한 책이 있습니다. 유럽 신학자 에버하르트 윙(Eberhard Jüngel)엘이란 분이 쓴 <God’s Being Is in Becoming>이란 책이 그것입니다. 번역하면 ‘하느님의 존재는 형성되는 중이다, 만들어지는 중이다’ 쯤이 되겠습니다. 지금은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칼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에 관한 책인데 성서가 말하는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라기보다는 ‘가르고 나눠서 질서를 세우는 과정으로서의 창조’라는 주장도 거기서 읽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찬양’은 예배의 필수요소


우리는 지난 4주 동안 레위기를 읽으면서 제사의식, 곧 예배의 중요성과 의미와 기능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그때는 주로 희생제사에 관해 얘기했지만 예배에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 반드시 있어야 하는 요소는 ‘찬양’(讚揚, praise)입니다. 찬양의 역사는 예배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됐습니다. 찬양이 없는 예배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찬양은 예배에서 필수적입니다.


찬양의 ‘형식’은 시대에 따라서, 문화적, 종교적 배경에 따라서 다릅니다. 주로 음악이 사용되지만 다른 예술형식도 사용됐습니다. 음악의 경우도 사람의 목소리뿐 아니라 다양한 악기들이 사용됐습니다. 때론 요란하고 열광적으로 찬양하기도 했지만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도 찬양했습니다. 침묵도 찬양의 한 방법이었습니다. 이렇듯 형식은 다양하지만 예배에서 찬양이 빠지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성서의 대표적인 찬양이 시편인데 무려 150편이나 되는 많은 시편이 있다는 사실은 예배에서 찬양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본래 시편에는 가락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시편을 읽지 않고 노래합니다. 현란한 멜로디와 화려한 애드리브는 없고 음정의 높낮이 변화도 크지 않았지만 시편은 분명 노래, 곧 찬양입니다.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구원 사건을 경험한 후에 그에 대한 응답으로 부른 노래라고 주장한 학자는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다는 구약학자 게르하르트 폰 라트(Gerhard von Rad)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사건에 대한 사람의 반응, 응답, 특별히 노래로 한 응답이 시편의 찬양이라는 겁니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하느님이 구원사건을 벌일 때 이스라엘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그 일이 마무리된 후에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는 겁니다. 하긴 히브리 노예들이 이집트를 탈출했을 때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파라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파라오는 하느님이 내린 열 가지 재앙을 겪은 후에, 특히 모든 장자가 몰살당하는 참변을 겪은 후에 비로소 히브리인들을 내보냅니다. 히브리 노예들은 한 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홍해가 갈라졌을 때도 두려워한 것 말고는 한 게 없었고 여리고 성이 무너졌을 때도 뿔 나팔 부는 사제들 뒤를 따라서 성 주위를 걸은 것 외에는 한 게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하느님이 일으킨 구원사건이 끝난 다음에 노래를 지어 하느님이 하신 놀라운 구원의 사건을 감사하며 찬양하며 축하했다는 것이 폰라트의 주장입니다.


그보다 약간 후대 학자인 크라우스 베스터만(Claus Westermann)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시편의 찬양은 단순히 하느님의 구원사건에 반응하고 응답하는 감사의 노래에 그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예배에서 했던 찬양은 과거 어느 때 벌어졌던 구원사건을 단순히 기억해서 되돌아보고 노래한 게 아닙니다. 하느님이 태초에 세상을 완성된 모습으로 창조하셨고 사람은 타자로서 그걸 향유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은 혼돈(카오스)을 갈라내고 질서를 세우심으로써 창조사역을 계속하고 계시고 사람은 거기에 파트너로서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하느님의 구원사건에 대해서도 사람은 그것과 떨어져서 객체로 머물지 않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동반자로 거기에 참여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하고 다짐하고 실천하는 마당이 바로 예배이고 그 중에서도 찬양이라고 베스터만은 주장합니다. 찬양은 늘 변조되어왔고 편곡되어 왔습니다. 과거에 벌어졌던 하느님의 구원사건을 같은 가락과 같은 노랫말로 반복해서 부르는 게 아니라 변조된 가락과 노랫말로 편곡하고 개사해서 부름으로써 지금 여기 자신들의 얘기를 담아냈습니다. 그들은 찬양을 하면서 ‘다른 세상’을 꿈꾸고 봤고 경험했던 겁니다.


어거스트의 음악은 곧 찬양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태어난 줄도 몰랐고 어머니는 아이가 태어나는 중에 죽을 줄 알았습니다. 그 아이가 사실은 죽지 않고 누군가에게 입양됐다가 고아원으로 옮겨져 거기서 자랐습니다. 그는 나이 많은 원아들의 놀림을 받으며 자랐지만 언젠가는 부모가 자기를 데리러 올 거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부모가 자길 찾으러 오지 않자 그는 스스로 부모를 찾아 나섭니다. 이 아이는 보통사람 이상으로 많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고 그 소리들을 음악으로 들을 줄 아는 비상한 탤런트를 가졌습니다. 그는 음악이 자기를 부모에게 데려다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거리를 헤매고 다니며 많은 소리들을 듣습니다. 우연히 만난 아이를 통해 몸을 의지하러 찾아간 곳이 하필 아이들을 거리로 내보내 ‘앵벌이’ 시키는 나쁜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어거스트는 거기서 자신이 천재적인 음악재질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가 한 교회에 찾아든 것은 우연을 가장한 하느님의 섭리 같은 것이었을까요, 그는 거기서 피부색 짙은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습니다. 그 광경을 조금만 볼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v=8DwW0dCQHPQ


그가 줄리아드에 들어가고 곡을 만들어 공원에서 연주하고 그것을 통해서 부모를 만나는 줄거리는 전형적인 해피엔딩 스토리요 할리우드 스타일이지만 그런 걸 감안하고 봐도 감동적입니다.


긴 세월 교회생활을 하는 동안 제일 듣기 싫은 말은, 그래서 저는 절대 사용하지 않는 말이 ‘준비찬송’ 또는 ‘준비찬양’이란 말입니다. 찬양은 뭔가를 준비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찬양은 예배의 메인이벤트를 하기 전에 하는 오픈게임처럼 벌이는 행사가 아닙니다. 찬양은 말씀을 듣기 전에 예배자의 감정을 달아오르게 하려고 벌이는 퍼포먼스도 아닙니다. 사람의 감정을 건드려서 무슨 말에든 ‘아멘!’ 하고 화답하게 만드는 수단도 아닙니다.


찬양은 꿈을 꾸는 행위입니다. 찬양은 다른 세계를 꿈꾸는 행위입니다. 어차피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은 찬양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지금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심초사하신다고 믿고 그 일에 우리를 동반자로 부르셨다고 믿는 사람이 찬양합니다. 오랫동안 이 땅의 흑인노예들이 매를 맞아가면서 ‘우린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를 부른 것은 그 노래가 자기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해주고 고통을 잊게 만들어줬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 찬양을 부르면서 실제로 자신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실현되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행진에 참여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니, 그 찬양을 부르면서 그들은 실제로 그 행진에 참여하여 그 대열 안에 있었습니다.


찬양은 세상을 바꾸는 역동적인 시(詩)


찬양은 지금 주어진 세상(status quo)은 별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산문’(散文)의 언어가 아닙니다. 찬양은 지금 나의 삶을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운명이나 팔자로 받아들이고 입 다물고 사는 맥없는 산문의 언어가 아닙니다. 나는 내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 세상은 바뀔 수 있다, 하느님은 나와 세상을 지금 이대로가 아니라 바른 방향으로 바꾸시려 한다, 그 일을 하기 위해 나를 부르셨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온 맘과 온 영혼과 온 몸을 바쳐 외치는 시(詩)적 언어입니다. 나의 삶은 내가 희망하는 대로 바뀔 수 있다, 나는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터뜨리는 살아 숨 쉬는, 역동적인 시적 언어입니다.





우리에게는 도덕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각자가 갖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도 해결해야 합니다. 매일의 일상이 무겁기만 하고 그 안에서 허덕이며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위로의 말씀도 필요합니다. 그뿐인가요, 올바른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올바른 가르침(교리)도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모두 ‘힐링’을 외치는데, 사실 한 주간 세상에서 부대끼면서 사는 몸과 마음과 영혼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것도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 못지않게, 아니 이 모든 것들보다 더 중요하고 절실한 것은 지금 현재 나의 삶을 더 낫게 바꾸겠다는 의지요 희망이며,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믿음입니다. 나와 내 후손이 살아갈 세상이 지금보다는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하느님나라의 이상에 좀 더 다가가고, 외롭고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 물질로나 정신, 영혼으로나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풍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희망,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과 자신감입니다. 찬양할 때 그런 희망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찬양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노래이고 그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행위입니다. 찬양은 그 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이른바 현실이라는 것과 기존질서를 뒤집어엎을 수 있는 힘을 갖게 해줍니다.


어린 어거스트 러쉬는 음악에서 그걸 봤습니다. 저는 그의 천재적 음악 재능이 그걸 보게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구성으로 보면 비현실적인 그의 천재적 재능은 부모를 빨리 만나게 하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궁극적으로 그가 부모를 만나게 된 것은 그의 음악에 담겨 있는 찬양의 힘이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찬양시간에 때로는 찬송가나 복음성가가 아닌 이른바 ‘세속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걸 불편해 하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심각하게 그에 대해 제게 질문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찬양을 찬양으로 만드는 게 뭘까? 그냥 노래와 찬양은 뭐가 다를까? 예수님, 하느님, 믿음, 은총 등의 언어가 가사에 담겨 있는 노래는 다 찬양일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나라를 꿈꾸고 그걸 실현할 수 있다고 굳게 믿으며 굳어 있는 현실을 바꾸겠다는 믿음을 가장 적절한 멜로디와 노랫말로 표현하는 노래가 찬양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찬양시간에 더욱 힘차게, 열정적으로 찬양합시다. 그냥 노래에 취해서 찬양하지 말고 내가, 우리가 이 찬양을 부르면서 새 술을 낡은 부대에서 새 부대로 옮기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찬양합시다. 그렇게 한다면, 저는 여러분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생이 달라질 겁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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