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함께 읽는 십계명(13)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 어느 희망에 관한 이야기

 

욕망과 지배

마지막 계명 역시 겉으로 드러난 행위가 아닌 마음에 품고 있는 ‘욕망’을 문제 삼습니다. 성서에서 ‘욕망’이란 말이 처음 등장하는 구절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인 창세기 3장 16절이란 사실을 아셨습니까?

 

한글성경이 이 구절은 다양하게 번역해서 원래 뜻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이럴 때는 영어성경을 참고해야겠지요. 우선 한글성경을 보겠습니다. 개역개정판은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라고 번역했고 표준새번역은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번역했으며 공동번역은 “(너는)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고 번역했습니다. 후반절은 모두 남편의 지배를 받으리라는 뜻이지만 상반절의 경우는 개역개정판은 ‘남편을 원한다’고 번역해서 ‘남편을 지배한다’는 뜻으로 번역한 나머지 두 번역본과 내용이 다릅니다. 어느 번역본을 택하느냐에 따라 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크게 달라집니다. 그런데 영어성경은 예외 없이 “너의 갈망은 네 남편을 향하겠고(또는 위한 것이고) 그는 너를 지배할 것이다(yet your desire shall be for your husband, and he shall rule over you).”라고 번역했습니다. 히브리어 ‘트슈카’는 ‘너의 갈망’(your longing, desire)이라는 뜻입니다.

 

이 구절은 남녀평등과 관련된 논쟁의 중심에 서있습니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구절로 이해됐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만 보면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이 구절은 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 성서를 읽었을 때 잘못된 해석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성서가 쓰였을 당시에는 중동지역 어디서도 남녀의 지위가 평등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개념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요즘 사정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져서 적어도 문명사회에서는 대놓고 남녀불평등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성서시대처럼 사는 일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습니다. 성서를 죽은 책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하느님 말씀으로 읽으려면 오늘의 상황에 맞춰서 새롭게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문제는 이 구절에 드러난 ‘욕망과 지배’의 관계입니다. 곧 ‘너는 남편을 욕망하고’라는 말과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는 두 서술의 관계를 생각해보려 합니다.

 

첫째로, 남편에 대한 아내의 욕망과 아내에 대한 남편의 지배를 병렬관계로 볼 수 있습니다. 둘이 어떤 식으로든 묶여 있지 않고 전혀 별개란 얘기입니다. 원문에서 둘은 ‘그리고’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이렇게 해석할 여지는 충분합니다.

 

둘째로, 둘 사이의 연결사를 ‘그러나’로 볼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어 연결사 ‘베’는 문맥에 따라서 ‘그리고’ 또는 ‘그러나’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문장은 “너는 남편을 욕망하겠지만 남편은 너는 지배할 것이다.”로 읽힙니다. 아내는 남편을 욕망하겠지만 남편이 아내의 욕망을 누르며 지배할 거라는 뜻이라는 겁니다.

 

셋째로, 흔치는 않지만 히브리어 연결사 ‘베’는 ‘왜냐하면’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너는 남편을 욕망할 것이다. 왜냐하면 남편이 너를 지배할 것이기 때문이다.”가 됩니다. 그렇다면 아내에 대한 남편의 지배가 남편에 대한 아내의 욕망을 만들어낸다는 뜻이 됩니다. 이렇듯 연결사 하나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문장의 뜻이 달라집니다. 어느 편을 택할 것인가는 읽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쪽을 택해야겠지요.

 

어느 편을 택하든 이 구절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욕망과 아내에 대한 남편의 지배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대체로 네 가지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욕망 때문에 지배하는 경우, 둘째는 욕망 때문에 지배받는 경우, 셋째는 때에 따라 지배하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경우, 마지막으로 지배하면서 동시에 지배받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네 해석이 모두 가능하지만 저는 영화 ‘어느 희망에 관한 이야기’를 욕망과 지배의 역설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네 번째 경우로 읽었습니다.

 

 

 

어느 희망에 관한 이야기

 

영화는 펑크 그룹 ‘시티 데스’(City Death)의 공연으로 시작됩니다. 젊은 관객들은 보컬 아르투르의 열창에 열광합니다. 그는 십계명을 어기라고 노래합니다. “살인하라, 살인하라! 간음하라, 간음하라! 남의 물건을 훔쳐라….” 이때 카메라는 손을 흔들며 관객을 뚫고 그에게 다가가려 애쓰는 한 중년 남자를 비춥니다. 그는 아르투르의 형인 저지인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동생에게 전하려고 애써 관객을 뚫고 그에게 다가갔던 겁니다.

 

아버지가 죽었는데 형제는 별로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아버지와 연락을 끊고 지내왔습니다. 장례식 후 형제는 아버지가 살던 아파트에 갔습니다. 아버지 살아생전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아파트에 뭐가 남아 있는지 보려 했던 겁니다.

 

아파트 문은 여러 개의 자물통으로 단단히 채워져 있었습니다. 겨우 열고 들어가니 요란하게 알람이 울립니다. 작고 초라한 아파트에 웬 자물통이 그리 많은지…. 아파트 안은 매우 더러웠고 어항 속 물고기는 굶어 죽어 있었습니다. 창문은 못질을 해서 열지 못하게 해놨고 캐비닛이 몇 개 있는데 그것들 역시 다수의 자물통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형제는 기대를 갖고 캐비닛을 열었습니다. 혹시 보석 같은 것이 있나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보석은 없고 몇 권의 우표 책들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이에 실망한 형제가 값나가는 것이 있나 아파트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동안 어떤 사람이 와서 아버지에게 꿔준 돈이 있다며 돈 대신 물건으로 가져가겠다고 합니다. 형은 적당히 둘러대서 그를 돌려보내는데 그는 지나가는 말투로 아버지의 우표를 처분할 생각이 없냐고 묻습니다. 그때까지도 형제는 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우표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었고 아버지가 우표 수집하느라 가정을 돌보지 않았기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 후 몇몇 수수께끼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형이 아버지가 소장하던 한 우표세트를 아들에게 줬는데 아들은 그걸 가치 없는 우표 수백 장과 바꿨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우표세트는 매우 값비싼 게 아닙니까. 아들은 모르고 그걸 무가치한 우표들과 바꾼 거죠. 그는 우표상에게 가서 항의했지만 주인은 정당한 거래였다며 물러줄 수 없다고 합니다. 동생도 기이한 일을 겪습니다. 그가 우표수집상 쇼에서 우표수집협회장을 만났는데 그는 아버지가 수집한 우표들을 살펴보고 나서 그것들이 엄청난 가치를 가졌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까.

 

아버지의 수집한 우표의 가치를 알게 된 형제는 도둑맞지 않으려고 아파트의 보안을 강화했습니다. 알람을 새로 설치하고 사나운 개까지 사들였습니다. 우표를 제값을 받고 팔려면 우선 그걸 잘 지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형은 멋진 계략으로 아들이 싸게 판 우표를 돌려받는 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그에게서 오스트리아 로즈 머큐리 우표에 대한 얘기를 듣습니다. 세 장짜리 세트 중 두 장은 아버지가 갖고 있고 한 장은 자기가 갖고 있는데 세 장을 모두 모아서 팔면 가치가 엄청나게 뛴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갖고 있는 한 장은 돈 받고 팔지 않겠고 대신 신부전증을 앓고 있는 자기 딸에게 신장을 기증하는 사람에게 그걸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검사해보니 형의 신장을 이식할 수 있다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형은 고민 끝에 자기 신장을 수집상의 딸에게 기증했습니다. 그 동안 아파트는 줄곧 동생이 지켰지요. 형이 수술에서 회복한 후 둘이 아파트에 가보니 도둑이 들어 모든 걸 훔쳐간 다음이었습니다. 도둑은 능숙한 솜씨로 보안장치를 무력화한 후 모든 걸 훔쳐갔습니다. 무섭고 사나운 개도 소용없었습니다. 둘은 경찰에 신고했지만 도둑맞은 우표를 되찾을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형은 왜 개가 짖지 않았는지가 궁금했습니다. 혹시 개가 아는 사람이 훔쳐간 것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심지어 형은 동생을 의심하게 됐고 반대로 동생도 형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따로 경찰을 만나 형제가 의심스럽다고 말합니다. 둘 사이에 불신의 벽이 생긴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둘이 각각 거리를 걷다가 아는 사람들이 걸어가는 걸 보게 됩니다.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줬다던 사람, 우표수집상협회장, 아들에게 우표를 사들인 사람 등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호화롭게 차려입고 형제가 사 놓은 개와 똑같은 개를 데리고 걷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형제는 진상을 파악합니다. 그들 모두가 짜고 우표를 털어갔던 겁니다. 영화는 두 사람이 서로를 쳐다보며 크게 웃는 것으로 끝납니다.

 

욕망하게 만드는 사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 하와에게 내려진 징벌은 산고(産苦)와 남편에 지배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욕망과 지배 사이의 관계를 봅니다.

 

욕망은 뭔가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소유해서 지배하고 싶은 게 욕망입니다. 하지만 욕망이란 게 묘해서 소유하고픈 것을 소유한다고 해서 욕망이 채워지는 게 아닙니다. 또 다른 욕망이 생겨나지요. 새로운 욕망은 본래 갖고 싶던 것을 갖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그걸 갖게 된 다음에 새롭게 생겨난 새로운 욕망입니다.

 

사람의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을 것을 채우려 합니다. 절대 채워지지 않기에 욕망에는 종착역이 없는 게 문제입니다. 게다가 욕망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건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욕망이 사람을 소유하고 있고 지배합니다. 아담과 하와 이야기는 이 사실을 아내와 남편의 관계에 빗대서 “너는 남편을 욕망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표현했던 겁니다.

 

형제는 아버지가 수집한 우표의 가치를 알기 전엔 평범한 소시민이었지만 우표의 가치를 알게 된 후엔 달라졌습니다. 우표의 금전적 가치에 주목해서 그걸 가급적이면 더 큰 돈에 팔려고 했습니다. 영화에서는 이들이 탐욕의 지배를 받게 되는 과정이 재미있게 그려집니다. 그렇지 않아도 비싼 우표세트의 빠진 한 장마저 구해서 더 비싸게 팔려고 신장 하나를 ‘기증’(?)하는 모습은 사람이 얼마나 쉽게 탐욕의 지배를 받는지 보여줍니다. 사람은 굳이 비장하지 않고 웃으면서도 탐욕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도 웃고 남도 웃기면서도 탐욕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는 비극을 얼마든지 연출할 수 있습니다. 처음엔 뭔가를 욕망하여 그걸 소유하고 지배하려 애쓰다가 결국 욕망 자체를 욕망하는 지경에 다다릅니다.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는 겁니다. 욕망에 대한 사람의 지배가 사람에 대한 욕망의 지배가 되고 마는 겁니다.

 

이렇듯 욕망은 사람의 의지와 힘만으로 다스리기가 매우 어려운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우리 사회에는 욕망을 북돋우고 마음껏 발휘하라고 불 지르는 것이 있는데 ‘시장경제의 꽃’이라고 불리는 ‘상품광고’가 그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람이 뭔가가 필요해서 구입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필요’가 느껴질 때까지 사람을 가만히 놔두는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필요를 자극하는 사회, 나아가서 필요를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쉴 새 없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상품광고는 필요를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기계와 같습니다. 상품경제는 물건을 만들어내기 전에 필요부터 먼저 만들어내는 체제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광고되는 상품을 갖고 있지 않으면 결핍감을 느낍니다.

 

이런 현실에 중독된 결과 사람은 자기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뭔지 망각하게 됩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과 진정 필요한 걸 구별하지 못합니다. 더욱이 상품광고는 끊임없이 나와 이웃을 비교하게 만듭니다.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이웃이 갖고 있는 것을 알면 결핍을 느끼도록 강요하는 기계가 시장경제의 상품광고입니다. 그것은 ‘탐욕’을 ‘야망’으로 착각하게 만들고 ‘사치’를 ‘필요’와 혼동하게 만듭니다. 욕망이 없다면 다른 사람보다 앞설 수 없고 더 좋은 삶을 살 수 없다고 주입하는 사회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입니다.

 

탐욕 없이도 행복한 사람들

 

뭔가를 갖고 싶어 하고 남이 갖고 있는 걸 자기도 가지려 하며, 심지어 욕망을 욕망하는 이유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물어야 할 질문은 ‘우리는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가?’가 되겠습니다.

 

오래 전에 신문에서 흥미로운 칼럼을 읽었습니다(권태선 칼럼, ‘행복지수가 두려워서야’ 한겨레신문 2010년 1월 31일). 경제상황이나 교육, 의료제도 등 사람의 행복에 영향을 주는 여러 요인들을 분석해서 나라의 행복지수를 발표하는 기관이 여럿 있습니다. 그 중에서 세계가치관조사(World Values Survey)와 영국 레스터 대학이 각각 2008년과 2006년에 조사해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덴마크가 모두 1위였답니다. 한국은 앞의 조사에서는 62위를, 뒤의 조사에서는 102위를 차지했는데 1인당 국민소득이 3-40위인 점을 고려하면 한국국민의 행복지수는 국민소득에 비해 무척 떨어지는 셈입니다.

 

‘행복’이 삶의 궁극적인 가치라고 할 때 많은 부자나라들을 제치고 인구 1천 만 명도 안 되고 천연자원도 별로 없으며 경제의 대외의존도와 직업 불안정성이 높은 수준인 덴마크가 행복지수 1위를 차지했다는 점은 의외입니다. 노동유연성(달리 말하면 쉽게 해고할 수 있는 정도)은 높지만 이 나라 노동자들이 고용불안에 시달리지 않는 이유는 철저한 직업교육과 사회안전망 덕에 쉽게 새 직장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병에 걸려도 거의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의료제도가 완벽하고 은퇴 후 생활도 안정되어 있습니다. 물론 세금 부담이 매우 높지만 세금으로 낸 돈이 복지로 환원되는 비율이 워낙 높아서 국민들은 불만이 없다는 겁니다.

 

덴마크의 교육현황을 보면 이상세계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유아원 아이들은 모두 집에서 간식을 갖고 가는데 먹을 때는 음식을 모두 모아놓고 나눠 먹는답니다.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을 하는데 이 기간에는 시험이 없고 수업은 토론식이라네요. 프랑스 영화 <클래스 The Class>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화에서 교사는 끈질기게 학생들과 대화하고 토론하며 답을 찾아갑니다. 제 눈에는 학생들의 태도가 너무 방자해서 화날 정도지만 교사는 화를 내지 않고 토론을 이끕니다. 이 모습에 저는 깊이 감동했습니다. 이런 교육이 경쟁 아닌 연대를 만들어내고 갈등과 투쟁이 아닌 대화와 타협의 문화를 만들어냈겠지요. 더 놀라운 사실은 덴마크가 이와 같은 복지제도의 근간을 구축한 때는 대공황이 닥친 1930년대였다는 사실입니다. 파이가 커야 나눌 것도 커진다는 말은 적어도 덴마크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영국의 신경제재단(New Economic Foundation)이 2006년에 실시한 행복지수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나라는 ‘바누아투’라는 이름도 못 들어본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호주 시드니에서 동북쪽으로 2,500km쯤 떨어진 남태평양 해역에 산재한 8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졌고 약 20만 명의 인구를 가진 미니 군도국가랍니다.

 

이 나라의 통계를 보면 한숨부터 나옵니다. 국민의 취업률은 7% 정도인데 취업자 대부분이 관광업에 종사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최고 빈곤국 중 하나인 바누아투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900달러로 전 세계 233개국 중 207위랍니다. 아무리 행복이 물질적인 부에 의해 결정되진 않는다지만 어떻게 이렇게 가난한 나라가 행복지수 1위를 차지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나라 한 관리는 바누아투 국민이 누리는 행복의 비결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물질이 풍부한 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직접 와서 느끼면 삶을 조금 알게 될 거라고 대답했답니다.

 

바누아투에는 약 사십 명 정도의 한국인이 살고 있습니다. 그 중 어떤 분이 한 신문과 인터뷰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바누아투 사람들이 행복한 이유는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고 단순소박하고 서로 나누고 존중하는 생활방식 때문이랍니다.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중대한 사회문제인 자살이 이 나라에선 지난 5, 6년 동안 단 한 건도 없었다가 얼마 전에 한 건 있었답니다. 자살자가 없는 이유는 공동체가 개인 삶에 든든한 의지가 되기 때문이랍니다. 각 섬의 족장과 연장자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공동체가 개인의 삶을 지지하고 있다는 거지요.

 

마지막으로 중미의 코스타리카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이 나라는 영국 신경제재단의 최근 조사에서 행복지수 1위를 차지했습니다. 이 조사는 국민이 자신의 생활만족도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수명, 의식주를 위해 자원을 생산하고 폐기하는 데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등의 변수로 측정됐습니다. 이 나라가 1위를 차지하는 데는 환경과의 친화성이 큰 요인이 됐답니다. 이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친환경적인 나라라는 명성을 갖고 있습니다. 코스타리카는 예일대학과 컬럼비아대학 전문가들이 발표한 ‘2010년 환경성과 지수’에서 163개국 중 3위를 차지했습니다. 영국 BBC 방송은 코스타리카가 친환경적 태도와 행복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나라이며 덜 물질적인 생활을 함으로써 일상이 단순해지고 그래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게 되고 그리하여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진 나라라고 설명합니다.

 

환경문제와 관련해서 이 나라가 취한 조치는 가히 획기적이라 하겠습니다. 이 나라는 그 어떤 선진국도 취하지 않는 정책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코스타리카는 개발도상국으로는 처음으로 2021년에 탄소중립국을 이루겠다고 선언했고 대규모 식목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1980년대에는 삼림이 국토의 20%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절반 이상으로 높아졌습니다. 1997년에는 이산화탄소세를 앞장서서 도입하여 이를 재원으로 산림보존 지원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 에너지 공급원의 90% 이상이 재생가능 자원이란 사실에 이르러서는 탄성이 나옵니다.

 

마지막 웃음, 그것은 희망

 

‘어느 희망에 관한 이야기’는 <십계명> 영화 열 편 가운데서 유일한 블랙코미디입니다. 다른 영화들은 모두 심각한데 마지막 에피소드인 이 영화만은 웃게 만듭니다. 저는 영화 제목이 왜 ‘어느 희망에 관한 이야기’일까를 생각해봤습니다.

 

고대 희랍철학은 사람의 몸과 영혼을 철저하게 구별했습니다. 그 중 어떤 분파(分派)는 몸을 영혼을 가두는 감옥으로 봤습니다. 영혼은 몸에 갇혀 있는 동안 자유롭지 못합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지(靈知 Gnosis)를 얻으면 몸이 죽는 순간 영혼은 자유로워진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사상의 영향을 신약성서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신약성서는 영지주의와 대립하고 싸웠지만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싸우면서 영향 받았던 거죠.

 

영지주의 가르침 중에는 관심이 가는 흥미로운 내용이 많습니다. 그들이 구약성서를 이해하는 방식 중에는 잘못된 것도 적지 않습니다. 물론 당시 상황 속에서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그 중 하나는 구약성서가 전적으로 물질적 사고에 머물러 있다고 본 겁니다. 구약성서는 영혼과 육체를 철저하게 구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물질적인 차원에만 매몰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희랍철학처럼 둘을 철저하게 구별하진 않지만 물질의 차원을 벗어난 뭔가가 있다는 생각은 구약성서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탐심을 규제하는 십계명 중 마지막 두 계명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계명이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 규제하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사람의 내면을 규제하려 했다는 사실은 구약성서가 겉으로 드러난 행위가 전부는 아니라고 이해했음을 보여줍니다. 구약성서는 겉으로 드러난 육체와 행위와 연관되어 있는 내면의 무엇이 존재함을 전제합니다. 그걸 ‘영혼’으로 부르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그런 뜻에서 예수께서 십계명을 극단으로 몰고 가거나 내면화하신 일도 전례가 전혀 없진 않습니다. 계명은 궁극적으로는 사람의 내면 또는 영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웃음으로 막을 내립니다. 형제는 자기들이 서로 의심했음을 무언으로 고백하고 용서를 빕니다. 탐욕에 대한 탐욕을 이기지 못해서 모든 걸 잃어버렸음을, 그래서 엉뚱한 사람들의 욕망을 채운 걸 알고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크게 웃습니다.

 

이 웃음은 뭘 의미할까요? 어떤 약점을 갖고 있든지, 어떤 실수를 저지르고 어떤 실패를 했든지, 얼마나 많은 계명을 어겼든지 사람에게는 새로 시작할 기회가 있다는 메시지가 아닐까요? 저는 이들의 웃음에서 그런 메시지를 읽었습니다. 탐욕으로 누군가를 지배하려 했다가 오히려 탐욕의 지배를 받게 됨을 경험한 후 애초부터 자기 게 아닌 것에 대한 미련과 탐욕을 버리고 새로 삶을 시작하면서 웃는 웃음 말입니다.

 

모두의 궁극적인 목표인 행복은 거저 얻어지지 않습니다. 행복해지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탐욕을 채워서 행복해지려 한다면 그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탐욕은 채우면 채울수록 새로운 탐욕이 새롭게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탐욕이란 채우고 또 채워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것에 대한 갈망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지수에 대한 조사는 행복해지는 데는 다양한 길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덴마크 식으로 철저한 사회보장제도가 행복의 조건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누아투 식으로 물질적 풍요에 집착하지 않고 단순소박하고 서로 나누고 존중하는 생활방식이 행복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코스타리카 식으로 자연과 더불어 사는 데서 행복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언뜻 보면 별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세 나라가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란 사실이 놀랍지만 공통점이 보입니다. 세 나라가 방법은 다르지만 탐욕에 지배되지 않고 그걸 제도와 문화로 제어한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덴마크는 세금을 통한 재분배제도로, 바누아투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 윤리로, 코스타리카는 자연의 리듬에 순응하는 자세로 말입니다.

 

이런 걸 보면서 행복은 노력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음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행복은 혼자 누리려 해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신기루일 뿐이란 사실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이런 점에서 여전히 지켜져야 하는 소중한 계명입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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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함께 읽는 십계명(12)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 어느 고독에 관한 이야기

 

‘탐심’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

 

가톨릭의 십계명은 이웃의 아내에 대한 탐심과 소유물에 대한 탐심을 구별해서 각각 아홉 번째, 열 번째 계명으로 세고 개신교는 이웃의 둘을 하나로 묶어 열 번째 계명으로 셉니다. 이 글은 가톨릭 셈법에 따라 영화를 따라가므로 이 글에서는 이웃의 아내에 대한 탐심만 다룹니다.

 

탐심에 대한 계명이 맨 뒤에 나오므로 다른 계명보다 가볍게 여겨도 된다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계명을 어기는 행위 밑바닥에는 ‘탐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맨 앞에는 야훼 하느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야훼 유일주의 신앙을 배치하고 맨 뒤에는 죄악의 뿌리인 ‘탐심’을 배치함으로써 십계명은 하느님에서 시작한 영적 여행을 사람의 마음에서 마무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라는 계명이 다른 계명들과 다른 점은 그것이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내적인 동기와 욕망에 대한 규정이란 데 있습니다. 십계명이 법정에서 통용되는 법률이 아님은 이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나쁜 생각이라도 마음속에 품고 있다고 처벌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행위로 실현되지 않고 마음으로만 갖고 있다면 그 어떤 악도 처벌하지 않습니다. 이게 흔히 말하는 사법적인 범죄(crime)와 종교적인 죄(sin)의 차이입니다.

 

학자들은 마음에 품은 생각과 밖으로 드러난 행위를 구별해야 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오랫동안 논란을 벌였습니다. 전자가 대체로 우세하지만 결국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 행동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둘을 엄밀히 구별할 수 없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습니다. 히브리어로 ‘탐내다’는 동사 ‘하마드’가 탐심을 품은 결과 남의 것을 소유하려는 행위까지 포함한다는 점도 후자의 근거가 됩니다. 하지만 구약성서 안에서 ‘하마드’의 용례를 광범위하게 조사한 결과 이 동사가 탐심에서 비롯된 행위까지를 포괄하지 않음이 확인됐습니다(신명기 7:25, 여호수아 7:21, 미가 2:2 등 참조). 물론 계명의 의미는 단어의 용법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일상적인 경험에 비춰보면 뭔가를 마음에 품는 것과 그걸 행동에 옮기는 것 사이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음도 사실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탐심에 대한 경계는 성서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고대 이집트의 지혜문서에도 탐심에 대한 경계가 자주 등장합니다. 피라미드 시대 문서인 <프타호텝의 교훈 The Instruction of the Vizier Ptahotep>에는 “남의 물건을 탐내지 말라. 네 몫이 아닌 것에 탐심을 품지 말라……. 아주 작은 탐심도 평온한 사람을 분쟁에 몰아넣기에 충분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원전 2천 년 경의 문서인 <메리카레 왕의 교훈 The Instruction of King Merikare>에서 왕은 후계자인 아들에게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것에 탐심을 품는 사람은 어리석다.”고 가르칩니다. 이집트 중왕국(Middle Kingdom) 시대의 한 지혜문서(The Tale of Eloquent Peasant)는 “위대한 사람이 탐심을 품고 있다면 그는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예들을 보면 탐심에 대한 경계는 고대인에게 새롭지 않습니다. 이집트 지혜문서와 십계명은 공히 탐심을 품은 사람을 법에 따라서 처벌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도덕, 윤리, 종교의 문제이지 법률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남의 아내에 대한 탐욕이 낳은 비극적 사건

 

다윗은 구약성서에서 이웃의 아내를 탐낸 죄를 저지른 인물입니다. 그는 헷 족속 출신의 수하 장군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가 목욕하는 관능적인 장면을 우연인지 의도적인지 목격하고 탐욕이 일어나 그녀를 취했습니다(사무엘하 11장). 여기까지는 권력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그는 자기의 죄를 숨기려 했는데 그러려면 더 큰 죄를 저지르게 되어 있습니다.

 

밧세바가 덜컥 임신했습니다. 다윗은 간음의 죄를 감추려고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입니다. 그가 밧세바와 동침하기를 바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충직한 우리야는 군인의 규율에 따라 집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근위병과 함께 밖에서 밤을 지냈습니다.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자 다윗은 더 큰 범죄를 계획합니다. 우리야를 죽이려 작정한 겁니다. 그는 군대 총사령관 요압에게 편지를 써서 그걸 우리야의 손에 들려 전쟁터로 돌려보냅니다. 편지는 그를 격전지로 보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를 죽이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요압은 왕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우리야를 격전지로 보내 죽게 했습니다. 그 후 다윗은 밧세바를 왕비로 맞아들였고 그녀는 다윗에게 아들을 낳아줬습니다.

 

얘기가 이렇게 끝났다면 잠시 씁쓸해 하는 걸로 그쳤겠지만 남은 얘기가 더 있습니다. 다윗과 밧세바가 저지른 불륜의 결과로 태어난 아기는 곧 죽었습니다. 이름도 얻지 못한 채 말입니다.

 

이 사건을 알게 된 예언자 나단이 왕에게 나아와서 우화(寓話) 형식을 빌려 추상같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당시에는 왕이 맘에 드는 여자를 취하는 일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탐심에서 비롯된 간음이 살인을 불렀고 다윗은 모든 일을 하느님이 없다는 듯이 해치웠다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은 다윗의 행위를 하느님을 얕보고 저지른 짓으로 규정했습니다(사무엘하 12:10). 그래서 그는 나단에게 고백합니다. “내가 야훼께 죄를 지었소.”(13절) 그러자 나단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훼께서 임금님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금님은 죽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님은 이번 일로 야훼의 원수들에게 우리를 비방할 빌미를 주셨으므로 밧세바와 임금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죽을 것입니다.”(13-14절)

 

아이가 병에 걸렸습니다. 다윗은 식음 전폐하고 베옷 걸치고 맨땅에 엎드려 밤새워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신하들은 임금의 정성에 감동했지만 엎드려 기도하는 다윗의 심정은 착잡했을 겁니다. 나단의 예언에 따르면 아기의 죽음은 하느님께서 다윗의 죄를 용서하셨음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죄를 용서받는 일은 은총이지만 그걸 아들의 죽음을 통해 확인해야 한다면 그걸 은총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다윗은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징벌을 이때 받았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나단은 다윗이 야훼를 얕봤기 때문에 그의 집안에 칼부림이 그치지 않을 거라고 예언했는데(10절) 이게 그대로 이루어져서 아버지의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아들들의 칼부림은 솔로몬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계속됐습니다. 이 모든 비극은 다윗이 한 여인의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일어난 탐심을 다스리지 못해서 일어났습니다.

 

어느 고독에 관한 이야기

 

영화 <십계명>의 다른 에피소드들처럼 이 계명에 대한 에피소드 ‘어느 고독에 관한 이야기’도 계명과의 연관성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의사인 로만은 항공회사 직원인 아름다운 아내 항카와 결혼한 지 10년이 지났는데 둘 사이에 아이가 없습니다. 어느 날 그는 의사이자 친구에게 성불구 판정을 받습니다. 의사는 그가 치료될 가능성이 없다면서 이혼할 걸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항카는 사랑하는 사이에는 섹스보다 더 중요한 것도 많다면서 로만이 성불구라고 해도 문제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로만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항카에게 애인을 만들라고 말합니다. 자기에겐 문제없다면서 말입니다. 항카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말하고 다시는 이 문제를 얘기하지 말자고 다짐합니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항카에게는 이미 젊은 애인이 있었습니다. 로만은 이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고 아내의 자동차 안에서 마리우스라는 이름이 적힌 대학생의 노트를 발견합니다. 로만은 그때부터 아내를 의심해서 전화에 도청장치를 달아놓지요. 로만은 아내와 마리우스가 불륜관계임을 확인합니다.

 

한편 로만의 집도로 심장수술을 받을 젊고 매력적인 여자 가수가 있습니다. 노래를 계속 부르려면 심장수술이 필수적입니다. 그녀는 자기 얘기를 로만에게 접근하는데 로만 역시 그런 그녀가 싫지 않습니다.

 

항카와 마리우스의 관계를 로만의 추측과는 좀 달랐습니다. 항카는 마리우스와 관계를 끝내려 했지만 마리우스는 그녀와 결혼하자며 막무가내로 조릅니다. 하지만 그녀는 둘의 관계는 이미 끝났다며 그를 돌려보내고 집을 떠나려는 순간 누군가 숨어서 자기를 엿보고 있음을 느낍니다. 로만이 벽장에 숨어서 엿보고 있었던 겁니다. 한바탕 설전(舌戰)이 오간 후 둘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기들 결혼생활의 미래에 대해 얘기하다가 아이를 입양해 키우기로 합의합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항카가 혼자 스키여행을 떠나는데 마리우스가 우연히 이를 알게 되어 그녀를 뒤따라갑니다. 항카는 이 사실을 몰랐는데 로만이 우연히 마리우스가 자동차에 스키를 싣고 어딘가로 가는 걸 목격하고 의심이 들어 확인해보니 그가 항카와 같은 스키장으로 간 게 아닙니까.

 

항카는 스키장에서 마리우스를 만납니다. 그녀는 놀라면서도 로만이 오해할 걸 걱정해서 집으로 전화하지만 로만은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갑니다. 로만은 항카를 오해해서 자살을 기도하지만 다행이 목숨을 건집니다. 집에 도착한 항카는 로만이 남겨놓은 편지를 읽고 그가 자살을 시도했음을 알고 망연자실합니다. 병원에서 깨어난 로만은 간호사에게 부탁해서 자기가 살아 있음을 항카에게 알립니다. 영화는 여기서 끝납니다.

 

탐욕을 버릴 수 있을까?

 

자기가 탐욕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요? 남들 눈에는 탐욕스러워 보이는 사람도 스스로는 그렇게 여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탐욕을 경계하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비유의 결론에서 예수께서 그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부르셨기에 그 이름이 붙어 있지만 내용을 보면 ‘탐욕스러운 부자’라는 이름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부모의 유산을 자기와 나누라고 형에게 말해달라는 어떤 사람의 요청에 대해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라고 말씀하신 후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한 부자가 어느 해에 곳간이 모자랄 정도로 많은 소출을 거두었습니다. 이에 그는 더 큰 곳간을 지어 곡식을 보관하기로 하고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을 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은 그에게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말씀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결론으로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느님께 대하여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13-21절).

 

예상보다 많은 소출을 거두어들였다면 누구나 이렇게 행동하지 않겠습니까? 왜 그를 어리석거나 탐욕스럽다고 합니까? 소출이 많아져서 큰 곳간을 짓고 곡식을 거기 보관하려 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물건을 잔뜩 쌓아놓았으니 마음껏 먹고 마시고 놀기로 작정했기 때문일까요? 두 가지 모두 때문일까요? 답은 생각보다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많이 쌓아두었다고 모든 사람이 놀고먹진 않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쌓아둔 것도 없으면서 일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탐욕과는 거리가 멀까요? 질문에 대한 답은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욕망이 모든 악과 불행의 뿌리라고 보고 욕망을 뿌리째 뽑아버려야 한다고 가르치는 종교가 있지만 그리스도교는 그렇게까지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서는 욕망 그 자체가 악의 뿌리라고 말하지도 않고 그걸 완전히 없앨 수 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서도 과도한 욕망이 악을 낳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제어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걸 뿌리째 없애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지도 않고요.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네 오른 눈이 너로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 또 네 오른손이 너로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마태 5:27-30).

 

이 말씀의 의미를 파악하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사람은 이미 간음한 것이니 간음죄는 극히 예외의 성자(聖者)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뜻일까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사람을 간음죄를 저지른 셈이니 모두 돌로 쳐 죽이라는 뜻일까요? 신체의 일부가 죄를 짓는다면 그 부분 없이 천국 가는 게 온전한 몸으로 지옥에 떨어지는 것보다 나으니 그 부분을 가차 없이 잘라내라는 뜻일까요?

 

죄는 몸으로 실행하기 전에 마음으로 저지릅니다. 벌도 집을 짓고 사람도 집을 짓지만 둘의 차이는 사람은 집을 짓기 전에 마음으로 집을 지어놓는 데 있듯이 사람은 죄를 몸으로 짓지만 그 전에 이미 마음으로 죄를 짓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눈을 빼고 손을 자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여자를 보고 음욕이 일어날 때마다 몸을 학대하라는 뜻도, 간음죄는 누구도 피할 수 없으니 피하지 말고 적당히 지으면서 살라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강조하는 바는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과 몸으로 행동하는 것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우리가 저지르는 죄가 얼마나 심각하고 중대한지 잊지 말라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죄 짓는 일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몸의 한 부분이 죄를 지으면 그걸 잘라낼 각오를 해야 한다, 물론 그런다고 마음까지 정화되지는 않지만 회개하는 걸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죄를 회개하는 일은 눈을 빼고 손을 잘라내는 일처럼 치열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양날 칼보다도 날카로워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가려냅니다.”라는 히브리서 4장 12절 말씀처럼 죄를 회개할 때는 날카로운 하느님 말씀 앞에 마주서는 심정이 되어야 합니다.

 

 

 

탐심의 뿌리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람에게는 성취할 수 없는 것을 갈망하고 채워지지 않는 것을 채우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탐심이 결코 채워지지 않고 탐욕을 절대로 만족시킬 수 없는 이유는 얻을 수 없고 채울 수 없는 걸 탐내기 때문입니다. 밑 빠진 독처럼 채우려 해도 채울 수 없이 때문입니다. 탐심은 놀라운 능력으로 사람을 속입니다. 매우 탐욕스런 사람도 자기가 탐욕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탐욕에는 착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또한 탐욕에는 갖고 싶은 대상이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게 만듭니다. 구약성서 전도서의 메시지는 평생 탐욕을 채우려고 쫓아다녔지만 종국에는 허무밖에 남은 게 없더라는 겁니다.

 

‘무엇’을 욕망하는가라는 물음보다 앞서 물어야 할 물음은 ‘욕망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입니다. 우리는 ‘왜’ 욕망하는가,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욕망하게 만드는가라고 질문해야 합니다.

 

탐욕의 반대는 ‘절제’가 아니라 ‘만족’입니다. 일이든 소유든 인간관계든 하느님과의 관계든 은총이든 축복이든 뭐가 됐든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것에 만족하려면 감사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만족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마음의 ‘상태’나 밖에서 뭔가가 주어졌을 때 절로 생기는 정신적 ‘반응’이 아닙니다. 기계적인 반응이 아니란 얘기입니다.

 

만족은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만족은 정적인 ‘정신상태’가 아니라 동적인 ‘정신활동’입니다. 만족이라는 정신활동은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무관하진 않지만 거기에 전적으로 의존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정신과 영혼이 주체적으로 활동한 결과로 만들어지는 겁니다. 밖으로부터 뭔가가 충분히 주어졌다고 해서 탐욕이 채워지지 않는 것처럼 만족도 밖에서 주어진 것에 의해 채워지고 말고 하는 비주체적인 정신상태가 아닙니다. 만족은 나의 영혼활동이 만들어내는 그 무엇입니다.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본래는 남자에게만 주어진 계명입니다. 여기서도 여자는 계명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사정까지 오늘날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영화의 초점이 남의 아내를 탐낸 마우리스에게 맞춰져 있지 않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초점은 로만과 항카 부부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영화와 계명의 관련성을 발견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영화는 남의 아내에 대한 탐심이 부부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심을 둡니다.

 

정상적인 부부관계가 불가능한 상황은 이 부부에게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습니다. 문제가 있는데 없는 척하고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택한 해결방법이 무엇인가가 문제입니다. 상대방을 부정직하게 대함으로써 사태를 해결하려 했던 게 문제였습니다.

 

로만은 아내에게 애인을 만들라고 권했습니다. 이는 ‘쿨’하게 들릴 수도 있고 ‘설마 정말 그렇게 하랴?’라는 심정이었을 수도 있지만 해서는 안 될 말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정직하지도 않은 말이었고요. 그는 아내에게 애인이 있다는 의심이 생기자 전화를 도청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벗고 있어도 부끄러운 줄 몰랐는데 선악과를 먹은 후에는 이를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서로 남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아담은 이를 ‘당신(하느님)께서 저에게 짝지어 주신 여자’ 하와의 탓으로 돌리면서 하느님을 끌고 들어왔고 하와 역시 ‘뱀에게 속아서’ 그랬다며 뱀 탓을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 사이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벌거벗고 다녀도 부끄러워하지 않던 사이가 가려야 하는 사이가 됐고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사이가 됐습니다. 로만과 항카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벌어진 원인은 로만이 성불구가 됐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불신하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로만과 항카는 서로 뭔가를 숨기고 숨겨진 사실을 밝혀내야 하는 사이가 됐습니다. 의심이란 걸 해본 사람은 그게 얼마나 사람을 병들게 하는 것임을 압니다. 로만은 질투 때문에 아내를 미워하게 됐습니다. 둘 사이에 미움이 끼어든 겁니다. 그는 마리우스와 관계를 정리했다는 아내의 말도 믿지 않았습니다. 의심하고 미워하게 되니까 상대가 진실을 말해도 그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그는 아내에 대한 오해를 풀지 못하고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로만에게 심장수술을 받을 예정인 젊은 가수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둘 사이의 얘기는 더 진행되지 않습니다. 둘 사이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그녀를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는 상당히 무거워 보입니다. 그녀의 역할은 마리우스의 그것보다는 더 큽니다.

 

저는 그녀는 ‘욕망의 전염성’을 말한다고 봤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말들 합니다. 사람은 남이 갖고 있는 걸 갖고 싶어 하고 그걸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안 되면 자신이 초라하게 여겨집니다. 로만과 젊은 가수의 관계는 로만에게 전염된 항카와 마리우스 관계입니다. 로만은 항카의 욕망을 욕망하게 된 것입니다. 항카가 누리는 걸 자기도 누리고 싶은 것이지요. 로만은 스스로 초라해지고 싶지 않은 겁니다. 젊고 매력적인 가수는 항카의 욕망을 욕망하고 싶은 로만에게 잘 어울리는 대상입니다.

 

항카 역시 남편에게 정직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는 애인이 있는데 애인을 가지라는 남편의 제안에 대해 ‘죽을 때까지 다시는 그 문제를 얘기하지 말자.’고 말하니 말입니다. 그녀가 남편을 속인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자기는 그런 생각을 조금도 안 해본 것처럼 죽을 때가지 거론하지 말자고 말한 겁니다. 게다가 그녀는 자기를 엿보다 들킨 로만에게 매우 당당합니다. 그 때 그녀가 마리우스에게 결별을 선언했기 때문일까요?

 

탐심도 고독에서 비롯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은 타인과 관계를 잘 맺지 못하기에 고독해지고 고독감을 메우기 위해 남의 것을 탐내게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남의 배우자를 탐내는 사람도 자기 배우자와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고독감을 메우기 위해 잘못된 방법을 선택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 박사가 쓴 글을 소개합니다. 그 글은 우리 주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얘기는 아니지만 도움이 된다고 여겨집니다. 고아로 자란 사람들 중에는 미련할 정도로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 많답니다. 고아는 자기가 필요할 때 원하는 만큼의 물리적, 정서적 보살핌을 못 받기 때문에 참는 게 성격으로 굳어진다는 겁니다. 고아 출신의 한국인 부인과 살고 있는 어느 외국인은 결혼 직후 아내에게 펀치 볼을 사줬답니다. 아내가 너무 참는 게 많아 보여서 순간순간 펀치 볼에 풀라고 말입니다.

 

이 처방이 아내에게 도움이 됐답니다. 하지만 진정한 도움은 펀치 볼을 때리는 데서가 아니라 남편에게서 자길 진정으로 걱정해 주고 지지해 주는 사람을 본 데서 왔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심리적 고아’로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고 합니다. 정신과 의사 눈에는 그런 사람들이 더 눈에 잘 띠겠지요. 그런 이들에게 필요한 건 그를 인정해 주고 격려해 주는 ‘한 사람’이랍니다. 그 한 사람만 있으면 정신적 고아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가 가슴을 뭉클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에게 그 ‘한 사람’이 되어주면 내게도 그런 사람이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말에 박수를 쳤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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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함께 읽는 십계명(11)

 

네 이웃에 대해서 거짓증거하지 말라(3)

- 어느 과거에 관한 이야기

 

 

진실과 거짓을 어떻게 구별할까?

 

‘거짓 예언’과 ‘거짓 예언자’는 예언서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입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모든 예언자들이 야훼의 참 예언자는 아닙니다. 그 중에는 거짓 예언자들도 섞여있는데 그들에게 ‘거짓 예언자’라는 명찰이 붙어있지 않아서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서는 거짓 예언자를 구별하는 기준을 말합니다. 예컨대 신명기 18장은 야훼께서 말하라고 하지 않은 것을 야훼의 이름으로 제 맘대로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사람은 거짓 예언자라고 말합니다(20절). 또 “예언자가 야훼의 이름으로 말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말은 야훼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니 너희는 제멋대로 말하는 그런 예언자를 두려워하지 말라.”(22절)고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언이 성취되면 참 예언자이고 성취되지 않으면 거짓 예언자란 얘기입니다.

 

예레미야 23장에 나오는 구별법은 좀 더 구체적입니다. 자기 마음속에서 나온 생각이나 환상을 야훼의 말씀이라고 전하는 자는 거짓 예언자라고 했습니다(16절). 사람들이 야훼의 말씀을 멸시하는데도 만사형통하리라고 말하고 제 고집대로 살아가는데도 재앙이 내리지 않으리라고 말하는 자도 거짓 예언자라고 했습니다(17절). 야훼께서 보내시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달려 나가 야훼께서 하시지도 않은 말을 야훼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자도 역시 가짜 예언자랍니다(21절).

 

모두 그럴듯한 기준이지만 충분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성취된 예언이 참 예언이란 것은 이해가 가지만 성취되지 않은 예언은 거짓 예언이란 말은 수긍하기 힘듭니다. 예언이 ‘언제’ 이루어지느냐도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이 성취되기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요? 그때까지는 참 예언인지 거짓 예언인지 판단할 수 없지 않습니까. 예수 재림은 2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 성취되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이 예언을 한 예수는 참 예언자일까요, 거짓 예언자일까요? 아직 진위(眞僞)가 판명되지 않았으니 판단을 유보해야 할까요? 예언자가 야훼의 말씀을 전하는지 자기 생각을 말하는지, 야훼에게 보냄 받았는지 아니면 스스로 달려 나왔는지는 예언자 자신 외에는 누구도 확언할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성서가 제시하는 판별법만 갖고는 예언의 진위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학자들이 성서에서 예언의 진위를 가리는 객관적인 기준을 찾을 수 없다고 결론내린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문제를 더 복잡하고 어렵게 만드는 점은 가끔은 하나님이 거짓말하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놀랍지만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왕 아합과 유대 왕 여호사밧이 라못 길르앗을 탈환하기 위해 힘을 합쳐 시리아와 전쟁하려 했을 때 미가야 예언자는 환상을 봤습니다. 야훼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아합의 예언자들에게 보내서 그를 꼬드겨 전쟁터에 나가게 해서 죽이려 한다는 환상 말입니다(열왕기상 22:19-22). 여기서 야훼는 아합을 ‘거짓말’로 속여 전쟁터로 불러내 죽게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 심판을 선포하라는 야훼의 명령을 받고 나서 이렇게 외칩니다. “아, 야훼 나의 하나님, 진실로 주께서 이 백성과 예루살렘을 완전하게 속이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안전하다’ 하셨으나 이제는 칼이 목에 닿았습니다!”(4:11). 야훼가 예루살렘에 약속한 안전은 거짓이란 얘기입니다. 야훼께서 당신 백성을 속이셨다는 뜻이죠. 예레미야는 자신의 예언자 직분에 대해서 이렇게 탄식조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야훼님, 야훼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야훼께 속았습니다. 야훼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들이 날마다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야훼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20:7-8). 예레미야가 야훼께 속아서 예루살렘의 심판을 외쳤는데 바로 그 때문에 자기가 백성들에게 모욕을 당한다는 얘기입니다.

 

엄밀하게 보면 예레미야의 말은 하나님이 거짓말을 했다는 신학적 주장이 아니라 자신이 선포한 심판이 실현되지 않아서 자신이 백성에게 조롱당하는 상황에 대한 일종의 하소연입니다. 심판을 선포했지만 예언자 자신도 그게 언제 이루어질지 모릅니다. 그게 지체되는 통에 그는 백성들에게 조롱을 당했고 그런 맥락에서 자기가 야훼에게 속았다고 하소연한 겁니다. 물론 야훼가 예루살렘의 안전을 약속했다가 그게 뒤집혔으니 백성들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냐는 예레미야의 주장은 예언의 관계적 성격을 간과한 면이 있습니다. 야훼의 심판은 백성들의 응답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예언자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메시지에 사람들이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언자가 야훼의 심판을 선언하셨다 해도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야훼는 이미 선언된 심판도 취소합니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하는 거짓말

 

성서는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걸 구별할 필요가 없다는 말도 물론 아닙니다. 진실과 거짓은 엄연히 존재하고 둘은 반드시 구별되어야 하지만 이를 위한 객관적인 기준을 성서가 제공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참과 거짓이 뚜렷이 구별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적지 않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그게 관건입니다.

 

우리가 이름을 아는 예언자들은 대부분 야훼의 보냄을 받은 참 예언자들입니다.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아모스, 요엘, 미가, 호세아 등이 모두 그렇습니다. 반면 거짓 예언자라고 판명된 예언자도 있습니다. 예레미야와 대립했던 하나니야와 미가야와 맞섰던 시드기야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참 예언자들이 실제로 활동했던 시기에는 그렇게 인정되지 않은 경우가 있다는 점입니다. 예언자 대접을 못 받은 사람도 있었고 원수 취급당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죽임당한 위기에 처하기까지 했습니다. 미가나 아모스가 살았던 시대의 사람들은 지금 그들이 어떤 대접을 받는지 본다면 놀랄지도 모릅니다. 자기들이 그토록 박해했던 자들이 참 예언자로 존경받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떻게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둘을 구별하는 왕도(王道)나 비방(秘方)은 없습니다. 참과 거짓을 판단해야 할 때마다 인용된 신명기와 예레미야 구절들과 그 외의 말씀에 근거해서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얻은 영적 분별력을 발휘해서 스스로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 판단이 옳다는 보증은 없습니다.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피해를 볼 수도 있고 상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영혼의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 받아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선포하는 메시지를 생각해보면 반성할 점이 많습니다. 특히 ‘메가처치’가 온갖 문제의 온상입니다.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계명과 관련해서 말하면 메가처치는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불쾌하지 만들지 않으면 좋은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뒤집으면 사람이 듣기 좋은 말만 한다는 뜻입니다. 더 신랄하게 말하면 교인들에게 아첨하는 말만 합니다.

 

 

꾸중이나 질책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어린아이도 꾸중 듣길 싫어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들어야 하는 꾸중이라면, 네 잘못을 정확하게 지적해주는 질책이고 내 영혼의 병든 구석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꾸중이라면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그런 꾸중과 질책은 들을 땐 고통스럽지만 결국에는 영혼이 치유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물론 여기엔 사랑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선포하는 메시지에는 이런 꾸중과 질책이 있어야 합니다. 설교에는 고통스런 질책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꾸중 듣길 싫어하긴 하지만 지루해서 졸게 만드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낫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현대교회의 특징은 죄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는 것이란 말이 있습니다. 수긍이 가는 얘기입니다. 진보적인 교회는 ‘사회악’은 말하지만 ‘개인의 죄’는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 말고 누가 사회악을 만들어낸다는 말입니까? 사회악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편 메가처치나 그게 되고 싶어 하는 교회는 죄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습니다. 교인들이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강조하는 교회는 전통적인 보수교회입니다. 하지만 이런 교회는 죄를 순전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질책하는 데 그칩니다. 교회는 사회악도 얘기해야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개인의 죄와 사회 전체가 죄로 기울어지는 성향에 대해서도 얘기해야 합니다. 듣기 싫어한다고 침묵해서는 안 되고 개인에게는 문제가 없다는 듯 덮어버려서도 안 됩니다. 이런 점에서 진보교회와 메가처치, 보수교회 모두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 많이 얘기하는 것과 실제로 죄의 문제를 진지하게 파고드는 것은 다릅니다. 죄로 물든 영혼의 심각성과 그것이 개인의 삶의 구석구석을 파고들어 타락시키는 현실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끈질기게 파헤치지 않고 그저 건성으로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는 교리를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죄에 대해서 많이 말하지만 진지하게 얘기하지는 않는 오늘날 교회가 갖고 있는 문제입니다.

 

네가 세상을 대하는 것과 똑같이 세상도 널 대할 것이다

 

 

참된 우정은 친구를 잃어버릴까봐 친구의 잘못을 모른 채하거나 참는 게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애인을 잃어버릴까봐 그의 병든 영혼에 진통제만 놓는 게 아닙니다. 교인을 사랑하고 세상을 섬기고 구원하려는 교회라면 거짓말로 교인과 세상을 마취하려 하지 말고 잘못된 길로 가는 그들이 회개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러려면 꾸중과 질책이 필요합니다. 물론 여기엔 애정이 담겨 있어야 하겠지요.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뒤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이끌고 나가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들 합니다. 《정글북》을 쓴 러디어드 키플링은 아들에게 주는 편지에서 “인생의 비밀은 단 한 가지, 네가 세상을 대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도 너를 대한다는 것이다…. 네가 세상을 향해 웃으면 세상은 더욱 활짝 웃을 것이요 네가 찡그리면 세상은 더욱 찌푸릴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진실하게 대하면 세상도 교회를 진실하게 대할 겁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거짓으로 대하면 세상도 그럴 겁니다. 세상이 웃는다고 따라서 웃는 데 그치지 말고 세상보다 먼저 웃으면 어떨까요? 세상이 찡그린다고 따라서 찡그리지 말고 먼저 웃어줌으로써 세상에 웃음을 찾아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영화에서 조피아와 엘즈비에타의 종교가 바뀌었습니다. 가톨릭 교인이었던 조피아는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했고 유대인 소녀였던 엘즈비에타는(그리스도인인지 확실치 않지만) 경건하게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둘이 어떤 종교를 믿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종교를 갖고 있는지 여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자기가 갖고 있는 종교에 얼마나 진지한가, 얼마나 진실하게 믿는가가 중요하겠지요.

 

조피아는 사람은 선과 악을 동시에 갖고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선해지기도 하고 악해지기도 한다고 했지요. 어렸을 때는 선과 악의 차이를 모르지만 자라면서 분명하게 그 차이를 깨닫는다고도 했습니다. 신은 모든 사람 안에 존재하지만 사람은 그 신을 거부할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신을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신을 거부하기로 선택한 사람에게 마지막에 남는 것은 외로움(loneliness)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신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이 달게 받아야 할 벌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조피아가 얘기한 유대인 아이를 미끼로 저항 운동가를 잡아들인다는 소문이 진실일까를 생각해봤습니다. 영화는 이에 대해 묘하게 침묵함으로써 여운을 남기지만 전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엘즈비에타는 그 얘기로 인해 사십 년 동안 꿔온 악몽에서 해방됐습니다. 조피아도 그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해 사십 년 동안 괴로워했는데 마침내 만나 구원받았습니다. 사랑이 담긴 진실한 말 한마디가 두 사람 모두를 악몽에서 해방시켜 준 셈입니다.

 

말은 사랑을 담아 건넬 때 진실해지고 상처도 주지 않습니다. 진실은 사실의 확인 이상입니다. 진실한 말에는 애정이 담겨 있기에 아픔을 치유하는 힘이 있습니다. 두 여인은 만나기 전엔 각자 자기 안에 똬리 틀고 앉아 괴롭히는 악마와 싸웠지만 이길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두 사람이 애정이 담긴 진실한 말을 나눴을 때 증오와 죄책감이란 악마에게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거짓을 없애려면 참된 말로써 관계를 회복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는 한 마디 말에 진실을 담으려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 마디 말로 깨진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는 믿음도 필요합니다. 사랑이 담긴 한 마디의 말이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 말입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네 이웃에 대해서 거짓증거하지 말라(1)http://fzari.com/767

네 이웃에 대해서 거짓증거하지 말라(2)http://fzari.com/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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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함께 읽는 십계명(10)

 

네 이웃에 대해서 거짓증거하지 말라(2)

- 어느 과거에 관한 이야기

 

어느 과거에 관한 이야기

 

조피아(Zofia)는 바르샤바 대학에서 윤리학을 가르치는 나이 많은 교수인데 어느 날 엘즈비에타(Elzbieta)라는 사십 대 폴란드 출신 미국 여인이 그녀 수업에 청강을 신청했습니다. 둘은 구면(舊面)이었습니다. 조피아가 뉴욕에 머물렀을 때 엘즈비에타가 그녀 논문을 번역해준 적이 있었던 겁니다. 그녀는 바르샤바에 머물며 2차 대전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의 삶을 연구할 계획이라고 했습니다.

 

그날 수업의 주제는 ‘도덕적 딜레마’였습니다. 한 학생이 남편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여인과 중병에 걸린 남편, 그리고 남편을 돌보는 의사에 관한 얘기를 꺼냈습니다. “야훼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는 계명에 관한 영화에서 다룬 바로 그 얘기였습니다. 조피아는 학생들의 의견을 다 듣고 나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의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엘즈비에타가 1943년 2월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섯 살짜리 유대인 소녀를 한 가톨릭교인 부부의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아이 부모는 게토로 끌려갔고 아이도 같은 길을 갈 운명이었는데 부부가 아이를 보호해주겠다고 해서 데려온 겁니다. 일이 잘 진행되는 듯했는데 막판에 부인이 마음을 바꿔서 아이를 맡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유대인 아이에게 세례를 줘서 거짓 가톨릭 교인을 만들면 그건 거짓말하는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이란 겁니다. 하지만 거짓말하는 죄를 피하려면 아이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엘즈비에타가 여섯 살짜리 소녀였고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은 부인은 조피아였습니다. 수업 후에 둘은 지난날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엘즈비에타는 그 일로 큰 상처를 받았고 이후 사십 년 동안 줄곧 조피아 부부에게 버려졌다는 사실 때문에 악몽에 시달렸다고 했습니다. 조피아 역시 그 사건에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그녀 역시 죄책감에 시달렸다는 겁니다.

 

이때 조피아는 엘즈비에타를 받아들이지 않은 진짜 이유를 고백합니다. 그것은 거짓증언하지 말라는 계명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조피아 부부는 반 나치 저항운동에 가담하고 있었는데 게쉬타포가 가짜 유대인 아이를 폴란드인 가정에 보내서 돌봐달라고 부탁하면서 저항 운동가들을 잡아들인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는 겁니다. 엘즈비에타가 가짜일지 모른다고 의심해서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나중에 그게 거짓소문임이 드러났지만 그땐 모두 그렇게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날 밤 엘즈비에타는 조피아 집에서 잤습니다. 엘즈비에타가 침대 옆에서 무릎 꿇고 경건하게 기도드리는 모습을 조피아가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다음날 둘은 훗날 엘즈비에타를 받아준 사람을 찾아갑니다. 그는 재단사였는데 그녀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대번에 그녀를 알아봤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옛날 얘기를 꺼내자 그는 그녀의 말문을 막고 전쟁얘기는 물론이고 전쟁 후 얘기나 현재 얘기도 하기 싫다고 말합니다. 옷을 맞추러 왔으면 그 얘기만 하자는 겁니다. 하지만 그녀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그때 자기는 여섯 살이었다고 말하자 얼떨결에 그는 자기는 그때 스물두 살이었다고 대답합니다. 그는 그 말을 하고는 깜짝 놀라 다시 옷 얘기로 돌아오지요. 그게 전쟁에 관해 그들이 나눈 얘기 전부였습니다.

 

그녀는 가게를 나옵니다. 밖에는 조피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피아는 지나가는 말처럼 그가 참으로 많은 일들을 겪었다고 말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엘즈비에타에게 “너 어제 밤에 기도했지?”라고 묻습니다. 그녀는 그랬다고 대답하지요. 마지막 장면은 재단사가 창문 너머로 두 사람이 얘기하는 것을 내다보는 장면인데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들리지 않습니다.

 

 

거짓말해도 값을 치르지 않는 사회

 

왜 사람은 거짓말을 할까요? 이 질문을 던지는 심정은 참담합니다. 오늘의 현실은 ‘왜 사람은 거짓말을 할까?’라고 묻기보다는 ‘왜 몇몇 사람은 참말을 할까?’라고 묻는 게 더 타당해 보이니 말입니다. 그만큼 참말 하는 사람이 예외인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넘치게 많은데 참말 하는 사람 찾기는 힘듭니다. 참말을 해도 그것이 ‘비현실적’이어서 거짓말로 의심 받는 ‘이상한’ 세상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거짓말을 해도 아무 문제도 없고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회적 합의’가 있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거짓말이 무소부재(無所不在)인 사회입니다. 절대 거짓말 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사람조차 그렇지 않음이 드러났는데 언론과 종교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과거엔 신문방송에 보도되는 것을 사람들이 그대로 믿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터넷 덕에 정보 얻기가 쉬워졌지만 언론 불신의 가장 큰 원인은 언론이 사실 아닌 보도를 남발한 데 있습니다. 요즘 언론은 사실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고 앞 다퉈 선정적인 보도를 쏟아냅니다. 보도내용이 거짓으로 드러나면 ‘아니면 말고’ 식으로 얼버무립니다.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면서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벌인 일이 대표적입니다. 영화 <그린 존 Green Zone>은 분통이 터져서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미국정부는 거짓정보를 보수적 신문사에 흘려 보도하게 해놓고 그것을 근거로 전쟁을 일으킵니다. 불의한 정부와 불의한 언론, 둘은 죽이 너무도 잘 맞습니다. 이들에게 사실을 보도하겠다는 의지나 끝내 진실을 밝히겠다는 자세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들 중에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때론 알면서도 거짓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거짓말에도 종류와 등급이 있습니다. 거짓말은 모두 똑같다는 말도 거짓말입니다. 악의 없이 좋은 뜻으로 한 거짓말은 악의적인 거짓말과 구별해야 합니다. 하지만 좋은 뜻으로 하는 거짓말도 거짓말이긴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거짓말이 다 똑같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선의의 거짓말을 참말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의 의도가 얼마나 나쁜지에 따라서, 그 거짓말이 초래하는 상황이 얼마나 중대한지에 따라서 거짓말에도 등급을 매길 수 있겠습니다. 이른바 ‘국익’이나 ‘공동체의 이익’을 빙자한 거짓말 중에 진정 국가와 공동체를 위한 거짓말이 얼마나 될지 의심스럽습니다. 소수의 이익을 위한 거짓말에 전체의 이름을 갖다 붙이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봐왔으니 말입니다.

 

왜 우리사회에 거짓말이 이토록 성행할까요? 왜 사람들은 거짓말을 합니까? 거짓말이 횡행하는 세상을 개탄하는 데 그치지 말고 대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는지,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말하게 만드는 것이 뭔지를 따져봐야겠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20년 넘게 살고 있습니다. 그 동안 내내 남가주에서만 살았으니 미국 곳곳을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형편이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미국사회는 거짓말했을 때 치러야 하는 값이 엄청나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나 그렇지만 특히 정치인이나 종교인처럼 말에 대해 져야 할 책임이 큰 사람이 거짓말을 했을 경우엔 매우 비싼 값을 치러야 합니다. 정치인은 정치생명이, 성직자는 성직생명이 그걸로 끝납니다.

 

이에 비하면 한국사회는 거짓말의 대가가 작습니다. 작아도 너무 작습니다. 웬만한 거짓말은 쉽게 용서되고 잊힙니다. ‘그 정도 거짓말쯤이야…’ 하는 일종의 ‘사회적 합의’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값을 치르게 하는 게 최선은 아닐지라도 필요한 것은 사실 아닙니까.

 

왜 거짓말을 할까?

 

높은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 거짓말을 덜 하게 할 수는 있지만 안 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거짓말을 안 하게 만들 방법은 없을까요? 가장 기본적인 길은 사회의 근본적인 가치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악을 이기는 길은 악을 처벌하는 것보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라고 하지요. 거짓말을 안 하게 하는 길도 같습니다. 거짓말을 없애려면 참말을 더 많이 해야 하고 참말로 거짓말을 이겨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말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말은 사람됨과 생각을 드러내는 방법이고 타인과 소통하는 수단입니다. 사람은 말로써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습니다. 참말을 한다면 진실한 관계를 맺기 원한다는 뜻입니다. 거짓말은 진실한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고 기왕에 맺은 관계도 망가뜨립니다. 성서가 “죽고 사는 것이 혀끝에 달렸다.”(잠언 18:21)고 말할 때나 예수께서 “말을 할 때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라.”(마태 5:37)고 말씀할 때 의미하는 바는 관계가 말에 좌우된다는 뜻입니다. 과장으로 받아들일 얘기가 아닙니다. 사람의 말이 관계를 진실하게 만들 수도, 거짓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똑같은 원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적용됩니다. 하나님 말씀이 진실하길 기대한다면 하나님을 향한 내 말도 진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진실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사회에 거짓말이 횡행한다는 사실은 진실한 인간관계가 드묾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진실은 진실을 낳고 거짓은 거짓을 낳습니다. 내가 남에게 진실하지 않으면 남이 나를 진실하게 대할 리 없습니다. 거짓은 악마의 도구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찌하여 너희는 내가 말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그것은 너희가 내 말을 들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의 아버지인 악마에게서 났고 또 그 아버지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다. 또 그는 진리 편에 서 있지 않다. 그것은 그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말을 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요한복음 8:43-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제가 악마라도 사람을 타락시키기 위한 수단을 한 가지만 택하라면 거짓말을 택할 겁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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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함께 읽는 십계명(9)

 

네 이웃에 대해서 거짓증거하지 말라(1)

- 어느 과거에 관한 이야기


영화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매체


키에슬롭스키의 영화 <십계명>은 계명을 직접 다루지도 않고 신에 대해 직접 얘기하지도 않습니다. 영화는 삶과 죽음, 신의 존재 등을 수수께끼, 징표나 징조, 우연이나 갑작스럽고 기이한 운명의 장난 같은 사건들로 표현합니다. 이 영화를 십계명에 대한 현대적 비유(parable)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영화를 집중해서 봐야 각 계명과의 관련성을 찾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계명을 읽으면서 간과했던 점을 발견합니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삶과 죽음, 신의 존재와 삶의 의미 등 상당히 무거운 주제를 다룹니다. 하나의 에피소드가 하나의 계명을 다루지만 거기에 다른 계명들이 암시되어 있는 경우도 있고 다른 에피소드에서 다뤄진 내용이 언급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열 가지 계명이 독립적인 계명이 아니라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과도 부합합니다. 감독은 이 사실을 간파한 걸로 보입니다.


영화가 방영된 때가 동유럽 국가들에 자유화 물결이 거세게 일었던 때입니다. 그래서 영화음악을 맡은 즈비그뉴 프라이스너(Zbigniew Preisner)는 이 영화가 “공산주의에 의해 파괴된 사람됨의 기본가치를 회복하려는 시도”였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특정 이념이나 체제에 사람됨의 가치회복의 필요성을 국한시킬 필요는 없겠지요. 제게는 영화가십계명을 기본 텍스트로 삼아 현대사회의 파괴된 도덕 가치를 회복하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영화에 종교와 신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그것이 삶과 죽음, 존재의 의미를 종교와 관련시켜 탐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파벨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진을 보며 “이 분은 삶의 의미에 대해 가르쳐주실까요?”라고 묻는 장면이 그렇습니다. 대답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황으로 표상되는 종교에 삶의 의미를 묻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합니다. 더욱이 요한 바오로 2세는 최초의 폴란드 출신 교황이 아닙니까.





거짓말하는 신들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사이에 위치해 있어서 두 문명권에 막대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여러 증거 중 하나가 구약성서입니다. 물론 영향을 받는 것과 동화되는 것은 다릅니다. 영향은 받았지만 동화되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변화한 경우도 있고 한편에서는 동화됐고 다른 편에서는 반대방향으로 나아간 경우도 있습니다. 종교라는 면에서 이스라엘은 후자의 경우라 하겠습니다. 이집트 및 메소포타미아에 비해서 후발주자인 이스라엘은 그들 종교와는 상당히 다른 신앙고백과 종교전통을 발전시켰는데 거짓말을 신과 관련시키는 방식도 그 중 하나입니다.

메소포타미아 종교에서 거짓말하는 신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곳 신들은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했고 그게 전혀 이상하지 않았으며 신을 믿는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신들은 거짓말한 걸 후회하지 않았고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드물지 않게 벌어지는 일이었을 뿐입니다.


아트라하시스(Atrahasis) 신화에서 최고신 엔릴(Enlil)은 자기가 내린 명령이 교활한 엔키(Enki)에 의해 훼방당한 사실을 알고 신들을 모두 모아놓고 홍수로 사람들을 멸망시킬 계획을 밝힙니다. 그리고 그것이 절대로 사람들에게 새나가지 않도록 하라고 신들에게 맹세를 받습니다. 하지만 엔키는 엔릴의 계획을 아트라하시스에게 알려서 그가 이루려던 일을 방해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니까 엔키가 거짓말로 엔릴을 속인 겁니다.


또한 아다파 이야기(Adapa Story)에도 이와 비슷한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엔키는 아다파의 생명을 구해주지만 거짓말로 그가 영생 얻는 걸 방해합니다. 엔키는 아다파가 아누(Anu)의 심판대 앞에 나아갔을 때 아누가 주는 음식과 물을 먹고 마시면 죽는다고 말하는데 그게 거짓말이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영생을 얻게 하는 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다파가 엔키의 거짓말을 믿고 그것들을 먹고 마시지 않음으로써 죽을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이처럼 메소포타미아의 신들은 쉽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또한 메소포타미아 사제들은 양의 내장 모양이나 주름의 모양을 관찰함으로써 신의 뜻을 알아냈습니다. 사제들은 이 방법을 쓸 때마다 “제가 바치는 양에게 당신의 진실한 답을 주소서.” 또는 “진실하고 올바른 결정을 내려주소서.”와 같은 기도를 장황하게 바쳤습니다. 그 까닭은 신들이 거짓 메시지를 보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제나 예언자를 통해 신의 메시지를 받는 왕은 늘 두 가지를 염두에 둬야 했습니다. 사제와 예언자가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과 신이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거짓말


계명은 “네 이웃에 대해서 거짓증언하지 말라.”고 명합니다. 여기서 ‘이웃’은 옆집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언약공동체에 속해 있는 모든 자유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계명의 본래 목적은 법정에서의 거짓증언을 금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군주제 이전 이스라엘에서 재판은 법률 전문가가 담당하지 않았습니다. 재판에서 촌락 장로들이 판사 역할을 했고 모든 자유민들이 배심원이자 증인 역할을 했습니다. 범죄의 목격자의 증언이 판결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 여부를 판단할 때는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는 부족했고 두세 사람의 증언이 일치해야 했습니다(신명기 17:6). 거짓증언하지 말라는 계명에는 이런 상황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성서에서 거짓말은 세속적인 범죄(crime)이자 종교적인 죄(sin)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신약성서는 ‘하나님의 구원의지에 반하는 모든 언행’을 ‘거짓’이라고 규정하고서 그것이 궁극적으로 악마에게서 비롯됐다고 말합니다(요한복음 8:44).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말과 행동이 진실해야 하고 거짓을 멀리해야 했습니다. 의도했거나 의도하지 않았거나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구약성서에서 모든 거짓말이 정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각각 자기 아내 사라와 리브가가 누이라고 거짓말했습니다(창세기 12:11-20; 26:6-11). 삼손은 자기 힘의 근원에 대해 데릴라에게 거듭 거짓말했고(사사기 16:6-15), 여리고 성의 라합도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숨겨놓고 왕의 사자들에게 거짓말했습니다(여호수아 2:4-5). 그런데 히브리서는 이런 라합의 행위를 칭찬합니다(히브리서 11:31). 믿음의 행위라는 겁니다. 거짓말을 했는데도 말입니다.


나봇의 포도원 얘기는 거짓말이 초래한 비극을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열왕기상 21장).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는 조상에게 유산으로 물려받은 포도원이 있었는데 아합 왕이 그것을 갖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봇을 불러 포도원을 자기에게 팔라고 했습니다. 더 좋은 포도원을 주든지 돈으로 값을 치르겠다는 겁니다. 거저 가지려 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하지만 나봇은 포도원을 아합 왕에게 넘겨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조상에게 물려받은 땅은 팔 수도, 살 수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상식이었습니다.


아합은 불쾌했지만 전통을 어길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방 출신 아내 이세벨은 그런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명색이 왕이라면 갖고 싶은 건 뭐든 다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전통이 엄연한지라 그녀도 포도원을 억지로 빼앗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꾀를 내서 그녀는 왕의 이름으로 편지를 써서 옥쇄로 인봉하고 그것을 나봇이 사는 성읍의 원로들과 귀족들에게 보냈습니다. 건달 둘을 내세워 나봇이 왕을 저주했다는 ‘거짓증언’을 하게 만들어 그를 죽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봇은 억울하게 죽었고 포도원은 아합의 소유가 됐습니다. 하지만 얘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언자 엘리야가 이 얘기를 듣고 왕에게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나 야훼가 말한다. 네가 살인을 하고 또 빼앗기까지 하였느냐? 또 나 야훼가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바로 그 곳에서 그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열왕기상 21:19). 나중에 아합은 엘리야의 예언대로 죽었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네 이웃에 대해서 거짓증거하지 말라(3)http://fzari.com/769

네 이웃에 대해서 거짓증거하지 말라(2)http://fzari.com/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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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함께 읽는 십계명(8)

 

간음하지 말라

- 어느 사랑에 관한 이야기 -

 

 

일부다처제 사회에 주어진 계명

 

“요즘 젊은이들은 성에 대해서 너무 자유분방해서 큰일이야.”라고 걱정하며 혀를 차면 그 사람은 기성세대에 속한다고 왕따 당한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 기성세대만 이런 걱정하는 것은 아니다. 수십 년 전, 아니 수백 년 전에도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의 자유분방함을 염려했을 터이다. 기성세대 눈에 젊은이들은 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존재니 말이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히브리어로 단 두 단어로 이루어진 짧은 계명으로서 설명을 달 필요도 없이 자명해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진 않다. 언뜻 보기보다는 생각할 점들이 많다는 얘기다. 우선 계명이 주어졌던 시기 사회적, 종교적 상황 속에서 계명이 뭘 규제하려 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그 시기에 이스라엘은 일부다처제 사회였다. 이게 요즘 기준으로는 비윤리적이지만 당시엔 그렇지 않았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이 여러 아내를 뒀다고 비난받았나? 그렇지 않았다. 또한 당시 이스라엘은 철저한 가부장사회로서 여자는 남자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지위에 있었다. 이 계명은 남자에게 주어졌다. 손뼉도 마추져야 소리 나듯이 간음도 남녀가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계명이 남자에게 주어진 것은 여자는 자유분방하게 간음해도 괜찮다는 뜻이 아니라 계명의 규제조차 받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처벌은 남녀가 똑같이 받거나 여자가 더 심하게 받았다. 요즘 이런 사고방식이 통용되는 문명사회는 지구상에 없다.

 

계명의 주된 목적은 혼인관계를 보호하는 데 있었으므로 그걸 깨뜨리지 않는 혼외정사는 간음죄에 해당되지 않았다. 그래서 결혼한 남자가 다른 남자의 아내나 약혼녀와 관계했을 때만 간음죄에 해당됐다. 여기 해당되지 않는 혼외정사는 남자가 관계한 여자와 결혼하거나 부모에게 돈을 주면 해결됐다. 하지만 여자의 경우엔 유부녀가 남편 아닌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가졌다면 상대방이 유부남이든 약혼남이든 총각이든 모두 간음죄로 처벌받았다. 혼인을 하거나 돈을 줘도 해결할 수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계명은 남녀를 차별하는 불평등한 계명이었다. 당시 기준으로 그랬다는 얘기다.

 

 

아담이 동물들 중에 자기에게 맞는 배필을 찾지 못하자 하느님은 그를 깊이 잠들게 하신 후 그의 갈빗대를 하나 취해서 그걸로 하와를 만드셨다. 아담이 하와를 처음 봤을 때 그에게서 터져 나온 외침은 원초적이고 원색적인 감정의 폭발이었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창세기 2:23).

 

하와를 자기의 뼈요 살이라고 부른 아담의 말에는 성적인 냄새가 노골적으로 풍긴다. 성서는 ld와 같은 아담의 감정과 탄성을 추하게 보지 않는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감정도 아니었다. 오히려 하느님은 아담의 반응에 만족하셨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둘은 ‘한 몸’이 됐다(24절). 이렇듯 부부의 성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렇다고 너무 좋아만 할 일은 아니다. 하느님의 선물이 모두 그렇듯이 ‘성’이란 선물도 잘 쓰면 축복이지만 잘못 쓰면 해(害)가 되기 때문이다. 후자의 대표적인 예가 다윗과 밧세바의 간음사건이다. 이 때문에 다윗 집안에 칼부림이 가실 날이 없었느니 여기서 ‘성’은 축복 아닌 ‘저주’의 씨앗이 된 셈이다.

 

오늘날 성에 대한 생각은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 남자와 여자의 지위도 계명이 주어졌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달라졌다. 간음죄의 정의도 달라졌다. 계명이 주어졌을 때의 윤리기준을 오늘날에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거다. 이렇듯 세상이 달라졌으니 계명에 대한 이해와 적용방식도 달라져야 하는 게 당연하다. 계명을 새롭게 이해하고 시대에 맞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한다는 얘기다. 물론 계명의 본래 정신은 고수해야겠지만 말이다.

 

이 계명을 두고 하느님이 남녀의 침실 문제까지 간섭해야 하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가정은 인간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이고 부부관계는 가정을 이루는 기본적인 인간관계임을 감안하면 이 계명의 중요성을 낮춰볼 수는 없다. 하느님과 사람이 맺는 관계를 한 축으로 하고 사람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를 다른 한 축으로 하는 십계명에 부부관계에 대한 계명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기억할 사실은, 계명의 목적이 남녀관계를 구속하고 속박하는 데 있지 않다는 점이다. 계명은 부적절한 성관계를 금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부부관계를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로 만들고 하느님이 선물로 주신 ‘성’을 바르게 누리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 ‘어느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간음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면서도 계명의 근본 의미를 성찰하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어느 사랑에 관한 이야기

 

토멕(Tomek)은 열아홉 살 먹은 고아로 친구 집에서 살면서 우체국 직원으로 일하는데 그가 사는 아파트 맞은편에 마그다(Magda)라는 매혹적인 독신여성이 살고 있다. 토멕은 매일 밤 망원경으로 그녀를 훔쳐보는 게 일과처럼 되어 있다. 그는 그녀를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그녀에게 가짜통지서를 보내서 그녀를 우체국에 오게 만들기도 하고 우유배달부가 되어 매일 그녀의 집 앞에 우유를 갖다 놓으면서 그녀를 보려고 한다.

 

그는 마그다가 남자친구를 수시로 바꾸고 그들과 스스럼없이 동침하는 자유분방한 여자란 사실을 알게 된다. 어느 날 토멕이 그녀를 우체국으로 불러내려고 가짜통지서를 보냈는데 그만 들통이 나고 만다. 결국 그는 전후사정을 그녀에게 고백한다. 자기가 가짜통지서를 보냈고 밤마다 그녀를 엿본다고 말이다. 그녀는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지만 그가 자기의 행동거지를 소상히 알고 있음을 확인하고 마구 화를 낸다. 그날 밤 토멕이 자기를 엿보고 있음을 확인한 그녀는 남자친구를 침실로 불러들여 커튼을 열어놓은 채 보란 듯이 같이 잠자리에 드는 엽기적인 행동을 한다. 더욱이 그녀는 동침하는 남자에게 토멕이 엿보고 있음을 알려주기까지 한다. 그러자 그 남자는 밖으로 뛰어나가 토멕을 불러내서 그를 때려눕힌다.

 

다음날 토멕은 그녀에게 느닷없이 사랑을 고백한다. 그녀가 어이없어 하면서 뭘 원하느냐고 묻자 토멕은 데이트를 신청한다. 데이트 후에 마그다는 세상에 ‘사랑’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고서 그를 끌어안으며 “이런 게 바로 사랑이다.”라고 말한다. 놀란 토멕은 그녀의 방을 뛰쳐나와 집으로 와서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해서 병원이 입원한다.

 

마그다는 토멕이 보이지 않자 그의 근황이 궁금해진다. 그녀는 토멕의 친구 어머니에게 묻는데 어머니는 토멕이 그녀를 엿봐왔다는 사실을 안다고 말하지만 그가 자살하려 했다는 얘기는 하지 않는다. 그녀는 뜬금없이 자기 아들은 늘 어디론가 떠난다며 자긴 이제 늙었고 외롭다고 말한다. 그녀는 사방으로 토멕을 찾아다니다가 우체국에서 그를 발견하지만 토멕은 무심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마담,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엿보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성’은 ‘인격’의 문제

 

교회에서 ‘성’에 대한 얘기를 드러내놓고 하는 경우는 드물다. 성은 공개적으로 얘기할 성격이 아니라 사적인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간혹 간음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얘기는 하지만 대체로 성에 대해서 쉬쉬하는 분위기다. 이와 같은 관행이 옳다면 계명에 대해 더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게다. “기혼자들은 절대로 혼외관계를 갖지 마십시오. 간음죄를 저지르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면 더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성에 대해 얘기할 때 인용되는 성서구절은 “‘간음하지 말라.’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7-28)라는 구절일 거다. 교회 내에서의 성 담론은 대부분 이 구절을 밑바닥에 깔고 진행된다. 이 구절 다음에 “네 오른 눈이 너로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 또 네 오른손이 너로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29-30절)는 구절이 이어지는데 이 둘을 연결하면 간음한 사람은 죄를 짓게 만든 신체의 일부를 떼어내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다는 뜻으로 읽힌다. 간음죄는 생식기라는 신체의 일부가 짓는 죄라는 인상을 준다는 얘기다.

 

이 구절을 글자 그대로 읽으면 일체의 욕망에서 해방된 극소수의 사람들을 빼고 모든 남자가 간음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예수님은 ‘남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에 대해서만 말씀하니 여자는 동성애자만 아니면 간음죄와 무관하다는 강변도 가능하다. 십계명이 주어졌을 때 그랬듯이 예수님도 계명을 남자들에게만 적용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시대적 한계를 갖고 있었다고 말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사람이 있겠지만 그게 사실인 걸 어쩌랴.

 

예수님은, 사람은 누구나 몸 또는 마음으로 간음하며 살아가므로 간음죄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말씀한 게 아니다. 이 말씀은 모두에게 간음죄의 굴레를 씌우려는 뜻이 아니라 간음죄는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전인격이 관계되는 죄라는 뜻이다. 성문제의 자리는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마음이요 전인격이란 얘기다. 성은 몸에 표현된 인격이다.

 

왜 사람은 간음을 할까? 사람은 본래부터 정욕으로 가득한 동물이기 때문일까? 정복욕과 지배욕 때문일까? 남의 아내가 더 예뻐 보이기 때문일까? 정욕, 정복욕, 지배욕이 누구에게나 있는 본성이라면 왜 어떤 사람은 간음하고 어떤 사람은 안 할까? 본성을 억누를 만큼 자제력이 강하지 않은 사람만 간음죄를 저지르나?

 

 

 

‘외로움’이란 병

 

성서와 영화는 모두 ‘외로움’을 중요한 문제로 든다. 창세기 2장 18절에서 하느님은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아서 하와를 창조하셨다고 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하느님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였다는 거다. 사람은 혼자 있지 말고 누군가와 같이 지내게 되어 있다. ‘홀로’가 아니라 ‘더불어’가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 상태라는 얘기다.

 

영화에는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토멕, 마그다, 토멕 친구의 어머니가 그들이다. 친구 어머니는 등장하는 장면은 적지만 중요한 뜻을 담은 말을 던지는데 그게 ‘외롭다’는 말이다. 그녀는 마그다에게 자긴 늘 외롭다고 말한다. 토멕을 데리고 있는 이유도 그거라고 짐작된다. 이 말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간음을 포함, 비정상적이고 부적절한 모든 인간관계의 뿌리에는 욕정이나 정복욕, 지배욕, 질투심 못지않게 ‘외로움’이란 병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2장 18절을 들지 않아도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여러 가지로 좋지 않다. 그래서 사람은 어떻게든 타인과 관계를 맺으려 한다. 외로움은 우울증 같이 무서운 병으로 발전할 수 있으므로 사람으로 하여금 타인과 관계 맺도록 몰고 간다. 하지만 그 관계가 늘 정상적이고 건강하지는 않다. 외로움이 너무 깊어서든지 다른 문제가 있어서든지 건강하지 않은 관계를 맺는 경우가 있다. 영화는 ‘외로움’이란 병 때문에 건강하지 않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 얘기라고 하겠다.

 

밤마다 마그다의 방을 엿보는 토멕의 행위는 타인과 정상적이고 건강한 관계를 맺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그는 분명 그녀를 좋아하지만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 모른다. 그녀의 행위를 엿보는 것으로는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그러다 갑자기 그녀에게 사랑고백을 하니 누가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겠는가. 아는 것은 엿봐서 아는 것 밖에 없고 맺은 관계라고는 일방적으로 엿보고 혼자 좋아하고 안타까워하는 것밖에는 없는 여자에게 하는 사랑고백은 아무리 좋게 봐도 건강하지 않고 비정상적이다. 게다가 그는 자기 사랑이 거절당했다는 느낌이 들자 손목을 그어 자살시도까지 했다. 이 모든 결정을 그는 혼자서 내렸다. 그에게는 얘기 나눌 사람이 없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다. 그는 늘 혼자다. 타인과 관계 맺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마그다는 외양적인 성격에 남자친구도 여럿이지만 그녀가 타인과 맺은 관계 역시 건강하다로 불 수는 없다. 남자는 많지만 그들과는 단지 잠자리를 같이 할 뿐이고 그 이상의 관계는 맺지 않는다. 사랑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그녀가 토멕이 안 보이자 혼란에 빠지는 모습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그녀는 여기저기로 토멕을 찾아다니지만 왜 그러는지는 자기도 모른다. 그녀 역시 타인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다.

 

성은 ‘사랑’이라는 존엄한 가치의 표현

 

성은 사람이 외로움을 극복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어나가는 중요한 통로 중 하나다. 성은 관계맺음과 소통의 통로다.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아 하와를 만들어 ‘더불어’ 살게 하신 하느님이 그들에게 주신 선물이 바로 ‘성’이었다. ‘성’은 사람의 신체 일부에 깃든 선물이 아니라 인격 전체에 새겨진 것으로서 전 인격과 전 영혼으로 소중히 다루고 꽃피워야 할 선물이다. 따라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해 생각할 때 어떤 종류의 성행위가 계명을 어기는 죄이고 어떤 성행위가 계명에 부합하는 행위인지 따지기 전에 하느님의 선물인 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상대방을 어떻게 존중할 것인지, 그리고 행위가 충동적인 욕구에서 비롯됐는지 순수하고 절제된 사랑에서 비롯됐는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하겠다.

 

또한 계명은 남녀평등이라는 전제 위에서 생각해야 한다. 계명이 처음 주어졌을 때는 남녀의 지위가 평등하지 않았다. 계명도 여자에게 불리하게 적용됐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세상이 달라졌다. 아직 완전하게 남녀가 평등하진 않지만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 덕분에 남녀관계는 평등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따라서 계명은 남녀가 평등하게 누려야 할 인격의 존엄성과 가치라는 기본전제 위에서 오늘의 상황에 맞게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남녀평등의 문제는 실제는 그렇지 않더라도 이론적으론 대부분 당위로 받아들여진다. 몰라서 실현되지 않는 게 아니라 전통적인 관습과 남자들이 누려왔던 기득권에 대한 향수가 끈질기게 사람들 발목을 잡고 있어서 실현이 지체되고 있다. 평등은 기득권을 누리던 쪽을 불리하고 불편하게만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을 떳떳하게 만들어주는 가치이자 건강한 인간관계를 가능케 하는 기본전제다.

 

마지막으로 계명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하는 현상은 오늘날 자본주의사회에서 ‘성’이 상품으로 대규모로 매매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의 상품화는 사회 구석구석에 침투해 있어서 해결을 위해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난감할 정도다. 미국 남쪽 국경선 너머로 팔려오는 어린 여자들이 한 해에 1백만 명이 넘는단다. 미국 한 나라에서만도 이 정도인데 전 세계적으로는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매매되고 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런 현실을 표현한 영화는 극영화, 다큐멘터리 할 것 없이 다 챙겨볼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나도 여러 편 봤는데 볼 때마다 치 떨리고 가슴 터질 것 같아 볼 수 없을 정도다. 한국에서 동남아 여인들을 데려와 결혼했다가 버리고 심지어 죽였다는 기사를 볼 때마다 부끄럽기만 하다. 이걸 과연 ‘결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건 결혼이 아니라 성매매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나.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간음죄는 개인들 간에 벌어지는 죄에 그치지 않는다. 성매매, 인신매매, 낙태, 미혼모, 태어나자마자 버려지는 아이들, 에이즈 문제까지 모두 성의 상품화와 뗄 수 없이 관련된 사회문제다. 덜 자란 소녀들을 ‘걸그룹’이란 가수로 만들어 놓고서 섹시한 춤을 추게 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나 그걸 보고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성의 상품화에 한 몫 거들고 있다. 이런 걸 ‘취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것은 ‘범죄’다. 이게 범죄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모든 걸 상품으로 만들어 파는 자본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간음죄 저지르는 사람을 성의 ‘소비자’로 둔갑시켰다. 자본주의는 이들을 공급자와 소비자로 둔갑시켜 도덕심과 윤리의식을 마비시키는 묘한 재주를 갖고 있다.

 

무엇이 ‘속박’이고 무엇이 ‘자유’인가?

 

키에슬롭스키는 혼외관계를 비난하는 쉬운 길을 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과 사랑이 결합했을 때 나타나는 신비로움과 놀라움과 생명을 북돋워주는 힘에 대해서 깊이 사색하고 명상할 것을 권한다. 사랑과 결합된 성은 몰래 엿볼 수도, 조작될 수도 없으며 시니컬하게 웃어넘길 수도 없다는 거다. 진정한 사랑과 결합된 성에는 외로움으로 병든 영혼과 왜곡된 관계에서 입은 상처를 치유할 힘이 있다.

 

성은 사랑과 관계되어 있고 사랑은 또 결혼과 관계된다. 성과 사랑과 결혼, 이 셋이 반드시 연결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떼어낼 수도 없다. 무관하다고 할 수는 더더욱 없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의 법칙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법칙을 무시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의 자유를 내세우면서 사랑과 결혼은 속박으로 여긴다. 성은 가볍고 자유롭게 누리지만 사랑과 결혼은 자유로운 성을 속박한다는 이유로 피하고 싶어 한다. 사랑과 결혼은 진정 속박일까? 그것은 인간관계를 제한하고 제약하는 족쇄인가? 그런 측면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거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당신은 상대방에 대해서 진실해지는 관계를 어디서 만나는가?”

 

진실보다는 거짓이 지배하고 양보와 자기희생보다는 속임수를 써서라도 이익을 얻기 위해 관계를 맺는 경우가 흔한 오늘날, 우리네 삶에서 진실과 양보와 자기희생이 밑받침된 관계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사랑과 결혼에서 그런 진실한 관계를 본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사랑과 결혼은 속박이 아니라 자유이고, 족쇄가 아니라 해방이라고 믿는다. 거짓이 횡행하는 사회에서 상대방을 신뢰하고 상대방에게 진실해질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다. 그래서 “마담,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엿보지 않습니다.”라는 토멕의 말에서 이젠 진실한 사랑을 찾겠다는 토멕의 결심을 보고 박수를 보낸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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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함께 읽는 십계명(7)

 

도적질하지 말라

- 어느 고백에 관한 이야기 -

 

 

단순히 유괴하지 말라는 계명인가?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은 뜻이 분명해서 다른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어 보인다. ‘이토록 당연한 걸 굳이 계명으로 삼아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이 계명을 세 번만 소리 내서 읽으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도둑질하지 말라고? ‘무엇을’ 도둑질하지 말라는 뜻인가? 이 계명에는 목적어가 없다! 아무리 십계명이 법정에서 사용되는 법률이 아니라 해도 그렇지, 적어도 도둑질의 목적어는 있어야 하지 않나! 안 그런가?

 

본래 이 계명은 유괴하지 말라는 뜻이었단다. ‘사람 도둑질’ 하지 말라는 말이다. “사람을 유괴한 자는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가 데리고 있든지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는 출애굽기 21장 16절과 “어떤 사람이 같은 겨레인 이스라엘 사람을 유괴하여 노예로 부리거나 판 것이 드러나거든 그 유괴한 사람은 죽여야 한다. 너희는 너희 가운데서 그러한 악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신명기 24장 7절이 그런 해석의 근거다. 하지만 계명의 범위를 유괴에 국한시킬 필요는 없어 보인다. 목적어가 없으니 도둑질할만한 모든 것에 계명을 적용할 수 있다고 볼 수도 있다. 해석의 여지를 넓게 열어놨다는 얘기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도둑질을 하는 사람은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말고 수고를 하여 제 손으로 떳떳하게 벌이를 하십시오. 그리하여 오히려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도록 하십시오.”(4:28)라고 권한다. 에베소서는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이므로 그가 기대한 독자는 당연히 에베소 교회 교인들이었다. 바울은 그들 중에 ‘도둑질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걸로 보인다. 물론 단순히 교인들에게 자기 손으로 떳떳하게 일해서 벌고 그걸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라는 뜻이었을 수도 있다. 편지가 구체적인 수신인을 전제했음을 감안했을 때 후자였을 가능성이 더 크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도둑(들)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고 봐야한다. 그가 어떤 종류의 도둑이었고 뭘 훔쳤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흥미로운 점은, 바울을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은 도둑(들)을 교회에서 내쫓지 않고 사랑으로 권고했다는 사실입니다. 도둑질하지 말고 제 손으로 떳떳하게 벌어서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말이다.

 

바울은 ‘도적질’을 ‘수고를 하여 제 손으로 떳떳하게 버는 일’과 대조한 후 그걸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는 일’과 관련시킨다. 여기에 비춰보면 “도적질하지 말라.”는 계명은 남의 것을 훔치지 말라는 금지명령에 그치는 게 아니라 어떤 자세와 원칙으로 노동할 것인지(“수고를 하여 제 손으로 떳떳하게 벌이를 하십시오.”)와 노동의 결과로 얻은 것을 어떻게 쓸 것인지(“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도록 하십시오.”)까지 의미한다고 봐야겠다.

 

 

 

다양해진 도둑질 유형

 

최근에는 도둑질 유형과 훔치는 물건 종류가 전보다 훨씬 다양해져서 과거엔 생각도 못했던 것까지 개인 또는 집단의 소유로 보호받고 있다. ‘지적소유권’이 대표적인 보기다. 지금은 지식과 아이디어도 법절차를 거쳐 개인 또는 집단의 소유로 등록하면 함부로 갖다 쓸 수 없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거의 오백 년 전에 이런 말을 했다. “도둑질은 지구상에서 가장 흔한 기술이다. 만일 세상의 모든 도둑이 처형대에 달린다면 세상은 곧 텅 빌 것이고 처형을 집행할 사람조차 모자라게 될 것이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지만 루터 눈엔 세상에 도둑 아닌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가 전통적인 의미의 도둑질만 염두에 뒀다면 상황을 이 정도로 과장하진 않았을 거다. 그는 미래엔 도둑질이 더 다양해질 걸 내다봤던 것 같다.

 

도둑질은 곧 불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도둑질이 불법은 아니다. 모든 도둑질이 처벌받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법망을 빠져나가서 처벌받지 않는 도둑질도 있고 ‘합법적인 도둑질’도 얼마든지 있다. ‘합법적인 도둑질’이란 말은 그 자체론 모순이다. 도둑질 자체가 불법이므로 거기에 '합법적'이란 말을 붙일 수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합법적인 도둑질’이 허다하다. 엄청난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면서 이른바 ‘절세’라는 방법으로 상속세를 적게 내고도 합법이라고 우긴다. 법을 어기지 않았다는 거다. 실제 가진 돈을 1백 원인데 그게 4백 원이나 5백 원인 것처럼 굴리다가(돈놀이) 세계경제를 망쳐놓고도 법적으론 아무 문제없이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도 있다. 특정 직업을 ‘합법적’인 도둑이나 ‘칼만 안 든’ 강도라고 불러온 지는 오래됐다. 이런 현실은 모든 도둑질이 불법은 아니고 또 합법이라 해서 도둑질이 아닌 건 아니라 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키에슬롭스키의 영화 “어느 고백에 관한 이야기”에는 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이걸 ‘도둑질’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영화에 나오는 대사처럼 “내 걸 내가 가져가는데 그걸 어떻게 도둑질이라고 말할 수 있나?” 싶기 때문이다.

 

어느 고백에 관한 이야기

 

학교 교장인 에바에겐 남편 스테판과 딸 마이카가 있다. 이 학교에 보이첵이라는 교사가 새로 왔는데 당시 열여섯 살 학생이던 마이카가 그와 사랑에 빠져 딸 아냐를 낳는다. 에바는 스캔들이 두려워 아냐를 자기 딸로 출생 신고한다. 엄마인 마이카는 법적으로 언니가 된 셈이다.

 

6년의 세월이 흘렀다. 아냐는 에바를 엄마로 알고 자랐다. 마이카는 한 학기 남은 대학공부를 중단하고 아냐를 데리고 캐나다로 도망칠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아냐의 여권을 만들려면 에바의 서명이 필요하다. 에바가 엄마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이카는 아냐를 유괴한다. 뒤늦게 에바가 사방으로 아냐를 찾지만 허탕치고 마이카는 아냐에게 사실은 자기가 엄마이고 에바는 할머니라고 말한다. 아냐는 “그럼 아빠는 누구야?”라고 묻는다. 그래서 마이카는 아냐를 보이첵에게 데려간다. 둘은 6년 동안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보이첵은 딸을 만나는 게 불편해 보이지만 아냐를 찾으려고 전화한 스테판에게 그들은 자기에게 오지 않았다고 거짓말한다. 그새 아냐는 잠들었고 마이카와 보이첵은 지난 일을 얘기한다. 마이카는 에바가 나오지도 않는 젖을 아냐에게 물리기까지 했다고 얘기한다. 그녀에게 아냐는 손녀 아닌 딸이었던 거다. 마이카는 에바에게 전화해서 자기가 엄마라는 사실을 법적으로 바로 잡고 아냐와 함께 살게 내버려두라고 요구한다. 이 통화 직후 마이카는 아냐에게 자길 엄마라고 부르라고 반복해서 시키지만 아냐는 그녀를 ‘마이카’라고 부른다.

 

아냐는 다시 잠들었고 보이첵은 마이카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강권한다. 아냐가 겪을 혼란을 생각하면 그게 최선이라는 거다. 마이카가 이에 동의하자 보이첵은 자동차를 빌리러 갔는데 그 사이에 마이카는 아냐를 데리고 보이첵의 집을 나온다. 애당초 돌아갈 생각이 없었던 거다. 그녀는 다시 에바에게 전화해서 아냐의 여권 서류에 서명하지 않으면 다시는 자기들을 볼 수 없을 거라고 협박한다. 하지만 에바는 망설이다 시간을 놓쳐버린다.

 

마이카 일행이 도시를 빠져나가려면 갈 곳은 기차역밖에 없다. 에바는 보이첵과 함께 그리로 갔고 마이카도 그들보다 먼저 거기로 갔지만 기차를 타려면 두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마이카가 역 사무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에바 일행이 도착해서 직원에게 마이카에 대해 묻는다. 직원은 그들이 두 시간 전에 떠났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아냐가 에바 목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들통 나고 만다. 에바는 아냐를 부둥켜안고 울고 마이카는 마침 역에 들어선 기차를 타고 혼자 떠난다.

 

도둑질, 사람의 존엄성을 해치는 죄악

 

영화를 보고나니 간단해 보이는 계명에 이런 심각한 도덕적 딜레마가 있을 수 있나 싶어 소름끼칠 지경이다. 지금은 도둑질의 개념이 계명이 주어졌을 때와는 크게 달라졌다. 그때는 유괴나 남의 물건 훔치는 일, 저울을 속이거나 땅의 경계표를 옮겨놓는 일 등이 도둑질의 전부였지만 지금은 일일이 열거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도둑질의 종류가 많아졌다. 게다가 도둑질과 도둑질 아닌 것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따라서 오늘날 계명을 제대로 지키려면 더 많은 걸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재물에 대해서 나름의 생각을 갖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만 어느 정도 가진 사람은 더 이상 재물에 마음 쓰지 않을 수 있다. 재물 모으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는 듯 모으는 데 열중인 사람이 있는가하면 모으기 전에 쓸 곳부터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오로지 자기만을 위해 재물을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를 위해서는 극도로 절약하면서 남에게 아낌없이 쓰는 사람도 있다. 사람 성격이 다양한 만큼 재물 모으고 쓰는 모양도 다양하다.

 

재물에 대한 태도는 개인에 따라 다르다. 각기 다른 태도를 갖고 산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인 이상 타고난 대로 살지 말고 도덕, 윤리, 신앙의 입장에서 재물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를 묻게 되어 있다. 타고난 성향과 도덕적 입장이 비슷하면 문제없겠지만 다를 때는 갈등이 생기게 마련이고 우리는 이 갈등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 이 갈등은 건전한 것이다. 갈등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문제일 수 있다. 이 갈등이 건강한 게 되기 위해 재물에 대해 성서는 어떻게 말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재물은 궁극적으로 누구의 것인가 하는 점이다. 성서는 재물에 대한 궁극적인 권리는 사람이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본래부터 내 것이란 없다는 얘기다.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것이다. 지금 내 소유로 등록되어 있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것이란 얘기다. 하느님이 잠시 내게 맡겨놓았을 뿐이고 은총으로 주셔서 잠시 누리고 있을 따름이다. 이것이 재물에 대한 성서의 기본입장이다.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따르지 않으면 된다. 믿을 수 없고 동의할 수 없으면 믿지 말고 동의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재물에 대한 성서의 기본입장을 바꿀 수는 없다. 성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시편 24편도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모두 다 주님의 것, 온 누리와 거기에 살고 있는 그 모든 것도 주의 것이다.”라고 노래하지 않는가.

 

둘째로, 인간 존엄성과 노동이다. 하느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노동하게 만드셨다. 사람은 에덴동산에서도 놀고먹지 않았다. 동산을 관리하는 청지기로 매일 노동했다. 사람은 누구나 노동의 대가를 기대한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노동엔 정당한 대가가 있어야 한다. 사람이 노동하고 그 대가를 누리는 것은 창조주의 뜻이기도 하다. 사람이 존엄한 까닭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됐기 때문이고 노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이 노동한 대가를 훔치는 행위인 도둑질은 그의 존엄성을 해치는 중대한 범죄라고 하겠다.

 

노동의 존엄성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모든 사람의 노동은 똑같이 존엄하다. 구약성서를 읽다보면 ‘원수’(enemy)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원수’는 ‘이웃’ 또는 ‘동족’과 대조되는 개념이다. 구체적으로 원수가 누구인지는 문맥과 역사적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어쨌든 원수는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계명은 원수의 소유물일지라도 마땅히 보호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너희는 원수의 소나 나귀가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보거든 반드시 그것을 임자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너희가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의 나귀가 짐에 눌려서 쓰러진 것을 보거든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말고 반드시 임자가 나귀를 일으켜 세우는 것을 도와주어야 한다(출애굽기 23:4-5).

 

전쟁에서 이기면 전리품을 챙긴다. 이긴 편이 패한 편의 군인, 가족, 무기, 동물 등을 소유할 권리를 갖는다. 하지만 율법은 원수의 소유도 돌려줘야 한다고 규정한다.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곧 원수)의 나귀가 짐에 눌려 쓰러져 있다면 그를 도와 나귀를 일으켜 세워주라는 거다. 나는 이 짧은 계명이 전제하는 인간의 존엄성과 노동의 윤리가 감탄스럽다. 누군가의 노동의 대가는 비록 원수의 것이라도 함부로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역사적 상황 때문에 미워하고 적대할 수 있지만 그게 인간의 기본적 존엄성 위에 설 수는 없다는 뜻이다.

 

 

 

도둑이 도둑 아닌 사회, 도둑 아닌 사람이 도둑 되는 사회

 

루터는 도둑질을 ‘부당한 방법으로 남의 것을 취하는 행동’이라고 정의했다.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워 보이지만 ‘부당한 방법’이란 어떤 방법이고 ‘남의 것’의 범위를 어떻게 정해야 하는지가 설명되지 않았다. 깔뱅은 도둑질이 무엇인지 직접 정의하지 않았다. 그게 뭔지 알려면 이웃에게 정당하게 행하는 게 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했다. ‘공동선’(公同善)을 고려하지 않으면 도둑질이 뭔지 제대로 정의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읽힌다. 세상에 자기 외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자기만 알고 자기 복지만 추구하는 사람은 눈에 띠는 도둑질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거기서 자유롭지 않다는 얘기다.

 

마이카가 아냐를 보이첵에게 데려갔을 때 보이첵은 “아이를 훔쳐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다. 이에 마이카는 “내가 내 걸 가져가는데 그게 왜 도둑질이냐?”고 대꾸한다. 영화는 이런 묘한 상황에 관객을 몰아놓고 묻는다. 마이카는 도둑질했나? 누가 도둑인가? 손녀를 딸로 입적해놓고 돌려주지 않은 에바가 도둑인가, 법적 엄마 몰래 아냐를 납치한 마이카가 도둑인가?

 

오늘날 세상에서는 누가 도둑인지 분명치 않다. 과거엔 명백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도둑이 도둑이 아니기도 하고 도둑 아닌 사람이 도둑이 되기도 한다. 왜 세상이 이렇게 됐을까? ‘합법화된 도둑의 체제’(a system of legalized theft)라고 부르는 ‘시장’(market)이 주요 원인이라고 말들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 살고 있다. 시장경제는 누구나 자유롭게 물건을 시장에 내놓고 팔고 사는 체제로서 이걸 이끌어가는 힘은 ‘경쟁’이다. 경쟁력 있는 상품이 시장을 지배한다는 거다. 시장은 모두에게 공정하다고 말들 한다. 누구나 경쟁력 있는 상품을 만들어 시장에서 팔면 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실제 시장이 작동하는 모습은 그렇지 않다.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법도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지 않는다. 기왕 존재하는 법 안에서도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지 않는데 설상가상으로 힘 있는 자들이 법을 자기 입맛에 맞게 더 불공정하게 만들어놓았다. 법은 큰 범죄에는 눈감고 작은 범죄만 호되게 다스린다. 그래서 큰 도둑은 도둑이 아니게 된다. 시장경제체제는 큰 고기는 빠져나가고 작은 고기만 잡히는 기이한 그물이다.

 

에바와 마이카 두 사람은 모두 나름의 정당성을 갖는다. 아냐가 자기에게 입적되었으니 자기 딸이라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합법적이기도 하다. 에바가 마이카를 구제해준 측면도 분명 있다. 하지만 아냐를 자기 딸로 입적하겠다는 마이카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호부호형(呼父呼兄)하지 못하는 한을 품고 살았던 홍길동처럼 마이카는 딸을 동생이라고 부르며 살았으니 그 심정이 어땠겠나.

 

해피엔딩이려면 에바가 아냐를 마이카의 딸로 입적시키고 둘이 먼 곳으로 떠나는 거라고 생각한다. 엄마를 언니로 불려왔던 마이카의 아픔을 에바가 헤아렸어야 한다는 거다. 마이카가 유괴라는 극단적인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그렇게 했으면 더 좋았겠다. 결정권을 쥐고 있는 에바가 딸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해서 진작 내렸어야 할 결단을 내리지 않았기에 사태가 꼬였던 거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오늘날 사회에서도 얼마든지 만들어진다. 꼬인 매듭을 푸는 방법도 비슷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갈등하는 양편 모두 정당성을 갖고 있는 경우 힘을 가진 편이 억지로 상대방을 제압하려 해서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가 잠복했다가 나중에 더 큰 힘으로 폭발할 수 있다. 힘과 결정권을 쥐고 있는 편이 적절한 선에서 양보하는 게 갈등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다. 에바는 그렇게 결단하지 못해서 결국 딸을 떠나보내야 하지 않았나. 우리 사회에선 이런 식으로 결말지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꿈을 꾸고 있나?

 

도둑질의 대상은 돈과 재물이 전부가 아니다. 남의 자유나 존엄성을 도둑질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사랑을 훔치는 사람도 있다. 자기가 가진 자유를 스스로 포기할 수는 있다.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가볍게 버리는 사람도 있다. 사랑을 도둑맞고도 그런 줄 모르는 무감각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들과 자유, 존엄성, 사랑을 빼앗기는 경우는 전혀 다르다. 지키지 않는 것과 빼앗기는 것은 다르다.

 

우리 사회에는 도둑이 아닌데 도둑이 되어버리는 사람들이 많다.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정당하게 주장했다가 범법자로 몰리는 사람도 많다. 안 그런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권리, 곧 천부인권(天賦人權)을 옹호하다가 법의 처벌을 받는 사람도 있다. 경제범죄를 수없이 저지른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는 반면 수십 년 동안 인권운동에 헌신해서 여러 번 감옥살이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편이 진짜 도둑인지 잘 판단할 일이다.

 

도둑이 되지 않으려면 자신부터 속이지 말아야

 

그리스도인을 죽은 후에 해부해보니 심장 옆에 돈지갑이 있더라는 말이 있다. 단순히 우스개로만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이,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소유를 팔아서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는 스스로를 위하여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를 만들고 하늘에다 없어지지 않는 재물을 쌓아 두어라. 거기에는 도둑이나 좀의 피해가 없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누가복음 12:33-34).

 

도둑질은 결국 ‘욕심’ 때문에 한다. 마음과 돈지갑이 같이 있다면 아무 문제도 없다. ‘탐욕’이 사람으로 하여금 부당한 방법으로라도 남의 것을 빼앗고 훔치게 만들기도 하고 공공재산을 개인적으로 사용하게 만들기도 한다. 재산축적을 삶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재물의 노예들’ 때문에 재물이 없어 사람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재물의 희생자들’이 생긴다. 재물의 노예가 없다면 재물의 희생자가 생길 까닭이 없다. 공적인 것을 사적으로 쓰는 것도 도적질이다. 아무리 자기 것이라고 해도 필요 이상으로 낭비하는 습관도 결국은 도둑질이나 다름없다.

 

재물에 대한 성서의 최종적인 교훈은 자신을 속이지 말하는 거다. 도적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려면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흔히 재물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 말이 반드시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 말을 자꾸 입에 올리는 속셈은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재물은 선하게 쓰기보다는 악하게 쓰기가 더 쉽다. 재물을 선하게 쓰려면 땀을 흘려야 하지만 악하게 쓰는 것은 힘들지 않다. 예수님도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가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떠받들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느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 없다.”(누가복음 16:13)고 말씀했다. 재물은 중립이 아니다. 재물은 맘몬 신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재물을 선하게 쓰려면 맘몬 신을 이겨야 한다.

 

재물과 관련된 거짓말은 이밖에도 많다. 나는 부자가 아니라는 거짓말, 노년을 준비하려고 그저 조금 모아놨다는 거짓말, 자식들을 위해서라는 거짓말,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도 재물을 쌓아놓을 수 있다는 거짓말 등이 그것이다. 이런 거짓말로 자신을 속이지 않겠다고 결단하지 않으면 누구나 언제든지 도둑질할 가능성을 갖고 있다. 도둑질이 뭔지 알려면 먼저 이웃에게 정당하게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깔뱅의 말은 도둑질이라는 부정적인 행위는 이웃에게 정당하게 행하고 이웃을 정당하게 대하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행위로 극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영화에서는 누가 도둑인지 가리기가 쉽지 않다. 에바와 마이카가 모두 도둑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분명한 사실은 어린 아냐가 두 사람의 갈등으로 인해 엄청난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땐 어려서 모르겠지만 이 상처는 쉽게 치유될 상처가 아니다. 그녀 영혼 깊은 곳에 계속 남아 있을 거다. 이는 도둑질이 도둑질하고 도둑질당하는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란 사실을 보여준다. 그 파장은 훨씬 더 깊고 넓게 퍼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곽건용/LA 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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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함께 읽는 십계명(6)

 

네 부모를 공경하라

- 어느 아버지와 딸에 관한 이야기

 

 

'가족'이란 무엇인가?

 

20여 년 전 미국에 왔을 때 오랫동안 이민생활을 한 사람들에게 미국생활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었다. 그 얘기는 낯선 곳에서 삶을 시작해야 하는 내게 큰 도움이 됐다. 그 중에 미국에서는 한 가족이라고 말해도 아이를 두고 “엄마를 닮아 예쁘다.”거나 “아빠를 닮아 잘 생겼다.” 같은 말은 하지 말라는 얘기가 있었다. 아이가 현재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전 부인이나 전 남편의 자식일 수 있다는 얘기다. 요즘은 한국에도 서로 다른 가정을 이루고 살다가 새로 가정을 이룬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가족은 무엇이고 누가 가족을 구성하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가족’이란 가족 아닌 사람이 있어서 만들어지는데 그 경계선이 뭔지 묻게 되는 거다.

 

그때 들었던 얘기들 중에 기억에 남는 또 하나의 얘기는 미국엔 집안 식구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요즘은 가족 구성이 과거보다 복잡해졌고 핏줄로 연결되지 않은 식구들도 있으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한 식구를….’이란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물론 같은 핏줄이 아니라고 성적 학대를 해도 괜찮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놀란 이유는 한 핏줄 간에도 그런 일이 드물지 않다는 데 있다. 옛날 같으면 ‘짐승’이라고 욕하고 당장 추방했음 직한데 이런 일이 드물지 않다니 내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전에 서울의 한 텔레비전 방송국 피디(PD)가 쓴 글을 읽었는데 내용이 너무 참담해서 잊히지 않는다. 사십대의 한 여인이 삼십 여 년 전에 겪은 일이랍니다. 그녀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집을 나가버렸고 어머니도 자매를 버리고 어딘가로 가버려서 그녀와 어린 여동생은 고아 아닌 고아가 됐단다. 그녀는 초등학생 때부터 남의 집에서 청소와 빨래를 해주고 살면서 학교를 다녔는데 우연히 고모와 연락이 닿아 아버지 소식을 들었다. 그가 제주도에 산다는 것이다. 그녀는 동생을 데리고 제주도로 내려갔다. 남의집살이하는 것보다는 아버지와 같이 사는 게 낫겠다 싶어서 그랬다는 거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았다. 술주정뱅이 아버지는 밤마다 같이 자자면서 열두 살짜리 딸의 옷을 벗기더란다. 친아버지인데 말이다. 그녀는 견디다 못해 경찰서에 신고했는데 경찰의 태도가 더 기가 막히더란다. 경찰은 “가족 일이니까 가족끼리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면서 신고도 받아주지 않더라는 거다.

 

여인의 아픈 사연은 계속되지만 더 얘기하지는 않겠다. 삼십 년 전 한국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하긴 서양에 있는 일이 한국이라고 왜 없겠나. 기가 막힌 대목은 경찰의 대응 방식이다. 경찰은 신고를 받고도 “가족 일이니까 가족끼리 알아서 처리하라.고 했다니 그럼 한국 경찰은 가족 간에 살인이 저질러져도 가족끼리 알아서 해결하란 말인가? 경찰도 아이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였나 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범죄’로 여기지 않았단 말인가? 아무리 삼십 년 전이지만 가족 간의 성적 학대를 범죄로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도대체 ‘가족’이 뭔가?

 

 

 

 

 

부모 공경은 동서고금의 보편윤리

 

공기나 물처럼 평소엔 의식하지 않다가 없어지면 그 존재감과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가족과 부모도 그렇다. 가족과 부모는 곁에 있을 때는 소중함을 느끼지 않지만 없어지면 빈자리가 크게 느껴진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동서고금의 보편윤리요 가치다. 십계명이 아니더라도 어느 사회에서나 당연하게 인정되는 가치다. 하느님이 계명으로 주지 않았다고 해도 다르지 않을 거다. 하지만 이론과 실제는 다른 법, 지켜져야 한다고 해서 반드시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은 법이 없으면 죽는다지 않나. 없어도 될 것 같은 계명이 정말 없다면 큰일 날 수 있다.

 

요즘 가족가치는 대세라 할 수 있다. 너도 나도 가족가치를 얘기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 내용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고 같은 사회 안에서도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늘 새롭게 해석되고 새로운 방법으로 실천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공경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카베드’로서 ‘무겁게 여기다’라는 뜻이니 계명을 직역하면 “네 부모를 무겁게 여기라.가 되겠다. 그렇다면 부모를 가볍게 여기는 게 문제라는 뜻인데 여기서 불가에서 전해지는 얘기가 떠오른다.

 

석가모니 부처가 제자 아난다와 함께 길을 걷다가 사람의 뼈가 무더기로 쌓여 있는 곳을 지나는데 부처가 뼈들을 향해 큰절을 하는 게 아닌가. 이에 아난다가 놀라서 물었다. 세존께서는 세상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시는데 어찌 마른 뼈다귀에 절을 하십니까?” 이에 부처는 “나는 뼈를 보고 절한 게 아니다. 저 뼈들 중에는 전생의 부모님 뼈도 있을 터이니 나는 부모님을 생각하고 절한 것이다.라고 대답한 후 이렇게 말했단다. 저 뼈들 중 희고 무거운 것은 남자 뼈이고 검고 가벼운 것은 여자 뼈다.아난다가 다시 물었다. 사람이 입는 옷은 남녀의 구별이 있지만 뼈들에겐 그런 구별이 없는데 남자 뼈와 여자 뼈를 어떻게 구별하십니까?이에 부처는 이렇게 대답했단다. “남자들은 살아있을 때 사찰이나 드나들고 경전이나 암송하면서 편하게 살기 때문에 죽어서도 뼈가 희고 무겁지만 여자들은 결혼하고 아기 낳고 젖을 먹이는데 젖이 바로 피에서 만들어지지 않는가? 그래서 어머니 뼈는 시커멓게 썩고 가벼워지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는 거다.

 

이 계명은 본래는 성인 남자들에게 주어진 계명으로서 생활능력을 잃고 자식에게 의존해야 하는 고령의 부모를 공경하란 뜻이었다고 한다. 고대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가부장 사회였다. 심지어 아내는 남편의 재산목록 가운데 하나로 취급됐다. 물론 아내가 농기구와 똑같이 취급되진 않았지만 남편과는 비교할 수 없이 낮은 위치에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계명은 “네 아버지를 공경하라.고 규정하지 않고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규정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공경하라니 둘을 동등하게 여기는 걸로 보인다. 부부관계가 불평등하다고 자식까지 아버지와 어머니를 불평등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지만 계명을 지키는 자녀 입장에서는 문제가 없지 않다. 줄곧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불평등을 봐왔으니 두 분을 똑같이 공경하기 쉽진 않았을 거다. 물론 공경의 방법이 같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이 계명에 대한 키에슬롭스키의 영화 ‘어느 아버지와 딸에 관한 이야기’는 식구가 둘뿐인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얘기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사정이 그리 간단치 않다.

 

어느 아버지와 딸에 관한 이야기

 

앙카는 젊고 매혹적인 배우 지망생으로 아버지 미할과 단 둘이 살고 있다. 어머니는 그녀가 태어나고 얼마 안 돼서 죽었고 그 후 아버지는 재혼하지 않고 딸과 둘이 살고 있다. 둘은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사이가 좋은 부녀다. 부녀 아닌 친구 같아 보일 때도 많다. 앙카에겐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가 있다.

어느 날 앙카가 출장 가는 아버지를 배웅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 책상 위에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었다. 봉투에는 아버지 필체로 ‘내가 죽은 다음에 펴볼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사실 그녀는 이 편지의 존재에 대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여행할 때마다 편지를 갖고 가는 통에 열어 보지 못했을 뿐인데 이번에 아버지가 그걸 집에 놔두고 갔던 거다. 딸이 열어 보길 바라는 듯이 말이다. 그녀는 며칠을 고민하다가 편지를 열었는데 봉투 안에 ‘내 딸 앙카에게 엄마가.라고 쓰인 또 다른 봉투가 있는 게 아닌가. 그녀는 그것까지 열까 말까 며칠 동안 고민한다.

 

일주일 후 앙카는 공항에서 아버지를 맞이한다. 미할은 딸을 반기지만 앙카의 태도는 전에 없이 시큰둥하다. 의아해 하는 미할에게 앙카는 편지 내용을 외워서 읊조린다. 내용은, 미할이 앙카의 친아버지가 아니란 얘기다. 미할은 앙카를 저지하지만 딸이 말을 듣지 않자 딸의 뺨을 때린다.

 

앙카는 아버지와 헤어진 후 애인의 어머니를 만나 결혼에 대해서 상의한다. 얘기 중에 “네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시니?”라고 어머니가 묻자 그녀는 “상관없어요. 어차피 친아버지가 아닌 걸요.”라고 대답한다. 한편 미할은 종일 앙카를 찾아다니다 집으로 돌아왔는데 엘리베이터에서 그녀와 조우한다. 그가 미안하며 앙카를 끌어안는 순간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둘은 황급히 떨어진다. 부녀간인데 말이다.

 

미할은 오래 전에 찍은 어머니 사진을 보여주면서 사진 속 두 남자 중 하나가 앙카의 친아버지일 거라고 말한다. 이 사실을 언제 알았냐고 앙카가 묻자 미할은 오래 전부터 의심했지만 확신하진 못했다고 대답한다. 그녀는 알면서도 자기를 속였다고 아버지에게 화를 낸다. 그는 그녀가 열 살이 되면 알려주려 했지만 그땐 너무 어려서 못 했고 열다섯 살이 되니 그땐 너무 커서 못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단다. 넌 내 딸이니까.그녀는 냉정한 표정을 지으며 “그건 거짓말이에요.라고 대꾸한다.

 

편지를 읽기 전에 앙카는 내용을 짐작했다고 말한다. 남자를 사귈 때마다 그녀는 늘 아버지 때문에 맘이 편치 않았고 아버지를 남자로 느꼈을 때도 많았다는 거다. 앙카가 그에게 “이젠 뭐라고 불러야 하죠?라고 묻자 미할은 “나도 모르겠구나.라고 대답한다. 한편 미할도 앙카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고 고백한다. 그녀가 남자친구와 함께 있을 때 질투심 비슷한 것도 느꼈다는 거다. 그녀가 임신한 적도 있다고 말하자 미할은 매우 불쾌하고 불편해 한다.

 

그는 앙카에게 이젠 자유롭게 자기 인생을 살라고 말한다. 그녀는 어렸을 적에 아빠가 등을 쓰다듬어준 얘기를 하며 아빠는 자기가 어린아이로 머물길 원했다고 말한다. 아빠가 재혼을 안 한 것도 자기가 자랄 때까지 기다렸기 때문이라며 앙카는 이제 자기는 다 자랐고 아버지 딸도 아니라면서 웃옷을 벗는데 미할은 말없이 그녀의 옷을 입혀준다.

 

다음날 앙카는 미할에게 놀라운 얘기를 한다. 엄마의 편지를 열어보지 않았다는 거다. 어머니의 필체를 흉내 내서 그녀가 쓴 가짜 편지를 읽었을 뿐이란 거다. 미할도 편지 내용을 짐작만 했지 실제 읽어보진 않았기 때문에 앙카가 가짜 편지를 읽어도 몰랐던 거다. 진짜 편지는 여전히 봉인된 채로 남아 있었다. 둘은 편지를 봉인된 채 불태운다. 편지가 거의 다 탔을 때 앙카는 타다 남은 편지를 애써 읽는다. 사랑하는 앙카에게 ……. 사실 미할은 ......이게 그녀가 읽을 수 있는 전부였다.

 

 

 

 

계명은 먼저 부모를 향한다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규정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공경할지는 말하지 않는다. 물론 다른 데 부모와 관련된 규정이 있다. 자기 부모를 때린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 (출애굽기 20:15)거나 “자기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 (출애굽기 20:17) 같은 게 그것이다. 하지만 이 규정들을 다 지킨다고 계명을 준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이 계명의 특징은 그걸 지키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는 데 있다. 이런 뜻에서 이것은 ‘열려 있는 계명’이다. 해석의 여지가 넓고 적용방법이 다양하다. 시대가 바뀌고 상황이 달라지면서 새롭게 해석해야 하는 계명인 것이다.

 

부모가 누군가? 공경 받으려면 공경 받을 만해야 하지 않겠나. 공경 받을 자격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말이다. 아버지라 해도 열두 살짜리 딸의 옷을 벗기는 자를 공경할 수는 없다. 야훼가 부모를 공경하란 계명을 줬다면 거긴 부모가 공경받을만 해야 한다는 의미가 전제돼 있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자녀에게 부모를 공경하라고 요구하기 전에 먼저 부모가 자신이 누군지 아는 게 순서겠다. 이는 계명의 이유와 목적과도 관련되어 있다.

 

세상의 모든 관계는 상대적이다. 부모자식 관계도 예외가 아니다. 일방 아닌 쌍방관계다. 지켜야 할 규범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쌍방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느냐에 따라 성격이 변하는 관계라는 얘기다. 한편은 일방적으로 요구만 하고 다른 편은 요구받기만 하는 관계가 아니다. 이 점을 파악한 바울은 이렇게 권한다. 아버지이신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에베소 6:4).

 

사람은 공장에서 물건 만들듯 생산되지 않고 부모를 통해 태어난다. 어머니가 큰 산고(産苦)를 겪어야 자식이 태어난다. 그래서 부모는 천하보다 소중한 하느님 선물인 생명을 자녀에게 전해주는 생명의 전달자다. ‘생명’ 부모와 자식을 이어주는 끈인 셈이다. 그렇다면 계명이 궁극적으로 전제하는 가치는 ‘효도’나 ‘가족’이 아니라 ‘생명’이 아닐까? 이게 사실이라면 생명을 증진하고 풍성하게 꽃 피우는 게 계명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겠다. 계명은 늙어서 생활능력을 상실한 부모를 돌보는 것 이상으로 넓은 생명가치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부모는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성직자’. 부모는 아이에게 첫 성직자일 뿐 아니라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성직자다. 사람이 신앙과 가치관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학교 교사도, 교회 목사도, 책도 아닌 부모다. 부모는 아이가 만나는 첫 ‘예언자’이고 첫 ‘제사장’이기도 하다. 부모는 불의와 정의에 대해서, 하느님의 분노와 자비에 대해서 아이에게 처음으로 가르치고 삶으로 보여주는 첫 예언자다.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범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속죄하는지를 보여주는 첫 제사장도 부모다. 유전은 유전자에만 새겨지는 게 아니다. 흔히 ‘환경’이란 이름으로 뭉뚱그리지만 부모에게서 자식에게 전해지는 유전은 ‘삶’에 새겨지는 법이다.

 

도둑맞은 편지

 

다시 영화 얘기로 돌아가 보자. 영화는 끝까지 미할이 친아버지인지 여부를 알려주지 않는다. 왜일까? 여러분은 궁금하지 않은가? 먼저 아버지 미할의 입장에서 보자. 아내는 앙카를 낳은 지 닷새 만에 죽었다. 나중에 딸이 크면 전해 주라는 봉인한 편지 한 통 남기고 말이다. 어머니는 딸의 친아버지가 누군지 안다. 만일 미할이 앙카의 친아버지가 아니라면 아내는 남편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 게다. 자기 알을 남의 둥지에 갖다 놓아 부화시키는 전형적인 뻐꾸기식 육아법(탁란)이 되겠다.

 

이상한 점은 아버지를 훔치는 마당에 치명적 증거인 편지를 가짜 아버지에게 맡기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미할’은 천사 ‘미가엘’의 동유럽 식 발음이다. 그는 이름대로 '천사'였을까? 이 대목에서 에드거 알렌 포의 ‘도둑맞은 편지’가 떠오른다.

 

 

 

‘도둑맞은 편지’의 줄거리는 이렇다. 프랑스 왕비가 어떤 편지를 읽고 있을 때 왕이 들어왔다. 편지는 왕이 봐서는 안 되는 편지였으므로 왕비는 읽던 편지를 별 것 아닌 서류처럼 책상 위에 펼쳐 둔다. 그때 D 장관이 들어오는데 그는 왕비의 표정을 보고 편지에 모종의 비밀이 있음을 간파하고 편지를 왕비가 보는 앞에서 가져가고 대신 다른 편지를 두고 나간다. 왕비가 편지를 도둑맞은 것이다. 왕비는 D 장관이 편지 훔쳐가는 걸 눈 뜨고 보면서도 상황 때문에 꼼짝 못하고 당한 거다.

 

편지를 소유한 D 장관은 왕비의 비밀을 자기 권력을 키우는 데 활용한다. 왕비는 편지를 되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수포로 돌아가자 G 경감에게 편지를 몰래 찾아오라고 부탁한다. 경감은 편지를 찾으려고 D 장관의 집을 뒤지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지만 실패하자 뒤팽을 찾아와 도움을 청한다. 뒤팽은 장관의 집을 방문해서 색안경을 끼고 방안을 샅샅이 뒤진 끝에 구석에 있는 편지함에 아무렇게나 꽂혀 있는 더럽게 구겨진 편지를 발견해서 장관이 편지를 훔쳐간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유유히 편지를 되찾아온다.

 

흥미로운 점은 여기서도 편지 ‘내용’이 밝혀지지 않는다는 거다. 왕비의 불륜이 담겨 있다고 상상하게 만들지만 말이다. 소설은 편지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인물들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소설은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에 의해서 문자와 사람의 무의식 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는 데 사용됐다.

 

소설에서처럼 영화에서도 편지가 앙카의 손에 들어가자 일종의 ‘권력’을 부여하는 도구가 됐다. 그런데 그게 권력의 도구가 되려면 내용이 알려지지 않아야 한다. 내용이 알려지면 힘을 잃는다. 그러니 읽히지 말아야 하는 거다. 이 점은 편지라는 게 읽히기 위한 것이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봉투와 어머니의 봉투로 이중 봉인된 편지는 읽으라는 것인지 읽지 말라는 것인지가 헛갈린다.

 

앙카가 태어난 지 닷새만에 아내가 죽었으니 핏덩이를 안은 미할은 강렬한 모성애를 느꼈을 터이다. 포동포동한 볼에 머리카락을 앙증맞게 둘로 갈라 묶은 다섯 살 짜리 앙카와,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안 되게 뛰어다니던 열 살짜리 앙카의 맑고 밝고 순수한 생명력, 이런 것들이 홀아비 미할의 삶의 한 줄기 구원의 빛이었을 텐데 그녀가 언제부터인지 변하기 시작했다. 사춘기에 접어드나 싶더니 급기야 남자친구와 침대에 있는 걸 들키지 않나, 앙카는 여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왜 편지를 놔두고 갔을까? 왜 앙카가 그걸 읽을 수 있게 만들었을까? 앙카 출생의 비밀이 언제 그에게 강력한 의문으로 모습을 드러냈을까? 미할이 처음으로 둘의 관계가 삐걱거림을 느낀 다음 편지와 거기에 숨어 있는 아내의 힘을 빌리고 싶었을까? 차마 직접 열어볼 용기는 내지 못했지만 말이다.

 

미할은 아내가 앙카에게 남긴 편지를 읽진 않았지만 자기가 앙카의 친아버지가 아니란 내용일 걸로 짐작한다. 이때까진 앙카와의 관계에서 미할이 힘을 갖고 있었다. 편지를 앙카에게 보일지 여부를 결정하는 쪽이 미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편지를 읽진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편지 내용이 아니라 앙카와의 관계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읽어야 하나. 읽지 말아야 하나?

 

편지는 미할의 의도대로 앙카의 손에 들어갔다. 앙카 역시 미할의 의도를 이해한다. 편지를 읽으라는 거다. 하지만 미할의 욕망은 이보다 좀 더 복잡하다. 그는 자기가 죽은 후에 편지를 읽으라는 글귀를 남겨서 앙카를 당혹에 빠뜨린다. 앙카는 얼마간 고민했겠지만 결국 아버지의 당부를 무시하고 봉투를 열지만 그 안엔 어머니가 남긴 봉투가 하나 더 있다. 이번엔 아무 제약도 없다. 그녀는 또 한 번 고민한다. 어머니의 메시지를 알려면 봉투를 열고 편지를 읽어야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고 대신 자기를 어머니의 자리에 위치시킨다. 어머니의 필체를 흉내낸 또 하나의 편지를 만들어냈다. 로써 그녀는 아버지 욕망의 밑바닥까지 파헤치려 했던 거다. 뜯어보지 말라는 아버지의 명령은 어기고 뜯어보라는 어머니의 명령 아닌 명령은 어기고 자신의 편지를 만들어낸 앙카, 그녀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어긴 걸까? 그녀는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 봉투를 열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어김으로써 아버지를 죽인 걸까? 물론 현실에선 어림도 없는 얘기지만 심리학적으로 그런 게 아니냐는 얘기다. 아버지 미할을 죽이고 남자 미할을 살리는 심리과정 말이다.

 

궁금한 점은 왜 앙카는 어머니의 봉투를 뜯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그녀가 봉투를 뜯으려 할 때 다른 에피소드에서 잠시 등장하는 그 남자가 지나간다. 단지 그 남자의 서늘한 눈빛 때문은 아니었을 거다. 앙카는 진실을 대면할 용기가 없었을 수도 있다. 편지의 내용이 담고 있을지도 모르는 진실이란 게 별 거 아닐 수 있다고 짐작했을 수도 있고….

 

대신 앙카는 뜯지 않은 어머니 편지를 미할에게 들이대며 그 앞에서 옷을 벗는다. 미할과 앙카 사이에 지난 20년을 복기하는 강력한 수단이고 그 비밀을 푸는 만능열쇠인 어머니의 편지, 아버지에겐 뜯은 걸로 되어 있지만 실제론 뜯지 않은 어머니의 편지를 들이대면서 말이다.

 

두 사람은 뭔가를 벗김으로써 어떤 비밀에 다가가려 했다. 여성 호르몬이 본격적으로 분비되기 시작하면서 혼란스럽던 자기 몸을 겹겹이 싸고 있는 옷을 하나씩 벗지만 겹 봉투에 든 편지처럼 옷 속에서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리라는 걸 두 사람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딸은 딸대로 서로에게서 같은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끝까지 그렇게 노심초사했던 게 아닐까? 결론은 어머니의 편지를 태워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야 20년 동안 수상한 아내의 수상한 편지를 결국 뜯지 않은 미할이 이해된다. 그리고 강렬했을 사춘기를 막 지낸 젊은 여자에게 볼 수 있는 출생의 비밀에 대한 호기심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편지를 끝내 뜯지 않고 불태운 딸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딸의 손에 편지를 쥐어주지도 않고 아버지 혼자의 생각만으로 편지를 태웠다면, 혹은 아버지에게 가짜 편지를 들이대는 의식을 치르지 않고 딸 혼자의 생각으로 편지를 태웠다면 딸과 아버지는 내용의 편지를 뜯어본 거나 마찬가지인 결말에 도달했을 것이다.

 

 

 

가족의 경계선은?

 

한동안 가족 가치는 보수파의 전유물이다시피 했다. 진보적인 사람에게 가족 가치를 말하면 ‘왕따’ 당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가족 가치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보편적인 가치로 받아들여지니 말이다. 그 의미는 다르지만 말이다. 요즘 정치인은 정치적 성향과 상관없이 가족 가치를 강조한다. 그걸 훼손하는 발언은 가급적 삼가한다. 교회는 말할 것도 없다. 교회는 가족을 하느님이 창조하신 공동체의 기본 단위로 볼 뿐 아니라 그 안에서 하느님 나라 가치가 실현되는 작은 천국이라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영화는 전통적으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 담겨 있는 내용과는 상당히 다른 얘기를 한다. 부모 공경에 대한 얘기를 찾아내기 어렵다. 하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하느님이 주긴 했지만 하느님이 창조한 사람은 아담과 이브지, 부모와 자식은 아니다. 부모자식, 형제자매, 친척 등의 관계는 부부관계에서 파생된 관계이고 사람이 만들어낸 제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 계명은 친자 여부가 의심스러우면 유전자 검사를 해서 확인한 후에 유전자를 공유하는 경우에만 지키라는 계명은 아닐 터이다. 계명의 범위를 좀 더 넓혀서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뜻이다.

 

오늘날 가족은 혈연만으로 형성되지는 않는다. 가족관계에도 현대사회의 복잡한 사회관계가 반영되어 있다. 전에는 가족의 일원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가족의 일원이 된 경우도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래서 가족의 범위를 정의하기가 쉽지 않고 가족과 가족 아닌 사람 사이에 경계선 긋기도 어려워졌다. 미할과 앙카가 아내이자 엄마가 남겨놓은 편지를 뜯지 않고 불태우는 장면은 이런 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보인다.

 

앙카가 쓴 가짜 편지로 인해서 두 사람이 오랫동안 서로에 대해 갖고 있던 감정이 드러났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 앙카는 미할의 딸일까, 아니면 다른 남자의 딸일까? 앙카는 엄마의 편지를 읽었을까, 읽지 않았을까? 영화는 이 질문에 미묘한 침묵으로써 보는 사람의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진실은 무엇일까? 두 사람이 서로를 남자와 여자로 느낀 적이 있었다면 그런 감정을 갖게 만든 것(또는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 것)은 개봉되지 않은 엄마의 편지 한 통이 전부다. 편지가 두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해서 그런 감정을 갖게 했고 그 감정이 읽지 않은 편지의 내용을 확신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둘은 편지를 읽지 않고 태워버린다. 결말이 어떻게 될까를 궁금해 하면서 지켜보던 나는 여기서 박수를 쳤다. 그들의 행위가 편지가 규정해 줄 둘의 관계를 당당히 거부하고 스스로 만들어가겠다는 결심의 표현으로 봤기 때문이다. 미할과 앙카가 이전처럼 아버지와 딸로 살든, 아니면 남자와 여자로 살든(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제3의 관계로 살든 그건 전적으로 두 사람이 결정하고 만들어야 한다. 둘 사이에 어떤 경계선이 그어지든 그건 전적으로 두 사람에게 달린 문제란 얘기다.

 

혈연이 아닌 믿음으로 이루어진 가족

 

영화의 결론은 그래서 예수 얘기를 떠올린다. 예수가 미쳤다는 세간의 소문을 듣고 가족들이 그를 찾아왔다. 예수는 어떤 집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다가 가족이 왔다는 얘길 듣고 모인 사람들에게 물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입니까?느닷없는 물음에 대답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예수는 그의 얘기를 듣던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십시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입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 (마가 3:31-35)

 

예수에게 가족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가족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아버지 요셉은 일찌감치 무대에서 사라졌다. 동생들이 있었지만 그들 역시 예수 생전엔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 동생 야고보가 교회의 기둥이 되지만 그건 훗날 일이다. 예수 가족들 중 제일 많이 등장한 인물은 어머니 마리아다.

 

여기서 마리아가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을 다 살펴볼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꼭 얘기하고 싶다. 예수가 가나의 혼인잔치 자리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형시켰을 때 마리아의 행동이 그것이다. 잔치 자리에 포도주가 떨어지자 마리아는 예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한다. 왜 그녀는 포도주 얘기를 예수에게 했을까? 포도주 책임자도 아닌데 말이다. 이 때 예수는 “여자여, 그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나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단다. 여기서 둘째 문장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만 첫째 문장, 여자여, 그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영어성서는 “Woman, what concern is that to you and to me?”(NRSV) 또는 “O woman, what have you to do with me?” (RSV)로 번역했지만 희랍어 원문은 “티 에모이 카이 소이?로서, 직역하면 “나와 당신 사이에 무엇(이 있습니까)?가 된다.

 

이것만 갖고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분명한 점은, 예수가 마리아의 행동에 대해 비난하거나 꾸중한다고 볼 이유는 없다는 거다. 마리아는 예수에게 이미 뭔가 범상치 않은 점이 있음을 느끼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굳이 그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렸던 게 아닐까? 예수는 아직 자기가 나설 때가 되지 않았지만 마리아가 자기를 알아본 데 놀랐던 것 같다. 그래서 “당신과 나 사이에 무엇이 있기에 (또는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당신은 나를 알아봤습니까?”라고 물었던 게 아닐까? 간단히 네 단어로 이루어진 희랍어 문장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해석이 배제되고 마리아를 비난하는 듯한 해석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보인다. 혹시 마리아를 낮추려는 개신교 신학의 고정관념이 작용한 게 아닌가 싶어 불편하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입니까?고 묻고 “보십시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입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라고 대답한 예수를 보면서 가족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본다. 예수가 가족에 대해 가졌던 태도가 오늘 우리의 태도를 결정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렇게 하기엔 정보가 충분치 않거니와 설령 충분하다 해도 예수와 우리 사이엔 2천 년이라는 시간적 간격과 문화적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예수에게 가족은 혈연 공동체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남이가?”는 아니었다는 얘기다. 예수에게 어머니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었다.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예수의 형제였고, 정의를 실천하다가 불의한 세력에게 박해당하는 사람이 예수의 자매였다. ‘혈연’ 예수가 가족을 생각할 때 고려한 점이 아니었다. 그래서 예수는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습니다.”라는 과격하기 짝이 없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마태복음 10:37).

 

구약성서는 가족 안에는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이 있음을 강조한다. 부모는 부모이고 자식은 자식이다. 구약성서에는 자식이 부모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들이 명시되어 있다. 형제, 자매 간에도 마찬가지다. 구약성서는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분명하게 세워놓고 그 안에서 지켜야 하는 선을 확실하게 그어놓는다.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레위기 18장 6-11절도 그런 것들 중 하나다.

 

한편 예수는 울타리로 둘러싸인 가족과 구별되는 다른 성격의 가족을 말한다. ‘가치’로 맺어진 가족, ‘신앙’으로 뭉친 가족이 그것이다. 같은 유전자로 인해 형성된 가족이 아니라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가 같기에 형성된 가족 말이다. 이것은 선을 긋는 가족이 아니라 선을 넘어서는 가족이다. 믿음이라는 가치가 바탕이 되는 동지 같은 가족 말이다. 키에슬롭스키의 영화가 미할과 앙카를 특정한 가치로 묶어놓지는 않았지만 둘이 유전자, 친자, 혈연을 초월해서 가족일 수 있음을 보여준 점에서 예수가 말하는 가족에 한 걸음 다가간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말하는 부모 공경도 가족에 대한 두 가지 개념을 염두에 두고 실천되어야 할 것이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과 가치를 중심으로 믿음으로 맺어진 가족 모두에서 부모는 존중되어야 한다. 방법이 반드시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녀이신 여러분, ‘주 안에서’ 여러분의 부모에게 복종하십시오. 이것이 옳은 일입니다.” (에베소 6:1)라고 권하는 게 아니겠는가.

 

곽건용/LA 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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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함께 읽는 십계명(5)

 

살인하지 말라

- 어느 살인에 관한 이야기

 

 

살인의 정의

 

사람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은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또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마태복음 16:26)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공감할 거다. 그런데 십계명 중 가장 까다로운 계명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라면 믿을 수 있겠나? 그건 다른 어떤 계명보다 이 계명에 ‘합법적’ 예외가 많기 때문이다.

 

‘살인’(殺人)은 사람 생명을 빼앗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 계명은 히브리어로 ‘살인하다’(to kill)와 ‘말라’(not)라는 두 단어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누가 누구의 생명을 어떻게 빼앗느냐는 방식과 상관없이 모든 형태의 살인을 금지하는 계명으로 보인다. 여기서 사용된 ‘라짜’는 구약성서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됐다. 예언자 엘리야가 나봇을 죽인 아합 왕을 꾸짖는 대목에서 이 동사는 의도적인 살인을 의미하지만(열왕기상 21:19), 도피성을 지정하는 대목에서는 실수로 저질러진 살인을 가리키며(신명기 4:42) “누구든지 사람을 죽인 사람은 살인자이므로 반드시 죽여야 한다.”라는 민수기 35장 30절에서는 사법적인 살인 곧 ‘사형’을 가리킨다. 이렇듯 ‘라짜’는 전쟁터에서의 살인을 제외한 모든 형태의 살인을 의미하므로 문맥을 잘 살펴서 해석해야 한다.

 

 

 

 

 

학자들에 따르면 이 계명은 본래 ‘피의 복수’로 행해지는 살인을 금지하는 의도였는데 훗날 악의를 품고 의도적으로 저질러진 모든 살인을 금지하는 뜻으로 확대되었다고 한다. 곧 어떤 상황에서든 무슨 방법으로든 증오나 분노, 악의, 속임수, 이득을 취하기 위해 폭력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모든 행위를 ‘살인’으로 규정하고 금했다는 거다. 더 후대에는 계명이 목숨을 빼앗는 소극적 의미를 넘어서 사람의 생명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것으로 더 확장됐다고 한다.

 

이 계명을 이해하기 어려운 까닭은 성서에 다양한 예외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계명들에도 예외가 있지만 이처럼 다양하고 복잡하진 않다. 우선 의도적인 살인과 의도적하지 않고 과실로 저질러진 살인이 구별됐다. 의도적인 살인은 대부분 최고형인 사형으로 다스렸지만 의도적이지 않은 과실로서의 살인은 사형을 피할 수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도피성 제도였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몇 개의 성읍을 지정해서 “실수로 살인한 사람이 피신할 수 있는”(민수기 35:11) 도피성으로 삼아서 “살인자가 회중 앞에서 재판도 받아보지 못하고 보복자의 손에 죽는 일이 없도록”(12절) 하라고 명했다. 그리로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실수로’ 살인한 이스라엘인뿐 아니라 외국인이나 거류자로 포함됐다(15절). 이런 사람들이 피살자 가족 등에게 피의 복수를 당하기 전에 정당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마련된 것이 도피성 제도였다. 재판 결과 고의적 살인이 아니라고 판명되더라도 피살자의 피붙이에게 보복당할 수 있으므로 살인자는 당시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에서 살 수 있었다(25절).

 

성서는 모든 살인을 똑같이 평가하지 않는다. ‘고의로’ 저지른 살인과 ‘실수로’ 저지른 살인, ‘피의 보복’에 의한 살인과 ‘사법 살인’을 성서는 구별한다. 의외로 성서는 ‘피의 보복’을 금하지 않는다. 갑이 악의를 품고 을을 죽였다면 을의 피를 보복할 사람이 갑을 죽일 수 있었다(16-21절). 또한 이스라엘에는 사형제도가 엄연히 존재했었다. 지파나 국가가 죄인을 사형에 처한 것은 계명을 어긴 게 아니었다. 전쟁터에서 적군을 죽이는 것도 금지되지 않았다.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정당화할 수 없는 살인, 곧 처벌받아야 하는 살인이 있는 반면 정당화되는 살인이 있었다. 또한 그 중간에 정당화되지는 않지만 의도적이지는 않기에 정상이 참작되는 살인이 있었다. 이 구분을 가능하게 하는 기준이 무엇일까? 무엇이 어떤 살인은 정당화하고 어떤 살인은 정당화하지 않는가 말이다. 자살은 정당화됐을까? 낙태와 안락사는 어떻게 봐야 할까? 오늘날 전쟁은 대량살상무기로 치러지므로 거기서 파생되는 윤리 문제들은 과거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 키에슬롭스키의 영화 ‘어느 살인에 관한 이야기’는 이 중에서도 사형제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어느 살인에 관한 이야기

 

영화는 젊고 이상주의적인 피오트르가 변호사 면접시험 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는 법이 자연을 모사(模寫)해서는 안 되고 그걸 개선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법은 인간관계를 규정하고 사람이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아가는가를 결정한다고 믿었던 거다. 사람은 자유로운 존재로서 법을 준수하기도, 어기기도 하는데 이런 자유는 오직 타인의 자유에 의해서만 제한된다고 그는 믿었다. 법에 의한 형벌은 해를 가하려고 행해지는 보복일 뿐이고 그걸로 범죄를 예방할 수는 없다는 거다. 그는 면접에서 합격해 변호사가 된다.

 

한편 발데마르는 중년의 택시 운전사로 자기 직업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그는 먹고 살만큼은 벌고 승객이 맘에 들지 않으면 태우지 않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는 임신부의 탑승을 거부할 정도로 질이 좋지 않다. 젊은 여인에게 추파를 보내는 속물이기도 하다.

 

스물한 살 청년 야섹은 가출해서 일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건달이다. 그는 빈둥거리며 못된 짓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른다. 자길 보고 웃는 사람을 쥐어박아 변기에 처박기도 하고 다리 위에서 지나가는 자동차에 돌을 던져 사고를 일으키기도 한다. 로프와 막대기를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니는 그는 당장이라도 범죄를 저지를 것 같다.

 

야섹이 어느 날 카페에서 차를 마시다가 손에 감던 로프를 칼로 자르고 뛰어나가 발데마르의 택시를 잡아타고 교외로 간다. 인적이 드문 곳에 당도하자 그는 갖고 있던 로프로 발데마르의 목을 조르는데 그가 죽지 않자 막대기로 마구 때린다. 그래도 숨이 끊어지지 않자 그는 바윗돌로 발데마르를 때려죽이고 시신을 강가에 내버린다. 그 후 야섹은 라디오를 켜는데 여자아이들의 노래가 흘러나오자 그는 견디지 못하고 라디오를 꺼버린다. 그에게 여자아이와 관련된 모종의 사연이 있음이 암시된다.

 

야섹은 발데마르 살인용의자로 재판을 받는데 신참 변호사 피오트르가 그를 변호한다. 이 사건이 첫 사건인 열정적인 변호사 피오트르는 사형제도에 반대한다. 변호사는 오류를 바로 잡을 수 있고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 믿는 그는 사형제도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두려움뿐으로 범죄 예방의 효과는 없다고 본다. 더욱이 판결의 오류로 일단 사형이 집행되면 그걸 바로잡을 수 없으니 사형제도는 없애야 한다는 거다.

 

 

 

판사는 사석에서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그의 변론은 최고였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야섹은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가 처형되는 날 피오트르는 그를 면회한다. 피오트르가 야섹의 어머니를 만났다고 말하자 그는 한 번 더 어머니를 만나달라고 부탁한다. 야섹은 여동생 마리가 열두 살 때 죽은 얘기를 피오트르에게 털어놓는다. 그가 친구와 술을 마셨고 친구가 트럭을 운전했는데 마리가 그 트럭에 치어 죽었다는 거였다. 그 일만 없었다면 그는 가출하지 않았고 모든 게 달라졌을 거라는 얘기였다. 그는 자기가 죽으면 아버지 곁에 묻어 줄 것과 사진관에 맡긴 마리의 영성체 사진을 찾아 줄 걸 부탁한다.

 

집행을 서두르는 관리의 성화에 면회는 끝났고 교도관은 야섹을 집행 장소로 끌고 간다. 처형은 그가 저지른 살인만큼 냉정하게 실행된다. 마지막으로 담배를 한 대 피운 후 야섹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발악하지만 교도관들이 그를 붙잡아 억지로 사형을 집행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형 집행 후 피오트르는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구역질난다!”고 되뇐다.

 

살인만 살인이 아니다

 

‘살인’의 의미는 세월과 함께 확대됐지만 생물학적 의미를 넘지 않았다. 개신교에선 외경으로, 가톨릭에서는 제2경전으로 분류되는 집회서에도 “가난한 사람에게는 빵 한 조각이 생명이며 그것을 빼앗는 것은 살인이다.”(34:21)라는 대목이 있는데 여기서도 생명은 생물학적 의미로 사용됐다. 그런데 신약성서는 ‘살인’을 물리적으로 생명을 뺐는 행위에 국한시키지 않는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옛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을 것이다.’ 한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를 모욕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의회에 불려 갈 것이요 자기 형제나 자매를 바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지옥 불 속에 던짐을 받을 것이다.”(마태 5:21-22)라고 말씀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살인’을 분노와 모욕, 언어폭력까지 포함하는 걸로 의미가 ‘확대’됐다고 이해하는 게 하나이고, 분노와 모욕과 언어폭력을 살인의 ‘동기’로 봤다고 보는 게 다른 하나다. 두 가지가 모두 가능하다. 대개의 경우 살인은 불현듯 저질러지는 범죄가 아니다. 어느 영화에서처럼 ‘햇볕이 너무 따가워서’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살인은 증오와 분노의 최종적인 결과다.

 

한편 요한일서 3장 15절은 “자기의 형제나 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을 하는 사람입니다. 살인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미움은 곧 살인이고 살인자에게는 영생이 없으므로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그 안에 영생이 없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교에서 중요한 가치인 ‘영생’의 소유 여부가 형제자매를 사랑하느냐 미워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전후맥락을 보면 요한일서에서 죽음, 살인, 생명, 영생 등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의미가 아님을 볼 수 있다. 요한은 우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며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요한일서 3:11).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일을 들며 가인이 한 일은 악했고 아벨이 한 일은 의로웠으므로 가인이 그렇게 했다고도 말한다(12절). 창세기 4장의 얘기만으론 이런 해석은 무리다. 가인과 아벨 얘기에 대한 오랜 해석의 역사를 감안하지 않으면 이 말을 이해할 수 없는데 우리 얘기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으니 그 얘긴 여기서 멈추겠다.

 

다음으로 요한은 세상이 우리를 미워해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한다. 세상은 사랑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죽음 가운데 머물러 있기 때문인데 그 까닭은 세상이 사랑을 모르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갔다는 것”을 안다고 했다. 그걸 어떻게 알까? 그들이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거다. 이렇듯 모든 것의 중심에 ‘사랑’이 있다. 그래서 요한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 가운데 머물러 있습니다.”라고 마무리한다(14절).

 

요한은 사랑, 생명, 영생이 그리스도인들만 누리는 특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을 그리스도에게 배웠고 그분을 통해 경험했는데 그 사랑은 자기 목숨을 우릴 위해서 버리 데서 드러났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됐고 따라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거다(16절). 요한에게 가인의 아벨 살해는 영적 살해, 영적 생명의 메타포다. 모든 비극은 사랑의 결핍에서 오고 참된 신앙의 표는 사랑이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내가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고린도전서 13:2).

 

이 계명은 의도된 살인과 의도되지 않은 살인을 구별해서 보복을 막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반면 신약성서는 증오나 분노, 언어폭력 같이 살인을 초래하는 원인을 규명해내고 궁극적으로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데까지 계명의 의미를 확대한다. 이젠 이런 흐름을 감안해서 오늘날 이 계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지켜야 하는지를 생각해볼 차례다. 오늘날에는 성서가 명백하게 언급하지 않는 다양한 종류의 살인이 있다. 자살, 낙태, 안락사 등이 대표적인 예다. 사형제도와 전쟁에서의 살인은 성서가 수없이 언급하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졌으므로 근본에서부터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전쟁에서의 살인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구약성서는 어떤 경우에도 전쟁에 반대하는 비폭력, 평화주의적인 책이 아니다. 그것은 어떻게든 전쟁은 피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고대 이스라엘이나 초대교회에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였다. 구약성서에는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살인에 대한 특별한 지침 같은 건 없다. 지침이 있다면 전쟁터에선 생명 있는 것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이 그것이다. 그들은 가나안 사람들과 전쟁했을 때 사람, 짐승 할 것 없이 모두 죽이고 전리품도 태워야 했다(신명기 20:10-18). 그걸 ‘헤렘의 법’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가나안 정복 후엔 이 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패배한 군인과 가족을 노예로 삼았고 전리품도 공신들에게 분배됐다. 로마제국 시대였던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은 전쟁에 동원되지 않았다. 그래서 전쟁터에서의 살인에 대한 가르침을 찾아볼 수 없다. 요한계시록에 우주적인 종말론적 전쟁 얘기가 나오지만 그것은 현실세계에서 벌어지는 전쟁과는 구별해야 한다. 그것 말고는 신약성서에 전쟁에 대한 얘기가 없다.

 

이스라엘의 전통적 전쟁 이념은 ‘거룩한 전쟁’(Holy War)이란 신학이다. 이스라엘에서 전쟁은 야훼가 자기 명예를 위해 직접 치르는 것으로서 이스라엘은 전쟁터엔 나가지만 굳이 싸우지 않아도 됐다. 이 이념은 여호수아 6장의 여리고 성의 경우처럼 초기엔 지켜졌지만 후대엔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신아시리아제국이 고대 중동 대부분 지역을 지배한 후로는 이스라엘이 주변 족속들과 별로 전쟁을 벌이지 않았고 상황이 이렇게 달라지자 전쟁에 대한 이념도 달라졌다. 거룩한 전쟁 이념의 퇴색은 자연스런 과정이었다.

 

거룩한 전쟁 이념을 갖고 있었다 해도 그들 역시 무기를 들고 전쟁터에 나가 피 흘리고 목숨 걸고 싸워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야훼의 거룩한 전쟁으로 여겼다는 사실은 전쟁의 정당성 및 거기서 벌어지는 살인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효과도 있었다. 훗날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과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등이 내세운 ‘정당한 전쟁’(Just War) 이론의 뿌리도 여기에 있다.

 

‘정당한 전쟁’ 이론은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전제 위에 서있다. 이것은 전쟁의 ‘윤리’를 고려한다는 점에서 그걸 전혀 고려하지 않는 ‘거룩한 전쟁’ 이념과는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평화주의자로 살아야 하지만 무고한 사람을 방어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전쟁은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물론 이 전쟁은 평화를 확보하기 위한 방어전쟁을 가리킨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정당한 전쟁이다. 한편 아퀴나스는 어거스틴의 주장에 근거해서 정당한 전쟁의 요건 몇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로 전쟁이 이득을 취하거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당한 목적을 갖고 치러져야 하고, 둘째로 국가와 같은 정당한 권위기구에 의해 치러져야 하며, 셋째로 폭력이 행해지는 중에라도 평화가 전쟁의 중심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당한 전쟁’ 이론은 오늘날에도 가톨릭교회가 내세우는 전쟁 윤리이다. 개신교는 교단 숫자도 많고 성향도 다양해서 전쟁윤리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지 않은 형편이다.

 

오늘날 전쟁의 양상을 보면 ‘정당한 전쟁’을 포함해서 어떤 전쟁윤리도 고려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쟁 관련 국제협약들도 지켜지지 않는다. 민간인에 대한 빈번한 살상(殺傷)도 빈번하고 대규모로 자행되고 있다. 911 사태 이후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이란 이름으로 자행한 수많은 인권유린 범죄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결론은 전쟁은 일단 벌어지면 쓰고 있던 윤리라는 가면을 금방 벗어버린다는 사실이다. 구약성서의 ‘거룩한 전쟁’ 이념이 현대인이 받아들일 수 없는 이념이듯 ‘정당한 전쟁’ 이론도 허울뿐인 명분에 불과하다. 그래서 전쟁은 무슨 수를 쓰든 막아야 하고 그 길만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는 길이다.

 

국가에게 사람 목숨을 빼앗을 권한이 있는가?

 

오늘날 문명국가에서 살인면허를 갖고 있는 유일한 기관은 국가다. 국가는 사형제도를 통해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다. 이 제도에 문제가 많다고 해서 많은 개인, 단체가 폐지운동을 벌여왔다. 덕분에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의 2007년도 통계에 의하면 64개 국가에서는 사형제도를 유지하는 반면 133개 국가에는 이 제도가 없거나 있어도 십년 동안 형을 집행한 적이 없다고 한다.

 

사형제도에 대한 여론은 오락가락한다. 평소에는 폐지의견이 많다가도 연쇄살인 같은 사건이 일어나면 존속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진단다. 제도의 존속과 폐지 쪽 논리에 나름 타당성이 있다. 존속 편의 의견에 따르면 사형제도에 범죄억제 효과가 크고 범죄에 대해 징벌을 가하는 것은 사회정의라고 한다. 경제적인 면을 고려해도 이 제도가 비용이 적다고 한다. 반면 폐지 편은 생명가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이므로 인도주의 입장에서나 헌법의 입장에서나 사형제도는 폐지돼야 한다는 거다. 재판은 사람이 하기 때문에 오판 가능성이 늘 존재한다는 점도 폐지 주장을 뒷받침한다.

 

<어느 살인에 관한 이야기>도 결국은 사형제도에 대한 영화다. 영화는 세 사람의 죽음 얘기다. 술 취한 친구의 트럭에 치어 죽은 야섹의 동생 마리의 죽음, 알지도 못하는 야섹에게 죽은 택시 운전사 발데마르의 죽음, 사형제도에 의해 죽은 야섹의 죽음이 그것이다. 마리의 죽음은 실수에 의한 죽음이고 발데마르의 죽음은 목적 없는 무의미한 죽음이다. 이 죽음을 야기한 사람은 어떻게든 책임을 져야 했다. 두 살인에 대해서는 국가가 살인자에게 책임을 물렸지만 국가가 저지른 살인(사형)에 대해서는 아무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이래도 괜찮은가?

 

왜 세 죽음을 나란히 얘기했을까? 마리의 죽음은 이 가운데 가장 억울하다. 야섹은 단번에 죽지 않고 끈질기게 버티는 발데마르를 잔인하게 돌로 쳐 죽였다. 치밀하게 준비한 국가 관리들에 의해 실수 없이 조용히 죽게 되어 있던 야섹은 잠시 소란을 피우지만 간단히 제압당한 후 숨을 거둔다. 마리는 잘못 없이 죽음으로써 관객의 동정을 불러일으킨다. 발데마르는 고상한 도덕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을 만큼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마리처럼 동정을 살 이유도 없지만 죽어 마땅하지도 않다. 한편 야섹에겐 동정 받을 구석이 없어 보인다. 마리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야섹이 살인해도 되는 건 아니다. 그에게 동정 받을 구석이 없다는 사실이, 그가 의미도 목적도 없는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국가 권력에 의한 처형을 정당화할까? 그의 처형을 정의의 실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오늘날 국가는 유일한 살인면허를 가진 존재다. 전쟁을 선포하고 실행하는 유일한 기관도 국가이고 ‘테러와의 전쟁’ 같이 그럴듯한 명분을 세워 사람을 죽이는 유일한 기관도 국가다.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 따르면 생명을 취하는 권한을 가진 국가는 세상의 폭력을 관리하고 제한할 수 있는 도덕적, 윤리적 정당성을 가져야 한다. 오늘날 국가에 그런 정당성이 있는가? 제도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죽일 권한을 주어도 될 만큼 국가는 정의로운가?

그 누구에게도 사람의 생명을 취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문제는 오늘날 사람 목숨을 빼앗을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는 국가를 감시하고 견제할 제도적 장치가 있는가 여부에 있다. 우리 경험에 따르면 그런 장치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국가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한다. 안 그런가? 국가는 ‘모든’ 국민의 복지를 위해 정책을 정하진 않는다. 심지어 전쟁과 같은 국가의 중대사도 ‘모든’ 국민의 이해가 아니라 소수 지배자의 이해에 따라 결정되지 않던가. 우리는 지난 십여 년 동안 이런 현실을 신물 날 정도로 봐오지 않았나 말이다. 그래서 전쟁에 의한 살인이나 사형제도 문제도 결국 국가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계명은 적극적인 생명가치의 바탕 위에서 이해해야

 

자살이나 안락사나 낙태 문제 역시 계명과 관련된 중요한 사회문제다. 그 동안 낙태와 안락사 문제가 사회문제로 인식되어온 것과는 달리 자살은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어왔다. 이를 사회문제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개는 개인의 문제로 본다. 특히 해결책에 있어서 그렇다. 자살의 최종적인 책임은 대부분 ‘우울증’이라는 정신질환에 돌려졌다. 또한 안락사와 낙태문제에 대해서도 교회는 설득력 있는 입장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가톨릭교회는 이에 대해서 일관된 입장을 보여 왔지만 일반대중에게 크게 설득력이 있지는 않은 형편이다.

 

교회는 안락사와 낙태와 자살을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죄’라고 규정한다. 셋 모두 성서에 등장하지 않거나(낙태와 안락사) 등장해도 문제시하지 않으므로(자살) 거기 근거해서 입장을 정할 수는 없다. 결국 성서의 기본입장이 뭔지 물어야 한다. 하지만 성서의 기본입장은 말 그대로 기본입장일 뿐, 구체적인 상황에서 그걸 어떻게 적용하는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

 

개신교는 안락사와 낙태와 자살에 대해 통일된 입장이 없고 가톨릭교회는 셋 모두 반대한다. 아무리 상황에 어렵다고 해도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사람 맘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게 그 이유다. 여기서도 생명가치가 가장 중요하게 인정돼야 한다. 그런데 이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안락사, 낙태, 자살의 문제를 전쟁에서의 살인 및 사형제도와 분리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일 생명가치가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최고의 가치라면 전쟁과 사형제도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는데 그 문제와 관련해서는 수많은 예외를 인정하는 모순을 교회가 저지르고 있다. 그래서 안락사, 낙태, 자살에 관련된 교회의 입장이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안락사와 낙태와 자살을 허용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생명이 최고의 가치라면 그걸 적용하는 데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오늘날 계명을 제대로 지키려면 현재 상황에 맞춰서 계명을 기술적으로 재해석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근본적으로는 생명가치를 최고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권력과 부(富)처럼 폭력과 살인을 용인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자리에 올려놓은 우리 사회의 가치관을 바꾸지 않으면 계명을 제대로 지킬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교회가 그 동안 해온 걸 반성해야 한다. 안 그런가?

 

교회는 형제자매에게 성을 내거나 모욕하거나 바보라고 언어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살인한 것이나 진배없다고 가르쳤지만 놀라울 정도로 쉽게 폭력을 용인하고 생명가치를 깎아내렸다. 권력을 가진 집단의 횡포를 견제하고 꾸짖기는커녕 그들의 가치관에 동화되어 국가가 불의한 전쟁을 벌였을 때도 침묵하거나 불의한 권력의 손을 들어줬다. 이런 행태를 보여 온 교회가 안락사, 낙태, 자살을 생명경시 풍조라고 꾸짖는다면 누가 교회의 말에 귀를 기울이겠나.

 

교회는 부에 대한 욕망과 폭력이 뗄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한다. 그것의 필연적인 귀결은 ‘살인’임도 깨달아야 한다. 이런 현실에서 교회는 온유하고 자비롭고 평화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로서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드높이는 공동체가 됐으면 좋겠다. 마땅히 교회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기에 그 일을 하고 있는 여타 공동체들,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 일하는 단체들,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터에 나가서 어느 편이든 다친 사람들을 치료해주는 단체들, 생명의 가치와 신비를 고양하는 데 힘쓰는 단체들, 굶는 아이들과 치료 못 받는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단체들, 그 종류를 열거하기도 힘든 여러 단체들과 손잡고 참된 생명과 평화의 질서를 세우는 데 온몸을 던져야 하겠다. 안 그런가?

 

예수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고 여러 번 말씀했다. 교회는 입을 열어 자기 말을 하기 전에 먼저 귀를 열고 세상의 소리를 들어야 하겠다. 불의하고 불평등한 사회구조 속에서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들어야 한다. 교회가 말을 들어주지 않고 곁을 내주지 않아서 외롭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는 “살인을 용인하지 말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곽건용/LA 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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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함께 읽는 십계명(4)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 어느 크리스마스이브에 관한 이야기

 

 

생명 있는 모든 존재를 위한 안식일 계명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는 사람이 창조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거기서는 신들의 세계에도 지위가 높은 신과 낮은 신의 계층구분이 있었는데 지위 낮은 신들은 3D 업종에 속하는 고된 일들을 맡아 했다는 거다. 하루는 이들이 일이 너무 고되고 힘들어 못 살겠다고 높은 신들에게 불평을 터뜨린다. 높은 신들이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어서 ‘사람’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사람은 낮은 신들이 하기 싫어하는 3D 업종 고된 일을 대신 하게 하려고 높은 신들이 창조했다는 얘기다.

 

안식일에 관한 계명은 이런 배경 속에서 이해돼야 한다. 고대 중동 어디서도 유례를 볼 수 없는 독특한 계명이다. 어디서도 신이 사람들에게 일주일에 하루는 일하지 말고 쉬라는 계명을 준 유례가 없기 때문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라. 너희는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야훼 너희 하느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희와 너희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만이 아니라 너희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내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야훼가 안식일을 복 주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다(출애굽기 20:8-11).

 

이 유래와 시행세칙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계명들과 구별된다. ‘기억하라’는 말은 안식일을 망각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그 의미와 취지를 명심하라는 뜻이겠다. 그 날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했는데 어떻게 해야 ‘거룩하게’ 지키는지를 아는 게 이 계명 이해의 관건이다.

 

계명을 지키려면 우선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하라”고 했다. 안식일 계명은 안식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엿새를 어떻게 지내는지와 뗄 수 없이 관련되어 있다. 엿새는 안식일을 돋보이게 하려는 들러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와 가치가 있는 소중한 날들이다. 따라서 계명의 준수는 안식일뿐 아니라 엿새를 어떻게 지내는지와 맞물려 있다. 엿새는 “모든 일을 힘써 하는 날”이다. 그러지 않으면 안식일을 어떻게 보내든 거룩하게 지냈다고 할 수 없다.

 

다음으로 “그러나 이렛날은 야훼 너희 하느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안식일은 사람의 안식일이기 이전에 ‘야훼 하느님’의 안식일이다. 안식일을 제정한 분도 하느님이고 첫 안식일에 쉬신 분도 하느님이므로 그 주인은 마땅히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사람이 안식일에 쉬어야 하는 이유도 하느님이 그 날 쉬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천지창조와 사람의 노동은 어떤 식으로든 관련되어 있음이 암시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만이 아니라 너희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해서 안식일에 누가 쉬어야 하는지 밝힌다. 사람과 동물을 막론하고 노동력을 가진 생명 있는 존재는 모두 쉬어야 한다는 얘기다. 여기에 계명이 갖고 있는 래디컬한 평등주의가 있다. 남자와 여자, 주인과 종의 차별이 존재했던 시대에 안식일만이라도 차별 없이 모두 쉬라는 계명은 남녀차별과 계층구별 이전에 생명 있는 모든 존재를 하느님이 사랑하심을 보여준다. 이 계명은 ‘명령’이 아니라 ‘복음’으로 들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 쉬라는데 마다할 사람이 있을까? 물론 엿새 동안 힘써 일하라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계명이 불편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안식일을 ‘복 주고 거룩하게’ 하셨으므로 사람도 이 날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종교적 의무의 냄새가 강하게 느껴지고 불편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거룩하게 지키는 걸까?’라는 물음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안식일에 일하면 죽여라!

 

하지만 이 계명이 그렇게 평온하고 평화로운 것만은 아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안식일 관련 사건과 얘기들을 보면 계명은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인상을 더 많이 준다. 예수 당시 유대교가 안식일을 이해했던 방식을 보면 그 날은 평화롭게 안식하는 날이 아니라 해서는 안 될 일들로 가득한 골치 아픈 날이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예수의 말씀이 부정적인 인식을 많이 씻어주지만 그 한 마디로 안식일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던 속박과 굴레가 없어졌을까? 안식일을 어기는 사람은 사형에 처하라는 율법(출애굽기 31:14-15)도 있지 않은가. 안식일에 일했다고 죽어야 한다면 그 계명은 ‘복음’일 수 없겠다. 안 그런가?

 

매일 놀고먹는 사람에게는 이 계명이 ‘복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겠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안식일 하루의 안식이 꿀맛일 게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 안식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쉬는 날이었다. 그런데 왜 그게 이렇게 달라졌을까? 왜 안식일이 뭔가는 반드시 해야 하고 또 뭔가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날이 된 걸까? 사람들은 하느님이 이 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했다는 대목에서 어떻게 해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서 복을 받을 수 있을까를 궁리했을까? 그래서 안식일에 해야 하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하는 일들에 대한 기나긴 목록이 만들어졌을까? 그러니 매일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계명은 족쇄가 됐고 제의적 의무에 집중하게 됐던 걸까? 이로써 가장 부담이 덜 되어 보이는 계명이 오늘날에는 가장 까다롭고 이해하기 어려운 계명이 됐다.

 

필자가 중고등학생 때는 주일에는 오락도 하지 말고 돈을 주고 뭔가를 사지도 말라고 배웠다. 공부도 해서는 안 됐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요즘도 그렇게 가르치는 교회가 있는지 모르겠다. ‘성수주일’을 외치는 교회는 많지만 그 의미는 옛날과 많이 달라졌다. 요즘은 그저 주일예배(미사)만 빠지지 않으면 주일성수한 걸로 친다. 이런 상황에서 안식일 계명의 의미는 뭘까? 이 법은 이미 사문화됐을까? 영화 ‘어느 크리스마스이브에 관한 이야기’는 안식일 법의 현재적 의미가 뭔지 곱씹어보게 해준다.

 

‘어느 크리스마스이브에 관한 이야기’

 

택시 운전사 야누스는 아내와 두 자녀와 함께 살고 있다. 한 크리스마스이브에 야누스가 산타복장을 하고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준다. 행복한 가정임을 보여주려는 듯이. 게다가 부부는 아이들을 재운 다음 자정미사에 참석한다.

 

에바는 숙모를 보러 양로원을 방문한다. 거기도 성탄절 분위기지만 숙모는 혼자 쓸쓸히 자기 방에 누워있는데 그녀를 알아보지만 정신이 흐리다. 이를 보는 에바의 심정은 쓸쓸하기만 하다. 성탄 전야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말이다. 그녀도 자정미사를 보러 성당에 갔는데 거기서 우연히 야누스를 본다. 둘은 3년 전엔 연인이었다. 각자가 가정이 있는 불륜관계였지만 말이다. 그 관계는 둘이 같이 있다는 걸 누군가가 에바 남편에게 전화로 알리는 바람에 깨지고 말았다.

 

미사가 끝나 야누스 부부가 집에 돌아왔을 때 전화벨이 울린다. 에바의 전화지만 야누스는 아내에게 택시를 도둑맞았다고 거짓말하고 그녀를 만나러 나간다. 에바도 야누스에게 거짓말을 한다. 남편이 실종됐으니 그를 찾아달라고 말이다. 둘은 에바의 남편을 찾으러 한밤중에 이곳저곳을 다닌다. 그 동안 둘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둘은 서로 찌르는 말을 주고받는다. 결국 남편을 찾지 못하고 에바의 아파트로 갔는데 거기서 야누스는 에바가 거짓말했음을 알게 된다. 에바가 그럴 줄 알고 화장실에 남자용 칫솔과 면도기를 갖다 뒀는데도 말이다. 두 사람은 3년 전 사건에 대해 얘기한다. 그때 야누스는 가정을 버리고 에바에게 가려 했는데 불륜 현장이 발각됐을 때 그녀가 자기를 버리고 남편에게 갔던 데서 상처받았다고 말한다. 한편 에바는 그 사건 후에 야누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복하게 잘 산다는 데서 배신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녀는 지금은 남편과 아무 문제도 없다고 말하지만 야누스는 그 말이 거짓말인 걸 알게 된다. 화장실에 있는 면도기가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녹슬어 있음을 봤기 때문이다.

 

에바는 그날 일이 자기에겐 일종의 게임이었다고 말한다. 크리스마스이브 저녁부터 다음날 아침 일곱 시까지 야누스가 자기와 함께 있다면 모든 게 잘 될 걸로 믿고 살고 야누스가 오지 않거나 일곱 시 전에 떠나면 자살하려고 했다는 거다. 둘이 하루 밤을 같이 지냈으니 자살할 필요가 없어졌다면서 그녀는 알약을 버린다. 한편 야누스가 집에 들어왔을 때 아내는 소파에서 선잠을 자다가 깨서 그에게 묻는다. “에바였어?” 그녀는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남편이 왜 한밤중에 나갔는지를. 그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녀가 “또 그럴 거야?”라고 묻는다. 야누스는 “다시는 안 그래.”라고 대답한다.

 

 

 

 

안식일은 시간의 성전(a sanctuary in time)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은 안식일 제도의 근거가 하느님의 창조행위라고 말하고 신명기 5장의십계명은 그 근거를 출애굽 사건에 둔다는 차이가 있다.

 

너희는 기억하여라.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에 야훼 너희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편 팔로 너희를 거기에서 이끌어 내었으므로 야훼 너희의 하느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한다(신명기 5:15).

 

왜 두 텍스트는 안식일의 근거를 다르게 말할까? 흔히 안식일의 근거로 창조행위와 출애굽을 나란히 놓고 생각한다. 인류 전체로 보면 창조행위가, 이스라엘로 좁혀서 보면 출애굽이 근거라는 거다. 하지만 하나의 제도가 연관 없어 보이는 두 사건에 동시에 기반하고 있다는 설명은 부자연스럽다. 성서 편집자가 둘을 그대로 뒀다면 거기에서 모종의 연관성을 봤기 때문일 것이다.

 

안식일은 말 그대로 안식하는 날이다. 곧 쉬는 날인 거다. 어떻게 하는 것이 쉬는 걸까? 여러분은 쉴 때 어떻게 쉬는가? 잠을 자나?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쉬는 것인가? 그럼 아무 것도 안 하는 건 어떻게 하는 걸까? 사람은 깨어 있는 한 늘 뭔가를 하고 있지 않나? 에너지를 사용하는 한 뭔가를 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하느님이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고 이레 째 쉬었다는 말은 창조하느라 너무 피곤해서 이레 째 되는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는 뜻은 아닐 게다. 하느님에게 쉰다는 것은 녹초가 되어 아무 일도 안 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직접 만든 만물을 즐기고(enjoy) 감상하고(appreciate) 관조(reflect)한 게 아닐까? 안식은 곧 즐기고 감상하고 관조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사람에게 안식도 단순히 육체적 피로를 푸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세계와 자신이 한 노동의 결과물을 즐기고 감상하고 관조함으로써 하느님과 소통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우리는 이것을 예배/미사라고 부른다. 예배/미사는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아니다. 그것은 노동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이고 ‘축복’이며 ‘선물’이고 ‘은총’이다. 안 그런가?

 

출애굽의 궁극적인 목적은 야훼 하느님을 예배하는 데 있었다(출애굽기 5:3). 곧 히브리 노예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창조세계를 즐기고 감상하고 관조하며 하느님과 소통하게 하려고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냈다. 야훼는 히브리인들의 뼈저린 경험을 잘 알기에 안식일에는 그 누구도 일하지 말라는 계명을 줬다. 출애굽기와 신명기가 다르게 말하는 안식일의 근거가 여기서 만난다. 안식과 창조가 예배/미사에서 만나는 것이다.

 

학자들은 이스라엘은 이 계명을 늘 잘 지키지는 않았다고 본다. 가장 철저하게 지켜졌던 때는 바빌론 포로기라고 한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어 제사를 지내니 못하게 됐을 때 그 자리를 안식일 제도가 차지했다는 거다. 이런 상황에서 안식일 계명이 ‘의무’로 인식되기 시작했단다. 계명의 준수 여부가 신앙을 판가름하는 척도가 되어 예수 시대까지 이어졌다는 거다.

 

예수 시대에 이 계명은 피곤한 노동에서 사람을 해방해서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을 누리고 감상하고 관조하며 하느님과 소통하게 하는 은총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안식일에도 일해야 했던 사람들과 안식일에는 해서는 하면 안 되는 6백여 가지 금령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던 사람들을 얽매는 속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께서 일부러 안식일에 만성병 환자를 고쳐준 걸 비롯해서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의도적으로 함으로써 안식일의 신학이 ‘공로의 신학’이 아니라 ‘은총의 신학’임을 일깨워줬다. 안식일은 하느님의 창조세계를 즐기고 감상하고 관조하면서 하느님이 우주의 주님임을 고백하는 날이고, 세계가 사람의 작품이 아니라 하느님의 작품임을 일깨우는 표징이 되는 날이다.

 

유대교 랍비 헤셀(Abraham Joshua Heschel)은 안식일을 ‘시간 안의 성전’(a sanctuary in time)이라고 불렀다. 안식일 계명은 시간을 거룩하게 여기는 종교인 유대교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계명이다. 성서에서 시간은 양적인 개념에 그치지 않는다. 시간의 다양한 성격에 주목하는 거다. 성서에 똑같은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시간은 다 다르다. 각각의 순간은 그만의 독특한 가치를 갖는다. 그래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일어나는 거룩한 사건들, 곧 ‘시간 안의 성전’에 주목하라고 한다. 안식일은 그 중 가장 거룩한 시간이고 가장 위대한 성전이라는 거다. 공간을 차지한 예루살렘 성전은 바빌론과 로마제국에 무너졌지만 시간 안의 성전은 아무도 파괴하지 못한다. 안식일은 시간의 거룩함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다.

 

성서에서 ‘거룩’이란 말이 처음 나오는 구절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한 출애굽기 20장 8절이다. 하느님은 시간을 거룩하게 만들었다는 거다. 하느님께서 처음 거룩하게 만든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구약성서 창조 이야기는 공간에 ‘거룩함’이란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데 이 사실은 특정 장소를 거룩하게 구별해서 거기에 ‘성전’을 지은 고대 중동문명과 대조된다.

 

다음으로 하느님은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을 가리켜 “거룩한 내 백성이 되리라.”(출애굽기 19:6)고 말했다. 안식일 다음에 하느님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었다는 거다. ‘장소’가 거룩하게 된 때는 황금송아지 배교(背敎) 사건 후에 ‘성막’을 만들라고 명했을 때다. 곧 하느님께서 가장 먼저 거룩하게 하신 것은 안식일이란 ‘시간’이었고 그 다음은 ‘사람’이었으며 마지막이 성막이란 ‘공간’이었다는 얘기다. 역사적으로도 성전 파괴와 함께 거룩한 장소가 사라졌고 그리스도교의 탄생과 더불어 거룩한 백성의 정체성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지만 거룩한 시간으로서 안식일(주일)의 의미는 여전히 남아 있다.

 

야누스와 에바의 안식일

 

안식일은 생명과 자유로 충만한 시간이다. 그게 반문화적인(counter-cultural) 계명인 까닭이 여기 있다. 안식일은 ‘재충전’을 위한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계명은 엿새 동안의 노동의 궁극적인 목적이 사색과 관조와 예배임을 상기시킨다. 키에슬롭스키는 추상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안식일 계명이 3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듯 그 의미와 가치를 현대적으로 풀어냈다.

 

야누스와 에바는 크리스마스이브 저녁부터 다음날 오전 7시까지 함께 지냈다. 둘은 불륜이긴 했지만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다. 맘은 편치 않았고 살얼음판 걷듯이 아슬아슬했을 거다. 불안한 관계는 전화 한 통으로 깨졌다. 그가 누군지 밝히지 않지만 야누스의 아내였음에 분명하다. 불륜 현장에 에바 남편이 들이닥쳤을 때의 일은 둘 모두에게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다. 그 일 후로 에바는 남편과 헤어져 혼자 살았다. 더욱이 야누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해 보여서 자기 처지가 더 비참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마음은 죄책감, 후회, 분노, 남 탓하기, 속임수 등 나쁜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죽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녀는 도박을 벌일 결심을 했다. 야누스를 크리스마스이브에 불러내서 다음날 아침까지 함께 지내는 데 성공하면 새 출발을 할 것이고 그러지 못하면 삶을 스스로 접겠다고 말이다. 한편 야누스가 에바를 만나기로 한 이유는 오래 된 숙제를 하기 위해서였다. 확인해봐야 달라질 건 없지만 그래도 에바가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둘 모두에게 그날 밤은 불편하고 고통스런 시간이었다. 줄곧 날카로운 긴장이 흘렀다. 야누스의 행복이 에바를 고통으로 몰아넣은 건 아닐 게다. 그가 불행했다고 그녀가 행복해지지는 않았을 터이니 말이다. 그녀의 소원은 누군가가 자기와 함께 있어주는 거였다. 자길 못 알아보는 숙모를 양로원에서 만난 후 크리스마스이브를 혼자 보내야 하는 현실은 그녀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같이 있어줄 누군가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런데 미사 때 우연히 야누스를 본 거다. 그에게 구원을 청했다. 야누스는 이런 정황을 모른 채 묵은 감정의 찌꺼기를 씻으려고 그녀를 만났다. 그날 밤은 둘 모두에게 우연히 다가온 ‘횡재’ 같은 시간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를 혼자 쓸쓸히 보내야 했기 때문일까? 에바가 생명을 걸고 도박을 하기로 결심한 날이기 때문일까? 에바는 거의 ‘무장해제’ 상태였다. 그런 그녀에게 야누스가 같이 있어줌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에게 구원이 됐던 것이다.

 

우리의 안식일

 

예수 시대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져있는 양을 건져줄까 말까를 두고 논쟁을 벌였단다(마태 12:11 이하). 양은 구해줘도 괜찮지만 구덩이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면 안식일을 어기는 게 됐다. 예수는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라도 착한 일을 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라고 말함으로써 잘못된 계명 해석에 쐐기를 박았다. 영화는 외로운 한 영혼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을 때 옛 애인이 하루 밤을 같이 지냄으로써 그녀에게 구원이 되어준 얘기다.

 

안식일 계명은 세계와 인생을 바라보는 렌즈라고 볼 수 있다. 그걸 의무로 여기면 그날 해서는 안 되는 6백여 가지 금령을 만든 바리새인이 되고 만다. 하지만 그것을 하느님의 선물로 여기면 생명 충만한 삶에로 부르는 하느님의 초대장이 된다. “너희와 너희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만이 아니라 너희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라도” 일하면 안 되는 날이 안식일이다. 사람은 나와 남을 가르고 주인과 종과 나그네를 엄격하게 구별하지만 하느님의 선물인 안식일에 대해서는 그런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 사람과 동물도 차별하면 안 되는 날이 안식일이다.

 

어느 전쟁터에서 크리스마스이브가 되자 서로 싸우던 군인들이 모두 총질을 멈추고 찬송을 불렀다고 한다. 그 시간만은 서로 기도해주고 축복해 줬다는 거다. 세상을 전쟁터라고 부른다. 싸워서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고 남을 딛고 올라서지 않으면 낙오되기 십상이니 그렇게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게다. 그래서 현대인은 쉴 때도 맘대로 쉬지 못하고 불안해하지 않는가. 휴가를 스스로 반납하고 일하는 사람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 모두가 중요하게 여기는 일에서 잠시 물러나라고 말함으로써,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잠시 싸움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으라고 말함으로써, 어느 주식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느 화폐가 오르고 내리는지 신경 곤두세우고 살피는 일을 잠시 멈추고 은은한 오르간 연주와 어린이의 찬송이 울리는 예배당으로 우리를 초대함으로써 안식일 계명은 실상은 가장 ‘정치적’인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와 인생을 보는 눈을 바꾸라고 말이다.

 

안식일은 세상의 번다한 일로 피곤하고 지친 영혼이 쉼을 누리고 새 힘을 얻어 그 번다한 일을 더 잘 하라는 날이 아니다. 안식일은 예배/미사하는 날이다. 지금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것은 예배/미사다. 안식일 하루 쉰다고 우주의 질서가 무너지지도 않고 세상이 지옥이 되지도 않으며 일용할 양식이 떨어지지도 않는다. 우주와 인생의 질서는 하느님 손에 달려 있고 우리 하느님은 능동적이고 사랑이 충만하시며 무한한 자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스스로 노력하고 성취하는 것 이상으로 하느님의 고임과 은총을 받으며 살고 있다. 안식일은 이 중요한 진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계명이다.

 

곽건용/LA 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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