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톺아보기(31)


가면과 맨 얼굴


● 하나님을 배반하는 역사


“난 점점 기독교가 싫어져요.”


“난데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의 선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게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이라면서요?”

“그렇다고 하더라.”


“그래서 행복하세요?”


“뭐야? 내가 왜 행복해?”


“기독교인들의 뜻대로 되었으니 말이에요.”


“얘가 노골적으로 비꼬네. 트럼프를 당선시킨 그 세력이 기독교를 대표하는 것도 아니려니와, 기독교인들의 뜻이 곧 하나님의 뜻과 늘 일치하는 것도 아니야.”


“그래도 미국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의 생각이 승리주의와 편협한 도덕주의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은 참 유감스러워요. 트럼프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타겟으로 삼아 동성간의 결혼과 낙태에 반대한다는 도덕주의적 캠페인이 먹혀들었기 때문이라면서요?”


“그렇다더라. 문제는 그들의 도덕주의가 다른 인종, 다른 이념,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포용할 여백이 없다는 것이지. 개인적으로 보면 그들은 매우 선량한 사람들이고, 자기들의 진실에 충실한 사람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들에게는 역사를 꿰뚫어보는 비전이 없어. 그건 좀 잔인한 말일수도 있지만 죄야. 무지함이야말로 악이 기생하는 텃밭이기 때문이야. 바로 보지 못하면 언제나 악하고 영리한 자들에게 이용당하게 마련이야.”


“가장 눈을 크고 뜨고 있어야 할 기독교인들이 왜 그렇게 안목이 협소해지고, 생각이 천박해졌지요?”


“부자가 되었기 때문일 거야. 부자가 되었다는 말은 뭔가를 지키는 일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말이거든. 부자들이 보수적인 것은 거의 필연적인 것이 아닌가 싶어.”


“언젠가 교회가 단순한 평안을 받아들이자마자 이내 권력에 의해 부패된다고 하셨지요?”


“그건 내 말이 아니라 쟈크 엘룰의 말이야. 콘스탄틴 이후의 교회의 범죄는 정치권력과 정치적 행동에 대한 정당화 과정을 통해 드러났다고 말할 수 있을 거야. 힘 있는 사람들 편을 들면서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편드는 하나님을 배반하기 시작한 거지.”


“하나님이 편을 든다는 말씀이 좀 낯설게 들리는데요.”


“낯설 것 없어.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어. 하나님이 더 큰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한 공동체 속에서 소외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야. 고아, 과부, 나그네…. 예수님은 심지어 양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가는 목자 이야기를 하시잖아. 그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야. 기독교인들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기독교가 얼마나 만만하게 보였으면 보수적인 어느 신문의 논객이 일어나 ‘애국 기독교계’가 다 들고일어나 이 좌파 정권을 몰아내야 한다고 말하겠니. 나는 아주 모멸감을 느꼈어. ‘아, 우리가 여기까지 전락했나’ 하는 생각에 아득해지더라.”





● 우리가 불러야 할 노래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후에 한 말도 생각나네요. ‘미국 대통령이 하겠다고 일단 말을 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세계 평화를 위해 낫다.’ 저는 당시의 그 기사를 보면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이 떠올랐어요. 바다에서 나오는데 뿔이 열이고 머리가 일곱 개나 된다는 짐승 말이에요. 그게 어디 나오는 구절이지요?”


“13장일 거야. 한번 찾아서 읽어보렴.


“아, 여기 있네요. ‘그 짐승은, 큰소리를 치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입을 받고, 마흔 두 달 동안 활동할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 짐승은 입을 열어서 하나님을 모독하였으니, 하나님의 이름과 거처와 하늘에 사는 이들을 모독하였습니다.’ 정말 기가 막힌 일치 아닌가요?”


“그래도 조심해라. 어떤 사람을 곧바로 묵시록에 나오는 이와 동일시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 없단다.”


“미국이 반이슬람,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 삼아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오폭으로 인해 수백만 명이 무고하게 죽어갔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어요. 그들도 다 살고 싶은 생명인데 말이에요. 그 속에서 다행히 살아남는다 해도 그들은 마음에 새겨진 지옥의 풍경을 평생 벗어버리지 못한 채 살아야 하겠지요? 어쩌면 그것은 죽음보다도 잔인한 일일 거예요.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가 가능한가를 물은 게 아도르노이지요? 정말 세상에 희망은 있나요? 우리는 남산에서 만난 단풍의 고움을 마음껏 노래해도 되는 건가요? 테러를 물리치기 위한 방법이 꼭 폭력이어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


“대답하기 어려운 것만 묻는구나. 그게 질문이 아니라 탄식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지만 말이야. 최근에 저 아픔의 땅 시리아에서 사린 가스로 보이는 화학무기가 살포돼 아이들 20명을 포함해 70여명의 고귀한 생명이 코와 입으로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처참한 모습을 보면서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었어. 특히 볼이 불그레한 예쁜 소년이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사람이라는 사실이 부끄럽게 여겨졌어.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은 사람이 있고,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터에서도 사랑의 노래를 지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야. 꾀꼬리가 하나님께 가서 불평을 했다더라. 개구리의 시끄러운 울음소리 때문에 자기의 아름다운 노래가 들리지 않는다고 말이야. 그러자 하나님은 말씀하셨대. ‘가서 노래를 계속하려므나. 네가 노래를 부르지 않으니까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더욱 시끄럽잖니.’ 맞아. 그런 거지. 고통 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불러야 할 아름다움의 노래를 포기해서는 안 돼.”


“……”


● 맨 얼굴을 보는 용기


“세상이 가장 어두운 것은 꿈이 사라지는 때일 거야. 정현종 선생의 <요격시 2>가 떠오르는구나. 내가 몇 차례 읽어준 적이 있는 데 기억날 거야.”


다른 무기가 없습니다.

마음을 발사합니다.

토마호크 미사일은 떨어지면서 새가 되어 사뿐히 내려앉았습니다.

스커드 미사일은 날아가다가 크게 뉘우쳐 자폭했습니다.

재규어 미사일은 떨어지는 순간 꽃이 되었습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은 날아가다가 공중에서 비둘기가 되었습니다.

지이랄 미사일은 바다에 떨어져 물고기가 되었습니다.

도라이 미사일은 사막에 떨어지면서 선인장이 되었습니다.

자기악마 미사일은 어떤 집 창앞에 떨어지면서 나비가 되었습니다.

디스페어 미사일은 어떤 집 부엌으로 굴러들어가 숟가락이 되었습니다.

플레이보이 미사일은 어떤 아가씨 방으로 숨어들어가 에로스가 되었습니다.

머어니 미사일은 어느 가난한 집 안방에 들어가 금이 되었습니다.

우라누스 미사일은 땅에 꽂히는 순간 호미가 되었습니다.

제구덩이 미사일은 저를 만든 공장으로 날아가 그 공장을 날려버렸습니다.

머커리 미사일은 아주 작아져 어떤 아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가 속삭였습니다: 이걸로 엿이나 바꿔 먹어.

……

우리는 저 시체들의 폐허 위에서 부르짖습니다

(UN의 힘을 훨씬 더 강화하면서)

UN은 무기 개발을 지금으로부터 영원히 중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라!


“정말 발사된 미사일을 새와 나비와 비둘기와 물고기로 변하게 하는 시스템이 개발되면 좋겠네요.”


“허황한 꿈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런 꿈을 끝끝내 버리지 않아야 그런 세상에 다가갈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런 시스템은 결국 우리 마음에 있는 사랑과 다른 존재에 대한 이해와 존경의 마음이겠구. 문제는 그런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거야.”


“그냥 작동하지 않는다기보다는 오작동한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지 않나요? 미움과 불신과 멸시를 생산하고 또 그것을 증폭시키는 것 말이에요.”


“그 시스템이 붕괴된 까닭은 뭘까?”


“욕심 때문이겠지요.”


“욕심?”


“예, 더 가질 욕심, 더 지배하려는 욕심 말이에요.”


“그렇겠구나. 한 번만이라도 고통 받는 사람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면 그들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을 텐데. 굶주린 아이들의 슬픈 눈망울, 공포에 질린 여인들의 퀭한 눈망울, 몸이 찢기고 잘린 사람들의 이지러진 눈망울을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면, 그리고 그 눈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정도의 인내력만 있으면 세상이 이렇게 난장판이 되지는 않을 텐데….”


“사실 우리는 그런 얼굴과 마주칠 기회조차 박탈당하며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제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별로 없거든요. 그런데 막상 그런 분들과 맞닥뜨리게 되면 저도 그 눈길을 피할 것만 같아요.”


“왜?


“그 눈은 뭔가 우리에게 지금과는 다른 삶을 요구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얼굴에 색칠을 하나봐. 그들을 비인간화시킴으로 자기들의 지배 욕망을 정당화하는 거지. 피에로는 슬픈 데도 사람들은 그를 보고 웃거든. 누군가의 맨 얼굴을 대하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거야.”


“화장기 없는 얼굴을 말하는 거 아니지요? 그래요, 내가 지고 가는 인생의 짐도 무거운데 남의 고통과 슬픔과 대면한다는 건 참 불편한 일인 것 같아요.”


“예수님은 남의 눈에서 티끌을 빼겠다고 나서기 전에 자기 눈에서 먼저 티끌을 빼라고 하셨는데, 나는 그 말을 언제부터인가 우리 이웃들의 남모를 고통에 눈길을 주고 그들의 신음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로 이해하고 있어.”


“그게 잘 안 돼요.”



● 가면 쓰기, 가면 씌우기


“자기와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조롱하고 욕하고 없애려는 이들은 그들에게 어떤 가면을 씌우는 것 같아.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원수이다’, ‘그들은 테러리스트다’, ‘그들은 사탄이다.’ 이렇게 가면을 씌움으로써 그들은 맨 얼굴을 대하는 고통 없이 그들을 파괴하는 거지. 그런데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들을 철저히 타자화시키고 물화시킴으로써 그들이 얻는 것은 세상의 평화도 아니고, 정의도 아니야. 강자의 이익일 뿐이지.”


“그들은 자기 스스로도 가면을 쓰는 것 아닌가요? '나는 의롭다'는 가면 말이에요? 자기 자신과 대면하지 않도록 해주는 보호막으로서의 가면 말이에요.”


“맞아. 그런데 가면 쓰기를 전략으로 선택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 전략에 부화뇌동하면서 가면을 쓰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해. 이청준 선생님의 소설 가운데 <예언자>라는 중편이 있는데, 거기에는 우리 사회의 권력이 즐겨 사용하는 가면놀이를 여왕봉이라는 술집에서 일어난 일을 중심으로 해서 보여주고 있어. 이야기는 여왕봉이라는 살롱에 새로운 마담이 오면서부터 시작되는 데, 마담은 이상한 술집 규칙을 강요하지. 밤 10시가 되면 손님들과 여급들은 너나할 것 없이 일제히 가면을 써야 한다는 거야. 처음에는 낯설어하던 단골손님들도 어느덧 그 규칙에 익숙해지지. 가면을 쓴 사람들은 맨 얼굴로는 하기 어려운 행동을 스스럼없이 해. 그건 손님들이나 여급들이나 마찬가지야. 가면은 인격이 없으니까. 손님들은 일단 가면을 벗으면 가면을 쓰고 했던 행동과 무관한 사람처럼 행동했지. 작가는 이렇게 말해. ‘가면이란 이를테면 우리들 인간의 본능적 욕구의 발산을 규범화시켜 주는 풍속적 방편이지요. 그 서양의 가면 무도회라든가 우리 나라의 탈춤처럼…. 가면은 어떤 추악스런 본능적 욕구의 발산도 그것을 덮어씀으로 하여 하나의 당당한 풍속으로 용납받을 수 있습니다. 음흉스런 지혜지요.’ 기가 막힌 통찰 아니니? 가면은 결국 현실을 ‘허위’의 놀이로 바꾸는 기제인 셈이야. 손님들은 그 가면놀이에 무의식적으로 적응하면서 사실은 자기들이 홍 마담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있다는 걸 짐작조차 못하고. 철저한 타자화가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제 마담은 손님들이 가면을 쓰고 있는 한 도붓장수 개 후리듯 그들의 의식을 지배할 수 있는 거지.”


“지금 우리 사회에도 그렇게 가면이 씌워진 사람들이 많잖아요?”


“정치인들이 대표적이지.”


“그들은 가면을 씌우는 사람들 아닌가요?”


“씌우는 사람인 동시에 씌워진 사람이라고 말하는 게 옳을 거야. 그들은 자기들이 쓴 가면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가면에 의해 규정되는 경우가 많아. 처음에는 필요에 따라 그 가면을 쓰기도 하고 벗기도 하지만, 나중에는 그 가면을 자기 얼굴인 줄 알고 사는 거야. 철저한 자기 소외가 일어나는 거지. 자기와 입장이 다른 사람을 향해서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막말을 하고 모멸감을 안겨주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비위를 건드리거나 자기들의 위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에 대해서는 인내력을 잃고 말아. 그들이 사용하는 말은 진실을 드러내기는커녕 진실을 은폐 혹은 호도하는 데 이바지하는 경우가 많아.”


“텔레비전을 통해 정치인들을 보면 괜히 우울해져요. 그들은 절망과 환멸을 확대재생산하는 것을 자기들의 역사적 소임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들을 정치인이 아닌 맨 얼굴의 이웃으로 만나도 마찬가지 느낌일까요? 그들은 가족들 앞에서도 그런 가면을 쓰고 살아갈까요?”


“글쎄다. 하지만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우리가 어떤 사람들에 대해 말할 때 전칭명제로 말하는 것은 옳지 않아.”


“아빠도 그렇게 말씀하실 때가 있잖아요?”


“그랬나? 하지만 그것은 일반화의 오류인 동시에 정신적 폭력이야. 감정적으로는 나도 어떤 집단의 사람들을 한통속으로 몰아붙이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고, 또 그렇게 할 때도 있지만 그건 나의 미성숙의 증거일 뿐이야.”


“하지만 사람이 이것저것 다 가리면서 어떻게 살아요? 가끔 실수도 하고, 오버도 하면서 사는 거지요.“


● 다지면서 가야 할 길


“물론 그래. 하지만 타인이 숨쉴 수 있는 여백을 만드는 일을 소홀히 하면 안돼. 그의 가면 속에는 분명 말랑말랑한 맨 얼굴이 있지 않겠니? 게다가 시간의 지평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진실의 실체를 온전히 보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거든.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모든 근본주의의 뿌리야. 타자에 대한 폭력은 흔히 자기 생각의 절대화에서 비롯되는 걸 거야.”


“종교는 그런 의미에서 폭력과 결합할 가능성이 아주 많겠네요?”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성스러움과 폭력은 이웃사촌이야. 예수님은 그런 인과 관계를 끊는 길을 보여주신 거고. 십자가상에서의 그의 죽음은 철저히 무고한 자의 죽음이고, 가공할 폭력의 사슬을 사랑과 관용으로 녹여버림으로써 구원의 길을 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거야. 일전에 내가 이야기했지?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 보수적인 유대인들을 보면서 내 내면에 들려왔던 소리 말이야.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그러나 지금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누가복음 19:42). 용서와 사랑과 포용, 그리고 나눔이 아니고는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방법이 없어.”


“옳은 말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건 너무 더딘 길 아닌가요?”


“더디더라도 다지면서 가야 쉽게 깨지지 않지.”


“여하튼 미사일을 새와 나비, 비둘기와 물고기로 바꾸는 시스템이 빨리 가동되면 좋겠어요.”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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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톺아보기(30)


영성의 깊이란 무엇일까


● 반환점을 돌고 나서


“이렇게 민박집에 머물고, 버너와 코펠로 밥을 해먹어 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네.”


“그 동안 너무 여백 없이 살았지?”


“그래, 벽에 가득한 낙서를 보니까 우리 신학교 때 입석으로 퇴수회를 갔을 때가 생각나네. 생각나? 누군가가 베니어판 벽면에 매직으로 써놓았던 낙서. ‘신은 죽었다’―니체. 누군가가 그 밑에 이렇게 써놓았지? ‘니체는 죽었다’―신. 그땐 그래도 그게 꽤 신선하게 읽혀졌었는데.”


“저기 저 낙서 좀 봐. ‘A man without a pot belly is a man without an appetite for life ―Salman Rushdi, 『The Moor's Last Sigh』. 누가 써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의 체형은 짐작할 수 있겠는데. 올챙이배를 한 중년의 사람일 거야 아마. 이런 구절을 외우고 있는 걸 보면 되돌리기 어려울 만큼 변화된 자기 체형을 삶에 대한 욕구로 포장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사람일 거야.”


“그래도 그런 포장의 욕구라도 있으니 다행인가?”


“왜 이젠 뭐든 시들한가보지?”


“반환점을 돈지 벌써 한참 되었는데 아직도 내 인생이 오리무중이구나 생각하니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하고.”


“우리 신학교 시절은 나름대로 치열했지?”


“그렇지. 시대적 소명으로서의 정의, 그리고 실존적 진실과 허무 사이를 오가면서 우리는 싸우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달아나기도 했지.”


“그런데 벌써 ‘몸’을 의식하게 되는 나이가 되어서, 젊은 날 우리를 달뜨게 했던 질문들은 사라지고, 또 다른 문제들에 치여 살고….”


“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붙들기보다는 비본래적인 문제들에 더 많은 시간을 바치고….”


“그래도 그 때는 ‘타자’의 세계가 압도적인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존재의 문제를 한 순간도 잊을 수가 없었는데.”


“그래, ‘나’를 주체할 수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삼십 대 중반쯤에 정현종 선생의 번역으로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을 처음 읽었는데, 그 중에 <소나타와 파괴들>이라는 시 가운데 이런 구절이 나와.


달이 사는 내 황폐한 침실 속에서,

내 식구인 거미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파괴들 속에서,

나는 내 잃어버린 자아를 사랑하고, 내 흠 있는 성격,

내 능변의 상처, 그리고 내 영원한 상실을 사랑한다.


―<소나타와 파괴들> 중에서


나는 이 구절을 보면서 일종의 정신적 근친성을 느꼈던 것 같아. 나중에 네루다가 이 시를 쓴 게 19세였다는 사실을 알고는 깜짝 놀랐지. 여하튼 파괴를 좋아하고, 능변이 상처가 되고, 흠 있는 성격도 사랑할 수 있는 영혼의 쓸쓸함과 자부심이 동시에 느껴지지 않니?”


“조숙한 천재구만? 남을 기죽이는….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물가로 나가자.”


● 목숨을 건 자기 진실의 드러냄


“네가 전짓불을 그렇게 켰다 껐다 하니까 이청준 선생의 글이 생각난다. 혹시 들어봤니? <전짓불 앞의 방백>이라고?”


“아니, 못 들어 봤는데.”


“낮과 밤으로 좌와 우가 뒤바뀌던 뒤숭숭한 세월이 배경인데, 그게 이청준 선생의 개인적 체험인지 창작인지는 모르겠어. 지리산 자락 어딘가에서 일어난 일이야. 주민들에게는 생존이 무엇보다도 소중했던지라, 낮에는 경찰들 편이 되고 밤에는 빨치산 편이 될 수밖에 없었어. 어느 날 밤 누군가가 방문을 박차고 들어와 전짓불을 눈앞에 들이대고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 거야. 미칠 노릇이지. 불빛 뒤의 상대방이 어느 편인지를 알면 대답은 간단해. 상대방을 기준으로 해서 안전한 대답을 선택하면 되니까. 하지만 문제는 전짓불을 비추고 있는 이가 어느 편인지를 알 수 없다는 거야. 어쩌면 이 물음이야말로 소설가로서의 이청준이 직면할 수밖에 없던 본질적인 상황이었던 것 같은데,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어.


길은 다만 한 가지. 그것은 자기 자신의 진실을 근거로 한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제 목숨을 건 자기 진실의 드러냄인 것이다. 그 밖의 다른 길은 없는 것이다.

마지막에 가선 자기 진실에 기대어 그것을 지키는 것뿐, 위험하기는 하지만 거기서밖에는 자신을 버티고 설자리가 마련될 수 없으리라는 참담한 이야기다.


진실 밖에는 버티고 설자리를 마련할 수 없다는 절박함과 목숨을 건 자기 진실의 드러냄이 없이는 진정한 글을 쓸 수 없다는 거지. 이것이 이청준의 문학이 지금까지도 진부해지지 않는 비결이 아닌가 싶어. 아니, 비결이란 말은 적절치 않겠다. 그건 방법이 아니니까 말이야. 하여튼 나는 이 대목이 떠오를 때마다 그것을 나의 상황으로 환치시켜놓고 생각해보곤 하는데, 과연 내가 진실이라는 위험한 길을 선택할 수 있을까 아직은 자신이 없어.”


“그건 자신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지. 맥락도 다르고, 경중도 다르지만 목회 현장에서도 그와 비슷한 선택 앞에 서야 할 때도 있는 것 같아. 예를 들어 교인 A와 교인 B는 아주 앙숙이야. 서로가 하는 일을 사사건건 트집 잡고 말을 만들지. 그런데 그들은 매우 충성스럽고 헌신적이야. 교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인 거지. 문제는 그들의 충성 경쟁에서 비롯된 갈등이 다른 교인들에게도 파급된다는 데 있어. 목회자는 그 둘 사이에 서서 조심스럽게 조정자의 역할을 해야겠지. 그러나 목회자도 사람인지라 조정자로서의 역할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느낄 때가 있어. 그러면 마침내 ‘진실’을 드러낼 수밖에 없지.”


“어떻게?”


“흑백을 가르듯 누구는 옳고 누구는 그르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주제넘은 일일 것이고, 다만 내가 겪어왔던 어려움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거지. ‘당신들 때문에 내가 몹시 힘들다. 두 분 다 소중한 분들이지만, 이런 점은 공동체에 부담이 된다.’ 그러면 그분들은 처음으로 자기들의 틀을 깨고 제3자를 의식하게 돼. 그게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꾸짖거나 외면하기는 쉬워도 실상을 있는 그대로 되비춰준다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닌데. 결국 그런 진실의 드러냄이 또 다른 상처나 오해로 귀결되지 않는 것은 오랜 인내와 수고와 사랑이라는 배경이 있기 때문이겠지?”


“간혹 그렇게 교회에 부담을 안겨주는 이들을 보면 화가 날 때도 있지만, 또 생각해보면 저마다 다른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모험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분들이 갈등을 통해 자신의 상처와 약함을 드러내면 공동체는 그런 갈등을 봉합하려고 서두르기보다는 그 상처를 자기 것으로 품고 함께 치유해가야 하겠지. 그게 어쩌면 교회의 치유적 책임이 아닐까?”


“갈등은 다소 혼란스럽게 보이더라도 잠복하는 것보다는 표출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어.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다’(잠14:4)고 하잖아. 교인들은 그렇다 쳐도 목회자들은 언제 그 영혼이 건강해지고 성숙해질까. 자기의 약함을 드러내거나 자기의 성격적 특색을 드러낼 기회도 별로 없으니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들이야말로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자꾸 질정을 받아야 나중에 허물을 면할 수 있는데, 그런 기회를 구조적으로 박탈당한 것 같아서 말이야.”




● 반성적 성찰의 허실


“스스로 깨어 있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겠지.”


“안톤 체홉의 소설 <공포>에 나오는 드미트리 페트로비치는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진부함’이라고 말해. 그의 공포를 알 것도 같아.


내 행동들 중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가려낼 능력이 없다는 사실은 나를 전율하게 만들어요. 생활 환경과 교육이 나를 견고한 거짓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놓았다는 걸 나는 압니다. 내 일생은 자신과 타인을 감쪽같이 속이기 위한 나날의 궁리 속에서 흘러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나는 죽는 순간까지 이런 거짓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무섭습니다.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자기를 지탱해주는 것, 즉 자기 동일성을 담보해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이 고백은 매우 심오한 거야. 그걸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선택하는 생이나 주어진 생에 대해서 자꾸만 의문부호를 붙여보아야 하는데, 그게 힘겨우니까 우리는 적당한 선에서 반성적 성찰을 포기하고 익숙한 것에 입각해 살게 되지.”


“나는 반성적 성찰이라는 게 무책임한 공론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의지의 변화와 반드시 결합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됐어. 다시 말하면 의지의 변화 없는 반성적 성찰이라는 것은 기껏 해야 자기만족이나 위안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지. 어느 날, 그 날은 새벽기도가 없던 날인데 새벽 일찍 깨어나게 되었어. 다시 잠이 올 것 같진 않고 해서 잠시 망설였지. ‘텔레비전을 켤까, 신문을 볼까?’ 그러다가 문득 내게는 그런 생각들을 거절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하루의 첫 시간을 세속의 분잡으로 덧칠함으로써 명상적 고요를 망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는 데 생각이 미쳐서, 아주 가볍고 기쁜 마음으로 교회로 나가게 되었는데, 그 날 내 마음에 들려온 소리가 바로 의지의 변화가 없는 지성적인 깨달음이나 감성적인 뜨거움은 우리를 허위의식에 빠지게 만든다는 것이었어.”

“흔들리지 않는 생의 토대는 결국 진실일 텐데, 우리가 진실한 걸까?”


“진실하려고 애는 쓰고 있지 않나?”


● 전체의 뜻으로 수정된 마음


“가끔 나는 ‘내가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어. 때로는 진실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스럽다는 생각도 들고. 이오덕 선생님과 권정생 선생님이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 엮은 책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라는 책에는 이런 말이 나와.


결국 인간은 최악의 고통에서만이 진실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이, 추운 사람이, 질병의 아픔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결코 점잖을 수도 없고, 성스러울 수도 없고, 거룩할 수도, 인자할 수도, 위엄이나 용기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를 찾는 자는 제 목에 오랏줄이 감긴 그 사람뿐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사람은 심신의 고통을 지금 맛보고 있는 그 사람뿐입니다. 가장 절실한 인간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장군이나 성직자가 아닙니다. 지금 배고픈 사람, 지금 추위에 얼어 죽어가는 사람, 지금 병으로 괴로워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 온갖 괴로움 속에 허덕이는 사람만이 진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밤을 사람들은 각양각색으로 새우고 있을 것입니다. 밤은 평안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수치와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고통의 시간이기도 한 것입니다.


절절한 아픔을 겪어본 이가 쏟아내는 이런 소리야말로 참 소리가 아닐까? 그렇게 보면 우리는 어쩌면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기보다는 진실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사람일 거야.”


“권정생 선생의 글이지?”


“응.”


“……”


“거기에 비하면 정치인이나 학자들의 말은 너무나 창백해 보여. 논리적이긴 하지만 진실의 향기는 맡을 수 없어. 며칠 전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나왔던 서울대학교의 어느 교수가 생각나네. 그는 정치권의 과거청산론에는 불순한 의도가 함축되어 있다고 말했어. 그러면서 특정인을 법률에 의해 죄인으로 몰면 그 시대에 일제에 부역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역사의 원죄로부터 면죄시키는 효과를 발생하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앞장서는 인위적인 과거 청산은 해서는 안 된대. 그는 심지어 정신대가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동원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자발적으로 참여로 이뤄진 상업적 공창이었다는 식으로 말해서 참석자들을 분노하게 했는데, 자기는 객관적 사실에 입각해서 말하고 있고 다른 이들은 그렇지 못하다고 빈정거리기까지 했어. 정신대 문제의 해결도 위안소를 이용했던 사람들의 자발적인 고백과 성찰이 우선되어야 한 대. 그가 말끝마다 후렴처럼 사용한 어구가 ‘반성적 성찰’인데, 과연 그가 말하는 성찰이란 뭘까? 그가 말하는 ‘반성적 성찰’이라는 말에서 나는 지적인 오만함 이외에는 느낄 수가 없었어.”


“그렇게 말하면 ‘반성적 성찰’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겠다야.”


“그럴지도 모르지. 내가 화나는 것은 다른 게 아니야. 그가 정신대 할머니들을 비롯해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부모 세대들이 겪은 아픔, 고통, 한을 ‘성찰’이라는 단어 속에 우격다짐으로 밀어넣음으로써 고통을 타자화하고 추상화하고, 그로써 역사의 진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하려 한다는 점이지.”


“내가 의지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게 그 때문이야. 혈기(血氣)에 든 병은 의사나 약을 찾아 고칠 수 있지만, 지기(志氣)에 든 병은 자각(自覺)하고 자수(自修)하여 내심(內心)으로 고칠 수 있대.”


“누가 한 말이야?”


“율곡 이이 선생이 생질인 홍석윤에게 한 이야기 중에 나와. 학자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안다’ 하는 것이 병이지. 자기 논리의 폐쇄회로 속에 갇혀 다른 이들의 눈물을 보지 못한다면 그는 절반의 진실 밖에는 볼 수 없는 거겠지.”


“맞아. 사실 우리는 혈기에 든 병은 심각하게 생각하면서도 지기에 든 병은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지. 학자들만 그런가, 신앙인들도 심각하지. 그 중에서도 영적 지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고. 함석헌 선생님이 그러셨지. ‘꽃이 아무리 피어도 수정이 못 되면 열매를 못 맺듯이 전체의 뜻으로 수정이 못된 마음은 쓸레 마음이다. 젊음은 전체의 위대한 영으로 수정이 돼야 한다.’ 나는 영성의 깊이란 결국 ‘전체와의 관련성을 깊이 자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이게 같은 말이 아닌가 싶어. 물론 이런 자각 속에는 의지의 변화가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전체의 뜻으로 수정된 마음이라! 바로 그거구나. 땅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기도로 들으시는 분이 계시고, 그런 하나님의 정념을 가슴으로 느끼는 사람이 참 사람이라며. 그렇다면 진실은 책장에 갇힌 것이 아니라, 고통이 있는 곳, 또 그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사람들에게만 깃드는 것인지도 모르겠어.”


“결국 다시 출발선일세 그려. 이제 우리의 남은 시간은 인식의 욕구를 채우려고 애쓰기보다는 어떻게든 앎을 삶으로 번역해내기 위해 땀흘려야 하겠지?”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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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톺아보기(29)


슬픈 몸, 고마운 몸


● 몸의 말을 들으라


“오랜만이야. 얼굴 잊어버리겠네 이 사람아.”


“죄송해요. 잠 못 이루는 토요일 밤 때문에….”


“뭐야? 그러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려면 토요일을 잘 보내야 한다니까.”


“건강은 좀 어떠세요? 얼굴빛은 좋아지신 것 같은 데요.”


“그래? 좋아져야지. 안 그래도 여러 사람한테 미안한데.”


“일 좀 줄이세요. 그 동안 몸을 너무 학대하셨어요.”


“그랬나? 어쩌면 성실함에 대한 과도한 집착 때문이었는지도 몰라. 나는 일을 적당히, 얼렁뚱땅 하는 걸 싫어하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스스로 만든 내 이미지에 자승자박 당한 꼴이었던 것 같아. 성실한 건 좋은데 그게 고스란히 스트레스로 바뀐 게 문제지. 나는 스스로 그런 문제를 잘 풀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몸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야.”


“전에 마음 따라 살지 말고, 몸 따라 살라고 하신 적이 있지요? 자칫 오해하기 쉬운 말이긴 하지만 생각할수록 그럴 듯한 말이에요.”


“요즘은 몸이 하는 말을 듣지 않고 사는 게 타락한 실존이라는 생각이 들어.”


“몸의 말을 듣는다는 게 어떤 거죠?”


“글쎄,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몸은 항상 소리 없이 말한대. 웬만하면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데, 우리 삶이 균형을 잃을 때면 몸이 우리에게 기별을 해주는 거지. 몸이 편치 않고, 피로하고, 통증을 느낀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돌아보라는 몸의 경고라는 거야.”


“하지만 그런 경고를 경고로 알아듣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사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몸의 투정을 다 들어주다가는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무시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다가 병을 키우는 거고.”


“그렇죠. 병은 처음부터 드러나는 게 아니라면서요. 병의 씨앗을 뿌리는 단계, 그 씨앗에 물을 주는 단계, 그러다가 그것이 고착되는 단계, 그것이 병적인 징후로 나타나는 단계, 그 다음에 나타나는 열매가 병이래요.”


“와, 굉장히 유식하네.”


“그게 아니고요, 허준의 동의보감에 나오는 말이래요. 모든 병이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많은 병이 마음이나 생활의 문제에서부터 비롯된다지요? 문제는 '이렇게 살면 안 되는 데' 하면서도 실제로 병의 징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별 일 없을 거야'라는 자기 암시에 매달린다는 거지요.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 같아요.”


“베드로가 들은 닭울음소리 비슷한 거겠지. 그래, 분명히 앎과 깨달음에는 차이가 있어. 앎이 곧 행동을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니까. 깨달음이 필요하지. ‘깨닫다’는 말은 ‘깨다’와 ‘닫다’로 이루어진 거래. 믿거나 말거나. 바깥을 향하던 지각의 창을 닫고, 잘못된 자아가 어떤 형태로든 깨뜨려질 때야말로 깨달음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는 거야. 깨달은 사람은 이전처럼 살 수 없겠지?”


“그렇게 잘 아시면서 몸을 왜 그렇게 방치하셨어요.”


“깨닫지 못해서지 뭐. 어느 의사 선생님이 나보고 이제부터는 ‘나는 바보다’ 하고 살래. 마음을 좀 푼푼하게 쓰며 살라는 말이겠지. 한동안 그분 말씀이 내 귓가를 떠나지 않더라. 그동안 내가 살아온 모습에 대한 중간 심판처럼 들려서 말이야.”


                    일러스트/고은비


● 몸, 의미 전달의 매개체


“성경에도 몸에 대한 가르침이 있나요?”


“물론 있지. 사람들은 기독교가 영혼에 집중하느라 몸을 소홀히 여기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히브리인들의 삶은 금욕적이라기보다는 매우 역동적이지. 구약성서를 읽다보면 경전에 담기기에는 적절치 않아 보이는 용어들이나 구절들이 많아.”


“적절치 않다는 것은 전문용어(?)인데요.”


“그렇지?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을 가리켜 ‘간음’이라고 표현하지.”


“그 만큼 신앙적 순결을 강조한 건가요?”


“그럴 거야. 아직 나라가 꼴을 갖추기 전이었으니, 신앙의 문제는 민족적 정체성의 문제와 곧장 연결되었을 테니까.”


“그렇군요.”


“또 구약의 언어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아. 우리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삶의 언어가 고스란히 담겨있지. 때로는 이건 좀 너무 외설적이다 싶은 대목도 많아. 어느 교수님 말씀이 <아가서>를 히브리어 표현대로 번역해 놓으면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거래.”


“그러시니까, 궁금해지네요.”


“사람하곤. 그렇게 궁금하거든 아쉬운 대로 에스겔서 16장이나 23장을 봐. 히브리인 예언자들은 파리한 얼굴을 한 지식인들이 아니야. 붉은 피가 펄펄 끓는 야인들이지. 그들은 과도한 욕망에 대해서는 준엄하게 꾸짖었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은 부정하지 않았어.”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그래서 신약보다는 구약에 더 끌린다고 했대요.”


“그럴 수 있을 거야.”


“그래도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매우 금욕적인 생활을 했잖아요.”


“물론이지. 종교의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하니까. 경건 생활을 위한 금욕 혹은 절제는 꼭 필요한 거 아닐까?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매우 높이 평가하면서도 자신은 금욕을 위한 금욕보다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잔치를 더욱 즐기시지 않았어?”


“저는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라는 예수님의 별명이 참 마음에 들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는 어떻고?”


“좋긴 좋은 데, 제가 그 자리까지 가려면 아직도 내공이 더 필요한 것 같아요.”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건 자신 있고?”


“그럼요.”


“그 먹고 마시는 자리에서 생명의 기적이 일어나고, 사람들 사이에 화해가 일어나고, 낙심했던 이들이 살맛을 회복한다면 그것도 좋겠지.”


“……”


“예수님은 참 다정다감하신 분 같아.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실 때, 기도만 하지지 않으시거든. 고통 당하는 사람들과 어떻게든 접촉을 시도하시지. 열병 걸린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킨다든지,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댄다든지, 앞 못 보는 이의 눈에 손을 대고, 말이 어눌한 사람의 혀에 손을 댄다든지…. 이게 보통 일이 아니거든. 나도 가끔 병원에서 경험하는 바이지만 어떤 때는 환자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 께름칙할 때도 있어. 그러니까 환자들을 어루만지는 예수님의 손길이야말로 말없는 기도라 할 수 있을 거야.”


“우리 배를 쓸어 내리시며 '엄마 손은 약손' 하시던 어머니의 손길과 같은 거겠지요.”


“맞아. 만짐 혹은 접촉이야말로 친밀함의 모태가 아닌가 싶어. 접촉은 ‘손으로 빚어내는 개념’(manual concept)이래. 손으로 상징되는 몸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의미 전달의 매개체인 거지.”


“말보다는 몸짓이 더 큰 의미를 전달할 때도 많은 것 같아요.”


“미켈란젤로의 그림 <천지창조> 알지? 하나님의 손끝이 아담의 손끝에 닿을락말락하잖아? 사람들은 그 미세한 지향 혹은 접촉에서 창조행위를 보아내지. 손가락 하나를 통해 천지창조의 그 오묘한 순간을 남김없이 담아내는 화가의 솜씨가 정말 일품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어. 마음이란 몸속에 깃든 마음이니까.”


● 타자화된 몸


“성경에도 그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나요?”


“고린도전서 6장 19절과 20절에 나오는 구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공감은 가지만 좀 부담스럽네요.”


“그래도 나는 이 구절을 우리가 명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물론 이 구절은 음행을 삼가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해. 우리 몸이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곳으로 의식하고 산다면, 아무 음식이나 함부로 먹어도 안 되고, 과식을 해도 안 되겠지. 몸의 균형을 잃어버리게 하는 삶의 방식, 즉 과로나 과욕도 피해야 할 거고.”


“뭐든 과한 것이 문제군요.”


“옛말에도 있지 않은가.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고, 족한 줄 알면 욕을 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참 어렵지.”


“일전에 삶의 중심이 하나이면 ‘忠’의 삶을 살게 되지만, 중심이 여러 개이면 ‘患’이 된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네요. 어쩌면 우리가 건강하게 살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러다 보니까 마음은 조화와 균형을 잃고, 몸도 덩달아 균형을 잃고요.”


“기원전 6세기의 그리스 의학자인 알크마이온은 인간의 몸이 단순한 물리학적 개체가 아니라 여러 가지 요소가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 여러 요소들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 건강한 것이고, 그 구성 요소 가운데 하나가 다른 요소를 침범하여 균형이 깨지면 병이 된다고 설명했어. 알크마이온은 병을 ‘모나르키아’라고 했는데, 그건 ‘파탄’ 혹은 ‘한쪽의 지배’라는 뜻이래.”


“세상의 모든 일을 음양과 오행의 원리로 설명하는 동양 철학의 원리와도 비슷하네요.”


“그렇지?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몸과 마음이 함께 건강해져야 한다는 점인데, 현대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몸적 사고에 지나칠 정도로 길들여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요즘 유행하고 있는 웰빙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포장만 바꾼 소비주의가 아닌가?”


“명상이나 영성에 대한 관심은 어떤가요?”


“그것조차 자본주의 시장의 유통 경로를 통해 상품화 된 것 같아. 물론 거기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이 그것을 통해 몸과 마음의 관계적 합리성을 회복하는 계기로 삼는다면 좋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구조로부터 먼저 해방되어야 할 거야.”


“정말 우리 시대는 몸이 상품이 되어 버린 듯한 감이 들어요. 우리 나라에 불고 있는 성형과 다이어트 열풍은 정말 병적이에요. 물론 이런 열풍의 배후에는 서구인들의 체형과 외모를 따라가도록 부추기는 매스컴이 있지요. 하지만 이건 프란츠 파농이 말한 것처럼 검은 피부에 하얀 가면을 쓰려는 것이 아닐까요? 아름다운 몸을 갖고 싶은 욕망 자체를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그 욕망이 자기 생의 다른 가능성들을 억압하고 타자화한다면 그건 정말 무서운 일이지요. 언제쯤이나 우리는 타자에 대한 열등감 없이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을까요?”


“언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요즘 중요한 단서를 발견한 느낌이야. 언젠가 여성민우회에서 ‘세계 다이어트 반대의 날’ 행사를 하면서 ‘내 몸의 주인은 나―노 다이어트, 노 성형’ 캠페인을 했다지? 난 이런 소수의 깨어남이 결국은 세상을 바꾸는 힘이라고 생각해. 한 때 ‘안티 미스 코리아 페스티발’이 열렸잖아. 중요한 것은 ‘선발대회’가 아니라 ‘페스티발’이라는 거야. 어떤 기준을 정해놓고 거기에 적합한 이들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드러내고 또 그것을 함께 긍정해가면서 삶을 축제화 하는 것이지. 간디도 마을 공동체 운동이 세상을 바꿀 거라고 말했는데, 변혁은 항상 작은 데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그러니 너무 조급하게 생각할 것 없고, 정신이 잠들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지.”


● 당신의 손을 사랑하십시오


“저는 요즘 몸은 정말 슬픈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학대받는 시리아나 이라크 포로들의 벌거벗은 몸을 보면서 저는 몸을 가진 자가 경험할 수도 있는 어둠의 깊이를 본 것 같아요. 일제시대에 우리 민중들이 겪은 아픔과 독재정권 시절에 민주화를 위해 싸우던 이들이 겪었다는 고통, 그리고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수용소에서 나치에 의해 학대받고 죽어간 유대인과 집시들의 고통도 가슴이 아프기는 했지만, 그것은 다분히 추상적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피라미드처럼 겹겹이 쌓인 그 벌거숭이 몸이 남이 아닌 바로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벌거벗기운 채 인간적 모멸감과 공포의 극한에 몰리면서도 어떠한 저항할 수 없다는 것, 스스로를 존엄성을 가진 인간으로 긍정할 수 없다는 것, 그보다 잔인한 일은 없을 거예요. 게다가 그런 그들 곁에서 웃고 있는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 이 부조화와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칼을 손에 쥔 사람은 허공이라도 베어보고 싶어하잖아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무저갱이 열리면서 사탄이 옥에서 놓여나는 장면이 있는데, 내 마음에는 자꾸만 그런 광경이 떠올라. 사탄은 우리의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닌지도 몰라. 몸을 지니고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 속에는 이미 천사도 있고 악마도 있다고 하잖아. 어느 쪽 열쇠를 쥐고 사느냐가 중요한데, 전쟁이라는 상황은 아무래도 악마를 풀어놓을 가능성이 많다고 봐야 할 거야. 토니 모리슨의 소설 <<연인>>에 나오는 한 대목이 기억나는군.


‘오! 나의 사람들이여 그들은 당신들의 손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묶고, 구속하고, 자를 때만 손을 사용할 뿐이어서 빈손으로 끝납니다. 당신의 손을 사랑하십시오! 사랑하세요. 두 손을 높이 들고 두 손에 키스하세요. 그 손으로 다른 사람을 만지시고, 양손으로 서로 두드리고, 얼굴을 쓰다듬으세요. 왜냐하면 그들은 이러한 일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이것을 사랑해야만 합니다.’


쓰다듬고 어루만지라고 주신 손으로 묶고 구속하고 자르고 학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타락한 실존의 흉한 모습이 아닐까?”


● 몸의 윤리


“몸에 가해지는 억압과 통제를 통해 어떤 대상들을 일시적으로 굴복시킬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결국 분노를 영속화시키는 일이 아니겠어요?”


“그렇겠지. 나는 우리가 회복해야 할 ‘몸의 윤리’가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어. 그 윤리는 ‘어루만짐’과 ‘보살핌’이야. 우리의 손이 어떤 대상을 어루만지고 보살필 때, 우리 마음도 제 자리를 찾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슬픈 몸’이 ‘고마운 몸’이 되겠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나는 살덩이와 뼈와 피와 땀, 그리고 눈물과 욕망과 꿈으로 가득 찬 자루’라고 말했지만, 그 자루를 잘 간수하지 못할 때 그 모든 것들이 땅에 쏟아질 수밖에 없지. 몸은 소중한 거야.”


“육체에 탐닉할 것도 없지만, 받은 몸을 건강하게 돌보고 지키는 것이야말로 우리 마음을 잘 지키는 길이기도 하겠네요.”


“물론이지. 몸을 사용하여 마음을 이끈다지 않던가. '그늘진 얼굴, 긴장된 근육, 구부정한 자세 속에 불행과 부정적인 것들이 보관되어 있을 수도 있다'더군. 그러니까 늘 얼굴에 미소를 띠고, 몸의 긴장을 풀고, 자세를 바로 하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맑아지겠지? 틱낫한 스님의 미소 명상이라는 것도 결국은 이런 원리에 따른 걸 거야.”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몸에서 힘 빼는 거 같아요.”


“워낙 긴장을 내면화하고 살아왔으니까. 자기 몸과 남의 몸을 공경하고 보살피려고 애쓰다보면 언젠가는 저절로 부드러워지지 않을까?”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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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을 이용하지 말라


인맥 만들기 문화


“직장이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면서?”


“예, 차 타고 한 30분쯤 가야 하지만 오히려 좋아요. 차를 타고 다니면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도 있고, 주변에 맛있는 음식 먹을 곳도 있고, 직장 옥상에 소박하지만 정원도 있고 해서, 짬짬이 쉴 수도 있고요. 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져요.”


“생명이 갖는 친화력 때문일 거야. 목적 지향적인 일직선의 시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일수록 자연과 교감하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할거야.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고 있는 시간은 사실은 순환하는 시간이거든. 노아의 홍수 이후에 하나님은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약속하셨어. 사람은 이 순환 속에 있을 때 가장 편안하지.”


“그 순환하는 시간의 리듬을 타고 사는 사람이 ‘철든 사람’이라면서요?”


“그런데 나는 오염된 ‘철든 사람’이 된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내 사무실에 하루만 앉아 있으면 알 수 있어. 옆에 있는 공장에서 들려오는 소음, 속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냄새,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철가루…. 그런 게 호흡을 통해 내 몸 속에 축적된다고 생각하면 영 기분이 찜찜해.”


“그러니까 중금속에 오염된, 그리고 쇠가루가 몸에 쌓인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정말 우울하네요. 해결 방법이 없나요? 주택가에 그런 공장이 있으면 안 되잖아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벌써 공장이 세워진지 여러 해가 되어서 나가라고 하기도 어렵고. 좀 고약한 이웃을 만난 셈이지.”


“그래도 공해배출 업소인데….”


“구청 환경과에서 나와서 시정 명령을 하기도 하는 모양인데, 그때 뿐이야.”


“불편함을 참는 것만이 덕스러운 행동은 아니잖아요? 서운할 땐 서운하더라도 행정적인 조치를 요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게 궁극적으로는 상생의 길일 텐데요.”


“어떤 때는 힘있는 사람이 ‘전화 한 통’을 넣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하지만 금방 그런 유혹을 떨쳐버리지. 더디더라도 공적인 시스템과 절차를 통해서 변화를 이루어야지, 바쁘다고 해서 미시적 동원 맥락(micro-mobilization context)을 이용해서 원하는 것을 손쉽게 손에 넣다보면 그게 습관이 되어서 헤어 나오기 어렵게 될 거야. 열심히 노력하기보다는 인맥 만들기에 시간과 정신을 쏟다보면 출세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정신은 황폐해지는 것 아닐까?”


“살다보면 그런 유혹을 떨쳐버리기 어려울 때가 많아요. 교수 임용 청탁 사건을 둘러싼 사회적 논의도 똑같은 맥락이잖아요. 사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인사의 관행이 아닌가 싶어요. 학교에서 열심히 연구하고 실력을 갖춘 사람보다는 윗사람들과의 교제가 좋은 사람들이 공부도 빨리 마치고, 일자리를 빨리 찾게 되는 게 현실이잖아요. 그 때문에 공정한 경쟁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마음에는 원망과 의심이 자라게 되고, 냉소와 환멸에 사로잡히게 되는 거죠. 또 그 폐해는 고스란히 아랫사람들에게 전가되고요. 실력 없는 교수들에게 배우는 학생들, 무능력한 상사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다 피해자들이에요.”


“참 씁쓸한 현실이야. 물론 인간관계가 중요한 요소라는 건 두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야. 공동생활에 있어서는 다른 이들과 협동할 수 있는 능력은 매우 필요하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필요조건이 아니라 필요충분조건으로 작용한다면 그건 곤란하지. 실력보다는 고분고분한 사람을 찾는 조직이라고 한다면, 그 조직은 사람들의 창의성이나 개성을 죽이는 닫힌 조직이라고 보아야 할거야. 우리 사회에서는 누가 좀 튄다 싶으면 그는 가혹한 눈길을 받거나 제재를 받게 되잖아. 그런 일이 반복되면 그의 개성은 귀퉁이가 다 닳아빠진 상처럼 남루해져서 파릇파릇한 본래의 매력은 간데 없고, 조직에 순응할 줄 아는 평범한 사람만 남는 거지.”


“조금 튀는 사람에게는 조직의 쓴맛을 보여주는 거지요.”




무지개빛 까마귀


“그런 셈이지. 나는 신앙적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상급자의 부탁을 거절한 적이 몇 번 있는데, 얼마나 시달렸는지 몰라. 마치 '무지개빛 까마귀'가 된 느낌이었다니까.”


“그게 뭐지요?”


“아, 저지 코진스키의 소설 제목인데, 숲에 사는 한 남자가 심심했던지 까마귀 한 마리를 잡아서 알록달록한 색을 칠하지. 그리고는 새의 날갯죽지를 비틀어. 새가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면 동료 새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날아오는 거야. 그때 사내는 무지개빛 까마귀를 공중으로 날려보내지. 억센 손아귀에서 풀려난 새는 죽어라 하고 동료들을 향해 날아오르는데, 까마귀들은 그 낯선 빛깔의 새를 용납할 수 없는 거야. 그래서 쪼아대지. 이것은 그 소설에 나오는 일화에 지나지 않지만, 작가는 그 까마귀 이야기를 통해서 생각이 다르고 모습이 다른 이에게 가하는 동료 인간들의 불합리한 폭력과 모욕을 드러내고 싶었던 걸 거야.”


“합리(合理)가 아니라 정리(情理)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합리를 말하고, 연줄이 작동하는 집단에 속해 있으면서 그 기제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다 ‘무지개빛 까마귀’ 신세인지도 모르겠네요. 저도 몇 번 쪼여본 적이 있어서 그 아픔을 조금은 알아요.”


“시인 김승희의 <제도>라는 시 들어본 적 있지?”


“글쎄요, 어떤 시지요?”


“‘아이는 하루종일 색칠공부 책을 칠한다./나비도 있고 꽃도 있고 구름도 있고 강물도 있다./아이는 금 밖으로 자신의 색칠이 나갈까 봐 두려워한다.’ 이렇게 시작되는 시인데, 시의 화자인 엄마는 ‘누가 그 두려움을 가르쳤을까?/금 밖으로 나가선 안 된다는 것을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 자문해보면서 ‘나비도 꽃도 구름도 강물도/모두 색칠하는 선에 갇혀 있다’는 사실에 울적해지지. 아이는 연신 엄마에게 ‘크레파스가 금 밖으로 나가면 안 되지?’ 묻고. 그런데 이 시의 묘미는 이 대목에 있어.


내가 엄마만 아니라면

나, 이렇게, 말해 버리겠어.

금을 뭉개버려라. 랄라. 선 밖으로 북북 칠해라.

나비도 강물도 구름도 꽃도 모두 폭발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이다. 랄라.

선 밖으로 꿈틀꿈틀 뭉게뭉게 꽃피어나는 것이다

위반하는 것이다. 범하는 것이다. 랄라


엄마는 어쩌면 이미 한계에 갇힌 제도인지도 몰라. ‘엄마만 아니라면/나, 이렇게, 말해 버리겠어’라는 건, 실제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거거든. 그래서 시인은 자신이 아이를 어떤 틀 속에 가두는 ‘제도’라고 ‘총독부’라고 자탄하지. 그리고 이어지는 말 한마디는 비명이나 마찬가지야. ‘엄마를 죽여라! 랄라.’”


“가슴이 찡해 오네요. 사실 저도 세상에 잘 순응하지 못하는 ‘삐딱이’여서 다른 이들과 어울려 사는 게 쉽지는 않거든요.”


“그럴 거야. 조직생활을 하기에는 다소 감성적이고, 우리 시대의 속도를 따라 살기에는 생각이 많고. 인맥을 형성하는 것은 체질적으로 맞질 않고.”


“그렇다고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그래도 나름대로 잘 적응해가며 살고 있어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안 됐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한때 ‘끈끈한 정’이라는 말이 유행했잖아. 좋은 말 같지만 좀 문제가 있는 말이야. 합리에 바탕을 둔 끈끈한 정이라면 좋겠지 하지만 그게 합리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작동될 때가 많다는 게 문제지.”


“함석헌 선생님 말씀이 생각나네요. ‘피는 물보다 걸다지만 건[濃] 것이 좋은 것 아닙니다. 맑아야지. 제발 핏줄 소리 하지 마셔요.’ 촌철살인이라고 하나요? 이 말씀은 짧지만 정말 정곡을 찌르는 말씀 같아요.”


“정말 그러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들은 왜 그렇게 연줄에 집착하는 걸까요?”


“글쎄, 나라가 국민을 보호해주지 못하니까 자기 나름의 자구책을 강구한 결과가 아닐까?. 그러니까 혈연·지연·학연 등을 통해 유사-가족적인 유대감을 형성하고 그 속에 머물 때라야 비로소 안심하는 거지.”


“그렇다면 인맥 만들기의 뿌리는 공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국가에 대한 불신이라고 보아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겠네요.”


“그 말을 뒤집으면 국가가 공적인 기능을 올바로 수행한다면 사적 관계에 바탕을 둔 정리의 문화는 어느 정도 극복될 수 있다는 말이 되나?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 국가 인권 위원회의 활동이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해. 그 동안 피해자들의 가슴에 깊이 묻어둘 수밖에 없었던 한 맺힌 이야기들이 역사의 조명을 받으면서 실체가 밝혀지고 있으니 말이야."


특권을 내려 놓으라


“한 사회를 제도적으로 개혁해나가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것 아닐까요?”


“그렇지, 언제나 문제든 인간 문제로 귀결되는 거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게 문제지. 이런 문제를 다루는 어떤 토론회를 보아도 열띤 토론 끝에 내놓는 전문가들의 결론이라는 게 기껏해야 ‘의식개혁’을 해야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뿐이잖아.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물으면 답답한 거야. 어느 사회학자는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요소로 정부와 기업과 NGO를 들더군. 한 문화의 뼈대라고 할 수 있는 종교 혹은 교회가 포함되지 않은 것이 유감이기는 하지만 그게 현실이니까…….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힘은 결국 종교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 말씀도 원론적으론 맞지요. 하지만 어떻게요? 지금의 교회는 그럴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요. 온통 정신이 교세 확장에 맞춰져 있는 지금의 교회는 의식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그 대상이 아닐까요?”


“참 뼈아픈 이야기네. 하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닐 거야.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예수님이 제일 먼저 요구한 게 뭐였어? ‘자기 부정’이잖아. 먼저 깨어난 사람이 자기가 누리던 특권을 내려놓는 일부터 시작해야겠지. 내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아도 나도 목사로서 누리고 있는 특권이 꽤 많을 거야. 지금부터라도 그것을 자발적으로 내려놓는 연습을 시작해야지.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전하는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교인들의 신세를 지지 않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다고 말해. 그 말씀을 볼 때마다 나도 손 노동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바울도 그리스도인들에게 특권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고난 당하는 특권’ 말이에요.”


“그렇지.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은 그것뿐이라고 생각해야 우리 삶이 맑아질 거야.”


“조금 불편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고요.”


“고통 없이 얻어지는 것이 있나?”


"그렇지요? 고난 당하는 특권을 포기하는 것은 일도 아닌데,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잘만 하는데, 달콤한 특권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아요. 내공이 좀 쌓여야 가능할 것 같아요.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한다면서요?”


“맞아. 그러니까 특권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겠다는 결의이지. 입원실이 없다고 하여 누군가 힘있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욕망을 내려놓고, 자기 신분이나 잘 아는 이와의 우정을 이용해 어떤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고 싶은 욕구와도 싸워야 해.”


“뙤약볕 아래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을 제치고 옆문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는 뻔뻔함도 버려야지요.”


“그렇지.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이들, 전화 한 통 넣어줄 가까운 사람 하나 없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우리 행동을 돌아보아야 할 거야. ‘가난한 자들의 인식론적 특권’이라는 말이 있는데, 세상을 실체 그대로 볼 수 있는 자리가 바로 가난한 이들의 현실이라는 것이지. 미국의 눈이 아니라 지금 전쟁의 공포 속에 살고 있는 시리아, 이라크 사람들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니겠어?”


“각자 자기들이 선 자리에서만 현실을 보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이군요.”


섬김이라는 묘약


“문제는 자기가 누리는 것이 특권이라는 생각을 아예 못할 수도 있다는 거야. 경북대학교 법학과의 김두식 교수가 쓴 『헌법의 풍경』이라는 책에 보면,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법조계에 나온 사람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살겠다던 애초의 꿈을 그렇게도 쉽게 포기하는 까닭을 말하는 대목이 있는데 아주 공감이 가더라구. <그들이 사법시험이라는 장벽을 넘어 들어간 곳에서는 ‘새로운 세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새로운 세계는 결코 그들에게 특권을 향유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특권과 특권의식은 가랑비처럼 소리 없이 그들의 삶 속에 젖어들었습니다.> 이게 무서운 거지. 가랑비처럼 젖어드는 거 말이야.”


“어쩌면 마하트마 간디가 아무리 일정이 바쁘더라도 경전을 읽고, 기도를 드리고, 물레 잣는 일을 쉬지 않았던 것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한 순간도 잊지 않기 위해서였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가장 분주한 시간에도 한적한 곳을 찾아가 하나님 앞에 엎드렸던 예수님의 경우와 같은 거겠지요?”


“그렇지. 결국 구도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 나는 특권의식에 길들여진 사고를 치유하기 위한 묘약은 어쩌면 ‘섬김’이 아닐까 싶어. 예수님이 좌우명이 섬김이었잖아.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가운데 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겸손해지려면 많은 모욕을 받아야 한다는 데,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소라도 특권을 내려놓은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몸으로 섬기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사실 몸이 앞서지 않으면 마음의 변화는 어렵지요. 그런데 저는 스스로를 치열하게 돌아보고 자기를 닦아나가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우리 사회의 관행화 된 특권에 대해서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일도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것은 귀찮은 일이고, 때로는 대단한 용기를 요구하는 일이지만요.”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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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톺아보기(27)


아낌만한 것이 없다


이군, 새벽빛이 희뿌옇게 밝아오는 아침입니다. 불기 없는 사무실에 앉아 아침을 맞는 일이 조금씩 힘들어지네요. 하지만 밤과 낮의 경계선이 무너지며 아침 햇살이 조금씩 비쳐드는 이 시간, 새로운 삶을 살라고 주신 이 복된 순간이 흔감(欣感)할 따름입니다. 주위가 참 고요합니다. 하루 중 가장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충만할 수 있다는 사실이 참 좋습니다. 정겨운 얼굴들을 머릿속에 그리다가 문득 이군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하고많은 얼굴 중에 왜 이군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모딜리아니의 목이 긴 사람들처럼 목마른 표정으로 나를 찾아오는 이군이 나를 부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잔뿌리만으로 버티기엔


일상의 일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자기가 선 자리를 가늠하기 위해 가끔은 멈추어 설 줄 아는 군이 참 대견합니다. 화가들은 자기 마음에 그린 이미지들을 화폭에 옮기다가 가끔 뒤로 물러나 자기 그림을 살피곤 하지요. 그것은 자기가 그린 형상이 전체 화면과 잘 조화되는지를 살피기 위한 몸짓일 것입니다. 군은 그런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더군요. 나는 삶에 아폴론적인 질서도 필요하지만, 디오니소스적인 일탈과 열정도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일탈과 열정도 더 큰 질서에의 통합을 지향하는 과정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 더 큰 중심을 향한 솟구침이 아니라면 참 곤란한 일입니다. 오늘의 청년 문화의 전모를 볼 눈이 내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청년 문화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느끼지만 그래도 직관적으로 느끼는 바는 있습니다. 그것은 '부박함'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되는 것 같습니다. 관심이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어 그 색깔은 화려하지만 지속성은 없는 것이 특색이라면 특색 아닌가요?


중심을 지향하기보다는 중심으로부터 벗어나는 탈주의 선을 더 소중히 여기는 세상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지속성이 없는 일들은 우리에게 씁쓸한 뒷맛을 남길 때가 많습니다. 일관된 법칙도 지향도 없는 가치들의 무질서한 율동을 보면서 나는 정서적 충격을 느낍니다. 어디로 발을 내딛든 중심을 향한 여정이기를 소망하며 살아온 내게 리좀(rhizome)적 질서는 매우 곤혹스럽습니다. 가끔 산에 오르다가 바람에 밀려 뿌리를 드러낸 채 쓰러진 나무를 봅니다. 어김없이 뿌리를 아래로 깊이 내리지 못하고 잔뿌리만 발달해있는 나무입니다. 잔뿌리만으로 버티기엔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 아닌가요? 물론 뿌리를 깊이 내린다는 것은 힘겨운 일입니다. 자기 자신의 어둠과 싸워야 하고, 거친 비바람과 싸워야 하고, 벽처럼 딱딱한 장애와 싸워야 하니까요.


이 암흑 속에 나는 계속 뿌리가 되는 게 싫다.

젖은 흙담 속에 안절부절 밑으로 늘어뜨려진 꿈에 떠는 뿌리,

무엇이든 흡수하고 생각하고 또 날마다 식사를 하는.


젊은 시절부터 좋아하던 파블로 네루다의 시 <산보>의 일부입니다. 삶이 무겁다고 생각되어 비틀거릴 때마다 나는 이 시를 떠올리곤 했습니다. 마치 내 마음을 꿰뚫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시를 읊조리고 나면 다시 그 어둠을 향해 팔을 뻗는 것이 그렇게 힘들게 느껴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건 어쩌면 ‘공감’에서 비롯된 힘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마음을 새롭게 하면 아픔도 슬픔도 고통도 힘이 되어 삶의 대지 위에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있게 되는 것 같더군요.


얼마 전에 만난 선배 목사님은 다짜고짜 내게 “김수영이 앙코르와트에 다녀왔으면 ‘거대한 뿌리’를 다시 썼을 거야” 하고 말씀하시더군요. 앙코르와트에 다녀오신 소감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인데, 수 백 년 동안 인간의 발걸음이 닿지 않았던 그곳의 신전 건물을 휘감아 오른 나무를 보고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은가를 절감하고 오신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요, 만일 김수영이 그곳을 보았더라면 다른 시적 상상력을 발휘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김수영은 이 척박한 슬픔의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모도, 어떤 반동도 감내하겠다고 말하면서 “― 第三人道橋의 물 속에 박은 鐵筋기둥도 내가 내 땅에/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이라고 말합니다.




고통의 은총


나는 그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김수영처럼 삶이 절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절박함이 없기에 현실에 착근하려는 노력도 그만큼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내 인생이 부평초처럼 흔들릴 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누군가에 대해 품고 있던 꿈을 접어야 할 때 나는 흔들립니다. 참 고통스러운 순간입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고통이야말로 은총입니다. 고통이 없다면 살아있음을 실감할 수 없었을 테고, 생명의 고마움을 몰랐을 터이니 말입니다. 생 텍쥐베리는 그의 일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란 누구나 바람에 따라 방황한다. 꽃들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인간은 뿌리가 없어 상당히 불편할 거야. 그러나 나는 내 몸에서 뿌리가 돋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고통의 뿌리이다. 고통만이 인간을 대지 위에 뿌리를 뻗게 하는 유일한 은총이다.


어쩌면 우리 시대의 문화가 천박한 것은 고통을 정직하게 대면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마치 컴퓨터 게임을 보듯 바라봅니다. 어두운 하늘을 가르는 미사일의 섬광은 마치 불꽃놀이와 같습니다. 미디어는 그 미사일이 떨어진 자리에서 벌어지는 참상은 보여주지 않습니다. 흥건히 흐르는 피, 잘린 손과 발, 그리고 아비규환의 비명소리… 현대문명은 그런 것을 감쪽같이 제거해줍니다.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테러와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아라비아 숫자로 치환되어 우리에게 제공되고, 우리는 그저 혀를 쯧쯧 참으로써 그들을 망각의 강에 밀어 넣고는 재빨리 일상의 삶으로 복귀합니다. 파괴와 폭력의 현장에서 죽어가고 있는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은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평안한 일상을 깨뜨리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아픔이 없으니 창조도 없습니다. 무통분만(無痛分娩)의 시대는 생명을 낳지 못합니다. 필요한 것을 생산할 뿐이지요. 그렇기에 생명 가치는 생산구조에 종속됩니다. 기가 막힌 뒤집힘입니다. 우리는 이 뒤집힌 현실을 유일한 현실로 인정하고 살아갑니다. 자본주의라는 매트릭스는 사유도 진정한 공감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고통 받는 이들이 엄연히 존재하는 데도 우리는 무관심과 무감각으로 무장한 채 갑각류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자크 아탈리는 “시장이 우위를 점하는 곳에서 소비자는 자기 이익만을 염두에 두고 행동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경쟁 논리의 종속변수로 변해버린 이들에게 남는 것은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거리감입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사나와집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이마에 ‘맹견주의’의 팻말을 써 붙이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사람들


이 시대에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장 소중한 가치가 뭐냐고 물으셨지요? 나는 서슴없이 대답하겠습니다. 그것은 ‘아낌’입니다. 공감할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내게 절실한 도전입니다. 생태계의 파괴가 가속화되고 있는 세상이니 모든 것을 아껴야 하겠지요. 시간이 촉박합니다. 과민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지금의 도시 문명이 마치 나발의 잔치와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아시지요? 그는 “도대체 다윗이란 자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이 누구냐? 요즈음은 종들이 모두 저마다 주인에게서 뛰쳐나가는 세상이 되었다”(사무엘상 25:10)고 말하며 절박한 처지에 있던 다윗을 조롱한 사람입니다. 모욕당한 다윗이 복수를 다짐하며 부하들을 이끌고 나발의 집을 향하고 있을 때 그는 왕이나 차릴 만한 술잔치를 베풀고 취할 때로 취하여서 흥겨운 기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숙취와 함께 잠에서 깨었을 때 그는 아내인 아비가일로부터 지난밤에 있었던 일의 전말을 전해 듣고는 심장이 멎고 몸이 돌처럼 굳어져서 열흘을 앓다가 죽고 맙니다. 나발 이야기는 지금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도취상태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본주의는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고, 그것을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제 몸집을 불려갑니다. 하지만 그것은 군대 귀신에 들려 비탈길을 내리닫는 돼지 떼의 상황과 다를 바 없습니다.


자본주의 질서는 난폭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보다 덕 있는 사람이 존중받던 호시절은 지나갔습니다. 군자는 사라지고 소인배들이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세상이 시끄러운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입니다. 자본주의 질서는 사람을 아끼지 않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늘어나고, 능력이 다소 부족한 이들에게는 일자리조차 허락되지 않습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은 주변부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얼마 전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빈민층 이주 청소년들의 소요 사태는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많습니다. 프랑스 말로 대도시의 외곽지역을 일컫는 말이 방리유(Banlieue)라지요? 그런데 프랑스 정부당국은 방리유를 ‘도시민감지역’이라고 부른다더군요. 이것은 주변부를 바라보는 주류 집단의 오만한 눈길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표현입니다. 눈에 보이는 분리의 장벽만 없을 뿐 그들은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입니다.


돈이 주인인 세상에서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부름 받은 까닭이 무엇인지 생각해본 적 있는지요? 어쩌면 그것은 강고한 자본주의의 세상에 균열을 내라는 것이 아닐까요? 쉽지 않은 과제이고 도전입니다. 하지만 딱딱한 얼음을 깨는 데는 망치보다 바늘이 유용하듯이, 자본주의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은 자본으로부터 독립한 사람 하나면 충분합니다. 물론 그런 독립한 인격들이 함께 연대할 수 있다면 더 좋겠지요. 나는 바른 신앙인은 정신의 독립을 이룬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유형무형의 강제에 의해 떠밀리듯 살아가기보다는 자기 내면의 소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이웃에게 사랑으로 다가설 수 있는 사람 말입니다. 유르겐 몰트만은 교회가 ‘출애굽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바로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탈출해 자유의 새 땅을 향하는 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라는 말이지요.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말로는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를 지속하는 것이 되겠네요.


하지만 오늘의 교회는 자본이라는 바로(Pharoh)가 지배하는 세상의 한 부분이 되고 만 것 같습니다. 크기와 힘에 대한 집착으로 교회는 그 근본인 예수정신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군이 교회에 절망했던 것은 이런 현실 때문이 아닌가요? 내가 이미 교회의 질서 속에 깊숙이 몸을 담은 목사가 아니라면 나 또한 교회를 떠날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교회를 떠나지 않겠습니다. 할 수 있는 한 자본이 아닌 예수적 가치가 교회와 세상의 중심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몸부림칠 겁니다.



아낌, 참 삶의 시작


나는 예수가 보여준 삶의 핵심이 ‘아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아끼셨습니다. 그가 민족의 반역자로 낙인찍힌 세리이든, 행실이 나쁜 여자라는 소문이 난 사람이든, 죄인이라고 규정된 사람이든, 하늘의 벌을 받았다고 백안시되는 병자들이든, 귀신에 들린 사람이든 예수는 모든 이들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인간적인 호오(好惡)의 감정을 떠나, 그들 존재의 중심에 있는 선함과 아름다움을 보아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나아오는 사람을 누구라도 물리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존재 이유가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뜻을 명백히 드러내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요한복음 6:39).


이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어찌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겠으며, 건성으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목회자인 나는 아직 이 마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젊은 날에 품었던 거룩을 향한 열정은 안락하고 안이한 삶에 잠겨버리고, 얼어죽어 가는 이의 포근한 꿈만 꾸고 있습니다. 잠들었던 제자들을 깨우며 ‘이제는 일어나 가자’고 말씀하셨던 서른 세 살 청년 예수의 모습은 예순 살 먹은 이 어설픈 제자의 얼굴에서 가뭇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일어서야 할 때라고 느낍니다. 이군 같은 젊은이들이 있어 나는 혼곤한 잠에서 깨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말이 있지요?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가 함께 성장한다는 뜻입니다. 이군의 열정은 나를 새로운 배움터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람들의 심성이 너무 거칠고 사나와졌습니다. 도로 위를 질주하는 운전자들의 시야가 좁아지고 남에 대한 배려나 너그러움이 줄어들 듯이, 이 무서운 문명의 발전 속도는 심성이 황폐화하는 속도와 비례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느림’이 하나의 상품이 되고 있는 세상이니 새삼스럽게 느림에 대해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느림은 우리의 문명병을 치유해주는 가장 소중한 요소입니다. 배고픈 이들을 먹이고, 버림받은 치매노인들의 대소변을 받아내며 살아가는 사람들, 장애자들을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속도전일 수 없습니다. ‘웰빙’을 위한 느림도 소중하지만, 이웃을 돌보기 위해 자발적으로 느림을 선택한 사람들이야말로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춘추전국시대에 살았던 노자의 말이 생각나네요.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데는 아낌만한 것이 없으니 治人事天 莫若嗇

무릇 아낌을 일컬어 빨리 돌아감이라 한다 夫惟嗇, 是謂早復

빨리 돌아감을 일컬어 덕을 거듭 쌓는다고 한다 早復, 謂之重積德(老子, 59장)


모두가 이 마음으로 산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사람을 아끼는 것이 참 삶의 시작일 겁니다. 특히 세상의 속도에 적응하지 못한 채 뒤쳐진 사람들, 자기 목소리를 갖지 못한 이들, 무방비로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을 아낄 줄 모른다면 우리는 결코 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경제 발전이라는 파이를 키우기 위해 이런 이들을 버리고 가는 사회는 결코 지속 가능한 사회가 될 수 없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의 심정이 실종된 문화는 몰락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사람 아낌과 하늘 섬김은 결코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아낌이야말로 우리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지름길입니다.



틈을 만드는 사람들


그런데 규모가 커지면 아낌의 자리는 좁아지게 마련입니다. 인간적인 규모라는 것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간디가 마을 공동체를 세상 변혁의 초석으로 보았던 것은 그 때문일 겁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은 경쟁에서 밀려난 패배자들의 허울좋은 구호가 아닙니다. 사과 씨 한 알속에서 과수원을 보아내는 게 믿음이라지요? 안으로 견고하게 생명을 품은 씨앗처럼, 속에 예수의 혼을 품은 사람들 그들이 있어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규격화된 벽돌과 역청을 가지고 쌓아올리는 욕망의 바벨탑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이군처럼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젊은이들이 이 답답한 세상에 작은 틈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몇 해 전에 텔레비전에서 수십 년을 한결같이 바위를 쪼며 우물을 파들어가는 할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언젠가는 값진 보화를 얻으리라는 그분의 바람은 허망해 보였지만 그분의 수도자적인 몸짓에서 나는 서늘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어리석음이 없으면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존중받고, 모든 피조물들이 자기 생명의 몫을 누리는 참 세상을 이루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들의 꿈을 하늘이 외면하지는 않겠지요. 나는 이군의 답답한 마음을 일시에 해결해줄 수 있는 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답은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다만 그 길에서 나는 이군이 예수의 마음, 즉 ‘아낌’이라는 단어 하나를 화두처럼 붙들고 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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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톺아보기(27)

 

에덴의 동쪽에서 살아가기

-한나의 아이 북토크


던져짐과 던짐 사이

 

에덴의 동쪽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보편적 운명은 불안이다. 동생을 죽인 가인은 주님 앞을 떠나서 '놋' 땅에서 살았다. '놋'은 '떠돌아 다님'을 뜻하는 말이다. 정주하지 못하고 떠돈다는 것, 흐름 위에 보금자리를 치고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홀가분하지만 동시에 불안정한 삶이다. 찰라의 불꽃처럼 번뜩이는 기쁨은 있을지언정 지속적인 평강은 언감생심이다. '안식 없음', '고향 상실'이야말로 인간의 운명이다. 삶은 익숙한 곳에서도 늘 낯설기만 하다. 어느 누구도 삶에 대한 영원한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 인간은 순간순간 삶의 의미를 묻는다. 그러나 동시에 시간이 혹은 우리의 외부 세계가 던지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지만, 그 자유는 한계가 뚜렷한 자유이다. 나의 자유는 너의 존재 앞에서 비틀거리곤 한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을 가리켜 '내던져진 존재'라 말했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왔다. 우리 삶은 필연성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자유를 선고 받았으나, 우리의 통제에서 벗어난 일들로 인해 우리는 부자유하다. 운명의 잡아당기는 힘 앞에서 어떤 이들은 속절없이 끌려가고, 어떤 이들은 그 힘을 거슬러가며 자기 삶을 기획한다. 인간은 내던져진 존재이지만 동시에 자기 삶을 기획하는 존재인 것이다. '던져짐'과 '던짐'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이 인간 존재의 운명이다. 그 흔들림은 존재론적 불안이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불안하기에 사람들은 불안의 대용물을 찾는다. 돈과 명예와 권세를 추구하기도 하고, 늘 새로운 것에 몰두함으로 존재의 불안을 잊으려 한다. 하지만 '존재'가 아닌 '존재자들'은 우리 영혼에 자유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늘 새로운 목마름을 안겨줄 뿐이다.


18세기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이성 3부작은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인간은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가?', '인간은 무엇을 아름답다고 느끼는가?'를 탐구한다. 그런데 이 세가지 질문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수렴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존재이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이 관심한 것은 시민 사회 속에서 어떻게 손해보지 않고 자기 이익을 확보할 것인가의 문제였지만,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누구인지를 물었다. 그 이래 철학의 과제는 인간 존재에 대한 분석에 바쳐졌다. 인간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지만 20세기를 거쳐오는 동안 우리는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멈춰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나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탈리아의 화학자 프리모 레비는 그곳에서 겪은 비인간적인 현실을 글로 남겼다. 수용소에서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였다. 인간에 대한 모든 낙관론은 인간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의 현실 앞에서 번번이 무너지곤 했던 것이다.

 

 

부조리한 세상

 

20세기의 위대한 사상가들을 괴롭힌 것은 '부조리'였다. 인간의 이성은 세상을 합리적 질서 안에 재배치하려 하지만, 현실은 결코 그 질서에 포섭되지 않았다.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혼돈과 무질서, 그리고 의미 없음이 사람들을 확고하게 사로잡았다. 카프카의 작품 <변신>의 작중인물인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문득 거대한 벌레로 변한 자신을 발견했다. <심판>의 작중인물인 요제프 K는 자기 죄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 나찌의 수용소에서 한 줌의 재로 바뀌거나 세탁용 비누로 변한 사람들의 존재, 세월호 안에서 구조를 기다리다가 속절없이 죽어간 사람들, 혹은 터키 앞 바다에 시체로 떠밀린 세 살박이 시리아 아이 아일란 쿠르디의 죽음은 우리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기표로 서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거침없이 신앙의 언어로 설명하려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마치 신의 대변자라도 된 듯 모든 일이 신의 뜻 안에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런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멀미를 하고 있는 인간 실존의 흔들림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으로 남겨두는 것이 지혜이건만, 그들은 그럴 생각이 없다. 노자는 言者不知, 知者不言이라 했다. 美言不信, 信言不美라고도 말했다.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기도 하지만, 벽이 되어 소통을 가로막기도 한다. 오늘날 종교적 언어는 다리로 작동하는가, 아니면 벽으로 작동하는가?


아름다운 삶의 본보기였던 욥은 하루 사이에 심연의 고통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친구들은 그를 다그치면서 죄를 토설하라 으르대지만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아파할 뿐이었다. 그를 괴롭힌 것은 육체의 고통만이 아니었다. 질서정연하던 세계가 무너지자 무의미의 심연이 그를 삼키고 말았던 것이다. 세계의 든든한 토대라고 믿었던 공평과 정의가 무너진 세상 앞에서 욥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많은 설교자들이 욥기 1,2장과 42장을 본문으로 택하곤 한다. 그곳에서 욥은 신실한 믿음의 태도를 고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욥기의 핵심은 3장부터 41장에 이르는 대목이다. 욥은 자기가 태어난 날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법정으로 소환하려 하기도 한다. 심연과 심연 사이에 놓인 외줄 위에 선 것처럼 위태로운 생존을 이어가면서도 그는 쉽게 신의 은총에 귀의하려 하지 않는다. 그 까칠한 버팀은 친구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지만 욥은 스스로를 속일 수 없었다. 욥기의 마지막 장에서 욥은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하고 고백한다. 욥은 마침내 자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가 깨달은 것은 세상에는 자기의 이해를 뛰어넘는 일이 많다는 사실과 인간은 그런 부조리함을 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얽혀 들어간다는 것

 

정답이 없다고 생을 포기할 수는 없다. 해답이 없어도 생은 지속된다. 어떤 이는 망각의 기법을 동원해 인생의 의미 물음을 던지지 않고 사는 길을 택한다. 해야 할 많은 일들이 그로부터 '의미 물음'이 주는 불편함을 소거해간다. 하지만 어떤 이는 자신의 심연에 숨겨진 어떤 핵심과 만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한다. 정신이 큰 사람들은 모두 무의미의 심연 혹은 영혼의 어둔 밤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존재 망각의 길이나 영웅적 정신의 길을 단호하게 추구하기 어려운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종교학자인 정진홍 선생은 "인간이란 희망이나 절망의 이원론적 서술을 벗어나는 다른 범주를 마련해야 비로소 서술할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청계천이 피난민들의 거주지였던 때의 한 일화를 들려준다. 어느 날 그는 옷을 수선하기 위해 얇은 널빤지를 얼기설기 엮어 바닥을 만들고 두꺼운 종이상자로 벽을 세우고 그 한 부분을 잘라 창을 만든 허름한 집에 들어섰다. 엉성한 마룻바닥 밑으로 퀴퀴한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눈에 띈 것은 창턱에 놓인 녹슨 깡통이었다. 깡통에는 채송화가 노란색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는 그 때의 감동을 이렇게 전해준다."저는 그 아주머니께서 길거리에서 깡통을 주워 거기 구멍들을 뚫고 흙을 담고, 어디서 얻으신 것인지 채송화 씨를 뿌리고, 그것을 정성스레 양지 볕에 놓고 물을 주고 키워 마침내 노란 꽃이 피었을 때, 그때 당신이 그 꽃에 담았을 온갖 삶의 애환과 그 꽃에서 피어났을 당신 삶의 추억과 꿈을 어떻게 숨 쉬셨을까 하는 것을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습니다."(정진홍, <<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 청년사, p.412-413)그 아주머니는 궁핍한 시대를 멋지게 살아낸 삶의 시인이 아니었을까? 정진홍 박사는 그 때부터 그 꽃과 아주머니는 아름다움과 진실함과 착함을 가늠하는 잣대처럼 당신 안에 머물고 있다고 고백한다. 새로운 범주가 마련된 것이다. 기로망양岐路亡羊이라는 말이 있다. 갈림길에서 양을 잃었다는 말이다. 양을 우리가 붙들어야 할 생의 본질적 가치라고 한다면 수없이 많은 길이 교차하는 길목에서 우리는 그 양을 잃어버리기 일쑤이다. 그럴 때일수록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은 "필요와 충족, 욕망과 쾌락의 원은 그의 실존의 모든 것을 담기에는 너무나도 좁다"((<누가 사람이냐>,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1996년 4월 20일, p.56)고 말했다. 인간에게는 그런 것들로 충족될 수 없는 목마름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싫든 좋든, 얽혀 들어가는 것, 행동하고 반응하는 것, 놀라고 응답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알든 모르든, 우주적인 연극의 한 역을 맡는 것"(앞의 책, p.65)이라고 말했다. 정답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한 방법은 누군가와 기꺼이 얽혀들어가는 것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책은 참 난해하다. 누군지도 모르고, 언제 온다는 기약조차 없는 고도(Godot)를 기다리는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막연히 기다린다.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 지루해서 쓸데없는 말장난을 해보기도 하고, 신을 벗으려고 애를 써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나무에 목을 맬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은 어느 순간 "살려달라"는 외침을 듣는다. 앞을 못 보는 포조라는 인물의 외침인데, 그 소리를 듣고 두 사람 가운데 하나인 블라디미르는 고민을 하다가 에스트라공에게 말한다.공연한 얘기로 시간만 허비하겠다. (사이. 열띤 소리로) 자, 기회가 왔으니 그 동안에 무엇이든 하자. 우리 같은 놈들을 필요로 하는 일이 항상 있는 건 아니니까. 솔직히 지금 꼭 우리보고 해달라는 것도 아니잖아. 다른 놈들이라도 우리만큼은 해낼 수 있을 테니까. 우리보다 더 잘할 수도 있을걸. 방금 들은 살려달라는 소리는 인류 전체에게 한 말일 거야.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엔 우리들뿐이니 싫건 좋건 그 인간이 우리란 말이다. 그러니 너무 늦기 전에 그 기회를 이용해야 해. 불행히도 인간으로 태어난 바에야 이번 한 번만이라도 의젓하게 인간이란 종족의 대표가 돼보자는 거다.(베케트, 133쪽)살려달라는 포조의 외침은 특정한 대상을 향한 것이 아니다. 물론 그 대상은 동물이 아닌 사람일 테니까 인류를 향한 외침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둘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싫건 좋건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쓰러진 사람 앞에 그들은 인류의 대표로 서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베케트가 암시하는 희망을 본다. 그는 삶의 무의미함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누군가를 돌보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누구를 돌보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을 때이다. 진정한 경건은 돌봄으로 표현된다. 


어떤 이야기의 일부가 될 것인가?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의 말이 참 크게 다가온다. 그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나는 어떤 이야기, 혹은 어떤 이야기들의 일부로 존재하는가?’라는 보다 앞선 질문이 해명될 때에만 비로소 대답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삶의 저자(auther)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은 '오리지널'로 태어나 '카피'로 사는 것이 타락이라 했다. 옳다. 하지만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앞서 바른 길을 걸어간 이를 모방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를 '길'이라고 고백한다. 세상에는 많은 길(many ways)이 있지만, 우리에게 예수는 '그 길'(the Way)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자기 자신을 '보냄을 받은 자'라고 표현한다.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내신 분의 뜻을 수행하는 것을 자기 소명으로 삼는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10:10) 이 단호한 한 마디 속에 예수를 추동한 삶의 원리가 담겨있다. 그는 자기 앞에 현전하여 있는 모든 대상을 '하나님이 내게 보내신 존재'로 보았다. 그렇기에 그는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고, 만나는 이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존재가 머무는 곳 어디에서나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받은 자들의 기쁨이 있었다. 자기 욕망 주변을 맴돌며 살던 사람들이 다른 이들의 아픈 사정을 헤아리며 살면서, 우정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자기 중심성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타자들 속에 숨겨진 신적 광휘를 보았다. 예수가 있는 곳에서 거룩과 속됨, 의인과 죄인,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를 가르던 경계선은 철폐되었다. 경계선을 만듦으로써 자기 체제를 유지하고, 그 가운데서 자기 이익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던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 체제의 토대를 흔드는 예수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본디오 빌라도의 손을 빌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예수와 더불어 시작된 하나님 나라 운동이 제국의 토대를 뒤흔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민한 정치가인 빌라도가 몰랐을 리가 없다. 불의의 공모가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스탠리 하우워어스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답 없이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이렇게 사는 법을 배울 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너무나 멋진 일이 된다. 신앙은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한나의 아이> p.375)이라고 말했다. 이게 무슨 말일까? 요한복음 9장에는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등장한다. 제자들이 그 사람을 보고 묻는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그 때 예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요9:2,3).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그를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제기한 신학적 문제를 삶의 문제로 바꿔놓고 있다. 어차피 해결될 수 없는 문제에 붙들려서 고통 당하는 사람의 현실을 해석의 대상으로만 삼지 말고, 그를 도울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물론 세상은 불의를 획책하는 이들과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시스템이 있다. 그것을 철저히 파헤치고, 더 이상 그런 불의가 작동되지 못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해야 할 일은 지금 여기서 고통을 당하는 이들과 연대하는 것이다. 그들 곁에 머물고, 그들이 가끔은 붙들고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예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른다. 예수는 그 짐을 벗겨주기는커녕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따르라" 하신다. 예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무거운 짐에 짓눌려 허덕이는 이에게 십자가를 지라니 너무 가혹한 것 같다. 하지만 바로 그 때 우리를 짓누르고 있던 무게가 가벼워지기 시작한다. 신앙의 역설이 여기에 있다. 삶의 매순간이 제기하는 물음에 대한 정답은 없다. 그러나 지향해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예수는 그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로 우리 앞에 서 있다. 예수라는 푯대를 향해 걷기 시작할 때, 비록 흔들릴 수는 있어도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그 길을 걸을 것인가, 아니면 그 길이 진리라고 고백할 것인가는 각자가 선택할 문제이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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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톺아보기(26)

 

                                                   하늘 북소리

어른들은 참 아무 것도 모른다. 숫자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가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사와 만났을 때 자기가 살던 별을 B 612호라고 홋수까지 가르쳐 준 것은 그 때문이다. 어른들에게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하면, 그들은 정작 제일 중요한 것은 묻지 않는다. "나이가 몇이냐? 형제가 몇이냐? 몸무게가 얼마냐? 그 애 아버지가 얼마나 버느냐?" 그들의 질문은 고작 이런 것이다. 그러니 "창틀에는 제라니움이 피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들이 놀고 있는 고운 붉은 벽돌집을 보았다"고 했을 때 어른들이 그 집 모양을 상상하지 못한다고 해서 어른들을 비웃으면 안 된다. 오히려 지혜로운 어린이/젊은이라면 몇 억 원 짜리 집을 보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어느 착한 시인은 "천국에는 아라비아 숫자가 없다"는 시를 썼다. 나는 그에게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지 않았다. 물었다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한 말을 들었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참 좋다. 모든 것을 숫자로 환산해서 바라보는 세상에서 주눅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좀 서운할 게다. 학생들은 점수와 석차로 서열화되고, 어른들은 아파트 평수와 자동차 배기량으로 서열화되는 세상이다. 목사들은 출석교인 수와 헌금액수에 따라 큰 목사와 작은 목사로 나뉜다. 사람들의 대접도 그에 따라 달라진다. '꿩잡는 게 매'라는 세상이니 너나할 것 없이 다 바쁘다. 회색일당에게 시간을 다 팔아 먹었나보다. 여러 해 전 학교에 머물고 있을 때 어느 학생이 편지를 보냈다. "모두가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고 말했어요. 한눈 팔면 뒤쳐질 것 같아 죽도록 달렸어요. 문득 허전했어요. 잠시 숨을 돌리려고 멈추어 섰더니 제 주위에는 아무도 없네요." 학생들만 그런 게 아니다.

 

 


 


어느 날 제법 유명한 문학 평론가가 술김에 나를 찾아오더니 다짜고짜 "김형은 행복해요?" 하고 물었다. 행복하다고 하면 그의 눈물을 감당할 수 없을 듯싶고, 불행하다고 하면 뭔 목사가 그러냐고 할 것 같아 웃기만 했다. 그러자 그는 자기가 빈 쭉정이처럼 살았다고 말하며 계속 울었다. 그래서 술을 먹으니까 제 정신이 돌아온 거냐고 물었더니 웃었다. 어른들도 울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술 먹어서 부끄럽냐?"고 물었더니 그는 말귀를 얼른 알아듣고 "부끄러워서 술을 먹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피차 <<어린 왕자>>를 읽은 사람인 티를 냈다.

우리는 너무 작아졌다. 정말 큰 소리는 들리지 않고, 정말 큰 형상은 보이지 않는다지 않던가? "북명에 곤이라는 물고기가 있었다지. 곤(鯤)은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었대". 여기까지 말하면 즉시 답이 돌아온다. "에이, 뻥치지 마세요." 장자(莊子)라는 사람도 이 시대에 오면 별 수 없을 거다. 그러니 그 물고기가 변해서 붕(鵬)이라는 새가 되었는데 그 등 넓이만 해도 몇 천리에 이르렀다고 이야기하면 다들 하품을 하면서 권태로운 표정을 지을 게 뻔하다. 어느 이야기꾼은 자기는 어릴 때 동해에서 펄쩍 뛰어오른 물고기가 서해에 가서 풍덩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고 자랑하던데, 요즘은 이런 이야기 아무도 안 듣는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고 말하면 "낮게 나는 새가 자세히 본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누가 아니래나? 다른 갈매기들이 하구에 모여들어 끼룩거리면서 바다에서 밀려온 죽은 생선을 줍느라 야단일 때 조나단 리빙스턴은 높이 그리고 빨리 나는 법을 연습했다고 말하면 "그래도 먹어야 산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숫자 올가미에 걸린 사람들이 참 많다. 그 올가미를 끊으면 큰일날 것 같지만, 아니다. 잠시 동안은 어리둥절하겠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광대한 자유의 지평이 눈앞에 펼쳐진다. 왕자의 운명을 타고나서 거지의 삶을 사는 게 타락이요 죄이다. 모두가 줄지어 행진하고 있을 때, 그 길을 벗어나 다른 방향으로 걷는 사람은 다른 북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하늘 북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살만한 곳이 된다. 하늘 북소리를 듣는 사람들을 가리켜 예수님은 '친구'라 부르겠다고 하셨다. 잘하면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도 있겠다. 이 희망이 있어 나는 오늘도 웃는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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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유가족 못지않게 외로우신 하나님

 

• 라헬의 울음

 

주님의 은총과 위로가 이 자리에 함께 한 모든 분들에게 임하시기를 빕니다. 벌써 2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4월은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지만 우리는 봄을 봄답게 맞이할 수 없습니다. 피어나는 꽃들과 함께 누군가의 신음소리 또한 피어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예레미야 선지자는 패망한 조국의 현실을 보며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라마에서 슬픈 소리가 들린다.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다. 자식들이 없어졌으니, 위로를 받기조차 거절하는구나”(예레미야 31:15).

 

이 땅의 라헬들도 위로받기를 거절하며 지금 울고 있습니다.

 

295명의 희생자들, 그리고 아홉 분의 미수습자들의 가족들은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은 비통의 시간을 견디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두 번이나 지나고 있습니다. 꽃이 피어도 눈물겹고, 초목이 무성해져도 눈물겹고, 단풍이 들어도 눈물겹고, 흰 눈이 내려도 눈물겨운 시간이었습니다. 그 회색빛 시간을 지나는 동안 밝혀진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동정 피로를 호소하며 ‘이제 그만 하면 되지 않았냐’고,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한 번도 누군가의 아픔에 동참하기 위해 자기들의 일상의 자리를 벗어나본 적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강자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 권력에 길들여진 사람들입니다. 보수 언론과 정부는 세월호 참사 유족들과 그들과 연대하려는 이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겨 불온시하고 있습니다.

 

가련한 나라입니다. 세월호 참사 당시 국가는 실종된 상태였습니다.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할 국가는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기울어져 가는 뱃전을 붙들고, 다소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결국 누군가가 와서 구해줄 거라는 희망을 끈을 놓지 않았던 이들이 서서히 밀려오는 물을 보며 느꼈을 공포의 시간을 떠올릴라치면 견디기 어렵습니다. 채 살아보지도 못한 채 스러져야 했던 이들이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배가 절망의 심연으로 가라앉고 가족들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팽목항을 뒤흔들고 있을 때도 정부는 실종 상태였습니다. 그 후에도 이 참사의 책임을 지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고, 진상조차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저들은 태평합니다.

 

 

인문학자들은 공적인 역사에서 배제되고 사라짐으로 그 누구도 ‘대변’해 줄 수 없는 희생자들을 일러 ‘서벌턴’(subaltern)이라 칭합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역사의 이면에는 주류 세계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착취당하고, 침묵을 강요당해 온 이들의 피눈물이 강이 되어 흐르고 있습니다. 현상을 유지함으로 이익을 보는 이들은 한사코 그 현실을 외면하려 합니다. 억눌린 이들의 혀를 잘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렇기에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은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혀 짤린 하느님

우리 기도 들으소서

귀먹은 하느님.”

 

우리는 그러한 불의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역사 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피라미드 세계로 상징되는 애굽에서 온 몸으로 체제의 무게를 받아내던 하층민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천대받고 착취당하고 폭행당하는 것을 숙명으로 여기고 살았습니다. 밤 되어 누추한 자리에 고단한 몸을 뉘였을 때 그들은 끙끙 신음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누구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소리에 예민하게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누군가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이들의 신음소리를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로 들으신다”고 말입니다.

 

사람은 잊어도 하나님의 기억하십니다. 때가 되면 이 불의한 역사는 시정되고야 말 것입니다. 아무리 서발턴들의 억눌린 신음소리를 막거나 은폐하려 해도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주님의 날이 다가옵니다. 불의한 자들이 심판받고, 억눌렸던 자들의 한이 신원되는 날 말입니다. 많은 교회가 세월호 참사를 모른 체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이 아픔의 자리에 성육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몸과 마음은 힘 있는 이들을 향해 기울어져 있습니다. 저는 지금 세월호 유가족 못지않게 외로운 분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은 많지만 당신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이들은 적기 때문입니다.

 

• 피에타

 

로마의 바티칸 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 가보신 분들은 누구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 앞에 발길을 멈춥니다. ‘피에타’는 슬픔 혹은 비탄이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그런데 많은 예술가들이 십자가에서 내려진 아들 예수를 안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을 형상화하면서 '피에타'는 그런 형태의 그림이나 조각을 지칭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바티칸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조형적으로 매우 아름답지만 자세히 보면 조금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건장한 아들을 무릎 위에 눕힌 마리아의 벌어진 두 다리가 터무니없이 크고 어깨는 넓습니다. 게다가 마리아의 얼굴은 지나칠 정도로 젊고 고요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마리아의 얼굴이 젊게 표현된 것은 ‘영원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그 평온한 얼굴은 ‘피에타’라는 이름이 생소할 정도로 낯설기만 합니다. 미켈란젤로가 그 작품을 제작한 때는 1499년 경이라고 합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 재건축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온 유럽의 교회가 혼돈에 빠져들던 상황이었습니다. 교황청의 후원을 받고 있었던 미켈란젤로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평온하기 이를 데 없는 마리아의 모습을 통해 사람들의 분노를 잠재우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하는 역할과 비슷합니다.

 

 

 

‘피에타’ 하면 맥락은 다르지만 저는 성경에 나오는 다른 한 어머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리스바입니다. 리스바는 사울의 첩입니다. 다윗이 역사의 무대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사울과 그 일가족들은 그늘진 곳에 유폐되어 살았습니다. 그러나 숨어 있다고는 해도 그들은 늘 감시의 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리스바가 역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삼년 가뭄이 닥쳐왔을 때입니다. 가뭄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다윗은 그 가뭄의 재앙이 누구 때문에 빚어진 일인가를 하나님께 묻습니다. 권력 주변에 있는 이들은 사울의 집안이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한 데 대한 벌이라고 조언했습니다.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에게 가서 어떻게 해야 그들이 화를 풀고 자기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사울의 일족 일곱 사람을 내주면 그들을 나무에 달아 죽이겠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그대로 하도록 허락합니다. 죽임을 당한 일곱 명은 리스바의 두 아들과 사울의 딸 메랍의 아들들 다섯 도합 일곱 명이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남의 칼을 빌려 적을 제거하는 노련한 정치술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으로 이 불쾌한 사건은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리스바는 차마 그들을 그렇게 떠나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보리 수확기가 시작될 무렵부터 리스바는 상복을 가져다가 바윗돌 위에 펴고 시신을 그곳에 수습하여 두었습니다. 낮에는 새가 내려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들이 주검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리스바는 피눈물을 삼키며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것은 억눌린 함성이었습니다. 그 광경은 그 비열한 사건을 추문거리로 만들었습니다. 리스바의 존재는 다윗에게 큰 부담이었습니다. 마침내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뼈와 함께 그 희생자들의 뼈를 수습하여 장례를 치러주도록 명령합니다. 그러자 가뭄이 그쳤습니다.

 

• 오늘 우리의 소명

 

세상에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인간의 합리적 이해를 벗어난 일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당황합니다. 많은 보수적인 신앙인들은 그런 현실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로 현실의 쓰라림을 은폐하곤 합니다. 하지만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남겨두어야 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주님께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그들의 질문에는 그가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누군가의 죄 때문이라는 생각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그런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더욱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이 구절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기 위해 그를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구절 속에 담긴 속뜻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것을 이렇게 이해하고 싶습니다.

 

너희가 물어야 될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이냐는 신학적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를 위해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왜 그 무고하고 예쁜 아이들이, 그리고 평범한 행복을 꿈꾸던 사람들이 그렇게 속절없이 죽어야만 했을까요? 물론 구조책임을 방기한 국가기관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습니다. 그 진상을 속속들이 파헤쳐야 합니다. 누군가는 그 사건을 망각의 강물 속에 띄워 보내고 싶겠지만, 그 일이 우리에게서 스러지지 않도록 치열한 기억 투쟁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차적 과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이 그들을 돕지 않으셨느냐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비틀거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그들을 산 자의 땅으로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을 의미 있는 죽음으로 바꿀 수는 있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벌거벗은 욕망이나 이익이 아니라 생명이 최우선의 가치로 존중받는 세상을 열어가야 합니다. 한 생명 한 생명이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이라는 사실을 우리 사회가 인식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2년 전 속절없이 죽음의 강을 건넜던 이들은 살아있는 사자가 되어 우리 곁에 머물 것입니다. 주전 8세기의 예언자 호세아는 “바람을 먹고 살며, 종일 열풍을 따라서 달리고, 거짓말만 하고 폭력만을 일삼는” 에브라임에 닥쳐올 파멸을 예고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바로 파멸을 목전에 둔 것은 아닌지요? 이 자리에 동참한 이들은 피해자 의식을 넘어 역사 변혁의 주체로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미켈란젤로, <론다니니의 피에타>

 

미켈란젤로의 또 다른 피에타 이야기로 제 설교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미켈란젤로가 죽기 직전까지 매만지고 있던 작품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론다니니의 피에타>(1564년)라고 부릅니다. 그 작품은 지금 밀라노에 있는 스포르체스코 성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피에타상은 바티칸의 피에타와 여러 모로 대조적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우툴두툴한 돌의 질감을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고통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형태가 좀 특이합니다. 어머니가 뒤에서 자꾸만 중력에 이끌려 무너져 내리는 아들을 부축하고 있는 형태인데, 가만히 보면 마치 죽임 당한 아들이 어머니를 업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참 기묘합니다. 미켈란젤로는 그 작품을 통해 은총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죽임 당한 이가 산 자를 위로하고 붙들어줍니다.

 

저는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그 신비를 경험할 수 있기를 빕니다. 누가 사람입니까? 신음하는 이웃들의 삶의 자리에 다가서는 이들입니다.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안일한 평안을 깨뜨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희생당한 304명은 우리의 인간됨을 묻는 물음표로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주님의 위로와 평강이 희생자들의 가족들 위에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또한 그들의 슬픔을 나누어지며 더 나은 세상의 주체로 서기 위해 광야에 나선 모든 이들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편집자 주/이 내용은 김기석 목사님이 4월 13일, 안산 분향소에 열린 세월호 참사 2주기 예배에 한 설교(누가 사람인가? 요한복음 9:1-3)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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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톺아보기(25)


우리는 지지 않는다


차이를 내포한 반복


손석춘 선생님,


하염없이 내리는 장맛비를 바라보면서 들숨과 날숨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오규원 선생의 시구가 떠올랐습니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강은 젖지 않는다. 오늘도/나를 젖게 해놓고, 내 안에서/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가는/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비가 와도 젖은 者는> 부분) 혼자 비감해져서 “비가 온다, 비가 와도/젖은 者는 다시 젖지 않는다.”는 마지막 연만 되뇌고 있습니다. 뭔가를 적어야 한다는 생각에 컴퓨터를 켜놓고 앉아 있지만 모든 언어가 물살에 떠내려갔는지 아니면 물기를 머금어 무거워진 것인지 도무지 떠오르질 않습니다.


뜬금없이 ‘슬픔’이라는 단어만 또렷하게 떠오릅니다. 나이가 들면 젊은 날 나를 온통 사로잡고 있던 슬픔의 정한이 물러갈까 생각했지만, 그것은 다만 헛된 꿈이었나 봅니다. 세상은 여전히 아프고, 눈물의 강은 우리네 삶을 관통하며 유유히 흘러갑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전도서 기자의 말이 왜 이리도 처연하게 들려오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들뢰즈는 어떠한 반복도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고통 혹은 슬픔이라는 인간의 한계상황은 영원히 극복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진중공업 타워 크레인 85호 그 아스라한 허공에 머물며 버텨내고 있는 김진숙 씨의 그 가혹한 시간을 생각하니 오늘의 안일한 삶이 부끄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경제논리, 정치논리로 그를 비난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는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에 대한 항거의 깃발로 우뚝 서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김진숙 씨를 노동해방의 깃발로만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의 깃발로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생뚱맞게도 문태준의 시 <가재미>가 떠오릅니다. 시의 화자는 암 투병하는 여인을 애연히 바라보다가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고 노래합니다. 저절로 감정이입이 되는 표현입니다. 시인은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고 내처 적었습니다. 이 시가 떠올랐던 것은 아마 이 표현 때문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내 저 허공에 매달린 김진숙 씨의 강건함과 고요함 그리고 햇살처럼 맑은 얼굴에 안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손을 모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저 허공이 아니라 땅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전국 도처에서 희망 버스를 타고 달려가는 사람들을 보며 감사했고, 그들을 향해 최루액을 살포하는 경찰을 보며 속상했습니다. 자기가 숨 쉴 만한 희망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이들이 고마웠고, 우리 시대의 희망 버스가 되지 못하는 교회 때문에 슬펐습니다. 어쩌면 지금 하염없이 전국을 적시는 장맛비는 인간다운 세상을 꿈꾸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울의 예수>에서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고 노래했던 정호승 시인이 만일 <부산의 예수>를 썼더라면 어땠을까요? 어쩌면 예수가 경찰차에 기대어 울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편지에서 선생님께서 주기도문을 들머리에 옮겨 적으신 것을 보면서 선생님이 어떤 마음으로 이 대화에 임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가 생각을 나누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 찾기임을 새삼스럽게 자각하며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과 저의 자리가 뒤집힌 것은 아닌가 생각하며 반성했습니다. 선생님은 저보다 훨씬 구도자적 자세로 임하고 계신 데 저는 오히려 당위와 현실 사이에서 바장이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지요? 되고 싶은 나와 현실의 나 말입니다. 그 둘을 일치시키는 사람은 참 행복할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 둘 사이의 불화의 골이 깊어지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가끔 별 일 없이 편히 쉬어도 몸과 마음이 무거운 것은 그 불화의 무게 때문일 것입니다. 너무 늦기 전에 그 둘 사이의 간극을 좁혀야 할 텐데, 나날이 시름만 깊어갑니다.





예수, 그리고 매혹


조금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걸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청년 시절 처음 교회에 나갔을 때 저는 이전까지는 경험해본 적이 없는 낯선 사람들을 여럿 만났습니다. 가난했지만 마음이 풍족했던 사람들, 누가 보더라도 목을 꼿꼿이 세우고 살만한 자리에 있었지만 한없이 겸손하고 부드러웠던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독재와 싸우기 위해 안일한 일상을 내려놓은 사람들…. 저는 예수를 만나기 전에 먼저 그런 이들을 만났습니다. 세상의 문 밖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느끼던 처지에 그런 이들과의 만남은 또 다른 세상의 발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규정짓고 있는 하나의 중심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예수라는 사나이였습니다. 그분의 부름을 받기도 전에 저는 예수에게 매혹 당했고, 그분을 알아갈수록 현실의 교회에 대해서는 절망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마음속에 깃든 빛까지 앗아가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라는 사나이와의 사귐이 깊어갈수록 세상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표상되기 시작했습니다. 무채색의 세상이 돌연 찬란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아도 감사했고, 풀잎에 내려앉는 햇살만 보아도 가슴이 따뜻해졌습니다. 공중을 자유로이 나는 새들도 그분을 찬미하는 듯했습니다. 내 앞에 현전하고 있는 세계 전체가 어떤 메시지인양 들려왔고, 살아있다는 사실이 은혜임이 실감되었습니다. 욕망을 채우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고단한 삶을 이럭저럭 견디며 살아가는 삶이 싫어졌습니다.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터 위에 집을 짓고 싶다는 욕구가 스멀스멀 솟구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좀 화가 났습니다. 현실 교회가 노정하고 있는 모습은 예수의 원정신과는 너무 거리가 먼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거의 급진적이라 할 만큼 인생의 방향을 선회한 것은 은혜로운 부르심 때문이라기보다는 예수 정신이 왜곡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습니다.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저는 신학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곤 했습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생각만 깊어갔습니다. 자기 확신에 찬 이들을 만나면 그들의 확신을 뒤흔들어놓거나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공허감도 따라 깊어갔습니다. 마치 고추잠자리가 앉아 있던 막대기 끝의 빈자리를 바라보듯 공허한 눈길로 세상을 흘끔거리곤 했습니다.


까뮈, 사르트르, 카프카, 도스토예프스키, 루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책에 탐닉했던 것은 그런 허깃증 때문이었을 겁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이 제기했던 문제의식의 언저리조차 살피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제게 숨구멍이 되어 주었습니다. 저는 마치 생채기를 긁어 덧내듯이 그들을 잡아당기던 심연을 즐겨 응시하곤 했습니다. ‘콘텍스트’는 질문을 던지고 ‘텍스트’는 답을 준다는 말에는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흔들리는 터전 위에 서 있는 듯 삶은 위태로웠고, 진리의 길은 모호했습니다. 황홀한 도취도, 뚜렷한 지향도 없이 엄혹했던 시절을 견딘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었습니다. 저는 전형적인 회색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예수라는 사나이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길을 나의 길로 삼기에는 심지가 너무 약했습니다.


윤동주의 <자화상>을 자꾸만 되뇌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논가 우물 속에 비쳐진 자기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시의 화자는 처연하게 고백합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이상의 <거울>을 외우고 또 외웠습니다.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자기불화와 연민 사이를 바장이면서도 저는 이미 정해진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목회자로 살기 시작했고 벌써 그 세월이 30년이 넘습니다. 그 기나긴 세월을 톺아보니 부끄러움뿐입니다. 길들여진다는 것처럼 슬픈 일은 없을 겁니다. 야성을 잃어버린 채 순치되어버린 삶에는 생기가 없습니다. 지나온 세월이 무색하여 공연히 책상 앞에 놓아둔 석향을 들어 냄새를 맡았습니다. 돌밭 위에서 모질고 시린 세월을 견디며 안으로 축적한 향내가 은은히 퍼져 나왔습니다. 문득 내게서는 어떤 향기가 날까 저어하는 마음이 드네요. 이야기가 일직선으로 내닫지 못하고 이렇게 가리산지리산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은 그동안 애써 숨겨 왔던 상처를 드러내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처음의 순수를 잊지 말아야


손석춘 선생님,


선생님은 예수를 보수의 눈으로 볼 것인가 진보의 눈으로 볼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진실을 찾아야 옳지 않은가 물으셨습니다. 백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진실이 없다면 진보든 보수든 좌든 우든 허깨비에 지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저는 선생님의 부드러운 눈빛과 조용조용한 말씨에서 투사를 보기보다는 구도자를 보았습니다. 구도자가 하는 말이기에 한국교회의 현실을 지적하는 그 날선 언어가 더욱 예리하게 다가왔습니다. 청년 시절 나를 분노하게 했던 한국교회의 현실을 나 자신이 체화하고 있다는 자책감이 큽니다. 내가 그렇게도 사랑하고 신뢰했던 예수는 지금 이 땅에서 외롭습니다. 나 또한 예수를 외롭게 한 사람입니다. 그는 당신의 일을 함께 하는 이들을 ‘친구’라 부르겠다고 말했지만, 그의 친구는 많지 않습니다. 물론 이 땅 구석구석에서 파란 불꽃을 일으키듯 예수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아가는 이들이 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사람들의 귀에까지 미치지 못합니다.


가끔은 주일을 맞이하는 것이 고문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매주 설교를 준비하기도 어렵거니와, 그 말이 사람들의 가슴에까지 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기 때문입니다. 설교자의 가장 큰 번민은 입을 다물고 싶을 때조차도 무엇인가를 말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삶을 통해 뒷받침 되지 못하는 말의 부박함이 떠오를 때면 어딘가로 달아나고 싶어집니다. 듣는 이들을 고려하여 자기 검열을 하고 있는 저 자신과 마주칠 때면 그런 심정은 더욱 깊어집니다.


예레미야는 주님의 꾐에 넘어간 덕에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며 하나님을 향해 부르댑니다.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예레미야 20:8). 그 구절을 읽을 때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 됩니다. 주님의 말씀 덕분에 사람들에게 좋은 대접을 받으며 사는 제 모습이 되비쳐지기 때문입니다. 젊은 날의 그 장하던 의기는 어디로 가고 현실에 길들여진 추레한 삶만 남은 것일까요?

성령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꾸짖었습니다. 그 첫 마음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가끔 걸음마를 익히는 아기들의 모습을 볼 때면 가슴이 설렙니다. 몇 걸음 걷다가 이내 주저앉곤 하지만 아이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두려움과 설렘 사이의 그 창조적 긴장이 새 세상을 여는 틈이겠지요. 저는 가끔 빈센트 반 고호의 그림 ‘첫걸음’을 들여다보면 합니다. 사립문 밖을 나선 아이가 저만치에서 한 무릎을 꿇은 채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아빠를 향해 가기 위해 역시 두 팔을 벌리고 있는 그림이지요. 아기의 발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이미 아빠의 품에 안겨 있었을 겁니다. 제가 지금 회복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마음인 듯싶습니다. 정진홍 선생님은 “처음의 순수를 잊으면 지금의 현존이 지향을 잃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간헐적으로나마 처음 자리를 확인하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일일 겁니다.


잡담회 풍경


손 선생님,


부끄러운 속내를 이렇게 털어놓는 것은 이제 탄식만 하며 지낼 수는 없다는 나름의 절박함 때문입니다. 의기만으로는 사람이나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서둘지 않으려 합니다.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널뛰기하기보다는 작은 희망이라도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까치발을 하고서는 오래 서 있지 못하고, 가랑이를 한껏 벌려 성큼성큼 걷는 걸음으로는 멀리 가지 못한다”(跂者不立, 跨者不行)는 노자의 말이 참 귀하게 여겨집니다. 까치발을 들거나 가랑이를 한껏 벌려 걷는 것은 결국 남보다 커 보이거나, 남보다 앞서겠다는 마음이겠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작다는 사실을 이제는 잘 압니다. 촛불을 나누는 마음으로 주위 사람들과 소통하려고 합니다.


요즘 저는 한 달에 한 번씩 교인들과 잡담회를 갖습니다. 정해진 멤버도 없고 정해진 주제도 없이 그저 자유롭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입니다. 잡담회에는 두 가지 금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연예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이들의 말을 비평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잡담회인가 묻는 이들도 있습니다. ‘잡담’을 사전은 ‘쓸데없이 지껄이는 말’로 정의해 놓았더군요. 하이데거도 잡담을 존재 망각에 빠진 ‘세인世人’의 특색 가운데 하나로 꼽고 있으니, 잡담의 가치는 철저히 무시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런 전제도 없이 벗들과 편하게 주고받는 잡담 속에서 창의적 사고의 단초를 발견하곤 했습니다. 마음 편한 잡담이야말로 마음의 빗장을 열고 자기 속내를 드러내기도 하고 남을 받아들이기도 하는 소통의 마당이 되는 것 같습니다.


며칠 전의 잡담회는 꽤 진지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것과는 다른 신앙적 배경에서 살아온 분들이 그 자리에 참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들은 모처럼 담임목사와 편하게 대면한 시간을 허투루 보낼 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분들이 제게 던지는 질문의 요지는 ‘구원의 배타성’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구원이라는 말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고 묻자 주춤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전제해 왔고 또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해 온 것인데, 질문을 받는 순간 모든 것이 모호해지고 만 겁니다. 잠시 망설이던 그들은 아주 솔직하게 내세에서 누리는 지복의 삶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예상했던 그대로였습니다.


저는 성경에서 사용된 구원이라는 단어의 다양한 용례에 대해 말해줬고, 예수가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초점은 저 세상보다는 이 땅에서의 삶에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이도 있고, 갸웃거리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제가 느낀 것은 많은 이들이 ‘이것이냐 저것이냐?’ 식의 질문과 대답에 익숙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정답을 원했습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고 말하면 그것은 대답의 회피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가치가 착종된 세상에서 단순한 답을 찾는 것은 어쩌면 본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답은 현실적합성을 갖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저는 진정한 신앙이란 정답이 아니라 질문 속에서 형성되는 것임을 이해시키려고 애썼습니다. 신앙이란 손쉬운 해답을 거절하는 용기라는 말도 했습니다. 이미 준비된 정답을 그냥 수용하기보다는 물음을 향해 자기를 열어놓는 정직한 태도가 필요하다고도 말합니다. 답을 가지고 있다는 오만함은 일쑤 타자에 대한 부정으로 나타나고, 그것은 믿음의 탈을 쓴 폭력이 되기도 하니 말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이 바라는 바를 성취하기 위해 도구화하는 것이야말로 반(反)신앙이라고도 말했습니다. 답을 원하는 이들에게 질문과 의혹거리만 잔뜩 안겨 준 셈입니다. 교우들이 저의 그런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의 신앙적 고민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틈을 만드는 사람들


손 선생님,


요즘 저는 길들여진 제 둔중한 의식을 두드리는 몇몇 일들에 접하며 좀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국교회의 현실에 절망하여 목사라는 직분을 내려놓는 젊은 목회자가 등장했고, 위선적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며 당분간 목회 현장을 떠나겠다고 선언한 분도 계십니다. 한결같이 정직하고 깨끗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성직은 천직’이라는 소명 신화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그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오랜 번민의 시간을 보냈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옵니다. 놀라운 것은 그들의 선택을 만류하는 이들보다는 오히려 격려하고 심지어 부러워하는 이들이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지금의 교회 모습이 정상이 아니라는 데 공감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원점에서 다시 돌아보아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면제년을 앞두고 돌려받지 못할까 하여 꼭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꾸어주지 않는 것이 ‘죄’라고 명쾌하게 정리하셨습니다. 또 ‘원죄’는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을 제멋대로 왜곡한 것이 아니냐고 물으셨습니다. 원칙적으로는 공감합니다. 하지만 목사의 버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죄’나 ‘원죄’라는 말을 일의적으로 규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성경이 ‘죄’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참 다양한 층위의 현실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죄’라는 말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 용어들은 인류의 장구한 역사적 경험과 존재론적 경험이 켜켜이 쌓여 있는 주름 잡힌 말들입니다. 그것을 펴서 매끄러운 말로 바꾸는 것은 오히려 해석학적 낭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우리가 흔히 간과하고 있던 죄의 공동체적 혹은 사회적 차원을 강조해주셨습니다. 그것은 오늘의 한국교회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펼쳐 보이신 역사 전망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자본이 경제 발전을 주도하던 시대는 이제 지나가고 사람의 노동이 주도하는 시대로 이행하고 있다고 진단하셨지요? 물론 이행의 조짐은 미약하지만 결국 그렇게 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절로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비인간화의 길로 사람을 몰아대는 자본을 횡포를 향해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이 늘어나야 하고, 인간 영혼의 선함을 굳게 신뢰하는 이들이 많아져야 할 겁니다. 저는 그런 신뢰의 밑절미에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의 힘을 굳게 믿는 이들이 본다면 세상모르는 이들의 설레발이라고 우리를 비웃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비웃거나 말거나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보고 있는 셈입니다. 김지하 선생의 시 <틈>이 떠오릅니다. 시인은 아파트 사이 빈 틈으로 불어오는 꽃샘바람을 맞습니다. 아파트를 거쳐온 그 바람은 사람의 몸속에도 꽃눈을 틔웁니다. 시인은 ‘갇힌 삶에도/봄 오는 것은/빈 틈 때문’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새일은 늘/틈에서 벌어진다’고 말합니다. 시인이 말하는 ‘틈’은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의 말로 옮기면 ‘꿈’이 되겠지요?


세상 다시 그리기


선생님은 제가 마음에 그리고 있는 사회의 모습이 어떠한가 물으셨습니다. 그 질문을 듣는 순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소망을 품고 애굽을 떠났던 히브리 공동체가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 채 노예노동을 숙명처럼 여기고 살던 이들에게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리며 사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불어넣으셨습니다. 폭언과 채찍 아래에서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허덕이던 그들은 새로운 삶을 찾아 광야로 나갔습니다. 삶의 조건은 엄혹했지만 그들은 주체적인 인간으로 형성되어 갔습니다. 애굽에서 준비해 간 음식이 떨어져 난감할 때는 하늘에서 내린 음식으로 배를 불렸고, 소유와 축적이 무의미함도 배웠습니다. 마실 물이 없어 허덕일 때는 반석에서 터져 나온 생수로 마른 목을 축였습니다.


누구나 다 아는 출애굽 이야기를 하고 있는 까닭은 지금 우리의 형편이 애굽의 상황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로는 지금도 우리 곁에 있고, 할당량․폭언․채찍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책상 빼’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의 정신은 점점 왜소해집니다. 사람의 정신을 왜소하게 만드는 세상은 살기 좋은 세상일 수 없습니다. 교회는 대안적인 삶을 가리켜 보이는 이정표가 되어야 합니다. 나눔과 섬김과 돌봄과 아낌에 근거한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표지가 되어야 합니다. 자본주의의 논리를 내면화하고는 성공신화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주전 8세기의 예언자 이사야의 꿈도 떠오릅니다. 그는 앗시리아 제국의 야욕으로 인해 지중해 세계가 뒤흔들리고 있을 때 현실과는 전혀 다른 세상의 꿈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었습니다. 그 꿈은 현실의 고통을 잊도록 해주는 미약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의 각박함 속에서 마음이 피폐해지지 않도록 해주는 닻입니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이사야 11:6-8).


이사야는 몽상가가 아닙니다. 그는 현실 논리에 매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가슴에 하늘의 불씨를 심었던 것입니다. 폭력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는 것 자체가 이미 혁명입니다.


예수의 겨자풀 천국도 떠오릅니다. 모두가 백향목처럼 우뚝한 존재가 되라고 가르치고 또 그렇게 되고 싶어 안달이 난 세상에서 예수는 겨자풀의 나라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백향목 세상은 몇몇 특권적인 사람에게만 천국이고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지옥인 세상이라면 겨자풀 세상은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특색에 따라 살아가면서도 그 때문에 주눅 들지 않아도 되는 세상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꿈을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은유를 통해 펼치고 있습니다. 몸의 지체는 많지만 그들이 모두 한 몸이듯이 신앙 공동체도 그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볼품없는 지체들이야말로 가장 소중히 여겨져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나라도 역시 마찬가지이겠지요. 정파적 이해관계를 떠나 가난한 이들이 굴욕감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사회 제도를 만들자는 제안을 복지 포퓰리즘이라고 매도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셈입니다.


종교, 문화, 경작의 종합


제가 그리고 있는 새로운 나라 혹은 사회의 모습은 비현실적이거나 추상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그런 나라 혹은 세상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가늠할 능력은 제게 없습니다. 하지만 지향이 분명하다면 길은 저절로 나타날 것입니다. 홀로는 걸을 수 없는 길이기에 벗들이 필요합니다. 부산을 향해 내달리던 희망 버스는 그 자체로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몇 해 전 도로시 데이의 《고백》을 읽다가 눈이 번쩍 떠지는 한 구절과 만났습니다. 미국 가톨릭 운동사의 한 획을 그었던 도로시 데이는 ‘사람들이 더 쉽게 선해질 수 있는 사회’를 꿈꿨습니다. 이것은 피터 모린이 도로시의 가슴에 심어준 꿈이기도 했는데, 그런 세상의 모습을 도로시 데이는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피터는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들, 위대한 꿈을 꾸는 사람들을 보며 크게 기뻐했다. 그는 모두가 형제들을 향해 두 팔을 벌리기를 소망했다. 그의 생각에는 형제들이야말로 하나님과 선을 발견하는 가장 확실한 도구였다. 그래서 형제들을 향한 이 노력이 더 나은 물질적 삶으로 이어지기를 원했다. 스스로의 자질을 발휘하고 모든 예술에서 표현되는 사랑과 찬미의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정도의 물질적 삶, 그는 모든 사람이 음식이나 옷과 같이 집에서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생산하며, 적어도 이러한 생필품에 관한 한 결핍을 겪지 않기를 원했다. 그는 내게 이와 관련한 비전을 심어 주려고 노력하면서, 그 원대한 계획을 ‘종교, 문화, 경작’의 종합이라고 불렀다.”(도로시 데이, 《고백》, 302쪽)


어쩌면 도로시 데이의 꿈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꿈을 구체적인 현실로 번역해내기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야 합니다. 종교, 문화, 경작을 종합할 수 있는 통섭의 능력은 홀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충동과 감상에 사로잡혀 글이 종잡을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선생님과 저는 출발점은 다르지만 새로운 세상이라는 하나의 중심을 향해 함께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든든합니다. 이제 이 장마가 지나고 나면 불볕더위가 찾아오겠지요? 그러면 또다시 소나기가 그리워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라고 노래했던 고정희의 절창이 더욱 새롭게 느껴지는 나날입니다. 내내 건강하십시오.


편집자 주/이글은 김기석 목사, 손석춘 선생 두 분이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책《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중의 일부이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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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톺아보기(23)


교회는 자동세탁기가 아니다



손석춘 선생님, 뵌 지 오래되었습니다. 경칩에서 춘분을 향해가는 이즈음 봄기운을 잘 타고 계신지요? 며칠 전 저는 겨우내 입었던 내복을 벗었는데, 그 때문인지 몸에 한기가 들어 잔뜩 옹송그린 채 책상 앞에 앉아 있습니다. 부실하기 이를 데 없는 저의 몸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래도 매일 물이 오르고 있는 산수유나무와 개나리와 눈맞춤하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어 흘낏흘낏 창밖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잠포록한 날씨 탓인지 제가 늘 눈길을 주고 말을 건네는 삼각산이 지금은 보이지 않습니다. 높은 빌딩과 거대한 크레인만이 제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있음’과 ‘없음’의 경계가 무엇인가가 새삼 떠올랐습니다.


요 며칠 만나는 사람마다 일본 동북부에서 일어난 지진과 해일에 대해 말했습니다. 누구라도 그 압도적인 재해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식탁머리에서 제 딸이 혼잣소리처럼 말하더군요. “이런 일을 겪고 보면 사람이 아득바득 용을 쓰며 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아직 젊은 딸의 그런 처연한 깨달음에 살짝 가슴이 아팠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유동하는 공포’를 말하지만, 우리가 실은 흔들리는 터전 위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새삼 과욕의 부질없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일본의 지진과 쓰나미를 보면서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춘추천국시대의 현인 노자가 쓴 말로 하늘과 땅은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일 겁니다. 그런데 오늘 재해 앞에 선 사람들은 이 말에서 자연의 맹목적 폭력을 보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는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이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복음 5:45b)고 말했습니다. 이런 판단은 잘났건 못났건 모두가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근본적 인식에서 비롯된 것일 겁니다. 어찌 하나님이 기독교인만의 하나님이겠습니까? 모두가 다 기가 막한 그분의 자식인 걸요. 저는 이 말씀이야말로 종교적, 인종적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새겨 들어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오래 전 라오서(老舍)의 소설 《루어투어 시앙쯔》를 읽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비가 가난한 이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이야기합니다.


“비가 개인 후에, 시인들은 연잎의 구슬과 쌍무지개를 읊조리지만; 가난뱅이들은 어른이 병이 나면 온 식구가 굶는다. 한 차례의 비는 기녀나 좀도둑을 몇명이나 더 보태주는지, 감옥에 들어가는 사람을 얼마나 내는지 모른다. 어른이 병들면, 아이들에게는 도둑질이나 몸을 파는 것이 굶는 것보다 훨씬 낫기 때문이다. 비는 부자에게도 가난뱅이에게도 내린다. 의로운 사람에게도, 의롭지 않은 사람에게도 내린다. 그러나 실은 비는 결코 공평하지 않다. 공평함이 없는 세상에 내리기 때문이다.”(라오서, 《루어투어 시앙쯔》, 1986, 통나무, 495쪽)


공평함이 없는 세상에 내리는 비는 결코 공평하지 않다는 말은 정의의 문제에 민감했던 80년 대 중반의 제게 쇠북소리처럼 쟁쟁하게 울려왔습니다. 어쩌면 성경을 보는 새로운 관점 하나를 얻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야기가 곁길로 갔습니다만 저는 지진과 쓰나미가 일본의 동쪽 해안지대를 초토화시켰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기도 전에 먼저 떠오른 것이 있습니다. ‘큰 종을 자처하는 목사들의 망언이 터져나오는 것은 아닐까?’ 2004년에 쓰나미가 남아시아를 휩쓸었을 때, 2005년에 허리케인 카타리나가 미국의 뉴 올리온스를 덮쳤을 때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서울의 어느 유력한 교회 목사는 그 두 사건을 모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 대한 심판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저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너무나 분노하여 그를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괴물로 변한 영혼이라고 질타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같은 해석이 나오는 것을 보고 저는 깊은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인물로 여겨지는 한 원로목사는 이 사건을 보며 마음이 아프다고 말하면서도, 신앙적으로 보면 일본 사람들이 하나님을 멀리 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지나치게 물질주의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내신 경고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의 말속에 담긴 무지와 정신적 오만함에 소스라쳐 놀랄 수밖에 없었고, 그릇된 종교적 신념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도 절감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 혹은 이웃에게 닥쳐온 불행에 대해 해석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 해석이 가능할 때 사람은 그 문제를 처리하고 또 대처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겁니다.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일을 겪을 때면 사람들은 해석을 위한 아르키메데스의 입각점으로 하나님을 동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은 세상의 모든 난제들을 푸는 열쇠어가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은 함부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그 말의 내포와 외연은 늘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소중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는 분들을 만날 때마다 욥의 이야기를 꺼내곤 합니다. 착하고 선한 사람도 고통을 겪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고통의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길흉화복의 인과관계로는 풀리지 않는 일이 세상에는 허다합니다. 자신이 겪어야 했던 불행한 운명도 욥을 괴롭혔지만, 그의 고통을 가중시킨 것은 가까운 친구들의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변호자라도 되는 것처럼 욥을 몰아붙입니다. 욥이 겪는 고통은 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확신에는 인간적 연민이 끼어들 틈조차 없습니다. 그릇된 신학은 우정에 바탕을 둔 세상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욥은 가장 가까웠던 이들도 낯선 사람이 되어 버린 현실을 견딜 수 없습니다.


“나는 피골이 상접하여 뼈만 앙상하게 드러나고, 잇몸으로 겨우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너희는 내 친구들이니, 나를 너무 구박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이 손으로 나를 치셨는데, 어찌하여 너희마저 마치 하나님이라도 된 듯이, 나를 핍박하느냐? 내 몸이 이 꼴인데도, 아직도 성에 차지 않느냐?”(욥기 19:20-22)


욥의 이 탄식이 제 귀에 절절하게 들려옵니다. 큰 불행을 겪을 때마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관습적인 사고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하나님은 계시는가?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인 엘리 비젤(Elie Wiesel)은 하나님이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수용소에 간 첫날 밤 자신의 어머니와 누나의 몸이 소각되는 화장장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훗날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의 신과 나의 영혼을 죽이고 나의 꿈을 재로 만들어버린 그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는 희곡 <하나님에 대한 공판 The Trial of God>에서 놀랍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나찌의 수용소에 갇혀 있던 한 무리의 유대인들이 신을 재판하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상상도 못할 고통 앞에서 신에 대한 기존의 논증들은 아무 설득력이 없음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이 전능하다면 분명 쇼아(Shoah, ‘절멸’을 뜻하는 히브리어)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고, 만약 막을 수 없었다면 신은 무능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막을 수 있었는데도 막지 않았다면 신은 괴물이었습니다. 치열한 논의 끝에 그들은 결국 신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경건한 이들에게는 충격이겠지만, 절망의 심연에 처한 이들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 놀란 것은 그 다음 대목입니다. 재판을 주재한 랍비는 판결을 내린 뒤 저녁 기도 시간이 되었음을 사람들에게 태연하게 알렸습니다. 신에 대한 생각은 변해도 가장 암울한 상황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몸부림을 그만 둘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인간의 인식을 뛰어넘는 여러 일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의 작음과 유한함이 뼈저리게 느껴집니다. 불가해한 삶의 곤경에 직면한 이들에게서 터져 나오는 ‘왜’라는 질문은 사실은 신의 정의를 구하는 외침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것이 구조적 악에 속한 문제라고 한다면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치열한 인식 투쟁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왜'라는 질문에는 대답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런 현실과 상황을 바꾸기는 어렵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번 지진과 쓰나미에 대처하는 일본인들의 의연하고 침착한 태도를 보며 저는 참 많이 놀랐습니다. 그 극도의 혼돈 속에서도 질서를 지키고 감정 표현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며 만일 우리에게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어땠을까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메이와쿠 카케루迷惑はかける’라는 말로 설명하더군요. 그들은 어릴 때부터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고 교육을 받는다고 하지요? 재해를 당한 일본인들이 크게 흐느끼거나 울부짖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은 '내가 그런 행동을 하면 나보다 더 큰 피해를 당한 이들에게 폐가 된다'는 극도의 배려 정신 때문이랍니다. 그런 배려심이 부럽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합니다. ‘남을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아름답지만, 그것이 국가주의와 결합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일본의 심장은 일본의 노래가 말하는 것처럼 벚꽃이 아니라면서 일본의 심장은 후지산이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꺼질 줄 모르는 불, 절제된 방식으로 순결한 눈에 덮인 후지산 말입니다. 후지산이야말로 일본의 진짜 얼굴이라는 것입니다. 저의 의구심이 지나치게 과민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혼돈 속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질서 의식이 경이로웠습니다. 배고픈 다른 이를 위해 음식을 양보하고, 생필품을 살 때도 뒤에 있는 이들을 의식해 적절하게 욕망을 통제하는 모습에서 저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말을 수없이 듣고 또 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자기의 울타리 밖을 사유하지 못합니다. 이게 한국 기독교의 실상입니다. 남의 큰 불행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경고 운운하는 수준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저는 명시적으로 하나님을 고백하지 않으면서도 고통 받는 이들과 연대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을 더 잘 이해하는 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성경을 통해 만난 하나님은 땅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예민하게 반응하시는 분이십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께서 사회 밑바닥에서 신음하는 이들의 울부짖음을 ‘이 땅에 정의를 세워달라’는 기도로 들으신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우리가 땅에서 들려오는 기도의 응답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일에 협력할 이들을 찾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당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나는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게 하겠다.”(출애굽기 3:10)당황한 모세는 자기는 그럴만한 그릇이 되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단 한마디 말씀으로 모세의 망설임을 가라앉힙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이고 또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력함을 느낄 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이념, 인종, 피부색, 종교를 묻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당신의 피조물들이 구체적으로 겪고 있는 고통입니다.





손석춘 선생님,


굉장히 먼 우회로를 거쳐 마침내 선생님이 제게 던지신 질문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주의 기도에서 ‘죄의 용서’라고 번역된 단어가 사실은 ‘빚의 탕감’을 의미할 수 있다는 제 지적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빚의 탕감’이 ‘죄의 용서’로 뒤바뀌게 된 소이연을 물으셨습니다. 정확하게 그 때를 지적하기는 어렵지만 그런 변형 혹은 왜곡의 과정이 왜 일어나는지는 짚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 등장하는 ‘죄의 용서’를 토라의 문맥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공동체와 언약을 맺으시면서 그들에게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라는 소명을 주셨습니다. 율법은 그런 소명을 이루기 위해 주어진 구체적인 지침입니다.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겠지만 저는 율법의 핵심은 안식일, 안식년, 희년으로 이어지는 절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식일을 뜻하는 히브리어 샤바트는 바빌로니아에서 정결례를 하는 날을 지칭하는 샤파투(sappattu 또는 sabattu)에서 나온 것이라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은 그 날을 ‘신의 심장이 쉬는 날’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신도 쉬어야 세상을 잘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히브리어로 샤밧shavat도 ‘그가 쉬었다’는 뜻입니다. 거기서 나온 단어가 바로 샤바트인 것이지요.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생각의 흔적이 보입니다.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라는 말끝에 성서 기자는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이는, 주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이렛날에는 쉬면서 숨을 돌리셨기 때문이다.”(출애굽기 31:17b) 이 마지막 부분을 우리말은 밋밋하게 번역해 놓았지만 그 문자적인 뜻은 ‘그는 자기 영혼을 되찾았다’입니다. 하나님도 좀 쉬셔야 한다면 우리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사실 안식일이 십계명 안에 들어간 것 자체가 놀라운 일입니다. 세상에 ‘쉬라’는 것을 아주 엄중한 종교적 계명으로 삼은 종교가 성서종교 말고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쉼’이 그들에게 그렇게도 중요했던 것은 그들이 제국주의 치하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했던 쓰라린 경험 때문일 겁니다. 제국의 질서 속에서 그들은 사람다운 삶을 영위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의 시간과 몸에 대한 통제권을 갖기 못한 것이 바로 노예살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에 그들은 자기들이 들어가 살게 될 새 땅에서는 몸과 시간에 대한 통제권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겠지요. 안식일 규정을 보면 이 마음이 더욱 확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엿새 동안 일을 하고, 이렛날에는 쉬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의 소와 나귀도 쉴 수 있을 것이며, 너희 여종의 아들과 몸붙여 사는 나그네도 숨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출애굽기 23:12)


안식일 규정은 자유민들만이 아니라 집에서 기르는 가축이나 종살이 하는 사람까지도 하나님의 깊은 관심의 대상임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나중에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율법주의적으로 규정하면서 그 깊은 뜻을 잃어 그렇지 안식일 법은 인권법, 아니 생명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안식년 규정은 안식일에 비해 훨씬 더 깊은 사회적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앞에서 라오서를 인용하며 말씀드린 바와 마찬가지로 공평함이 없는 세상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생존권은 늘 위협받게 마련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빚을 얻고 이자조차 갚지 못해 결국 땅과 재산을 채권자에게 넘겨주고, 나중에는 종으로 전락하는 것이 가난한 이들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런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주기적으로 그런 세상 현실을 갱신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요즘 들어 이익 공유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어느 재벌가의 총수가 그런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는 화가 나더군요. 정말 뻔뻔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누려야 할 공공재를 사유화하고 노동자들의 몫을 가로채 부를 얻은 사람의 말이었기에 더욱 화가 났습니다. 그의 말은 하나님에 대한 부정입니다. 출애굽기나 레위기에 나오는 안식년 규정은 땅의 휴경을 강조합니다.





“여섯 해 동안은 밭에 씨를 뿌려서, 그 소출을 거두어들이고, 일곱째 해에는, 땅을 놀리고 묵혀서 거기서 자라는 것은 무엇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먹게 하고, 그렇게 하고도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게 해야 한다.”(출애굽기 23:11, 레위기 25:7).


여기서도 하나님의 관심사는 ‘가난한 사람들’과 ‘들짐승’입니다.


하지만 신명기서에 나오는 안식년 법은 초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빚의 면제와 종의 해방입니다. 오늘의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도무지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을 성경은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일에 성경은 매우 급진적입니다. 먼저 빚의 면제 혹은 탕감에 대한 규정을 보겠습니다.


“매 칠 년 끝에 그 해의 끝에 빚을 면제하여 주어라. 면제 규례는 이러하다. 누구든지 이웃에게 돈을 꾸어 준 사람은 그 빚을 면제하여 주어라. 주께서 면제를 선포하였기 때문에 이웃이나 친족에게 빚을 갚으라고 다그쳐서는 안 된다.”(레위기 15:1-2)


빚을 면제해주는 해가 가까이 왔다고 하여 인색한 마음으로 친족을 냉대하거나 아무것도 꾸어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무안을 당한 이가 주께 호소하면 그것이 그에게 죄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빚을 갚지 못해 결국 종으로 팔려간 사람들도 일곱 해 째 되는 해에는 자유민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유를 주어서 내보낼 때에는 빈 손으로 내보내서는 안 됩니다.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대로, 너희의 양 떼와 타작마당에서 거둔 것과 포도주 틀에서 짜낸 것을 그에게 넉넉하게 주어서 내보내야 한다.”(신명기 15:14)


부자들로서는 참 받아들이기 싫은 요구였을 겁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들이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한 것과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거기에서 구속하여 주신 것을 생각하여라.”(신명기 15:15a)


하나님의 말씀을 금과옥조로 여긴다고 말하는 이들조차 이런 급진적인 요구를 슬그머니 외면해버리고 맙니다. 대학문을 나서는 순간 빚쟁이가 되어버리는 젊은이들, 저임금에 시달리며 언제 쫓겨날지 몰라 늘 전전긍긍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을 이 말씀에 비추어보면 오늘의 교회가 얼마나 성서 정신으로부터 멀어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희년법은 안식년 법의 확장입니다. 안식년 법에 나오지 않는 한 가지는 빚에 몰려 채권자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던 땅을 원주인에게 주라는 명령입니다. 희년법이 이스라엘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실제로 시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습니다. 하지만 안식일, 안식년, 희년을 일이관지하는 정신이 있다면 그것은 정의의 회복입니다. 물론 그 정의는 사법적 정의라기보다는 분배적 정의겠지요.


저는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죄의 용서’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복음사가인 누가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무렵 나사렛의 회당에 들어가서 이사야가 들려주는 주님의 은혜의 해, 곧 희년이 바로 오늘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셨습니다(누가복음 4:18-21). 예수님의 사회적 비전이 희년에 맞닿아있는 것이 사실일진대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서 '죄의 용서'라고 번역된 대목이 ‘빚의 탕감’을 가리키고 있음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 아닐까요?


이제 선생님의 두 번째 질문에 대답해야 할 차례입니다. ‘빚의 탕감’을 ‘죄의 용서’로 바꾼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셨지요? 전문 신학자가 아닌 제게 이 질문은 사실 감당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매우 버겁습니다. 성경의 전승사나 교회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샅샅이 살필 능력이 제게는 없습니다. 하지만 ‘빚’을 뜻하는 단어 속에 이미 ‘죄’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었고, 복음서 안에서 이미 그러한 의미의 뒤섞임이 있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빚’이 ‘잘못’이 되고, ‘잘못’이 다시 ‘죄’로 바꾸는 의미의 진화과정을 우리는 성경에서 이미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사에서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논의가 거듭되면서 예수의 가르침이 정신화되고 추상화된 과정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또 다시 우회로를 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번 편지에서 선생님은 언론의 현실이 우리의 인식을 어떻게 왜곡하는지, 그리고 언론이 권력이 될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나는지, 언론의 타락이 어떻게 자본의 욕망과 유착되어 있는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지적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 길을 읽으면서 ‘언론’의 자리에 ‘기독교’라는 말을 대입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쩜 그리도 똑같은지요? 종교적 담론이 지배를 위한 수단으로 전위될 때, 종교가 자본의 욕망과 유착될 때, 종교의 쇠락은 시작됩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는 많은 이들에게 걸림돌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에게 예수는 낯설고도 위험한 가르침을 베푸는 걸림돌이었고, 그의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에게 걸림돌이었고, 승리주의를 거부함으로써 제자들의 걸림돌이 되었고, 죄인과 세리를 변호하심으로써 경건하다는 사람들과 민족주의자들의 걸림돌이 되셨고, 여인들과 스스럼없이 대화하셨기에 사회적 통념에 따라 살아가는 이들의 걸림돌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지금 행세깨나 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걸림돌이 아닙니다.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를 죄짓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기 목에 연자맷돌을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나을 것이다”(누가복음 17:2) 하셨던 예수는 교회 안에서 더 이상 그렇게 격렬하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아니, 말씀을 하지 않는 것은 예수가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전하도록 택함받은 목사들입니다. 그리고 성공의 사다리에 오르는 것을 하늘이 내린 복으로 여기는 성도들도 그러한 입막음의 동조자들입니다.


어느 분이 교회를 가리켜 ‘죄 경영’(Sin management)을 하는 사업장으로 표현하는 것을 듣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너무 쉽게 용서를 선언하고, 삶의 변화 없이 너무나 가뿐하게 마음의 무거움을 덜어버리는 교인들의 모습이 도무지 마뜩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최승호 시인의 <때밀이수건>이라는 시를 떠올렸습니다.


살이 얼마나 질긴지

때밀이수건에 먼저 구멍이 났다.

무명(無明)은 또 얼마나 질긴지

돌비누 같은 경(經)으로 문질러도

무명에 거품 일지 않는다.

주일(主日)이면

꿍쳐둔 속옷 같은 죄들을 안고

멋진 옷차림으로 간편한 세탁기 같은 교회에

속죄하러 몰려가는 양(羊)들.

세탁비를 받으라, 성직자여

때 밀어 달라고 밀려드는 게으른 양떼에게

말하라, 너희 때를 이젠 너희가 씻고

속옷도 좀 손수 빨아 입으라고.

제 몸 씻을 새 없는 성자(聖者)들이 불쌍하다.

그들의 때 묻은 성의(聖衣)는 누가 빠는지.


-<때밀이수건> 중에서


시인의 표현에 거침이 없습니다. 불경스럽게까지 들리는 시인의 언어를 타박하기보다는 그것을 거울로 삼아 스스로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삶의 변화가 없는 데도 속죄를 선언하는 교회를 가리켜 시인은 ‘간편한 세탁기’같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별다른 가책조차 없이 꿍쳐둔 속옷 같은 죄들을 안고 교회를 찾아갑니다. ‘빚의 탕감’이 ‘죄의 용서’로 환치되는 순간부터 빚어진 참상입니다. 이런 환치의 역사는 교회가 불의한 현실에 저항하기를 포기한 때부터 시작되어, 권력과 결탁하여 성장한 콘스탄틴 대제 이후 가속화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종교 권력자들은 기독교를 탈역사화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자기들의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가 욕망에 기초한 문화적 흐름을 거스르지 않을 때 기독교의 생명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 절기로 사순절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마다 아주 가끔이나마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인간을 마술적으로 구원하기 위한 속죄의 죽음으로만 보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교우들에게 예수도 우리처럼 평범한 행복을 원했던 분임을 잊지 말라고 말하곤 합니다. 사실 그 말은 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손석춘 선생님,


저는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앓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안쓰러운 생각에 가끔은 한눈도 팔며 살라고 말합니다. 너무 몰두하다가 소진되거나 거칠어질까 염려가 되기 때문입니다. 외람되지만 선생님께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불의한 현실에 대해 분노도 해야 하고, 바로 잡기 위해 투쟁도 해야 하지만, 그래도 더러 한눈도 좀 팔아보십시오. 벗들을 만나 더러 허튼소리도 해보고, 숲의 고요함 속에 머물기도 하십시오. 봄이 되면 꽃은 피어나듯이, 세월이 제 아무리 수상해도 선생님의 가슴에도 싱그런 꽃 한 송이 소담하게 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평화를 빕니다.


편집자 주

이글은 김기석 목사, 손석춘 선생 두 분이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책《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중의 일부이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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