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영의 구약 지혜서 산책(15)


“음녀”도 “이방계집”도 아니에요


기존 언어에 동의하지 않고 말하는 것, 용기를 필요로 한다. 더군다나 그 언어가 소수의 목소리일 때는 비난 받을 각오까지 한다. 힘의 위계질서에서 약자의 말은 묵살당하기 쉽다. 약자의 말이 타당성을 얻으려면 설명과 증명이 필요하다. 연일 쏟아지는 ‘미투’(Me too)운동을 보며 마음이 무겁다. 용감히 나서 잘못된 사회를 고발하는 목소리를 응원하면서도, 돌덩이를 안고 있는 것처럼 무겁다.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느껴서다. 성폭력 피해 여성들 문제는 우리 사회의 그릇된 성의식 문제만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열려있어야 할 공적인 자리가 여전히 권력사회의 강자인 남성중심의 편파적 권력구조가 빚어낸 불합리성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최고 엘리트 집단인 검사 조직만이 아니라 비정규직 청소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집단 내부의 크고 작은 권력은 여성을 소외시킨 남성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도 그렇다. 다수가 여자 성도들로 구성된 한국교회지만 제도권 교회의 권력 상층부는 학벌이나 재력을 동원한 남자들을 위한 권력 재편의 자리다. 건전하고 건강한 교회를 위해 여기저기 교계의 변화와 개선을 외치는 소수의 남녀 목소리들이 있지만, 제도권 교회의 힘 있는 남자들은 꿈적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작은 목소리들이 모아지고 또 모아지면, 더디더라도 변화의 새벽은 올 것이다.


말이 길어졌다. 본래 구약성경 〈잠언〉 본문 중에서 불편한 번역, 여성비하처럼 소비될만한 말이 발견되어 짚어보려 했다. 잠언은 복잡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질문하고 깨닫기 위해 지혜 추구를 목표하는 책이다. 잠언은 실용적이면서도 교육적이고 신앙적인 성격이 강하다. 무엇보다 ‘주님 경외’(잠언 1:7; 9:10)라는 신학화된 개념이 가장 센 억양이다. 지혜는 인간을 밝게 비추어 자신을 깨닫게 하는 것이어서 지혜 추구의 목소리가 잠언 전반부에서(1-9장) 유력하게 드러난다. 지혜가 진귀한 귀금속들보다 귀하고 그 어떤 것보다 가치 있고, 장수와 부귀, 즐거움, 행복, 그리고 ‘샬롬’, 곧 완전한 복지를 약속하기 때문이다(3:13-17). 더군다나 지혜는 태초에 하나님이 우주를 조성하실 때, 최고의 조력자였다(3:19-20; 8:22-31). 이 때문에 고대 이스라엘의 부모(또는 지혜 선생)는 아들에게 지혜 추구를 촉구한다.



그런데 지혜 추구와 그 유익을 말하는 본문에서 불편한 낱말이 포착된다. “음녀”와 “이방계집”(2:16; 5:20 개역개정)이라는 말이다. 이 둘은 본래의 히브리말 뜻을 과도하게 해석한 번역자의 통념이 반영되었다. 한국기독교가 가장 많이 애독하는 성경을 비교해봤다.


지혜가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2:16, 개역개정)


지혜가 너를 음란한 여자에게서 건져주고

너를 꿰는 부정한 여자에게서 건져줄 것이다

(2:16, 새번역)


또 슬기는 너를 낯선 여자에게서,

매끄러운 말을 하는 낯모르는 여자에게서 구해준다.

(한국천주교 성경, 2:16)


개역개정과 새번역 성경은 다른 듯 비슷하지만, 천주교 성경은 많이 다르다. 그러면 “음녀”와 “이방계집”(개역개정), “음란한 여자”와 “부정한 여자”(새번역), “낯선 여자”와 “낯모르는 여자”(천주교 성경)가 어떻게 다른가? 사전적인 뜻을 따지기 전에 번역어의 뉘앙스 차이가 마음에 먼저 도착한다. 개역개정과 새번역의 공통점은 성적으로 부도덕한 성향의 여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강의 중에 학생들에게도 “음녀”의 뜻을 질문했다. 음란하고 부정한 여자나 창녀 또는 매춘부라는 답이 돌아왔다. “음녀”라는 말은 이미 음탕한 여자 정도의 성적인 의미로 수용되었기에 도덕적인 판단이 내려진 답변이다.


그러면 자기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창녀가 “음녀”인가? 아니다. “음녀”로 번역된 ‘잇샤 자라’는 ‘낯선(생소한) 여자’, ‘이방 여자’, ‘다른 여자’,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여자’를 뜻한다. 천주교 성경이 히브리말을 그대로 번역한 셈이다. 익숙하지 않은 ‘낯선’ 또는 ‘타국의’, ‘다른’, ‘불법의, ‘금지된’ 이라는 히브리말 여성 형용사 ‘자라’가 구약 다른 본문에서 성적인 모티프로 사용된 예는 없다. 그럼에도 성적인 부도덕성을 함축한 말로 번역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후 17절에서 ‘낯선 여자’를 설명할 때, 젊은 시절의 짝을 버리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2:17)라는 말에 근거한 것일까? 그렇다면 젊은 시절의 남편과 이혼한 모든 여자는 부정하고 음란하고, 음탕한 여자인가?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음녀”라는 번역은 여성을 대상화하는 성적인 모티프에 강세를 준 셈인데, “음녀의 입술”(5:3), “음녀”, “이방계집”(5:20), “음녀의 골목”(7:8)으로 반복된다. ‘창녀’를 언급하는 히브리말 ‘잇샤 조나’(6:26)라는 말이 있지만, 똑같이 “음녀”(개역개정)로 번역하여 ‘낯선 여자’(‘잇샤 자라’)와의 구별을 없앴다. 더군다나 단지 ‘한 남자의 아내’ 그러니까 ‘다른 남자의 아내’(6:26)를 뜻하는 ‘에쉐트 이쉬’를 “음란한 여자”(새번역), “음란한 여인”(개역개정)으로 번역했다. 설령 이것이 시행 첫 소절의 “창녀”와 동의적인 평행관계를 고려한 것이라 해도, 본래 언어의 뜻을 삭제한 번역자의 해석이 강하게 적용된 셈이다.


그러나 “음녀”로 번역된 본문의 맥락은 지혜를 추구하고, 여호와 경외를 요청하면서(2:1-11), ‘악한 길’에 있는 남자와 패역을 말하는 남자에게서 지혜가 보호해 줄 것이라는(2:12-15) 조언의 문맥을 이어간다. “음녀”로 번역된 ‘잇샤 자라’(낯선 여자‘)는 합법적인 관계 밖에 있는 여자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니까 허락되지 않은 금지된 관계로서, 다른 남자의 아내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다른’, 또는 ‘금지된’ 이라는 말의 위험성이 레위기 본문에서도 발견된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성막에서 여호와가 명령하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여호와의 불이 나와 죽었다(레위기10:1). 금지된 “다른” 불은 생명을 앗아갈 정도였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부모(또는 지혜 선생)가 아들을 교훈하며 “남의 아내와 통간 하는 자”(7:29), “여인과 간음하는 자”(7:32)를 언급한 것처럼, 합법적인 아내 이외의 “다른” 여자와의 관계가 가져올 위험성을 언급한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음녀”로 번역하면, 조언을 듣는 아들, 혹은 남자는 여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로 개념화시키기 쉽다. 또 신앙의 독자가 “음녀”를 창녀로 이해하면, 이 구절을 돈으로 거래되는 성관계 금지 교훈으로만 축소시켜 오해할 수 있다.


“이방계집”(2:16; 5:20, 개역개정)의 번역도 문제다. 여성비하적인 표현이다. “계집”은 여자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그러면 본래 히브리말도 여자를 낮추는 저속한 말로 기록되었나? 아니다. “음녀”라고 번역된 말이 본래 자기 아내를 제외한 합법적인 관계 밖의 여자, 낯선 여자, 혹은 생소한 타국인 여자를 일컫는 것처럼, “이방계집”은 히브리말 ‘노흐리야’라는 말로서 ‘낯선’, ‘이방의’, ‘타국의’라는 뜻의 여성 형용사다. 첫 소절의 ‘여자’(‘잇샤’)가 생략되었지만, 단지 ‘낯선 여자’, 또는 ‘이방 여자’라는 말이다. 이방 여자를 낮잡아 보는 속어, “계집”이라는 말이 아니다. “이방계집”이라는 말은 타국인 여자를 낮추어 대해도 괜찮은 것처럼 생각되지 않겠는가? 언어 사용과 표현에는 통념이나 지배 이데올로기가 자리 잡고 있어서 암암리에 권력관계로 묶이거나 폭력이 되기도 한다. 언어 선택의 신중함과 적실성이 고려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음녀”와 “이방계집”이라는 말이 이후 개정작업에서 논의되길 바란다. 단지 이 두 개의 낱말 이외에도 다양한 고대 사본들과 역본들의 장구한 역사를 거쳐 우리말 성경에 이르기까지 번역의 과정에서 말 못할 사정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구약의 오경이 기록되었을 시점부터 지금까지 350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최초의 기록 언어와 지금 언어 사이의 시간적, 공간적, 지리적,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그 간격을 번역으로 메꾸는 것은 간단치 않다. 성경을 현재의 수용 언어로 번역하는 기술적이고 예술적인 문제는 다양한 간격과 무게를 아는 학자들의 치밀한 연구뿐만 아니라 남녀학자들의 동등한 협업을 통해 좀 더 섬세하고 세심한 성경번역의 열매를 기대할 수 있지 않겠는가.


김순영/ 《어찌하여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저자, 대학원과 아카데미에서 구약 지혜서를 강의하며 신학과 현실의 밀착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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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지혜서 산책(14)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가?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하나님은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실까.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 구별 없이 느닷없이 닥치는 자연 재해나 대형 참사들, 그리고 대학살(홀로코스트)같은 어마어마한 고통을 어떻게 설명할까. 때때로 인생과 세상사는 인간의 빛나는 지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봉착하곤 한다. 때문에 누군가는 고통과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 사이에서 방황한다.


해롤드 쿠슈너(Harold S. Kushner)라는 랍비는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 때』(When Bad things Happen to Good People)라는 자전적인 이야기를 책으로 남겼다. 8개월 된 아들 아론의 ‘조로증’ 때문에 겪었던 고통과 내면의 문제들을 진솔하게 표현했다. 젊은 랍비는 인생의 고통의 경험이 많지 않았지만, 아들의 질병 때문에 무자비한 시간을 견딘다. 그는 아들의 질병이 조로증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듣고,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어”라며 몇 번을 되 내었다. 그러고서 그는 아들 아론을 위해 생일 마다 축하파티를 열지만, 젊은 랍비 부부에게 아들의 생일잔치는 아들의 살아갈 날이 줄어드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부부는 부모보다 먼저 늙어가는 아들을 바라보아야 했던 순간들을 견뎌야했다. 그리고 끝내 아들 아론은 14번째 생일 이틀을 앞두고 부모 곁을 떠났다(1963-1977). 젊은 랍비가 아들을 회고하며 책을 쓴 이유는 단순했다. 고통에 대한 전문적인 신학적 해석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고통을 무시하려는 것도 아니고, 단지 아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젊은 랍비는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악이 발생하는지를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고통의 문제를 자신의 신학적인 지식으로 설명하려들지 않았고, 고통의 신비를 그대로 남겨두었다.


지극히 의로웠던 의인 욥에게(욥기 1:1), 생애 어떤 날도 부끄럽지 않기를(27:6) 원했던 그에게 닥친 재앙들은 완벽했던 그의 삶을 산산조각 냈다. 경건한 욥은 왜 자신에게 이러한 고통이 닥쳤는지 알 수 없었다. 흔들림 없이 견고했던 욥은 끔찍한 육체적 고통과 사회적인 고립 앞에서 자기 생일을 저주하며 죽음을 갈망하기에 이른다(3장). 열 명의 자녀들이 혹시 모를 마음의 죄까지 염려하며 번제를 드릴정도로(1:5) 신중했던 그였지만, 아니 너무 지나치게 강박적 신앙인 같았던 그였지만, 그도 흔들렸다. 죽기를 갈망하며 자신을 저주하는 욥의 탄식 앞에서 욥의 친구들은 인간의 고통은 죄 때문이라는 판단을 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더군다나 친구들은 욥의 죄를 집요하게 추궁했다. 도시의 오물더미처럼 버려진 욥이(2;8) 깨진 우정 앞에서 얼마나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끝까지 그는 자신의 결백 주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도 하나님은 왜 충실한 종에게 고통을 허락하셨는지, 고통은 죄의 결과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고통의 원인자는 하나님


하늘 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욥이지만, 적어도 자기의 고통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의 말은 과감하다. 솔직하다.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6:4, 개역개정)


욥은 자신이 전능자의 원수 같다고 느낀다. ‘욥’이라는 이름의 뜻이 ‘핍박 받는 자’, ‘미움을 받는 자’, ‘대적자’라는 뜻 말도고 다양하게 전해지긴 하지만, 그의 이름이 그의 존재 자체가 된 셈이다. 욥은 고통당하며 친구로부터 위로를 얻지 못하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최후의 은총을 기대할 뿐이다. 거룩하신 분의 말을 거역하지 않았다고 당당히 말하는(6:10) 욥. 친구들은 이런 욥이 건방져 보인다.


욥도 자신이 왜 고통당하는지 이유를 알고 싶다. 친구들의 집요한 추궁, 숨 막히듯 조여드는 통증의 괴로움, 깨진 우정의 상처는 하나님을 향해 거침없는 항의로 이어졌다. 욥은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 사이의 긴장 속에서 양가적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그는 하나님을 규탄하면서 동시에 절대적인 통치자 하나님을 찾는다. 욥은 왜입니까? 라고 묻기도 한다(7:20).


사람을 살피시는 주님,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하여

주님께서 무슨 해라도 입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주님의 과녁으로 삼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주님의 짐으로 생각하십니까?

(7:20, 새번역)


욥은 고통을 견디며 하나님을 향해 질문하지만, 친구들은 다르다. 고통이 하나님의 심판과 정의라고 확고하게 믿는 빌닷은 전통주의자였고, 신학적인 전통이 모든 것을 구원할 것처럼 말했다. 빌닷은 욥에게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우라’(8:8) 한다. 빌닷의 말처럼 지혜 전통과 유산은 귀하다. 하지만 그 유산을 빛내줄 새로움이 없다면 전통주의만 남을 뿐이다. 기독교 역사학자 야로슬라프 펠리칸(Jaroslav Jan Pelikan, 1923-2006)이 “전통은 죽은 자들의 살아 있는 믿음이지만, 전통주의는 살아 있는 자들의 죽은 믿음”이라고 했던 한 문장, 깊이 새겨 봄직하다. 전통은 새로운 환경에서 재해석되지 않으면 가치를 잃게 된다.


빌닷은 욥에게 청결하고 정직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돌보실 것이고(8:6),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9, 개역개정) 말하기도 했다. 너무도 유명한 이 한마디! 말 자체는 그럴듯하지만, 아무리 좋은 말도 때에 맞는 말이어야 가치 있는 법. 욥에게 어떤 위로도 주지 못하는 친구들의 말 말 말! 욥은 친구들이 가하는 보응교리 때문에 괴로워하며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가 없음을 탄식한다(9:32-33). 욥의 솔직한 발언을 문제 삼아 친구 소발도 회개를 촉구한다(11장). 친구들에게 욥은 고난당하는 자가 아니라 죄인이다. 그러니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11:14) 그러면 ‘네 생명의 날이 대낮처럼 밝은 것이라’(11:17)는 등등의 약속을 한다. 엘리바스도 욥에게 회개하면, 겸손하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며 약속의 말들을(22:21-30) 쏟아낸다.


욥의 친구들처럼 우리가 한 가지 신학적인 확신만 있다면, 그런데 그 확신이 틀렸다면 어떡할까?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신비한 일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죄 없이 참혹한 십자가의 고난을 받아들이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욥의 친구들처럼 고난의 신비를 인식할 수 없다면, 내가 아는 진리에만 지나치게 자기 확신에 빠져 모르는 것은 안중에도 없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타인에게 비난과 혐오로 맞대응하게 된다.


경건하고 착한 사람에게 닥치는 곤경을 누가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도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은 것 하나 있다면, 고통은 그것이 어떤 종류이든지 간에 만사가 잘 돌아간다는 환상을 깨고, 사람이 창조자 하나님으로부터 자립할 수 있다는 오만함을 버리는 시간 아닐까. 인간중심적인 사고에 균열을 가져오는 시간 아닐까. 하나님의 손이 짧아 예수님을 십자가의 고통에 그대로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듯, 고난은 하나님의 버려둠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또 하나의 길 아닌가.


김순영/ 《어찌하여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저자, 대학원과 아카데미에서 구약 지혜서를 강의하며 신학과 현실의 밀착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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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 지혜서 산책(13)


지고한 의인 욥과

지혜자 코헬렛이 만났을 때


구약의 지혜서 중 <욥기>와 <전도서>는 구약지혜 전승의 중심이 아니라 주변부의 시각으로 존재한다. 중심을 탈피하고 위계적인 존재 방식을 넘어 대안적인 사유방식으로 존재한다. 구약에서 이 두 권의 책은 모호성과 불가해성으로 독자를 당혹스럽게 하지만, 성급하고 억지스러운 판단과 주장을 피하도록 인내심을 길러준다. 어떤 사태의 복잡성을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거리를 두고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선사한다. 코헬렛(전도자)은 ‘미지’(the unknown)의 세계, 곧 ‘영원’ 안에서 세심하고도 열린 사고를 요청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우주와 역사의 ‘비밀’을 풀고 싶은 열정을 주셨지만, 하나님이 어떻게 일을 시작하셔서 끝내실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전도서 3:11; 8:17). 그러니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의 시나리오 속에서 인간중심적인 사고의 한계를 깨달을 수밖에.


지고한 의인 욥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지혜를 찾을 수 없다고 지혜의 신비를 노래했다(욥기 28장). 광부는 숨겨진 보화를 찾기 위해 어둠과 죽음의 그늘을 뚫고 들어간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이르러 갱도를 파고 보물을 찾는다(28:4). 땅 밑에 숨겨진 청옥과 사금 같은 진귀한 보물들은 어떤 맹금류도 야수도 본 적이 없는 곳에(28:5-8) 묻혀있다. 이 숨겨진 보물들을 발견하기 위해 광부의 손은 단단한 돌들을 헤쳐 산들의 뿌리까지 뒤엎는다(28:9). 위험을 무릅쓴 광부는 ‘강들의 근원’을 파고들어가 보석을 발견하여 밝은 빛으로 가지고 나온다(28:10-11).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인간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 그곳이 지혜의 장소이며, 지혜의 길이다. 사람이 숨겨진 진귀한 보물들을 발견하여 밝은 곳으로 가져올 수 있지만(28:11) 지혜는 아니다.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인고

그 길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는 찾을 수 없구나

(28:12-13, 개역개정)


“깊은 물”(‘테홈’, 28:14; 창세기 1:2), 곧 ‘원시의 바다’도 모른다. 지고한 의인 욥은(1:1, 8; 2:3) 또 묻는다.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이 머무는 곳은 어디인가?(28:20) 그가 말하기를, 지혜는 모든 생물들의 눈에 감추어져 있고, 새들에게도 숨겨져 있다(28:21). 더군다나 파괴와 황폐의 영역으로 알려진 ‘죽은 자들의 세계’도 ‘사망’도 모른다. 영원히 감춰진 지혜를 소문으로만 알뿐이다(28:22). 그러니까 지혜는 살아 있는 것들과 모든 죽은 것들에게도 감춰진 보물이다. 그러면 지혜는 피조세계 너머 어디에 있는 것일까?


윌리엄 블레이크 <욥기> 삽화


욥은 하나님만이 지혜에 이르는 길과 지혜가 있는 곳을 아신다(28:23)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땅 끝과 온 천하를 감찰하시고 살피시니(28:24), 온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 때문이다. 하나님이 지혜에 이르는 길과 장소를 아신다고 하니 사람 사는 땅 어디에 있든지, 아니면 어떤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우주 전체에 널리 퍼져 있는 것인지 모호하다. 그러나 욥이 하나님만 바람의 무게, 바다의 양, 비의 법칙과 번개의 길을 정하신다(28:25-26)라고 노래한 것처럼, 하나님의 지혜는 자연 세계를 보시고, 곧게 세우시고, 탐구하셔서 질서를 세우는 수단이다(28:27; 잠언8:22-31). 지혜의 원천이신 하나님만이 완벽하게 우주를 통제하시고 관리하시니 지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 전체에 널리 퍼져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사람이 지혜를 찾을 수 없다면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욥이 대답해주었다.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28:28, 개역개정)


말하자면 지혜를 얻는 방법은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피하는 삶에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떠나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에 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삶은 잠언을 시작하고 끝맺는 말이요(1:7; 31:30), 코헬렛의 가장 중요한 지혜 실천의 원리이며 덕목이다(전도서 8:12-13; 12:14). 그러니까 지혜는 알려지지 않는 것을 탐구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에서 시작되고 확장된다. 사람의 재능과 탐구능력이 죽음의 세계와 강들의 근원을 찾을 만큼 위대하다고 해도 ‘하나님과의 사귐’이 지혜로 향하는 길이다.


그러나 태곳적 시간, 인류의 첫 커플은 하나님만 아는 비밀의 영역을 넘보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창세기 3:6). 인류는 이후로도 끊임없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창세기 11:1-9). 결국 하나님과의 자유로운 만남은 깨졌다. 인간은 개방된 자유를 선물로 받았지만, 자유는 인간 스스로 넘어지는 시험거리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모세는 임박한 죽음 앞에서 불평으로 얼룩졌던 광야 이스라엘 자손들을 향해 외쳤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신명기 29:29, 개역개정).


하나님이 감추신 것과 나타난 것 사이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가르침’(‘토라’)을 행실로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과의 사귐이요, 창조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리라.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은 삶의 초점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맞추고, 악을 떠나 착함을 도모한다. 지혜는 지식을 축적하는 것도, 비밀을 발견하는 것도 아니다. 지혜는 인간의 범위 안에 존재하는 것이며 착한 행동과 관련된다. 곧 현실에 뿌리 내리지 않은 신학과 실천을 낳지 않는 신앙은 지혜 없는 공허한 외침이다.


그 누구보다 현실세계의 문제점을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 질문했던 두 사람. 고대의 지혜 선생 코헬렛과 하나님이 인정하신 의인 욥이 여기 있다. 이들은 동시대를 살지 않았지만, 공유했던 지혜의 중심 신학이 있었다. 그것은 우주의 창조자 하나님을, 노예적 삶을 살며 억압당하는 자들의 ‘구속자’ 주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 하나 더. 코헬렛이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했다(전도서 7:23)라고 고백한 것처럼,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이 머무는 곳이 아디인지 알 수 없음을 노래한 욥처럼(욥기 28:12, 20), 참 지혜는 세계를 이해함에 있어 인간이 판단의 주체인양 생각하는 인간중심적인 사고의 격파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흰 눈발 날리는 12월의 거리위로 주님 예수의 강림을 기다리는 자들 속에서 천사들의 합창이 들려오는 듯하다. 위대한 지혜가 하늘을 가르고 인간의 땅 위로 내려온다고.


김순영/ 《어찌하여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저자, 대학원과 아카데미에서 구약 지혜서를 강의하며 신학과 현실의 밀착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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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지혜서 산책(12)


나의 말이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새겨졌으면


글 쓰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자기 이름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쓴다. 또 누군가는 입신출세의 길이어서 쓴다.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해 쓰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글을 쓰지 않고서는 못 배기기 때문에 쓴다. 글을 쓰지 않으면 마음속 지병이 되기 때문에 쓰는 이도 있다. 프란츠 카프카(1883-1924)는 쓴다는 것은 기도의 형식과 같다고 했다. 간절한 무엇이 있기에 글을 쓴다는 것인데, 그러면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만을 위한 행위일까? 글쓰기가 자신의 존재이유인 사람도 있지만, 인류에 대한 연민 때문에 글을 쓰는 이도 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글쓰기는 자신의 결백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불멸의 기록이 되기를 염원했던 한 남자를 향한 연민 때문이다.


죽음을 갈망했던 남자


옛날 아주 먼 옛날 ‘우스 땅에’ 욥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살았다(욥기1:1). 그는 사해 남쪽 에돔 지역 어디쯤으로(창세기36:28) 추측되는 우스의 시민이었다. 그의 시대, 지역, 어떤 집안의 사람인지, 이름의 뜻도 정확히 알려진 바 없으나 하나님이 승인하신 당대의 의인이었다(1:1, 16). 자녀는 아들 일곱에 딸 셋이 있었으니(1:2) 이상적이고 완벽한 가족 그 자체다. 그러나 느닷없이 닥친 재난과 불행은 그를 처참한 상태로 몰아갔다. 모든 재산과 자식을 잃고(1:13-19), 심각하고 끔찍한 피부병에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2:7-8). 이것은 하늘 위에서 벌어진 하나님과 사탄과의 일종의 ‘내기’에서 시작된 일 때문이었다(1:8-11). 그러나 하늘 위를 볼 수 없는 욥은 자기의 불행과 육체적인 고통의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래도 그는 불행과 고통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복과 화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고백하며(1:21; 2:10) 순응했던 아버지였고, 남편이었다.


어느 날, 고통당하는 욥을 위로하기 위해 친구들이 찾아 왔다. 친구들은 경악했다. 그들은 처참한 욥의 모습을 보고 일제히 소리 지르며 울고 겉옷까지 찢으며 죽은 자를 애곡하는 의식처럼, 욥의 고통에 동참했다. 친구들은 욥의 처절한 고통에 차마 말도 못하고 칠일 동안 침묵의 시간을 보낸다(2:11-13).


그런데 욥에게 어떤 마음의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욥이 친구들과 긴 침묵의 시간을 보내고 발설한 첫 마디는 ‘자기저주’였다. 욥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며 삶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충격에 휩싸였다. 욥은 태어난 날과 수태되던 밤을 저주했다. 그 밤이 현재 자신이 겪는 슬픔을 막아주지 못했다고 생각해서였다(3:1-10). 욥은 출생 당시 죽지 않아 안식할 수 없었던 것(3:11-19), 그리고 내면에 차오르는 두려움과 비탄은 죽음을 갈구하는 탄식의 소리로 분출했다(3:20-26). 신체적인 고통이 커지면서 고뇌의 깊이도 깊어졌다. 욥은 왜 자신이 끔찍한 고통에 던져졌는지 도무지 답을 구하지 못해 답답했다. 그의 탄식은 숨겨진 자기의 길에서 삶의 방향감각을 잃고 분출하는 믿음을 위한 투쟁이었다. 그는 갑작스러운 재난과 고통을 이해하려고 분투했고, 솟구치는 의문들을 쏟아내며 과감하게 항변했다.


그러나 욥의 항변과 탄식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는 친구들(엘리바스와 빌닷, 소발). 그들은 욥의 고난이 밝혀지지 않은 욥의 죄 때문이라고 추정하며 죄인으로 몰아세우기까지 한다. 위로자로 왔던 친구들은 더 이상 위로자가 아니다. 친구들에게 욥의 내적투쟁과 불평의 언어들은 전통적인 지혜가르침과 보응신학을 변개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며, 평화를 깨는 위험한 사상가로 보일 뿐이다. 때문에 친구들은 욥에게 마음을 돌이켜 순응하고 회개하라고 화려한 신앙의 언어로 집요하게 설득한다.

그러나 욥은 부당하게 느껴지는 고난은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억울하게 둘러막고 불공평하게 대하시고 박해자가 된 것임을 친구들이 제발 알아주길 바란다(19:6). 욥이 하나님을 고발한 셈이다. 욥은 폭행을 당해 부르짖어도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 불운한 시민처럼, 어둠에 갇힌 여행객처럼, 굴욕을 당하는 왕자처럼, 뿌리 뽑힌 나무처럼, 전쟁터의 적군처럼, 적군에게 포위당한 도성처럼(19:7-12) 하나님이 자기를 다루시는 것처럼 느낀다.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 <욥기> 삽화


아, 모두가 나를 버렸구나!


욥은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사회적으로 고립된 외로움이 버겁다. 형제와 친척이 모두 떠나고, 자기를 멀리하며, 잊었다(19:13-14). 자신의 입김을 아내도 매스꺼워하고 등을 돌린다. 어린애들도 업신여기고 조롱한다(19:18). 마음의 비밀을 나눌 가까운 친구들조차 원수가 된 상황이다(19:19). 뼈는 살가죽에 달라붙고, 겨우 잇몸으로 연명한다(19:20). 자신이 속한 공동체 모든 구성원에게 버림받은 신세다(19:21-22). 욥이 사회적인 지위와 품위를 잃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욥은 자신을 몰아세우는 친구들에게 연민을 구한다. ‘나의 벗들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게 나를 불쌍히 여기시게’(19:21). 그러나 친구들이 여전히 냉담했던 것일까. 욥은 자신의 말이 전혀 수용되지 않는 절망의 상황에서 오직 한 분, 그의 ‘증인’과 ‘대변인’(16:21)이 되어 줄 하나님을 생각하며 자신의 말이 기록되기를 열망한다.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19:23-24, 개역개정)


욥은 “모든 시간의 횡포와 인간의 필멸성을 넘어 자신의 무죄함에 대해 증거 할 수 있는 기록”(다니엘 에스테스)을 원한다. 그리고서 욥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한다. 이 말은 기독교 공동체에서 죽음 이후 하나님을 만나는 육체적인 부활을 옹호하는 시 본문이다(19:25-27).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19:25-26, 개역개정)


“대속자”를 뜻하는 히브리말 ‘고엘’은 본래 가장 가까운 친족(형제, 삼촌, 조카 등)을 일컫는 용어다. 어떤 사람의 재산을 그 가문의 재산으로 유지시키기 위해 다시 사는 책임을 가진 ‘기업 무를 자’로서(레위기 25: 25-34), 노예가 된 친족을 도로 사서 노예가 되지 않게 하거나(레위기 25:47-54), 과부와 결혼하여 후사를 잇는 책임과 관계된 말이다(룻기 3:12; 4:1-6). 또는 살해된 친척의 피를 복수하는 ‘피의 보복자’를 뜻한다(민수기 35:12, 19-27; 신명기 19:6, 11-12). 그러니까 ‘몸값을 주고 구출하다,’ ‘다른 힘으로부터 해방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어 친족의 명예를 회복하는 방법이었다.


동시에 ‘고엘’은 법률적인 상황의 은유로서 주님께 적용되곤 한다(잠언 23:10-11; 예레미야 50:34; 애가 3:58; 시편 119:154). 특히 이사야 40-66장에서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의 ‘고엘’이다. 그러하니 구약의 맥락에서 욥이 말하는 ‘나의 구속자’(19:25)는 하나님이다. 욥은 이미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해줄 친구(6:14), 판결자 혹은 중재자(9:33), 증인과 중보자(16:20)를 기대했지만, 이 땅의 ‘고엘’이 모두 등 돌린 처절한 상황에서 자기를 구출해주실 ‘고엘’을 열망한 것이다. 욥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희망을 안고 확신에 차 있다. 당대에는 도무지 이해 될 수 없었던 욥의 말, 초대 교부들의 해석의 빛 아래 신약의 부활과 맞닿게 되었다. 그때는 욥이 볼 수 없었던 ‘구속자’(‘고엘’) 이름은 메시아 예수. 우리는 마지막 날에, 그가 일어나셔서 우리를 변호하실 것을 믿는다(베드로전서 1:18-19; 요한계시록 1:5; 5:9).


성탄절을 기다리는 대강절이 곧 시작된다. 자기의 말이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지길 열망했던 욥. 그가 남긴 ‘구속자’에 대한 믿음의 고백은 신앙의 후세대를 위한 거룩한 책에 불멸의 기록으로 남았고, 헨델(1686-1759)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3부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첫 곡 아리아로 숭고한 음악이 되었다. 예수의 오심을 경축하기 위한 기다림의 계절, 욥의 고백은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의 변호와 위로를 가다리는 모든 이들의 불멸의 노래가 되었다.


김순영/ 《어찌하여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저자, 대학원과 아카데미에서 구약 지혜서를 강의하며 신학과 현실의 밀착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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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 지혜서 산책(11)


“모든 책들 가운데 가장 진실한 책”


나는 일찍이 성경의 아름다움을 깨닫지 못했었다. 성경을 자세히 읽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씩 맛보기 시작할 때에야 비로소 ‘언어로 된 성전’, 곧 성경전서의 ‘아름다움’이 보였다. 기독교인의 삶의 표준인 성경 말씀을 통해 ‘진리’의 참됨(진)과 ‘착함’(선)을 배웠지만, ‘아름다움’(미)은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뒤늦게 깨달은 것 하나, ‘진리’는 아름답다. 서구 철학이 말한 진선미(眞善美)의 구도가 인간의 지성, 의지, 감정(심미성)의 조화를 목표한 것이라서 이 말을 한 것은 아니다. 시의 문장으로 지어져 예술성을 확장시키는 구약의 지혜서는 간결미, 상징적인 언어의 모호함과 함축미의 결정체다. 글의 형식적인 아름다움과 현실의 사건들이 어울리는 그곳에 진리의 현실성과 예술성이 교차한다.


《모비딕》의 작가 허멘 멜빌은 전도서를 “모든 책들 가운데 가장 진실한 책”이라고 극찬했다. 세대가 가고 오며 위대한 작가들은 성경의 진리와 그 진리를 담아낸 언어로 지어진 성전의 문학적인 탁월성과 아름다움을 말했지만, 오히려 구도자의 삶을 살아갈 신앙인들은 관심 없다. 무관심이 무지를 낳은 것일까. 필요한 성경구절을 뽑아 ‘주문’처럼 외우며 이용하는 것은 능숙하다. 그러나 총 66권 성경전서의 한권 한권의 영감 받은 말씀이 왜 그 순서에 자리 잡고 있는지, 어떤 이야기는 왜 꼭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어떤 것은 명확한데, 왜 어떤 것은 모호하여 말의 숲을 헤매게 하는지 질문하지 않았다. 수도 없이 궁금했을 법한 이야기들이 거룩한 말씀 안에 있었지만,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질문은 의심을 만들고, 의심은 불신을 낳을 것이라는 자발적인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신앙공동체가 가하는 무언의 억압 때문이었을까? 각설하고 왜 전도서는 진실하고 아름다운가? 나는 전도서를 대표하는 말, ‘헤벨’(한숨, 호흡, 헛됨, 허무, 덧없음, 무의미, 부조리, 모순)에서 찾았다.



코헬렛(전도자)은 갖가지 인생살이의 현실, 역설과 모순, 온갖 부조리를 한 마디로 발설했다. 모든 것은 ‘헤벨’이다(1:2). 단 한가지로 응축시켜 종합하기 어려운 총천연색의 현실은 어제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어쩌다 코헬렛은 의미 있는 것을 다루지 않고 그 반대의 부조리하고 모순된 현실들을 말해야 했을까. 인생의 변덕스러움과 부조리를 전부 이해할 수 없어서 지혜 선생 코헬렛은(12:9-12) 해 아래 모든 것은 ‘모순덩어리’(1:2; 12:8; “헛되고 헛되다”, 개역개정)라고 했다. 이 때문에 코헬렛의 지혜 말씀은 질문을 반기지 않는 종래의 신학과 신앙에 익숙해진 우리를 낯선 해석의 장으로 데려간다.


우리는 자주 ‘전제된’ 신앙과 신학의 울타리에서 질문하기를 꺼렸지만, 코헬렛은 인생의 너절함과 모순적인 현실을 묻고 발설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서 그는 허점투성이일 수밖에 없는 내 인생에 깊이 들어와 삶은 ‘덧없으니’(헤벨) 먹고, 마시고, 노동하며 즐거워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거듭거듭 당부한다(2:24-26; 3:12-13, 21-22; 5:18-20; 8:15; 9:7-10; 11:7-10). 이것은 삶의 즐거움으로의 부름이요, 때때로 의미 없고 너절한 일상의 반복도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는 역설이다. 코헬렛은 대중에게 환호 받는 위대한 꿈의 성취가 아니라 하루하루 먹고 마시는 일상을 가치 있게 여겼다. 삶의 위대함은 도달하기 어려운 무엇을 성취한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가장 소박하고 단순한 삶에 담백하게 찾아든 기쁨 때문이리라.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외적으로 풍요로운 시대다. 그러나 극도로 심화된 빈부 격차와 특권화 된 계층을 위해 작동하는 사회구조는 많은 이들을 불안과 박탈감으로 밀어 넣는다. 이럴 때 코헬렛이 발설한 모든 것이 ‘모순덩어리’라는 ‘헤벨’판단은 가장 적실성 있는 시대의 외침이다. 이는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그 어떤 책보다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때문이다. ‘헤벨’이 발설되는 곳에서, 그러면 진짜 의미 있는 삶은 무엇인가를 깊이 성찰하도록 부르기 때문이다. 그러하여 전도서는 모든 것을 다 잃고 폐허가 된 자리에서도 완고한 현실에 직면해야 할 근거와 가치를 마련해 준다.


전도서는 현실의 부조리에 회피와 방관의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서, 지배적 담론에서 벗어나 대안적인 상상을 하도록 끌어들인다. 때문에 자본과 성공을 위대한 성취로 받드는 세상에서 매일매일 사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믿는다면, 거기에 생명이 솟는다. 거기에 설령 슬픔과 비애가 머문다할지라도 삶의 진실을 배울 기회가 허락된다. 성취감 같은 것은 없어도 괜찮다. 욕망의 성취가 행복 자체가 될 수는 없지 않는가. 성취감은 잠깐이다. 도리어 ‘허무’(헤벨)가 엄습해 오기도 하니까. 모순, 허무, 부조리의 세상에서 내 안의 자유와 진실함을 끌어내는 순간 절망은 사라지고 삶의 기쁨이 샘솟는다.


그러하여 세상 모든 것을 ‘모순덩어리’(1:2; 12:8, ‘하벨 하발림’)라고 표현한 한 마디 코헬렛의 말(1:1). 함축의 극치를 보여준 이 말이 가장 아름답고 진실한 언어로 내게 왔다. 지나친 확신과 흥분에 찬 말이 아니어서, 위대함을 자랑하는 말이 아니어서 진실하다. 의심하고 질문하게 하는 말이어서,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아 현재의 ‘순간’을 마음껏 누리라는 말이어서, 그리고 모호해서 아름답다. 해 아래 모든 일은 ‘수수께끼’(헤벨)어서 인간에게 온전히 이해되지 않는다고 솔직히 말하니 얼마나 진실한가. 이보다 더 진실할 수 있을까.


늦가을, 독서와 사색을 위해 좋은 계절이다. “모든 책들 가운데 가장 진실한 책” 전도서에서 ‘모순덩어리’ 인생의 묵직한 아름다움을 느껴보는 것은 어떤가.


김순영/ 《어찌하여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저자, 대학원과 아카데미에서 구약 지혜서를 강의하며 신학과 현실의 밀착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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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 지혜서 산책(10)


지혜의 문장을 들어야 하는 이유


문학성과 예술성을 삭제한 논리적 용어가 학술적 가치를 드높이고 학문적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믿는 세계가 있다. 지식을 다루는 학자들의 세계다. 그 세계의 문장들은 길고 감동 없기 일쑤다. 나도 어느새 문학적인 감수성과 예술성, 그리고 상상력을 살려내지 못하여 심미성을 극대화하지 못하는 독자가 되어 있다. 독자로서의 시간이 길어지면 저자가 되기도 하는데, 가끔 단 한 줄 문장도 마음을 동요시키지 못할까봐 두렵다. 그럼에도 이 틈바구니에서 신학적인 것에 문학성을 녹여 서로의 자양분이 된 글쓰기를 꿈꾼다. 운율과 리듬, 비례와 조화가 어우러진 구약 지혜서 문장의 숭고한 아름다움처럼.



구약 지혜서의 문장은 오랜 세월 갈고 닦여진 함축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지혜의 문장은 장황한 설명문이 아니라, 예술적인 시의 언어라서 더 매력적이다. 적은 낱말의 문장으로 많은 생각을 전한다. 글은 간결하지만, 생각의 굴곡을 만드는 문장의 예술성이 마음을 동요시킨다. 특히 구약의 《잠언》은 각기 다른 시대 다른 저자들에 의해 오랜 세월 수집된 짧지만 격조 있는 문장들의 모음집이다. 잠언의 표제(1:1)는 저자로 보이는 솔로몬 이름이 등장하지만(10:1; 25:1), 솔로몬 이외의 다른 저자들의 글이 포함되었다. ‘지혜자들’(하카밈)이라 불리는 집단(22:17; 24:23), 그 밖에도 아굴(30:1), 르무엘 왕의 어머니 교훈(31:1)이 지혜 잠언의 원천으로 언급된다.


무엇보다 잠언은 구약의 다른 책들과 달리 책의 머리말처럼 글의 목적을 분명히 밝혔다(1:2-6). 압축의 극치를 보이면서 시사성이 높다.


지혜와 훈육을 알기 위함이요

명철한 말을 깨닫기 위함이요

훈육을 받기 위함이요

정의와 공의와 공평을 꽃피우기 위함이라

(1:2-3, 필자의 번역)


잠언의 목적은 지혜와 ‘훈육’을 알고 통찰력 있는 말씀을 깨닫는 데 있다(1:2). 한 마디로 앎과 깨달음을 위함이다. 《개역개정》이 ‘훈계’로 번역한 히브리말 단어 ‘무싸르’는 ‘훈육’으로 표현함이 더 좋겠다. 훈육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훈련의 과정이 두루 포함된 말이다. 권위자의 말잔치가 아니다. 구약의 성문서 전체에서 50회 사용된 이 단어는 잠언에서만 36회 사용될 정도니 책의 성격을 규정한 셈이다. 더군다나 ‘훈육’은 ‘훈련하다’, ‘단련하다’(야싸르)에서 파생된 말로서 몸과 생각의 훈련을 일컫는다. 한 마디로 ‘훈육’은 ‘삶의 훈련’이다. 삶의 훈련은 앎과 관계된 것이면서 명철한 말을 깨닫는 것과 통한다. 그러하니 사물의 이치나 도리를 분별하는 능력은 시간을 필요로 하며 삶의 과정 안에서 터득하게 된다.


그럼에도 잠언의 목적은 사물의 이치와 도리를 분별하고 체득하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잠언의 둘째 목적은 ‘정의’(쩨덱), ‘공의’(미쉬파트), ‘공평’(미샤림)을 꽃피우는 삶이어야 한다(1:3). 이것은 삶의 도리를 익혀 배양해야 할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목적이다. 그 목적이 ‘정의(rightness), 공의(justice), 공평(equity)’을 꽃피우는 삶이어서 개인적인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법적이며 사회 공동체적인 덕목을 실천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무엇보다 이러한 잠언의 목적과 함께 지혜의 가르침을 들어야할 일차적인 대상은 젊은이와 어수룩한 자들이다.


어수룩한 자들에게 노련함을 주고,

젊은이에게 지식과 신중함을 주기 위함이다

(1:4, 필자의 번역).


히브리 시의 간결한 아름다움이 오롯한 평행구문에서, ‘어수룩한 자들’(페타임)과 ‘젊은이’(나아르)는 동일시된다. ‘젊은이’는 아직 미숙하고 풋내 나는 청춘들로서 결혼하지 않은 젊은 사람들을 일컫는다. 고대인들 눈에 젊은이는 경험이 부족하여 어수룩하다. 때문에 잠언 곳곳에서 젊은이들은 어수룩한 사람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그렇다면 잠언을 읽어야할 독자는 단지 젊은이였나? 아니다.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포함된다.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1:5, 개역개정)


대체로 나이든 사람은 젊은이가 터득하지 못한 삶의 경험에서 삶의 기술을 발휘하곤 한다. 이것은 나이든 사람의 이점이지만, 경험적 지혜를 의지하여 배움의 열정은 시들해진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이나 명철한 사람은 타인의 조언을 듣고 배움을 더해간다. 한 마디로,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 경험적 지혜에 머무르지 않고 ‘들음’을 중히 여겨 거기서 “지략”을 얻는다. “지략”(타흐불로트)은 어렵고 독특한 말이다. 사전적인 의미는 방향을 잡는 기술 또는 지혜로운 조언이다. 그러니까 지략은 미숙하고 서툰 솜씨가 아니라 복잡 미묘한 기술이다. 이 기술은 선천적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고, 윤리적인 삶이나 지혜로움으로 잘 다듬어져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통찰이다. 그러하니 지혜로운 자는 들음의 중요성을 알기에 들음에서 신중함을 배우고 삶의 복잡 미묘한 기술까지 터득한다.



마지막으로 잠언의 목적은 “잠언과 비유,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개역개정)을 깨닫기 위함이다(1:6). 이 간결한 문장에서 잠언과 지혜자들의 말의 성격이 드러난다. 지혜자들이 생산한 짧은 문장은 오랜 세월동안 닦여진 농축된 언어다. 그 형태는 대체로 ‘풍자’와 ‘수수께끼’였던 셈인데, 구약에서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매우 희귀한 단어가 “비유”(개역개정, 새번역)로 번역되었다. 좀 더 정확한 히브리적인 표현을 하자면, ‘풍자’다. 풍자는 어떤 사안을 두고 빗대어서 재치 있게 경계하거나 비판하는 말이다. “오묘한 말”(또는 “심오한 뜻”, 새번역) 역시 희귀한 말이다. 일종의 “수수께끼”인데, “당황스러운 질문”, “불가사의한 질문”을 뜻한다. 그러니까 잠언의 목적이 당황스럽고, 불가사의한 질문을 깨닫기 위함이니 실로 인생은 수수께끼 같은 난제로 가득하다는 말로 들린다.


이처럼 잠언의 머리말(1:2-6)은 경험이 부족한 젊은이와 지혜를 추구하는 자들에게 잠언의 가치와 목적을 밝혀 지혜의 가르침을 듣도록 초청하는 부름이다. 이 부름은 들음을 통한 젊은이의 품성 교육을 위함이다. 또한 도덕성과 통찰력을 얻는 훈련이요,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지혜자의 말과 글을 깨닫고 해석하는 기술을 익히는 것이다. 그러하여 고대 지혜자들의 간결한 문장들을 엮은 잠언은 수수께끼 같고 불가사의한 삶을 어떤 방향에 맞추어 살 것인가 안내하는 가르침이다.


고대인들과 달리 현대인들의 배움은 인격을 다듬는 수련의 과정이 아니라 갖가지 자격증과 높은 시험점수를 획득하여 경제 논리에 만족시키는 시장의 원리에 충실하다. 얼마짜리 인간을 만드느냐에 혈안이 된 교육은 학벌과 돈을 숭배하는 사회와 통한다. 우리의 배움이 구약의 잠언처럼 삶의 난제를 풀어가는 통찰력과 덕성을 키우는 삶의 훈련이면 얼마나 좋을까. 창조자이며 구속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고대 지혜자의 잘 다듬어진 간결한 한 줄 문장이 읽는 이의 삶을 충만하고 아름답게 조율하듯, 우리의 배움이 구약 잠언의 목적과 통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옛적 말씀이 낡아보여도 그 맛은 나날이 새로우니.


김순영/ 《어찌하여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저자, 대학원과 아카데미에서 구약 지혜서를 강의하며 신학과 현실의 밀착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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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지혜서 산책(9)


거기 영원히 서있는 땅의 사람이여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삶은 시작과 끝이라는 양극성을 품고 있다. 전도서 저자 코헬렛(전도자)은 일찍이 자연세계의 순환하는 질서와 반복되는 인간 역사에서(전도서 1:4-11) 양극의 운동을 살폈다. 그는 자연과 인간의 역사가 양극 사이를 끝없이 오가지만 언젠가 그 끝이 존재함을 인식했다. 무엇이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 아닌가. 코헬렛은 우주와 인류 역사의 종말을(12:1-8) 내다보면서도 끊임없이 순환하는 자연의 길과 새로울 것 없는 인류 역사의 흐름을 살펴 땅에 속한 사람이 어떠해야함을 깨우치게 했다. 그 방식은 선동적인 설득으로 굴복시키고야마는 연설이나 주입식 설교조의 말도 아니다. 간결해서 아름다운 시의 언어다.


코헬렛은 ‘해 아래’ 일어난 온갖 수고로운 일들을 조목조목 말하기 전에 자기 눈에 비친 자연현상을 시로 읊었다.


한 세대가 가고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여전히 그대로 서있다.

해가 떠나고

해가 오지만

해는 떠났던 그곳으로 숨 가쁘게 가서

해는 거기서 떠오른다.

바람은 남쪽으로 가고

북쪽으로 돌아간다.

바람은 돌고 돌아가지만

바람은 돌았던 그곳으로 되돌아온다.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지만

바다는 넘치지 않고

강물이 나왔던 곳으로 돌아가

거기서 돌아 흘러간다.

(전도서1:4-7, 필자의 번역)


한 세대가 가고 오는 것처럼, 해도 떠나가고 온다. 바람도 강물도 가고 온다. 코헬렛은 자연의 운동을 묘사하며 마치 푸른 지구 밖에서 자연계의 운동을 내려다본 사람처럼 간명하게 말한다. 그가 사람의 죽음을 ‘가는’ 것으로(3:20; 6:6, 9; 7:2;9:10; 12:5), 출생을 ‘오는’ 것으로(6:4) 말하듯, 자연의 세계도 가고 온다. 자연과 인간이 구별 없이 가고 오는 운동을 반복한다. 한 사람이 가면 다른 사람이 오듯, 한 세대가 가고 다른 세대가 온다.



그러나 가고 오는 인간 역사는 오묘한 역설을 품었다. 한 세대가 가고 다른 세대가 오지만, 고유한 한 사람 한 사람은 한 번 가면 그뿐이다. 그런데 ‘땅은 언제나 그대로 서 있다’(1:4). 땅의 영원성과 인간의 일시성이 교차한다. 죽음을 향해 가는 사람과 영원히 서있는 땅이 조우하면서 일시적인 사람의 한계성이 도드라진다. 인류학자이자 사회학자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1908-2009)가 남긴 말을 떠올려 본다. 


“세계가 시작하였을 때 인류는 존재하지 않았고 세계가 끝날 때에도 인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와 인간을 보는 인류학자의 눈에 인류는 각자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대를 통과하는 존재일 뿐이다. 역사의 진보를 일구어가는 위대한 인류도 자연의 일부분인 셈이다. 자연은 사람 없이 존재하지만, 사람은 자연 없이 살 수 없다. 자연의 세계는 사람에게 생존을 위한 안전한 공간으로 존재한다.


코헬렛은 자연세계의 가고 오는 반복적인 운동에 마음을 두었다. 왜일까.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의 운동은 지루하게 반복하는 무의미한 운동이 아니기 때문일 테다. 당연하게만 여겼던 자연계의 반복 운동과 놀라운 규칙성에서 벅차오르는 감격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다. 자연계의 반복운동이 멈추는 순간을 생각해 보았는가? 만약 우주와 푸른 지구의 반복 운동이 멈춘다면, 온 세상은 혼돈 그 자체다. 해가 뜨고 지고, 바람이 불고, 강물이 흘러 바다를 돌아 다시 강으로 흐르는 단조로운 운동이(1:4-7) 멈춘다면, 인류는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다. 우주와 자연의 순환 운동은 사람에게 안전한 공간을 마련해주는 질서다. 그 질서가 사람에게 복이다. 하여 사람이 날마다 해를 보며 맞이하는 아침은 환희의 조건이요, 최고의 선물 아닌가.


해와 바람과 강물과 바다는 자신의 자리를 지켜 책임을 다하니, 사람은 그 규칙적인 운동에서 창조자의 호흡과 손길을 느낀다. 사람은 피조세계에 깃든 반복 운동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통치 질서를 인식하고 맛본다. ‘땅이 그대로 있는’(1:4) 한 씨를 뿌리고 거두는 일,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밤과 낮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창세기 8:22). 이것은 피조세계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우리는 오늘도 피조세계의 운동과 질서를 조정하시는 창조자의 손길을 느낀다. 때문에 규칙적인 자연의 운동과 질서를 인식한 ‘사람’(human)은 자신이 ‘흙’(humus)에 기반을 두었기에(창세기2:6) 땅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 앞에 ‘겸손’(humility)의 미덕을 실행할 테다. 사람이 물과 바람과 강물을 통제할 수 있을 것처럼 온갖 기술과 능력을 뽐내며 관리한다한들, 사람은 ‘영원히 서있는 땅’(1:4)에 속한 존재 아니던가.


김순영/ 《어찌하여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저자, 대학원과 아카데미에서 구약 지혜서를 강의하며 신학과 현실의 밀착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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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지혜서 산책(8)


지나치게 의롭지 말라?


사물을 판단하는 가장 우선적인 신체기관은 눈이다. 아름다움과 추함을 자각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혜 탐색도 먼저 눈에서 시작된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에게 지혜의 자리로 알려진 ‘마음’의 눈은 사물과 사건의 가장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간다. 코헬렛(전도자)이 그러했다. 그는 덧없는 날을 살면서 ‘해 아래’ 일어나는 온갖 일을 살펴보고 “보라!”는 말을 자주 했다. 게다가 그의 지혜의 말들은 학술적인 논리어가 아니고 일상의 언어다. 그 말들의 자유로운 어울림은 독자로 하여금 삶을 반추하게 만드는 놀라운 힘을 가졌다. 무엇보다 그는 ‘개념의 감옥’에 갇혀있지 않아 지혜자의 깊은 내공이 느껴진다. 그는 자유롭다. 그 내공과 자유로움은 ‘지나치게 의롭지 말라’(전도서 7:16)는 말에서 드러난다.

 


코헬렛은 지혜가 한계에 봉착하는 현실과 정의가 한계에 직면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과감하게 발설한다. 그는 그의 말처럼 ‘덧없는’ 날을 사는 동안 보고 느낀 불편한 현실과 진실 말하기에 숨김이 없다. 솔직하다.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전도서 7:15, 개역개정).


우리는 의로움과 악행에 따른 상벌을 기대하지만, 삶은 자주 우리의 기대를 배반한다. 그렇게 세상살이는 질서와 순리를 거스르는 모순과 역설로 얽혀있다. 시편의 시인들도 코헬렛처럼 불편한 현실을 피하지 않고 발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전도서 7:12-13, 개역개정).


나는 고대 히브리 시인과 지혜자의 언어에서 중대한 사실 하나를 발견한다. 그들은 삶의 모순을 보고 자유롭게 말했다. 때로는 당황스러울 만큼 솔직하다. 그러하여 희망과 현실의 괴리를 과감하게 말하는 그들의 언어는 참신하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순에 찬 현실에서 희망을 저버린 것은 아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시편 37:1-2, 개역개정).


이처럼 구약 지혜 전통의 가르침과 믿음에서 하나님의 복은 의로운 자들을, 저주는 악한 자들을 향해 있다. 이것이 지혜 가르침의 보편화된 공리다. 그러나 코헬렛은 지혜전통을 수렴하고 유지하되 보는 눈과 생각의 결이 조금 남달랐다. 인간의 지혜도 의로움도 완벽할 수 없다는 지점에서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지혜의 반성적 성찰이 시작된다. 그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지 결심했지만 지혜가 나를 멀리했다(7:23)라는 고백과 함께 지혜는 너무 멀고, 깊어 누가 그것을 발견하겠는가?(7:24) 말했던 것처럼, 결정적으로 지혜 자체의 한계를 아는 것이 지혜이듯(욥기 28:12-13), 그는 지나치게 지혜로운 것과 지나치게 의로운 것을 경계한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전도서 7:16, 개역개정).


지나친 악과 어리석음도 마찬가지다(7:17). 그것이 무엇이든 ‘지나침’은 위험하다. 때문에 그는 지혜로움과 의로움의 과잉을 문제 삼았다. 과잉, 곧 ‘지나침’은 스스로를 파괴시킨다. 이 자각은 과도한 자기 확신을 피할 수 있다. 의롭지 말라거나 지혜롭지 말라는 조언이 아니다. 의로움의 자만심을 피하라는 뜻이다. 그가 “하나를 붙잡되, 다른 것도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7:18, 새번역)라고 말한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양 극단을 피한다(7:18)라고 했는데, 지나친 의로움과 지혜를 피하는 것만큼이나 의로움과 지혜가 모자란 것도 문제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라는 명문장이 통용되긴 하지만, 코헬렛의 ‘지나침’을 경계하는 교훈이 동양 철학의 ‘중용’과 비슷하다. 중용은 중간적인 입장이나 중간 지대가 아니다. 가치판단을 삭제한 기계적인 혹은 산술적인 중간이 아니다. 중용은 가운데가 아니라 정확함이다. 양비론이 아니다. 부단히 고민하고 행동하는 참된 마음과 태도다.


동양의 사상가 순자(기원전 298-238)의 말에 따르면, 중용은 “만물을 다 같이 늘어놓고 곧고 바름을 재고 헤아리는 것”이라고 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의 ‘중용의 철학’도 비슷하다. 중용은 지나침과 모자람의 극단을 멀리하는 것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거부한다. 동서양의 고전 철학이 모두 ‘지나침’을 멀리하는 절제와 넘나듦의 삶, 그리고 바른 마음을 추구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악에서 멀리하라(잠언 4:27)는 지혜 교훈 역시 지나침과 모자람을 경계한다. 코헬렛은 일찍이 모든 것의 ‘덧없음’(헤벨)을 발설하며 ‘해 아래’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음을 자각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적절한 위치가 어디인지를 알았다. 때문에 ‘지나치게 의롭지 말라’는 것은 지나치게 자신을 자랑하거나 빛내려 하지 말고, 과도하게 맑고 깨끗한 체하며 도도하게 행동하지 말고, 분별하여 포용하는 여유를 가지라는 뜻이리라. 코헬렛이 “좋은 일만 하고 잘못을 전혀 저지르지 않는 의인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7:20, 새번역)라고 말한 이유다.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인정받은 욥 역시 “죽을 인간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겠는가?”(욥기 9:1)라고 말했다. 세월이 강물처럼 흐른 후, 사도 바울이 욥과 코헬렛의 가르침을 깊이 묵상했던 것일까. 그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로마서 3:10)라고 선언했다. 그러니 ‘지나치게 의롭지 말라’는 것은 ‘지나침’이 가져올 자기 자랑과 그 위험을 자각한 균형 감각이요, 절제와 넘나듦의 자유를 표방한 가르침이다.


김순영/《어찌하여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저자, 대학원과 아카데미에서 구약 지혜서를 강의하며 신학과 현실의 밀착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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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지혜서 산책(7)


왜, 지혜의 낙관적 기대를 무너뜨리는가?


지혜는 유산처럼 아름답다

전도서의 저자 코헬렛(전도자)은 지혜의 가치와 유용성을 말하고 가르치는 지혜 선생이다(전도서 12:9-10). 그에게 지혜는 유산처럼 아름답고, 돈의 그늘 아래 있는 것처럼 유익하다. 지혜를 소유한 자는 생명까지 보호받는다(7:11-12).


지혜는 유산 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 되도다

지혜의 그늘 아래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과 같으나

지혜에 관한 지식이 더 유익함은

지혜가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라

(7:11-12, 개역개정)


코헬렛이 지혜의 가치를 돈과 비교하니 이 보다 더 적나라할 수 있을까 싶다. 이 말은 잠언의 지혜처럼, 지혜의 오른 손에는 장수가 있고 왼손에는 부와 명예가 있다(잠언 3:16)라는 지혜의 실용적인 맥락과 일치한다. 게다가 지혜를 얻은 자에게 지혜가 생명나무가 된다(잠언 3:18)라는 이스라엘 지혜 전통과도 꼭 들어맞는다.



그러나 코헬렛은 돈을 사랑하는 자는 돈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 소득으로 만족하지 못한다(5:10)라는 가시 박힌 말도 거침없이 한다. 동시에 “돈은 만사를 해결한다”(10:19, 새번역)라며 돈에 대한 솔직한 관점도 주저하지 않았다. 코헬렛이 돈의 전능성을 말한 것인가? 아니다. 돈은 세상살이에 꼭 필요한 재화다. 필요를 채우는 수단으로서 돈의 가치를 평가한 말이다. 필요를 채우는 효용가치를 생각한 것이지, 돈을 필요 이상으로 절대화 시켜 돈의 만능성을 말한 것이 아니다.


안타깝지만 현대사회에서 돈은 요술방망이 같은 환상과 성공의 잣대다. 지금 우리는 자본의 힘이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자본 만능의 시대를 산다. 그러나 코헬렛은 돈의 유익을 말하면서도 지혜의 유익에 빗대어 지혜의 가치를 더 옹호했다(7:12). 돈이 주는 유익이 있지만 지혜만큼은 아니다. 돈은 결코 사람을 고상하게 만들지 않는다.


엎어진 지혜의 기획

코헬렛은 지혜와 돈이 삶의 은신처가 될 수 있지만, 돈이 지혜의 탁월성을 대신할 수 없음을 밝혔다. 이렇게 그는 주류 지혜의 전통과 결별하지 않지만,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흑과 백의 경계를 넘나든다. 그는 사람의 지혜로운 행동이 그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는 틈을 관찰했다. ‘지혜’는 ‘전쟁 무기’보다 강하지만(9:18), 항상 인정받는 것은 아니었다.


…지혜가 힘보다 좋으나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의 말들을 사람들이 듣지 않는다(9:16, 개역개정)


인생은 우리의 기대처럼 호락호락하지도 착하지도 않다. 코헬렛은 전통적인 지혜의 생각, 곧 지혜가 힘을 발휘할 것이라는 보편적인 기대에 인간이 끼어들 수 없는 틈을 생각했다. 주류 지혜전통으로 통하는 잠언에서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을 가진 자는 힘을 가질 수 있다(잠언 24:5)라고 했지만, 코헬렛은 그 맥락을 이어가면서도 거기서 벗어난 다른 측면을 관찰했다. 그는 지혜가 가져올 유익과 기대를 꺾는 반전의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이것은 지혜 전통과 현실 사이의 괴리, 곧 지혜의 기획까지 엎어버리는 지혜의 역설이다.


전통 지혜의 가르침은 ‘지혜’와 선(善)을 동의적 개념으로 여기지만, 코헬렛이 보기에 지혜의 가치는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


지혜가 전쟁 무기 보다 좋다

그러나 죄인 한 사람많은 을 무너지게 한다(9:18, 필자의 번역).


코헬렛은 많은 선을 무너지게 만드는 죄인 한사람의 파괴적인 힘과 착함의 무력함까지 콕 찍어 말했다. 착함의 무력함처럼 무기보다 좋은 지혜가 맥없이 무너져 내리는 현실은 하찮은 어리석음 때문이다.


죽은 파리들이 향기름을 악취가 나게 만드는 것 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를 난처하게 만드느니라(10:1, 개역개정).


변변치 않은 어리석음이 지혜와 영광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든다니. 지혜가 탁월하지만, 현실세계에서 어리석음과 죄의 영향력이 결코 가볍지 않다. 코헬렛은 지혜와 어리석음의 대중화된 생각을 비집고 들어와 지혜의 낙관적 기대를 전복시켰다.


왜일까. 어쩌자고 코헬렛은 우리의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의 기대를 격파하고 들어오는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지나치게 떠받들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귀중한 것을 너무 귀하게 여기지 말라는 뜻인가? 끝내 코헬렛은 지혜의 우수성을 의심하는 것 같은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겼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7:16, 개역개정).


코헬렛은 먹고 마시며 노동 안에서 즐기는 일상의 가치를 드높였지만, 그의 말에는 일상의 지식을 뛰어넘는 통찰이 있다. 지혜조차 한계에 봉착하는 순간을 관찰한 그는 수립된 전통적인 체계들을 계승하면서도 대중화된 지혜의 가치와 배움을 해체시킨다. 나는 그에게서 치열하게 관찰하고 사유하는 자유를 배워간다. 인생길은 오르막과 내리막, 슬픔과 기쁨의 양극적인 사태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니(3:1-8) 형통한 날은 즐거워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면 된다(7:14). 안달복달하며 발버둥 칠 이유가 없다.



그러면서 코헬렛은 지나치게 지혜롭지 말라며 극단을 피하는 자세를 논했다. 인생의 기복에 의연해지기를 바라는 코헬렛이 ‘지나침’을 경계하며 축적된 지혜 경험의 한계, 곧 지혜의 불확실성을 말한 것이다. 보고 또 보고 묻고 또 묻는 그였지만, 누적된 온갖 지혜의 성과들을 철저하게 파헤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던 거다. 그러니 광대하고 아득한 ‘미지’의 영역, 곧 ‘영원’을 말했을 터(3:11). 이것은 온갖 지혜와 지식에 관한 한계 인식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겸허함을 터득하는 창문이며 통로다. 하여 지혜의 야심찬 기획마저 무너뜨리는 그의 말들은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인간이 마치 전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말라는 준엄한 뜻의 권고다.


김순영/ 《어찌하여 그 여자와 이여기하십니까?》 저자, 대학원과 아카데미에서 구약 지혜서를 강의하며 신학과 현실의 밀착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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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 지혜서 산책(6)


전도서에서 말하는 노동은?


종교인의 세금납부 의무를 2년 유예시키자는 법안이 발의되었다. 이 법안 발의를 주도한 국회의원들이 모두 기독교인으로 알려졌다. 종교인의 세금납부 정당성과 찬반문제를 논하기 전에 교회 공동체에서 전문성을 갖추고 수고하는 이른바 ‘목회’ 혹은 ‘교회사역’이 노동의 영역인가를 정의하는 제도권 교회의 내부적인 합의가 우선되어야겠다. ‘목회’가 ‘노동’으로 간주되면 그 대가로 발생한 소득 때문에 목회자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세금납부의 의무를 이행해야한다. 일반적으로 노동은 생계를 꾸리기 위해 몸을 움직여 일하여 필요한 물자를 얻는 육체적 혹은 정신적인 노력과 수고를 총칭하는 말이다. 그러면 목회자의 목회활동은 노동의 영역인가? 기독교의 삶의 표준인 정경으로서의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을 주지 않지만, 전도서가 이 노동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를 풀어가는 지혜로운 가르침을 준다.


교회 사역과 노동 사이에서

전도서는 저세상이 아니라 지상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관심이 많다. 그 가르침의 강조점이 구원역사 보다 창조질서와 보편적 삶의 실천적 측면에 있기 때문이다. 전도서는 창조와 우주질서의 의미, 그리고 삶의 구체적인 문제들, 곧 시장과 거리, 광장, 일터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갖가지 일상의 문제들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무엇보다 노동은 코헬렛(전도자)에게 중요한 관심사다. 왜냐하면 노동은 창조자 하나님을 닮은 인류의 본질적인 구성요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셨지만, 땅의 짐승들과 하나님을 닮은 사람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노동 행위로 창조되었다. 땅에 충만하여 땅을 돌보아야 하는 창조명령을 받은 인간에게 노동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사명이다(창세기 1:24-28).


그러나 첫 인류가 타락한 이후로 노동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 되었다(3:18-19). 땅과 흙에 기반을 둔 사람의 고된 삶의 현실을 관찰한 코헬렛은 자신의 다양한 담론 전개를 위한 화두로서 ‘노동’의 문제를 제기한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도서 1:3, 개역개정).


여기서 “수고”로 번역된 말은 ‘노동’이다. 히브리말 ‘아말’은 노력, 고생, 수고, 일, 노동을 일컫는다. 코헬렛이 즐겨 사용하는 ‘해 아래’ 라는 말과 함께 인류의 온갖 노동과 관련된 현상들을 포함시켜 노동의 “유익”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유익”으로 번역된 ‘이트론’은 구약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은 전도서에만 유일하게 반복 사용된 경제적인 용어다.


구약의 다른 책들과 달리 전도서는 노동의 문제를 깊이 성찰한다. 코헬렛은 사람이 먹고 마시고 노동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2:24; 5:18; 9:9)라는 말을 반복하며, 모든 것을 무효화시키는 죽음이 있으니 사는 동안 힘을 다해 노동할 것을 권한다(9:10). 그렇게 그는 먹고, 마시며, 노동하며 사는 평범한 일상의 가치를 드높인 지혜 선생이다.


그러면 ‘목회’는 노동인가?

목회는 노동이다. 이 말이 낯설게 들리겠지만, 땅 위에서의 모든 종류의 노동은 생존을 위해 양식과 자원을 얻기 위한 행위다. 물론 이 말은 경제적인 측면이 고려된 광의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코헬렛의 노동의 관점을 따라가 보면, 노동은 단지 생존을 위한 활동이 아니라 삶의 기쁨과 관계된 일이다(2:24; 3:13; 3:22; 5:18; 8:15; 9:9). 태초에 하나님의 창조와 노동, 에덴 정원 관리인으로서 경작을 책임지는 노동과 애정 어린 돌봄을 수행할 사람의 이야기(창세기1-2장), 그리고 전도서에서 말하는 노동은 창조신학적인 관점에서 숙고해야할 신학적인 문제다.



프레드릭 뷰크너는 노동을 “인간 내면의 기쁨과 세상 저변의 필요가 만나는 지점”이라고 말했다. 목회자의 목회활동 역시 세상의 필요와 기쁨이 만나는 노동이다. ‘목사’는 하나님과 교회의 부르심에 자발적으로 응답한 개인이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기쁨으로 수행하겠다고 선택한 직업이다. 목회자의 일은 생존과 연결되었지만, 그 수고로움과 노동을 ‘사명’이라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문적인 신학교육을 받은 목회자가 교회의 부름에 응답했다면, 교회는 마땅히 목회자 생계를 책임지게 된다. 목회자는 목회 활동에 대한 보상으로서 교회로부터 ‘사례비’를 받고, 자신과 가족의 생계문제를 해결한다. 목회자가 받는 사례비는 무보수의 자원봉사가 아니라 전문성을 인정받은 수고, 곧 정신적 육체적 노동 행위에 따른 보상인 셈이다.


그러나 공공연하게 제도권 교회는 목회자가 성경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심방하고, 복음 전도하는 일련의 목회 활동을 평신도의 세속적인 노동과 구별하여 특권화 시키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종교개혁의 핵심가치 중 중요한 한 가지를 놓치게 된다. 종교개혁자들이 생존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소명과 직업을 예리하게 구분했는가? 우리가 만일 이 지점에서 교회 사역을 노동이 아닌 특권화한 ‘사역’으로 간주하고, 일반적인 노동과 구별하여 성과 속의 영역으로 나눈다면 ‘모든 신자는 제사장’이라는 개념과 가치를 훼손하는 것 아닌가? 목회와 노동 사이의 분명한 개념정립을 하지 않는다면 실제적인 측면에서 나쁜 사례들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예컨대, 목회자를 ‘성직’이라는 미명아래 목회 ‘훈련’과 거룩한 ‘사명’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쉼을 허락하지 않는 노동력 착취와 비인간적인 대우를 서슴지 않는 목회자들 사이의 악한 관행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묻고 싶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라는 노래를 부르며 내세의 천국을 소망하는 것만이 복음적인 삶인가? 그러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새번역 주기도문; 마태복음 6:10)라고 기도를 가르치신 예수님의 뜻은 무엇인가?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서 다양한 직업으로 노동하며 살아간다. 때문에 신자들의 다향한 직업과 노동처럼 목회자의 ‘교회사역’도 노동이다. 신자의 세속적인 직업과 목회자의 교회사역은 동등하게 신성하다.



노동은 삶의 기쁨과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촉진제

만약 우리가 목회자의 교회사역을 노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노동 자체를 천시하거나 혐오하는 마음이 자리 잡은 것인지 모른다. 또한 목회자의 교회사역을 노동이라고 말할 때, 목회자는 ‘성직’으로 특화된 계급이 아니라 모든 신자와 더불어 동등하게 제사장적인 소명을 수행하는 자로서의 부르심을 완수하는 것 아닐까. 코헬렛은 먹고, 마시고 노동으로 즐거워하는 것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밝혔다(2:24; 3:22; 5:18-19; 8:15).


때로는 노동의 유익과 가치를 보상받지 못하는 부조리하고 불편한 현실과 부딪히곤 하지만, 전도서의 가르침처럼 노동을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사건들과 연결하여 창조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노동은 신성한 사건이다. 그러하여 노동은 신학적인 문제요, 각 사람의 생존과 기쁨을 위한 삶의 문제요, 사회를 건강하게 존속시키는 기반으로서 사회적인 문제다. 노동은 단지 개인의 경제적 이익과 잠재력 발휘만이 아니라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촉진제가 된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하늘 아래서’ 행하는 갖가지 ‘노동’은 하늘 아버지의 뜻을 땅에서 이루는 거룩한 일이 된다. 이것이 주님 다시 오실 때가지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 가는 모든 신자의 ‘사명’ 아닌가.


김순영/《어찌하여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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