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영의 구약 지혜서 산책(4)


경쟁이 아닌 협력과 공생을 위하여


어떤 향기도 열정도 재미도 없는 건조한 글을 꼽으라면 교과서다. 이것은 학교공부에 흥미를 못 느끼고 어정쩡한 시간을 보내며 가끔씩 무료하면 아무거나 읽던 중고등학교 시절 느꼈던 나의 생각이다. 그런 내가 마흔을 훌쩍 넘긴 세월을 지내며 십대 청소년기의 아들에게 “학교공부도 잘 해야지”라고 말하는 학부모가 되어있다. 그렇게 나는 세월과 함께 평범한 학부모의 대열에 서있다. 그런데 문제는, 학교공부가 시민적 교양과 덕성을 목표하는 교육이 아니다. 경쟁에서 이긴 소수의 사람들에게 우월성을 부여하는 시대의 폭력성과 연계된 상태다. 이 때문에 조금이라도 다른 삶을 살아야지 다짐했지만,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나는 기독교인이고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기도 한다. 부끄럽다. 그런데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자들의 동맹과 힘의 위력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아들이 낙오하지 않기를 바라는 자식사랑과 꿈으로 포장한 속물적 욕망 때문이다.


이 속물적 욕망을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멋지게 포장해도 소용없다. 이런 삶에 말을 걸어오는 구약 지혜서의 말씀이 ‘다른’ 대안의 삶을 꿈꾸고, 상상하라고 심장과 옆구리를 찌른다. 한걸음 더 나아가 지혜의 가르침이 생각을 고치고, 태도를 교정해야 할 책무 속으로 밀어 넣는다. 특히 전도서의 저자 코헬렛은 타인들과의 경쟁에서 우월적 지위를 차지하려는 발버둥을 멈추고 협력과 공생의 문제를 고민하고 발설하도록 설복시켜 지혜의 말씀 곁으로 바짝 끌어들인다.



코헬렛은 농경사회에 기반을 둔 고대 사회에서 살았지만, 상업적인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경제적인 잉여 소득을 남기려는 시대적 욕망을 지켜본 사람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전도서는 그가 살았을 시대적 배경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 곳곳에는 인간의 수고, 곧 ‘노동’의 문제뿐만 아니라 경제적 ‘이익’과 관련된 어휘와 질문들이 반복된다. 이 때문에 그의 삶의 자리를 어림할 뿐이다.


코헬렛은 위로받을 길 없는 억압적인 현실의 문제를 돌이켜 보고(전도서 4:1-3), 인간의 수고와 성공의 위력이 아니라 허상에 관심을 가졌다. 코헬렛은 누구의 위로도 얻지 못하는 온갖 억압과 사람들 사이에 일어는 시기심, 거기서 비롯된 경쟁을 비웃는다(4:4-6). 그리고서 그는 그 허망한 수고, 또는 노동을 극복하고 함께 나누는 행복의 가치를 논한다(4:7-12). 코헬렛은 동료애는 물론 함께 나누는 행복을 수호할 가치로 여겼다. 코헬렛의 말을 한 문장 한 문장 되새김질하듯 읽다보면, 그가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자인지 지금 나와 함께 같은 시대를 사는 지혜 선생님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시대적 적실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코헬렛은 쉼을 모르고 일만하는 한 남자의 짧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남자는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불행한 존재다(4:8). 이 남자의 삶을 관찰했을 코헬렛의 말은 그의 시대를 뛰어넘어 경쟁 때문에 공동체적 가치를 모르거나 외면하며 사는 지금, 그리고 오고 오는 모든 세대를 향해있다. 그의 말이 어디서 들어본 듯도 하여 독자는 무심히 지나쳐 버릴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짧고 단순한 문장이 고요히 심장을 파고든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4:9, 개역개정)

혼자보다 둘이 낫다.

두 사람이 함께 할 때에,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4:9)

그 가운데 하나가 넘어지면,

다른 한 사람이 동무를 일으켜 줄 수 있다.

그러나 혼자 하다가 넘어지면, 딱하게도,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

또 둘이 누우면 따듯하지만,

혼자라면 어찌 따듯하겠는가?(4:11)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4:12, 새번역).



가장 좋고, 가장 많은 것을 홀로 차지하는 것이 승리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나눌 사람이 없다면 무슨 유익이겠는가. 불행한 노고일 뿐이다(4:9). 코헬렛이 살았을 세상과는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지금은 사회적인 억압과 경쟁에 내몰려 쉼을 박탈당하고, 위로해 줄 사람 없는 인생들이 허다한 세상이다. 이웃과 즐기지 못하고 수고만하며 한탄하는 한 남자의 말, “어찌하여 나는 즐기지도 못하고 사는가? 도대체 내가 누구 때문에 이 수고를 하는가?”(4:8, 새번역) 부자였어도 행복하지 않았던 고독한 남자의 말이 현대인의 외롭고 쓸쓸한 삶을 들여다보는 창문이다.


끝없는 과잉의 수고와 거기서 얻은 부요함을 자랑하는 한 남자의 일화와 그의 질문은 현대 사회와 신앙 공동체에게 던지는 사회학적이며 신학적인 질문이다. 더군다나 코헬렛은 이것 역시 헛되고, 불행한 일이라고 판단했다(4:8). 그의 말 때문에 현대사회의 절제되지 않는 탐욕과 포장된 자아실현, 그리고 초과수익을 얻기 위한 과도한 노동뿐만 아니라 타인에 의해 강요된 장시간의 노동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 그뿐인가. 노동자의 쉴 권리를 빼앗거나 축소시킨 거대자본가의 배후에는 인간을 그저 소비재로 전락시켜버리는 탐욕적인 착취가 있다. 내적인 욕망의 분출 때문이든 외부적인 압력에 의한 것이든 끝내 과도한 노동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연민마저 빼앗고 함께 누릴 연대의 기쁨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가 코헬렛의 가르침을 심장에 새긴다면, 남보다 더 높고 많은 것을 차지하기 위한 시기심에서 비롯된 경쟁은 자신을 억압하는 일이지 행복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삶의 태도를 바꿔야 한다. 돈의 위력이 지배하는 우리 사회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고 타인을 짓밟는 무한 경쟁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무차별적인 경쟁은 끝내 나와 타인 사이에서 갈등관계를 조장하여 공동체의 불신과 분열을 가져올 뿐이다. 그러나 고대의 지혜 선생 코헬렛은 경쟁을 권하는 사회에 무기력하게 포섭당한 개인에게 경쟁보다 나은 협력과 공생을 요청한다. 하여 오래된 그의 말씀은 소수의 우월적인 지위 확보를 위해 다수를 희생시키는 경쟁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공동체적인 삶의 행복 실현을 요청하는 부름이다. 기독교 신앙공동체의 권위 있는 말씀으로서의 정경, 전도서의 가르침과 부름에 교회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김순영/백석대 교육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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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 지혜서 산책(3)


아름다움과 부조리가 공존하는 세상


인생은 아름다운가? 아름답다. 인생은 덧없는가? 덧없다. 허무하다. 부조리하다. 저마다의 인생은 역설과 모순투성이로 가득 차 있다. 누군가의 인생도 세상사도 온통 아름다움과 부조리로 뒤엉켜있다. 그러하여 격한 희망에 감격하다가도 삶의 낙관은 여지없이 무너지곤 한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인가.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 선생이며 전도서의 저자 코헬렛은 이미 간파했으니, 그는 세상사의 양극적인 현실과 역설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이것은 그가 그토록 집요하게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헤벨’(헛됨, 무익함, 덧없음, 허무, 부조리)과 생의 ‘즐거움’을 말한 이유다.


전도서는 ‘헤벨’의 책이지만, 동시에 삶의 즐거움을 촉구하는 “기쁨의 복음서”다. 저자 코헬렛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삶의 기쁨을 용기 있게 확신하면서, 인생의 밝고 어두운 면을 정직하게 대면시킨다. 그는 삶과 죽음의 양극적 현실을 가로질러 삶의 온갖 양태들을 공정하게 치우침 없이 말한다. 이것은 코헬렛이 인생의 절망적인 상황을 목격하고서도 회피하지 않아서다. 그는 아무리 수고해도 결실 없는 노력과 탐구를 거침없이 말하기도 한다(1:12-2:11). 그런 그가 삶의 양극적인 양태를 노래한 ‘때’에 관한 시(3:1-8)는 유명하다. 그가 살아온 세월에서 단련되었을 언어의 단아함과 경쾌함이 멋지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살릴 때가 있다.

허물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

통곡할 때가 있고,

기뻐 춤출 때가 있다.

돌을 흩어버릴 때가 있고,

모아들일 때가 있다.

껴안을 때가 있고,

껴안는 것을 삼갈 때가 있다.

찾아 나설 때가 있고,

포기할 때가 있다.

간직할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다.

말하지 않을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다.

전쟁을 치를 때가 있고,

평화를 누릴 때가 있다(전도서3:1-8, 새번역)



이렇게 코헬렛은 삶과 죽음사이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관찰하여 얻은 통찰을 간결한 언어와 은유적인 심상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이 천년 넘는 세월 지나 코헬렛의 시는 1965년 미국의 유명한 5인조 록밴드 ‘버즈’(The Byrds)가 발표한《Turn! Turn! Turn!》이라는 곡으로 재생되었고,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인생이 각자의 계획한대로 원하는 시점에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렇지 않음을 보았기에, 코헬렛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사람에게 지워준 짐이라고 말했다(3:10). 이것은 하나님에 관한 진실이요, 삶에 관한 진실이다. 코헬렛이 지은 시 때문에 삶의 어두움과 밝음의 공존은 낯설지 않은 것이 된다.


초월적 존재에 대한 고백

‘해 아래’ 일어나는 갖가지 양극의 사건들과 삶의 짐을 사람이 통제할 수 있을까? 코헬렛은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온갖 일들이 일어나는 신의 결정에 대한 고백을 시로 담아냈다. 그렇다고 코헬렛이 결정론이나 숙명론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죽고 사는 문제부터 일이 성취되는 정확한 때와 순간을 결정할 권한이 사람에게 없다는 깨달음의 표현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하늘 아래’ 사는 인간의 취약한 조건에 대한 깨우침이다.


또한 이것은 인간의 구체적이고 특정한 온갖 상황 속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과 인간 행위 사이에 존재하는 역동적관계의 표명이다. 그러니까 코헬렛은 삶에서 변화무쌍함을 겪는 사람들과 사건들에서 운명을 반전시키는 하나님의 역동성을 본 것이다. 하여 우리는 한 줄 한 줄의 시행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행동과 책임 사이의 미묘함과 섬세함을 성찰해야하는 여행길에 초대받은 셈이다. 이 노래를 그저 삶의 밝음과 어둠, 긍정과 부정의 현상만을 묘사하려고 쓴 것이겠는가. 코헬렛은 삶의 긍정성과 부정성 사이를 오가는 삶의 현실에서 ‘시간’(때)의 지배자를 생각한 것이다. 시간을 초월하지 못하는 시간에 소속된 사람이 모든 사건들마다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의 인식이다. 사람 나름의 똑똑함이나 온갖 사건의 인과관계 밖에서 통제하시는 초월적인 절대자를 생각한 노래다.



그래서일까. 코헬렛은 확실히 죽음과 삶 중에서 둘 중 어느 하나를 더 선호하지 않았다. 그는 살아있는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자들이 더 복되다고 말하거나 아예 아직 출생하지 않은 자가 더 낫다(4:2:3)라고 까지 말한다. 반대로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9:4)라며 살아있음의 가치를 강조하기도 했다. 코헬렛은 그렇게 삶의 양극적 상황과 그것의 가치를 동등하게 존중한다. 이것은 지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양극의 사건들과 초월적 존재 하나님이 엮어가는 운명과 역사를 보는 통찰이다. 그러면 이에 대한 우리의 적절한 반응은 어떠해야 할까.


“성경 전체에서 신의 섭리에 대한 가장 위대한 진술”로 극찬을 받은 코헬렛의 말이 있다. 전도서 본문이 설교되지는 않아도 설교 강단에서 인용되는 구절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3:11, 개역개정)


코헬렛의 이 말은 신앙인들의 희망을 담은 공론이다. ‘해 아래’ 일어나는 온갖 사건들 사이에서 ‘헤벨’을 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인생에게 주는 지혜교훈이다. 오랜 세월 지나 사도 바울역시 코헬렛의 말씀을 인용하듯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로마서 8:28)라고 전하지 않았던가. 


양극이 교차하며 반복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코헬렛의 결정적 한 마디는 더 있다. 그는 사람마다 먹고, 마시고, 노동하며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으며,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3:13). 이것은 아름다움과 갖가지 기쁨과 사랑, 그러나 헛됨, 덧없음, 허무, 부조리가 공존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수행할 수 있는 소박하지만, 강력하고 지혜로운 행동지침으로 우리 앞에 놓여졌다. 그러니 오늘 하루 땀 흘리고 소박한 밥상에서 먹고 마시며 즐거워했다면, 이것 보다 더 위대한 선물은 없다. 혹시, 지혜 선생님 코헬렛의 소박한 일상의 기쁨을 수용하면서도 뒤끝이 불편하다면, 우리는 그 불편함의 크기만큼 시대의 욕망에 충실한 노예가 된 것인지 모른다.


김순영/백석대 교육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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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 지혜서 산책(2)


지혜는 생명나무라


구약의 지혜는?

지혜란 무엇인가? 인생의 방향을 잡는 기술인가, 아니면 어떻게 살아야 사람답게 살 수 있는가를 아는 지식인가. 구약에서 지혜는 전문적이고 숙련된 기술이나 예술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지만(출애굽기 36:1-2), 능숙한 기술보다는 앎과 태도에 강조점이 있다. 구약신학에 큰 보폭을 남긴 폰 라트(G. von Rad)는 “지혜는 사물의 근저에 하나님의 질서, 즉 조용하고 거의 느낄 수 없지만 균형을 이루게 하는 질서가 있음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자연과 세계 질서, 그리고 인간의 삶에 깃든 창조주 하나님을 표현한 멋진 정의다. 이것에 더해 구약 지혜서의 독특한 지혜개념은 기술이나 지식의 중성적 가치보다는 도덕화되고 신학화되었다. 왜냐하면 지혜와 지식은 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잠언 1:7; 9:10; 31: 30; 전도서 12:13; 욥기 28:28).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1:7, 새번역)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한 이를 아는 것이 슬기의 근본이다(9:10, 새번역)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욥기 28:28, 개역개정)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도서 12:13, 개역개정)


지혜의 자리는 마음에

고대 이스라엘의 현자들에게 지혜는 인간의 마음과 줄곧 맞닿아 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지혜가 거처하는 자리는 마음이다. 의지와 의사결정의 자리도 마음이다. 곧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예컨대 구약의 지혜자는 어리석은 자를 마음 없는 자 취급한다. “음녀”에게 유혹받기 쉬운 젊은 남자를 “지혜 없는 자”(잠언 7:7, 개역개정)라고 비웃는다. 음녀의 본래 히브리말 뜻은 ‘낯선 여자’, 또는 ‘금지된 여자’, ‘이방 여자’를 일컫는다. 모든 적법한 관계를 벗어난 여자를 지칭한 말이다. 거기다 “지혜 없는 자”의 문자적 의미는 ‘마음이 부족한 자’이다. 곧 “지각이 부족한”(NAS, lacking sense), 또는 “분별력이 없는”(NIV, no sense) 사람이다. 한 마디로 마음이 부족하면 지혜가 없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이다.



지혜는 생명나무

히브리적인 사고에서 지혜와 어리석음의 관계는 좀 더 근원적인 영역과 연결된다. 히브리말의 ‘마음’은 곧 ‘심장’이다. 심장과 마음이 같은 형태다. 때문에 마음을 잃으면, 생명까지 잃을 수 있다(잠언 7:26-27).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지혜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주님의 은총을 얻는다고 믿었다(잠언8:35). 지혜가 은, 금, 보석보다도 가치 있고 탁월한 것은 물론이고(3:14), 지혜는 모든 것들을 능가하는(3:15) 생명나무다(3:18).


‘생명나무’는 우리를 태곳적 창조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에덴동산에 살았던 남자와 여자를 떠올려 보라. 하나님은 남자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지 말라고 금하셨다(창세기 2:16-17; 3:11). 이때 생명나무는 직접적인 금지의 대상은 아니었다(2:9). 그저 배경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가 주 하나님의 금지명령을 어긴 후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 비로소 생명나무의 존재 이유가 밝혀진다.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3:22-23, 개역개정).


우리는 창조 이야기 끝자락에 이르러 사람이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서 창조 이야기는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천상의 존재들, 곧 불 칼을 든 그룹들(히브리말, ‘케루빔’)을 하나님이 에덴 동쪽에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는 것으로 3장이 끝난다(3:24). 하나님이 생명나무가 있는 에덴동산의 접근을 차단하셨다. 그러니까 에덴동산에 살았던 최초의 인류는 하나님 명령을 지키지 않은 반역 때문에 생명나무에서 분리되어 영원불멸의 기회를 잃은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잠언의 지혜는 창조 사건의 마지막을 뒤집고 있다.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3:18, 개역개정).


지혜를 얻은 자에게 지혜는 생명나무다. 지혜를 얻은 자는 금지된 곳에 들어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지혜는 생명나무’라는 은유적인 경구로 지혜가 죽음의 저주를 피할 약속처럼, 금지된 에덴에 접근할 수 있는 방편처럼 말한 것이다. 하늘의 계시를 받고 전하는 예언자가 아니라 삶의 경험과 관찰을 토대로 진리의 말들을 생산한 지혜자에게서 ‘생명나무’에 깃든 종말론적 의미가 드러났다. 그러하여 이 땅에 사는 동안 지혜는 생명을 약속받는 일이어서 지혜를 발견하고 명철을 얻은 사람은 복되다. 행복하다(3:13).


지혜는 자연의 리듬에 맞추어 사는 삶, 그리고 마침내

이처럼 태곳적 창조 이야기와 분리할 수 없는 지혜는 생명과 관계된 것으로서,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삶과 직결된다. 순리를 따르는 삶이란, 하나님이 수립하신 창조질서 원리에 맞추어 사는 삶이다. 구름이 이슬을 내리는 자연의 온화함처럼, 계절의 변화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 나무들처럼, 밤과 낮의 순환과 별들의 움직임처럼,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리듬에 맞추어 일상을 질서 있게 살아가는 삶이다. 하여 구약에서 말하는 지혜의 삶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세계의 질서를 발견하고, 그 리듬에 따라 사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자연스러움’이라고 말하련다. 때로는 고된 일로, 때로는 휴식과 즐거움으로, 때로는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균형 잡힌 도적적인 행위들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매일의 삶을 채워가는 삶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스러움’을 버리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맞서 싸우며 물신의 노예가 된 시대를 산다. 구약의 지혜가 우리 사회와 교회에게 성공에 목말라하는 일그러진 모습을 비추는 거울로서 속물적인 욕망과 성공 신화에 열광하는 시대정신을 교정해 줄 것이다. 모름지기 지혜 추구와 참 행복은 ‘자연스러움’을 거스르는 반역과 욕망의 성취가 아니라 자연의 순리에 맞추는 마음의 방향과 태도에 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그 지혜는 접근금지 되었던 생명나무의 길로 우리를 안내할 것이다. 이것은 길과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지혜라고 선언된 이유일 테다(고린도전서 1:30).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30, 새번역).


김순영/백석대 교육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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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 지혜서 산책(1)


전도서의 저자 전도자는 여성일지도


구약의 지혜서를 말해야하는 이유


나는 신학을 전공학문으로 결정하고 공부하고 가르쳐왔지만, 잘한 일인지 수없이 돌이켜봤다. 나는 신학하기의 영토에서 외부자이며, 방관자적인 처지에 있음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신학을 공부할수록 신학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 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신학이 자칫 관념적이고 논리적인 놀이로 그쳐버려 너절한 삶에 생기를 불어 넣을 수 없겠다, 라는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을 때, 구약 지혜서 연구는 세상의 갈등과 모순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신학적인 의심을 가능하게 했다. 특히 전도서는 진리와 현실 사이의 긴장된 괴리감을 좁혀 갈 수 있었던 짧지만 가장 심오한 책이요 지혜의 말씀이다.


무엇보다 전도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정경의 말씀으로서 구속 역사보다 창조의 보편적 질서에 관심을 갖도록 재촉한다. 그럼에도 A는 B다, 라는 주류 지혜 전통을 향해 A는 B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용감히 말할 줄 아는 ‘지혜자’(전도서 12:9)의 목소리가 우세한 책이다. 전도자는 우주의 보편적 질서를 관찰하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모순에 관심을 두었다. 이것은 현실의 모호성을 살핀 것이며, 인류의 평등을 말하되 획일성을 강요하지 않는 지혜의 가르침이다. 때문에 나는 한국교회 강단에서 소외된 구약 지혜서의 진실한 목소리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고동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도서를 시작으로 구약 지혜서 말씀의 숲을 산책해보려 한다.



전도자가 솔로몬? 글쎄요


구약의 책들 중에서 예언서와 지혜서(욥기, 잠언, 전도서, 아가서)의 첫 장 첫 절은 ‘표제절’로서 저자 이름을 밝힌다. 욥기만 예외다. 그런데 표제절 중에서 미묘한 수수께끼 놀이를 하는 전도서 1장1절은 흥미롭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개역개정)


‘전도자’로 번역된 말은 히브리어의 ‘코헬렛’이다. ‘전도자’라는 명칭은 고유명사보다는 직업이나 직책에 관계된 이름처럼 보인다. 현대 영어 번역본들도 “설교자”(NAS, KJV, RSV), “선생”(NIV)으로 번역되어 직능의 의미가 강하다. 실제로 코헬렛은 자료를 “수집하다”, 사람들을 “소집하다”, 라는 “카할”동사의 여성형 분사다. 말하자면, 회중이나 공동체를 소집하는 사람, 회중의 인도자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번역을 피하여 히브리 성경제목을 그대로 음역한 ‘코헬렛’(공동번역, TNK)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이처럼 ‘코헬렛’은 고유명사인지 직책과 관련된 보통명사인지 논란의 대상이고, 여전히 모호하다.


나는 코헬렛이라는 명칭이 익명성을 고집하는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 선생의 직능적인 정체성을 표현한 필명이지 싶다. 왜냐하면 저자 코헬렛은 책을 마무리하는 끝맺음말에서(12:9-14) 자신이 어떤 일을 했던 사람인지 분명히 밝히기 때문이다.


전도자는 지혜자이어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12:9-10, 개역개정)


그는 수집의 대가였고, 성문 앞 광장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 진리의 말들을 전하는 사람이었다. 가르치고, 따져보고, 연구하고, 조사하고, 정리하여 새롭게 잠언들을 생산한 지혜자였다.


그러나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은 본문에서 솔로몬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았음에도 전도자와 솔로몬을 동일시 해왔다. 다윗의 아들 중에 ‘코헬렛’이라는 직계 아들이나 후손이 없음에도 말이다. 물론 전도자를 솔로몬과 동일시할 만한 근거는 있다.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왕이었다”(1:12)라는 말은 솔로몬을 명시하지 않았어도 솔로몬을 상기시킬만한 쾌락, 거대한 토목사업과 관련한 업적, 권력이 제공한 유익들을 묘사하고 있으니 말이다(2:1-10).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헛됨’(히브리말, ‘헤벨’)과 ‘바람 잡는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2:11). 이것은 솔로몬의 지혜와 영광을 드높이는 것이 아니라 솔로몬의 권력과 영광을 ‘무’(無)로 만들어 버린다.


위대한 지혜의 모범, 건축과 토목사업, 어마어마한 부, 수많은 처첩들에 이르는 모든 것을 솔로몬 자신의 반성적 성찰이라고 말하기에는 열왕기와 역대기의 기록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다. 한 마디로 고대의 지혜자 코헬렛은 솔로몬을 빗대어 ‘솔로몬 전통의 패러디’를 감행하고 지혜와 권력, 그리고 집중된 부를 문제시했다. 솔로몬의 모든 통치와 웅장함을 헛된 바람으로 일축시켜버렸다. 그러니까 솔로몬을 연상시킨 위대함의 묘사들은(1:12; 2:1-10) 문학적인 픽션인 셈이다. 마치 자신이 왕인 것처럼 왕의 의상을 걸친 저자의 ‘페르소나’로서 문학적인 장치를 활용해 솔로몬의 영광을 ‘무’로 만든 것이다. 하여 자끄 엘룰(Jacques Ellul)의 말대로 “이것은 어떤 신학적 논쟁보다도 더 큰 스캔들이다.”


그러면 “신학적인 스캔들”의 발의자 전도자가 솔로몬이 아니면 누구인가? 솔로몬의 위대함을 ‘무’로 만든 지혜자는 ‘코헬렛’이라는 필명의 여성일 수 있다. 너무 과격한가? 이유는 있다. 전도자의 말(1:1)을 서술하는 “전도자가 말했다”라는 표현이 세 번 출현한다(1:2; 7:27; 12:8). ‘코헬렛’ 자체도 모호한데, “말했다” 동사는 더 애매하다. 히브리어 단어는 남성, 여성으로 구분되는데, 두 번의 남성 동사(1:1; 12:8)와 한 번의 여성 동사(7:27)를 사용했다. 전문적인 독자들 중에는 필사자의 실수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필사자의 오류가능성, 인정한다. 그러나 말놀이를 즐기는 코헬렛의 문체를 생각하면, 이것은 여성인지 남성인지 애매하게 수수께끼처럼 처리하려 했던 의도적인 실수는 아니었을까?


동사의 이중적인 사용은 독자의 상상력을 발동시켜 언어라는 비밀의 방을 두드리도록 유혹한다. 과도한 추측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고대 사회에서 여성 지혜자의 존재 가능성은 열려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전문성을 띤 여성 지혜자들이 존재했었다(사사기5:29; 사무엘하14:2; 20:16). 예컨대, “지혜로운 시녀들”(개역개정, 사사기5:29)은 정확하게 허드렛일을 하는 시녀가 아니라 귀족 계급의 지혜로운 여성들을 일컫는 말이다. 전문성을 갖춘 조언자들이다. 또한 요시야 왕의 개혁에 앞서 성전에서 방치되었다가 발견된 율법책의 진위여부를 묻는 제사장과 왕의 사람들에게 여자 예언자 훌다가 정경성을 확인시켜주고, 하나님의 계시를 왕에게 전달했다(열왕기하 22장). 이후 요시야 왕의 개혁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 글쓰기와 읽기 능력을 갖춘 여성의 존재 가능성을 방증하는 일화다.


코헬렛이 스스로를 솔로몬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여성 동사를 사용했지만 여성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코헬렛이 잠언의 수집자요, 창조적인 생산자답게 말의 세계를 즐기려했던 것은 아닐까. 누군가 전도서의 저자가 여성인지 남성인지를 따지는 것이 해석에 어떤 가치가 있는가를 묻는 다면, 나는 잠언 31장에서 왕을 교훈하는 어머니(잠언 31:1-9)와 이른바 ‘현숙한 여성’(31:10-31)을 노래한 맥락을 따라 남성과 여성의 차별적 고리를 끊지 못한 사회에게 해독제요, 수많은 신앙의 여성들에게 위로가 된다고 말하련다.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고유한 이름을 말하지 않은 ‘코헬렛’(1:1)이라는 필명의 지혜 선생(12:9-14)의 가르침이 전도서다. 우리의 삶은 수수께끼를 푸는 것 같아서 재미와 즐거움이 있지만, 모호함과 고통이 존재한다. 전도서의 저자 코헬렛은 대중이 모이는 광장과 혼란에 맞서 투쟁하는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에게 지혜를 말했던 현장성을 갖춘 지식인이었다. 고도의 수사적 전략이 녹아든 ‘해 아래’ 일어난 일들에 대한 관찰과 비평적인 코헬렛의 견해들, 곧 그의 혹은 그녀의 말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은 수고로운 즐거움이다. 그러나 ‘찌르는’(12:11) 고통이 있으니 조심하시길.


김순영/백석대 교육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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