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봉의 성서 묵상, 영성의 길(6)

 

몸을 입혀라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야고보서 2:14-17)

 

1.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이라는 말은 진실이지만, 믿음이 살아 있음에도 행함으로 열매가 맺혀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씨앗 하나가 땅에 심겨져서 싹을 내고 줄기로 자라 가지를 뻗고 잎을 내고 꽃을 피운 다음 열매를 맺듯이, 믿음의 씨앗도 그런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마음과 영혼에서 시작된 믿음이 내면을 변화시키고 손과 발까지 움직이려면 어느 정도 성숙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믿음의 씨앗이 심겨지고 충분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행함의 열매가 없는 경우입니다. '마음의 고백' '입술의 시인'으로 충분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 때문에 감수해야 손해 혹은 불편을 회피하려는 본성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행함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살아있으나 행위의 열매를 맺을 정도로 성장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무엇이 옳은지도 알고 그것을 행할 능력도 있는데 실천을 회피하는 것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마음 아파하면서 믿음의 성장을 위해 노력한다면, 그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열매가 없는 것에 대해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면, 믿음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런 믿음은 죽은 것이다"라고 경고합니다. 실제로 죽었다는 뜻이 아니라, 죽은 것이나 다름 없으니, 정신을 차리라는 뜻입니다.

 

16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먹을 것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하십시오"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말씀을 기도에 적용하면 이렇게 고칠 있습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먹을 것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을 위해 "주님, 그들에게 평안을 주시고,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서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2.

 

맥락에서 제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교회 모임에서 풍성한 음식을 차려놓고 감사 기도를 드릴 , " 귀한 음식을 대하는 저희로 하여금 헐벗고 굶주린 이웃을 기억하게 하옵소서"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귀한 기도입니다. 하지만 기도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불편한 양심을 위로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것이 것입니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에 대한 진실한 마음이 있다면, 음식 차림에 절제가 있어야 하고, 실제로 자신의 지갑을 열어 가난한 사람을 돕는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도는 위선입니다.

 

물론, 기도는 그것 자체로 충분히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 자체로서 능력이 있습니다. 때로, 기도 외에는 일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마음을 다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마음 담긴 기도를 드리고 나면 기도한 일에 대해 내가 해야 일이 생각나게 되고 또한 일을 하려는 열심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 중에 성령께서 구체적으로 일을 알게 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데이빗 팀즈(David Timms)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위선으로 오인될만한 요소가 항상 있게 마련이다"라고 지적한 있습니다. 우리 시대 최고의 문장가로 꼽히는 고종석 작가가 "글쓰기의 위선" 대해 고백하는 말도 읽었습니다. '옳은 ' 대해 글을 쓰다 보니, 자신의 글과 사이에 괴리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따라 살아가려는 그리스도인에게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있게 마련입니다.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현재 상태보다 높은 경지로 나아가기를 힘씁니다. 지금 실천하고 있지는 못해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잊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바라는 이상과 그가 살고 있는 현실 사이에 괴리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만일 자신의 현재 상태에 만족하고 있다면 그의 믿음은 죽어 있다 있습니다. 괴리를 겸허하게 인정하고 벌어진 간격을 좁히기 위해 힘쓰는 것이 영성 생활의 핵심입니다.

 

누구이든지 악의를 가지고 헐뜯고자 마음만 먹으면 진지한 믿음의 사람을 '위선자' 매도할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테레사 수녀에게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삶의 이면을 알지 못하기에 생겨난 악의적인 모함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위선은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를 부정하거나 은폐하고 자신이 마치 그렇게 사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입니다.

 

3.

 

영성 생활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높은 이상을 향하여 나가기를 힘쓰며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과정입니다. 높은 부름을 알기 위해 말씀을 궁구하고, 깨닫는 대로 순종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높은 부름을 따르기 위해 기도하고, 기도한 대로 실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렇게 보면, 기도는 "하나님, 이렇게 주십시오"라는 요청인 동시에 "하나님,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라는 고백과 결단이기도 합니다.

 

중보기도의 대가로 알려진 리즈 하월즈(Rees Howells)에게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기도 중에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입니까?" 그러자 하월즈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기도가 끝난 15 지난 다음입니다." 마음을 다해 기도드린 다음에 어떻게 행동하는지가 제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말은 예배에도 적용될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예배는 축도 후에 시작된다" 말합니다.

 

우리의 영성에 육을 입혀야 합니다. 사실, 점에서 '영성'이라는 단어가 오해의 여지를 제공합니다. 영성이 '영혼의 문제' 혹은 '마음의 문제' 국한한다고 오해합니다. 이것은 성경 안에 일관되이 흐르고 있는 히브리적인 인간 이해에 반하는 생각입니다. 인간은 영과 혼과 육이 분리할 없이 융합된 존재입니다. 영성과 육성이 별개일 없습니다. 육은 영이 필요하고, 영은 육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의 영성에 손과 발이 필요합니다. 영에서 일어난 변화가 손과 발을 통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영성은 영지주의의 오류에 빠져 버릴 것입니다.

 

 (묵상)

 

눈을 감고 당신의 영성에 연결되어 있는 손과 발을 더듬어 만져 보십시오. 당신의 마음에서 일어난 변화들이 손과 발에 얼마나 신속하게 그리고 충실하게 전달되고 있습니까? 당신의 삶에 '의도하지 않은 위선'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혹시 '의도한 위선' 없습니까? 부르심의 높은 이상과 현실의 사이의 괴리가 좁아질 있도록 더욱 기도하고 실천하십시오.  

 

 

김영봉/와싱톤 한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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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봉의 성서 묵상, 영성의 길(6)

 

맡기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을 해서, 8)자기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 어찌하여 너희는 옷 걱정을 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와 같이 잘 입지는 못하였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마태복음 6:25-32).

 

 

1.

 

 

현대인들이 가장 많이 앓고 있는 병이 불안입니다. 그로 인해 매년 가파르게 치솟아온 신경안정제 소비 추세가 누그러들지 않고 있습니다.

 

불안은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 사는 사람에게 생기는 피할 수 없는 질병입니다. 현대에 와서 이 질병이 더 심각해진 것인데, 그 원인이 과학문명의 발달에 있습니다. 과거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던 일들 가운데 많은 일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통제 능력을 향상시키는 약과 기술과 장치가 끊임없이 개발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백 년 전에 살던 사람들에 비해 우리는 삶의 많은 부분을 장악하고 살아갑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즉각 해결할 방법을 찾습니다. 두통이 생기면 진통제를 찾고, 잠이 오지 않으면 수면제를 먹고, 하수구가 막히면 약품을 사다 붓습니다. 그 같은 조치가 나중에 더 심각한 문제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면서도 문제가 생기면 즉시 해결할 방도를 찾습니다. 통제에 대한 조급증이 심각해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영역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완치할 수 없는 질병이 적지 않습니다. 치료법이 개발되는 속도보다 더 빨리 새로운 질병이 발생합니다. 마음을 통제하는 일도 여전히 불가능합니다. 현대인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사람입니다. 우리 시대에 가장 똑똑하다는 스테펜 호킹(Stephen Hawking)여자가 우주보다 더 어렵다고 농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관계의 어려움을 토로한 것입니다. 사물을 연구하는 것은 쉽지만,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때로 피곤한 일입니다. 거대한 세계 경제의 흐름도 어찌 해 볼 수 없는 문제입니다. 개인이 아무리 근면하게 살아도 세계 경제가 침체에 빠지면 함께 늪으로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미래도 우리의 통제권을 넘어 있고, 죽음과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도 우리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인간에게 통제력이 약했던 과거에는 많은 것을 맡기고살았습니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 맡겼고, 믿지 않는 사람은 운명에 맡겼습니다. 통제력이 커진 지금은 모든 것을 자신의 손아귀에 잡고 통제하고 싶어 합니다. 맡기는 것은 곧 무력하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통제할 수 없는 영역들이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과거보다 불안이 더 깊어진 것입니다. 과거 사람들에게도 불안은 큰 문제였지만, 현대인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통제하고 관리하고 싶은데, 그리고 상당히 많은 것들이 그렇게 되는데, 때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현대인의 병적 불안의 원인입니다.

 

 

 

 

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중에 불안의 문제를 다룹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불안을 겪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욕심때문입니다. 욕심은 그 성격 상 한도가 없습니다. 채워도 채워도 만족되지 않는 것이 욕심입니다. 욕심이 생기면 불안이 생깁니다. 다 만족시키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 생깁니다. 게다가, 주변에 욕심껏 채우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그 불안은 더 커집니다. 실은, 그들도 욕심을 다 채운 것은 아닙니다. 욕심으로 눈이 멀었기에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그러한 시기심과 질투심이 불안을 더 깊게 만듭니다.

 

둘째는 불신앙때문입니다. 내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책임 질 사람은 나 외에는 없어 보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너무 멀어 보입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시간까지 기다리기에는 상황은 너무도 빨리 변합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쩌나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펴기 전에 다른 사람이 손을 펴면 어쩌나 싶습니다. 그래서 팔을 걷어 부칩니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미래를 대비하려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욕심과 불신앙으로 인해 마음이 불안해지면 기도의 자리로 나옵니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채울 수 없는 욕심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우려 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경우, 기도를 많이, 오래 한다는 것은 그들의 욕심의 정도를 말해 줄 뿐입니다. 욕심이 한이 없으니 한이 없이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니 아무리 기도해도 안정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만 그분의 현존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지적 승인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그분의 임재에 의지하고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고, 오늘날에도 많이 있습니다. 욕심이 특심하여 혹은 믿음이 없어서 더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을 가리켜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자”(30)라고 혹은 이방 사람”(32)이라고 하십니다. “이방 사람이라는 말은 혈통이 아니라 믿음 없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 아니라 욕심을 정화하는 과정입니다. 일상의 삶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눈 뜨게 하고, 그분께 주권을 맡기고 살아가게 만듭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기도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이 걱정하게 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걱정과 염려와 불안으로 기도의 자리를 찾았다 해도 기도의 자리를 떠날 때는 평안과 기쁨을 회복해야만 제대로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믿는 사람은 욕심을 채우는 것을 목적으로 살지 않습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만큼만 채워지는 것으로 자족합니다. 기도로써 자족하는 능력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자신의 필요에 만족하도록 마음을 바꾸어 줄 뿐 아니라 가치관을 뒤집어 놓습니다. 예수님은 들의 백합화를 가리키면서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와 같이 잘 입지는 못하였다”(29)고 말씀하십니다. 레드 카펫을 밟는 수많은 영화배우들의 치장보다 이름 없는 한 송이 들꽃이 더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하면, 결코 자족의 능력을 누릴 수 없습니다. 자족하는 능력이 생기면 비로소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33)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3.

 

기도할 때,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불안감에 발버둥 치는 것인지, 하나님을 믿기에 그분 안에서 사귐을 나누는 것인지, 스스로 판단해 보아야 합니다. 믿지 못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도는 흐려졌던 영적 시야를 회복하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눈을 뜨고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살다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잊었기에 눈을 감고 다시금 하나님에게 눈을 뜨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회복되면, 우리는 내일 걱정을 내일에게 맡기고(34) 오늘은 다만 그분의 뜻을 이루는 일에 마음을 다할 수 있습니다.

 

불안은 내일을 걱정하느라 오늘을 허비하게 만들고, 허비된 오늘은 또 다시 내일을 허비하게 만듭니다. 반면, 하나님 안에서 얻은 평안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주어지는 순간에 충실하게 만듭니다. 불안은 시간을 허비하게 만들지만, 믿음은 시간을 구속(redeem)하게 만듭니다. 시간을 구속하는 사람에게 불안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주인에게 맡겨진 삶에는 깊은 바다 속 같은 평안이 깃듭니다.

 

욕심으로 혹은 믿지 못해서 드리는 기도는 여러 가지 불안의 증상을 강화시킬 뿐입니다.

 

1) 기도로써 욕심을 구한다.

2) 기도 중에 하나님께 관심을 두지 않는다.

3) 기도 응답을 받기 전까지 불안이 사라지지 않는다.

4)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 점점 극단적인 행동을 취한다. (단식투쟁하듯 금식을 하거나, 자학적인 행동을 하거나, 싸우고 투쟁하듯 기도하거나, 어떤 조건을 걸어 기필코 응답을 받으려는.)

5) 응답을 받으면, 그로 인해 교만해진다. 자신이 하나님을 굴복시켰다고 생각하고 기도 응답에 대해 자랑한다.

6)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믿어지면 하나님을 떠나거나 기도 생활을 접는다.

 

반면,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평안의 열매를 맺습니다.

 

1) 기도 중에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

2)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 욕심이 정화된다.

3) 필요를 하나님께 맡기고 자족하는 능력을 기른다.

4) 기도 중에 평안을 얻는다.

5) 응답을 받기 위해 극단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 기도하는 마음에 늘 하나님께 대한 든든한 신뢰가 있다.

6) 응답을 받으면 감사하고 겸손해진다.

7) 응답을 받지 못해도 감사한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기에.

 

(묵상)

 

눈을 감고 당신의 마음을 살펴보십시오. 불안감이 있습니까? 근심과 염려가 있습니까? 무엇이 당신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듭니까?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눈 뜨십시오. 미래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십시오.

 

다시금 당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십시오. 당신은 욕심으로 삽니까? 기도를 통해 욕심을 채우려 노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기도를 통해 욕심을 비우려고 노력합니까? 당신의 가치관은 얼마나 주님의 그것과 닮았습니까? 당신은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믿음을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매일 그분의 임재에 자신을 맡기고 살만한 믿음을 구하십시오. 당신에게 있는 욕심을 제거해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불안감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때문에 기도하도록 힘쓰십시오.

 

김영봉/와싱톤 한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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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봉의 성서 묵상, 영성의 길(5)

 

지는 싸움을 하라!

 

 

“그 밤에 야곱은 일어나서,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데리고, 얍복 나루를 건넜다. 야곱은 이렇게 식구들을 인도하여 개울을 건너 보내고, 자기에게 딸린 모든 소유도 건너 보내고 난 다음에, 뒤에 홀로 남았는데, 어떤 이가 나타나 야곱을 붙잡고 동이 틀 때까지 씨름을 하였다. 그는 도저히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다가 엉덩이뼈를 다쳤다. 그가, 날이 새려고 하니 놓아 달라고 하였지만, 야곱은 자기에게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그가 야곱에게 물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야곱입니다.” 그 사람이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야곱이 말하였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그러나 그는 “어찌하여 나의 이름을 묻느냐?” 하면서, 그 자리에서 야곱에게 축복하여 주었다. 야곱은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뵙고도, 목숨이 이렇게 붙어 있구나!” 하면서,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하였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솟아올라서 그를 비추었다. 그는, 엉덩이뼈가 어긋났으므로, 절뚝거리며 걸었다. 밤에 나타난 그가 야곱의 엉덩이뼈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짐승의 엉덩이뼈의 큰 힘줄을 먹지 않는다(창세기 32:22-32).

 

야곱이 얍복강에서 드린 기도 이야기는 성경의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입니다. 잘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잘 못 알려져 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낸 이야기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곱처럼 기도로써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기를 소원합니다. 기도에 대해 그릇된 이미지를 품게 만듭니다.

 

알고 보면, 이 이야기는 하나님을 굴복시켜서 자신이 얻고 싶은 것을 얻어내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역이민을 갔던 야곱은 20년 만에 큰 부자가 되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거부도 되었고, 처자식도 남부럽지 않게 얻었습니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가는 야곱에게 큰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형 에서가 아직도 자신에게 품고 있을 원한이 그것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평안하게 살 수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야곱은 미리 사람을 보내어 사정을 알아봅니다. 아니나 다를까, 형 에서가 동생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사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형의 분노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9-12절).

 

하지만 그 기도만으로 안심이 되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하다 보면 그럴 때가 있습니다. 불안한 마음에 기도를 드렸는데, 기도 후에도 도대체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더 많은 기도가 필요하거나, 기도를 잘 못 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 자구책을 구합니다. 야곱이 그랬습니다. 그는 꼼수를 부립니다. 종들을 여러 팀으로 나누고 각각의 팀에 짐승떼를 나눕니다. 팀과 팀 사이에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게 하여 에서를 만나러 갑니다. 각 팀을 맡은 종에게는, 에서를 만나 가축떼를 선물로 주고 “뒤에 야곱이 오고 계십니다”라고 말하도록 일러두었습니다. 그렇게, 계속하여 선물 공세를 하면 자신이 에서를 만날 즈음에는 분노가 풀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야곱은 가족들과 함께 맨 뒤에서 따라갔습니다. 그들이 ‘얍복’이라고 하는 개울을 건너 가족들을 먼저 보내고 자신은 강나루에 홀로 남습니다. 그 밤에 “어떤 이가 나타나 야곱을 붙잡고 동이 틀 때까지 씨름을 하였다”(24절)고 합니다. 이것은 야곱이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여러 가지의 꼼수를 쓰고 나서도 야곱은 안심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확답을 받을 때까지 기도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과 씨름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Leloir - Jacob Wrestling with the Angel" by Alexander Louis Leloir>

 

살다 보면, 속삭이듯 기도할 때도 있고, 잠잠히 기도할 때도 있으며, 통곡하며 기도할 때도 있고, 황홀한 사귐으로 기도할 때도 있으며, 싸움하듯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삶의 상황에 따라 감정에 정직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만일 기도가 늘 같은 감정, 늘 같은 어조라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늘 운다면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기도할 때마다 늘 고성으로 기도한다면 혹은 기도할 때마다 침묵하고 있다면,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있는 것인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야곱은 감정에 정직한 사람이었기에 싸움하듯 기도했습니다.

 

“그는 도저히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25절)는 말은 야곱이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동이 트고 다시 밤이 오더라도 야곱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야 말겠다는 태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의 엉덩이뼈를 치셨습니다.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 포기할 줄 알았는데, 야곱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자기에게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26절)고 합니다. 야곱이 바라던 축복은 형 에서로부터 보호해 주시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서 물으십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27절) 이 무슨 뜬금없는 질문이란 말입니까? “야곱입니다”라고 대답하자, 하나님께서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28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은 ‘발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입니다. ‘싸우는 자’ 혹은 ‘속이는 자’라는 뜻도 가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십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새 이름을 주셨다는 것은 새로운 존재로 부르셨고 새로운 운명으로 초청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는 이제 사람을 대항하여 싸우는 운명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대로 하여 싸우는 운명으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상대로 하여 싸운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싸운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이름을 받은 야곱은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29절)라고 청합니다. 이즈음에서 야곱은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자신이 이길 수 없는 대상과 싸우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야곱의 관심사는 이제 하나님에게로 옮겨 갔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야곱의 관심사가 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다가올 위험으로부터 보호 받는 것만이 그의 관심사였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그의 관심사는 자신의 ‘문제’로부터 자기 ‘자신’에게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에게로 옮겨집니다. 자신을 새로운 존재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어찌하여 나의 이름을 묻느냐?”(29절)고 반문하십니다. ‘이름을 안다’는 말은 그 사람을 소유하고 조종한다는 뜻입니다.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기를 거부하신 것은 당신을 소유하거나 조종하려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어딜 가나 하나님은 임재하시고, 그 하나님은 늘 새로운 방식으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자신을 열고 살아야 합니다.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는 대신,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야곱에게 축복해 주십니다. 목전에 둔 위험으로 안전할 것이며, 고향 땅에서 잘 정착하고 번영할 것을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이 떠나가신 후에 야곱은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뵙고도, 목숨이 이렇게 붙어 있구나!”(30절)라고 탄식하고는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지었습니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벧엘에서는 꿈에 하나님을 뵈었지만, 브니엘에서는 하나님을 직접 체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자 야곱에게는 어떤 문제든지 대면할 용기가 생겼습니다. 새벽이 되어 그 자리를 뜨는데, “해가 솟아올라서 그를 비추었다”(31절)고 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야곱의 삶에 새로운 역사가 열린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엉덩이뼈가 어긋났으므로, 절뚝거리며 걸었다”(31절)고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새로운 존재가 되어 새로운 운명을 살아가야 하는 야곱은 그 대가로 큰 값을 치룬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기도에 대해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얻습니다.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기도하게 만듭니다.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우리는 자주 자신의 한계를 절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며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일입니다. 심각한 문제를 만났음에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갔다가 우리는 하나님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이 기도에서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면한 문제보다 우리 자신에게 관심을 두십니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그런 문제를 만들어낸 우리 자신이 진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보게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또한 당신과 우리의 관계가 새롭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야곱은 당면한 문제를 해결 받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야곱이 당신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 복이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 그 새로운 관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더 우선이며 더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다른 것은 그 후에 따라오는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새롭게 만난 후에 형의 분노로부터 보호받는 복을 얻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야곱과 하나님의 싸움에서 누가 이겼습니까? 오늘의 본문은 마치 야곱이 이긴 것처럼 그리고 있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이긴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고자 하셨으면 얼마든지 야곱을 뿌리치고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이 이겼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야곱은 힘으로 하나님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대신, 그는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를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을 이겼습니다. 하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그것이 인간이 하나님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안 된다는 철저한 신뢰와 믿음은 하나님을 어쩌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 만남 후에 야곱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한 싸움 즉 '지기 위한 싸움'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쓴 그리스 소설가 니코스 카잔자키스(Nikos Kazantzakis)가 수도원을 찾아다니다가 어느 수도사를 만납니다. 그 수도사는 금세 쓰러질 것처럼 기진맥진해 있었습니다. 카잔자키스가 묻습니다. “수도사님은 아직도 사탄과 씨름을 하고 계십니까? 너무 힘들어 보이십니다.” 그러자 그 수도사가 대답합니다. “웬걸요. 사탄과의 싸움은 벌써 끝났습니다.” 카잔자키스가 되묻습니다. “아니, 그러면 누구와 싸우기에 그렇게 지쳐 있습니까?” 수도사가 대답합니다. “하나님과 싸우지요.” 카잔자키스가 놀라 묻습니다. “하나님과 싸운다구요? 감히 이기리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러자 수도사가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에게 지려고 싸웁니다. 그런데요, 지는 것이 이토록 어렵습니다.”

 

프레데릭 뷰크너(Frederick Buechner)는 야곱의 얍복강 이야기를 The Magnificent Defeat 즉 “화려한 패배”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패배했지만, 그것은 화려한 패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감복하시고 그를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 주셨고 새로운 운명에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영광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패배하려는 씨름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려는 노력이며,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려는 노력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얻으면 우리의 인생에 새로운 해가 솟아오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가 구할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사실, 기도를 통해 우리가 얻어야 할 복은 하나님과 새롭게 만나 그분 안에서 새로운 인생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기도는 하나님을 굴복시키려는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 지려는 노력이라는 사실을, 이 이야기를 통해 배워야 할 것입니다.

 

(묵상)

 

당신은 기도로써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기도로써 구할 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기도로써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하나님께 새 이름을 받았습니까?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새로운 운명을 발견했습니까? 앞으로의 기도가 '지는 싸움'이 되도록 하십시오.

김영봉/와싱톤 한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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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봉의 성서 묵상, 영성의 길(4)

 

바라보라!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고린도후서 3:17-18).

 

신학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제가 공부하고 싶었던 신약성서학 분야에 새로운 교수님이 부임하셨습니다. 저는 그분의 문하생으로 들어갔고, 나중에는 조교로 그분을 도왔습니다. 저는 할 수 있는 대로 그분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려고 힘썼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그분과 사무적인 관계로부터 인격적인 관계로 나아갔고, 저의 은사라 할 만한 분이 되셨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유학을 나오기 전에 그분이 맡으신 강의를 몇 주간 동안 대신 맡게 되었습니다. 제 강의를 듣고 나더니 학생들이 제게, “강의하는 것이 교수님과 똑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말을 듣고 의아하게 느꼈습니다. 그분을 닮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 일이 없었고, 저 자신은 그런 줄을 전혀 몰랐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 선생님을 존경하고 그분의 강의를 집중해서 듣는 동안에 저도 모르게 그분을 닮은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주목해서 보는 그것에 의해 영향 받고, 또한 귀담아 듣는 그것에 의해 영향을 받습니다. 지속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무엇인가를 주목하거나 무엇인가에 귀 기울이면,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누군가를 좋게 생각하고 자주 만나다 보면, 그 사람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원하지 않아도, 노력하지 않아도, 인격적으로 사귀는 동안 서로 닮게 되어 있습니다.

 

어릴 적에 교회에서 불렀던 노래가 생각납니다.

 

“네 눈이 보는 것을 조심해 네 눈이 보는 것을 조심해 위에 계신 주께서 사랑스레 보시네 네 눈이 보는 것을 조심해.”

 

하나님께서 “사랑스레 보신다”고 말하면서 “조심하라”는 말은 도대체 뭡니까? 사랑스레 보신다면 조심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앞뒤가 잘 맞지 않는 가사입니다. 이 가사는 하나님을 ‘하늘의 경찰관’으로 오해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그래서 이 노래를 부를 때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것을 조심해야 하는 진짜 이유는 하나님에게 벌 받을까 무서워서가 아니라, 우리가 보는 그것에 의해 우리가 지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노래의 가사를 이렇게 바꾸면 좋겠습니다.

 

“네 눈이 보는 것을 조심해 네 눈이 보는 것을 조심해 네가 보는 그것이 너를 다스릴 것이니 네 눈이 보는 것을 조심해.”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그리고 지속적으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볼 때,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천천히, 점진적으로 그러나 틀림없이 변화합니다. 우리 자신은 그 변화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변화가 천천히 진행되기 때문이며, 내가 내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동안, 그와 같은 변화는 분명히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원래 사귐이라는 것이 그런 것인 데다가, 성령께서 그 변화를 촉진시키십니다.

 

18절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라봅니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카톱트리조마이’(katoptrizomai)인데, 두 가지 의미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주목해서 바라보다’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비추어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주목해서 바라봅니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우리는 주님의 영광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봅니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의 의미를 잘 살펴보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생각해야 바울이 말한 바가 온전히 드러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주목해서 바라봄으로 그리고 그 영광의 거울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성찰함으로 주님의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어떻게 바라봅니까? 17절에서 바울 사도는 “주님은 영이십니다”라고 선언합니다. ‘영’이라는 말은 바람처럼 혹은 공기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는 것을 가리켜 ‘관상’(觀想)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contemplation이라고 합니다. Contemplation은 원래 “주목해서 바라보다”라는 뜻으로 쓰이던 말인데, 요즈음에는 “깊이 생각하다”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을 주목해서 바라본다는 말은 그분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상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면, 마치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에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난 것처럼, 우리에게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주목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사귀는 매우 중요한 방법입니다. 예배만큼 집중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들어 주는 통로가 없습니다. ‘설교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을 때면 저는 이렇게 답합니다. “회중이 하나님에게 집중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에게 집중하면 거기서 사건이 일어납니다. ‘말씀 묵상’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또 다른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보이지 않는 주님을 보게 됩니다. ‘영적 사귐’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의 섬김’도 역시 하나님을 보게 해 줍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몸을 낮추어 섬기다 보면, 그들을 통해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에게 주목하고 하나님을 사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통로입니다. 기도를 할 때 우리의 최고의 관심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자주 우리의 기도는 우리 자신에게 혹은 우리 문제와 욕망에 집중되곤 합니까? 우리의 문제와 욕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나가게 만드는 도구로 쓰임 받고 끝나야 합니다. 우리로서는 어찌 할 수 없는 문제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왔다가 그분에게 사로잡혀야 합니다. 기도 중에 하나님을 만나야만 우리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변화되지 않으면 지금 당하고 있는 문제가 해결된다 해도 우리는 또 다른 문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중에 우리는 자주 하나님을 주목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까닭에 기도는 요구가 아니라 사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묵상)

 

잠잠히 당신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당신이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자주 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가장 많이 듣는 소리는 무엇입니까? 당신의 마음을 자주 사로잡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얼굴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볼 것 같습니까?

 

기도 중에 당신은 무엇에 주목해 왔습니까? 기도로써 당신에게 일어난 변화는 무엇입니까? 기도 중에 주님에 대해 생각하는 것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해 보십시오.

김영봉/와싱톤 한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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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봉의 성서 묵상, 영성의 길(3)

자각하라!

 

“여러분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 때에 여러분은 허물과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우리도 모두 전에는, 그들 가운데에서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으며, 나머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로 베풀어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장차 올 모든 세대에게 드러내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에베소서 2:1-10).

오래 전 일입니다. 기도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미국에서 나온 기도 관련 책들을 꼼꼼히 살펴 본 일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상한 점이 하나 발견되었습니다. ‘회개기도’에 대해 제대로 논한 책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고백의 기도’가 전부였습니다. 고백의 기도와 회개의 기도는 비슷해 보이지만, 꽤 다른 것입니다. 회개의 기도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자신을 돌아보고 통회하며 삶을 돌이키는 기도입니다.

기도 안내서에 회개에 대한 안내가 없다는 사실은 미국의 교회들이 죄에 대해 망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느 나라 사람이든 죄에 대해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사는 미국에서는 그 도를 지나쳤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조는 누구에게도 “너, 잘 못 했어!”라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주제 넘은 것이고 교양에 있어서 뒤떨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소위 ‘정치적 정확성’(political correctness)입니다. “그건, 옳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것도 좋아! 그건 너의 선택이지!”라고 말해야 옳습니다.

이 풍조가 교회 안에까지 밀고 들어와 복음에서 가시를 뽑아 버렸습니다. 교회에서도 더 이상 ‘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죄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 당연히 회개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죄가 아니라 ‘상처’요 ‘아픔’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가 아니라 ‘치유’이며 ‘회복’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거룩하고 의로운 삶으로 향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더 나은 삶, 더 복된 삶, 더 향상된 삶으로 향하게 합니다.

세상과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도 ‘웰빙’(well-being)을 말하지, ‘라잇빙’(right-being)을 말하지 않습니다. 상처와 아픔이 죄로 인해 만들어지는 것이고, 치유와 회복은 회개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 때 비로소 더 나은 삶, 더 복된 삶을 살게 된다는 진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웰빙’보다 ‘라잇빙’이 더 앞서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현상은 미국만의 현상이 아닙니다. 미국제 복음을 가장 신속하게 수입해 사용하는 한국교회에도 이러한 현상이 뚜렷합니다.

복음에 숨겨져 있는 가시를 뽑아 버리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가시에 찔려야 복음을 제대로 믿고 그 복음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자신의 죄성을 자각하고 인정하며 회개해야만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복음’이란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자신이 처해 있는 불행과 슬픔을 알지 못하는데, 복음이 어떻게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습니까? 인간이 처해 있는 불행과 슬픔의 원인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 원인을 마지막까지 파고 들어가면 결국 죄에 닿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를 인정하지 않고 복음을 믿으려는 것은 마치 몸에 난 종기를 고운 천으로 감싸고 있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Goya Peter" by Francisco Goya, Wikimedia Commons.>

죄에 대해 말하다 보면, “내가 왜 죄인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법적인 의미에서의 죄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죄를 보통 ‘범죄’라고 부릅니다. 영어로는 crime이라고 합니다. 법을 어긴 것이 범죄입니다. 반면,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이다”라고 말할 때는 의미가 달라집니다. 이 죄를 영어로는 sin이라고 부릅니다.

죄는 범죄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은 의미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며 나와 이웃에게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해를 주는 생각과 계획과 행동은 모두 죄입니다. 죄가 이런 것이라면, 우리는 자신의 죄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여러분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인해 죽었던 사람들입니다”(1절)라고 말씀하시는데, ‘여러분’ 안에 우리 모두가 포함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영적인 눈이 밝아지면 우리는 또 다른 종류의 죄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죄’(sins of commission)도 있지만,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죄’(sins of omission)도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자라가다 보면, ‘해서는 안 될 죄’를 범하는 일이 점점 줄어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이라는 착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조금 더 자라고 보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죄’들이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10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구속된 존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뜻입니다. 따라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사랑해야 하는데 사랑하지 못한 것, 용서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 내어 주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모두 죄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 없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죄에 관해 하나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죄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죄보다 더 깊은 죄가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더럽혀지는 죄입니다. ‘행함의 죄’(sins of doing)보다 더 깊은 ‘존재의 죄’(sins of being)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작품이 더럽혀지고 훼손되도록 버려두는 것이 가장 깊은 죄입니다. 죄에 대해 수산나 웨슬리(Susanna Wesley)는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당신의 이성을 약화시키는 것은 무엇이나, 당신의 양심의 예민함을 둔화시키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감각을 둔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나, 영적인 것에 대한 당신의 갈망을 약화시키는 것은 무엇이나, 즉 당신의 영혼보다 당신의 육신을 더 강화시키는 것이면 무엇이든, 그것이 아무리 순수해 보이더라도, 그것은 당신에게 죄가 됩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의 죄는 바로 이 존재의 죄로부터 발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가장 먼저 자각할 것은 바로 우리 존재가 오염되어 있고 파괴되어 있다는 사실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너져 “오, 제가 죽게 되었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게 됩니다. 이것이 영성이 깨어나는 순간입니다. ‘자각’ 즉 스스로에 대한 진실을 깨닫는 것이 영성의 출발점입니다.

 

(묵상)

눈을 감고 묵상하십시오. 위에서 이야기한 세 가지의 죄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얼마나 행했으며 또 행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당신의 마음과 영혼은 얼마나 맑고 깨끗합니까?

어떻습니까? 아직도 “나는 죄인이 아니다”라거나 “그래도 나는 평균 이상은 되는 사람이다”라고 말할 자신이 있습니까? 조용히 묵상하며 성령의 조명을 기다리십시오. 진정한 회개의 은총을 기다리십시오.

김영봉/와싱톤 한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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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봉의 성서 묵상, 영성의 길(2)

눈을 떠라!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셨다. 그 때에 무리가 예수께 밀려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예수께서 보시니, 배 두 척이 호숫가에 대어 있고, 어부들은 배에서 내려서, 그물을 씻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 배 가운데 하나인 시몬의 배에 올라서, 그에게 배를 뭍에서 조금 떼어 놓으라고 하신 다음에, 배에 앉으시어 무리를 가르치셨다. 예수께서 말씀을 그치시고,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대답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대로 하니, 많은 고기 떼가 걸려들어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하였다. 그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히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베드로 및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은, 그들이 잡은 고기가 엄청나게 많은 것에 놀랐던 것이다. 또한 세베대의 아들들로서 시몬의 동료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뭍에 댄 뒤에,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갔다.(누가복음‬5:1-11)

 

시몬 베드로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고기잡이로 하루하루 벌어 사는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도 인생이 잘 풀리는 때가 있었고, 잘 풀리지 않는 때도 있었습니다. 지난밤처럼, 밤새 지치도록 일했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나름대로의 자신감도 있었고, 고집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자신감이 와르르 무너지는 날도 있었습니다.

어느 재수 없는 날, 예수께서 그를 찾아오십니다. 많은 무리가 그분을 따라 옵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배에 오르시더니 해변가에 서 있는 무리에게 설교를 하십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몰고 다니면서 설교하는 전도자들은 당시 갈릴리에 흔히 있었습니다. 그 전도자들은 로마 정부를 몰아내기 위해 군중을 선동하려는 열심당이거나, 자신을 메시아라고 착각하고 있던 광신자들이었습니다. 시몬은 그 사람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귓등으로 들으면서 그물을 손질합니다.

얼마 후, 그물을 손질하던 그의 손길은 어느 새 멈추어 섰고, 시몬은 그분의 설교에 푹 빠졌습니다. 고기 잡는 어부 베드로가 예수께 잡힌 것입니다.

설교를 마친 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을 거십니다.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4절). 베드로는 순간 갈등에 빠집니다. 관록 있는 어부가 볼 때, 그것은 하나 마나 한 일입니다. 그 시간에 고기가 잡힐 리가 없고, 더구나 깊은 데로 갈수록 가망성은 줄어듭니다. 하지만 방금 그분에게서 느낀 그 ‘무엇’을 생각하니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여느 전도자와는 달라 보였습니다. 간단히 ‘No’ 할 일이 아니라는 느낌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답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5절).

시몬은 우리와 다름없는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에 있는 의혹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드러냅니다. 동시에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려는 마음도 인정하고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는 깊은 곳에 들어가 그물을 내렸다가 얼마 후에 그물을 끌어 올립니다. 밤새도록 허탕을 쳤는데, 이번에는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시몬과 일행은 다른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간신히 고기를 끌어 올리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7절)고 합니다.

 


(V&A - Raphael, "The Miraculous Draught of Fishes (1515)" by Raphael)

 

이 때,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달려가더니 그 무릎 앞에 주저앉고 부들부들 떱니다. 다른 사람들은 잡힌 고기를 보고 흥겨워하고 있는데, 베드로는 정반대로 행동합니다. 그는 떨리는 입술을 열어 말합니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8절).

베드로가 우리 보통 사람들과 달라지는 지점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도 바로 여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도약해야 할 지점도 바로 이곳입니다. 시몬은 배에 가득 찬 물고기를 보고 곧 손에 넣을 돈을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그 일을 일어나게 만든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있었습니다.

그 순간, 그에게 번득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자신에게 찾아오셨다는 믿음이 그의 마음을 압도한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동안 외면해 왔던 자신의 진짜 모습이 눈앞에 환히 드러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죄인으로서 그는 두려움에 빠져 “아, 나는 죽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간청합니다. “나를 떠나 주십시오. 저는 도저히 당신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당신 앞에 있으면 저는 질식해 죽든지, 타 죽든지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보통 사람을 부르셔서 특별한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베드로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드러난 자신의 참 모습을 외면하지 않았고, 마음에 일어난 감정을 속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특별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들과 비교하면, 이것은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너무나 쉬워서 오히려 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특별해서 특별한 일이 된 것이 아니라, 특별하지 않아서 특별한 일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시몬 베드로와 같은 변화를 입으려면 대단하고 거창한 일을 도모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하나님을 생각하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적인 깨달음에 정직하고, 그 깨달음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너무도 쉬운 일이지만, 죄에 물든 우리의 마음에는 너무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특별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영적 깨임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것이 어떤 일이든, 하나님과 맞딱뜨리는 순간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보이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진지하게 관찰하다 보면, 어느 순간, “하나님이 여기 계신데 내가 몰랐구나!”라는 자각이 압도하게 됩니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하나님이 아니고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는 자각을 하게 됩니다. 루돌프 오토(Rudolf Otto)가 말한 ‘누미노제’(Numinose)의 순간입니다. 그런 자각과 함께 “아, 나는 이제 죽었구나!”라는 탄식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그 맑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거울을 등지고 자신의 진실을 외면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많은 이들이 그런 선택을 합니다. 그것은 죽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불에 타 죽을 줄 알면서 불에 뛰어드는 벌레처럼, 하나님께 타 죽어도 하나님 앞에서 죽겠다는 심정으로 그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타 죽어도 괜찮다는 심정으로 그분 앞에 무릎을 꿇지만, 그로 인해 우리가 타 죽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예수께서 해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분은 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깨를 어루만지시며, 예수께서 시몬에게 하신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10절).

하나님 앞에 우리가 가지는 두려움은 우리가 제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사죄의 확인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 때 비로소 진정한 사귐이 시작됩니다. 기도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회개는 기도의 문이며 영성의 근거입니다. 진정한 회개 없이는 진정한 기도가 없고, 진정한 회개가 없으면 영성은 허울이 됩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때 발생합니다. 텅 빈 예배당에서 홀로 기도할 때, 마음 다해 찬양을 부를 때,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차를 마실 때, 길가에 핀 꽃 한 송이를 마주하고 있을 때, 불현듯 찾아온 질병과 씨름할 때,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울 때, 혹은 무릎으로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우리는 문득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게 되고, 자신의 죄성에 몸서리치게 되며, 마음으로부터 터져 오르는 회개에 이릅니다.

그것이 두렵고 아프지만, 그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야만 하나님과의 진정한 사귐이 시작됩니다.

(묵상)

당신은 시몬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 앞에서 두려워 떨며 눈물로 회개한 일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용서와 사랑에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의 임재를 더 분명히 경험하며 살기를 기도하십시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는지 반성하며 기도하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진정한 회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임재를 목도하고 그 앞에 고꾸라지는 순간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어느 순간에 찾아오실지 모를 하나님에 대해 늘 기대하고 삶과 세상을 관조하십시오. 느린 걸음으로 걷고 느린 눈으로 주변을 보십시오. 그리고 자주 머물러 앉으십시오. ‘누미노제’의 은총이 주어질 것입니다.

김영봉/와싱톤 한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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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봉의 성서 묵상, 영성의 길(1)

잿더미 위에 앉으라”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욥기 42:1-6).

‘영성’을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저는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정의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먼저 해결할 것이 ‘죄’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의 죄성을 깨닫고 회개할 때면 자주 재를 뒤집어쓰고 기도했습니다.

‘재’는 가장 쓸모없는 물질입니다. 용도 폐기된 것입니다. 따라서 재를 뒤집어쓰는 것은 “나는 쓸 모 없는 존재입니다”라는 몸짓입니다. “나도 결국 재로 돌아갈 존재입니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를 뒤집어쓰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낮아지는 행동입니다.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있는 사람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시체가 앉아있는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와 같은 여러 가지의 메시지를 스스로에게 그리고 하나님에게 전하기 위해 회개할 때 재를 뒤집어 쓴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여러 가지의 재앙들로 인해서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던 욥의 믿음에 혼란이 생겼습니다. 그가 믿던 하나님이 옳다면, 지금 그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벌하고 의인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고, 자신은 죄를 멀리하고 의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욥은 극악무도한 죄인이나 당해야 할 재앙을 한꺼번에 당하고 망해 버렸습니다. 뭔가 잘 못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거나, 하나님이 뭔가 착각하셨거나, 하나님이 원칙 없이 행동하는 분이거나.욥은, 하나님이 아니라 욥 자신에게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친구들과 논쟁을 하면서 자신은 떳떳하다고 강변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욥은 하나님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의 말대로, 지금까지는 하나님께 대해 귀로만 들었는데, 이제는 눈으로 주님을 뵙게 되었습니다(5절).

 


(출처: http://hannahscupboard.com/jobs-prayer.html)

 

하나님을 대면하고 나서야 욥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습니다. 욥기 38장부터 41장까지 숨 가쁘게 이어지는 하나님의 질문들을 마주하고 욥은 하나님에 대해 쏟아놓았던 그 많은 말들을 멈춥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3절)라고 고백하고 입을 다뭅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던 것에 대해 회개합니다. 자신의 한계적인 이해력으로 하나님을 다 안다고 교만을 떨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했던 것에 대해 회개합니다. 진정한 의는 하나님께만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욥은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깨달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불의를 자각했으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성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티끌 같은 존재이며, 재와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티끌과 재를 뒤집어쓰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습니다.

예언자 요나의 설교를 듣고 니느웨의 왕은 “임금의 의자에서 일어나, 걸치고 있던 임금의 옷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잿더미 위에 앉았다”(요나 3:6)고 합니다. 그는 니느웨 온 백성에게 자신을 따라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라고 요청했고, 전 국가적인 회개로 인해 니느웨는 하나님의 용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모르드개는 바벨론에 살던 유다 백성에게 위기가 닥친 것을 알고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걸치고, 재를 뒤집어쓴 채”(에스더 4:1) 대성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유다 백성이 모두 모르드개의 회개에 참여했습니다. 그로 인해 유다 백성은 파멸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다니엘은 폐허 상태에 있는 조국을 생각하면서 “금식을 하면서, 베옷을 걸치고, 재를 깔고 앉아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간구하였다”(다니엘 9:3)고 합니다.

영적 여정을 시작하려는 사람에게 이 마음이 필요합니다. 영적 여정의 중심에는 기도가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사귐을 나누는 것입니다. 사귐은 사랑의 관계가 열려야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서먹서먹한 관계 혹은 틀어진 관계에서는 사귐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영적 여정에서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기를 원한다면, 재를 뒤집어 쓴 심정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욥처럼 하나님 앞에서 교만했던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 앞에서 마치 우리가 심판자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까? 니느웨 왕처럼 하나님을 외면하고 산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행복인 줄 알았는데, 실은 그것이 불행의 출발이었습니다. 그것을 깨달았다면, 그 즉시 잿더미에 앉아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새로운 희망이 생깁니다. 모르드개처럼 혹은 다니엘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기 위해 잿더미에 앉아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의 출발점입니다.

(묵상)

* 눈을 감고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당신이 만든 우상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필요하다면, 욥기 38장부터 41장까지 천천히 읽으십시오. 지금 당신이 누구 앞에 서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두렵고 떨림이 생길 때까지 생각하십시오.

* 그 하나님 앞에서 당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생각하십시오. 그분은 불꽃같은 눈으로 당신의 삶의 모든 것을 보아 오셨습니다. 당신 마음의 가장 깊은 곳까지 알고 계십니다. 그런 분 앞에서 당신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분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그분이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고 당신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 이제 기도하십시오. 성령의 감동과 감화를 구하십시오. 그분이 조명해 주시면, 하나님이 누구신지 깨닫게 되고, 당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죄인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회개의 영'이라고 부릅니다. 당신 스스로 뉘우치는 회개가 성령께서 터지게 하시는 회개로 나아가도록 그분의 은총을 구하십시오.

김영봉/와싱톤 한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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