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을 면탈하려는 부끄러운 세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늘도 같은 위로가 필요해서 그러는 것일까. 오전에 맑던 날씨가 오후 들어 찌푸러지더니 가는 비가 안개처럼 슬픔을 반추하는 듯했다. 세월호 참사 2주기인 지난 4월 16일 오전, 오후의 예정된 스케줄 때문에 이른 아침 시간 밖에는 여유가 없었다. 새벽에 집을 나서서 지하철을 세 번 갈아타고 안산의 정부합동분향소를 찾았다. 작년 1주기 때에는, 러시아 선교사에서 물러나 안산에 계시는 이형근 목사님 내외분의 안내로 분향소를 찾았다. 그러나 올해는 어제부터 이 목사님을 찾았으나 연락이 닫지 않았다. 사모님께서 얼마 전 귀천(歸天)하신 후 눈마저 어두워 자유롭게 외출도 못하시기에 이 목사님도 방문하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반월을 지나면서부터 옆의 승객들에게 ‘세월호정부합동분향소’에 가자면 어디에서 하차하는 것이 좋겠느냐고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작년의 기억을 떠올려 고잔역에서 하차, 택시로 분향소에까지 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초지역에서 하차하면 도보로 10여분간 되는 거리다. 당일 행사 때문에 분향소 앞 운동장에는 식단을 만들어 놓고 수백명 분의 의자도 마련해 놓았다. 아침 7시가 조금 지난 시간, 분향소에는 10여명이 헌화, 분향하며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방문록에 무슨 말을 쓰랴, “잊지 않겠습니다”는 부끄러운 한 마디를 남기고 국화 한송이를 헌화하고 분향의 예를 갖추었다. 아직도 사진 속 그대들의 청순한 모습 때문인지, 기성세대로서 죄책감이 뭉클 솟는다. 저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먼저 가야 했나, 분향소에 안치된 사진들은 나이를 먹고 싶지 않은 듯, 그곳에 찾아와 위로받아야 할 이웃들을 작년과 같은 모습으로 맞고 있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친척 친구 친지들이 다녀갔는지, 사진을 안치한 전시대 앞에는 생일 케이크도 있고 갖가지 사연들을 적은 편지들도 있다. 가장 많은 말이 “사랑한다”, “잊지 않겠다”, “기억하겠다”라는 말이다. 어떤 편지는 하트형으로 만들었고 어떤 것은 차곡차곡 접어 네모로 만든 것도 있다. 그 편지의 사연도 ‘사랑한다’ ‘잊지 않겠다’는 말일 것이다. 앞서 떠나 보낸 자식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도 담겨 있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친구들이 이곳을 찾아 눈시울을 적셨는지, 그들의 눈물이 있었기에 아직도 이 분향소가 철거되지 않았고, 세월호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이 자지러지는 불꽃처럼 꺼질 듯 말 듯하지만 그래도 계속되고 있다.

 

세상에는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유족의 심정으로 공감하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딴지를 거는 사람들이 많다. ‘7시간’을 해명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눈치 빠른 관료 정치인들은 거기에 안테나를 맞춰 이젠 700여일이 넘는 시간까지 허송하고 있다. 눈물을 흘리면서 다짐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관료들은 눈물 속에 든 진의를 간파하고 세월호 진상규명의 방향계를 정해 놓고 행동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진상규명을 묻으려는 역풍이 점점 거세지고 있다. 어느날 세월호 뱃지를 단 채 고등학교 동기 모임에 갔다. 그걸 왜 달고 다니느냐고 면전에서 조롱을 퍼붓는 곱지 않게 늙은 친구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고위관직을 지난 친구도 있었다. 그런 분위기여서 그랬을까, 새누리당에서는 세월호사건을 모독한 언설을 퍼나른 분이 비례대표 후보에 당당히 올랐다. 미안하다거나 부끄럽다거나 하는 의식이 조금도 없이.

 

세월호 사건의 본질은 해난사고로 304명이 불의의 사고를 맞았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살릴 수 있었는데도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정부의 무능에 있다. 책임을 묻는다면 바로 그것을 묻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세월호 참사 배후에는 우리 사회에 얽혀져 있는 각종 관행과 부패사슬이 있음도 알게 되었다. 그 원인을 철저히 규명하여 부패를 근절하는 것도 304명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 것이리라. 그러나 특별법 제정 때부터 삐꺽거리던 ‘4.16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는 마지못해 출범했고, 출범해서도 위원회가 일을 시원스럽게 진행하도록 지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예산을 죄고 조사시한을 단축시키려 하고 있다. 이게 눈치와 아부에 노회한 대한민국의 관료들이다.

 

세월호 참사의 뒤처리는 그 초점이 보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진상규명에 있다. 이것은 유족들이 원하고 주장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의 형편은 어떻게든 진상조사를 덮어버리려고 시도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 때에 유권자들은 절묘하게 여소야대의 정국을 만들어냈다. 한 시민단체는 총선출마 후보자에게 “당신이 국회의원이 되면 세월호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요지로 설문을 던졌고, 야당 후보자의 상당수는 철저한 진상조사를 약속했다. 여소야대의 새 국회는 ‘세월호특별법’을 개정하고 진상조사도 제대로 시행토록 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우리 세대의 잘못과 무능으로 젊은이들을 수장(水葬)했는데, 그 책임을 면탈하려는 부끄러운 세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원인과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여 그런 부끄러운 참사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만열/전 국사편찬위원장, 숙명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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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자리의 사람, 사람, 사람(4)

 

마음의 사진, 그리운 사람들

- 사진 작가 신미식 -

 

 

사진가는 사진으로 말한다. 서른이 넘어서 사진을 시작하고 100여 개 국을 여행하며 수만 가지 이야기들을 담아내는 신미식(53) 작가 역시 사진 너머로 수많은 이야기를 건넨다. 도통 머물러 응시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통에 잃어버렸던 인간의 다양한 감정들을, 그가 건네는 이야기, 카메라 앵글로 포착한 자연과 사람, 세상의 모든 ‘얼굴’들을 통해 다시 느낀다. 기쁘고 따뜻하고 아름답고, 또 슬프고 먹먹하고…. 마흔 둘부터 펴내기 시작한 사진집이 벌써 서른 권에 이르고, 여전히 설레는 마음으로 셔터를 누르는 그를 갤러리 카페 마다가스카르에서 만났다.

 

 

 

 

                                사진 김승범

 

 

‘아프리카 사진가 신미식’

 

잡지사 디자이너였던 그가 사진을 시작한 건 회사 동료인 사진부장 선배가 사진 인화를 배워주면서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사진을 인화하던 당시에 그는 회사 암실에서 살다시피 하며 사진 인화를 배웠고, 회사 문이 닫히는 밤이면 아무도 없는 암실로 되돌아가 찍었던 사진들을 밤새 뽑고 또 뽑았다.

 

“사진이 너무 하고 싶었는데 당시 사진부장 선생님이 인화 방법을 알려줬어요. 사람들이 퇴근하고 회사 문이 잠기는 밤 시간이면 회사로 되돌아와 미리 복사해둔 열쇠로 암실 문을 따고 들어가서 인화 작업을 해보곤 했죠. 인화지가 비싸서 주로 회사에서 쓰고 남은 것들을 사용했고요. 집에 돌아가면 새벽 6시 정도였는데 한두 시간 정도 눈 붙이고 출근하기를 3년 했어요. 당시엔 필름 카메라여서 찍은 사진을 지울 수 없으니까 오히려 사진 한 장 한 장을 신중하게 찍었는데, 찍은 사진들을 놓고 암실에서 자세히 보면서 공부가 많이 됐지요.”

 

회사를 그만두고 떠난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펴낸 그의 책이 한국에서 사진 에세이집의 시작이었지만, 정작 그는 열세 권의 책을 내기까지 신용불량자 형편이었다. 집도 절도 없이 후배 창고에서 2년간 잠을 청하면서 새벽 인력 시장에서 막일을 뛰었고, 빚 독촉에 시달렸다. 전기가 끊겨서 한전에 찾아가 사정한 적도, 교회 나갈 차비조차 없던 때도 있었지만 말 그대로 “가진 거 다 내놓고 사진을 했다.” 하나 있는 카메라를 팔아서 연 첫 개인전시회에서는 사진이 팔리지 않아서 1년 간 카메라를 빌려서 사진을 찍었다.




 

“주변 사람들은 나를 부러워했지만, 열세 권의 책을 내고 나서야 신용불량자에서 벗어났어요. 주변 사람들에게는 일절 알리지 않았지만 전기까지 끊길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죠. 아침에 깨지 않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하기도 했어요. 그러다 첫 전시를 열기 위해 카메라를 팔고서 전시 수입이 없어서 1년을 렌탈 카메라로 살았는데, 되레 그때 내가 무엇을 찍고 싶은지를 알겠더라고요. 늘 살던 동네가 어찌나 아름답던지…. 그동안 볼 수 없던 게 보이고, 마음속에서 구도가 다 잡혔지요. 늘 소유하고 있으면 할 수 없는 경험이지요. 내가 계속 아프리카 사람들, 아프리카 아이들의 사진을 아무렇지 않게 찍을 수 있는 것도 가난했던 생활 덕분일거에요. 그들을 마주했을 때 불쌍하지 않고, 그저 사람으로 다가왔으니까요.”





       

                                       사진 신미식

 

‘아프리카 사진가 신미식’이 될 수 있던 이유도 아프리카를 불쌍한 모습으로 ‘꾸미지’ 않아서일 거다. 그가 아프리카로 처음 떠난 시절, 아프리카 이미지가 ‘죽음의 가난’ 혹은 ‘기아’ 정도였던 때부터 지금까지, 스물일곱 번의 여행을 통해 사진으로 말한 이야기는 그곳 사람들의 삶의 풍경과 일상의 표정들이다. 우리와 같은. 특히 아이들의 수줍고도 생동감 넘치는 표정이 담긴 그의 사진에서는 우리에겐 없을 ‘아프리카의 낭만’도 상상하게 된다. 셔터를 누르는 그의 손가락은 꽤 오랜 세월 동안 이렇게 사람들의 편견을 서서히 벗기는 작업을 해온 것일까?

 

 

 

 

 

제2의 고향 에티오피아

 

지금은 기회 생기는 대로 찾아가는 아프리카, 그중에서도 에티오피아는 그에게 또 다른 고향이다. 열 번 정도 다녀오면서 귀국할 때면 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지만 한 달 만에 또 찾곤 했단다. 그가 특히 에티오피아를 찾는 이유는 ‘그냥 좋아서다.’ 굳이 따지자면 두 손으로 악수를 청하는 문화나 다른 아프리카 사람들에 비해 옅은 피부색이 한국과 비슷하고, 에티오피아의 기독교 문화유산들이 친숙해서다. 게다가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마을은 동네 자체가 커피와 낭만이 있다. 아침이면 마당에서 커피를 볶는데, 아무리 가난한 집도 커피 끓이는 도구가 있고, 일종의 커피 문화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가 에티오피아 사진 속의 사람들과 계속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특별한 목적 없이 만나는 이들의 작은 필요를 발견할 때마다 가능한 그 필요를 채워주면서.

 

“에티오피아는 워낙 익숙해진 곳이라 꼭 고향에 가는 것처럼 설레지만, 작업 의뢰 받아서 가는 게 아니면 이제 사진은 잘 안 찍어요. 고향에 들어설 때면 뭔가 마음은 ‘쨍’하지만 사진을 찍진 않잖아요. 본 고향보다 더 자주 가는데,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다주러 가거나 사람들이 보고 싶을 때 가요. 특히 예가체프는 동네 자체가 커피 향에 취해 있는 마을이고 어느 집이나 들어가게 되면 커피를 내려 줘요. 가난해도 넉넉함이 있고 일종의 커피 문화가 있죠. 거기서 사람들 사진을 찍어 주다가 사귀게 된 한 장애인 청년에게는 특별히 동생 같은 마음이 생겨서 필요한 집을 지어 준 적이 있어요. 만나러 갈 때마다 동생 만나는 느낌이에요. 에티오피아 수도에서도 차를 열 시간은 타고 가야하는 마을이지만 멀다는 생각은 안해봤어요. 거리는 마음의 거리잖아요.”

 

어쩐지, 신미식의 사진에는 보는 이들을 제압하려는 느낌보다는 편안함이 있다. 피사체와 사진가의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서일까. 그에게 사진은 ‘예술 작품’이 아니다. 어떤 의도적인 장치 없이 흘러가는대로, 마음 가는대로 자유롭게 사진을 찍는다. 그렇게도 누군가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사진을 찍는 것이 그의 목표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그를 알아본 독자가 사인을 청했다.

 

“사진가는 예술가가 아니에요. 그야말로 숟가락만 얹은 거죠. 하지만 사진가는 사진가로 충분해요. 예술가가 되는 건 재미도 없고요. 사진가가 카메라로 담으려는 자연 그 자체가 예술이고, 그 자연을 만든 이가 예술가죠. 물론 어떤 사진이 누군가에게는 예술로 받아들여질 수는 있어요. 사진이 멋있어 지는 건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때죠. 누군가 저를 찾아와서 너무 만나고 싶었다면서 악수를 청할 때, 그럴 때 제 일에 대해 보람을 느껴요. 글 쓰는 사람도 그렇잖아요.”

 

곧 그의 책이 또 나온다. 에티오피아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120장으로 추려서 묶는 작업으로, 딱 서른 번째 책이다. 이번 달 14일로 잡혀 있는 에티오피아 가족사진전 작가와의 대화에 맞춰 출간한 사진집을 들고 15일 다시 에티오피아로 떠났다. 언제나처럼 책은 거의 다 만든 채로 출판사로 넘기고, 제작비로 일체 부담한다.




                                        사진 신미식

 

지금 그에겐 새로운 꿈이 또 하나 있다. 포토아카데미 하우스를 만들어서 그 안에 도서관도 짓고, 여행자들이나 사진가들이 편히 쉴 수도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 예산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라 언제 시작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계속 꿈꾼다. 생각해 보면 그가 사진을 시작할 무렵에도 여기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고, 공동 운영으로 시작한 갤러리 카페 마다가스카르도 우연한 기회에 어려운 조건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8년째다. 어차피 “꿈이 꼭 이루어 져야 해서 품고 있는 것도 아니다. 꿈꾸는 것 자체가 좋다. 꿈이 있는 한은 청춘이다.”

 

‣ 에티오피아 가족사진전이 ‘사진 공간 배다리’에서 있습니다. (2015.3.13~4.1)

 

오지은/ 월간 <복음과상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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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자리의 사람, 사람, 사람(3)

유영모와 함석헌, 광활한 정신세계

 

우리의 기독교 신앙 역사 속에는 소수의 굵직굵직한 이들이 선두에 서서 미답(未踏)의 경지를 개척해나갔다. 특별히 유영모와 함석헌 선생이 그러하다. 그 미답의 경지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동양인들의 삶과 기독교 신앙을 깊숙이 만나게 하려 했던 점에 있다. 다시 말해서, 서양이 전해준 기독교 신앙과 그 신학 체계를 그대로 받아들여 신주단지처럼 떠받들고 모시려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호흡과 우리의 역사, 우리의 삶을 기반으로 하여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재해석해 들어갔던 것이다.

유영모와 함석헌의 이러한 자세가 언제나 옳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이러한 시도는 우리 자신의 현실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다가가는 능력을 길러나가는 데 있어 매우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이해와, 아프리카 흑인들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이해는 사뭇 다르다. 미국인들의 신앙이라고 해도, 1백 년 전의 신학 체계와 오늘의 신학체계는 또한 너무나 달라져 있다. 초기 산업화 단계에 있었던 사람들의 생활과, 오늘날의 삶이 제기하는 문제는 대단히 다르기 때문이다. 로마제국 당시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들은 이른바 헬레니즘 문화 속에 살고 있었다. 그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던 것은 따라서 그리스 철학이었다.

신앙도 그러한 각도에서 사고하고 받아들였으며, “주일(主日)”마저 전래의 안식일에서 이들 로마제국의 종교적 습속이었던 태양절과 관련이 있는 일요일(Sunday)로 대치되었다. 태양의 자리를 예수 그리스도가 차지하게 될 정도로 이들의 정신세계는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현실과 기독교 신앙을 만나게 한 결과였다. 성탄절마저도 로마제국의 천문학적 사고에 기반을 두고, 동지(冬至)가 끝나는 시점을 잡아 정해졌다. 하여, 비록 로마제국의 문화와 결합한 기독교 신앙이지만 그 신앙이 주려 했던 생명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고, 그들의 삶에서 가장 익숙한 형태를 취하여 이들의 마음에 다가갔던 것이다.

복음서의 경우에도 우리는 그러한 면모를 볼 수 있다. 유대 종교의 정신적 전통이 강한 지역에서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려 했던 마태 공동체는 구약의 족보를 기점으로 나사렛 예수를 설명하려했던 것과는 달리, 그리스 철학의 전통에 익숙한 요한복음은 이들이 잘 알고 있는 ‘로고스’의 개념을 중심으로 기독교 신앙을 설파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신앙을 전하려고 할 때에도, 아이들의 사고와 경험의 세계를 통해서 비유적으로 다가가지 않으면 아이들은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깨우치기가 어렵게 된다. 설교 또한 사람들의 구체적인 현실과 경험의 세계와 만나지 못하면 그 신앙적 메시지는 알아듣기 어려운 이야기가 되고 만다.

한마디로, 그 복음의 뿌리가 내리고자 하는 땅의 조건에 맞추어 그 복음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열매를 맺고자 하는 것이다. 히브리어나 헬라어로 시작된 성서일지라도, 우리말을 통해서 여과된 의미는 달라지기도 하며, 또 같은 말이라도 그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성서를 읽는 이에게 새롭게 다가가기도 하는 것이다.

유영모와 함석헌 선생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조선 땅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는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은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이냐?” 하는 질문을 안고 평생을 살았던 것이다. 이 질문은 참으로 당연한 것이며 마찬가지로 우리들로서도 던져야 하는 질문이다. 적지 않은 비신자들이 기독교 신앙에 다가가려 하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그건 유대인들의 역사 아니냐? 그들의 신앙 아니냐? 그게 왜 나와 관계가 있는가?” 하는 의문에서 비롯된다. 아브라함, 이삭, 모세 등등의 이름이 우리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괜히 남의 다리만 긁지 말고 아예 우리 자신의 역사나 충실한 사상, 전통에 더 깊이 눈을 떠야 하지 않는가라는 힐난마저 한다.

하여, 우리는 자연스럽게, 수천 년 전의 히브리인들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이후 그와는 전혀 다른 풍토와 정신적 자산이 있는 동양인,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에게는 어떻게 역사하시는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궁해질 때, 우리는 수입된 종교사상에 매달리는 민족적인 혼마저 없는 이들로 여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동양정신+기독교사상=종교다원주의(?)

유영모와 함석헌 선생은 바로 이 기독교 신앙을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힘 있게 다가갈 수 있는 정신적 자양분을 동양정신의 맥에서 발견하고자 했던 것이다. 특히 함석헌의 노자(老子) 연구는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여겨 노자의 생각과 나사렛 예수의 언행을 깊이 연결시켜 사고하는 방식을 추구했다. 그래서 노자적인 사고가 무의식적으로 삶에 스민 동양인들의 심성에 가장 알맞게 다가갈 수 있는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정리해내고자 그토록 애를 썼던 것이다.

인위(人爲)에 사로잡히지 않고 무위(無爲)의 도(道)에 따라 인간의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려 했던 마음은 오늘날에도 우리들의 심성 깊숙이 존재하고 있다. 억지로 꾸미지 않고 자연스럽게 살아가려는 정신적 욕구는 신앙인이나 비 신앙인 모두에게 무의식화 되어 있는 동양인들의 정신적 논밭이다. 함석헌 선생은 바로 이 논밭을 개간하여 기독교 신앙이 이에 뿌리를 내려 열매 맺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이 점이 자칫 오해되면, 종교다원주의의 논란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하여, 그의 시도는 마치 요한복음이 당대의 그리스 철학적 사고에 젖어 있던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뜻을 전하고자 로고스의 개념에서 출발하여 이를 바탕으로 신앙의 세계를 풀어가려 했던 노력과 흡사한 것이다. 따라서, 함석헌 선생은 기독교의 이단이 아니라, 기독교의 선교영역을 보다 넓혀 나간 선각자이다.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자산을 내어버리지 않고 이를 적절하게 밝혀 기독교 신앙과 만나게 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은 유대인들의 민족종교라고 배척하던 사람들의 마음에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정신, 그 신앙의 세계를 열어주려 했던 것은 우리에게 남긴 귀중한 정신적 자산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점에서 그의 사상과 족적을 되새겨 본다면, 우리는 그에 대한 오해도 접고, 그가 못다 한 기독교 신앙의 주체적인 해석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들의 무의식적 심성에까지 뿌리를 드리우는 신앙이 되고자 한다면, 실로 동양정신의 정수에 대한 이해가 밝지 않고서는 기독교 선교는 제한적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 작업은 우리 모두가 당연히 시도해야 할 바라고 생각한다.

유영모, “우리 모신 디”

다석 유영모는 독특한 인물이다. 그의 정신세계는 기독교, 노자, 불교, 톨스토이 등이 섞여 있으며, 그와 함께 우리말로 철학하는 노력을 부단히 한 선각자다. 훗날 함석헌 선생이 유영모의 ‘씨알’을 ‘씨 ’로 풀어 발전시킨 것은 유명한 일화이나, 함석헌이 정치 현실과 치열하게 마주했던 반면에 다석 유영모는 평생 종교 사상가로 자신을 자리매김한다.

1890년, 그러니까 동아시아가 격변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던 시절 태어난 그는 운명적으로 사상적 융합이 이루어지는 역사적 찰나의 존재가 된다. 15세에 기독교에 입교한 그는 기독교에만 머물지 않고 정신적 여정을 광활하게 펼쳐나가는데, 그에게 노자의 《도덕경》과 톨스토이는 두고두고 영향을 미치는 사상적 뿌리가 된다. 그가 52세 되었던 때, 김교신의 <성서조선>에 자신이 기독교인이 된 지 38년 만에 드디어 자기의 진정한 자아 “참 얼 나”를 깨우쳤다면서, 자기 안에 갇혀 있던 자기 영혼을 우주적 차원에 이르게 했다는 각성을 발표하게 된다.

 

 

이후 유영모의 기독교는 제도 기독교에 머물지 않고 참된 자기를 찾고, 그 참된 자기가 하늘의 영과 하나 되는 길을 모색하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단지 관념의 소산이 아니라 땀을 흘리고 노동하면서 깨우치는 몸의 철학과 통한다. 농부가 되어 땀을 흘리는 톨스토이의 모습은 유영모에게도 모범이 된다. 간디의 사상도 그에게는 일종의 전범(典範)이 된다.

그래서 유영모는 “이마에 땀 흘리는 노동을 천시하고 노동하는 이를 낮춰 보는 사람은 참으로 못난 사람들이다”라고 단정했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이 올바르게 살려면 이마에 땀 흘리고 농사지은 것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고 덧붙이고는 “권력과 금력으로 호강하겠다는 것은 제가 땀 흘릴 것을 남에게 대신 흘리게 해서 호강하자는 것이니 그 죄악은 여간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해서 바른 생각은 바른 노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니, 유영모의 생각은 이렇게 표현된다. “입맛 잃고 진 땀 냄은 모르기론 땅파기믄 무슨 생각 올바르며 말은 어찌 일은 무슨? 우리는 땅 파 물먹고 땀맛 밥힘으로!” 사람이 입맛 잃고 진땀 흘리면 그것이 이미 병든 조짐이니 이때 특효약은 나가서 땅 파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무슨 생각과 일이 바르게 잡히겠는가라는 것이다. 그는 “딛고 서 있는 땅과 몸에서 스며 나오는 땀은 사람들의 입맛을 나게 한다. 땅과 땀이 바삐 돌아가는 것은 우리의 입맛과 밥맛 내는 데에 서로 내기하는 것과 같다. 땅이 우리 밥맛을 더 내 주는지, 땀이 우리 밥맛을 더 내주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노동과 사상은 그렇게 하나로 결합되어 있으며, 그 흙 속의 물, 땀, 그리고 밥으로 살아가는 정직한 삶이 올바른 생각을 길러준다고 강조한다. 이렇게 유영모는 우리의 노동이 단지 육체의 일로 그치지 않고 사상적 모태가 되는 것을 꿰뚫어 보면서 자본과 노동을 대립시키는 현실을 돌파하는 지점에 이미 다다른 셈이다.

그런 그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 가운데 진실된 자아의 각성에 이르러 생명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가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이 대목을 읽고 해석할 때 우리는 그가 우리말이 가진 사상성을 최대한 풍부하게 하려는 노력을 보게 되며, 그로써 그런 말을 쓰는 순간 이미 그 사상과 종교적 힘이 우리에게 스며들도록 했던 것을 알게 된다. 가령 이런 것이다.

“임의 부름이 고디에 다다름에 이에 얼김으로 배이시도다. … 한 님의 고디는 우리 때문 비르샤 우리로 하여금 늘 삶에 들어감을 얻게 하소서.”

무슨 주문 같은 느낌이 있을 수 있으나, 이 뜻은 매우 간명하다. 여기서 “임”은 당연히 하나님이며, “고디”는 “곧이 곧대로”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유기체를 연결시키는 바른 지점을 뜻한다. “얼김”은 “얼”과 “김”의 합성어로 성령의 순 우리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영혼이 담긴 기체적 존재라고 하겠다.

그러니 이 대목은, 하나님의 뜻이 결국 그 어떤 진정한 연결점에 도달해서 성령의 역사가 육신의 세계에 펼쳐졌으며 인간과 하나님이 서로 엮어진 그 지점에서,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다, 대강 이런 이야기가 된다. 이렇게 그의 사상을 펼쳐낸 다석은 결국, 우리 인간이란 하나님을 통해 생명의 참 나를 얻게 될 때 진정한 자신을 알게 되며 그로써 무지에서 깨어나고 자기가 진심을 다해 할 일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다석의 사상 체계 안에서는 기독교의 성령과 석가의 다르마, 노자의 도가 모두 하나로 통하게 된다. 하나님의 얼과 서로 교통하면서 참된 얼나를 얻는 것이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어찌 보면, 성 어거스틴이 “영원한 인간적 불안의 도정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합치되는 지점에 이르게 될 때 영원한 안식이 온다”고 했던 바와 다르지 않다. 다석은 오늘날 성찰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우주적 영의 세계에 대해 선각자적으로 짚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 고로 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곧 인간의 생명을 지키는 숨쉬기의 대상이다. 하나님의 생명의 얼이 그의 숨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런 상태를 그는 “참 말로 숨 아멘”이라고 말한다. 참 된 말로 숨 쉬는 자에게 아멘은 저절로 열린다는 것이니, 참된 말씀이 갈급한 오늘의 시대에도 여전히 종교적 상상력을 창조적으로 일깨우는 바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다석 유영모에게 하나님은 어떤 존재로 표현되는가? 그에게 하나님은 역설적 존재다. “없이 계시는 분”이 곧 그에게 하나님에 대한 정의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존재 양식에 대한 표현이고, 그에게 하나님은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했듯이 다정한 존재다. 모든 시원(始原)의 보이지 않는 형상이나, 그와 동시에 아버지, 하고 부를 수 있는 관계다.

다석은 그의 나이 84세 때 하나님을 이렇게 부른다. “우리 모신 ㅇ、ㅂ、 디” 무슨 뜻인가? 여기서 “ㅇ、”는 모든 시작의 감탄이 집중되어 있다. “ㅂ、”는 “밝다”의 축약이다. 그래서 만사가 제대로 보이는 것이다. “디”는 “딛는다”에서 알 수 있듯이 단지 관념적 이해가 아니라, 실천, 마음과 몸으로 깨우쳐 행하는 그런 존재의 근원이라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 그 시작과 출발 자체라는 감탄의 대상이자, 그로 인해 만물이 빛을 얻고 제대로 보이며 이를 바탕으로 삶의 실천이 이루어지게 하는 분, 그렇게 다석은 하나님을 불러도 그 존재의 내면과 우리가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할 것인지를 순전한 우리말로 풀이하게 위해 지극히 애를 썼던 것이다.

그 하나님을 제대로 “ ㅇ、ㅂ、 디”라고 부르자면 세상의 이해와 유혹에 얽힌 제나(自我), 즉 저만 잘난 줄로 아는 그런 자아 가지고는 안 되고 이를 벗어나 하늘의 얼로 가득 찬 “얼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다석은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세상에 빠진 내가 미혹에서 벗어나서 뚜렷하게 나서야 한다. 예수는 뚜렷이 하나님을 모시고 태초부터 자기가 모신 아버지라고 불렀다. 나도 이에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얼(성령)의 숨을 쉼으로 뚜렷이 하나님 아들로 사람답게 살겠다는 말씀 한 마디를 하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다석의 사상을 바탕으로 요한복음을 해석해나간 다석 사상가 박영호는 《잃어버린 예수》라는 책을 통해 제나를 극복하고 얼나를 찾아가는 길을 발견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세상을 향해 다석이 말한 바를 이렇게 전한다.

“낱동(개체)인 나는 전체인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사람은 완전이신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사람은 온통(전체)을, 완전(참나)을 알고 싶어한다. 그 온통과 완전이 참나인 하느님 아버지가 되어서 그렇다. 하느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것이 우리의 참 삶인 것이다. … 거짓 나인 제나로 죽고 참나인 얼나로 솟아나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유영모는 그의 평생이 결국 그 자신의 참된 자아에 눈뜨기 위해 진력을 다 했던 세월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깨우침을 무수한 종교적 탐방을 통해 이루려고 했으나 종국적으로는 그 모든 출발점에 서 있는 자신이 중요한 것을 인식하고 그 자신과 하느님이 하나가 되는 길을 터득하는 사상적 지도를 만들고자 했던 셈이다.

다석 유영모의 사상은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오늘날 종교적 갈등과 소통 불능의 지점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던질 수 있다고 본다. 어떤 특정한 종교적 굴레에 묶이지 않고 어느 종교나 깨우침에 도달하려는 곳을 향해 그는 공통의 인류적 노력을 깊이 주시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상적 경로에 우리말이 갖고 있는 힘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노력했다. 그건 그가 민중적 사고를 하고자 함이었고, 우리말 속에 담긴 조상들의 사상적 역량을 다시 발굴하고 그것을 오늘의 상황에 되살리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말로 철학하기> 운동도 펼쳐지고 있는 터에, 우리말로 신학하기도 이쯤해서 깊게 다져 생각해볼 일이다. 다석 유영모가 ‘씨 ’의 모태를 일군 존재라면, 그의 사상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해볼 경우 다시 찾아 써 볼 수 있는 말과 사상과 소재가 풍부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다. 유영모는 자신 안에 쌓여 있는 말의 회로를 따라 하나님의 뜻을 찾아 나섰고, 그걸 창조적으로 갈고 닦아 다석 사상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런 다석의 자세는 이런 대목에서 한결 뚜렷하게 이해된다.

“우리는 마음이라는 성화로(聖火爐)에 영원한 생명의 불을 태우느냐 못 태우느냐를 늘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생각을 불사르는 것이고, 그것으로 정신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 말이 터지게 된다.”

이미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을 반복하는 것은 암기하는 것에 불과하다. 또는 교리적으로 자신을 세뇌하거나 사고를 공식화해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창조적 발상을 억제하고 참된 자신과 하나님의 만남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방식이다.

그런 면모에서 보자면, 다석 유영모는 우리에게 자신에게 이미 있는 말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뚫어낸 존재이다. 조선의 역사와 풍습과 삶과, 사유방식이 깃든 말에 하늘의 얼김이 배이면 그것이 하늘의 얼김을 받은 몸이 된다. 그 몸이 토해내는 말은 어느새 하늘말씀이 되어 우리의 숨결로 변모한다. 그 숨결이 가득 찬 세상은 생명 세상이 될 수 있다.

다석 유영모를 외면하지 말고 그의 속뜻을 깊게 읽어나가면, 의외로 무진장한 보석이 발견된다. 우리의 사상이 고갈되어버린 듯한 이 시대에 다석은 그래서 반가운 존재 아닌가?

함석헌, 빈들에 외치는 소리

“나는 빈들에 외치는 소리, 아니 건드리는 것이 없고, 못 들어가는 틈사리가 없고 간 데마다 닥쳐 싸워 이겨 울고 져서 우는 하늘 땅 사이를 달리는 바람 소리. …살로메냐! 살로메냐! 썩어질 살로 내 가슴 매려느냐? 독사의 살로 내 목을 베려느냐? 시집 밑천 삼진 못할 내 목 잘라 쟁반에 들고 춤추는 오그라진 속아, 네 눈에 원수 갚음의 독살 소용이 없느니라. 나의 죽음이 쏜 빛살이 이미 네 살을 뚫어 꿰지 않았느냐? 나는 영원의 빈들에 메아리를 울리는 죽지 않는 외치는 소리”(함석헌, ‘나는 빈들에 외치는 소리’).

스스로를 “빈들에 외치는 소리”, “영원의 빈들에 메아리를 울리는 죽지 않는 외치는 소리”로 못박은 함석헌은 일제의 황량한 시대를 거쳐, 독재와 분단의 시기를 통해서 우리 역사에 거칠 것 없는 “하늘의 야성(野聲)”을 울린 이였다. 그는 20세기가 시작하는 첫 해인 1901년에 태어나 1989년, 88세의 장수를 누리면서 혹독한 세월을 때로는 폭풍처럼, 때로는 우박처럼 우리의 영혼을 몰아치고 울리며 살다 간 사상의 거인이었으며, 역사의 맥을 짚어내는 장엄한 시(詩)로 혜안(慧眼)의 빛을 우리의 어두웠던 정신에 비춘 민족 시인이기도 하였다.

그는 허연 수염과 하얀 두루마기 자락을 펄펄 날리면서, 고대 동양의 ‘선인(仙人)’과 같은 풍모로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살아 움직이는 예언자로서 우리의 역사에 우뚝 선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가 나타나면, 그 자리는 온통 존경의 마음이 우러났고, 그가 발걸음을 딛는 자리는 역사의 진전이 이루어지는 뜨거운 현장이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성서는 하늘의 뜻을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읽어나가는 책이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존재는 그 내면에 완성의 힘을 가진 <씨알>이 되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노자와 같은 고대 동양의 지혜는 새로운 육성을 가진 깨우침이 되었고 편협했던 기독교 신앙에 우주와 인간을 온통 하나로 아우르는 힘을 갖도록 하였다. 이 밖에도 그가 일구어놓은 정신사의 흔적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1935년경, 그가 서른 다섯의 역사 선생으로 정주 오산학교의 교편을 잡았던 시절, 함석헌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초고로 내놓는다. 이 글을 그의 신앙동지들과 함께 조국의 역사에 스며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찾기 위한 노력의 성과로 작성했던 것이다. 그는 이 글을 발간하지 못한 채 해방된 조국의 현실을 맞이하게 되는데, 1950년 성《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는 책으로 서울에서 출간하게 된다. 그리고 이 책은 더욱 연조를 더해가면서 1965년 다시 본래의 제목인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되어서 오늘의 모습이 되었다.

책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조국의 희망 일깨워

함석헌을 대중들에게 가장 많이 알리게 된 저서인 이 책은 믿음의 눈으로 본 조국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 민족에게 어떤 계시와 메시지를 주시려는가를 깨우치려 했던 것이다. 사실 이 책은 무슨 전문적인 역사저술도 아니고, 엄격한 역사학 방법론에 기초한 학술서적도 아니었다. 조선의 역사를 제대로 배울 수 없었던 시절, 젊은이들에게 오로지 자신의 민족사를 알게 하려는 일념 하나와, 그저 사실을 엮어나가는 역사책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두신 뜻까지 알게 하려는 마음이 이 책을 탄생하게 했던 것이다.

이 책은 그리하여, 함석헌의 사색의 열매였다. 평안도 시골구석의 한 초라한 민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이 자신의 혼과 열을 다하여 쏟아낸 이 글은 그러나 이후 무수한 젊은이들에게 조국의 역사에 열등감을 느끼지 않고 심오한 뜻과 새로운 희망을 품게 하는 책이 되었던 것이다. 1930년대는 어떤 시대였는가? 그야말로 세계적인 공황이 휩쓸고 이에 따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일제가 우리나라를 병참기지화 하여 중국을 향해 총칼을 들이대었던 때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온 민족이 절망하고 갈 길을 잃은 채, 새로운 시대에 대한 비전을 갖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바로 이 때, 젊은 함석헌은 우리 민족의 고난의 경험이 도리어 우리를 새롭게 살려 내게 된다는 것을 깊이 깨우치고, 그 영감을 사람들에게 나누었던 것이다. 고난이란 짐이며, 그래서 조국의 역사를 외면하고 있던 젊은이들은 이러한 그의 역사해석에서 뜨거운 정신과 만났고, 그 정신의 감화로 잠자던 영혼이 일어나 역사의 현실을 감당하는 존재가 되어 갔던 것이다.

여기서 그는 모든 역사의 주체를 ‘씨알’로 규정하고 이 존재가 역사의 밭에 뿌려져 하나님 나라를 일구게 된다고 보았다. 이것은 나사렛 예수의 비유를 관통하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변화의 현실을 의미했고, 당당한 자아를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민족사를 개간하는 주체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 씨알들이 자라나고, 힘을 모아 새로운 민족의 미래를 만들어내는 것을 꿈꾼 그는 그래서 이 씨알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세력들에 대해서는 가만있지 않았다. 장준하와 손을 잡고 벌였던 <사상계>를 통한 싸움은 바로 이 씨알의 힘을 억누르려 했던 권세와 감연히 맞선 일이었다. 1950년대와 60년대를 걸쳐, <사상계>는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호흡과도 같은 출판물이었고, 암울했던 시대를 일으켜 세우는 새벽의 뜨거운 함성이었다.

그가 <사상계>에 발표하여 정치적 논란과 탄압을 불러일으킨,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함석헌이 역사의 현실에서 어떤 메시지를 온 몸으로 전하려고 했는지 일깨우는 글이라고 하겠다. 오랜 일제의 속박 속에서 당장의 생존이 급급했던 우리 민족, 그리고 다시 그 일제의 악령을 되불러온 독재의 사슬 속에서 우리 민족은 생각하며 사는 여유와 힘을 잃고 만 것이었다. 그는 권력의 명령과 지시, 그리고 족쇄에 갇혀 마치 무뇌(無腦)적 존재처럼 살게 된 것을 탄식했다. 사람이 아니라, 인형과 기계가 되어가고 있던 민족의 현실 앞에서 그는 용기 있게 “아니다!”를 외쳤고, 그 힘을 민족사의 전진을 위한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일에 진력을 다하였다.

성서독법 훈련으로 동양고전 새롭게 해석

그가 시대의 이단자가 되어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려는 의지를 그는 <대선언>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들어라, 오 들으라.

하늘이여 땅이여.

그 사이에 소용돌이쳐 오르는 인간의 회리 바람이여.

내 즐겨 이단자가 되리라.

비웃는다. 겁낼 줄 아느냐.

못될까 걱정이로다.

앞으로 밖에 모르는 몰아치는 영이 이를 명한다.

내 감히 자신 있어 지어먹는 맘에서랴,

내 속에 분명 딴 뜻을 나는 듣노라.

나의 나직하장에는 거슬리는 뜻을.

그런데 그는 정치적 이단자로서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평생에 그가 믿고 고백해온 기독교에서도 이단자적 위치를 마다하지 않았다. 대선언의 시 그 다음 구절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내 기독교에 이단자가 되리라.

참에야 어디 딴 끝 있으리라.

그것은 교회주의의 안경에 비치는 허깨비뿐이니라.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보다 위대하다.

함석헌의 정신은 워낙 광대하여 기존의 기독교 신학의 틀 안에 가둘 수 없었고, 기존의 교회주의적 고백으로는 성이 찰 수 없었다. 기독교가 둘러 처 놓은 울타리를 깨고, 그는 하나님의 육성에 담겨 있는 참이 무엇인가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도처에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영이 하나님의 마음에 닿아 있으면, 참은 보인다는 그 신념이 그를 기독교의 이단자가 되게 하였으나, 종교간의 대화의 문을 열어 놓았고 서구에서 수입해온 기독교적 관점으로 멸시하며 지내온 동양정신의 깊이를 여는 역할을 감당하게 하였다. 이것은 실로, 그 동안 잠자고 있던 정신의 보고(寶庫)를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었고, 기독교 신앙으로 훈련되고 자란 정신의 힘으로 영감(靈感)의 차원이 달라진 그의 눈이 우리들에게 보여준 새로운 세계였다.

그의 노자 강좌의 첫 대목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노자를 하게 되었다고 그러는데, 왜 노자 공부를 하나? …종교란 종교는 다 동쪽에서 나서 서쪽으로 갔어요. …서양문명이 발달하면 모든 것이 다 자동적으로 잘 풀려 나갈 줄 알았단 말이예요. 그러나 그것은 이미 착각이라는 것이 다 밝혀졌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떡하지?” 동양, 거기 한번 찾아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단 말이예요. …종교란 밑뿌리가 다 하나일건데, 발표형식이 다를 뿐인데. …공자는 어려운 때니까, 실질적인 지식을 주자, 실천도덕이 중요하다 그랬는데 노자의 생각은,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해서 어찌 되느냐? 근본에서 잘못되어서 그러는데, 이제 그 근본을 다시 찾아 돌아가기 전에는 어찌 그럴 수 가 없지 않느냐? 보다 더 생각이 깊은 거예요. …영적으로 해석한다할까, 정신적 해석이라 할까? 그런 견지에서 나는 하는 거니까.”

결국 그가 추구하려 했던 것은 모든 인간사의 밑바닥에 관통하고 있는 정신적 문제의 근본을 바로 보자는 것이었고, 동양의 정신 속에 이미 있는 보고를 그대로 지나치지 말고 자세히 들여다보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자신을 혁파하여 새롭게 하자는 것이었다. 주목되는 것은 그의 이러한 동양고전의 해석이 과거 자구를 붙들고 구태의연하게 해석했던 한문학(漢文學)과는 달리, 그 뜻을 총괄적으로 살펴나가는 성서독법의 훈련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결국 그는 서양에서 들여온 기독교의 깊은 뿌리를 어루만지다가, 동양정신의 뿌리까지 가게 되었고 이 양자간의 대화를 통해서 하늘의 뜻을 캐묻고 대답해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자세는 어둠에 갇혀 있던 인간의 정신세계에 맑은 생수를 부어나가는 일이었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의 크기를 우주적 규모로 만드는 일이었으며, 하나님의 뜻을 도처에서 찾아 이를 이루는 일과 통했던 것이다.

이제 기독교는 유영모와 함석헌 선생이 걸어갔던 사상적 자취를 되돌아보면서 우리 자신의 편협함과 배타성을 극복하고, 광활한 정신세계의 확대를 이루어 기독교가 이 시대에 보다 큰 힘으로 호소력을 갖고 인간의 삶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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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자리의 사람, 사람, 사람(2)

문익환의 목소리가 그리운 것은…

 

늦봄 문익환, 그 이름 석 자는 이 나라 신학과 운동과 역사에 박힌 빛나는 보석이다. 퇴색하지 않는 아름다움이요, 늘 푸른 힘을 주는 생기이다. 책상물림으로 앉아 있던 구약성서학자가 들판에 나와 광야의 소리로 변신하자 역사는 꿈틀거렸고, 함께 춤을 추었다. 그리고 고난의 시대를 기운차게 뚫어내었다.

이 나라 신학과 운동과 역사에 박힌 빛나는 보석

그 문익환이 우리 곁을 떠난 지도 어언 20여 년이 지났다. 산천은 변했으나 그 맑은 미소와 청아한 꿈은 아직도 여전히 우리에게 뜨거움으로 있다. 목사이면서 목사로만 머물지 않았으며, 시인이면서 시인으로 그치지 않았고 학자이면서 학자로 멈추지 않았다.

정치의 소용돌이에서 야욕이 없었고, 존경의 상석 위에서 교만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내면에 쏟아져 내린 하나님의 영과 시대의 소리에 맞추어 자신을 던졌고, 그로써 역사로 존재하게 되었다. 모두가 지쳐 스러질 때에 우뚝 선 우리의 마음이 되었고, 막히지 않은 길이 되었으며 꺼지지 않는 불꽃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떠난 20년의 세월이 먼 듯 하지 않으며, 그는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움직이는 생명 같기만 하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존재의 모습은 모두 그러한가 보다.

‘재야인사(在野人士)’라는 말이 주었던 무게가 시대를 울렸던 때가 있었다. 백발 휘날리며 포효하듯 민중의 마음을 흔들었던 그의 모습 한 자락이라도 보이면 권력이 긴장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가 노년의 몸을 청년처럼 움직이면 모두가 어느새 일제히 일어나 오만과 독선, 그리고 독재의 성채를 향해 진군했던 역사가 있다.

손에 수갑을 차고 옥에 들어서도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옥 밖에 있는 이들을 도리어 위로하던 그의 넉넉한 웃음이 우리 모두를 기쁘게 했던 시간이 있었다. 그가 두 팔을 벌리고 소리를 토해내면 그것이 곧 역사의 육성이 되고, 그가 훌쩍 발걸음을 옮기면 그것이 곧 역사의 한 걸음이 되었던 충격이 있었다. 그리하여 문익환은 시대의 선봉이었으며, 우리 모두의 횃불이었고 내면의 감격이었다.

1989년, 김일성 주석과의 전격적인 만남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으나 그 놀라움은 사실 그의 순수한 꿈의 연장이었다는 것, 그래서 김일성 주석과의 뜨거운 포옹이 그 어떤 외교적 제스처가 아니라 그의 몸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사랑과 삶의 모습이었다는 것, 그것을 이해하기까지 그에게 가해진 고통은 그에게 역설적으로 힘이 되었고, 달려갈 길을 줄기차게 달려가는 자로 만드는 동력이었다.

어찌 그 만남 하나로 통일이 되고 남북이 통하며 세상 천지가 바뀌겠는가 만은, 누군가 앞장서서 길을 내지 않으면 결국 길은 언제고 영영 생기지 않는 법. 문익환은 없는 길을 만들어 뚫었고, 그 뒤로 무수한 사람들이 줄을 이어 그 길을 밟았으니 역시 선각자는 달리 있던 것이었다.

소년 문익환을 길러낸 자양분

1918년, 만주 북간도 명동에서 문재린, 김신묵의 첫아들로 태어난 문익환은 민족에 대한 사랑과 새로운 시대의 문명에 대한 깊은 일깨움이 있었던 그곳 이주 조선인촌에서 이미 장래의 문익환으로 자라난다. 북간도 명동은 일제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면서 그곳으로 떠난 일군의 선비들이 모여 만든 동네.

그곳에서 교육과 기독교의 열정은 소년 문익환을 길러내는 자양분이었다. 목사인 아버지 문재린의 모습을 통해서 그는 평생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목사임을 자각하고 있었고, 그것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자신에 대하여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성서를 통해서 만나게 된 믿음의 사람들은 소년 문익환에게 꿈을 불어넣었고, 그로써 그는 성서의 세계에 일찍 탐닉하게 된다. 무척이나 성숙한 소년이었다.

민족혼이 강렬했던 명동의 분위기에서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과 신앙의 세계가 하나가 되는 가장 기초적인 훈련을 그때 하게 된다.

그런 명동인지라 이후 이곳에서는 민중 신학 교육자로서만이 아니라 민중을 위한 정치에 나섰던 그의 아우 문동환, 이후 민중신학의 태두가 되는 안병무 등이 배출된다. 명동은 아이들에게 민족의 존엄을 배우게 한 현장이었고, 기독교 신앙이 역사와 하나로 어울려야 함을 일깨운 자리였던 것이다.

물론 그가 처음 접한 기독교는 그가 이후 구약성서의 예언자적 전통에 서서 외쳤던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로 치면 보수적 신앙의 원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신앙의 틀에서 그의 뼈대는 굵었고, 웬만하면 물러서지 않는 강단이 생겨났다. 이것은 그가 오랜 세월 동안 한눈팔지 않고 히브리 성서를 번역하는 작업에 몰두할 수 있게 한 힘이었고, 결국 그런 예언자적 삶으로 살아가게 한 근력이 되었다.

일본 동경의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그곳에서 신학수업을 했고, 만주 북간도에서와는 다른 자유로운 사상적 흐름 속에 있게 되었다. 일본 동경시대의 그는 그 과정에서 자신의 보수적 신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그로써 한 단계 발전한 신학적 이론의 토대 위에 설 수 있었다.

이후 그는 학병 소집을 거부, 만주 봉천 신학교로 이적하여 만보산 한인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게 된다. 아직은 그리 특별할 것 없는, 그러나 공부에 관심이 깊은 젊은 청년 신앙인이었다.

해방 직전인 1944년, 그는 평생의 가약을 맺은 박용길과의 삶이 시작되고, 해방 후 한국신학교의 전신인 조선신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학구열은 중단되지 않아 목사 안수를 받고 난 이년 뒤인 1949년,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1950년대의 한국에서, 미국으로 유학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프린스턴에서 수업하던 그는 6.25 전쟁이 터지자 귀국, 그가 배운 영어실력 탓으로 꼬박 3년을 판문점과 동경의 유엔 사령부에서 근무한다.

남북 대결과 전쟁, 그리고 분단의 현장에서 보았던 역사는 그가 이후 통일의 길을 향해 가게 되는데 중요한 밑거름의 경험이 된다. 3년간 계속된 전쟁이 휴전으로 미완성된 종결을 하자, 그는 마치지 못한 학업에 대한 열망을 주체치 못하고 다시 유학길에 올라 프린스턴에서 석사 학위를 끝낸다.

한국 기독교계에서 당시 “프린스턴 신학대”라는 이름이 차지했던 영광을 떠올려본다면 청년 문익환이 전란에 휩싸였던 조국에 돌아와 신학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 처지가 어떤 것이었을까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한신대와 연대에서 구약학을 강의하는 한편, 한빛교회의 목회자로서 어찌 보면 얌전한 길을 걸었던 그에게 1965년에서 1966년의 유니온 신학대 유학은 의미 있는 충격으로 남는다. 민권운동이 한참이었던 그 시기에 유니온 신학대학은 흑인 해방신학의 산실이었으며,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의 요람이기도 했다.

구약의 예언자적 전통의 흐름과 이 해방신학의 만남은 그에게 역사의 지평을 열어주었고, 이후 실천의 능력을 갖도록 하는데 있어서 매우 소중한 체험이 되었다.

 

 

 

밀실에서 시대의 광장으로

이후 그는 십년간 신구교 공동 구약 번역 책임 위원으로 살면서 히브리어와, 그 언어의 세계를 통해서 성장했던 예언자들의 삶 속에 그대로 푹 파묻힌다. 시대의 중심에 살면서 소용돌이치듯 세월을 보냈던 윤동주, 장준하의 꿈속에서의 부름도 마다한 채, 그는 히브리 성서의 번역에 미친 듯 몰두했던 것이다.

그가 윤동주에 대한 시인으로서의 열등감을 이후 고백하지만, 그의 구약 성서 번역 작업은 그러한 열등감의 극복을 넘어 그에게 새로운 시의 세계를 열어주게 된다. 아무튼, 그는 1976년에 이르기까지 일찍 일본과 미국에 유학을 하고 온 탁월한 성서학자였고, 히브리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예술적 재능을 가진 한 목회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박정희 군사독재 체제는 그의 이러한 신학적 헌신의 세계를 그대로 놓아두지 않았다. 예언의 언어를 번역하고 있기만 해서는 말씀이 육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우시기나 하시려는 듯, 역사는 문익환을 성서번역의 외로운 밀실에서 시대의 광장으로 전격 불러낸다. 진정 부름을 받은 것이었다.

이른바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이라고 불린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연루된 그는 처음으로 영어(囹圄)의 몸이 된다. 애초에 이 사건은 그가 연루되지 않게 기획되어 있었다. 필력이 좋은 그가 구국선언문을 기초한 사실은 아무도 불지 않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구약성서의 번역작업이 거의 다 마쳐가고 있다는 중대과제가 있기에, 이 일과 관련되었던 이들은 모두 그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우 문동환은 고문의 고통 속에서도 문익환 이름 석 자가 나오지 않도록 인내했던 동지들의 아픔이 더 이상 계속될 수는 없다고 판단, 형의 이름을 내놓는다.

다른 누가 그리했으면 동지들에 대한 배신이 되었겠지만, 아우가 동지들의 고통을 덜고자 형을 역사의 현장에 끌어들였으니 이를 어찌 거부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이 시기에 이르기까지만 해도 재야 민주화 투쟁의 지도급 인사는 오히려 그의 아우 문동환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졸지에 엮이게 된 문익환은 그간 히브리 성서 번역의 과정과, 해석의 훈련 속에서 다져온 믿음의 내공을 이른바 초식으로 펼쳐보이게 된다.

1977년 전주교도소에서의 24일간 옥중 단식은 약골로만 여겼던 문익환 목사에 대한 당국의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고, 재야 민주화 운동을 그를 중심으로 하는 판으로 집결시켜 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가 재야인사로서 뒤늦게 입문하여 스스로를 늦봄이라고 불렀고, 그 사로잡힘의 자리에서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알렸으니 그야말로 사도 바울의 모습대로 산 셈이다.

옥에 가둘 수 없는 영혼

1977년, 기독교계에서 존경받는 그를 더 이상 구속 수감할 수 없어, 박 정권은 그를 형 집행 정지로 석방시켰으나 이내 그는 유신 헌법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 형 집행 정치 취소로 재수감 된다. 이렇게 해서 그의 감옥 생활의 긴 세월이 시작된다.

첫 투옥이 22개월, 형 집행 정지 취소로 재수감 되어 박정희 암살사건으로 유신체제 붕괴에 이르기까지 옥살이는 한 것이 15개월, 1980년 5월 광주 연루혐의로 이른바 “내란 예비음모죄”로 세 번째 투옥되어 31개월 만에 출옥하게 된다.

1985년에는 5.3 인천항쟁사건으로 네 번째 투옥되어 형 집행 정지로 26개월 만에 나오고 1989년 평양을 다녀왔다는 죄목으로 국가보안법에 걸려 다섯 번째 투옥, 형 집행 정지로 19개월 만에 출옥한다.

1991년, 이른바 분신정국에서의 활동 혐의로 형 집행 정지로 여섯 번째 투옥되어 21개월 만에 옥에서 나오게 된다. 이렇게 1976년에서 1993년까지, 17년 세월 동안 그가 옥에서 보낸 세월은 도합 134개월, 그러니까 11년이 넘는 시간을 감옥 생활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오랜 세월의 투옥 생활도 그의 총기와 열정을 잠재우지 못했다. 아니, 도리어 그는 투옥의 고난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욱 강한 존재가 되어 우리들 앞에 나타났다. 도무지 옥에 가둘 수 없는 영혼과, 민족에 대한 사랑이 펄펄 넘치는 “자유청년”이었다.

그러기에 그에게서는 어두운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힘겨운 영어(囹圄)의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어디에 갖다놓아도 불길이었고, 역사의 산 현장이 되었으며 곳곳에서 시대를 일깨우는 소리요, 무딘 마음을 깨는 타고난 교사였다.

그래서 그가 수감되면 그 자체로서 역사는 격동했다. 문익환을 감옥에 집어넣는 시대가 그냥 온전하게 자기보신을 하고 지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가 온 몸으로 부딪혀 깨려는 어둠의 장벽은 그렇게 하나하나 무너져내려갔다.

그를 가두는 횟수가 늘어나면 날수록 민중은 그로써 깨어났으며, 현실의 모순을 명확하게 보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그는 자신의 몸으로 이 시대의 눈을 뜨게 했다. 눈 먼 시대를 자신의 생명을 걸고 개안(開眼)시키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문익환의 명망(名望)은 민주주의와 통일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귀중한 자산이 되어갔다. 그의 명성은 개인적 출세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시대의 고난을 뚫고 가려는 이들에게 자랑이요 용기가 되었으며 그의 이름은 마치 열정의 암호처럼 사람들의 영혼에 와 박혔던 것이다.

문익환이 하는 일이라면, 문익환이 하는 말이라면, 문익환이 가는 곳이라면 문익환이 목숨을 거는 일이라면, 그것은 곧 이 시대가 반드시 해야 하고 귀 기울여야 하며 함께 가야하고 그로써 생명을 거는 사건이 된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혼신을 다한 뜨거움과 그 어떤 위협과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소신대로 사는 모습은 이 시대의 예언자가 과연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모두에게 성찰할 수 있는 재료를 주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의 삶을 껴안고 평생을 살아왔던 그가 어느새 그 자신의 형상을 예언자의 것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 늦봄 문익환 기념사업 이사장 이재정 신부는 문익환의 발걸음을 “가나안땅을 향하여 모진 고난을 무릎 쓰고 걸었던 모세의 길이었으며, 마른 뼈로 뒹굴며 죽어 있던 동족을 살려내기 위하여 골짜기를 헤매던 에스겔의 길이었고, 정의를 위하여 권력에 맞서 몸을 던졌던 예레미야의 길이었으며, 살라진 민족을 다시 하나로 만들어 남북을 통일하려고 설파하던 아모스와 호세아의 길이었다”고 회고한다.

민중들이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입 한번 열지 않으며 거동조차 하지 않은 무수한 기독교계 지도자들과는 달리, 그는 하나님이 외치라는 소리만 있으면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토해냈던 것이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미 그 안에 십자가의 죽음과 삶을 품고 있는 그를 물러서게 할 수 없었으며 죽기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는데 무엇으로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 많은 회유와 협박에도 그가 끝까지 자신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그러한 예언자 정신의 삶과 믿음 때문이었다.

자신은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서 그 말씀을 대언할 뿐이라는데, 실로 무얼 가지고 그를 꺾을 수 있었겠는가?

 

                                    

미래의 역사를 감격으로 전망

그렇게 살았던 그에게 1992년에는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든다. 그건 그에게 감사였다. 노벨 평화상을 받고 안 받고 가 문제가 아니라, 이 땅의 현실이 인류사회로부터 주목받고 있다는 것, 그래서 이 역사의 한계를 밀어나가는 것이 인류에게 평화의 꿈을 나누게 하는 일이 된다는 것.

그것이 그에게 감사의 이유였다. 1989년 그가 북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만났던 일도 다 이렇게 고난의 민족에게 살 길을 열겠다는 심정 하나로 이루어낸 일이었으며, 그로 인해 고초를 겪었어도 그것이 그에게 아무 상처와 좌절의 원인이 되지 않았다.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된 것 자체로서 그는 기뻤고,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면 그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신다는 믿음이 더욱 깊어갔던 것이다.

형 집행 정지로 풀려나 마지막 투옥 생활을 마치고 난 1993년, 그는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운동을 제창하였다. 그에게 통일은 이미 온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이미 맛보는 복”과도 같은 개념이었다.

기도하면 이미 주어진 것이니, 그와 마찬가지로 통일도 아직 오지 않았으나 이미 온 것으로 받아, 통일된 조국의 삶을 살아내는 연습과 훈련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언제나 앞서 있었다.

사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우리의 현대 민족사의 반성과 깊은 관계를 가진다. 1945년 해방은 왔으나, 그 해방을 맞이하는 삶을 살아오지 않았기에 우리는 혼란과 위기, 그리고 마침내 분단의 세월을 맞이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어느 때인가 통일의 역사가 열리면, 그것이 우리에게 혼란과 위기로 치닫는 일이 되지 않도록, 그래서 통일된 나라의 백성답게 성숙하고 힘 있게 현실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 건너지 않은 요단강 저편의 가나안을 미리 보고 산 위에서 이미 기뻐한 모세처럼 그렇게 미래의 역사를 감격으로 전망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여생의 사업으로 바로 이 일을 해야겠다고 팔을 걷어 부친다. 통일을 부르짖지만, 각기 방식과 노선이 달라 분열되어 있던 통일운동을 하나로 묶어내고, 그로써 “새로운 통일 운동체”를 결성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정세(政勢)에 대한 인식도 서로 다르고, 운동방식에 대한 생각도 차이가 나며 인적 구성이나 조직의 내력도 틀린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어 가면서 통일 운동의 핵을 키워나간다는 일이 어찌 쉬운 것이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에스겔의 계시에서처럼 두개로 나뉘었던 막대기가 하나로 이어지는 그 통일의 꿈을 결코 포기할 수 없어 주변의 오해나 때로의 중상모략, 그리고 비난에도 마다하지 않고 한 길로 뚜벅 뚜벅 나간다.

그의 가슴에는 이미 가야 할 땅이 보였고, 그 땅을 가기 위한 대열만 정비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한 일의 열매는 그의 손에 쥐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후대가 맛볼 열매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이 그에게 상관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진심을 이 시대가 이해하고 그로써 통일의 기운이 대세가 되는 세상을 꿈꾸었던 것이다. “새로운 통일 운동체”를 꾸리는 것은 흩어졌던 통일운동의 기운을 견고한 하나의 힘으로 만드는 일이었고, 통일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준비였던 것이었다.

그는 이 일에 밤낮으로 매달렸다. 주변에서는 그의 건강을 걱정했고, 때로 그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모략과 중상을 걱정했다.

문익환의 목소리가 그리운 것은…

그러던 중, 1994년 1월 그는 갑자기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고통을 한 바탕 겪더니, 잠을 자고 있던 중 심장마비로 인해 그가 그렇게 사랑하고 뜨겁게 열정을 쏟았던 이 세상을 홀연히 떠난다. 모두에게 놀라운 충격이었고, 한 시대의 통곡이 그의 죽음을 향해 쏟아 부어졌다.

님이 가신 것이었다. 어두운 역사의 밤을 지새우며 예수의 길을 따라, 좁은 길만 찾아다니고 그로써 형극(荊棘)의 삶을 마다하지 않던 그가 졸지에 우리 곁을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어디 떠난다고 떠나지는가? 문익환은 그저 떠나고 만 것이 아니라, 이 분단의 시대에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를 두고두고 가슴에 새기도록 하였다.

고난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이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어떤 능력을 주시는가를 보도록 하였다. 민족의 현실과 만난 신앙이 어떤 불꽃을 피워내는가를 목격하게 하였다. 그로써 참된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일깨웠던 것이다.

한반도의 정세가 어지러운 이때에, 문익환의 목소리가 그리운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다. 순수하고 열정적인 그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어 하는 것 또한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일신의 영달이나 개인적 야망, 또는 출세의 자랑을 모두 접고 한 시대의 절절한 요구 앞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자신을 던질 줄 아는 “아름다운 이”가 제대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믿는다. 그의 삶이 이 땅에 뿌린 그 무수한 씨앗이 보이지 않게 여기저기서 싹을 틔우며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고 있다는 것. 그래서 민중의 거대한 함성이 그날 그때에 울리면 “역사의 여리고성”은 무너지고 만다는 것. 그것을 우리는 믿는다.

문익환, 그는 바로 그렇게 그 날을 준비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전령(傳令)이자, 그리스도의 날을 예비하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였던 것이다. 그가 흔든 깃발, 우리도 뒤따라 흔들어 하나님 나라의 의를 이루고자 하니, 한 시대의 스승으로 그를 가진 우리는 정녕 복 받은 존재들이 아닌가?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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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자리의 사람 사람 사람’ (1)

트루에 오르겔, '바람 피리의 꿈'
- ‘파이프 오르간’을 짓는 사람, 홍성훈을 만나다 -

 

어릴 적 교회 예배당에는 성가대 자리 바로 옆에 피아노가 있었고, 반대편 저 멀리 한쪽 구석에 파이프 오르간이 외롭게 있었다. 그 큼지막한 나무 상자 뒤에는 반주하는 선생님이 숨어있었다. 그 속에서 무얼 하는지 늘 궁금했다. 아무도 없는 시간에 가까이 가 보았던 오르간의 정체는 조금 더 큰 피아노 정도일 거란 예상을 깨고, 층을 이룬 건반들과 바닥을 뒤덮은 여러 개의 페달로 독특한 모양을 한, 이제껏 보지 못했던 괴상한 물건이었다. 예배 시간에 성가대의 찬양이 시작되면, 파이프 오르간은 그만의 신비하고 묵직한 소리로 예배당 공간을 온전하게 채우고 울렸다. 그때 내 몸을 진동시켰던 작은 울림이 바로, 내가 기억하는 파이프 오르간이었다.

일반적으로 파이프 오르간하면, 역사가 깊은 성당이나 교회에 붙박인 거대한 건조물이 떠오른다.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듣기에 앞서, 그것의 웅장한 생김새만으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자신을 품은 건물과 영원히 운명을 함께 할 것 같이 보인다. 그래서 파이프 오르간을 만든 사람은 분명 오랜 전통의 기술을 잇는 유럽 어느 작은 마을에 사는 가문 대대로 이어지는 장인의 모습일 거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미지의 파이프 오르간 장인은 저 멀고 먼 유럽이 아닌, 서울과 가까운 경기도의 어느 작은 마을에도 있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됐다.

경기도 양평에 파이프 오르간을 짓는 사람, 홍성훈이 있었고, 거기서 그를 만났다. 거대한 컨테이너 박스 한 귀퉁이에는 홍성훈 오르겔바우 공작소라 적힌 나무 현판이 붙어 있었다. 그 안으로 들자 갑자기 따뜻한 기운이 확 밀려 들어왔다. 눈앞에는 커다란 몸통을 가진 난로에 연결된 연통이 길고도 높게 뻗쳐 있고, 난로 옆 수레에는 작업하다 남은 고급 목재 자투리가 땔감용으로 쌓여 있었다. 실내 중앙에는 작은 구멍이 송송 뚫린 기다란 목판이 누워 있었고, 한쪽 벽면에는 커다란 나무 구조물이 서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정밀한 기계들과 그 위에 오르간을 구성하는 작은 부품들이 놓여 있었다. 그의 열네 번째 파이프 오르간 작업이 한창이었다.

백발에 스카프가 잘 어울리는 그는 난로 옆 간이탁자로 우리를 안내했고, 모두가 탁자에 둘러앉자 조용히 유리잔에 담긴 난쟁이 양초에 불을 붙였다. 어느새 그는 차를 내왔고, 찻잔을 들어 달큰한 찻물 한 모금을 입안에 머금으니, 추위에 움츠러든 몸이 기지개를 켰다. 다시, 반짝거리는 작은 촛불이 눈앞에 들어왔다. 작업장 안은 벌건 대낮 같은데, 굳이 작은 초 한 자루에 불 밝힌 그의 사연이 궁금해졌다.

“1986, 스물일곱 살 청년의 저는 독일로 떠났습니다. 당시 한국 사회는 평화롭지 못했지요. 불안한 정치 상황 속에 대학생들의 민주화 열망이 컸던 시기였습니다. 취업문은 지금보다 더 좁았고, ‘풍족이라는 건 기대하기 어려웠던 새마을운동의 시대였지요. 반면, 독일은 유럽 가운데서도 가장 풍족한, 말 그대로 선진국이었습니다. 당시 외국으로 나가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유학을 가려면 국가시험을 치러야 했고, 해외여행은 국가정보원에서 관리하는 중요한 사안이었어요. 그 엄혹한 시절, 북한과는 극도의 긴장 관계였을 뿐 아니라 주변 상황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러한 때에 자유의 나라 독일에 갔으니 한국에서는 볼 수 없던 생소한 모습에 충격 받고, 위축될 수밖에 없었지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그는 독일인들의 생활습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 온 건, 손님이 집에 방문하면 촛불을 켜는독일인들의 모습이었단다. 그들에게 있어 촛불은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깊은 대화를 나누기 위한 그들의 문화였다. 한국에서는 전기가 없어서 촛불을 켰는데, 우리와는 목적 자체가 달랐다. 뿐만 아니라 주5일제였던 독일인들에게 토요일은 여유롭고 한가한 시간이었단다. 당시 일주일 내내 뼈 빠지게 일해야 했던 한국인에게 5일제는 꿈같은 일이었다. 독일에서는 토요일마다 들어 선 교회 앞 장마당에서 줄지어 늘어선 포장마차에서 과일, 치즈, 생선 등 여러 가지 식료품을 팔았고, 여유롭게 쇼핑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에게도 토요일마다 열리는 장마당에서 장을 보는 것은 일상에서 누리는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토요장터에선 여러 가지 물건을 팔았지만, 그중에서도 저의 눈에 들어온 건 이었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꽃을 참 많이 사가더군요. 비싼 꽃을 왜 그리 많이 사는지 저로써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꽃을 살 바에 차라리 연탄 한 장 더 사는 게 낫다는 게 저의 생각이었지요. 독일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있는 곳마다 사람들로 붐비던 모습도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예술 작품을 통해 삶의 어떤 에너지를 얻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보였어요. 독일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그들이 누리는 문화적 향유의 깊음과 넓음이 부러웠습니다.”

언젠가 지리산자락의 민들레학교에서 만났던 그는 한 번은 이런 말을 전해주었다. 독일 고등학교에서는 예술, 체육, 작문, 라틴어와 영어까지 무려 다섯 가지를 얻는단다. 일석오조(一石五鳥). 그래서 독일에서는 고등학교만 나와도 대부분이 자신만의 취미를 가지게 되고, 미술작품을 관람하거나 음악을 감상할 때 코멘트 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어 문화를 즐기는 데 있어 전혀 어려움이 없다고 느낀다. 어느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찾은 독일 관객들이 연주에 맞춰 자연스럽게 악보를 넘기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그가 말했지만, 어쩌면 그건 당연한 교육의 결과였던 셈이다. 일상에 면면히 여유가 흐르는 독일 사람들과 달리, 그의 눈에는 우리나라 사람의 삶이 참 메말라 보였고,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 입학이 가장 큰 목표가 됩니다. 대학을 목표로 하는 고등학교 생활도 억울한데, 목표한 대학에 가서도 시간만 버리고 말지요. 결국 사회에 나와서 뭔가를 하려면, 그땐 또 사회의 룰을 따라서 살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는 없고, 목표만 남고 마는 거지요. 우리 사회는 20대에는 공부해야 하고, 30대에는 결혼해야 하고, 40대에는 저축해야 하고, 50대에는 노후준비를 해야 하고, 60대는 건강관리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사회에서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들을 따라가다 보니 그걸 다 이루지 못했을 때는 자괴감이 들지요. 지금은 옛날보다 훨씬 풍족하게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지수는 오히려 이전보다 급격히 줄어들었지요.”

 

인터뷰 도중에 그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뜻한 기운이 조금 식었는지, 기침을 한 번 하고는 장작 몇 뭉치를 난로에 부지런히 넣는다. “내가 이렇게 비싼 나무를 때워. 이건 순수한 오크(Oak). 이렇게 장작을 때면 이 겨울도 지나가는 거지.” 그가 자리로 돌아오자, 갑자기 라디오에선 우리 노래 가락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이와 함께 그는 열네 번째 파이프오르간을 시작하게 된 특별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꺼내놓았다. 시작은 <십대들의 쪽지> 발행인 고 김형모(1956-2008) 목사의 꿈에서 비롯됐다.

김형모 선생님은 청소년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강연도 많이 했습니다. 어느 날 제게 트루에 오르겔을 만들 수 있냐고 물어보신 적이 있어요. 차에 싣고 시골, 산간벽지 어디든 가서 우리 청소년들에게 좋은 소리를 들려주고픈 그의 꿈 때문이었습니다. , 저도 한국사람 누구나 파이프오르간 소리를 듣게 된다면 참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요. 하지만 결국 김형모 선생님은 주문만 하고 결과물은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그의 꿈이 밑바탕이 되어, 지금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됐습니다.”

트루에 오르겔은 모든 문을 통과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이동형 파이프오르간으로, 무게는 대략 120kg, 가로세로 각 1m 정도 크기의 외형에 총 224개의 목관, 금관 파이프로 구성된 세상에서 가장 작은 파이프오르간이다. 한국적인 것을 추구하는 그의 트루에 오르겔에는 어두운 소리의 퉁소 소리, 부드러운 흙냄새 가득한 훈의 소리, 당찬 향피리 소리 등의 한국적 음색이 담기고, 메탈파이프 전면에는 에밀레종의 비천상의 구름이 새겨져 한국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게 된다.

지난 2, 그는 트루에 오르겔 다섯 대를 동시에 만든 적이 있다. 다섯 대의 트루에 오르겔은 각자의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이번에 제작하는 트루에 오르겔은 목적 자체가 다른데, ‘바람피리의 꿈이란 이름의 문화펀드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그는 이번 트루에 오르겔을 기부자 모두의 것으로 만들고픈 거창한 꿈을 꾸고 있다. 지난 12월 초, 곽건용 나성향린교회 목사는 우연히 그의 양평 공작소에 들렀다가 문화펀드의 취지를 듣고는 선뜻 100불을 기부하기도 했다. 국내가 아닌 바다 건너 미국 땅에서 들어 온 첫 후원이라 그 의미가 더욱 크다. 곽 목사에 이어 후원의 손길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지만, 아직도 더 많은 관심과 후원의 움직임이 필요한 상황이다.

모두를 위한 새로운 프로젝트입니다. 파이프 오르간을 기부 받아서 만드는 건 처음 있는 일일 겁니다. 이건 투자가 아닌 기부입니다. 모두가 문화를 누릴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는 매개체가 파이프오르간이 되는 거지요. 파이프 오르간은 교회에만 설치되어 있고, 연주를 자주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소리를 듣기란 쉽지 않지요. 더군다나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 접하기란 더욱 쉽지 않습니다. 그때, 이걸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면, 모두가 이 음악을 들을 수 있겠다고 깨달았지요.”

 

트루에 오르겔 제작펀딩 프로젝트 바람피리의 꿈

트루에 오르겔 제작펀딩 프로젝트 바람피리의 꿈은 오는 331일까지 진행되며, 제작비 675십 만원을 목표금액으로 잡았다. 문화펀드에 기부하는 모두에게 트루에오르겔 콘서트 초대권이 주어지며, 기부액에 따라 다양한 혜택이 주어진다.

>>문화펀드 참여하기<<

 

파이프오르간 소리를 모두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게 그의 꿈이다. 그래서 제작을 넘어 정기적인 연주회를 열고자 하는 계획까지 차근차근 준비되고 있다. 오는 328일 구 서울역사 갤러리에서 바람피리의 꿈, 실크로드를 위하여란 제목으로 오르겔&크로스앙상블첫 번째 콘서트가 열린다. 콘서트가 끝나면, 열네 번째 파이프 오르간은 통영에 둥지를 틀게 된다. 베이스캠프가 통영 옻칠미술관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그곳이 관리 책임자가 되고, 지역 어느 곳이든 연주가 필요한 곳마다 찾아가는 연주회가 열리게 된다. ‘2차 오르겔&크로스앙상블이 시작되는 것이다. 공연 장소는 음악홀이 아닌 곳이 될 것이다. 미술관, 고궁, 한옥 대청마루, 갤러리, 심지어 마구간, 쌀 곳간까지. 첫 연주회는 통영국제음악당 로비에서 시작해 담양, 평창에서의 연주회 일정이 잡혔다. 펀드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연주회 초대권이 주어진다.

 

보통 파이프오르간은 벽장에 붙어 있어 이동이 어렵습니다. 이번에 제작중인 트루에 오르겔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파이프 오르간이지요. 그래서 1톤 트럭에 싣고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한라산 꼭대기에서 연주회를 가질 수도 있지요. 재밌는 이벤트를 많이 만들 수 있을 거에요. 많은 사람들에게 오르겔을 알리고, 새로운 음악문화도 만들어가고 싶은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열네 번째 파이프오르간 바람피리의 베이스 캠프로 정해진 통영은 시인 유치환의 깃발이 날리고, 시인 김춘수의 꽃이 피는 예술의 도시로,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의 고향이기도 하다. 남북사이의 철조망을 음악으로 녹이자고 처음 제안했던 윤이상은 음악을 매개로 남북화해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그가 비무장지대에서 남북 음악인들의 합동연주회를 제안하고,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통일음악회를 열었던 건 그 누구보다 간절했던 그의 기도 때문이었다. 두 동강난 허리를 부여잡고 여전히 아파하는 한반도에서 그의 기도는 아직까지 유효하고, 한반도의 통일을 향한 간절한 염원은 바람피리의 꿈에 잇대어 있다. 파이프오르간 마이스터 홍성훈이 모두에게 들려주고픈 트루에 오르겔의 아름다운 피리 소리도 자유로운 바람을 타고 남한 구석구석을 돌고, 저 북녘 땅까지 고루고루 퍼지는 꿈을 꾸고 있으리라.

하늘과 땅의 축복으로
비와 눈과 바람의 축복으로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를 누리는 나라
노래와 춤의 나라
종교도 도덕도
예술도 문화도
모두모두 노동의 깃발 아래 모여 하나인
나라의 꿈
그래서 겨레사랑을 말로 하지 않고
얼싸안고 비벼대는 몸으로 하고
온몸으로 노래하는 나라.

- 윤이상이 작곡한 성악곡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My Land, My People!)’1악장 Die Geschichte(역사) 문익환의 시

 

성상현/꽃자리출판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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