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26)

 

요단강의 쇳소리

 

 

“당신은 누구요?” “나는 광야에서 울부짖는 이의 소리요”(요한복음 1:19-28).

 

“당신은 누구요?”

 

예루살렘 제관과 레위지파 사람에게 광야에서 서성거리는 미치광이의 대답은 중요치 않았다. 사실이냐 아니냐, 진실이냐 거짓이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직 그자가 자기들의 법망에 걸리겠느냐 아니냐가 문제였다. 그자가 누군인들 무슨 대수인가? 요컨대 어떻게 저자의 입만 다물게 할까 그것이 전부였다.

 

지난 30년, 한국 교회에는 많은 소리가 있었다. 듣기 거북한 쇳소리가 있었다. 마치 양들이 떼죽음을 당하는데 목자는 코를 골고 있다며, 목자 대신 싸움을 벌이던 개들의 소리와 같았다. 얼어붙은 강토를 스산하게 휩싸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놀라 달빛타고 짖어대는 늑대의 울음처럼 고독하기도 했다. 우리들 모두 소름이 끼쳐 이렇게 수군거려왔다.

 

“정치라면 신물이 나니 밖에 나가서 하시구려. 우리야 하느님의 부드럽고 따스한 손길을, 달콤한 위안의 말씀을,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하는데, 당신 도대체 무슨 권리로 정의니 평등이니 가난이니 통일이니 하는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를 성당까지 끌고 들어와 우리의 심사를 거북하게 만들죠? 어째서 미움과 원한과 피냄새가 배인 불길한 쇳소리로 우리 소박한 교우들을 가슴이 철렁 내려앉게 만드느냔 말이오. 성모 어머님께, 성령님께 올리는 뜨거운 우리 기도에 왜 초를 치느냔 말이오. 당신들 소란 때문에 입교하려던 예비자는 다 내빼고 대신 불순분자만 우글거린다 말이오!”

 

 

 

요한이 울부짖으며 소리친다.

 

“누군가 왔다! 큰일이 닥치고 있다!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분이 당신들 가운데 서 계신다.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분이…”

 

하지만 우리 중 아무도 요한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당신들이라니 누구 들으라는 소린가? 우리? 우리가 어때서? 뭐가 어때서? 우리는 바른 길에 서 있다. 나사렛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고 있다! 우리는 세례를 주는 사람이지 회개하는 표로 세례를 받아야 할 죄인들이 아니다!”

 

놀라운 맹목! 마음의 눈이 멀면 실체가 아닌 겉모습을 실체로 여긴다. 본질 대신 자기 신념의 허깨비를 보려 한다. 그것을 그리스인들은 우상 숭배라고 불렀다. 우리 역시 우상을 숭배하고 있지 않은가? 드뤼박의 말처럼 말이다. “정의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결별하는 것이며, 하느님 예배를 우상숭배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다만 빛을 증거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던 요한마저 꼬투리를 잡아 없애려던 사람이, 빛이신 그분을 알아볼 리 없었다. 요한은 그분의 신발 끈이라도 풀어 드리는 게 희망이라는데, 예루살렘 고위층은 그분을 때려죽이는 게 바램이요, 소원이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왜 세례를 베푸는 거요?" 당신들더러 가톨릭이라는 명칭도 천주교라는 간판도 쓰지 말라는데 왜 천주교인 행세를 하는 것이죠? 어떻게 신성한 가톨릭을 등에 업고 마땅찮은 언행들을 하는 거요?

 

먼 옛날 유다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내세워 하느님의 아들을 배척했다. 지금은 그렇게 배척당한 그 분의 교회가 교회법을 내세워 하느님의 백성을 배척하고 있지 않는가?

 

"성서를 연구해 보시오. 갈릴리에서 예언자가 일어나지 않습니다"(요한복음 7:52). 성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 덕분에 대제사장이 성서를 완성하러 오신 분을 알아보지 못했듯이, 논리정연한 신학지식이 하느님의 예언자를 알아보지 않고 화형에 처했던 저 무수한 범죄를, 교회 역사는 증언하지 않는가?

 

성염/전 바티칸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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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25)

 

빵을 주랴, 자유를 주랴?

 

 

“여러분이 나를 찾는 것은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6:24-35).

 

16세기 스페인의 세빌랴 라는 도시에 예수가 나타나셨다. 종교 재판과 마녀 사냥이 판치던 그 곳, 철저한 가난을 부르짖던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아, 국왕과 성직계의 미움을 받던 개혁가가 날마다 광장에서 불타 죽던 도시에 예수께서 나타나셨다. 그곳 추기경은 당장 예수를 체포하여 지하 감방에 가두고 한밤중에 예수를 찾아와 따진다. 도스또옙스키의 《카라마죠프가의 아들들》에 나오는 유명한 ‘대심문관’ 장면이다.

 

세빌랴의 추기경이 예수를 설득하는 교리는 이것이다. “자유와 지상의 빵과는 어떠한 인간에게나 양립할 수 없소. 자기네들끼리 그것을 공평하게 분배할 수는 도저히 없기 때문에. 또 그들은 너무도 무력하고 너무도 사악할 뿐만 아니라 한푼의 가치도 없는 반역자들이기 때문에 절대로 자유를 누릴 수 없소.”

 

“빵을 주랴? 자유를 주랴?”

 

“먼저 먹을 것을 주시오, 그리고 나서 착한 행동을 요구하시오! 자유가 밥 먹여 주지 않습디다.” 그래서 지난 40년간 이 땅에는 빵의 이름으로, 경제개발과 공업화, 수출경쟁과 개방시대와 국제 경쟁력의 이름으로 온갖 독재가 판을 치고 자유가 유린되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요한복음의 말씀 역시 빵과 자유의 논리를 토대로 한다. 빵의 기적에 놀라 몰려온 군중을 상대로 예수께서 꾸준히 설득하신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라.”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그 길입니까?”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분(=예언자)을 여러분이 믿는 것, 이것이 곧 하느님의 일이다.”

 

 

 

 

과연 하느님께서 파견하시는 사람, 예언자란 누구인가? 예언자란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다. 꿈을 꾼 이는 파라오였지만 일곱 해의 대흉년이 온다는 징조로 풀이한 이는 예언자 요셉이었다.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잔치 때 벽에 글씨를 쓴 것은 난데없이 나타난 손가락이었지만 그 뜻을 풀어 준 이는 예언자 다니엘이었다.

 

자본이 위협하는 세상에서도 교회는 빵과 자유는 양립할 수 있다고 가르쳐야 한다. 빵은 강자와 부자가 독차지하고 가난한 노동자는 그들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나 주워 먹어야 한다는 식으로 교회가 행동해서는 안 된다. 거짓으로 교과서를 국정화하려는 정권에게 그것은 허위라고 소리쳐야 한다. 국가보안법을 그대로 둔 채 남북대화를 하는 일은 위선이라는 사실을 종교인은 지적해야 한다.

 

그런데… 그 엄혹한 시절, 저 파업 노동자들, 대학생들은 왜 걸핏하면 명동으로 모였던가? 무엇을 기대하고 명동으로 올라갔던가? “예언자”를 보러 왔었다. 하지만 요즘 그 언덕에서 그네들은 “비단옷 입은 사람”이 부려먹는 제관만 보는 것 같다. 하느님과 맘몬 사이에 끼어 난처해하는 제관의 말이 서러운 사람들 귀에는 이렇게 들릴지도 모른다.

 

“여기는 왕의 성소요 왕실 성전이다. 여기는 힘있고 돈 있고 변변한 선남선녀들이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성소이지 너희들이 몸을 피하라고 세워진 치외법권 지역이 아니다. 당장 여기를 나가거라!”(아모스 7:12-13 참조).

 

무슨 소리를 들으려 서울의 신도들은 수년 간 돈을 모아 ‘평화’의 방송과 신문을 만들었던가? ‘진리를 빛으로 하여, 정의를 목표로 하여, 사랑을 원동력으로 하여 참 언론을 펴 나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어쩌다 지금은 ‘평화’의 소리가 당국의 발표 위에서, 학생과 노동자에 대한 이념적 증오를 깔고 내는 쇳소리처럼 들릴까? 아아, 빵과 자유가 양립하느냐 못하느냐가 예수와 대심문관을 구별하는 잣대이거늘….

 

성염/전 교황청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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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24)

 

처음부터 망쳤구나!

 

 

“당신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주겠소?”(요한복음 2:13-25).

 

너무도 변해 있었다. ‘빛의 아들들’과 섞여 사느라 십여 년을 멀리했던 성전이기는 하지만 이건 시장 바닥이었다. 해방절이 다가오는 때라 제관에게는 대목이라겠지만(판공에다 찰고, 십일조 책정에 오죽이나 바쁠까?) 해도 너무들 하다.

 

열두 살 적 추억을 어떻게 잊는단 말인가? 정말 웅장하고 성스럽고 신기했었다. 온 겨레가 '하느님 아버지의 집'이라 부르지만 내겐 정말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살아온 듯한 친근감을 주는 곳이 여기 성전이다. 핏덩어리인 내가 강보에 싸여 왔던 곳, 우리 어머니가 시므온이니 안나니 하는 노인네에게 내 팔자가 기구할 테니 조심하라는 말을 들으셨다는 곳이 여기라서 그럴까?

 

 

 

 

그날 긴 수염이 하얀 할아버지 한 분이 내게 무엇인가 질문하였던 것을 시작으로, 모든 율법학자들이 나에게 이것저것 묻곤 했다. 덕분에 친척들이 떠난 줄도 몰랐었지. 그 시간이 사흘이었으니 어머니한테 단단히 회초리를 얻어맞을 뻔했던 기억이 난다.

 

‘악한 대제관’이 교회 권력의 우두머리로 군림할 시기는 7년 대란뿐이라던 말이 뇌리에 남아 저런 행동이 나오는지도 모른다. 허나 내가 공생활을 시작한 첫 번 상경길인데 어떻게 성전에서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을까?

 

나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부정한 권력의 하수인으로 온갖 사회악을 도맡는 자, 반공의 가면을 쓴 맘몬 숭배자, 현실기피자가 이 성전에 들어와 제사를 좌지우지하는 꼴을 볼 수가 없었다. 성전에서까지 쾌락에 대한 욕망, 인색한 마음, 권력에의 의지가 하느님의 자리를 점유하다니 견딜 수 없었다. 헌금 액수와 돌 덩어리 숫자와 총 공사비로 하느님의 영광을 재다니 이럴 수가 없다. 제관도 신도도 성전 앞 구걸하는 거지와 뒷문으로 들어오는 빈민의 사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 분노가 저 하찮은 장사꾼에게로 터진 것이다. 나다나엘이 전하기로, 정신이 나간 내가 물건을 닥치는 대로 집어서 땅에다 팽개쳤다는 것이다. 게다가 채찍을 들고 후려치다니…. 장사꾼 역시 권리금을 내고 있겠다, 어떤 연줄로든 제관의 빽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터이라 반발이 없을 리 만무했다.

 

다행히 법률적인 시비는 없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 주겠소?”라고 고작 빈정거리기만 했다. 마치 네가 예언자냐는 투였다. 나 역시 퉁명스럽게 대꾸했지만, 나의 출세는 이제 처음부터 망쳤다는 것만은 불을 보듯 뻔하다.

 

성염/전 교황청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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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23)

 

부자는 누가 부자야?

 

 

“어린 친구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란 참으로 어렵구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습니다”(마가복음 10:17-30).

 

젊은이는 슬픔에 잠겨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풀이 죽어 떠나갔다. 일상생활로 돌아갔다. 겉으로는 전보다 더 경건해지고 신심이 돈독해지고 기도를 더 많이 하고자 힘쓰며 정직하고 의롭고 곧은 사람으로 처신하고자 애썼다. 성전에 가고 헌금을 많이 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사도 많이 하여 참으로 경건한 인물로 흠모 받았다.

 

하지만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기분은 떨치지 못하였다. 만사가 전과 다르고 다 허전하였다. 자기가 왜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는지, 왜 지금도 이처럼 마음이 무거운지 알 길이 없었다. 몇 달 뒤 드디어 예수께서 혼자 계시는 틈을 타서 다시 한 번 찾아갔다. “주님 말씀이 옳았습니다. 저는 비겁한 사람입니다. 제 재산이 그대로 있습니다만 이미 제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기 양도 증서가 있습니다. ‘나의 전 재산을 빈민들에게 기증함.’ 받아 주십시오….”

 

 

 

<Christ  And The Rich Young Ruler - Heinrich Hofmann , Wikimedia Commons>

 

 

성서학자 마르띠니 추기경이 상상해 본 오늘 복음의 뒷 이야기이다(마르띠니, 《마태오복음》 60-75면 참조). 역시 해피엔드가 좋다.

 

우리는 세상 물정을 알기에 저 청년처럼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어리석은 질문은 하지 않는다. 우리 질문은 그저 “선하신 선생님, 저처럼 선한 사람이 세상에서 삼박자 축복도 받고 죽어서 영원한 생명도 물려받으려면(꿩 먹고 알 먹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에서 그친다. 성서와 교리서와 교회 사회 문서에 나오는 뻔할 뻔자 대답을 듣는다는 것도 잘 안다.

 

요즘 부부들이 결혼 전에 작성한 각서에 따라 선을 긋고 산다는데, 우리도 세례 후 몇 해만 지나면 어느새 적당히 선을 긋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느낀다.

 

“좋아요 주님, 주일미사 다니지요. 교무금과 헌금도 하지요. 시간 여유 나면 신심회 활동도 하지요. 다만 그 이상은 간섭하지 맙시다. 세무 공무원들 충분히 이해가 가고 남습니다. 재수가 없었을 뿐입니다. 백화점 고객 명단, 그 정도는 써야 사람 대접받습니다. 주님은 세상 물정을 모르셔서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잘라 말씀하셨지만, 하느님 계시고 돈이 있으니 세상에 안 되는 일없더군요. 우리 서로 마음에 부담을 주지 마십시다. 이 점은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글쎄요, 부자가 천당 가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말씀 같은데 그게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저는 유복한 중산층에 불과하지요. 땅과 상가와 주식이 좀 있어 주위의 부러움을 사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제가 부자는 무슨 부잡니까? 주님의 것을 관리하는, 마음이 가난한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그대가 정말 마음으로는 가난한 청지기인지 인색한 부자인지 알고 싶은가? 그러면 주님의 입에서 “네가 가진 것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라!”라는 말씀을 듣는다고 상상해 보시라! “주님, 저도 줄만큼 주고 나눌 만큼 나누었습니다! 그 이상 어쩌자는 것입니까?”라고 당당히 대꾸하게 되리라.

 

같은 말을 강론 시간에 본당 신부의 입에서 듣는다고 하자. “듣자듣자 하니 별 미친 소리 다 듣겠네!”라는 욕지기가 우리 목구멍까지 올라오리라. 같은 말을 시민운동가의 구호에서 듣는다고 하자! 당장 “저 빨갱이 새끼들 때려죽여라!”는 고함이 우리 입에서 거침없이 터져 나오리라.

 

성염/전 교황청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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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22)

 

신앙은 투기요 모험이다

 

 

“주인께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시라서…”(마태복음 25:14-30).

 

성서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이라 한다. 머리를 끄덕거리고 무릎을 치게 만드는 금언명구가 아니라 하느님과 나 사이에 일대일의 시비(是非)를 붙이는 말씀이다. 따라서 어디에다 인용을 하고 사람을 훈계하기 위해서나 겨우 성경을 뒤적거리는 일은 매우 어리석다. 더구나 누구한테나 찍어 붙여 욕하고 비난하고 단죄하려고 성경 말씀을 끌어대는 일은 너무도 위태하다.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는 예수님 말씀은 공갈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그 사람이다. 나는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다. 그래도 변통은 해서 천만다행이다. 그런데 저 자는 무엇이람? 한 달란트도 건사를 못하고 저렇게 닥달을 받는 꼴을 좀 보라지…” 이런 생각은 되도록 삼가는 편이 이롭다. 한 달란트를 받았다가 주인의 질책을 받는 사람은 우리 모두의 신세이기 때문이다.

 

 

 

 

세례 때 받은 은총(교리상으로 ‘상존은총’이라 일컫는다)을 고이 간직하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은 그럴듯하다. 그러나 하느님은 늘 일하시는 분이시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시다. 그렇다면 한 달란트(요새 돈으로 백만 원 단위다)를 이자 한 푼 안 붙여 둔 종이야말로 악하고 게으르게 보일 수밖에 없다.

 

신앙생활의 근본은 낙원의 태평성대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다. 한 번 받은 은혜를 때묻지 않게 고이 간직하는 것도 능사가 아니다. 유감을 당하지 않고 귀찮은 문제에 부딪치지 않고 순탄하게 사는 사람이 복 많은 것이 아니다.

 

헐벗은 거지가 지나갈 때, 내가 부리는 사람이 생활에 쪼들려 기진함을 알 때, 내 동료가 부정과 불의에 희생당함을 보고 들을 때, 집권자들과 재벌들과 그 패거리가 이 나라를 뿌리째 썩혀 쓰러뜨림을 두 눈으로 목격할 때, 나는 과연 어떻게 하는가? 성당에 들러 가난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아랫사람들에게서 착취한 돈을 교회에 헌금하고, 이 나라와 동료를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맡기고 나면 양심이 편해지던가?

 

신앙은 투기요 모험이다. 하느님이 셈을 하실 때는 원금은 물론 이자와 소득을 따지실 것이다. 내 개인의 구원, 내 양심의 평안만 얻는 뾰족한 수는 없다. 하느님의 백성은 함께 멸망하거나 함께 구원받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성염/전 교황청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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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21)

 

때로는 눈먼 이가 보는 이를 위로하였다

 

 

“그가 당신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니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분은 예언자입니다.”

“우리가 알기로 그는 죄인이오.”(요한복음 9:1-38)

 

제목으로 쓴 글귀는 종교화가 루오의 화집 <미세레레(MISERERE)>에 나오는 어느 그림의 제목이다. 요한복음 내용에 맞춘다면 “눈먼 이가 보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보여주었다”고 바꿈직하다.

참으로 성서는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 같다.

 

“당신이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인가?”

“그렇습니다.”

“할멈, 이게 당신 아들 틀림없어?”

“그렇습니다만.”

“소경으로 태어났다 이 말씀인가?”

“소경으로 태어난 것만은 틀림없읍죠.”

“영감, 당신 아들이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말짱한 거야?”

“글쎄요… 나이가 있으니 본인한테 물어 보시지요.”

 

“여봐, 당신 어떻게 눈을 떴나?”

“예수라는 사람이 진흙을 개어 눈에 얹어 주시고는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씻었더니…”

“하, 우선 무면허 의료 행위로 걸고… 그런데 그게 언제야?”

“그젭니다.”

“그 사람 하필 왜 안식일에 그따위 짓을 하고 다녀?”

“예? …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안식일도 안 지키는 작자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보나? 당신, 그 작자를 뭘로 봐?”

“예언잡니다.”

“예언자 좋아하시네. 그 사람은 죄인이야.”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소경이었다가 지금은 눈을 떴습니다.”

“그 새끼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어?”

“아니 왜 자꾸 같은 걸 묻습니까? 그분 제자라도 되실 생각입니까?”

“이게 누굴 놀려? 너나 그 새끼 제자 되라. 우린 모세의 제자야. 그 새끼는 어디서 온 놈인지도 모른단 말이야. 수상한 놈이야.”

“그분이 하느님으로부터 오시지 않았다면 소경을 눈뜨게 하실 수 있을까요?”

“어라… 너 이 새끼 누구한테 설교하는 거야? 여봐, 김실장, 이 거지 새끼들 밖으로 쫓아내버려!”

 

 

               루오/때로는 눈먼이가 보는 이를 위로했다

 

 

지난해 대통령 선거 직전 국군 사이버사령부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댓글 공작 선거 대책회의를 회상해 보자. 국가 기관과 기관장의 선거 음모가 어떻게 해서 매춘 언론과 충견 검찰의 조작을 거치게 되었는지를 기억해 보자. 태생 소경이 눈을 뜬 기적은 온데 간데, 없고 “안식일에 기적을 행했다”는 사실만 꼬집어 예수를 죄인으로 몰아가는 터무니없는 시비만이 남아 있는 그 변질 과정에 납득이 간다.

 

게다가 이 사안이 선거판을 뒤집어 놨음을 기억해 보자. 나사로의 부활을 보고서 예수를 처형하기로 결정한 예루살렘 기관장 회의는 백분 이해된다.

 

독일 나치가 친위대원, 생체실험자, 고문자,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학살자에게 가르치는 첫째 수칙이 있었다. “희생자의 눈을 절대로 바라보지 말라!”는 것이었다. 사람이 악에 물들면 제일 먼저 사실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증상이 나타난다. 진실 역시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사람은 잠시라도 진리의 빛 속에서 거닐지 않으면 당장 어둠 속에 빠지게 마련이다. 어둠 속에 오래 오래 머물수록 눈이 먼다. 악을 행하면서도 악을 악으로 느끼지 못하는 불감증에 걸리고 만다. 어둠이 그 눈을 빽빽하게 채워서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지금 제 입으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실에 무관심한 자는 제아무리 세례명을 지니고, 주일미사에 나가 교무금을 바치고, 사도위원에 명단을 올려도 실제로는 ‘무신론자’이다. 우리 주변 성당 안에도 반공이니 안보니 하는 악마적인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지방색에 기인한 까닭 없는 증오에 물들어, 제 손아귀에 쥔 것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젖어, 사실도, 진실도, 진리도 안중에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권력과 금력과 안전을 하느님 위에다 섬기는 우상숭배로 사람이 눈을 멀게 되면, 입으로는 그리스도 신자이지만 자신의 권력과 돈과 안전을 위협하는 대상은 그냥 두지 않겠다고 이빨을 갈고 덤비고야 만다.

 

“진실을 은폐함은 허위를 홍보함과 같다”(suppressio veri expressio falsi)는 옛 로마인들의 속담이 있다. “나는 이 세상에 심판하러 왔습니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게 하고 보는 이들은 소경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참담한 이 마지막 말씀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진실이 우리 양심에 던지는 선언이기도 하다.

 

성염/전 교황청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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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20)

 

예수의 심란한 마음

 

 

“인자가 영광스럽게 될 시간이 왔습니다. 지금 제 영혼이 몹시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릴까요?”(요한복음 8:1-11)

 

안드레와 빌립이 헬라계 백인을 데려오자 예수께서는 놀라신다. 무슨 예감이 드셨는지 모르지만 “결단의 시간이 왔구나!” 하는 표정이다. 어차피 양자택일하는 것이 인생이기는 하나….

 

자연에도 법칙이 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는다.” 옳은 말씀이다. “그래 옳거니! 너희들 다 죽어 다오, 너희를 밑거름 삼아 내가 무럭무럭 자라나 백 배도 천 배도 결실을 낼 터이니.” 그런데 예수님의 삶은 이러한 자기 보존의 법칙을 무시한다. “이 세상에서 제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그것을 보전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누구를 진정 사랑한다 하더라도, 자신을 참으로 사랑한다 하더라도 사람은 가난해야 하고 가난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을 결국 제 목숨을 내놓아야 하니. 당신 역시 이런 운명이 달가울 리 없었다.

 

 

 

 

“지금 제 영혼이 몹시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릴까요?” 당정협의회에서 당신에게 이미 내려진 사형선고! 남은 것은 요식행위뿐이었다. 야간 체포, 야간 재판, 사형 집행 단 하루면 다 해치울 사람들이었다. 당신은 서른 셋의 한창 나이인데…. 빠져나가고 싶어졌다. 그래도 버티신다. “아니, 저는 바로 이 시간을 위해서 지금까지 살아 왔습니다.”

 

아아, 사업에 실패하고 몸져누운 남편을 바라보며 이렇게 뇌일 수 있는 여인은 행복하여라! 학교와 직장과 미래를 깡그리 빼앗기고 투옥당해 이 구절이 떠오르는 젊은이는 행복하여라! 하느님과 타인에게 봉헌된 한 생애가 무참히 실패로 끝장났다고 서러워할 때 이렇게 기도하는 이는 행복하여라!

 

하지만 주님의 운명은 왜 이리 비극적이었나? 종교에도 근간이 있는 법인데 그분이 하필 이 근간을 손상시키셨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만 들자. 안식일이면 무슨 일이 있어도 성당에 가서 하느님께 예배드리고 복을 받아야 하니, 성당에 와 있는 우리는 선량한 사람이고 공장에 출근하는 노동자와 한푼 더 벌겠다고 가게를 열어 놓은 사람은 한심스럽고 죄스럽다고 믿는 우리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일이 사람 쉬라고 있는 것이지 사람이 주일 지키자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는 말씀을 서슴지 않으셨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는 그분을 미워하였다. “일주일이 이레나 되는데 그 동안 뭐하다 하필 성스러운 일요일에 병신을 고치고 정의 따위를 설교하고 사회불의를 고발한답시고 이 성스럽고 복된 날을 망치는가 말이다.”

성염/전 교황청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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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19)

 

부처님의 미소와 예수님의 얼굴

 

 

“그들이 눈을 들어 살피니 아무도 없고 예수 그분만 보였다”(마태복음 17:1-9).

 

어느 해인가 결혼 주례를 위해 경주땅을 난생 처음 밟게 된 필자는 토함산 석굴암의 부처님 상을 보러 갔다. 의연한 본존상이 짓는 그윽한 미소에서 필자는 이제껏 세계 어느 곳에서 본 형상보다 위엄 있고 경건한 인간상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인류가 돌에 새긴 가장 위대한 작품을 꼽으라면 서슴없이 석굴암의 아미타불을 들게 되었다.

 

사람은 볼품이 있어야 한다. ‘미모는 말없는 추천장’이라는 속담도 있다. 늠름한 풍채에 멋진 외모는 여인의 눈길만 끄는 것이 아니라 남자의 선망도 일으킨다. 아리따운 여인을 바라보는 모든 남성의 눈빛에는 “아, 드디어 나타났구나!” 하던 아담의 경탄어린 저 첫마디가 서려 있다.

 

“주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마태복음에 나온 베드로의 아첨은 극히 정상적이다. 그런데…. 해마다 사순절이 되면 필자는 대웅전에 모셔진 본존, 열반에 드신 부처님의 은은한 미소와 성전에 내 걸린, 피투성이로 숨진 그리스도의 일그러진 얼굴을 비교하곤 했다. 두 분의 얼굴 표정은 고통과 악에 맞서는 인류의 두 가지 대응을 보여주는 위대한 표상이다.

 

 

 

 

과연 화상으로 심하게 일그러진 얼굴, 나병환자의 뭉크러진 손발과 눈자위, 단말마에 허덕이는 간암 환자의 몸매에서 누가 사랑의 매력을 느낄 것인가? 그런데 비닐과 넝마로 초막을 지어 놓고 행려병자를 데려다 임종을 지켜 주는 수녀가 있고, 부모가 버린 정신박약아를 위해 젊음을 바치는 젊은이가 있고, 소록도와 음성 나환자촌에서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이가 있다.

 

“그들은 다볼산에서 잠들었다가 도대체 어떤 헛깨비를 보았기에, 감겨진 임종자의 눈에서 부활의 불꽃을 본다고 하며, 가련한 비렁뱅이의 얼굴에서 주님의 모습을 발견했노라 말하는 것일까?”(샤를 델레 지음, 《소용없는 하느님》 참조).

 

주춤주춤 골고다까지 뒤따라 간 베드로, 그는 십자가 위에 피투성이로 숨진 죄인의 얼굴을 보며 다볼산의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기억했을까? “그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그 옷은 빛처럼 하얗던” 그 광경을?

 

빨갱이라면 온 가족을 처형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해 온 저 동포를 보며, 전라도 사람이라면 학살해도 괜찮다고 경멸해 온 저 겨레를 보며 하느님의 모상을 발견하는 눈이 우리에게 있을까? “에이, 신앙인들이 차마 그러겠어요?”라며 의아해 하는 분들에게 몇 가지 사실만은 꼭 상기시키고 싶다.

 

광주학살이 한창이던 그 주간, 어느 교구를 다녀온 외신 기자가 그곳 고위 성직자에게 들었다며 필자에게 확인을 요청했다. “전라도는 본래 좌익이 많았어요. 이번 사태도 그자들이 일으킨 거에요!”… 학살이 끝난 직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상임위를 통해 “군부와 광주시민은 서로 화해하시오!”라는 이상한 성명을 발표하고는 지금까지 간 침묵이다! 소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김영삼 대통령이 광주사태의 진상규명은 역사에 맡기자고 주창하자(93.5.13), 김수환 추기경도 “광주의거 진상규명 역사에 맡기자!”(93.5.23 평화신문)고 신앙인에게 호소하였다.

 

이태 후 김영삼 대통령이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하자(95.11.17) 김수환 추기경도 관훈클럽 강연에서(95.12.20)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잘못된 과거를 단죄하고 권력과 금력에 의한 부정부패를 척결하자!”고 호응하였다.

 

그러자 1996년 2월호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김남수 주교는 광주사태를 ‘민란’이라고 부르면서 “진실을 밝힌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전두환 씨와 노태우 씨는 우리를 5∼6년 동안 지배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호소하였다. 당시 그는 “남북 대치 상황에서 우리끼리 이렇게 싸워야겠는가?”였고, 수천 억 부정 축재나 5·18의 조사가 “국민 화합의 저해 요소로 작용할까 그게 걱정”이었다. 그리하여 김남수 주교는 <월간조선> 기자에게 빅톨 위고의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가장 아름다운 신부님’으로 칭송 받았다.

 

성염/전 바티칸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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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18)

 

산 사람의 눈과 송장의 눈

 

 

“지키던 자들은 천사를 보고 두려워 떨다가 마치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 그러자 천사가 입을 열어 여자들에게 말했다”(마태복음 28:1-10).

 

주님이 부활하셨다! 엊그제 골고다 형장에서 처형당하고 매장 당했던 그분이 다시 살아나셨다! 생사람을 죽이고 송장마저 무서워 무덤에 보초를 세운 사람들! 그러나 무덤을 막았던 돌은 사라지고 무덤은 텅 비었다.

 

그들은 다시 한 번 수를 썼다. 경비원을 매수하고, 제자들이 밤중 몰래 스승의 시신을 약탈했을 것이라는 헛소문을 퍼뜨린 사람들!(마태복음 28:11-15) 그들은 다 어디 갔을까? 그들은 무덤 속에 있고 그들이 묻은 죄수는 2천 년을 살고 계신다. 2천 년 전에 부활하시어 지금도 살아 계신다!

 

내 사랑하는 사람도, 나도 죽는다. 그는 그리고 나는 언제 부활하는가?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했다는 1999년 8월 15일? 2015년 12월 31일 밤 12시? 반 만 년 후? 이미 지나간 우주의 역사가 150억 년이라니 앞으로 150억 년 후? 어휴, 길기도 해라!

 

 

 

 

교리에 따르면 사람은 영과 육으로 되어 있다 한다. 위력적이고 자유로운 정신과 물질의 결합체, 간단히 말해 사람은 ‘육화한 인격’이다. 그러니 육신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영혼만 빠져 나와 연옥이니 천당이니 지옥이니 하는 곳에서 벌을 받거나 복을 받는다는 것은 우스운 얘기다. 육신도 없는 영혼이 지옥에 가서 지옥불에 들볶인다는 설명도 억지 같다. 영원만이 있는 하느님 대전에서 영혼이 공심판 날짜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모습도 기이하다. 차라리 약간 성급한 신학자들 추측대로, 사람들 각자 죽음의 순간에 부활이 일어난다는 설명이 더 무난하게 들린다.

 

그러면 죽은 이들은 어떤 육체와 결합하나? 부활한 이들이 왜 우리한테는 안 나타나나? 부질없는 물음이다. 부활한 예수님의 몸도 ‘믿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 대제관, 바리사이파, 무덤을 지키던 경비대원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

 

다만 마태가 오보를 전한 것이 아니라면(마태복음 27:52-53), 예수께서 숨지시던 순간 “무덤들이 열리고 잠들었던 성인들의 많은 육신들이 부활하였다.”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하시는 시각까지 참았다가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성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저 성인들이 좀비(무덤에서 나와 돌아다닌다는 송장)가 아닌 이상, 부활은 우주 최후의 날까지 미루어질 필요가 없는 듯하다.

 

대제사장도 바리새파도 빌라도의 염탐군도 부활하신 예수를 보지 못했다. 그들 눈에는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맹랑한 소리를 시부렁거리고 다니는 실성한 갈릴리 사람들이 보였을 뿐이다. 미친놈이라고 죽여도 죽여도 씨가 마르지 않는, 사랑이니 정의니 하느님 나라니 외치고 몸 바치다 나사렛 사람 예수처럼 십자가에 매달리는 고약한 무리만이 보였을 따름이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청계천에서 분신자살한 다음, 그의 귀신은 무수한 의인과 노동자에게 씌워져 이 나라 역사가 바뀌었다. 세상을 뜬 통일 영감 문익환 목사는 원래 정치와 거리가 먼 학자였다. 데모하느라 숙제 못하는 학생에게 가차 없이 낙제점을 주었고, 동료 교수들의 사회 참여를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죽마고우 장준하 선생의 싸늘한 시체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의 삶은 독재와 불의와 분단을 향해 내닫는 야생마의 질주로 변한다. 장준하 선생이 죽고 문익환 목사로 새로 부활한 셈이다.

 

과연 주님의 부활이든, 나의 부활이든, 겨레의 부활이든, 부활을 보려면 별다른 눈이 필요하다. 죽어서 묻힌 사람이 살아서 돌아다니는 모습은 '심안(心眼)'을 지닌 신앙인 아니면 볼 수 없다. 미래의 희망을 위해 민중을 위해 숨져 간 사람은 역사의 지평에 시선을 멈추고 죽어 간다. 대신 지금도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는 사람을 십자가에 매달고 지하에 매장하는 자들, 그것도 성에 안차 무덤에 보초를 세우고 헛소문을 퍼뜨리는 자들, 그들은 송장의 눈을 하고 있다.

 

성염/전 바티칸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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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17)

 

악마의 성서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라 걷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빵을 먹습니까?”(마가복음 7:1-23)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가장 무서운 범죄 하나를 꼽는다면 성서를 함부로 인용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스도교 혁신의 위인 마르틴 루터를 단죄한 1520년의 교황문서(Exsurge Domine)가 “야훼여! 일어나소서. 사람이 우쭐대지 못하게 하소서”(시편 9:19)라는 성경 구절로 글을 시작하는 예를 비롯해, 교회 기득권층은 항상 미운 이를 공격할 때 대개 성스러운 성경구절을 서두로 해 공식 문서를 쓴다.

 

성서 주석의 역사는 오해와 이해관계가 얽이고 설키는 과정이었다. 예컨대 “하느님의 모상”(창세기 1:26-27)이라는 개념은 2000년 동안 인간의 ‘영혼’이나 ‘정신’이나 ‘지성’을 가리키는 말로 오해되다가, 20세기에 들어서야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졌으니 남의 피를 흘리는 사람은 제 피도 흘리게 되리라”(창세기 9:6)는 뜻으로, 인간이 존엄하다는 뜻을 회복했다.

 

그 반대의 예도 적지 않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마태복음 22:21)라는 말씀이 ‘정교 분리’의 근거로 이용되는 것도 그 하나의 예이다. 마치 종로파 깡패와 남대문파 깡패의 거래처럼 이 구절이 그리스도인들의 사회 비판을 봉쇄하는 성구로 인용된 것이다.

 

에라스무스의 말대로 “악마도 성경을 인용할 줄 알” 뿐더러 누구보다도 유창하게 인용한다는 것은 주변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이다. 성직자는 신도를 감화하기 위해 성서를 인용하고, 신앙인을 가장한 정치꾼은 상대방을 두들겨 패기 위해 성서를 끌어댄다. 그자들은 자기네 기득권을 위협하는 일체의 무리에게 “사탄, 붉은 용, 가(假) 그리스도, 어둠의 세력” 따위의 묵시록적 상표를 붙여 왔다.

 

 

 

내가 복음화 되기 위해 읽고 묵상하는 성서가 아니라 남을 칼로 베기 위해서 성서를 휘두르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이 양날검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다. 날이 양면에 나 있어 남을 치면 반드시 자기가 베인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한 마디도 보태거나 빼지 못한다”(신명기 4:2). 야훼의 이런 말씀에도 불구하고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에는 수천 조목의 자질구레한 율법이 섞여 들어와 ‘하느님의 계명’을 자처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법망에 걸어 넣지 못해 안달하던 바리새인들이 당신 제자의 위생 문제를 두고 시비를 걸어오자 사뭇 퉁명스럽게 대꾸를 하셨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일은 소홀하지 말아야 하지만 정의와 진실과 사랑을 고수하는 일은 반드시 실천해야 할 것이다!(누가복음 11:42).

 

수십 년 전 문규현 신부가 방북했을 때 가톨릭교회 당국은 그들이 국가의 실정법을 위반했으니 사직 당국의 제재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태도를 표명하였다. 80년대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 때에 혐의자를 숨겨 주었지만 자수까지 시킨 성직자를 당시의 사직 당국은 가차 없이 투옥, 유죄판결, 복역시켰었다.

 

한 때 문민정부라 자처하는 정권 역시 민중의 통일운동과 대학생과 재야의 진보 운동을 위법이라 공격하고 유례없이 투옥 처단하며 ‘법질서 수호’라는 명분을 내세우기도 했다. 교회든 사회든 실정법은 대개 강자의 권리를 지키는 장치이자 약자를 때려잡는 올가미라는 것을 간파하셨기에 예수께서는 저렇게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이신 듯하다.

 

성염/전 바티칸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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