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16)

 

내가 누구지?

 

 

“인자는 마땅히 많은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누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마가복음 8:27-35).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합디까?”

“체제에 도전하다 헤롯의 손에 목잘려 죽은 세례자 요한 같다고 하고,

통일 통일하는 엘리야 같다고 하고,

좌경용공의 예언자 그러니까 요새말로 종북세력이라고도 합디다.”

 

나사렛 사람은 그다지 평판이 좋지 않았나 보다. 갈릴리 출신인 그는 예루살렘 언론 그 어느 하나에도 호감을 못 사 집중포화를 맞던 참이었다. 그 때는 <한겨레신문>이나 기독교 방송도 없던 시절이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하겠습니까?”

 

서로 얼굴을 쳐다보는 제자들은 난처한 기색이었다. 솔직하게 말해 이분이 누구신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하는 수 없이 반장이 나서 정답을 말한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말이 누가복음 9장 20절에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로 발전하고, 마태복음 16장 16절에 가면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로 확대된다. 원래 뉴스는 확대되기 마련이니까.

 

 


"V&A - Raphael, Christ's Charge to Peter (1515)", Wikimedia Commons.

 


곧 이은 스승의 질문이 그들을 더욱 난감하게 만든다.

 

“내가 그리스도임을 무엇으로 압니까?”

 

한참 있다가 제자들이 다투어 손을 들었다.

 

“니고데모 같은 청와대 인물도 감복시키시는 선생님의 고매하신 인품.”

“바리사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신 언변.”

“마귀까지 쫓아내시는 위력.”

“물위도 걸어가시는 마력.”

“4천명을 먹이신 경제적 수완.”

“마리아님의 태몽 얘기로 말할 것 같으면….”

 

스승이 그들의 말을 가로막는다.

 

“다 틀렸습니다!”

 

제자들은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십자가를 지기 때문에 그리스도입니다!”

“예? 뭐라구요?”

“인자는 마땅히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제관들과 율사들에게 버림을 받아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이 불길한 말씀에 쇼크를 받아 넋을 잃었다. 이것은 스승의 신상문제만 아니고 자기들의 장래 문제였다. 줄을 잘못 섰구나!

 

“그리고 나는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는 다음 말씀은 제자들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십자가! 정말 그리스도를 알아 볼 수 있는 표다! 그리스도의 제자를 알아보게 하는 표다!

 

“누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

 

언젠가 악마가 다가와서 예수에게 협상을 제시했었다.

 

“저 모든 권세와 나라들의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저것은 내게 넘겨진 것이니 내가 원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소. 그러니 당신이 내 앞에 엎드려 절하면 모두 당신의 차지가 될 것이오”(누가복음 4:6-7).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든 권세와 영광을 받은 자들은(그리스도인이라 불리더라도) 적어도 그리스도를 뒤따르지 않는다. 악마에게 넘겨진 세속의 영광이 지금은 관훈클럽이니 여의도클럽에서 주어지고, 텔레비전의 톱뉴스로, 보수언론의 1면 톱기사나 특별기자회견으로 나타난다.

 

거짓과 증오와 분단을 “사랑할 이유가 있으면, 사랑하는 대상에게 유리한 거짓된 이야기를 사람들은 기꺼이 믿는다”(아우구스티누스). 더군다나 하느님의 가난한 사람을, 그들을 위하는 작은 예언자를 옹호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몰살시키는 데 앞장서면서 권세와 영광을 누리는 자가 있다면, 이는 분명히 사탄에게 절하고 받은 권세와 영광이다!

 

“그러나 인자는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안중근(토마)을 위시해 한국사의 의인들은 부활했다. 그 대신 겨레를 등지고 체제의 앞잡이가 된 이들은 반드시 역사의 단죄를 받는다. 다만 그때까지 사흘(3년, 30년, 아니면 300년….)이 걸릴 뿐이다.

 

성염/전 바티칸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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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성 금요일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누가복음 11:11-34).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예수의 제자들은 자기네의 운명에 무엇인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음을 예감하였다. 스승 가까이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고 불안한 시선으로 주님의 표정을 지켜보았다. 성지 주일의 열띤 분위기에 휩싸이기도 전에 사도들이 들은 말씀은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는 그 한마디였다.

 

 

 

 

그 다음은? 아무것도 모른다. 이 민족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 정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의 눈앞에는 희망에 찬 미래가 열릴 것인가, 아니면 비극의 역사가 반복될 것인가? 그에 따른 내 일신과 내 가족의 운명은 어찌될 것인가? 역사라는 것은 전진하는가, 퇴보하는가? 지금은 초저녁인가, 한밤중인가, 새벽녘인가? 어느 닭이 있어 시대의 징표를 알려 줄 것인가? 우리 중에 시대의 흐름에 민감한 이들은 이런 의문들을 가질 만하다. 이 민족은 어제도 오늘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오늘 첫째 복음의 첫 구절이다. “이 말씀을 마치셨다”는데 무슨 말씀을 마치셨다는 것인가? 달란트의 비유로 말씀을 끝내셨다. 하느님은 인간과 그 집단들에게 자신들의 운명과 역사를 책임질 달란트를 맡기셨다. 그 역할을 거부하는 인간과 민족공동체는 “있는 것마저 빼앗기게” 되어 있다. 인간다움을 지킬 의지와 용기가 있는 민족만이 살아남는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거기서 사람의 아들에 대하여 예언자가 기록한 모든 일은 이루어질 것이다. “사람의 아들”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이 “사람의 아들들”에게도 이루어질 것이다. 배달민족이 이방인의 손에 넘어가 짓밟히고 수탈당하고 이방인이 시키는 대로 서로 죽이고 죽는 비극이 과거처럼 앞으로도 계속 지속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예수께서는 “앞장서서 가신다.” 이 민족의 선구자, 작은 예수들은 언제나 민족의 역사를 앞장서서 나갔다. 우리는 그 뒤를 조심스럽게, 겁먹은 얼굴로, 저만치 떨어져서 따라왔을 뿐이다.

 

부활은 온다. 우리 민족의 하느님은 살아 계시며, 이 민족은 생존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겨레에게나 민족사의 성 금요일이 있는 법이다.

성염/전 바티칸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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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14)

 

그리스도의 함장수들

 

 

한밤 중에 “신랑이다! 마중하러 나가라!”(마태복음 25:1-13).

 

“함 사려! 함 사!” 예식장들이 분주해지는 가을철이면 우이동 골짜기 해묵은 골목에서는 간간이 함 들어오는 목청이 쩌렁쩌렁 초저녁잠을 깨우는 일이 있다. 스무 해를 눌러 사는 골목이라 주부들은 남의 집 숟가락까지 세고 있다.

 

“무슨 소란일까?” “무슨 소란은요? 오늘 구 선생댁 은경이 함 들어오는 소리라구요.” “아이고, 누가 데려가는지 복도 많겠네. 이쁘고 참한 색시지…….” “이 동네서 태어나고 자랐지요. 코흘리개 적부터 보아 왔으니까요. 걔가 빵기를 업어 주던 때가 엊그젠데…….” 터무니없는 억지라도 함장수의 요구는 들어주어야만 골목은 다시 고요히 잠결에 빠져 간다.

 

 


<함들이기, http://blog.naver.com/ryugane07>

 

마태복음의 본문을 두고 흔히 하는 해석으로는, 멍청한 처녀들은 등잔 껍데기만 들고 있었고 똑똑한 처녀들은 등잔에 기름을 그득히 담아 두고 있었다고, 그래서 저 처녀들은 신앙만 있는 신도들, 이 처녀들은 신앙과 애덕도 갖춘 신도들을 가리키는 교훈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복음서는 분명히 “슬기로운 처녀들은 자기 등불과 함께 그릇에 기름도 담아 갖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지금 팔레스티나에서 발굴되는 조막만한 가정용 등잔들을 본다면 당장 이해가 간다. 주부가 들러리들의 등잔마다 기름을 가득 채워 주지만 “신랑이 늦어지고” “접시가 들썩거린다”는 입방아도 시들해지면 처녀들이 “졸다가 자다가 자다가 졸다가” 하는 새에 등불만 마냥 타오르고 기름은 떨어져 간다.

 

주님이 슬기롭다고 하신 처녀들은, 그러니까 ‘스패어’ 기름 그릇을 지닌 셈인데 우리네 50년대 지프차 뒤에 매달려 있던 기름통을 연상시킨다. 요새는 오리도 못 가서 주유소가 있으니까 그럴 걱정이 없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장거리 시골길을 뛰려면 필히 휘발유통을 마련해야 했다.

 

그러나 주님의 시각은 늘 사람을 놀라 자빠지게 만든다. 함장수의 고함, “보라, 신랑이다!”라는 고함은 대개 한밤중에 터져 나온다. 그리고서는 골목어귀에 있는 기름집에 석유 사러 갈 틈도 주지 않는다. 주유소에 차를 세우고 급유할 여지도 주지 않는 절박함에 문제가 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상(日常)의 세계를 한순간에 때려 부순다. 나른하고 포근한 안정과 평온을 순식간에 뒤집어엎는다. 대개는 얼떨결에 옷 매무시 다듬을 틈도 없이, 또는 벌거벗은 채로, 맨발로 초라한 행색에 이승을 뛰쳐나가야 한다.

 

허망하게 죽어가는 모습들이나 계절의 변화로 나무들이 졸가리만 암기고 단풍마저 지고 나면 젊은 사람들도 생명의 나약함과 인생의 종말을 바라보게 된다. “사람은 결국 죽자고 태어난 것일까?” 의문도 던져 본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비유에 의하면, 사람은 죽자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살자고, 하느님 잔치에서 잘 먹고 잘살자고 태어난 듯하다.

 

죽음은 저승사자가 낫을 들고 와서 우리 목숨을 수수목대처럼 베어가는 심판이 아니라, “신랑이다! 마중 나가라!”는 함장수의 반가운 목청이다. 또 사후에 벌어지는 장면은, 베르디 레퀴엠의 “디에스 이레 디에스 일라!(저 의노의 날에)”에 나오는 공포의 아비규환이 아니고 신랑을 모시고 쿵작거리며 먹고 마시며 웃고 떠드는 결혼식 피로연이다.

 

“예수는 주님이시다!”로 비롯된 우리의 신앙이 인생의 오랜 여정을 위해 충분히 마련된 기름으로 밤새 타오르라는 타이름만 유념한다면, 소란스럽게 우리의 초저녁잠을 깨워 놓는 그리스도의 함장수들을 박대하지만 않는다면, 하늘나라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의 잔치이리라.

 

성염/전 바티칸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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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13)

 

차라리 소경이었더라면…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주기 바랍니까?”

“선생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가복음 10:46-52).

 

간판에 씌어 있는 글씨를 보고 나는 눈을 의심했다.

 

“진리를 팝니다. 각종 진리일체!”

 

판매원 아가씨는 매우 예의발랐다.

 

“무슨 종류를 사시려고요? 부분 진리를 원하세요, 아니면 완전한 진리를 찾으세요?”

“완전한 진리! 그럼요, 완전한 진리를 보여 주시오. 내게 속임수는 필요 없소! 변명도, 합리화도 필요 없소! 평이하고도 명료한 나의 진리! 그게 내가 바라는 진리입니다.”

 

아가씨는 가게 안쪽을 가리켰다.

 

“저쪽이 완전한 진리를 파는 곳입니다.”

 

그곳 판매원은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값이 비싼데요, 선생님.”

“얼마요?”

 

값이야 얼마든 완전한 진리를 얻고야 말리라고 마음먹고 나는 물었다

 

“이걸 가져가시면 여생의 모든 평안을 잃는 그런 값을 치르시게 됩니다.”

“...”

 

나는 슬픈 마음으로 가게에서 나왔다.

 

(안토니 드 멜로의 우화 한 토막이다.)

 

 

 

 

아무리 말려도 소리소리 지르는 바람에 주님 앞에 데려온 소경 걸인! 예수께서는 그를 맞으며 친절하게 물으셨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 주기 바랍니까?” 걸인은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나지는 않았다. 그는 보았다!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산천초목이 얼마나 눈부신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그만 불의의 병으로 눈이 멀었다. 아름다운 세계를 보지 못하는 답답함을 누가 알아주랴!

 

“다시 한 번만 저 아름다운 세상을 본다면, 빌어먹고 사는 나한테 시집이라고 온 아내의 얼굴을 본다면 죽어도 원이 없겠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우리는?

 

“내가 어때서? 나는 두 눈이 성하다구! 시력이 2.0이라서 안경을 안 쓰고도 잘 보이는데.”

 

 하지만 주님의 말씀도 있으니 조심해야 할 게다.

 

“나는 세상에 심판하러 왔습니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게 하고 보는 이들은 소경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복음 9:39).

 

이 말씀에 돋친 가시를 느낀다면 한 마디 내뱉지 않고 못 견딘다.

 

“나도 소경이란 말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인즉슨 “당신들이 차라리 소경이었더라면 당신들에게 죄가 없었을 것입니다”(요한복음 9:40).

 

하기야 하느님의 눈으로 사물을 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못 느끼는 바도 아니다. 아버지 재산을 술집 여자에게 갖다 바치고 가문에 똥칠을 한 아우한테 몸 성히 살아 돌아왔다고 잔치를 차려 주시는 아버지! 새벽부터 포도밭에서 땀 흘린 일꾼하고 오후 세시 파장 시간에 얼굴 비친 놈팽이 하고 똑같은 일당을 주신다는 하느님의 경제 정의! 주일이야 하느님께 속한 날이라 미사하고 헌금하고 교회에 봉사해야 마땅하거늘 “사람이 안식일 지키자고 난 게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 하루 쉬라고 생겨난 거다!” 하시는 예수님의 비공인단체적 발언!

 

그뿐이랴 한 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철야기도하고 기도회다 성령봉사에다 ME에다 비밀결사 ‘오푸스 데이’에다 안하는 것 없이 성당에서 살다시피 하는 모범 신도들은 주님의 안중에도 없다. 대신 세리와 창녀들이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느니 어쩐다느니 하시는 예수님의 말투! 우리 맘에 안 드는 예수님 언행을 꼽기로 한다면 한이 없다(“그래 십자가도 싸지 싸!”)

 

사도 임원에 신심회 활동에 성경 공부에 어지간히 숙달되어 있노라는 신앙심으로 우리는 멋쟁이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지 모른다. 지난 30년간 매춘 언론과 허위 매스컴이 끼워 준 색안경을 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재물의 신 맘몬이 씌워 준 반공과 안보 이데올로기라는 콘택트렌즈를 남몰래 끼고 있는지 누가 알랴?

 

그건 그렇고 소경은 눈을 뜨자 집으로 달려가지 않고 “예수를 따라 길을 나섰다.” 소경 걸인의 이름이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고 전해져 온 것은 그가 초대 교회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성염/전 바티칸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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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12)

무엇을 보러 광야를 헤매는가

 

“늘어진 두 팔에 힘을 주고 휘청거리는 두 무릎을 꼿꼿이 세우고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마태복음 11:2-11)

젊은 혼과 병든 지성은 무엇을 보려 허허한 가슴을 안은 채 유다의 저 텅 빈 들을 헤매고 있는가? “바람에 날리는” 갈대밭을 보러 가진 않았을 게다. 일찍이 뉴먼 추기경이 “사람은 주먹이 자기 면상에 날아드는 순간까지는 자기 편할 대로 믿으려 든다”고 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용기도 마음도 없을 때 맹랑한 낙천론처럼 편한 게 세상에 또 있을까?

 

 

그들이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갈릴리에서 도륙한 백성의 피와 그 어머니들과 아내들의 눈물로 염색된 화려한 곤룡포를 걸치고 왕궁 깊숙이 숨어 있다. “나의 새끼손가락이 부왕의 허리보다 굵다”(열왕기상 l2:l0)고 대갈하는 바람에 겨레는 “더러운 악령 하나를 쫓아냈다가 더 흉악한 악령 일곱을 맞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누가복음 11:24-26).

그러면 저 넋은 무엇을 찾아 헤매는가? 예언자다! 지금 이 땅을 구할 한 가닥 기운은 희망이다. 마음은 응어리지고 젊은 얼굴이 웃음을 잃은 지 오래고 패배감과 허무주의가 지성들을 갉아먹고 있다. 냉소와 체념, 증오가 죄책이 고름처럼 엉기고 있다. 이런 때는 “하느님의 사람들”이 필요하다.

“울고 겁에 질린 자들을 격려하는”(이사야 36:3) 소리가 필요하다. “너희 하느님께서 원수 갚으러 오신다”고 말을 전하는 사람, “너희는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복음 l6:32)는 주님의 말을 전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맨손으로 사정없는 칼잡이들에게 덤비고, 아무도 듣지 않는 빈들에서 목이 쉬도록 외치고, 시대의 표지를 읽어 주고, 그러면서 배움터와 일자리와 처자와 끝내는 자기 목숨마저 잃는 무모한 꿈쟁이들이 필요하다.

그들의 고난과 고뇌와 죽음이 이스라엘을 대신하는 속죄요 제사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겨레가 언젠가 한꺼번에 겪은 운명을 체험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세례자 요한은 지금 목 떨어질 날만 기다리고 있다. 자기 한 몸에 온 겨레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짊어지고서.

성염/전 바티칸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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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11)

단서가 붙은 인생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준비하고 있어라!”(누가복음 l2:35-40)

거울 앞에서 정성을 쏟고 있는 여인, 명동 거리의 그 아름다운 자태들을 보노라면 "집과 여자는 다듬기 나름이다"라는 옛말이 실감난다. 마찬가지로 셋방살이 끝에 내 집을 한 채 사고 나면 고치고 다듬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

그러나 서울 인구 70퍼센트는 자기 집이 없다는 통계이고 보면 집을 다듬는 재미는 나머지 30퍼센트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이다. 독채 전세를 들더라도 자기 돈을 들여 손질하는 일은 드물다. 남의 집이니까 언제 비워 달랠지 모르는지라 정을 못 붙이는 것이다.

남의 집이니 언제라도 비워 달라면 이사를 갈 생각으로 사는 셋집살이…. 오늘 성서 말씀이 우리에게 일깨우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셋집살이와 같다. 믿는 사람은 하느님과 참사랑 외에는 모든 것에 단서를 붙이고서 산다. 사랑하는 사람, 손에 넣은 재산, 힘써 얻은 명성을 영원히 자기 것으로 붙잡아 두려는 것이 인간의 정이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은 죽고, 부귀공명은 이 손 저 손으로 옮겨가며, 인류 역사는 진보와 퇴보, 전쟁과 평화, 희극과 비극을 번갈아 되풀이하며 극히 느린 걸음으로 향상될 따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더구나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집주인)이 오셔서” 내놓고 가라면, 이 인연을 훌훌 털고 나서야 하는 것이 우리의 신세이다.

이런 말을 듣자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민중용 아편” 아니냐고 욕하는 자들이 떠오른다. 신앙인이란 고작 “자신을 위하여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를 준비하고 하늘에다가 없어지지 않는 재물을 쌓아 두자고” 멍청하니 하늘만 쳐다보며 처자식 건사나 나라 일이나 세상사는 될 대로 되라고 구경하는 폐인(廢人)들이라는 욕설이다.

 


<"RossGospWiseFoolVirginsF4". - Wikimedia Commons.>

 

믿음이 있는 자만 모험을 한다. 스물 몇 해를 포근히 감싸던 가족을 떠나 낯선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은 사랑하는 그 남자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마흔이 넘어 남의 나라로 이민을 가는 용기는 손에 쥔 돈이나 그곳의 친지나 자신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만 믿고 자기가 가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떠났다.

처자식 건강하고 만족할 만한 집 한 칸 있고 직장 든든하다면 우리 서민은 그것이나마 잃지 않겠다는 소심증이 생긴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그것만 안전하게 보호[安保]해 주겠다는 자가 나타나면 칼잡이든 총잡이든 하늘처럼 섬기는 우상숭배자가 된다

그러나 참 신앙인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잘 살고 사회가 안정되고 국가 안보가 튼튼하다고 해도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는다. 거기에도 단서를 붙이고, 정의에 어긋난 점이 하나라도 있으면 비판하고,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해 노력한다. 비록 이 땅에 유토피아가 서더라도 신앙인의 눈은 “하느님께서 설계자가 되시고 건축가가 되셔서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 주실 도시를 바라며 산다.”

하느님이 세상과 역사의 주인이심을 우리는 믿는다.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보다 의롭고 인간답고 형제애가 군림하는 세계를 건설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음을 안다, 그 의무를 소홀히 하다가는 불충한 종으로 찍혀 영원히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니까 신앙인이 인생에 붙이는 단서란 언제나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해 나가는 태도를 말한다.

성염/전 바티칸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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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10)

우리 시대의 순교자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너희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단장하고 선자들의 기념비를 장식해 놓고는…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일을 마저 하여라!”(마태복음 23:29-33).

신앙인에게 남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두 개의 눈 말고 또 하나의 눈, 신앙의 눈인 셋째 눈이 달린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유다인 예수를 우리는 “그리스도”로 섬긴다. 한낱 정치범을 “구세주”로 모신다. 죽어 버렸으니까 모두 끝장났다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그분이 부활하셨다!”고 선포한다. 누구나 십자가에서 죽음의 공포를 보는데 우리는 인류의 새 생명을 보고 그 고상을 성당 지붕에 설치하고 방안에 걸고 가슴에 달고 다닌다. 이야말로 신앙의 신비이다.

“너희가 예언자의 무덤을 단장하고 성자들의 기념비를 장식해 놓고는 ‘우리 조상들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죽이는 데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고 떠들어댄다. 이것은 너희가 예언자들을 죽인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것을 스스로 실토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일을 마저 하여라. 이 뱀같은 자들아, 독사의 족속들아!”(마태복음 23:29-33)

딴 사람 아닌 예수님의 발언이다.

그런데 신앙인 중 이 구절에 나오는 ‘예언자’를 ‘순교자’로 바꾸어 읽거나, 예수님의 이 엄청난 말씀이 자신에게 해당하는 저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지금 천주교 신자가 되어 있으니 순교자의 후손이지 박해자의 후손은 아니라고 믿는 까닭이다. 박해자와 그 후손은 온데간데없고 순교자와 그들을 받드는 영예로운 후손만 남은 셈이다. 듣기에 껄끄럽고 불리한 성경 말씀은 대개 딴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우리다.

 

 

과연 대원군 시대에 선량한 백성은 우리의 순교 선열을 어떤 이라 생각했을까? (국가보안법 보다 두려운) 상감마마의 뜻을 어기고 서학을 믿는 대역죄인들, (신천지 같은 사교를 믿는)사학 죄인들, (미국이나 러시아 같은)서양 오랑캐의 패거리,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를 불사르는 불효막심한 패덕자들(어떤 교우의 눈앞에는 김정은의 사주를 받는다고 말하는 주사파 대학생이 떠오를 것이다)로 여겨졌음에 틀림없다.

아무튼 수많은 목숨이 떼로 생매장 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에게 죄도 없이 억울하게 학살당하는 희생자라고 동정을 보내는 백성이 얼마나 있었을까? 죽일 놈들이 죄 값으로 죽어 가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교우들은 순교자의 시신을 거두고 자신도 그 길을 따라갔다.

단, 우리한테 문제가 되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나 하느님의 예언자가 있고 신앙의 순교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이 항상 일하시고 언제나 당신 사람을 세상에 파견하시고 있음을 아무도 부인 못한다.

누구나 가난한 사람을 위한다고 말한다. ‘한 마음 한 몸’ 운동에도 속했고 본당 차원으로 자선 봉사도 행한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이 아예 없는 세상을 만들어 보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찌되었을까? 그들은 권력자에게 제거 당할 뿐더러 대개 교회의 저주를 받는다. 빈민 운동, 노동 운동, 민주화 운동을 하는 성직자와 신자는 비웃음거리가 되고, 돈을 내더라도 교회 건물에 세들어 살지 못한다. 정의구현사제단이 명동 가톨릭 회관에서 쫓겨나 따로 사무실을 얻게 된 이유도 그런 까닭이다. 교회가 북한 선교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권장하면서도 정작 통일을 추구하는 세력을 사상의 이름으로 앞장서서 모조리 단죄하고 말았다.

“예언자를 예언자라는 명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의 보수를 받고, 의인을 의인이라는 명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의인의 보수를 받을 것이다”(마태복음 10:41).

오늘 신앙인의 ‘셋째 눈’에는 우리 시대의 순교자가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성염/전 바티칸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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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9) 

용서가 그토록 어려운 줄이야?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9, Rembrandt )

창녀들한테 빠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 버린 동생이 돌아오니까 살찐 송아지를 잡아 주시다니요!”(누가복음 15:11-32).

잘 아는 복음 대목이지만 참을성을 갖고 다시 한 번 읽어보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작은 아들은 집에서 살기가 싫다며, 어느 날 집안의 돈을 모조리 싸 가지고 집을 나가 버렸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곧 돈도 다 떨어지고 실컷 고생을 한 뒤 집으로 돌아갈 마음을 먹었다. 그가 집에 당도하자 아버지는 굵은 몽둥이를 들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길에서 큰아들을 만났다. ‘어딜 그리도 급히 가십니까? 그것도 몽둥이를 들고’, ‘몹쓸 놈의 네 아우가 돌아왔다. 단단히 두들겨 맞아도 싸다.’ ‘아버지, 저도 거들까요?’ ‘그래. 도와 다오.’ 그리하여 아버지와 큰 아들은 작은 아들을 두들겨 패 주었다. 아들을 실컷 때린 아버지는 제일 살찐 송아지를 잡아 큰 잔치를 베풀었다. 못된 아들을 벌주리라고 벼르고 벼르던 소원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화해를 살다라는 책에 나오는 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의 글이란다. 잃었던 아들의 비유를 들은 어린이가 나름대로 비유를 재구성한 것인데, 어쩌면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 꾸밈없이 담아 놓았나 싶다. 심보가 옹졸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이기가 무척 힘들다.

사람은 두 개의 잣대를 갖고서 산다. 자신과 하느님 사이에는 '자비'라는 잣대로 모든 것을 잰다. 그분은 대자대비하시고 아무리 큰 죄도 용서하신다. 따지거나 꾸짖거나 추궁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용서하신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는 정의라는 잣대가 쓰여져야 한다. 주님은 의로우시고 악한을 벌하시며 그것도 당장에 벼락으로 치셔야 옳다. 세리와 죄인이 예수의 말씀을 듣겠다고 모여들었다. 이것을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 못마땅해 하였다. 선량하고 신심 깊고 윤택한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처신이나 논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도대체 용서할 가치가 있는 자를 용서해야지. 저것들은 사람이 아니다. 개선의 가망이 없다. 선한 사람에게만 햇빛을 비추시고 착한 사람의 밭에만 비를 내리셔야지 하느님의 도리(?).”

그러나 하느님의 길은 인간의 길과 다르다. 하느님 마음은 어버이의 마음이고, 내가 남에게 가지는 마음은 시샘 많은 형제간의 그것이다. 하느님이 악인을 벼락으로 치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우리 자신이 제일 먼저 맞아 죽었을 텐데. 그러나 하느님 마음을 아직 배우지 못한 우리는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마태복음 7:2)는 말씀을 듣고도 아랑곳없다 

성염/전 바티칸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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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8)

사람이 하느님 신비를 알면 얼마나 알까

 

“과연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시어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요한복음 3:16-18).

사람은 ‘너’를 만나면서 ‘나’로 피어난다. 인간은 사랑의 햇살을 받아야만 피어나는 피조물이다. 하늘과 삼라만상에서, 그리고 부모와 여인에게서….

아담은 하느님이 만드신 걸작품이었지만 하와를 만나기까지 웃을 줄 몰랐다.

“하느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를 하나 뽑고 지성스럽게 그 자리를 살로 메우시고는 솜씨를 다하시어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다음 아담에게 데려오셨다.”

그러자 하느님의 모상인 아담의 입에서 처음으로 소리가 터진다.

“야, 히야, 드디어 나타났구나!”

이어서 당신의 가장 깊은 신비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시면서 하느님께서 흐뭇하게 지으시는 미소….

머리께나 쓸 줄 안다는 철학자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가까스로 도달한 유일신 사상, 유대인들이 수천 년 동안 매질을 당한 후에야 겨우겨우 배운 유일신 야훼 신앙, 인류가 수십만 년 역사를 살아오면서도 아직까지 쉽게 수긍하지 못하는 '한 분이신 하느님' 신앙, 그 유일신 신앙을 하필이면 저쪽에서 오셨다는 그리스도께서 왜 이 믿음을 흔들어 놓으셨을까? (안식일 시비는 여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가닥 잡는 데도 무려 800년의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니체노-콘스탄티노플 신경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는 이가 있다면 “한 번 나와 보십시오”라고 외치고 쉽다.

 

 

사람이 하느님 신비를 알면 얼마나 알까, 조가비 껍질만한 머리로 말이다. 그래도 당신의 비밀을 숨기지 못하시는 하느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신비를 기어이 열어 보이시는 그리스도께서는 확실히 우리네 인간과는 다른 분이시다. 당신의 모상대로 지어내신 인생들인지라 ‘언젠가는 알아듣겠지.’ 이런 깊은 뜻을 품고 계시나 보다. 하여간 지금 내게는 유일하신 하느님이 지고하신 고독 속에서 홀로 갇혀 계신다는 믿음은 콜록콜록 홀로 누워 계시는 건넛방 시아버님을 연상시켜 오히려 거북하기만 하다.

하기야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당신을 가리켜 ‘우리’라는 말을 쓰셨다. 《소용없는 하느님》을 쓴 델레 신부의 표현처럼 하느님은 ‘단수’가 아니시고, 개인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분명히 복수이다. 왜냐고? 그 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며, 그 사랑은 개인적이지도 사사롭지도 않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에게 “하느님 나라”와 “지상의 나라”를 가르는 기준은 분명하다. 바로 사회적인 사랑과 사사로운 사랑이 그것이다.

“두 사랑이 있으니 하나는 사사로운 사랑이요 또 하나는 사회적인 사랑이다. 이 두 사랑이 인류를 두 도성으로 나누어 세웠으니 악인들의 도성과 의인들의 도성이 그것이다. 하나는 순수하고 하나는 불순하다. 하나는 상위의 도성을 생각하여 공동의 유익에 봉사하는데 전념하고, 하나는 오만불손한 지배욕에 사로잡혀 공동선마저도 자기 권력 하에 귀속시키려는 용의가 있다.

하나는 하느님께 복속하고 하나는 하느님께 반역한다. 하나는 평온하고 하나는 소란스럽다. 하나는 평화스럽고 하나는 모반을 일으킨다. 하나는 그릇된 인간들의 칭송보다는 진리를 앞세우지만 하나는 무슨 수로든지 찬사를 얻으려고 탐한다. 하나는 우의적이고 하나는 질시한다. 하나는 자기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도 바라지만 하나는 남을 자기에게 복종시키기 바란다.

하나는 이웃을 다스려도 이웃의 이익을 생각하여 다스리지만 하나는 자기 이익을 위하여 다스린다. 천사들로부터 시작해서 한 사랑은 선한 자들에게 깃들고 한 사랑은 악한 자들에게 깃들어서 두 도성을 가른다”(창세기 축자해석 11.15.20).

물론 인류의 첫 번째 공동선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다. 자신을 사랑해도 하느님과 결부시켜서, 타인을 사랑해도 하느님과 결부시켜서, 그리고 하느님으로 인해 타인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지혜이다.

하지만 이웃을 외면하고 하느님만 우러르겠노라는 신앙, 나라와 사회를 잊고서 교회에만 매달리는 신심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저주하는 “사사로운 사랑”이리라. 지상 여정이 끝나고 하느님 도성에서는 사사로운 사랑은 존재하지 아니하고 사회적 사랑만 존재하리라(아우구스티누스, 산상설교 강론 1.15.41).

심장에 가시망이 둘러쳐진 예수 성심을 바라보는 계절이 올 것이다. 사사로운 사랑이 범접하지 못하게 쳐 놓은 가시망은 아닐까? 팔은 안으로 안으로만 굽는다고, 아예 두 손을 십자가에 못질해 버린 그리스도에게 배우고 또 배우노라면 우리도 영원한 경지에서 “우리 힘으로 하느님을 우러러 뵈오리라.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눈으로!”(떼이야르).

성염/전 바티칸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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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7)

마르다, 마르다…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누가복음 10:38-42).

 

“저 여우같은 계집애, 난 눈코 뜰 새 없는데 선생님 턱 밑에 앉아서 얼빠진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꼴 좀 보라지. 선생님 좋아하는 제 속 모르는 바 아니고 원래 물에 손만 담그면 어찌되는 줄로 아는 얌체라지만 이건 해도 너무하다. 열댓 명 손님을 나 혼자서 치우라니… 선생님도 저렇게 눈치가 없으실까? 한 마디 해야만….”

부엌살림을 해 본 여자라면 마르다와 마리아 얘기에서 마르다의 편이 되지 않을 사람은 없겠다. 그래서 벼르고 벼르다 성미대로 한 말씀 올렸는데, 예수님 대답이 천연덕스러웠다.

“마르다, 마르다, 저녁이야 밥하고 김치면 되지 뭘 그리 야단인가? 또 저녁밥 좀 늦는다고 누가 고꾸라지나?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말씀이야 쉽죠. 선생님 맘 누가 모를라구요.) 마르다의 입이 한 자나 나온다. 그제서야 마리아는 제 정신이 들어 후닥닥 부엌으로 내려갔을 테고. 

 


(출처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Christus_bei_Maria_und_Martha_(fl%C3%A4misch).jpg)

얘기를 비약해 보자. 남편과 자녀 시중이며 집안 살림에 정신없고 물가 걱정에 바쁜 주부들에게 사회 일인 자유, 평화, 정치, 세계, 경제가 귀에 들어오기 힘들다. 가족들 건강하고 집안에 걱정이 없는 한, 쌀과 연탄 그리고 얼마의 금붙이와 곗돈이면 저으기 안심이라고 한다면, 주부들에 대한 지나친 멸시일까?

그러나 때로는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일 경우가 있다. 주님을 모시면 찬거리 걱정보다도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와 사랑과 영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 요긴하다.

주님의 말씀대로 시대의 징조를 주부들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전 세계가 놀라는 사건이 있어도 그것은 남의 땅 얘기라고 외면하면 안 된다. 언제나 역사 속에 사건은 있게 마련이고 주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이도 있다. 이를 보고 십자가를 진 개인의 잘못이라고만 생각하고 돌아서서는 안 된다. 십자가 위의 죽음이 우리의 무관심하고 냉담한 태도를 단죄하고 벌을 내릴지도 모른다.

선악을 분별할 줄 아는 우리가 참회하고 속죄하지 않았기에 주님의 정의가 더 큰 벌을 내린다면 남정네에게는 죽음이, 여인들에게는 수치가 있을 따름이다. 지금 이 시대의 모든 사건이 우리의 운명을 예고하는 하느님의 표였음을 깨달을 때 소스라치겠지만 그 때는 너무 늦을 것이다.

“믿음으로 여인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자기들의 식구들을 다시 만났다”(히브리서 11:35)는 말씀이 있다. 경건한 여인들의 기도와 가난한 자의 속죄와 울부짖음이 주님의 손길을 가로막았던 그 역사의 죄악들을 새삼스럽게 한다.

성염/전 바티칸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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