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46)

 

수넴 여인, 자식 낳기도 어렵고 키우기도 어렵다(2)

 

1. 사랑하는 아이, 낳을 수 없는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낳은 아이가 손 쓸 겨를도 없이 죽는 모습을 지켜본다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을까? 아이가 제 무릎에서 죽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수넴 여인은 그저 아이를 살려야겠다는 본능적인 의지만 남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아들이 죽은 다음, 그 아이를 엘리사의 침상에 뉘어놓고, 나귀를 타고 쉬지 않고 갈멜 산까지 달려가서 엘리사를 만난다. 엘리사는 자신의 발을 꼭 껴안은 채 말을 하지 못하는 수넴 여인을 보면서, 뭔가 말하기조차 어려운 일을 그가 당했음을 짐작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아차리지는 못한다. 그래서 엘리사는 신통력이 작동하지 않음을 자인한다. “그의 영혼이 괴로워하지마는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27절).

 

2. 엘리사는 수넴 여인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아이가 죽었음을 알아차린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28절). 이 말을 우리는 16절에서 이미 들었다. 그런데 이게 참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말이다. 아마 독자들은 수넴 여인이 하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단 수넴 여인은 자신이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간구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엘리사를 원망하고 따지는 것 같다. 자신은 아들을 원한 적이 없는데, 왜 당신 맘대로 내가 아이를 갖게 해서 이런 고통스런 일을 겪게 하느냐는 그런 뉘앙스가 강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3. 성경기자가 말하는 대로, 수넴 여인은 자녀를 출산하지 못했고 당시에 남편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14절) 앞으로 아이를 출산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으며, 그리고 그 당시에 자녀를 출산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삶을 힘겹게 하는지 독자들도 충분히 짐작할 것이기 때문에, 엘리사가 아들을 낳게 해주겠다고 말했을 때 수넴 여인이 뛸 듯이 기뻐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수넴 여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조금도 기뻐하는 것 같지 않다. 아이를 낳지 못해서 마음 아파하고 어찌 되었든 무슨 방법을 쓰든 어머니가 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보통 여자들인데, 수넴 여인은 그런 모습, 어머니가 되려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말 독특한 여인이다.

 

 

 

4. 수넴 여인이 느닷없이 자신을 찾아와서 하는 행동을 보고 또 그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엘리사는 다급한 상황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바로 게하시에게 지시한다.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단단히 준비하고 수넴 여인 집으로 속히 가서 엘리사의 지팡이를 아이 얼굴에 놓으라고 지시한다(29절).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 허리를 묶고 내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라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하지 말려 사람이 네게 인사할지라도 대답하지 말고 내 지팡이를 그 아이 얼굴에 놓으라”(29절).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매우 엄중한 지시를 하는 것이다. 한 눈 팔지 말고 수넴 여인 집까지 빨리 달려가서 아이를 살리라는 것이다.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 살리는 일을 매우 중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5. 그러나 수넴 여인은 엘리사가 게하시를 보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해서, 즉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일러준 대로, 엘리사의 지팡이를 아이 얼굴에 놓는다고 해서 아이가 살아날 것이라고 믿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반드시 엘리사가 가야 한다고 고집한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30절). 그래서 엘리사는 마지못해 길을 떠나고 수넴 여인이 그 뒤를 따랐다.

 

6. 그런데 엘리사의 지시를 들은 게하시가 엘리사의 지팡이를 들고 먼저 수넴 여인 집으로 가서 그 지팡이를 아이의 얼굴에 놓았지만, 예상과 달리 아이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엘리사가 수넴 여인 집에 도착하자 게하시는 엘리사를 맞으면서 자신이 지팡이를 아이 얼굴에 놓았지만, 아이가 깨지 않았다고 보고한다(31절). 독자들은 게하시가 엘리사보다 능력이 부족해서 아이를 살리지 못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다음 구절에서 엘리사가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하는 방법을 보면, 꼭 그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7. 엘리사는 집으로 들어가서 자기 침상에 누인 아이가 죽은 것을 확인한다. 엘리사는 문을 닫고 주님께 기도한 다음,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아이를 살려낸다. 침상에 반듯하게 누인 아이 위에 몸을 엎드리고 아이 입과 자신의 입, 아이 눈과 자신의 눈, 아이 손과 자신의 손을 대고 아이 몸이 다시 따뜻해질 때까지 그렇게 했다. 침상에서 내려와 집 안을 이리 저리 다닌 후, 다시 아이 위에 몸을 엎드렸더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를 하고 깨어났다. 엘리사는 자신이 게하시에게 말한 방식대로 하지 않았다.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자기 지팡이를 아이 얼굴에 올려놓으라고 지시했지만, 게하시가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깨어나지 않았다고 하자, 다른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아이를 살렸다.

 

8. 아이가 눈 뜬 것을 확인한 엘리사는 수넴 여인에게 아이를 데려가게 한다. “네 아들을 데리고 가라”(36절). 이것은 단순한 말 같지만, 수넴 여인이 그 아이의 어머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야기는 “여인이 들어가서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아들을 안고 나가니라”(37절)로 끝난다. 이것은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그 아이 어머니로서 엘리사에게 감사함을 표현하는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9. 이렇게 끝난 수넴 여인 이야기는 열왕기하 8장에서 다시 이어진다. 엘리사가 수넴 여인에게 가족들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피하라고 말한다. “너는 일어나서 네 가족과 함께 거주할 만한 곳으로 가서 거주하라 여호와께서 기근을 부르셨으니 그대로 이 땅에 칠년 동안 임하리라”(1절). 기근으로 인해서 살던 곳을 떠나서 이주하는 것은 아브라함, 야곱, 그리고 엘리멜렉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칠년 기근은 요셉을 떠올리게 한다.

 

10. 수넴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 즉 엘리사가 일러준 대로 블레셋 땅에서 7년을 우거하다가 기근이 끝나자 다시 돌아온다. 돌아온 수넴 여인은 제 집과 전토를 되찾기 위해서 왕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때 마침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 게하시가 왕과 함께 수넴 여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단다. 왕이 엘리사 이야기, 특히 기적을 일으킨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 해서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이를 살린 이야기를 게하시가 왕에게 들려주는데, 그때 마침 수넴 여인이 왕을 찾아왔다는 것이다. 정말 기막힌 우연의 일치이다. 왕은 수넴 여인으로 하여금 엘리사가 아이를 살린 이야기를 직접 하게 한다. 그런 다음 왕은 특별히 관리를 한 사람 임명해서 수넴 여인이 청원한 일을 처리하게 한다. 이렇듯 여러 가지 경우마다 성경기자는 수넴 여인의 죽은 아이를 엘리사가 살린 것을 강조하고 그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애쓴다. 엘리사는 수넴 여인 가족이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직접 나서서, 아니면 남들이 서로 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도와주었던 것이다. 엘리사는 수넴 여인의 가족을 지켜주는 수호천사, 진정한 모정천리의 예언자였던 것이다.

 

이종록/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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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45)

 

수넴 여인, 자식 낳기도 어렵고 키우기도 어렵다(1)

 

1. 두 어머니. 열왕기하 4장은 두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경제적인 형편이나 사회적인 신분은 다르지만, 두 여인이 어머니로서 자식 때문에 아픔을 겪을 때, 엘리사가 그 문제를 해결해주었다는 점에서는 같다. 1-7절은 갚지 못할 빚으로 인해 두 아이를 빼앗길 번한 어머니가 엘리사의 도움으로 빚을 갚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8-37절은 자식이 없고 앞으로도 자식을 낳을 가능성이 없는 한 부유한 수넴 여인이 기적적으로 출산한 아이가 갑자기 죽었지만, 엘리사로 인해 그 아이가 다시 살아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2. 오늘은 두 번째 어머니 이야기를 하려 한다. 엘리사는 이스라엘 땅 이곳저곳을 주유하면서 사역했는데, 어느 날 수넴이라는 곳에 들렸을 때, 그곳에 사는 한 부유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식사 대접하기를 간절히 원해서, 엘리사는 수넴 지역을 지날 때마다 그 집에서 식사를 했다. 그 수넴 여인은 엘리사를 매우 존경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엘리사를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이라고 칭한다. 그렇게 식사를 대접하다가 그 수넴 여인은 자기 집에서 엘리사가 편하게 묵어 갈 수 있게 옥상에 작은 다락방을 만들기로 남편과 의논한 다음, 엘리사가 머물 방을 만들었다. 그 후로 엘리사는 수넴을 지날 때마다 그 집에서 묵었다. 그런데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위한 방을 만들자고 남편에게 제안할 때 그 방에 들여야 할 가재도구를 언급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 수넴 여인은 엘리사가 편안히 쉴 수 있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던 것으로 보인다.

 

3. 엘리사는 자신을 그토록 극진히 섬기는 수넴 여인이 고마워서(“네가 이같이 우리를 위하여 세심한 배려를 하는도다”) 감사 표시로 무엇인가 도움을 주고 싶어서 수넴 여인을 불렀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하랴 왕에게나 사령관에게 무슨 구할 것이 있느냐?” 엘리사가 하는 말을 잘 살펴보면, 엘리사가 왕이나 사령관 같은 고위관리들에게 어떤 부탁을 할 때, 그들이 엘리사를 무시하지 못할 만큼 영향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4. 그런데 수넴 여인은 가정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왕이나 사령관에게 부탁해서 어떤 도움을 받아야 할 만한 그런 특별한 일이나 문제가 없었던 모양이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에게 “나는 내 백성 중에 거주하나이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수넴 여인과 그 가족들이 이웃들과 어울려 원만하게 평화롭게 지내고, 생활도 꽤 풍족해서 전혀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겠다. 그래도 우리 같으면 엘리사가 그렇게 말할 때, 없는 일이라도 만들어서 높은 사람들에게 연줄을 놓으려고 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수넴 여인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엘리사를 섬기려 했음이 분명하다.

 

5. 엘리사는 수넴 여인에게 어떤 도움을 주려고 했지만, 수넴 여인이 아무 문제없이 사람들과 어울려서 잘 살고 있다고 해서, 엘리사가 오히려 당황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엘리사는 수넴 여인을 돌려보낸 다음, 다시 게하시와 의논을 한다. “그러면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할까”(14절). 수넴 여인이 아무 것도 요구를 하지 않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들이 집안 사정을 잘 살펴서 수넴 여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선물로 주기로 한다. 게하시는 그 집안에 자식이 없다는 사실을 엘리사에게 이야기 한다. “참으로 이 여인은 아들이 없고 그 남편은 늙었나이다”(14절). 그러니까 수넴 여인은 지금껏 자식이 없었는데, 이제는 남편이 나이가 들어서 앞으로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떠올리게 한다.

 

6. 게하시가 하는 말을 듣고 엘리사는 다시 수넴 여인을 부른다. 그리고 그에게 아이 출산을 약속한다. “한 해가 지나 이때쯤에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16절). 하지만 수넴 여인은 엘리사가 하는 약속을 전혀 믿지 않는다. “아니로소이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16절). 이런 모습들도 하나님이 하시는 약속을 믿지 않고 오히려 우습게 여겼던 사라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섬기면서도 아무런 대가를 원치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7. 수넴 여인은 엘리사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높이면서도 아이 출산에 대해 그가 하는 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엘리사가 말한 대로 수넴 여인은 일 년이 지나서 아이를 출산했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어머니가 될 거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수넴 여인은 어머니가 되었다. 이렇게 어머니가 된 수넴 여인은 남편과 함께 아이를 금지옥엽(金枝玉葉)처럼 애지중지했을 것이다. 그렇게 행복한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아이가 추수꾼들을 따라서 아버지가 일하는 보리 추수하는 곳으로 갔는데, 느닷없이 머리가 아프다고 해서 아이를 어머니에게 데려다 주었다. 수넴 여인은 아이를 지극하게 간호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후로 넘어가면서 아이는 결국 어머니 무릎에서 죽었다.

 

8. 이렇게 갑작스럽게 아이가 세상을 떠나자 수넴 여인은 “아들을 하나님의 사람의 침상 위에 두고 문을 닫고 나왔다”(21절). 그리고 남편에게 사환 한 사람과 나귀 한 마리를 주면, 하나님의 사람에게 달려갔다가 돌아오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남편은 오늘이 초하루도 아니고 안식일도 아닌데 뭐 하러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려고 하는지 묻는다. 남편은 아이가 죽었는데 아내가 하나님의 사람, 즉 엘리사에게 가려는 이유를 몰랐던 듯하다.

 

9. 수넴 여인은 사환에게 “내가 말하기 전까지는 늦추지 말고, 힘껏 달려가자”(새번역)고 말한다. 그는 잠시도 쉬지 않고 달려서 갈멜 산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기 위해 간다. 성경기자는 21절부터 엘리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칭한다. 그리고 29절부터 다시 엘리사로 칭한다. 엘리사는 수넴 여인이 나귀를 타고 오는 것을 먼 곳에서 알아보았다. 수넴 여인이 나귀를 타고 급하게 오는 것을 보고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게하시에게 가서 알아보게 한다. “너는 달려가서 그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26절). 그런데 수넴 여인은 게하시에게 “평안하다”고 대답하고는 계속 달려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러 그 발을 안았다.

 

10. 어머니가 된 감격, 그리고 아이를 키우는 기쁨.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행복. 이 모든 게 아이가 어머니 무릎에서 죽는 순간에 끝났다. 아이 잃은 어머니가 겪는 아픔은 아이 없을 때 느꼈던 아픔과는 비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지만, 살다보면 아이를 잃는 그런 뼈저린 아픔을 겪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수넴 여인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엘리사가 그에게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말하자, “아니로소이다”라고 말한 게 아닐까?

 

이종록/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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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45)

 

두 아이의 어머니, 자식들을 지키고 싶다(2)

 

1. 엘리야가 홀연히 하늘로 사라진 다음, 엘리사가 그 사역을 이어간다. “맞은 편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그를 보며 말하기를 엘리야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엘리사 위에 머물렀다 하고 가서 그에게로 나아가 땅에 엎드려 그에게 경배하고(열왕기하 2:15). 엘리사가 제일 먼저 행한 기적은 물이 좋지 않은 토양을 소금으로 치유한 것이다(열왕기하 2:19-22). 그리고 엘리사는 이스라엘과 모압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을 때, 이스라엘 왕에게 군사적 자문을 해서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한다. 그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대에 포위당한 모압 왕 메사는 세자를 번제로 드리는 극약 처방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져서 돌아갔다. 여기까지가 열왕기하 3장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2. 열왕기하 4장은 세 가지 이야기를 하는데, 하나는 홀로 된 어느 여인에 대한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수넴 여인에 대한 이야기이고, 마지막은 국에 퍼진 독을 없앤 이야기이다. 우리는 그 첫 번째 이야기를 하려 한다. 당시에 엘리사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여럿이었을 텐데, 그 가운데 엘리사를 따르던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두 아이와 함께 살던 한 여인이 있었다. 성경기자는 그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어느 날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여인이 엘리사를 찾아와서 하소연을 한다. 성경기자는 그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었다고 한다. 새번역은 “엘리사에게 부르짖으며 호소하였다”(1절)고 번역한다. 새번역 본문이 맘에 확 다가온다.

 

 

 

3. 제일 먼저 그 여인은 자신의 남편이 세상을 떠난 사실을 언급한다.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그 사람은 엘리사의 종이었고 그 여인의 남편이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엘리사에게는 그를 따르는 종을 잃었다는 의미이고, 그 여인에게는 남편을 잃었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여러 번 살펴보았지만,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이 갖는 의미가 참 복잡하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텐데, 고대 사회에서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남은 아내와 자식들이 세상을 살아가기란 정말 힘겨운 일이다. 그래서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는 세상살이가 남편 생시와 너무도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4. 남편이 세상을 떠난 것을 언급한 다음, 그 여인은 자기 남편이 생전에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음을 이야기한다.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것은 그 여인의 남편,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여인의 남편, 엘리사의 신실한 종이었을 그 사람이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고, 그 사실을 엘리사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게 신실하게 엘리사를 섬기고, 주님을 경외하며 섬기던 사람이 무슨 일로 아내와 두 아이를 남겨놓은 채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 이후로 그 여인이 두 아이와 함께 어떤 삶을 살았을 것인지 눈에 선하다.

 

5.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그 여인과 두 아이의 삶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은 “빚”이라는 글자이다. 그 여인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 빚 준 사람이 와서.” 자세한 이야기를 다 생략했지만, 우리는 “빚”이라는 이 한 글자를 통해서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이 얼마나 어려운 삶을 살았는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도무지 갚을 길 없는 빚에 치어서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았을 것이다.

 

6. 그런데 그들에게 빚을 준 사람이 그들에게 온 까닭은 무엇일까? 그 이유야 너무도 분명하지 않는가? 냉정하기 짝이 없는 “빚 독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빚을 갚지 못하는 경우라면? 우리 예상은 적중한다. 그 여인은 그에게 빚을 준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온 때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나의 두 아이를 데려가 그의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채권자가 와서 두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하는 것은 그동안 빚 독촉을 수차례 했지만, 이제 그 기한이 다 찼는데도 빚을 갚을 여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빚 대신 두 아이들을 데려다가 종으로 삼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두 아이는 아들들이다. 하지만 그 여인은 그들을 “아이들”이라고 한다. 아이들! 정말 모성애를 강하게 느끼게 하는 단어이다.

 

7. 빚을 갚지 못해서 결국 두 아이를 빼앗길 그런 황망한 순간에 그 여인은 다급하게 엘리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엘리사에게 이야기한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다 들은 엘리사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말하라”(2절). 엘리사는 그 여인이 처한 어려움을 파악하고 즉각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 나선다. 그 여인에게 엘리사 자신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묻는다. 엘리사는 이렇게 묻고 나서, 그 여인에게 집에 무엇이 있는지를 묻는다.

 

8. 엘리사가 그 여인에게 집에 무엇이 있느냐고 묻자, 그 여인은 “계집종의 집에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 것도 없나이다”(2절)라고 대답한다. 기름 한 그릇 외에 아무 것도 없다! 이제는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 그동안에 도대체 무엇을 먹고 살았단 말인가? 먹을 게 전혀 없는 그런 형편이라면 차라리 두 아이 뿐만 아니라 그 여인도 종으로 팔려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엘리사는 말할 것도 없고, 독자들 역시 그 여인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상황이 얼마나 열악한지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다음, 그 집은 하루하루 끼니를 이어가는 것도 어려울 정도였던 것이다. 보통 상황이 아니다.

 

9. 엘리사는 상황을 파악하고, 곧 바로 대책을 일러준다. 이웃들에게 빈 그릇들을 가능한 대로 많이 빌려오게 하고,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서, 빌려온 빈 그릇들에 차례대로 기름을 채우라고 한다(3-4절). 그 여인은 엘리사가 지시한 그대로 해서, 빌려온 그릇들을 기름으로 다 채운다. 일이 끝나자, 그 여인은 엘리사에게 보고한다. 성경기자는 “그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말하니”라고 하면서, 엘리사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칭한다. 엘리사는 그 여인에게 후속 사항을 알려준다.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7절).

 

10.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독자들은 그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말한 그대로 했다고 믿을 것이다. 엘리사가 하는 말,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 기적보다 이 구절이 크게 다가온다. 엘리사는 그 여인이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였고, 빚으로 인해 한 가족이 해체되는 것을 막아주었다. 물론 그 이후로 그 여인과 두 아들이 얼마나 풍족한 삶을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살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때를 기억하며, 꿋꿋하게 살았을 것이다. 엘리사. 참으로 귀한 모정천리의 예언자였다.

 

이종록/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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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44)

 

두 아이의 어머니, 자식들을 지키고 싶다(1)

 

1. 두 아이를 종으로 팔아야 하는 어머니. 그 심정이 어떨까? 그런 모진 세상을 살았던 한 어머니 이야기를 하려 한다. 그 어머니가 두 아이를 팔아야 하는 안타까운 지경에 처한 까닭은 가난으로 인한 빚 때문이다. 우리 사회도 그렇지만, 고대 이스라엘에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가장 흔한 이유는 빚이었다. 사울을 피해서 이리 저리 떠돌던 다윗에게 몰려온 사람들 가운데 빚을 갚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사무엘상 22:2).

 

2. 사백 명은 상당히 많은 수인데, 나중에는 육백 명으로 늘어난다. 다윗에게 모여든 사람들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사회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빚진 모든 자”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생계를 위해 빚을 냈다가 결국 갚지 못해서 야반도주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 대다수는 경제적으로 파산상태였을 것이다. 이스라엘 건국 초기라고 할 수 있는 다윗 시대에도 빚 문제는 이미 상당히 심각한 사회적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윗을 따르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것은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었음을 입증한다.

 

 

3. 그런데 그 후로 500여년이 흐르고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총독으로 부임했을 때에도 여전히 경제사정이 어려워져서 빚을 지고, 그 빚을 갚지 못해서 결국 종이 된 사람들이 많았다. 성경기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알려준다. “그 때에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는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양식을 얻어 먹고 살아야 하겠다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가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저당 잡히고 이 흉년에 곡식을 얻자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서 왕에게 세금을 받쳤도다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 된 자가 있고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도다 하더라”(느헤미야서 5:1-5).

 

4.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그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밭, 포도원, 집, 할 수 있는 대로 저당을 잡히고 양식을 얻어 와야 했다. 그리고 세금도 내야 했는데, 세금 낼 돈이 없어서 역시 무엇이든 저당 잡히고 빚을 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남은 게 아무 것도 없어서, 자식들을 종으로 팔아야 할 인생의 막다른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우리는 여기서 “가난”이 악순환을 되풀이하면서 결국 사람들을 파산케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이스라엘에는 건국 초기부터 후대 유대교 시절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빚진 자들, 경제적으로 파산상태에 처한 사람들이 있었다.

 

5. 희년. 참 좋은 말이다. 그런데 희년이라는 게 모든 일이 형통해서 기쁨이 가득한 해는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 상황이다. 레위기 25장이 희년을 이야기하는 까닭은 사람들이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짓고 일해도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 즉 경제적으로 가난해져서 양식을 구해야 하고, 세금을 내기 위해 땅을 저당 잡히고 빚을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빚을 갚지 못해 자식들을 종으로 팔아야 하고, 그래서 가족이 흩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레위기 25장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이 세 번 나오는 것으로 보아, 세 부류의 사람들이 각각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부류는 땅이 없어서 품삯으로 사는 사람들이고, 둘째 부류는 땅은 갖고 있지만, 흉년으로 인해 농사를 망쳐서 부채를 갚지 못한 경우이고, 셋째 부류도 땅은 갖고 있지만, 세금을 내기 위해서 빚을 지는 경우이다.

 

6. 그리고 레위기 25장은 네 가지 경제적 상황, 즉, 파산에 이르는 네 단계를 설명하는데, 일종의 점층적 효과를 갖는다. 경제사정이 갈수록 악화되는 것이다. 생활이 어려워지자 빚을 지고, 그 빚을 갚기 위해 처음에는 땅 일부를 팔고, 그 다음에는 땅 전체를 팔고, 그 다음에는 자신을 팔고, 그리고 나중에는 외국인에게 팔리는 경우이다. 이렇게 하면서 그 사람들은 스스로는 회복이 불가능한 파산상태에 빠진다.

 

7. “가난”이 악순환을 되풀이하면서 결국 사람들을 파산케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이스라엘에는 건국 초기부터 후대 유대교 시절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빚진 자들, 경제적으로 파산상태에 처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사(페르시아)가 당시 세계를 재패하면서 바벨론에 살던 유다인들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귀국한 이후 그들도 어려운 경제적 상황에서 결국 빚쟁이가 되고 말았다.

 

8. 이자율이 살인적이었던 고대 사회에서 이렇게 돈이나 식량을 빌려서 생계를 유지할 상황에 이르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자력으로 회생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생계유지를 위해 빚을 내는 판에, 그것을 투자해서 돈을 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다음 단계는 완전히 파산하는 경우인데, 땅을 다 팔고, 그리고 빚을 냈는데도 회생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채권자의 종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고대 이스라엘에 사람들이 파산해서 남에게 종으로 팔리는 경우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사무엘상 2:5).

 

9. 우리 시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오히려 더 심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시대에 만연한 빚. 그로 인한 파산.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가?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서 정상적인 삶을 누리지 못하고 파산하는 것은 개인적인 책임도 있지만, 사회적인 이유도 있고, 또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에, 공동체가 그 문제를 함께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10. 구약성경도 개인회생을 위해 공동책임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빚을 지고 파산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회생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제도적으로 마련하게 했다. 느헤미야도 경제문제를 개인적인 차원에 국한하지 않고, 사회적인 문제로 규정하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대책을 강구하고 시행한다. 한 개인이 가난해서 빚을 지고 결국 부모들이 자식들을 종으로 팔아야 하는 상황, 그 극심한 가난. 그건 결코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는 아니다.

 

이종록/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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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43)

 

리스바, 누구도 그처럼 모권을 주장하지 않았다(2)

 

1. 또 다른 비극. 또 다른 아픔. 이미 일어난 비극과 아픔을 해소하기 위해 또 다른 비극을 만들어내고 또 다른 아픔을 겪게 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가혹한 자연재해를 계기로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 했는지를 알기 위해서 과거사를 살피고 과거 역사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자들을 찾아내서 진상을 규명하고 보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진상규명과 보상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처형하는 것은 옳지 않다. 가뭄과 기근의 원인으로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집단 살해한 것을 알려주신 하나님도 그것을 결코 원치 않았을 것이다.

 

2. 하지만 일은 그렇게 흘러갔다. 자연재해의 원인을 찾다가, 과거에 사울이 저질렀던 집단살해의 진상을 밝혀낸 다윗은 사법 제도를 작동하지 않고, 기브온 사람들에게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물었다. 다윗은 금전적 보상을 제안했는데, 기브온 사람은 그것을 거부하고(“ 사울과 그의 집과 우리 사이의 문제는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며”), 사울의 남은 가족 중에 일곱 사람을 자기들에게 넘겨주어서, 그들을 사울의 고향인 기브아에서 자신들이 직접 교수형에 처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다윗은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3. 이렇게 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는지 알 수 없지만, 지나치게 잔인한 처사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국가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해결하지 않고, 피해자들에게 모든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제도적이고 사법적인 처벌을 하지 않고, 피해자들이 가해자들에게 직접적인 보복을 하게 함으로써,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게 하는 것은 왕으로서 올바른 행동이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4. 어쨌든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이 요구하는 대로 자신이 직접 일곱 사람을 택해서 그들에게 내어준다. 사울과 리스바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 그리고 아드리엘과 사울의 딸 메랍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 아들을 기브온 사람들에게 넘겨주었다. “기브온 사람들이 그들을 산 위에서 여호와 앞에 목 매어 달매 그들 일곱 사람이 동시에 죽으니 죽은 때는 곡식 베는 첫날 곧 보리를 베기 시작하는 때더라”(21:9). 기브온 사람들은 일곱 사람을 사울의 고향인 기브아 산에 있는 성소로 데려가서 성소 앞에서 나무에 매달아 죽였다.

 

 

5. 성경기자는 다윗이 므비보셋을 처형에서 제외시켰다고 한다. 다윗이 사건을 친분관계에 따라 해결하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성경기자는 다윗이 요나단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므비보셋을 처형대상자에서 제외시켰음을 강조함으로써, 다윗이 결코 사울 가문으로부터 왕권을 강제적으로 탈취하지 않았으며, 약속을 지키는 의리 있는 자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러나 성경기자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우리는 다윗의 행동이 정당하지 않음을 느낀다.

 

6. 어쨌든 그렇게 해서 사건이 끝나는 듯했다. 그런데 의외로 사건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성경기자는 21장 9절에서 그 일곱 사람들이 동시에 죽임을 당했다고 하면서, 그 때를 밝히는데, 이것이 복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메랍이 낳은 아들들은 다섯 명이었는데도 그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데, 리스바가 낳은 두 아들의 이름을 밝히는 것도 결과적으로는 그 다음 이야기를 위한 복선이었다. 메랍은 아버지 사울이 저지른 집단 살해 사건으로 인해 자신의 아들 다섯 명이 기브온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자 다섯 아들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서, 자포자기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리스바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보리 베는 날 죽임을 당한 두 아들 시신을 지켰다.

 

7. 사울의 아내였던 리스바를 성경기자는 “아야의 딸 리스바”라고 한다. 그가 사울의 아내였다는 것보다 누군가의 딸이었다는 게 더욱 맘을 아프게 한다. 성경기자도 그랬던 모양이다. 두 아들이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날, 리스바는 굵은 베로 만든 천을 가져다가 바위 위에 장막처럼 치고 두 아들의 시신을 지켰다. 리스바는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했다”(11절). 그러니까 밤낮으로 제대로 잠도 못자면서 두 아들의 시신이 훼손되지 않도록 지켰다는 것이다. 얼마 동안 그렇게 했을까? 정확한 날수야 알 수 없지만, 보리 베는 날부터 가을비가 내릴 때까지라고 했으니, 4월에서부터 10월경까지 대략 6개월가량을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정말 초인적인 모정이다.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한 서린 모정이다. 하지만 봄에서 초겨울에 이르기까지, 무더운 여름을 지나면서 시신들이 어떻게 됐을 것인지, 생각하기도 끔찍하다.

 

8. 리스비가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한이 깊었다는 사실이다. 기브온 사람들이 처형한 사람들의 시신을 땅에 묻지 못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참으로 감동적이면서 또 한편으론 한 서린 섬뜩한 모정! 리스바 이야기가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던 모양이다. 민심이 들끓었을 것이다. 결국 다윗도 그 이야기를 들었단다. 다윗은 그 이야기를 듣고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했다. 당시 사람들, 그리고 독자들은 리스바가 시신을 지키는 모습에서 피맺힌 원한을 보았을 것이다. 이 아픔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다윗은 그 원한을 잠재우기 위해, 길르앗 야베스에 있던 사울과 요나단의 뼈를 찾아왔는데, 그것을 보고 여러 사람들이 처형당한 사람들의 뼈, 즉 일곱 사람들의 유해를 거두어서, 다윗이 명한 대로 사울의 가족묘지에 합장했다.

 

9. 본문은 사람들이 다윗이 말한 대로 했더니,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말로 끝난다. 하나님은 감추어진 사건의 진상을 정확히 밝혀내기를 원하시고, 그리고 거기에 합당한 처벌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여기서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일과 전혀 무관한 사울의 일곱 아들을 단지 사울의 아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다윗과 특별한 연고가 없다는 이유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그렇게 사적으로 보복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곱 사람을 처형했는데도, 바로 비가 내려서 가뭄과 기근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윗이 지시해서 사울과 요나단, 그리고 일곱 사람들의 뼈를 가족 묘지에 합장했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셨기 때문이다.

 

10. 성경기자는 과거의 죄악을 규명하고 청산하는 의로운 재판관으로 다윗을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사울의 범죄만을 보여주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을 읽으면서 사울의 범죄뿐만 아니고 심층적으로 다윗의 범죄도 본다. 다윗의 행동이 과연 정당하고 합법적이었는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판단해야할 문제이다. 리스바. 그는 누군가의 딸이었으며, 무고하게 죽임을 당한 두 아들의 어머니였다. 그가 보여주는 그 지독한 모정. 아, 정말 잔인한 모정의 세월이었다.

 

이종록/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

 

리스바, 누구도 그처럼 모권을 주장하지 않았다(1)http://fzari.com/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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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42)

 

리스바, 누구도 그처럼 모권을 주장하지 않았다(1)

 

 

1. 리스바와 메랍. 성경기자는 가혹한 삶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이 무력하고 가련한 여인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들 이야기를 슬쩍 들려준다. 성군(聖君)이라는 위대한 왕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절, 하지만 언제나 살기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혹독한 가뭄과 기근이 3년 동안 이스라엘 땅을 폭력적으로 지배했다. 상황은 참으로 끔찍했을 것이다. 인심이 사나워져서, 자연적인 폭력에 인간적인 폭력이 뒤섞였을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강한 자들이 설친다. 그리고 힘없는 사람들, 노약자들, 여자들과 아이들은 폭력에 희생당하기 쉽다.

 

2. 사무엘하 21장은 그 참혹한 시대 이야기를 들려준다. 줄거리는 아주 단순해 보인다.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기간에 3년 동안 계속해서 흉년이 들었다. 자연재해가 상상 이상으로 심각했던지, 다윗은 답답해서 하나님께 그 이유를 여쭤보았는데, 예전에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무고히 죽인 민간인학살사건이 그 원인이라고 하나님이 알려주셨단다. 그래서 다윗은 그 사건을 철저하게 진상조사하고, 피해당사자들인 기브온 사람들의 의견을 전폭 수용해서,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사울의 후손 가운데 일곱 명을 택한 다음, 기브온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처형케 한다. 나중에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 그리고 처형당한 사람들의 뼈를 합장했더니,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셨단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맺은 약속을 업신여긴 사울의 죄 때문에 죽은

사울의 아들과 손자 7명, 그리고 아들들의 시체를 지키는 리스바

 

3. 이게 줄거리인데, 사무엘하 21장을 좀 더 깊게 읽어보면, 이중구조가 드러난다. 본문에는 두 가지 사건이 안쪽과 바깥쪽으로 그려진 두 원처럼 겹쳐 있다는 것이다. 바깥 원은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이다. 이것은 그 원인과 의도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인간역사에서 빈발하게 일어났던 민간인학살사건임에 틀림없다. 사무엘하 21장 1-14절은 그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관련자들을 피해자들의 뜻에 따라 처벌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사울이 과거에 저지른 죄를 다윗이 밝혀내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사울을 악인으로, 다윗을 의인으로 판정하기 쉽다. 하지만 이것은 본문의 표면적인 내용일 뿐이다.

 

4. 우리는 본문의 심층적인 측면도 읽어내야만 한다. 본문에는 하나의 원이 더 있다. 그것은 안쪽 원이다. 우리는 바깥 원을 읽을 때보다는 안쪽 원을 읽을 때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본문을 피상적으로 읽지 말고, 좀 더 자세하게, 역사적인 상상력을 발휘해서 읽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읽는 것이 성경기자가 우리에게 말하려는 본심을 파악하는 데 유용하다.

 

5. 3년을 이어온 가뭄과 기근. 3년 동안이나 흉년이 계속되었으니, 민심이 얼마나 흉흉했겠는가? 다윗은 나라를 다스리는 왕으로서 상당히 큰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자연재해가 미치는 사회적 파장은 경제적으로 그리고 특히 정치적으로 컸을 것이다. 독자들은 본문을 꼼꼼하게 읽으면서, 탁월한 전략가이며 정치가인 다윗이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는지를 살펴보면 흥미로울 것이다.

 

6. 다윗은 들끓는 민심을 진정시키는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어렵게 하는 사울 가문을 효과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즉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 흉년의 원인을 과거에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사건과 연결시켜서, 사울의 가문을 기브온 사람들의 손에 넘겨서 처형토록 했다. 이것은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이었을까?

 

7. 기브온 주민을 학살한 사울의 행동이나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 그 사건을 이용한 다윗의 행동은 모두 정당화할 수 없는 범죄 행위이다. 사울은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기브온 사람들을 처형했다(21:2). 새번역은 2절을 이렇게 번역한다. “기브온 사람은 본래 이스라엘 백성의 자손이 아니라, 아모리 사람 가운데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며, 이미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을 살려 주겠다고 맹세하였는데, 사울은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을 편파적으로 사랑한 나머지, 할 수 있는 대로 그들을 다 죽이려고 하였다.” 사울은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맺은 상호평화조약을 임의로 깨뜨리고, 기브온 사람들을 진멸(인종청소)시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사울의 이러한 의도는 2절 마지막 부분과 5절에서 반복된다.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을 이렇게 평가한다.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영토 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5절). 사울은 인종차별주의자, 집단살해(제노사이드)범이다.

 

8. 가뭄과 기근이라는 자연재해의 원인을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며 윤리적인 차원에서 규명하려는 노력 끝에 비록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니지만, 기브온 사람들이 억울하게 집단살해를 당한 사실을 밝혀내고, 과거사를 청산하려는 시도는 매우 바람직하다. 그런데 다윗이 자신의 개인적인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사울의 잔존세력을 제거하고, 그것도 자신이 직접 하지 않고, 기브온 사람들의 손을 빌어서 하는 교활함을 보였다면, 사울보다는 오히려 다윗이 더 지탄받아야 할 인물이라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본문의 단순한 구조를 넘어서, 실제 세계, 특히 정치적인 측면은 대단히 복잡하게 얽혀서 전개되기 때문이다.

 

9.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도 그렇고 다윗이 그 진상을 규명하고 피해자들에게 보상하는 것도 그렇고, 언제나 모든 게 분명해지는 건 아니다. 성경기자는 실제 상황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보다는, 사울이 기브온 사람을 무고히 죽였다는 데 역점을 두고, 다윗이 그것을 어떻게 지혜롭게 풀어가는 지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그리고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다윗이 하는 방식이 당시에 통용되었다는 사실이다. 3년 동안 흉년이 들었는데, 다윗은 이것을 자연적인 재해로만 규정하지 않았다. 그것을 촉발케 한 인간적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연현상을 인간의 구체적 삶과 연계해서 그 근본 원인을 찾으려 했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가 보기에는 3년 동안 가뭄이 발생한 원인으로 사울의 기브온 주민학살사건을 내세우는 것은 대단히 무모한 것처럼 보이지만, 다윗을 비롯한 정치가들뿐만 아니라, 성경기자를 포함하는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10. 그래서 다윗도 기브온 주민학살사건을 3년 연속 기근의 원인으로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었고, 그것을 신적인 권위에 근거해서 공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윗이 진상조사를 하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다. 본문을 보면, “다윗이 물었다”는 말이 네 번 나온다. 다윗은 하나님에게 물었고, 기브온 사람들에게도 물었다. 이것은 다윗이 진상조사와 그것에 대한 조치를 나름 철저하게 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기근의 원인을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이 그 원인을 알려주시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기근의 원인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에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아무도 거기에 반대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면서 또 다른 비극을 야기 시켰다는 게 문제다.

 

이종록/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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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41)

 

밧세바, 다 내 탓이다(2)

 

1. 나단이 다윗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심판 말씀을 찬찬히 읽어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게 많다.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사무엘하 12:7-8). 이 구절은 어떤 사람이 왕위를 빼앗는 경우, 그 왕이 지닌 모든 것, 재산뿐만 아니라 아내들도 빼앗았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러한 일을 하나님이 주도하셨다고 말하는 게 걸린다. 그게 그냥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냉혹한 현실이라고 하면 그럭저럭 받아들이겠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 즉 사울의 아내들을 다윗에게 주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은 다윗이 우리아를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은 것을 용서할 수 없는 악행으로 규정하시고, 그래서 다윗 집안에 칼부림이 떠나지 않게 하시며,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11-12절)고 말씀하신다. 이 구절도 황당하게만 보인다. 죄를 지은 것은 다윗인데, 왜 하나님은 다윗을 징계하지 않고 다윗의 가족들, 아들들 사이에서 왕위계승을 위한 피비린내 나는 칼부림이 일어나게 하고, 다윗의 아내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서 백주대낮에 공개적으로 성행위를 강요당하는 수모를 겪게 하시겠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그 여자들이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 그냥 그게 현실이라고 하지, 왜 하나님이 내리시는 벌이라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3.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나단이 하는 말을 들은 다윗이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하자, 하나님이 다윗을 용서하시는 대신,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죽이겠다고 하는 장면이다(13-14절). 다윗과 밧세바가 죄를 범한 것이지 그 아이가 죄를 지은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 아이가 죄의 결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가혹한 벌을 받아도 마땅한가? 그러면 처음부터 그 아이를 태어나지 말게 할 일이지 왜 태어나게 한 다음, 그 무구한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고 하는가? 그 아이의 아픔과 죽음을 통해서 다윗과 밧세바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서인가? 그리고 다윗이 보낸 편지를 받고 우리아를 사지로 몰아넣어서 전사케 한 요압은 공범(共犯) 또는 종범(從犯)인데, 왜 벌을 받지 않는가?

 

 

 

                               밧세바 (폴 세잔, 1880년경)

 

4. 성경기자는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15절)고 하는데, 그 아이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 알 수 없지만, 어린 몸으로 견디기 어려운 극심한 고통을 당한 것은 분명하다. 아, 성경 읽는 게 정말 답답하고 힘이 든다. 도대체 그 아이가 왜 그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다윗도 그런 마음이었는지, 그 아이를 위해서 금식하면서 밤새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간구했다. 사람들이 그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그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고 음식을 먹지도 않았다.

 

5. 아이는 결국 칠 일만에 죽었다. 다윗은 아이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차리게 하고 먹”었다(20절). 신하들이 의아해서 연유를 묻자, 다윗은 아이가 살아있을 때는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고 살려주시기를 원해서 그렇게 금식하면서 기도를 한 것이고, 지금은 이미 죽어서 아무리 해도 다시 살릴 방도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23절)고 말한다. 이 말 속에 다윗의 절절한 심정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윗은 그 아이를 정말 사랑했고,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통스럽게 세상을 떠난 것을 자신이 지은 죄 때문이라고 여기고 마음 아파했을 것이 분명하다.

 

6. 그런데 그 아이가 그렇게 고통스럽게 앓다가 세상을 떠나는 일주일 동안 어머니 밧세바는 무엇을 했을까? 성경기자는 다윗이 아이를 위해서 금식하며 엎드려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상당히 길게 서술하면서도, 밧세바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분명히 밧세바도 다윗과 함께 금식하면서 아이를 위해 땅에 엎드려 기도했을 텐데, 아니 다윗보다 더 간절하게 처절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제발 그 아이를 살려달라고 간구했을 텐데, 성경기자는 그 아이가 병들어 심히 고통스러워 하다가 세상을 떠나는 7일 동안 밧세바가 무엇을 했는지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성경기자, 참 매정하다.

 

7. 하지만 독자들은 그 불쌍한 아이가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그 기간 동안 밧세바가 찢어지는 심경으로 슬퍼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그 실마리를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했다(24절)는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신하들이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아이 때문에 금식하며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간구하던 다윗이 밧세바를 위로했다는 것은 밧세바가 다윗보다 더 큰 슬픔을 겪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8. 그 후에 다윗은 밧세바와 동침하고 밧세바는 다시 아들을 출산한다. 그리고 그 아이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짓는다. 그런데 주님이 그 아이를 사랑하셨단다(24절). 그래서 선지자 나단을 보내서 그 아이에게 “주님의 사랑을 입었다”는 의미를 가진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지어주게 하셨단다. 나는 이런 상황이 매우 맘에 거슬린다. 도대체 하나님이 솔로몬을 사랑하신 까닭은 무엇인가? 다윗과 밧세바가 낳은 첫째 아이는 중병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었기 때문에 결과론적으로 하나님이 치셨다고 하고, 둘째 아이는 그런 일 없이 잘 자랐고, 나중에 우여곡절 끝에 다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기 때문에 결과론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 것일까?

 

9. 그렇다고 해도 나단 선지자가 그런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나단은 첫째 아이가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솔로몬에게는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이름도 지어주지 않아서 부를 이름이 없던 첫째 아이는 다윗과 밧세바가 정식 부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저지른 범죄로 인해서 잉태되었기 때문에, 다윗과 밧세바가 정식 부부가 된 이후에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비참하게 죽어야 하고, 솔로몬은 다윗과 밧세바가 정식 부부가 된 이후에 잉태되고 태어났기 때문에 주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아도 무방하다는 것인가?

 

10. 아무튼 한 아이의 비극적인 죽음과 한 아이의 복 받은 탄생이 보여주는 극적인 대비만큼 맘이 혼란스럽다. 그리고 맘이 아프다.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을 한 다윗과 밧세바, 그들은 응당 욕을 얻어먹어야 하지만, 그리고 우리아의 죽음과 한 아이의 고통스런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하지만, 그래도 그들이 아파서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를 두고, 아버지 어머니로서 금식하며 엎드려 하나님께 간구하는 모습까지 가증스럽게 볼 필요는 없을 듯하다. 어쨌든 그들은 그 아이의 부모였다.

 

이종록/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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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40)

 

밧세바, 다 내 탓이다(1)

 

 

1. 밧세바. 그는 누구인가? 목욕하는 한 여인으로 성경에 등장한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사무엘하 11:3)이다. 하지만 성경기자는 그를 밧세바라는 이름 대신 “우리아의 아내”(11:26)라고 부르는데, 다윗이 그를 궁전으로 데려와서 아내로 삼았는데도(27절) 성경기자는 계속해서 “우리아의 아내(12:10, 15)라고 한다.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12:15). 이 요상한 구절을 지나서 12장 24절에서야 성경기자는 밧세바를 다윗의 아내라고 부른다.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성경기자는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태어난 첫째 아이가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밧세바를 다윗의 아내로 인정한 것이다.

 

2. 다윗은 아내가 여럿이었는데, 그 가운데 미갈, 아비가일, 그리고 밧세바가 다윗의 아내가 된 사연은 꽤 복잡하다. 사울의 딸인 미갈은 다윗과 결혼했다가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주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된다. 다윗은 왕위에 오른 다음, 미갈 부부를 강제 이혼케 해서 미갈을 다시 아내로 맞이한다. 아비가일은 나발의 부인이었는데, 나발이 죽은 다음, 다윗과 결혼한다. 그리고 밧세바는 우리아의 아내였는데, 다윗의 계교로 우리아가 전사한 후에 다윗의 아내가 된다.

 

 

                               밧세바 (폴 세잔, 1880년경)

 

 

3. 밧세바가 다윗의 아내가 되는 과정을 찬찬히 살펴보자. 다윗과 밧세바가 처음 만나서 결혼하는 과정을 성경기자는 사무엘하 11장과 12장에서 꽤 상세하게 들려주는데, 당시에 상당히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다윗은 주변 나라들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례적으로 출전해서 군사력 시위를 하게 하는데, 이번에는 요압을 암몬으로 보내고, 자신은 예루살렘 왕궁에 남았다. 어느 날 저녁에 다윗은 왕궁 옥상에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발견한다. 그 여인은 “심히 아름다웠다”(11:2). 그 아름다움이란 분명히 성적인 매력이었을 것이다.

 

4. 다윗은 즉시 심복을 보내서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게 한다. 그 심복이 돌아와서 그 여인이 누구인지를 알려주었는데, 남편인 우리아가 요압과 함께 암몬 전투에 참여해서 집 안에 남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다윗은 밧세바를 데려오게 해서 동침한 다음, 집으로 돌려보낸다. 거기서 일이 끝났어야 하는데, 밧세바가 임신을 했고, 그 소식을 다윗에게 알린다. 밧세바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큰 일 났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서 그 일을 무마하기 위해 요압에게 편지를 보낸다. 우리아에게 휴가를 주게 해서 밧세바와 동침케 하려 한 것이다.

 

5. 하지만 우리아는 너무나 강직했다. 성경기자는 우리아의 강직함을 괘 길게 서술한다(11:6-13). 다윗은 우리아를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우리아가 다윗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고 귀대하는 바람에, 다윗은 우리아를 죽이기로 계획한다. 그리고 요압에게 편지를 보내서, 우리아를 전사하게 한다. 결국 우리아는 자신이 그토록 충성을 바친 조국에 배신을 당한 것이다. 다윗과 요압, 그리고 밧세바, 이들은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이다. 성경기자는 우리아를 전사케 하는 그 추악한 음모를 상세하게 들려준다.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 내용을 그대로 보여준다.

 

6. 그들은 우리아를 전사케 하려고 대본을 만들었다. 그리고 각자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요압은 부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의 용기를 북돋워주는 훌륭한 사령관을 연기했다. 그리고 다윗은 전투 계획을 잘못 세워서 뛰어난 무장을 전사케 한 지휘관들에게 격분하는 훌륭한 왕을 연기했다. 다윗과 요압은 매우 탁월한 연기자들이다. 자신들의 진면목과는 전혀 다른 거짓된 역할을 너무도 능숙하게 해낸 것이다. 이들과 달리, 우리아, 그리고 그와 함께 전사한 군인들, 음모로 가득한 추악한 편지를 들고, 그것이 그런 편지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다윗과 요압 사이를 오고간 전령. 그들은 모든 게 진실인 줄 알았을 것이다.

 

7. 밧세바는 어땠을까? 성경기자는 남편이 전사한 소식을 들은 밧세바의 모습을 이렇게 서술한다. “우리아의 아내는 그 남편 우리아가 죽었음을 듣고 그의 남편을 위하여 소리 내어 우니라”(11:26). 별다른 평가를 하지 않지만, 성경기자가 생각하기에도 밧세바의 그런 모습은 매우 역겨웠을 것이다. 정확한 사실이야 알 길이 없지만, 밧세바가 우리아의 비극적인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을 수도 있지만, 눈물 흘리는 그 모습이 매우 가증스럽다는 느낌은 떨치기 어렵다. 다윗이 그가 세운 우리아 제거 음모에 대해 밧세바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고 해도,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대충 눈치를 챘을 텐데, 밧세바 역시 자신이 맡은 역할이 무엇인지 잘 알았고, 그리고 그 역할을 정말 잘 해낸 것이다. 성경기자는 이 모든 위선적인 행위들에 대해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11:27)고 평가한다.

 

8. 다윗과 요압이 세운 계략으로 우리아가 장렬히 전사한 후에 다윗은 밧세바를 궁으로 데려와서 아내로 삼는다. 그리고 밧세바는 아이를 낳는다. 이렇게 모든 일이 깔끔하게 끝난 듯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그 일을 아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던 모양이다. 우선 다윗의 심복들은 다윗을 위해 여러 가지 일들을 했기 때문에 자초지종을 다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요압과 그의 심복들이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어쩌면 요압이 다윗을 견제하기 위해 그 이야기를 은근하게 흘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 일은 아무도 모르게 감쪽같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9. 전혀 사실을 모를 것이라 여겼던 나단 선지자가 그 추악한 음모를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윗을 찾아온다. 처음에는 비유로 이야기를 하면서 다윗을 농락한다. 그런 다음 대놓고 다윗을 질책한다. 나단은 하나님이 하시는 책망과 심판의 말씀을 다윗에게 전한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모든 것을 넘치게 주었는데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차지한 것을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 보기에 악을 행한 것”으로 규정한다(12:10).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심판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죽이겠다는 것이다(14절).

 

10. 이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왜 범행 당사자들은 가만 두고 무고한 아이를 죽이겠다는 것인가? 다윗은 나단이 그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긴 질책을 듣고 자신이 범죄 했음을 인정한다.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노라.” 그러자 나단은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은 죽지 않는다”(13절)고 말한다. 그 대신 아이를 죽이겠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윗이 저지른 일로 인해서 여호와의 원수들이 비방할 거리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란다(16절). 그러면 다윗을 죽일 일이지, 도대체 그 아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 아이를 죽이겠다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하기 어렵다.

이종록/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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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39)

 

이가봇의 어머니, 비극의 시대를 통찰하다(2)

 

1. “이가봇의 어머니.” 결코 영화롭지 않은 호칭이다. 이가봇이라는 험악한 이름을 자신이 낳은 아이에게 지어주는 어머니 심정은 얼마나 절박했을까? 남자들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그만큼 모든 것을 망쳐놓았던 그 비극적인 시절로 돌아가 보자. 사무엘상 4장은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로 시작하는데, 그런 다음 사무엘은 7장 3절에서야 다시 등장한다. 그 사이에 2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다.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2절). 그래서 사무엘은 사람들을 미스바로 모이게 한다.

 

2. 그렇게 사무엘이 지도자로 등장하기 20년 전 일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엘리에게 꽤 긴 저주를 들려주셨다. 결국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고, 엘리 가문은 몰락해서, “네 집에 남은 사람이 각기 와서 은 한 조각과 떡 한 덩이를 위하여 그에게 엎드려 이르되 청하노니 내게 제사장의 직분 하나를 맡겨 내게 떡 조각을 먹게 하소서”(2:36)라고 한단다. 아버지에 이어 두 아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막강한 엘리 집안이 완전히 망해서, 쇠락한 양반처럼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비굴한 신세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3. 엘리는 그런 이야기를 사무엘로부터도 들었는데,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3:18)고 대답한다. 엘리는 가문의 비극적 몰락을 예감하면서도, 달리 어쩔 방법을 찾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두 아들을 통제할 힘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이름만 있을 뿐이지 힘없는 안방 늙은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4. 그러는 동안,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투가 벌어진다. 사사 시대에는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계속 싸웠는데, 이번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패하고 사천 명이 죽임을 당했다. 이스라엘 장로들은 패전 이유를 찾는데, 그들이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라고 묻는 것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패하게 하셨다, 즉 패전 원인이 신앙적인 차원에 있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5. 그래서 그들은 다음 전투에서 필승할 수 있는 비책을 강구하는데, 그 비책은 다름 아닌 언약궤를 전장에 가져가는 것이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4:3). 그런데 이 구절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그들이 신앙적으로 대처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매우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 간구하자는 것이 아니고, 언약궤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게 하자는 것이다. 물론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 즉 하나님의 영광의 상징이기 때문에, 언약궤로 하여금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는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게 하자는 의미로 풀이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신적인 능력을 가진 언약궤를 자기들 의도대로 이용하자는 것으로 보인다.

 

6. 이스라엘 장로들은 그런 불길한 결정을 내린 다음, 사람들을 실로에 보내서 언약궤를 가져 오게 하는데, 성경기자는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에 있었더라”(4:4)고 한다. 그리고 성경기자는 언약궤를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라고 한다. 결코 인간들이 제 맘대로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그 언약궤를 관리하고 감독하는 제사장 자격으로 언약궤를 따라서 전쟁터로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전날에 당한 패전으로 의기소침해 있던 이스라엘 군인들은 언약궤가 오는 것을 보고 땅이 울리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의기양양해진 것이다. 그 외침을 들은 블레셋 사람들은 너무도 두려워하고 절망해서 공황장애를 겪을 지경이다. 그들은 “신이 진영에 이르렀도다”라고 하면서, 출애굽 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역사를 일으킨 신, 즉 야훼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은 언약궤 자체보다 야훼에 더 주목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종교적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언약궤라는 신물, 신적인 능력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그 물건에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7. 언약궤를 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블레셋 사람들은 두려워했는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블레셋 사람들이 기왕 죽을 것 최선을 다해서 싸우다 죽자 라는 결연한 의지로 이스라엘 군사들을 대했기 때문에, 죽기를 무릅쓰고 달려드는 그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날 삼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 그뿐이 아니다. 성경기자는 전투 결과를 이렇게 요약한다.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4:11).

 

8. 이렇게 해서 엘리 가문에 내린 저주가 시작되었다. 어느 베냐민 사람이 실로로 달려가서 그 참상을 엘리에게 전한다. 성경기자는 그때에 눈이 어두워서 앞을 거의 볼 수 없는 “엘리가 길 옆 자기의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떨릴 즈음이라”(4:13)고 묘사하는데, 전투 결과에 대해 자초지종을 들은 엘리는 충격을 받아 의자에서 뒤로 넘어지면서 목이 부러져 죽었다. 성경기자는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고 주석을 단다.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노사사가 비보를 전해 듣고 무력하고 비극적인 모습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9. 비극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엘리의 며느리, 즉 비느하스의 아내가 아이를 낳고 세상을 떠난다. 그는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것과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충격을 받아서 몸에 이상이 생겼는데, 그로 인해 죽어가면서도 간신히 아이를 출산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아들을 낳았다고 해도 그는 거기에 대해서 대답도 하지 않고 관심도 보이지 않았단다. 그가 한 일은 아이 이름을 이가봇으로 지은 것이었다. 이가봇은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는 의미를 갖는다. 성경기자는 그가 아들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은 까닭을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21-22절). 이가봇은 모든 것을 주도하는 남자들의 무능력, 남자들의 비극적 죽음, 그리고 남겨진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의 무한한 아픔을 상징한다.

 

10. 비느하스의 아내, 이가봇의 어머니는 이스라엘의 패배, 남편의 죽음, 그리고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다는 비보를 듣고 충격을 받아서 세상을 떠난다. 그런데 성경기자는 이가봇의 어머니가 남편과 시아버지의 죽음보다 궤를 빼앗긴 것에 더 충격을 받았고, 그래서 아들 이름을 이가봇으로 지은 것으로 기록한다. 이가봇의 어머니는 그 당시 누구보다 시대적 상황을 신앙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것 같다.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아이에게 냉정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아이에 대한 모정이 그만큼 강했다는 것이고, 그 아들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다는 것은 그 아이를 비롯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지를 아린 마음으로 내다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시대. 그 비극적인 시대를 가장 비극적으로 살았던 비극적인 여인이 바로 비느하스의 아내이며 이가봇의 어머니였다. 너무도 짧고 애절한 모정의 시간이었다.

 

이종록/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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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38)

 

이가봇의 어머니, 비극의 시대를 통찰하다(1)

 

1. “이가봇의 어머니.” 우리는 비극적인 시대를 살다간 한 여인, 한 슬픈 어머니 이야기를 하려 한다. 누구보다 예리하게 시대적 상황을 파악하고 신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던 여인. 어리석고 탐욕스런 남자들이 제 멋대로 주도하다 결국 망쳐놓은 비극적 상황으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것을 바꿀 어떤 역할도 할 수 없었던, 그러다 몰락의 거센 물살에 휩쓸려 사라져야 했던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2. 사무엘상 2장에서 7장까지는, 당시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다스리던 막강한 엘리 가문이 어떻게 삽시간에 멸망하고, 에브라임 산지 출신으로 어린 시절에 그의 어머니 한나가 성전에 의탁한 사무엘이 어떻게 이스라엘 역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성경기자는 엘가나 집안 사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실로를 중심한 제사장 세력을 엘리가 아닌,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이끌었음을 일부러 밝힌다. “이 사람이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에 있었더라”(사무엘상 1:3). 한나가 기도하는 장면에서는 엘리가 주도적인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홉니와 비느하스가 당시에 모든 것을 관장했다는 것이다.

 

3. 2장은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기도하는 한나(1-11절), 비행을 저지르는 엘리의 두 아들(12-17절), 성전에서 봉직하는 사무엘과 출산의 복받은 한나(18-21절), 두 아들을 꾸짖는 엘리(22-26절), 엘리에게 멸문지화를 예고하는 하나님의 사람(27-36절) 순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사무엘과 엘리의 두 아들을 극과 극으로 대비한다. 한나가 사무엘을 성전에 바치는 이야기는 “엘가나는 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사무엘상 2:11)로 끝난다. 그리고 12-17절은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로 시작해서,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로 끝난다. 이러한 대비는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더라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의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2:25-26)에서 절정에 이른다.

 

 

 

 

4. 이렇게 성경기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무엘과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는 엘리의 두 아들을 대비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무엘은 승승장구하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엘리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할 것임을 독자들로 하여금 예측하게 한다. 이런 의도를 강하게 보여주는 문학적 구조와 전개로 인해서, 독자들은 엘리를 필요 이상으로 가혹하게 비난하고 사무엘을 필요 이상으로 높이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엘리와 사무엘, 엘리의 두 아들과 사무엘의 두 아들을 대비하면, 전혀 그렇게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무조건 엘리를 비난하고 사무엘을 칭송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5. 성경기자는 사사 엘리가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고 하는데, 이것은 엘리가 나약하고 무능한 지도자는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성경기자는 전성기의 엘리가 아닌, 나이 들어 무능하고 무력한 엘리의 모습만을 보여줌으로써, 엘리를 매우 희화화하는 느낌을 주는데, 이것 역시 엘리 가문의 몰락과 사무엘의 상승을 대비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엘리가 나이 들자 두 아들, 즉 홉니와 비느하스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이스라엘 여러 지파들을 다스린 것으로 보이는데, 성경기자는 엘리 아들들이 사사라는 직책을 이용해서 재산을 증식하는 일에 몰두했음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서 보여준다. 이것은 사무엘과는 정반대되는 모습이다(사무엘상 12:1-5).

 

6. 이 경우 역시 엘리의 두 아들과 사무엘을 비교하는 것이지만, 엘리와 사무엘을 비교하면, 양상은 달라진다. 사무엘이 매우 청렴하게 산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12장 1-5절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사무엘은 청렴 콤플렉스가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청렴하게 살았음을 스스로 밝힌 다음, 백성들에게 그것을 확인하고, 그런 다음 주님을 증인 삼아서 다시 자신의 청렴결백을 입증한다. 두 아들이 저지른 비리로 인해, 사회적으로 유력한 사람들이 사무엘 집안을 조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사무엘은 “털어서 먼지가 안 난” 것으로 보인다. 엘리도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나이 들면서 두 아들을 통제하지 못했다는 게 문제였다.

 

7. 그런데 젊은 시절에 명성을 날렸던 사무엘 역시 나이가 들면서 엘리와 별로 다를 바 없게 된다. “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사무엘상 8:1-3). 그리고 사무엘의 두 아들들에 대한 평가는 엘리의 두 아들들에 대한 평가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엘리의 두 아들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멸문지화를 예고하고 경고했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엘리와 두 아들들을 즉각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 후로도 엘리와 두 아들들은 사사직을 계속 유지했다.

 

8. 하지만 사무엘의 두 아들들은 경우가 전혀 달랐다.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8:4-5). 사무엘이 아닌 두 아들에 대한 실망으로 인해, 이스라엘 장로들이 모여서 사무엘 가문을 축출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아예 정치체제를 왕정으로 바꾸려는 것이다.

 

9. 여기서 보는 대로, 사무엘이 아무리 탁월한 지도자였다 해도, 세월에 장사 없다고, 사무엘 역시 나이 들면서 무력한 노인에 불과했다. 엘리도 그랬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것은 법궤 사건 이후 일이고, 사무엘상 2장의 상황에서는 엘리가 더 나이 들면서 문제가 매우 심각해진다.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의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음을 듣고”(2:22), 엘리가 두 아들들을 구구절절 옳은 말로 나무라는데, 그들은 아버지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이런 장면을 세세하게 묘사하면서, 성경기자는 사무엘의 경건함과 엘리의 두 아들들의 불경함을 대비하고, 그로 인해서 엘리 가문이 몰락할 것을 하나님의 사람과 사무엘을 통해서 확실하게 들려준다.

 

10. 이미 가파른 내리막길을 브레이크 없이 치달리는 엘리 가문을 저주하면서, 하나님은 “네 집에서 출산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이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2:33-34)고 말씀하신다. 홉니와 비느하스의 죽음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엘리 가문과 이스라엘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독자들은 엘리 가문이 이런 끔찍한 저주를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엘리 가문에 이렇게 욕 얻어먹어도 마땅한 남자들만 있는 게 아니다. 여자들도 있고 아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 저주는 얼마나 가혹한 것인가.

 

이종록/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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