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오의 건강한 작은 교회 이야기(14)

 

교회 대형화와 브랜드화의 병리현상들

 

 

한국교회 신학적/윤리적 타락의 그야말로 막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원인을 교회 성장주의 다시 말해 "대형화"에 따른 현상으로 이해하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이런 인식의 확산에는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한 여러 사건사고들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목회자 가족을 둘러싼 재정비리, 한국교회 연합 기관 대표회장 선거에서 불거진 금권선거 논란, 담임목사직 세습, 목회자에 의한 성범죄, 박사학위 논문 표절 문제, 정치적 이념적 편향의 극단적 표출 등 끊이지 않고 터지는 문제의 중심에 대형교회들이 자리 잡고 있다. 교회만 성장시키면 교리적 타락이든, 윤리적 부패든 모두 용서되고 용납되는 세속화가 횡횡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신학적 타락과 윤리적 부패는 목회자 개인의 영성과 도덕성과 관계없다. 교회 신자 수가 일정 숫자 이상 넘어가면 어느 교회에서나 나타나는 필연적 현상으로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로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교회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가 좋든 나쁘든 대형교회들은 또 다시 초대형교회를 향해 지속적인 성장 경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

 

 

 

 

 

대형교회는 교회 개척/분립 등을 할 때 자신들의 교회 명칭을 붙여 지교회화 하며 그 영향력을 확산시키고 있다. 이런 현상은 대형교회의 폐해를 지적하며 교회갱신과 제자훈련을 기치로 내세우며 성장한 소위 개혁적인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들도 자신들의 건강한 교회 이미지나 목회방법론을 브랜드화해 지교회, 네트워크교회, 캠퍼스교회 등의 명칭으로 교회를 프랜차이즈화 하고 있다.

 

이렇게 전통적인 대형교회들과 개혁적인 브랜드교회가 자신들만을 위한 교회 생태계를 형성해 가는 동안 한국교회에는 다음과 같은 병리현상들이 가시화 되었다.

 

첫째, 동네 작은교회들의 몰락이다. 대형교회는 버스 운행이나 대규모 초청행사 등의 물량공세와 각종 종교 편의 시설 서비스 등을 내세워 동네 작은 교회 신자를 수평이동해가는 파렴치한 일을 서슴치 않고 있다. 또 스타목사나 개혁적 이미지로 성장한 소위 교회들의 브랜드화는 지역교회를 프랜차이즈화 하고 있어 또 다른 위협이 되고 있다.

 

둘째, 교회 공교회성을 위협하고 있다. 대형교회의 출현은 개교회와 목회자의 영향력의 지나친 확대로 노회(지방회)/총회 등으로 구성된 교회의 공교회성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노회(지방회)/총회를 장악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런 영향력은 암묵적 카르텔을 형성해 대형교회와 그 목회자의 교리적/윤리적 타락을 징계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대형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치리권의 부재는 작은 교회와 목회자들로 하여금 대형교회와 목회자와 분파를 형성토록하고 이런 분파를 통해 작은 교회와 목회자들도 치리할 수 없는 부패의 고리는 견고하고 넓어졌다.

 

셋째, 신자중심의 교회됨을 상실시키고 있다. 1517년 종교개혁을 기점으로 시작된 개신교의 정신은 “오직성경”, “만인제사장”, “개교회 우선성” 등이었다. 이런 정신은 중세 가톨릭의 중앙집권적 사제주의를 배격하고, 세속적 계급주의와 자본주의적 교회 운영을 터부시 했다. 그래서 목사만이 성직자가 아니라 모든 신자가 성직자이며, 각각의 직분을 은사적 직제로 복음적 분업을 존중하였다. 그런데 대형교회와 소위 브랜드교회 현상은 개교회적 신자중심의 교회됨을 상실시키고 있다.

 

넷째, 소위 “가나안” 신자 양산을 가속화 하고 있다. 예수를 믿지만 교회를 안 나가는 신자를 “가나안 성도”라고 부른다. 교회를 안 나가는데 어떻게 신자인가? 의아할 수 있겠다. 처음부터 안 나간 것이 아니라 교회를 출석하다가 목회자나 교회에 실망하거나 신앙적으로 방황하면서 안 나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 대형화는 신학적/목회적 타락과 부패를 방치해 이에 상처받고 실망한 신자들을 가나안 성도로 내몰고 있다.

 

다섯째, 소위 “익명화된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하고 있다. 이들은 교회에 출석하지만 교회 공동체 일원으로서 참여하지 않고 그저 예배만 드리거나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주변을 맴도는 자들이다. 공동체적 관계를 갖는 다는 것이 불편하고 귀찮아서이기도 하고, 성격적으로 누군가와 어울리며 교제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그럴 수도 있다. 이유야 어쨌든 교회는 공동체이고 가족이다. 익명화된 상태로 방치하는 것은 개인을 위해서도 교회를 위해서도 적절치 않다. 교회 대형화는 익명화된 그리스도인이 양산되고 방치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익명화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속시켜 습관화 시키고 있다.

 

여섯째, 신자들의 일상의 제자도를 방해하고 있다. 신자는 교회에서 어떤 신자인가도 중요하지만, 일상의 삶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교회에서의 예배, 교제, 교육 등은 교회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신자들이 일상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주님의 제자로 살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교회 대형화는 신자들의 모든 달란트와 은사를 또 시간과 물질을 오직 교회를 성장시키는 일에 동원되도록 부추긴다. 교회 중심의 삶은 오히려 신자 개인의 일상의 관계와 삶을 망가트리기도 한다.

 

일곱째, 교회의 공공성을 방해한다. 성공회 대주교였던 윌리엄 템플은 “교회는 회비를 내어 자기 회원들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은 유일한 곳이다”라고 했다. 교회가 단지 교인들과 자기 교회만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교회는 지역사회의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과 또 우리시대 고난 받는 이웃들과 정치사회적 불의와 맞서 사랑과 평화를 행하고,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곳이다.

 

그런데 대형교회는 큰 건물을 유지하고 막대한 재정이 들어가는 프로그램 등으로 인해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 중심으로 운영된다. 세상 가운데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이해관계 가운데 자유롭지 않게 되었다. 이로 인해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일에는 참여하지만, 정작 가난으로 내몰리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개선에는 참여하지 못한다. 지역사회와 시대적으로 교회가 공적으로 감당해야할 공공 사역을 외면한다. 심지어 교회가 세상 가운데 대항적 공동체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라 맘몬과 불의를 오히려 인정하고 강화시키는 역기능적 역할을 하기도 한다.

 

교회 대형화와 브랜드화는 교회의 교회됨을 포기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공동체성, 일상의 제자도, 공공성, 공교회성 회복을 위해 건강한 작은 교회로 재편되어야 한다.

 

이진오/더함공동체교회 목사, 교회2.0목회자운동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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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오의 건강한 작은 교회 이야기(13)

 

직분 선출은 공정하고 자율적으로

- 건강한 작은 교회의 직분(4) -

 

 

교회 직분과 관련해 직분의 종류와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직분자를 선출하는 절차이다. 직분이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기 위해 주신 고귀한 것이기에 그 선출 절차 또한 고귀하고 거룩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많은 교회에서 직분을 돈으로 사고파는 부끄러운 일이 성행하고 있다. 장로직에 3천만 원, 안수집사직은 1천만 원, 권사직은 5백만 원 이런 식이다. 심지어 장로 임직에 억 단위의 헌금이 요구되기도 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기사 댓글에 달린 글들을 보면 직분의 대가로 특별헌금을 해야 하는 교회가 보편화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직분을 대가로 한 헌금은 대형교회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물론 작은 교회도 잘못된 관행과 부정부패로 직분을 대가로 헌금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는 부패를 바로 잡고, 관행을 끊으면 사라질 수 있다. 그런데 대형교회는 단순히 부패와 관행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직분에 대한 헌금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운영과 존립의 문제라는데 심각성이 있다.

 

대형교회가 되기 위해 무리하게 은행 대출을 받아 큰 예배당을 건축한 교회들은 매달 은행에 갚아야 하는 원금과 이자에 심한 압박을 받는다. 은행 대출이 없는 교회라 하더라도 대형교회 예배당을 유지하고, 수많은 인건비와 내부 운영비용을 감당하려면 매달 고정 지출 비용이 상당하다. 바로 이 부분 인건비와 교회 운영비를 감당하기 위해 직분자를 세우고, 직분자에게 헌금을 대가로 받는 것이다.

 

 

 

 

뉴스앤조이가 53일 보도한 임직 감사 헌금, 장로 3,000만 원, 안수집사 300만 원, 권사 200만 원?” 기사에 등장하는 인천 교회 담임목사는 기자에게 교회 중직으로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한다. 그에 걸맞은 헌신이 있어야 한다고 답변했다. 다시 말해 교회 임직자들은 교회 운영에 대한 책임을 감당해야 하고 그 책임으로 헌금을 내야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교회 임직자로서 교회에 대해 공동의 책임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교회뿐 아니라 세상 어느 기업이나 단체도 당연한 것이다. 문제는 교회도 돈이 없고, 책임을 지지 못하는 사람은 임직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 인건비와 건축 등 감당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 돈으로 공동의 책임을 지는 구조를 만들고 이를 당연시 하는 것은 얼핏 들으면 맞는 말 같지만 교회가 주님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세속적인 기업과 다를 바가 없이 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 직분자를 선출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아니라 믿음이고 은사. 교회가 믿음과 은사가 아니라 돈으로 사람을 선출 할 때 교회는 교회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교회가 임직자들의 임직 대가로 돈을 내야할 정도로 운영에 어려움이 있는 것 자체가 문제다. 교회는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정도 운영되어야 한다. 교회가 은행에 대출을 받아 무리한 건축을 하고, 교회가 성도들에게 무리한 헌금을 요구하는 것은 성장에 대한 욕망과 욕심을 드러내고, 성장만이 복이라는 기복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아니라 맘몬을 섬기는 우상숭배를 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직분자 선출은 어떻게 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자발성이다. 교회 직분은 때가 되면 진급해야 하는 계금도 아니고, 어떤 대가에 의해 주어지는 포상도 아니며, 억지로 져야하는 짐도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또 교회 공동체를 위해 스스로 감당하는 십자가이다. 연륜이 되고 상황이 되면 누구나 직분자 후보자가 될 수 있고 직분자가 될 수 있는 피선거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자발성이다. 스스로 직분을 감당할 때가 되었다 판단하고, 스스로 직분을 감당할 상황이 될 때, 스스로 직분을 감당할 책임을 가지고 직분에 임해야 한다.

 

교회는 정관/규약에 직분자 선출 절차를 명시해야 한다. 일정한 연령(대체로 장로/권사는 50세 이상, 집사는 30세 이상)이 되고, 일정한 자격(대체로 장로/권사는 교회 출석 5년 이상, 집사 3년 이상, 집사는 교회 출석 3년 이상 세례 및 일정한 교육 수료자 등)을 갖춘 자를 후보자로 공지한다. 이후 본인의 후보 수락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후보자를 수락할 때만 최종 후보자로 교인총회에 후보자로 공지한다.

 

이렇게 후보자가 된 대상자에 대해 교인들은 교인총회를 통해 투표를 실시한다. 대개 처음 임직을 받을 때는 교인 2/3 이상의 동의를 얻을 때 임직이 통과된다. 교회에 따라서는 1/2이나 다득표자를 선출하기도 하는데 직분이 명예직이 아니라 실제 일을 감당하는 시무직일 때는 2/3 이상의 동의를 얻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재 많은 교회들이 서리집사직을 관행적으로 유지해 집사를 남발하고 이와 구분하여 안수집사를 세워 시무를 맡긴다. 또 이때도 교회에 실제로 필요한 집사직이나 장로직의 숫자보다 훨씬 많은 수를 직분자로 세워 실제적으로 비직분자나 직분자의 역할이나 책임에 구분이 없도록 하는데 이는 직분 자체의 의미와 권위를 무력화 시키는 것이다.

 

장로는 대체로 세례교인 30~50명에 1명을 선출해 실제적으로 그 인원만큼의 성도들을 담당해 신앙을 지도하고 섬기도록 하고, 집사는 교회 책임 있는 직분의 필요한 수를 정해 그 수만큼 선출해 집사들이 책임있는 역할과 권한을 행하도록 해야 한다. 그냥 이름뿐인 직분자는 없어야 한다.

 

이렇게 선출된 직분자는 직분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 충분한 교육을 실시하고, 정식으로 안수하는 임직식을 거행하며, 이후 적절한 직분을 감당하도록 역할을 분배해야 한다. 또한 재직회(또는 직원회) 등을 통해 당회/운영위원회가 감당하고 있는 사역을 보고받고 심의하고 함께 책임을 다하도록 한다. 직분자는 일정한 기간을 두고 재신임을 받도록 해 직분에 성실하게 임했는지 점검하도록 한다. 재신임제를 실시하는 이유는 누구를 탈락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직분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최선을 다하도록 동기부여하고 책임있게 감당토록 하기 위함이다.

 

직분은 성도를 온전하게 함으로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직분 선출은 공정해야 하고, 직분은 자율적으로 맡아야 하며, 직분은 책임있게 감당해야 한다.

 

 

이진오/더함공동체교회 목사, 교회2.0목회자운동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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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오의 건강한 작은 교회 이야기(12)

 

직분자는 직분자 답게

- 건강한 작은 교회의 직분(3) -

 

 

교회 내 ‘직분’에 대한 세 번째 글이다. 오늘은 집사, 권사, 권찰 등의 직분의 유래와 의미에 대해 살펴본다. 먼저 ‘집사’는 ‘디아코니아’(섬김, 봉사)라는 말에서 나온 ‘디아콘’(일꾼)이란 의미의 직분이다. 초대교회에 사람이 많아지자 구제사역을 담당시키기 위해 일꾼을 세운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이 구제사역을 담당하게 된 것은 ‘사도’들이 말씀사역에 집중할 수 있도록 역할 분담을 한 것이다. 따라서 현대 교회에서는 장로와 일을 분담하는 분업적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집사의 자격은 디모데전서 3장 8-13절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특별히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디모데전서 3:8)로 보아 구제 등을 위해 재정을 집행하는 역할을 수행할 때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고, “먼저 시험하여 보고”(디모데전서 3:10) 집사 직분을 맡게 하라고 하는 것으로 볼 때 집사 직분자를 대단히 신중하게 선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사도행전 6:3)을 선출했고, 바울의 사역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로마서 등 바울의 편지를 전하고 읽고 설명한 여 집사 ‘뵈뵈’ 등 실력 있고 헌신된 집사들이 사도와 장로들과 사역적으로 동역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스데반 집사나 빌립 집사처럼 말씀을 직접 전하거나 가르치기도 하고,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디모데전서 3:9)를 세우라고 한 것 등을 볼 때 집사도 상당한 수준의 성경적 실력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즘은 집사를 ‘안수집사’, ‘서리집사’로 구분하는 것이 보편화 되어있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처음부터 있던 것이 아니고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서리’라는 말은 일본식 표현으로 행정기관에서 직책이 인준되기 전에 임시로 부르던 호칭으로 우리말로는 ‘임시’ 정도의 의미다. 원래 장로, 집사 등의 직분자는 개 교회가 선출 또는 임명해서 노회(또는 연회, 지방회) 등의 인준을 받아야 한다. 서리(임시)집사는 개 교회가 선출/임명한 집사를 노회/연회/지방회가 인준하기 전 그야말로 임시로 부르는 호칭인 것이다. 대체로 그 기간은 1년 이내였다.

 

이런 행정적 직분 호칭을 어느 순간 직분을 마구잡이로 남발하는데 이용하게 되었고, 세례 교인 중 일정한 나이가 넘으면 의례적으로 집사로 임명해 서리집사로 칭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집사가 많아지니 서리집사와 구분하기 위해 노회/연회/지방회의 인준을 통해 집사가 된 분들을 안수해서 세운다 해서 ‘안수집사’로 호칭하게 된 것이다. 돌아보면 서리집사의 출현과 이에 따른 안수집사의 등장은 직분의 임의적 남발로 생긴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여성들에 대해서는 ‘권찰’, ‘권사’의 호칭도 일반화 되었다. 그런데 이 또한 성경에 정해진 직분은 아니다. ‘권사’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18세기 감리교를 창시한 존 웨슬레다. 그는 당시 영국 전역을 다니며 교회를 개척하고 부흥운동을 주도하였는데, 교회 내 설교자가 부족하자 성경에 나오는 ‘권위자’(헬라어 ‘파라클레시스’, 권면하고 위로하는 자, 사도행전 4:36,로마서 12:8, 에베소서 6:22)을 인용해 ‘권사’(디아코니스, deaconess)라는 직분을 만들어 남자들에게 주었다. 이렇게 임명된 ‘권사’들은 설교를 하거나, 초신자들의 신앙지도를 담당했다.

 

이후 미국 연합감리교단은 1939년 장로와 집사로 충분하다고 보고 권사 제도를 폐지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고, 심지어 장로교까지도 1955년 제40차 총회에서 권사 제도를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다. 장로교가 권사 제도를 받아 들이 것은 당시 장로교는 여성에게 안수 할 수 없다하여 안수집사나 장로로 세울 수 없자, 신앙연수가 오래된 여성도들에게 권사 직분을 주어 심방, 봉사 등을 담당하게 한 것이다.

 

‘권찰’은 미국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평양신학교와 장대현 교회를 설립한 사무엘 마펫이 처음 도입했다. 그는 미국 필라델피아 교회에서 사역할 때 교인들을 10명 단위로 소그룹으로 나누고 ‘leader of ten’이라는 리더를 세웠는데, 이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 권찰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구역장, 속장, 셀리더 등과 유사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사무엘 마펫이 1909년 평양에서 백만인 구령 운동을 전개할 때 권찰을 임명해 효과적으로 사역하는 것을 보고 당시 교회들이 이를 받아들였다. 현대에는 입교한 지 6개월 이상 된 여자들에게 권찰 직분을 주어 1년간 심방 도우미나 구역장의 보조 역할로서 교회 봉사를 시켜 서리집사가 되기 전 단계의 직분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상으로 집사, 권사, 권찰 직분에 대해 살펴보았다. 필자가 볼 때 교회 직분은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더라도 공교회가 필요에 따라 절차를 가지고 새롭게 추가할 수 있다 생각한다. 단, 성경이 명시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는 장로, 집사 등의 직분은 그 가르침의 의미를 살펴 바르게 제도적으로 유지해야 할 것이다. 성경에 명시 되지 않은 직분을 세울 때는 성경에 명시된 직분으로 표기하는데 한계가 있거나 역할적으로 꼭 필요한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제도는 직분은 세우기도 어렵지만 폐하기는 더욱 어렵다.

 

우리가 알다시피 권사, 목사, 장로, 집사라는 직분은 계급이 아니라 은사 즉, 일종의 역할이다. 목사는 목사답게 신학과 성경을 연구하고 준행하며 가르치기기를 힘쓰고, 고통과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위해 심방하고 기도하고 격려해야 한다. 또 장로는 교회의 신학/신앙이 세속적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하고, 성도들을 섬기고 돌보며, 목회적 사역을 동역한다. 권사는 권사답게 성도들의 신앙과 삶이 교리적/윤리적으로 바르게 살아가도록 권면하고, 고난과 고통이 있는 성도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 한다. 집사는 집사답게 구제와 봉사의 일 중 적실한 것을 맡아 최선을 다해 감당하고, 성실하게 일해야 한다.

 

각 직분자들이 바르고 정직하게 주어진 직분을 감당할 때 하나님의 자녀들인 성도들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 봉사의 일을 하고, 주님의 교회를 아름답게 성장/성숙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직분자를 세울 때 절차는 공평/공정해야 하며, 직분을 대가로 헌금/헌물이 요구 되어서는 안된다. 또 직분자에 대한 바른 교육이 있어야 하며, 적절한 권한과 책임을 다하도록 서로 격려해야 할 것이다.

 

이진오/더함공동체교회 목사, 교회2.0목회자운동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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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오 목사의 건강한 작은 교회 이야기(11)

 

목사는 목사답게

- 건강한 작은 교회의 직분(2) -

 

 

지난 번 글에서 교회 직분을 직분(office)과 직책(position)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이번에는 각 직분의 의미와 형성 과정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먼저 ‘목사’라는 호칭부터 생각해 보겠다. 요즘 ‘목사’가 성경에 없는 직분으로 콘스탄틴 대제 이후 교회가 제도화 되면서 권력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성경대로 ‘목자’ 또는 ‘장로’ 등으로 부르거나 심지어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등장하고 있다.

 

우리 말 성경 <개혁개정>에 ‘목사’라는 호칭이 등장하는 것은 에베소서 4장 11절 단 한 곳 뿐이다. 이 구절에서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라고 했는데 이 때 ‘목사와 교사’는 ‘목사 곧 교사’로 같은 의미로 번역하고 이해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 대체적인 이해이다. 문제는 ‘목사’라는 단어의 원어가 ‘포이멘’이라는 것이다. 포이멘은 ‘양을 치는 사람’으로 ‘목자’로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이에 따라 ‘목사’라는 단어는 없고 원래 표기대로 ‘목자’라고 하거나, 사도행전이나 서신서 등에 등장하는 ‘장로’ 또는 ‘감독’으로 표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 예수님만이 우리의 ‘목자’이시니 목사를 목자라 부르는 것도 적절치 않다고 주장하며 ‘목사’라는 호칭을 폐기하고 그냥 모두를 ‘형제, 자매’로 부르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부활 후 예수님은 낙심해 있던 베드로에게 나타나 “내 어린 양을 먹이고, 치라”고 명하신다. 주님의 양인 성도를 특별히 섬기라는 섬김의 직임을 주신 것이다. 또 베드로전서 5장 1-4절은 장로들에게 양무리를 치되 양무리의 본이 되라고 부탁하며 후에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 영광의 관을 얻게 될 것이라 말한다. 장로들에게 양무리를 섬기는 직임을 부여하고, 특히 예수님에 대해 ‘목자장’이라고 하는데 ‘목자장’이 있으면 ‘목자들’도 있는 것으로 예수님은 ‘목자장’이고 섬김의 직임을 맡은 자들은 ‘목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목자’가 양을 치고 섬기는 일을 한자로 ‘목양’(牧羊)이라고 한다. 원래 고대 중국에서 백성을 잘 이끈 뛰어난 관리에게 주어지는 칭호로 ‘목자’ 또는 ‘양치기’라는 뜻으로 ‘목사’(牧師)를 사용했고, 그대로 우리나라 고려, 조선 시대에도 사용했다. ‘목자’의 헬라어 ‘포이멘’을 라틴어가 ‘파스토르’(pastor)로, 영어로 ‘패스터’(pastor)로 번역했다. 라틴어로 영어로 번역할 때도 포이멘의 의미를 그대로 살린 것이다. 우리나라 성경은 중국어를 번역했는데, 목양하는 사람이란 의미로 중국어 성경이 번역한 ‘목사’(牧師)를 그대로 사용했다.

 

이렇게 놓고 보면 ‘목양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란 의미에서의 ‘목사’가 꼭 비성경적이거나 폐기되어야 할 호칭은 아닌 것이다. 목사에 대한 지나친 권력화나 권위주의화를 염려하는 것은 이해하나 그렇다고 호칭을 없애는 것이 바른 방향인가는 의문이다. 더구나 ‘목사’(牧師)의 ‘師’는 ‘집사’, ‘권사’할 때도 동일한 ‘師’를 사용해 특별성이나 구분됨을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 특별하게, 권력적으로, 권위적으로 인식하고 사용하는 잘못된 인식과 관행을 바로 잡으면 될 일이다.

 

 


<By Illustrators of the 1897 Bible Pictures and What They Teach Us by Charles Foster , Wikimedia Commons>

 

초대교회는 ‘장로’, ‘감독’, ‘목자’란 호칭을 혼용해서 사용했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서(사도행전 20:17) 당부하면서, 성령께서 장로들을 양떼들의 ‘감독자’로 세우셨다(사도행전20:28)고 말한다. 또 디도를 그레데 교회에 남겨 둔 이유를 “‘장로’(디도서 1:5)를 세우려 함”이라고 설명하면서 장로를 ‘감독’(디도서 1:7)이라고 칭한다. 베드로는 ‘목자’가 곧 ‘감독’(베드로전서 2:25)이라고 말한다. 요한도 자신을 ‘장로’(요한이서 1:1)라고 소개한다.

 

이렇게 장로, 감독, 목자(목사)가 혼용되어 사용되다가, 교회 정치 구조나 직임의 역할을 나누면서 목사와 장로로 구분하거나, 감독으로 호칭하였다. 현대 교회에서는 대체적으로 ‘목사’는 교사로서의 역할인 ‘가르치는 장로’, 장로는 ‘다스리는 장로’로 그 역할을 구분하고, ‘감독’은 감리교 등 감독정치를 하는 교파에서 목사들의 목자이거나, 특정 지역(노회나 연회 등)을 대표하는 목사를 의미하여 사용한다.

 

초대교회는 한 교회나 지역에 다수의 장로, 감독, 목사가 있었고 이들의 직무는 교회를 행정적으로 다스리는 일(디도서 1:7), 교인들을 심방하고 기도하는 일(사도행전 20:28, 베드로전서 5:2, 야고보서 5:14), 교인들을 권면하고 가르치는 일(디모데전서 3:2, 디도서 1:7), 교회를 대표하는 일(사도행전 2017~31) 등이다.

 

현대 교회에서 장로는 개 교회가 일정 세례교인(대개는 30명~50명)에 1명의 장로를 투표(장로교 등)를 통해 선출하거나 임명(감리교 등) 한다. 이렇게 개 교회에서 투표로 선택된 장로는 노회나 연회 등에서 실시하는 일정 교육이나 고시를 통해 안수하여 정식 시무 장로가 된다. 이렇게 세워진 장로는 엄밀히 말해 개 교회의 장로로 개 교회에서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대외적으로 대표한다.

 

장로의 자격은 디도서1장 5-9절, 디모데전서 3장 2-7절까지의 말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개 교회는 이런 자격에 준하게 장로를 선출하고, 교육시켜야 한다. 장로 직무는 억지로가 아닌 자원함으로 해야 하며, 이득을 위하여 해서는 안 되고, 또 주장하는 자세가 아니라 본이 되는 자세로 감당해야 한다(베드로전서 5:2,3). 이런 장로에게 젊은 자들은 순종하고(베드로전서 5:4 데살로니가전서 5:12), 존경할 자로 알아야 하며(디모데전서 5:17) 특히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존중하고(디모데전서 5:17) 그 삯을 주어야 한다(디모데전서 5:18, 고린도전서 9:13,14)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목사직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장로직에 대한 무용론과 일정 나이가 넘으면 그냥 예의 상 호칭으로서 부르는 교회까지 생긴 것이 현실이다. 그 이유는 목사가 목사답지 못하고, 장로가 장로답지 못함에서 시작되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목사와 장로의 ‘어떠함’에 귀 기울이고, 목사와 장로가 ‘무엇’해야 하는 자들인가를 회복해 가르치는 자로, 치리하는 자로 바르게 섬기고 신앙인과 세상 가운데 본이 되는 직분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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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오/더함공동체교회 목사, 교회2.0목회자운동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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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오의 건강한 작은 교회 이야기(11)

 

직분(office)과 직책(position)

- 건강한 작은 교회의 직분(1) -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의 다스리심을 받는 곳이다. 따라서 교회에서의 직분은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위임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직분자를 세우신 것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함으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다.(에베소서 4:12) 그럼으로 직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봉사하는 자 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직분자는 그리스도의 일꾼’(고린도전서 4:1)이며, 하나님의 일꾼(고린도후서 6:4), 복음의 일꾼(에베소서 3:7), 새 언약의 일꾼(고린도후서 3:6)으로 주인에게 충성하고,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또 직분자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고린도전서 4:1)로서,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골로새서 1:27)를 전파하고 가르쳐 완전한 자로 세우는데(골로새서 1:28)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교회에서 직분3직분 또는 4직분으로 구분한다.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 ‘교사를 주셨다는 에베소서 411절에 대해 앞의 3직분은 교회를 시작하는 초대교회에 임시적으로 있었던 직분으로 지금은 목사교사만이 현존하는 항존직이라고 보았다. 또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신약교회가 시작되면서 교회 내에서 집사장로가 생겼음으로 교회에는 목사’, ‘교사’, ‘장로’, ‘집사’ 4직분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교사는 성경과 신학을 가르치는 직으로 현재의 신학교수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대체로 신학자들은 에베소서 411절의 목사와 교사를 헬라어의 전치사가 목사와 교사에 각각 있지 않고 1개만 있는 것으로 보아 목사 곧 교사로 이해해 교회의 직분은 목사’, ‘장로’, ‘집사’ 3직분이 존재한다는 보편적으로 주장한다. 그럼에도 공교회에서 성경과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수들의 위치를 특별하게 이해하는 측면은 동일하다. 따라서 개 교회에는 3직분이 항존직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용어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 현대 교회 내에는 직분은 그 기능과 역할에 따라 크게 직분’(office)직책 or 직위’(position)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직분’(office)은 성경에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지정한 집사, 장로, 목사로 일종의 기능을 의미하고, ‘직위’(position)는 교회 내 각 조직에서 필요에 따라 규정한 당회장, 담임목사, 위원장, 부장, 팀장, 총무 등의 역할을 의미한다.

 

항존직임시직으로 구분할 수 있겠다. 항존직은 성경이 명시하고 있는 직으로 정상적으로 구성된 교회에 항상 있어야 직분으로 집사, 장로, 목사를 의미하고, 임시직은 아직 구성이 완료되지 않은 교회에 있는 직분으로 사도, 전도사, 서리집사 등을 의미한다. 항존직은 개인 사람에게 부여된 직분이 항존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자체가 항존적이란 것으로, 개인은 해당 직분에 선임되거나 폐해지기도 하며, 직분이 달라질 수도 있다. 항존직이 개인에 대한 종신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가톨릭은 임기가 없이 맡는 직분이나 직위인 종신직으로 교황, 주교 등을 두고 있다.

 

교회 내 직분(office)과 필요에 따라 규정한 직책(position)을 운영방식에 따라 선출직으로 투표 등으로 통해 선출하기도 하고, ‘임명직으로 당회 등에서 임명하기도 한다. 또 각종 직분(office)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를 직분자라고 칭하고 특정 사역을 위한 직책(position)에 부르심을 받은 자를 사역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부에서는 직분을 설명할 때 구약에서의 3직분 즉, 선지자, 제사장, 왕을 가지고 설명한다. 3직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으로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직분을 위임할 때 기능적으로 이 3직분을 모델로 주셨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목사는 선지자직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장로는 왕직으로 다스리며, 집사는 제사장직으로 봉사하는 직분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구약의 선지자, , 제사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그분의 직분인 것은 일정 부분 타당한 면이 있지만 신약에서 목사, 장로, 집사로 기능적으로 전가되었다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왜냐하면 베드로전서 29절에서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라고 했는데, 여기서 너희는 예수 믿는 성도들교회를 의미한다. 믿는 모든 자들이 택한 족속이고, 왕 같은 제사장이고, 거룩한 나라이고, 백성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목사는 선지자, 장로는 왕, 집사는 제사장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오히려 모든 성도들이 차별 없이 선지자로, 왕으로, 제사장으로 역할 한다고 하는 것이 좋겠다.

 

다음 글에서는 각각의 직분 목사’, ‘장로’, ‘집사에 대한 성경적, 교회사적 근거를 제시하고, 특별히 권사’, ‘권찰등과 안수집사’, ‘서리집사등으로 구분하는 것 등의 유례와 바른 이해에 대해서도 설명하겠다.

 

이진오/더함공동체교회 목사, 교회2.0목회자운동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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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오의 건강한 작은 교회 이야기(9)

 

민주적 운영이 신본주의다

- 민주적 운영과 건강한 작은 교회 -

 

 

교회 정치구조는 민주적이어야 한다고 이야기 할 때 가장 많은 반론이 교회는 ‘신본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신본주의와 민주주의 개념에 대한 오해다. 교회가 하나님 중심이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교회는 ‘신본주의’가 맞다. 그런데 하나님께 신본주의를 하려면 인간끼리는 민주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신본주의의 반대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인간 중심 즉, ‘인본주의’다.

 

신본주의/인본주의는 생각 즉, 사상의 영역이다. 반면 ‘민주주의’는 생각과 사상을 구체화한 제도의 영역이다. 권력의 귀속과 행사에 따라 정치 제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한 명이 다스리는 ‘왕정’, 소수 특권층이 다스리는 ‘귀족정’, 다수 시민이 참여하는 ‘민주정’이다. 각 체제가 타락하면 왕정은 ‘폭군정’으로, 귀족정은 ‘과두정’으로, 민주정은 ‘중우정’으로 변질된다.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격적인 존재다. 따라서 모든 인간에게는 인간으로서의 권리(주권)가 부여된다. 성경은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로마서 13:1)라고 말씀하신다. 모든 사람에게 권세(권리)를 주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는 하나님이 주신 ‘양심’을 따라(로마서 13:5)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성된 ‘교회’의 주권은 교인들에게 있다. 물론 주인(머리)은 하나님(예수님)이시다. 그렇다면 당연히 교회의 정치체제는 민주적이어야 한다. 이를 반대하는 사람은 왕정이나 귀족정으로, 목사에 의한 1인(독재)이나 당회에 의한 소수의 권위주의적 체제로 교회를 운영 하자고 하는 것이다. 물론 당회 구조는 대의 민주적 운영의 한 형태이다. 문제는 전체 성도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고 부패하고 타락했다는데 있다.

 

하나님이 직접통치 하시는 ‘신정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신정정치’는 ‘세속정치’의 대조어로서 신이 대리인을 통해 직접통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 사사, 왕 등을 통해 신정정치를 시도 했는데 이런 정치가 가능하려면, 직접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이런 특정인이 존재해야 한다. 제사장, 사사, 왕 등을 통한 하나님의 신정통치는 안타깝게도 인간의 타락으로 실패했다.

 

종교개혁가들의 정신과 우리가 믿는 바 개신교의 신학적 가르침은 ‘성경’ 말씀으로 모든 계시는 완전히 전해졌고, 특정인에게 계시되는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다. 일부 성령의 특별한 역사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말씀을 통해서나, 영감을 통해서 주시더라도, 교회의 직원 선출, 재정 출납, 회의 소집과 진행, 권징, 사무행정 등 정치적/행정적 업무에 일일이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여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적 운영에 대한 오해 중 하나는 모든 것을 ‘다수결’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민주주의 개념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주장이다. 물론 민주주의는 다수결이 중요한 의사결정 수단이다. 그러나 그것은 소수에 대한 고려, 구성원의 다양한 의견에 대한 충분한 수렴을 전제로 하며, 소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에 대한 배려를 전제로 한 최종적 결정 수단이라는 의미다. 그럴 때 소수와 다른 의견자는 다수의 의견을 존중하며 따를 책임도 있다.

 

또 ‘견제와 균형’은 민주적 운영의 핵심요소다. 모든 권력은 부패한다는 전제하에, 적절한 견제와 균형을 이루기 위해 책임과 권한을 분산하고 점검한다. 민주적 운영은 담임목사, 장로, 집사, 총회, 당회, 직원회 등 직분과 회의체를 분산하고 상호 점검토록 해 부패를 예방한다.

 

마지막으로 또 민주적 운영의 핵심적 개념은 ‘의무’다. 주권을 가진 자로서 권리행사뿐 아니라 주권자로서의 공동체에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직분자들이 각 직분에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각 회의체들이 제 기능과 역할을 다하도록 교육 훈련하는 것이 성숙이다. 민주적 운영은 성도들로 하여금 권리와 함께 책임을 다하도록 하는 효율적인 제도이다.

 

몰론, 교회에서의 민주적 운영은 성령의 감동과 개입하심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의 뜻을 쫒아가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려는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 정치구조를 가톨릭의 사제주의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구조에 대응하여 조직했다. 종교개혁의 시점, 지역, 인물, 정신에 따라 발생한 교파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인 정신은 민주적 운영이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정치구조는 크게 보면 세 가지로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감독정치다. 이는 가톨릭적 요소를 사제(목사) 중심의 중앙집권적 형태를 상당히 계승한 것인데, 성공회, 감리교, 루터교 등이 채택하고 있다. 둘째는 장로정치다. 이는 교인들에 의해 선출된 장로들에 의한 대의정치로 장로교, 성결교 등이 채택하고 있다. 셋째는 회중정치다. 이는 교인들이 직접 참여해 운영하는 방식으로 침례교 등이 채택하고 있다.

 

이 세 가지 정치구조는 형태는 다르지만 직분자와 교회 내 회의체들을 통해 민주적으로 운영되도록 구조화 되어 있다. 그래서 각 교단법은 대부분 민주적 운영을 언급하고 있다. 건강한 작은 교회를 지향하려면 이런 개신교회의 정치구조적 가치를 존중하며 제도화해야 한다. 목사 1인이나, 장로 등 소수에 의한 권한과 책임의 독점은 공동체를 지향하는 교회의 건강함과 공동체성을 훼손한다.

 

다음에는 건강한 작은 교회가 지향해야 할 직분의 의미와 역할, 선출 절차 등에 대해 이야기 하겠다.

 

이진오/더함공동체교회 목사, 교회2.0목회자운동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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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오의 건강한 작은 교회 이야기(8)

 

건강한 작은 교회(?) 도대체 몇 명인가?

- 50명에서 200명! -

 

 

“건강한 작은 교회” 논의에서 언제나 질문되는 것이 “그래서 몇 명이 작은 교회인가?” 하는 것이다. 작다는 개념도 작은 교회의 수치도 모두 제 각각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교제함이라고 정의 가운데 가장 원론적인 답변은 구성원들 간에 인격적인 교제가 가능한 숫자이다. 그럼 그 수는 얼마일까? 개인에 따라 편차가 있는데 이를 획일적으로 정할 수 있을까? 학자들은 보통 한 사람이 기억 할 수 있는 사람의 수를 1,500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수는 피상적으로 얼굴이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지 인격적 즉, 관계적일 수 있는 수는 아니다. 나는 청장년 인원이 최소 50명에서 최대 200명까지를 제안하고 싶다.

 

물론 교회는 가정에서 모여도 교회이고, 뜻이 맞는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도 교회를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지역교회로서 공동체를 이루고 유의미한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규모가 필요하다. 나는 그 최소한을 개별 교회가 전임사역자 1명의 생활비를 지급하고, 기본적으로 예배와 모임을 위해 필요한 공간을 이용하고, 내부적 교제와 교육을 시행하며, 외부적으로 뜻있는 곳에 일정한 지원도 할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한다. 물론, 목회자가 생활비를 받지 않거나, 가정이나 공공장소 등 별도의 비용이 필요 없는 공간을 이용하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 그러나 보편적인 지역교회가 모두 이렇게 할 수는 없다.

일러스트/임종수

 

50명을 선정한 이유는 단순하다. 80년대 중반 통계로 평균적으로 대학생 이상 교인들의 1년 평균 헌금 액수는 1백 만 원이었다. 현재는 지역이나 구성원에 따라 150만~200만까지 일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청장년 50명(아이들까지 70명 정도)인 교회의 1년 예산은 5천 만~6천 5백 만 가량이 될 것이다.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1천 만 원 가량이 장소 사용료 및 운영비용으로 사용되고, 전임사역자 1명의 연봉을 2천 만 원 정도로 보고, 내부적 교제와 교육을 위해 1천 5백 만 정도가 사용된다고 보면 1천 만 원 정도를 외부적으로 뜻있는 곳에 기부하거나 사용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청장년 50명 정도면 충분히 건강성을 유지하며 보람 있고 의미 있게 교회를 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최대 숫자는 왜 200명인가? 나는 이 정도 인원이 모든 구성원 간에 인격적 교제가 가능한 최대 인원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적 근거는 정확히 없고, 공동체마다 또 개인마다 편차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영학이나 군대 조직 등 조직의 효율성을 다루는 곳에서는 비전의 공유와 소통, 조직 규모에 따른 효율성과 효과성 극대화 등에 대한 몇 가지 연구와 사례가 있다. 아래 제시된 사례는 《153 교회》(오규훈, 포이에마)에서 여러 부분 인용되었음을 밝힌다.

 

첫째 “던바 수”라는 것이 있다. 옥스퍼드 대학 인류학 교수인 로빈 던바는 인간의 사회성을 서명하기 위해 여러 연구를 했다. 던바 교수는 사람이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최대 수는 150명이라고 발표했다. 이 수를 넘어가면 형식적 관계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둘째 인류학에서 볼 때 씨족 집단은 대략 150명 정도였다. 이 숫자는 부부가 결혼해 4대까지 이르는 대략적 숫자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5천 년 전 근동 지방에 살던 농가 인구도 대략 150명가량이었다고 한다.

 

넷째 ‘Gore’라는 회사의 사례이다. 고어사는 등산복 재질인 “고어텍스”를 만드는 회사이다. 이 회사는 1958년에 설립되었는데, 고어사는 현재 섬유, 의료, 전자, 산업재 4개 분야 사업부를 운영하며 1천 종이 넘는 제품들을 생산하고 있다. 고어사는 포천지 선정 “가장 일하기 좋은 100대 기업”에 12년 연속 선정되었다. 고어사의 경영철학은 다양한 면에서 독특하고 창의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특히 주목 받는 것은 한 공장이나 한 조직이 200명을 넘어서지 않도록 작은 단위로 운영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늘면 공장 규모를 늘리는 게 아니라 새로 공장이나 조직을 만들어 분사했다. 이렇게 한 이유는 200명이 넘어가면 이름이나 얼굴을 모르게 되고, 인격적 관계가 단절되고, 창의력이 상실되며, 협력하고 선의의 경쟁을 하는데 해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영 철학은 적중했다. 고어사는 단지 조직과 공장만 나눈 것이 아니라 의사결정도 완전히 분리해 같은 이름을 사용하지만 완전히 다른 조직, 다른 회사로서 독립적으로 운영한 것이다. 고어사의 경열철학은 4가지로 “인간에 대해 믿음을 갖고(Belief in the individual), “작은 조직에서 오히려 강한 힘이 나온다고 확신하며(Power of small teams)”, “모두 함께 라는 정신으로”(All in the same boat), “장기적 시각으로(Long-term view)” 경영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영 방식은 형태는 조금 다르지만, GM 등 대기업에서도 가져가 소위 “브랜드” 방식으로 브랜드별로 독립된 의사결정과 마케팅 등을 사용하는 것이 보편화되고 있다.

 

다섯째 군부대 중 중대단위다. 군대에서 “중대”는 최종적인 전투 지휘 단위다. 대개의 중대는 120명에서 15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숫자가 소통과 일관성에 가장 좋은 숫자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교회 사례다. 우리가 모범적으로 생각하는 미국 뉴욕의 ‘세이비어 교회’나 《작은 교회가 아름답다》(데이비드 브라이닝, 옥당)에서 소개된 ‘CTK’ 교회 등이 150~200명을 넘지 않는 작은 교회들의 연합으로 사역하고 있다.

 

나는 200명 정도면 지역교회로서 모든 사역적 열매를 맺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한 교회가 더 커지고, 더 많은 일을 하려고 하기보다 한두 가지 선택하고 집중해 감당해야 할 것을 하고, 무엇보다 어떤 일보다 교회 구성원 안에 신앙과 삶의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역은 사람이 한다. 진정한 성장은 숫자적 성장이 아니라 사람의 성숙이다.

이진오/더함공동체교회 목사, 교회2.0목회자운동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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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오의 건강한 작은 교회 이야기(7)

 

“더불어 함께”는 교회의 존재 목적이다

- 세 가지 핵심가치3 “더불어 함께” -

 

 

저는 건강한 작은 교회가 지향해야 할 핵심가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단순함”, “작음”에 이어 세 번째 핵심가치는 “더불어 함께”(with)입니다. “더불어 함께”는 핵심가치 중에 핵심가치입니다. 단순함과 작음을 지향하는 이유도 결국 더불어 함께를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더 나아가 더불어 함께는 하나님의 속성이며, 창조원리이며, 하나님 나라의 통치원리이고,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존재 목적이라 생각합니다.

 

바른 신학이 무엇일까요? 성경의 가르침을 깨닫는 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신앙이 좋고 신앙이 깊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른 신학을 배우고 깨닫는 것은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고, 구원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인 다른 인간과 더불어 함께하는 법과 식을 배우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깨닫는 것 그것이 신학이고 구원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법과 식을 배우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을수록, 신앙이 깊을수록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라는 성령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어지는 것이며, 가족과 교회와 이웃과 더불어 함께함이 넓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을 때는 내 것만 챙기고, 내 생각만 주장하지만 어른이 되어가면서 주변을 돌아보고, 챙기고, 다른 사람의 생각에 귀 기울임이 넓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무엇입니까? 교회는 여러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한마디로 말하자면 “공동체”입니다. “한 몸”이고 “가족”입니다. “우리”입니다. 하나님께 부름 받은 우리 각 사람 각 사람이 모인 우리들이 교회인 것입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 건강한 교회가 된다는 것은 교회인 성도들이 각 삶의 자리인 가정, 직장, 사회 속에서 “더불어 함께”함이 넓고 깊어지는 것이며, 그런 성도들이 교회로 모였을 때 교회는 더 넓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더불어 함께하는 것은 “책임”을 함께 지고 “고통”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이룬 성도들의 신앙과 삶에 관심을 갖고, 짐을 나누어지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이루어가며 필요한 재정과 사역의 짐을 함께 지고 함께 공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비판하고 판단하지만 한 순간도 교회로부터 떨어져 있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주적 교회의 일원으로 부르셨지만 동시에 지역교회의 일원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렇게 부름 받은 지역교회가 “내 교회”이며 “우리교회”입니다. 내 몸이고 내 가족이며 내 공동체입니다. “더불어 함께”라는 우리의 정신은 더 성숙해져야겠습니다. 더불어 함께는 시간을 내고, 함께 참여하고, 재정적 책임을 지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한 교회로 더불어 함께한 “우리”는 이제 그 더불어 함께를 더 넓혀가야 합니다. 우리끼리만 더불어 함께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더 많이 더불어 함께해 가고, 교회는 보냄 받은 지역과 더불어 함께해 갑니다. 지역에 고통 받고 소외된 이웃을 돌아보고, 지역에서 벌어지는 불의에 맞서 공평과 정의를 이루어 갑니다. 또 그리스도인은 교회는 사회적, 시대적 아픔과 더불어 함께하며 불의에 맞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갑니다.

 

건강한 작은 교회는 단순하게 성경을 믿고 단순하게 실천하는 단순함을 지향하고, 있는 바를 족한줄 알고 비움, 나눔, 내려놓음, 낮아짐의 작음을 지향하며, 이를 통해 삶의 자리에서 또 교회적으로 더불어 함께를 지향합니다.

 

이진오/더함공동체교회 목사, 교회2.0목회자운동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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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오의 건강한 작은 교회 이야기(6)

“작음”은 십자가의 정신이다

- 세 가지 핵심가치2 “작음” -

 

건강한 작은 교회가 지향해야 할 핵심가치 “단순함”에 이어 오늘은 “작음”에 대해 이야기 하겠다. 한국교회는 큰 교회를 위한, 큰 교회를 향한, 큰 교회에 의한 거대한 생태계가 형성되어 있다. 신학교는 어떻게 하면 큰 교회를 이루고 큰 교회를 목회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출판사는 큰 교회 목사의 설교, 지향하는 신학적 가치, 사례와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책들을 내고, 교단의 총회와 노회는 큰 교회 목사와 장로들이 모든 임원을 맡아 좌지우지 하고, 각종 연합기구는 큰 교회 목사들을 중심으로 큰 교회의 이익을 대변한다.

그래서 “크지 못한 교회”는 끊임없이 “큰 교회”를 지향한다. 그러나 지금처럼 큰 교회가 좋은 교회, 건강한 교회라고 인식하며 크기만을 강조하면, 어느 순간 교인들은 깨닫게 된다. 크지 못한 교회, 앞으로 클 가능성도 그리 많지 않은 교회에서 고생하며 이 고생을 자녀들에게까지 물러줄 필요 없이 그냥 큰 교회로 옮겨가면 된다는 것을…. 크지 못한 교회가 큰 교회를 모델로 삼는 한 큰 교회를 찾아 수평 이동하는 교인들을 막을 논리도 이유도 없다.

 

 

사실 성경에서의 교회는 “큰 교회”와 “크지 못한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건강한 교회”(성경적인 교회)와 “건강하지 않은 교회”(세속적인 교회)가 존재한다. 세속적인 교회는 세속적 가치를 따라 성경적 가르침을 쫒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왜곡하고 배반한다. 그렇다면 세속적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성공, 번영, 성장이다. “맘몬”으로 대표되는 돈, 명예, 권력이다. 육신의 정욕이며, 안목의 정욕이고, 이생의 자랑이다.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했던 것들이다. 예수님은 이것들을 물리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따라야할 가치를 가르쳐 주셨다.

성경적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내려놓음, 비움, 낮아짐, 작음 등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끊임없이 내려놓고, 비우고, 낮아지고, 작아지는 교회는 의도적으로 “건강한 작은 교회”를 지향한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큰 교회도 건강할 수 있다. 작은 교회라고 다 건강하지 않다고 말한다. 물론 작은 교회가 다 건강하지 않다. 크기는 작지만 “크지 못한 교회”라는 인식 속에 “큰 교회”를 지향하는 교회일 뿐이다. 그런데 큰 교회 중에 건강한 교회가 정말로 존재할까? 큰 교회도 건강할 수 있다는 말 뒤에는 큰 교회를 지향하는 욕망이 숨겨져 있다.

“작다”는 것은 단지 크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본질의 문제이다. 중세시대 번영, 성공, 승리를 추구하던 ‘로마 가톨릭’에 맞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자들은 내려놓은, 비움, 나눔의 정신 즉 “십자가의 정신”으로 새로운 교회를 시작했다. 작음은 바로 십자가를 따르는 지향이며 본질적 가치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돌아보시며 자신을 따르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말씀하셨다. 성공, 승리, 번영을 기대하며 따르던 많은 사람들은 자기 길로 돌아갔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작은 교회”를 지향해야 한다. 크지 못해서 작은 교회가 아니라 건강한 작은 교회를 지향하는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올바른 정신과 가치를 따라 작음 그 자체로 행복하고, 그 자체로 감사한 그런 교회를 지향하는 것이다. 게으르거나 지지리 궁상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의도적으로 작은 교회는 한 교회를 “더 크게”, “더 호화롭게”, “더 영향력 있게” 하기 위해 성장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교회로 “더 넓게” 성장하는 그런 교회이다. 이를 위해 교회는 일정 수에 이르면 “분립/분가”를 통해 나누어야 한다. 교구제, 각종 작은 소그룹을 만들어 대형교회 안에 부목사, 전도사 등 전임사역자를 끝없이 두어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교구가 교회가 되도록 분립하고, 소그룹이 교회가 되도록 분립하는 것이다.

교회는 원래 한 교회가 “더 크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분립/분가를 통해 “더 넓게” 성장해왔다. 그런데 대형교회가 브랜드교회가 등장하면서 이런 좋고 바른 전통을 훼손한 것이다. 작음을 지향할 때 교회의 공동체성도 살고 공교회성도 회복될 것이다.

이진오/더함공동체교회 목사, 교회2.0목회자운동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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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오의 건강한 작은 교회 이야기(5)

“단순함”은 본질에 대한 추구다

- 세 가지 핵심가치1 “단순함” -

 

나는 지난 번 글에서 건강한 작은 교회가 지향해야 할 핵심가치는 “더불어 함께”이며, 이를 우해서 “단순함”과 “작음”을 지향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이제는 순서대로 단순함, 작음, 더불어 함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려고 한다.

현재 한국교회는 세 가지 면에서 복잡하다. 첫째는 교리적으로 복잡하다. 어거스틴은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은 다양성을, 이도저도 아닌 것에는 자유를”이라고 했다. 그런데 현제 한국교회에서는 본질이 아닌 것까지도, 마치 율법을 수백 가지 규칙으로 세분화해 성도들을 옥죄었던 바리새파와 같이 너무 복잡하게 불필요하게 교리를 만들고 적용해 성도들의 신앙과 삶에 다양성과 자유를 제약하고 있다.

둘째는 프로그램적으로 복잡하다. 한국교회에는 많은 프로그램들이 개발되고 보급되고 시험되고 있다. 대개의 프로그램들은 신앙의 본질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성숙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 성장을 위해 필요한 전략과 방법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리스도의 온전함까지 자라감으로 신앙과 삶이 성숙해야할 성도들은 온갖 프로그램을 쫓아가느라, 교회를 중심으로 시간과 역량을 소비하고, 다시 교회 내 재생산을 위해 사용된다.

셋째는 조직적으로 복잡하다. 조직은 사명과 비전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적절해야 한다. 조직을 사람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성장을 위한 효율성 극대화의 목적으로 구성한다면 일반 기업과 다를 바가 없다. 더구나 조직은 복잡하면서 권한은 독점되어 분산되지 않는다면 자유로운 의사표현과 소통을 제한하게 된다. 교회 조직은 개인의 성숙과 진실한 공동체를 이루기에 적절해야 한다.

 

 

단순함(simple)의 사전적인 의미는 “이해하기 쉬운, 소박한, 있는 그대로의, 자유로운, 신중한, 일반적인” 등이다. 즉, 단순하다는 것은 원래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손봉호 교수는 ‘단순한 삶’(simple life)은 그리스도인 개인적으로는 “정직, 검소, 절제, 나눔”을 실천하는 삶이라고 제시한다.(기윤실 설립 취지문 중) 짐 월리스는 “단순한 삶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비참하게 가난한 삶을 살자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와 삶의 태도를 바꾸자는 것”이라고 말한다.(《가치란 무엇인가》, IVP)

우리는 무엇을 더 갖고, 무엇이 되는 것, 소위 “성공과 번영”을 ‘축복’으로 아는 세상에서 어떻게 단순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그것은 ‘단순한 믿음’(simple faith)에서 나온다. 하나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단순하게 믿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욕심을 내려놓고, 주위의 평가와 체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믿기 위해서는 특정인에 의해 해석되어 강제되는 말씀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성경을 읽고, 스스로 성경을 깨달아야 한다. 이를 위해 개인은 기본적으로 성경은 최소 1년에 1독 이상을 해야 한다. 성경을 1독해야 한다는 것은 교조적 의미에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무 뜻도 모르면서 그저 숫자를 채우기 위해, 무슨 주문서 읽듯이 읽는 것을 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내용과 뜻을 생각하며 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교회는 스스로 읽고, 깨닫고, 가르칠 수 있도록 성경공부의 기회를 만들어 진행해야 한다.

단순한 믿음에서 ‘단순한 실천’(simple practice)이 나온다. 信行一致!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단순하게 믿고, 단순하게 실천함을 통해 단순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모여서 사명과 비전을 세우고, 운영 방향을 정하고, 우선순위를 정하면 그 교회는 원래적이고 본질적인 ‘단순한 교회’(simple church)가 된다.

세이비어 교회는 이를 “내적영성과 외적실천”이라고 표현한다. 일을 위한 일, 실천을 위한 실천이 아니라 내적영성의 충만함이 넘쳐서 행해지는 외적인 실천은 단순한 믿음에서 나오는 단순한 실천을 통한 단순한 삶, 이런 내적영성이 교리적, 프로그램적, 조직적으로 단순하면서도 적확하고 분명하게 실천하게 한다.

이진오/더함공동체교회 목사, 교회2.0목회자운동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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