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5)


BWV 244 Matthäus-Passion/

마태 수난곡 No.6 거룩한 낭비


장면이 바뀌고 베다니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 열립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때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이를 보고 분개합니다.


폴 틸리히는 이 여인의 행동을 일컬어 ‘거룩한 낭비(a holy waste)’라 하였습니다. 반면 제자들은 계산에 있어서는 합리적이었고 상황에 있어서는 분석적이었습니다. 좀 멀찍이서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면 제자들의 모습은 현대인들이 표준으로 삼고 있는 상식적이고 균형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기억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한국교회가 과도하게 기적을 구한다고 비판 받지만 솔직히 기적 없는 종교를 종교라고 할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기적, 가장 위대한 기적은 희생입니다. 십자가가 인간에게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기적이었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희생의 기적을 통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몰상식이 믿음으로 포장되고 육신적이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의 노력 없는 획득이 기적으로 취급받는 오늘날의 교회에서 이런 모습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상식과 합리성과 균형은 미덕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교회의 타락에 열을 올리고 상식과 합리성과 균형을 내세우는 가운데 어쩌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가장 아름다운 기적, 가장 위대한 기적인 ‘거룩한 낭비’ 즉 ‘희생’을 잃어가고 있는 것 아닐까요? 저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스스로 합리적이고 균형 있다고 생각하며 비판하기 좋아하는 신앙인들의 실루엣을 봅니다.



마태수난곡 1부 6번~8번

(마태복음 26장 6절~13절)

6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6. Da nun Jesus war zu Bethanien, im Hause Simonis, des Aussätzigen, 7. trat zu ihm ein Weib, das hatte ein Glas mit köstlichem Wasser, und goß es auf sein Haupt, da er zu Tische saß. 8. Da das seine Jünger sahen, wurden sie unwillig und sprachen:

6.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7

대 사

제자들

8. Wozu dient dieser Unrat! 9. Dieses Wasser hätte mögen teuer verkauft und den Armen gegeben werden.

8.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8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10. Da das Jesus merkete, sprach er zu ihnen:

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8

대사

예수

10. Was bekümmert ihr das Weib! Sie hat ein gut Werk an mir getan. 11. Ihr habet allezeit Armen bei euch, mich aber habt ihr nicht allezeit. 12. Daß sie dies Wasser hat auf meinen Leib gegossen, hat sie getan, daß man mich begraben wird..13. Wahrlich ,ich sage euch: Wo dies Evangelium geprediget wird in der ganzen Welt, da wird man auch sagen zu ihrem Gedächtnis, was sie getan hat.

10.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함께 들어보실 부분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제자들의 대사를 담고 있는 합창곡인 7번곡입니다.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라는 가사인데 마태 수난곡에 쓰인 1545년 루터 성경은 제자들의 대사를 조금 더 과격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마 개혁의 선상에 있었던 루터가 이 부분에 감정이입을 과하게 한 것 같습니다.

‘Wozu dient dieser Unrat!’은 번역하면 ‘이 쓰레기를 이제 어디다 쓴단 말인가?’입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귀한 향유는 소비된 순간 쓰레기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라고 하는 말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라 모든 존재를 돈으로 환산하는 그들의 본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지만 이 향유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쓰임 받은 향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이 이야기가 기억되는 곳에서 여전히 그 향기를 퍼트리고 있습니다.


음악적으로 볼 때 바흐는 매우 기발한 방법으로 이 부분을 표현합니다. 먼저 앞서 언급한 Wozu dient dieser Unrat!’라는 가사의 합창은 에반겔리스트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한꺼번에 갑자기 튀어나오는데 이는 제자들의 흥분되고 분개하는 감정을 표현합니다. 이어지는 제자들의 대사 ‘Dieses Wasser hätte mögen teuer verkauft und den Armen gegeben werden /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는 한 파트씩 시간차를 두고 등장하는데 마치 베버(Carl Maria von Weber)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Der Freischutz)’의 1막에서 사람들이 주인공을 조롱하는 장면처럼 ‘이것(향유)’을 가리키며 손가락질을 하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대부분의 지휘자들은 이 부분을 부드럽게 넘기지만 칼 리히터는 그의 음반에서 바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여 이 부분을 한 음 한 음 끊어서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치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삿대질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어서 예수의 대사가 나옵니다. 26장 10절부터 13절입니다. 두 번째 등장이긴 하지만 첫 번째 대사(2절)가 너무 짧았기에 예수의 본격적인 등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일전에 마태수난곡 음반을 선택할 때 지휘자와 에반겔리스트 그리고 예수역할을 누가 부르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 면에서 칼 리히터의 첫 음반의 아쉬움을 굳이 꼽으라면 예수역할을 들 수 있겠습니다. 성악가의 역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소리만으로 따지면 칼 리히터 음반에서 예수를 노래한 키스 엥겐(Kieth Engen)이 가장 뛰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듣기에는 키스 엥겐의 노래는 너무 무겁게 들리고 고난 받는 어린 양 예수가 아니라 완벽한 예수를 그려 내는 것 같습니다. 물론 녹음 당시의 보편적인 예수상이 반영되었고 원전연주로 녹음한 다른 음반과 달리 반음 더 높게 불러야 했기에 더 부담스럽게 들린 면도 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입니다. 청년 예수는 저음이지만 부드러운 목소리일 것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로써 아버지의 뜻 앞에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또한 완전한 인간으로서 그가 감당해야할 십자가의 잔 앞에서 흔들리는 목소리였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레온하르트 1989년 음반에서 막스 반 에그몬트(Max Van Egmond)는 가장 이상적인 예수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장면에서도 키스 엥겐의 예수는 덩치가 크고 남성다운 완벽한 모습의 예수께서 제자들을 혼내는 목소리로 들립니다. 반면 반 에그몬트의 노래는 여인의 정성과 희생에 감동하는 마음과 자신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는 떨림 그리고 제자들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이 뒤섞인 청년 예수의 목소리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https://youtu.be/zhzNL7LBkQc



저만의 상상이긴 하지만 가끔 마태 수난곡 녹음의 드림팀을 구성해보곤 합니다. 칼 리히터가 원전 연주로 지휘를 하고 에반겔리스트는 프레가르디엔과 헤플리거 사이에서 잠시 고민한 후에 헤플리거를 선택할 것 같습니다. 예수 역할은 당연히 막스 반 에그몬트이며 소프라노는 바바라라는 이름의 두 명의 성악가를 다 부르고 싶습니다. 바바라 슐릭과 바바라 보니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마태 수난곡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아인 ‘Erbarme dich mein Gott’은 캐슬린 페리어의 목소리여만 합니다.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집니다. 마태 수난곡과 함께 복된 사순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낮은자리 믿음교회 담임으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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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5)


BWV 244 Matthäus-Passion

마태 수난곡 No. 5 에반겔리스트의 아니리


장대한 코랄 판타지아 합창이 끝나면 잠시 적막이 흐른 후 예수 수난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오늘 감상하실 부분은 마태 수난곡 2번부터 5번곡이며 이에 해당하는 마태복음 본문은 26장 1절부터 5절입니다. 이 부분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라는 예수의 말씀에 반응하는 코멘트, 성도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코랄입니다. 바로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입니다.


‘오, 사랑의 예수시여…

대체 무슨 죄를,

어떤 잘못을 범하셨단 말입니까?’


장면이 바뀌고 가야바의 관정에 모인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는 모습은 합창으로 표현됩니다.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성경에서 ‘민란’에 해당하는 독일어 단어는 ‘Aufruhr’인데 ‘격동, 혼란’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사람들의 대사를 표현하는 여기저기에서 떠들어 대는 듯한 합창을 들어보면 정작 혼란스럽고 소요하는 것은 바로 예수를 죽이려 하는 그들의 마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수난곡 1부 2번~5번

내러티브

EVANGELIST

1. Da Jesus diese Rede vollendet hatte, sprach er zu seinen Jüngern: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대 사

JESUS

2. Ihr wisset, daß nach zween Tagen Ostern wird, und des Menschen Sohn wird überantwortet werden, daß er gekreuziget werde.

2.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코멘트

CHORAL

Herzliebster Jesu, was hast du verbrochen,

Daß man ein solch scharf Urteil hat gesprochen! Was ist die Schuld, in was für Missetaten bist du geraten!

오, 사랑의 예수시여 당신이 무슨 죄를 지셨기에 그토록 엄한 판결을 받으시나이까? 대체 무슨 죄를, 어떤 잘못을 범하셨단 말입니까?

내러티브

EVANGELIST

3. Da versammleten sich die Hohenpriester und Schriftgelehrten und die Ältesten im Volk in den Palast des Hohenpriesters, der da hieß Kaiphas. 4. Und hielten Rat, wie sie Jesum mit Listen griffen und töteten. 5. Sie sprachen aber:

3.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가야바라는 대제사장의 아전에 모여 4.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5. 말하기를:

대 사

CHOR

5. Ja nicht auf das Fest, auf daß nicht ein Aufruhr werde im Volk.

5.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에반겔리스트의 아니리

서곡의 역할을 하는 코랄 판타지아에 이어 이야기의 문을 여는 것은 에반겔리스트입니다. 에반겔리스트의 가사는 루터판 독일어 성경 마태복음 본문의 내러티브의 가사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사실 복음서를 성경으로 읽을 때 우리는 에반겔리스트의 내러티브 부분을 간과하기가 쉽습니다. 보석과 같은 예수의 말씀을 하나로 연결하는 줄이기에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 복음서의 내러티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복음서가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도마복음과 같은 예수 어록의 형태에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하나의 이야기로 발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롯이 내러티브의 역할 때문입니다. 특히 마태복음 26장 이후는 단편적인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매우 극적인 전개가 시간 순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내러티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어쩌면 복음서가 예수 어록의 형태에서 오늘날의 내러티브와 대사로 구성된 복음서로 발전하게 된 것은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이라는 드라마틱한 이야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수난-십자가-부활이라는 드라마틱하고 긴박한 이야기를 전하자니 내러티브가 필요했고 전체적인 통일성을 위해 복음서 전체에 내러티브가 삽입되었다고 말입니다. 실재적으로 복음서의 초기 형태인 도마복음에는 십자가와 부활사건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내러티브의 역할은 복음서 자체에서 보다 마태 수난곡에서 조금 더 부각됩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마태 수난곡은 우리의 판소리와 아주 닮아 있습니다. 판소리의 구성요소가 창(소리) 아니리(사설, 말) 발림(혹은 너름새, 몸짓)인데 에반겔리스트의 내러티브는 이 중 아니리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지요. 판소리를 실재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리 듯이 수난곡 연주에서 가장 중요하고 힘든 역할이 에반겔리스트입니다.


에반겔리스트를 위한 테너, 에른스트 헤플리거

판소리의 아니리에 해당하는 에반겔리스트 역할은 선율적인 아름다움은 없지만 곡의 시종을 이끌어야 하며 너무 감정에 몰입되어서도 안 되며 그렇다고 너무 건조하거나 가창에만 신경 써서도 안 되는 역할입니다. 노래하기도 매우 까다롭고 가사를 완전히 이해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영적 전달자의 역할까지 수행해야 합니다. 테너가수 한 명이 지속적으로 등장하면서 이 중요한 부분을 전부 다 감당해야 한다니 에반겔리스트의 중요성을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수난곡에서는 지휘자도 중요하지만 에반겔리스트가 누구인가에 따라 전체적인 곡 해석과 분위기 그리고 몰입도가 달라집니다.


일전에 설명 드린 대로 칼 리히터는 1958년, 1971년, 그리고 1979년 총 세 번에 거쳐서 마태 수난곡 음반을 남겼는데 첫 번째로 녹음된 1958년 음반이 가장 명연주로 손꼽히는 이유는 전쟁 직후라는 시대적 상황과 더불어 에반겔리스트를 노래한 에른스트 헤플리거 때문입니다.


헤플리거의 노래에는 그 누구와도 비할 수 없는 깊은 영성과 떨림이 담겨 있습니다. 마치, 그의 에반겔리스트는 오래된 어머니의 성경책으로 성경을 읽는 느낌이 듭니다.



에른스트 헤플리거(Ernst Haefliger ,1919~2007)는 스위스 테너입니다. 그는 저에게 성악가는 소리로만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음사이의 여백을 느끼며 심지어 침묵으로도 노래할 수 있어야 함을 깨닫게 해 준 진정한 예술가이며 리트와 오라토리오뿐만 아니라 모차르트의 오페라에 정통한 대가입니다. 그의 노래에는 숨결이 담겨 있습니다. 독일을 대표하는 테너인 슈라이어나 분덜리히처럼 영롱한 음색은 아니지만 좋은 발성에서 나오는 풍부함과 자연이 만들어 낸 듯 엷은 스크래치가 서려있는 음색은 깊은 영성과 떨림 그리고 애잔함을 품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음악적 해석은 매우 뛰어납니다. 그가 부르는 슈만의 ‘Der Nussbaum Op 25 N3(호두나무)’을 가사와 함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https://youtu.be/E2KBpTbJxtU


그가 부르는 리트(독일가곡)를 듣노라면 이것이 시를 읊는 것인지 노래를 하는 것인지 혼동될 정도로 진정 시와 음악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예술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비록 스위스인이지만 그의 노래는 역사상 누구보다 가장 독일적인 테너의 연주를 들려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인들이 사랑하는 덕목인 자연주의, 꾸밈없는 소박함, 경건함, 진실함이 그의 노래에 스며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데뷔 무대는 바흐의 요한수난곡의 에반겔리스트였는데 그 인연으로 말미암아서인지 헤플리거는 평생에 걸쳐서 바흐 음악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56년 마태수난곡 녹음을 진행하던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 칸토르인 귄터 라민이 갑자기 사망했습니다. 토마스 칸토르라는 직책은 바흐의 적통 후계자로서 지휘는 물론이고 여러 악기와 작곡에도 정통해야 하는 개신교 음악가에 있어서 최고의 명예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그 프로젝트에 에반겔리스트로 참여했던 에른스트 헤플리거는 귄터 라민의 후계자로 칼 리히터를 꼽았고 비록 칼 리히터는 장고 끝에 뮌헨에서의 교수직과 자신이 만든 합창단을 위해 그 제안을 거절했지만 마태수난곡 녹음 프로젝트는 승계하여 결국 58년 음반이라는 명반을 낳게 된 것입니다. 결국 58년 음반은 그 프로젝트를 완성해 내고 최고의 에반겔리스트로 참여한 헤플리거에게 숨은 공로가 있습니다.


헤플리거 노래의 명장면들

헤플리거 노래의 진수를 만나기 위해서는 리히터음반 58년 녹음의 겟세마네 장면을 들어보셔야 합니다. ‘Da kam Jesus mit ihnen zu einem Hofe, der hieß Gethsemane, und sprach zu seinen Jüngern /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로 시작하는 부분입니다. 예수께서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라고 부탁하신 후 에반겔리스트는 ‘Und nahm zu sich Petrum und die zween Söhne Zebedäi, und fing an zu trauern und zu zagen. Da sprach Jesus zu ihnen /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때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라고 노래합니다.


이 부분에서 ‘und fing an zu trauern und zu zagen / 고민하고 슬퍼하시기 시작하사’ 를 주목해 들어 보십시오. 물론 그렇게 작곡한 바흐에게 일차적인 찬사가 돌아가야 할 것이지만 헤플리거가 부르는 ‘고민하다’이라는 의미의 ‘trauern'과 ’슬퍼하다‘라는 의미의 ’zagen'이라는 단어에는 주님의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합니다. 임방울의 ‘쑥대머리 구신형용’에 버금가는 성악 예술의 백미가 바로 이 부분에 담겨 있습니다.https://youtu.be/3icLbxogeV4 (49분47초에 시작)


헤플리거는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와 더불어 음악을 위해 자기 자신마저 내려놓을 줄 아는 성악가입니다. 성악가로서 가장 높은 경지라고 할 수 있지요. 앞서 제가 그의 노래에는 여백이 있다고 말씀 드렸는데 관객을 바라보며 자기의 목소리로 수많은 관객의 시선을 압도해야만 하고 주어진 시간을 자신의 소리로 채워야 하는 성악가에게 자기 자신을 비우는 일 그리고 여백을 느끼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의 노래를 듣노라면 어느 새 극과 음악마저 넘어 성경 속으로 들어 가 버리곤 합니다. 이 장면에 관한 수많은 설교를 듣고 겟세마네의 기도를 담은 많은 그림을 보았지만 58년 녹음의 이 부분만큼의 감동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이어지는 테너 솔로의 ‘기도’와 합창의 ‘코멘트’로 이루어진 ‘O Schmerz! Hier zittert das gequälte Herz! ...Ich will bei meinem Jesu wachen’은 마태수난곡에서 가장 극적으로 아름다운 부분 중의 하나입니다.


또 하나, 헤플리거의 노래에서 도무지 빼뜨릴 수 없는 부분이 있어 미리 소개드립니다. 바로 동일한 음반에서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장면입니다. ‘Und ging heraus, und weinete bitterlich /그리고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하니라’ 이 부분을 헤플리거와 같이 표현할 수 있는 테너가 과연 또 다시 있을까요? 베드로의 찢어지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 부분은 마태 수난곡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아인 ‘Erbarme dich Mein Gott um meiner Zähren willen ’바로 앞에 나옵니다. 즉 이 유명한 알토 아리아는 베드로의 통곡에 대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이올린 선율이 너무나도 애달프고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고 이어서 알토가 ‘주여 나의 눈물을 보아서라도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바이올린 선율과 교차하며 노래합니다. 알토 성악가 헤르타 퇴퍼 (Hertha Töpper) 의 노래도 흠잡을 데 없지만 바이올린의 연주도 일품입니다. 우리의 죄를 눈물로 다 토해 내고 주님의 사랑으로 정화되는 느낌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이 곡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바이올린 솔로 곡으로 편곡되어 연주되기도 하고 독창회의 프로그램의 단골 메뉴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마태수난곡의 일부로서 베드로의 통곡에 이어지는 ‘기도’로서 이 노래를 들을 때 가장 감동이 됩니다. https://youtu.be/qP3RF6KrzII (38분 40초에 시작)


때로 마태 수난곡의 에반겔리스트가 옛 시절 변사와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변사의 톤을 잠시 빌려서 말씀드리자면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노래와 이야기’가 바로 58년 음반의 헤플리거의 노래에 담겨 있습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낮은자리 믿음교회 담임으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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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4)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4 다시 없을 오스카들의 노래


코랄 판타지아


첫 번째 합창곡은 오페라의 서곡과 같은 역할을 해 주는 코랄 판타지아입니다. 바흐에게 있어 판타지아는 형식에 구애 없이 작곡가의 음악적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쳐냈다는 의미입니다. 서곡은 연주자로부터 청중까지 그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음악으로 모아주는 역할을 하며 전체 음악의 내용이나 주제를 함축하고 있지요. 특히 이 곡은 두 개의 4성부 합창과 리피에노 합창의 코랄까지 총 세 개의 합창이 노래를 주고받으며 어우러지는 큰 스케일의 곡입니다. 이 세 개의 합창단은 저마다의 역할이 있는데 이를 구별할 수 있어야 이 곡을 제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합창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따르며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예루살렘의 딸들’(누가복음 23:28)입니다. 두 번째 합창은 극 속의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아직 십자가와 주님이 당하는 수난을 영적으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채 구경꾼처럼 군중의 틈바구니에 섞여 있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도 그 중에 하나였겠지요. 마지막으로 코랄을 부르는 리피에노 합창은 극 밖에서 이 모든 상황에 정서적, 신앙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성도들로 이 곡에서 코멘트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지금 이 음악을 듣고 있는 청중들이라고도 할 수 있고 판소리로 치면 감정적, 정서적, 영적 반응을 하고 맞장구를 치는 ‘추임새’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리히터의 1971년 영상을 보시면 세 개의 합창단이 나뉘어 배치되어 있는 모습을 확인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 중 뒤쪽에 있는 소년합창단(뮌헨 소년합창단)이 세 번째 합창단입니다. https://youtu.be/dfLNM7tlSF8




전주와 함께 펼쳐지는 장면은 ‘십자가의 길(Via Dolorosa)’을 연상케 합니다. 먼저 오보에와 플롯이 함께 슬픔과 고통 그리고 비장함이 뒤범벅 된 선율을 연주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멈춤 없이 계속 되는 느리고 무거운 12/8 박자의 리듬은 이 세상 죄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는 고난의 발걸음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발걸음은 2박자 계통으로 표현되는데 12/8 박자는 3박자 계통으로서 절뚝거리듯 힘겨워하시면서도 사랑과 인내로 끝까지 감내하시는 주님의 발걸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칼 리히터의 템포가 대부분의 다른 지휘자들이 선택하고 있는 템포보다 확연히 느린 이유와 이 곡의 템포를 너무 빠르게 잡는 것이 바흐의 의도를 거스르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1971년 녹음된 리히터의 영상판은 1958년의 녹음보다 더 느리지요. 원래 모든 음악적 템포는 빨라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지금 골고다를 향할수록 점점 지쳐가고 있습니다. 1971년의 영상에서 이 곡을 보십시오. 지휘를 위한 최소의 동작만을 가지고 템포를 지켜나가며 끝까지 주님의 십자가의 길에 집중하는 리히터의 지휘는 실로 경탄스럽습니다. 멋진 폼으로 지휘하는 지휘자가 유능한 것이 아닙니다. 지휘자는 무용가가 아니니까요. 그러나 실제로 칼 리히터만큼 멋진 폼을 가진 지휘자도 또한 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1971년 영상이 11분에 이르고 1958년 녹음은 10분정도이며 리히터 이후 대부분의 지휘자들은 8분에서 9분정도에 첫 번째 합창곡을 마무리합니다. 음악적으로 굉장히 커다란 차이지요.


소리마저 뛰어넘는 음악


바흐의 교회음악은 단지 예배를 위한 부수음악이 아니었고 기본적으로 언어적 설교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거기에 음악이 덧붙여짐으로 설교에 음악의 날개를 달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소리마저 뛰어 넘는, 인간의 모든 감각을 다 동원한 총체적인 설교가 됩니다. 이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더 해 드리겠습니다. 


이 첫 합창곡의 가사를 보십시오. 예루살렘의 딸들은 계속 ‘보라’라고 외칩니다. 보는 것은 시각적 감각입니다. 아마 당시의 청중들은 이 음악을 들으며 알자스 어느 작은 마을에 있다던 그 유명한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를 떠올렸을지도 모릅니다. 바흐 음악에서는 이처럼 시각적인 감각이 매우 중요하며 때로 음악을 뛰어 넘어 예배당에 걸려 있는 성화와 같은 시각적 역할을 해 주고 있습니다. 마태 수난곡 전체가 이젠하임 제단화 같이 예수의 수난 이야기를 펼쳐 놓은 것이라면 이 합창곡은 그뤼네발트의 그림 속에서 십자가의 예수를 가리키고 있는 세례요한의 손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바흐의 교회음악은 예배의 한 부분이 아니라 시각적인 감각까지 아우르는 총체적 설교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 (1511∼1515)부분. 운터린덴 미술관 소장



다시 첫 번째 합창곡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은 극중의 성도들에게 신랑을, 어린 양을, 그의 인내를, 우리의 죄를 바라보라고 독려합니다. 처음에 두 번째 합창단은 십자가와 주님의 수난의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계속하여 ‘Wen? Wie? Was? Wohin?’이라고 묻는 것이지요. 하지만 곡 후반에 그들 모두는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으면서 사랑과 은총으로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만나고 고백하게 됩니다. 바로 이 구절이 마태 수난곡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적 메시지입니다.


Sehet ihn aus Lieb und Huld Holz zum Kreuze selber tragen.

그를 보라, 사랑과 은총으로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그 분을.


다시없을 오스카들의 노래


합창곡 30마디에서 리피에노 소프라노 파트는 당시 루터교회에서 성 금요일에 회중 찬송으로 불렸던 ‘O Lamm Gottes unschuldig/오 죄 없으신 어린양이’라는 코랄을 유니즌으로 부릅니다. 이 곡은 당시의 회중들이 다 알고 있는 곡이었기에 아마 이 부분에서 성도들은 추임새를 넣듯 나지막이 이 선율을 따라 불렀을 것입니다. 칼리히터의 1958년 녹음에서 이 부분을 부르는 뮌헨 어린이 합창의 노래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부분을 듣고 ‘경악’이라는 단어가 긍정적인 감정적 반응에서도 쓰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분명 처절한 절규의 목소리인데도 흐트러짐 없이 놀라운 절제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로테스크함과 순수함이, 공포와 위로가 뒤섞여 뭐라 할 수 없는 이 감정이 너무나 당황스러웠습니다. https://youtu.be/3icLbxogeV4


하지만 이 음반이 녹음된 1958년의 뮌헨을 생각하니 어느 정도 이해가 갔습니다. 녹음 연도가 1958년이고 소년합창단은 변성기 후에는 활동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연주에서 노래하는 소년들은 대부분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모국의 패망을 전후하여 태어났을 것입니다. 전쟁의 아픔과 비극 그리고 재건을 위한 고된 시절은 이 소년들의 보드라운 어린 마음에 이미 굳은살처럼 고스란히 배어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뮌헨은 히틀러의 정치적 고향으로 전쟁의 참상이 더욱 심했던 곳입니다. 바로 이러한 시대적, 지역적 조건이 이러한 노래를 끌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한 소년의 이름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오스카’입니다. 이 소년의 이름만 들어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귄터 그라스의 소설과 동명의 영화 ‘양철북(Die Blechtrommel, 1979)’을 말씀드리면 기억하는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가장 비극적이고 암울했던 시기에 스스로 사다리에서 뛰어 내림으로 육체적 성장을 멈추어 버린 소년 오스카… 뮌헨 합창단 소년들의 노랫소리는 그 참상을 겪어 내라고 일방적으로 세상에 내던져졌던 오스카들의 노랫소리, 바로 오스카들이 두드리는 양철북 소리였습니다.


어쩌면 오스카는 스스로 육체적 성장을 멈추어 버린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감당키 어려운 비극적 상황을 다 받아 내며 ‘애어른’이 되어야만 했던 영혼들을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스카는 특별한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정작 전쟁에 책임이 있었던 이기주의와 위선에 찌든 평범한 소시민들의 사생아였습니다. 평화를 깨뜨리고 전쟁과 파괴를 일으키는 것은 한 사람의 악마도 아니고 집단적 광기도 아닙니다. 평범한 소시민들의 개인주의와 이기심의 악마적 연대가 증오를 낳고 평화를 깨뜨리고 그 마성이 히틀러라는 얼굴마담 한 사람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모습은 우리의 죄성 안에 보편적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현실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독일인들은 그 참혹한 전쟁 후에 마태 수난곡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동족간의 전쟁이라는 더 잔인한 아픔을 그저 덮어놓은 채 새마을 노래와 군가와 유행가를 불렀습니다. 독일인들의 죄와 아픔은 계속 용서되어지며 치유되고 있는 반면 우리의 죄와 아픔은 계속 변이되고 있으며 곪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도 이제 주님의 수난곡을 함께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우리의 죄악과 아픔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마태 수난곡 첫 번째 합창곡의 가사처럼 ‘ Erbarm dich unser o Jesu!/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오 예수여라고 노래하며 진정 회개하고 울부짖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입니다. 진정한 용서와 치유 그리고 평화는 십자가에 있습니다. 우리의 노래는 남을 향한 분노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향한 절규가 되어야 합니다. 그 노랫소리는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부르는 노래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우선 우리는 이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양철북을 마구 흔들어 쳐야 합니다. 그리고 모두 함께 주님의 수난곡을 불러야 합니다. 또한 주님의 십자가 길의 구경꾼으로 남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따라 나의 십자가, 우리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명음반 명연주, 1958년 리히터


잠시 무거운 주제로 흘러버렸습니다만 리히터의 1958년 음반의 위대함은 시대적인 배경과 ‘오스카들의 양철북소리와도 같은’ 뮌헨 어린이 합창단이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1971년 영상보다 1958년 음반을 더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971년 영상에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 되어 들어 있습니다. 무대 구성도 파격적이고 음향과 카메라 워크가 흠 잡을 데 없습니다. 솔리스트들도 당대 최고의 성악가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독일인들은 어느새 전쟁의 참상에서 벗어나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고 있었습니다. 연주자들도 전반적으로 자신감과 화려함에 익숙해 진 듯한 느낌이 듭니다.


수난곡에서 그러한 자신감은 상당히 불편하게 들립니다. 죄인으로서, 고통을 당하는 이로서의 깊은 절규가 아니라 음악적 완벽함을 추구하고 보여주고자 하는 모습이 우리가 수난곡을 부르고 듣는 근본적인 이유와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작년 성탄절 예배를 시작으로 낮은자리 믿음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비록 의정부 가난한 동네 지하에 있는 예배당에서 열 명도 안 되는 성도들이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매주 새롭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크게 느껴져 ‘오늘은 울지 말아야지’라고 매주 다짐하며 강단에 서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이렇듯 낮은자리와 고난과 고통 속에서 비로소 빛나는 것인가 봅니다.


1958년 음반이 명반인 또 다른 이유는 에반겔리스트를 맡은 에른스트 헤플리거 때문입니다. 리히터의 1971년 영상과 1979년 음반의 에반겔리스트는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독일의 거장 페터 슈라이어입니다. 아마 대중에게 알려진 정도로만 생각하면 페터 슈라이어의 에반겔리스트가 더 매력적일 것 같지만 헤플리거의 노래에는 그 누구와도 비할 수 없는 깊은 영성과 감동이 담겨 있습니다. 헤플리거는 조만간 깊이 만나게 되실 것입니다.


이렇듯 1958년 음반이 불멸의 명반이 된 이유는 시대적 참상과 연관이 깊습니다. 또한 함께 부르는 회개와 구원의 절규의 노래를 잿더미 위에서 꽃피워 낸 음악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세계대전과 같은 비극적인 역사가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을 소망하는 마음을 섞어 말하자면, 리히터의 1958년 마태 수난곡에 필적하는 연주는 인류 역사상 결코 다시 없을 것입니다.


수난곡과 함께 걷는 십자가의 길


이 글을 쓰기 위해 몇 주간 계속 마태 수난곡을 듣었고 참 많이도 울었습니다. 제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어느 날 강원도 우리 집으로 소포가 왔습니다. 어머니의 고향 섬에서 온 마늘 몇 첩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마늘을 까는 동안 마늘이 참 맵다고 굳이 얘기하시면서 연신 눈물을 닦아내셨습니다. 그 마늘은 어머니의 바로 윗 언니, 저의 이모의 사망소식과 함께 전해져 온 것이었습니다. 강원도 화천 산골에서 전라남도 신안의 섬까지 가실 수 없었던 어머니는 그렇게 마늘 핑계를 대면서 아들 몰래 울고 계셨던 것입니다.


마태 수난곡 핑계를 대고 있었지만 사실 지금 이 나라의 현실과 아직도 그 한을 풀지 못한 채 세월호에 갇혀 있는 아이들 생각이 자주 났습니다. 때로는 뜬금없이 가슴 깊은 곳에서 절규가 밀려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자격 없는 저는 구레네 시몬 마냥 얼떨결에 십자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곧 사순절이 다가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의 사순절은 우리 모두가 바흐의 마태 수난곡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으면 좋겠습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낮은자리 믿음교회 담임으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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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3)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3 네 명의 화자(話者)와 음반소개


내러티브

지난 시간에는 대본작가 피칸더와 더불어 마태 수난곡의 네 명의 화자(話者)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보았습니다. ‘내러티브, 대사, 코멘트, 기도’라는 화자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오늘은 조금 더 깊은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내러티브’와 ‘대사’는 마태복음의 본문 그대로의 내용입니다. 예를 들면 내러티브는 마태복음 26장 1절의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와 같은 부분으로서 에반겔리스트(복음사가)가 담당합니다. 바흐의 수난곡에서 에반겔리스트는 테너가 담당하고 있는데 선율적인 노래를 담당하지는 않지만 음악의 전체 분위기와 곡의 시종을 이끄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성서 자체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판소리에서의 아니리나 무성영화에서의 변사(辯士)를 떠올리시면 그 중요함을 쉽게 공감하실 것입니다.


대사

대사는 복음서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직접화법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마태 수난곡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대사는 26장 2절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는 주님의 대사이며 베이스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중요한 역할이 아닐 수 없겠지요. 그래서 제가 마태 수난곡 연주를 선택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지휘자-에반겔리스트-예수를 누가 맡고 있느냐입니다. 그 밖에 성서의 등장인물인 베드로, 유다, 가야바, 빌라도 등의 대사도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남성 저음 파트인데 자주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합창 단원이나 솔로 한 사람이 모든 배역을 소화하기도합니다. 여성의 대사로는 아시다시피 베드로를 알아 본 두 여종과 빌라도의 아내가 있습니다.


대사중에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 여러 사람들이 함께하는 부분들입니다. 예를 들면 26장 5절에서 가야바의 관정에 모인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들이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라고 말하는 장면이나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 분개하고 있는 제자들의 대사인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 등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대사이기 때문에 당연히 합창으로 표현되는데 여러 성부로 구성된 합창의 장점을 살려 현장의 분위기를 생동감 있게 전달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음악적으로 매우 다채롭게 표현됩니다. 그들은 주로 한 목소리로 대변되기도 하지만 때로 여러 사람들이 시끄럽게 자기 목소리를 내기도하는데 바흐는 이런 상황들을 다 구분하여 합창으로 섬세하게 표현합니다.


마태 수난곡 음반을 처음 들으시면 어떤 음반의 경우 소년합창단의 소리가 들려 놀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성인 합창단과 달리 안정적인 연주에 있어서는 한계가 있지만 이는 바흐시대의 전통을 고려한 소위 ‘원전연주(Historically informed performance-HIP)’를 따른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이유 때문에 소년합창단의 연주를 좋아하는데 그들의 노래가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영적인 메시지를 주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어린 소년들을 포함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도 예외 없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코멘트와 기도

‘코멘트와 기도’는 성서 밖에서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코멘트’는 주님의 수난 이야기를 접한 신자가 마음속으로 품었을 법한 내적 정서적, 신앙적 반응인데 주로 바흐 당시의 회중 복음성가라고 할 수 있는 코랄합창이 이 역할을 담당합니다. 마지막으로 ‘기도’는 말 그대로 코멘트의 반응을 응축시켜 외적 고백과 결단으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주로 솔로 아리아로 표현되며 마태수난곡에서는 알토 아리아 ‘내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Erbarme dich mein Gott’가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기도’의 노래입니다. 이 곡은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한 후에 나오는 노래이지요.


제가 만든 아래의 표를 통해 마태 수난곡의 시작인 합창곡 ‘오라 너희 딸들아(Kommt, ihr Töchter)’ 부터 6번곡인 알토 아리아 ‘회개와 뉘우침에(Buß und Reu)’에서 마태 수난곡의 네 명의 화자가 어떻게 역할을 나누고 있는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틀을 가지고 마태 수난곡을 감상하시면 아마 3시간에 육박하는 이 대작을 보다 쉽게 소화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음악 속으로

이제 마태 수난곡을 직접 들어보시면 어떨까요? 첫 번째 감상은 위의 표에 있는 네 명의 화자의 역할에 주의를 기울이시면서 가볍게 들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한 번에 마태 수난곡 전곡을 다 들으시려는 것은 새해 벽두에 창세기부터 성경 통독을 다짐하는 것과 같고 작심삼일로 끝날 확률이 높습니다. 마태복음 26장을 펴 놓으시고 우연히 들른 장터에서 모여 앉아 판소리를 듣는 것처럼 편안하게 들으시기 바랍니다. 섬세한 내용들은 성서일과를 따르듯이 제가 소개하는 부분들만 들어 나가셔도 충분하실 것입니다. 되도록이면 음반을 구입하시기 바랍니다. 인터넷 온라인으로 쉽게 들을 수 있지만 마태 수난곡 음반 하나 정도는 소장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또한 음반 케이스 속에 첨부된 해설과 대본(리브렛토)은 그저 덤이라고 생각하기에 매우 유용한 아이템이 되어줄 것입니다.


굳이 음반 구입을 원하지 않으시는 분들이나 비교대상으로 듣고 싶으신 분들은 유튜브에 ‘Matthew Passion'을 입력하시면 수많은 명반들과 영상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다행인 것은 다른 음악과는 달리 유튜브에 소개 된 대부분의 마태 수난곡 음반들이 저마다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좋은 음반들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태 수난곡은 헨델의 메시아처럼 대중적인 인기가 많은 곡도 아니며 연주 기법으로도 훨씬 난해한데다가 전 곡의 연주시간만 3시간에 육박하여 어지간한 지휘자나 연주자들은 연주할 수 없고, 그러기에 마태 수난곡을 녹음으로 남길 정도면 지휘자는 그 자체로 진지하고 음악적 역량이 검증된 음악가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독일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번역하여 부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나 엄청난 음악적 스케일은 음악가적 역량과 성품이 부족하고 음악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고 이용하려드는 대다수의 음악가들을 차단시키는 훌륭한 장벽이 되어 줍니다. 듣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간혹 영화나 소설에서는 한니발 렉터와 같은 천재적 싸이코패스들을 바흐 음악과 연결시키곤 하는데 실제로 제가 만난 마태 수난곡이나 바흐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깊이 있고 지성적이며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음반을 고르셔도 좋겠지만 감상하실 때 지휘자와 녹음 연도, 에반겔리스트를 노래한 테너와 예수 역할을 맡은 베이스가 누구인지는 꼭 체크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추천하는 음반은 칼 리히터(Karl Richer)가 1958년 녹음한 음반입니다. 같은 지휘자가 71년에 녹음한 영상판이나 79년의 음반과 혼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리히터의 58년 녹음은 뮌헨 바흐합창단과 뮌헨 어린이합창단이 합창과 코랄을 노래했고 에반겔리스트는 에른스트 헤플리거(Ernst Haefliger)입니다. 헤플리거는 신앙적 표현과 성악적 역량 면에서 단연코 최고의 에반겔리스트입니다. 모노녹음의 실황연주가 아닌 음반 발매를 위해 스테레오로 녹음된 첫 번째 마태 수난곡 연주지만 50년 전의 작업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음반은 마태 수난곡의 고전적인 연주이면서도 여전히 파격성과 탁월함을 느끼게 하는, 클래식 레코딩 역사의 가장 위대한 음반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녹음입니다. 아마 이번 여정 내내 저는 이 음반에 관한 언급을 할 것입니다.



  


(유투브링크         https://youtu.be/3icLbxogeV4)



음반소개

그 밖에 추천할 음반은 다음과 같습니다. 레온하르트의 음반은 매우 지성적이면서도 혹자의 말로는 ‘없던 신앙심마저 생기게 해 주는’ 영성 깊은 연주입니다. 프레가르디엔이 노래하는 에반겔리스트는 이야기에 깊이 개입하지 않고 물 흐르듯 깨끗하게 진행됩니다. 그는 가장 군더더기 없는 에반겔리스트입니다. 또한 이 음반에서 예수 역할을 맡은 막스 반 에그몬트는 바흐음악에 가장 잘 어울리는 베이스로서 다른 음반에서 예수의 음성이 너무 무겁고 지나치게 힘이 넘치는 아쉬움을 남기는 것과 달리 선하고 부드럽고 때로 흔들리는 청년 예수의 음성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헤레베헤의 1984년 음반을 추천한 이유는 소프라노 바바라 슐릭 때문입니다. 그녀의 중성적인 느낌의 노래는 바흐 음악에 매우 잘 어울립니다. 특히 마태 수난곡에서 제가 가장 사랑하는 노래로서 그녀가 노래하는 ‘Aus Liebe will mein Heiland sterben/사랑 때문에 나의 주님은 죽으려하신다’ 한 곡 때문에라도 이 음반은 충분한 소장 가치가 있습니다.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Agnus Dei, c. 1635–1640 


  아르농쿠르의 음반은 그의 다른 곡 녹음에 비해서는 다소 아쉬움이 있지만 언제나 그의 연주는 바흐 음악에 있어서 원전연주의 표본이 되어줍니다. 특히 대학시절 그 음반이 나왔을 때 CD 자켓의 그림이 매우 충격적인 아름다움으로 다가왔었는데 작년에 방문한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서 그림의 원본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습니다.


그 밖에 헬무트 릴링의 1994음반(Non HIP)이나 칼 리히터의 1971년 영상(Non HIP)도 꼭 들어야 할 연주입니다. 다만 카랴얀, 번스타인 등 잘 알려진 지휘자들의 음반은 일단 피하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바흐의 음악은 기교가 넘치고 세상적으로 성공했다고 아무나 제대로 연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흐와 같은 음악가들, 장인정신과 신앙심과 음악의 종으로서의 자세가 삶에 배어 있는 사람들이 바흐를 제대로 연주할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마태 수난곡의 첫 번째 곡인 코랄 판타지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첫 곡도 들어가지 못했군요. 서둘러야겠습니다.



Gustav Leonhardt(좌) - 듣기

Philippe Herreweghe(중) - 듣기

Nikolaus Harnoncourt(우) - 듣기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낮은자리 믿음교회 담임으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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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2)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2 피칸더 그리고 네 명의 화자(話者)


지난 주 나름 큰 포부를 가지고 여정을 시작했습니다만 한 주가 훌쩍 지난 지금에서야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자판 앞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음악 편력이 꽤 있는 사람이지만 저의 지난 한 주간 음악적 삶을 말씀드리자면 간단합니다. 지난 화요일 선배 목사님의 차안에서 신촌블루스의 노래 몇 곡을 청해 들은 것 외에는 지금까지 칼 리히터가 58년에 녹음한 마태 수난곡만을 반복해서 듣고 있습니다.(https://youtu.be/3icLbxogeV4)글을 쓰기 전에 음반을 한 번 더 들어 보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이렇게 사로잡혀 버렸습니다. 마태수난곡을 깊이 만나게 되면 일 년에 두 세 번씩 이런 일이 일어나곤 하지요.


마태 수난곡은 들으면 들을수록 그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고 어느 순간부턴가는 헤어 나올 노력마저 포기한 채, 온 존재를 그 품에 맡겨 버릴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바다의 심연과 그 풍경에 압도되어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이제는 내가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음악이 나를 오선지에 걸쳐 놓고 읽어 내듯 마태 수난곡 앞에 내가 완전히 분해되어 버리고 그 장면을 어디서 왔는지 모를 또 다른 내가 바라보는 야릇한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베토벤이 바흐를 일컬어 “Nicht Bach, Meer sollte er heissen(그는 시냇물이 아니라 바다라고 불리어져야 마땅하다)”라고 말한 것이 단순한 독일어 말장난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강원도 산골 소년이었던 저는 바다를 좋아했습니다. 어른이 된 지금도 늘 바다를 그리워합니다. 수영은 못하지만 여름에 바다에 가면 바다 위에 가만히 그리고 하염없이 몸을 맡기고 떠 있기를 좋아합니다. 바다의 이름은 저마다 다르고 어떤 사람들은 그 이름 때문에 싸우기도 하지만 사실 온 세상의 바닷물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한 바닷물이지요. 저는 이 온 세상의 한 바닷물 전체가 자신의 온 몸을 빈틈없이 꼬옥 껴안아 주는 것을 느끼면서 마치 엄마 뱃속인 양 바다 속에 가만히 떠 있습니다. 모든 껍데기를 벗고 무궁무진한 바다 속에서 자신이 분해되고 녹아버려 그저 한 작은 생명이 되어 버린 그 본향의 편안함을 좋아합니다.


바흐라는 또 다른 바다 속에 갇혀 버린 저는 그렇게 조금 더 그 안에 머물러 있고 싶지만 이제는 바다의 품 밖으로 나와서 그 이야기를 여러분께 풀어 놓아야 합니다.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마태 수난곡에 대한 사전적 정보나 잊혀 졌다가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된 흔한 에피소드 등도 생략하겠습니다. 굳이 제가 아니어도 조금만 관심을 두면 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은 최소화 하고 여러분에게 맡기겠습니다. 다만, 저는 목회자와 연주자의 입장에서 텍스트와 연주를 중심으로 제가 느끼는 바흐를 여러분께 소개하려 합니다.


다소 유치한 서론이 쓸데없이 길어졌지만 여러분들께선 이해해 주셔야만 합니다. 바흐의 마태 수난곡 앞에서는 모든 표현이 유치할 수밖에 없고 모든 찬사가 짧기만 할 것임을 여러분들도 곧 알게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칸더와 네 명의 화자

바흐는 네 개에서 다섯 개의 수난곡을 썼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지금은 마태 수난곡과 요한 수난곡 두 개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마태 수난곡의 초연은 1727년 성 금요일(Good Friday)에 토마스 교회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여겨지며 그날은 4월 11일이었습니다. 마태 수난곡은 이름 그대로 마태복음에 기록된 주님의 수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과 27장의 수난 부분에 해당하는 모든 말씀 구절이 전 곡에 그대로 다 담겨있을 정도로 성경 본문에 충실한 대본을 기초로 작곡 되었습니다.


대본은 피칸더(Picander)라는 필명을 쓰는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헨리치(Christian Friedlich Henrici)의 것으로 성경은 루터판 독일어 성경을 사용하였습니다. 성경 본문을 그렇게 충실하게 따랐다면 대본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우리가 대본 작가까지 알 필요가 있을까요? 하지만 피칸더는 마태 수난곡의 숨겨진 주역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의 흐름 중간 중간에 추가되어 나오는 첨가된 가사에 있습니다.


그 첨가된 가사는 크게 두 가지의 내용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Comment’이고 다른 하나는 ‘Prayer’입니다. ‘코멘트’는 주님의 수난 이야기를 접한 신자가 마음속으로 품었을 법한 내적 정서적, 신앙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말 그대로 그 반응을 응축시켜 외적 고백과 결단으로 승화시킨 것이지요. 복음서 본문이 내러티브와 대사로 이루어졌으므로 정리하자면, 마태 수난곡은 내러티브, 대사, 코멘트, 기도라는 네 명의 화자들이 번갈아 가면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코멘트와 기도가 자칫 엄숙하고 딱딱할 수밖에 없는 이 수난의 성경 본문에 ‘은혜로움’을 불어 넣어 주고 있는 것이지요. 이 네 명의 화자만 잘 구분해도 마태 수난곡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니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피칸더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별로 없지만 바흐는 그에게 크게 감사했던 것 같습니다. 마태 수난곡 바흐 자필악보의 표지에는 피칸더의 이름이 바흐 위에 놓여 있습니다.



바흐 자필악보 표지

‘마태복음에 따른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아래에는 ‘주님을 위한 시 헨리치 피칸더, J.S. Bach의 음악 제 1부‘ 라고 쓰여 있다.


판소리와 수난곡

얼마 전 양재훈 교수의 책 ‘판소리의 신학적 풍경’을 통해 박동진 명창의 창작 성서판소리 ‘예수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마태 수난곡은 우리의 판소리와 아주 닮아 있습니다. 판소리의 구성요소는 소리(창), 아니리(사설, 말), 발림(혹은 너름새, 몸짓) 그리고 추임새인데 이런 구성요소가 수난곡에도 그대로 있습니다. 아니리는 에반겔리스트의 내러티브와도 같습니다. 발림은 지휘자와 연주자들의 몸짓에서 나타나고 판소리의 추임새는 ‘코멘트’부분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앞서 설명 드렸듯이 ‘코멘트’란 ‘주님의 수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신자가 마음속으로 품었을 법한 내적 정서적, 신앙적 반응’이기에 ‘얼씨구’, ‘좋다’, ‘그렇지’등으로 대표 되는 ‘추임새’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판소리에서의 ‘소리(창)’는 ‘기도’에 해당하는 합창과 중창, 솔로 아리아에서 그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태 수난곡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위대한 고전음악을 듣는 마음이 아니라 둘러 앉아 판소리를 들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추임새를 넣는 마음으로, 혹은 예배를 드리며 나지막이 ‘아멘’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사의 이해가 필수적이겠지요. 제가 이 여정 가운데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은 아마 이 부분이 될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판소리와 창작 성서판소리가 얼마나 귀한 우리의 예술적, 기독교적 유산인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서양 음악사의 가장 위대한 음악인 마태 수난곡과 같은 형식을 민중예술로서, 그것도 1인극으로서 품었기에 판소리라는 우리 음악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또한 박동진 명창의 판소리 ‘예수전’이 음악적 토착화의 가능성을 열어 준 우리의 바흐와 같은 역할을 해 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창작 성서판소리 ‘예수전’에 한 가지 아쉬움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피칸더의 부재(不在)’입니다. 우리는 흔히 음악을 작곡가 혼자 만든다고 착각하곤 합니다만, 쉬카네더 없이는 모차르트의 마술피리가 없었을 것이고 하이네의 시들이 없었더라면 슈만의 아름다운 가곡들도 없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보면 대본 작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https://youtu.be/EZLjf_m6j0A ).


피칸더는 탁월한 시인이요 대본 작가이기 전에 성서와 신학에 깊이가 있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저와 함께 마태 수난곡을 깊이 만나가시다보면 곳곳에서 그의 놀라운 가사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마태 수난곡의 가사는 종교 개혁의 정신이 한창 무르익었던 당시 사람들의 성서적, 신학적, 신앙적 깊이가 얼마나 깊었는지 증거하고 있습니다. 반면 창작 성서판소리 ‘예수전’은 곳곳에서 대본의 미흡함이 드러나고 너무 서둘러 완성시켰다는 아쉬움을 감출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제 그 명맥마저 흐려진 상태라고 하니 그 슬픔이 너무나 큽니다.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고 있는 한국교회를 향한 여러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한국교회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성서와 신학과 신앙적인 기본기를 더욱 탄탄하게 쌓고 다져야 하는 것임을 단호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종교개혁의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열매인 바흐와 피칸더의 마태 수난곡이 지금도 살아서 그 사실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낮은자리 믿음교회 담임으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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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1)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1 여정의 시작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독일로 날아가 종교개혁의 현장을 천천히 순례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기왕이면 독일인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5월이면 좋겠습니다. 제게 있어 종교개혁의 성지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와 연관된 곳들입니다. 왜냐하면 요한 세바츠찬 바흐의 음악은 종교개혁이 진리와 진실의 힘에 이끌린 성공적인 것이었음을 보여 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며 종교개혁이 열매 맺은 가장 아름다운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불가능한 꿈속에 조금 더 머물자면, 라이프치히 시내의 집을 빌려서 잠시나마 바흐의 이웃이 되어 살고 싶습니다. 그가 산책했던 길, 이웃들과 인사를 나누며 머물렀던 곳들, 커피칸타타가 초연되었던 침머만 커피하우스 근처의 커피집에서 진한 커피 한잔을 마시고도 싶고 무엇보다 그가 30년 가까이 몸담았던 토마스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려보고 싶습니다.

한참 동안 구글어스를 통해 라이프치히 거리를 누비며 바흐 씨의 이웃이 되는 꿈에 머물다가 다시 자판에 손을 얹습니다. 그래도 마냥 행복합니다. 시내를 이리저리 걷는 동안 흥얼거렸던 바흐의 ‘Schafe können sicher weiden/양들은 평안히 풀을 뜯으며-BWV 208 사냥칸타타 中 ’가 여전히 귓전을 맴돌고 있습니다. ( https://youtu.be/B1nyzGR3tUE )

 

지난 해 바티칸 시스틴 예배당에서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보았습니다. 사진으로 수 없이 보았지만 하늘 층층이 자리한 살아 있는 그 모습은 실로 직접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여느 관광코스처럼 빨리 흘러가버렸고 저는 넋을 빼앗긴 채 시간을 잊고 예배당에 머물러버렸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나오자 성 베드로 성당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일행들의 엄청나게 따가운 눈총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 하나를 보기 위해서라도 바티칸, 아니 이탈리아에 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기에 연신 죄송함을 표현하면서도 속으로는 미소 지으며 뿌듯해 했습니다.

 

미켈란젤로, 그리고 천지창조… 서양 음악의 영역에서 이와 비견할 수 있는 것은 바흐와 마태 수난곡일 것입니다. 깊은 신앙심, 종교성, 예술가적 고집, 천재가 장인이 되었을 때의 시너지, 작품에서의 입체감, 후세의 평가 등 그러고 보니 미켈란젤로와 바흐는 많이 닮았습니다.

 

예술작품을 직접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분들이 많습니다. 천지창조를 보기 위해서는 시간을 내고 비용을 들여 이탈리아 로마로 가야합니다. 사진기나 화면기술이 아무리 발달한들 그 실재의 느낌은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시스틴 예배당에서 그 그림을 보는 그 거룩한 공간적 느낌도 사진이나 화면으로는 절대 느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음악은 그런 면에서 축복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통해 지금 이 자리에서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 접근 방법이 너무나도 쉬워서 우리가 그 귀함을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음대에 다닐 때 2주에 한 번 저만의 성사가 있었습니다. 압구정동 어느 교회건물에 있던 S레코드 음반가게에 들르는 것이었습니다. 늘 새로운 음반이 들어와 있었고 직접 들어 볼 수도 있었습니다. 특히 상업적이지 않은 마이너 레이블 음반들이 많아서 좋았습니다. 약간 어둡고 오래된 유럽호텔의 서재와 같은 분위기가 참 좋았습니다. 매 번 음반 한두 개를 작은 비닐봉지에 들고 나올 때면 얼마나 설레고 좋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느 새 인터넷이 발달하고 스마트폰이 늘 손 언저리에 머물게 되자 저의 성사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기숙사로 들어와 음반을 플레이어에 걸고 첫 소리를 기다릴 때의 그 설렘이 어느새 사라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CD 이전의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교시절 첫 오페라를 보러 간 때가 생각납니다. 가족끼리 잘 알고 지내던 목사님 사모님이 딸과 함께 보라고 표를 마련해 주셨었습니다. 첫 오페라 공연을 보기 위해 이것저것 옷을 입어보던 저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20년이 지났어도 그날 입은 옷이 기억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한 곡의 음악을 듣기 위해서 정성으로 준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음악을 듣기 편한 세상이 오게 되자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음악에 대한 고마움과 예의를 잃어버린 듯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를 시작하겠습니다. 음악회를 앞두고 옷을 고르는 정성으로, 평소 가고 싶었던 먼 곳으로 여행을 가는 떨림으로,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비견되는 서양음악사 최고의 명작과 조우하는 설렘으로 함께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주목 받고 있는 종편 뉴스의 앵커가 마감멘트에서 자주 쓰는 말인데, 이런 식상한 표현이 이토록 무게감 있고 멋있게 느껴질 줄은 몰랐습니다. 상식과 기본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이 뒤틀린 시대가 주는 작은 축복인가 봅니다.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낮은자리 믿음교회 담임으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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