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강유철의 음악정담(26)

 

표절의 시궁창에 핀 장미

- 진회숙, 《음악사를 움직인 100인》-

 

 

저는 술을 못합니다. 최근에는 예의 차원에서 맥주 한 잔 정도는 사양하지 않습니다만, 이때까지 살아오며 한 번도 술에 취해 보지 못했습니다. 학창 시절을 불량 청소년 소굴인 밴드부에서 보냈고, 박정희의 피살과 전두환이 12․12 군사반란을 자행한 그 어간에 군에 입대해 최전방 부대에서 만기 제대했지만 누구의 회유나 압력에 굴해 술을 입에 댄 적이 없습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내 신앙을 지키는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에 두들겨 맞든 고문관 취급을 당하든 겁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그래야 하는 줄로 알았고, 그것이 은근한 제 자존심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저는 근본주의 신앙과 결별한 지 오래입니다. 그런데도 수십 년 동안 술을 멀리했습니다. 술을 먹는 게 죄라서가 아니라, 술을 먹지 않는 것에 익숙해진 라이프스타일을 굳이 허물어야 할 이유를 못 찾았기 때문입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주변에서 “아직도 너는 근본주의 신앙을 못 버렸느냐?”는 투로 술을 자유롭게 먹는 것으로 ‘착한 크리스천’과 자신을 차별화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술이나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을 교회 안에서 꼭꼭 숨기고 사는 좌파 내지 진보적 크리스천 목사나 지식인들의 위선이 싫었습니다. 또한 원하는 사람들끼리 폭탄주를 제조해 마시는 거야 내 간섭할 일 아니나, 직장이나 단체 술자리에서 여성이나 약자들에게 술을 퍼 먹여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 사회의 야만적 음주문화를 혐오했기에 술을 입에 대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술에 대한 관심조차 없었느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한 동안은 술에 취하는 과정을 면밀하게 추적해 보고 싶은 호기심으로 살았습니다. 잠드는 순간을 정확하게 포착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잘 알면서도 그와 유사한, 사람의 몸이 어떤 과정을 거치며 술에 취하는지, 각 단계마다 어떤 증상이나 상황이 벌어지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 문학 작품 가운데 술을 취하는 과정을 면밀하게 묘사한 작품이 궁금했습니다. 인터뷰로 만났던 이명원 교수에게도 그 질문을 했던 순간이 생각납니다. 아직 그런 작품을 소개받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성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어떻게 술에 정복(?) 당하는지를 추적하는 일에는 실패했지만 술, 특히 동양의 옛 사람들에게 술이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음악 작품에서 드러나는 서양 사람들의 술에 대한 이해는 우리와 어떻게 다른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술의 철학을 제게 알려 준 그녀의 주량이 얼마인지, 주사가 있는지, 어떤 술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녀를 만나기는커녕 그에 관한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녀가 술의 종류를 꿰고 있는지, 예를 들어 와인은 어떤 브랜드가 좋은지를 아는 지 여부도 모릅니다. 어쩌면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서 자랐으니 저처럼 술을 못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글을 읽은 술꾼들은 술을 전혀 못하는 제가 선정한 술꾼에 대해 기대가 전혀 없겠지만, 상관치 않습니다. 누가 뭐래도 그녀는 제가 아는 최고의 술꾼입니다.

 

고대로부터 술은 신이 내려주신 최고의 선물이란 이야기를 여기게 길게 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술에 대한 예찬은 어느 분야에나 다 있겠지만 클래식 음악도 예외는 아닙니다. 저는 별로 즐기지 않지만 오페라에도 유명한 술노래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에 나오는 ‘샴페인의 노래’,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의 ‘축배의 노래’,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의 ‘권주가’, 그리고 베르디의 <오텔로>에서 악의 화신인 이아고가 부르는 ‘건배의 노래’를 대표적인 오페라의 술노래로 꼽나 봅니다. 하지만 제게 있어서 클래식 음악의 최고 술노래는 구스타프 말러의 <대지의 노래> 중 5번째 곡인 ‘봄에 술 취한 사내’입니다.

 

저는 진회숙의 《클래식 오디세이》에 나오는,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대지의 노래>를 주제로 쓴 ‘나를 취하게 내버려 두게’란 에세이보다 빼어난 술 이야기가 있는지 모릅니다. 불과 몇 쪽 분량이지만, 그녀의 글을 읽으며 바로 취한 것 같았거든요. 이래서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술에 미치는구나 싶었습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그 에세이를 다시 읽었더니 그때처럼 취기가 오르는 느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글은 이태백의 ‘달 아래서 홀로 마심’이란 시와 그 시에 흠뻑 젖어 빼어난 곡을 쓴 말러, 그리고 그의 인생 황혼에 겪었던 슬픔과 고독을 주제로 빚어낸 최고의 술 예찬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토록 빼어난 술에 대한 노래를 교향곡으로 작곡한 말러도 술에 대해 매우 엄격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주량은 맥주 한 잔이나 소량의 와인을 마시는 정도였습니다. 역시 술을 질펀하게 마셔대야 술에 관한 좋은 작품을 쓰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이 글을 알고 난 뒤에는 보도를 통해 술로 인한 이런저런 눈살 찌푸리는 만드는 사건 사고를 보더라도 이 글을 떠올리며 성난 가슴을 달랠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학위 논문에서 음악만큼 표절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는 영역이 또 있을까 싶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대개 그런 비판은 밖에서 안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나오는 고백일 경우가 많으니 틀림없는 사실일 겁니다. 꼭 학위 논문이 아니더라도 서점에 나가서 작곡가나 음악사 관련 책을 몇 시간만 훑어보아도 그런 사실은 어렵지 않게 확인됩니다. 최근 들어 일부 음악도들이 믿을 만한 책을 직접 쓰거나 번역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음악 서적들의 베끼기는 여전하되 그 정도가 심각합니다. 그나마 내용이라도 사실에 부합하면 좋겠는데 무비판적으로 베끼다 보니 오류가 자주 눈에 띕니다. 견디기 힘든 것은 오류가 저마다 다를 수 있는 의견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작곡가나 작품에 대한 펙트일 때가 많다는 점입니다. 만약 국내 음악 박사 학위 소지자가 장관 청문회에 나오거나 유력 국회의원이 되어서 언론에서 음악계의 논문들에 관심을 갖게 된다면 난리가 나지 싶습니다.

10여 권의 음악 에세이집을 펴낸 진회숙은 진중권의 누나이자 세계적인 현대 음악 작곡가인 진은숙의 언니입니다. 이화여대와 서울대 음대 대학원을 졸업한 그녀는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을 거쳐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 프레시안 인문학습원 '오페라 학교'와 '클래식 학교', 그리고 평화방송 <FM 음악공감-진회숙의 일요 스페셜'> 등을 진행하고 있는 음악평론가입니다.

진회숙의 ‘피타고라스부터 슈톡하우젠까지 음악의 역사를 만든 사람들’이란 부제가 딸린 《음악사를 움직인 100인》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한 권쯤 머리맡에 가지고 있을 만한 책입니다. 688쪽이나 되는 적지 않은 분량인데 진회숙이 이제까지 낸 저서 중 부피가 가장 두껍습니다. 자신의 색깔을 최대한 억누르고 작곡가의 면면을 충실하게 소개했다는 점에서, 그의 주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진회숙이 저의 이런 생각에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녀의 《음악사를 움직인 100인》이 나오기 전까지 저는 웬디 톰슨이 쓴 《위대한 작곡가의 생애와 예술》을 사전처럼 늘 곁에 두고 참고했습니다. 웬디 톰슨은, 중요하지 않은 작곡가들은 200자 원고지 10여 매 내외로, 중요한 작곡가는 20매로, 모차르트나 베토벤 같은 초특급 음악가는 30여 매로, 그리고 알아두면 좋겠다 싶은 작곡가들은 시대별로 묶어서 간단히 설명하는 방식으로 160여 명을 소개하였습니다. 놀라운 점은, 짧은 서술임에도 불구하고 꼭 필요한 이야기는 다 들어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마치 2000년대 초반에 열풍을 일으킨 웬디 수녀의 미술 에세이집처럼 말입니다. 

 

진회숙의《음악사를 움직인 100인》은 웬디 톰슨의 책과 더불어 음악 애호가들의 좋은 반려가 될 것 같습니다. 두 책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잘 보완하여 준다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진회숙이 서술한 몇몇 작곡가를 찾아 읽어 보았더니 그의 성실성이 눈에 들어옵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충분히 숙성시켜서 자신의 톤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분량 면에서 웬디보다 곱절은 더 썼기 때문에 풍만감도 그만입니다. 선정한 그림이나 사진이나 악보나 초연 당시의 포스터 등에서 꼼꼼함과 세심함이 느껴집니다. 음악을 공부하지 않은 클래식 에세이스트들의 책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꼭 필요한 음악적 팁도 덤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바흐의 평균율, 평균율에 대해 이야기는 많이 쓰는데 정작 그것이 어떤 것인지, 그것의 반대인 순정률과는 어떻게 다른지를 한 눈에 보여주는 책은 많지 않거든요.

 

 

 

 

선정한 100명의 음악가에 대해서도 대체로 만족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음악 에세이스트들이 쓴 음악가에 대한 책들이 잘 알려진 몇몇 작곡가 위주인데 반해 『음악사를 움직인 100인』은 딱딱한 음악사 교과서처럼 어려운 악보나 전문 용어로 기를 죽이지 않으면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비인기 음악가들에 대해서도 균형 있게 다룹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윌리엄 버드, 바로크 시대의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와 페르골레시, 낭만주의의 카를 닐센 등이 빠진 것이 아쉽긴 하지만 괜찮습니다. 그러나 21세기가 주목하는 작곡가 진은숙이 친동생이기 때문에 빠진 것은 이해되지만 100명의 음악가에 윤이상이 없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수준이 안 되거나 안익태처럼 우리나라에서도 평가가 양분된 작곡가를 무리하게 올려달라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각주까진 바라지 않지만 참고문헌이 있었다면 더 좋았지 싶습니다.

 

그러나 《음악사를 움직인 100인》에서 제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믿을만한 내용이나 다른 책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진귀한 사진이나 그림 등이 아니었습니다. 이제까지 낸 10여 권의 음악 에세이들과는 볼륨감이 다른 책을 내놓으면서 진회숙은 저자의 자리를 스스로 사양했습니다. 자신의 노고에 대해 엮은이로 만족한 것입니다. 700여 쪽에 가까운 책을 세상에 내어놓으면서 자신은 여러 자료를 잘 정리해 놓은 것일 뿐 독창적인 연구를 한 것이 아니란 점을 행간을 통해 고백한 것입니다.

 

진회숙의 음악 에세이집을 다 읽긴 했지만 지금까지 그의 열혈 독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성실하고 좋은 음악도란 건 뭔가 2프로 부족했습니다. 가끔은 글이 맥락에서 탈선도 좀 하고, 때로는 독자가 놀랄 만큼 속내를 털어놓고, 속이 상하면 욕지기도 좀 하고, 언제나 그런 건 문제가 되겠지만 문장 또한 몸이 원할 때는 탐미적 글쓰기에 매달리면 좋겠는데 제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진회숙의 열혈 독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50대 후반에 700여 쪽에 가까운 책을 내면서, 그것도 어느 정도 음악에세이스트로 이름을 얻었음에도 그녀가 자신의 역할을 엮은이로 자리매김하는 걸 기분이 좋습니다. 작가로부터 이게 얼마 만에 느껴 보는 감동인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더 많은 글쟁이들이 가끔은 엮은이의 역할에 만족할 줄 안다면, 그렇게 소박한 자유와 행복에 눈뜰 수 있다면 표절 따위와는 사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아직도 너무 낭만적인가 봅니다.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 저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지강유철의 음악정담(25)

 

사제가 된 비르투오조

- 프란츠 리스트(4) -

 

 

리스트는 1865년부터 1886년에 타계할 때까지 검은 수단(soutane)을 입은 가톨릭 성직자로 살았습니다. 이 사실을 처음 접한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신기하다” 또는 “뜻밖이다”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에서 신기하고 뜻밖인 것은 성직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리스트는 어려서부터 모차르트에 비견될 만큼 피아노 신동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해 죽을 때까지 정상을 지켰던 음악가입니다. 그런데 리스트는 가톨릭 성직자가 되고 싶다는 어린 시절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신학교를 보내달라고 반복해 졸랐던 것은 16-17살의 사춘기 때 일이었으니 한 때의 치기로 볼 수 있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를 흠모하여 《그리스도를 본받아》나 성경을 열심히 읽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성인이나 순교자가 되기 위해 사제가 되려는 열망을, 유럽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성공한 음악가가 되어서는 물론 50이 넘도록 버리지 않았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리스트는 귀족이 아니란 점만 빼고는 부족한 게 없었습니다. 구스타프 말러처럼 부모 사이가 나쁘거나 형제들이 일찍 죽는 슬픔을 겪지 않았고, 다른 음악가들처럼 집안이 가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부친 아담 리스트는 헝가리 명문 귀족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토지 관리인으로 4-5만 마리의 양을 기를 만큼 부유했습니다. 아마추어 첼리스트였던 아버지에게 7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1년이 지나자 뛰어난 초견(初見) 능력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8살의 나이에 기초 수준의 작곡도 했습니다.

 

9살 때의 첫 공개연주는 반응이 좋아 한 달 뒤인 1820년 11월 16일에는 에스테르하지 궁정에 초대를 받고 생의 두 번째 연주회를 가졌습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어린 천재 모차르트와 비교하기 시작했고, 헝가리 귀족들은 리스트가 당시 세계 음악의 수도인 빈에 유학할 수 있도록 6년 동안 매년 600굴덴의 후원금을 지급하였습니다.

 

아담 리스트가 가족을 이끌고 빈으로 이사를 한 것은 1821년이었습니다. 아담은 아들을 빈에서 가장 저명한 피아노 스승 카를 체르니와 영화 아마데우스로 유명해진 살리에리에게 작곡 수업을 받게 했습니다. 1822년 12월에 열렸던 리스트의 빈 데뷔 연주회는 대성공이었습니다. 당시 11살이던 리스트는 당시 25살이던 슈베르트를 만났습니다. 그 이후 리스트는 슈베르트 음악을 좋아해서 56곡의 가곡을 피아노로 편곡해 유럽 전역에 알렸고, 슈베르트의 마지막 교향곡인 <더 그레이트>를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빈 데뷔 연주 이후 약 4개월 동안 파리 살롱 등을 돌며 연주를 하던 리스트는 1823년 4월 13일에 다시 콘서트를 개최했습니다. 두 번째 공식콘서트를 가진 것입니다. 가을이 되자 리스트는 뮌헨과 슈투트가르트를 비롯한 독일의 여러 도시의 순회 연주를 하고 가족과 함께 12월에 파리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리스트의 파리 음악원(원장 케루비니) 입학은 거부되었습니다. 그래서 체르니나 살리에리에게 사교육을 받았던 것입니다. 리스트의 파리 데뷔 연주는 1824년 3월 7일 루브와 극장에서 있었습니다. 5월에는 영국 런던까지 진출해 궁정이나 살롱에서 연주를 하다가 6월 21일 공식 데뷔 콘서트를 가졌습니다. 1825년에는 프랑스 여러 지방으로 연주 여행을 하고 6월에는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조지 4세 앞에서, 그리고 극장에서도 연주회를 가졌습니다. 1826년에는 프랑스 여러 지방으로 순회 연주를 하였고, 이후에는 스위스 제네바와 루체른에서도 연주회가 이어졌습니다.

 

리스트에 대한 유럽의 주요 도시의 초청은 그가 작곡에 전념했던 13년 동안의 바이마르 시절은 물론 가톨릭 성직자로 살았던 생의 말년까지 이어졌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돈을 받던 콘서트를 무료로 전환하거나, 피아니스트로만 아니라 오페라와 콘서트 지휘자로 무대에 오른 것 정도가 될 것입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바쁘고 가장 잘 나갔던 리스트, 그것도 어느 한 때가 아니라 평생을 그렇게 잘 나갔던 리스트가 이처럼 54살에 하급 사제 사품을 받을 때까지 열망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놀랍습니다.

 

54살에 사제가 된 리스트가 신기하게 보이는 두 번째 이유는 그가 우리나라에서 뒤늦게 목사가 된 대다수 목회자들과 매우 다른 동기로 목회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것저것을 하다가 모두 망해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는 찬송을 부르며 신학교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사실 리스트가 1865년에 성직의 길에 들어섰다고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는 사제가 아니었습니다. 미사를 집전하고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는 사제가 되려면 7품, 즉 수문품, 강경품(삭발), 독서품, 시종품, 차부제품, 부제품, 사제품을 받아야 하는데 리스트는 4품인 시종품까지만 받았습니다.

 

 

 

 

 

그와 사실혼 관계에 있었던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은 리스트가 7품 성사를 모두 받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리스트는 그 제안을 거절하고 14년 동안 미사를 집례하거나 고해성사를 받을 수 없는 준 사제로 살았습니다. 리스트의 신분상에 변화가 생긴 것은 1879년 10월 12일입니다. 자신의 후원자인 호헨로에 추기경으로부터 ‘알바노의 수사신부’로 승격되면서 수도원장이 된 것입니다.

 

1879년에 수도원장이 된 이후 한 신문기자로부터 ‘음악을 포기한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리스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성직에 오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이 길을 택한 것은 세상에 대한 혐오감 때문이 아니며, 특히 나의 예술에 대한 무력감으로 인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세상에 대한 혐오감이나 예술에 대한 무력감 때문에 사제가 된 것이 아니란 리스트의 고백은 한국 개신교에 던지는 의미는 적지 않습니다. 사제가 되고 싶다는 그의 동기는 세상에서 이것저것 하던 일이 모두 실패하자 신학교를 선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음악적으로는 사업적으로든 실패를 몰랐습니다. 아니 연주와 창작 모두에서 최고 수준을 유지했습니다. 그가 시작한 교향시란 단 악장으로 구성된 교향곡은 베를리오즈, 바그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드뷔시 등등의 작곡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한 쇤베르크가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았던 12음기법이란 무조(無調) 음악을 리스트는 무려 68년 전에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사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리스트가 캐롤린 자인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과의 결혼이 실패로 끝나자 성직을 결심했다고 말을 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3년 사이에 20살이 된 아들과 26살의 딸을 잃은 충격 때문에 성직의 길로 들어섰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에 대해 《반 룬의 예술사》는 다른 해석을 합니다.

 

그 무렵 리스트는 자신의 명성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보통 사람 100명의 야망을 충족시키고도 남을 만큼의 영화를 누렸다. 마지막에는 더없이 충실한 여성인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번역자는 후작으로 표기)에게도 흥미를 잃었다. 쉰이 다 된 나이에 비가 올 때는 비옷을 입으라든가, 식후에 코냑은 소화에 나쁘니까 두 잔 이상 마시지 말라는 잔소리를 듣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그래서 리스트는 헤어지자는 뜻을 비쳤다. 마침 그때 후작부인은 평민과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리스트가 재빠르게 행동하지 않으면 영원히 붙잡힐 판이었다. 그 문제는 전형적인 오스트리아 식으로 해결되었다. 가족의 반대를 이유로 두 사람의 결합을 강력하게 반대하던 호헨로에 추기경은 리스트를 사제로 서품했다. 조용하고 은밀하면서도 효과적인 해결이었다. 성직자가 된 리스트는 이제 모든 유혹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는 여전히 후작 부인의 충실한 정신적 친구였으나 결혼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또 다른 사람들은 리스트가 비트겐슈타인 부인과의 결혼에 소극적이 된 것이 그녀의 보수 신앙에 대한 강요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폴란드 대지주의 딸이었던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은 17세 때 러시아 니콜라스 자인 비트겐슈타인 왕자와 결혼했습니다. 딸 하나를 낳았지만 극단적인 성격차로 인해 두 사람은 결혼 3-4년 뒤 별거에 들어갔습니다. 공작부인은 로마 교황청과 긴 이혼 소송을 하면서 자신이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압에 의해 결혼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고, 그것이 받아들여져서 비트겐슈타인 왕자와 거의 이혼 직전까지 갔었습니다. 남편의 훼방으로 끝내 이혼에 성공하진 못했지만 말입니다.

 

리스트가 공작부인을 만난 것은 1847년 2월 키예프 연주회 때였습니다. 당시 28세였던 공작부인은 리스트보다 8년 연하였습니다.

 

공작부인과의 만남은 리스트의 운명을 바꿨습니다. 공작부인의 권유로 리스트는 비르투오조의 생활을 청산하고, 바이마르에 정착해서 작곡에 전념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은 1872년부터 죽은 1887년까지 남긴 24권 중 신학 관련 서적이 꽤 될 정도로 신앙이 매우 깊었다는 것이 음악사의 일관된 진술입니다.

 

공작부인이 쓴 저작에는 불교와 기독교, 불교와 유대교와 마르틴 루터, 그리고 신구약 성경에 관한 연구, 특별히 사도 요한의 계시에 대한 연구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리스트는 빅토르 위고, 조르주 상드, 바그너, 베를리오즈 등의 진보적 작가나 음악가들과 친분이 깊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공상적 사회주의자라고 부르는 집단에도 지지를 보냈습니다.

 

때문에 공작부인의 끊임없는 보수적인 신앙에 대한 강요나 바그너와 그의 음악에 대한 반대 등으로 그녀에 대한 마음이 전과 달랐다는 것입니다. 리스트는 공작부인과 결혼이 거의 성사될 즈음에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은 리스트의 생일에 맞춰 결혼식을 하기 위해 남편과의 이혼 수속에 피치를 올리고 있을 때 말입니다.

 

 

 

 

 

리스트가 죽은 후 8개월을 두문불출하던 공작부인은 1887년 3월,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토록 문학과 신학에 두루 조예가 깊고 신앙이 좋았던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이 남편을 버리고 딸아이와 함께 리스트와 동거에 들어간 것은 파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더 큰 파격은 보수 신앙이 두텁던 공작부인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녀의 자살은 당시 사람들은 물론 오늘의 신앙인들에게도 매우 당혹스런 문제를 던져줍니다. 잘 믿는다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리스트가 태어난 곳은 1921년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로 편입된 도시 쇼프론 근처의 작은 마을 라이딩입니다. 리스트 당시 이름은 도보리얀이었지만 말입니다. 최근 20-30년 동안 약 400명의 인구가 늘어났는데도 현재 1300명의 주민이 살 정도로 작은 마을에서 리스트는 태어났습니다. 라이딩은 행정구역상 남부 오스트리아의 부르겐란트 주에 속합니다.

 

부르겐란트에 있는 주립 박물관에는 리스트의 유물 하나가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리스트가 여행 때 가지고 다녔던 간이 제단입니다. 지금처럼 운송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높이가 1미터가 넘는 여행용 간이제단을 가지고 다니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리스트는 불편을 감수하고 요즘 교회의 작은 강대상만한 제단을 갖고 다녔습니다. 그의 신앙이나 성직이 단순한 장식 이상이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물증이 아니겠나 싶습니다. 벌써 글이 길어졌습니다. 성직자가 된 이후 그가 남긴 종교적 작품과 그의 삶의 이야기는 다음에 써야 하겠습니다.

(다음에 계속)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 저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지강유철의 음악정담(24)

 

콘서트 나들이 울렁증

 

 

며칠 전 예술의전당 서울시립교향악단 연주회에 다녀왔습니다. 티켓을 처음 구매한 분이 갑자기 모 소설가 북 콘서트 사회 일정이 겹쳐 표를 후배에게 넘겼습니다. 저도 아는 그 후배 역시 연주회 당일에 메르스 긴급 대책회의에 투입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제게 왔습니다. 서울시향 연주를 마지막으로 들은 게 언제인지 가물거리고, 그날의 레퍼토리 중에 라이브로 쉽게 접할 수 없는 슈만의 ‘2번 교향곡 다장조가 들어 있어 콘서트 나들이에 나섰습니다. 이 글에서 저는 그날의 서울시향 연주를 시청하지 못한 대다수 독자들을 앞에 두고 곡목 해설을 길게 하거나, 전문적인 연주회 비평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실 그럴 능력도 제겐 없습니다. 때문에 지난 610일의 서울시향 콘서트의 음악평이 궁금하신 분은 전문 평론가의 글을 참조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 글은 서울시향의 610일 연주회를 주제로 한 음악적 수다 그 이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목을 콘서트 나들이 울렁증이라 붙인 것은 아직도 클래식 콘서트에 가는 일이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70년대 중반엔 볼만 한 콘서트가 많지 않았습니다. 예술의 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이 없던 시절이었지요. 장충동 국립극장에서도 요즘처럼 매일 콘서트가 열린다는 건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때 저는 호주머니 사정으로 좋은 콘서트 시청이란 꿈도 못 꾸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연주회 소식이 있으면 친구들과 무작정 장충동 국립극장으로 갔습니다. 혹시나 약속이 펑크나 나서 어떤 사람이 티켓을 흔들어 보이며 표 필요하신 분!”이란 소리에 저요, 라고 대답할 야무진 행운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혹시 맘 착한 국립극장 직원의 눈에 띄어 연주회가 시작되고 난 후에 슬쩍 들여보내 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시골 극장에서는 종종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입장하는 사람들만 쳐다보다가 터덜터덜 장충동 고개를 내려오던 일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음악을 공부하던 대학시절에도 콘서트를 자주 갈 순 없었습니다. 허구한 날 친구들에게 점심 얻어먹을 수는 없어서 200원짜리 에이스를 사서 연습실로 올라가 피아노만 두들기던 시절이었으니, 어떻게 콘서트 갈 생각을 했겠습니까. 결혼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조금 여유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교육 전도사이다 보니 일요일, 수요일, 금요일, 토요일 저녁은 교회 프로그램에 묶여 콘서트는 아예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연주회는 대게 그런 요일에 열렸는데 말입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예술의전당을 비롯한 대부분의 콘서트홀에서 요일 구분이 무의미해졌습니다. 매일같이 콘서트가 열리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집 근처의 예술의전당은 저녁 콘서트는 물론 오후 4-5시 연주도 거의 상설화되었습니다. 음악당 소극장에서는 리사이틀이 열리기도 합니다. 토요일 오전에도 마음만 먹으면 유명 지휘자가 조직한 젊은 오케스트라의 신선한 연주를 관람할 수 있습니다.

 

제가 콘서트 못 가서 안달하던 시절엔 돈도, 시간도, 콘서트 일정도 모두 저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제까지 다녀 온 클래식 콘서트는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그때보다 많은 여유가 생겼지만 지금도 여전히 저는 콘서트 나들이가 뜸합니다. 제 음악 생활의 상당 부분은 연주회 밖에서, 그러니까 오디오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오디오 생활에 익숙해진 탓도 없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콘서트 나들이를 주저하게 만드는 여러 이유를 해결하지 못한 탓이 더 큽니다. 대략 이런 이야기입니다.

 

 

 

 

제가 어쩌다 다녀오는 클래식 콘서트 중 좋은 추억으로 남은 연주회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공연의 질에 실망한 적도 없지 않지만 연주회장에서 만나는 얼굴 뽀얗고 핸섬하게 차려있는 사람들이 사실은 더 불편했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이 땅의 민주화나 어려운 사람들과의 연대를 거의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궁예처럼 콘서트홀에서 만나는 얼굴 뽀얗고 근사하게 차려 입은 사람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이나 이전의 활동을 뚫어볼 독심술이 없습니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클래식 음악계와 마니아들이 우리 사회 문제와 관련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어느 정도 압니다. 엄혹했던 지난 30~40년 동안, 이 사회의 정치적 민주화와 소수자 인권 신장에 클래식 연주자나 연주단체, 또는 음악대학 등에서 성명서나 시국선언을 발표하며 동참했다는 소릴 저는 아직 들은 적이 없습니다. 문학계는 두말할 것도 없지만 대중음악계나 미술계에서도 우리 사회의 중요한 현안에 대해 단체의 입장을 표명하는 일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오로지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에만 거리로 나오거나 입장을 밝혔지요.

 

클래식 마니아들을 보며 가장 황당했던 일은 푸르트벵글러란 지휘자가 1942년 히틀러의 53회 생일 전야에 열렸던 축하 콘서트 음반이 국내에 수입, 발매되었을 때입니다. 그 연주회에는 히틀러와 그 측근들이 총출동하였고, 콘서트를 메운 대다수 청중은 제복을 입은 고급 장교들이었습니다. 우측에는 나치를 상징하는 대형 깃발 하겐 크로이츠가 걸려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음반 출시에 대해 클래식 마니아들이 교주님 만세!”를 외치는 듯한 환호 일색의 온라인 반응을 보자니, 속이 뒤틀리더군요. 몹시 역겨웠습니다.

 

아무리 클래식 음악이 좋고 푸르트벵글러란 지휘자를 좋아해도 그렇지, 하루에도 수만 명의 유대인을 독가스실로 보내 죽게 만든 히틀러의 생일 전야제 축하 연주에 어떻게 저렇게 열광할 수 있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으니 연주회장에서 만나는 얼굴 뽀얗고 핸섬하게 차려있는 사람들, 특히 콘서트홀 로비에서 목사님, 권사님 집사님 하면서 교양을 즐기는 분들을 보며 제 시선이 고울 리 있었겠습니까.

 

 

서울시향의 이전과 달라진 풍경은 연주 시작이 10여 분 남았는데 미리 자리를 잡고 소리를 내는 단원들이 보였다는 점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최고 교향악단에서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단원들이 일찌감치 자리 잡고 앉아서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에 약간 놀랐습니다. 이류나 삼류 오케스트라에서는 종종 보았지만 일류 오케스트라에선 좀처럼 보지 못한 풍경이었거든요. 그런 광경은 휴식 시간에도 반복되었습니다. 호른을 연주하는 외국 연주자가 일찍 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소리를 내더군요. 신선했습니다.

 

그러나 이날의 콘서트에는 의아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들의 작품으로 꾸며진 연주회였는데 콘트라베이스 주자가 8명이 아니라 6명이었더군요. 아무리 제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스케일이 큰 후기 낭만주의 교향곡 연주에서 콘트라베이스 연주자가 6명인 오케스트라는 본 기억이 없습니다. 물론 실내악단이 교향곡이나 협주곡을 연주할 때는 연주 인원이 보통 때보다 훨씬 작습니다. 하지만 지방 음악대학 콘서트가 아니라 서울시향의 정기연주회에서 콘트라베이스가 6명만 출연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바순과 오보에를 비롯한 목관악기들은 거의 4관 편성(목관 악기가 각 파트마다 4)이었기 때문에 콘트라베이스는 8명이 아니라 9명이나 10명으로 늘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거든요. 그 때문인지 1D, 그러니까 거의 정중앙에 위치한 제 자리에서도 서울시향의 중저음은 적잖이 답답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또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슈만 교향곡 2번 스코어에는 튜바가 없는 걸고 기억하는데, 이날 연주회에서는 어쩐 일인지 튜바를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슈만의 교향곡 2번 동영상을 여러 개 봤지만 튜바가 연주하는 장면은 없었거든요. 이것이 지휘자의 선택이었을까요? 그 또한 모르겠습니다.

 

이날 연주회에서 제일 신경이 거슬리는 것은 금관 파트였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서울시향 시절에 비해 현제 단원들의 실력이 월등하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문제는 거기 있었습니다. 지휘를 조금이라도 해 본 사람은 압니다. 연주에 방해가 되는 존재는 그 합창단이나 오케스트라에서 실력이 좋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 반대란 사실을 말입니다. 실력이 없는 단원들을 이끌고 나가야 한다는 사명감이 앞설 때 어떤 연주자는 오버합니다. 필요 이상으로 소리를 크게 내면서 자기의 존재를 과시하는 것이지요. 하모니가 중요한 합주나 합창에서 이런 행위는 결코 연주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날 서울시향을 객원 지휘한 독일 출신의 콘스탄틴 트링크스는 정명훈보다는 한 수 아래입니다. 나이도 연주경험도 말입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 사람들이 서울시향 단원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금관파트가 저는 좀 나댄다고 느꼈습니다. 만약 정명훈이 지휘를 했더라도 금관 파트가 저렇게 안하무인’(?)으로 큰 소리를 펑펑 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정명훈이 서울시향을 맡고 난 뒤 일취월장한 파트가 제1바이올린이란 사실에는 별 이견이 없습니다. 저도 이번 콘서트 나들이에서 그 점을 확인했습니다. 서울시향을 처음 지휘한 트링크스는 좀처럼 연주회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방식으로 청중의 박수를 유도했습니다.

 

지휘자들은 특히 그날 중요한 솔로를 담당했던 연주자나 한 파트를 따로 일으켜 세웁니다. 이때의 파트는 목관이나 금관일 경우가 많습니다. 1바이올린을 모두 일으켜 세우고 박수를 유도하는 지휘자는 드뭅니다. 저는 아예 그런 지휘자를 보지 못했습니다. 콘서트홀에서건 DVD나 블루레이 영상물에서든 말입니다. 그런데 트링크스 지휘자는 그렇게 했습니다. 1바이올린 파트의 팀워크가 지휘자 보기에도 매우 좋았던 모양입니다.

 

다행이다 싶은 건 서울시향 단원의 성비 구성이었습니다. 지금 대다수 대한민국 오케스트라들은 거의 여성 천국입니다. 이는 세계 오케스트라 역사에서 매우 드문 일입니다. 1842년에 창단되어 세계에서 가장 실력과 전통을 자랑하는 빈 필하모닉은 1997년에서야 여성 단체의 항의와 시의회에 압력에 굴복해서 하피스트 안나 렐케스를 정식 단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하프 연주가 들어가는 곡이 매우 적기 때문에 사실상은 여성 단원이 없는 것이나 다르지 않았습니다.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가 지휘한 2003년 미국 공연 때는, 현지 여성 단체와 시민단체의 항의 시위를 걱정, 빈 슈타츠오퍼에서 2명의 여성 단원이 순회 연주에 동행했습니다. 빈 필하모닉의 지금 사정은 그때보다 더 나아졌습니다. 2011년에는 여성 악장이 임명되었고, 현재 총 4명의 여성 단원이 활동하고 있거든요. 보수적이고 전통을 중시하던 빈 필하모닉이 더는 세상의 흐름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원의 80-90퍼센트를 여성 단원으로 채우고 있는 대한민국 오케스트라는 빈 필하모닉에 비해 매우 진보적이란 의미일까요? 저는 그 반대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합니다. 돈 많고 권력 있는 집안 아이들 중 왜 유독 딸들만 음악을 전공을 많이 시킬까요? 그 이유를 생각하면 대한민국 오케스트라가 여성 천국인 이유에 대한 답이 얼추 나옵니다. 21세기의 한국 오케스트라의 구성원 중 대다수가 여성이란 사실은 우리 사회 지도층 사람들의 머릿속에 여전한, ‘음악은 광대나 하는 짓거리라는 생각일지 모릅니다. 만약 그게 옳다면 대한민국 오케스트라가 여성 천국으로 변한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상층부가 아직도 전근대적 사고방식에 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아닐까요.

 

물론 저는 현대 오케스트라가 여성과 남성 비율을 5050으로 구성해야 함을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케스트라에는 여성이 유리한 악기가 있고 남성에게 유리한 악기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관악기, 특히 금관 악기에서는 절대적으로 남성이 유리하다는 점입니다. 물론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모든 음악에서 파워가 중요하진 않습니다. 보통의 경우는 파워보다는 예술성과 테크닉이 더 중요합니다. 하지만 구스타프 말러나 브루크너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작품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아무리 연주력이 뛰어나더라도 파워가 없다면 이들 작곡가의 스펙터클하게 매우 연주 시간이 긴 작품을 끝까지 연주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대다수의 스포츠는 남성과 여성을 구분합니다. 남성과 여성의 대결을 동등한 조건이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케스트라 연주에서는 어떨까요? 저는 스포츠와 유사한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거의 남성 단원을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 오케스트라를 볼 때마다 늘 심사가 복잡했던 이유는 이런 현상을 결코 정상적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서울시향 콘서트 나들이에서 서울시향의 금관 파트가 거의 남성으로 구성된 점, 그리고 전체 남성과 여성 단원의 비율이 34였던 점은 박수를 쳐주고 싶은 대목입니다. 서울시향의 남녀 구성 비율이 다른 오케스트라에도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을 기대합니다. 아쉬웠던 점은, 정명훈이 지휘를 하지 않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서울시향의 전석 매진을 구가하던 예전만 못해진 것인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1층의 많은 좌석이 텅텅 빈 것입니다. 빈 좌석은 오케스트라 뒤의 합창석도, 2-3층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언론 보도를 통해 서울시향 연주가 늘 성황이라고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다른 상황을 보면서 놀랐습니다.

 

클래식 음악과 친해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주 콘서트홀을 자주 찾는 것입니다. 누가 이 점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서민이 자주 콘서트에 가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클래식 음악회 티켓 값이 세계에서 가장 비싸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문적인 이야기이지만 대한민국의 콘서트홀이 사운드적인 측면에서 결코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한다는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실이 세계에 너무 많이 알려져서 일부 연주자들이 내한 공연을 기피한다는 소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지휘자가 일류 오케스트라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연주회를 열면 티켓 한 장 값이 몇 십만 원입니다. 서민이라도 1년에 한 두 차례 정도는 적금을 부어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몇 개월 동안은 음악 없이 살다가 1년에 한 두 차례 라이브 공연을 보면서 저 오케스트라를 사람들이 왜 세계적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날 연주되는 음악을 충분히 알고, 다른 연주 단체의 음악을 자주 접하며 변별력을 기르지 못했다면 몇 십 만원씩 주고 세계 유명 오케스트라를 가는 일이 저는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그 돈으로 같은 곡의 서로 다른 연주를 충분히 익히는 것이 자신의 음악 생활을 훨씬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자기 경제적 수준에 맞는 오디오를 장만하고 일상생활 속으로 클래식 음악을 끌어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입니다. 그런 음악 생활이 전제될 때에만 돈을 저축하여 어렵게 찾는 콘서트에서 듣는 음악으로 인해 카타르시스를 경험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를 말하는 것이 순서이겠지만 그 이유를 설명하려면 이제까지 쓴 정도의 분량이 더 필요하지 싶습니다. 콘서트홀에서 듣는 라이브 음악의 차이와 오디오를 듣는 라이브 음악의 차이를 누구나 명쾌하게 설명할 자신도 아직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주제는 다음의 과제로 남겨두려고 합니다.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 저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지강유철의 음악정담(23)

 

정명훈 선생, 프란츠 리스트는 왜?

- 프란츠 리스트(3) -

 

 

프란츠 리스트의 생애와 작품은 많은 부분이 알려지지 않았거나 왜곡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을 덜 받은 부분은 작가로서의 리스트가 아닐까 싶습니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습니다. 물론 그는 19세기 중반의 유럽에서 비교 대상이 거의 없는 피아니스트였고, 로베르트 슈만, 베를리오즈, 바그너처럼 음악 평론을 본격적으로 하지도 않았습니다. 때문에 당시 유럽이 그의 글을 주목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글에 대한 21세기의 평가는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가 쓴 몇몇 글들은 지금 여기에서 읽어도 속이 후련하고 배울 바 또한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재까지 리스트가 남긴 저서, 에세이, 팸플릿 등의 글은 6권의 전집으로 나와 있습니다. 교회 음악의 미래와 예술가들의 열악한 사회적 지위를 고발한 논문을 비롯하여 당대의 음악가들과 조르주 상드, 하인리히 하이네 등에게 보낸 편지가 제2권으로, 베토벤, 글루크, 베버, 벨리니, 도니체티, 바그너, 멘델스존, 슈베르트, 모차르트의 오페라나 음악을 논한 에세이가 제3권으로, 베를리오즈,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슈만 등의 작품 분석이 제4권으로, 보다 심층적 주제를 가지고 쓴 에세이가 제5권으로, 헝가리 집시 음악이 제6권으로 묶인 것입니다.

 

 

 

 

 

전집 1권은 그가 1852년에 출간한 Life of Chopin입니다. 리스트는 쇼팽이 39살에 요절한 지 3년 만에 그의 전기를 출간했습니다. 이 전기에 대한 음악사가들의 평가는 야박한 편입니다. 문학적으로는 빼어나지만 19세기에 나온 대다수 쇼팽의 전기들처럼 리스트의 전기도 진실의 전달이라는 자료의 가치측면에서 큰 기여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걸 인정하더라도 그의 쇼팽 전기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습니다. 쇼팽은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리스트가 내 연습곡을 연주하는 것을 듣노라면, ‘나는 내 작품들이 괜찮은 곡들이구나.’ 하는 생각에 혼자서 황홀한 기분에 빠지게 된다. 나는 그가 내 연습곡들을 연주하는 기법을 그로부터 훔치고 싶은 생각까지 든다.”

 

쇼팽은 리스트를 썩 좋아하지도, 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음악에 대해서도 별로 동의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라이벌 의식 때문이었을까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리스트는 달랐습니다. 슈베르트처럼 쇼팽에 대해 호감 정도를 넘어서는 관심과 존경의 마음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선지 리스트는 자신이 좋아했던 쇼팽의 전기를 누구보다 먼저 썼습니다. 이 전기를 위해 그는 쇼팽의 여동생에게 질문지를 보내는 등, 나름 애도 많이 썼습니다. 쇼팽 여동생의 비협조적 태도 때문에 큰 도움을 받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21세기에도 세계적인 지휘자나 연주자가 신문이나 잡지에 칼럼이나 자기주장이 담긴 글을 발표하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그러니 리스트가 쇼팽 전기를 완성한 163년 전에는 어떠했겠습니까. 하물며 현역으로 뛰고 있는 연주자가 다른 연주자의 전기를 쓴다? 더군다나 그 대상이 자기에게 라이벌 의식 내지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다가 죽었을지 모를 피아니스트를 위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요. 그럼에도 리스트는 쇼팽 전기를 썼던 것입니다.

 

작가 리스트에게서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글은 1835년에 쓴 <예술가의 지위에 대해서>라는 논문입니다. 1781년은 음악가의 지위와 관련하여 눈여겨봐야 할 해입니다. 25살이던 모차르트가 콜로제도 대사제와 충돌을 계기로 귀족과 교회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해이기 때문입니다. 25살 이전의 모차르트는 유럽에서 귀족의 총애를 받던 천재요 신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모차르트는 사제나 귀족의 노리개로 사는 것을 거부합니다. 하지만 반항에 대한 대가로 그는 죽을 때까지 빈핍한 생활을 면치 못했습니다.

 

물론 그 이후 모차르트의 음악은 더 한층 매우 사회적이고 정치적이 되었습니다. 독립 선언 이후 쓴 <피가로의 결혼>(1786)이나 <마술피리>(1791) 등의 오페라는 줄줄이 반 귀족, 반 계급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습니다. 하이든도 179030년간 봉직했던 에스테르하지 궁전으로부터 해방이 되고, 베토벤 또한 1794년에 독립을 선언하고 자유계약 작곡가가 됩니다. 1780년대 이후 유럽에서는 이처럼 귀족의 보호 아래서 안정을 누리던 음악가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건 하이든이나 모차르트나 베토벤 같은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에 해당되는 이야기일 뿐, 대다수 음악가들은 자신들이 음악가란 자의식은커녕 배고픔을 해결하지 못하는 존재로 비참한 생활을 면치 못했습니다. 오노레 도미에(1808-1879)가 그린, 식량을 구하기 위해 바이올린을 켜는 <곡예사의 퍼레이드>라는 그림은 19세기 대다수 음악가들이 어떤 처지였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19세기 초중반 음악가들의 지위는 귀족이 거느리는 시종 중에서도 하위직에 속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음악가로 칭송을 받던 모차르트조차 시종들 사이에서 식사를 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런데 모차르트가 타계하고 44년이 흘렀음에도 음악가들의 지위나 배고픔의 문제는 크게 개선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리스트가 이런 논문을 쓸 이유가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당시 사회를 향해 리스트는 음악에 유보된 특권이나 사회적인 과제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또한 그러한 특권이 없는 예술가의 굴복이나 그들에 대한 중상모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매우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봅니다.

 

우리 사회에서 예술가의 지위를 엄밀하게 또한 상세하게 규정해서 그의 정치적, 개인적, 종교적 관계를 설명하고, 그의 고통, 그의 불행, 그들의 곤궁함과 실망감을 기술하고, 그리고 늘 피 흘리는 상처의 붕대를 찢고 예술가를 상처 입히고 심하게 괴롭히고 영락시켜 그들을 장난감으로 이용하는 억압적인 불공정이나 파렴치에 대해 힘껏 항의하고, 그들의 과거를 검증하고, 그들의 미래를 보여주며 그들의 훌륭한 능력을 세상에 알려 (……)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향하고 우리의 과제는 어디에 있으며, 우리는 한 마디로 누구인지를 가르쳐 준다. (……) 그렇다면 그것은 훌륭하고 멋진 과제일 것이다.

 

당시 그의 국제적 위치를 생각하면 대단한 용기입니다. 음악가의 생활사에서 니시하라 미노루는, “리스트만큼 당시 음악계나 사회에 분노한 작곡가는 없었다고 썼습니다. 1835년은 리스트의 피아니스트로서 기량이 절정이었을 때입니다. 1960년대의 비틀즈가 그랬던 것처럼 어느 한 도시나 나라의 영웅이 아니라 전 유럽의 스타 중 스타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마리 다구 백작 부인과 연애가 시작되어 18355월엔 스위스에서 도망하여 백작 부인과 살림을 차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시 리스트는 한 가정을 파탄에 이르게 한 죄에 대해 근신하며 조용히 지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리스트는 가장 낮은 처치에 있는 삼류 음악가들의 고통을 더는 못 참고 도발적인 논문을 발표한 것입니다. 사실 경제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음악적으로든 1835년 당시, 아니 리스트의 평생은 별로 아쉬울 게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2-3년 사이에 성년이 된 딸과 아들을 잃은 참척의 슬픔을 당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리스트의 이 논문으로 벌어진 입을 다물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리스트는 말로만 열악한 처지에 놓인 음악가들을 걱정한 게 아니었습니다. 수백 명의 제자들을 무료로 레슨하고, 당시에 주목받지 않던 재능 있는 음악가들을 글로 옹호하고, 자기가 지휘하는 연주회를 통해 등단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등의 대선배들 음악을 피아노로 편곡하여 보급한 것이야 후배로 마땅한 일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살아 있는 슈베르트, 베를리오즈, 도니체티, 벨리니 등의 음악가들의 작품을 편곡하여 직접 연주까지 한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최고였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정명훈 이야기를 피해갈 수가 없네요. 리스트에게 그랬듯 정명훈에게도 프랑스 파리는 그의 인생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음악을 공부했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를 맡으면서부터였으니 말입니다. 리스트처럼 정명훈 역시 피아니스트로 시작해서 지휘자로도 성공을 했습니다.

 

정명훈이 프랑스 작곡가의 음악만으로 명성을 얻은 건 아니지만 그의 레퍼토리에서 프랑스 음악의 비중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베를리오즈, 메시앙, 라벨, 생상스, 비제 등 프랑스 음악가들의 작품을 꽤나 많이 녹음을 했고, 그 중에 몇몇 음반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흥미롭게도 아무리 기억을 되돌려보아도 정명훈이 지휘한 리스트 음반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검색을 해 보아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음반이 없다고 콘서트에서 리스트 곡을 지휘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정명훈의 음반은 독일, 이태리, 프랑스, 러시아 등 크게 편식이 없고, 시대도 고전시대부터 현대음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 합니다. 때문에 정명훈의 음반에서 리스트의 음반을 쉽게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다소 의아합니다.

 

정명훈은 리스트가 싫은 것일까요?

 

저로써는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크게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제가 아는 바는 그의 디스코그래피에서 프란츠 리스트 음반을 거의 찾을 수 없다는 점이고, 제가 기억하는 바는 몇 년 전 국립 오페라단이 해체 위기에 몰려 절박한 도움을 청했을 때 매몰차게 거절한 일입니다.

 

백보 양보하여 당시 그를 찾아갔던 사람들이 약속 없이, 그것도 심야에 불쑥 찾아간 결례 때문에 그날의 서명 요청을 거절했다고 한다면 이해 못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매너가 문제였다면 이후에라도 거리로 내몰린 음악가들을 위해 서명 정도는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명훈은 제가 틀리지 않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건은 차치하더라도, 그가 이 땅의 가난한 음악가들이 당하는 문제에 대해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저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리스트는 달랐습니다. 18482월에 프랑스 파리를 시작으로 유럽 전역으로 혁명의 불길이 치솟을 때 그는 바이마르에 살고 있었습니다. 괴테와 실러로 유명한 바이마르는 리스트 당시에 정치적으로 매우 보수적 도시였습니다. 그는 1848년의 혁명적 상황에서 두 가지 선택을 하였습니다. 우선 리스트는 4중창과 남성합창을 위한 <노동자의 합창>을 작곡했습니다. 이 노래의 독일어 제목을 보니 아르바이트로 시작되더군요.

 

이때 바그너는 드레스덴 봉기에 가담했다가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지명 수배자가 된 것입니다. 그의 인상착의를 그려 넣은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던 일은 유명합니다. 이때 리스트는 드레스덴 경찰서까지 달려가 바그너를 구했습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바그너가 스위스로 피신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해 8월에 바그너는 답방 형식으로 리스트를 만나기 위해 바이마르에 왔습니다. 바이마르의 시각에서 보자면 바그너의 음악은 너무 불온하고, 게다가 여자관계까지 복잡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의 바이마르 행을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 싶습니다. 당시 유럽의 도시들 중에는 그의 방문을 반대하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지 않을 리스트는 3개월 후인 1112일에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곡을 바이마르 무대에 올렸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탄호이저> 오페라의 전곡 상연을 주장했습니다. 돈 문제가 깨끗하지 않은 바그너를 모르지 않았을 텐데 그가 손을 내밀 때마다 도왔습니다. 그 때문인지 바그너는 1876년의 바이로이트 축제 때 순례객들 앞에서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아무도 나를 알지 못했을 때 누구보다도 먼저 나를 믿어준 분이 저기 앉아 계십니다. 저분이 없었더라면 여러분은 내 음악을 한 음표도 듣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다의 다정한 친구 프란츠 리스트입니다.

 

정명훈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은 음악 이외에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음악계 한편에선 그가 순결한 그의 이미지 뒤에서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놓고 흥분하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작년 연말과 올해 초 서울시향 대표와의 갈등을 통해 그의 문제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긴 했지만 말입니다.

 

리스트는 자신이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때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음악가라고 음악 이야기만 하고, 사제라고 영적인 이야기만 하지도 않았습니다. 리스트는 <노동자의 합창>을 쓴 꼭 10년 뒤에도 독일 교원협회에 남성합창 한 곡을 헌정했습니다. ‘10회 전 독일 교원집회 개회 축하노래를 작곡한 것입니다. 1850년대의 유럽은 지독한 반동의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교원협회 창립을 축하하는 행위가 어떤 의미인지 리스트가 몰랐을까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왜 리스트는 위험을 감수했을까요? 이덕희가 잘 말한 것처럼 그에게 음악이란 세계를 포용해야 하는 것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계속)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 저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지강유철의 음악정담(22)

 

두 명의 프란체스코와 백건우

- 프란츠 리스트(2)

 

 

세월호 참사 100일이 되던 지난해 7월 24일,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영혼의 소나타’란 제목으로 제주항 특설무대에서 추모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연주회 10여 일 전에 있었던 기자회견에서 백건우는, ‘부다페스트 공연을 준비하다가 세월호 소식을 접한 뒤 할 말을 잃었고,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어 화가 났었다’고 느리게 말했습니다. 추모 콘서트 제안을 받았을 때 백건우는 자신의 연주회 일정을 변경했고, 파리-서울 왕복 항공료는 물론 출연료까지 포기했습니다. 곁에서 지켜 본 윤정희는 수십 년 연주 생활 중에서 남편이 레퍼토리 선정을 놓고 이번처럼 심혈을 기울인 적은 없었다고 거들었습니다. 백건우는 죽음, 상처, 치유란 주제로 각 두곡씩을 선정했습니다. 처음 시도하는 추모 콘서트를 놓고 백건우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가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백건우는 ‘영혼의 소나타’ 콘서트를 네 명의 작품으로 구성했습니다. 베토벤․라벨․바그너를 한 곡씩 골랐고, 프란츠 리스트의 작품에서는 세 곡이 뽑혔습니다. 산책길에 나섰다가 병으로 죽은 자식을 앞에 놓고 슬퍼하는 여성을 위해 베토벤이 연주했던 자작곡 ‘비창’ 소나타 2악장과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그리고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사랑의 죽음’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입니다.

 

백건우가 세 곡을 고른 작곡가는 뜻밖입니다. 추모 음악회와 쉽게 매치가 되지 않아 보이는 프란츠 리스트의 곡을 집중적으로 골랐기 때문입니다. 그가 고른 리스트 작품은 '잠 못 이루는 밤, 질문과 대답', 친구이자 사위였던 바그너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작곡한 '침울한 곤돌라 2번', 그리고 <순례의 해> 제3년 가운데 ‘힘을 내라’였습니다. 참고로 바그너의 ‘사랑의 죽음’은 원곡이 아니라 프란츠 리스트 편곡이었습니다.

 

추모 콘서트에서 리스트의 비중이 이렇게 높을 것이란 사실은 누구도 쉽게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클래식 추모 콘서트에서 리스트의 곡이 절반을 넘어 2/3를 채운 경우가 세계 클래식 음악사에서 몇 차례나 있었을까요. 기억을 더듬어보지만 얼른 떠오르지가 않습니다.

 

추모 음악회는 쉴 새 없이 드나드는 선박들과 비행기 소음으로 최악의 조건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백건우는 제주항 추모 콘서트를 통해 자신이 어떤 음악가인지를 선명하게 각인시켰습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과연 누가 리스트로 도배하다시피 한 추모 음악회를 열었겠습니까.

 

리스트가 음악사에서 최고의 비르투오조 피아니스트란 사실엔 별로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영혼이 없다느니, 기교에 치중하느라 메시지가 약하다느니 하는 낙인이 찍힌 지 오래입니다. 게다가 리스트는 그의 평전을 쓴 대다수 전기 작가들조차 ‘러블레이스’라 불렀던 인물입니다. 당시 유럽 사람들은 18세기 영국 소설가 사무엘 리처드슨의 『클라리사』란 소설 속 주인공에 빗대어 천하의 난봉꾼을 ‘러블레이스’라 불렀습니다. 많은 당대 사람들에게 리스트는 그 시대의 ‘러블레이스’였던 셈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리스트는 16살 때의 첫 사랑을 시작으로 두 딸과 아들을 낳아 준 마리 다구 백작 부인, 전 유럽을 상대로 순회 연주로 눈코 뜰 새 없었던 리스트를 설득하여 위대한 작곡가로 만든 러시아 공주 카롤리네 자인 비트겐슈타인 공작 부인이외에도 아델르 라프뤼나레드 백작부인, 마리 뒤플레시스, 댄서 롤라 몽테즈, 마리 플레이엘, 삭소니 대공의 부인 마리아 파블로프나, 그의 마지막 추문상대였던 코사크 백작의 부인 올가 쟈니냐와의 염문이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졌습니다.

 

때문에 예나 지금, 또는 서양이나 동양을 가릴 것 없이 리스트는 슬픔보다는 환희, 내면보다는 밖으로 드러나는 초절정 테크닉이 더 잘 어울리는 음악가라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세계 여러 콘서트 장에서 빈번하게 연주되는 그의 곡들도 현란함을 앞세운 초, 중기의 비르투오적 작품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리스트의 종교성과 실험정신이 빛나는 말기 작품들은 예전과는 비할 바가 아니나 지금도 여전히 콘서트에서 듣기 힘듭니다. 이런 클래식 음악계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백건우가 세월호 추모 콘서트 레퍼토리를 리스트 중심으로 구성했다는 점은 그래서 충격입니다.

 

한반도를 삼켜버린 슬픔 앞에서 백건우의 내면을 사로잡았던 피아노 작곡가가 바흐, 브람스, 슈만, 슈베르트,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메시앙의 피아노 작품이 아니라 악마에게 영혼을 판 메피스토펠레스란 오해를 시달린 리스트였다는 사실은 그래서 놀랍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백건우가 작년 8월 16일 있었던 가톨릭 제266대 교황이 집전하는 순교자 124위 시복식 미사 때도 리스트를 들고 나왔다는 점입니다. 50여 만 명이 운집했던 광화문 광장의 식전 행사에서 백건우는, 성 프란체스코를 주제로 쓴 리스트의 ‘두 개의 전설’ 중 ‘새들에게 설교하는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를 연주했습니다.

 

백건우가 이 곡을 선택한 것은 평생 겸손하게 무소유를 실천하며 가난한 자들을 위해 헌신한 성 프란체스코를 자기 이름으로 선택한 교황에 대한 고마움과 화답의 차원이었습니다. 이때도 언론은 백건우가 공연에 필요한 제반 경비를 스스로 부담하고, 사전에 잡혀있던 연주 일정을 변경한 사실을 보도하였습니다.

 

백건우는 1982년 파리와 런던에서 당시까지 거의 연주가 안 되던 리스트의 후기 작품 50여 곡을 6주간 연속으로 연주하여 세계를 놀라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리스트 탄생 200주년이던 2011년 6월에도 그는 서울에서 이틀 동안 그의 곡만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백건우는 세월호와 교황 축하라는 단 두 번의 공연으로 “‘초절정 테크닉’, ‘음악계의 카사노바’란 자극적인 수식어”에 가려졌던 리스트의 “‘철학적 심오함’, ‘종교적 경건함’, ‘음악적 혁신’”을 세상에 알린 것입니다.

 

백건우는 왜 리스트의 작품으로 세월호의 아픔과 프란체스코 교황의 역사적 방한을 축하한 것일까요. 슬픔과 기쁨 모두로 빼어난 작품을 쓴 작곡가가 리스트였던 게 첫째 이유입니다. 다음으로는 리스트의 세례명이 프란체스코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그의 세례명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긴 하지만 말입니다. 게다가 리스트는 젊은 시절의 2년 동안을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 보내기도 했습니다. 작년에 한국을 방문했던 교황처럼 프란츠 리스트도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를 흠모하였고, 그래서 그를 주제로 두 곡의 작품을 남겼던 것입니다.

 

 

 

 

 

《위대한 음악가들의 영적 생활》을 쓴 패트릭 카바노프가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한 게 아니라면, “리스트는 평생 동안 열정적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16살 때 이미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즐겨 읽었고,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자들, 그리고 사도들의 생애에 대한 관심이 많아 어려서부터 부모를 성가시게 했습니다. 어머니로부터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를 들으며 종종 감동의 눈물을 흘렸고, 사제가 되고 싶으니 신학교를 보내달라고 부모님을 자주 조르기도 했습니다. 그의 부친 아담 리스트는 아들을 이렇게 설득했습니다.

 

너는 음악에 속해 있지, 종교에 속해 있지 않다. 하나님을 사랑해라. 선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어라. 그러면 너는 음악에 있어서 최고의 정상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음악은 하나님이 너에게 부여하신 은사이고 네가 담당하도록 예정하신 소명이다.

 

17살 때도 리스트는 다시 한 번 파리 신학교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사제가 되는 것이 “성자들의 삶을 살도록 해주고 어쩌면 순교자들의 죽음을 죽게 해 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리스트는 “하늘나라처럼 자명한 것은 아무 데도 없”다고 생각했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긍휼하심과 같이 그렇게 진실하고 풍요로운 것” 또한 없다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믿었습니다.

 

리스트는 1859년에 20살 된 아들 다니엘을, 1862년 9월에는 장녀를 잃고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51살이던 리스트가 그 무렵 어머니에게 쓴 편지가 남아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저의 모든 허물과 잘못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삶을 믿는 나의 믿음을 흔들어 놓을 만한 것은 아무도, 그리고 아무 것도 없었”다는 내용으로 말입니다.

 

몇 년 뒤에는 그는 그란(Gran) 대성당 봉헌식을 위해 <장엄미사>를 썼습니다. 바그너에게 쓴 편지에서 리스트는, “나는 이 미사곡을 작곡했다기보다는 기도드렸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에 <시편 13편>의 작곡이 마무리되자 리스트는 이 곡을 ‘울부짖는 피’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생애 후반으로 갈수록 리스트의 작품은 더욱 진지하고 심오해졌던 것입니다.

 

그의 대표적인 종교음악 중 하나이고, 연주 시간이 3시간이나 걸리는 오라토리오 <그리스도>의 가사를 리스트는 직접 썼습니다. 당시 리스트는 가장 빼어난 피아니스트와 작곡가였을 뿐 아니라 40여 편의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고, 바흐와 베토벤을 비롯한 이전 시대의 음악가는 물론 바그너와 베를리오즈 등 당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초연한 실력 있는 지휘자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리스트는 최초로 쇼팽의 전기를 썼고, 젊은 시절부터 교회 음악과 당시 음악가들의 신분 보장에 대하여 의미 있는 글을 발표한 글쟁이이기도 했습니다. 리스트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언젠가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십자가에 대한 열정적인 갈망, 그리고 십자가를 높이는 것이 언제나 나의 진실하고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소명이었다.

 

이제까지 거칠게 살폈듯 리스트는 한마디로 규정하기가 쉽지 않은 사람입니다. 생의 대부분을 숱한 여성에 둘러싸여 살았으나 어려서부터 깊은 신앙의 체험을 경험한 그였습니다. 무신론이 대세였던 시대를 살면서 평생 기독교 신앙을 떠나지 않았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리스트는 모순덩어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천재의 허영심과 관대함, 호색, 종교성, 속물근성, 서민기질, 그리고 문학적 갈망과 환상”이 자연스럽게 공존했으며, 그의 인품은 바이런적이자 카사노바였습니다. 어떤 순간에는 메피스토펠레스 같다가 또 다른 순간엔 성 프란치스코였습니다. 낭만주의 시대의 특징을 “예술, 정치, 종교에 있어서 많은 모순들을 양산”한 시대라 부를 수 있다면 그 측면에서 리스트에 필적할 인물은 없지 싶습니다.

 

때문에 리스트는 우릴 고민에 빠트립니다. 선택을 강요합니다. 가장 쉬운 길은 리스트를 천하의 바람둥이라고 욕하며 그의 음악을 쓰레기통에 처박는 것입니다. 아니면 대다수 사람들처럼 그가 연주자에게 요구하는 현란한 테크닉을 즐기며 골치 아픈 그의 인생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제3의 길은 그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대신 꼭꼭 숨겨둔 자신의 편견과 고집과 독선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만 모순덩어리인 리스트의 삶에 손을 내밀 수 있겠고, 포옹을 위해 두 팔을 벌릴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아니, 예수가 그랬듯 아직도 문제 가운데 있는 리스트의 친구가 되고, 그로부터 배우며 그와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다음에 계속)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 저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지강유철의 음악정담(21)

 

음악사에 등장한 원조 오빠 부대

- 프란츠 리스트(1) -

 

 

음악가 평전을 쓸 기회가 생긴다면 저는 고민하지 않고 프란츠 리스트(1811-1868)를 선 선택하겠습니다. 리스트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나 닮고 싶은 음악가가 아닙니다. 그를 좋아하지만 바흐처럼 존경하지는 않습니다. 구스타프 말러처럼 리스트가 제 취향인 건 맞지만 그는 좀처럼 저를 미치게 만들진 않습니다. 그러니 리스트는 제게 최고일 순 없습니다. 미치게 만들지 못하는 음악이라면 2프로 부족하다는 것이 제 생각이니 말입니다. 음식에 비유하자면 리스트는 외식에 가깝지 외국에 오래 체류할 때 너무도 먹고 싶은 김치나 쌀밥이나 짜장면 같은 주식(主食)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쓰고 싶은 음악가 평전은 제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바흐나 좋아하는 베토벤이나 브람스나 말러가 아니라 프란츠 리스트입니다.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우선 바흐, 베토벤, 브람스, 말러의 평전은 많습니다. 한국인 저자의 평전도 여러 권이 나와 있습니다. 앞으로도 바흐, 베토벤, 브람스, 말러 평전은 틀림없이 계속 나올 것입니다. 그러니 굳이 저까지 나설 이유가 없습니다. 더 잘 쓸 자신도 없구요. 그러나 리스트는 다릅니다. 1990년대 초반에 Humphrey Searle이 쓴리스트의 음악세계가 번역되긴 했지만 오래 전에 절판되었습니다.

 

리스트 평전을 쓰고 싶은 두 번째 이유는 그를 통해 그 시대와 음악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몸이 그 시대 음악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점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리스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와 교류했던 바그너, 베를리오즈, 쇼팽은 물론 그와 음악적 입장이 달랐던 브람스, 슈만, 한슬리크도 알아야 합니다. 그의 음악에 상당할 정도로 영향을 준 괴테, 바이런, 실러, 조르주 상드, 빅토르 위고, 들라크루아, 하인리히 하이네, 생시몽, 뮈세 등의 작가나 화가, 1830년과 1848년의 혁명, 그리고 민족주의가 당시 유럽 음악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는지에 대한 이해도 필수입니다.

 

물론 어느 시대 어떤 음악가도 시대와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해 모르고 한 사람의 평전을 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19세기에 유럽을 근거로 활동했던 인물일 경우는 그가 음악가이든 문인이든 화가이든 관계없이 시대와 여타 문학이나 예술에 대한 이해가 훨씬 더 중요해집니다. 빠르게 시대가 변하면서 그로 인해 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생겼고, 문학, 미술, 음악가들 사이의 교류가 그 이전이나 이후 시대와는 비교불가였기 때문입니다.

 

 

 

 

 

리스트 평전을 쓰고 싶은 마지막 이유는 오늘의 한국 사회, 특히 한국교회가 리스트로부터 들어야 할 말이 많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이 땅에서 태어난 개신교인이 아니었다면 굳이 리스트 평전을 쓰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리스트가 나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개신교인이었다면 어땠을까를 떠올리면 그 상상만으로도 아찔해집니다. 나와 신앙생활을 함께 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이 그에게 드러낼 적의나 비난이 눈에 선하기 때문입니다.

 

리스트를 가장 좋아하거나 존경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평전을 쓰고 싶은 이유는 그가 받는 부당한 오해와 비난에 대한 연민 때문입니다. 그의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고 싶은 것입니다. ‘박근혜 빠가 되어 그가 무슨 짓을 하든 무조건 옹호하는 리스트의 가스통 할배를 자처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10을 잘못했는데 100을 잘못한 것처럼 비판하는 것을 바로잡지는 못하더라고 그게 부당하다는 점을 알리고 싶은 것입니다.

 

리스트는 몇 가지 측면에서 서양 음악사를 새롭게 쓰게 만든 인물입니다. 그는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의미의 피아노 독주회를 처음 시작한 인물이었습니다. 리사이틀이란 표현의 원조 내지 원작자도 리스트였고, 몰려드는 관객 때문에 피아노 뚜껑(lid)을 열고 연주를 시작한 것도 리스트였습니다. 당시까지의 관행은 관객석에서 보았을 때 오른쪽에 피아노를 배치하였지만 리스트는 피아노를 왼쪽으로 옮겼습니다. 옆모습에 자신이 있었고, 어느 도시에서 연주회를 열거나 주관객은 돈 많은 여성 팬들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얼굴 옆선이 잘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리스트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진이나 미술 작품의 십중팔구는 그의 옆모습을 그렸습니다.

 

리스트가 시작한 또 하나의 관행은 마스터 클래스, 즉 공개레슨을 처음 시작한 마에스트로였다는 점입니다. 그는 레슨으로 돈을 버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피아니스트는 연주회에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스트는 무료 레슨을 장기간에 걸쳐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렇게 그가 길러낸 제자가 400명이라고 음악사가들은 적고 있습니다. 때문에 리스트는 피아노 레슨으로 떼돈을 번 테오도어 쿨라크의 아들들에게,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을 가난한 음악가들을 위해 기탁하라는 공개서한을 쓰기도 했습니다.

 

 

 

 

리스트로 인해 생긴 또 하나의 현상은 음악사상 처음으로 오빠 부대가 등장한 것입니다. 리스트는 모든 연주 프로그램 악보를 전부 외워서 연주한 첫 음악가였습니다. 자기 곡만 외워서 친 것도 아닙니다. 그는 바흐에서부터 자기 시대의 음악가들 작품까지 레퍼토리가 당시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폭이 넓었습니다. 바로크와 고전 시대의 피아노 작품 뿐 아니라 베토벤의 교향곡 전곡, 슈베르트의 가곡, 자신이 결혼식 증인을 서 준 친구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을 피아노로 편곡하였습니다. 모차르트나 벨리니 등의 유명 오페라 아리아도 편곡하여 연주했습니다. 19세기 중반에 많은 사람들은 베토벤의 교향곡을 오케스트라를 통해서보다는 리스트의 연주를 통해 더 자주 접했습니다.

 

리스트는 평생 1300여 곡을 작곡했다고 하는데 그 중에 400곡이 피아노 편곡일 정도로 그의 음악에 있어서 편곡의 비중은 매우 컸습니다. 대부분이 자신의 연주를 차별화하고 돋보이게 하기 위한 전략이었겠지만 애정이 없이는 그 긴 세월 동안 이렇게 많은 작품을 편곡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많은 여성들은 그의 연주를 보며 실신하고, 꽃 대신 보석을 던지고, 연주 도중 피아노 와이어가 끊어지면 그걸 쟁취해서 목걸이를 만들어 걸고 다녔습니다. 연주가 끝나면 그를 만지기 위해 몰려들었고, 어떤 여성은 리스트가 피우다 버린 궐련을 죽을 때까지 간직하기도 했습니다. 리스트가 얼마나 빼어난 연주를 했고, 그의 인기가 어느 정도로 하늘을 찔렀는지는 몇몇 기록이 입증합니다.

 

 

 

 

리스트는 1839-1847년 사이에 서쪽 포르투칼에서 아일랜드까지, 동쪽으로는 터키에서 루마니아를 거쳐 러시아까지 유럽에서 총 1000여 회의 독주회를 개최했습니다. 리스트를 가장 열렬하게 환영하였던 러시아의 모스크바 연주회 때는 일주일 만에 4만 프랑을 벌었고, 1840년대의 7년 동안 그가 순회 연주로 벌어들인 돈은 22만 프랑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베토벤 탄생 75주년을 기념해서 베토벤 기념상을 독일 본에 세울 때나 사회적으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자선 음악회를 많이 열었고, 거기서 생긴 수입을 통 크게 쾌척했습니다. 리스트가 가는 곳마다 여성들의 집단적 히스테리가 얼마나 심했으면 하인이리 하이네가 리스토마니아란 신조어를 만들어냈겠습니까.

 

음악사가들은 역사상 가장 피아노를 잘 친 연주자로 리스트를 꼽는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남긴 피아노 작품들의 테크닉은 당시 대다수 피아니스트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었고, 그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대연습곡>이나 <초절기교 연습곡> <B단조 소나타> 등은 현대의 피아니스트들에게도 쉽지 않은 난곡입니다. 1830124, 그러니까 그가 19살 때 리스트는 파리에서 파가니니의 연주를 보고 충격에 빠집니다. 그 이후 리스트는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겠다고 작심하고 하루에 14시간씩 피아노를 치면서 초절기교를 완성했습니다.

 

모차르트가 1781년 크리스마스 전야 때 프란츠 요제프 2세 앞에서 클레멘티와 피아노 대결을 펼쳤듯 리스트도 탈베르크(1812-1871)라는 당대의 빼어난 비르투오조와 연주 대결을 펼쳤습니다. 지금은 거의 아무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에드바르트 그리그(1843-1907)가 자신의 바이올린 소나타 악보를 들고 말년의 리스트를 찾아 온 일이 있습니다. 존경하는 선생으로부터 작품에 대한 평가를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때 리스트는 초견(初見)으로 즉석에서 그 곡을 연주했습니다. 요즘처럼 인쇄된 악보가 아니고 손으로 그린, 때문에 그의 필적에 익숙하지 않으면 금방 잘 안 읽히지 않는 악보였는데 말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리스트가 피아노 반주는 물론 그 위의 바이올린 파트까지 빼놓지 않고 다 연주했다는 사실입니다. 훗날 그리그는 넋이 나갔던 당시 상황을 단 한 줄로 요약했습니다.

 

나는 어린애처럼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리스트는 75살에 딸도 만나고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트리스탄 이졸데>를 보기 위해 바이로이트로 갔다가 폐렴에 걸려 타계했습니다. 죽기 11일 전 룩셈부르크의 콜파흐에서 마지막 연주회를 가졌는데요. 당시 연주회에 참석했던 사람은 언뜻 보기에 움직이기도 힘들어 보이던 노인 리스트는 일단 무대에 올라서자 기적처럼 청년으로 변해버렸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지금도 그의 조국 헝가리 부다페스트 6구 뵈뢰스마르티가 35번지 2층에 있는 리스트 박물관에는 베토벤이 말년에 사용했던 브로드우드 피아노(에스파냐의 출판업자 갈 리가 소장하고 있다가 리스트에게 선물한)와 그리그와 그의 친구들이 선물한 은으로 만든 보면대가 놓여있다고 합니다. 그토록 베토벤이 되고 싶었던 리스트가 애지중지하던 피아노가 궁금합니다. 베토벤과 리스트의 손때가 뭍은 그 피아노를 볼 수 있는 날이 제게도 올까요? 그러면 좋겠습니다. (다음에 계속)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 저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지강유철의 음악정담(20)

 

로시니와 채현국의 이중창

 

 

지오아키노 로시니(1792-1868)는 이태리 페사로 출신의 작곡가입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가 중 한 사람이었던 그가 1816년에 작곡한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는 1825년에 미국에서 최초로 공연된 이태리 오페라라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1842년에 초연된 십자가 앞에서 통곡하는 마리아의 노래 <스타바트 마테르>는, 그 해에 유럽의 29개 도시에서 공연이 될 정도로 반응이 대단했습니다. 볼로냐 초연 때 이 곡을 지휘했던 도니체티는 초연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 열광은 말로 표현하는 게 불가능하다. 마지막 리허설이 끝나자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귀가하는 로시니를 집까지 따라가며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첫 공연 뒤 청중은 모두 그의 집으로 몰려가 창문 아래 둘러서서 ‘로시니’를 외쳤다.

 

오죽했으면 울리케 팀이 그의 책 《오케스트라》에서, “1816-1830년까지 유럽을 휩쓸었던 로시니 열풍은 아마도 1960년대의 비틀즈 열풍과 비교할 만한 것”이었다고 썼겠습니까. 1823년 베네치아에서 발표한 오페라 <세미라미데>가 혹평을 받고 파리로 옮긴 일을 제외한다면 로시니는 평생 실패를 몰랐던 작곡가였습니다.

 

하지만 로시니가 당시 유럽에서 호불호가 분명한 작곡가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로시니의 음악은 주로 드라마틱한 음악을 선호하는 프랑스와 이태리 사람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반면에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나 영국에서는 그의 음악을 못 견뎌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가 혁명을 지지하는 진보가 아니라 타도의 대상이었던 구체제 사람들과 친했다는 점도 어느 정도 작용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로시니를 좋아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가장 성스러운 음악 중 하나인 <스타바트 마테르>마저 너무 화려하게 작곡하는 그의 스타일 때문일 것입니다. 종교 음악이란 대성당에서 오르간과 합창으로 슬픔을 내면화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보수적인 사람들에게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는 견딜 수 없는 불경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교회음악에는 ‘오페라와 교회 음악의 잡종’ 내지 ‘세속화된 교회 음악’이란 낙인이 찍혔습니다. 바그너는 <스타바트 마테르>의 성공에 배가 아팠는지 모르겠지만 “로시니가 신앙심이 깊다고 말한다면 온 세상이 ‘신앙 그 자체 일 것’이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러나 독일인 중에 철학자 프리드리히 헤겔이나 하인리히 하이네처럼 로시니에 열광하는 이들이 없진 않았습니다.

 

이념적으로 하인리히 하이네는 혁명을 지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때문에 망명을 선택하고, 자신의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조국의 개혁을 말한 시인이었습니다. 반면에 로시니는 1830년 프랑스 혁명 때 로시니는 프랑스로부터 받던 종신연금을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되자 6년의 법정투쟁을 불사한 외국인이었습니다. 연금도 연금이었지만 혁명 때문에 그 이전에 자기와 구축해 놓았던 파리의 오페라 극장과의 관계에도 적잖게 문제가 생겼던 것입니다. 1848년의 이태리 혁명 때는 반동으로 몰리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이네에게 로시니는 개혁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시니를 위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로시니 선생은 최고의 마에스트로이며, 음악의 햇살을 온 세상에 비추는 이탈리아의 태양입니다. 선생의 예술적 깊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못하는 가련한 우리 독일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들이 선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선생의 음악이 장미꽃으로 뒤덮여 있어, 사색적 무게와 철저함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독일인들은 선생의 음악이 너무나 가벼운 날개를 달고 천상을 날아다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로시니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우선 그는 그의 인기가 절정이었던 1829년 <기욤 텔>(독일어권에서는 빌헬름 텔, 영어권에서는 윌리엄 텔로 표기)이란 오페라 발표를 끝으로 사실상 은퇴를 한 사람입니다. 이때 그의 나이 37살이었습니다. 자신의 인기가 절정인데다가 기량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로시니는 미련 없이 그 자리를 걷어찼습니다. 그의 이름 하나만으로 흥행 보장되었던 터라 많은 사람들이 다시 오페라를 써 달라고 졸랐지만 로시니는 39년 동안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고 살다가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로시니의 조기 은퇴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워낙 게으른 사람이라서 오페라 작곡을 포기했다고 수군댔습니다. 로시니는 14살에 오페라를 처음 작곡하여 37살까지 무려 37개의 오페라를 작곡했습니다. 1813년에는 한 해 동안 무려 4개의 오페라를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오페라 <기욤 텔>의 상연 시간이 5시간이나 걸리는 것에서 알 수 있듯 한 편의 오페라는 1-2시간이 기본입니다.

 

오페라는 극장을 잡아야 하고, 오케스트라와 합창을 연습시켜야 하고, 무대 세트를 만들어야 하고, 가수들의 연기와 노래를 지도해야 하는, 그래서 한 작품이 무대에 오르려면 작곡이 끝난 이후 최소 몇 개월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런 오페라를 로시니는 25년 동안 37편을 작곡했을 뿐 아니라 대다수 작품들을 연습시켜 무대에 올렸습니다. 이는 사실 로시니가 25년 동안 작곡기계 그 자체였다는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바쁘게 젊은 시절을 보낸 로시니가 게을렀다? 이는 사실과는 너무 다른 추측입니다.

 

로시니가 급변하는 시대의 음악적 요구를 따라잡을 수가 없어서 작곡을 포기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또한 믿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그가 1842년에 초연한 <스타바트 마테르>와 1864년에 발표한 <작은 장엄미사>는 그를 대표하는 걸작 중 하나라는데 이견이 별로 없습니다. 작곡 능력을 잃었기 때문에 오페라를 더 이상 쓰지 않았다? 그 또한 신빙성이 떨어지는 얘깁니다. 평생을 괴롭힌 질병 때문에 조기 은퇴가 불가피했다는 동정론도 있습니다. 이는 일리가 없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는 요리하는 일을 더 좋아해서 오페라 작곡을 포기했다는 주장입니다. 로시니는 대단한 미식가였습니다. 윈디 톰슨은 그에 관한 유명한 일화를 전해 줍니다.

 

한 기자가 로시니에게, “당신은 대중 앞에서 평생 단 두 번밖에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하고 물었다. 한 번은 세비야의 이발사 초연이 실패한 이후에, 그리고 또 한 번은 피크닉 도중 송로버섯이 채워진 너무나 맛난 칠면조 요리가 강물에 빠졌을 때를 말한 것인데, 로시니는 한참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니요, 단 한 번, 칠면조가 강으로 빠졌을 때 뿐입니다.”

 

로시니는 요리책을 썼고, 아직도 그가 만든 요리 이름과 레시피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진실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 로시니가 이 대목에 대해 분명한 언급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로시니는 죽을 때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아내 펠리시에가 죽으면 고향 페사로에 자기 유산을 기부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가 자신의 유산을 페사로의 음악 발전을 위해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조기 은퇴와도 관련이 없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로시니는 은퇴 이후에 자기가 조명을 받으며 무대에 오르기보다는 후배 음악가들을 세워주는 일에 더 열심이었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의 유지에 따라 페사로에는 음악원이 창립 되었습니다. 그의 유산으로 설립된 로시니 음악원은 지금도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매년 여름 페사로에서는 로시니 음악만으로 음악 페스티벌이 열립니다. 로시니의 오페라를 부르는 가수들에는 한 번쯤 꼭 서야하는 꿈의 무대라고 합니다.

 

우리가 로시니를 주목해야 세 번째 이유는 그가 당시 사회와 자신의 늙어 감을 주제로 150여 곡을 작곡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1829년에 로시니가 조기 은퇴했다는 것은, 오페라가 가장 중요했던 시대에 가장 뛰어난 오페라 작곡가로 추앙받던 그가 더 이상 오페라를 쓰지 않았다는 의미이지 작곡 자체를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은퇴 이후 그가 남긴 최고의 작품은 1842년의 <스타바트 마테르>와 1864년의 <작은 장엄미사>입니다. 로시니는 1857년부터 죽을 때까지 10여 년 동안 약 150여 편의 피아노, 성악, 실내악 작품을 남겼습니다. 피아노 소품이 가장 많고 성악곡과 기악곡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로시니는 이 150여 편의 모든 작품을 <늙은이의 못된 짓>(Les Peches de vieillesse)이란 제목으로 묶었습니다. 1868년, 그러니까 그가 죽던 해에 로시니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음악은 오직 관념과 감정 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관념과 감정은 모두 증기와 약탈과 바리케이드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1822년 내가 이탈리아에서 활동을, 그리고 1829년에 프랑스에서 내가 활동을 포기한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총 14권으로 이루어진 《늙은이의 못된 짓》에는 그가 그렇게 좋아했던 ‘낭만주의적인 다진 고기 요리’와 같은 음식, 그의 삶을 결정적 위기로 몰아넣었던 1830년 프랑스와 1848년 이태리 혁명에 대한 불편함, 그리고 동료 작곡가들에 대한 풍자 등을 담고 있습니다. 이 작품집에는 ‘즐거운 기차여행의 우스꽝스러운 묘사’도 있고, 자신의 친구 마이어베어를 소재로 한 ‘분수에 맞는 장송가, 나의 가난한 친구 마이어베어’도 있습니다. ‘내 아내에게 부리는 응석’도, ‘구체제의 견본’이나 ‘현대의 견본’과 같은 시사적인 작품도 보입니다. 그런가하면 이태리나 프랑스를 여행한 것이 한 권으로 묶였고, ‘천식 환자의 연습곡’, ‘어떤 마주르카의 잘못된 탄생’ 등 그가 그토록 좋아했던 음악에 관련된 곡도 많습니다.

 

오늘의 한국에서도 로시니는 여전히 오페라 작곡가로 사랑을 받습니다. 아주 적은 수의 마니아들이 그가 쓴 <스타바트 마테르>나 <작은 장엄미사>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늙은이의 못된 짓>이란 제목으로 묶인 그의 말년의 소품들은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음악을 즐겨 듣는 사람이야 두말 하면 뭐하겠습니까.

 

 

 

 

사실 얼핏 들으면 대다수 《늙은이의 못된 짓》에 나오는 소품들은 우리의 시선을 잡아끌 만큼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배경 음악으로 적합하고 여흥에 더 그럴듯합니다. 물론 로시니가 능력이나 경험이 부족해서 이런 소품들을 작곡한 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 세계를 열광케 할 오페라를 써 달라는 유혹을 뿌리치면서 로시니는 이런 음악을 썼던 것입니다.

 

로시니는 이런 소품을 10여 년 간 작곡하면서 친구들과 어울렸습니다. 저는 로시니 삶의 모토에 충실했다는 이 한 마디가 웬만한 목사의 설교 한 편보다 더 믿음이 갑니다. 물론 그 이유는 그의 76년의 삶이 이 한 문장을 보장하기 때문이고, 음악가에게서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먹고, 사랑하고, 노래하고, 소화시키는 것, 이것이 ‘인생’이라 부르는 희극 오페라의 네 가지 핵심 행위이다. 이 오페라를 즐기지 못하고 흘려보내는 사람은 정말 바보다.

 

‘가스통 할배’들로 인해, 그리고 노욕을 버리지 못한 정치권과 경제계와 종교계 노인들로 인해 한국 사회는 스트레스와 피곤이 이만저만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더 이상 늙음은 영광도 슬기로움도 아니게 되어버렸습니다. 채현국 할아버지의 등장에 그토록 많은 젊은이들이 열광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겠습니까.

 

아무도 대놓고 말할 수 없었던 늙은 꼰대의 욕망에 채현국은 통렬한 펀치를 날렸습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 사회 일부에서는 폐기해버렸던 노인의 지혜와 연륜을 다시 꺼내들었습니다. 로시니와 채현국을 닮은 노인들이 많아지는 것을 기대하기엔 너무 늦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두 할아버지를 닮고 싶은 젊은이들은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떠날 때를 알고, 재산이든 재능이든 이웃과 나누고,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음악과 일을 상대화 할 줄 아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 저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지강유철의 음악정담(19)

 

애국가에서 묵도송으로

 

 

단지 애국가를 부르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종북으로 몰리는 요즘의 시각으로 보자면 황당하겠지만, 제게는 한 때 애국가를 근사하게 지휘해 보고 싶은 꿈이 있었습니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애국가의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을 처음 들으며, 그러니까 바이올린 파트가 한 옥타브 높은 피아니시모로 연주하는 애국가 세 번째 연을 들으며 넋이 나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제겐 꿈이 하나 생겼습니다. 좋은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어서 애국가를 근사하게 연주해보는 꿈 말입니다.

 

 

 

 

춘천 강원고등학교 시절에 언감생심 콘닥터를 저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첫째 조건이 큰 키였는데 제 키는 밴드부에서 가장 작은 축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2학년 말에 서울로 전학했는데 어쩌다 보니 콘닥터가 되었습니다. 친구들 입장에서는 굴러 온 돌이 박힌 돌을 뺀 셈이 되어버렸고, 전학 온 제 입장에서는 횡재였습니다.

 

당시는 월남 패망의 여파 때문에 궐기대회가 많아 밴드부가 바빴습니다. 게다가 저는 차범근, 김강남, 박항서 등을 배출한 축구 명문으로 전학을 했기 때문에 동대문 서울운동장 응원 행사에 자주 동원됐습니다. 서울 지리와 교통 법규를 잘 모르는 촌놈이 콘닥터로 앞장을 서다보니 대로에서 밴드부가 갈팡질팡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가끔 연출되었습니다.

 

 

 

 

 

박정희가 장기 집권을 하고 있던 시절에는 크고 작은 콘서트가 모두 애국가를 연주해야 시작되었습니다. 관객은 연주자들이 애써 준비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애국가 연주부터 들어야 했습니다. 가끔은 녹음된 애국가가 라이브 연주를 대신했습니다. 그런 시대상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밴드부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마스터해야 할 곡이 애국가와 교가였습니다.

 

교회 성가 연습이나 밴드부 합주 때 제일 안 되는 것이 피아니시모였습니다. 실력이 없는 놈들은 피아니시모뿐 아니라 포르티시모도 못하지만 말입니다. 그때 우리의 관심은 단 하나, 피아니시모를 잘 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함께 내는 가장 작은 소리가 때로는 심오하고, 황홀할 수 있다는 진실을 우린 그때 몰랐습니다. 아무리 작게 소리를 내도 더 작게 내라며 눈을 부라리는 지휘자의 요구를 맞추기에 급급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교회든 학교 밴드부든 작은 소리를 잘 내는 요령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우리 선배들은 피아니시모가 지금 이 대목에서 왜 중요한지, 그리고 잘 연주된 피아니시모가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서는 가르쳐주지 않은 채 덮어놓고 작게 내라고 윽박지르기만 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애국가에 넋이 나갔던 그 사건은 피아니시모에 대한 이런 그릇된 오해를 단 몇 초 만에 바꾸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애국가를 근사하게 지휘해 보고 싶다는 제 꿈은 10·26, 12·12, 5·18, 6·10을 거치면서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국가에 대한 회의가 시작되었고, 애국가가 과도하게 중요해지는 현실에 나까지 애국가에 힘을 보탤 필요가 있겠나 싶었습니다. 급기야 애국가를 불렀느냐 안 불렀느냐 따위로 종북 딱지까지 붙이려 드는 현실을 만나고 나니 더는 애국가를 근사하게 연주해 보고 싶은 꿈을 간직할 이유가 없더군요. 그래서 애국가에 대한 꿈을 미련 없이 휴지통에 처넣었습니다.

 

애국가의 빈자리가 채워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저런 자리에서 감동을 받았던 곡들이 빈자리를 대신한 것입니다. 그 곡들 중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곡은 에반스H. R. Evans가 작곡한 축복입니다. 산상수훈의 8복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이 곡이 좋아질 무렵 제게는 조그만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당시 담임 목사는 사회적으로 꽤나 높은 자리에 있는 교인을 안수 집사로 세우고 싶어 했습니다. 교역자 회의에선 그 점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높으신 양반은 공동의회에서 2/3의 지지를 얻지 못했습니다. 주일 평균 출석이 100여 명을 조금 넘는 교회에서, 공사가 다망하다는 이유로 주일에 얼굴 뵙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웠고, 지금은 그게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조그만 가정적인 결격 사유도 쉽게 용납되지 않았던 경직된 분위기 탓에 표를 많이 못 얻었던 것입니다.

 

엉뚱하게도 그 불똥은 제게로 튀었습니다. 반대표의 근거지로 제가 지휘한 성가대가 지목되었던 것입니다. 그 교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두 분의 장로가 우리 성가대에 열심 있는 대원으로 있었는데, 제가 두 장로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쳐 될 사람이 떨어졌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렇게 미운 털이 박혀 있던 어느 주일에는 지도하던 청년부 주보에 쓴 칼럼이 문제가 되어 연습을 시키다말고 불려갔습니다. 연습하기도 짧은 시간에 엄한 꾸중을 듣고 주일 찬양을 했는데, 그날 찬양이 마침 축복이었습니다. 묘한 우연이었습니다.

 

눈물을 억누르지 못하고 축복 지휘를 했습니다. 그 이후 이 곡을 더 아끼게 되었던 것은 물론입니다. 몇 해 동안은 송구영신 예배 때마다 이 곡을 찬양했고, 임직식이나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야 할 때도 자주 꺼내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이 곡이 눈에 보였습니다. 곡의 마지막인 하늘의 상이 크도다라는 부분을 에반스가 어떤 마음으로 작곡했는지를 알 것만 같았습니다.

 

그 뒤로는 악보가 아니라 종말의 심판 장면이 머리에 그려졌습니다. 여기저기 연주를 들어보아도 저처럼 해석하는 연주는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 해석만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경험 때문에 이 곡을 마음속에 오래 간직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곡으로 찬양하려고 할 때마다 주저했습니다. 맡았던 여러 성가대들에는 이 곡의 바리톤 솔로를 제대로 불러줄 만한 솔리스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목소리가 되는 성악 전공자이면 깊이 있는 해석이 아쉽고, 지휘자가 표현하려는 것을 잘 알아차린 비전공자는 목소리가 따라주지 못하는 식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제 가슴에 오래 머물렀던 곡은 가사도 곡도 내세울 것이 없는 소박한 노래였습니다. 좀 보수적인 분들이라면 이런 곡을 어떻게 주일 예배 때 성가대 찬양으로 올릴 수 있느냐 따질 정도로 말입니다. CCM 전문 작곡가로 알려진 윌리엄 게이더William J.Gaither의 작품인데다 70-80년대에 유초등부 아이들이 즐겨 불렀던 곡이었거든요. 쉬운 걸로 치자면 개척 교회 성가대도 소화할 만한 수준이었습니다.

 

소박한 이 곡을 사랑하게 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 노래를 부르거나 지휘를 할 때면 냇가에서 놀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그때 제 또래의 아이들은 여자 남자를 가릴 것 없이 예쁜 조약돌을 주웠습니다. 냇가에서 주을 때도 있었지만 머리를 처박고 흐르는 물속에서 찾기도 했습니다. 이 노래는 묘하게도 그때의 동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제 기억 속에는 이 노래의 가사가 두 개 버전으로 존재합니다. 애착을 가졌던 가사는 어린이들이 주일학교 예배 때 부르던 바로 그 가사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옛 버전 가사에서 좋아했던 바로 이 대목만 기억합니다.

 

사랑하며 섬기겠어요.

생명주신 예수님

버려진 날 찾아오셔서

내게 생명주셨죠.

 

현재 제가 소장하고 있는 성가곡집에 나온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으로 주를 섬기리/새 생명을 주셨으니/주가 나를 찾으시기 전/아무것도 아닌 나/슬픔 상한 심령/그를 위해 주님 죽으셨네/주 손길 갈망했었네/새 생명을 주셨네.”

 

이 찬양도 지난 20여 년 동안 꽤 여러 번 지휘를 했습니다만 만족할 만한 연주는 아직 못했습니다. 버려진 날 찾아오셨던 주님에 대한 감격을 표현하는 일이 제겐 역부족이었나 봅니다. 이 곡을 다시 지휘해 볼 날이 올까요? 그러면 좋겠습니다.

 

 

 

 

나이를 더 먹으니 애국가를 대신했던 빈자리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아직도 브람스의 레퀴엠 6번째 곡인 여기엔 영구한 도성이 없고”, 멘델스존 2번 교향곡 <찬양의 송가> 7번 합창 이제 밤 지나고”, 알레그리의 미제레레등은 여전히 근사하게 지휘해 보고 싶은 레퍼토리입니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이나 <B단조 미사>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F장조 미사> BWV 233이나 교회 칸타타들이라도 지휘해볼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헨델의 <유다 마카베우스>, 베토벤의 <장엄미사>,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 스트라빈스키의 <시편 교향곡>, 이건용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도 기회만 된다면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는 그런 곡을 잘 해 보고 싶은 간절함이 예전만 못합니다. 어떤 특정한 곡이 아니라 성가대라면 모두가 하는 묵도송, 기도송, 헌금송, 송영 등이 애국가의 빈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대다수 성가대원들의 의식 속에 이런 곡들은 찬양이 아닙니다. 이런 곡들은 설교 전의 찬양처럼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틀리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대원들은 일어서서 하는 그날의 찬양 때만 성가대원일까요. 속은 알 수 없지만 제겐 그렇게 보였습니다. 주로 그런 대원들이 성찬을 받을 때나 대표기도 시간엔 거기 집중하다가 찬양이 시작되고 나서야 눈을 뜹니다. 물론 기도의 내용에 집중하는 게 신자로서는 당연합니다. 하지만 기도든 성찬이든 거기에 집중하느라 자기 역할을 잊는다면 좋은 성가대원일 수는 없겠습니다. 성가대원은 예배 전에 이미 마음속에서 예배가 시작되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겨우 예배 사회자를 따라가는 형국이라면 글쎄, 저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가대원들에게 링에 올라가는 선수들 이야기를 자주했습니다. 격투기 선수들은 라커룸에서부터 이미 머릿속에서 경기가 시작됩니다. 때문에 라커룸에서부터 링으로 이동이 끝날 때까지는 오로지 준비한 전략에만 집중합니다. 코치나 감독이 말을 시켜도 고개만 끄덕입니다.

 

그런데 성가대원들에게서 링에 오르는 선수 정도의 긴장이나 하나님과 시선이 고정되어서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고요함을 발견하는 일은 여간 어렵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연습에서 모아진 하나의 마음은 예배실로 이동하는 그 짧은 시간에 웃고 이런 저런 대화를 하면서 다 허물어버리기는 일을 거의 매주일 하였습니다. 아무리 침묵 가운데 하나된 마음을 움켜쥐고 이동하라고 해도 그때뿐입니다. 마치 그런 일은 설교자나 지휘자인 너희들에게만 해당된다는 듯 말입니다. 이런 일들을 오래 겪다 보니 찬양을 잘 하면 뭔 소용이냐라는 생각이 점점 더 절실해지더군요.

 

묵도송은 음악 실력으로 잘 하는 게 아닙니다. 묵도송부터 축도송까지의 전 과정이 성가대에게는 문제가 되고, 성가대는 그 전부를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때만 묵도송이 비로소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매번 반복하는 묵도송은 그런 태도가 아니라면 새롭기가 여간 쉽지 않습니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재작년까지 지휘를 했던 교회 성가대에서는 먼 훗날 묵도송을 잘 했던 지휘자로 기억되고 싶다는 이야길 종종했습니다. 성가대의 영성은 준비된 그 날의 화려한 찬양에서가 아니라 늘 하는 묵도송에서 실체를 더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다시 지휘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8에서 16마디에 불과한 묵도송, 지난주에도 했고 다음 주에도 또 하게 될 그 묵도송에 마음을 더 오롯이 담을 참입니다.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 저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지강유철의 음악정담(18)

 

오디오에 입문하려는 J에게

 

 

J에게.이제야 답을 씁니다. 바쁘기도 했지만 말을 꺼내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새 제품을 추천할 수 있다면 모델명과 믿고 살만 한 전문 매장을 소개해 주면 그만일 테지요. 그러나 J의 호주머니 사정이 저와 별반 다르지 않기에 어떻게든 가격을 다운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다보니 생각이 많았습니다. 중고 오디오를 판매하는 오디오 전문 매장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사기를 당할 가능성을 아주 배제할 순 없지만 오디오 장터 구매를 추천하는 편이기에 답을 머뭇거렸습니다.

 

왜냐하면 비용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J에게는 그게 쉽지 않았습니다. J가 이번 오디오 마련을 위해 얼마를 마련했다고 알려줬다면 조금 수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J 역시 이쪽 경험이 없다보니 얼마의 비용이 언제 필요한지를 몰라서 말을 꺼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해합니다.

 

인터넷을 통한 오디오 장터 거래라는 것은 속성상 내가 찾는 제품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뻔질나게 오디오 사이트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사람들이 소위 명기라 부르는 기기들은 올라오기가 무섭게 거래가 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언제든 결제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꽤 여러 문제들이 해결됩니다.

 

J처럼 누군가가 거래를 도와야 할 경우는 좀 복잡합니다. 적당한 물건이 나타나면 연락을 해서 돈이 얼마가 준비되어 있느냐 물어야 하고, 그걸 받아서 입금을 해야 합니다. 거래가 성사되었더라도 인터넷 장터거래가 영수증 처리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거래한 인터넷 사이트를 알려주거나 이체 내역을 보내줘야 합니다.

 

인터넷 장터 거래 경험이 없는 J에게 사야할 제품과 판매자 연락처만 덜렁 알려주고 거래하라고 할 순 테니 말입니다. 인터넷 장터 거래에서는 사기 당하지 않는 노하우와 제품의 상태나 문제가 생겼을 경우 처리 경험이 꼭 필요하거든요. 그러다 보니 돈 이야기가 필수인데 우리 사이에 그게 참 그렇습니다.

 

제대로 오디오를 갖춰 음악을 들으려면 스피커와 앰프와 소스 기기, 즉 CD플레이어(나 DVD플레이어)가 필요합니다. 만약 J가 FM 방송을 통해 음악을 즐겨 듣는 경우라면 튜너를 따로 장만하거나 앰프를 리시버로, 즉 앰프 기능과 튜너 기능을 동시에 갖춘 복합기를 장만해야 합니다.

 

 

 

2000년대 중반에 돌풍을 일으켰던 오라노트. 튜너와 시디피와 앰프를 겸한 모델이다. 디자인 수려하고 기능 다양하고 소리까지 좋지만 200만 원대 가격이었다. 현재는 업그레이드된 오라노트 프리미어가 판매되고 있다.

 

 

음악을 제대로 들으려면 스피커와 앰프와 소스 기기 일체형, 즉 포터블 오디오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일체형도 뛰어난 음질을 자랑하는 경우가 왜 없겠습니까만, 일체형 오디오는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10여 년 전에 오디오 마니아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오라 노트’란 제품은 사이즈도 앙증맞고, 디자인도 빼어납니다. 소리 또한 훌륭합니다. 지금도 업그레이드 버전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 제품을 구매할 경우 ‘오라 노트’는 스피커를 제외하고 200만 원이 넘습니다. ‘오라 노트’와 연결하려면 최소 100만 원은 주어야 격이 맞는 스피커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제품을 J에게 어떻게 추천하겠습니까.

 

그래서 스피커와 앰프와 소스 기기를 따로 사야한다는 문제가 발생하는데, 막상 실행하려면 이게 만만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디오에도 궁합이라는 게 있어서, 아니 궁합이 절대적이어서 서로 맞지 않은 스피커와 앰프를 연결하면 500만 원을 주고 샀음에도 100만 원을 투자한 오디오보다 못한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오디오를 잘 모르는 분들은 어떻게 500만 원짜리가 100만 원짜리 보다 못할 수 있느냐, 과장이 심하지 않느냐 그러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변에 오디오 마니아들을 붙잡고 물어보면 대다수가 이 점에 동의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오디오 세계에선 그게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빈번합니다. 그래서 오디오 세계는 알수록 신비하답니다.

 

오디오를 고를 때 제일 먼저 고려해야 할 점은 음악을 듣게 될 공간입니다. 가령 층간 소음이 많은 곳에 세팅할 것이라면 굳이 출력이 강하고 비싼 오디오가 필요 없습니다. 그 오디오가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볼륨을 결코 올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40-50평 이상 규모의 집에 살면서 싼 맛에 혹해서 출력이 약한 시스템을 골랐다가는 그 역시 낭패를 볼 것입니다. 공간이 넓어지면 그만큼 출력이 강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비용이 상승합니다. 오디오는 경제력을 고려하는 만큼이나 집의 규모, 음악을 듣는 시간, 음악을 듣는 장소 등을 반드시 고려해야 가격성능 대비에서 성공할 수 있습니다.

 

오디오는 출력뿐 아니라 어떤 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이냐에 따라 소리 성향이 많이 다릅니다. 아메리카 사운드에 익숙한 사람에게 브리티시 사운드는 영 답답하고 어둡습니다. 오디오 사운드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출신 지역뿐만이 아닙니다. 남성 넥타이나 여성 스커트 길이가 시대와 유행에 따라 넓이와 길이와 패션이 달라지듯 오디오도 시대마다 지역마다 특징적인 사운드가 있습니다. 그래서 대체적으로는 지역과 시대가 다른 제품으로 오디오를 구성하는 것은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만약 스피커를 1960년대 생산 모델로 장만하고 앰프를 2000년대 것으로 마련하여 연결을 했다가는 스피커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50-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출력이 낮은 앰프가 대세였기 때문에 그 점을 고려한 스피커를 제작했습니다. 때문에 과학의 발달로, 즉 진공관을 대체한 트랜지스터의 출현으로 앰프의 힘이 장사가 된 현대 앰프와 힘이 약한 60년대 스피커를 연결했다가는 돈만 버릴 수 있습니다.

 

 

 

스피커는 빈티지로 갈수록 사이즈가 엄청나다. 그러나 빈티지는 앰프의 강한 출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트랜지스터가 발명되기 전까지 앰프가 높은 출력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이앤드 스피커들 중에는 북셀프형이 많은데 사이즈가 아주 작다. 그러나 이런 스피커는 매우 강한 출력을 낼 수 있는 앰프가 아니면 무용지물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빈티지 진공관 앰프에 최근에 만들어진 음압이 낮은 스피커를 연결하면 조금 과장하여 모기 소리만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디오는 기본적으로 전기를 이용해서 소리를 냅니다. 때문에 오디오를 설치할 공간의 전기에 따라서도 영향을 받습니다. 고가의 제품으로 갈수록 일정한 전압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 고장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오디오를 제대로 하려면 너무 많은 변수를 해결해야 합니다. 기계에 능하고 모험심이 발달한 사람에겐 이 과정을 하나하나 익히고 배워나가는 것에 매력을 느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실제로 오디오를 사서 뜯어보고 수리를 하는 정도로도 모자라 스스로 오디오를 만드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기계나 전기를 다루는데 서툰 사람은 이 과정에 지레 겁을 먹고 오디오 장만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끝이 아닙니다. 오디오를 시작하기 전엔 오디오만 장만하면 다 끝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음원, 즉 CD나 DVD(나 블루레이)를 구하는 문제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음악을 본격적으로 듣는 시간이 길어졌을 때 뒤를 돌아보면 오디오를 갖추는데 든 비용보다 음원 구입비로 더 많은 투자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날이 반드시 옵니다. 방송인 황인용 씨나 시인이면서 열혈 오디오 마니아인 김갑수 씨 같은 경우는 오디오가 워낙 고가여서 그렇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사실 듣고 싶은 음원을 제때 구하는 것도 대단한 실력입니다. 음원 문제는 단순히 비용만많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음원을 그때그때 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배워야 합니다. 주변에 오디오 마니아가 있다면 별 문제가 없겠으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먼 훗날에는 처치 곤란한 음원을 긁어모으는데 귀중한 시간과 비용을 낭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머리를 쥐어뜯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서재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은 J에게는 ‘헤드 파이’를 권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가격대비 성능’ 이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헤드 파이’를 권하는 두 번째 이유는 헤드폰과 헤드폰 앰프 단 두 개의 기기로 본격적 음악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헤드 파이’는 헤드폰으로 음악을 즐기는 것을 말하는 전문 용어입니다. 헤드폰만 있다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소스 기기가 필요합니다. 물론 오디오를 장만해놓고도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을 수는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헤드폰을 제대로 들으려면 또 다른 장비가 필요합니다. 헤드폰 앰프가 필요한 것이지요. 물론 2-3만 원짜리 이어폰이나 4-5만 원짜리 헤드폰이라면 굳이 헤드폰 앰프가 필요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전문 용어로 헤드폰의 임피던스가 60오옴(Ω) 이상이면 헤드폰 앰프를 써야 합니다. 오디오 대용으로 ‘헤드 파이’를 선택한 경우라면 60오옴 이상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헤드폰 앰프 마련은 필수입니다.

 

자기 오디오가 없다면, 즉 컴퓨터에 헤드폰을 꽂고 사용하는 경우라면 DAC(digital analog converter, 디지털 아날로그 변환기)라는 기기가 필요합니다. 일반 컴퓨터에 들어가는 사운드 카드의 음질이 좋지 않아서 사용하는 기기가 DAC인데요. 고가의 오디의 장비가 있는 경우라면 CD플레이어나 블루레이 플레이어에 장착된 DAC 성능이 좋아 따로 구매할 필요는 없습니다.

 

 

 

 

뮤질랜드 MD-11이란 DAC를 겸한 헤드폰 앰프. 가격도 부담이 없고 음질도 뛰어나서 입문기로 인기를 누린 제품이다. 상위 모델로는 MD-30이 있다.

 

하지만 컴퓨터를 통해 음악을 듣는 경우라면 DAC의 사용은 필수입니다. 최근의 오디오 업계는 어느 회사든 DAC 계발에 승부를 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고맙게도 DAC를 겸한 헤드폰 앰프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기계치들에게 헤드폰 앰프와 DAC의 복합형 제품의 출현은 복음, 즉 굿 뉴스입니다. 집이나 사무실 컴퓨터에 DAC가 장착된 헤드폰 앰프를 연결하고 헤드폰만 꽂으면 만사 오케이기 때문입니다.

 

헤드폰 앰프와 컴퓨터는 USB로 연결이 되기 때문에 USB선은 따로 장만해야 합니다. 하지만 문구점이나 컴퓨터 관련 상점에서 파는 몇 천 원짜리는 사절입니다. USB선에 따라 음질 차이가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헤드 파이’를 할 때는 연결 커넥터가 한 가지 더 필요합니다. 헤드폰 앰프의 전원선, 즉 파워케이블입니다.

 

이 역시 어지간히 비싼 헤드폰 앰프가 아니라면 몇 천 원짜리 파워 케이블이 따라옵니다. 전문 용어로 번들(bundle) 케이블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이 역시도 과감하게 포기해야 합니다. 오디오 마니아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각종 오디오 설치에 꼭 들어가는 케이블 중에서 제일 먼저 교체해야 할 것이 파워케이블이라고 말입니다. 그만큼 소리 변화가 크기 때문입니다.

 

이제 각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먼저 할 일은 헤드폰의 선택입니다. 헤드폰은 크게 밀폐형과 개방형으로 나뉩니다. 밀폐형은 외부 소음을 차단해주어서 실외에서 사용할 때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단점으로는 내 귀에는 다소 무리가 간다는 점입니다. 반면에 개방형은 좀 더 자연스러운 소리가 나지만 독서실 같은 곳에선 금물입니다. 밖으로 소리가 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즘은 유선 헤드폰과 선이 없는 블루투스 헤드폰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헤드폰은 몇 만 원 대에서 수백 만 원대까지 다양한 선택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내 주머니 사정에 따라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헤드폰도 클래식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제품과 팝이나 재즈처럼 강한 비트에서 표현력이 돋보이는 제품이 다릅니다.

 

물론 재즈든 클래식이든 두루두루 괜찮은 소리를 내주는 헤드폰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브랜드가 BOSE일 것입니다. 물론 모든 보스 제품이 싸구려란 뜻은 아닙니다. 돈을 투자하여 본격적으로 음악을 들을 요량이라면 내가 주로 듣는 음악의 장르를 고려하여 헤드폰을 선택해야 두고두고 후회하지 않습니다.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입문용 헤드폰 BOSE OE-2. 보스는 기술력은 대단하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마니아들 가운데는 BOSE를 얕잡아 보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러나 BOSE는 거의 모든 제품에서 평균 이상의 품질이 보장되는 회사다.

 

그 다음으로 선택해야 하는 것이 헤드폰 앰프인데요. DAC가 지원되는 헤드폰 앰프 역시 천차만별입니다. 컴퓨터에 장착하는 것이니 만큼 헤드폰 앰프나 DAC는 부피나 무게에 있어서 전혀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제품을 디자인할 때부터 컴퓨터 책상에 함께 올려놓아야 할 것을 전제하고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DAC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우 복잡합니다. 때문에 가격 또한 10만 원대에서 몇 천 만원까지 제품이 나와 있습니다. 아직 초보이거나 ‘헤드 파이’에 그렇게 많은 비용을 지출할 생각이 없는 경우라면 최대한 싸고 부담 없는 것으로 선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독일 젠하이저는 헤드폰의 대표적은 브랜드이다. 사진의 HDVD는 젠하이저가 출시한 HD-800이란 최고의 헤드폰을 위해 내놓은 제품이다. HDVD-800은 파워케이블이 제공되지 않아서 따로 구입해야 한다. 각각의 제품 모두 200만 원이 넘는다. 일부에서는 소리가 너무 밝은 것을 흠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헤드 파이’를 추천하는 또 다른 이유는, 아니 가장 중요한 이유는 따로 음원, 즉 CD나 DVD를 사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 때문입니다. 유튜브라는 어마어마한 음원을 거의 무료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의가 필요합니다. 이동 중에 스마트폰이나 아이패드 등으로 유튜브를 이용하다가는 엄청난 요금 폭탄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음원을 거의 구입하지 않고 유튜브로 음악을 들을 생각이라면 반드시 컴퓨터에서 인터넷을 통해 유튜브를 활용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몇 년 전에 업계의 인터넷종량제를 네티즌들이 좌절시킨 것은 유튜브를 통해 음악을 즐길 수밖에 없는 서민들에겐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닙니다. 인터넷 3사가 3월에도 인터넷종량제 카드를 만지작거리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점은 신경을 건드리지만 말입니다.

 

 

 

 

베어다이나믹스 T-1이란 제품이다. 젠하이저 HD-800과는 소리 성향이 매우 다르다. 둘을 비교해 들어보면 헤드폰이 회사에 따라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유튜브는 최근 발매된 음반을 제외한 대부분의 음반이나 연주회 실황을 담은 동영상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수천 만 원을 주고도 다 못살 음반들을 유튜브에서 거의 언제든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축복받은 세대가 맞습니다. 유튜브에는 이미 품절되었거나 단종된 음원들도 많습니다. 우리나라엔 한 번도 수입된 적이 없는 CD나 DVD도 널려 있습니다.

 

이제는 ‘헤드 파이’를 선택했을 때 따라오는 단점 내지 약점을 말씀드려야 할 차례입니다. ‘헤드 파이’는 나 혼자만 즐길 수 있습니다. 요즘 좋은 헤드폰 앰프는 헤드폰을 복수로 꽂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는 게 현실이지만 말입니다. 그렇더라도 한 공간에서 동시에 여러 사람과 함께 좋은 음악을 나눌 순 없습니다.

 

또 하나 고려해야 할 점은 헤드폰은 장시간 착용하는 것이 경우에 따라선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출시된 고가의 헤드폰들은 헤드폰 무게를 줄이고, 오래 사용해도 불편하지 않는 착용감을 제공하기 기술력을 발휘합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헤드폰을 장시간 사용하는 것에는 어느 정도 적응이 필요합니다. 물론 그런 면에서 무던한 사람들도 있지만 더러는 예민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헤드 파이’를 하기에 앞서 헤드폰 매장을 방문하여 꼼꼼하게 들어볼 것을 권장합니다.

 

이제 글을 끝내야 하겠습니다.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하시면 검색창에서 ‘헤드 파이’를 치거나 ‘헤드 파이 동호회’를 입력하면 제품 구입부터 좋은 제품 추천은 물론 가격과 실패담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소비자의 입장이 반영된 글들이기 때문에 잘만 활용하면 많은 도움이 됩니다. 또 다른 루트로는 대형 서점을 검색하면 몇 권의 오디오 저서를 구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용산이나 홍대나 강남 쪽에 헤드폰을 골라서 들어볼 수 있는 전문 매장을 직접 방문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헤드폰만 들을 수 있는 매장보다는 헤드폰 앰프까지 들을 수 있는 곳을 찾아간다면 금상첨화이겠지요.

 

 

 

2000년 중반 가난한 오디오 마니아들에게 복음이 되었던 황준의 오디오 시리즈물 3권. 1권 부제가 '오디오 마니아가 되지 않도록 해주는 책'일 만큼 황준은 화려하고 비싼 오디오 소개만이 판치는 세상에서 가장 값싼 가격으로 좋은 음질을 들을 수 있는 노하우를 알려주었다.

 

 

J가 헤드폰과 헤드폰 앰프, 그리고 파워케이블이나 USB케이블 등에 대해 제품 추천 및 가격대를 알고 싶어 한다는 점을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몇 십만 원대에서는 어떤 제품이 좋고, 클래식에는 어떤 제품을 사라는 식의 추천은 자제했습니다. 저의 오디오 취향과 J의 오디오 취향은 정반대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발품을 직접 팔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디오 제품을 구매할 땐 누구의 말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추천이 아니라 내 귀입니다. 결국 그 헤드폰을 끼고 들을 사람은 나이기 때문입니다.

 

오디오 마니아들은 오디오에 많은 돈을 투자하고 나서야 내 귀를 믿어야 한다는 이 값진 진리를 터득합니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 추천하더라도 내 귀에 좋지 않으면 사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내 귀에 좋은 소리도 시간에 따라, 내공이 쌓여감에 따라 변합니다. 더 좋은 소리로 변할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취향의 소리가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 가서 제품을 바꾸면 됩니다. 잘 모르겠다면, 언제든 물어보세요. 아는 범위 내에서 답해 드리겠습니다. 좋은 소식 기대합니다.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 저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지강유철의 음악정담(17)

 

거세된 개신교 음악

 

 

전 세계 대다수 연주회장에는 스타인웨이란 피아노가 놓여있습니다. 그만큼 스타인웨이의 성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인데, 이 악기는 모두 수작업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각각의 악기 소리가 다릅니다. 예술의전당은 시리얼 넘버가 571318, 550699, 571309인 세 대의 그랜드 피아노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 바닥에서는 약칭으로 ‘318’, ‘699’ 등으로 부르지만 말입니다.

 

연주자들이 독주회나 오케스트라와 협연 전에 피아노를 고르는 일은 매우 중요한 통과의례입니다. 예술의 전당 피아노 중 가장 많이 사랑을 받는 악기는 ‘318’입니다. 이유는 밝고 화려하면서 볼륨 있는 소리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르카디 볼로도스, 랑랑, 안젤라 휴이트, 김선욱, 손열음 등의 피아니스트들이 ‘318’로 연주를 했습니다. 연주곡이 슈베르트일 때는 ‘699’가 더 많이 선택됩니다. 그의 고독과 슬픔을 담아낸다면서 밝고 화려한 소리가 나는 피아노를 선택하는 것은 어폐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베토벤 스페셜리스트인 루돌프 부흐빈더는 2012년의 첫 내한 연주 때 ‘309’를 선택했습니다. ‘309’는 고음이 화려하진 않지만 중저음이 풍부하다고 합니다.

 

 

 

 

악기를 가지고 다닐 수 없는 피아니스트들 중 일부는 자기 그랜드 피아노가 아니면 연주를 거부합니다. 그래서 그랜드 피아노를 싣고 연주 여행을 다니는 연주자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연주자가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였고, 현존하는 피아니스트 가운데는 폴란드 태생의 크리스티안 치메르만이 있습니다.

 

치메르만은 2003년 예술의 전당 연주 때도 피아노 액션(해머가 달린 부분으로, 자동차의 엔진에 해당)을 두 세트 가지고 왔습니다. 한 세트는 연주용으로, 또 한 세트는 조율용으로 말입니다. 치메르만은 자기 피아노를 갖고 다니는 것으로 모자라 조율을 직접 합니다.

 

치메르만이 별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는 젊은 시절 폴란드 남부 지방의 카토비체 악기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그때 연식이 오래된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많이 접하면서 피아노의 구조와 수리 방법은 물론 조율까지 배웠습니다. 조율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피아노가 전혀 다른 소리를 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2003년 내한 연주 때는 조율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피아노 조율 명장 1호 이종열 씨(77)의 조율이 매우 흡족했다는 후문입니다.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들인 호로비츠나 미켈란젤리는 자기 전속 조율사를 두었습니다. 음색이나 건반의 무게 등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맞춰 줄 뿐 아니라 연주할 곡이 바흐냐 브람스냐에 따라 조율을 달리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30여 년 전에 이미 조율 기계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조율사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물론 그때도 조율 기계는 주목을 끌지 못했습니다. 사람의 손맛을 기계가 결코 흉내조차 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2013년 겨울 풍월당이란 음반점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중 한 분인 백건우 의 대담을 들었습니다. 이때도 피아노 선택 문제가 나왔습니다. 스타인웨이가 왜 좋은 피아노냐는 질문에 대해 백건우 선생은 천사의 소리에서 악마의 소리까지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정리했습니다. 그 피아노가 예쁜 소리는 물론이고 사납고 난폭한 악마를 표현할 수 없다면 좋은 악기가 아니란 뜻이었습니다. 백건우 선생도 일제 야마하 피아노의 소리가 예쁘다는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자신은 연주회 때 야마하를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쁜 소리 그 이상의 표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백건우의 이 짧은 한 마디 속에는 그의 음악철학이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음악이란 아름다움뿐 아니라 추함을, 선함뿐 아니라 악함을 모두 담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음악이 아름다움만을 지향하면서 현실 도피용 환각제가 되어서는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음악이란 삶의 이중성과 세상의 더러움을 포괄해야 합니다. 우리는 갈등이 거세된 소설이나 희곡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음악 또한 고상함과 함께 삶의 누추함과 경박함을 피해가서는 안 됩니다.

 

언제부턴가 한국 개신교의 교회음악이 CCM이든 성가대든 곱고 아름다움만을 지향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물론 여기서의 아름다움이란 신앙의 주제나 교회가 규정한 규칙에 복종할 뿐 아니라 지도층의 음악적 간섭이나 감시가 느슨해질 때조차 스스로 자기 검열을 하는 음악을 말합니다.

 

한국 개신교의 음악적 토양이 이렇기 변했기 때문에 성가대나 CCM 찬양단은 자신들의 찬양에 굳이 삶 전체를 개입할 필요를 별로 못 느끼는 듯합니다. 대다수 한국교회 성가대원들의 찬양은 거의 연습과 예배가 있는 날에만 적용이 됩니다. 그 결과 삶과 찬양, 현실과 예배 음악이 거의 완벽하게 분리됩니다. 그래서 한국 개신교 음악은 너무 우아합니다. 치욕스럽고 고통스런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철저하게 표백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기에 있는 우리의 아픔과 슬픔과 고민과 꿈이 배제되는 것 그 이상으로 공동체나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나 심판을 전혀 담아내지 못하는 교회 음악도 심각하긴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대한민국 개신교 음악은 CCM이든 성가대 음악이든 하나님의 심판이 거세되었습니다. 거의 유일한 예외는 부활절 때 성가대가 예수를 죽이라는 민중들의 분노를 표현할 때 정도입니다.

 

기독교의 오랜 전통 중 하나인 레퀴엠이란 음악 형식에는 디에스 이레란 곡이 포함됩니다. 라틴어 디에스 이레진노의 날로 번역됩니다. 예수 재림 때 악한 자들을 심판할 바로 그날을 주제로 쓴 곡이 디에스 이래입니다. ‘디에스 이레가 포함되지 않는 거의 유일한 예외는 가브리엘 포레의 레퀴엠입니다. 죽은 이는 물론 그와 관련된 이들을 위로하기 위한 음악이 레퀴엠인데 이상하게도 레퀴엠에는 최후 심판에 대한 경고가 빠지지 않았습니다.

 

현존하는 교회 음악 가운데 가장 무서운 최후 심판을 경고한 것은 프랑스 작곡가 베를리오즈가 35살 때인 1837년에 작곡한 <죽은 자를 위한 대 미사>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줄여서 그냥 레퀴엠이라 부르지만 말입니다.

 

베를리오즈의 레퀴엠은 18307월의 프랑스 혁명에서 희생당한 2천 여 명을 추모하기 위해 작곡되었습니다. 베를리오즈는 역사에서 영광의 3로 명명되는 프랑스 혁명이 파리를 휩쓸고 있을 때, 자신의 사랑과 좌절을 형상화한 <환상 교향곡>의 마지막 부분을 작곡 중이었습니다. 그 곡을 끝내자 베를리오즈가 서랍에 넣어두었던 권총을 들고 혁명의 대열에 동참했습니다. 

 

 

 

 

후대 사람들은 그의 대표작으로 <환상 교향곡>을 거론하지만 베를리오즈 자신은 <레퀴엠>을 꼽았습니다. “하나의 작품만을 남기고 나머지 모든 작품을 버려야 한다면, 나는 <죽은 자를 위한 대 미사>를 남겨두도록 자비를 구할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베를리오즈는 자신의 레퀴엠을 연주하려고 할 때 몇 가지 주문사항을 오케스트라 스코어에 표기해 놓았습니다. ‘디에스 이레란 두 번째 곡 때문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요구한 것입니다.

 

우선 큰 북의 일종인 팀파니의 숫자를 보겠습니다. 요즘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습니다만 당시까지의 관현악곡들은 한 명의 팀파니스트가 최대 세 대의 팀파니를 연주했습니다. 그런데 베를리오즈는 예수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오시는 영광의 재림과 악인들의 받을 심판 묘사를 위해 16대의 팀파니와 10명의 연주자를 요구했습니다. 거기에 큰 북 연주자 2명과 심벌즈 연주자 10, 그리고 탐탐이란 타악기도 4명이 필요합니다. 보통의 관현악곡에서는 타악기 연주가가 4명이면 충분한데, 지금으로부터 176년 전에 베를리오즈는 무려 26명의 타악기 주자를 요구했던 것입니다.

 

 

 

오케스트라에서 금관 악기들인 트럼펫, 트럼본, 튜바 등의 악기는 음악의 스케일을 표현하는데 제격입니다. 베를리오즈는 심판을 위해 천상에서 소리를 높이는 천군과 천사들의 묘사를 위해 콘서트 홀 2층 동서남북에 38명의 금관 악기를 배치하도록 지시했습니다. 16대의 트럼펫(과 코넷)과 트럼본, 6대의 튜바가 동원됩니다.

 

오케스트라에는 이미 보통 편성의 3배인 12대의 호른, 그리고 4명의 코넷(트럼펫)4명의 튜바가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베를리오즈는 세상 종말에 있을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후 심판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총 58명의 금관악기를 요청했던 것입니다. 당시 입장에서 보자면 규모가 큰 관현악 곡이라고 해도 금관악기는 11(트럼펫3, 트럼본3, 호른4, 튜바1)을 넘지 않았습니다.

 

금관악기와 타악기 연주자로 벌써 80명을 훌쩍 넘겼기 때문에 그보다 소리가 상대적으로 작은 현악기의 증원 또한 불가피했습니다. 그래서 베를리오즈는 50명의 바이올린과 20명의 비올라와 20명의 첼로를 요구합니다. 21세기에도 오케스트라의 더블베이스 연주자는 8명이 표준인데 18대를 요구했습니다.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면 제정신이 아닐 것입니다. 오케스트라의 규모가 세 배로 들어났기 때문에 합창단도 210명을 요구하였습니다. ‘만약 공간이 허용된다면 오케스트라의 두 배나 세 배의 합창단, 그러니까 700-800명의 합창단을 쓰라는 주문과 함께 말입니다. 좀 허세를 부린 측면이 없지 않은 곡이지만 베를리오즈의 디에스 이레는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로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치메르만이란 피아니스트는 거의 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만의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어딜 가나 갖고 다니는 습관을 놓고 떠벌리는 법도 없습니다. 청중에게도 앙코르를 선사하지 않는 무뚝뚝한 연주자입니다. 그런 치메르만은 2009426일의 미국 로스앤젤레스 디즈니홀 연주 때는 달랐습니다. 공연 중에 프로그램에 없는 돌발 발언을 한 것입니다. 그의 발언은 나직했지만 화가 나 있었습니다.

 

치메르만은 미국은 내 조국을 떠나라면서 폴란드 땅에 대한 미사일 방어막인 MD의 설치 계획 철회를 촉구했습니다. 오바마가 부시 대통령 시절 정책인 폴란드와 체코 공화국에 미사일 보호막을 설치하기로 한 것을 그대로 유지키로 한 결정에 분노한 것입니다.

 

그는 2006년에도 부시가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은 미국에 돌아오지 않을 것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해에 볼티모어의 쉬리버 홀에서 연주할 때는 미국 관타나모의 감옥에 대한 규탄의 뜻으로 베토벤의 <비창> 소나타로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치메르만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임에도 불구하고 9/11 직후 그의 피아노가 뉴욕 JFK 공항 세관 당국에 의해 접착제 냄새가 이상하다는 이유로 압수당했고, 그 결과로 미국 세관은 그의 악기를 폐기처분한 일이 있었습니다. 친구가 번역해 준 영국 가디언지의 보도에 따르면 어떤 미국 관객은 치메르만의 발언에 환호했고, 어떤 이들은 닥치고 연주나 하라고 소리치거나 욕지기를 하거나 연주도중 자리를 떴습니다.

 

악마의 소리까지 표현이 가능해야 좋은 악기란 백건우의 지론은 문자를 넘어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치메르만의 오바마 정부에 대한 항의처럼, 또는 자기 공연 계획을 취소하고 세월호로 인한 슬픔을 달래기 위해 제주도로 달려와 연주했던 백건우처럼 말입니다.

 

성가대를 쉬고 있는 제게 만약 다음 주 지휘를 할 수 있다면 두 번 고민할 것도 없이 모차르트의 레퀴엠 중에서 디에스 이레를 선곡할 것입니다.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 저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