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들에게 주는 편지(7)


인생은 도장(道場) 깨기

-말들의 진실-


1.


공자(孔子)께서 자공(子貢)에게 말씀하셨다.


“사(賜)야, 너는 뛰어난가보구나. 나는 그럴 겨를도 없는데.”(《논어》, 「헌문(憲問)」편).


곧잘 자기의 입장에서 타인들을 평가하고 비교하길 좋아하는 의기양양한 제자의 허를 찌른 것이다. 아무리 입버릇처럼 거리낌 없이 남의 비평을 해댔기로 되 주고 말을 돌려받자 한 짓은 아니었을 터. 면전에서 스승님께 정면 디스(diss)를 당했을 때 자공의 낯은 어땠을까?


자공의 뒷담화와 달리 예기치 못한 순간 상대의 안면을 직격하는 인간실격선언의 스트레이트(straight)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방망이처럼 정수리 복판에 작렬해 심장 속 양심에서 폭발한다. 위급한 마음을 모면할 길이 없어 어떤 말을 임시로 빌려다 쓰는 것도 안 될 정도로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가차(假借, 한자에서 음이 같은 글자를 임시로 빌려 쓰는 방법) 없다’란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혼비백산(魂飛魄散)! 머리는 고압전류에 감전된 듯 아득해지고, 가슴은 T익스프레스(T Express)가 수직 낙하하듯 고공에서 천길 아래로 떨어지고, 꼭두각시처럼 다리는 붙어있는 건지 떨어진 건지 후들거리고, 손에는 땀이 배고, 맥은 쪽 빠져 열은 위로 뻗치고, 얼굴은 백납병자처럼 창백하다가 술 취한 듯 달아오른 홍당무가 된다.


저항이나 항복을 요구하는 것도 허락하는 것도 아닌 순수한 일격이 전부인 그런 순간에 이르면 오로지 소원은 모멸과 창피가 새빨갛게 피워낸 한 송이 부끄러운 꽃이 되던지, 꺼져 사그라지지 않으며 불타오르는 한 그루 떨기나무가 되던지, 무너지지도 않은 채 변명을 아주 잊어버린 벽이 되던지, 그 벽에 뚫린 쥐구멍에라도 기어 들어가 이 참담한 재판장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싶어질 것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제 꼴이 한심스러워지는 참담한 순간에 직면하게 마련이다. 자공보다 가진 것도 없고(그는 큰 부자<富者>였다고 한다)훨씬 어리석으면서도 곧잘 남을 비평하길 좋아하며 의기양양하게 살아온 내가 한두 번 겪어본 일이겠는가. 너희는 또 나보다 가진 게 없고 훨씬 어리석을지 모르니 그런 일을 만나거든 ‘그렇군!’하면서 벌어질 일이 벌어졌으려니 우선은 제정신부터 차릴 일이다.



세상엔 누가 시늉만 했을 뿐 아직 때리지도 않았는데 벌써 카운터(counter)에 얻어맞은 것처럼 쓰러지는 사람들이 있고, 페인트(feint)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 만큼 태연한 사람도 있다.(태연함을 유지하려 애쓰는 사람도 태연한 것이다.) 태연한 사람은 시늉이 노리는 바를 정확히 깨달은 것이다. 세상은 상대적인 것이고 너와 남이 없이 내 판단은 다 반(半)만 맞는 것이란 말은 여기에도 적용된다. 절대가 아니란 말은 내게는 절대로 옳은 것이 상대에게는 틀린 것일 수 있고 상대의 절대로 옳은 것이 내게는 틀린 것일 수 있으며, 우리 모두의 견해가 상대적으로 절대가 아니니, 이것을 깨달으면 무엇보다 생각이 주는 고루함과 한계와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걸 두고 아는 체 논쟁을 할 것이 아니라 배우고 익혀 나를 괴롭히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복잡함에서 내가 벗어나는 기술을 발전시켜야한다. 무엇보다 항상 ‘이것이 실제로 벌어진 일일까?’ 이런 질문을 해보는 게 좋다. 큰 일이 생긴 것도 아닌데 벌써 당한 것처럼 스스로를 괴롭힌다면 누구 좋으라고 세상을 사는 것이며, 정말 큰일에 당해선 어떻게 정신을 차릴 수 있겠는가. 그러니 남을 비평하는 것이 그렇듯 참담한 순간을 겪고 이기는 것에도 오직 하나의 목적과 기술이 필요한 거라고 하겠다.


자공이 《논어》에 이 얘기를 기록해 넣은 걸로 미루어 그는 이 참담한 순간을 잘 극복하고 이겨냈을 것이다. 꽁꽁 숨겨도 시원찮을 부끄러운 일화를 자랑과 명예로 바꾸어 소중히 간직했다가 후세의 귀감으로 남겨주었다. 이겨냈기 때문에 이후론 그런 일을 겪지 않았을 것이고 잘 이겨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해도 예전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옛 경험을 창피스럽게 여기지 않고 떳떳하게 기록할 수 있었던 긍지가 거기 있다. 끝내 그 참담함 앞에 정신을 못 차리고 그것이 실제로 벌어진 일이 아니라 뭔가를 일깨우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깨우치지 못했다면, 자공은 부끄러움에 짓눌려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며 일생동안 선생님께 당한 창피를 숨기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가 아니라 진정한 실제를 볼 수 있도록 일깨워주는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으로 부족함을 돌파했기 때문에, 그로써 스승의 자기를 향한 특별한 고마움을 세상에 전할 수 있었던 것. 그랬지 않았다면 공자님은 인류의 스승일지 모르나 자공에게만은 한 번의 잊지못할 언어폭력으로 평생 씻지 못할 모멸감을 가르쳐준 냉정하고 혹독한 비평가로 기억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엔 뭇 사람의 관대한 선생으로 존경을 받으면서 뒤로는 냉혹하고 혹독한 비평가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선생들에게 순종한답시고 자기를 책망하여 괴롭히는 것으로 자기가 더 발전되고 나아지리라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회개란 노상 타박할 거리를 발견해 자기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더 나아지는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다. 칭찬과 격려로도 모자랄 텐데 책망과 괴롭힘으로 어떻게 나아지겠는가. 말하자면 그런 사람은 항상 자기 곁에서 자기와 각축하며 물어뜯고 있는 이리를 선생이라 여기는 것이다.


실제 공자를 그런 도덕적 꼰대로 비평하는 사람들이 늘 있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공자 자신 때문이 아니라 공자를 그렇게 이해한 꼰대 제자들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스승의 가르침이 실제로 일어난 큰일이라도 되는 양 받아들였다. 그러니 가르침으로 생긴 가능성으로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르침에 매여 버렸던 것이다. 스승이 야단을 치지도 않았는데 늘 야단맞는 학생처럼 도덕적 훈계나 받고 있으니, 어느새 나나 남이나 여기서 벗어나 함께 높이 날고 멀리 달아나려는(高飛遠走) 진취(進取)의 사람이 될까. 그런 진취적인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든 끌어내려 자기보단 아랫길에 묶어 두어야 마음이 안전해지고 기분이 흡족해지고 직성이 풀리는 것이었다. 그런 자들은 입만 열면 스승을 핑계로 삼고 말끝마다 스승의 말씀을 빙자하지만 스승처럼 누군가 배우려는 자를 일깨워 지금의 상태에서 자유롭게 해주려는 마음은 조금도 없다.


반대로 배우려는 자를 끝내 못 배우게 막아 현재 상태에 감금시키고 그의 가능성의 무한한 자유를 박탈하는 데만 스승과 그의 말씀을 써먹는다. 그들이 항상 하는 말은 이것은 이래서 저것은 저래서 안 된다는 말 뿐이다. 그들은 자기보다 더 진취적인 사람이 주목 받는 것을 발견하면 언제나 사려 깊은 모양으로 점잖게 한마디 하는 것이다. ‘저 사람은 위태롭다.’ 그들은 복음서에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바보)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태복음 5:22)는 말은 잘도 인용하지만, 그 말이 자신이 일삼고 있는 생활태도 자체를 가리킨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다.


언어폭력 정도는 폭력도 아니지. 그것이 폭력이라는 걸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생활은 점점 가식적이고 도덕적이 된다. 가식적이 될수록 도덕적이고 도덕적이 될수록 가식적이니 가식과 도덕은 마침내 그들에게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한 번도 스승의 가르침을 가능성으로 삼아 고비원주(高飛遠走)해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승의 말씀을 진리의 테두리랍시고 그것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시험하고 낙인찍고 왕따 시키고 아주 살지를 못하게 온갖 구설(口舌)로 괴롭히는 도덕적 꼰대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에 이르렀지만 기원전 479년에 돌아가신 양반이 다시 죽는다한들 스승의 가르침에 값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일깨울 수 있을까. 자공이 스승의 가르침에 붙들려 자기를 책망하며 꼼짝도 못했고 꼼짝하려는 동료들까지 책망으로 꼼짝 못하게 했다는 소린 들어보지 못했다. 자공은 더욱 더 의기양양해지려는 자기의 길을 더욱 더 의기양양하게 구축해 갔던 것이다. 그것이 자기를 향한 스승의 질책의 뜻임을 깨우쳤으니 공자의 핵심제자라 할 만한 것이다.

설마 사람들이 생각하듯 공자께서 자공의 의기양양을 시기해 ‘그냥 놔둬선 안 되겠구나’ 기세를 팍 꺾어놓으려 작심을 하시고 “사(賜)야, 너 정말 엄청 나대는구나. 아주 나를 능가하는구나.” 그러셨을까? 그런데 도덕선생들은 누군가 보기 싫은 사람(그들은 왜 보기 싫을까?)을 발견하면 이런 부분을 인용하는 것이다. 그럴 땐 공자도 앉지 않으셨던 모든 것을 이미 알고 판단하는 권위의 상석에 스스로 앉아 겸손을 가장한 훈계로 거드름을 떤다. 근엄한 목소리에 추상같은 질책을 담아 야비한 비웃음으로 인신공격을 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질책을 한다나!


과연 공자께서 이 말씀을 그렇게 하셨던 것일까? 그랬다면 자공이라도 ‘나에겐 내가 너무나 아까워 당신과 나는 여기까지’하면서 얼른 다른 스승을 찾았을 것이다. “사(賜)야, 너는 뛰어난가보구나. 나는 그럴 겨를도 없는데.” 공자님은 부드러움과 해학과 여유와 너그러움 가운데 제자를 향한 칭찬 감탄 격려 사랑의 가르침을 담았던 것이다.


「헌문(憲問)」편의 그 다음 말씀이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자신이 능하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不患人之不己知, 患己不能也)인 것은 자기를 인증하려 안달하는 제자를 향한 스승의 독려가 아니고 무엇인가. 나는 그럴 겨를도 없다는 말은 얼마나 본받아 쫓아가고 싶은 배우고자하는 사람의 달려갈 길인가. 공자가 추상같은 질책을 담아 진짜 인신공격을 하며 비웃고 미워했던 자들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2.


만장(萬章)이 물었다. “공자(孔子)께서 진(陳)나라에 계시면서 ‘어찌 돌아가지 않으랴. 내 고향의 선비들은 과격하고 단순하고 진취(進取)하려 하되 그 초지(初志)를 잊지 않는다’라고 하셨는데, 공자(孔子)께선 왜 진나라에 계시면서 노(魯)나라의 광사(狂士, 과격한 선비)들을 생각하셨던 겁니까?”


맹자(孟子)께서 대답하셨다. “공자께선 ‘중도(中道, 비진리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고 자유로운 도〔진리〕)’에 부합한 제자를 얻어 가르치지 못하게 되면 나는 반드시 과격하고 고집 센 사람(광견, 狂獧)을 택할 것이다. 과격한 사람(광, 狂)은 진취(進取)적이고 고집 센 사람(견, 獧)은 ‘이것만은 하지 않겠다(所不爲)는 지조(志操)가 있으니까’라고 말씀하셨다. 공자께서 어찌 중도의 사람을 바라지 않으셨을까? 그러나 반드시 얻을 수는 없기에 그 다음(차(次), 광견)을 생각하신 것이다.”


“어떤 걸 과격하다(狂)고 하는지 또 여쭙습니다.”


“(공자의 제자들)금장(琴張), 증석(曾晳), 목피(牧皮) 같은 사람들이 공자께서 말씀하신 과격한 사람(狂者)이다.”


“어째서 과격한 사람(狂)이라고 합니까?”


“그 뜻이 크고 말이 커서 ‘옛 사람은, 옛 사람은(이랬었는데, 저랬었는데)!’하는데, 평소 그들의 행동을 살펴보면 (그 현실이)그 말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이다.(따라가지 못함을 늘 괴로워했다는 말). 이와 같은 과격한 사람(狂者)도 얻지 못하게 되면 불결(不潔, 더러움)을 달가워하지 않는 선비를 얻어서 가르치고자하셨으니, 이것이 (비루한 데는 가담치 않겠다는)고집 센 사람(獧)이다. 이 또한 차선인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집 문 앞을 지나가면서 내 집안에 들어오지 아니할 지라도 내가 조금도 유감으로 생각지 않을 사람은 오직 향원(鄕原, 시골선비(촌양반)를 가리키나 여기서는 사이비 군자, 자기의 위선을 깨닫지 못하는 위선자를 가리킴)뿐이다. 향원은 덕(德)의 적(賊, 도둑, 해치는 자)이다.’라고 하셨는데, 어떤 사람을 향원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어찌 그리 매사에 뜻과 말이 큰지(항상 올바르고 도덕적인지) 어쩌자는 것인가? 말이 자기의 행동을 돌보지 않고 행동이 말을 돌보지 않으면서도 ‘옛 사람은, 옛 사람은(이랬거늘 저랬거늘)!’이라고 되뇌는 자들이다.(옛 성현들의 말씀으로 남을 깎아내리는 데만 써먹는다는 말). 하는 짓이 무엇에 쓰려고 그렇게 친근함이 없고 차가운가? 세상에 났으면 이 세상에 맞게 살면 되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좋다고 할 말만 하면 된다’라고 생각하고 속생각(진정한 자기 실력)을 숨기고 세상에 아첨하는 자들이 바로 향원이다.”


만장이 말했다. “한 고을 사람이 모두 원인(原人, 모범적인 사람)이라고 일컬으면 어디를 가더라도 원인이 아닐 수 없을 텐데 공자께서 ‘덕의 도적’이라고 하심은 어째서입니까?”


“그를 비난하려 들면 이것이라고 들게 없고, 그를 풍자하려 들면 풍자할 거리가 없기 때문이다.(언제나 모두에게 아첨해 책잡히지 않을 정도의 소리만 하니까.) 유속(流俗, 세상평가)과 적당히 동조하고 더러운 세상과 적당히 합류하며 (행동하지 않고)가만히 있으니 마치 신뢰할 만큼 신중한 듯하고, (그런 방식으로)행동하는 것이 청렴결백한듯하여 뭇 사람들이 좋아하고 자기 스스로도 옳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러한 부류들과는 ‘요순(堯舜)의 도(道)(진리의 세계, 기독교에서 하나님 나라)’에 함께 들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그들은 실제로 변화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도 없다는 말) 그러므로 덕을 해치는 자들(도적)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공자께선 ‘나는 사이비(似以非, 비슷하나 아닌 것)한 자를 미워한다’고 하셨다. ‘가라지(莠)를 미워함은 그 곡식의 싹(苗)을 어지럽힐까 두려워함이요, 말을 잘 둘러대는 자(佞)를 미워함은 그 의(義)를 어지럽힐까 두려워함이요, 구변(口辯)만 좋은 자를 미워함(惡利口)은 그 신용(信用)을 어지럽힐까 두려워함이다. 정(鄭)나라의 음탕한 음악을 미워함은 아악(雅樂, 아름다운 음악)을 어지럽힐까 두려워함이요, 자줏빛(紫)을 미워함은 그 붉은빛(朱)을 어지럽힐까 두려워함이요, 향원(鄕原)을 미워함은 그 덕(德, 본질)을 어지럽힐까 두려워함이다.’ 라고 하셨다. 군자(君子)는 상도(常道, 경전(經典)의 말씀이 가리키는 도(道)의 경지를 향한 일관된 추구)를 회복할 뿐이다. (선비(지식인)들의)상도가 바르게 전파되면 서민들까지 깨어나게 되고 서민들이 깨어나게 되면 그때야 세상에 사특(邪慝, 혼란을 일으키는 요사스러움)이 없어질 것 아니겠느냐.”(󰡔맹자(孟子)󰡕 「진심(盡心)편」).


3.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라. 고수는 곳곳에 널렸으나 오직 한 분 스승은 마음에 있다. 그러니 모든 일에 자라나는 배움의 뜻을 품었다면 도처에 스승이 아닌 게 없다. 온갖 곳에 고수와 스승이 널렸으니 인생은 ‘도장(道場) 깨기’와 같은 것이다.


일본 전국시대 검술 대가로 명성을 남긴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 1584~1645)는 13세부터 29세까지 60여회의 진검승부(眞劍勝負)를 벌여 이겼다고 한다. 그는 ‘천일(千日)의 연습을 단(鍛)이라 하고 만일(萬日)의 연습을 련(鍊)이라 한다. 이 단련(鍛鍊)이 있어야만 승리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진검승부란 목숨을 내놓고 하는 대결이다. 지금이야 어리석어 보이겠지만 사무라이 시대를 살았던 그에게 진검대결이란 자기시대를 변명과 타협으로 회피하지 않고 정직히 살아가는 오직 하나의 길이었을 것이다. 목숨을 건다는 걸 현대에 비유하자면 지금까지의 전존재를 걸고 승부를 내려는듯한 삶(배움)의 태도쯤 되지 않을까.



영화 <바람의 파이터>(2004)의 모델로 ‘극진공수도’를 창시한 재일한국계 무술인 최영의(崔永宜, 최배달), 1923~1994)도 이 ‘도장깨기’로 전설이 됐었다. 그러나 그가 진짜 가르친 것은 오로지 극기(克己)였다고 한다. 온갖 고통을 인내하고 극복해 나가는 과정. 거기엔 더 이상 승패가 중요한 게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파이팅(fighting)이 중요하다.


굴종은 영원히 패배하고 마는 것이지만 패배는 부단히 발전해나가는 죽음이기 때문에, 파이팅에 있어서는 굴종보다 패배가 차라리 낫다. 모든 생명은 죽음을 통해 새로워지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런 파이팅을 내면에 품은 굴복하지 않는 도장깨기로서의 인생수업을 권한다.


4.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도가니는 은을, 화덕은 금을 단련하듯이, 칭찬은 사람됨을 달아 본다”(잠 27:21).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다른 결점은 몰라도 사람됨이 교만한 건 죽어도 못 고친다.’


‘잘난 척하는 놈치고 끝까지 잘난 경우를 보지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인신공격성 잔인한 언어폭력까지. 나는 이런 말들을 무수히 들어왔다. 깨우침은 그것을 찾는 이의 통상적 사유와 인식을 강제중지 시키는 신적(외부의) 영감이지만, 이런 영감은 원치도 않는데 찾아와 나의 목숨(역사와 전통)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테러와 같았다.


잔혹한 말들은 나에게 동의도 구하지 않고 나를 해체하고 바꿨다. 내가 다시 살아가기 위해 나를 해체하고 갈아 부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나에게 왜 그런 말들을 했을까? 나는 왜 그런 말들에 괴로워하고 양심을 찔려했을까? 내가 정말 잘 나기라도 했단 말인가? 혹은 잘 나지도 않았으면서 잘난 척을 했단 말인가? 누군가의 인정에 그토록 기대 살았던 결과인가? 그들과 나 사이에 정말 이런 말들만큼의 중대함과 각별함이 요구될 만큼 실재한 쟁투가 있었던 것일까?


문제는 그들이 내가 나름 흰 말을 타고 활을 가지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 이기고 또 이기려고 했던(계시록 6:2) 나의 대적이 아니라, 대개는 내 동료들이나 선생들이었다는 점에 있다. 적이 아니라 동료에게 내가 인간실격을 선고받는 전도된 상황에 직면하면 마치 친구들에게 린치를 당하는 듯한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다.(그럴 때 순종은 진짜 죽음이 아닌가!)


다행스럽게도 나는 광견(狂獧)의 기질이 있어 아주 기가 죽지는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이나 신학이 한 진취적이고 고집 센 동료에 대한 경계와 시기와 질투와 공격의 언어폭력으로 왜곡되는 모양들을 보았을 뿐이다. (그들에게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굴복하지 않는 광견(狂獧)의 과격과 지조와 그 우월감이 나를 부단히 단련시키고 발전시켜 주었다. 내 나름대로는 도장깨기에서 그들이 패배한 것이고 내가 이긴 것이다.


공격을 잘하는 사람은 상대의 허점을 잘 안다. 어디를 어떻게 찔러야 상대가 더 놀라고 아프고 괴롭고 부끄럽고 두고두고 못 잊어할지를 기막히게 안다. 그러나 그걸 아는 나 또한 마찬가지다. 싸움에는 하나의 기술만이 필요한 게 아니라 많은 기술을 가진 사람이 유리하다. 그러나 많은 기술과 함께 하나의 기술이 반드시 더 필요한데 그것은 놀라지도 쓰러지지도 절망에 빠지지도 않는 침착함이다. 침착은 초연이고 그것은 거기 있으면서 거기서 벗어나 있는 자유로움이다. 정신의 자유와 그 능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말의 의미를 안다. 비유컨대 그 상태는 결투에서 상대방이 먼저 나에게 일격을 가한 것과 같다. 언제나 이제는 내 차례인 것이다. 같은 말도 누가 하느냐 나름이다. 공자님 정도라면 받아들일 만하겠지.


그러나 너나없이 도토리 키재기로 시지프스의 언덕을 기어오르려 안간힘을 쓰는 고만고만들의 도덕적 품평을 일일이 받아들여 그런 쩨쩨한 훈계에 행여 저촉이 될까 눈치를 보는 식으로 날마다 과격과 진취와 지조를 찍어 눌러 겸손해지려한다면, 그건 겸손이 아니라 함께 같잖아지려는 한심한 노릇이랄 수밖에. 겸손이란 유무형의 내세워진 권위와 권력 앞에 옷깃을 여미고 밥을 굶은 듯 무기력한 게 아니라 자기를 인식하는 정직을 잃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카를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이 최후의 저서에서 ‘젊은 날의 꿈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했듯이, 처음 뜻(初志)을 저버린 허리굽힘이 어떻게 겸손일 수 있으랴. 그러나 함께 부단히 자라가려는 벗을 향한 이런 겸손이라면 어떠냐. ‘그대는 뛰어난 것 같구려. 나는 아직도 그럴 겨를이 없다네.’ 친구라 하고 제자라 하고 동료라 하면서 고작 비웃음과 깎아내림으로 도덕적 우위와 안전을 확보하는 정도라면 그것은 이미 내가 그를 능가했다는 뜻이니 안심해도 되겠다. 옛날 어느 스승님께서는 누군가에게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충고를 듣고는 이렇게 답했다나. ‘익지도 않았는데 고개를 숙이는 벼는 병든 벼’라고. 대개 말과 말의 진실이 이와 같다.


5.


‘독재가 현실이라면 혁명은 의무이다.’ 어느 영화에서 본 누군가의 묘비명이다. 거기서 말하는 주인공의 혁명이란 인식과 태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대개 사람들은 혁명은 너무나 급진적이기 때문에 개혁이 좋다고 한다. 그것이 어디서 왜 나오는 말인 줄 모르기 때문에 혁명이라면 겁부터 내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원하는 개혁이란 결국 아무 변화도 원치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교회든 세상이든 개인이든 개혁을 말하려한다면 그것은 말할 게 아니라 내가 개혁을 위해 무엇을 했고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또 너는 할 만하니까 그런 속편한 소리나 지껄인다고 나무랄 것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어렵게 살아가는 줄 아느냐고. 너도 그 속에 있다면 그런 소리는 못할 거라고. 너의 비평 속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도 얼마나 사려 깊고 진중한 사람들이 많은 줄 아느냐고. 안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들에게 내가 말하는 혁명이란 굳이 당신들이 상상하는 어떤 구체적이고 급진적인 손해가 예상되는 외부적이고 행동인 상태가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어디까지나 당신 자신과 당신의 시공간을 변화시키는 내면적 인식과 태도의 문제라고 안심을 시켜 주어야할까?


아,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자. 세상이 뭐라든, 어떻게 비평하든, “너희는 너희에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으로 인해 자기를 책망하지 않는 사람이 행복한 것이다”(로마서 14:22). 밤새 도박판에서 영혼까지 남김없이 다 올인(All-in)하고 돌아와 속기사 앞에서 러시아 민족의 구원과 메시아적 사명을 구술(口述)하던 도스또옙스끼처럼.


“여러분은 늘 깨어 있으십시오.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씩씩하고 용감한 사람이 되십시오”(고린도전서 16:13).


딸들아 나의 청년아, 인생은 도장깨기다.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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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에게 주는 편지(6)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

 

심령이 가난하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마태복음 5:3). 이 말씀은 마태복음」 5장 1절에서 7장 29절까지 이어지는 ‘산상수훈(山上垂訓)’의 첫 구절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시나이 산에서 모세로 부터 율법을 받았듯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새로운 계명으로서 산상수훈을 반포하셨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한복음 1:17).

 

‘은혜와 진리(grace and truth)’는 같은 말이다. 은혜 따로 진리 따로가 아니라 은혜가 진리고 진리가 은혜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진리가 왔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갈라디아서 1장 1절에서 바울은 자기를 소개할 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바로 이런 자의식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왔는가? 그건 단순한 일차적 생각이다. 종교적 자각(自覺)은 차원이 다르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한 아이가 부모에게 ‘엄마 아빠는 왜 날 낳았어?’라고 물을 때 ‘우리가 낳은 게 아니라 너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야’라고 대답하듯이. 훗날 그 아이 자신이 그걸 스스로 깨닫게 될 때, 나는 나의 어머니 아버지를 통해서 세상에 나왔지만 깨닫고 보니 그것이 아닌 것.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세상에 다시 존재하게 된 나다.”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다’라는 말은 ‘복음’이란 그 기원이 한 사람에 의해 선포되었던 모세의 율법과 본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는 차별성을 부각시킨다. 모세의 율법이란 일종의 불가피한 수단으로서 인간의 악함(연약함) 때문에 주어진 것이다. 복음은 그에 반해 하나님이 그리스도(로고스)를 통해 인간의 악과 연약까지 담당(용서, 없이 하심)하심을 일깨운다.

 

이처럼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은혜와 진리의 가르침인데, 그 처음을 ‘팔복(八福)’이라 불리는 한편의 시로 시작한다. 팔복은 운문으로 된 시요 노래요 전체에 대한 서문이고 선언이다. 거기 또 여덟가지 행복이 열거되고 있지만 그 첫 구절이 가장 의미심장하다. 대개 여러 가지 사례를 열거할 때 첫 번째로 거론되는 것 속에 가장 크고 중대한 대의가 들어있고 그 다음부터는 첫 번 피력한 사례에 대한 보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을까? 심령(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

 

 

 

 

질투는 나의 힘

 

팔십 년대에 기형도(奇亨度, 1960년 3월 13일~1989년 3월 7일)라는 시인이 있었다. 그는 생전에 그때까진 없었던 독특한 스타일의 시편들로 이름을 얻었었는데 스물아홉 살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첫 시집이자 유고시집이 된 《입속의 검은 잎》이란 시집 속에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시가 있다. 이 말은 아마 기형도를 통해서 세상에 나왔지만 그 후 그의 시와는 상관없이 세상 사람들이 자주 써먹는 말이 되었을 것이다.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 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시인은 자신이 가진 것이 탄식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희망의 내용은 다 질투의 소산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런데 그것은 미친 듯 사랑을 찾아 헤맨 것이었으되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다. 시인의 고백은 깨우침이기도 하고 성찰이기도 하고 반성이기도 하고 그보다는 회한 가득한 슬픔이기도 하다. 그 짧은 삶(29년의)의 무엇을 위하여 나(시인)는 그렇게 많은 마음의 공장들을 지었는가. 여기서 시인이 사용한 ‘공장’이라는 말은 본래 거대하고 서로 다른 구조를 가진 군집체를 의미하는 콤플렉스(complex)를 연상 시킨다.

 

기형도는 60년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7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내고 80년대에 청년기를 보냈다. 그는 다른 시에서 자신은 그 나이에 벌써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고 쓰고 있다. 기형도의 갑작스런 죽음(그는 종로의 어느 심야극장에서 뇌졸중으로 숨진 채 발견 됐다)은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나는 스무 살에 그의 신작이 수록된 문예지들을 복사해 가지고 다니며 읽고 외우고 또 흉내를 내기도 했는데, 군대시절 휴가를 나와 벌써 한 계절이 지나간 다음에야 그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그의 유고 시집이자 첫 시집인 《입속의 검은 잎》을 읽으며 말할 수 없는 생각에 젖어 고뇌하며 군대로 복귀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그의 고백들은 팔십 년대 젊은이들의 가난과 어둠, 욕망과 좌절의 상처와 고통을 대신해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때 우리들(우리사회)은 무엇에 의해, 왜 그토록 많은 고통을 감내하면서, 마음속에 저마다 콤플렉스와 같은 복잡하고 거대한 열망들을 품었던 것일까? 아니 그 힘의 진정한 내용은 무엇일까? 시인이 ‘질투’라고 표현한 것은 정확하고 정당한 것일까? 그는 스물아홉에 1990년대를 맞기 직전 스러졌지만 그 이후를 살아온 우리들은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각 사람의 그러한 질투의 포화상태 속에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헬 조선’이라 표현하는 증오사회를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우리는 어디서 왔나

 

한동안 몸이 아파서 고생을 했다. 그래 그랬는지 고통에 관한 책들을 꽤 읽었다. 그 중에 ‘고통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그 속에 원함이 많기 때문’이라는 한 줄이 기억에 남아있다. 원함이 고통을 만든다는 것이다. 원함이 없으면 고통도 없다?(기가 막혔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혹은 관계 속에서 누군가에게 혹은 사회와 세상을 향해 마치 사랑을 갈구하듯 갈망하는 어떤 원함이 있을 때, 거기서 고통이 발생한다. 그러면 아무 것도 기대하거나 계획하거나 원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좀 미루어 두고 우선 그대로 밀고 나가 보자.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이 만년을 보낸 타히티 섬에서 그린 연작 중에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그림이 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절친이기도 했던 고갱은 그와 함께 후기인상주의(Post-Impressionism) 화가라 불린다. 그들은 당시 탐욕으로 물들어 가는 유럽 문명에서 회의 느끼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유사한 정신으로 문명의 비정성과 부조리 세속성, 속물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고흐가 기독교적 세계 속에서 구원을 찾으려 했다면 고갱은 원시적인 낙원 곧 기독교 문명 이전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고갱은 태평양의 타히티 섬으로 가서 원시적 자연과 삶속에 들어갔다. 그는 타히티 섬의 원주민들 속에서 구원의 희망을 발견하고자 했다. 물론 그곳에서도 그가 만난 것은 유럽 제국주의 문명의 탐욕과 타락의 전파였다. 거의 모든 당대의 예술가들이 그랬지만, 그는 왜 기독교 문명이 건설한 유럽에서 구원을 발견치 못했나? 유럽과 타히티의 차이는 무엇인가? 가령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들이 보여주는 세계와 우리들의 현실의 차이는 무엇인가?

 

《탄허록》에 보니까 탄허(呑虛 1913~1983) 스님에게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조사(祖師, 불교의 높은 스승)는 병을 어떻게 고칩니까?” 아픈 나로서는 매우 반갑고 흥미로운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탄허는 이렇게 답했다.

 

병종하래(病從何來)오 병종업생(病從業生)이니라

업종하래(業從何來)오 업종망생(業從妄生)이니라

망종하래(妄從何來)오 망종심생(妄從心生)이니라

심종하래(心從何來)오 심본무생(心本無生)이니라

심본무생(心本無生)이어니 병종하래(病從何來)오.

 

병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병은 업으로부터 왔습니다.

업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업은 망상으로부터 왔습니다.

망상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망상은 마음으로부터 왔습니다.

마음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마음은 본래 나온 곳이 없습니다.

“마음이 본래 나온 곳이 없는데, 병은 어디에서 왔는고?”

 

이렇게 말함(깨우침)으로써 병이 마음에서 뿌리 채 뽑힌다는 것. 조사들은 이런 식으로 병을 고친다고 답했다. 비록 그런 경지까진 이르지 못할지라도 이 내용은 여러 생각을 하게 해준다. 지금 우리 사회, 사실은 온 세계가 창세기 6장 노아 홍수의 전야처럼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하여 ‘땅에 포악함이 가득’하다. 약한 사람, 없는 사람, 선한 사람, 무죄한 사람들이 악인들과 악한 권력자들에 의해서 날마다 죽임을 당하고 있다. 이런 무례하고 무정하고 무자비한 폭력들이 어떻게 생겼나? 가령 어머니의 몸 밖으로 태어나는 어린 아기들을 생각할 때, 본래 그들에게 없던 것으로부터 어떻게 이토록 많은 병(病)이 나왔단 말인가? 오늘의 우리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도대체 우리는 무엇인가(우리의 정체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원죄, 이분법, 탐욕

 

성서는 처음부터 이 신앙이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은, 탐욕에 관한, 탐욕에 대한 형벌과 구원에 말씀인 것을 선포한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인간의 타락이란 탐욕의 발생에 의한 새로운 인간조건 곧 인간의 마음의 탄생이 그 서막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인간이 태어나서 탐심이라는 것이 발생하고, 그것을 자기 동일시하고, 그것이 자신의 본질(영혼)과 상관없이 스스로 자아(自我)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갈 때, 거기서부터는 성서에 기록된 모든 문제가 그의 일생에 나타나게 된다. 곧 죄와 형벌과 구원의 문제다.

 

아담과 화와는 뱀(사단)의 유혹에 빠져 금지된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딴) 마음’이라는 것을 가지게 되었다. 즉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은 마음이란 다 개별적인 ‘딴 마음’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며 자기본위의 자기 밖에 위할 줄 모르는 닫힌 정신, 꽂힌 열정이다. 그 내용은 선악(좋고 나쁨)의 이분법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분별심이라고 해야겠지만 그 분별이란 사려 깊고 신중하고 정당하다는 의미에서의 분별이 아니라 자기의 욕망에 의해 변덕을 부리는 폭력적이고 배타적인 나눔이다. 이것을 자기분열이라고 하는데, 이미 분별이 인간의 기본 조건이 돼버렸기 때문에 하나의 분열은 순식간에 수십 가지로 분열된다. 인간이란 그렇게 해서 끝내 자기 마음을 자기 자신도 헤아릴 수 없고 결국에는 자신이 결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치달리게 되어 있다.

 

곧 탐욕이 마음의 근본적인 동력이자 작용이다. 지금 어떤 무식한 기독교인들은 사단이 따로 존재하는 어떤 보이지 않는 세력인 것처럼 생각하고 가르치기도 하지만, 예수님은 도리어 이렇게 말씀 하신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한복음 8:44).

 

우리를 만들어 온 것은 우리들의 탐욕(욕망)이다. 마음은 곧 탐욕인데 거기서 온갖 불만과 불만족과 그로인한 원한과 모략과 반항과 폭력성이 생기고 자라났다. 우리가 우리 자신들의 탐욕으로부터 만들어졌다는 말의 의미는 지금 우리를 병들게 하고 괴롭게 하고 비틀리게 하고 파괴하는 모든 파행적인 사태를 한마디로 줄인다면 스스로의 탐욕의 결과라는 말이다. 부디 이 말을 엉뚱한 곳(자학 혹은 변명 혹은 기독교 도사 같은 무정한 논리)에 가져다 쓰지 말기를! 어떤 부패한 사람들은 늘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도리어 약한 자를 절망시키고 권력자에게 아부하는 식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디서든 발견되는 죄와 폭력이다. 가장 시급히 복음을 깨우쳐야할 자들이 있다면 언제나 시급히 저지시켜야할 죄와 폭력의 자아 정체성을(그것을 정당한 것으로) 가진 자들이다.

 

탐심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은 매우 분명하고 영적(본질적)인 설명이고 과학적인 해설이다. 특별히 어떤 악인들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자신의 탐심의 결과로 이렇게 만들어졌다는 말이다. <십계명>에 열 개의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 한마디는 ‘탐내지 마라’는 한 말씀에 다 들어있다. 사도 바울은 ‘탐심은 곧 우상숭배’라 했고(골로새서 3:5), 율법의 모든 조항을 뭉뚱그린 상징으로 탐심에 대한 금지(로마서 7:7)를 언급한다.

 

거기엔 영적이고 본질적인 원리가 내재해 있다. 다만 세세한 설명이 없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사색하지 않거나 사색이라는 것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이런 근원적인 자기 인식에 도달하지 못하고 만다. 혹은 그중에 무식한 사람은 다만 ‘탐내지 말라’는 문자에 매달리는 것이다. 무엇이 탐내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몇 가지 탐내지 않는 자기 의를 내세우게 된다. 그것이 얼마나 기만적인 것인지를 모르는 채 ‘나는 이렇게 욕심이 없는 사람이지’ 라고 스스로 흐뭇해한다. 그러나 생각하는 사람은 가르침을 즐겁고 달게 받아 그 원리에 이른다.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남에게 양보하고 탐내지 말라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도(道,원리)에 이르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 이것이 유교(儒敎)에서 말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이다.

 

명대(明代)의 사상가 왕양명(王陽明, 1472~1528)은 공자의 가르침의 핵심을 ‘양지양능(良知良能)’이라고 정의했다. 벌써 깨우친 본성, 이미 가진 재능, 본성의 자각이다. 그래야 거짓이 없는 진실의 지행합일이 누구든지 그의 품성에서 나온다. 양지(良知)는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양반 천민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본래 성인도 범부도 있을 수 없다. 자기에게 양지가 본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 사람은 양지를 지닌 사람, 그것을 자각한 사람, 거기를 향해가는 사람이 된다. 그러나 양지에 이르지 못했다면 비록 열 수레의 글을 읽어 박식한 박사라도 끝없이 공자나 주자, 부처나 예수의 말씀이나 인용하고 읊조리는 위선자가 되고 만다.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2절에서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라고 쓰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일체의 비결’이라는 말이다. 만족과 자족이란 하나님이 주신 상태로 만족한다는 의미다. 있는 그대로 감사하고 자유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평안이고 행복이다. 그러나 거기엔 그럴만한 일체의 비결이 있다. 왜 그러한지, 그것이 가능한지 원리를 모르면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무슨 말을 왜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상황이 호의적일 때는 감사하고 만족하고 자족하며 탐심을 절제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상황이 악화되면 영락없이 옛날 자기의 탐심의 지배를 받게 된다. 하나님의 만족케 하심을 신뢰 못하는 것이다. 왜 예수께서는 그의 첫 말씀을 ‘심령이 가난한 자가 행복하다’고 했을까?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천국)에 들어간다. 여기서 천국은 미래적이 아니라 현재적이다. 내 심령이 가난하다면 나는 곧바로 천국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있지 못하다면 나는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다.

 

‘가난’이란 무엇인가? 그 곳간이 비었다는 뜻이다. 곳간이란 무엇의 직유인가? 말할 것 없이 마음이다. 예수께서는 천국에 들어가는 첫 조건으로 마음의 빔을 설파하는 것이다. 마음이 비었다! 헤아려 보면 너희들도 잘 알다시피 누가 마음이 빈 사람인가? 어느 때 우리는 마음을 비우게 되는가? 무언가를 결국 얻지 못할 때, 해도 해도 안 되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 즉 포기할 때이다. 우리는 그럴 때 ‘나 마음 비웠어’ 이렇게 말한다. 다시 말하면 실제로 가난해 질 때만 사람은 마음을 비우게 된다. 부자인 사람이 가난한 척을 하면서 하는 비움이란 위선이나 기만이나 허영에 불과하다. 그러나 실제로 가난했을 때, 그 가난에 대해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이 주신 하나의 온전한 상태에서 그것을 받아들였을 때, 그럴 때 가난은 피치 못할 쪼들림이 아니다. 쪼들림마저도 하나의 탐심으로 자각하고 그것마저 비운 상태다. 곧 자발적이고 자각적인 존엄한 가난이 된다.(우리는 그렇게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서 신적 존엄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복음의 원리를 생각해야지 ‘그렇다고 어떻게 마음을 실제로 싹 비운단 말인가’ 이런 식으로 자꾸 자기 현실을 고집해선 이 ‘비결(祕訣)’에 도달할 수 없다. 바로 그러한 집착이 탐심인 것을 아는 때에 행복이 있다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주가 되는 것이지 그리스도 앞에 내가 여전히 주가 되는 사사로운 것이 아니다. 사사로운 이득을 바라고 도를 좇는 사람을 ‘삯군’이라고 했다. 비유하자면 스스로 주인이 못되어 밤낮 일생을 삯받는 직원으로 산다는 말이다. 누구의? 있지도 않은 자기 마음(탐심)의 하수인 말이다.

 

참 사람의 일생

 

고향에 사니 동창들의 부모님의 부음(訃音)에 문상을 가게 된다. 가서는 나는 대개 고인들의 삶과 인생 역정 그리고 최후의 병상 죽음의 순간 등에 관해 묻는다. 공통점이 있다. 그들의 일생은 지독한 가난과 가혹한 노동과 무명(無名)과 별것 없는 소득으로 점철됐다. 그리고 그 빛 없는 무명(無明) 속에서 생의 희망(빛)을 획득하기 위해서 그분들은 일생을 그토록 힘겹게 분투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의 일생의 노고를 생각할 때 진정 하나님께 그들을 받아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보상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또 한편 이런 의문이 든다. 그들은 어쩌면 이제부터 인생을 비로소 살아볼 만 해졌는데, 왜 하필 살만해지면 인생이 끝나게 되는 것인가? 인생은 왜 이렇게 배반적인가?

 

마음을 비운다, 만족한다, 자족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욕심이 없다? 아니다. 우리는 더 큰 욕망을 품어야한다. 진정으로 자기를 위하는 욕망, 자기를 완성하는 욕망, 본래 완성이었다는 것, 결국 그 주신 완성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깨닫고 세상에 현혹됨 없이 거기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 그 상태를 유지해 나가려는 욕망, 모든 사람을 그렇게 보고 볼 수 있는 한결같은 안목을 가지는 욕망. 그러므로 너희는 다른 사람들의 이목(耳目) 따위에 너무 연연하지 말아라. 오로지 자기 안으로 자기를 살펴 하나님의 진리(은혜)의 말씀에 따르는 성(誠, 성실)과 경(敬, 외경)에 이르자. 모든 아프고 눈물 흘리는 모든 존재들을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존중하는 고귀함의 천국에 들어가 살자. 이제부터 ‘질투는 나의 힘’이 아니다. 본래 충만하신 그리스도가 나의 힘, 이 완성을 향해가는 행복의 힘이 너희의 힘이다. 흐르는 강물처럼.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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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에게 주는 편지(5)

 

불멸과 소멸, 자매들의 전쟁에 관하여

 

‘쁘레스뚜쁠레니’와 ‘나까자니에’

 

밀란 쿤데라의 《불멸》이라는 소설에는 - 다른 얘기도 많이 나오지만 - 두 자매의 이야기가 나온다. 한 사람은 맏딸이고 다른 한 사람은 당연히 맏딸이 아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제일먼저 󰡔구약성서󰡕의 장자(長子)의 권리를 둘러싼 끝없는 암투가 떠올랐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선택(選擇)과 유기(遺棄)라는 인간문제의 근본적 조건이 아닐까 싶다.

 

너희가 읽어보면 알게 될 테지만, 구약성서의 장자 다툼은 대부분 차자(次子)의 승리로 끝난다. 그 기나긴 싸움의 역사는 한 형제의 비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세상의 첫 번째 사람이었던 아담의 장자는 가인이지만 신께서는 차자인 아벨의 편을 들어주었다. 창세기는 가인과 아벨이 동시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열납(받아들임)했다고 쓴다. 선택을 받지 못한 가인은 실망과 원망이 교차하며 얼굴빛이 변했다. 그의 흘기는 눈빛은 아벨을 정조준했다. 가인은 왜 자기를 더 사랑해 주지 않는 하나님(아버지)을 미워하지 않고 자기 동생 아벨에게 분노를 품었을까? 기억해 두어라. 죽이고 싶도록 형제가 미워지는 이 피치 못할 실망과 원망에 관하여. 비록 가족의 역사 속에는 그런 경쟁과 시기가 비일비재하고 자기도 어쩔 수 없이 거기 길들여지기는 한다지만, 하나님은 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세기 4:7).

 

원인 제공자의 말씀이니 가인으로선 더욱 아프게 찌르는 책망이었을 게다. 그러나 또 얼마나 정확한 지적인가. 가인은 문에 엎드려 걸려 넘어지기를 기다리는 죄에 걸려 넘어진다. 일부러 그랬을지 어쩔 수 없었을지, 분명한 것은 그가 원하는 죄에게 자신을 넘겨주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죄는 음모의 인격체(人格體)로 묘사된다. 그는 뱀이고 사단이고 마귀다. 그놈은 걸려 넘어뜨려 스캔들을 일으키는 자이고 음모를 꾸미며 유도하는 자이고 범죄를 실행하도록 부추기는 자이다. 가인은 자기 안의 음모의 인격자를 품게 된 후 자신의 주체성을 상실한다. 그는 잔인하게 동생을 살해했다.

 

일단 범죄가 실행되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범죄자 자신에게 돌아간다. 죄에게 그것을 물을 수 없다. 이를 두고 ‘죄를 지으면 결국 지옥행’이라 하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마가복음 9:48).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지옥을 자기에게 불러들이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런 자기지옥에서 일생을 양심의 괴로움에 시달리며 보낸다.

 

동생을 죽이고 양심의 가책에 견딜 수 없었던 가인은 길을 떠난다. 그는 형제의 피를 흘린 땅으로부터 버림받아 땅에 정착하지 못하는 유랑인이 된다. 곧 자연과 편안히 일체가 되고 싶으나 자연이 받아주기를 거부해 땅에서 발이 떨어진 존재가 되었다. 식물은 자연에 뿌리를 내리고 동물은 자연에 맨 몸으로 눕지만 인간만은 그렇지 못하다. 인간은 신발을 신고 옷을 입고 집을 지어 거주한다. 신과 옷과 집은 자연에게 거부당한 인간의 기본 조건이다. 그가 죽을 때까지, 자연은 그를 자기의 일부로 너그럽게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땅에서 모든 것과 화해하려 발버둥을 치지만 땅은 그에게 가시와 찔레와 엉겅퀴를 낸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정(선택)을 받은 형제를 시기하여 그를 살해한 범죄에 대한 형벌 때문이라고 󰡔성경󰡕은 지목한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다시 그 땅의 거절을 형제에 대한 착취와 동료에 대한 적대행위로 보상받으려 한다. 아벨들에 대한 가인들의 죽임과 땅(자연과 섭리)에 의한 가인들의 추방은 지금도 계속되는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땅이 모자란다, 돈이 모자란다고 변명하길 좋아하지만, 땅이 인간을 용서할 겨를이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으리라.

 

도스또옙스끼의 소설 《죄와 벌》은 인간 살해에 관한 영감 넘치는 작품이나 그 번역된 ‘죄와 벌’이란 말은 실감이 너무 모자라다. 러시아어로 《죄와 벌》은 ‘Преступление и наказание(쁘레스뚜쁠레니에 이 나까자니에)’라고 한다. ‘쁘레스뚜쁠레니에’는 ‘죄’로 번역되지만 이 죄란 단순한 죄가 아니다. 그것은 결코 벗을 수 없는 무겁고 무거운 굴레를 연상시킨다. ‘나까자니에’ 역시 단순한 벌이 아니다. 그것은 형틀에 매어 벌거벗겨진 채 사지를 벌리고 금속의 형구에 찔리고 잘려서 죽어가는 형벌을 연상시킨다. 기억하거라. 성경은 한 인간에 대한 미움을 그에 대한 살인과 같은 범죄로 다룬다. 그리고 그것이 진실이다. ‘미워하지 말라’는 명령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미움이 그렇게 무서운 것’이라는 깨우침에 있다. 깨우침이 있어야 그 다음 회개(획기적으로 길을 돌이킴, 방식을 바꿈)가 있다.

 

 

 

 

판도라의 상자

 

아브라함의 장자는 이스마엘이지만 장자의 권리는 이삭의 차지였다. 물론 그는 첫 번째 아내에게서 난 적자였고 이스마엘은 첩에게 난 서자였으니 시대적 정황상 이해가 간다. 그러나 이스마엘 대 이삭 갈등의 역사는 현대 아랍인과 유대인, 기독교도와 무슬림까지 이어져 온다. 너무하지 않은가? 그들은 사실 그렇게 사이가 나쁜 형제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형제가 함께 장례를 치루기도 했다. 그들에겐 아직 유대 기독교도의 교리도 이슬람의 교리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자식들은 대대로 서로를 경원했고 미워했고 적대했다. 왜 그랬을까?

 

이는 그들의 어머니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스마엘의 어머니 하갈은 이삭의 어머니의 사라의 여종이었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사라는 남편에게 하갈을 주어 아들을 낳게 한다. (사라는 아들을 낳게 될 거라는 천사의 전갈을 받았지만 믿고 기다리지 못했다.) 하갈은 여종에서 계승자의 어머니로 일약 신분이 상승하자 사라를 멸시했다. 사라는 두 번이나 하갈을 광야로 내쫓는다. 그녀는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 죽음직전 가까스로 아들을 지킬 수 있었다. 천사는 그녀에게 사라에게 돌아가 복종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한다. 그리고 이삭이 태어났다.

 

이삭이라는 이름은 ‘비웃음’이란 뜻이다. 천사가 아들을 낳게 되리라 전해주었을 때 사라는 장막 뒤에서 이를 비웃었다. 자신이 이미 여자의 전성기를 보낸 아무 낙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비웃음은 역설로서 야비한 비웃음을 말하는 건 아니다. 믿기지 않는 축복에 대한 반신반의의 웃음이다. 아마도 그 웃음의 반전은 아이를 낳아본 부모라면 누구나 경험해 보았을 믿기지도 않고 안 믿을 수도 없는 축복의 반전일 것이다. 세상에 너희 같은 딸들을 낳게 되리라고 (상상이야 했겠지만)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러한 이삭 출생의 잔칫집 분위기 뒤편에는 이스마엘 모자의 진짜 비웃음도 있었을 것이다. 고립되고 잊혀져버린, 버림받고 불안한 모자의 장막에 이번에는 천사도 찾아오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음모의 인격체가 찾아왔을까? 아마도! 그는 자기 친구들을 데려왔을 것이다. 미움과 슬픔과 원망과 저주라 불리는 아주 오래전 판도라의 상자에서 세상 밖으로 나온 어둠의 자식들을. 이스마엘은 그들을 친구삼아 자신의 불운한 청년시대를 통과했을 것이다. 그는 일찍이 이런 예언을 받았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찌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창세기 16:12).

 

이삭이 선택받은 축복의 자연스런 계승자라면 이스마엘은 그것을 싸워서만 쟁취하는 유기된 인간이다. 싸우기 위해 그는 자신과 비슷한 동패들을 불러 모았을 것이다. 무릇 인생에서 친구라 불릴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은 대개 불운한 시절의 동반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진짜 친구였는지는 세월이 흘러간 뒤에야 알게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우리들의 친구인 것이지 또 다른 친구를 나중에 가서야 만나게 될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는 말은 그런 뜻이겠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될 일이겠느냐. 새겨 유익이 되기를!

 

갈망과 절망, 흠모와 비탄의 변곡점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장자는 에서였으나 장자의 권리는 쌍둥이 동생인 야곱에게 돌아갔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말씀하셨다’라고 기록한다(로마서 9:13). 왜 그랬을까? 나중에 두 민족이 된 이 쌍둥이 형제의 갈등도 그 결과가 천년 이상의 역사를 물들였다. 에서의 후예 에돔 족속은 수세기에 걸쳐 야곱의 후손들과 싸웠고, 예수님 당시 로마제국에 빌붙어 유대를 통치하던 식민지 어용정권 헤롯가문을 배출하기도 했다.

 

에서는 장자였고 전사였고 사냥꾼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아버지가 즐겨하는 사냥꾼의 특선 요리를 잘했다. 부모는 자주 자기에게 없는 탁월함을 가진 자식을 애인 대하듯 좋아한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사랑을 받을지 미움을 받을지는 아무도 모르고 그 이유가 반드시 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이삭이 에서를 사랑했다는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그는 순진하게도 자신을 너무 믿었다. 강력한 육체를 지닌 반면 정신이 빈약했다. 보이는 즉물적 욕구에 쉽게 굴복했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가치에 무신경하고 경솔했다. 그는 부모가 원치 않는 여자들과 함부로 관계했고 두 번이나 장자의 명분을 동생에게 팔아먹었다. 배가 고픈 나머지 붉은 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았기 때문에 그의 별명은 ‘붉은 죽(에돔)’이 되었다.

 

‘에돔’은 에서의 이름에서 따온 불명예스러운 비칭일 것이다. 에서나 그의 후손들이 자신들을 그렇게 불렀을 리는 없다. 이는 중국인들이 자기들을 둘러싼 이민족들을 ‘오랑캐’라 불렀던 것과 같다. 야곱의 후손들이 에서의 후손들을 ‘에돔’이라 부를 때마다 그들은 에서가 붉은 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먹은 그 매매의 법적 효력을 상기시켰을지 모른다. 에서는 그때 이미 장자의 권리를 상실했던 것이라는 뜻이다.

 

에서가 사냥꾼에 거친 들사람인 반면 야곱은 조용하고 과묵했으며 부모 곁에서 양을 치는 목부(牧夫)로 지냈다. 리브가는 그를 편애했다. 아버지가 형을 사랑했으므로 어머니가 동생을 더 아껴주었다는 것은 가족 간 감정 흐름의 질서상 이해가 가는 일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생인손이 더 아픈 법이다. 약한 자식, 못나가는 자식, 형편이 어려운 자식에 대한 부모의 편애는 균형을 맞추려는 자연의 자비로운 성품이다. 특히 어머니들이 그렇다. 물론 이러한 자비도 다른 자식들에게는 부당한 편애로만 보여 시기 질투의 빌미가 될 것이다. 또 그런 부모의 편애를 바탕으로 이른바 을의 갑질이 발생하기도 한다.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서 믿음직한 맏아들(그리스도)이 되랴? 부모의 마음과 자식의 마음이 이 같이 다르다는 것만을 기억해 두어라.

 

야곱은 ‘발뒤꿈치를 잡은 녀석’이라는 뜻이다. 어머니 리브가의 배에서 나올 때 야곱은 쌍둥이 형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나왔다. 이는 그들의 장래를 예고하는 상징적인 형상이었다. 듣기에 따라 야곱이란 이름은 야비하고 비열한 뜻으로 들린다. 그는 두 번이나 형의 장자의 명분을 교묘한 방법으로 빼앗았다. 한번은 붉은 죽 한사발로, 또 한 번은 자신을 형인 것처럼 눈먼 아버지를 속여서. 형이 아버지의 마지막 장자의 축복을 받기 위해 그가 즐겨하는 요리감을 찾아 광야를 헤매는 동안 야곱은 아버지 앞에서 형의 흉내를 냈다. 에서의 살갗을 꾸미고 목소리를 꾸몄다. 어머니가 그의 속임을 위해 형의 특선요리를 대신 만들어 주었다. 이삭은 의심스러웠지만 야곱에게 에서의 축복을 준다.

 

장자의 특권, 그것은 다른 형제들 보다 한 몫을 더 받는 재산상의 법적보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한 몫이란 남 보다 두 배를 받는 재산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버지와 동격, 하나 됨을 의미한다. 신적 선택이자 영원한 불멸의 계보에 들어가는 되는 것이다. 그 선택과 유기는 일찍이 가인이 아벨을 살해했던 갈망과 절망, 흠모와 비탄의 변곡점이다. 선택된 자는 선택이 그의 운명이 되고 유기된 자는 유기가 그의 운명이 된다. 그랬기 때문에 가인은 아벨을 죽였어도 선택받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하나님은 죽은 아벨 대신에 셋을 다시 태어나게 하셨다. 기억해 두어라. 이 선택과 유기의 깊고 깊은 의미를.

 

가인이 아벨을 죽였던 것처럼 에서도 야곱을 죽이려 한다. 그러나 야곱은 아벨과 같지 않았다. 그는 외삼촌 라반에게로 야반도주한다. 그리고 무려 20년을 타향에서 떠돌았다. 그런데도 선택은 바뀌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에게 야곱이라는 이름 대신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었다. 그 의미는 ‘신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이다. 비겁한 겁쟁이요 비열한 책략가였던 야곱은 형제의 발뒤꿈치나 붙잡는 보잘 것 없는 위인에서 신과 겨루어 이긴 위엄 있는 인간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누가 그것을 알아주랴. 자신만이 아는 것이다. 훗날 그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 에서는 야곱을 용서했다. 그러나 그의 용서는 불완전했고 의심스러웠다. 왜 그랬을까? 그는 여전히 장자의 권리에서 유기된 자에 불과했던 것이 아닐까? 나는 창세기를 읽을 때마다 에서가 가엾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에서는 장자의 권리를 잃었을 때도, 야곱을 용서했을 때도, 용서한 후에도, 매양 어리석었다. 그는 도대체 인간이 무엇으로 사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선택받은 자와 버려진 자의 태도

 

야곱의 자식들에 관해서는 다 말할 수 없다. 아내가 넷에 아들이 무려 열두 명이다. 생물학적 장자는 르우벤이고, 실질적으로 장자 역할을 하며 아버지가 죽을 때 두 몫의 축복을 받은 건 요셉이고, 나중에 장자로 추존(?)된 건 유다였다. 구약을 읽어보면 몇 군데서 이 요셉의 자식들과 유다의 자식들 간의 역사전쟁이 계속됐음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최후 승자는 다윗대왕을 배출한 유다지파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얼마나 우스운가? 장자의 축복이란 두 몫은 대개는 그저 상징에 불과했음이니. 오늘날 부친의 유산을 놓고 벌이는 형제들간의 전쟁과는 사뭇 다른 전쟁이라는 것을 이해했을지 모르겠다. 그것은 무엇이라 분명히 규정할 수 없지만 무엇을 다툼인지는 능히 가늠할 수 있는 싸움이다. 선택 받은 자와 선택받지 못한 자는 명확히 갈린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할 것이다. 말하자면 혈연의 전쟁이 아니라 정신의 전쟁이다.

 

그런데 왜 성경의 장자다툼은 대부분 차자의 승리로 돌아가는 것일까? 그것은 신의 선택이 자연적 서열에 따른 자동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준다. 누가 신의 선택을 받게 될는지는 신만이 아시고 결정하신다. 그것을 명확히 일깨워주기 위한 방식이 차자의 뜻밖의 승리라는 것이다. 똑같은 패턴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오로지 강조에 있다. 그러니 누군가 자신이 차자라 하여 하나님이 자기를 지지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해석이다. 하나님의 뜻에 달린 것이지 자연히 차자에게 돌아간다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자연적 서열로서 가장 먼저 태어난 맏이에게 신적 선택이 돌아가는 경우가 훨씬 많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것이 구약성경이라 할 때, 그것을 생활의 교범으로 삼았던 그들 유대인들 개개인의 가정에서는 어땠을까? 이런 태도들이 우리 한민족만큼이나 유난스레 족보를 중요시하는 유대인들을 낳았다. 나중에 사도 바울은 이러한 폐단(끝없는 신화와 족보에 착념하는 것)에서 벗어날 것을 강력히 권고하기도 했다(디모데전서 1:4). 그러나 한 부모 밑에 태어난 한 형제(자매)간의 장자다툼이 모든 인간쟁투의 기본단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선택받은 자가 되는 것. 선택받은 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버려진다는 의미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선택받은 자는 이미 선택 받은 것이고 버려진 자는 벌써 버려졌다는 것. 거기로부터 선택받은 자와 버려진 자의 태도가 나오고 그것이 그들의 운명을 만든다.

 

 

 

하늘의 맏딸이 되거라

 

쿤데라는 두 자매의 인생을 통해 선택과 유기, 불멸과 소멸의 인간쟁투의 주제를 환기시킨다. 그것은 인간의 야망에 의해 굴절되기는 하지만 결코 변개되는 것이 아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에서가 야곱을 추방시키지만 아벨과 야곱의 장자의 선택이 취소되지는 않는다. 쿤데라의 《불멸》에 등장하는 여동생 로라는 자신의 인생을 사는 대신 끝없이 언니 아네스의 뒤를 쫓는다. 그녀의 모든 선택은 언니의 선택과 결부되어 있다. 옷, 액세서리, 취미, 전공, 제스쳐, 남자 선택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끝없이 언니를 탐한다. 그것이 결국 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게 된다. 그러나 언니에게는 그녀가 결코 가질 수 없는 불멸의 유산이 있었다. (그녀가 그것을 깨닫고 있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아네스를 자신의 정신적 분신으로 여긴다. 소설에 보면 아버지는 실제로 아네스에게 비밀리에 재산을 남겨주었다. 그것이 선택된 장자의 두 몫을 상징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네스는 자기에게만 남긴 아버지의 비밀유산을 동생에게 나누어 주려 하다가 그만둔다. 왜 그랬을까? 아버지가 자신에게 지니셨던 개인적 뜻을 존중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 그건 나눌 수 없는 재산이다.

 

살면서 절실히 깨닫는 것은 ‘사람은 이렇게도 다르구나’하는 절망인데 거기엔 승자도 패자도 없는 이전투구(泥田鬪狗-진흙탕에서 싸우는 개들)의 전투가 개입된다. 그러나 승자도 패자도 없는 게 아니라 이미 결정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것이 나만의 착각인지 모르겠으나 이상하게 어떤 패자들을 보면 내가 승자도 아니면서 승자처럼 통쾌하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만만찮게 많지만) 때로 오래도록 시달린 누군가에 대한 기대를 마침내 완전히 포기하고 나면 의외로 용서가 선선하니 쉽다. 그러나 그런 누군가를 축복해줄 수는 없었다. 그건 용서의 문제는 아니지 싶어서다.

 

굳이 기독교적 교의가 아니라도 인간사의 무수한 선택과 유기는 불가피하고 불가항력적이다. 너희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한편 시달린 뒤끝이 통쾌하지만 가슴이 아프고 안타깝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일생을 특정한 타인에 대한 원한과 복수의 경쟁심으로 살기도 한다. 유기된 사람은 선택받지 못했다는 그 원망과 미움으로 스스로 평화를 얻지 못한다. 이럴 경우 그 대상이 된 상대자는 수많은 곤혹과 의혹을 거듭하지만 점차 이러한 무의미한 전쟁에 질리게 마련이다. 결국 이러한 싸움에선 물러나는 길 외엔 해답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잊지 마라. 선택된 사람은 선택의 싸움에서 이미 벗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진정한 맏아들은 스스로 일체감 속에 아버지가 되어 아버지를 이어간다. 이런 관점에서 기독교의 예정이란 실제로는 신의 독단이라기보다는 스스로 유기된 인간의 고집스런 집념의 결과인 경우가 많다.

 

딸들아, 두렵구나. 나는 너희들을 생각한다. 너희들을 위해 기도한다. 너희의 하늘을 우러르거라. 아빠의 첫째, 둘째, 셋째가 아니라 각자 그 하늘의 맏딸이 되거라. 너희는 무엇보다 이 세상에 가득한 자매(형제)들의 전쟁으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이 되거라.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이 주는 비밀한 한 몫을 더 가진 딸들이 되어라.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아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보물은 여전히 보물이다. 그 가치를 경솔히 여기지 마라. 하나님의 진정한 맏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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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에게 주는 편지(4)

 

모든 진리는 하나다

 

 

자기를 사랑하는 내가 있는데 또 나 이외에 수많은 사람들도 자기를 사랑한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누구이고 저들은 누구이고 우리 모두는 누구인가? 나의 생각은 저들에게서 오고, 저들의 생각은 나에게로부터 생긴다. 빼어난 천재의 영감은 그보다 더 월등한 전체의 의식으로부터 주어지고 천재는 그 답례로 공동체에게 그를 낳은 보람을 선사한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다.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없고 고상하거나 천한 사람도 없다. 우리 모두가 높고 낮은 것이며 우리 모두가 고상하고 천박하다. 전체를 인식하게 된다는 것은 공부가 깊어지려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빨리 그것들을 사랑한다고, 사랑해야한다고 말하지 마라. 도스또옙스끼(Фёдор Миха́йлович Достое́вский, 1821~1881)는 자기 자신은 전(全)인류를 사랑하는 의로운 인간일지라도 바로 옆에 누운 동료 한 사람을 전 인류를 사랑하는 만큼이나 미워했었노라고 고백했다. 우리 주변에도 매우 친절하고 상식적인 사람이 자신의 부모형제와 원수로 지내며 일생동안 내왕조차 없이 지내는 경우를 왕왕 본다. 남 얘기가 아니다. 잘 헤아려 천천히 가야한다.

 

너무 빨리 누군가에게 너를 맡기려하지도 말고, 한 단체에 경솔히 가입하려고 하지도 마라. 할 수 있는 한 너희들 자신을 얽매임 없는 가운데 놔두어라. 공부의 자유와 즐거움을 위해서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중략)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하라. 이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혼인하게 하라.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고린도 전서 7:25-38).

 

매일 40여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이혼율이 50%에 육박하고,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가 증가하고, 결국엔 ‘견디면 암 못 견디면 자살’이라는 말까지 생겨난 이 나라에서 결혼을 축복하고 행복을 축원하는 일이 책임 있는 행위인지 모르겠다. 나도 결혼식 주례를 여러 번 섰지만 자살하고 이혼하고 파괴되는 모든 가정이 그런 파라다이스를 꿈꾸며 출발했다가 결국엔 지옥의 경험으로 끝났으리라는 것을 생각할 때 더 이상 혼인의 주례가 되기가 주저되기도 한다. 이제야말로 결혼식 주례 같은 축복의 설교에 파묻혀버린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을 기억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오해하면 안 된다. 이것은 처녀의 결혼에 대한 반대와 금지의 말이 아니다. 여자뿐 아니라 남자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본질이고 본질에 충실한 삶이고 거기에 맞춰진 뜻과 지향이다. 그러니 결혼을 하더라도 두 사람이 함께 이러한 진리와 진실의 길을 추구해 나간다면 더 바랄 바 없이 좋겠다.

 

 

                                 일러스트/고은비

 

 

인생은 장애를 헤치고 나가는 것이다. 장애가 아주 없을 수도 없고 있다면 있는 대로 의미가 있다. 너무 많아 온통 그것을 돌파하느라 정신이 없으면 그것만은 불행이다. 나는 사도 바울처럼 너희를 아끼므로 장애가 가급적 없기를 바라고 있더라도 쉽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미리부터 장애를 대하는 기술을 연마하는 게 필요하다. 운동선수가 기본 폼을 익히는 과정처럼 사는 데도 기술이 필요하다. 사는 법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마음을 다스려 평안에 머문다는 것이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처럼 사람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으면 항상 자기의 주인으로 자기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주인은 자기 가계의 규모를 파악하고 해야 할 바를 분명히 안다. 의지와 의욕을 가지고 일한다. 곧 혼란 가운데서도 시야가 트이고 어두운 가운데서도 눈이 밝은 것이다. 그러면 매사 말이 분명해지고 뜻에 힘이 생긴다. 너희 자신의 손님(생각)들의 방문을 통하여, 세상과 사람들이 너희에게 주는 생각들을 통하여, 국가와 사회가 주는 생각들을 통하여, 너희 자신이 흔들리지 않게 된다. 그것이 오히려 너희의 할 일, 할 공부, 살아갈 목적과 의미와 방식을 결정해 준다. 근본적인 것 안에는 반드시 사랑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근본적인 것을 사랑한다.

 

다만 우리의 사랑이 자기 몸 하나에 국한되고, 우리의 지식이 기껏 자기가 살아온 몇 십 년 깜냥에 그치게 되면 공부의 보람이 무엇일까? 여기서 사람 사는 재미를 앗아가는 온갖 이기적이고 얄미운 행동들이 나타난다. 출세를 하던 성공을 하던 돈을 많이 벌든 그것은 저마다 제 자랑에 불과한 것이니 다 남을 괴롭히는 노릇이 아니냐. 공부의 목적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것이다. 《세상 속으로》는 막심 고리키( Максим Горький, 1868~1936)의 자전소설 제목이기도 한데 그 원뜻은 ‘브 류쟈흐(В людях)’, 곧 ‘사람들 속으로’라는 의미다. 거기엔 꼭 나도 우리 동네에서 한 몇 십 년 함께 살며 보아온 듯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대중이니 군중이니 민중이니 하는 거창한 이름에 속지 마라. 개혁이니 진보니 민주주의니 하는 이데올로기에 기대하지 마라.(물론 그 반대에 대해서는 말할 가치도 없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너희들과 나처럼, 언제나 구체적인 사람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거기서부터 출발이고 어쩌면 그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몇 사람이 아니어도, 그 수가 적어도 얼굴과 얼굴 마음과 마음이 마주쳐 열정이 솟고 불꽃이 튕긴다. 서로의 감정을 토해 놓으면 자기와 똑같아 어느덧 속이 시원해지고 뿌듯해지고 함께 사는 세상이 나를 지지해주는 용기로 환해지는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

 

너희도 조금은 알겠지만 소위 똑똑하다는 빈 수레가 항상 더 요란한 법이다. 많은 숫자와 인기와 대중의 권력 속에 자기를 동일시하며 들레는 것은 개구리가 한껏 공기를 들이 마시고 배를 부풀려 자기를 과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이사야 2:22) 과한 욕망을 부리지 말자. 생명은 그 코에 있으니 고작 공기를 마시고 사는 것이다. 얼마든지 마실 수 있고 힘들여 억지로 마시는 게 아니라 저절로 마신다.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다.

 

우리의 공부가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그것이 이 ‘자연(自然, 스스로 그렇게 됨)의 원리’와 더불어 영원히 지속되는 ‘하나!’임을 알아야 한다. ‘태초에 로고스가 계셨고 이 로고스는 곧 하나님이시다!’(요한복음 1:1) 이 자연, 이 땅은 그 로고스(λόγος, 말, 언어, 중개자,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인간에게 도무지 상관없는 곳이 된다. 인생은 어둠 속에 핀 곰팡이처럼 낯선 곳에서의 무의미와 공허로 떨어지고 그런 사람의 일생은 무언가를 남길 이유도 기억할 필요도 없다.

 

기독교에서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것은 천지간의 이 로고스를 만났다는 것이다. 곧 유교가 말하는 성인의 중용(中庸)이나 불교의 해탈(解脫, 깨달음)이나 노장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이나 근본이 다르지 않다. (이렇게 말하면 또 누군가 제 성에 차다 못해 넘치는 바가 있어 견디지 못할 위인이 있을 것이다. 나는 또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성철의 ‘불교’라는 말에 밑줄을 치고 그 아래 ‘기독교’라 써 넣으리라. 고백컨대 나는 불교보다는 내가 믿는 기독교가 수승(殊勝)하다고 보니까. 다 시원하고 유쾌하진 않은 말들이다.)

 

동양에는 자고로 유·불·선(儒·佛·仙)의 삼교(三敎)가 있었고 그 후 서양에서 기독교가 들어왔다. 그러나 동양이든 서양이든 인간의 조건이 다를 리가 있겠는가? 결국 모든 가르침은 하나, 곧 진리는 하나다! 어리석은 자들은 이 모든 가르침들의 다른 제도와 외형에 착념할 뿐 본질적으로 같은 조건에서 나온 같은 공부의 결과(가르침)라는 점은 끝내 이해하지 못한다. 곧 본질은 보지 못하고 외피만 보는 것이다.

 

너희가 나와 자주 다녔던 우리나라의 유명사찰들을 생각하면 비슷비슷한 법당들과 불상들과 탑들과 울긋불긋 현란한 단청들이 기억날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 오면 그것보다는 훨씬 단조로운 강대상과 십자가와 성가대를 보게 된다.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지만) 성당에 가거나 청진사(淸眞寺, 중국의 이슬람 사원)에 가보면 또 그에 맞는 여러 건축과 심벌과 문양들을 보게 될 것이다. 거기서부터 제도와 형식과 예배의 순서와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들이 나온다. 그러나 그것들은 외형이지 본질은 아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한복음 6:63).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것, 생명에 이르게 하고 죽음에 방치해두는 것은 본질이지 형식이 아니라는 말이다.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 염불인가, 젯밥인가? 진리인가, 예배인가? 본질을 표현하는 외적 형식은 ‘반드시 그렇게만 하여라’고 신께서 직접 일러주신 것이 아니다. 바울은 이것을 복음이라는 진리 안에서 이방인은 유대인이 될 필요가 없고 유대인은 이방인이 될 필요가 없다고 설명한다. 그것들은 다 인간들이 고안해낸 제 나름의 형식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만이 옳다’, ‘오직 내가 하는 이 형식과 법칙이 유일한 진리의 형식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몸에 두른 표범무늬 외투를 과시하느라 정작 그것이 빌려온 것임을 잊어버린 것과 같다. 파티가 끝나면 그 사람은 어디로 갈까?

 

본질을 망각한 종교의 허망함이란 바로 그 신을 내세워 인류 역사를 종교전쟁으로 물들이고도 정작 자기 종교 안에서조차 참된 진리를 구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 증명된다. 하물며 기독교 신앙의 외투를 두르고 실제론 자기의 욕망과 탐욕을 위해 싸우면서도 자기는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뭐든 잘 될 거라고 주장하는 어리석음일까. 너희는 결단코 그런 소란에 가담하지 마라. 그런 자들은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어떡하든지 남의 노동을 빌어 제 밭을 경작하려는 자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기독교인이므로 기독교를 비난해선 안 된다고 하지만 나는 반대한다. 나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기독교를 비난하는 것이다.

 

오직 진실로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타인의 자기와 같음을 이해하고 그 공통의 사랑을 위해 진리를 탐구하려는 자만이 침착하고 고요한 가운데 저절로 ‘자연(自然, 스스로 그렇게 됨)’이라는 세계의 한 법칙을 깨닫게 된다. 이는 공자와 붓다와 노장의 가르침이 결국 후대에 와서 하나로 통합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런데도 세상에는 아직도 나만은 당신들과 다르다 주장하면서 그 다름이 왜 어떻게 다른지 설명도 하지 못하는 자칭 선생들이 많다.

 

“내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저마다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 가르치는 사람들은 더 엄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야고보서 3:1).

 

그들이 심판을 받든지 말든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일까. 그러나 많은 악영향을 후세에 남겨주는 것만은 상관치 않을 수 없다. 그들 중에는 노골적인 종교사기군들도 많다. 그러나 그런 자들이 전부는 아니다. 착하기는 착하되 무섭게 착한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선량하긴 선량하되 너무나 선량한 나머지 어쩌면 주님을 위하여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법한 자들도 있다. 어떤 남녀들은 마치 종교적 좀비와 같아 아예 말도 통하지 않고 다른 말은 일체 들으려고도 하지도 않는다. 진리의 하나 됨에 있어서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부류는 바로 그들이다. 그들이 저 천둥벌거숭이 같은 노골적인 사기꾼들을 떠받쳐 준다.

 

이런 것이 어디 기독교뿐이겠느냐. 너희는 할 수만 있거든 그런 자들과 화평을 유지하되 한두 번 말하여 뜻이 통하지 않으면 일정한 거리를 두어라. 쌀 한 톨 생산하지 못할 공연한 분쟁으로 내내 어리석음에 가슴을 친 경험이 많았던 까닭이다. 내 말은 너희더러 산속으로 바닷가로 가라는 말이 아니다. 세상 속에서 사람들 속에서 그렇게 살라는 것이다.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잠언 18:1). 자기 소욕을 따르는 것은 결국 지혜에 반하게 된다. 개인의 의식이 어디에 속해있는지, 어디로부터 오는지, 어디를 향해 있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자연은 산천초목에 있는 게 아니라 너희 마음속에 있다! 모든 종교적 가르침의 핵심은 자기 안에서 ‘자연(自然)!’을 깨닫는 것이다. 누가 너의 안의 자연(스스로 그렇게 됨)의 주인이시냐? 주인에게 잘 길들여진 말은 채찍의 그림자만 보고도 주인의 갈 곳을 짐작하는 법이다. 채찍을 맞고도 갈 바를 모른다면 매만 더 버는 꼴. 불운이 불운을 낳고 불행이 불행을 불러들인다. 그러므로 더욱, 때가 되어 할 수만 있다면 산이나 바닷가나 고요히 자적할 수 있는 삶은 정녕 행복한 삶이다. 곤궁해져 어쩔 수 없이 가게 되는 사람도 있지만 미리 이 모든 재앙을 피해 은택을 누리는 선량한 인간들도 있게 마련이다. 평안하여라. 평안하여라.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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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에게 주는 편지(3)

 

자기를 사랑함, 생각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영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한복음 3:8).

 

사람이 살면서 직면하는 모든 경험은 그 사람의 인생의 내용이자 그에 대한 공부다.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인간은 자연 중에 가장 약한 한 줄기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고 했을 때, 두 가지를 말한다. 갈대와 생각! 갈대의 생각은 흔들림이고 흔들림은 갈대의 본질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냥 갈대(흔들림, 생각)가 아니라 생각하는 갈대다. 이렇게 바꿀 수 있다. ‘인간은 무의미한 생각들에 불과할지라도 그것들을 개관(槪觀, 생각)함으로써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생각을 생각한다’, ‘생각을 본다는 것은 자각(自覺)이 일어났음을 가리킨다. 빛이 어둠 속에서 번쩍(!)하고 비취면 순식간의 그 안의 내용물이 눈에 들어온다. 이것을 이해라하고 깨우침이라 하며, 그 과정을 공부라 한다. 이 세상에는 우연히 찾아온 생각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이 있고, 그 찾아온 손님과 얼굴을 대하고 그의 말을 경청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손님의 부류는 실로 다양하다. 무뢰한도 있고 폭군도 있고 달콤한 유혹자도 있다. 우리를 방문하는 이 손님들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이 비밀을 안다는 것은 너무나 신비롭다.

 

 

 

                            일러스트/고은비

 

 

손님 접대는 지나치지 않게 적절하고 정중해야 한다. 손님은 눌러 사는 식구가 아니다. 찾아온 소정의 목적을 마치면 방문객은 제 갈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회견을 마치지 못하면 침실에 응접실에 화장실과 마루와 마당에 눌러앉는다. 손님들이 돌아가지 않는 집안은 곧 마비될 것이다. 개중에는 아예 독재자처럼 주인을 내쫓고 왕노릇을 하려는 부류도 생길 수 있다. 쿠데타가 성공하면 국민은 노예가 된다. 주인이 도망치지 않으면 배길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생각하는 갈대는 흔들리면서 자각해야한다. 생각은 나이면서 내가 아니다. 그러니 분별해야 한다. 생각과 분별, 이 둘을 한꺼번에 수행하려면 고도의 기술과 훈련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대개 어정쩡한 기술을 가지고 산다.) 사람이 기술을 완전히 익히려면 따로 시간을 들여 공부를 해야 하는 것처럼, 이 공부 또한 처음엔 정신을 차려 따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공부의 목적은 무엇인가? 성철(性徹, 1912~1993)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장(항상) 생각하는 쇠말뚝이 있지. 그것이 아직도 박혀 있거든. ‘영원한 진리를 위해 일체를 희생한다이것이 내 생활의 근본자세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더러 책도 읽어보고 했는데, 그래도 불교가 가장 수승(殊勝, 특히 뛰어남)합니다. 불교보다 나은 진리가 있다면 나는 언제든지 불교를 버릴 용의가 있습니다. 나는 진리를 위해서 불교를 택한 것이지 불교를 위해 진리를 택하지는 않았습니다.” (<산은 산 물은 물>법정(法頂) 스님과의 대화, 밀알, 1983.)

 

나는 여기서 성철이 말한 불교에 밑줄을 친 다음 그 밑에 기독교라고 써넣어 본다. (결국 같은 말인데 이런 말이 왜 필요한지 너희는 모르리라.)

 

많은 사람들이 인생은 허무하다고 말한다. 너희들도 벌써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했고 장례식에 참례했었다. 허무하다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장례식이 끝나면 무의미한 인생을 계속 살기 위해 재빨리 무덤을 떠난다. 가장 오래 머물고 자주 찾아오는 사람은 고인을 가장 오래 기억하는 사람이다. 누군가 한 말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그와 함께 있다는 뜻이다. 사람이 누군가를 오래 기억한다는 것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일이다. 이러한 기억 또한 생각의 한 방식이다. 애도란 헤아려보는 슬픔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삶의 허무와 무의미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시지프스 신화에서 철학자의 주장은 실천에 의해서만 진실로 증명된다고 말했다. 인생이 공허한 것이고 살 가치가 없는 것이라 주장하려면 그 신념을 실천으로 보여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곧 자살(自殺)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생이 공허하고 무의미하다고 되뇌면서도 자살하진 않는다. (물론 이 나라에서는 하루에 40여 명씩이나 되는 자살자들이 있다. 누가 그들을 자살로 몰아대는 것인가? 이것도 곧 밝혀지리라.)

 

종교 재판정에서 스스로 내린 결론을 부인해야 했던 갈릴레오처럼 우리를 모순되게 나마 계속해서 살게 하고 자살하지 않게 하는 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 의미를 발견치 못한다면 우리들은 스스로 목숨을 버린 용감한 인간들에 비할 때 도리어 비겁하고 비열하고 열등한 존재들일 것이다.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정작 자신은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 개인의 의식은 전체의 의식으로부터 온다. 우리 모두가 어떻게 서로에게 가해자이며 피해자인줄 알겠는가? 우리가 어떻게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폭력의 위협을 받는지 알겠는가? 한 사람의 생각은 그를 둘러싼 전체로부터 오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의미에 관한 의구심을 낳는다. 오로지 죽음을 향해가는 삶이라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대답은 없다. 있는 것은 의구심이다. 따라서 생각해야 한다. 매순간 자신에게 찾아오는 생각을 자각함으로써 깨어있어야 한다. 그것이 사는 길이고 살아있는 방식이다! 그 자각 가운데 흔들려도 더 이상 흔들림이 없고 죽어도 더 이상 죽음이 없어진다. 이 말은 진리를 깨우친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도를 닦아 공중부양에 축지법을 쓰는 도사도 앓다 죽게 마련이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으니까 죽지도 아프지도 않을 것처럼 기대하기도 한다. 그런 것을 신학(神學)’이라 부른다. 신학이 그의 삶을 만드는데, 상상해 보라. 그러한 신학이 그들의 생각(현실)과 얼마나 상관없는 생뚱맞은 것일지. 그들은 딴소리로 제소리를 덮는 사오정과 같이 자기세계 안에서 순진하긴 하다.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 게 아니라 한 번 죽는다. 이미 죽음을 선고 받았으므로 벌써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 또한 신학이다. 여기에서 그렇다면 무엇이 이 살아있음의 의미가 될 것인가 하는 탐구가 나온다. 바로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라는 존재의 근원, 곧 나에게서 일어나는 이 모든 생각들의 출처와 행방을 연구하여 나의 생과 사의 근본을 탐구하는 일이 내 인생의 숙제이다. 내 <자서전(自敍傳)>의 주제는 바로 나다.

 

본래 이러한 생각과 공부는 따로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부분을 끝내 깨우치지 못하여 생각 따로 공부 따로의 폐단이 생긴다. 즉 그가 쌓아올린 공부의 지식과 그의 의식적 현실이 서로 반()하여 극단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타인들은 외면만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물에 가까이 가서 렌즈를 들이대면 예상과 다른 진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 마냥 책상 앞에 앉아 고문서를 뒤지는 것으론 이 공부가 못된다. 곧 현실(사는 일 자체)과 더불어 항상 그 현실을 도구로 병행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학교 공부가 이 점을 일깨워 주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문제는 지금이라는 삶의 경험을 항상 분명한 목적과 의미를 지닌 공부로 여길 수 있고 볼 줄 아는 안목(眼目)이다. 거기서 공부가 시작된다. 이것이 자신에 대한 사랑’, 곧 자기의 생각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알아내는 유별난 관심이다. 그러니 자기를 직시(直視)하고 직면(直面)하려는 사람은 먼저 침착하고 고요하고 용감하고 의연해야 한다. 완벽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흔들리더라도 흔들리면서 그래야한다는 말이다.

 

톨스토이(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1828~1910)26세 때인 1854년 제정러시아와 오스만 터키간() 크림전쟁에 참전했다. 포탄에 동료들의 팔다리가 찢겨져 나가는 최전선 포대에서(그는 포병 장교였다) 그는 전쟁과 살육의 한복판에서도 인간으로서 인간다운 삶과 죽음의 의미가 무엇일까를 묻는 공부를 했다. 그때 쓴 세 편의 중편소설(세바스토폴 연작)로 톨스토이는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됐던 것이다. 이것이 인생에 대한 사랑이 아니고 무엇일까.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를 사랑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욕망과 탐심으로 공부를 시작하여 경쟁과 시기 질투로 과목을 삼는다. 우쭐대고 들떠서 시끄럽고 방자하게 군다. 비교와 경쟁에서 오는 왜소함에 위축되어 절망한다. 부질없는 탐욕에 붙들려 원치 않는 분쟁과 쓸데없는 소란에 끌려 다닌다. 그리하여 일생 동안 자기를 사랑한다고 분투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고 만다. 나는 너희들이 무자각한 사람들 속에 뒤섞여 인생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거기가 살아있는 지옥이기 때문이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마가복음 9:48).

 

 

Who has seen the wind?

(누가 바람을 보았나요?)

 

Who has seen the wind?

Neither I nor You:

But when the leaves hang trembling

The wind is passing thro.

 

누가 바람을 보았나요?

나도 당신도 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나뭇잎 살랑거릴 때

그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고 있지요.

Who has seen the wind?

Neither you nor I:

But when the trees bow down their heads

The wind is passing by.

 

누가 바람을 보았나요?

당신도 나도 보지 못했어요

하지만 나무들 고개 숙일 때

그 곁으로 바람이 지나가고 있지요.

 

-크리스티나 로제티(Christina Rossetti, 1830~1894)-

 

 

, 이 모든 생각이 어디에서 오는 줄 알았느냐? 너희도 거기에 한몫 가담하고 있느냐?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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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에게 주는 편지(2)

 

진정성에 대하여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웃과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언제나 그 다음이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말도 아니고 이웃과 타인을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도 아니다. 이 둘은 언제나 같이 간다. 같이 감으로써 서로를 보완하고 고쳐주고 완성시킨다. 그러나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먼저는 자신을 아는 것이고 그 다음이 자기 자신에 기반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다. 이때의 실천이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우러나는 육친(肉親)적 사랑이다. 육친(肉親)이란 곧 내 몸이다. 아빠가 너희를 사랑하듯, 엄마가 너희를 사랑하듯, 너희는 곧 우리의 몸이다. 누가 자기 몸을 이 세계의 전부로서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랑이란 그런 것이니 억지로 사랑하는 척 수고를 자처하지 마라. 너희 자신조차 사랑할줄 모르면서 인류 전체를 사랑하려 하지 마라. 너희들이 사랑하는 너의 가장 가까운 이들, 네 몸 같은 이들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그러면 그 사랑이 곧 인류를 사랑하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곧 무엇보다 진정성의 문제다. 진정이란 몸과 마음과 영혼(이건 하나다! 셋이 아니다!)으로부터의 자연스런 우러나옴이다. 때문에 머리로 생각하여 임의대로 생산해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세속적이라 속물적이라 하는 말은 거짓으로 진정을 꾸며내어 남에게 자신의 충성스러움을 내보이려는 신념의 상투성이다. 그것은 거짓이고 속임이고 비지니스다. 그런데도 온 세상이 이런 거짓과 속임과 비즈니스를 아무런 성찰과 반성도 없이 드러낸다. 그러면 그에 대응하는 응답 역시 속임과 거짓과 비지니스가 된다. 도대체 자기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면서 남을 사랑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또 남을 사랑해야한다는 말을 듣고 자기의 상태도 망각한 채 맞장구를 친다고 곧바로 그와 같이 남을 사랑하게 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전 자연스런 자기의 우러나옴을 알아내는 공부는 하지 않고 남에게 보여 인정받으려고 남을 사랑하는 척 착한 흉내를 내려고 하는 사이비(似而非) 위선자들이 많다. 이는 다 잘못 배운 것이고 누군가 잘못 가르치는 자에게 잘못 배웠기 때문이다.

 

오늘날 설교자(선생)들은 영혼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자연 상태의 마음은 버려두고 ‘사랑해야한다, 봉사해야한다, 용서해야한다, 화해해야한다’ 같은 누군가의 좋은 말들을 자기 말인양 영혼 없는 앵무새처럼 반복한다. 자기 자신조차 실천하지도 않고 실천 할 수도 없는 그럴듯한 율법을 설파한다. 저마다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디모데전서 1:7). 말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바로 그 거저 구원 받았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알지 못한다. 아무에게도 드러나지 않고 드러날 필요가 없는 자신을 찾는 근본은 망각하고 모두에게 드러낼 수 있는 자화자찬(自畵自讚)의 공적에만 집착한다.

 

이는 겉옷은 화려하고 멋지게 차려입었으나 속에는 더러운 속옷을 입고 있는 것과 같다. 속옷이야 어찌됐든 겉옷만 잘 입으면 된다는 자기치장의 이유가 무엇일까? 처음부터 공부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도무지 자기 자신을 참되게 알아가는 공부를 시작도 못해본 것이다. 지금까지도 여태껏 자기를 아는 공부가 무엇인지를 모르며,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남에게 가당찮게도 진리의 공부를 가르친답시고 휴머니즘의 교사노릇을 자처한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마태복음 10:24). 그런 자들에게선 필연적으로 그들보다도 못한 어리배기 제자들이 나온다.

 

 

 

 

너희는 언제나 먼저 자기 자신을 알아내는 공부를 해야 한다. 그 다음 거기서 얻어진 자신의 무가치함과 어리석음과 경박함과 경솔함으로 진중함을 깨달아 들레지 않고 과장되지 않고 거짓으로 꾸며내지 않는 너희의 진정성을 획득하거라. 그렇게 되면 너희 말은 보다 견실해질 것이고 신뢰할만 할 것이고 설득력을 가질 것이다. 무엇보다 너희들 스스로 남이 너희를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주게 되는 자신의 고귀한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 너희에겐 모든 사람이 너희의 선생이나 더 이상 선생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다. 사람들의 인정과 타인의 비평에 대하여 의연하고 초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한 의연함과 초연함이 가능할 때만 사랑의 실천이든 타인에 대한 봉사든 용서와 화해이든 무엇이든 진정으로 너희가 하고자하는 행위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자기를 알게 되어 거기서 나오는 진정이란 이와 같이 자기뿐 아니라 세상을 밝힌다. 굳이 입으로 발설하고 손가락으로 지적하지 않는다 해도 저절로 거짓을 드러내고 천박함을 드러내고 모든 거짓과 속임에 대항해 진실과 진리를 드러내게 된다. 또한 이로써 아직 명확하지 않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때의 진정이란 영혼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영혼의 본래적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색무취이면서 투명하고 초월적이다. 아첨이나 아부를 할 줄 모른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분별할 수 있다. 그것은 이미 착한 것도 아니고 칭찬 따위를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언제나 그런 상태로 언제나 그렇게 행할 뿐이다. 본래 그런 상태인 것이고 본래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사람이 멈출 곳을 알 수 있다면

항상 고요하고 항상 안정되리라

지극히 고요하여 욕심이 없어지고

만사가 편안하여 옮겨 다니지 않게 되고

백가지 생각이 하나로 모일 것이다.

-이탁오(李卓吾, 본명 이지(李贄), 1527∼1602)-

 

너희들은 마음이 항상 고요하고 항상 안정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그것부터 해결하지 않으려느냐? 마음의 진정이 오락가락 자기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데도 그것은 그대로 방치해둔 채 누구를 사랑하고 어떤 훌륭한 일을 하고 싶다고 하겠느냐? 온갖 근심과 걱정이 ‘아하, 이것이었구나!’ 하고 마음이 포착해낸 하나로 모여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것을 감당해 나가겠느냐?

세상에는 온갖 잘난 척을 하는 선생들이 있어 그들은 제 자신을 속이듯 세상을 속이는 자들이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자들은 그들의 속임수를 눈치 채지 못하고 그들을 존경하며 추종하고 그를 위해 그들의 악을 본받기까지 한다. 그들의 거짓과 기만의 사업에 돈을 내고 몸을 내주어 그들의 욕망을 위해 봉사해준다. 그들을 위해 진실과 싸우며 거짓을 변명해주기까지 한다. 이것이 목사(선생)가 학생 보다 많고 사원(교회)이 편의점보다 많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렇게 잘나고 똑똑하고 모범적인데 어찌 그리 비양심적이고 뻔뻔하며 비열하고 비겁한가. 그 비양심과 뻔뻔함과 비열과 비겁을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것은 그 자신일 뿐이다.

 

세상에는 드러나진 않지만 오로지 진리를 추구하며 배우기를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들이야말로 하늘이 알아주는 사람이 아닌가!) 하지만 죽을 때까지라도 자기의 영혼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명백한 진리를 깨우치지 못하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자들 또한 부지기수다. 그런데도 단 한 순간도 이러한 진리를 가까이하는 경험도 없이 날마다 제 스스로 진리의 교사를 자처하고 나서는 자들도 들끓는다. 내 딸들아, 그러한 구태의연한 거짓 선생들에게서 재빨리 떠나라. 구태의연한 거짓 선생들을 한 눈에 척, 알아보아라. 행여 거기 눌어붙어 그들과 함께 바보가 되지 말아라.

 

그리고 언제나 너희들 자신을 살필 수 있는 마음과 영혼의 골방부터 마련해라. 거기서 우선 자유로이 너희를 이렇게 저렇게 연마해라. 너희 자신이 먼저 거짓된 자아(自我)의 망상으로부터, 그 놈이 만들어내는 온갖 유치하고 경박한 희비극으로부터 너희를 구원해주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공부가 성공적이었다면 언젠가 반드시 타인과 세상을 위해서도 너희의 그 구원이 쓰일 데가 있으리라. 딸들아. 설령 쓰이지 못한다 해도 무슨 상관이겠느냐. 이미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너희들의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는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은 하늘이 너희를 알고 너희가 너희를 알고, 너희가 너희를 알고 있음을 너희가 알고, 하늘이 너희를 알고 있음을 너희가 아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너희 자신이 주체다. 진정성이 있다는 것은 타인의 인정을 구할 필요가 없는 천하무적인 것이다. 명심하여라.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니 또한 군자(君子)가 아닌가.” (《논어》, 「학이(學而)」편.) (2015. 9. 5.)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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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에게 주는 편지(1)

 

유언(遺言)

 

 

 

나는 지난 6월 메르스에 감염되어 서울대병원 격리병동에서 1주일간 투병했다. 내게는 팔순의 노모와 아내 그리고 세 딸이 있다. 아이들은 고등학교 1학년, 중학교 2학년, 초등학교 3학년이다. 아이들의 외할아버지는 앞서 메르스에 감염되어 국립중앙의료원에서 돌아가셨다. (주께서 그분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기를!) 할아버지와 아빠의 감염으로 아이들은 40여 일간을 집에서 격리된 채 보냈다. 아이들은 한 집에서도 부모와 떨어져 할머니 방에서 지내야 했다. 학교에 가는 것은 물론, 제 엄마조차 유리창 너머로 바라볼 뿐 가까이 다가 갈 수 없었다.

 

내가 한밤중에 구급차에 실려 격리 병동에 들어가야 했을 때, 어머니와 아내와 아이들은 마당에 나와 집을 떠나는 나를 전송했다. 나는 그 때 그들에게 거의 아무 말도 못했다. 어머니께 너무 걱정 마시라 했던가. 아내에게 굳건히 잘 있으라 했던가. 아이들에겐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 애들에게 입을 맞출 수도 품에 안을 수도 손을 잡아 볼 수도 없었다. 나는 그것이 가장 가슴 아팠다. 아이들은 떠나는 나에게 용기를 낸 인사도 변변히 못했다.

 

격리병동에서 나는 내가 언제든 이렇게 죽을 수 있으리라는 현실에 직면했다. 실제로 죽음 비슷한 경험도 했다. 나에게 내가 죽는 것은 상관없었다. 그러나 남아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견딜 수 없는 슬픔이 몰려왔다. 내가 죽은 다음에 누가 나의 아이들을 보살펴 줄까? 물론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어떡하든 그 애들이 계속해서 살아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로서 나만이 해 줄 수 있는 그것은 나 이외에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살아서 이 병실을 나간다면 언젠가 나 없이 살아가야할 딸들을 위해 내가 부재할 때도 언제나 나의 음성이 되어줄 유언을 쓰기로 마음먹었었다.

 

퇴원한 후 다행히 몸도 회복되었고 할아버지의 뒤늦은 장례도 치렀다. 약속을 지킬 때가 온 것이다.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지만, 누가 알랴. 장인은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신 채 돌아가셨다. 그리고 나는 살아남았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함인가? 나는 이젠 미루지 않으려 한다. 언제까지 쓰게 될 진 모르겠다. 가급적 한권의 책이 될 때까지 쓰고 싶다. 그리하여 딸들에게 한 권의 유언을 물려주고 싶다. 돌아가시니 알겠다. 그분의 한마디 한마디는 곧 세상과 우리에게 남기는 유언이었음을. 그 마음으로 살고 그 마음으로 사랑하리라 

 

 

 

 

영적인(참된) 삶에 관하여

 

(, 혹은 영혼)이란 다른 게 아니라 본질을 말한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영혼 없는 사람이 없고 영의 작용에 의해 존재하지 않는 사람도 없다. 이 영을 생명존재의 빛이라 한다. 어느 한 순간도 이 빛과 생명이 발현되지 않는 때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즉각적으로 알아차리긴 어렵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사람의 인식작용, 곧 육체와 혼(정신)의 쉬지 않는 주인노릇(자기증식) 때문이다. 생각해 보아라. 육체로부터 생각이 순간순간 얼마나 속력이 빠르게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낳는지. 이것을 다 헤아려본다면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정신없는 생각 속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본래 영혼의 생명이란 무색무취(無色無臭), 생명 그 자체이다. 그에겐 걸림도 없고 슬픔도 없고 고통이나 괴로움도 없다. 없는 것이 아니라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인간이 나고 자라나면서 인식의 작용이 무한대로 팽창하고 증식하여 자아(自我)’라는 거대한 망상이 생겨난다. (그것이 자랑이든 열등감이든 자기가 자기를 생각하는 관념은 망상(妄想)이다) 영혼의 생명과 상관없이 자기(自己)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곧 처음 영혼에 의거했던 생명이 망상에 의해 이제부터 자아에 의거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본래 무색무취하여 아무 것에도 구애를 받지 않지만, 인식을 이루는 자아는 자기가 경험하는 온갖 무늬와 얼룩과 맛과 호불호의 감정과 기억에 좌우된다. 따라서 영혼은 본래 고요한 것이지만 자아는 본래 자극이고 불안이다. 영혼은 하나님의 일을 보지만 자아는 자기의 망상을 본다. 영혼은 본래 다 이룬 것이고 완성된 안식일이지만 자아는 끝없이 요구하며 쉬지 못하게 자기를 수탈한다. 누가 어려서부터 이점을 분명히 알게 해 주어 영에 기초한 삶과 자아에 기초한 삶의 차이를 분별하게 할까. 누가 최고의 지혜를 다해 자아의 망상으로부터 벗어나 고요하고 평안하고 자유로운 영혼과 관계를 맺도록 이끌어 줄 것인가.

 

어렵다. 똑똑한 사람이면 그 똑똑함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면 그 어리석음 때문에,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면 바로 그 이도 저도 아닌 그 점 때문에, 그들은 이 주제의 중대한 논점을 헤아리지 못한다. 때로는 종교를 안다하고 종교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더 헤아리지 못하고 타인들까지 혼란스럽게 한다. 그리하여 그러한 견해와 관점과 이해력이 곧 자기와 자기 주변의 삶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악이란 바로 그러한 무지(無知, 알지 못함)와 무명(無明, 빛 없음, 깨우치지 못함)이 만들어내는 자아의 망상과 그 망상에 따르는 온갖 불필요한 일들이다. 딸들아, 너희는 불필요한 일들에 일생을 매어 사는 사람의 불행에 관하여 반드시 알기를 바란다. 너희는 어려서부터 아빠의 말과 글을 대했고 설교를 들어왔으니 아빠의 이 말이 그다지 어렵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몇 마디 말로 다 설명해 주기 어렵다.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도 있고, 자라면서 사모하는 사람도 있고, 자라서 깨우치는 사람도 있고, 늙어서야 겨우 알게 되는 사람도 있다. 자아의 망상이 언제나 진리를 아는 것 보다 불필요한 욕망의 일들을 더욱 중대한 것이라 여기도록 만들고 거기에 열중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절로 아는 사람도 있고, 배워서 아는 사람도 있고, 온갖 고통을 다 겪어서 아는 사람도 있고, 끝끝내 모르는 사람도 있다. 자기 삶을 만들어내는 모든 과정을 자기가 안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다. 삶의 방식을 고쳐 자기의 한계를 벗어나고 자기의 고통에서 해방된다는 것의 어려움을 이로써 이해할 수 있다.

 

행복 가운데 가장 행복한 사람은 진리를 알고, 그것을 사랑하고, 그에 따르려는 착한 마음, 곧 거룩한 종교심(신심,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내 딸들아, 늘 아빠가 가르쳐준 이 거룩하고 차분한 마음을 잃지 말거라. 무슨 일을 만날지라도 진리의 완전한 평화를 믿고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사람을 평강에 평강으로 지켜 주신다.’ (이사야26:3). 진리에 의지하는 사람은 마음의 요동에 의하여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는다. 마음을 항상 고요하고 침착한 상태로 유지하고 지킬 수 있다. 그런 사람을 하늘이 도우신다. 도우신다기보다 하늘의 뜻을 알아 거기에 따르는 것. 곧 하늘이 그 사람에게 생명과 인생을 주신 천명(天命)을 깨달은 사람, 하나님(하늘)과 교감을 지닌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하늘)의 자녀라 부르는 것이다.

 

본래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영혼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주어진 것이니 주신 분(주체와 의지)이 계신다. 인간이 인격을 가진 것은 그것을 주신 이가 인격이시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우주와 세계가 지성적으로 유지되는 것은 그것을 만드신 이가 지성적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비록 나중에 깨우쳤어도, 못 깨우쳤어도, 그에게 아직 없거나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다. 항상 있는(계신) 것이며 그()에 입각하고 의지해 있으나, 그것을 알지 못하고 거스를 뿐이다. 포기하지 않고 겸손하게 배우려고만 든다면 누구나 배울 수 있다. 만날 수 있다. 그분이 주시는 무한한 영혼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곧 맑음 중의 맑음이고 밝음 중의 밝음이고 진솔 가운데 진솔이고 사랑 가운데 사랑이다. 근심 걱정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고 벗어남이다. 관계의 얽힘, 부질없는 근심과 걱정, 음모와 모략, 말과 말들의 이어짐, 의심과 협잡, 이런 것들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날 것이다. 이제부터 시비 논쟁이 아니라 거기서 벗어난 것이 너희의 인생의 내용을 만들어 갈 것이다.

 

모두가 벗어나지 못한 세상에서 벗어난 자로 존재하는 그것이 신적(하늘이 주신) 사명이다. 사명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라 반드시 확실하게 얻은 자, 깨우친 자, 변화된 자, 변화되어가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얼마나 다른 인생이고 얼마나 다른 내용이고 얼마나 다른 목적과 지향인가. 우리는 그것을 구원천국이라 진리라 부른다. 같은 세상을 동일하게 살면서 그런 특권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구원을 받았고 천국을 소유했고 진리를 알았다. 또 그렇게 부름 받았다. 그러니 천국을 지향해 나가야 한다. 이것이 곧 진리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고 우리가 그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는 말씀이 성경에 나오지 않는가.

 

그러므로 무서워해야한다. 우리 모두 이 세상에 한 영혼으로 태어났거늘 어찌 그것을 모르고 자아의 망상 가운데 서로 앙숙이 되어 시기경쟁하며 싸워야 하는가. 혹은 본래 진리를 알지 못하여 자기의 옳고 착한 뜻으로 행동한다하면서 항상 다시 악에 빠지고 마는가. 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낭비하고 세상과 세계를 못 쓰게 하려고 애를 쓰는가. 사람들은 이런 진실도 알지 못한 채 진리의 배움과 이끎을 무한정 뒤로만 미룬다. 각자 자기를 괴롭히는 허무한 욕망으로 인생을 보낸다. 그러나 너희는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아라. 오늘 배워야할 진리를 내일로 넘기면 그만큼 자아의 망상은 독초와 같이 자라날 것이다. 밭에 풀은 날마다 뽑아야 한다. 그래야 열매를 먹는다. ‘이마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으리라.’(창세기3:16) ‘일하기 싫은 자 먹지도 마라.’(데살로니가 후서3:6) 어찌 음식과 노동에 관한 말에 그칠 것이겠느냐. 부지런함이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만이 아니다. 깨우쳐야할 때 깨우치지 못하는 일이야말로 게으름 중의 게으름이고, 무서운 일중의 무서운 일이다. (2015715.)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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