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37)


오르막과 내리막


수피령은 정말 만만한 고개가 아니었다. 로드맵에도 수피령을 두고는 ‘직등코스’라 적혀 있었고, 전날 길을 걷던 중 우연히 만나 긴 이야기를 나눈 심마니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넘어야 한다고 일러준 터였다.


‘수피령’이라니, 무슨 뜻일까 궁금했다. ‘물 수’(水)에 ‘가죽 피’(皮)에 ‘재 령’(嶺), ‘水皮嶺’이라 쓰고 있었다. 어찌 그런 이름을 얻었을까 싶은데 함장로님은 ‘말이 씨가 되었나, 96년 대홍수 때 대성산 수피령은 온통 물을 뒤집어쓰는 대피해가 있었다.’고 수피령에 얽힌 일 한 가지를 소개했다.


이른 아침 숙소 앞에 있는 식당에서 국밥을 먹고 길을 나섰다. 막 퍼지기 시작하는 볕인데도 벌써 더위가 느껴질 정도였다. 단단히 마음을 먹으라 한 고개이니 여느 길보다도 마음을 다잡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도 일종의 오기였을까, 고개를 다 넘기 전까지는 쉬지 않겠노라고 마음을 먹었다. 힘든 길일수록 중간에 쉬면 쉬고 난 다음이 어려웠다. 배낭은 더 무겁게 느껴졌고, 걸음은 나도 모르게 무거워지곤 했다.


수피령은 두 가지 점에서 어려웠다. 하나는 완만한 경사였고, 다른 하나는 급한 경사였다. 완만한 경사가 끝없이 이어졌다. 완만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완만한 경사는 언제인지도 모르게 내 안에 있는 힘을 다 소진시키게 했다. 차라리 힘이 들어도 급한 경사를 단 번에 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마음을 알았다는 듯이 어느 순간 급경사가 나타났다. 그야말로 한 걸음을 옮기기가 쉽지 않은 경사였다. 한 번 주저앉거나 자빠지면 데굴데굴 굴러 처음 떠났던 자리로 물러설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느새 입에서 터져 나오는 숨은 증기기관차에서 내뿜는 김처럼 뜨겁고 소리도 거칠어졌다. 심장은 부풀어 오를 대로 부풀어 올라 “뻥!” 하며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한 순간에 파열될 것만 같았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느껴보는 몸의 한계였다.


마침내 나티난 수피령 정상. 고개 하나를 넘기가 이리도 어렵다니,

 인간이 갖고 있는 한계가 자명하게 여겨졌다.


몸의 한계를 느끼는 것을 좋아했었다. 신학을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서울 냉천동에 있는 감신대(監神大)에서는 해마다 가을이 되면 학년 대항 체육대회를 했다. 과(科)라고는 달랑 신과(神科) 하나, 한 학년 학생이라고는 50명, 당시의 감신대는 마치 수도원 같은 분위기였다.


한 학년이 50명인데다가 우리 학년은 유난스레 여학생이 많았다. 내 기억에는 16명이었지 싶다. 남학생들 중에서도 더러 군대를 가고 휴학을 하고 나면 그 수는 더 줄어들었다. 운동을 좋아하기도 했거니와 학생도 부족하다보니 나는 거의 모든 경기를 뛰어야 했다. 당시의 주종목은 배구와 농구였는데, 경기를 모두 마치는 오후가 되면 거반 녹초가 되었다.


체육대회의 마지막 종목은 단축 마라톤이었다. 이미 몸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지만 마라톤도 뛰었다. 그 때 느낀 것이 몸의 한계였다. 심장이 파열될 것 같은 한계를 마주하며 계속 달리는 것은 고통스러웠지만 뭔지 모를 희열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1학년 때의 경험을 친구에게 이야기하여 2학년 때는 친구와 함께 뛰기도 했다. 수피령을 오르며 그 시절 느꼈던 감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학!, 학!, 학!”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탄식처럼 비명처럼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때마다 단내가 확 풍겼다. 그러던 중 마침내 더는 견딜 수 없다 싶은 순간이 왔다. 고개를 넘을 때까지는 쉬지 않기로 한 다짐을 포기해야 할 것 같은 순간이었다.


나는 목사다, 마지막 한계에 왔다 싶을 때 내뱉는 소리와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학!” 소리를 “주여!”로 바꿨다. 자신이 매달릴 무거운 통나무를 자신의 어깨에 메고 쓰러질 듯 쓰러질 듯 비척거리며 골고다 언덕을 오르던, 그러다가 여러 차례 쓰러졌던 예수님을 생각했다.


내가 등에 메고 있는 것은 고작 배낭 하나, 게다가 채찍을 내리치는 로마군병도 없지 않은가, 사람들의 조롱소리가 들리는 것 아니고. 그런 생각을 하며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옮겼다. 몸과 마음의 한계 속으로 누군가가 가만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화천과 철원은 수피령을 경계로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다. 고개는 오르기가 힘들었지 내리막길은 저절로 가는 것 같았다. 우리는 견딘 것 만큼을 누리는 것이었다.


마침내 나타난 정상, 고개에 올라서자마자 나는 고꾸라지듯 길가에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요새 눕기보다 쓰러지는 법을 배웠다.” 황동규 시의 한 구절일 것이다. 해발 780m 고개를 넘기가 이리도 어렵다니, 인간이라는 존재가 갖는 한계가 자명하게 여겨졌다. 배낭에 기대 누워 생각하니, 고개를 다 넘은 여유 때문이었을까, 옛 시절 보릿고개를 넘는 일은 수피령 고개 넘는 일과는 비교도 안 되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서 오십시오, 청정지역 철원입니다’


눈앞에서 반기고 있는 표지판 속 ‘철원’이라는 글자가 더없이 반가웠다. 화천과 철원은 그렇게 수피령을 경계로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고개 정상까지 오르기가 어려웠지 그 다음은 쉬웠다. 로드맵에 적혀 있는 것처럼 ‘30리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저절로 가지 싶은 걸음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도움이 되었던 것은 바람이었다. 저 아래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수피령을 오를 때는 없던 바람이었고, 고개를 오르느라 수고했다는 듯이 온 몸 다 젖은 땀을 내내 말려주었다.


살다보면 오르막길을 만나기도 하고 내리막길을 만나기도 한다. 계속 오르기만 하는 오르막길도 없고, 언제까지나 내려가기만 하는 내리막길도 없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은 서로 어울리며 이어진다. 오른 자만이 내려갈 수가 있다. 내리막길을 가볍게 걷는 즐거움은 오르막길을 힘겹게 오른 자만이 누릴 수가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참아낸 만큼을 누리는 것이었다.


내리막길을 걷고 있자니 마치 누군가가 뒤에서 등을 밀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오르막길을 걸을 때에 비하면 저절로 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퍼뜩 드는 생각이 있었다. 정말로 누군가가 내 등을 밀어주었던 때는 힘겹게 오르막길을 오를 때였다는 생각이었다. 누군가가 등을 밀어주었기 때문에 벅찬 오르막길을 끝까지 오를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의 등을 밀어주는 때는 내리막길을 편하게 내려갈 때가 아니라, 오르막길을 힘겹게 오를 때였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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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36)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들


뜻이 있어 그렇게 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걷는 기도의 일정은 열하루로 정해졌다. 주일 지나 월요일에 길을 떠났고, 길 떠난 다음 주 금요일에 말씀을 나눌 신우회 예배가 있어 목요일까지는 돌아와야 했는데,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열하루의 일정이 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고성의 명파초등학교에서 파주의 임진각까지의 거리를 열하루의 일정으로 나누니 조금 무리다 싶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불가능한 거리가 아니었던 것도 일정을 정하는데 있어 큰 몫을 했다.


일정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채 길을 떠났는데, 곰곰 그 의미를 생각한 이들이 있었다. 같은 지방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천성환 목사님은 길을 걷고 있는 내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주었다.


길을 걷다가 만난 벽화. 이불에 지도를 그리고는 옆집으로 소금을 얻으러가던,  

어릴 적 내 모습이 그림 속에 담겨 있었다.


샬롬!

폭염에 목사님 건강을 지켜 주시길 손 모읍니다. 전 요즘 성도들과 함께 민수기 말씀을 큐티하고 있는데…,


모세와 함께 시내산을 출발하여 가데스바네아까지 열 하룻길이었는데, 도중에 메추라기 일로 한 달을,, 미리암이 모세를 대적한 일로 일주간을 광야에서 더 머물러야 했지요. 정탐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었는데,,, 정탐을 고집한 이스라엘 공동체를 보면서…


인간의 명석한 이성(?)이 당대와 다음 세대에게 얼마나 고통을 안겨 주었는지 실감합니다.


목사님의 열 하룻길의 걸음이 제 목양 사역에 돌아가는 길이 아니길 기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걷는 목사님의 발걸음!》



가데스바네아는 길을 걸으며 묵상하기에 더없이 좋은 내용이었다. 주일을 맞아 혼자 예배를 드리며 가데스바네아를 생각했던 것도 천 목사님의 글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게 지금의 내 목회와 섬기고 있는 성지교회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걷는 기도를 마치고 돌아와 교역자회의에 참석했을 때였다. 회의를 마치고 마주앉아 식사를 하던 고신복 목사님은 걷는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성서원어를 공부하는 일에도 열심인 고 목사님은 언제라도 기회가 되면 꼭 걸어보고 싶다며 내가 걸었던 일정표를 구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함 장로님이 만들어 주신 로드맵을 메일로 보냈더니 정성이 담긴 답장을 보내주었다.


들판에 서 있는 솟대. 허름한 솟대지만 그것을 세운 이의 마음은 지극했을 것이다.


샬롬

늘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격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자료를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로드맵을 읽으면서 처음 출발하셨던 명파초등학교가 제 장인어른이 교장으로 처음 발령 나신 곳이어서 눈길이 갔습니다. 또한 목사님께서 걸으신 명파초등학교에서부터 임직각까지의 로드맵이 출애굽의 로드맵 가운데 라암셋(고센)부터 마라까지의 여정과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서 의미를 부여 해 보았습니다.


1) 여정에서 두 가지의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로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여 200만 정도의 사람들이 하룻길을 걸은 거리와 목사님이 하룻길을 걸은 거리가 거의 비슷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걸은 로드맵은 말씀을 드린 것과 같이 고센에서 마라까지를 제한한 거립니다. 출애굽한 백성들도 거의 하루에 평균 30km를 걸었는데 목사님도 하루에 평균 30km를 걸으셨네요.


둘째로 이스라엘이 라암셋을 출발하여 마라까지 걸린 일자가 10일인데(제가 조사해 본 지금까지의 자료를 통해서 보면) 그 기간 동안 걸으셨네요. 유대의 날짜는 오후 3시를 관습에 따라서 하루를 시작하는 저녁의 시작이라고 보고 오후 6시를 저녁의 완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목사님께서 점심 식사 후에 명파 초등학교를 출발했다고 보면 유대 날짜의 계산으로 보면 10일이 되네요.


2) 의미적으로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임진각’까지 도착했을 때 많은 교훈을 얻으신 것을 교역자회의를 마치고 듣고 싶었지만 많은 것을 전해 듣지 못해서 아쉬웠습니다. 날씨도 좋지 않은 상태에서 홀로 300km가 넘는 거리를 걸으시면서 많은 싸움을 하셨을 텐데 그 싸움에서 승리한 교훈을 가지신 목사님이 부럽기도 합니다. 목회의 여정 속에서 많은 교훈을 얻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마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에 앞서서 십계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두 가지의 교훈(법도와 율례)을 받은 곳이어서 마라가 마치 임진각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쓴 물을 달게 해 주신 후에 ‘법도와 율례’(출 15:25)를 주셨는데 그것은 십계명의 기초이기도 합니다. 법도(호크, ‘하카크’ <새기다> : 엄중한 계명으로 십계명 1-4번째 계명에서 표현할 때 사용)는 보통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주로 사용하고(아닐 때도 있지만), 율례(미쉬파트, ‘샤파트’ <재판하다> : 인간 사이에서 재판하는 것으로 5-10번째의 계명에 사용)는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서 주어지는 법을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제가 로드맵을 받은 후에 마음이 떨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제가 목회하면서 어떤 액티비티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제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려고 했습니다. 목사님께서 11일간의 수고한 여정을 제가 복사하듯이 마음에 품었다가 언젠가 한 번 시도해야겠다는 마음이 더욱 들었습니다. 힘든 과정이겠지만 출애굽을 했던 백성들을 생각하고, 그 가운데서도 고독했을 것 같은 모세를 생각하면서 한 번 도전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임진각에 도착했을 때 목회의 전환점에서 하나님께서 다시 제 마음에 새겨 주실 법도와 율례를 생각하고 시도해 봐야겠습니다.


요즘 목회의 한계라 할까요? 많이 힘들었는데 무엇인가를 다시 해 봐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 같이 걸으면서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 볼까 합니다. 기도해 주세요.


언제 멈춘 것일까, 경운기를 온통 칡순이 덮고 있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말해주는 것이 있다. 되늦게서야 알게 되는 의미도 있다.


생각지 못하고 보낸 일정, 그러나 두 목사님의 글은 내가 걸었던 길의 의미를 새롭게 해주었다. 우연히 정한 일정이었지만 그 안에도 얼마든지 마음에 새길 나도 모르는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뒤늦게 깨닫게 되는 의미들이 있다. 돌아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우리의 삶에는 있다.


“오, 맙소사! 죽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한 번도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다니!”


H. D. 소로우가 했던 말도 어렴풋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01. 걷는 기도를 시작하며 http://fzari.tistory.com/956

02. 떠날 준비 http://fzari.com/958

03. 더는 힘들지 않으려고 http://fzari.com/959

04. 배낭 챙기기 http://fzari.com/960

05. 챙기지 않은 것 http://fzari.com/961

06. 길을 떠나니 길 떠난 자를 만나고 http://fzari.com/964

07. 따뜻한 기억과 든든한 연대 http://fzari.com/966

08. 가장 좋은 지도 http://fzari.com/967

09. 길을 잘 일러주는 사람 http://fzari.com/969

10. 사람은 가도 남는 것 http://fzari.com/971

11.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 http://fzari.com/973

12. 소똥령 마을 http://fzari.com/974

13. 아, 진부령! http://fzari.com/975

14. 행복한 육군 http://fzari.com/977  

15. 몇 가지 다짐 http://fzari.com/978  

16. 할머니 민박 http://fzari.com/979 

17. 오래 걸으니 http://fzari.com/980 

18. 왜 걸어요 http://fzari.com/981

19. 작은 표지판 http://fzari.com/982 

20. 도움 받으시다 http://fzari.com/985 

21. 숨겨두고 싶은 길 http://fzari.com/986 

22. 지팡이와 막대기 http://fzari.com/987 

23. 이 땅 기우소서! http://fzari.com/988 

24. 함께 짐을 진다는 것은 http://fzari.com/990

25. 해안(亥安) http://fzari.com/991 

26. '화'와 '소' http://fzari.tistory.com/992  

27. 팔랑미 풍미식당 http://fzari.com/994 

28. 인민군 발싸개 http://fzari.com/997 

29. 산양의 웃음 http://fzari.tistory.com/998 

30. 인간의 어리석음을 하늘의 자비하심으로 http://fzari.com/999

31. 몰랐던 길 하나 http://fzari.com/1000 

32. 물 없이 먼 길을 간다는 것 http://fzari.tistory.com/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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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거미의 유머 http://fzari.com/1010 

35. 혼자 드린 에배 http://fzari.tistory.com/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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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35)


혼자 드린 예배


걷는 기도의 일정이 열하루였으니 도중에 주일이 한 번 들어 있었다. 떠나기 전부터 고민이 되었다. 주일이 되면 걷기를 멈추고 교회로 돌아와 예배를 드려야 할까, 그런 뒤에 다시 걷기를 이어거야 할까, 아니면 계속 걸을까…, 그러다가 결정을 내렸다. 계속 걷기로 했다. 주일 예배 설교를 부목사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래도 되는지를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걱정할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


결정을 내리고 나니 또 하나 이어지는 고민, 그렇다면 걷다가 만나게 되는 주일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그러다가 그것도 결정을 내렸다. 그것 또한 결정을 하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혼자서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일정을 보니 주일을 맞게 되는 곳은 화천이었다. 화천은 친구 목사가 오랫동안 목회를 한 곳으로 아는 후배 목사들이 있는 지역이었다. 잘 알고 있는 장로님들도 몇 분 있는 곳이기도 했다. 불쑥 예배 시간에 맞춰 한 교회를 찾아들어가 예배를 드릴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이내 그건 아니겠다 싶었다. 그렇게 되면 본의 아니게 그날 관심의 중심은 내가 되고 말 터였다.


길을 걷다가 만난 주일, 조용한 계곡에서 혼자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돌아보니 혼자서 드린 예배가 아니었다.


화천을 떠나 다목리로 가는 길이었다. 어느새 아침 7시, 성지교회에서 1부 예배를 시작하는 시간이다. 함께 마음을 모았다. 9시 즈음엔 2부 예배를 생각했다. 마음속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교우들의 모습이며 찬양대의 모습이며 주일에 만날 수 있는 모습들이 선하게 그려졌다. 그러던 중 11시가 가까워졌다. 이왕이면 섬기는 교회의 예배 시간과 비슷한 시간에 예배하고 싶었다.


혼자 예배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았다. 걷고 있는 도로 옆으로 물이 흐르는 작은 계곡이 있었는데, 때마침 계곡으로 향하는 포장된 길이 보였다. 길을 따라 내려갔더니 한 남자가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쉬고 있었다. 6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분이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예사롭지 않은 오토바이에 교통경찰을 떠올리게 하는 멋스러운 옷차림, 한눈에 보기에도 오토바이 즐겨 타는 사람이다 싶었다.


잠깐 서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파주에서 떠나 화천까지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시간이 될 때마다 오토바이를 타고 훌쩍 길을 나선다고 했다. 표정에서 묻어나는 여유, 풍류를 즐기는 사람이다 싶었다.


내 일정을 듣더니 대단한 결정을 했다며 마치 자기의 일처럼 좋아라 한다. 오토바이와 도보, 방법은 달라도 모두가 길을 가는 사람들, 잠깐 사이에도 왠지 모를 동류의식 같은 것이 느껴졌다. 믿음과 사역의 길을 함께 걷는 사람들에게서 동류의식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야기를 나눈 뒤 길을 떠나는 그분께 조심해서 가시라 인사를 하며 “이 오토바이를 얻어 타면 제 목적지 파주 임진각까지 금방 갈 텐데요.” 했더니 “정말 그러네요. 그럴래요?” 하면서 호탕한 웃음을 남기고 떠났다. “두두두두둥…” 오토바이 배기음 소리가 낮고 묵직하면서도 듬직했다.


새들과 계곡물이 찬송을 했고 나무들이 기도를 했다. 

뜻밖에도 축도는 바람이 맡았는데, 더없이 은혜로웠다.


가까운 곳 나무 그늘 아래 바위들이 모여 있는 곳이 보였다. 그곳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 그리고 마음을 모은다. 혼자 드리는 예배는 얼마만인가. 눈을 감고 조용히 기도를 드린다. 어딘지도 모르는 계곡에서 혼자 드리는 예배, 가만히 눈을 감자 밀물처럼 밀려오는 것도 있었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도 있었다.


이어 찬송 시간, 누가 찬송을 할까 할 때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려왔다. 새소리는 또 다른 새소리로 이어졌다. 바로 앞 물소리도 화답을 했다. 아름다운 조화로 이루어진 훌륭한 찬송이 한참 이어졌다.


다음은 기도 시간, 누구든 기도를 하렴, 하며 눈을 감았다. 나무가 기도를 했다. 나는 오직 나일뿐입니다, 내가 선 자리 사랑하게 하소서, 다른 나무 다른 자리 다른 높이 부러워하지 말게 하시고 다만 내 잎과 꽃과 열매를 피워내게 하소서, 어떤 폭풍우라도 이겨낼 수 있도록 뿌리 깊게 내리게 하소서, 나무의 기도가 이어졌다.


다음은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 가데스바네아를 생각했다.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막을 지나 마침내 도달한 곳,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초입,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걸음을 되돌리고 만다. 가나안 정탐으로 인해 불거진 불순종이 그들의 걸음을 되돌리게 했다. 나쁜 소문을 퍼뜨린 사람들과 그 소리를 듣고 밤새도록 울부짖었던 백성들, 가데스바네아는 복과 화를 가르는 극명한 분기점이다.


예배 후 성찬처럼 먹은 호두과자. 

누군가의 정이 누군가에게는 성찬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오늘도 우리는 아찔한 분기점에 선다. 그곳에서 어떤 이는 축복의 땅으로 들어가고, 어떤 이들은 복을 등진 채 광야로 돌아선다.


마지막 축도 시간, 눈을 감았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시원한 바람이 계곡을 따라 불어왔다. ‘바람’은 ‘성령’과 같은 단어, 몸도 마음도 바람에 내맡겼다. 꼭 필요한 손길이 온 몸과 맘을 부드럽게 시원하게 어루만졌다.


예배를 마치고는 성찬을 나누듯 호두과자 몇 알을 먹었다. 전날 화천을 찾아와 저녁을 든든하게 사 준 이 장로님이 사 온 과자였다.


조용한 계곡에서 혼자 드린 예배는 참으로 호젓하고 평온했다. 마음속 지문처럼 남을 드문 예배였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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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34)


거미의 유머


익살스러운 농담이나 해학(諧謔)을 뜻하는 ‘유머’는 막혔던 숨을 탁 터뜨리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싶다. 마치 물속에 잠겨 한동안 숨을 쉬지 못했던 이가 물 밖으로 나오며 참았던 숨을 토해내는, 그런 순간처럼 말이다.


답답하게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려지는 것과도 같아서 내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단번에 이해하는 순간이기도 하고, 견딜 수 없었던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하는 순간이기도 하고, 도무지 긍정할 수 없었던 것을 웃음으로 긍정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수피령은 만만한 고개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심장이 파열될 것 같은 걸음을 이어가야 했다.


한 유머 강사는 그의 책에서 ‘당신은 테러리스트인가, 유머리스트인가?’를 묻고 있는데, 그의 질문에 의하면 유머리스트의 반대말은 재미없는 사람이나 딱딱한 사람이 아니라 테러리스트가 맞겠다 싶다.


오바마가 대통령 취임식을 할 때 실수로 선서를 잘못하는 바람에 취임식이 끝난 뒤 백악관에서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선서를 다시 했는데, 그 때 오바마는 선서를 다시 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너무 재미있어서 다시 한 번 하기로 했습니다.”


그만한 여유와 유머가 있어 미국이라는 나라를 이끌어갔지 싶기도 하다.


열하루 동안 길을 걷다가 만난 거미의 유머가 있다. 화천을 떠나 철원으로 향할 때였다. 화천과 철원이 강원도에 있는 것이야 잘 알고 있었지만, 한 가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왜 그랬을까, 화천과 철원 사이에는 뭔가 다른 이름을 가진 어떤 지역이 자리를 잡고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을 했었다.


마침내 수피령 정상이 보인다. 정상이란 무릇 인내와 인내가 합해진 결과였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화천과 철원은 고개 하나로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화천 다목리에서 수피령 고개를 넘으니 바로 철원 땅이었다. 물론 수피령 고개는 걸어서 쉽게 넘을 고개가 결코 아니었지만 말이다. 심장이 파열될 것 같은 고통을 내내 참으며 넘어야 하는 고개였다.


앞뒤 어디에도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외진 길을 한참을 걸어가다가 도로 곁에 있는 밭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 외진 곳도 누군가 땅을 놀리지 않고 농사를 짓고 있다는 것이 반갑고 고마웠다.


그런데 보니 밭 가장자리엔 말뚝이 나란히 박혀 있었고 말뚝에는 전선이 묶여 있었다. 전기가 흐르니 주의하라는 경고문이 붙어있는 것을 보면, 먹을 것을 찾아 밭으로 내려오는 산짐승들을 쫓기 위한 전깃줄이다 싶었다.


우리 땅에 살면서 우리글을 모르는 짐승들만 놀라 뒷걸음질을 치겠구나 싶을 때였다. 밭이 끝나는 자리에 마지막 말뚝이 섰고 전선들도 그곳에서 멈춰 섰는데, 마지막 말뚝과 그 옆에 서 있는 자작나무 사이에는 뭔가 알 수 없는 선들이 아침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유심히 바라보니 거미줄이었다. 마치 마지막 말뚝에서 멈춘 전선을 슬며시 잇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얼마를 먹든 다 같이 나눠 먹지 전깃줄이 다 뭐래요, 어디선가 숨어 슬며시 건네는 거미의 유머에 피식 웃음이 났고, 수피령 험한 고개가 문득 너그럽게 여겨졌다.


크지 않은 나라, 그런데도 화천과 철원이 고개 하나로 어깨를 걸고 있는 것을 이번에 처음으로 알았다.


매주 <드문 손길>이라는 주보를 만든다. 우리 손 잡아주신 주님의 손이 흔한 손 아니었듯이, 우리가 세상을 향해 내미는 손이 흔한 손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보 이름을 <드문 손길>이라 정했다.


주보 표지에는 짤막한 글 하나씩을 싣는다. 차 한 잔 마시듯 잠깐 생각을 가다듬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의 신앙을 일반 언어로 바꾸는 노력이기도 하다.


걷기를 마치고 돌아와 주보 표지에 ‘거미의 유머’라는 짧은 글을 실었다. 유머를 유머로 받았으면!


화천과 철원은 같은 강원도라 해도

설마 고개 하나로 이웃인 줄은 몰랐는데

수피령은 결코 만만한 어깨가 아니어서

함부로 걸어 넘을 고개가 아니었다

앞뒤 어디에도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가르마 같은 길을 걷다 만난 길가 밭 가장자리엔

박아 놓은 말뚝을 따라 전깃줄이 내달리고

전기가 흐르니 주의하라는 경고문

우리 땅에 살면서 우리글을 모르는 짐승들만

기겁하듯 뒷걸음질을 치겠구나 싶을 때

밭이 끝나는 자리 마지막 말뚝에 이르러

전선도 달리기를 멈췄는데

마지막 말뚝과 곁에 선 자작나무 사이

빛나는 선들이 아침햇살에 그네를 탄다

저게 뭘까 유심히 바라보니

멈춰선 전선을 잇듯 거미가 친 거미줄이었는데

얼마를 먹든 나눠먹지 웬 욕심이래요

어딘가 숨어 슬며시 건네는 거미의 유머에

수피령 가파른 고개가 문득 너그럽지 싶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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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33)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깊은 산중으로 이어지는 길, 걸어도 걸어도 사람이 보이지를 않았다. 그런 외진 곳에 가게가 있을 리는 만무한 일이었고, 물 없이 길을 나선 나는 점점 심해지는 목마름을 어렵게 견뎌내야 했다. 원래 사람이 없는 곳인지, 날이 무더워 밖으로 나오지를 않은 것인지 한 사람을 만나기가 이렇게도 어려울 수가 있구나 싶을 정도였다.


정 안 되면 계곡물이라도 마셔야지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침내 사람을,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길가 밭에서 한 중년의 남자가 일을 하고 있었다. 외진 곳에서, 목이 말라 고통스러울 때 사람을 만나는 것이 그렇게 반가울 줄이야.


“물 좀 마실 수가 있을까요?”


아마도 나는 “안녕하세요!”나 “수고하십니다.”라는 인사보다도 물 얘기를 먼저 한 것이 아닐까 모르겠다. 밭에서 돌을 골라내는 일을 하던 그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얼른 일손을 멈추고는 얼마든지 오라며 손으로 나를 불렀다.


그를 따라 들어간 곳은 허름한 농막이었다. 얼기설기 몇 개의 기둥이 서 있고 비닐과 천막으로 하늘과 벽을 가려 볕과 비를 겨우 가릴 수 있겠다 싶은 그곳에는 몇 개의 살림도구들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산에서 떠온 물이라 뭐가 좀 떠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물은 좋은 물이예요.”


긴 목마름 끝에 마시는 물인데 어찌 달지 않을 수가 있을까. 나는 염치도 없이 필시 산에서 어렵게 떠왔을 그 물을 서너 컵 연이어 받아 마셨다. 석 달 가뭄 끝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흙먼지를 적시듯이 고마운 마음으로 물을 마셨고, 물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 목마름의 맨 밑바닥부터 채워오기를 시작했다. 시들어가던 식물이 물을 먹고 되살아나듯이 긴 목마름 끝에 물을 마시자 생기가 회복되는 것 같았다. 그것은 느낌만이 아니어서, 실제로 그랬을 것이다.


낯선 길을 걷는 이에게 주어지는 은총 중의 하나는 생각하지 못한 만남이 주어지는 것이었다.


우리는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나와 연배가 비슷한 그 이가 왜 깊은 산중에 들어와 살게 되었는지를 들었고, 그는 내가 왜 먼 길을 걷고 있는지에 대해서 들었다. 서로의 선택을 이해하며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가 이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 마음이 아쉬웠다. 가야 할 길이 아직도 한참 남았으니 무한정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배낭을 메고 농막 밖으로 나올 때였다.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무엇 하는 분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이야기를 나누며 내가 목사라는 것을 일부러 숨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알릴 일도 아니다 싶어 말하지 않은 터였다.


“저는 개신교 목사입니다.”


그러자 그가 말한다.


“어쩐지, 느낌이 남달랐어요.”


궁금하긴 했지만 남달랐다는 느낌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따로 묻지는 않았다. 목사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한 마디를 했다.


“실은 저도 이곳에 들어올 때 성경책 한 권을 가지고 들어왔어요. 틈틈이 읽고 있고요.”


걸음을 멈추고 더 많은 이야기를 이어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망설임이 순간적으로 지났지만, 그곳 주소와 그분 이름을 수첩에 적는 것으로 대신했다. 다시 한 번 뜻밖의 만남이 주어져 심중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시간이 은총처럼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낯선 길을 걷다보니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삶이 보였다. 저 많은 벌통을 두고 어디로 간 것인지 주인은 보이지를 않았다.


폭염주의보는 거의 날마다 날아왔다. 날이 뜨거우니 야외활동을 자제하라는 한결같은 내용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지금 야외활동이 아니라 실내 활동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나 스스로에게 아재개그를 건네며 불볕더위가 주는 고통과 염려를 물리고는 했다.


지친 이에게는 작은 고개 하나를 넘는 것도 벅찬 일이라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하며 파포(巴浦)와 봉오(峰吾)를 지나 그날의 목적지인 다목리를 향해 걸었다. 다목리는 작가 이외수 씨가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는 곳이다. 젊은 시절 그의 글을 눈여겨 읽기도 했으니 얼마든지 이외수 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도 좋겠다 싶었지만, 그보다는 ‘다목리’가 왜 ‘多木里’가 되었는지가 궁금했다.


다목리는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었다. 최종 목적지인 다목초등학교가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 사람을 찾았지만 역시 보이지를 않았다. 가다보면 사람을 만나든지, 아니면 표지판을 만나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길가 둔덕 위에 자리 잡은 동네 노인정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노인정 옆 정자에 한 사람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으로 길을 물었다. 길을 가르쳐주던 그가 거기 서서 그러지 말고 올라와서 물이나 한 잔 하고 가라며 권했다. 쉬지 않고 내처 걸었더니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터라 시간의 여유도 있어 정자 위로 올라갔다.


허름하고 편안한 옷차림을 한 그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는 심마니였다. 혼자 깊은 산에 올라 약초를 캐는 심마니, 심마니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 주로 그가 이야기를 했고 나는 들었지만 이야기는 재미도 있었고 유익하기도 했다. 전혀 모르는 세계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22년째 이어오고 있는 일이 있다. <교차로>라는 생활정보지 ‘아름다운 사회’란에 매주 한 편씩 칼럼을 쓴다. 전국 길가에 꽂혀 누구라도 꺼내보는 정보지, 세상과 신앙 사이에 다리를 놓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언젠가 한 번은 캐나다로 이민을 간, 우리 아이들 어릴 적 피아노 레슨을 한 선생님이 그곳에서 우연히 칼럼을 읽게 되었다면서 전화를 한 일도 있다. 매주 한 편의 글을 써야 하는 일, 그 일을 22년째 이어오고 있다니 내가 생각해도 아찔하다. 무엇보다도 미련하니까 가능한 일이다 싶다.


걷기를 마치고 돌아와 칼럼을 쓰며 심마니 이야기를 썼다. 얼마든지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래의 ‘심마니의 자존심’은 교차로 칼럼으로 썼던 글이다.


심마니의 자존심


그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DMZ 인근마을을 따라 혼자 걷기 위해 나선 열하루의 길, 이레째 되는 날의 목적지는 화천 다목리였습니다. 작가 이외수 씨가 사는 곳으로 알려진 동네였지요.


날이 얼마나 뜨거운지 벌써 며칠 째 국민안전처에서 폭염주의 경보를 보내오고 있었습니다. 날이 너무 뜨거우니 야외활동을 삼가라는 경보 문자였습니다. 날이 뜨거운 것이야 길을 걸어보니 알겠는데, 그 정도가 야외활동을 삼가야 할 수준이라는 것을 경보문자는 확인시켜 주었는데 그렇다고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열하루 동안 걸어갈 길이 정해져 있기도 했거니와, 걷기 시작한 지 둘째 날 생각지 못한 경험을 한 것도 적잖은 이유가 되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폭우와 우박이 쏟아지고, 천둥과 번개가 야단이었던 진부령을 걸어서 넘는 경험을 했던 것입니다. 그 일을 경험하고 나니 어떤 악천후도 이겨낼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다목리로 가는 오후, 이글거리는 땡볕 때문인지 한참을 걸어도 밭에서 일하는 사람조차 보이질 않았습니다. 길을 물으려면 누군가를 만나야 하는데 아무도 보이질 않으니 내심 당황스러웠는데, 그를 만난 것은 그렇게 길을 물을 사람을 찾던 순간이었습니다.


누군가 길가 옆 정자에 앉아 있어 길을 물었더니, 길만 묻지 말고 올라와서 물 한 잔이라도 하고 가라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기꺼이 정자 위로 올라갔고,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서로가 처음 만난 사이, 하지만 이야기는 시간을 잊고 이어졌습니다. 마침 다목리도 멀지 않았고, 예정보다는 여유 있게 온 것이어서 마음도 편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심마니라 소개를 했습니다. 혼자서 산을 다니며 산삼을 캐고 있다고 했습니다. 말만 들었지 전혀 알지 못했던 세계,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산에서 그 중 위험한 것이 멧돼지나 뱀보다도 벌이라는 이야기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계곡에 들며 막대기로 나무를 쳐서 탁 탁 소리를 내면 멧돼지나 뱀은 자리를 피한답니다. 그러나 잘못 벌집을 건드려 쏘이면 그것은 치명적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삼 씨에 대한 이야기도 귀했습니다. 산에서 만나는 산삼은 오래 전 누군가가 씨를 뿌렸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새에 의해 삼이 자라는 것은 극히 드문 경우라는 것이지요. 그걸 잘 알기에 자신도 기회가 될 때마다 누군지 모르는 이를 위해 삼 씨를 심는다고 했습니다.


그 날 나눈 이야기 중 특별히 마음에 와 닿은 것은 그가 지키고 있는 자존심이었습니다. 중국에서 좋은 삼을 구해서 팔면 전문가들도 구별하기가 어려울 정도, 누군가를 속이면 큰돈을 벌 수 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몇 뿌리가 되었든 자신이 캔 삼을 정직한 값에 팔고 싶다고 했습니다. 하늘이 아껴 키운 멋진 삼을 만나기를 바란다는, 헤어지며 전한 인사 속에는 그의 삶을 격려하고 축복하고 싶은 마음이 다 담겼답니다. -‘아름다운 사회’ (2017년 7월 12일)


낯선 길을 걷는 이에게 주어지는 은총 중의 하나는 뜻밖의 만남이 허락된다는 것임을 배운 날이었다. 농막에서 물을 마시며 나눈 이야기나 정자에 앉아 심마니와 나눈 이야기는 분명 내 마음속 빛나는 기억으로 남을 것이었다. 아름답고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내 마음을 더욱 풍요롭게 해 줄 것이다.


맞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사막 어딘가에 우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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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소똥령 마을 http://fzari.com/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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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함께 짐을 진다는 것은 http://fzari.com/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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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32)

 

물 없이 먼 길을 간다는 것


단순한 실수가 중요한 실수가 될 때가 있다. 가볍고 단순하다 싶어도 실수의 결과가 치명적인 것들이 있다. 그 날 일도 그 중의 하나였다.


화천에서의 숙소는 생각지 못한 곳으로 정해졌다. 화천읍내에 도착을 해서 보니 거리마다 군인들이 가득했다. 삼삼오오 군인들끼리 어울려 다니기도 했고, 면회를 온 애인과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다니는 모습들이 흔했다. 궁금해서 물었더니 무슨 큰 훈련을 마친 뒤여서 그렇게 많은 군인들이 한꺼번에 외박을 나온 것이라 했다. 


거리만이 아니었다. 후배 목사를 만나기 위해 잠깐 찻집에 들렀을 때, 찻집 안을 가득 채운 것도 군인들이었다. 애인과 마주앉아, 아니면 옆자리에 앉아 마음에만 두었던 이야기와 쟁여둔 그리움을 풀어내는 모습들이 정겨워 보였다. 군 생활을 하는 동안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모습이어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문득 면회를 온 여자 친구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보다는 바로 옆에 나란히 앉아 모습이 더 가까운 사이라고 여겨졌다. 어디에 앉느냐가 사람 사이의 관계를 가늠하게 하는구나!


화천에는 그냥 지나가면 서운해 할 이들이 몇 명 있지만, 조용히 지나가려고 했었다. 주일을 앞둔 토요일이어서 행여 그들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고, 누군가를 따로 만나는 것은 조심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많은 군인들로 화천 인근의 숙박업소가 이미 꽉 찼다는 것이었다. 지나가는 길에 길가 철물점 주인에게 물었더니 그렇게 대답을 했다. 그런 일을 자주 경험을 하는 것인지, 화천읍내 인근의 숙소가 다 찼다는 말을 하면서도 전혀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투였다. 그런 모습이 오히려 새삼스러웠다.


할 수 없이 후배 이 목사에게 전화를 했고, 얼마 후 이 목사를 찻집에서 만났다. 이 목사는 내 전화를 받고는 교우가 하는 숙소에 연락을 했고, 마침 빈 방이 있다며 나를 그곳으로 데려다 주었다.


두 가지 점에서 다행이다 싶었다. 무엇보다도 숙소가 정해져서 다행이었다. 없는 숙소를 찾으려면 그 또한 많은 시간과 신경을 써야 할 일이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교우가 하는 숙소가 다음날 가야 할 길 쪽에 있다는 점이었다. 지치고 피곤했기 때문일까, 걸어가야 할 길을 차로 대신할 마음은 없었지만 막상 숙소가 그렇게 정해지고 나니 괜히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이었다.


제법 터가 넓은 <시아네 펜션>은 깨끗했고 조용했다.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도 누렸다. 무엇보다도 숙소 앞 개울에 다슬기가 많고 덕분에 반딧불이도 많이 볼 수 있다는 말이 반가웠다. 
<시아>는 손녀 이름이라 했다. 손녀를 사랑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마음이 그 하나만으로도 물씬 느껴진다. <시아네>는 <詩안에>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배의 도움으로 하룻밤을 묵었던 시아네 펜션.
집 앞 개울에 다슬기가 많고 덕분에 반딧불이가 많다는 말이 반가웠다.

 

다음날 아침 이른 시간에 길을 떠나며 물을 챙기지 못했다. 물을 챙기지 못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길을 가다가 가게를 만나면 물을 사야지 했던 것이었다. 늘 그렇게 다녔으니 그래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생각이 문제였다.


가도 가도 가게는 나타나지 않았다. 외지고 한적한 길, 가게가 나타날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물이 없다는 것을 알자 괜히 목이 더 마른 것 같았다. 한 번 목이 마르다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자꾸 침을 삼키게 되었고, 목마름은 더욱 심해졌다.

 

길을 걷다가 만난 버스 정류장.
버스도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지만 버스 정류장은 혼자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목마름이 엄살만은 아닌 것이 아침 햇살이 퍼지기 시작된 더위가 만만치 않았다. 금방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가게는 아니더라도 동네가 나타나면 물을 얻어 마셔야지 했지만 동네도 보이질 않았고, 모처럼 만난 동네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누구 한 사람 보이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 집이나 찾아가 문을 두드리고 물을 달라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목이 마른 것도 그렇지만, 목마름을 참으며 길을 걷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그 단순한 일, 왜 물을 챙기지 못했을까?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거라고,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을 했을까?


먼 길을 걸어 지칠 대로 지쳤을 때 생각지 못한 곳에서 물을 마실 수 있었다. 물 없이 먼 길을 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도 위험한 것인지를 마음에 새겨야 했던 날이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01. 걷는 기도를 시작하며 http://fzari.tistory.com/956

02. 떠날 준비 http://fzari.com/958

03. 더는 힘들지 않으려고 http://fzari.com/959

04. 배낭 챙기기 http://fzari.com/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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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31)


몰랐던 길 하나


평화의 댐 정상에 있는 물 기념관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곳에 식당이 있는 것이 다행이었는데, 메뉴 중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산천어가스였다. 화천은 세계적인 겨울축제로 자리 잡은 산천어축제가 유명한 곳, 산천어로 튀김을 한 요리였다. 화천에 왔으니 당연하다 싶은 마음으로 산천어가스를 택했다.


점심을 먹으면서 식당에서 일하는 분께 다음 행선지에 대해 물었다. 화천까지 가려고 한다 하니 대답이 쉽다. 40분 정도 가면 될 걸요, 했다. 차가 아니라 걸어서 가려고 한다 하니 눈을 동그랗게 뜬다.


로드맵에는 댐 정상을 통해 대붕터널과 산과 산을 연결한 비수교, 재안터널을 통과하라고 적혀 있었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문제가 있었다. 댐이 공사 중이서 댐 정상으로는 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평화의 댐 정상에서 점심으로 먹은 산천어가스. 당연하여 고민할 것이 없는 순간은 얼마나 되는 걸까.


그렇다고 평화의 댐 아래로 내려가 옛 길을 따라 걸으면 길이 멀어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기가 어려울 것이라 했다. 그 길로 가면 구불구불 먼 길을 돌아가게 되는데 평화의 댐에서 화천까지 족히 40km가 될 것이라고 했다. 아무리 해가 길다고 해도 점심을 먹고 떠나 저녁에 도착할 수는 없는 거리였다.


그래도 한 가지 가능성이 남아 있다 싶었다. 로드맵에는 버스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걷다 보면 북한강 상류를 안동철교로 통과하는 민통선 길을 달리는 마을버스를 만날 수도 있는데, 만약 버스를 만나면 그것은 횡재니 무조건 “accept!!”하라는 내용이었다.


버스에 대해 물어보니 직원 한 분이 친절하게도 몇 곳에 전화를 걸어 버스에 대해 알아봐 주었다. 하지만 기대를 걸었던 버스도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버스는 늘 다니는 것이 아니었고 손님이 있을 때만 다니는데, 만약 와달라고 요청을 하면 저녁 5시쯤에나 평화의 댐으로 올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평화의 댐에서 길이 막히다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차 한 잔을 하며 궁리를 하고 있을 때 직원 한 사람이 다가와선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하면서 한 가지를 일러주었다. 민통선 입구 검문소에서 군인들에게 이야기를 하면 혹시 민통선을 지나다니는 차를 얻어 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이따금씩 민통선을 지나가는 차가 있는데, 민통선을 통과하면 화천으로 가로질러 가는 길이기에 화천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 될 것이라는 귀띔이었다. 이야기를 듣고는 반색을 하자 될지 안 될지는 저도 몰라요, 하는 것이었다.


인근에 있다는 민통선 검문소를 찾지 못해 같은 길을 서너 번 왔다 갔다 했다. 딱히 물을 사람도 보이지를 않았다. 마침내 검문소, 저만치 총을 든 군인들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내 행색을 살피는 초병의 눈에서 빛이 난다.


걸어서 화천까지 민통선을 지나서 갈 수가 있는지를 물었더니 안 된다고 한다.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는 투다. ‘민통선’(民統線)이란 말 그대로 ‘민간인통제선’(Civilian Control Line)이다. 민간인들의 출입을 금하는 선 앞에 민간인이 서서 지나갈 수 있는지를 묻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사정을 이야기 하며 혹시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탈 수 있는지를 물었다. 다시 한 번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살핀 군인 한 명이 잠깐 기다려보라 하면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상관에게 보고를 하는 것 같았다.


잠깐의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통화를 마치고 다가온 군인은 내게 “신분증을 주시겠습니까?” 했다. “신분을 확인하고 차가 오면 같이 타고 지나가도 된다고 했습니다.” 신분증을 받으면서 상황 설명을 해주었다.


민통선 안에서 농사를 짓는 이들이나 댐을 공사하는 차들이 사전 허락을 받고는 왕래를 한다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차는 나타나지 않았다. 언제 올지 모르는 차를 기다리며 초병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1981년부터 군 생활을 했으니 그들은 까마득한 후배들이었다. 아들 규민이도 지난해 제대를 했으니 아들 같기도 했다. 비상용으로 남긴 배낭의 초코바와 육포를 전해도 되는지를 묻자 규정상 안 된다며 사양을 했다.


만들어진 길을 걷기도 하지만, 걸으면 길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길을 걷되 길을 만드는 사람, 부르심의 자리는 거기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있는데 언덕 위에 있는 막사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한 무리의 군인들이 쏟아지듯 막사 밖으로 나왔다. 함성과 구호 소리가 웃음 속에 이어지는 것을 보니 뭔가 행사를 갖고 있지 싶었다. 초병에게 물었더니 소대장이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간다고 했다. 함께 지내던 소대장을 떠나보내는 전별식을 하는 중이었다.


순서를 마쳤는지 소대장은 차를 타고 검문소 앞까지 왔고, 소대원들은 함성을 지르며 차를 뒤쫓아 달려왔다. 서로가 정이 많이 든 사이구나 싶었다. 하긴 나라의 부름을 받고 이 외진 곳에서 함께 지냈으니 어찌 정이 들지 않을까, 어쩌면 서로가 형제 같을 터였다.


소대장의 차가 멈춰 서자 초병이 다가가선 하차를 명한다. 차에서 내리는 소대장을 보니 얼굴이 앳되다. 소대원들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모두가 비슷비슷한 연배의 젊은이들이었다.


소대장이 차에서 내리자 초병 두 명이 자동차 안은 물론 차량 하체를 검사하는 도구를 끌고 다니며 사방으로 차량 검사를 한다.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하다. 함께 지내던 사람을 떠나보내기 전 함께 지내며 늘 했던 일을 마지막 관례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베풀고 있는 것이었다. 하나의 의식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 젊은이가 주어진 임무를 마치고 다른 부대로 떠나가는 전별식은 웃음 속에서 이어졌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마음은 괜히 짠했다. 누군가를 보내고, 누군가를 떠난다고 하는 것은 언제라도 마음을 짠하게 하는 법이다.


40 여분이 지났다 때 마침내 차가 다가왔다. 평화의 댐 쪽에서 레미콘 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차를 세운 초병들은 조금 전 소대장을 보낼 때처럼 차량 검사를 했고, 검사를 마친 뒤 기사에게 내 이야기를 했다. 젊은 레미콘 기사는 선뜻 차에 타라고 했다.


레미콘의 높이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더 높았다. 경사가 아찔했다. 자리에 앉으니 시야가 탁 트인다. 부산 쪽에서 일을 하러 왔다는, 선하게 생긴 젊은이가 운전하는 레미콘 차를 타고 민통선 안을 달렸다.


철조망 밖과 무엇 하나 다를 것이 없는 풍경과 공기,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새롭게 다가왔다. 민통선 안과 밖이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은 뭔지 모를 통증처럼 여겨졌다.


평화의 댐에서 화천까지 가는 길, 막혔던 길 하나가 그렇게 열렸다.


길이 있어 가기도 하지만, 가면 길이 되기도 한다.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향하는 길도 그렇게 열렸으면! 마음이 오가고 걸음이 오가며 몰랐던 길 하나 우리네 가슴 속에 화들짝 활짝 열렸으면!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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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30)


인간의 어리석음을 하늘의 자비하심으로


이때껏 찾은 적 없었던 ‘평화의 댐’을 걷는 기도 중에, 걸어서 처음으로 찾게 될 줄이야. 방산을 떠나 화천으로 가던 중에 ‘평화의 댐’을 지나게 되었다. 17km의 거리를 오전 내내 부지런히 걸었더니 점심때쯤 ‘평화의 댐’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평화의 댐’은 이름과는 달리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평화와는 거리가 먼 이미지로 남아 있다. 1986년 당시 건설부 장관은 모든 국민이 깜짝 놀랄 만한 성명문을 발표했다. 북한을 향하여 ‘금강산 댐’ 공사를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문이었다.


평화의 댐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평화를 말하지만 평화와는 거리가 먼 일이 세상에는 있는 법이다.


북한이 휴전선 북방 10㎞ 북한강 본류와 금강산이 만나는 곳에 대규모 ‘금강산 댐’을 건설하여 물을 원산 쪽으로 역류시켜 발전하는 공사를 진행 중인데, 이 댐이 완공될 경우 북한강을 통해 휴전선 이남으로 흘러오는 연간 18억 톤의 물 공급이 차단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약과였다. 온 국민의 마음을 두려움으로 몰아넣은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북한이 ‘금강산 댐’을 붕괴시켜 200억 톤의 물을 한꺼번에 방류하는 이른바 수공(水攻)을 벌이면 남한은 끔찍한 결과를 맞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럴 경우 물이 63빌딩 중턱까지 차오를 수 있다며 방송에서는 연일 그래프까지 동원하며 국민들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방송마다 경쟁하듯이 보여주던 자극적인 영상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63빌딩이 저 정도라면… 두려움과 공포는 매우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온 나라가 물에 잠길 것 같은 두려움이 이미 물에 잠긴 것처럼 퍼져갔다. 마침 그 때가 서울에서 열리는 1988년 하계 올림픽을 앞둔 시점,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한 북한의 책략일 수도 있다는 그럴듯한 생각이 보태져 급속도로 번져갔다.


세계분쟁지역에서 수거한 탄피를 녹여 만든 평화의 종. 

이래저래 평화는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조된 분위기는 대응댐 건설 계획으로 이어졌다. 북한의 수공을 막기 위한 댐을 건설해야 한다며 국민들의 성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정부의 발표를 믿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이들도 있었겠지만, 반강제적인 할당도 적지 않았다. 각 기업은 물론 초등학교 아이들도 코 묻은 돈을 보탰다.


그렇게 모은 성금이 모두 733억 원, 정부는 이듬해 대응댐 공사에 들어갔다. 안팎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국에 대한 관심들이 온통 금강산댐으로 모아졌고, 어수선했던 모든 것들이 슬그머니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잠깐 가라앉는다고 영원히 가라앉는 것도 아니고, 가라앉는다고 모두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평화의 댐 건설 당시 모금한 성금의 사용내역과 금강산댐의 실체에 대한 논란이 일자 김영삼 대통령은 감사원에 진상규명을 지시했고, 감사 결과 금강산댐의 위협과 이를 대비하기 위한 ‘평화의 댐’의 필요성도 부풀려진 것으로 드러났다.


‘평화의 댐’은 불명예스러운 기록도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 최대 거짓말’을 묻는 여론조사에서 대학생들로부터 2위로 꼽히기도 했고, 〈워싱턴포스트〉지에서는 ‘불신과 낭비를 상징하는 사상 최대의 기념비적 공사’라 부르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평화의 댐’은 이래저래 평화와는 거리가 먼 셈이다.

‘평화의 댐’에 도착했을 무렵, 왜 그런지 기운이 뚝 떨어지고 말았다. 걸음이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날씨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폭염주의보가 연일 문자로 날아오고 있었다. 국민재난처였던가, 날이 뜨거우니 야외활동을 삼가라는 내용이었다. 머리 위에서 벌침처럼 쏟아지는 뙤약볕은 물론 도로에서 후끈 바람에 실려 올라오는 지열까지, 길을 걷기에는 분명 더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하는 날씨였다.


‘평화의 댐’에 들르려면 경사진 길을 한참 올라가야 했다. 그냥 지나쳐 갈까, 지친 상태였기에 고민이 되었다. 그러다가 걸음을 옮겼다. 내가 언제 다시 이곳을 찾을까, 그런 생각이 걸음을 옮기게 했다.


‘평화의 댐’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거대했다. 미국 서부에 있는 ‘후버댐’을 본 적이 있는데, 규모면에서는 뒤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저만한 구조물을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 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댐에서는 요란한 공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저만한 높이도 안심을 할 수가 없는 것인지, 어딘가 취약한 부분을 보강하는 것인지 댐 곳곳에 불안한 만큼 키가 큰 크레인이 세워져 있었다.


'비목'의 배경이 되는 곰삭은 나무 십자가와 그 위에 걸린 철모. 

나라를 위한 무명의 희생과 헌신을 생각하게 했다.


‘평화의 댐’을 지나 정상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계단을 오르는 한 걸음 한 걸음이 힘에 부쳤다. 그러면서 비목공원을 지난다. 백암산 부근에서 십자 형태의 나무만 세워져 있는, 무명용사의 돌무덤을 지키고 있는 비목을 보고서 조국을 위해 죽어간 젊은이들을 기리기 위해 쓴 시 ‘비목’(碑木), ‘비목’을 기리기 위한 곳이었다. 저만치 세월에 곰삭은 나무 십자가 위로 녹슨 철모가 걸쳐 있는 모습이 보인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돌에 새겨져 있는 ‘비목’을 눈으로만 따라 불렀다. 세상에는 평화를 가장한 평화 아닌 것들이 참으로 많다. 간디가 자주 인용했다는 ‘지옥으로 가는 모든 길이 선한 동기로 포장되어 있다’는 말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평화의 댐’은 평화에 대해서 역설적인 말을 건네고 있다 여겨졌다.


어쩌면 깨어 있는 한 사람을 속이는 것보다는 무지한 다수의 군중을 속이는 일이 더 쉬울지도 모른다. 속는 자가 다수일 경우 속는 자들은 자신이 다수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다수에 속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선택을 신뢰하고 지지하며, 고민하지 않거나 고민을 외면한다.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를 엄격히 구분하신 것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세계 30여 개의 분쟁지역에서 수거한 탄피를 녹여 만들었다는 평화의 종 앞에 서서 ‘평화의 댐’ 일대를 내려다보며 한 줌의 기도를 바친다.


‘댐을 만든 동기야 어떻다 하더라도 이 댐이 부디 평화를 위해 쓰이게 하소서. 인간의 어리석음을 하늘의 자비하심으로 바꾸소서!’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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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29)


산양의 웃음


양구를 떠나 화천까지 가는 날이다. 길을 걷기 시작한지 엿새째, 절반쯤을 지나고 있는 셈이었지만 아직은 긴장의 끈을 풀어서는 안 된다고 자신에게 이른다. 숙소 1층에 있는 식당에서 이른 아침을 먹고는 곧바로 길을 나섰다. 로드맵에 ‘전 여정 중 가장 난코스’라 적혀 있는 날이었다. 38.3km, 걸어야 할 거리 또한 가장 긴 날이었다.


동네 앞을 흐르는 큰 개울을 따라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멋진 수묵화를 누군가가 맘껏 그리고 있었다. 저 한없이 부드럽고 막힘없는 붓질이라니! 문득 단강에서 물안개를 보며 썼던 ‘두 개의 강’이 생각났다. ‘좋은날 풍경’ 박보영 씨가 곡을 붙인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바다까지 가는 먼 길

외로울까 봐

흐르는 강물 따라

피어난 물안개

또 하나의 강이 되어

나란히 흐릅니다

나란히 가는 두 개의 강

벌써 바다입니다


전날 밤, 장로님 일행이 다녀간 이야기를 들은 함광복 장로님은 이런 문자를 보내왔다.


“참 하나님은 그렇게 절묘하십니다. 전 내일 해산을 넘으실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해산은 태산이거든요. 이제 육군으로 전역하세요. 성도님들도 그 감동을 나눠 갖게 하셔도 좋을 것 같아서요. 뭘 드시겠냐고 물으시면 닭이나 오리를 선택하세요. 마라토너 딘사모와 세계랭킹 3위권 친구들에게 저녁을 산 일이 있었는데 닭고기를 사달라고 하더라고요. 에너지를 순발력으로 발산하는데 그게 최고라면서요. 아, 장로님들 오늘밤 행복하겠다!! ㅎㅎ”


'하늘 꼬리'라는 뜻을 가진 '천미리'는 그냥 얻은 이름이 아니었다. 첩첩산중 저 아래로 가르마 같은 길이 지나고 있다.


금악리를 떠나 천미리로 가는 길, 이번엔 오천터널을 통과해야 한다. 산이 많은 강원도라 그런지 곳곳에 터널이 많았다. 1,296미터의 오천터널이 길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돌산령터널을 지난 경험 때문일 것이다. 돌산령터널은 2,995미터였다. 하지만 오천터널이 5,000m가 아닌 것은 참 다행이었다.


‘하늘 꼬리’라는 뜻을 가진 ‘천미리’(天尾里)는 그냥 얻은 이름이 아니었다. 오천터널을 빠져나와 고개 위에 서니 저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집 몇 채는 개미집처럼 작고도 아뜩해 보였다. 눈이 모자랄 만큼 장엄하게 겹겹이 둘러선 산봉우리들, 가히 하늘 꼬리라는 이름을 얻을 만한 지형이었다. 가르마처럼 산과 산 사이를 지나는 도로는 우람한 산맥에서 삐져나온 실뿌리 같았다.


천미리를 향해 내려오면서 보니 도로 옆으로는 낙석을 방지하기 위한 철망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철망에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이 지역은 천연기념물 217호로 지정된 산양의 주요 서식지입니다”


바로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듯, 산양 한 마리가 사진 속에 담겨 있었다. 현수막을 보고선 산세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아찔한 높이로 솟은 산과 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너럭바위와 선바위들, 산양이 살기에는 적지겠다 싶었다. 아니, 깎아지를 바위도 무서워하지 않는 산양만이 살 수 있는 곳이겠다 싶었다.


천미리 일대는 산양이 사는 서식지이기도 했다. 지나가는 발걸음도 괜히 조심스러워졌다.


설마 산양이 내 발자국 소리에 놀랄 일은 없겠지만, 현수막을 보고나니 나도 모르게 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나는 산양이 어디 있는지 볼 수 없어도 어디선가 산양은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고갯길을 내려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굉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을 때, 튀어나오듯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 있었다.


자동차 행렬이었다. 저 아래 산모퉁이를 돌아서는 자동차 한 대가 보인다 싶었는데, 자동차는 연이어 나타났다. 뱀이 좌우로 몸을 흔들며 앞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자동차들은 꼬리를 물고 달려왔다.


모두가 죽어라고 내달리고 있었다. 방금 들었던 굉음은 전속력으로 달리는 자동차에서 나는 소리였다. 바람처럼 내 앞을 스쳐 지나간 자동차 행렬은 경사가 급한 오르막길을 단번에 치달려 요란한 소리만을 남긴 채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벤츠, BMW, 렉서스, 포르쉐 등 모두가 외제차였다.


잠깐 사이에 눈앞에서 벌어진 일, 내가 뭘 잘못 봤나 싶을 정도였다. 산양이 살고 있는 하늘 꼬리, 고요함과 장엄함이 산맥 가득히 배어 있는 심심유곡, 산양이 놀랄까 발걸음도 조심스레 옮기고 있는 터에 저, 저, 지랄 같은 짓거리라니!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욕이 터졌는데, 그 때 슬그머니 떠오르는 한 모습이 있었다. 조금 전 현수막을 통해서 본 산양의 모습이었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허연 수염, 산양이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이르는 것 같았다.


‘내버려 두소. 모두들 자기 걸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니.’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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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28)


인민군 발싸개


돌산령터널 안에서 만나 하루를 꼬박 동행했던 정 장로님 내외분과의 일정은 방산에 도착하면서 마쳤다. 폭염 속 땡볕 아래를 종일 같이 걸었던 시간과 나눴던 이야기들은 두고두고 아름답고 소중한 기억으로 남으리라.


방산에 도착을 했을 때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독일을 처음 찾았을 때였다. 슈투트가르트에서 집회를 마치고 그곳 목사님의 안내로 독일 안에 있는 종교개혁과 관련된 곳을 돌아보던 중 벨기에를 찾았다. 독일 국경에서 가까운 곳에 유명한 성지가 있다고 했다.


독일에서 벨기에로 들어가는 길, 국경을 넘는 일이니 당연히 겹겹의 철조망과 총을 든 군인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방금 국경을 지나왔어요.” 목사님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독일 땅을 달리고 있는 줄로 알았을 것이다.


국경을 그냥 넘다니! 국경을 이렇게 쉽게(?) 넘어도 되나 싶었다. 마치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접어들 듯 아무 일도 없이 통과를 했으니, 내가 다 걱정이 될 정도였다. 여권 검사도 없었고 총을 든 군인들을 만난 것도 아닌데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들어가다니, 나는 내 앞에서 일어난 일을 보며 뭔가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체 이게 뭐지, 마음속으로 이어지던 충격과 혼란은 지금도 새롭다.


방산을 찾으며 불쑥 그 때의 경험이 떠올랐던 것은 ‘방산’이라는 지명 때문이었다. 방산이라는 지명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防産’으로 이해를 했었다. 방산이라는 이름의 박물관이 있으니 당연히 온갖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나 보다 했다.


그러고 보면 분단 시대의 산물은 의외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의식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방이 산이어서 얻은 이름일까, 방산(方山)은 도자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특히 흙이 좋아 예로부터 백자로 유명한 곳이었다. 조선시대 왕실 도자기를 공급하던 경기도 광주 분원에 원료를 공급했던 곳으로, 방산 일대에서는 40기의 옛 가마터가 확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옛 명성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방산자기박물관을 세운 것이었다.


하루의 피곤과 여전한 더위를 달랠 겸 콩국수를 하는 식당을 찾아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은 뒤엔 정 장로님 내외분과 인사를 나눌 참이었다. 그런데 막 식사를 마칠 때쯤 전화가 왔다. 이 장로님이었다. 방산 가까이 왔는데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 전화였다. 



돌산령터널 안에서 만나 방산자기박물관까지 동행한 정장로님. 장로님은 일정을 모두 마칠 때까지 내 배낭을 내려놓지 않았다.


정 장로님도 그랬고 이 장로님도 그랬다. 시간과 장소 등 만날 곳을 약속한 것도 아니었고, 만날 것을 약속한 것도 아니었다. 길을 떠나며 미리 전화를 한 것도 아니었다. 두 분 모두 불쑥 찾아온 걸음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만남, 그래서 그랬을까 반가운 마음과 고마운 마음은 새롭고도 컸다.


떠나려던 걸음을 늦춰 정 장로님 내외분도 이 장로님 일행을 만났다. 생각지 못한 곳에서의 만남, 우리는 다 같이 방산자기박물관 뒤편에 있는 평상에 둘러앉았다. 한낮의 무더위와는 달리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함께 웃으며 나누는 이야기가 더욱 마음을 시원하게 했다. 이런 시간이 다 허락되는구나, 더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우리가, 이런 것이 함께 믿음의 길을 걷는 길벗이구나 하는 생각이 자꾸 자꾸 마음에 새겨지는 시간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웃은 일이 있었다. 걷기에 나선 뒤 몇 몇 교우들의 전화와 문자를 받은 일이 있다. 특히 나이 많으신 권사님들이 걱정을 많이 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흐르는데 어떻게 뙤약볕 아래 길을 걷느냐며, 전화를 해서 울먹이기도 했다.


교우들에게 걱정을 끼칠까 싶어 길을 떠난 뒤 아무 소식을 전하지 않기로 했던 생각을 바꿔 교회 홈페이지에 짤막한 근황을 올리기로 했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걱정을 더는 길이다 싶었다. 글과 함께 몇 장의 사진을 함께 올렸는데, 올린 사진 중의 한 장을 눈여겨 본 이가 있었다.



쓰러지면 안 된다며 오집사님이 놓아준 링거는 몸보다도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발바닥에 생긴 물집을 가라앉히기 위해 두툼한 폼 드레싱 한 장을 발바닥에 깔고 압박붕대로 칭칭 감은 사진을 올린 것이었는데, 그 사진을 보고 폼 드레싱과 압박붕대를 전해준 오 집사님은 왈칵 눈물이 났다고 했다. 사실 나는 그 말을 듣고 눈물이 났다. 오 집사님은 그런 모습의 사진을 보고는 그냥 있을 수가 없어 차를 수소문하여 동행을 한 것이었다.


우리가 함께 웃었던 것은 ‘인민군 발싸개’라는 말 때문이었다. 물집 잡힌 발을 처치한 사진 속 모습은 영락없이 ‘인민군 발싸개’였다는 것이다. ‘인민군 발싸개’라니, 그 말은 너무도 적절했고, 너무도 실감이 났고, 너무도 재미있었다.


오 집사님이 사진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인민군 발싸개. 나는 그 말을 듣고 눈물이 났다.


하긴, 나는 지금까지 폼 드레싱이 있는 줄도 몰랐고, 압박붕대를 써 본 적도 없고, 어떻게 쓰는 것인지를 배운 적도 없다. 그저 상황에 맞춰 떠오르는 생각을 따라서 처치를 했을 뿐인데, 전문가가 보기엔 아니어도 영 아니었던 것이다.


걱정을 하며 내려온 집사님께 여전히 풀지 않고 있던 인민군 발싸개를 내보이며 그렇게 처치를 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은 집사님은 참 잘했다며 내가 한 서툰 처치를 인정해 주었다. 발바닥에 물집이 넓게 잡혔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되었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정말로 그런 것인지, 내 쑥스러움을 덜어주려는 것이었는지 나는 지금도 진실을 모르고 있다.


잠깐 사이 시간은 흘렀고 아쉽지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들 돌아갈 길이 멀었다. 돌아서는 길에 집사님과 장로님이 숙소로 찾아왔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오 집사님은 먼 길을 내려오며 그냥 내려오지를 않았다. 몇 가지 약품과 함께 영양제 주사를 챙겨왔다. “걷다가 쓰러지면 안 되잖아요!” 세상에나! 얼마나 걱정이 되었으면 영양제를 다 챙겼을까.


영양제는 몸 속으로가 아니라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덕분에 링거를 꽂은 채로 방에서 인사를 나눴고, 링거를 꽂은 채로 잠이 들었다가 핸드폰에서 울리는 알람 소리를 듣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주사기를 빼냈다.


사방이 고요한 깊은 밤, 몸은 젖은 솜처럼 무거웠지만 잠은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많은 생각을 했다.


먼 길을 찾아왔던 분들은 다들 잘 돌아갔을까, 그처럼 좋은 믿음의 벗을 주신 은혜가 참으로 크고 감사했다. ‘어렵게 준비된 잔치가 아름답다’고 했던 생텍쥐페리의 말은 바로 오늘 같은 날을 두고 한 말이었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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