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검은 사람일수록 비단 두루마기를 입는다

 

 

따끔이 속에 빤질이, 빤질이 속에 털털이, 털털이 속에 얌얌이, 이게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일까? 따끔이, 빤질이, 털털이, 얌얌이, 각각의 의미도 짐작하기 쉽지 않은 터에 그것들이 서로의 속에 있다니 마치 말의 미궁에 빠져드는 것 같다.

 

정답은 밤이다. 캄캄한 밤이 아니라, 가을에 익는 밤(栗) 말이다. 밤을 먹기 위해서는 따끔따끔한 가시를 벗겨야 하고, 두껍고 빤들빤들한 겉껍질을 벗겨야 하며, 그 뒤에는 작은 털이 달린 껍질을 다시 벗겨야 하고, 맨 마지막으로는 떫은맛을 지닌 속껍질을 벗겨내야 비로소, 마침내 고소하고 오들오들한 밤을 얌얌 맛있게 먹을 수가 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 ‘표리부동’(表裏不同)이라는 말이 있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뜻이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은 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도 그렇다. 겉 다르고 속 다를 때가 있다. 아니,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을 만난다고 하는 것은 참 드문 일이 되었다. 어디서고 가면극이 벌어지는 세상, 허전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양의 탈을 썼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는 말이 있다. 겉은 그럴듯하지만 속에는 음흉한 생각을 숨기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낚시 바늘을 보면 바늘 뒤편에 살짝 되꼬부라진 부분이 있다. 이른바 ‘미늘’인데 바로 그 미늘 때문에 고기는 걸려든다. 미늘 때문에 물고기는 바늘로부터 빠져나갈 수가 없게 된다. 겉으론 웃지만 뒤편에 미늘을 숨긴 채 다가오는 사람이야말로 ‘양의 탈을 썼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달과 별이 된 오누이 이야기에 나오는 호랑이가 그렇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면서 떡을 팔고 장에서 다녀오는 엄마를 호랑이는 잡아먹는다. 떡 하나에서 시작이 되었지만 결국 호랑이는 엄마를 잡아먹고 만다. 하나씩 하나씩 빼앗기는 것이 결국은 전부를 빼앗기는 길이라는 걸 호랑이를 통해 보게 된다.

 

엄마를 잡아먹은 호랑이는 외딴집에 남겨진 오누이마저 잡아먹기 위해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오누이를 찾아온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오누이가 문을 열어주지 않자 호랑이는 자기 발에 분을 바르고 엄마 목소리를 흉내 낸다. 아무리 아이들이라 해도 어찌 분칠을 한 호랑이 발을 엄마의 손으로 알 수가 있었는지, 호랑이 목소리를 엄마의 목소리와 혼동할 수가 있는지 이해가 안 되지만, 결국 오누이는 호랑이 앞에 문을 열어주고 만다.

 

생각해 보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오누이는 바로 우리들일 수 있다. 분칠을 한 호랑이 발을 엄마의 손으로 알고, 그럴듯한 호랑이 목소리를 엄마의 목소리로 알고 헛된 것 앞에 문을 여는 일은 우리들의 삶속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난다.

 

우리의 속담 중에 ‘속 검은 사람일수록 비단 두루마기를 입는다’는 속담이 있다. 검은 속과 화려한 비단옷이 대조를 이룬다. 속이 검으면 검을수록 그것을 가리려는 화려함은 더욱 화려해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비단옷을 입었다고 덕 있는 사람이라 당연히 생각해서도 안 되고, 허름한 옷 입었다고 당연한 듯 무시해서도 안 될 일이다. 비단 두루마기를 입었다고 무조건 검은 속을 의심할 건 아니겠으나, 비단 옷 입고 비단 같은 말을 한다 하여서 무조건 믿을 일 또한 아닌 것이다.

 

비단옷을 입어 다른 이의 마음을 어지럽히느니 차라리 무명옷을 입고 무명옷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운 세상이지만, 무엇보다 비단옷의 화려함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없어야겠다. 두껍게 바른 분으로 감추고 다가오는 날카로운 발톱을 행여나 엄마의 손으로 혼동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바로 그런 일에 우리의 생명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행여 비단옷을 입고 보는 이의 마음을 어지럽히느니, 무명옷을 입고 무명옷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레 그립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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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데는 무쇠도 녹는다

 

 

내 책상 위에는 그림 하나가 놓여 있다.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이다. 신약성경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를 형상화 한 그림으로, 거지꼴로 돌아온 아들을 다 늙은 아버지가 끌어안아주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일부러 그렇게 그린 것인지 나중의 해석이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가만히 보면 아들의 등을 감싸고 있는 아버지의 두 손은 서로 다르게 보인다. 한 손은 크고 억세게 보이는데, 다른 한 손은 보드랍고 작다.

 

마치 한 손은 아버지의 손 같고, 다른 한 손은 어머니의 손처럼 보인다. 거장 렘브란트가 두 손을 똑같이 그릴 재주가 없어 그렇게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두 손을 이렇게 이해하곤 한다. 네 모습이 어떠하든지 얼마든지 너를 용서한다는 어머니의 마음과, 내가 다시는 너를 놓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마음이 함께 담겨 있는 것이라고.

 

 

 

 

그것뿐이 아니다. 아버지가 걸친 붉은 색 망토는 상처 입은 새끼 새를 보듬어 안는 어미 새의 품 같고, 아버지 가슴에 기댄 아들의 머리에 땀이 밴 것은 마치 자궁 속에 자식을 품는 심정이며(히브리어 긍휼이라는 말에는 태, 자궁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한다), 아버지의 거반 감겨 있는 두 눈은 지난날 지은 모든 잘못에 대해 이미 눈을 감은 아버지의 심정을 담아낸 것으로 이해한다. 그림을 통해 아버지의 심정을 표현하는 화가의 이해력이 놀랍기만 하다.

 

그 아버지 앞에 무릎 꿇은 아들의 꼬락서니가 볼만하다. 영락없이 거지꼴을 한 아들이 얼마나 먼 길을 걸어왔는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신발은 다 헤져 있고, 그나마 신발 한 짝은 벗겨진 채 무릎을 꿇고 있다.

 

아버지께 돌아오기 전 아들은 아버지께 이렇게 말하려 했다.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큰 죄를 지었습니다. 지금부터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닙니다. 저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돌아온 아들이 아버지께 이야기를 할 때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가로막는다.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대신 종들을 불러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기라 한 뒤 잔치를 준비시킨다.

 

아버지가 말을 막아 아들이 아버지께 하지 못한 말이 있다. “저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아버지는 돌아온 아들로부터 그 말 듣기를 원하지 않으셨고, 차마 그 말 듣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성으로 용서를 빌면 용서하지 않을 수가 없다. 비는 데는 무쇠도 녹는다. 사람이 사람에 대해 그럴진대 하물며 하늘이겠는가.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 중에서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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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익자 체 장수 지나간다

 

 

삶은 공식이 아니라 신비다. 나이 먹으면서 우리는 그것을 배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평생 생의 학교에 다니는 코흘리개 학생들이다.

 

열심히 하는데도 일이 안 될 때가 있다.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는데도 오히려 일이 꼬일 때가 있다. 그런가 하면 별로 애쓰지 않았다 싶은데도 일이 뜻대로 잘 될 때가 있다. 누가 돕기라도 하듯 술술 풀릴 때가 있다.

 

일이 술술 잘 되는 것을 두고 ‘술 익자 체 장수 지나간다’고 했다. ‘체’란 가루를 곱게 치거나 액체를 밭거나 거르는데 쓰는 도구였다. 그물이 드물었던 어린 시절에는 체를 들고 나가 개울에서 고기를 잡기도 했다. 동그란 체를 대고 고기를 몰면 미꾸라지 새우 등이 걸려들었다. 대개의 경우 고기를 잡다보면 체에는 구멍이 났고 그러면 어머니께 된 꾸중을 맞았지만 말이다.

 

 

 

체를 많이 사용하던 시절에는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다 헤어진 쳇불을 갈아 끼워 주거나, 얼레미, 도디미, 생주체, 고운체 등 체를 파는 체 장수가 있었다. 그만큼 일상생활 속에서 체의 사용이 많았던 것이다.

 

우리의 전통 술인 막걸리는 술이 익은 후에 술막지를 체로 걸러낸 후에야 먹을 수가 있다. 술이 알맞게 익어갈 무렵 술 맛이 궁금하던 차에 때마침 술을 거를 수 있는 체 파는 장수가 지나가니 일이 그렇게 잘 맞을 수가 없다. ‘술 익자 임 오신다’는 속담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일이 잘 맞아 돌아가는 즐거움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 삶에도 그런 즐거움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대추나무에 연 걸린 듯 사방 답답한 일들이 엉겨 있는 요즘에는 더욱 더 그런 마음이 든다. 술 익자 체 장수 지나가는, 술 익자 임이 찾아오는 기가 막힌 즐거움이 더러더러 있어 답답한 숨구멍을 터주는.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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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 길에는 눈썹도 짐이 된다 


 

40여 일 동안 산티아고 순례 길을 걷고 온 지인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꼭 필요하다 싶어 챙긴 짐들 중에서 중간에 버린 물건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걷는 것이 워낙 힘들다보니 버릴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버리게 되더라는 것이다.




천리 길에는 눈썹도 짐이 된단다. 눈썹도 짐이 된다니, 눈썹에 무슨 무게가 있다는 것일까 싶다. 눈썹이 없는 사람도 없지만 눈썹의 무게를 느끼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눈썹이라는 말과 무게라는 말은 도무지 어울리지가 않는 말이다. 그러나 ‘백 리만 걸으면 눈썹조차 무겁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눈썹도 먼 길을 걸으면 느낌이 달라지는 모양이다.


천리 길에는 눈썹도 짐이 된다는 것은, 먼 길을 나설 때는 눈썹조차도 빼놓고 가라는 뜻이다. ‘눈썹조차도’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뜻을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불필요한 것들은 무엇이든 모두 다 빼놓고 가라는 것이다.


말을 타고 멀리 가려고 하는 자는 말을 배불리 먹일 것이 아니라 말이 내핍에 견딜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했던 것처럼 말이다.


뭐가 필요한지 불필요한지 생각지도 않은 채 온갖 것을 다 챙겨가지고 무거운 걸음을 옮기고 있는 우리네 삶에 눈썹의 무게 이야기는 얼마만한 무게로 다가올 수 있을지.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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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 사랑을 재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

 

 

지금이야 대부분 미터법을 사용하지만 이전에는 치(寸), 자(尺), 척(尺) 등 지금과는 다른 단위를 썼다. 거리를 재는 방법도 달라져서 요즘은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도 기계를 통해 대번 거리를 알아내곤 한다.

 

하지만 아무리 측정법이 좋아져도 잴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있다. 하늘의 높이나 크기를 누가 잴 수 있을까. 바라볼 뿐 감히 잴 수는 없다. 그런데도 자기 손에 자 하나 들었다고 함부로 하늘을 재고 그 크기가 얼마라고 자신 있게 떠벌리는 종교인들이 더러 있으니 딱한 노릇이 아닐 수가 없다.

 

 

 

사람의 마음도 잴 수가 없다. 기쁨과 슬픔 등 사람의 마음을 무엇으로 잴 수가 있겠는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니다.

 

잴 수 없고, 재서는 안 되는 것 중에는 사랑도 있다. 때로는 궁금한 마음에, 때로는 욕심으로 누군가의 사랑을 재려 할 때가 있다. 어떤 땐 내게 주는 사랑의 정도가 궁금하고 어떤 땐 내가 더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 손해 아닌가 사랑을 재려 할 때가 있지만 결국은 어리석은 일이다. 사랑이 길거나 짧다 생각하는 것은 모두 내 마음에서 비롯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잴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강물처럼 흘러가도록 두어야 한다. 스스로 숨을 쉬며 자라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깊이 뿌리를 내리고 그윽해 진다. 재기 시작하는 사랑은 서서히 질식하기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사랑초서>는 절창이다 싶다.

 

떫은 사랑일 땐

준 걸 자랑했으나

익은 사랑에선

눈멀어도 못다 갚을

송구함뿐이구나

 

-김남조 <사랑초서>(53)

 

‘사랑은 정직한 농사

이 세상 가장 깊은데 심어

가장 늦은 날에

싹을 보느니’

 

-김남조 <사랑초서>(83)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 중에서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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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똥 눈 우물물 제가 도로 마신다


예전에는 동네마다 우물이 있었다. 우물은 동네 한복판에 있었다. 지리적으로 한 가운데가 아니라 마음의 중심이었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긷고 빨래를 하고, 우물은 만남의 장소였고 대화의 장소였다. 우물이 있어 비로소 마을 사람들은 한 식구와 같은 ‘우리’가 될 수 있었다. ‘남’이 따로 없었다. 우물은 그렇게 마을을 형성하는 중심이었다.




그런데 우물에다 똥을 누다니,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한단 말인가? 그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우물에다 똥을 눈다는 말인가? 누군가를 골려주려고 그랬을 수도 있고, 대판 싸운 집이 있어 분한 마음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의 속담은 ‘제가 똥 눈 우물물 제가 도로 마신다’고 말한다. 단순하고 명쾌하다. 재미있고, 통쾌하다. 자신의 감정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것, 급하다고 아무도 안 본다고 앞 뒤 가림 없이 행동하는 모든 것, 그 모든 것들은 우물에 똥을 누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보는 이 없다고 슬쩍 쓰레기를 버리거나, 돈에 눈이 멀어 비 오는 날 하수구에 독성이 있는 공해물질을 함부로 흘려버리거나, 화가 났다고 자기의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낸다든지, 그 때는 편할지 몰라도 그 모든 일들은 고스란히 자기에게로 돌아온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자기 입으로 들어오게 된다. 우물에는 제발 똥 누지 말 것, 그 당연한 일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있다니!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 중에서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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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 밑에 가시 드는 줄은 알아도

염통 밑에 쉬 스는 줄은 모른다



손톱 밑에 가시 드는 거야 대번 안다. 눈에 금방 띄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아프기 때문이다. 다른 어느 부위보다도 손톱 밑에 박히는 가시는 아프기도 하고 빼내기도 어렵다.


그런 점에서 ‘손톱 밑의 가시’란 보잘것없어 보이는 자그마한 것 때문에 겪게 되는 적잖은 곤란이나 고통을 의미한다. 염통이라 함은 심장을 말하는 것일 터, 그런데 ‘쉬 스는’이라는 말은 아무래도 낯설다. ‘쉬가 슬다’라는 말은 ‘파리가 알을 까다’라는 말이다. 심장에 파리가 알을 까다니, 그런 심각한 상 황이 어디에 있을까 싶다.





그런데 사람이 묘하다. 손톱 밑에 가시 박힌 것은 알아도 심장에 파리가 알을 까는 것은 모르니 말이다. 눈에 보이는 작은 문제는 알면서도 정말로 심각한 문제가 벌어지고 있는데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모르는 것이 우리들이다. 우리의 엉뚱한 민감함과 위태위태한 우리의 무감함이라니!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 중에서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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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런두런(29)

 

누군가의 비밀을 안다는 것

 

 

강원도 단강에서 지낼 때였습니다. 어느 날 새집을 하나 발견하였습니다. 어릴 적 우리는 새집을 발견하면 새집을 ‘맡았다’고 했습니다.

 

지금 와 생각하면 ‘맡다’라는 말이 묘합니다. ‘맡다’라는 말에는 ‘차지하다’는 뜻도 있고, ‘냄새를 코로 들이마셔 느끼다’ 혹은 ‘일의 형편이나 낌새를 엿보아 눈치 채다’라는 뜻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어릴 적 말했던 ‘맡는다’라는 말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다 담긴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새집이 어디 있는지를 눈치 챘다는 뜻도 있고, 내가 차지했다는 뜻도 담겨 있었을 테니 말이지요.

 

저녁 무렵 교회 뒤뜰을 거닐다가 새 한 마리를 보게 되었는데, 날아가는 모양이 특이했습니다. 주변을 경계하면서 조심스럽게 이 가지 저 가지를 옮겨 다니고 있었지요. 어릴 적엔 새가 쫑긋거리며 나는 모양만 보고도 새집의 존재 여부와 위치를 짐작하곤 했지요. 그런 떨리는 예감이 틀리지 않을 때의 짜릿함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만이 누릴 수 있는 신비로움이었습니다.

 

눈앞에서 날고 있는 새의 모습은 어린 시절의 경험에만 비춰 봐도 근처에 새집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했는데, 새의 부리에 벌레까지 물려 있으니 새집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더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습니다.

 

 

 

 

경계하는 새의 눈에서 벗어나 사택 계단 쪽으로 물러나와 가만히 새를 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는 나의 행동이 미심쩍었던지 여간해선 둥지에 들지를 않았습니다. 제법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새는 안심을 했던지 둥지 쪽으로 내려앉았고, 새집의 위치를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난 성탄절, 성탄장식을 했던 소나무와 소나무가 넘어지지 않도록 모래를 넣어 사용한 플라스틱 양동이를 예배당 뒤편에 놓아두었는데 놀랍게도 새집은 그곳에 있었습니다. 비스듬히 누워 있는 양동이 안은 비가와도 비에 젖을 것이 없는 매우 안전한 장소였습니다.

 

양동이 안 소나무 가지를 피해 둥그렇게 만들어진 새집 안에는 - 새는 언제 누구에게서 자기만의 집 짓는 법을 저리도 훌륭히 배운 것일까요 -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새끼 세 마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새끼들은 내 인기척을 듣고는 어미가 온 줄로 생각을 했던지 쩍쩍 입을 벌려대고 있었습니다.

 

가장 은밀한 곳에 숨겨 있던 비밀 하나를 알게 된 것처럼 가슴이 뛰었습니다. 잘 보살펴야지 싶었습니다. 개구쟁이 아이들에게 들키면 새끼들은 장난감이 될 지도 모를 일, 그런 수난 없이 잘 자라 둥지를 떠나게 하고 싶었지요.

 

둥지를 살필 때마다 조금씩 달라져가는 모습이 신기했습니다. 어느새 솜털을 지나 고운 털들이 몸을 덮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새끼 새 한 마리가 둥지에서 떨어져 나와 양동이 안에서 죽어 있었습니다. 내 딴엔 새를 더 잘 살핀다는 마음으로 시간이 될 때마다 둥지에 들른 것인데, 결국 생각하니 이유라면 그게 이유 아닐까 싶었습니다.

 

어미로서는 누군가 둥지를 찾는 것이 마음에 걸렸을 것이고, 그런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새끼를 옮기려다가 그것이 제대로 안 되어 그만 새끼가 죽은 것이겠다 싶었습니다.

 

누군가의 비밀을 안다는 것, 그를 돌본다는 이유로 내밀한 비밀을 함부로 들여다보는 것,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치명적인 일인지를 양동이 안에서 죽은 새끼 새는 지금도 엄하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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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런두런(28)

 

옥수수 수염

- 동화 -

 

이제부턴 흙길입니다. 차가 덜컹거리며 흔들리기 시작하자 민구가 잠에서 깼습니다. 아침 일찍 서울을 떠날 때만 해도 오랜만의 나들이에 신이 나서 창에 코를 박고 밖을 구경하던 민구가 따뜻한 햇살에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잘 잤니? 이제 곧 할아버지 댁이다.”

 

운전하는 아빠 옆에 앉아 있던 엄마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아직 졸음기가 남아있는 민구는 큰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습니다.

 

기지개를 켜며 막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민구뿐이 아니었습니다. 나무마다 아기 손톱 같은 작은 이파리들이 조잘조잘 돋아나고 있었고, 논둑과 밭둑으로는 누군가 크레용을 칠한 것처럼 굵고 힘찬 초록색 선들이 달리고 있었습니다.

 

아빠가 창문을 열자 확, 시원한 바람이 밀려듭니다. 맑은 기운이 가득 담긴 바람입니다. 숨을 크게 들이쉬며 바람을 마시자 찬물에 세수를 한 것처럼 민구의 잠기운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들판 곳곳에선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소를 부려 밭을 가는 모습들도 보입니다. 나란히 서서 일하는 두 마리 소, 겨릿소입니다. 개울가에 줄지어 선 산수유나무에는 샛노란 꽃들이 눈부시게 피어있었고, 어디서 우는지 뻐꾸기 소리도 은은하게 들려왔습니다.

 

뻐꾸기 소리를 듣자 대뜸 민구는 뻐꾸기시계를 떠올립니다. 민구네 집 거실 벽에는 뻐꾸기시계가 있습니다. 시간만 되면 뻐꾸기가 문을 열고 나와 “뻐꾹! 뻐꾹!” 어떻게 아는지 시간의 수만큼 노래를 합니다. 뻐꾸기시계 소리에 익숙해진 민구는 진짜 뻐꾸기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 소리가 뻐꾸기시계를 닮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쫑긋 쫑긋 꼬리를 까불며 날아다니는 할미새도 보이고, 머리 위에 로마 병정의 투구를 닮은 깃털을 달고 “호홍, 호홍” 빈 병에 입을 대고 불면 나는 소리를 내는 후투티도 보입니다.

 

나무 이름도 새 이름도 모두 잘 아는 것처럼 척척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 민구는 아는 게 없습니다. 서울에 살면서 그런 것을 본 적이 없고, 그런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지냈으니까요. 어떤 걸 물어도 막힘없이 대답을 해주시는 아빠가 신기할 뿐입니다.

 

“저기 할아버지가 마중을 나와 계시는구나!"

 

산모퉁이를 지나 저 앞에 동네가 나타났을 때 엄마가 앞 쪽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멀리서도 보이는 하얗고 긴 수염, 민구도 대번 할아버지를 알아볼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4월 5일, 식목일이자 한식입니다. 민구네 가족은 한식을 맞아 몇 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 산소를 찾아온 것입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이 평생토록 일해오신 산간밭 한쪽 양지 바른 곳에 할머니는 묻히셨습니다.

 

할아버지 손길이었겠지요, 할머니 누우신 산소는 깨끗하게 정돈이 되어 있었습니다. 나란히 서서 할머니 앞에 큰 절을 올린 뒤 엄마 아빠를 따라 봉분 위의 풀 하나를 뽑을 때 민구는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할머니가 환하게 웃으시며 ‘아이구, 우리 민구 왔구나!’ 하며 손을 잡아주시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손을 잡아주시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던 할머니의 손길은 유난히 따뜻했었답니다.

 

‘그래요, 할머니. 저 민구에요. 제가 왔어요.’

 

민구도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인사를 드렸습니다.

 

산소에서 돌아온 민구는 할아버지와 함께 텃밭으로 갔습니다. 할아버지와 함께 옥수수를 심기로 했습니다. 호미 끝이 반 이상 닳은, 할머니가 쓰셨던 호미를 민구가 잡았습니다. 호미 끝 몇 번 닳으니 세월이 다갔다 하시던 할머니 말씀이 생각납니다.

 

“할아버지, 땅은 얼마나 깊이 파면 되요?”

“옥수수 알은 몇 개씩 넣으면 되죠?”

 

민구는 모르는 것도 궁금한 것도 많습니다. 때마다 할아버지는 흐뭇한 목소리로 대답을 합니다.

 

“씨앗은 씨앗의 크기만큼만 묻으면 된단다.”

“한 구덩이에 서너 알씩 넣으렴.”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옛 이야기까지 해주었습니다.

 

“옛날 어른들이 그러셨단다, 옥수수를 심을 땐 서너 알씩 심으라고. 그래야 한 알은 하늘의 새가 먹고, 한 알은 땅속 버러지가 먹고, 한 알은 사람이 먹는 거라고.”

 

민구에겐 한 알만 심어도 되는 것을 서너 알씩 심는 것이 손해처럼 느껴졌지만, 아직 자기가 알지 못하는 좋은 뜻이 할아버지의 이야기 속에 담겨져 있을 것도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손으로 흙을 만지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손도 마음도 부드러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옥수수 씨를 심으니 마음이 착해지는 것도 같았습니다. 가끔씩 긴 지렁이가 나와 기겁을 하고 놀라기는 했지만요.

 

민구가 할아버지 집을 다시 찾은 것은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학원이다, 영어 캠프다, 숙제다…, 방학이 더 바빴으니까요. 그래도 개학을 며칠 앞두고 할아버지 집을 찾을 수가 있게 되어 민구로서는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릅니다. 지난번에 할아버지와 함께 심었던 옥수수가 어떻게 되었는지 여간 궁금한 것이 아니었거든요.

 

민구는 이제 초등학교 5학년, 엄마 아빠는 민구가 혼자서 시골 할아버지 댁을 찾아가도록 했습니다. 전철과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 먼 길이었습니다. 엄마 아빠는 시간이 없어 그런다고 했지만 꼭 그런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민구도 아주 모르지는 않았습니다. 자기가 그만큼 컸다는 것을 인정해주는 엄마 아빠 앞에 민구도 용기를 냈습니다. 중간에 길을 잃어버리면 어쩌나 싶어 떨리기도 했지만 의젓한 마음을 갖기로 했습니다. 아빠 차로 갈 때와는 달리 혼자서 찾아가는 할아버지 집은 땅 끝에 있는 것처럼 멀리 느껴졌지만, 그럴수록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며칠 동안 민구는 할아버지 집에서 할아버지와 단 둘이 지냈습니다. 할아버지가 하시는 일도 거들어드리고, 밤에 할아버지 곁에 누워서는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는 옛날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아버지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듣는 것이 무엇보다 재미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아버지의 어릴 적 모습 속엔 지금의 자기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어떤 땐 너무도 닮아 지금 아빠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책에서는 읽을 수 없었던 재미난 이야기들도 할아버지는 많이 알고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는 이야기들은 컴퓨터 게임과는 다른 독특한 재미와 감동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에 빠져드는 재미를,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다시 한 번 꿈속으로 나타나는 재미를 서울에 있는 친구들은 짐작이나 할까요?

 

할아버지와 보내는 시간은 하루가 언제 갔나 싶게 재미있고 즐거웠지만 민구는 왠지 할아버지를 볼 때마다 쓸쓸한 생각이 듭니다. 할머니와 두 분이 계실 때는 그런 줄 몰랐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혼자가 되신 뒤로는 할아버지 등이 허전하게 보입니다.

 

혼자되신 할아버지께 서울로 올라가 같이 사시자고 엄마와 아빠 그리고 민구까지 나서 여러 번 말씀을 드렸지만 할아버지는 시골이 좋다시며 굳이 혼자서 지내십니다. 시간이 될 때마다 슬며시 할머니 산소를 찾으시는 것을 보면 아마도 할아버지는 서울이 싫기보다는 할머니 곁을 떠나기가 싫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민구가 서울로 돌아가기로 한 전날 저녁, 엄마와 아빠가 서울에서 내려왔습니다. 엄마 아빠는 며칠 사이에 얼굴이 검게 탄 민구가 건강하게 보여 반가웠고, 민구는 혼자 찾아와 보낸 시간을 엄마 아빠에게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 날 밤은 정말로 멋진 밤이었습니다. 마당에 널찍한 멍석을 펴놓고 식구들이 둘러앉았습니다. 그새 할아버지께 배운 대로 민구는 말린 쑥을 가져와 모깃불을 피웠습니다. 모기를 쫓는 것은 모기향밖엔 없는 줄로 알았던 민구에게는 쑥으로 연기를 피워 모기를 쫓는 것이 여간 신기하지 않았습니다. 손을 들어 휘저으면 후두두둑 떨어질 것 같은 머리 위의 수많은 별들, 앞산과 뒷산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대답하듯 번갈아 울어대는 소쩍새의 울음소리, 빛과 소리가 어둠 속에서 너무나도 잘 어울렸습니다.

 

엄마가 막 쪄낸 옥수수를 쟁반에 담아 왔습니다. 할아버지는 민구가 심은 옥수수가 잘 자랐다고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호미로 땅을 파고 서너 개 옥수수 알을 심었더니 그게 자라 정말로 옥수수가 열리다니, 땅은 보물창고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낮에 옥수수를 딸 때부터 민구는 여러 번 했습니다.

 

무릎을 맞대고 둘러앉은 식구들이 찐 옥수수를 먹으며 광주리에 담긴 옥수수 껍질을 벗겼습니다. 서울 갈 때 가져가라며 할아버지는 밭에 익었다 싶은 옥수수를 거반 다 따냈습니다. 촘촘한 옥수수 껍질을 한 겹 두 겹 벗겨내면 그 속에서 하얀 옥수수 알이 드러났습니다. 옥수수 알은 긴 수염에 덮여 있었습니다. 간지럼을 탈만큼 보드라운 수염이었습니다.

 

 

 

“엄마, 옥수수에 수염은 왜 있는 거예요?”

 

무슨 이유로 수염이 껍질 안에 들어있는 것인지, 옥수수 껍질을 벗기다말고 민구가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네 생각에는 왜 그런 것 같니?”

 

물으면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되묻는 것은 엄마의 주특기입니다. 마땅한 대답을 찾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속에 있는 옥수수 알을 지켜주려고 있는 게 아닐까요? 옥수수 알이 다치지 않도록 감싸주려고요.”

 

민구의 대답에 자신이 없자 엄마가 말했습니다.

 

“그런 것은 할아버지께 여쭤보렴. 할아버지는 모르시는 게 없거든.”

 

함께 옥수수 껍질을 벗기며 가만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할아버지가 빙긋 웃으며 대답을 하였습니다.

 

“얘길 들어보니 민구 대답도 그럴듯하구나. 옥수수 수염은 옛날부터 요긴한 쓰임새가 있었단다. 오줌이 시원찮게 나올 땐 옥수수 수염 말린 것을 달여 먹었지. 얼굴이 부었을 때도 옥수수 수염을 달여 마시면 부은 것이 내리곤 했어.”

 

“아니, 옥수수 수염이 약으로 쓰였단 말이에요?”

 

“그럼. 땅에서 나는 것은 어느 것 한 가지도 버릴 게 없는 거란다. 어디엔가 다 쓸모가 있는 법이지.”

 

할아버지는 땅에서 나는 것은 한 가지도 버릴 게 없다고 했습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쉬운 것 같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다음날 아침, 민구는 엄마 아빠와 함께 길을 나섰습니다. 개학이 눈앞으로 다가왔으니 서둘러 서울로 올라가야 합니다. 이것저것 할아버지가 챙겨주시는 것들이 어느새 자동차를 가득 채웠습니다.

 

할아버지를 혼자 두고 떠나야 하는 마음은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고향을 지키다 할머니 곁에 눕고 싶은 할아버지 마음이야 잘 알지만 혼자 계셔야 하는 것이 늘 마음에 걸립니다.

 

인사를 드리다가 괜히 눈물을 보일까 싶어 얼른 인사를 드리고는 뒷자리에 올라탄 민구가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몸을 돌려 할아버지께 손을 흔듭니다. 할아버지도 같이 손을 흔들어 주십니다.

 

차가 산모퉁이를 돌아설 때까지 할아버지를 향해 손을 흔들던 민구는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나무처럼 서서 여전히 손을 흔들고 계셨는데, 갑자기 할아버지의 흰 수염이 와락 마음을 파고들었습니다.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할아버지의 하얀 수염이 어젯밤 마당에서 벗겨내던 옥수수수염과 겹쳐졌던 것이었습니다. 순간 민구는 마음이 울컥해졌습니다.

 

‘그래 맞아. 옥수수 수염은 옥수수 알을 지켜주기 위해 있는 거야. 할아버지가 우리를 지켜주고 계신 것처럼!’

 

끝까지 흙을 일구시며 아빠와 엄마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시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할아버지 수염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것을 민구는 분명하게 알 수가 있었습니다.

 

왜 그러냐고, 엄마 아빠는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훔쳐내는 민구에게 몇 번을 물었지만 민구는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 할아버지의 옥수수 수염!’

 

꾹꾹 눈물을 참기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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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런두런(25)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하나님!

 

 

지난 여름 독서캠프를 통해 만난 분 중에 나태주 시인이 있습니다. ‘풀꽃’이란 시로 널리 알려진 시인이지요. 시골초등학교 교장으로 은퇴하신 분답게 중절모가 잘 어울리는 시골 할아버지의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그분을 처음 뵙는데, 그 분은 나를 알고 있었습니다. 한 신문에 쓰고 있는 칼럼을 눈여겨 읽어오고 있다 했는데, 금방 친숙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나태주 시인이 쓴 시 중에 최근에 알게 된 시가 있습니다. 병원 중환자실에서 시한부 삶을 선고받을 만큼 중병을 앓고 있을 때, 곁에서 간호하는 아내가 안쓰러워 썼다는 시였습니다.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라는 제목의 시였는데, 아내를 위해 하나님께 하소연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너무 섭섭하게 그러지 마시어요. 하나님!

 

저에게가 아니에요.

저의 아내 되는 여자에게 그렇게 하지 말아 달라는 말씀이어요.

이 여자는 젊어서부터 병과 함께 약과 함께 산 여자예요.

세상에 대한 꿈도 없고 그 어떤 사람보다도 죄를 안 만든 여자예요.

신발장에 구두도 많지 않은 여자구요.

한 남자 아내로서 그림자로 살았고

두 아이 엄마로서 울면서 기도하는 능력밖엔 없었던 여자이지요.

 

자기의 이름으로 꽃밭 한 평 채전밭 한 뙈기 가지지 않은 여자예요.

남편 되는 사람이 운전조차 할 줄 모르고 쑥맥이라서

언제나 버스만 타고 다닌 여자예요.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가난한 자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

저의 아내 되는 사람에게 너무 섭섭하게 하지 마시어요!

 

 

 

 

아내를 위한 간절한 마음이 뭉뚝뭉뚝 묻어나는데, 더 감동적이었던 것은 남편의 글에 화답하여 쓴 아내의 글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남편이 드린 기도보다 더 간절한 기도, 시인 아내의 절창이었습니다.

 

너무 고마워요,

남편의 병상 밑에서 잠을 청하며

사랑의 낮은 자리를 깨우쳐주신 하나님!

 

이제는 저이를 다시는 아프게 하지 마시어요.

우리가 모르는 우리의 죄로 한 번의 고통이 더 남아 있다면,

그게 피할 수 없는 우리의 것이라면, 이제는 제가 병상에 누울게요.

 

하나님!

저 남자는 젊어서부터 분필과 함께,

몽당연필과 함께 산, 시골 초등학교 선생이었어요.

시에 대한 꿈 하나만으로 염소와 노을과 풀꽃만 욕심내온 남자예요.

시 외의 것으로는 화를 내지 않은 사람이에요.

책꽂이에 경영이니 주식이니 돈 버는 책은 하나도 없는 남자고요.

제일 아끼는 거라곤 제자가 선물한 만년필과

그간 받은 편지들과 외갓집에 대한 추억뿐이에요.

 

한 여자 남편으로 토방처럼 배고프게 살아왔고,

두 아이 아빠로서 우는 모습 숨기는 능력밖에 없었던 남자지요.

공주 금강의 아름다운 물결과 금학동 뒷산의

푸른 그늘만이 재산인 사람이에요.

운전조차 할 줄 몰라 언제나 버스만 타고 다닌 남자예요.

승용차라도 얻어 탄 날이면

꼭 그 사람 큰 덕 봤다고 먼 산 보던 사람이에요.

 

하나님!

저의 남편 나태주 시인에게 너무 섭섭하게 그러지 마시어요.

좀만 시간을 더 주시면 아름다운 시로 당신 사랑을 꼭 갚을 사람이에요.

 

부부가 나누는 지극한 사랑이 따뜻한 감동으로 전해졌습니다. ‘한 번의 고통이 더 남아 있는 것이라면 이제는 제가 병상에 누울게요.’라는 기도 앞에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만, 이만한 기도를 물리치시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토록 순박하고 아름다운 사랑은 우리 곁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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