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2644

텅 빈 들판 한희철의 얘기마을(128) 텅 빈 들판 들판이 텅 비었다.볏가리와 짚가리 듬성듬성 선 들판모처럼 소들이 한가하다어미 소와 송아지가 진득이 편한 시간 보내기도 드문 일,커서 할 일 일러라도 주는 듯어미 소와 송아지가 종일 정겹다.송아지와 어미 소가 대신하는 이 땅의 평화. - (1992년) 2020. 10. 29.
멈출 수 없는 사랑 신동숙의 글밭(259) 멈출 수 없는 사랑 물이 흐르는 것은멈출 수 없기에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을무슨 수로 막을까 매 순간 흐르고 흘러서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물처럼 멈출 수도 없는 끊을 수도 없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멈출 수 없는 사랑 햇살이 좋은날엔 무지개로 뜬다 2020. 10. 28.
변소 한희철의 얘기마을(127) 변소 언젠가 아내의 친구가 단강에 들린 적이 있었습니다. 와서 지내다 아내에게 화장실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들어가더니 고개를 흔들며 “여기 아닌데” 하며 그냥 나오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배를 잡고 웃었지만 허름한 공간 안 땅바닥에 돌멩이 두 개만 달랑 놓여 있었으니, 도시 생활에 익숙한 친구로선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누구네를 가도 익숙해졌지만 저도 단강에 처음 왔을 땐 변소 때문에 당황했었습니다. 들어가 보니 한쪽 구석에 돌멩이 두 개만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잠시 생각하다 틀리지 않게 일을 보긴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수세식에 익숙해진 터에 돌멩이에 올라앉아 맨땅 위에 일을 본다는 것은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편해.. 2020. 10. 28.
은희네 소 한희철의 얘기마을(126) 은희네 소 은희네 소가 은희네로 온 지는 10년이 넘었습니다. 정확히 그 연수를 아는 이는 없지만 대강 짐작으로 헤아리는 연수가 십년을 넘습니다. 이젠 등도 굽고 걸음걸이도 느려져 늙은 티가 한눈에 납니다.은희네 소는 은희네 큰 재산입니다. 시골에서 소야 누구 네라도 큰 재산이지만 은희네는 더욱 그러합니다. 팔십 연줄에 들어선 허리가 굽을 대로 굽어 고꾸라질 듯 허리가 땅에 닿을 할머니, 은희네 할머니가 온 집안 살림을 꾸려갑니다. 아직 젊은 나이의 아들과 며느리가 있지만 그들조차도 이런 일 저런 일 크고 작은 일에까지 할머니의 손길을 필요로 합니다. 중3인 은희야 제 할 일 제가 한다 해도 이제 초등학교 3학년과 2학년인 은옥이와 은진이 뒷바라지는 역시 할머니 몫입니다. 이런.. 2020. 10. 27.
구멍가게 성당 신동숙의 글밭(258) 구멍가게 성당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답작은 마을의 어둑해진 골목길은 좁은길 구멍가게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어린 아들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카운터를 지키시던 주인 아주머니가 오늘은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텔레비젼을 바라보시며 저녁 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색색깔의 과자봉지와 음료들은 아울러중세시대 성당의 화려한 비잔틴 모자이크가 됩니다. 간혹 종지에 촛불을 켜고 앉으셔서 늦은 밤까지학원에서 돌아오는 딸아이의 밤길을 지켜주기도 하시는 염주알인지 묵주알을 돌리시기도 하는 구멍가게아들이 좋아하는 과자가 풍성한 이곳은 기도의 성당 두 손을 모으신 아주머니가홀로 드리는 저녁 미사를 두고간혹 싫어하는 손님도 계신다지만, 앞으로 과자를 사러갈 때면기도의 성당으로 들어가듯 달콤하고 엄숙한 마.. 2020. 10. 27.
들꽃 한희철의 얘기마을(125) 들꽃 단강에 와서 깨닫게 된 것 중 하나가 들꽃의 아름다움입니다. 곳곳에 피어있는 이런저런 들꽃들. 전엔 그렇게 피어있는 들꽃이 당연한 거라 여겼을 뿐 별 생각 없었는데, 요즘 와 바라보는 들꽃은 더 없이 아름답고 귀하게 여겨집니다. 쑥부쟁이, 달맞이꽃, 달개비, 미역취 등 가을 들꽃이 길가 풀섶에, 언덕에 피어 가을을 노래합니다.때를 따를 줄 아는 어김없는 모습들이 귀하고, 다른 이의 주목 없이도 자신의 모습 잃지 않는 꿋꿋함이 귀합니다. 제 선 자리 어디건 거기 넉넉히 뿌리를 내리고 꽃으로 피어나는 단순함이 또한 귀합니다. 꾸밈없는 수수함은 또 얼마나 정겨운지요. 필시 우리도 들꽃 같아야 할 것, 지나친 욕심과 바람일랑 버리고 때 되면 제자리에서 피어나 들꽃처럼 세상을 수놓.. 2020. 10. 26.
알찬 온기 신동숙의 글밭(257) 알찬 온기 혼자 앉은 방어떻게 알았을까 책장을 넘기면서 숨죽여 맑은 콧물을 훌쩍이고 있는 것을 누군가 속사정을 귀띔이라도 해주었을까 있으면 먹고 없으면 저녁밥을 안 먹기로 한 것을 들릴 듯 말 듯 어렵사리 문 두드리는 소리에마스크를 쓴 후 방문을 여니 방이 춥지는 않냐며 내미시는 종이 가방 속에는노랗게 환한 귤이 수북하다 작동이 되는지 모르겠다며놓아주시는 난로에 빨간불이 켜지고방 안에 온기가 감돈다 가을 햇살처럼알찬 온기에 시간을 잊고서 밤 늦도록 과 의 허공 사이를유유자적(悠悠自適) 헤매어도 좋을 것이다 2020. 10. 26.
전도서 기자는(3) 전도서 기자는(3) 인간은 누구나 늙어가고 또 기력이 쇠하여 어쩌지 못하는 때가 반드시 오기 마련이다. 그 어느 누구도 한때의 젊은 시절의 힘이 늙어 죽을 때까지 그대로 간다고 장담할 수 없으며, 그 자랑으로 한 평생을 자기 영광을 구하며 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권좌의 영광에 취해 교만해지고, 자신의 간교한 지혜에 자만하여 구덩이를 파다가 자신이 그 구덩이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전도서의 기자는 “책은 아무리 읽어도 끝이 없으며 공부만 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한다.”(12:12)고 말하고 있다. 세상에는 알아야 할 것들이 널려 있고, 그걸 쫓아다니면서 사는 것은 피곤한 일이라는 것이다. 최고의 지혜자라고 알려진 전도서의 기자는 지식에 의한 명성을 도리어 거부하고 있으며 그것에 사로잡혀 사는 .. 2020. 10. 25.
되살이 한희철의 얘기마을(125) 되살이 죽을 사람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다시 살아나 이어가는 삶을 단강에서는 ‘되살이’라 합니다. 우속장님을 두고선 모두들 되살이를 하는 거라 합니다. 십 수 년 전, 몸이 아파 병원에서 수술을 했는데 의사가 아무런 가망이 없다고 집으로 데려가라고 했습니다. 개울에서 빨래를 하다 ‘병원 하얀 차’가 마을을 지나 속장님 집으로 올라가는 걸 본 허석분 할머니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곧 무슨 소식이 있지 싶어 집에 와 두근두근 기다리는데 밤늦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다음날 올라가 봤더니,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쇠꼬챙이처럼 말라 뼈만 남은 몸을 방바닥에 뉘였는데, 상처 부위가 형편이 없어 정말 눈 뜨고는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저렇게 몇 달이나 갈까 동네.. 2020. 10.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