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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인문학 산책'48

무진기행 김민웅의 인문학 산책(13) 무진기행 스물 세 살의 청년이 쓴 글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김승옥의 《무진기행(霧津紀行)》은 지난 세월, 수많은 문학 지망생들에게 하나의 교과서처럼 되었습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세려된 문체는 60년대 문학의 우울함을 뚫고 자신을 비추는 투명한 거울이기도 했습니다. 무진은 이름 그대로 “안개 나루터”입니다. 김승옥의 글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훗날, 라는 이름으로 영화가 되기도 한 이 작품은 김승옥이라는 작가가 통과하고 있던 정신적 방황과 급속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 2015. 5. 13.
느려도 옳게 가는 것이 진정 승리하는 길 김민웅의 인문학 산책(11) 느려도 옳게 가는 것이 진정 승리하는 길 여섯 마리의 말이 눈을 찔린 사건을 실화로 삼은 영국 극작가 피터 셰퍼(Peter Shaffer)의 작품 는 심리극이다. 한 소년이 엄격하고 교리적인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와 억압이 말에 대한 기이한 복수로 나타난 사태를 놓고 파고드는 이 연극은, 이성적 설명으로 해석이 가능하지 않는 인간의 복잡한 심리적 현실을 짚어내고 있다. ‘에쿠우스’가 ‘말’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라고 한다면, ‘아반떼’는 ‘전방’ 또는 ‘앞으로 돌진’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연극으로 유명해진 ‘에쿠우스’라는 단어는 그러나 오늘날 자동차의 이름으로 더 대중화되어 있다. ‘아반떼’도 마찬가지다. 두 가지 모두 ‘달린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그 자동차의 제작사인 .. 2015. 4. 28.
어깨 걸고 함께 가자! 김민웅의 인문학 산책(10) 어깨 걸고 함께 가자! 박근혜 정권이 탈진상태에 이르렀다. 그렇게 된 것은 애초의 출발점이 수상했고, 대형 참사 앞에서 기능과 책임을 저버렸으며 부패세력의 정체가 폭로되는 사건들이 쌓이면서 권력의 국민적 토대가 무너져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현 정권의 정치적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세월호 1주기가 되는 시점에서 국민적 고통을 함께 해야 할 대통령이 모르쇠하고 해외로 빠져나가는 상식 이하의 일이 추진되고, 모법의 취지를 짓밟은 특별조사위원회 시행령을 버젓이 내세우는 몰염치는 왜 생기는 것일까? 그것은 집권세력이 얼마나 두려움에 처해 있는가를 보여주는 역설적 반증이기도 하다. 과거의 냉전정치는 공포를 통한 통제장치의 강화가 그 본질이었다. 북에 대한 .. 2015. 4. 17.
애틋한 마음 김민웅의 인문학 산책(9) 애틋한 마음 중국이 18세기 청대의 소설 《홍루몽(紅樓夢)》으로 인간의 정과 그 별리(別離)의 아픔을 그려냈다면, 일본은 11세기 일본 왕실 내부의 애정소설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통해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낸다. 우린, 18세기 중엽 영-종조 시대에 《춘향전(春香傳)》으로 사랑을 그려 냈다. 동아시아 3국이 각기 사랑과 아픔과 그리움, 그리고 이별의 한을 풀어내는 방식이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데, 중국의 경우에는 채워지지 않은 사랑에 대해서 결국 달관하듯 초연히 스쳐 지나면서 표표히 떠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때의 꿈으로 간직하면서 홀로 아파하는 것이다. 일본은 그리움을 유독 깊게 간직한다. 오늘의 영화나 소설에서도 이 그리움은 환상의 세계를 설정해가면서까지 그 그.. 2015. 4. 7.
강 저쪽 편이 부럽지 않은 사람들 김민웅의 인문학 산책(8) 강 저쪽 편이 부럽지 않은 사람들 전철 교각 밑 포장마차에서는 튀김을 비롯해 익힌 어묵이 나무꼬치에 가지런히 꽂혀 있었습다. 빠르게 지나는 자동차의 먼지가 아랑곳없는 그곳에는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이들이 허기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파는 사람이나 사먹는 사람이나 모두 힘겨워 보입니다. 팔지 못하고 남은 것들은 다 어떻게 할까? 저렇게 잔뜩 만들어 놓고 손님이 들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서글픈 염려에 사로잡힙니다. 다른 한편에는 길가에 내놓은 탁자들이 즐비한 채, 횟집, 고기집, 맥주 집 등이 서민들의 휴식처를 만들어 놓습니다. 강남 도심에는 그리도 흔한 카페 하나 없는 초라한 동네에 마을 사람들이 귀가를 잠시 늦추고 아쉬운 한잔들을 기울입니다. 서울 타워 팰리스 부근의 풍경은.. 2015. 4. 2.
무대는 현실과 어떻게 만나는가? 김민웅의 인문학 산책(7) 무대는 현실과 어떻게 만나는가? - 을 공연에 올리면서 - 뉴욕 TKTS, 그리고 명 연기자들 뉴욕 브로드웨이 42가에는 ‘TKTS’라고 쓰인 부스가 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이나 연극표를 40퍼센트에서 50퍼센트까지 할인해서 살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늘 붐빈다. 한없이 기다랗게 늘어선 줄을 보면 미국이 가지고 있는 문화예술의 대중적 기반과 저력이 느껴지곤 한다. 미국인은 물론이고 관광객들도 이 행렬에 한 몫을 한다. 연극표를 사는 외국인들은 드물다. 당연히도 대사를 제대로 알아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기 배우가 등장하면 그를 보기 위해 외국인들도 기꺼이 연극표를 산다. 브로드웨이 연극 무대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은 그래서 연극판에 있다가 영화로 가 인기를 모은 뒤 다.. 2015. 3. 22.
영혼의 산책로 김민웅의 인문학 산책(6) 영혼의 산책로 덕수궁(德壽宮) 돌담길은 담을 허무는 길이다. 그 길을 지나는 이들의 마음에 담이 쌓이지 않는다. 있던 울타리마저 어느새 형체가 사라지고 마는 마술이 펼쳐지는 길목이다. 지구촌 어느 곳에 그런 돌담길이 과연 있을까 싶다. 그러면서도 그 허물어진 자리를 고스란히 들추어내지 않는다. 보이면서 보이지 않는 길을 걷게 한다. 인파(人波)에 섞여 있어도 휩쓸리지 않게 해주고, 홀로 있어도 고독하지 않게 해준다. 지나치면서도 그 자리에 머물게 하고, 머물러 있어도 여전히 걷게 한다. 궁궐과 세속을 지엄하게 갈라놓은 그 담벼락이 기이하게도 무정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다. 또는 높은 곳에서 아래를 꾸짖듯이 내려다보지도 않는다. 한때는 그 앞에서 머리 하나 제대로 들지 못했던 나.. 2015. 3. 16.
몸 말, 몸 글 김민웅의 인문학 산책(5) 몸 말, 몸 글 “머리가 아니라, 손으로 생각한다.” 서체 디자인으로 명성이 높은 안상수 선생과의 대담에서 듣게 된 이야기였다. 손과 뇌는 직결되어 새로운 상상력과 시도를 하는 일종의 수단이자 작업의 현장이기도 하다는 논지다. 우리의 화제는 이내 우리말과 글로 옮아갔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말과 글은 몸 말과 몸 글이다.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만들어지는 ‘ㅇ’부터 ‘ㅁ’과 ‘ㅂ’ 등 입술소리에 이르는 구강구조의 흐름에 따라 그 체계가 잡힌 자음은 물론이고, 음과 양의 구조를 확연히 보여주는 ‘ㅗ’와 ‘ㅜ’ 등은 생명의 기운이 어디에서 비롯돼 어디로 가는지를 일러준다. 이를테면 몸의 인문학과 생명철학이 우리말과 글에 그대로 담겨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기운이 위로 오.. 2015. 2. 15.
바람을 마주보고 가는 바보 김민웅의 '인문학 산책'(5) 바람을 마주보고 가는 바보 “그 양반은 독서에 너무 빠져든 나머지 잠은 안자고 책만 읽는 바람에 머릿속 골수가 다 말려버려 마침내 정신이 이상해지고 말았다.” 문제는 책이었다. 아, 독서도 적당히 하지 않으면 정신건강에 해롭단다. 그걸 염려하다 독서를 하지 않으면 그 반대로 골수가 넘쳐나서 문제가 되려나? 이에 대한 최근 학계의 결론은 어떠한지 궁금해진다. 아무튼 이 사나이는, 기사 소설을 잔뜩 읽은 탓에 마침내 방랑 기사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골수가 동이 나도 그런 결심은 가능한 모양이다. 아니 그러 길래 그런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건가? 이리하여 라 만차의 어느 시골에 사는 영감 “돈 끼호떼”의 기이한 유랑 행각이 시작된다. 돈 끼호떼와 산초 (출처: spotter_nl.. 2015. 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