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희철의 '두런두런'/'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72

끝내 떠날 수 없는 땅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63) 끝내 떠날 수 없는 땅 “예레미야가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나아가서 그 땅에 남아 있는 백성(百姓) 중(中)에서 그와 함께 거(居)하니라”(예레미야 40:6). 동화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전라남도 광주, 그 외곽에 있는 송정리, 그곳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평동이라는 곳에서 군 생활을 했다. 105미리 대포를 쏘는 포대였다. 상무대에서 이론 교육을 받은 이들을 위해 실제로 포를 쏘아줌으로 측지, 사지, 사격명령 등 실제적인 훈련을 받게 하는 부대였다. 부대 안에는 창고를 개조하여 만든 예배당이 있었다. 독립대대, 군종장교는 따로 없었다. 포다리라 불리는 포병생활과 함께 군종 역할을 맡은 나는 매주 한 번씩 광주 시내로 나가 교회를 섭외하.. 2016. 7. 29.
비참한 말로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62) 비참한 말로 “바벨론 왕(王)이 립나에서 시드기야의 목전(目前)에서 그 아들들을 죽였고 왕(王)이 또 유다의 모든 귀인(貴人)을 죽였으며 왕(王)이 또 시드기야의 눈을 빼게 하고 바벨론으로 옮기려 하여 사슬로 결박(結縛)하였더라”(에레미야 39:6-7). 독일 속담 중에 ‘끝이 좋아야 모든 게 좋은 것이다’(Ende gut, alles gut)는 속담이 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자칫 오해를 살 수 있는 말이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그런 가벼운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속담을 보면 ‘끝만’이 아니라 ‘끝이’다. 끝만 좋으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끝이 좋아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과정이 다 중요할 터이지만,.. 2016. 7. 18.
웅덩이에 빠졌을 때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61) 웅덩이에 빠졌을 때 “그들이 예레미야를 취(取)하여 시위대(侍衛隊) 뜰에 있는 왕(王)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에 예레미야를 줄로 달아내리웠는데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고 진흙뿐이므로 예레미야가 진흙 중(中)에 빠졌더라 왕궁(王宮) 환관(宦官) 구스인(人) 에벳멜렉이 그들의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음을 들으니라 때에 왕(王)이 베냐민 문(門)에 앉았더니 에벳멜렉이 왕궁(王宮)에서 나와 왕(王)께 고(告)하여 가로되 내 주(主) 왕(王)이여 저 사람들이 선지자(先知者) 예레미야에게 행(行)한 모든 일은 악(惡)하니이다 성중(城中)에 떡이 떨어졌거늘 그들이 그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으니 그가 거기서 주려 죽으리이다 왕(王)이 구스인(人) 에벳멜렉에게.. 2016. 7. 12.
불신앙과 두려움 사이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60) 불신앙과 두려움 사이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왕(王)에게 아시게 하여도 왕(王)이 단정(斷定)코 나를 죽이지 아니하시리이까 가령(假令) 내가 왕(王)을 권(勸)한다 할지라도 왕(王)이 듣지 아니하시리이다”(에레미야 38:15). 몇 해 전 같은 지방에서 목회를 하는 목회자들과 일본 나가사키 지역을 다녀온 적이 있다. 거론되고 있던 동남아 대신 의미 있는 곳을 찾으면 좋겠다고 한 마디 의견을 보탰다가, 결국은 동행을 하게 됐다. 엔도 슈사쿠(遠藤周作)의 소설 《침묵》의 배경이 된 곳, 일본에는 생각지 못한 시절 뜨거운 순교의 피를 흘린 현장이 있었다. 순교의 피는 너무나 뜨겁다 싶은데 그럼에도 신앙과 상관없다 여겨지는 오늘의 모습, 쉽게 메.. 2016. 7. 4.
말씀을 제 집으로 삼은 사람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59) 말씀을 제 집으로 삼은 사람 “이에 그 방백(方伯)들이 왕(王)께 고(告)하되 이 사람이 백성(百姓)의 평안(平安)을 구(求)치 아니하고 해(害)를 구(求)하오니 청(請)컨대 이 사람을 죽이소서 그가 이같이 말하여 이 성(城)에 남은 군사(軍士)의 손과 모든 백성(百姓)의 손을 약(弱)하게 하나이다”(에레미야 38:4). 오래 전 기억이 맞는다면 장작불 속에서 타 죽어간 개미 이야기를 들려준 이는 솔제니친이 아닐까 싶다. 활활 타고 있는 모닥불 속에 통나무 하나를 집어넣었다. 통나무가 타오르기 시작했을 때 불이 붙은 장작에서 개미들이 떼를 지어서 쏟아져 나왔다. 무심히 던져 넣은 그 장작개비 속에 개미집에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는 황급히 불 붙은 통나무.. 2016. 6. 29.
반쯤은 희망을 품고 반쯤은 두려움을 품은 채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58) 반쯤은 희망을 품고 반쯤은 두려움을 품은 채 “시드기야 왕(王)이 보내어 그를 이끌어 내고 왕궁(王宮)에서 그에게 비밀(秘密)히 물어 가로되 여호와께로서 받은 말씀이 있느뇨 예레미야가 대답(對答)하되 있나이다 또 가로되 왕(王)이 바벨론 왕(王)의 손에 붙임을 입으리이다”(예레미야 37:17). 같은 본문을 읽고 묵상한 다른 이의 글을 읽는 것은 조심스럽기도 하고 유익하기도 하다. 조심스러운 것은 그것이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처럼 자리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말씀과 씨름을 하며 내가 길어올릴 수 있는 묵상의 내용을, 다른 이가 길어 올린 물로 손쉽게 대신하는 우를 범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익함도 크다. 무엇보다도 다른 이의 묵상을 대하며 얻는.. 2016. 6. 21.
내게는 말씀이 있습니다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57) 내게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토굴(土窟) 옥(獄) 음실(陰室)에 들어간 지 여러 날 만에 시드기야 왕(王)이 보내어 그를 이끌어 내고 왕궁(王宮)에서 그에게 비밀(秘密)히 물어 가로되 여호와께로서 받은 말씀이 있느뇨 예레미야가 대답(對答)하되 있나이다 또 가로되 왕(王)이 바벨론 왕(王)의 손에 붙임을 입으리이다”(예레미야 37:16-17). ‘용기’(勇氣)를 사전에서는 ‘씩씩하고 굳센 기운’ 또는 ‘사물을 겁내지 않는 기개’라 풀고 있다. 예수님을 통해 생각하게 되는 용기의 모습이 있다. 풍랑이 이는 밤바다, 어부 출신의 제자들은 놀라 당황했지만, 예수님은 태연히 잠을 주무신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고 평온함을 누리는 것, 그것이 믿.. 2016. 6. 13.
두루마리는 태워도 말씀은 태우지 못한다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56) 두루마리는 태워도 말씀은 태우지 못한다 “이에 예레미야가 다른 두루마리를 취(取)하여 네리야의 아들 서기관(書記官) 바룩에게 주매 그가 유다 왕(王) 여호야김의 불사른 책(冊)의 모든 말을 예레미야의 구전(口傳)대로 기록(記錄)하고 그 외(外)에도 그 같은 말을 많이 더 하였더라”(예레미야 36:32).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어디 그런 모습이 한둘일까만 내게도 떠오르는 모습이 있다. 흔히 미련한 사람을 ‘꿩 대가리’라 부르는 데,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어릴 적 시골의 초등학교에서는 겨울이 되어 눈이 수북이 쌓이면 선생님들이 학생들과 함께 뒷산으로 올랐다. 토끼사냥을 가는 것이다. 한쪽에 그물을 쳐 놓고는 .. 2016. 6. 7.
난도질당한 말씀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55) 난도질 당한 말씀 “왕(王)이 여후디를 보내어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하매 여후디가 서기관(書記官) 엘리사마의 방(房)에서 가져다가 왕(王)과 왕(王)의 곁에 선 모든 방백(方伯)의 귀에 낭독(朗讀)하니 때는 구월(九月)이라 왕(王)이 겨울 궁전(宮殿)에 앉았고 그 앞에는 불 피운 화로(火爐)가 있더라 여후디가 삼편(三篇) 사편(四篇)을 낭독(朗讀)하면 왕(王)이 소도(小刀)로 그것을 연(連)하여 베어 화로(火爐) 불에 던져서 온 두루마리를 태웠더라 왕(王)과 그 신하(臣下)들이 이 모든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그 옷을 찢지 아니하였고 엘라단과 들라야와 그마랴가 왕(王)께 두루마리를 사르지 말기를 간구(懇求)하여도 왕(王)이 듣지 아니하였으며 왕(王)이 왕(王)의.. 2016. 5.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