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진의 '덤벙덤벙한 야그'(25)



불편한 동거가 답이다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으로, 자기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지체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쫓아야 합니까, 품어야 합니까?”


5시간 차를 몰아 경남 합천의 오두막공동체에 도착, 이재영 대표께 처음 건넨 질문이었다. ‘멀쩡한사람들 모이는 교회 공동체도 파괴자의 등장으로, 항상 치명적 위기에 봉착하는데, 30년 넘게, 출소자, 알코올중독자 등과 함께 공동체를 일궈온 그라면 명확한 답변을 해줄거라 믿었다.

 

기대한 바대로 그의 대답은 명쾌했다.


난 내손으로 가라지를 뽑은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공동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품는 것이고, 그가 공동체를 떠나더라도 탕자를 기다리는 아비의 마음으로, 가족의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지요.”

 


경남 합천의 어느 산골에서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는 오두막공동체. 이재영 대표가 공동체에서 운영하는 공방에 오르고 있다. ⓒ이범진



속으로 생각했다. ‘혹시 이분은 치명적 위기를 한 번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이상적인 말을 하는 것은 아닐까?’ 그는 내 속마음을 알아차린 듯, 이야기를 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 그 자체로 사람을 받아들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어요. 나의 선한 의지를 몰라주고, 오히려 훼방을 놓는 사람들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젊을 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밤에 야구방망이를 들고 가서 패 죽일까 여러번 생각했어요. 분해서 잠을 못잤어요. 예수님의 일을 하다가 살인하게 되는 것 아닌가 했죠. 이론적으로는 품어야 한다는데, 너무 미워서 사랑하고 싶지가 않은 겁니다.”

 

이랬던 이재영 대표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충분한 기도의 시간을 확보하면서부터다. 특단의 조치같은 것은 없었고 성령께서 나를 변화시킨 것이라고 했다. 문제를 일으키는 형제들이 밉지 않고 유치해 보이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재롱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고, 비로소 그 사람을 통해서 자신이 변화되었다는 고백을 했다. 그때에서야 그들도 함께 변하기 시작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뺨을 맞으면 맞지 않은 다른쪽 뺨을 들이대고, 5리를 가자 하면 10리를 더 가주는 행동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더 단호하게 말했다.


가라지는 뽑지 마세요. 가라지는 예수님께서 뽑아 가실거예요. 가라지를 뽑는 행위는 마귀적인 것입니다. 분리와 분열의 죄를 짓는 거예요. 말씀은 나에게 들이대는 칼이지, 남에게 들이대는 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너른 마음 때문이었을까. 예배당에 휘발유를 뿌리며 불태우겠다고 난리를 쳤던 가라지도 그는 뽑아내지 않았다. 30년 넘게, 세상의 변방에서 쓰레기 취급을 당하던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그는 복음의 최종적 목적은 인간 존중임을 깨달았다. 인간 존중. 그것은 곧 야구방망이로 패 죽이고 싶던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기적일 테다.



'이 모습 이대로 함께 성전을 이루는 삶'이라는 푯말. 오두막공동체 예배당 앞. ⓒ이범진


 

그런 것에 비하면, 잘난 사람들끼리 모였다고 하는 기독교 공동체가 깨어지는 걸 보면 안타깝다. 극악무도한 죄 때문도 아니고, 그냥 서로 간의 작은 감정 싸움 때문에 풍비박산이 난다. 겉으로는, 교회의 영적 일치이니 이념의 통일이니 개혁이니 좋은 말은 다 갖다붙이며 싸움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려고 한다. 진리 대 비진리의 대결도 아닐 터인데, 그들은 왜 소탐대실의 길로 달음박질하는 것일까


그 싸움에서 이긴다한들, 공동체가 하나되거나 진리의 길에 들어서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말이다. 이겨도 얻을 것 하나 없는 싸움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교회뿐이랴. 나는 정치계에서도 거창한 담론을 꺼내며 자신의 순수성을 대변하고 상대는 더럽다고 말하는 이들을 경계한다.

 

불편한 동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서다. 매일매일 믿음이 흔들리는 청년들도 직장 동료와의 갈등 때문에 원형탈모가 생길정도로 괴로워도 신앙의 힘으로 이겨내고자 힘쓴다. 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의 갈등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붙잡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고상한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킨다. 순수, 순결, 순백, 거룩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불순세력을 만들어 공동체를 분열시킨다.

 

답은 불편한 동거다. 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엽기적이지 않는 한, 한번 인연을 맺은 공동체는 원수를 품는 각오로 이어가야 한다. 그리고 불편한 동거는 오히려 공동체를 건강하게 한다. 세계적인 뇌신경 과학자 마이클 가자니가는 말한다.

 

그냥 제 경험을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저는 자기 생각이 분명한 사람들과 여럿 어울려 있는 것을 즐깁니다. 왜냐하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계속 자극을 받게 되니까요. 그래서 항상 다른 입장에 있는 스태프와 회의를 하죠. 아주 많은 친구들이 세상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방식과는 완전히 반대예요. 그런 똑똑한 이들이 늘 제 주변에 있으면 좋겠어요. 모든 사람들이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그런 곳에는 있지 마세요. 이는 인생에서 기만당하거나 스스로를 기만하는 함정이 됩니다.” (마이클 가자니가, 경향신문, 2015.10.17)

 


불편한 동거의 기간을 견디지 않고, 어떻게, 바로 발 밑에 감추어진 보배를 찾겠다는 것인가. 오두막공동체 예배당 ⓒ이범진



궁금하다. 불편한 동거의 기간을 견디지 않고, 어떻게, 바로 발 밑에 감추어진 보배를 찾겠다는 것인가.



이범진/월간 '복음과상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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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진의 '덤벙덤벙한 야그'(23)


40대가 된 '바보' 빨대맨


제가 ‘국민학교’ 때입니다. 우리가 “삼강돼지바” 하면 반사적으로 “꿀꿀!” 외치던 바보가 있었습니다. 저보다 다섯 살은 많아 보이는 ‘중딩’이었습니다.(물론 학교를 다니진 않았습니다) 빨대를 가지고 다녀 ‘빨대바보’라고도 불렸습니다.



'중딩'이었던 그가 언제 '40대'가 되어 30대인 내 앞에 다시 나타났다.



얼마 전, 홍대 버스정류장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평범한 주택가였던 홍대는 휘황찬란한 도시가 되었는데 그는 여전히 빨대를 쥐고 있었습니다. 40대가 된 그는 머리카락도 많이 빠졌고 배는 더 나왔습니다. 국민학교 때의 추억을 소환해주니 고마우면서도 왠지 미안합니다.


그는 버스정류장에 앉아 자기에게 가까이 오는 이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면 욕을 하며 사람들을 쫓아내지만, 점점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움찔움찔 다가오고 있는 게 보입니다. 저는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여지없이 터져 나오는 욕. 


“저리가 씨발놈아. 보지마. 보기만 해봐. 오지마. 가!” 


저는 그가 무섭지 않았습니다. 원래 사람을 공격하는 ‘바보’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반갑습니다. 기다리던 버스는 안 오고, 그의 곁에 가서 앉았습니다. 더 이상의 욕은 하지 않습니다. 계속 머물다가 저도 모르게 그에게 말을 붙였습니다.


“나 그 빨대 하나만 줘요.”

 

한바탕 욕바가지를 얻어먹을까 했는데, 웬일일까요. 지금껏 주변 사람들에게 욕을 퍼부은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해맑은 어린아이의 웃음을 지으며 “안돼요, 아저씨” 합니다. 그 미소가 너무 천진난만해서 순간 ‘귀엽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40대 아저씨가 이렇게 오염되지 않은 채 웃을 수 있다니. 그렇게 빨대 하나를 갖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게 뭐라고, 안 주니까 저도 오기가 생겼습니다.) 기다리던 버스가 왔고, 결국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빨대 하나를 갖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버스 안에서, 멀어지는 그를 보며 ‘과격한 욕설’과 ‘해맑은 미소’ 사이의 어떤 아련함이 밀려왔습니다. 많이 맞았을 겁니다. 온갖 못된 일들을 다 당했을 겁니다. 약 30년 전, 그보다 훨씬 키가 작았던 제 친구들한테도 곧잘 뒤통수를 얻어맞곤 했으니까요. 그래서 배운 말일 겁니다. 저 욕은 말입니다. 자기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으로 배운 욕일 겁니다. 해맑은 미소를 지키는 유일한 방어전략이 사람을 내쫓는 ‘욕’이어야 한다니. 누구보다 사람 곁이 그리워 해맑은 미소를 감추고 있는 그에게 유일한 생존전략이 거친 욕이라니, 비극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지적장애인 아담과 함께하며 비로소 예수를 알게 되었다 고백했습니다. 도널드 밀러는 어느 아이가 손가락을 튕기며 온 신경을 거기에 집중하고 있는 걸 보고, 그 안에 우주 창조의 비밀이 담겨 있을 수 있다 예상하기도 합니다. 경남 합천에서 출소자, 알코올중독자, 지적장애인 들과 함께 30년 넘게 오두막공동체를 이끌고 있는 이재영 대표는 이들을 “감추인 보배”라고 표현합니다. 


그들의 말을 100프로 이해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40대가 된 ‘빨대맨’은 30년이 지나도록 ‘보배로움’을 잃지 않았고, 그 미소는 분명 형용 못할 위로를 주었습니다. 동네에 한 명쯤은 꼭 있었던 ‘바보’들. 그들은 정말 ‘다의 배’들이었나 봅니다. 그가 멀어지는 버스 안에서 좀 후회가 되었습니다. 한마디 더 건넬 걸…. 


“형! 그때는 미안했어.”


P.S. 그는 크라잉넛의 1999년 발매앨범 중 ‘빨대맨’이라는 노래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나는 오늘도 빨대와 함께 미친 세상을 비웃을 꺼요~”






빨대맨


사람들은

나를 보고 웃어

나도 그냥 웃어

나는 빨대맨


구름처럼 모여

바람처럼 가는

나는 떠돌이

나그네처럼


엄마우유가 그리워지면

나는 빨대를 빤답니다요

랄라 랄라라

랄라 랄라라

랄라 랄라


나는 빨대맨

나는 빨대맨

나는 빨대맨


모두 나를 보고

웃고있네

구름처럼 모여

바람처럼 가는

나는 떠돌이

나그네처럼


나는 오늘도

빨대와 함께

미친 세상을

비웃을꺼요

(꿈인줄 몰라선가)

(떠도는 사람이여)

(그리움 찾아서)

(친구를 버리고)


(사람을 버리고)

(누군가를 기다림은)

(허무에의 길)


(이 마음 안다면)

(별도 새도 달도 꽃도)

(눈물을 흘리리@)


나는 빨대맨

모두 나를 보고

웃고있네

구름처럼 모여

바람처럼 가는


나는 떠돌이 나그네처럼

나는 오늘도

빨대와 함께

미친 세상을

비웃을꺼요


엄마우유가 그리워지면

나는 빨대를 빤답니다요


빨대맨이 나는 좋아

빨대 흘리게 달란 말이야


엄마우유가 그리워지면

나는 빨대를 빤답니다요


나는 빨대맨

나는 빨대맨

모두 나를 보고

웃고있네

엄마우유가 그리워지면

나는 빨대를 빤답니다요

구름처럼 모여

바람처럼 가는


나는 떠돌이 나그네처럼


이범진/ <복음과상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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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진의 덤벙덤벙한 야그(9)

 

악당들의 사랑이 부럽다

 

 

최근 이사한 집은 전철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10분정도 더 들어가야 합니다. 가파른 길이라 마을버스가 꽤 힘겹게 오르내립니다. ‘달동네라 불리기도 합니다. (실제로 달동네슈퍼라는 이름의 슈퍼가 있습니다) 집 근처에 그 흔한 편의점 한곳 없어 처음엔 좀 불편했는데요. 작은 구멍가게가 두 곳이나 있고, 꽤 늦은 시간까지 어두운 골목을 밝혀줍니다. ‘아는 척을 해주며 인간적 관심을 보이는 주인할머니도 정이 가고요. (얽힌 이야기) 마을버스 운전하는 아저씨들 얼굴도 이젠 다 외울 정도.

 


이렇게 예쁜 동네는 아닙니다만, 느낌은 비슷합니다. ⓒ이범진



이런 곳이 사람 사는 곳이구나! 30년 가까이 살던 동네를 떠나와 새로 정착한 이 동네에 정을 붙이려는 중이었습니다.

"사람 좀 고만 태워요!”


출근길 마을버스에서 누군가 외쳤습니다
. 사람이 좀 많아 저도 좀 예민해진 상태였는데요. 그래도 뭐, 우겨넣으면 몇 명 더 탈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몇 명의 탄식이 겹치고, 아우성이 됩니다.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어우, 밀지마세요!”

아침 출근길부터 기분이 나빠집니다. 애써 이런 게 사람 사는 거지~’하며 화를 억눌러봅니다.

 

조금 늦은 퇴근길. 다행히 여유가 있는 마을버스. 갑자기 아주머니의 느닷없는 고함소리가 들립니다.

"내 아들 딸 같아서 쳐다봤는데.. 이 싸가지 없는 것들아. 버스 안에서 그 지랄하고 있냐? 내 자식이었으면 너넨 벌써 얻어터졌다 ... 아유~”


술이 조금 취한 듯한 어느 아주머니가 젊은 커플에게 딴죽을 걸고 있었습니다
. 사실 스킨십을 엄청 심하게 한 것도 아니었는데요.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게 화근이었습니다. 당황한 듯한 커플. 공교롭게도 아주머니와 같이 내린 커플. 급기야는 싸움이 붙었습니다.

이런 게 사람 사는 걸까요?

 

엄기호 작가(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 단속사회)의 강연을 들은 이후라 마음은 더 복잡했습니다. 엄 작가는 강연에서 을 강조했습니다. 공동체의 다른 말이었는데요. 대한민국 사회의 무너진 시스템 안에서 우리가 더 잘 살아내기 위해선 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만 남고 이 사라진 우리네 가스러진 삶을 진단하며, ‘으로 위기를 돌파하자는 말을 전했습니다. (그의 책 단속사회에 잘 나와 있습니다.)

 

마을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으며 을 생각합니다. 정감 넘치는 사람들 모여 여기저기 아나바다운동의 거점이 있는 활발한 동네이지만, 동시에 서로를 필요이상으로 밀쳐내는 곳. ‘의 반전이 있는 곳. 어쩌면 그냥 가장 못사는 동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절망의 끝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는 삶들이 모인 자존감 낮은 곳. 곁이 있는 삶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걸까요?


악당들의 진정성


반면,곁을 가장 잘 활용(?)하는 사람들은 부자들과 권력자들입니다. 가장 최근의 사건으로는 이완구 국무총리와 야당의 우윤근 원내대표가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의 재회를 한 것인데요. 우 원내대표는 정말 저도 마음이 아팠다. 도와드리지 못해서라며 말을 잇지 못한 채 눈물을 보였고, 이를 이완구 국무총리가 토닥이며 자신도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습니다. ㅅㅂ 정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장면입니. 이완구 총리의 수많은 비리와 의혹을 파헤치려 했던 건 쇼였을까요? 어쨌든 이 장면을 보고 많은 이들이 비웃고 비아냥거렸지만, 사실 전 소름이 끼치더라고요. ..이 느껴졌거든요.

 


어쨌든 이 장면을 보고 많은 이들이 비웃고 비아냥거렸지만, 사실 전 소름이 끼치더라고요. 진.정.성이 느껴졌거든요.(경향신문, 2015.2.25)

 

 

흔히 우리는 저들의 우정과 연대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영화나 드라마에서 악당들이 서로의 욕심을 주체 못하고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장면을 너무 많이 봐서 그렇습니다. 실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뇌물을 주고, 가족의 대소사를 살뜰하게 챙기며 헌신적으로 자신의 곁을 챙깁니다. 다른 이라 할지라도 상대의 아픔에 공감하며, 그를 위해 고결한 눈물 한 방울 흘릴 줄 아는 이들입니다.(비꼬는 거 아님)

 

전두환의 추징금을 걷는 과정에서 경매로 나온 일부 미술품들을 측근들이 사서 다시 돌려주었다는 일화도 유명하지 않습니까? 악당들의 이야기지만 분명 감동적입니다. 단순히 권력이 무서워서였을까요? 서로를 정말 사랑한 겁니다.

 

엄 작가도 자신의 목격담을 이야기합니다.

 

강남의 H고등학교 다니다가 공부 잘 못해서연세대 온 애들이 있습니다. 열댓 명씩 몰려다니면서 서로를 너무 사랑합니다. 새로운 사람을 사귈 필요를 못 느끼죠. 또한 자기네 동네를 너무 사랑합니다. 정말 사랑입니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부럽습니다. 제 주변엔 하나같이 애정결핍증, 2, 관심병 환자들인데요. 상처는 왜 그리도 많고, 왜 다 가난뱅이들일까요? 4대보험 적용되는 곳에서 일하는 친구는 극히 드물고, 자존심인지 잔존심인지 모를 것을 지키느라 싸우고 삐치고. 그러다 술 한 잔 기울이며 쌓였던 감정을 친구 아이가하며 넘어가는 데, 우정이나 사랑 때문이 아니라 회피인 경우가 많죠. 그런데도 찌질함을 감추기 위해 민주주의’ ‘인류 구원따위의 꽤 거창한 말로 연막을 칩니다. 제 친구들의 이야기이자, 제 이야기입니다.

 

오른쪽이의 조소 "흥, 자기희생이라니, 웃기고 있군."

기생수에 등장하는 사립탐정 쿠라모리 씨도 그런 사람 중 하나입니다. 기생생물에게 고용되어 주인공 신이치를 미행하고 관찰하는데요. 말이 사립탐정이지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드러난 신이치의 정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해주겠다며 비장함을 감추지 못하는데요. 그런 그를 신이치는 죽이지 않고 설득해보기로 합니다. 기생생물이 침투한 것,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 인간에게 들켜도 기생생물에게 들켜도 안전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요. 이야기를 듣고 심하게 동요하던 쿠라모리 탐정. 이내 냉정한 표정을 되찾는데요.




 

쿠라모리 그래서 날더러 어쩌라고?”

신이치 우리에 대해 아무 말도 말아주세요. 이쪽 사정은 대강 알았을 테니. 더 이상 뒤를 밟거나 하지 말아주세요. 부탁입니다!”

 

 

잠시 고민하던 쿠라모리, 갑자기 표정을 비장하게 바꾸며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네 얘기로는 아직 괴물들이 더 있다는 건데? 그놈들을 그냥 놔두라고? 만약 정말 인류를 위해서라면 네가 직접 나서야지. 설령 실험대상이 되는 한이 있어도!”

 

구원의 사도 나셨습니다. 한마디 더 덧붙이는데요.

 

"자신을 희생하는 한이 있어도 인류 전체를 생각해야지. 그게 인간 아냐?”

 

듣다 못한 오른쪽이가 그를 죽이려드는데요. 신이치가 말리는 통에 한 번 더 참습니다. 그리고 평소대로 논리를 이용해 쏟아내는 말.

 

"흥, 자기희생이라니, 웃기고 있군. 잘 들어! 네게 살 권리가 있듯이 우리 기생생물에게도 살 권리가 있다. 아무튼 우리는 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한다. 신이치가 실험대상으로 나서는 건 내가 허락 못해! 때문에 네가 내 적이 되겠다면 가차 없이 죽이겠다.”

 

이어지는 오른쪽이의 감동 대사. 평소와 달리 감정에 호소합니다.

 

"이 녀석을 잘 봐. 아직 10대인 고등학생이다. 너에 비하면 한참 어린애지. 그런 어린애가 어머니를 잃고 시체의 산을 넘고, 온갖 참혹한 지경을 당하고서도 꿋꿋이 살아가려 애쓰고 있다. 가엾지도 않나?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봐라. 너 같으면 견딜 수 있겠어?”

 

단지 생명 유지를 위해 전략적 공존을 하고 있던 신이치와 오른쪽이’. 이제는 운명 공동체(共同體)가 되어서일까요? ‘오른쪽이는 평소대로 논리적·과학적 접근을 하지 않고, 감정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한 몸(?)을 이룬 그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되는 과정도 기생수의 관전 포인트입니.

 

다시 우리의 모습으로 시선을 돌려봅니다. 하나같이 육식동물에 쫓기다가 벼랑 끝에 몰린 초식동물의 모습들을 하고 있습니다. 아노미. 〔곁〕에 누구를 두느냐에 따라 삶과 죽음이 갈릴 수도 있는 처지여서 일까요? '오른쪽이'의 조언처럼 “입장을 바꿔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은 무엇일까요? 초식동물들은 불안에 떨다가 이렇게 서로의 곁을 밀쳐내며 궤멸하게 될까요? 다음 글에서는, 갑의 횡포만큼이나 심각한 을의 횡포에 관한 절망을 나누겠습니다.

 

이범진/월간 <복음과상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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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일의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현실(2)

신앙은 국적 교체의 사건이다

 

대학 시절,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리 똑똑하지도 총명하지도 않았던 친구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의 권유로 이 친구가 맑스의 자본론 세미나에 참여하였고, 근현대사 공부 모임에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세미나가 끝난 후부터 이 친구의 삶이 새로워진 것입니다. 제국의 음료라 하여 커피를 거부하고 민족의 차 율무를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제국의 언어라 하여 영어를 거부하고 민족 음악과의 만남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흐리멍덩하던 눈동자에 초점이 잡히고, 집회 현장에 단골 참석자가 되었습니다. 불과 세미나 몇 시간 참여한 것 밖에 없는데 존재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친구들을 맑스의 세례를 받은 자라 칭했습니다.

맑스의 세례는 분명코 강력한 힘이 있었습니다. 자기만을 알던 존재가 맑스의 세례를 받은 이후부터는 말끝마다 민족과 역사를 언급했습니다. 자기 한 몸을 민족과 역사의 제단에 바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타자를 위한 헌신적인 삶을 추구하며 실천했습니다. 저는 그때 맑스의 세례를 받은 자의 놀라운 변화를 목도하며 예수 세례의 의미를 물었습니다.

(출처: Praytino(http://www.flickr.com/photos/prayitnophotography)

 

세례는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왔던 옛 삶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와 함께 거듭 태어날 것을 다짐하고 결단하며 증거하는 의식입니다. 공동체의 지체들 앞에서 공개적인 세례를 받음으로서 이제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 예수의 사람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이 의식의 진중함과 엄중함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으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세례 이후에 이전과는 다른 존재의 변화가 있는가를 묻게 되면 참으로 궁색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예수를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은 하고 있지만 실상은 이 시대를 장악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충실한 신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기심과 탐욕으로 중무장된 이 시대의 주류 문화와 주류 가치에 동일하게 종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절대적 충성의 대상으로 하나님을 모시는 사건입니다. 하나님 외에 내 인생을 지배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상대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내가 유일하게 존재를 다해 충성을 바칠 국가로 모시고, 예수만을 내 인생의 유일한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처럼 신앙은 국적 교체와 주인 교체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가지는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이전과는 달리 내 인생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묻게 되고, 내 인생의 주인 되신 예수님이 원하시는 바대로 인생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뚜벅뚜벅 걸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19세기 말에 이 땅에 선교사님들이 들어왔을 때 당시 조선 사회는 신분제 사회였고 가부장제 사회였습니다. 그때 자신이 양반이고 남성이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조선 사회가 추구하던 가치와 이데올로기에 근거하여 양반으로서의 특권, 가부장으로서의 특권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조선의 가치와 문화, 이데올로기를 신봉하고 순응하는 조선의 백성으로 충실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복음을 접하고 기독교 복음을 믿고 신앙하는 자가 되기로 결단하는 순간, 이전의 삶을 그대로 유지하며 향유할 수는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믿는 기독교 복음에서는 인간을 위계화하지 않고 모든 인간을 평등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복음이 말하는 인간론의 핵심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것입니다. 양반도 천민도, 남자도 여자도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복음은 하나님의 형상이 그 안에 있음으로 인해 인간 모두가 존귀하고, 인간 상호간에는 평등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수납하는 순간, 천민과 여인에 대해 그동안 취해 왔던 태도를 지속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조선의 백성으로 살아갈 때에는 양반이기 때문에 집에 있는 노비를 함부로 대하는 것이 문제가 안 되었고, 남성이기 때문에 여성을 함부로 하대하는 것이 문제가 안 되었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자 결단하는 순간부터는 집에 있는 노비와 여인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한 자세를 지속하는 것이 인생의 주인 되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앙은 단순히 일요일에 어디 가서 예배드리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 인생의 가치관과 세계관과 삶을 새롭게 전환시켜내는 힘인 것입니다.

양진일/가향 공동체 목사, 하나님 나라 신학 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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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일의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현실’(1)

신앙의 의미를 묻는다

 

겨울 한복판, 1월 중순이지만 날씨가 화창합니다. 햇살의 따사로움만으로 판단하자면 초봄이나 진배없습니다. 따스한 햇살의 기운으로 인해 몸이 노근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편안하지 못합니다. 오늘 이 땅의 처해있는 현실과 그 안에서 표류하고 있는 교회로 인해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오늘 한국 교회에 대한 한국 사회의 시선은 굉장히 차갑고 냉소적입니다. 비판을 뛰어넘어 비난과 조소가 가득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동안 한국 교회는 이런 신앙인들을 좋은 신앙인이라고 칭찬해 왔습니다. 교회 예배에 성실하게 참여하고 말씀을 신실하게 읽고 기도 한 번 했다고 하면 세 시간 스트레이트로 하고 교회 봉사 열심히 하는 사람, 거기에 전도에 대한 열심까지 있으면 금상첨화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간직한 이는 좋은 신앙인이었고, 반대의 모습을 간직한 이는 신앙이 안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기준에 근거하여 신앙인들 사이에서는 자기도 모르는 신앙의 계급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한국 교회 안에는 이 기준에 부합한 신앙 좋은 사람이 수십만, 수백 만 명은 족히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수백, 수천 번 드린 사람하고 예배를 한 번도 드려보지 않은 사람, 설교를 수백, 수천 번 들은 사람, 성경을 몇 독 한 사람하고 성경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의 가치관이 다르지 않습니다. 세계관이 다르지 않고 물질을 소비하는 방식이 다르지 않고 자녀를 양육하는 모습이 다르지 않습니다. 타인을 배려하는 모습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을 간파한 세상은 그렇게 많은 예배에 참여하고 설교 말씀을 듣고 성경을 묵상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신앙을 통해서 어떤 변화가 있는가에 대해서 정직한 답변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고 있는 말씀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또 운동력이 있어서 우리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고 하고 속에 있는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고 존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변화시킨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존재가 변화된 사람이 너무 부재한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말씀으로 인해 새로워지지 못한 우리의 삶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이 아닌 거짓으로 조롱받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로 인해 세상은 우리에게 냉정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도대체 예수가 인생의 주인 되신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기독교 역사를 보면, 신앙인 한 명이 탄생하는 것은 단순히 교인 한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공공선을 증대시키는 사건이었습니다. 아내와 자녀에게 폭력적이었고 입만 열었다 하면 거짓말과 사기를 쳤던 한 사람이 말씀에 타격을 받아서 회심하게 되면 회심한 이는 그 사람이지만 그 존재의 변화로 인해 주변에 있는 이들이 많은 유익을 누렸습니다. 그 존재의 변화로 인해 폭력에 시달리던 아내와 자녀들이 구원을 받았고, 거짓말과 사기로 피해를 입었던 친구와 이웃들이 행복해졌습니다.

신앙인이 많아진다고 해서 국내총생산량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국내총사랑량, 국내총자비량, 국내총긍휼량, 국내총정직량, 국내총거룩량, 이웃에 대한 배려량 등은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예수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는 신앙인들이 개신교, 가톨릭 합쳐 1,500만 명 가량 되는데 그들로 인해 한국 사회의 공공선이 증대된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한국 사회는 이기심과 탐욕, 욕망의 각축장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회가 우리에게 신앙의 의미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주장이 아닌 삶으로 신실하게 답변해야 합니다.

 

양진일/가향 공동체 목사, 하나님나라신학 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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