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의 ‘짭조름한 구약 이야기’(32)

 

성서는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1)

- 정말 소돔은 그래서 심판받았을까? -

창세기 19:1-11 에스겔 16:49-50

 

 

동성애와 한인교회

 

개신교회에서 동성애에 대해서 설교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냥 적당히 위험한 정도가 아니라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대부분의 한국 개신교인들은 동성애를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도 전에 단칼에 ‘죄’라고 규정합니다. 한국 개신교인들은 ‘차별금지법’ 전체를 강력하게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거기에 성적 지향에 근거한 차별을 금하는 내용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곳 미국에서는 지난 6월에 연방대법원이 동성 간의 결혼이 합헌이라는 판결을 내린 후로 한인교회들이 그 결정에 대대적으로 반발하고 있습니다. 또 3월에 미국장로교(PCUSA)가 동성결혼을 인정하는 결의를 했다고 해서 한인교회들이 줄줄이 교단을 탈퇴하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실제로 탈퇴한 교회는 몇 안 되지만 이런 현상은 장로교뿐 아니라 다른 교단에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제자회에서도 남미와 아시아인 여러 교회가 이 때문에 교단을 떠났습니다. 대부분의 한인교회들은 동성결혼뿐 아니라 동성애 자체를 반대합니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동성애라는 주제를 설교에서 진지하게 다뤄야겠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해왔습니다. 단편적으로는 설교나 성경공부 때 여러 번 언급했지만 맘먹고 얘기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이 문제가 정말 한인들에게 그토록 중요한 문제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한인교회들은 이 문제를 ‘순교의 각오’ 또는 ‘십자군 정신으로’ 반대하고 싸워야 한다고 목소리 높이지만 한인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그리 뜨거운 이슈는 아닙니다. 유독 개신교회만 들끓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유독 한인들 가운데 동성애자 숫자가 적어서 그럴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 한인이라고 해서 동성애가 적겠습니까. 동성애자의 비율이 인종에 따라 다르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습니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인구의 10% 정도가 동성애자라고 하는데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동성애자는 상당히 많으며 그 비율은 인종과 무관합니다. 그러니 분명히 한인 중에도 다른 인종들만큼 동성애자가 있을 겁니다. 다만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고 쉬쉬하며 감추고 있을 따름입니다. 손가락질 받는 게 두려워서 숨기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속으로 앓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달 25일에 금요일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동성애 세미나를 합니다. 잘은 모르지만 남가주에서는 처음일 겁니다. 미국 한인교회 중에서 처음일지도 모릅니다. 처음이라 자랑스럽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만큼 한인교회에서 이 문제를 깊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오늘과 다음주일에 성서가 동성애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서 설교합니다. 세미나를 하기 전에 성서가 이 주제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를 따져보자는 겁니다. 세미나 때는 이를 정리해서 작은 책자로 만들어 참석자들에게 나눠주려고 합니다.

 

소돔은 정말 동성애 때문에 심판받았나?

 

대부분의 한인기독교인들은 망설이지 않고 동성애를 ‘죄’라고 단정합니다. That’s it! 그걸로 끝입니다. 더 생각해볼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죄는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하고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동성애는 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동성애자도 사랑하시므로 회개하고 구원받아야 합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러 있지만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이만하면 그래도 뭔가 생각하는 편에 속합니다. 단숨에 죄라고 단정하고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동성애자는 ‘회개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회개’는 “제가 동성애자인 것을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걸 가리키지 않습니다. 동성애자에서 이성애자로 바꿔야 회개한 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동성애자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게 아니라 그가 이성애자로 바뀌어야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혹자는 “하나님은 동성애자도 ‘사랑’은 하시지만 그가 ‘구원’ 받으려면 이성애자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게 말도 안 된다는 건 더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동성애를 반대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이 들이대는 ‘최종병기’는 성서입니다. 성서가 동성애를 죄라고 가르친다는 겁니다. 동성애가 죄라는 건 사람에게 나온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고 성서의 가르침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럼 성서는 정말 동성애를 죄악시할까요? 언뜻 보면 그렇게 보입니다. 성서는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동성애에 대한 성서구절들을 잘 읽어보면 이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잘 읽어보면 성서는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답을 주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성서가 동성애에 대해 말하는 구절을 하나하나 읽어보겠습니다. 저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쪽과 인정하는 쪽의 주장을 가급적 객관적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어느 편이 옳고 어느 편이 그르다고 판단하지 않겠다는 얘기입니다. 그 판단은 여러분이 내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설교에는 낯선 방식이지만 오늘은 그렇게 하겠습니다.

 

Lot leaving Sodom, Nuremberg Chronicle (1493)

 

동성애 얘기를 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본문은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입니다. ‘소돔’이란 말에서 ‘항문성교’를 가리키는 ‘sodomy’라는 단어가 생겨났을 정도니 대표적인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야훼가 파견한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렀을 때 롯이 그들을 자기 집에 맞아들여 저녁을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소돔의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모든 남자가 롯의 집으로 몰려와서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오늘 밤에 당신의 집에 온 그 남자들이 어디에 있소? 그들을 우리에게로 데리고 나오시오. 우리가 그 남자들과 상관 좀 해야 하겠소.” 상관하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지요? 이 부분을 직역하면 “우리가 그 남자들을 알아야겠소.”(we may know them)가 됩니다. 히브리어 ‘알다’라는 동사 ‘야다’에는 ‘성관계를 갖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남자들이 몰려와서 남자들을 내놓으라며 그들을 ‘알아야겠다’고 말하니 이는 분명 성관계를 갖겠다는 뜻입니다.

 

이에 롯은 “여보게들, 제발 이러지 말게. 이건 악한 짓일세.”라면서 애원했지만 그들은 듣는 척도 안 헸습니다. 그래서 롯은 무리의 주장보다 더 엽기적인 제안을 합니다. “이것 보게, 나에게 남자를 알지 못하는 두 딸이 있네. 그 아이들을 자네들에게 줄 터이니 그 아이들을 자네들 좋을 대로 하게. 그러나 이 남자들은 나의 집에 보호받으러 온 손님들이니까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게.”라고 말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손님을 환대하고 그들이 피해당하는 걸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딸들을 욕정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무리에게 내놓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불행 중 다행으로 천사들이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해서 비극적인 사태가 실제로 벌어지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하늘에서 내려온 불벼락을 맞아 멸망당합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에 근거해서 이들이 동성애자들이기 때문에 멸망당했다고 여기는 겁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소돔 사람들은 동성애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말입니다.

 

그렇다고 칩시다. 소돔 사람들이 동성애자라서 심판받았다고 치자는 말입니다. 그리고 생각해봅시다. 롯의 집에 몰려온 무리는 이성애자였을까요, 동성애자였을까요? 남자를 내놓으라고 한 걸 보면 동성애자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롯이 이들에게 자기 딸들을 내주겠다고 제안한 것을 보면 이들은 이성애자였다고 봐야 할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롯은 이들의 성적지향을 오해하고 쓸데없는 제안을 한 걸 테니 말입니다. 혹시 이들은 양성애자였을까요? 이론적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몇 명인지는 모르지만 그 많은 무리가 모두 동성애자나 양성애자였을까요? 그런 사람들만 몰려왔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제 생각일 따름입니다. 제 생각이 여러분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점은, 이 얘기를 읽을 때 어떻게 가장 먼저 ‘동성애’라는 단어를 떠올리냐는 겁니다. 동성애나 이성애보다는 ‘강간’이란 단어가 먼저 떠올라야 하지 않습니까? 이들은 나그네를 ‘강간’하려고 몰려온 무리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강간’은 상대방의 의사에 반해서 강제로 성관계를 갖는 겁니다. 이는 동성애, 이성애, 양성애 등의 성적 지향과 무관하게 인권을 침해하는 극악한 범죄입니다. 롯의 집에 몰려든 무리는 타지에서 온 나그네들을 강간하겠다고 모여들었던 겁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읽을 때 ‘동성애’나 ‘이성애’가 아니라 가장 먼저 ‘강간’을 떠올려야 맞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여기서 ‘강간’이 아니라 ‘동성애’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 머릿속이 어떤지 궁금합니다. 이는 살인사건이 났는데 살인 그 자체에 집중하지 않고 사용한 무기가 미국산인지 중국산인지를 따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에스겔은 다르게 말한다!

 

그러면 소돔의 ‘죄’에 대해서 다른 성서구절들은 어떻게 말할까요? 오늘 읽은 에스겔 16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동생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다. 소돔과 그의 딸들은 교만하였다. 또 양식이 많아서 배부르고 한가하여 평안하게 살면서도 가난하고 못 사는 사람들의 손을 붙잡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교만하였으며 내 눈 앞에서 역겨운 일을 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그것을 보고는 그들을 없애 버렸다.

 

에스겔 예언자는 소돔의 죄에 대해 말하면서 ‘동성애’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대신 ‘교만’과 ‘자기들은 배부르게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은 죄’를 말합니다. 그 죄가 하나님에게 역겨웠다는 겁니다. 물론 소돔 사람들이 동성애의 ‘죄’도 저질렀는데 에스겔 예언자가 그걸 간과했거나 무슨 이유로든 언급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저지른 모든 죄를 열거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돔이 동성애 때문에 심판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이 구절만큼은 진지하게 읽어야 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소돔의 죄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그걸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구절만 선택해서 강조하고 자기 생각에 반하는 구절은 없는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또한 예수님도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라고 열두 제자를 파송하시면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그 집에 들어갈 때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래서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알맞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집에 있게 하고 알맞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되돌아오게 하여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려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는 견디기가 쉬울 것이다(마태복음 10:12-15).

 

여기서 예수님은 ‘영접’ 또는 ‘환대’에 대해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러 온 사람을 영접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심판을 받을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도 ‘동성애’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돔과 고모라가 동성애와 무관했다고는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은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 또는 ‘환대하지 않는 사람들’ 얘길 하시면서 소돔과 고모라를 언급하셨다는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는 나그네(여기선 복음 전파자)를 영접하지 않은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어느 편의 해석이 옳은지는 여러분이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의 해석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거룩함’과 동성애

 

다음으로 레위기와 신명기에 나오는 동성애 관련 구절들을 읽을 차례인데 그 전에 먼저 읽어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너희의 하나님인 나 야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위기 19:1-2).

 

야훼가 거룩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도 거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야훼가 거룩하다는 말은 이해할 수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해야 한다는 말은 얼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처럼 거룩해질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불가능한 요구를 하고 계신 걸까요?

 

히브리어로 ‘거룩하다’는 말은 ‘카도쉬’입니다. 이 말은 ‘분리하다’ 또는 ‘구별하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성결하다거나 장엄하다는 뜻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말은 하나님이 사람과 구별되고 분리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이스라엘도 거룩해야 한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말이 사람과 분리되어 있다는 뜻이라면 어떻게 사람이 거룩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사람이 어떻게 똑같이 거룩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은 야훼 하나님이 거룩하듯이, 곧 하나님이 사람들과 구별되고 분리되어 있듯이 이스라엘도 거룩해야 한다, 곧 다른 종족과 구별되고 분리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엿새 동안 창조를 마치고 하나님은 안식일을 ‘거룩하고 복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안식일이 거룩하다는 말은 그 날이 다른 날들과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엿새와는 다른 날이란 뜻입니다. 또 성전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미크다쉬’입니다. 이 말은 ‘카도쉬’에서 파생된 말로서 ‘거룩한 곳’이란 뜻입니다. ‘미크다쉬’의 뜻은 단순합니다. 성전이 성결하고 왠지 모르게 거기 들어가면 엄숙해지는 신비한 곳이란 뜻이 아니라 단순히 다른 장소들과 ‘구별’되고 ‘분리’된 곳이란 뜻입니다.

 

이런 전제를 갖고 레위기와 신명기의 동성애 구절을 읽어야 합니다. 먼저 레위기부터 읽어보겠습니다.

 

너는 여자와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안 된다. 그것은 망측한 짓이다(18:22).

남자가 같은 남자와 동침하여 여자에게 하듯 그 남자에게 하면 그 두 사람은 망측한 짓을 한 것이므로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 죄 값으로 죽는 것이다(20:13).

 

두 구절은 분명히 동성애를 금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앞의 구절은 그걸 ‘망측한 짓’이라고만 불렀지만 뒤의 구절은 반드시 사형에 처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말로 ‘망측한 짓’이라고 번역했지만 히브리어 ‘토에바’는 그보다 훨씬 강한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영어성서는 ‘abomination’으로 번역했는데 이를 우리말로 옮기면 ‘역겹다’거나 ‘가증스럽다’ 정도가 맞을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거운 죄인지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라는 규정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제 이 규정들을 잘 읽어봅시다. 우선 이것이 금하는 바는 동성애가 아니라 동성 간의 성행위입니다. 이성 간의 ‘사랑’과 ‘성행위’가 같지 않듯이 동성 간의 사랑과 성행위도 같지 않습니다. 전자가 더 넓은 의미를 갖고 있지요. 이 구절을 포함해서 성서가 금지하는 것은 동성애가 아니라 동성 간의 ‘성행위’입니다. 성서, 특히 구약성서에는 동성 간의 사랑에 대한 얘기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학자들 중에는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단순한 ‘우정’ 관계가 아니라 ‘동성애’ 관계라고 보는 학자들이 있지만 여전히 논란의 소지가 있습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걸 우정으로 보는 반면 인정하는 사람들은 동성애 관계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좌우간 레위기 규정은 동성애 일반이 아니라 동성 간의 성행위를 금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이 규정들은 여성 간의 성행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구절뿐 아니라 구약성서 전체를 샅샅이 뒤져봐도 여성과 여성의 성행위에 대한 규정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때는 여성 간에 성행위가 존재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구약성서는 그것은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금지하지 않으니까 해도 됐을까요? 여성 간의 성행위는 역겨운 짓이 아니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없으므로 결국 우리는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얘기하겠습니다.

 

동성애와 관련 있는 구절이 신명기에 또 있습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살펴볼 구절은 신명기 23장 17절입니다.

 

이스라엘의 딸은 창녀가 될 수 없습니다. 또 이스라엘의 아들들도 남창이 될 수 없습니다.

 

성매매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맞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과장이긴 하지만 그만큼 성매매의 역사가 오래 됐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창녀’나 ‘남창’은 성매매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돈 받고 몸을 파는 사람이 아니란 얘기입니다. 이 사실은 히브리어를 알아야 파악할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여기서 창녀는 히브리어로 ‘카데샤’이고 남창은 ‘카데쉬’입니다. 짐작할 수 있듯이 이 두 단어 모두 ‘거룩하다’는 뜻인 ‘카도쉬’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곧 이들 모두 성전 또는 신에게 바치는 제사와 관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과 광야 유랑 후에 들어가 살게 된 가나안은 빈 땅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미 여러 부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이 여럿 있었지만 대표적인 신이 바알 신이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바알 신전에서 제사드릴 때 충분한 비와 풍요로운 결실을 기원하면서 남자 제사장과 여자 제사장이 성관계를 가졌답니다. 성행위가 결실을 맺게 하는 상징적인 행위였던 겁니다. 이때 성행위하는 제사장이 카데쉬와 카데샤입니다. 물론 이들은 제사장으로서 보상을 받았지만 이는 성매매와는 달랐습니다. 이 규정은 이스라엘 남자와 여자들은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곧 가나안의 제사풍습을 따르지 말고 거기 동화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종교적인 의미보다 더 넓고 깊은 사회, 정치, 경제 문화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레위기에 있는 동성 간의 성행위 금지 규정은 이스라엘의 ‘거룩함’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해야 하므로 동성 간의 성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이므로 바알종교의 남녀 제사장들이 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 규정들은 동성애에 대한 금령이 아닙니다. 동성 간에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동성 간에 성행위를 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성서에 근거해서 동성애를 반대하든 인정하든 상관없이 성서가 금하는 게 뭔지는 분명히 알아야 하겠기에 몇 구절들을 자세히 들여다봤습니다. 오늘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어떻습니까? 구약성서는 동성애를 금지한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설교 서두에 ‘경고’했는데 과연 그렇지 않습니까? 다음에는 신약성서의 구절들을 읽어보고 동성애에 관한 성서 구절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대해 말씀하겠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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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4)

문명충돌? 아니, 원초적 살인의 추억!

 

1.

<분노의 포도><에덴의 동쪽>을 쓴 존 스타인벡은 이런 말을 했다 한다. 이 열여섯 절[창세기 4:1-16] 시대, 문화, 인종과 상관없는 모든 인류의 역사다.창세기 1장부터 11장이 종족 분화 이전의 얘기임을 그가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글의 성격을 제대로 알고 한 말이다. 아담과 하와 얘기가 그렇듯이 가인과 아벨 얘기 역시 개인 간에 벌어진 사건 얘기가 아니라 인류 전체에 관한 얘기니 말이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읽다 보면 이 점을 깜빡 잊고 이 얘길 개인들의 얘기로 읽는 경우는 있지만 말이다. 남들은 몰라도 나는 가끔 그래왔다. 그럴 때마다 아차, 이건 개인 간의 얘기가 아니라 일종의 원형적 이야기(an archetypal story)를 되뇌며 정신을 차리곤 했다.

이 얘긴 무척 압축돼 있다. 그만큼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가 많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읽을 수 없다. 상상력을 발휘해서 빈 공간을 메워 나가지 않으면 읽을 수 없다. 그만큼 이 얘기엔 빈 공간이 많고 설명되지 않은 부분이 널려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가인과 아벨은 야훼에게 제물 바쳐야 하는 걸 어디서, 누구에게 배웠을까? 아담과 하와는 제물을 바치지 않았다. 왜 야훼는 아벨의 제물은 반겼고 가인의 제물은 반기지 않았을까? 야훼가 자기와 자기 제물을 반겼음을 아벨이 알았단 얘기는 없다. 거긴 관심 없다는 듯이. 그런데 가인은 야훼가 자기와 자기 제물을 반기지 않았음을 어떻게 알았을까? 아벨의 제물은 야훼가 먹어서 제단에서 사라졌고 가인의 제물은 먹지 않아서 제단에 그대로 있었나? 세상에 아담, 하와, 가인, 아벨 말고 또 누가 있다고 가인은 누군가가 자길 죽일까봐 두려워했을까? 그리고 가인의 아내는 어디서 나타난 걸까? 언제부터 살인이 나쁜 일로 여겨졌을까?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주어지기도 전인데 말이다. 어떤 짓은 계명과 상관없이 원초적으로 나쁜 짓으로 인식됐었나?

가인과 아벨 (출처: AK Rockefeller(http://www.flickr.com/photos/akrockefeller))

 

이와 같은 기본적인 질문들에 대해 가인과 아벨 얘기가 아무 대답도 내놓지 않기에 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얘기가 본래는 복잡한 플롯과 디테일을 갖춘 독립된 얘기였는데 구약성서에 들어왔을 때 지금 모양으로 축소, 축약됐다고 추측해왔다. 그렇게 추측할 근거는 충분치 않지만 관습적으로 그래왔다. 일종의 관행이 돼버렸다고 할까. 이 얘기뿐 아니라 전후 연결이 부자연스럽거나 설명 없는 빈 공간이 많은 얘기에게도 같은 추측이 적용됐다. 그런데 이 추측대로 얘기가 다듬어졌다면이해하기 어려운 얘기가 쉬워져야 하는 게 아닐까. 연결도 자연스럽지 않고 읽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다듬어졌다고 할 수 있겠나 말이다. 그러니 달리 생각할 수는 없을까 싶다. 이 얘긴 본래부터 연결이 잘 안 됐고 빈 공간이 많게 의도됐다고. 그래서 읽는 사람이 상상력을 발휘해서 연결 안 되는 부분을 연결하고 빈 공간을 메워가면서 읽게 하려고 저자가 본래부터 의도했다고 말이다. 요즘은 이런 글이 흔하다. 이게 지나치면 안 되지만 정도껏 하면 읽는 재미가 있다. 요즘 저자들도 그런데 옛날 저자라고 그렇게 하지 말란 법 있나. 그런 의도로 글 쓰지 말란 법 있나 말이다. 물론 이 역시 입증할 방법은 없다.

2.

스타인벡의 말이 아니더라도 가인과 아벨 얘기는 꼼꼼히 읽어볼만하다. 그 동안은 짧아서 그런지, 결과가 참혹해서 그런지 거기 도달하는 과정에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경향이 있었으니 말이다. 우선 장황한 해석을 덧붙이지 않고 문장의 뜻만 따져가면서 한 번 읽어보자.

1절은 이렇게 말한다. 아담이 자기 아내 하와와 동침하니 아내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았다. 하와가 말하였다. ‘야훼의 도우심으로 내가 남자 아이를 얻었다.’” 전반부엔 문제가 없다. 우리말로나 영어로나 히브리 원어로나 뜻이 명백하다. 하지만 후반부는 그렇지 않다. 하와는 야훼의 도우심으로 내가 남자 아이를 얻었다.”고 했다. 영어로도 “I have gotten a man with the help of YHWH.로 되어 있어서 별 문제 없어 보이지만 정작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내가 야훼와 더불어(with YHWH) 남자(a man)를 낳았다.가 돼야 한다. 영어와 우리말 번역본은 하와와 야훼가 성관계를 갖는 걸 상상할 수 없어서 도우심으로라는 말을 첨가했지만 원문에는 그런 말이 없다. , 시작부터 곤혹스럽네. 전반부에선 분명 아담이 하와와 동침했다고 했다. ‘동침하다를 표현할 때 구약성서는 알다 to know’라는 동사를 사용한다는 사실이 이젠 제법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후반부에선 아담과 더불어가 아니라 야훼와 더불어일까? 자식은 부모의 결합을 통해 생겨나지만 궁극적으론 야훼의 창조물임을 강조하려는 뜻일까?

2절은 이렇다. 하와는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다.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고 가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다.” 텍스트는 누구와 동침해서 아벨을 낳았고 적시하지 않는다. 시간상으론 아벨이 가인의 아우임이 당연한데 굳이 아벨을 가인의 아우라고 불렀다. 둘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주려 했을까? 그 다음에 둘의 직업을 밝힌다. 여기서 이 얘길 유목문화와 농경문화 사이의 갈등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생겼다. 일종의 문화인류학적 해석인데 과연 이게 둘 사이에 벌어진 기나긴 갈등의 기원을 따지려는 얘길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있다면 그건 텍스트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3절은 세월이 지난 뒤에 가인은 땅에서 거둔 곡식을 야훼께 제물로 바치고라고 했다. ‘세월이 지난 뒤에를 영어성서는 ‘in the course of time’이라고 번역했는데 애매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세월이 얼마나 지났다는 말도 없고 무엇을 하는 중간인지도 밝히지 않으니 말이다.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마지막 날들에 at the end of days’라고 읽어야 한다. 그러니까 농사의 한 사이클이 끝나는 시점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이게 더 그럴듯하지 않은가. 농경문화에서 시간은 순환적(cyclic)이니 말이다. 씨를 뿌릴 때가 있으면 소출을 거둘 때가 있고 우기와 건기가 반복되는 것처럼.

4절과 5절이 문제다. 아벨은 양 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바쳤다. 야훼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셨으나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다. 그래서 가인은 몹시 화가 나서 얼굴빛이 달라졌다.” 이 구절에는 많은 이슈들이 있다. 왜 사람은 야훼에게 제물을 바쳤을까? 그걸 어디서 배웠을까? 야훼가 그렇게 명했나, 아니면 본능적으로 그랬나? 부모에게 배웠다는 말도 없다. 양 치는 목자가 양 떼 가운데 맏배의 기름기를 바친 건 당연하다. 밭가는 농부가 땅에서 거둔 곡식을 제물로 바친 게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안 그런가? 그런데 왜 야훼는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반겼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반기지 않았을까? 그냥 이유 없이 야훼 맘대로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 야훼가 그랬다면 그런 줄 알면 되나? 이래서야 어디 무서워서 야훼에게 제물 바치겠나. 왜 그냥 가인이 바친 제물’, ‘아벨이 바친 제물이라 하지 않고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이라 썼을까? 야훼가 제물을 반겼다는 말과 반기지 않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흔히 반겼다는 말은 야훼가 제물을 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는데 그럼 왜 받았다고 하지 않고 반겼다고 했을까? 제물을 받다는 말이 구약성서에 흔한데 말이다. 느낌만으로도 전체의 의미가 이 구절에 달려 있다 싶다. 안 그런가? 하지만 이 구절은 얘기 전체에서 가장 구멍이 많은 부분, 따라서 가장 활발하게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6절은 야훼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네가 화를 내느냐? 얼굴빛이 달라지는 까닭이 무엇이냐?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빛이 달라지느냐?’”라고 읽는다. 우리말 성서가 얼굴빛이 달라지는 까닭이 무엇이냐?’로 번역한 말을 영어성서는 ‘why has your countenance fallen?’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히브리 원어의 직역이다. 우리말 직역은 왜 얼굴을 떨어뜨렸느냐?’가 되겠다. 곧 야훼가 자기 제물을 반기지 않아서 가인이 얼굴을 떨어뜨렸다는 거다. 고개를 숙였다는 얘긴데 이 말이 뭘 상징하는지는 정확하게 추측하기 어렵다. 분노의 표현일 수도 있고 실망이나 좌절의 표현일 수도 있다. 다음으로 네가 올바른 일을 했으면7절에 나오는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면”(인용한 새번역성서에는 조건절임이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다)이란 조건절도 문제다. ‘올바른 일이나 올바르지 못한 일이 뭘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일반적인 윤리 문제인지 아니면 제물 바치는 것과 관련해서 제기되는 문제인지가 분명치 않다. 마지막 부분의 어찌하여 얼굴빛이 달라지느냐?”는 지나친 의역이다. 히브리 원문에는 올리기또는 치켜 올리기란 뜻을 가진 부정사 한 단어다. 영어성서도 RSV“will you not be accepted?”라고 모호하게 번역했고 JPS“there is uplift”라고 거의 직역했다. 분명한 건 이게 조건절이란 사실이다. 올바른 일이 뭐든 만일 네가 그걸 했다면 고개를 들라는, 또는 들 것이란 얘기다.

7절은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라고 말한다. 첫 문장은 조건문이므로 만일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다면이 정확한 번역이다. 만일 그렇다면 죄가 너의 문에라는 거다. 성서에서 란 말이 여기에 처음 나온다. 여기서 이 대문이나 성문을 가리키는 게 아님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그럼 어떤 문일까? 마음의 문? 영혼의 문? 어디가 됐든 문에 도사리고’(또는 웅크리고’) 앉아 있다는 말은 그게 외부에서 누군가를 노리고 있다는 뜻이겠다. 이에 대해 마틴 부버는 죄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것은 바깥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거다.”라는 말을 했는데 의미가 알쏭달쏭하지만 한 번쯤 생각해볼 말이 아닌가 싶다. 죄가 마음(또는 영혼)의 문 밖에서 성난 개처럼 웅크리고 앉아 물어뜯으려고 노리고 있다. 하지만 가인은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그런 뜻에서 RSV“you must master it”라고 번역했는데 JPS“you can be its master”이라고 번역함으로써 이와는 약간 다른 뉘앙스를 풍긴다. ‘다스려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다스릴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이해하니 말이다.

8절은 가인이 아우 아벨에게 말하였다. ‘우리 들로 나가자.’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였다.”라고 말한다. 여기도 메워야 할 구멍이 있다. 히브리 원문에는 가인이 아우 아벨에게 말하였다.” 다음에 우리 들로 나가자.”라는 말이 없다. 가인이 말은 했지만 내용이 빠진 채 바로 그들이 들에 있을 때로 이어진다. 누가 봐도 말이 안 된다. 뭔가 빠진 게 틀림없다. 그래서 아람어 번역인 타르굼은 이리 오라, 우리 들로 나가자.”라는 말을 집어넣었고 다른 번역본들이 이를 따라갔다. 타르굼이 잘 한 걸까? 그래 보인다. 말을 했는데 내용이 없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으니까. 그런데 혹시 여기에 저자의 의도가 숨어있는 건 아닐까? 결론짓기 전에 꼼꼼히 따져 봐도 늦지 않을 거다. 왜 가인은 아벨을 하필 ’(field)로 데리고 갔을까? 그가 아벨을 왜 쳐 죽였는지도 궁금하고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반기지 않은 건 야훼인데 왜 아벨을 죽였는지도 궁금하기 짝이 없다. 아벨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9절은 야훼께서 가인에게 물으셨다.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읽는다. 여기가 얘기 전체의 의미를 결정짓는 부분이란 느낌이 확 오지 않는가. 앞 장에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듯이 여기서도 야훼는 가인에게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는다. 정말 몰라서 물었을까? 그런 거 같다. 아는데 짐짓 모른 척 묻진 않은 거 같다. 그런데 가인은 알면서도 모른다고 했다. 그것도 짐짓 불쾌하다는 듯이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는 말까지 덧붙이며 말이다. 이 구절은 심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많은 이슈를 갖고 있다. 그것들을 따지기 전에 거 참 나쁜 놈이네하는 생각이 즉시 들지만 말이다. 그 얘긴 나중에 해보자.

10절은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너의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이다. 클라우스 베스터만은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라는 물음을 성서에 나오는 기념비적인 문장들 중 하나라고 불렀다. 하느님은 불의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죽은 자, 특히 (억울하게) 살해된 자의 피가 하느님 들으라고 땅에서 울부짖는다는 얘기는 민간신앙에서도 흔하다. 민수기 35:33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너희가 사는 땅을 더럽히지 말아라. 피가 땅에 떨어지면, 땅이 더러워진다. 피가 떨어진 땅은 피를 흘리게 한 그 살해자의 피가 아니고서는 깨끗하게 되지 않는다.”). 얘기 전체를 통해서 아벨은 한 마디도 말을 안 한다. 설화자는 그에게 목소리를 주지 않는다. 그는 죽어서 비로소 말한다. 정확히는 땅에 쏟아진 그의 가 목소리 높여 하느님께 울부짖는다. 자기 얘길 들어 달라고 말이다.

11절은 이제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 땅이 그 입을 벌려서 너의 아우의 피를 너의 손에서 받아 마셨다.”이다. 첫 문장의 뜻이 모호하다. RSV는 우리말 성서처럼 “you are cursed from the ground”라고 번역했는데 JPS“you shall be more cursed than the ground”라고 번역했다. 둘의 뜻은 적지 않게 다른데 히브리 원어는 둘 다 가능하다. 전치사 min’에는 비교급 ‘~보다 than’‘~으로부터 from’ 두 가지 뜻이 다 있다. JPS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한 짓 때문에 땅이 저주받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 구절을 가인이 그때 저주받은 땅보다 더 큰 저주를 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12절은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이제는 너에게 효력을 더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다.”이다. 이젠 가인이 땅을 갈아봐야 헛심만 쓰게 될 뿐이다. 그 결과 그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방랑자가 될 거다. 유목민은 본래 떠도는 사람이지만 농사짓던 자가 떠돌이가 된다니 이런 저주가 어디 있겠나.

13절은 가인이 야훼께 말씀드렸다. ‘이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 무겁습니다.”로 읽는다. 사람을, 그것도 자기 동생을 죽여 놓고 떠돌아다니는 게 너무 무거운 짐이란다. 남의 고통은 작아 보이고 자기 고통은 커 보이는 게 사람이긴 하다. 수백 명의 학생들을 수장해놓고도 얼굴색 하나 안 변하는 사람들도 많은 세상이니 가인을 철면피라고 부르는 건 지나칠 수 있다. 그래도 그가 뻔뻔한 건 부인할 수 없다.

14절은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쫓아내시니 하느님을 뵙지도 못하고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라고 읽는다. 우리말 성서는 둘 다 이 땅이라고 번역했지만 히브리 원어로는 전자는 먼지의 표면으로부터 from the face of the dust’이고 후자는 땅 위에서 on the earth’이다. 전자는 먼지’, ‘티끌을 의미하는 아다마이고 후자는 이란 뜻의 에레쯔. 왜 둘을 구별했을까? J 기자에 따르면 사람은 아다마에서 와서 아다마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존재인데 거기서 추방당했다는 말인가? 누가 가인을 죽이려 한다는 걸까? 글자 그대로 읽으면 세상엔 아담(언제부턴가 무대에서 사라졌다!), 하와, 그리고 가인 밖에 없지 않나! 부모가 자길 죽일 리는 없고 대체 누가 자길 죽일 거라고 이토록 두려워하는가 말이다. 자기는 동생도 죽였으므로 부모도 자길 죽일 수 있다고 두려웠던 걸까? 설마. 또한 그는 왜 가인을 죽이려는 걸까? 보복? 대관절 누가? 보복은 인척이든 친분이든 피살자와 관계있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닌가.

15절은 야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로 벌을 받을 것이다.’ 야훼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라고 적었다. 이건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를 훨씬 뛰어넘는다. 가인을 죽인 자는 일곱 갑절로 벌 받을 거라니, 일곱 명을 죽이겠단 얘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가인을 이처럼 아낄 거면 왜 야훼는 그와 그의 제물을 반기지 않았을까? 야훼는 애지중지하는(?) 가인에게 표를 찍어주어 그를 보호했단다. 구약학자들은 이 가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두고 머리 싸매고 고민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지만 속 시원한 답은 아직이다.

16절은 가인은 야훼 앞을 떠나서 에덴의 동쪽 놋 땅에서 살았다.”이다. 이 구절 덕분에 스타인벡이 소설을 썼고 엘리아 카잔이 영화를 만들었으며 제임스 딘이 스타가 됐다. 그러니까 가인은 에덴의 동쪽, 야훼가 없는 곳(“야훼 앞을 떠나서”)인 놋에서 야훼 없이 살았단 얘기다. 여기서도 하느님은 무소부재하다는 교리는 어디론가 실종이다.

3.

, 이젠 각 절이 무슨 뜻인지 대충 감이 잡혔을 터이니 이슈들을 살펴보자. 앞에서 이 얘긴 원형적 이야기(archetypal story)라고 했다. 곧 인간세상의 중요한 사건이나 현상의 근원적, 근본적 의미를 다루는 얘기란 뜻이다. 이 얘기에는 농경과 목축, 제사, 살인, , 추방, 하느님을 떠난 삶 등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것들이 갖고 있는 원초적 의미가 뭔지 생각해볼 차례다.

창세기 2, 3장에서처럼 여기서도 하느님은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고 대화를 나눌 정도로 가깝다. 하느님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듯이 여기서도 가인에게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라고 묻는다. 하느님은 살인자 가인에게 벌도 내리지만 두려워 떠는 그를 안심시키기도 한다. 그를 죽이는 자에겐 일곱 갑절로 보복하겠다는 약속도 한다. 그것도 모자라 가인의 몸에 를 찍어줘서 그를 죽이지 못하게 조치한다. 참으로 자애로운 하느님 아닌가! 살인자에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보복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보호해주니 말이다.

하지만 가인에겐 이처럼 자애로운 하나님이 가인의 잠재적 가해자에겐 지나치게 가혹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모든 게 하느님 맘대로인 갑질을 여기서도 하는가? 여기서도 나는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풀고 긍휼을 부어주고 싶은 사람에게는 긍휼을 부어준다.”(출애굽기 19:33)는 유일신의 절대주권이 통하는가?

나는 다신교가 절대대세인 세상에서 특이하게 유일신교를 믿었던 이스라엘이 느꼈을 당혹감에 공감한다. 참 곤란했을 거다. 이해되지 않는 점들도 많았을 거다. 다신교를 믿었다며 문제가 없었을 텐데 유일신교를 믿어서 곤혹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니었을 거다. 모든 게 하느님 맘대로 갑질하는 건 줄 알았지만 그래도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걸 이해해보려고 노력하고 인과관계를 따져보려고 애썼던 그들의 신앙적, 신학적 고뇌에 적지 않게 공감한다.

왜 야훼가 아벨과 그의 제사를 반겼고 가인과 그의 제사는 반기지 않았는지 그들은 알 도리가 없었다. 가인과 아벨은 야훼에게 제사를 드렸다. 제사가 뭔가? 왜 사람은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가? 그게 그들 삶에서 무슨 역할을 했을까? 그걸 통해 어떤 목적을 이루려 했을까? 이에 대해선 무수한 이론이 있지만 결국 제사란 신의 마음을 얻으려는 행위 가운데 하나다. 또한 결과적으론 그걸 통해 신이 누굴 선호하는지가 드러나는 게 제사다. 여기엔 신의 마음을 얻으려는 사람의 노력에 대한 신의 평가와 판단이 관련되어 있고 결과적으로 구별과 차별이 벌어지게 되어 있다. 그 판단의 기준이 뭔지는 전적으로 신에게 달려 있다. 사람은 그게 뭔지 추측할 뿐이다.

가인과 아벨이 야훼에게 제물을 바쳤다. 각각 자기가 거둔 것으로 말이다. 제물의 종류에서 신의 선호와 비선호의 이유를 찾는 것은 옳지 않다. 구약성서에서는 둘 다 적법한 제물이니 말이다. 유목문화와 농경문화의 충돌로 보는 것도 안 맞는다. 이스라엘은 둘 중 하나에 속한 게 아니라 둘 다 경험했다. 그들은 정착생활하기 전엔 반()유목, ()농경생활을 했다. 텍스트가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이라고 표현한 데 지나치게 무게두는 것도 옳지 않다. 제사의 정당성이 궁극적으로 제물의 재료에 달려 있지 않고 그걸 바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음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신이 제물이 뭔지에 좌우될 정도로 어리석다고 여길 멍청한 사람이 과연 있을까.

따라서 야훼가 가인의 제물을 반기지 않았던 건 그를 아벨과 비교, 평가, 판단해서 아벨과 구별한 행위였음에 분명하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반기기엔 부족한인물 됨됨이 및 제물로 평가됐는 거다. 그런데 이 판단이 돌이킬 수 없는 최종적인 것이었다면 설화자가 다음 얘길 이어갈 이유가 없었을 거다. 하지만 설화자는 얘길 거기서 끝내지 않고 살인사건과 그 이후의 얘기로 이어갔다. 이것은 제사 수납 여부가 전체의 클라이맥스가 아니란 뜻이다. 정작 하려는 얘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거다. 할 얘기가 더 있다는 말이다.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반기지 않았다는 게 곧 그를 최종적으로 싫어하거나 미워한 건 아닐 수 있다. 막말로 가인이 , 내가 뭘 잘못한 모양이네. 그럼 다시 하지 뭐.’ 할 수도 있었지 않았냐는 거다. 그렇지 않다면 얘길 더 이어갈 이유가 없지 않나 말이다. 안 그런가?.

야훼가 자기와 자기 제물을 반기지 않자 가인은 화가 나서 얼굴을 떨구었다. 이런 그에게 야훼가 묻는다. 왜 화를 내냐고, 왜 얼굴을 떨구냐고. 그 다음에 야훼는 조건문 형식의 두 마디 말을 한다. 만일 네가 올바른 일을 한다면(미완료형) 고개를 들어라! 만일 네가 올바르지 않은 일을 한다면 죄가 네 문에 웅크리고 앉아서 널 다스리려 하는데 너는 그 죄를 다스려야 한다(또는 다스릴 수 있다)! ‘올바른 일이 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일반적인 윤리일 수도 있고 제사를 제대로 드리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야훼가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을 반기지 않은 게 그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정짓진 않았다는 얘기다. 여전히 그에게 미완료 조건절을 적용하는 걸 보면 아직 그에겐 상황을 바꿀 기회가 있다. 올바로 행한 후에 고개를 들면 된다. 아직 끝이 아니다. 물론 그가 올바르지 않은 일을 한다면 죄라는 사나운 개에 물어뜯길 수 있다. 죄는 마음(영혼) 문에 웅크리고 앉아서 널 물어뜯으려 하니 고개를 들고 그 머리통을 밟아라!

여기에 성서에서 처음으로 란 말이 등장한다. 이를 두고 구약학자들이 얼마나 많은 주장을 내놓았겠나. 그것들을 모두 살피는 건 어차피 불가능하고 몇 가지만 얘기하련다. 우선 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하타의 어원이 과녁을 빗나가다라는 뜻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가르침을 뜻하는 토라과녁을 향하다란 뜻이므로 둘은 대조되는 뜻을 갖는다. 과녁을 향하는 게 토라인데 그걸 빗나가는 게 죄란다. 어원은 그렇고, ‘가 문에서 웅크리고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이미 행해진 게 아니라 행해질 가능성이 있는 뭔가를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게 맞겠다. 영어로 ‘culpability’란 말이 여기 딱 맞는다. 그러니까 가인은 제사를 잘못 드려서 죄를 지은 게 아니라 죄지을 가능성에 노출된 거다.

4.

가인은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우를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설화자는 8절에서 가인이 아벨에게 말했다고 하곤 그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이를 아쉬워한 타르굼이 이리 오라, 우리 들로 나가자.”라는 말을 집어넣었다고 했다. 논리적으론 타르굼이 옳다. 얘기의 흐름 상 그래야 했다. 하지만 설화자가 의도적으로 둘 사이에 있어야 할 대화를 빼버렸다고 볼 수는 없을까? 설화자의 머릿속에 들어갈 수 없으니 우린 그의 생각을 알 도리가 없지만 얘기 처음부터 끝까지 가인과 아벨이 한 마디도 대화하지 않는 게 정녕 우연은 아닐 거라고 믿는다. 무대에 등장하는 하느님, 아담, 하와, 가인, 아벨 중 가장 존재감 없는 인물은 아담이고 그 다음이 아벨이다. 둘의 공통점은 한 마디도 말하지 않는다는 거다. 정말 그럴까? 아담의 경우는 그런데 아벨은 아니다! 그는 말을 했다! 죽은 다음이긴 하지만 말이다. 살아 있을 때 가인과 소통하지 않았기에 죽어서 하느님에게 울부짖었다고 볼 수는 없을까? 설화자는 이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둘 사이에 있어야 할 대화를 의도적으로 뺀 게 아닐까?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가?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라는 말은 아벨의 위치뿐 아니라 그의 상황, 둘 사이의 관계까지를 묻는 물음이다. 가인은 모른다고 딱 잡아뗀다. 잡아떼면 하느님이 모를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담과 하와는 숨긴 했지만 거짓말하진 않았다. 그런데 가인은 자기가 살해한 아벨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하느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하느님을 그렇게 헐렁한존재로 봤나?

가인은 왜 아벨을 살해했을까? 그에게 무슨 죄가 있나?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을 반기지 않은 건 아벨 아닌 야훼였다. 그런데 그의 분노는 아벨을 향했다. ? 감히 하느님에게 화낼 수 없어서 아벨을 속죄양으로 삼은 걸까? 분노를 쏟을 데를 찾지 못하다가 만만한 아벨에게 퍼부었나? 프로이드는 때론 죄에 대한 인식이 범죄행위를 앞선다고 말했다. 죄의식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동기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가인은 하느님에 대해 신뢰와 증오라는 두 개의 감정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하느님을 믿었지만 자기 제물을 반기지 않아서 그를 미워하게 된 거다. 그래서 그는 증오를 마땅히 하느님에게 쏟아야 했지만 그러기엔 하느님은 너무 강하다. 그래서 하느님을 대체할 존재를 찾아야 했는데 그게 아벨이었다는 거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건 대상을 잘못 찾은 증오심(displaced hatred) 때문이다. 이유 없이 남을 미워할 수 있는데 이때 증오의 대상은 단지 그 증오가 퍼부어질 대상이 있어야 하기에 그에게 퍼부어졌을 수 있다. 아벨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말했을 때 가인은 아우에 대해서 심리적인 장벽을 쌓았다. 이제 아벨은 아우가 아니라 하느님 대신 분노를 받아야 할 대상이 됐다.

그의 무도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퉁명스럽게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말했다. 둘 사이가 이렇게 멀었나? 언제 이렇게 멀어졌을까? 둘은 서로에게 극도로 무관심했나?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관계의 단절 선언이 아닌가. 본래부터 둘 사이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그렇다면 이는 모순이다. 아벨을 아우라고 부르면서 관계없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아우가 뭔가? 그건 관계아닌가. 우리식으로 2촌 관계가 형제관계다. 부모자식 다음으로 가까운 게 형제인데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니! 네가 아니면 누가 지키는데?

이렇게 가인은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었다. 하느님이 창조한 세상에서 나는 너를 지키는 자여야 하고 너는 나를 지키는 자여야 한다. 그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인데 가인은 그걸 부정했다. 굳이 프로이드에 따르지 않더라도 아벨은 가인의 다른 모습임이 어렵지 않게 보인다. 그리고 신은 둘이 함께 투영된 형상(image)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그는 형제를 죽였고(fratricide), 자신을 죽였으며(suicide), 동시에 하느님을 죽였다(deicide). 구약학자들은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유목문화와 농경문화의 충돌이나, 농부 사울(사무엘상 11:5)과 목동 다윗(사무엘상 16:11)의 갈등 등으로 처음부터 갈라놓고 봐왔다. 이 역시 옳지 않다. 텍스트는 둘(또는 하느님과 더불어 셋) 사이의 뗄 수 없는 유대관계를 줄곧 강조한다. ()은 본래부터 남이 아니다. ()이 본래부터 대립적이었다고 보는 건 옳지 않다. ()은 이 사건으로 인해 갈라졌고 관계가 깨졌지만 본래는 그렇지 않았다. 제사가 주된 원인이 아니다. 그게 일련의 사건들을 촉발했지만 제사보다는 살인과 그 후의 책임회피가 관계의 단절을 가져온 거다. 이 상황에서 땅에서 울부짖는 아벨의 피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건 올바른 관계의 회복을 호소하는 모든 억울한 죽음의 울부짖음이 아닐까?

그 다음엔 시선이 온전히 으로 향한다. 아벨의 피가 에서 야훼에게 울부짖고, 가인이 보다 더 저주를 받을 것인데 그 까닭은 이 그 입을 벌려서 아벨의 피를 가인의 손에서 받아 마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로는 가인이 밭을 갈아도 이 그에게 효력을 나타내지 않을 것이고 그는 위에서 쉬지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란다. 이에 가인이 엄살을 부리며 자기를 에서 쫓아내니 이제 하나님을 보지도 못하고 이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라고 호소한다. 그렇게 되면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를 죽이려 할 거란다. 이에 야훼는 그에게 일곱 갑절로 복수할 것이고 가인에게 표를 찍어 주어 누구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겠다고 약속한다. 이에 가인은 야훼 앞을 떠나 에덴의 동쪽 놋 에서 살았다는 걸로 얘기가 끝난다.

, , . 부동산 투기 얘기도 아닌데 땅이 너무 많이 나오는 거 아니냐고 불평할 만하다. 땅 투기했다 손해 본 사람은 지겨워서 안 읽고 지나갈 만도 하다. 하지만 땅 투기 얘긴 아니니 염려 마시라.

가인은 아담이 저지른 짓으로 인해 땅이 당한 저주보다 더 큰 저주를 받아야 했다. 아벨의 피가 흐르는 땅은 그에게 소출을 내주지 않을 거다. 가인은 아벨을 죽여 땅 어딘가에 묻었지만 바로 그 때문에 아벨은 어디나 존재하게 됐다. 참 대단한 역설 아닌가! 가인은 아벨을 죽여 무존재로 만들려 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아벨은 온 땅이 울부짖음으로 현존하게 된 거다. 이 때문에 농부 가인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녀야 했다. 어딜 가도 아벨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그는 쫓겨나서 하느님 얼굴을 못 보게 됐지만 아벨의 울부짖음은 어디서도 들렸다. 아벨은 울부짖음으로 부활한 거다. 그는 하느님을 향해 울부짖는다. 그래서 사랑받던 자의 울부짖음 때문에 하느님을 졸지도 잠자지도 못한다. 되돌릴 수 없는 상실을 영원히 되새겨 주는 게 이 울부짖음이다. 시편 94편의 시인도 이와 비슷한 맘이었지 싶다.

야훼님, 야훼님은 복수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복수하시는 하느님, 빛으로 나타나십시오…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악인을 치며,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행악자들을 대항할까?
야훼님께서 나를 돕지 아니하셨다면
내 목숨은 벌써 적막한 곳으로 가 버렸을 것이다(1, 16-17절).

가인은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강박증 환자가 된 거다. 아우를 가차 없이 실해한 그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는 공포에 시달리는 건 또 무슨 아이러니인가. 가인의 방랑은 혼돈(chaos)을 상징한다. ‘계명은 삼라만상을 창조한 하느님과 피조물인 사람 사이에 놓여 있는 다리(bridge). 세상의 질서는 계명을 지킴으로써 유지된다. 계명이 지켜지지 않으면 세상은 태초의 혼돈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담과 하와 때문에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란 얘기(창세기 3:18)와 가인의 방랑이 이걸 상징한다. 하느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합(창세기 6:2)이 낳은 혼돈과 바벨탑으로 인한 언어의 혼란 역시 계명을 어긴 결과 초래된 혼돈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만일 네(가인)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이라는 조건절이 갖는 무게는 무겁기만 하다. 올바른 일을 하면 이런 혼돈은 벌어지지 않는다.

5.

구약성서 종교는 유일신 종교다. 여럿이 아니라 오직 한 신이 모든 걸 갖고 있고 모든 걸 주관한다고 믿는다. 그에게 권력을 나눠 받을 다른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절대권력자다. 하지만 동시에 유일신 야훼는 사람 없이는 의미가 없는 신이다. 야훼는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구약성서는 이 점을 매우 강조한다. 하느님과 사람의 관계는 철저하게 나와 너 I and Thou’의 관계(마르틴 부버). 성서는 이런 하느님과 사람의 상호성(reciprocity)을 질리게 반복해서 말한다. 사람인 없인 하느님인 는 아무 의미도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둘 다 철저하게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인격이므로 둘의 관계는 나와 그것 I and It’의 관계가 아니다. ‘나와 너의 관계인 거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것도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다. 하느님은 그들을 선택하기로 선택했고 그들은 선택되기로 선택한 것이다(they chose to be chosen)!

하느님의 권위와 힘은 강제력과 구별해야 한다. 하느님의 힘은 사람이 올바르게 행하는지 여부와 뗄 수 없이 관련되어 있다(7). 이럴 때 의존이란 말은 적절하지 않아 보이지만 내용상으론 그렇다. 세상질서는 사람들이 계명을 준수하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그래서 만일 네가 올바르게 행한다면이란 문장이 매우 중요하다. 세상질서가 여기에 기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올바르게 행하도록 가인을 강요하진 않았다. 하느님은 그의 도덕적 결단을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도 않았다. 가인조차 하느님의 정당한 파트너로 존중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하느님의 전능(omnipotence)은 사람과의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 하느님이 할 수 있는 모든 조절과 통제를 포기하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무능(impotence)은 전능(omnipotence)의 한 부분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가인은 아우를 죽이고 추방당해 하느님 없는 땅을 방황했다. 마지막 절은 그가 에덴 동쪽 땅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게 무슨 방랑인가! ‘땅에 정착했다면서! 그런데 이란 말이 히브리어 방랑하다의 언어유희라면 어떤가? 그가 정착해서 방황했고 방황하며 정착했다는 뜻으로 읽어야 할까. 이 얘긴 끝까지 멋을 잃지 않는다!

 

곽건용/나성 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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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3)

선악과, 하느님의 갑질?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창세기 2:16-17 공동번역)

 

You may freely eat of every tree of the garden;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you shall not eat, for in the day that you eat of it you shall die. (같은 곳, RSV)

 

1.

 

선악과 얘기를 설명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성서학자들이 땀과 에너지를 쏟아 부었을까? 얼마나 많은 종이와 잉크가 쓰였을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노력과 계산 안 될 정도의 물자가 이 얘기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부어졌다. 그럴만한 가치가 과연 있었을까? 이 얘기가 그만한 노력과 물자를 쓸 정도로 가치 있는 얘기인가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대다수의 구약학자들과 목사들은 당연히 그런 가치가 있다고 대답할 게다. 그 이상의 가치를 가졌다고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본질을 설명하는 얘기이고 사람 사는 세상에 만연한 죄와 악의 기원을 말하는 얘기이므로 모든 걸 다 바쳐서라도 그 뜻을 파악해야 한다고 할 거다. 정말 그럴까?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에겐 미안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왜 구약성서에서 선악과 얘기는 애오라지 여기만 등장할까? 그토록 중요하다면 반복해서 얘기하고 설명해서 사람들 뇌리에 단단히 새겼어야 하지 않을까? 선악과 얘기가 고대 중동지역 문헌에서 한 번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구약성서에서도 여기 외엔 이 얘기가 한 번도 안 나온다는 사실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이상한 점이 또 있다. 선악과 얘기는 답하기 어려운 물음들을 제기한다. 몇 가지 예를 들면, 하느님은 왜 에덴동산에 선악과나무란 걸 갖다 두었을까 하는 기본적인 물음에서부터 그걸 왜 눈이 잘 띠는 동산 ‘한 가운데’에 두고 먹지 말라 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하느님은 첫 사람들이 그걸 먹지 않길 바랐는지 먹길 바랐는지조차 헛갈린다. 전자라면 왜 하필 동산 ‘한 가운데’ 갖다 뒀는가 말이다. 창세기 22 1절은 하느님이 아브라함더러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했을 때 그게 아브라함을 ‘시험’하려는 거라고 분명히 밝힌다. 여기서 하느님은 사람을 시험하려 했던 걸까? 그럼 하느님은 그들이 그걸 따먹으리란 걸 몰랐다는 얘긴데 전지전능한 분이 어찌 그럴 수 있나 말이다. 뱀은 그걸 먹으면 그들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 어떻게 알았을까? 금령을 직접 받은 아담도 몰랐던 사실을 말이다. ‘선악과’의 정식이름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이니 그걸 먹으면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일 터이다. 그걸 금지한 하느님은 사람이 그런 지식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까? “그것을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말은 왜 실현되지 않았을까?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당일에 죽기는커녕 930세까지 살았다니 말이다.

 

이 밖에도 질문들이 많은데 텍스트는 거기에 대해 답하지 않는다. 그럼 교회라도 답을 주었어야 하는데 교회도 거기서 ‘원죄’ 교리를 끄집어낸 것 외엔 답을 제공하지 못했다. 2천 수백 년 동안 수많은 구약학자들이 노력했지만 어느 것도 정설이 되지 못했다. 내가 그것들을 다 찾아보진 않았지만(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나!) 내가 찾아낸 답들은 전부 제각각이었다. 이래저래 선악과 얘기는 신앙에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2.

 

언제부터인지 선악과 얘길 읽을 때 욥이란 인물이 떠오른다. 언뜻 보기엔 둘은 관련이 없는 얘긴데 왜 욥이 떠오른 걸까? 나도 처음엔 이유를 몰랐는데 찬찬히 생각해보니 두 얘기 모두 중요한 신학적인 질문을 던져놓고 답을 주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음을 알았다.

 

구약성서 지혜문학에 속한 욥기는 ‘의로운 사람이 왜 고통을 당하는가?’라는 문제를 다룬 책이라고 말들 한다. 왜 하느님은 의로운 사람이 부당하게 고통당하게 버려 두냐는 거다. 이를 신학 용어로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이라고 부른다. 욥기는 오랫동안 그렇게 여겨졌다. ‘의로운 사람이 이유 없이 당하는 고통’에 대한 책으로 말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보다 ‘사람이 보상 없이 하느님을 믿을 수 있을까?’가 욥기의 주제라고 말들 한다. 욥기의 주제는 1 9절에서 사탄이 하느님에게 던진 “욥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라는 물음에 담겨 있다는 얘기다. 욥기의 주제는 욥이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그걸 소재로 해서 보상을 바라지 않고 믿는 게 가능하냐를 묻는다는 거다.

 

욥기 저자는 경건하고 순종적이던 욥을 3장부터 불손하고 저항적인 인물로 돌변시킨다. 세 명의 친구들이 그를 위로하러 왔지만 그의 신성모독적인 태도에 분노하여 그를 위로하려던 마음을 접고 판단하고 정죄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욥의 고통은 그가 저지른 죄와 불순종에서 비롯됐다고, 하느님이 사람을 왜 이유 없이 벌하겠냐고, 그러니 네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잘 생각해보고 회개하라고 다그친다. 하지만 욥은 물러서지 않고 자기는 이런 고통을 당할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양편의 대결은 접점을 찾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린다. 그래서 욥은 제삼자를 재판관으로 세우려 하지만 여기서 누가 재판관이 될 수 있겠나. 그럴만한 존재는 하느님 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욥은 하느님을 재판관으로 세우려 하는데, 아뿔싸, 하느님은 이 법정에서 피고이기도 하지 않은가! 욥도 세 친구들의 생각의 차이를 그리 크지 않다. 그도 자기가 당하는 고통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됐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그게 잘못됐다는 거다. 그러니 하느님은 법정에서 피고석이 앉아야 한다. 그런데 동시에 하느님은 이 소송에서 공정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 재판관이기도 하니 이를 어쩌란 말인가. 여기서 욥은 진퇴양난의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다. 그는 하느님에게 통사정한다. 제발 자기를 힘으로 누르지 말고 공정하게 판단해 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욥도 이미 알고 있다. 하느님이 재판관이자 피고인 재판은 어차피 공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중에 노령(?)의 세 논객들이 논쟁을 제대로 이끌지 못하는 걸 보다 못한 엘리후란 청년이 논쟁에 끼어들지만 대세를 바꾸진 못하고 슬그머니 사라진다. 그 다음엔 누가 등장할 차례인가? 이제 남은 건 하느님 밖에 없다. 얘기 흐름 상 하느님이 등장할 차례다. 하느님이 등장해서 욥의 질문에 대해 대답해야 하는 거다. 누구나 그렇게 예상할 터이다. 과연 그랬다. 하느님이 등장했다. 하느님은 폭풍우 가운데서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묻는 말에 대답해 보아라.”라고 누군가에게 외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얘길 듣는 사람은 귀를 쫑긋 세울 수밖에 없고 읽는 사람은 눈에 잔뜩 힘을 줄 수밖에 없다. 왜 착한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지, 과연 보상 없이도 하느님을 잘 믿는 게 가능한지에 대한 기나긴 논쟁에 답이 주어질 분위기이니 말이다. 이 문젠 욥과 세 친구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인류의 문제가 아니던가. 그런데 장장 넉 장에 걸쳐서 이어지는 하느님의 연설에 한껏 귀를 세우고 듣고 눈을 부릅뜨고 읽어도 질문에 대한 답은 없다.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반복해서 들어봐도, 한 글자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꼼꼼히 읽어봐도 거기엔 욥의 물음에 대한 답이 없다. 있는 거라곤 하느님이 삼라만상을 다스리고 운행하느라 얼마나 바쁜지, 사람의 생각과 지혜, 지식이 닿지 않는 영역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세상에서 날뛰는 악인들(베헤못과 레비아단으로 표현된)을 다 쓸어버리고 싶어도 당신은 그러지 못하니 네가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보라는 등의 얘기뿐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구약성서, 그 중에서 지혜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수많은 학자들이 욥기 38장에서 42장에 걸쳐 있는 야훼의 연설에서 의인이 고난당하는 까닭과 보상 없는 믿음의 가능성 유무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오랫동안 무진 애를 써왔고 다양한 답을 내놨지만 대개는 확신이 결여되어 있다. 그저 ‘이러저러하게 보인다.’거나 ‘이러저러하게 여겨진다.’는 등의 뜨뜻미지근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학자들도 분명 거기 답이 있긴 있을 것이고 그걸 찾아내긴 해야 할 텐데 찾아지지 않으니까 그런 식으로 답을 내놓았을 것이다.

 

나도 하느님의 연설에서 답을 찾으려고 애써봤다. 그 방면 전문가들의 책도 많이 찾아 읽었다. 하지만 전문가들도 못한 걸 내가 어찌 하겠나, 나 역시 헛심만 쓰고 답을 찾진 못했다. 한땐 욥기에 미쳐서 설교에서도 욥기, 성서공부에서도 욥기를 다룬 적이 있다. 논문제출 자격시험(qualifying Exam)도 욥기가 포함된 지혜문학을 선택했었다. 내 말은 ‘나도 할 만큼은 해봤다’ 뭐 이런 얘기가 되겠다. 하지만 욥기의 질문에 답을 찾진 못했다.

 

그러던 중 한 생각이 ‘계시처럼’(‘계시’란 얘긴 아니다) 떠올랐는데 욥기엔 본래부터 답이 없는 게 아닌가 하는 게 그것이다. 그것은 어차피 답이 없는 인생의 수수께끼이므로 굳이 답을 찾으려 하지 말라는 뜻일지 모른다는 거다. 세상엔 수많은 착한 사람들이 이유 없이 고난을 당하는데 어찌 일일이 답이 있을 수 있겠나! 보상 없이 하느님을 믿을 수 있냐고? 이 질문에 누가 있다거나 없다고 대답할 수 있겠나 말이다. 있다고 한들 없다고 믿는 사람을 설득해서 하느님 잘 믿으며 살게 할 수 있겠으며, 없다고 한들 하느님 잘 믿고 사는 사람을 꼬여서 타락하게 만들 수 있겠나? 이런저런 이유로 착한 사람도 이유 없이 고통을 당할 수 있다고 말한들 그게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위안이 될까? 차라리 당신 같이 착한 사람이 고통당하는 건 하느님과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해주는 게 더 큰 위로가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욥기라는 책은 자기가 제기한 질문에 답을 주려는 책이 아니라 그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더 넓혀주고 달리 만들어주는 게 목적인 책일 수도 있겠다 싶은 것이다.

 

3.

 

선악과 얘길 읽으면서 욥기를 떠올린 이유는 하나다. 둘 다 답이 없는 질문만 잔뜩 던져놓았다는 공통점 말이다. 그나마 욥기는 답처럼 보이는 것들을 제공한다. 야훼의 연설에는 답처럼 보이는(혹은 착각하게 만드는) 내용들이 들어있다. 읽고 또 읽으면 그게 답이 아님을 깨닫게 되지만 말이다. 그런데 선악과 얘기에는 그것도 없다. 거기에는 답해야 할 질문이 뭔지도 불분명하다. 흔히 그걸 ‘악의 기원’에 대한 얘기라고 말들 하는데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선악과 얘기는 악의 기원이 무엇이라고 말하나? ? 뱀의 유혹에 넘어간 여자? 여자가 하자는 대로 따라 한 남자? 아니면 선악과나무를 굳이 동산 한 가운데 갖다둔 하느님? 그것도 아니면 이 모두의 합작품? 이 중 어느 것도 답이 아니거나 모두가 답이다. 게다가 그렇다 한들 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뭐가 답인들 무슨 소용인가 말이다. 악이란 게 기원을 안다고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선악과 얘기는 악의 기원 문제를 포함해서 거기서 답을 얻으려 해온 문제들에 답을 주는 얘기가 아니란 생각 말이다. 그러니까 우린 그동안 선악과 얘기를 근본부터 잘못 읽어온 게 아닐까? 그 얘기가 말하려는 것과 전혀 상관없는 우리 자신의 문제에 대한 답을 거기서 찾으려 했던 게 아닐까? 곧 이 얘기에는 하느님이 선악과나무를 에덴동산에 갖다 둔 이유나 왜 하필 그걸 동산 한 가운데 둔 이유, 사람이 그걸 따먹으리란 걸 하느님이 알았는지 여부, 선악을 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왜 하느님은 사람이 그걸 아는 것을 원치 않았는지 등등의 물음에 답을 주려는 의도가 애초부터 없었던 게 아닐까? 물론 이 얘기의 저자도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이 뭔지 궁금했겠지만 얘기를 전한 목적이 그게 아니었다는 말이다. 성서는 내가 궁금해 하는 물음에 답을 줘야 하는 책이 아니다. 알고 싶은 걸 다 알 수 있게 하는 백과사전도 아니다. 그런데 우린 너무도 자주 그런 오해를 한다. 과연 이 얘기가 말하고자 하는 게 뭘까? 

 

(출처: Ariel Grimm (https://www.flickr.com/photos/in2thewoodz9))

 

이 얘기의 하느님은 ‘무조건적’이다. ‘막무가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일방통행적이다. 하느님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사람에게 주면서 왜 그래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걸 먹으면 하느님처럼 되니까 금지한 거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준 건 뱀이다. 하지만 그 설명이 맞는지 틀리는지 아담과 하와는 알 수가 없다. 그들이 아는 건 선악과를 먹으면 안 된다는 것뿐이다. 거기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설명되지 않았다. 나는 이런 점이 이스라엘이 갖고 있던 야훼 유일신 신앙의 핵심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고대 중동지역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라는 두 개의 중심을 갖고 있었다는데 그들의 종교는 ‘거의’ 없이 다신교였다. 두 가지 예외가 있었기에 일부러 ‘거의’란 말을 썼다. 첫째 예외는 주전 14세기 아마르나시대 이집트 왕 아케나텐의 종교다. 아케나텐은 이집트에선 전무후무하게 유일신 종교를 갖고 있었다. 그게 그의 통치기간을 넘기지 못하고 사라졌지만 말이다. 그의 왕위를 계승한 자는 선왕의 종교를 버리고 다신교로 돌아갔다. 그 뿐 아니라 선왕에 대한 모든 얘기를 역사에서 지워버렸다. 그 시기를 ‘어두운 암흑의 시대’로 본 것이다. 둘째 예외는 이스라엘의 야훼 유일신 종교다. 야훼 종교도 처음부터 확고하게 유일신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다신교에서 유일신교로 ‘발전’해갔던 것도 아니다. 야훼 종교는 처음부터 ‘다듬어지지 않은’ 유일신교였다. 다신교와는 근본부터 달랐다는 얘기다. 우리에겐 다신교보다 유일신교가 더 익숙하지만 구약성서 시대엔 사정이 달랐다. 중동 전역에서 대부분의 시기에 다신교가 지배적이었다. 유일신교는 앞의 두 경우가 전부였다.

 

다신교는 말 그대로 신이 여럿이 있다고 믿고 일신교는 신이 하나라고 믿는다. 그런데 둘의 차이는 신의 숫자에 그치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크고 넓고 깊다. 다신교는 또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여러 신들이 존재하지만 자기 지역은 특정한 한 신이 다스린다고 믿는 종류이고, 다른 하나는 한 지역을 여러 신들이 각각 맡은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며 다스린다고 믿는 종류다. 예컨대 두 도시국가가 전쟁을 벌였다 치자. 그 중 승리하는 편의 신이 패한 편의 신을 수하에 거느리게 되는데 이때 패한 편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어온 신을 버리고 승리한 편의 신을 받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전자의 예라면 한 지역에서 농사를 관장하는 신이 따로 있고 다산(多産)을 주관하는 신이 따로 있으며 그 밖의 여러 기능을 관장하는 신들이 따로 있어서 사람들이 필요할 때 자기들이 바라는 일을 주관하는 신에게 가서 비는 게 후자의 예가 되겠다.

 

그러니까 다신교와 유일신교는 신의 숫자뿐 아니라 믿는 신의 성격도 다를 수밖에 없다. 다신교는 기본적으로 믿던 신에 문제가 생기면 그 신을 버리고 다른 신을 믿는 게 가능하다. 그게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자연스럽다. 전쟁의 예에서 보듯이 자기들을 보호해준다고 믿어온 신이 다른 신에게 패하면, 다시 말해서 다른 도시국가와의 전쟁에서 패하면 아무리 오랫동안 그 신을 믿어왔더라도 주저 없이 버리고 다른 신에게로 갔다. 자기들을 보호해줘야 할 신이 전쟁에서 졌는데도 불구하고 그 신을 고집할 이유가 없었던 거다. 여기에는 ‘의리’란 게 필요 없었고 따라서 그게 있을 자리도 없었다. 한편 다양한 신들이 다양한 역할과 기능을 담당한다고 믿는 다신교에서는 특정한 한 신에게 배타적으로 충성을 바칠 이유가 없었다.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충성심을 배분하면 됐다는 얘기다. 농사를 지을 때는 농경의 신에게 제사를 바치면 됐고 자식을 낳고 싶으면 다산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면 됐다. 여행을 할 때는 여행을 관장하는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길을 떠나면 그뿐이었다. 그 어떤 신도 배타적인 충성을 요구하지 않았고 사람 편에서도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유일신교는 그렇지 않았다. 유일신은 다신교의 신들과 달리 믿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원했다. 전적인 충성과 배타적인 사랑을 원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충성을 바쳐야 할 다른 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유일신의 성격에 기인한 바가 컸다. 유일신교의 신은 다른 신들과 다툴 이유가 없었다. ‘졸개 신들’(lesser gods)들이나 천사들이 있긴 했지만 그들의 파워는 유일신이 갖고 있던 파워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게다가 유일신교의 신은 다신교에서 여러 신들이 하는 역할과 기능을 혼자 다 맡고 있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러니 전적인 충성과 배타적인 사랑을 바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유일신은 자기를 믿는 사람들에게 ‘전적인 신뢰’를 요구한다. 그게 유일신 종교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속된 말로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자기만 믿으라는 거다. 믿음직하지 않아 보여도 무작정 믿어야 했다. 믿어야 하는 이유도 주지 않고 믿을만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무작정 믿으란 거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신뢰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 ? 자기는 유일신이니까! 신이라고 할 만한 존재는 자기밖에 없고 나머지는 다 졸개 신이거나 가짜 신이니까! 게다가 자기는 사람이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넓고 높고 깊으니까! 다신교에는 하느님의 신비라거나 알 수 없는 신이라거나 숨은 신, 또는 붙잡을 수 없는 애매한 현존(Elusive Presence - 사무엘 테리엔의 구약신학서 제목) 같은 개념이 있을 수 없다. 그건 오로지 유일신교에만 있는 개념들이고 거기서만 의미 있는 개념들이다.

 

선악과 얘기의 하느님은 유일신교의 신이다. 그가 아담, 하와가 선악과 따 먹은 걸 몰랐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저녁에 동산을 어슬렁거리며 걷는 등 순진한 사람처럼 그려져 있지만 선악과 얘기의 하느님은 첫 사람들에게 배타적인 충성과 전적인 신뢰를 요구한 절대적 유일신이다. 그것은 첫 사람이 이런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욥기 얘기가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창조세계 질서를 말하면서 착한 사람이 고난을 당해도 무조건 하느님을 신뢰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유일신을 믿고 신뢰하는 것은 보상의 유무와는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선악과 얘기는 그걸 먹지 말라는 하느님의 명령은 무조건 지켰어야 했다고 말하고 있다.

 

과거에는 선악과 얘기를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선악을 아는 지식을 맞바꾼 얘기로 이해했었다.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무조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전적인 신뢰의 요구를 선악과를 먹고 얻을 지식에 대한 욕구와 맞바꾼 얘기라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보다는 사람에게 유일신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요구했지만 그걸 저버린 얘기로 읽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혹시나 해서 한 마디만 덧붙인다. 선악과 얘기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배타적 신뢰에 관한 얘기라고 해서 그걸 ‘반계몽주의’를 권장하는 얘기로 읽는 건 옳지 않다. 한국교회는 신앙을 지성적으로 이해하고 납득하려는 태도를 환영하지 않는다. 목사들도 그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그렇지 않은 목사들도 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반계몽적임에 분명하다.

 

선악과 얘기는 지성을 포기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라는 얘기다. 우리는 신앙에 대해 최대한 따져 물어야 한다. 그렇게 해도 다 알 수 없는 게 신앙 아니던가. 유홍준 선생은 문화유적은 아는 만큼 보인다 했는데 묻는 만큼 알게 되는 게 신앙이다. 그렇게 묻고 또 물어도 하느님이라는 신비의 바다 밑바닥에 닿기는커녕 얕은 물가에서 물장구치는 정도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이 글 제목이 ‘선악과, 하느님의 갑질?’인데 여긴 물음표가 있음을 잊지 말라 주시라. ‘갑질’이란 말은 요즘 유행하는 별로 고상하지 않은 용어지만 글의 내용에 어울린다고 여겨서 썼다. ‘갑질’은 쌍방 간의 계약서에서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갑’이란 말에 ‘행동’을 지칭하는 저속한 표현인 ‘질’을 붙여서 만들어진 말이다. 이는 우월한 위치에 있는 편이 열등한 위치에 있는 쪽을 함부로 대할 때 쓰는 말이다.

 

하느님이 갑질을 한다고? 그렇다. 선악과 얘기에서 하느님은 갑질을 했다.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갑질’ 하는 걸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게 얼마나 추악하고 비열한지는 당하는 ‘을’이 가장 잘 알게 마련이다. 이 얘기에서 을의 위치에 있는 아담, 하와, 뱀은 꼼짝없이 갑인 하느님의 처벌을 감수해야 했다. 물론 하나님이 한 행위가 추악하고 비열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수퍼갑인 유일신으로서 절대 권력을 행사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아닌가. 이번에 땅콩회항사건을 일으킨 대한항공에서는 사주의 말이 곧 메뉴얼이었다고 한다. 하느님과 대한항공 사주를 비교하는 건 좀 거시기하지만 유일신 종교의 신은 바로 대한항공의 사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자신이 왜 그런 생각을 하고 계획을 세우고 행동을 하는지 그 누구에게 설명할 필요도, 동의를 얻을 필요도 없는 존재, 바로 이런 존재가 유일신교의 신이니 말이다.

 

유일신교의 신은 갑질 하는 존재다. 반면 다신교의 신들은 갑질을 못한다. 그들에게는 그만한 권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유일신교 신자는 찍소리 못하고 신이 하는 대로 복종해야 하나?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도살장에 끌려나는 소처럼 따라가야 하나? 유일신교의 신은 매사에 원칙도 계획도 없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나? 그렇지는 않다. 유일신교 신자도 신이 어떤 원칙에 따라서, 어떤 계획을 갖고 행동하는지 탐구하고 또 탐구해야 한다. 이유와 목적을 신에게 묻고 또 물어야 한다. 하지만 신에게는 그걸 사람들과 나눌 의무는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의 ‘계시’는 ‘은총의 사건’이 아닌가. 출애굽기 19 33절의 표현을 빌면 야훼는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을 부어주고 싶은 사람에게 긍휼을 부어주는 ‘수퍼갑’이니 말이다.

 

이게 무슨 신이냐고? 이런 독재자 같은 신을 왜 믿어야 하냐고? 믿기 싫으면 안 믿으면 된다. 다만 구약성서의 야훼 하느님은 기본적으로 이런 분이란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믿는 신은 구약성서가 보여주는 수퍼갑 유일신 야훼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믿는 신은 유일신교의 신과 다신교의 신들 중간 어디쯤에 있는 ‘어정쩡한’ 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 우리가 믿는 신은 성서의 하느님이 아니라고? 반드시 그렇다고만 할 수 없는 이유는, 구약성서의 수퍼갑 유일신이 굳이 하지 않았어도 될 행동을 함으로써 스스로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속박해버렸기 때문이다. 바로 이게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언약’(covenant)이 아닌가. 구약과 신약성서를 가리키는 영어 ‘old testament’와 ‘new testament’에서 ‘testament’란 말이 바로 이 ‘언약’에서 나온 말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할 기회가 있을 거다.

곽건용/나성 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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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2) 


늬들이 구약을 알어?

 

1.

대단한 글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러저런 이유로 글을 쓰는 입장에서 보면 구약성서는 독자들에게 대단히 불친절한 책이다. 어떻게든 많이 읽히겠다는 의지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구약성서는 그런 책이다. 하긴 어떤 경전이 많이 읽히려고 글을 쓰고 재미있게 쓰였겠냐마는.

구약성서는 이야기’(story)설화’(narrative)가 큰 부분을 차지하므로 형식만 보면 다른 경전들에 비해 재미있을 수 있는 책이다. 재미있는 부분도 없진 않지만 전체적으론 재미없는 책임에 분명하다. 구약성서가 재미로 넘쳐나고 흥미진진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는 사람을 나는 아직까지 한 명도 못 봤다. 여러분은 본 적 있나? 아마 없을 거다. 있다면 그는 구약성서 전문가가 되도록 타고난 사람이든가 재미란 게 뭔 줄 도통 모르는 사람, 둘 중 하나일 거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그리스도교는 오랫동안 구약성서를 율법이라고 불러왔다. ‘율법이란 말은 히브리어 토라’(torah)를 그리스어 노모스’(nomos)로 잘못 번역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그래서 구약성서는 사람의 행위를 규정하고 강제하는 법률이 근간이란 오해가 생겼지만 어쨌든 그리스도인들에겐 구약성서=율법이란 도식이 뇌리에 박혀 있다. 일단 그렇게 되면 고치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니다. 구약성서에서 좁은 의미의 율법인 법률 규정은 양적, 질적으로 지배적이지 않다. 그보다는 이야기설화가 더 많다. 그래서 구약성서=율법보다는 구약성서=이야기/설화가 더 적절한 도식이지만 전통과 관습이라는 장벽을 넘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당분간 구약성서에 대한 고정관념이 바뀌기는 어려울 게다.

이야기/설화만 끄집어내서 읽는다면 구약성서는 그리 재미없는 책은 아니다. 이야기/설화의 종류도 제법 다양하다. 벌어진 사건에 교훈을 적절히 섞어서 기록한 역사 설화(historical narrative)가 있는가 하면, 아예 처음부터 꾸며낸 얘기도 있다. 두 종류 모두 전하려는 메시지가 있지만 그걸 담는 그릇이 다르다. 상징성이라곤 찾을 수 없는 메마른 얘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무궁무진한 상징들로 가득한 얘기도 있다. 그러고 보면 구약성서 저자들에게 가능한한 많이 읽히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 모르겠다.

구약성서는 그냥 읽는 것보다 형식을 따져가며 읽으면 훨씬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문학 형식이란 관점에서 보면 구약성서는 매우 다채롭다. 앞에서 이야기와 설화를 얘기했는데 그 외에도 시()가 있고 역사 서술(historiography)도 있으며 법전도 있다. 짧은 격언도 있고 비유(parable)와 우화(fable)도 있다. 우화 중에는 역사 서술처럼 쓰인 것도 있고 반대로 역사 서술임에 분명한데도 이야기처럼 쓰인 것도 있다. 사물을 필요 이상으로 자세히 묘사한 얘기가 있는가 하면,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설명해주지 않고 빈 공간(gap)으로 남겨놓은 얘기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글들을 재미있게 읽으려면 그게 어떤 문학 형식에 담겨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그러면 구약성서를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덤빈다는 우스개 말이 있다. 구약성서에 대해서도 그런 짓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웃자고 하는 얘기는 그냥 웃으면 된다. 그게 그 글의 목적이니 말이다. 안 그런가? 거룩한 경전인 성서에 우스갯소리가 어디 있냐고 격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은 예후다 T. 라다이(Yehuda T. Radday)와 아달리아 브레너(Athalya Brenner)가 편집한  On Humor and the Comic in the Hebrew Bible나 윌리엄 웻비(William Whedbee)이 쓴 The Bible and the Comic Vision이란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럼 그런 말 못 할 거다. 전자는 이름에서 보듯이 유대인이고 후자는 포모나대학에서 가르치다가 10여 년 전에 암으로 죽었다. 특이한 점은 기독교인이었던 그가 유대인 아내 덕분에 유대교로 개종했다는 점이다. 흔치 않은 일이다. 어쨌든 두 책은 구약성서가 얼마나 유머로 가득한 재미있는 책인지 잘 보여주는 좋은 책이다.

이와는 반대로 심각한 얘길 하고 싶은데 글이 너무 무거우면 효과가 줄까봐 일부러 우화처럼 가벼운 형식에 담았다면 독자는 우화에만 정신이 팔려 웃다 말 것이 아니라 그 안의 메시지를 파악해야 한다. 웃자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목적이면 그렇단 말이다. 안 그런가? ()는 시로 읽어 문학적 영감과 감흥을 느끼고 감동하면 된다. 전하려는 메시지가 시라는 문학 양식이 가장 잘 맞으니까 그렇게 한 게 아닌가 말이다. 시적인 표현을 두고 과학적으로 옳으니 그르니 따지거나 교리에 맞니 안 맞니 한다면 그보다 어리석은 짓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그리스도교가 이런 짓을 해왔으니 그 어리석음을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하고 싶은 얘긴 구약성서를 재미있게 읽자는 거다. 기왕 읽을 거면 재미있게 읽어야겠고 또 아직까지 읽을 맘이 없던 사람도 그게 재미있는 줄 알면 혹 읽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다. 여기서 재미있게읽는다는 말은 제대로읽는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내 경험으로 구약성서는 제대로읽어야 맛이 난다. 다시 말해서 구약성서의 얘기들이 어떤 그릇(문학 양식)에 담겨 있는지, 그리고 저자는 독자가 어떻게 자기 얘기를 읽기 바라는지 알아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한껏 모양 나게 시적으로 표현했는데 그걸 논문 읽듯이 딱딱하게 읽는다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제 딴엔 다양한 상징들을 글에 녹여서 오색찬란한 그림을 그려놨는데 그걸 흑백으로 감상한다면 저자의 기분은 고사하고 글에 대한 예우겠는가 말이다. 또한 자기의 온갖 이성, 지성, 감성과 영성까지 동원해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세계를 애써 고상하게 펼쳐놨는데 독자가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라는 한 마디로 밀쳐버린다면 그게 글과 저자에 대한 공정한 대우라 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내 얘기는 기왕이면 구약성서를 재미있게 읽어야겠는데 그러려면 수고스럽더라도 개개 글들이 담겨 있는 그릇, 곧 문학 양식을 따져봐야 한다는 거다. 시는 시로 읽고 설화는 설화, 비유는 비유로, 역사 서술은 역사 서술로 읽자는 말이다. 


2.

그 다음에는 뭘 해야 하나? 이젠 구약성서를 읽을 준비가 된 걸까? 아니다. 아직 한 가지가 남아 있는데 현대인에겐 이게 문학 양식 따지는 일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다름 아니라 구약성서 얘기들 가운데 현대인의 건전한 상식과 보편적 양식으로 믿어지지 않는 얘기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예컨대 성서가 바다가 갈라졌다고 말하면 진짜 갈라졌다고 믿을 것인가? 태양이 멈췄다고 하면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믿을 것인가? 물에 던진 도끼가 물 위로 떠올랐다고 하면 그걸 그대로 믿고 나도 시험해봐야 하나? 사람이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사흘 동안 있다가 나왔다고 하면 그걸 그대로 믿어야 하는가 말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대략 1970년대까지 윌리엄 올브라이트(William F. Albright)가 주도한 미국 성서고고학계를 지배해온 흐름은 고고학의 발굴을 통해 성서 설화의 역사성을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누지(Nuzi)에서 발굴한 자료들을 아브라함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조상들 얘기와 비교해보니까 비슷한 점이 많더라, 힉소스라고 불리는 가나안 출신 족속이 한동안 이집트를 지배한 걸 보니 요셉의 후손들이 이집트에 자리 잡고 살았다는 얘기가 역사적 사실일 수 있겠더라, 또 주전 13세기에 가나안 여러 도시들이 불타고 파괴된 흔적이 많더라, 특히 여리고를 파보니 완전히 파괴된 층이 있더라, 등의 얘기들 말이다.


시내산 (출처: Wilhelm Joys Andersen (https://www.flickr.com/photos/wilhelmja))


그럴듯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아도 믿고 싶고, 믿어야 하는데 그걸 뒷받침해주는 증거들이 발굴됐다니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냐 말이다. 상당히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던 학자들도 이런 발굴에 영향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런 발굴들은 훨씬 이전에 이루어졌지만 20세기 중반에 지배적인 경향으로 자리 잡은 건 성서고고학의 조상인 올브라이트 덕분이었다. 오랫동안 미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구약성서 개론으로 널리 쓰였던 버나드 앤더슨(Bernard Anderson)구약성서의 이해 Understanding the Old Testament가 바로 이 계열의 개론서다. 이젠 시대가 달라져서 이 책을 교과서로 쓰는 미국 신학교는 없다고 봐도 되겠지만 말이다. 지금은 구약성서와 고고학이 분리됐다고 봐도 될 정도다.

고고학이 구약성서 이야기의 역사성을 입증하는 학문이라고 말하면 완전히 왕따 당하는 분위기다. 물론 현재도 이스라엘 출신 고고학자들에게서 이데올로기의 냄새가 난다고 조심스레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래도 과거에 비하면 고고학이 성서학에서 완전히 독립됐다고 보는 게 맞다. 나는 고고학자가 아니므로 내 의견을 낸다는 게 우습지만 구약성서의 이야기들과 고고학적 성과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놀랍지는 않다. 왜냐하면 구약성서 이야기가 벌어진 일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구약성서 저자(수집자, 편집자, 설화자를 모두 포함해서)는 사건 현장에 달려 나가서 사건을 눈으로 목격하고 보도하는 기자(reporter)가 아니다(요즘에는 이것도 하지 않고 기사 쓰는 기자들도 있지만). 설령 기자라 해도 개인의 관점이든 언론사의 관점이든 특정한 관점을 갖고 보도하게 마련인데 성서 저자는 기자도 아니었으니 오죽 했겠나 말이다. 그렇다고 성서의 저자가 거짓말을 밥 먹듯 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들은 확고한 관점을 갖고 벌어진 사건을 해석해서 서술했고 이 과정에서 때론 사건의 역사적 사실성과 정확성을 무시한 경우도 있었다는 거다.


3.

이런 얘기는 요즘 나온 구약성서 개론서나 이스라엘 역사서에서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지만 굳이 여기에 쓴 이유는 앞으로 이런 관점에서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를 써보겠다는 뜻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정작 하고 싶고 꼭 해야겠다 싶은 얘기는 그게 아니다.

사실 구약성서를 제대로 읽으려는 사람을 방해하는 것은 고고학이니 역사성이니 하는 거대한얘기들이 아니라 현대인의 건전한 양식은 차치하고 일반적인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이야기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예컨대 뱀과 사람이 대화한다는 이야기(창세기 3), 돌도끼가 물 위로 떠올랐다는 이야기(열왕기하 6:6), 태양이 지지 않고 멈췄다거나(여호수아 10:13) 그게 열 칸 거꾸로 갔다는 이야기(열왕기하 20:11), 사람이 물고기 뱃속에서 며칠 동안 살아 있었다는 이야기(요나 2) 등의 동화나 우화 같은 것들 말이다. 어렸을 땐 이런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고 신기했지만 어른이 됐는데도 여전히 그렇다면 그는 병원에 가봐야 할 게다. 요즘은 어린아이들도 이런 이야긴 안 믿는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들도 믿지 않을 이야기들이 구약성서에 등장하고 구약성서는 그걸 믿으라고 강요한다는 데 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상식으로나 과학으로나 말도 안 되니 내다버려야 하나? 아니면 하느님은 못 하시는 게 없으니 글자 그대로 믿어야 하나? 그도 아니면 지나치게 말이 안 되는 건 내다버리고 그나마 말이 안 되는 건 믿어야 하나? 그렇다면 어떤 건 너무에 속하고 어떤 건 에 속하는지는 어떻게 결정하지? 상식에 어긋나는 걸 다 내다버리면 뭐가 남을까 걱정되기도 하고. 또한 글자 그대로 믿는다는 게 어떻게 하는 것인지 의문도 들고. 그것은 똑같은 일이 지금도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내 상식에 어긋나는 걸 내다버린다는 건 나를 하느님 위에 둔다는 뜻일까? 별별 생각이 다 든다.

내가 과문(寡聞)해서인지 이 문제를 정직하게 다룬 글을 아직 읽지 못했다. 외국 학자 중에는 대놓고 그런 건 안 믿는다고 선언한 학자들을 많이 봤다. 그 중엔 자기 입장을 애써서 장황하게 해명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런 건 일고(一顧)의 가치도 없다고 말한 사람들이 더 많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그렇다는 말이다.

나는 위에서 예로 든 얘기들을 역사적 사실로 믿지 않는다. 그러고도 어떻게 목사 노릇을 하냐고? 맞다. 그러고도 아직까지 목사 노릇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그럼 아직까지 이 문제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었냐고? 천만에! 그렇지 않다. 그 얘길 필요할 때마다 몇 번이나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피해가지 않을 거란 얘기다. 그럼 나도 이런 이야기들을 내다버리는 거냐고? 천만에! 그렇지 않다. 내 생각은 이렇다.

우선 구약성서 시대 사람들은 하느님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걸 전능이라는 책상물림 용어로 표현하는 게 옳은지는 모르지만 좌우간 하느님은 못 하는 게 없다고 믿었던 건 분명하다. 하느님은 뭐든지 하실 수 있다. 도끼를 물에 띄울 수도 있고 태양을 멈출 수도, 뒤로 물릴 수도 있다. 사람 손을 빌리지 않고 성을 무너뜨릴 수도 있고 천사들을 시켜서 185,000명의 군인들을 하룻밤에 몰살할 수도 있으며(열왕기하 19) 홍해를 가를 수도 있다(출애굽기 15). 그들은 그렇게 믿었다. 그것도 요지부동으로 철석같이 말이다.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구약성서 시대에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그 시대에 살지 않았으므로 그걸 확인하는 방법이 없다. 유일한 증거는 구약성서가 그렇게 말한다는 사실뿐이다. 그 얘길 사실로 믿는 사람들이 내놓은 근거도 그게 전부다. 안 그런가? 그 외에 달리 그 얘기의 사실성(factuality)을 입증할 길은 어디에도 없다. 성서에 나오는 이른바 기적을 합리적, 이성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과거엔 있었지만 지금 그런 사람은 없다. 소수의 변증론자를 제외하면 말이다. 나는 그런 일들이 오늘날일어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래서 과거에그런 일이 일어났다고도 믿지 않는다. 지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과거엔 일어났으리라고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고.

그런데 내가 이걸 안 믿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하느님이 그런 일들을 일으켰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갖고 있던 하느님에 관한 생각(이른바 신관이라는 것)에 내가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곧 나는 그들과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란 얘기다. 구약성서 시대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신관은 철저하게 종족주의’(tribalism) 신관이었다. 곧 자기들 신은 자기들만 위한다는 신관 말이다. 그들에게는 보편주의’(universalism)란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런 생각은 구약성서 시대 후기에 와서야 비로소 싹텄다. 그 전까지 신은 만인을 위한 신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기들만을 위한 신이었던 거다.

위에 열거한 이른바 기적들이 왜,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를 따져보자. 철저하게 자기들만을 위해서, 곧 자기 원수에게 피해를 주고 그들을 멸절시키려고 일어났다는 거 아닌가. 이스라엘이 아모리 족속을 더 죽이게 하려고 태양이 멈췄고 히스기야에게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불어넣어주려고 태양이 뒷걸음질을 쳤다는 거 아닌가. 나는 이런 신관을 그들과 공유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다. 그런 신관에서 비롯된 얘기들을 믿을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뉴스앤조이에 가면 볼 수 있다( 몰살하는 하나님에 대한 의구심, ② 대량 살육도 주저 없는 성경의 기적, 믿으면 끝?,  거짓말하는 하나님, 우리 편만 위하는 하나님).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냐고? 나는 그들의 어떤 신관에서 그런 얘기들이 나왔다는 걸 이해한다. 그들의 신관이 갖고 있는 시대적 한계를 이해한다. 그들의 신관은 그들 세계관의 일부이고 그 둘이 어떤 관계인지를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동의하진 않는다. 나는 그들의 세계관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럴 수도 없거니와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다. 그 중에는 동의하는 내용도 있지만 그럴 수 없는 내용이 더 많다. 나는 이해도 안 되고 동의도 안 되는 것을 믿을 수도 없고 믿지도 않는다. 누구나 그렇다. 안 그런가?

나는 모든 사람을 하느님 나라의 잔치 자리에 초대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믿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이 글을 쓴다. 곧 종족적 신이 아니라 보편적인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말이다. 보편적인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종족적 세계관과 신관의 기반 위에서 쓰인 구약성서의 이야기들을 읽는다. 내가 하는 작업은 우선 구약성서 이야기들이 종족적 신관의 틀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따져보는 일이다. 이걸 따져보기 전에 구약성서에 보편적 신관을 들이대는 것은 옳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되고 현대인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신관의 틀에서 그 이야기들을 어떻게 읽고 재해석하는 데까지 나아가려 한다. 물론 각각의 얘기들을 이런 전제에서 읽겠다는 얘기일 뿐이지 같은 얘길 반복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서론 격의 얘긴 이 정도로 하고 다음엔 선악과 이야기를 해보겠다. 제목은 선악과, 하느님의 갑질?’이다.

곽건용/나성 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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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1)

   

정말 성서를 이렇게 읽어도 될까?

그럼, 되고말고! 그렇게 읽어야 해!

 

1.

구약성서를 읽을 때나 그것에 관한 글을 쓸 때 회피할 수 없는 질문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그것이 전하는 말씀이 정말 하느님이 직접 하신 말씀인가 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하느님에 대해서한 말이나 쓴 서술도 그 성격을 진지하게 따져야겠지만 그보다 더 중차대한 문제는 하느님이 직접 하신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이다. 곧 하느님이 나는 이러저러하다.”고 일인칭으로 말씀한 것, 그중에서도 자신에 대해 하신 말씀들을 과연 글자 그대로 하느님의 직접적인 진술로 이해해야 하는가 말이다.

 

이 문제를 왜 구약학자들이 따져 묻지 않았겠는가. 그랬다. 적어도 구약성서를 역사적, 문학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19세기 이후 수많은 학자들이 이 문제의 답을 얻으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왔다. 그럼 결론은? 서구세계에서 보수적인 입장을 갖고 있는 일부 학자들을 제외하고 다수의 학자들은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이 직접 했다고 전해지는 말씀들도 그것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사람의 손을 거쳤다고 이해한다. 곧 구약성서의 하느님의 말씀에도 인간적인 요소가 개입되어 있다는 얘기다. 여기서 몇 걸음 더 나아가서 구약성서의 하느님 말씀은 전적으로 사람의 말이라고 여기는 학자들도 있다. 구약성서를 극단적으로 역사적인 문서 또는 이데올로기적인 문서로 읽는다고 하면서 그 안에서 신적인 요소들을 모조리 이데올로기로 읽고서 지워버리는 학자들 말이다.

 

나는 이 문제가 입증의 문제라기보다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구약성서 자료만 갖고는 어떤 입장도 입증이나 반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 입장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내 입장을 설득할 수도 없다. 서로 평행선을 그릴 뿐이다. 물론 구약성서를 잘 모르는 사람이 공부하면서 입장을 바꿀 수는 있지만 어느 정도 깊이 공부해서 아는 사람은 기존의 입장을 여간해서는 바꾸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니 글을 시작하는 마당에 내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겠다. 그래야 이어지는 글들을 읽는데 도움이 되겠기 때문이다.

 

2.

구약성서의 모든 얘기들은 여러 단계에서 다양한 부류의 전달자들을 통해서 전해졌다. 이 점은 하느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이나 마찬가지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한 누군가가 있었듯이 아브라함이나 모세, 사무엘이나 다윗, 이사야나 예레미야 등의 말도 그것들을 전달한 사람이 있었다는 얘기다. 그 중 예언자는 하느님 말씀을 전달한 대표적인 전달자다. 유일한 예외가 십계명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출애굽기 20장에는 야훼 하느님이 십계명을 직접백성들에게 선포했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이 다른 계명들과 비교해서 우월한 지위를 갖는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십계명도 그것을 전해준 사람이 있었기에 문자로 기록되어 우리에게까지 전달됐다는 점에서는 예외라 할 수 없겠다.

 

구약성서의 말과 사건들은 다양한 전달자들의 손을 거쳤다. 그 중 대표적인 것 몇 개 들어보면, 우선 본래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던 말과 사건들을 최초로 문자화한 사람, 저자’(author)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오랫동안 구전(口傳)된 것을 글로 적은 사람들이니 현대적 의미의 저자는 아니지만 학계에선 오랫동안 그렇게 불러왔다. 이들이 전한 말과 사건들은 길이도 짧고 내용도 단편적이었다. 이런 단편적인 기록들을 모아 더 큰 단위의 얘기로 만든 사람을 수집자’(collector)라고 부른다. 예컨대 흩어져 있던 아브라함에 대한 단편적인 얘기들을 모아서 아브라함 전승을 형성한 사람들을 아브라함 전승의 수집자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이렇게 수집된 전승들을 모으고 다른 전승들과 연결해서 더 큰 단위의 연속적인 얘기로 만든 사람을 편집자’(redactor)라고 부른다. 예컨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전승들을 편집해서 하나의 조상 전승군으로 만든 사람이 바로 편집자다. 우리가 갖고 있는 구약성서는 이렇듯 오랜 기간 동안 다양한 역할을 감당한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 역사적인 책이다.

 

마지막으로 설화자’(narrator)가 있다. 구약성서 모든 얘기들은 설화자에 의해 소개되어 있다. 예컨대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창세기 1:1)라는 말은 하느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라 설화자가 한 말이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얘기를 시작하는 이런 일들이 있은 뒤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셨다.”(창세기 22:1)라는 말 역시 설화자가 한 말이다. 이렇듯 구약성서에 나오는 모든 말과 사건은 설화자가 소개하고 있는데 이 설화자도 일종의 전달자라고 볼 수 있겠다.

 

 

(출처: http://www.flickr.com/photos/danielgallagher/2893958343)

 

우리는 이상의 전달자들, 곧 저자, 수집자, 편집자, 설화자의 이름이 뭔지 모른다. 전통적으로 오경은 모세가 썼고 여호수아서는 여호수아가 썼으며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는 각각 이사야와 예레미야(그리고 바룩)가 썼다고 전해져왔지만 지금 학계에서 그렇게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또한 누가 됐든 하느님이 하늘에서 불러주신 얘기를 사람이 받아서 그대로 적었다고 믿는 학자 역시 거의 없다. 그대로 적지 않았으면 어떻다는 뜻일까? 그 말은 구약성서에 인간적인 요소가 적지 않게 개입되어 있다는 뜻이 되겠다. 하느님이 직접 하셨다고 전해지는 말씀조차도 최소한 한두 단계의 전달자의 손을 거쳐서 전해졌다는 거다. 하느님이 백성들에게 직접 선포하셨다는 십계명조차도 그것을 전달한 사람이 있었는데 다른 것들은 말해 뭐 하겠는가. 요컨대 구약성서의 모든 말과 사건은 누군가를 통해서 전달됐다.

 

관건은 이렇게 전달자들을 거쳐서 전해진 하느님 말씀에 과연 그들의 입김이 어느 정도는 들어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전달자의 입김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고 보는 입장을 택할 수 있다. 그러니까 머리도 가슴도 없는 누군가가, 아니면 머리와 가슴이 있지만 그걸 전혀 사용하지 않은 누군가가 하느님이 직접 하신 말씀을 받아서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사람에게 전달하고 기록했다고 보는 입장 말이다. 나는 이 입장을 택하지 않는다. 나는 머리도 있고 가슴도 있는 누군가가 어떤 경로로든 자기에게 전해진 하느님 말씀을 받아서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공감한 다음에 그걸 사람들에게 전했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하느님 말씀은 이들에게 다양한 경로로 전해졌다. 사람 모양으로 나타난 하느님이나 천사가 전했을 수도 있고 꿈이나 환상을 통했을 수도 있다. 모세에게 그랬듯이 하늘에서 하느님 음성이 들려왔을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그 말씀의 전달자들이 머리도 가슴도 없는 인조인간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이 전달한 하느님 말씀에는 그들 자신의 머리와 가슴이 녹아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구약성서의 하느님 말씀 중에 어느 정도가 하느님 말씀이고 어느 정도가 전달자의 말인지 구별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두고 구약학자들이 오랫동안 논쟁해왔다. 지금까지의 결론은 둘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얽혀 있다는 것이다. 곧 전달자가 하느님 말씀이라고 전한 것에도 인간적인 요소가 들어 있고 사람의 말에도 신적 요소가 들어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야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라는 말에 이어지는 얘기나 이상은 하느님의 말씀이다라는 말에 선행하는 얘기는 문법적으로는 하느님 말씀의 인용이지만 그조차도 전달자의 머리와 가슴을 거쳐서 전해졌으므로 인간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3.

하느님은 근본적으로 알 수 없는 분(the unknowable)이다. 알 수 없으니 하느님이다. 사람이 알 수 있으면 그분이 어찌 하느님이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이 자신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셨다고 믿어왔다. 하느님을 다 알 수는 없지만 하느님 자신이 알려주신 범위 안에서는 알 수 있다는 거다. 나도 여기에 동의한다. 하느님은 근본적으로 알 수 없는 분이지만 자신을 알려주기 원하시는 분이니 얼마나 다행인가 말이다! 그리스도교는 이걸 계시라고 부른다. 하느님이 자신을 전에도 알려주셨고 지금도 알려주신다는 얘기다.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느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 의도적으로 사람의 머리와 가슴을 사용하신다고 믿는다. 왜냐고? 아무리 좋은 하느님의 계시라고 해도 사람이 공감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람이 반려동물을 좋아하는 까닭은 그것들과 공감이 되기 때문이다. 곧 가슴으로 만나기 때문이란 말이다. 또한 아무리 좋은 것이 계시로 주어진다고 해도 사람이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람의 이해수준을 넘어가는 계시는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는 유치원생에게 미적분을 가르쳐봐야 아무 소용없는 것과 같다. 나는 사람이 이해도 못하고 공감도 못하는 걸 하느님께서 계시해주신다고 믿지 않는다.

 

구약성서에 우리가 동의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는 얘기가 많이 나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 중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얘기도 있지만 그보다는 하느님께서 성서가 전달되고 기록되던 당시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세계관 안에서 당신을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곧 당시 사람들은 하느님의 계시를 자기들의 세계관 안에서만 이해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과는 크게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고 그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이해하고 행동하고 있다. 그래서 구약성서의 얘기들에 동의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예컨대 생육하고 번성하라!”라는 말씀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지상과제였다. 숫자가 많아야 살아남을 가능성이 커지고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多産)은 최고의 명령이자 복이었다. 당시의 세계관이 그랬던 거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인구가 75억이 넘는 오늘날 다산이 지상과제인가? 또한 지상과제로 여긴다고 해도 당장 그리스도인부터 그걸 실천하고 있나? 그렇지 않다. 요즘 누가 과거처럼 주렁주렁 아이를 낳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현대인은 구약성서가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지상과제를 행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동성애 금지를 비롯해서 많은 계명들이 이 지상과제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요즘 교회에서 간음이나 동성애를 정죄하는 얘기는 많이 하지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계명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역설하는 교회가 있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다. 안 그런가?

 

다시 말하는데 나는 구약성서가 전하는 하느님 말씀은 그것을 전한 전달자들이 이해한하느님의 말씀으로 읽는다. 하느님 말씀이되 전달자들의 머리와 가슴을 거쳐서 나온 하느님 말씀으로 읽는다는 얘기다. 거기에는 그들의 세계관, 가치관, 신앙관, 신학이 반영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해와 해석의 폭이 넓어졌다. 하느님의 의지와 전달자의 신학을 구분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이미 앞에서 말했다. 전달자들이 자기들 세계관 안에서 하느님을 어떻게 바라봤고 어떻게 믿었는지를 먼저 이해하고 그 기반 위에서 우리 세계관 안에서 하느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려는 것이다.

 

충분히 설명이 됐기를 바란다.

 

곽건용/나성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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