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진의 '덤벙덤벙한 야그'(18)


슬리퍼 끌고 갈 수 있는 '곳'



동네 친구네 마실갔다가 나서는 길. 친구가 오늘 시장에서 과일을 싸게 샀다며 냉장고에서 주섬주섬 시간을 끌더니 이 검은 봉지를 건네주었습니다. “마누라 갖다주라”면서요. 고맙다는 인사는 대충하였습니다. 그만큼 친해서요. 


자두, 참외, 방울토마토, 체리 등 조잡한 구성 ⓒ이범진


집에 와서 봉지를 펼쳐보니 갖가지 과일들이 조잡하게 들어있었습니다. (친구는 ‘그래도’ 방울토마토 꼭지를 떼고 주었다 생색을 냅니다.) 생각해 보니 종류별로 이렇게 조금 조금씩 ‘조잡한’ 구성으로 시장에서 과일을 사기 힘들죠. 동네친구에게서나 구할 수 있는 조합입니다. 고맙네요. 봉지냄새와 함께 달콤시큼한 과일향이 얼굴에 닿았습니다.


봉지 속 조잡한 과일들을 보자마자 제가 ‘동네’를 절실히 그리워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요즘은 자주, 동네에 가까이 친구들이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옥상에서 키우는 상추도 뜯어주고 싶고, 상추 옆에서 지글지글 고기도 굽고 싶고요. 냉장고에 넣어둔 음식들은 왜 그리 빨리 썩을까요? 슬리퍼 끌고 방문할 수 있는 친구네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땅꼬마 때는 친한 친구들이 다 한동네에 살았잖아요. 동네책방에서 빌린 만화책을 검은 봉지가 터질듯 우겨넣어 친구네로 향합니다. 슬리퍼 찍찍 끌며 친구네 앞에 당도하면 발꼬락에 낀 검은 때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거침없이 성큼성큼 친구의 방으로 쳐들어갔습니다. 놀이와 흥분으로 가득 찼던 그 방의 느낌, 지금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요?


슬리퍼 신고 갈 수 있는 곳에 친구가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친구들도 다 흩어졌습니다. 동네마다 집값이 천차만별이라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걸,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습니다. ‘거리’뿐이겠습니까. ‘마음’도 그만큼 멀어졌지요. 눈(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 했나요? 마음과 마음 사이를 슬리퍼 끌고 편히 갈 수 있는 친구도 몇 남지 않았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 만나고 싶은 사람과 멀리 떨어져 살아야만 하는 구조, 극한에 치달은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큰 폐해입니다.


사람과 더불어 자연도 가까이에 있어야 합니다. 신혼집 옥상에 식물을 심고 나서 작은 심경의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일단, 비 오는 게 너무 기쁩니다. 우산 없이 소낙비를 맞던 날도, 탈모 우려에 앞서 옥상에서 비를 맞고 있을 식물들 생각에 기뻤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주 큰 변화였는데요. 작은 텃밭, 남들 많이 하는 거지만 그래도 안 하는 사람이 더 많으니 덤벙덤벙 유난 좀 떨어보자면, 생명감수성이 쭉쭉 올라가는 게 느껴졌습니다.


옥상 '텃밭'(?)


한 달만에 얻은 수확물


아쉽습니다. 작은 노력으로 키울 수 있었던 이 감수성. 더 일찍이 키웠더라면 ‘새만금’이나 ‘4대강’ 뉴스를 더 민감하게 살폈을 텐데요. 평창동계올림픽을 위해 잘려나간(갈) 가리왕산의 나무들도 지키질 못했습니다. 자연과 멀리 살아온 탓입니다. 주변의 자연을 둘러보지 않고 살거나, ‘웰빙’을 위해 소비만 해온 탓입니다.


다시 ‘동네’로 돌아갈 수 있을까?

우리는 다시 자연과 더불어 살 수 있을까?

거대한 굴레에 빠져 거대한 질문을 던졌었는데요. 


큰 질문을 던질수록, 희망은 사그라집니다. 이내 회의주의자가 되고야 맙니다. 그런데 오늘아침 지하철에서 읽은 책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 저항하라》(헨리 나우웬)에는, 작은 것부터 시작하여 큰 저항에 이르라는 조언이 담겨 반가웠습니다.


그것은 아주 작은 것을 선택하는 일일 수도 있다. 깨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편지라든지, 화난 친구에 대한 친절한 한마디, 마지막 남은 것을 권유하는 일, 경쟁자에게 칭찬하는 쪽지를 보내는 일, 대화에 초청, 기꺼이 첫 번째로 나서는 일, 악수를 청하거나 포옹 혹은 키스하는 일 등등. 이런 것들과 다른 많은 선택들이 비단 개인들 사이뿐 아니라 민족과 국가들 사이에 사랑의 공동체를 불러일으킨다. 그것들은 선한 의지에 대한 표징 이상이다. 그것들은 바로 우리가 기다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첫 번째 현실이다.(158쪽)


새 하늘과 새 땅의 현실을 맞이하기 위해, 사람들이 옥상이든 베란다이든 슬리퍼 끌고 갈 수 있는 곳에 식물을 많이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저는 한참 멀었습니다. 비오는 게 좋았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간 가뭄 때문에 물조리개 들고 옥상 한층 오르내리는 게 몹시 귀찮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나비(나방)가 될 애벌레를 무참하게 죽이고야 말았습니다. 생태주의자가 되긴 글렀습니다. 


그래도, 꼴랑 이렇게 흉내만 내는 사람만 좀 늘어나도 ‘4대강 재앙’ 같은 일은 막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유난을 떨어보았습니다. 열매가 또 열리면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슬리퍼 사정거리 내에 계신분들과 나누겠습니다.


이범진/ 월간 <복음과상황> 기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posted by

한희철의 두런두런(3)

 

이 땅 이 시대가 피워 올리는 눈물의 봉화

 

 

언젠가 저 남쪽 끝에 있는 교회를 찾아가 말씀을 나눈 일이 있습니다.

잘 아는 후배가 섬기고 있던 교회였지요.

점심을 먹고 쉬는 시간 후배와 길을 나섰습니다.

답답하고 힘들 때 자신이 찾는 곳을 보여주고 싶다 했습니다.

바다와 섬이 그림처럼 어울리는 아름다운 풍광이 한 눈에 들어오는 언덕이었습니다.

감탄이 절로 나왔지요.

하지만 후배가 찾는 곳은 빼어난 조망대가 아니었습니다.

언덕 위엔 돌을 쌓아 만든 봉화대가 있었습니다.

위험한 일이 생기면 불을 피워 다급한 상황을 알리는 봉화대였습니다.

마음 답답하고 힘들 땐 그 봉화대 위에 올라 무릎을 꿇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봉화를 피워 올리듯 드리는 기도,

세상에 그만한 기도가 어디 흔할까 눈시울이 뜨거웠습니다.

그 때 그 시간 떠올랐던 것은 이 엄동설한 굴뚝 위로 올라간 사람들 때문입니다.

쌍용 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이 70미터 굴뚝에 올라 여기도 사람 있다 외치고 있습니다.

칼바람 에는 까마득한 꼭대기, 거기야 말로 하늘로 향하는 봉화대네요.

이 땅 이 시대가 피워 올리는 눈물의 봉화입니다.

모든 기도 들으시는 주님, 봉화대 위에서 드리는 기도 더욱 들으소서.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신고

'한희철의 '두런두런' > '두런두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를 가짜로 만드는 것은  (0) 2015.02.06
천천히 가자  (0) 2015.02.03
이 땅 이 시대가 피워 올리는 눈물의 봉화  (0) 2015.01.29
개구리 함정  (0) 2015.01.24
살고 싶다 누이여  (2) 2015.01.17
마지못해 구한 은총  (0) 2015.01.12
posted by

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6)

 

아담아, 너는 어디 있느냐?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
누가복음 11:1-13).

 

성서에는 한 사람이 처한 시간과 장소마다 가슴에 그 뜻이 새겨지는 구절들이 많다. 평소에 그냥 넘기던 구절이 불화살처럼 가슴에 와 박히는 순간이 있다. 사람의 손으로는 그 누구도 빼내 주지 못하는 극한 상황에서 야훼는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구원하시는 이”(시편 l8:2)라는 부르짖음이 나의 기도가 되고, 몇 번이고 까무러치는 고문을 당하는 자의 입술에서는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시편 22:l)라는 신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가 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가족의 심장은 복수의 하느님, 야훼여, 일어나소서. 악인들이 언제까지 만세를 부르리이까?”(시편 94:2-3)라는 물음으로 응어리진다.

그러나 자칫하면 기도는 지극히 음흉한 속임수로 전락하기도 한다. 하느님이 아담을 세워 낙원을 돌보게 하시고 만물의 으뜸으로 세우신 뒤로,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당신이 팔 걷고 나서 가로채신 적이 결코 없었다. 인간의 도리와 나라를 펴는 법도는 우리 양심과 성서 그 가운데서도 예언서에 다 밝혀져 있다. 따라서 우리가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하고 나서”(누가복음 l7:l0) 구하면 받을 것이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하지만 겁에 질리고 일신의 모든 것을 하나도 잃지 않겠다는 계산 하에 바치는 기도는 하느님을 조롱하는 짓이다. “누군가 의롭고 용기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해주겠지”, “누구 누구가 나서 줘야 하는데”, “야훼여! 일어나소서. 악인들 맞받아 때려 누이시고 칼로써 끝장내어 이 목숨 구하소서”(시편 l7:l3)라는 말 속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역사의 현장을 기피하는 간교가 숨어 있다.

하느님은 살인청부업자가 아니다. 세상에 엄청난 비극이 터질 때마다 걸핏하면 신은 죽었다!”고 부고장을 돌리며 우리의 하느님이 어찌되었느냐?”(시편 42:12)고 외칠 때에 하느님께서도 하실 말씀이 있는 것이다. “아담아, 너는 어디 있느냐?”(창세기 3:9).

 

성염/전 바티칸 대사

 

신고
posted by

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하는 ‘안으로의 여행’(3)

 

“넌 도대체 어디 있었단 말이냐?”

 

 

 

* 하나님 내지 하나님의 뜻 외에

  다른 것을 구하는 자들은 잘못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아무 것도 구하지 않는다면,

  나는 제대로 된 것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야말로 제대로 된 기도이며 힘 있는 기도입니다.

 

이 땅의, 소위 성공(?)한 성직자들이 세상의 도마 위에 올라 난도질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내지 하나님의 뜻 외에 다른 것’을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영계(靈界)를 향하지 않고 물질계를 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잘 못 구하고 있는’ 줄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프란체스코 교황의 표현대로 ‘영적 치매(癡呆)’라고나 할까요!

 

 

“물질계에 더 많이 깨어 있을수록 영계에 더 많이 잠들어 있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에게 잠들어 있을 때, 다른 깨어 있음이 거룩한 은총의 문을 닫아버린다”(젤라루딘 루미).

 

성직의 대물림뿐 아니라 교회[재산]의 대물림도 감행하는 철면피! 오, 혈연(血緣)은 쇠심줄보다 더 질기고 질긴 모양입니다.

 

석가는 깨달음을 얻고 나서 자기 아버지가 있는 카필라 성으로 돌아와 밥을 빌어먹는 거지 행각을 했지요. 아버지 정반왕(淨飯王, Suddhodana, 슈도다나)이 아들 석가를 찾아가 걸식을 못하게 막으며 “석가족에는 거지란 없다. 왜 밥을 빌어 집안 망신을 시키고 다니느냐?”고 꾸짖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석가는 “나는 석가족이 아닙니다”라고 대꾸했습니다. 이는 곧 나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깨달음을 얻은 석가는 혈연에도 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는 또 어떻습니까. 그는 가나의 혼인잔치 자리에서 자기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불렀습니다. 속인의 눈으로 보면 불효자의 언사가 아닐 수 없지요. 그러나 이것은 예수가 ‘혈연’에 매이지 않고 하늘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겼음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예수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마태복음 12: 50).

 

하여간 예수나 석가는 ‘제대로 구하는 것’의 본보기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늘 아버지(신성 혹은 불성)와 하나가 된 그분들은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었지요. 모든 것을 다 가지신 하늘 아버지와 하나가 되었는데 무엇을 더 구하겠습니까. 그분들은 ‘아무 것도 구하지 않아’, ‘제대로 구한’ 본보기가 되셨습니다. 하늘 아버지와 하나 됨을 구하는 것, 이것 외엔 구할 만한 게 없습니다. 이것 외에 더 힘 있는 기도는 없습니다!

 

*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변하게 하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에는 변화라는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생겨나고 자라고 늙어 죽어 사라지는 변화 속에 있습니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이 생멸(生滅)의 ‘변화’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것들 속에 ‘변화의 낙인’을 찍어두었기 때문이지요. 산스크리트어에서도 ‘세상’을 일컫는 단어 ‘jagat'는 ’변화하는 것‘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변하는 것들의 세상에

모든 것은 신(神)으로 덮여 있도다.

그러니 인간들이여

내버림의 지혜를 가져

어느 누구의 재물도 탐내지 말지어다”(이샤 우파니샤드).

 

하지만 어리석은 인간들은 이 변화를 피하고 싶어 더러는 만리장성을 쌓고, 더러는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철옹성을 짓고, 또 더러는 신의 이름을 빌어 사원의 탑을 크고 높게 수축하지만, 그 무엇으로도 쇠락과 소멸의 운명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아득한 옛날 이 땅별에서 크나큰 위세를 떨치던 공룡도 사라졌고, 또 다른 공룡 인간의 시대도 뉘엿뉘엿 저물어가려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덩치 큰 힘이 센 공룡들도 ‘변화의 낙인’을 피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 밝은 우리의 길잡이는 “그러므로 우리도 스스로 하나가 되어야 하고, 모든 것을 여의여야 하고, 확고부동해야 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일갈합니다. 하나님만이 변화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불멸의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밖에 있는 것은 모두 무(無)일 뿐”이기 때문이지요.

 

*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계시건만,

  우리는 그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하나님은 안에 계시건만,

  우리는 밖에 있다.

  하나님은 집에 계시건만,

  우리는 외출 중이다.

 

작년에 세상을 뜨신 제 노모께서 93세의 나이셨던 몇해 전입니다. 설날 아침 세배를 받으신 노모가 말씀하셨습니다.

“어서 죽어야 할 텐데!”

아, 어머니 정신이 아직도 말짱하시구나. 돌아가야 할 때를 또렷이 기억하고 계시니.

인도의 고전 《마하바라타》에 나오는 유디슈트라는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일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남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자기는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돌아갈 곳을 아는 사람입니다. 뒷모습이 추한 사람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도 자기 돌아갈 곳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는 늘 집[하나님] 바깥에 있고, 그의 마음은 항상 ‘외출’(外出) 중이지요.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간극(間隙)이 생기는 것은 나의 무지 때문입니다. 이 간극을 없애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분이 바로 내 안에 계심을 자각하면 됩니다. 가장 귀중한 보물을 바로 내 안에 감춰두신 창조의 신비!

“넌 도대체 어디 있었단 말이냐?”

“내가 아버지 집에 있다는 걸 왜 모르십니까?”

열두 살 소년 시절에, 예수는 벌써 이런 문답을 자기 부모와 나누었다고 합니다.

하늘의 뜻을 헤아릴 나이라는 ‘知天命’을 훌쩍 뛰어넘어, 나는 겨우 이제야, 그분 집에 머물러 살고 있는 걸 사무치게 깨닫습니다!

하지만, 이제라도 그걸 깨닫는 은총을 주셨으니 고맙고 고마울 뿐!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