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6)

  임시정부 돌아왔지만 개인 자격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충칭에서 일제의 패망을 내다보면서 좌우합작을 이루고 광복군을 창설하여 본토진격 등을 준비하였다. 191931혁명을 계기로 413일 상하이에서 출범한 임시정부는 27년 동안 중국 관내를 돌아다니면서 일제와 싸운 한민족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기관이었다.

임시정부는 19411128일 건국 강령을 제정하여 해방 후 건설할 민족 국가의 성격과 강령을 마련하고, 129일에는 일본에 선전을 포고하는 한편 19444월 약헌(헌법)을 개정하여 부주석제를 신설, 김규식을 영입하고 민족 혁명당 등과 통합하여 좌우합작 정부를 출범시켰다.

임시정부는 또 국무위원 장건상을 연안에 특사로 파견하여 김두봉을 비롯한 독립동맹 간부들을 만나, 충칭에 모여 통합 문제를 협의키로 하였다. 그러나 시국이 급진전하면서 김두봉의 충칭행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것이 성사되었으면 해방 후 통일 과업을 논의하는 데도 큰 기여가 될 수 있었는데, 안타까운 일이 되었다.

임시정부는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고임시정부의 당면 정책4가지를 제시했다.

1. 임시정부는, 최소기간 내에 입국할 것

2. 영 등 우방과 제휴하고 연합국 헌장의 준수

3. 국내에 건립될 정식 정권은 반드시 독립국가민주정부균등사회를 원칙으로,

4.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와 매국적 처단




김구 주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115일 장개석 정부가 내준 비행기를 타고 5시간 만에 임시정부가 출범했던 상하이로 돌아왔다. 그러나 미국이 보내주기로 한 비행기는 상하이에 머문 지 18일 만인 1123일에야 도착했다. 이날 김구 등 115명은 미군 C-47 중형 수송기편으로 3시간 만에 김포 공항에 도착 환국하였다. 그나마 2진은 일주일 후 목포 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국내에는 임시정부 환영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었으나 미군정측은 이를 알리지 않아 공항에는 환영객 하나 없었다.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개인자격으로 귀국케 하는 등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1016일 미국 태평양 방면 육군총사령관 맥아더가 주선한 비행기를 타고 도쿄를 경유해 서울에 도착했다. 미 육군 남조선 주둔군사령관으로 임명된 존 하지 중장이 이승만이 일본에 도쿄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만나려 일본까지 가서 맥아더와 3인 회담을 가진데 이어 대대적인 귀국 환영 대회를 연 것과는 크게 대조되었다.

미국은 투철한 민족주의자인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보다 친미성향이 강한 이승만을 처음부터 점찍고 차별대우를 하였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환영 준비 위원회에서 마련한 경교장과 한미호텔에 머물면서 해방정국에 대처하였다. 1219일 대규모적인 임시정부 개선 환영식이 열렸다. 미군정은 냉대했지만 국민은 임정요인들을 뜨겁게 환영했다. 식장에는 조선 음악가 협회가 제정한임시정부 환영가가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임시정부 환영가


1.

원수를 물리치고

맹군이 왔건만은

우리의 오직 한 길

아직도 멀었던가

국토가 반쪽이 나고

정당이 서로 분분

통일없인 독립없다

통일만세 통일만만세

 

2. 

30년 혁명투사

유일의 임시정부

그들이 돌아오니

인민이 맞이하여

인제는 바른 키를

돌리자 자주독립

독립없인 해방 없다

통일만세 통일만만세.

 

환국한 임시정부는 해방 정국의 주역이 되지 못하였다. 12월 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5년 신탁통치를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임정 요인들은 반탁운동에 앞장서고, 미군정과 친일세력으로부터 사사건건 견제를 받았다. 참다못한 김구 주석은 1231일 내무장관 신익희에게국자(國字)12호의 임시정부 포고문을 발령케 했다. 미군정과 정면 대치하는 결단이었다.


국자 제1


1. 현재 전국 행정청 소속의 경찰 기구 한국인 직원은 전부 임시정부 지휘 하에 예속케 함.

2. 탁치 반대의 시위운동은 계통적질서적으로 할 것.

3. 돌격 행위와 파괴 행위를 절대 금함.

4. 국민의 최저생활에 필요한 식량연료수도전기교통금융의료기관 등의 확보

운영에 대한 방해를 금함.

5. 불량상인들의 폭리 매점 등은 엄중 취제함.


하지는 이와 같은 임시정부의 처사를 군정에 대한 쿠데타라고 비판하면서 김구를 구속하여 인천 감옥에 수감했다가 중국으로 추방할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한국 민중의 대대적인 저항을 불러올 것이라는 주변의 만류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임시정부(김구)와 미군정은 돌이키기 어려운 관계가 되었다. 해방 정국은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좌우 세력의 찬반투쟁으로 갈리고 통일정부 수립과 친일파 청산 등 민족적인 과제는 실종되었다. 임시정부는 미군정이 비록 실체로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정치적으로는 가장 활발하게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한 세대에 걸쳐 피어린 투쟁으로 독립된 나라가 또 다시 외국의 신탁통치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임시정부 측의 소신이었다.

김구는 미군정뿐 아니라 소련측으로부터도 배척되었다. 1946320일 미소공동위원회가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렸다. 소련 대표 스티코프가 김구를 반동적반민주주의적이라고 비난하면서 앞으로 수립된 민주주의 임시정부는 모스크바 3상회의를 지지하는 민주주의 정당과 사회 단체를 망라한 대중 단결의 토대 위에서 창설되어야 한다고 하여 사실상 김구와 임시정부 세력을 배제하는 발언을 하였다. 김구는 격노하여 하지와 만난 자리에서 이를 따졌다.

김구 : 장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는데 당신들은 나라를 전략적으로 점령한데 불과하오. 자주 독립 정부를 세워야 할 것이 절실한 당면 과제인데 미소 양국이 한국에 신탁 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은 잘못이 아니겠소.

하지 : 김구 선생, 신탁통치안은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조치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 역시 한국의 자주정부 수립을 희망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김구 : 아니 잠정적인 조치일 뿐이라니, 물론 장군도 소련 스티코프란 자의 개회사를 기억 하고 있을 것이 아닙니까. 분명히 말해두겠지만 이번에 열리는 미소공위는 한민족 전체의 염원을 짓밟는 강대국의 처사라고 아니할 수 없소. 따라서 신탁통치를 반대 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당연하고도 엄숙한 의사표시인 것이오.(백범김구전집, 5)

소공위가 결렬되고 한국 문제가 유엔으로 넘어가 남한 단독 선거가 결정되면서 김구는 김규식 등과 남북협상을 제기하고 평양에서 북한 지도자들과 만나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논의했으나, 결과적으로 남북한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김구 주석의 암살로 사실상 종료되고 말았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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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5)

해방군 또는 점령군, 미군정 3

 

일본이 미국에 공식 항복한 날은 194592일 도쿄만의 미국 군함 미조리호 함상에서였다. 일본 정부 대표 시게미쯔 가오루, 일본군 대표 우메즈 미찌로우는 맥아더 장군 앞에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하여 일본의 통치 권한을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제한 하에 둔다는 항복 문서에 조인했다.

시게미쯔 가오루는 주중 일본 공사로서 19324월 상하이 일왕 생일 및 전승기념행사장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한쪽 다리가 잘린 장본인이다.

맥아더는 이날 연합군 최고 사령부 일반 명령 제1호로서 동아시아 각 전선의 일본군의 항복을 수락하고 그 무장을 해제하기 위한 연합국간의 지역적 분담을 발표했다. 이는 전동북아시아에 대한 국제적 역학 관계를 규정한 문서였다. 여기서 처음으로 북위 38도라는 인위적인 선에 의한 한반도가 양단되는 것이 드러났다.

일반 명령 제12항은 만주, 북위 38도 이북의 한국, 화태 및 천도열도에 있는 일본의 선임 지휘관과 모든 육상해상항공 및 보조 부대는 소비에트 극동군 최고 사령관에게 항복할 것”, 3항은 일본 대본영, 일본 본토에 인접한 제 소도, 북위 38도 이남의 한국, 유구 제도, 필리핀 제도에 있는 일본 선임 지휘관과 모든 육상, 해상, 항공 및 보조 부대는 미국 태평양 육군 총사령관에게 항복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앞서 820일 미군의 B29가 서울 상공에 나타나 웨드마이어 장군 명의의 삐라를 시내에 살포했다. 내용은 미군의 진주를 예고한데 이어, 92일에는 다시 미 제24군단 사령관 하지 중장의 명의의 포고 삐라를 살포했다.남한 민중 각위에 고함>이란 제목의 재조선 미군 사령관 포고 1’2. 3으로 계속된 포고령은 해방군이기보다 점령군적인 내용이 담겼다. “주민의 경솔무분별한 행동은 의미 없는 인민을 잃고 아름다운 국토가 황폐화되어 재건이 지연될 것이다.”, “각자는 보통 때와 같이 상업에 전념해주기 바란다. 이기주의로 날뛴다든가 혹은 일본인 및 미 상륙군에 대한 반란행위, 재산 및 기설 기관의 파괴 등의 경거망동을 하는.” 따위의 협박적인 내용이었다.

이승만, 김구, 존 하지(John Reed Hodge) (출처: 서울신문)

남북에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마련한 일련의 정책과 분위기는 해방군이라기보다 점령군으로서의 성격을 나타냈다. 남한의 경우 912일 하지 중장이 아놀드 소장을 군정 장관에 임명하고, 20일에는 군정청의 성격임무기구 및 인사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미군정체제가 수립되었다.

이에 앞서 98일 남한에 상륙한 미 제7사단은 제1단계로 서울경기 지역을 점령하고 712일부터 23일까지 개성수원춘천 등을 점령했다. 2단계에는 제40사단이 경남북지역을 점령하고, 7사단의 점령 지역이 확대되어 1010일까지 경기강원의 모든 지역을 점령했다. 3단계는 6사단에 의해 전남북 점령으로 남한 전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점령이란 표현을 썼지만 일본군의 저항이 전혀 없어서 무혈입성이나 마찬가지였다.

미군정 당국은 남한에서 군정을 실시하면서 충칭의 임시정부는 물론 여운형의 인민 공화국 등을 인정하지 않았고,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구성된 인민 위원회, 치안대 등 각종 자치기구들을 강제로 해체시켰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기구를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조선인 행정 관리, 경찰을 인계받아 통치했다. 일제에서 미국으로 주인만 바뀐 셈이다.

하지 장군은 김성수 등 11명의 한국인을 군정 장관 고문으로 임명한데 이어 조병옥장택상 등을 경찰 책임자로 임명했다. 또한 영어를 잘하는 지주 출신의 친일 인사들을 행정 고문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사실상 과거의 친일관료경찰지주 등 반민족적 인사들의 재등장 과정이었으며 사회주의자들은 물론 임시정부 인사들도 배제되었다.

미군정은 치안 유지법, 사상범예비 구금법 등 일제가 만든 악법을 폐지했으나 신문지법, 보안법 등은 존속시켜 점령 통치에 활용했다. 미군정기에 발생한 대구 101 항쟁, 제주 43항쟁 등 민중 항쟁에는 친일경찰이 미군정 경찰로 변신하여 국민을 탄압, 수탈한 데서 발생한 요인이 적지 않았다. 이른바 통역 정치의 병폐도 많았다. 미군의 통역을 하면서 귀속재산을 가로채는 등 악덕 모리배가 횡행하였다.

미군정체제에서 입법 기구는 1946214일 개원한 남조선과도 입법의원이 효시가 된다. 미군정 사령관의 자문 기관으로 출범한 민주의원은 의장 이승만, 부의장 김구김규식이 선출되었고, 좌익계를 제외한 인사들이 총망라되었다. 이승만이 의장을 사퇴하면서 김규식이 대리 의장을 맡아 운영하였다. 이승만이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고, 김구김규식 등은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함으로써 민주의원은 사실상 기능이 정지되었다.

그 후신으로 설립한 것이 남조선과도 입법의원이다. 1946년 미군정법령 제18호로 설치된 입법 의원은 민선 의원 45, 관선 의원 45명으로 구성되었다. 민선 의원은 간접 선거로 선출되었는데, 이승만과 한민당 계열이 대부분 당선되었고, 관선 의원은 좌우합작위원회 등 중도 노선의 각계 인사가 임명되었다. 의장 김규식, 부의장 최동오윤기섭이 선임되었다.

입법 의원에서 심의 제정한 법령이 50여 종이었는데 미군정은 민족 반역자부일 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법과 농지 개혁법 등 가장 중요한 입법은 공포하지 않음으로써 친일청산과 농지 개혁의 시기를 놓치게 되었다. 두 법안이 사산한 것은 한민당 출신의 입법 의원들과 미 군정청 간부가 된 친일세력의 방해 때문이었다.

미군정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미소공동위원회 활동과 결렬이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으로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1946320일 개최된 미소공위는 미국측 수석위원 아놀드 소장, 소련측 수석위원 스티코프 중장이었다.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좌우익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열린 미소공위는, 김구김규식 등의 좌우합작과 남북 협상론, 이승만과 한민당측의 단독정부 수립론, 여기에 미국과 소련의 이해 대립으로 공전을 거듭하다가 결국 미국의 제안으로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면서 막을 내렸다.

19471114일 제2차 유엔 총회는 한국 문제 해결을 위해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을 설치하여 그 감시하에 19483월까지 자유 선거를 실시, 국회 및 정부 수립 후 미소 양군이 철수한다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소련측은 이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위반하는 것이며, 한국 문제는 미소양군이 철수한 후 조선인 스스로 결정하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반대했다. 당시 미국의 영향권 아래 있던 유엔은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가능한 지역만의 총선거를 실시토록 결의하였다.

1948815일 남한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913일 한미간의 행정권 이양이 이루어지면서 만 3년여 만에 미군정 체제는 완전히 종결되었다.

3년 동안 무소불위의 위치에서 남한을 통치한 존 하지는 1893612일 미국 일리노이 주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정규 육사가 아닌 고등사관 양성소 출신으로 육군부에서 근무하다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전선에 투입되었다. 육군 24군단 소속으로 오끼나와에서, 194511월로 예정된 일본 본토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 일본의 항복과 함께 남조선 점령군 사령관으로 선발되었다. 그와 그의 부대가 선발된 것은 한국에 가장 빨리 이동할 수 있다는 물리적인 이유에서였다.

하지는 주둔군 사령관으로 군림하면서 김구를 중국으로 추방하려 하는 등 한국 민족주의 세력을 적대하고, 국면을 분단 정부 수립으로 이끌어가는 주역이었다. “그의 점령 통치는 한반도에 분단의 씨앗을 뿌렸다. 그는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면 그만이었지만 한국인들은 여전히 역사남긴 부()의 유산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정용욱,존 하지와 미군점령통치 3)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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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4)

여운형의 암살과 건국 준비위원회

 

포악한 일제식민체제는 국내에서의 독립 운동을 불가능하게 했다. 인도나 베트남 등 아시아국가가 자국에서 독립 운동을 한데 비해 한국은 중국 등 해외에서 이루어졌다. 그만큼 일제의 지배가 강폭했던 것이다.

예외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국내에서 박헌영 등이 지하에서 항일 운동을 계속하고, 1919년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하고 국내에 밀사를 보내어 대규모 항일 시위를 준비토록 하는 등의 역할을 했던 여운형이 일경에 피체되어 국내로 들어와서도 항일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여운형은 <조선중앙일보>사장 때에는 베를린 올림픽 대회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신문사가 폐간되는 고초를 겪었다.

1929년 체포되어 용산역에 내리는 여운형(출처: 동아일보(1929)) 

 

여운형은 일제의 패망을 내다보면서 준비를 서둘렀다. 1944년 8월 10일 서울 삼광 한의원에서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고 지방 조직에 이어 10월에는 경기도 용문산에서 농민 동맹, 1945년 3월에 건국 동맹 산하에 군사 위원회를 조직하는 한편, 북경과 연안 등지에 연락원을 파견하여 임시 정부와 화북조선독립동맹 등 해외 혁명 단체와의 연계를 시도했다.

패망의 소식을 접한 조선 총독부는 8월 15일 아침 엔도 정무 총감을 통해 여운형에게 치안 유지의 책임을 제의하였다. 이에 그는 5가지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① 전조선의 정치범, 경제범을 즉시 석방하라.
 ② 집단 생활지인 경성(서울)의 식량 8, 9, 10월 3개월분을 확보하라.
 ③ 치안 유지와 건설 사업에 아무런 구속과 간섭을 말라.
 ④ 조선에 있어서 추진력이 되는 학생의 훈련과 청년의 조직에 간섭을 말라.
 ⑤ 전조선에 있는 각 사업장의 노동자들을 우리 건설 사업에 협력시키며 아무런 괴로움을 주지 말라.

엔도는 이 제의에 동의했고 여운형은 해방 공간의 막중한 시기에 치안 유지의 책임을 맡았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비밀리에 조직했던 건국 동맹이 뒷받침되어서였다. 여운형은 해방 당일 홍증식에게 <매일신보>를 접수해 조선 독립을 알리는 호의를 찍어 알리도록 하고, 여운홍에게 경성 방송을 접수해 조선 독립을 방송토록 하는 한편 건국 동맹원을 소집하여 치안대 조직, 식량 대책 위원회 조직 등의 임무를 부여하고, 안재홍과 함께 조선 건국 준비위원회(건준)을 조직하였다.

건준은 여운형을 위원장으로, 안재홍을 부위원장으로 하여, 좌우익의 인사를 고루 실무 부서 책임자로 선임했다. 3대 강령을 내세웠는데, 첫째는 완전한 자주 독립 국가의 건설, 둘째는 전체 민족의 정치적ㆍ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 셋째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여 대중 생활의 확보를 기한다는 내용이었다.

여운형은 9월 4일 미군의 진주에 앞서 건준을 모체로 국내 혁명 세력을 주축으로 하는 인민 위원회를 구성키로 하고 조직을 확대하여 한 달 만에 전국에 145개의 지부가 결성될만큼 국민의 지지가 따랐다. 미군 환영을 위해 여운홍ㆍ백상규ㆍ조한용을 건준의 대표로 인천에 보내 하지 사령관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9월 2일에 맥아더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ㆍ소 양국의 분할 점령 정책을 발표하고 9월 7일에는 미 극동 사령부가 남한에 미군정의 실시를 선포하면서 인민 위원회 등을 불법 단체로 적시하였다.

여운형은 9월 6일 전국 인민 대표자 회의에서 임시 의장으로 선출되어 활동중, 9월 7일 6인조 테러단의 습격을 받았다. 미군정이 여운형을 적대시하고 그의 조직을 불법 단체로 인정하면서, 잇따른 테러에 시달렸다. 인민 위원회 조직이 공산주의자들의 수중으로 넘어간 것은 여운형의 일대 정치적 실패작이라는 평가가 따른다.

미군정 당국이 여운형과 건준을 적대시한 데는 배경이 있었다. 하지 장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전에 미군은 선발대를 서울로 보내 총독부의 항복 절차를 밟도록 했다. 총독부는 이 선발대 요원들을 최고급 호텔에서 영접하면서 여운형이 공산주의자라는 날조한 문건을 만들어 건넸다.

총독부는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여운형에게 과도기적인 치안 유지를 맡겼는데, 그가 건준을 조직하는 등 독립 정부 수립 쪽으로 활동하자 그를 배척하는 정보를 미군측에 제공한 것이다. 대신 친일경력의 한민당 인사들을 미화시켰다.

하지와 미군정 수뇌부는 이 같은 총독부의 정보에 따라 민족주의자들을 배척하고 친일부역자들을 군정의 요직에 중용하고 한민당을 지원하였다. 반면에 임시정부와 건준→인민위원회 등은 불법 단체가 되고 말았다.

에드가 스노가 지적한대로 아무런 준비없이 남한을 점령한 미군이 건준을 활용했더라면 한국의 해방 정국은 크게 방향을 달리했을 것이다. 건준은 여운형, 안재홍을 비롯하여 김병로, 이인, 허헌 등 우익 및 중간 노선의 인물들이 중심이 되고, 중앙 위원회에도 김준연, 이용설, 김약수, 이강국, 김동화, 최용달 등을 임명하여 좌우 각 계열 인사들이 고루 포함되었다.

송진우ㆍ장덕수 등 우파 세력은 건준에 참여를 거부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충칭의 임시 정부 봉대를 내세웠다. 임시 정부의 환국을 기다린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던 중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개인 자격으로 귀국케 하면서 돌변하여 한민당을 급조하고 미군정에 참여했다. 이들은 일제 강점기 자신들의 행적 때문에 새로운 권력의 실체로 등장한 미군정의 눈치를 살피면서 건준 참여를 주저하고, ‘임정봉대’에서 ‘미군정 봉대’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건준은 좌절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의미는 막중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첫째, 건준의 조직은 진정한 민족적ㆍ민주적 정부 수립을 위한 기초적 준비 작업이자 민족 통일 전선을 결성하기 위한 시도였다. 즉 건준은 민족 통일 전선인 동시에 건국 사업의 조직적, 정치적 준비 작업 수행자였다. 이것이 건준의 가장 중요한 본질적 의의였다.

둘째, 건준은 해방직후의 치안 유지, 식량 관리, 재산 관리라는 과도적 임무를 담당했다. 이 임무를 단시일 내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이미 건국 동맹에서 수년간 조직ㆍ준비해 온 과제였기에 체계적인 처리가 가능했다.

셋째, 결국 건준의 결성은 정세에 비추어 합리적이며 순리적이었다. 일제 패망 뒤 자율적인 정부 수립이 당면과제였던 상황에서 건국의 준비조직인 건준의 결성은 민족적 요구를 자연스럽게 반영한 것이었다. 또한 건국 동맹이라는 조직과 준비된 역량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결국 동맹은 건준으로 자연스럽게 연계될 수 있었다(정병준,《몽양 여운형 평전》).

일제의 패망을 앞두고 미국은 일본 점령에 대비하여 2천 명의 행정관을 선발하여 교육시키고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한국에 대해서는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없었고, 오히려 자생적인 건준과 임시 정부를 인정하지 않은 과오를 저질렀다.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점령 정책을 수월하게 하기 위한 책략이었겠지만, 전범국 일본에 비해 한국의 차별 정책으로 피해는 오롯이 한민족이 겪게 되었다.

해방직후〈여운형론〉을 쓴 이강국은 “일본제국주의의 포악한 위협과 교묘한 회유 속에서도 권위와 절도를 지키면서 지하의 투사, 지상의 신사로서의 전술을 겸비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 같은 평가가 아니더라도 여운형의 독립 운동과 해방 후 건준 조직, 김규식과 좌우합작 등은 통일 정부 수립에 큰 기여가 될 뻔했는데, 친일세력과 미군정에 거부당하고, 그가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극우 청년에게 암살당하면서 건준의 이상도 그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에 묻히게 되었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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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3)

누가 38선을 그었는가

 

한민족은 918년 왕건이 삼한을 통합한 이래 1,000년 이상을 통일된 민족국가로서 영광과 고난을 함께해왔다. 그 사이에 몽골의 전란, 왜구침범, 임진ㆍ정유재란 7년 전쟁, 정묘ㆍ병자호란의 치욕, 망국ㆍ식민지를 함께 겪었다.

우리 민족은 오랜 고난의 역사를 살아오면서 거듭되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항상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외세의 침략은 군사ㆍ정지ㆍ경제ㆍ문화ㆍ종교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나타났지만, 외압에 눌리면서도 결코 그들에 동화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주변의 강자였던 말갈ㆍ흉노ㆍ여진ㆍ만주ㆍ몽골족 등의 행방을 살펴보면 한민족이 얼마나 강인하고, 그리고 민족적 정체성을 지켜왔는가를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고대 부족국가 형성기에 중국 한나라의 침략으로 국토심장부와 주요 영역에 400여 년 동안이나 외세의 식민 지배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하여 고려시대 40년의 몽골(元) 지배, 조선조 전기 250년의 명나라 간섭, 병자호란 이후 260년의 청국 복속, 일제 35년의 식민 지배라는 가혹한 침략과 수탈을 당하면서도 굳건한 민족의 정체성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따라서 한민족 공동체의 원형질이 되어온 ‘민족’이란 접두어는 우리에게 언어나 이데올로기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늘 외세에 짓밟히고 강대국의 지배와 속박에 시달려온 우리에게 민족이란 용어가 각별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최근 일부 식자들 사이에서 ‘민족’이란 용어나 ‘민족주의’가 마치 고리삭은 개념처럼 배척ㆍ폄하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노릇이다.

제국주의적 민족주의나 침략주의형 민족주의는 배척해야 마땅하지만, 민족공동체의 유지와 이를 위한 저항적 민족주의는 보호받고 앙양되어야 마땅하다.

1,000년 이상을 운명 공동체로 함께해온 한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면서 반도의 허리가 잘리는 분단 체제가 되었다. 강토 분단과 민족 분열의 원죄는 일본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서 남북에 진주한 미국과 소련, 그리고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 정부를 세우지 못하고 남북에 각각 분단 정권을 세운 좌우, 남북의 지도자들에게도 책임이 적다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북위 38도선으로 국경 아닌 국경선이 되어 국토가 양단된 지 어언 70년이 되었다. 38선은 그동안 가족적으로는 이산의 아픔, 공동체로는 적대의 대상이 되어 증오의 칼날을 갈아왔다.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6.15선언, 10.7선언 등 화해 협력의 시기가 없지 않았지만, 남북의 극우ㆍ극좌세력이 대결과 증오심을 작동하여 정권을 잡거나 유지하려 들면서 파탄되곤 하였다.

1. 아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
   아아 물이 막혀 못 오시나요
   다같이 고향땅을 오고 가는데
   남북이 가로 막혀 원한 천리 길
   꿈마다 너를 찾아 꿈마다 너를 찾아
   삼팔선을 탄(歎)한다.

<가거라 삼팔선>, 1946, 이부풍 작사, 남인수 노래

 1.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
    저하늘 저산 아래 아득한 천리
    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
    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

<꿈에 본 내 고향>, 1953년, 박두환 작사, 김기태 작곡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3년 11월 27일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수상, 장개석 중국 총통이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회담을 갖고 대일본전 기본 목적에 관해 협의한 결과로 공동 코뮤니케를 채택했다.

코뮤니케 중에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일본이 탈취한 태평양 제도를 박탈하고, 만주ㆍ대만ㆍ팽호 열도 등을 중화민국에 반환하며, 일본이 약취한 모든 지역에서 일본 세력을 축출한다.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특별 조항을 넣어 “현재 한국민이 노예 상태에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 에 자유독립국가로 할 결의를 가진다”고 선언하였다. 연합국 수뇌들의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명시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임시정부 김구 주석 등이 장개석 총통을 움직여 얻어낸 성과였다.

1945년 2월 4일부터 7일까지 미ㆍ영ㆍ소 3개국 수뇌가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다시 회담을 갖고 일본에 항복과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 회담에서 공식 거론되지는 않았으나, 루스벨트가 제안한 미ㆍ소ㆍ중 3국에 의한 한반도 신탁통치안이 재확인되었다. 이때 한반도 분단의 씨앗이 잉태된 것이다. 

얄타 회담 (출처: Marion Doss (https://www.flickr.com/photos/ooocha))

 

1945년 7월 26일 독일의 포츠담에서 미ㆍ영ㆍ중ㆍ소 4개국 수뇌 회담이 열렸다. 선언문에는 일본에 항복을 권하고 전후의 대일 처리 방침을 밝힌 13개조의 합의문을 채택했다. 카이로 선언의 실행과 일본 영토의 한정, 일본군의 무장 해제, 전쟁 범죄자 처벌, 일본군수산업의 금지 등이 담겼다. 그리고 카이로 선언에서 채택했던 한국의 독립이 여기서 다시 확인되었다.

미국은 2차 대전 종결 후 한반도에 관해 일정 기간 동안 4대국이 신탁 통치를 한다는 구상이었다. 한국민이 자활ㆍ자력ㆍ자립의 능력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특히 미군이 오끼나와를 점령할 때 막대한 희생을 치룬 것을 감안하여 만주에 주둔한 일본 최강의 관동군을 무장해제시키는 데는 소련의 참전이 중요하다는 인식이었다.

얄타 회담에서는 소련군이 유럽전에서 역할이 끝나는 즉시 대일 참전을 하기로 약속되었다. 일본은 8월 6일과 9일 두 차례 원자폭탄 세례를 받고도 소련의 참전을 기다리느라 항복의 시간을 늦추고 있었다. 소련이 참전하여 한반도의 북쪽에 들어오면 일본 대신 한반도가 분단될 것으로 내다 본 것이다.

일본의 예상대로 8월 9일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하여 만주에서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한반도를 공격 목표로 삼아 진격하였다. 8일에는 나진, 9일에는 웅기와 10일 경흥으로 진공하였다. 8월 9일 일본은 천황제 유지의 조건부로 중립국 스위스를 통해 포츠담 선언의 수락 의사를 밝힘으로써 항복하기에 이르렀다.

소련 극동군이 한반도를 향해 진격하면서 미국무성ㆍ육군성ㆍ해군성의 3자 정책조정위원회는 8월 12일 저녁 딘 러스크 대령과 본스틸 대령이 아시아 지도를 펴놓고 30분 만에 서울을 미국측에 포함시키는 조건으로 북위 38선을 분계로 하여 소련군과 미군의 점령 지역을 나누자는 안을 만들었다. 이 안은 루스벨트의 사망으로 승계한 트루만 대통령이 스탈린에게 정식 제안하게 되고, 스탈린이 받아들임으로써 확정되었다.

이 제안에 대해 미국측은 소련측이 의외로 손쉽게 받아들인데 놀라고, 소련측은 미국이 예상 외로 북쪽을 분할선으로 제시한데 놀랐다고 한다. 한반도의 운명은 한반도 문제에 전혀 문외한인 미국의 두 대령에 의해 쪼개지고, 이를 소련이 수용하면서 분단의 운명을 겪게 되었다. 딘 러스크는 나중에 미국의 국무장관이 되고 본스틸 대령은 주한 유엔군 총사령관을 역임하였다.

미국이 제안하고 소련이 수용한 38선 분할은 미ㆍ소 양군이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한 ‘일시적인 잠정조치’ 라고 했지만 38선을 경계삼아 70년간 한민족의 허리를 잘라낸 국경선으로 굳어졌다.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에서 미ㆍ영ㆍ소 3국 대표들이 모여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결정했다. 이를 둘러싸고 국내에서는 통일정부수립, 친일파 척결과 같은 민족사적인 과제가 찬반탁의 회오리 바람에 매몰되고 말았다.

미ㆍ소공동위원회의 활동도 시간만 낭비한 채 끝나고, 결국 한반도 문제는 미국의 의지대로 유엔에 넘겨지고 ‘가능한 지역’ 만의 총선거로 1948년 8월 15일 남한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에서는 같은 해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어, 해방 3년 만에 남북에 두 개의 이질적인 정부가 수립되고, 38선은 경계선이자 국경선이 되었다.

김구, 김규식 등이 분단 정권을 반대하면서 남북 협상을 하고자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김두봉 등과 회담을 하였으나 양쪽의 극우ㆍ극좌세력과 미ㆍ소 양국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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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70’(2)

 

815해방 동포여 자리차고 일어나거라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튼다

동포여 자리차고 일어나거라

아 해방의 해방의 종이 울린다.

-독립행진곡

 

우리에게 815는 이중성이 겹친다. 1945년의 815는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국토분단의 날이고, 1948년의 815는 단독정부 수립과 더불어 북쪽에 또 다른 정부가 수립되는 민족분열의 날로 기억된다.

 

이렇게 이중적인 815는 이후 한반도 전체는 물론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의 성격을 규정하는 족쇄가 되었다. 1민족 2국가의 원천적인 비극은 미일의 해양세력과, ()의 대륙 국가 사이에서 대리전이라는 동족상잔을 겪게 되고, 분단외세지향의 세력이 남북에서 각각 지배 주류가 되는 역설적인 구조를 만들었다.

 

1945년의 815는 본질적으로는 일본 제국의 붕괴에 따른 새로운 전후 동아시아체제의 구축에 결정적인 계기가 성립하는 전환점이 되었으며, 전범(戰犯) 국가 일본이 아닌 한반도가 두 동강이 나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8151948년 남북에 분단 정권이 수립되기 전까지는 해방절로 불리다가 이후 남한에서는 광복절’, 북한에서는 민족 해방 기념일로 지정되었다. 일본에서는 염치없게도 종전 기념일로 불린다. 그들은 패전이라는 용어 대신 종전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자신들의 침략 전력을 은폐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승전 기념일로 부른다.

 

일왕 쇼와는 1945814일 밤 1125분부터 궁내성 내정 청사 2층에서 이른바 옥음 방송을 녹음하였다. 437초가 걸린 이 녹음은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 이로써 만세(萬世)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로 시작되는 항복 선언이지만, 최고 전범자로서 사죄의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녹음된 방송은 이튿날인 815일 정오에 발표되었다. 의도한 것인지 우연인지 이 종전 조서815()로 되어서 그 배경을 살피게 한다.

 

815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는 노예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일제의 식민통치는 세계 식민지 역사상 유례가 없는 혹독한 것이었다. 말과 글과 역사를 빼앗기고, 성씨를 비롯해 전통과 문화를 박탈당하고, 인력과 자원물산을 수탈당하는, 민족 말살 바로 그것이었다.

 

 

(출처: InSapphoWeTrust(http://www.flickr.com/photos/skinnylawyer))

 

 

일제에 짓밟힌 시기는 말이 36년이지, 1910829일 국치일로부터는 만 3411개월 보름만이고, 187622일 강압에 의해 체결된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으로부터 기산(起算)하면 69, 실질적으로 국권을 강탈당한 19051117일의 을사늑약으로 치면 40년이.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광명이고 부활이었다. 그래서 국내에서 훼절하지 않고 광복의 날을 맞았던소설 임꺽정을 썼던 홍명희는눈물 섞인 노래를 목 놓아 불렀다.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짖는 소리 닭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

산천도 빛이 나고

해까지도 새빛이 난 듯

유난히 명랑하다.

 

함석헌은 해방이 도둑같이 왔다고 술회했지만, 독립 운동가들은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일제와 싸우면서 해방을 준비하였다. 특히 김구김규식 등이 주도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충칭에서 좌우합작의 정부를 세우고 광복군을 조직하는 한편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도발한 지 이틀 후에 일본에 선전을 포고하였다.

 

광복군은 미군 OSS부대와 합작하여 국내 진공할 날을 기다리며 맹훈련을 하고 있던 중에 일제가 항복함으로써 때를 놓치고 말았다. 김구 주석이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고 환호감격보다 우리가 크게 한 일이 없는데 조국의 앞날이 걱정된다고 개탄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김구가 우려한 대로 자력으로 해방을 쟁취하지 못한데다 해방과 동시에 분단이 이루어지게 되면서, 해방의 날은 왔으나 완전한 해방이 되지 못하였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는 고사 그대로였다. 친일파들에게는 춘면불각효(春眠不覺曉)’-“봄 잠에 취해 새벽이 오는 줄도 몰랐다고 할 것이다.

 

해방의 날을 보지 못한 채 그날이 오면을 애타게 그리다가 젊어서 숨진상록수의 작가 심훈의그날이 오면에는 모든 항일 운동가와 민중들의 염원이 담겨 있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치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올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으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815의 정언명령(定言命令)은 통일된 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이었다.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단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건국강령으로 채택한 개인간, 민족간, 국가간의 균등을 구현하는 민주적 삼균주의의 실천이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은 분단주의자, 친일파, 외세추종자들이 주류가 되고, 독립 운동가민족주의자남북협상파는 암살되거나 제거되고 말았다. 변통세력이 정통세력을 짓밟고 이 땅의 주역이 된 것이다. 따라서 815 해방정신은 실종되고, 815 세력이 득세하는 민족모순역사모순이 자리잡게 된 셈이다.

 

해방 70주년이 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3대 미해결의 모순이라면 친일파 미청산 분단 미해결 군사독재 잔재 미청산이라 할 것이다. 이런 잔재들이 상호연대연계하면서 한국사회의 주류가 되고 세습을 하면서 역사를 오도하고 민주주의를 짓밟는다. 이것은 현재진행형이다.

 

그 나라의 정치는 그 국민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이명박근혜정권이 지난 8년 여 동안 저지른 반통일, 반민주, 반서민의 퇴행은 세계 제2위의 대학진학률, OECD 가입국가의 형편으로는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4월 혁명으로 이승만, 반유신 항쟁으로 박정희,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으로 전두환을 몰아낸 한국 국민이다. 민주화와 평화통일은 여전한 국민적 과제가 되고 있다.

 

해방 정국에서 크게 불렀던해방의 노래이다.

 

해방의 노래

 

1. 조선의 대중들아 들어보아라

우렁하게 들려오는 해방의 날을

시위자가 울리는 발굽 소리와

미래를 고하는 아우성 소리.

 

2. 노동자와 농민들아 들어보아라

우렁차게 들려오는 해방의 날을

시위자가 울리는 발굽소리와

미래를 고하는 아우성 소리.

(조선음악동맹 찬, 김순남 작곡)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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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1)

 

광복 70주년과 분단 70주년 현재적 의미

 

 

광복 70주년과 분단 70주년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그 과제는 무엇인가. ‘70주년’은 생물학적으로는 노령기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성장기에 속한다. 70년은 한 개인에게는 생애의 전부에 속하지만, 민족ㆍ국가의 영속하는 시간으로는 한 순간일 뿐이다.

 

을미년 2015년은 한민족이 일본제국주의에서 해방된 지 70주년이다. 민족사의 비극은 ‘해방둥이’가 압제로부터 해방과 동시에 허리 잘린 장애아로의 출산이라는 데서 비롯되었다. 건강한 옥동자가 되지 못하고 장애가 된 것은 선천성이 아니라 국제열강의 역학정치라는 후천성 때문이었다. ‘후천성 장애’의 구조는 분단, 6.25동족상잔, 냉전으로 이어지고, 이후 남북으로 갈린 두 개의 한민족은 상호 적대관계를 강화하면서 오늘에 이른다.

 

‘해방 70주년’은 일제 통치에서 풀린 지 꼭 두 배의 기간이다. 우리는 흔히 ‘일제 36년’을 말하지만, 1910년 8월 29일 국치일로부터 해방까지는 정확히 34년 10개월 보름이었다. 해서 올 해는 식민지시대보다 해방기간이 두 배가 되는 시점이다. 일제 35년이 길고도 험한 세월이었지만, 해방 후의 기간도 만만치 않았다.

 

독립 운동가들은 그 잔혹했던 일제와 싸워 해방의 일역(一役)을 맡았는데, 그 두 배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해방 후 세대는 외세가 가른 분단의 장벽을 허물지 못하고 있으니 ‘못난 후손’이란 지탄을 면키 어려울 터다.

 

‘해방 70주년’을 맞은 한민족에게 지난 70년은 다른 국가에서는 700년에 해당하는 격동과 고통과 애증의 세월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는 항복하고서도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9월 7일 미군 극동 사령부가 남한에 군정을 선포하면서 ‘선수교제’가 이루어졌다.

 

이후 미군정, 6.25전쟁, 이승만 12년 백색독재, 4.19혁명, 박정희의 5.16군사 쿠데타, 10.26박정희 암살, 12.12군부반란과 전두환 쿠데타, 광주민주항쟁, 6월 항쟁, 김대중ㆍ노무현 문민정부, ‘이명박근혜’의 보수정권에 이르기까지 격동과 혼란의 시대를 겪었다.

 

그런 속에서도 세계적으로 최빈국에서 10위권에 속하는 경제성장을 이루고, 백색독재, 군사독재를 물리치고 제도적인 민주화를 쟁취하였다. 프랑스가 1789년에서 1814년까지 25년 동안 절대왕정→ 입헌군주정 → 공화정 → 공포정치 → 반동정부 → 군사쿠데타 → 제정 → 왕정복고라는 급격한 반동 정치체제의 변화를 겪었듯이,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출처: Republic of Korea (https://www.flickr.com/photos/koreanet))

 

 

우리는 흔히 지난 70년 동안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적으로, 단축하여 성취시켰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보수나 진보를 가리지 않고 하는 말이다. 상당 수준 맞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실상은 어떠한가. 우리나라는 언필칭 국호와 헌법 제1조에서 ‘민주공화’를 표시하고 선언한다. 국민의 희생으로 ‘민주’는 법적, 제도적으로 어느 정도 구현했다. 반면에 ‘공화’는 여전히 구색용일 뿐이다. 본래 ‘공화(共和)’란 중국 주나라에서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14년 동안 협의하여 행한 정치를 말한다.

 

서양에서 공화주의(republicanism)는 직접 민주주의와 대의제 민주주의 사이의 균형을 취하기 위한 고민에서 비롯되었다. 로마시대의 철학자 키케로는《국가론》에서 “공화국은 정의와 공동의 이익을 인정하고 동의한 사람들의 모임”이라 말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들이 교대로 지배하고 지배받는 능력과 평등한 권리, 시민들 간의 평등”이라고 정의하였다. 축약하면 “정의와 공동의 이익, 시민들 간의 평등”이 공화주의라는 것이다.

 

여기에 민주와 공화주의가 한 묶음이 되면서 민주는 시민적 권리, 공화는 시민적 평등을 담보하고자 근대 서구의 여러 나라에서 경쟁적으로 채택하고, 한국도 1907년 안창호 등이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면서 ‘민주공화주의’를 내걸었으며, 1919년 4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국호와 약헌(約憲)에서 이를 채택하였다. 그리고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에서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오늘에 이른다.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항일 독립 운동가들의 일치된 소망은 자주 독립이었다. 그리고 다수의 독립 운동가들의 정치적 비전은 통일된 조국에서 민주공화제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한데 해방70주년을 맞아 ‘자주독립’은 박근혜 정부가 다시 전시작전지휘권(전작권)을 미군사령관에게 무기한 연장시켜줌으로써 기약 없는 바람이 되었다. 유엔 회원국 200여 국가중 군사주권이 없는 유일한 나라의 신세가 연장되고 있다.

 

민주공화제는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가. 우리 국민은 4월 혁명, 광주민주화운동, 6월 항쟁 등의 희생과 저항을 통해 제도적ㆍ법적인 민주주의는 구현하였으나 지난 대선의 부정, 정보기관의 간첩조작, 민변ㆍ전교조 등의 탄압 그리고 지난해 12월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과 소속의원들의 의원직 박탈에서 보이듯이, 민주주의는 다시 유신, 5공시대로 회귀하기에 이르렀다.

 

국가보안법이 건재하고 형법에 반국가사범을 처리하는 규정이 엄존한다. 국사범은 이들 법으로 처리하면 된다. 그런데 임명제 헌재재판관들이 정당 해산과 국민이 선출한 국회의원의 자격을 박탈하는 반민주적 행태가 자행되었다. 미국 헌법의 아버지라는 토마스 제퍼슨은 “사과 하나를 따기 위해 거침없이 사과 나무를 잘라버리는 사람이 독재자”라 하였다.

공화주의 정신은 어떠한가. 국민의 피와 땀으로 성취한 경제발전의 공은 특정 개인의 공적으로 치부되는가 하면, 성장의 열매는 소수 재벌과 권력층이 독차지하고 있다. 정부가 떠들기는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에 이르렀다고 장밋빛 선전을 하고 있지만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48.05%를 차지한다. 빈부격차와 양극화ㆍ청년실업은 심각한 공동체 위기현상으로 대두되고 있다.

 

한국의 지배층은 친일세력에서 기원한다. 매국배족(賣國背族)의 대가로 재산을 모으고 자식들을 교육시켜서 미군정 이래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이들이 정치, 언론, 재벌, 대학, 사법부 등 국가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세습하면서 불패의 집단이 되었다. 이들은 통일과 민주화세력을 빨갱이→ 용공 → 좌경 → 종북으로 몰아치면서 ‘북한 프레임’으로 국민을 선동ㆍ현혹하면서 권력을 유지해왔다.

 

해방 70년은 독재와 반독재의 힘겨운 대결에서 짧은 기간, 그러니까 4.19혁명 공간과 김대중ㆍ노무현 정권 10년을 제외하면 60여 년이 반민주세력의 독재시대였다. 정치적 독재는 경제적으로 독점재벌을 낳고 사회적으로는 그 하수인으로 어용언론ㆍ지식인ㆍ종교인ㆍ판ㆍ검사를 배출, 양육한다. 이들은 권력의 풍각쟁이가 되어 국민을 혹세무민하고 여론을 조작하면서 민족사를 오도해왔다.

 

이런 모든 죄악들이 가능한 것은 분단으로 인한, 북한이라는 ‘마취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세시대 ‘마녀’의 존재(사실은 무존재)가 비판자를 화형시키고 매장시켰듯이, 분단시기 남북의 지배세력은 ‘적대적 공존’ 관계를 유지하면서 비판세력을 탄압하고 독재 권력을 유지해왔다.

 

현재의 국제정세는 싫든 좋든 미국과 중국 2대강국(G2) 체제로 진행되고,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중간에 낀 한반도는 70년 전이나 지금이나 국제열강의 땅따먹기 장기판의 졸(卒)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남북이 민족적 구심력으로 외세의 원심력을 이겨나가야 하는데, 지배자들은 외세의 종이 될지언정 내부의 주역이기를 원한다.

여기에 일본 아베 정권의 극우노선과, 한ㆍ미ㆍ일 군사정보공유 의정서체결, 한국의 MD체제 편입 등이 향후 동북아질서와 한민족 운명의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해방 70주년, 분단 70주년을 맞아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뒤틀린 민족사를 주인인 국민이 바로 잡아야 한다. 남북화해의 길을 찾고, 잃어버린 자주와 잊어버린 공화정신을 회복해야한다. 옛사람들이 역사를 감계(鑑戒)라 하여 “지난 일을 거울에 비춰보고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한 이유를 되새기면서, 새 시대를 열었으면 한다. 이 연재가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되었으면 싶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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