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 하는 안으로의 여행'(5)

가장 내밀한 곳에 계신 하나님

 

* 까막눈을 어떻게 뜰 것인가

  나는 하나님만큼 내 “가까이” 있는 것도 없다고 확신합니다.
  하나님은 나 자신보다도 더 내 가까이 계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내 에 계신 분이라는 말이다. ‘이란 말보다 그분이 가까이 계신 것을 어떻게 더 잘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제 에 있는 분을 몰라보는 이가 있을까 싶지만, 놀랍게도 제 에 있는 분을 몰라 사람들은 방황한다. 사실 모든 고등종교의 가르침의 고갱이는 제 에 있는 그분을 알라!는 것이다.

티베트어로 불자(佛子)를 뜻하는 <낭파 nangpa>내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란 뜻이라고 한다. 즉 마음의 본성 바깥이 아닌 <>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란 뜻이란 말이다.

우리는 바깥세상 돌아가는 일엔 대단히 민감하다. 바깥세상 일에 민감한 사람이 동시에 자기 존재의 내부 사정을 잘 알 수는 없는 법. 대개 그런 사람은 자기 내부 사정엔 까막눈이다. 이 까막눈을 어떻게 뜰 것인가.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다. 바깥세상[外界]를 향한 창을 닫고 안(內界)으로 향한 창을 여는 것뿐. 예수의 가르침을 빌면, 골방[내계]으로 들어가 외계로 향한 문을 닫고서, 은밀하게 계시는 분[아버지]께 기도하는 것뿐(마태복음 6:6).

*가장 내밀한 곳에 계신 하나님

  만물 안에서 하나님을 붙잡으십시오.
  여러분이 만물 안에서 하나님을 붙잡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여러분의 탄생을 알리는 표지,
  하나님이 몸소 여러분 안에서
  아들로 태어나셨음을 알리는 표지가 될 것입니다.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 잠시 멈춰 서서 !’ 하고 감탄하는 이는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우파니샤드의 현자는 말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우리 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은 곧 하나님의 자기표현에 다름 아니니까 말이다. 하나님은 본래 형상이 없는 분이지만, 만물 속에 현현하심으로써 자기를 드러내신다.

그러나 사물의 겉모습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은 사물 안에 계신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만물 속에 자기를 감추신다. 그래서 우리의 길잡이는 만물의 에서 하나님을 붙잡으라고 권고한다.

동학의 해월 최시형 선생도 천지만물 중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은 존재가 없다”(天地萬物莫非侍天主也)고 했다. 표현은 좀 다르지만 같은 통찰이 아닐까.

이런 통찰력으로 만물의 에서 하나님을 붙잡는 사람은 자기 에서도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만물의 가장 내밀한 곳에 계시듯이 사람의 가장 내밀한 곳에 계시니까 말이다. 그래서 우리의 길잡이는 우리가 만물 안에서 하나님을 붙잡는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몸소 우리 안에 아들로 탄생하신 표지가 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 에 아들로 탄생한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으랴.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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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하는 안으로의 여행(4)


그대 영혼의 수심(水深)은?



* 영원한 현재를 살라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 속에 계십니다.

영이 매순간 영원한 현재 속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절대로 늙지 않을 것입니다.


아주 오랜 옛날, 세 젊은이가 있었다.

둘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고, 하나는 아직 수태조차 되지 않았다.

지독한 가난의 고통에 시달리게 된 그들은 ‘공허’(空虛)라는 도시를 아주 떠나기로 작정했다. 긴 여행 중에 피곤에 지친 그들은 세 그루의 나무 그늘에서 쉬게 되었는데, 그 중에 두 그루는 흙에 심겨진 적이 없었고, 한 그루는 아직 싹도 나지 않았다.

그 나무 그늘에서 쉬면서 나무에 달린 열매를 먹고 기운을 차린 그들은 다시 길을 걸어 세 개의 강가에 이르렀으나, 그 중에 두 강은 애초부터 물이 없었고, 또 한 강은 바짝 말라 있었다.

그들은 다시 그 강가에서 타는 목을 축인 다음 보트 세 척에 나눠 타고 강을 건넜는데, 이번에는 보트 두 척이 아예 있지도 않았고, 한 척은 바닥이 텅 비어 있었다.

이렇게 숱한 고생을 하고 나서 세 젊은이는 ‘미래’(未來)라는 도시에 이르러 세 채의 집에 기거하게 되었지만, 그 중의 두 채는 아직 터도 닦지 않은 상태였고, 한 채는 아예 벽도 없었다.

그들은 그 후 그 ‘미래’라는 도시에서 줄곧 살았다.

―스와미 웨다의 <만개의 태양>에서

읽는 이를 황당하게 만드는 이 이야기는, 스승이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이지 싶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이, 있지도 않은 나무 그늘에서 쉬고, 달리지도 않은 열매를 따먹고, 물도 없는 강을, 있지도 않은 보트를 타고 건너가, 터도 닦지 않은 집에서 산다는 이 이야기는 얼마나 황당한가.

하지만 스승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근심을 밥 먹듯 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바로 그와 같다는 것을 일깨우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현실을 살며 겪는 마음의 불안과 근심은, 이 우화에 나오는 ‘공허’라는 도시, ‘미래’라는 도시와 마찬가지로 아무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근거가 없다는 말은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불안이나 근심이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이미 지나가버린 일에 연연하여 회한이나 슬픔에 잠기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가지고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것은 황홀히 누려야 할 ‘오늘’을 잃어버리는 행위이다.

신은 우리 모두에게 ‘순간’이라는 값진 보화를 선물로 주셨다. 그 선물을 우리는 잘 사용하여 풍성한 삶을 누려야 한다. 세속의 보화는 화폐단위로 세지만, 우리 생의 보화는 ‘순간’이라는 단위로 센다. 돈은 다 쓰더라도 다시 벌 수 있지만, 순간이라는 보화는 한 번 쓰면 다시 벌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는 한 번 쓰면 다시 벌지 못할 순간을 덧없는 불안과 근심으로 허비하는 경우가 너무 많지 않은가. 우리가 세속의 화폐를 아껴 쓰듯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 순간을 현명하게 써야 한다. 그것이 곧 ‘영원한 현재’를 사는 길인 것을!


* 접착 도사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된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요?

이것은 이단사설처럼 들립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둘이 아니라 하나와 일치만이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 속에 있을 때보다는 사랑 안에 있을 때

더더욱 하나님이 됩니다.


상운당 형 표구가게 <祥雲堂>에 앉아 있으면 심심치 않다. 내가 좋아하는 이들의 그림들이며 글씨들을 담은 액자가 즐비하게 걸려 있기 때문이다. 천진한 아이의 모습을 그린 중광 스님의 수묵화, 판화가 이철수의 소가 수레를 끌고 가는 그림, 그리고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수묵화나 글씨 등등.

오늘도 상운당 형과 함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가게로 가서 차를 마시는데, 문득 눈길이 가는 글과 그림이 있었다.


싸움은 말리라 했지

우리말에 풀쟁이는

접착도사(接着道師)이니

너 알아서 해 이놈아

      ―無爲堂 酒中遊


이 글은 돌아가신 무위당 장일순 선생께서 표구를 하는 상운당 형을 위해 쓴 글이다. 표구를 하는 형을 두고 ‘풀쟁이’라 칭하신 표현도 재미있고, ‘접착도사’란 표현도 웃음을 머금게 한다. 나는 이 글을 보며 과연 무위당 선생다운 표현이며, 지극한 제자 사랑이란 생각도 들었다.

무위당 선생께선 상운당 형이 무슨 ‘접착’(接着)을 잘 하길 바라신 것일까.

이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와 나’를 가르고, 어떻게든 남을 짓누르고 앞서 나가려는 다툼으로 조용할 날이 없다. 해서 ‘너’는 다툼을 말리고 ‘너와 나’를 이어주고 붙여주는 ‘접착제’ 같은 역할을 제대로 하는 삶을 살라는 뜻에서 하신 말씀이 아닐까.

마이스터 엑카르트도 말했다. 둘로 가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이분법은 우리의 눈을 가려, 꽃 한 송이마저 뽐내는 존재의 신성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고.(141)

‘원주의 예수’로 불리기도 했던 무위당 선생께서는 일찍이 원주 땅에서 ‘한살림 운동’을 시작하셨다. ‘한살림’에는 이 죽임이 만연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살림’(구원)을 일구고자 하는 여망이 깃들여 있다. 즉 그 말 속에는 ‘하나님과 인간’을 잇고, ‘사람과 자연’을 잇고, ‘도시민과 농민’을 잇는, 이른바 이원적으로 나누어진 모든 것들을 하나로 잇고자 하는 염원이 담긴 것이다.

이와 같은 큰 염원을 품고 사시던 선생이시기에 상운당 형에게 그런 글씨를 써주셨을 것이다. 물론 그 간절한 염원은 상운당 형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너 알아서 해 이놈아.”

하여간 난 이 마지막 글귀를 읽으며 가슴이 뭉클했다. 평소 그분의 어투와 다정함이 묻어 있고, 또한 그 당부의 간절함이 담겨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상운당 형의 집을 떠나며 형에게 농 삼아 말했다.

“접착도사, 형수랑도 다투지 말고 잘 접착하고 사시우!”

형이 대꾸했다.

“암, 잘 접착해야지!”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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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하는 ‘안으로의 여행’(3)

 

“넌 도대체 어디 있었단 말이냐?”

 

 

 

* 하나님 내지 하나님의 뜻 외에

  다른 것을 구하는 자들은 잘못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아무 것도 구하지 않는다면,

  나는 제대로 된 것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야말로 제대로 된 기도이며 힘 있는 기도입니다.

 

이 땅의, 소위 성공(?)한 성직자들이 세상의 도마 위에 올라 난도질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내지 하나님의 뜻 외에 다른 것’을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영계(靈界)를 향하지 않고 물질계를 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잘 못 구하고 있는’ 줄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프란체스코 교황의 표현대로 ‘영적 치매(癡呆)’라고나 할까요!

 

 

“물질계에 더 많이 깨어 있을수록 영계에 더 많이 잠들어 있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에게 잠들어 있을 때, 다른 깨어 있음이 거룩한 은총의 문을 닫아버린다”(젤라루딘 루미).

 

성직의 대물림뿐 아니라 교회[재산]의 대물림도 감행하는 철면피! 오, 혈연(血緣)은 쇠심줄보다 더 질기고 질긴 모양입니다.

 

석가는 깨달음을 얻고 나서 자기 아버지가 있는 카필라 성으로 돌아와 밥을 빌어먹는 거지 행각을 했지요. 아버지 정반왕(淨飯王, Suddhodana, 슈도다나)이 아들 석가를 찾아가 걸식을 못하게 막으며 “석가족에는 거지란 없다. 왜 밥을 빌어 집안 망신을 시키고 다니느냐?”고 꾸짖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석가는 “나는 석가족이 아닙니다”라고 대꾸했습니다. 이는 곧 나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깨달음을 얻은 석가는 혈연에도 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는 또 어떻습니까. 그는 가나의 혼인잔치 자리에서 자기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불렀습니다. 속인의 눈으로 보면 불효자의 언사가 아닐 수 없지요. 그러나 이것은 예수가 ‘혈연’에 매이지 않고 하늘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겼음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예수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마태복음 12: 50).

 

하여간 예수나 석가는 ‘제대로 구하는 것’의 본보기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늘 아버지(신성 혹은 불성)와 하나가 된 그분들은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었지요. 모든 것을 다 가지신 하늘 아버지와 하나가 되었는데 무엇을 더 구하겠습니까. 그분들은 ‘아무 것도 구하지 않아’, ‘제대로 구한’ 본보기가 되셨습니다. 하늘 아버지와 하나 됨을 구하는 것, 이것 외엔 구할 만한 게 없습니다. 이것 외에 더 힘 있는 기도는 없습니다!

 

*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변하게 하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에는 변화라는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생겨나고 자라고 늙어 죽어 사라지는 변화 속에 있습니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이 생멸(生滅)의 ‘변화’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것들 속에 ‘변화의 낙인’을 찍어두었기 때문이지요. 산스크리트어에서도 ‘세상’을 일컫는 단어 ‘jagat'는 ’변화하는 것‘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변하는 것들의 세상에

모든 것은 신(神)으로 덮여 있도다.

그러니 인간들이여

내버림의 지혜를 가져

어느 누구의 재물도 탐내지 말지어다”(이샤 우파니샤드).

 

하지만 어리석은 인간들은 이 변화를 피하고 싶어 더러는 만리장성을 쌓고, 더러는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철옹성을 짓고, 또 더러는 신의 이름을 빌어 사원의 탑을 크고 높게 수축하지만, 그 무엇으로도 쇠락과 소멸의 운명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아득한 옛날 이 땅별에서 크나큰 위세를 떨치던 공룡도 사라졌고, 또 다른 공룡 인간의 시대도 뉘엿뉘엿 저물어가려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덩치 큰 힘이 센 공룡들도 ‘변화의 낙인’을 피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 밝은 우리의 길잡이는 “그러므로 우리도 스스로 하나가 되어야 하고, 모든 것을 여의여야 하고, 확고부동해야 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일갈합니다. 하나님만이 변화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불멸의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밖에 있는 것은 모두 무(無)일 뿐”이기 때문이지요.

 

*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계시건만,

  우리는 그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하나님은 안에 계시건만,

  우리는 밖에 있다.

  하나님은 집에 계시건만,

  우리는 외출 중이다.

 

작년에 세상을 뜨신 제 노모께서 93세의 나이셨던 몇해 전입니다. 설날 아침 세배를 받으신 노모가 말씀하셨습니다.

“어서 죽어야 할 텐데!”

아, 어머니 정신이 아직도 말짱하시구나. 돌아가야 할 때를 또렷이 기억하고 계시니.

인도의 고전 《마하바라타》에 나오는 유디슈트라는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일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남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자기는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돌아갈 곳을 아는 사람입니다. 뒷모습이 추한 사람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도 자기 돌아갈 곳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는 늘 집[하나님] 바깥에 있고, 그의 마음은 항상 ‘외출’(外出) 중이지요.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간극(間隙)이 생기는 것은 나의 무지 때문입니다. 이 간극을 없애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분이 바로 내 안에 계심을 자각하면 됩니다. 가장 귀중한 보물을 바로 내 안에 감춰두신 창조의 신비!

“넌 도대체 어디 있었단 말이냐?”

“내가 아버지 집에 있다는 걸 왜 모르십니까?”

열두 살 소년 시절에, 예수는 벌써 이런 문답을 자기 부모와 나누었다고 합니다.

하늘의 뜻을 헤아릴 나이라는 ‘知天命’을 훌쩍 뛰어넘어, 나는 겨우 이제야, 그분 집에 머물러 살고 있는 걸 사무치게 깨닫습니다!

하지만, 이제라도 그걸 깨닫는 은총을 주셨으니 고맙고 고마울 뿐!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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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 하는 안으로의 여행(2)

  하나님, 팔팔한 청춘

 

     * 나의 영혼은 그것이 창조되던 때만큼이나 젊습니다.

실로 나의 영혼은 그때보다 더 젊습니다.

나의 영혼이 오늘보다 내일 더 젊어진다고 해도,

나는 전혀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새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는 교우에게 나이가 몇이냐고 물었다.

서른 한 살이에요.”

팔팔한 청춘이군.”

앞의 교우보다 조금 먼저 나온 교우에게 나이가 몇이냐고 물었다.

마흔 아홉이에요.”

팔팔한 청춘이군.”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항변 아닌 항변을 했다.

아이구 참, 이제 내년이면 쉰내가 날 텐데요. 그런데 목사님, 어떻게 서른둘하고 마흔아홉이 똑같이 그렇게 팔팔한 청춘일 수 있죠?”

내가 잠시 낄낄대다가 대꾸했다.

하나님은 나이와 상관없이 언제나 팔팔한 청춘이시거든! 그대들 안에 계신 하나님은 말이야!”

“.............”

     * 하나님은 덧붙임을 통해서가 아니라

덜어냄을 통해서만 영혼 안에서 발견됩니다.

 

나무들은 겨울이 다가오면 제 몸의 무게를 덜어냅니다. 이파리로 향하던 수분을 뿌리로 보내어 겨울나기 준비를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수분이 빠진 잎은 울긋불긋 물들어 떨어지고 맙니다. 물론 나무들이 지상에 노출된 가지에서 수분을 덜어내는 이유는 동사(凍死)를 막기 위해서이기도 하지요.

나무들은 그렇게 제 몸의 것들을 덜어냄으로써 겨우살이를 대비할 뿐만 아니라 파릇파릇 잎새가 피어날 새 봄을 준비합니다. 자연의 아름다운 순리(順理)지요. 나무들은 이 순리를 거스른 적이 없습니다. 덜어냄을 통해서 나무들이 새 생명의 날을 준비하듯이, 우리 인생에도 덜어냄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땅 위의 것들을 자꾸 덧붙임으로서 세속의 욕망을 채우려는 이는 그 영혼이 날로 앙상해질 뿐입니다. 욕망의 전차에 싣고 가는 지상의 양식으로는 영혼을 살찌울 수 없습니다. 인간은 덜어냄을 통해서만 자기 속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덜어냄, 즉 자발적인 금욕은 우리의 영적 성장을 돕습니다.

피둥피둥 살찐 새가 하늘을 나는 것을 보지 못한 것처럼, 세속적 욕망의 무게를 줄이지 않고는 하늘을 나는 비상(飛翔)의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 거장은 목재나 돌로 조상(彫像)을 만들 때

나무에다 상을 새겨 넣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상을 덮고 있는 껍질을 깎아 냅니다.

그는 목재에 아무 것도 보태지 않습니다.

다만 목재의 껍질을 벗겨내고,

옹두리를 떼어낼 뿐입니다. 그러면

그 속에 감추어진 것이 환히 빛납니다.

 

가을은 거추장스런 것들을 훌훌 벗겨내고 알몸이 드러나도록 하는 계절입니다. 하나님이 위대한 예술의 거장처럼 우리를 새롭게 빚으신다면, 아마도 먼저 우리의 알몸이 드러나도록 하실 겁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사랑하시지만, 그것은 단지 피조물의 사랑스러움 때문이 아니라 피조물 속에 깃든 신성의 사랑스러움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그것은 사람의 사랑스러움 때문이 아니라 사람 속에 깃든 신성의 사랑스러움 때문이지요. 그래서 예술가의 손을 지니신 하나님은 그 신성의 사랑스러움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 피조물을 덧씌운 껍질옹두리를 벗기시고 떼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드러나는 사랑스러운 신성은 곧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기도 합니다.

화가 미켈란젤로가 어느 날 어느 화방 앞을 지나다가 그 앞에 버려져 있는 대리석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화방 주인에게 그 버려진 돌을 얻어 돌아가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쓸모없다고 버린 이 돌 속에서 나는 자기를 꺼내달라고 애원하는 천사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미켈란젤로는 그렇게 가져간 돌로 그 돌 속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하는 천사를 끄집어내었다고 합니다. 이 위대한 화가의 손에 맡겨진 돌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예술의 거장 하나님의 손길에 내맡겨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영혼의 갈망이기도 하니까요.

우리가 그렇게 우리 자신을 그분에게 내어드릴 수만 있다면, 그분은 우리를 새롭게 빚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지 않겠습니까.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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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 하는 안으로의 여행’(1)

 

하나님은 집에 계시건만 우리는 외출 중

 

* ‘안으로의 여행을 떠나며

 

나는 이 여행을 떠날 채비를 하며 되도록 행낭을 가볍게 했습니다. 행낭에 넣은 짐은 단 두 가지, ‘명상방석과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설교집’. 이 세상에서의 삶이란 깨달음의 봉우리를 향한 여정 위에 있는 베이스캠프와도 같은데, 부득불 시간의 짐이나 공기, 물 같은 필수품을 챙기지 않을 수 없는 이 지구별 여행이 홀가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티베트의 차마고도(茶馬古道)보다 아득하고 묘묘한, 안으로의 여행에서 나는 내내 마이스터 엑카르트를 길동무로, 아니 나의 길잡이로 삼게 될 것입니다. 어두운 신성의 심연으로 내려가는 거친 길조차 마다하지 않았던 그의 오체투지를 내 몸으로 온전히 익히지 않았으므로, 나는 내 길잡이에 대해 윤똑똑이처럼 잘 아는 체할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길잡이의 글의 매력에 이끌려 십 수 년 동안 그것에 심취해 온 애독자일 뿐. 시를 긁적이다가도 잘 풀리지 않으면 시적 흥취를 돋구어주는 그의 글들을 벗 삼았고, 목사로서 설교 준비를 하다가도 영감이 잘 떠오르지 않을 땐 그의 설교문을 곁눈질하곤 했지요. 그의 글들은 언제나 메마른 영적 감수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내 안의 창조의 샘에서 신선한 샘물이 솟구치도록 내 혼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최근에 나는 내 의식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인류의 위대한 영적 유산 중의 하나인 <우파니샤드>에 마음의 닻을 내리고 있는데, 그것에 몰입하는 동안 나는 자주 내 길잡이의 글을 비교하여 뒤적거리곤 했습니다. 그 문화, 종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위대한 영적 유산들은, 인간의 영원하고 근원적 물음들을 탐구하는 데 좋은 선구가 되어주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지면의 글에서 그 두 사상을 학문적으로 비교하거나 분석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그 위대한 사상의 빛에서, 오늘날 제도기독교가 상실한 궁극적 물음을 되살려내고 싶을 뿐입니다. 근원과의 소통을 잃어버린 채 영적 치매상태 속에 있는 오늘의 우리가 진정한 자기다움을 회복하려면 고되고 힘들더라도 어둠 속에 감춰진 뿌리를 다시 더듬어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팍팍한 생의 행로에서 옹달샘을 만나면 거기 엎드려 목마름을 해갈하듯이 나는 틈틈이 내 길잡이가 으밀아밀 들려주는 빛나는 잠언으로 내 영혼의 갈증을 달랬습니다. 그리고 그 잠언에 귀 기울일 때마다 서늘해져오는 내 소회를 몇 줄씩 명상노트에 옮겨 적었지요. 이런 소회 역시 내 길잡이와의 영적인 교감에서 온 것입니다. 남의 좋은 시를 지면에 베낀 한 시인이 자기가 공들여 베낀 것을 시로 쳐줄 수 없겠느냐고 말한 것처럼, 이런 옮겨 적음을 나는 내 마음 닦음[수행]의 한 방편으로 여깁니다. 덧붙이자면 내가 이 여정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엑카르트의 글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옮긴이의 노고 덕분이라는 것도 밝혀두렵니다(매튜 폭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김순현 역, 분도출판사).  그 역시 자신의 작업을 마음 닦음의 한 방편으로 여기는 것은 아닐까요. 하여간 고맙기 짝이 없습니다.

 

내 길잡이도, 길잡이의 글을 옮긴이도, 그걸 또 옮겨 적는 나도, 그리고 이 서툰 글을 읽는 독자도 모두 같은 영적 여정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여정은 우리가 하나님의 바다에서 헤엄을 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여정인 것입니다”(매튜 폭스)

 

* 하나님은 그 속에 오로지 하나님만을 모신 영혼,

  곧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

  아무 것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영혼을 찾아

 그곳에서 낳고 싶어 하십니다.

 

, 그렇군요. 하나님, 당신께서는 여전히 가임(可姙)의 욕구를 지니고 계시군요! 그렇겠지요. 당신께선 늙음이나 쇠락을 모르는, ‘영원한 젊음을 지니고 계시니까요.

 

오늘, 지금 이 순간도 당신께선 당신의 형상을 가장 쏙 빼닮은 사람을 통해 당신 자신을 낳고 싶어 하신다지요. 하지만 우리는 너무도 분주하여, 낳고 싶어 하시는 당신의 뜻을 깊이 헤아리지 못하고 있답니다. 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고, 듣고 싶은 것이 너무 많고, 갖고 싶은 것이 너무 많고, 짓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당신을 모실 여백이라곤 없답니다.

 

첨단의 기계를 다루는 일에 능해진 인간의 기심(機心)이 하늘을 찌를 듯하고, 어디서나 손가락 하나로 숫자를 눌러 사통팔달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도 많아졌지만, 오늘 우리의 삶은 당신을 아는 불멸의 지식을 섭취하는 일엔 한없이 게으르고, 소멸할 지식을 쌓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형국이지요.

 

주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잠언 1:7).

 

당신을 아는 것이 지식의 본()이고 나머지는 말()인데,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안타깝게도 그 본말이 뒤집혀져 있지요. 피조세계에 대한 숱한 지식은 당신을 아는 일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데 말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려면, 피조세계에 대한 앎과 단()해야 한다는 거지요.

 

()! 우리 영혼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피조세계의 것들을 당신을 아는 지식의 칼로 단호히 잘라냄()으로서 우리 속에 하나님 당신이 활동하실 수 있는 공간을 넓혀야 하는 데 말입니다. 그런 순수해진 영혼의 터라야 비로소 당신은 당신 자신을 낳을 수 있는 데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나는 당신이 곧 우리의 참 모습’(眞我)이지요. ‘영으로 난 것이 영’(요한 3: 6)이란 말처럼 전적으로 새로 난 생명인 것이지요.

 

이 신생(新生)의 기쁨,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놀라운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불완전하고 허물투성이인 우리가 당신을 낳을 성스러운 태()라니요. , 우리 속에 당신이 태어나시다니요. 고맙습니다. 하나님! 이제 우리는 당신을 아는 일 말고는 세상에 대한 그 숱한 앎이 아무 소용도 없음을 알았습니다. 우파니샤드의 현자도 말했지요.

 

진정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삶이 불안정한 가운데 세밀하고 파멸하지 않는 존재이니, 이제 학문의 그물을 버리고 참(진리)에 대해 명상하라.”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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