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5)

  사라, 우여곡절 끝에 어머니가 되다(2)

 

1. 어머니 사래. 사래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 바로 어머니였을 것이다. 사래가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는 말이다. 사래는 어머니가 되기를 염원했다. 아니, 어머니가 되어야 했다. 그것도 많은 자식들의 어머니여야 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2. 창세기 1110-26절은 셈에서 데라의 세 아들에 이르는 계보인데, 여기서는 계보 특성상 낳고를 반복한다. 그리고 창세기 1127-32절은 데라의 족보이다. 족보는 부부들이 자식들을 출산함으로써 부모가 되는 과정을 나열하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 기자는 사래가 임신하지 못해서 자식이 없었다는 것을 애써 알려준다. 사래는 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창세기 11:29-30). 창세기 16장도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로 시작한다. 사래가 아직 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3. 그렇다. 사래는 아직 어머니가 아니다. 그런데 사래가 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은 현 상황에서는 아브람도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셨을 때 이렇게 말한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창세기 15:2). 아브람은 자신이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는데, 그 이유를 하나님에게 돌린다. 하나님이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아브람이 아버지가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브람은 입양방식을 통해서라도 아버지가 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하나님께 아뢴다.

4. 그렇게 말하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강조해서 하시는 말씀은 아브람이 반드시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세기 15:4-5).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예전에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세기 12:1-2).

5. 이것은 앞으로 아브람이 많은 자식들을 둘 것임을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것인데, 17장에서 다시 약속하신다.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6). 이런 점에서 아브람은 12장에서 이미 아브라함, 즉 히브리어 이름 그대로 여러 민족의 아버지임(창세기 17:5)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명령과 약속이 사래에게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6.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하신 약속을 사래에게도 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래가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래에게 여러 민족의 어머니 사라가 될 것임을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창세기 17:15-16). 사래와 사라라는 히브리어에는 어머니라는 의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경기자가 뜻풀이를 그렇게 하는 것은 사래가 어머니여야 함을 그만큼 강조하는 것이다.

7. 그러나 사래는 자신이 결코 어머니가 되지 못할 것이다, 즉 자식을 낳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아브라함이 아버지가 되게 한다. 사래는 아브라함이 하갈과 결혼해서 이스마엘을 낳게 함으로써, 아브라함이 아버지가 되게 한다.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되었지만, 사라는 아직 어머니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라가 어머니 될 것을 계속 약속하신다. “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창세기 17:21). 하나님은 이렇게 굳게 약속을 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사라가 어머니 된다는 것을 전혀 믿지 않는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나이 때문에 이제는 임신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8.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만나서 사라가 어머니 될 것을 다시 강력하게 말씀하신다. 그런데 사라는 그 이야기를 듣고 웃는다. 자식을 낳기에는 이미 늦은 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 기자는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고 말한 다음, 사라가 속으로 웃으면서 자신이 어머니가 될 가능성이 전무 하다는 통절한 마음을 웃음으로 표현한다. 사라는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라고 말했단다.

9. 예전에 아브람이 애굽에 내려갔을 때, 아브람이 사래를 누이 동생이라고 해서 사래가 바로의 여인들 가운데 한 명이 되었던 것처럼, 거의 동일한 상황에서 사라가 그랄 왕 아비멜렉의 여자가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때 하나님은 아비멜렉 집안의 태를 닫으셨다고 한다.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베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창세기 20:16). 사라를 괴롭게 하는 아비멜렉 가문에 임신을 불허하는 조치를 취하신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가 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10. 아무도, 심지어는 당사자들도 믿지 않을 때, 하나님은 약속하셨고 그것을 꼭 이뤄주셨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또 이르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창세기 21:1-7). 하나님은 사래를 지키시고 돌보심으로써, 결국 사래로 하여금 어머니가 되게 하셨다. 이렇게 사래의 삶은 사라, 즉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었다.

 

이종록/한일장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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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4)

 

사라, 우여곡절 끝에 어머니가 되다(1)

 

1. 사래라는 한 여인. 우리가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은 무엇인가? 아브람과 사래가 살던 시대는 매우 혼란스러웠던 모양이다. 그것은 아브람과 사래가 여러 차례 이주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다. 아브람과 사래는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그리고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했다. 가나안에서도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이동했다. 그러다 나중에는 애굽으로 내려갔다.

2. 아브람과 사래가 애굽으로 들어갈 때, 이들은 일종의 난민(難民)이었다. 그들은 애굽으로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니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할 수 없이 애굽으로 가야 했다. 그들이 살던 가나안땅에 기근이 들었다. 그것도 매우 심한 기근이었다. 그 기근을 피해서, 생존하기 위해 아브람과 사래는 애굽으로 내려갔다. 그러니 아브람과 사래는 자연재해로 인해서 제 살던 곳을 떠나야만 했던 난민이었다.

3. 아브람과 사래만 기근으로 고통을 당했을 리는 없고, 또 그들만 기근을 피해서 애굽으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나안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아브람과 사래처럼 기근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했을 것이고, 또 아브람과 사래처럼 애굽으로 애굽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양식을 찾아서, 살 길을 찾아서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가는 사람들.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행렬. 그들은 모두 난민들이었다.

4. 애굽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아브람이 사래에게 말을 한다. 그들이 가려는 애굽은 마냥 희망천지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배고파서 살길을 찾아 떠난 길인데,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아브람은 사래를 불러 세우고 심각하게 이야기를 한다. 애굽으로 내려가던 아브람은 사람들로부터 무슨 소문을 들은 모양이다. 애굽 땅 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들은 듯하다. 그 소문은 아브람과 사래를 긴장시키는 것이었다. 불길한 소문을 들은 아브람은 애굽 사람들이 자신과 사래를 보고 어떻게 할 것인지를 예상했을 것이다. 애굽 사람들이 아브람과 사래가 부부인 것을 알아채면, 아브람은 죽이고 사래는 살려둘 것이 분명하다. 소문에 의하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많다.

5. 그래서 아브람은 꾀를 생각해냈다. 앞뒤로 죽음이 막고 있는 야만적인 상황.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아브람은 사람들이 사래에게, 사람들이 물어보면, 아내가 아니고 아브람의 누이동생이라고 말하라고 알려준다.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아브람이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면, 사래는 전혀 목숨의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것은 바로 아브람이다.

(출처: pcstratman (http://www.flickr.com/photos/32495192@N07)

 

6. 질긴 목숨 부지하기 위해, 아브람은 사래를 누이동생이라고 하면서 애굽으로 들어가려 한다. 누이동생이라고 하면, 사래를 빼앗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유부녀도 탈취하는 판인데, 남편 없는 여자를 그냥 두겠는가? 그렇다면 아브람은 그들이 애굽으로 가면 서로 헤어질 것이 뻔하고 사래는 애굽 사람이 데려가서 제 여인으로 삼을 것이 명약관화하다는 것을 이미 짐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브람과 사래는 애굽으로 내려간다.

7. 이것은 당시 상황이 그만큼 어려웠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로 헤어지는 한이 있어도 애굽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것만이 살 길이다. 당신과 내가 살 길은 이 길 밖에 없다.” 이렇게 맘먹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러니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은 부부 사이를 끊고 헤어짐을 전제하는 이별의 길이요 눈물의 길이다. 고통스러운 길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이 얼마나 굴욕적인 상황인가. 이것이 바로 우리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람과 사래가 겪는 일이다. 하나님이 가라고 한 그 땅에 들어와서 바로 겪는 일이다. 이때 아브람은 어떤 심경이었을까? 내가 이런 꼴을 보려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고, 다시 하란을 떠나서 이 가나안으로 왔단 말인가? 가나안에 들어와서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기근으로 죽을 지경에 처하다니.

8.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래이다. 남편이 하는 말을 들은 사래는 어떤 심경이었을까? 남편을 따라 애굽에 와서, 남편을 남편이라 부르지 못하고 오빠라고 부르고, 그러다가 남편을 떠나서 바로에게 붙들려 가야 했던 사래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사래가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래는 전적으로 침묵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궁금하다. 침묵하는 사래. 사래는 도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 성경기자는 사래를 완전히 침묵케 함으로써, 본문을 읽는 우리들로 하여금 그 처절한 심경을 짐작해보게 한다. 선택권이 없는 사래. 그런 상황에서 침묵하는 사래. 아니, 사래를 침묵케 하는 성경기자. 침묵할수록 애절함이 더하는데.

9. 도대체 사래는 누구인가? 본문은 사래의 정체성에 대해 묻는다. 창세기 12장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11절을 제외하고는 성경기자가 사래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기자는 사래라고 하는 대신, 그 여인, 그 아내, 나의 누이, 나의 아내, 그 아내, 네 아내, 네 누이, 네 아내, 그 아내로 부른다. 본문기자가 사래를 사래로 표기하지 않고, 이렇게 여러 가지로 표기하는 것은 사래가 과연 누구인지, 누구 아내인지가 불분명한 상황, 즉 사래의 불분명한 정체성을 문제 삼기 때문이다. 사래는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없다. 그는 아브람과 바로와의 관계에 의해서 제 자신이 누구인지 알 뿐이다.

10. 이러한 정체성의 불분명함은 사래가 어떤 상황에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아니, 사래는 한마디도 할 수 없는 강압적인 상황에 처했던 것이 분명하다. 사래는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는다. 그저 상황에 따를 뿐이다. 그래서 사래는 아브람이 자기를 아내로 부르면, 그런 줄 알고, 누이라고 하면 또 그런 줄 알고 사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바로가 사래를 아내로 부르면, 그렇게 여기고, 바로가 사래를 아브람의 아내라고 하면 또 그렇게 여기면서 사는 것이다. 사래라는 한 여인.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세상을 이렇게 살았다.

 

이종록/한일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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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3)

 

하우와, 믿음으로 실패와 아픔을 이겨내다(2)

 

 

1. 어머니 하우와. 창세기 4장은 2장과 3장의 서술과는 달리, 하우와가 세 자녀를 낳고 키우면서 일상의 희노애락을 경험하며 살던 한 평범한 어머니였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 하우와가 신앙적인 여인이었음을 보여준다. 하우와는 셋째 아들인 셋을 낳고 난 다음에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25절).

 

하우와가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의 이름을 '셋'이라고 짓고 나서 그렇게 이름을 지은 이유를 밝히는 장면이다.

 

2. 이것과 비슷한 구절이 4장 1절에도 나온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우와와 동침하매 하우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우리는 이 두 절이 닮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래서 창세기 4장은 첫아들을 낳은 다음 하우와가 하는 말로 시작해서 막내 아들을 낳은 다음 하우와가 하는 말로 끝난다. 그렇기에 4장 전체의 주인공은 다른 사람이 아닌 하우와이다.

 

3. 우리는 이 구절에서 하우와의 깊은 신앙을 엿볼 수 있다. 하우와는 자기 아들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결코 심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아들이 태어나는 일을 중대한 사건으로 보고 그 사건을 하나님의 사건으로 해석한다. 하우와는 가인을 낳을 때도 그랬고 셋을 나을 때도 그랬다. 하우와가 아들 낳은 것을 하나님의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이 창세기 4장에 두 번이나 나오고, 그것이 4장 맨 앞부분과 뒷부분에 나오고 있다는 것은 그녀가 언제나 그랬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창세기 4장에 나오는 비극적인 사건들을 하우와의 신앙고백으로 끌어안고 있음을 알려준다.

 

Emil Nolde - Verlorenes Paradies (Paradise Lost) (1921) Oil on canvas, 106 x 157 cm

(출처: Playing Futures: Applied Nomadology (http://www.flickr.com/photos/centralasian))

 

 

4. 우리는 여기서 하우와의 새로운 모습을 본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만나는 하우와는 얼마나 신앙적인 인물인가?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신앙심 깊은 한 여인을 만난다. 자녀들로 인해 아픔을 겪으면서, 그것을 신앙으로 극복해내는 한 어머니의 모습을 본다. 지금까지 성경에 묘사되어 있는 하우와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우리와 같은 한 인간으로 생각한 적이 있는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하고 노래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그런 하우와를 생각한 적이 있느냐는 말이다. 본문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우와의 기쁨과 슬픔을 살려내는 것, 그래서 그를 한 인간으로 경험하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성경독자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5. 4장 처음 부분과 마지막 부분 사이에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극적인 사건이 나온다. 물론 이 사건의 주인공은 가인이다. 그래서 성경은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다보니 이 사건으로 인해서 아담과 하우와가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는지에 대해서는 본문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을 밝혀내는 것이 바로 독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성경이 표면적으로 말하는 바를 꼼꼼하게 읽어내야 할 뿐만 아니라, 성경이 침묵으로 전달해주는 정작 더 귀중한 메시지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아니, 본문에 등장하는 아담과 하우와가 우리에게 조용히 들려주는 말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

 

6.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우리는 이 말에서 아들을 낳은 한 어머니가 지르는 환호성을 듣는다. 하우와는 가인을 낳고 얼마나 기뻐했을까? 물론 아벨을 낳은 후에도 그런 맘이 들었겠지만, 아벨을 낳고 그런 말을 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하우와가 가인을 낳고 얼마나 기뻐하고 감격하고 감사했는지 알 수 있다. 하우와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장면을 읽을 때, 무덤덤하게 읽을 수가 없다. 우리와 똑같은 한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7.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이 말을 하는 하우와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하나님이 주신 아들. “아 하나님이 아들을 주셨다.” 기쁨에 넘쳐서 외쳤던 그 아들이 사랑하는 둘째 아들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멀리 떠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우와는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을까? 또 피 흘린 채 죽어있는 둘째 아들 아벨의 시신을 끌어안고 하우와는 얼마나 가슴 아파했을까? 고통당하는 하우와. 그러면서도 그 모든 일들을 신앙으로 이겨내는 하우와. 그 하우와의 모습을 생생하게 느껴야 한다.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던 하우와. 아들 낳은 일을 하나님의 사건으로 해석해내고 모든 아픔을 신앙으로 이겨내는 하우와는 분명히 신앙심 깊은 인물이었다. 이 하우와가 창세기 4장을 지배하는 무서운 증오와 죽음을 신앙으로 끌어안아서 녹여내고 있다.

 

8. 아담과 하우와가 낳은 셋째 아들은 누구인가? ‘셋’이다. ‘셋’의 뜻이 무엇인가? ‘대신한다’이다. 셋은 가인과 아벨을 대신하는 아들이다. 셋은 가인과 아벨로 상징되는 증오와 죽음을 대신하는 아들이다. 그렇기에 아담과 하우와가 아들을 낳은 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그 증오와 죽음을 넘어서서 새로운 사랑과 삶으로 나아가는 사건이다.

 

9. 셋이 태어난 것은 증오와 죽음의 현장, 증오와 죽음의 시대를 넘어서 사랑과 삶의 시대로 나아가는 사건이다. 만약 셋이 탄생해서 에노스로 그 계보가 이어지지 않았다면, 증오와 죽음이 세계를 지배하고 비극의 역사가 계속되었을 것이다. 가인에서부터 라멕까지 이어지는 증오와 죽음의 역사를 문학적으로 단절하는 것이 바로 ‘셋’의 탄생이다.

 

10. 창세기 4장의 구성을 보면, 증오와 죽음의 역사는 셋의 탄생으로 일단 끊어지는 구조를 보인다. 4장 3절부터 15절까지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이야기이고, 16절부터 24절까지는 가인과 그의 후손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야기는 라멕이 부르는 증오와 죽음의 노래로 종결된다. 그래서 4장 3절부터 24절까지가 증오와 죽음의 이야기이다. 이 비극적인 이야기들을 감싸는 것이 바로 아들들의 탄생과 하우와의 신앙고백이다.

 

 

이종록/한일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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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2)

 

하우와, 믿음으로 실패와 아픔을 이겨내다(1)

 

 

 

1.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뭘까? 뭘 보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이런 의문이 들 때가 많다. 성서학자로서 내가 하는 일은 이런 의문들을 통해서 성서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를 강력하게 지배하는 그릇된 고정관념들이 참 많고, 그것들을 파악해서 넘어서는 게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읽든, 대다수 경우 결국은 우리에게 굳게 박힌 고정관념을 보고 그것을 읽어내는 것 이상이 아님을 새삼 깨닫는다.

 

2. 하우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우와는 인류 최초의 여자라고 하는 하와를 히브리어그대로 읽은 이름이다. 하우와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동사 하야에서 왔다고 하는데, “하야살다” “살아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하우와의 뜻은 생명또는 이다. 창세기 기자는 하우와를 모든 산 자의 어머니로 풀이한다.

 

3. 이 하우와를 영어식으로 이브”(Eve)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브는 도대체 하우와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히브리어 성경을 70인 역이라는 헬라어 성경으로 번역하면서, 번역자들이 하우와라는 히브리어를 맨 처음에 딱 한 번 그 의미를 살려서 헬라어 조에”(생명)로 옮겼는데, 그 다음부터는 에우와로 음역했다. 이것이 영어식으로는 이브가 된 것이다. 그러니 이브는 하우와라는 히브리어의 헬라어 음역을 흉내 낸 것일 뿐이다. 그러다보니 이브에는 생명이라는 의미가 전혀 담기지 않았다. 그리고 원명이 하우와인데, 왜 헬라어 음역에서 파생한 이브라는 이름을 사용하는가? 제 이름 그대로 불러주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 아닌가? 여성신학자들마저도 하우와를 이브라고 칭하는 것은 한심해 보인다. 이것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고정관념을 넘어서 하우와를 제대로 평가하는 일은 하우와를 하우와로 부르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4. 하우와라는 이름은 아담이 지어주었다. 하나님이 아니고 아담이 지어준 이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그 시점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아담이 자기 아내에게 하우와라는 이름을 지어준 때는 그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사실을 하나님이 아시고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각각 벌을 내리신 바로 다음이다. 어떻게 해서 아담이 아내의 이름을 하우와라고 지어주는 구절이 거기에 자리를 잡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자리를 잡고 있는 형태는 큰 의미를 갖는다. 본문을 쓴 사람은 아담이 아내를 하우와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언급한 바로 다음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3:21)는 자기 진술을 첨부하는데, 아담과 하우와라고 하지 않고 아담과 그의 아내로 부르는 것에서 그가 아직 하우와라는 이름에 익숙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출처: pcstratman (https://www.flickr.com/photos/32495192@N07)

 

 

5. 우리는 아담과 그의 아내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추궁을 받는 동안 잘못을 서로에게 전가했기 때문에, 그들이 벌 받은 이후에 관계가 원만치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현재 본문 구성을 보면, 그렇게 볼 근거가 전혀 없다. 만약 아담과 그의 아내가 서로 원망하고 증오했다면, 아담이 아내 이름을 하우와라고, 즉 모든 산자의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우와라고, 즉 생명이라고 부르는 대신, 증오, 저주, 죽음, 이런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붙여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아담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우와, 즉 생명이라는 귀중하고 의미심장한 이름으로 아내를 불렀다.

 

6. 아담이 아내를 하우와라고 부르는 것을 아담이 아내를, 즉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인간관계형태를 반영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꼭 그럴까? 이것은 전체적으로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한 결과로 보인다. 아담과 하우와는 사건 이후에 더 성숙해지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아담이 아내에 대한 지배권을 확증하기 위해서 아내를 하우와라고 부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매사에 아담보다 하우와가 주도적이기에 결코 그럴 리가 없다.

 

7. 사람들은 하우와를 정죄하고 낙인찍기를 좋아하는 듯하다.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고 여기는데, 그 까닭을 하우와 때문인 것으로 본다. 하우와가 유혹하는 뱀에게 넘어가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그것을 남편에게도 주었기 때문에, 인류가 이처럼 타락해서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도대체 하우와가 죄를 지었다고 하자. 그것이 그토록 엄청난 일이었던가? 그리고 그것이 하우와 개인에게 그치지 않고, 온 인류에게 전달되는 무시무시한 유전자로 변형되어서 생물학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유전될 수 있는가?

 

8. 밀턴은 자신이 쓴 책 실낙원에서 하우와가 아름답고 탁월하긴 하지만, 결정적인 게 2퍼센트 부족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부족한 2 퍼센트로 인해 심각한 잘못을 저지를지 몰라 아담은 항상 노심초사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홀로 밭에 나가서 일하겠다는 것을 막지 못해서, 하우와가 뱀에게 유혹당해 죄를 범하고 결국 온 인류를 죄에 빠지게 했다는 것이다.

 

9. 오래된 유대 전설은 하우와가 아담의 첫째 아내가 아니고 둘째 아내라고 한다. 첫째 아내는 너무 고집이 세서 아담이 이혼을 했고, 그래서 하나님이 둘째 부인인 하우와를 순둥이로 창조하셨는데, 하우와가 예상을 깨고 아담에게, 하나님에게 불순종함으로써 그 엄청난 사단, 인류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10. 이렇듯 하우와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게 고정관념으로 전달되고 전파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하우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상당히 강력한 차별과 억압의 이데올로기가 작동한다. 그런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하우와를 바르게 읽어내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여기서는 특히 하우와가 세 아들을 낳고 키운 어머니였음에 주목하려 한다.

 

이종록/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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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1)

 

내 맘고생 사연을 들려주고 싶어요!

-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들려주는 이야기 -

 

 

마리아의 침묵?

 

오늘은 정말 특별한 삶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합니다. 주인공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그런데 마리아에 관한 성경 구절들을 찾아 읽으면서 느낀 것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에 마리아가 말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 복음서에서 마리아는 침묵합니다. 마리아가 말하는 모습은 누가복음에서만 잠깐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마리아는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할 겁니다. 마리아가 우리에게 하려는 첫 번째 이야기는 맘고생이 심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맘고생

 

마태복음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로 시작하는데, 그 족보는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가 태어나신 것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이 족보는 요셉보다 마리아를 강조합니다. 요셉이 예수를 낳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족보에 나오는 다른 세 여인 관련 구절들을 보면,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3),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5),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6)라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한다면, “요셉은 마리아에게서 예수를 낳고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16). 여기서 보는 대로, 요셉을 마리아의 남편이라고 칭하고, 마리아가 예수를 낳았음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요셉이 예수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족보를 마무리한 다음, 마태복음 기자는 118-22절에서 예수가 태어나는 과정을 들려주는데, 여기서는 마리아가 아닌 요셉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마가복음은 예수가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는 장면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예수 탄생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가족, 특히 어머니는 그들이 예수를 찾으러 오는 장면(마가복음 3:31-35)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마태복음은 요셉이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그 일을 지혜롭고 덕스럽게 처리하려는 것을 보여주는데, 요셉은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맘고생이 심했던 모양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20)라는 구절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한 것은 요셉이 임신한 마리아와 결혼하는 것을 얼마나 염려하고 두려워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요셉이 이럴 정도였다면 당사자인 마리아는 얼마나 맘고생이 심했겠습니까? 하지만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은 그 과정에서 마리아가 어떤 심정이었을 것인지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의 임신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지만, 마리아에게는 어떤 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요셉보다 마리아가 더 황당했을 것 아닙니까? 마리아는 그런 뜻밖의 일을 어떻게 감당했을까요? 마태복음은 마리아를 예수의 어머니라고 하면서도, 마리아 자신에게는 전혀 주목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가복음과 요한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출처 https://flic.kr/p/fe51AF)

 

누가복음, 마리아가 말하게 하다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누가복음은 마리아가 말하게 합니다. 누가복음은 세례 요한 탄생 이야기와 예수 탄생 이야기를 절묘하게 엮어서 흥미진진하게 들려줍니다. 그러면서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한 말(누가복음 1:25, 42-45)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한 말(누가복음 1:34, 38, 46-55)도 들려줍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축복하고 찬양합니다. 특히 마리아가 부른 찬양은 한나가 사무엘을 낳고 부른 긴 찬양(사무엘상 2:1-10)과 관련이 깊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누가복음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인사하고 예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마리아가 무척 당황하고 두려워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가브리엘이 인사할 때 마리아는 속으로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라고 생각합니다(누가복음 1:29). 그런 다음 천사가 예수 잉태와 탄생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자,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38)라고 말합니다. 매우 겸손하면서 품위 있고 신앙적인 느낌을 주는 대답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찾아가서 그가 축복하는 말을 들은 다음, 한나의 찬양을 본받아 찬송합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 집에서 석 달을 머물다 돌아갑니다(56). 그렇게 석 달을 함께 지내면서,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서로를 의지하며 위로하고 격려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다른 세 복음서와는 달리, 두 여인의 이런 우애로운 모습에 주목했습니다.

 

부모 심정·자식 심정

 

마태복음을 보면, 요셉은 헤롯을 두려워해서 애굽으로 피신했다가, 애굽에서 돌아온 다음에는 아켈라오를 두려워해서 갈릴리 나사렛으로 갑니다. 다 자식을 걱정해서 그런 겁니다. 마태복음 2장에서 3장으로 넘어가면서 30 년가량 세월이 흐릅니다. 누가복음은 그 사이에 일어난 일들에 관심을 갖습니다. 누가복음은 마리아에게 주목합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누가복음 2:19),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누가복음 2:51).

 

요셉과 마리아는 마태복음 3장으로 넘어가면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12장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등장합니다(46-50). 예수께서 무리들에게 말씀하시는 동안,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찾아왔습니다. 그 사실을 어떤 사람이 예수께 알렸는데, 그때 예수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48). 그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정말 황당했을 것입니다. 일상적인 말씀은 아니니까요. 그런 다음 예수는 제자들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49-50). 이렇게 매정하게 말씀하시고, 예수는 결국 가족들을 만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가족들, 특히 어머니 마리아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예수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을 몰랐을 리 없지만,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않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복음 10:37). 마태복음 1034-39절을 보면, 예수는 가정에 불화를 일으키는 원인 제공자인 것 같습니다.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태복음 19:29, 마가복음 10:29-30. 마가는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라고 해서 부모 대신 어머니만 이야기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는 부모를 자주 찾아뵙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다음, 예수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지만, 부모형제, 특히 어머니를 만났다는 말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는 큰 아들인데도,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그리 정 깊은 아들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배척당하는 아들·지켜보는 어머니

 

예수가 어느 날 고향에 왔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가 거기서 부모 형제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회당에서 가르쳤다는 말만 합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은 예수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 지혜와 능력에 놀라지만, 예수를 인정하거나 존중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를 배척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마태복음 13:55-56).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동네 사람들이 하는 말의 뉘앙스를 보면, 그들이 요셉과 마리아를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수를 조금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욕했습니다. 아들이 이렇게 고향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배척까지 당하는 것을 본 어머니 마리아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아들의 삶·어머니의 고통

 

누가복음은 예수에게 정결예식을 행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갔을 때 예수를 알아본 사람들, 즉 시므온과 안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시므온은 예수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자(누가복음 2:29-32), 예수의 부모는 그것을 들으면서 놀라워합니다(33).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한 다음, 시므온은 부모들을 축복하고(34),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누가복음 2:34-35)는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특히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한다.”는 구절은 예수의 어머니로서 마리아가 앞으로 어떤 심적인 고통을 당할 것인지를 명확하게 알려줍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은 그 말을 듣고 마리아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은 예수가 처형당하는 장소에 어머니 마리아가 왔는지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19:25-27).

 

아들이 밤새 고문당한 것을 확인하고, 그리고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어머니.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모르겠지만, 그 아픔을 안고 평생을 살았을 마리아. 참척(慘慽)의 상황! 다 헤아리지 못해도, 짐작은 할 수 있겠습니다.

 

마리아가 들려주는 말

 

나는 요셉의 아내이고 여러 자식들의 어머니였지만, 사람들은 예수의 어머니로만 기억하는 거 같아요. 나는 요셉과 결혼할 생각에 부풀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천사가 찾아와 예수 탄생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바로 그 순간부터 내 삶은 결코 평탄하게 흘러가지 않았답니다. 예수가 태어나면서부터 내가 겪은 여러 일들. 기쁨과 슬픔. 기대와 실망. 웃음과 눈물. 그리고 평생 안고 산 참척의 고통. 그런 것들을 다 말 못해도, 맘으로 헤아려 주면 좋겠어요. 다 풀어놓지 못한 이야기 보자기. 여러분에게 그냥 드릴게요. 풀어보세요.”

 

이종록/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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