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6)

 

아담아, 너는 어디 있느냐?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
누가복음 11:1-13).

 

성서에는 한 사람이 처한 시간과 장소마다 가슴에 그 뜻이 새겨지는 구절들이 많다. 평소에 그냥 넘기던 구절이 불화살처럼 가슴에 와 박히는 순간이 있다. 사람의 손으로는 그 누구도 빼내 주지 못하는 극한 상황에서 야훼는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구원하시는 이”(시편 l8:2)라는 부르짖음이 나의 기도가 되고, 몇 번이고 까무러치는 고문을 당하는 자의 입술에서는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시편 22:l)라는 신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가 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가족의 심장은 복수의 하느님, 야훼여, 일어나소서. 악인들이 언제까지 만세를 부르리이까?”(시편 94:2-3)라는 물음으로 응어리진다.

그러나 자칫하면 기도는 지극히 음흉한 속임수로 전락하기도 한다. 하느님이 아담을 세워 낙원을 돌보게 하시고 만물의 으뜸으로 세우신 뒤로,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당신이 팔 걷고 나서 가로채신 적이 결코 없었다. 인간의 도리와 나라를 펴는 법도는 우리 양심과 성서 그 가운데서도 예언서에 다 밝혀져 있다. 따라서 우리가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하고 나서”(누가복음 l7:l0) 구하면 받을 것이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하지만 겁에 질리고 일신의 모든 것을 하나도 잃지 않겠다는 계산 하에 바치는 기도는 하느님을 조롱하는 짓이다. “누군가 의롭고 용기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해주겠지”, “누구 누구가 나서 줘야 하는데”, “야훼여! 일어나소서. 악인들 맞받아 때려 누이시고 칼로써 끝장내어 이 목숨 구하소서”(시편 l7:l3)라는 말 속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역사의 현장을 기피하는 간교가 숨어 있다.

하느님은 살인청부업자가 아니다. 세상에 엄청난 비극이 터질 때마다 걸핏하면 신은 죽었다!”고 부고장을 돌리며 우리의 하느님이 어찌되었느냐?”(시편 42:12)고 외칠 때에 하느님께서도 하실 말씀이 있는 것이다. “아담아, 너는 어디 있느냐?”(창세기 3:9).

 

성염/전 바티칸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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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자리의 '종횡서해'(1)

  ‘천사’가 일깨워준 새로운 삶
- 마사 베크의 《아담을 기다리며》 -

 

몇 해 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개인적 체험이라는 작품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원래 사소설(私小說)적 전통이 뿌리 깊은 일본이기 때문에 조금 덜 했을지는 모르지만, 작가의 이색적인 자기 고백이 담겨 있는 이 작품이 당대의 국내 독자들에게 준 충격과 감동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작가 개인의 가장 내밀하고도 직접적인 경험을 담은 이 소설의 내용은, ‘뇌 헤르니아라는 기형의 병을 앓고 있는 장애 아이를 키우는 버드라는 사내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머리에 혹이 달린 아이는 뇌수술을 받지 않으면 곧 죽게 된다.

장애아를 살려 키울 것인가, 아니면 미필적 고의로 죽게 내버려둘 것인가? 이때 주인공은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한 생명이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적잖은 부담을 느낀다. 결국 주인공은 수술을 결정하게 되고 장애아인 아이를 살려 돌보게 된다. 실제로 오에 겐자부로가 장애인인 아들을 키우던 개인적 체험이 반영된 이 작품은, 그 과정에서 느꼈을 법한 한 인간의 번민과 고통이 소설의 직접적인 내인(內因)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강렬한 감동과 공감을 자아낸 바 있다.

여성 칼럼니스트 마사 베크(Martha Beck)의 자전적 회상록 아담을 기다리며는 여러 면에서 개인적 체험을 환기하고 있다. 우선 이 작품은 아이를 갖게 되고, 그 태아가 다운증후군을 가진 것을 알게 되고, 그 아이를 낳기로 결정하고, 산고 속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부부의 고통스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또 이 작품은 철저하게 작가의 실제 경험에 기초를 두고 있다. 제삼자의 눈에는 휴머니즘의 발현으로 보이는 이 같은 부모의 헌신과 애정이 실은 엄청난 고통과 번민과 망설임과 안간힘의 결과라는 것을 두 작품은 매우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개인적 체험에 나타나는 개인적 결단의 과정에 비해 아담을 기다리며는 우리의 삶을 움직이고 있는 근원적이고 신성한 존재와 그로 인해 삶의 가치와 우선순위가 변화하는 과정에 중심을 두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래서 자신이 집착하던 가치나 삶의 양식에서 벗어나 진정한 삶의 가치에 이르는 감동적인 전신(轉身)의 서사가 뼈대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이 작품과 개인적 체험이 갈라지는 지점이 된다. 그리고 이 작품은 한결 밝고 활력에 차 있다. 이 작품을 종교적 각성의 한 은유(隱喩)로 읽을 수 있는 까닭도 이러한 활력과 전신의 에너지 때문이다.

하버드의 엘리트 학생 부부인 마사와 존이 두 번째 아기를 임신하게 된다. 산과 검사 결과 뱃속의 아기인 아담이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임신 중절을 하라는 주위 사람들의 숱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그들 부부는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다.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여러 고통과 절망, 불안에도 불구하고 아담으로 인해 그들 부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던 가치들과 하나하나 결별한다. 그리고 그 동안 살아오던 것과는 전혀 다른 안목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에 눈을 떠가게 된다. 아담을 기다리며는 이처럼 주인공 마사와 존이 그들의 아들 아담을 통해서 이르게 되는 자기 발견의 이야기이다.

이 작품의 흐름은 시간의 선형적(線形的) 구조를 따르고 있지 않다. 작가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는 여러 풍경과 삽화들이 그때그때의 기억의 충실성에 의해 순서 없이 나열되고 있다. 아담을 가지기 전, 아담을 가진 후, 아담을 낳던 때, 아담을 키우면서 등의 시간이 뒤섞여서 일정한 배열 원리 없이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아담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삶의 변화의 여러 결을 보여주려는 데 작품의 초점이 있지, 장애아를 키우면서 삶을 극복해 가는 휴먼 다큐식의 서사에 중심이 있지 않다. 그런데 이들이 그토록 힘든 고통을 감내하면서 기다린 아담은 누구인가?

먼저 아담은 태어날 때부터 다운증후군을 앓은 선천성 장애아다. 그는 고개가 한편으로 기울고, 입은 헤벌어지고, 혀가 늘어져 나오고, 눈은 초점을 잃”(121)은 외관을 하고 있는, 어찌 보면 한 가정에 근심과 한숨을 가져다줄 것만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존도 처음에는 임신 중절을 생각하게 되고, 주위 사람들도 그들 부부의 자기 성취를 위해서 아담으로부터 떨어져 나올 것을 권면한다. 그러나 아담을 가지게 되면서 겪게 되는 이들 부부의 신비한 경험들, 예컨대 집에 화재가 났을 때 마사를 구해준 손길 같은 보이지 않는 존재들(인형 조종자)’의 도움을 통해 그들은 생활이 전적으로 나 아닌 누군가의 통제하에 있다는 기괴한 기분”(61)을 느끼게 된다.

따스한 이웃들, 적절한 조언을 해주는 사람들, 그들 앞에서 펑펑 울고 마는 그들 부모의 애정도 이러한 변화에 중요한 몫을 한다. 이 순간 그들이 기다리던 아담은 장애아로부터 신성한 존재로 탈바꿈된다. 결국 아담을 통해 만나고 알게 된 이러한 신성한 존재들과의 신비로운 소통을 통해 너무나도 논리적인 사람”(33)이었던 마사는 자신이 내 자식인 이 아이는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영혼을 지니고 있다는 것, 내가 그를 정상적인 아이로 만들려고 애쓰며 겪는 고통에 대해 안쓰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나의 많은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사랑한다는 것”(79)을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작품 처음부터 끝까지 집요하게 반복되고 있는 마사의 가혹한 구토증은 이러한 발견과 변화에 따르는 고통이 얼마나 커다란 것인가를 암시한다. 그러나 이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그들의 생을 고통으로부터 축복으로 이끈다. 그래서 마사는 아담은 그를 갖기 전에 내가 느낀 어떤 것도 능가하는 행복감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사물의 핵심을 보는 것, 가던 걸음을 멈추고 장미뿐만 아니라 관목들까지 냄새를 맡아보는 것에서 오는 것”(84)이라는 고백에 이른다.

마찬가지로 존 역시 황량한 황무지 대신에 온갖 가능성이 충만한 세상에 온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을 버리고 과거의 싸움터로 돌아가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다 해도 그건 전혀 바랄 만한 일이 아닌 것 같았다”(290)라는 변화를 겪는다. 이 모든 것이 아담이 가져다준 신비로운 은총이다. 그만큼 조그만 기적들이 항상 아담 주위에서 일어난다는”(109) , 그리고 나는 내가 받은 그 모든 교육과 훈련에도 불구하고 즐겁게 사는 것에 대해 내가 아는 거의 모든 것은 학교에서가 아니라 단 한 사람 내 아들에게서 배웠다는 것”(123), “아담에게는 사물의 외면적 일상성을 꿰뚫고, 그것이 내면에 지니고 있는 마술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202)는 것에 대한 일련의 귀중한 발견이 뒤따르면서 그들의 생은 변화한다.

이 책의 부제가 “A True Story of Birth, Rebirth, and Everyday Magic”인 것을 참조하면, 이들 마사와 존의 삶은 탄생과 재탄생 그리고 매일 일어나는 마술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 일상적 마술이 아담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조그만 기적들의 다른 이름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 가운데 마사가 고통 속에서 듣게 되는 신성한 음성과, 특별히 마사가 진통의 혼몽중에 바라본 공중에 서 있는 한 쌍의 맨발”(302)은 예수 그리스도의 감각적 형상으로 보아도 손색이 없다. 생의 극한에서 만나게 되는 신의 음성과 손길과 맨발, 그것들은 사랑하면 눈이 먼다는 말은 아주 틀린 말이다. 사랑은 지상에서 오직 하나 우리에게 서로를 가장 정확하게 보게 해주는 것이다”(234)라는 발견을 통해 그들 부부를 궁극적인 사랑의 힘으로 인도한다. 그래서 이 작품의 초점은 이제 사랑에 가 닿는다.

우리의 짧고 덧없는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고립된 자신을 벗어나 손을 뻗쳐 서로에게서, 그리고 서로를 위해서, 힘과 위안과 온기를 발견하는 능력이다. 이것이 인간이 하는 일이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사는 것이다.”(147)

그래서 이 손을 뻗쳐 서로에게서, 그리고 서로를 위해서, 힘과 위안과 온기를 발견하는 능력은 자연스럽게 사랑의 힘으로 이어진다. “방안의 그 물리적 존재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것과 함께 온 사랑이었다. 나는 빛나는 사랑의 물결에 휩싸인 느낌이었다. 그 사랑은 땅 위의 모든 고통이 조그만 흠집도 낼 수 없는 그렇게 강한 사랑이었다”(302)는 발견은 그래서 이 책의 궁극적인 메시지를 이룬다.

책의 서문에서 김종철 교수가 베크 부부는 그들 자신이 이 세상에 전혀 새로이 태어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들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인생에서 무엇이 정말 소중하고, 무엇이 하찮은 것인가 하는 데 대하여 근원적인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사랑으로의 변화를 일컫는 증언이다. 그 근원적 깨달음을 던져준 아담은 결국 천사들의 호위를 받고 강림한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 형식이 된다. 인류의 첫 사람 아담과 인류의 구원자인 예수와 선천적 장애아이자 뭇사람들에게 진귀한 은총을 주고 있는 아담은 이 순간 하나의 육체로 통합된다. 이처럼 이 책은 크게는 종교적 발견의 서사, 작게는 한 인간의 가치의 중심이 전이되는 자기 탐색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장애인 문제에 대해 새롭게 접근할 수 있는 안목을 열어주고 있다. 장애아를 돌보는 것은 휴머니즘이라는 인간 본위의 실천이 아니라, 신성한 힘에 의해 주어진 은총의 일부라는 생각으로의 전환을 이 작품은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다. 우리 주위에서도 흔하게 목격할 수 있는 이 같은 풍경은, 생의 재앙을 생의 복으로 변화시키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힘과 은총을 함께 암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은 이른바 아이비리그(Ivy League)’에 속해 있는 엘리트들의 맹목에 가까운 삶의 태도에 대한 우회적 비판의 함의도 띠고 있다. 하버드를 이루고 있는 풍경은 치열한 경쟁과 엄청난 속도, 지독한 자기 중심성이다. 특히 존이 존경해 오던 유능한 사업가인 카버나 하버드의 저명한 학자이자 교수인 고우트스트록에 대해 존이 치르는 존경과 경멸의 엇갈림은, 그 자체로 성취 중심의 지식인 사회에 대한 강한 비판을 담고 있는 전회(轉回)의 장면이다. 고우트스트록 교수가 존에게 한 암흑시대가 아직 가장 명석한 정신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군”(221)이라는 말은, 우리 사회가 불문율처럼 전제하는 이성 중심, 효율성 중심, 자기 본위의 상상력을 그대로 드러내주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성적·기능적·자기 중심적 영역 너머에 존재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인간의 종교적 욕망을 한계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 읽은 호킹이나 인간의 궁극적 관심으로 읽은 틸리히의 견해를 존중한다면, 그리고 원천적으로 종교적 체험이 어떤 거룩한 실재와 접촉하는 성스러움의 경험을 동반하는 것이라면, 확실히 베크 부부가 겪은 신성한 존재와의 만남은 종교적 체험의 일부를 이룬다. 종교적 경험의 현상학적 특징이 자기 부정을 통하여 새롭게 자기를 재긍정 하는 통과제의적 과정을 겪는 데 있다는 점에서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궁극적으로 새로운 존재(New Being)’가 되기 때문이다. 베크 부부는 아담을 통해 삶의 전환점을 엄청난 고통 속에서 찾았다. 욥이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아담은 그들 부부를, 우리 모두를 새로운 존재가 되게끔 인도한 천사였다. 말 그대로 하늘이 보낸 사자였다.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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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3)

 

하우와, 믿음으로 실패와 아픔을 이겨내다(2)

 

 

1. 어머니 하우와. 창세기 4장은 2장과 3장의 서술과는 달리, 하우와가 세 자녀를 낳고 키우면서 일상의 희노애락을 경험하며 살던 한 평범한 어머니였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 하우와가 신앙적인 여인이었음을 보여준다. 하우와는 셋째 아들인 셋을 낳고 난 다음에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25절).

 

하우와가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의 이름을 '셋'이라고 짓고 나서 그렇게 이름을 지은 이유를 밝히는 장면이다.

 

2. 이것과 비슷한 구절이 4장 1절에도 나온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우와와 동침하매 하우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우리는 이 두 절이 닮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래서 창세기 4장은 첫아들을 낳은 다음 하우와가 하는 말로 시작해서 막내 아들을 낳은 다음 하우와가 하는 말로 끝난다. 그렇기에 4장 전체의 주인공은 다른 사람이 아닌 하우와이다.

 

3. 우리는 이 구절에서 하우와의 깊은 신앙을 엿볼 수 있다. 하우와는 자기 아들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결코 심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아들이 태어나는 일을 중대한 사건으로 보고 그 사건을 하나님의 사건으로 해석한다. 하우와는 가인을 낳을 때도 그랬고 셋을 나을 때도 그랬다. 하우와가 아들 낳은 것을 하나님의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이 창세기 4장에 두 번이나 나오고, 그것이 4장 맨 앞부분과 뒷부분에 나오고 있다는 것은 그녀가 언제나 그랬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창세기 4장에 나오는 비극적인 사건들을 하우와의 신앙고백으로 끌어안고 있음을 알려준다.

 

Emil Nolde - Verlorenes Paradies (Paradise Lost) (1921) Oil on canvas, 106 x 157 cm

(출처: Playing Futures: Applied Nomadology (http://www.flickr.com/photos/centralasian))

 

 

4. 우리는 여기서 하우와의 새로운 모습을 본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만나는 하우와는 얼마나 신앙적인 인물인가?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신앙심 깊은 한 여인을 만난다. 자녀들로 인해 아픔을 겪으면서, 그것을 신앙으로 극복해내는 한 어머니의 모습을 본다. 지금까지 성경에 묘사되어 있는 하우와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우리와 같은 한 인간으로 생각한 적이 있는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하고 노래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그런 하우와를 생각한 적이 있느냐는 말이다. 본문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우와의 기쁨과 슬픔을 살려내는 것, 그래서 그를 한 인간으로 경험하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성경독자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5. 4장 처음 부분과 마지막 부분 사이에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극적인 사건이 나온다. 물론 이 사건의 주인공은 가인이다. 그래서 성경은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다보니 이 사건으로 인해서 아담과 하우와가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는지에 대해서는 본문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을 밝혀내는 것이 바로 독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성경이 표면적으로 말하는 바를 꼼꼼하게 읽어내야 할 뿐만 아니라, 성경이 침묵으로 전달해주는 정작 더 귀중한 메시지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아니, 본문에 등장하는 아담과 하우와가 우리에게 조용히 들려주는 말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

 

6.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우리는 이 말에서 아들을 낳은 한 어머니가 지르는 환호성을 듣는다. 하우와는 가인을 낳고 얼마나 기뻐했을까? 물론 아벨을 낳은 후에도 그런 맘이 들었겠지만, 아벨을 낳고 그런 말을 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하우와가 가인을 낳고 얼마나 기뻐하고 감격하고 감사했는지 알 수 있다. 하우와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장면을 읽을 때, 무덤덤하게 읽을 수가 없다. 우리와 똑같은 한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7.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이 말을 하는 하우와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하나님이 주신 아들. “아 하나님이 아들을 주셨다.” 기쁨에 넘쳐서 외쳤던 그 아들이 사랑하는 둘째 아들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멀리 떠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우와는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을까? 또 피 흘린 채 죽어있는 둘째 아들 아벨의 시신을 끌어안고 하우와는 얼마나 가슴 아파했을까? 고통당하는 하우와. 그러면서도 그 모든 일들을 신앙으로 이겨내는 하우와. 그 하우와의 모습을 생생하게 느껴야 한다.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던 하우와. 아들 낳은 일을 하나님의 사건으로 해석해내고 모든 아픔을 신앙으로 이겨내는 하우와는 분명히 신앙심 깊은 인물이었다. 이 하우와가 창세기 4장을 지배하는 무서운 증오와 죽음을 신앙으로 끌어안아서 녹여내고 있다.

 

8. 아담과 하우와가 낳은 셋째 아들은 누구인가? ‘셋’이다. ‘셋’의 뜻이 무엇인가? ‘대신한다’이다. 셋은 가인과 아벨을 대신하는 아들이다. 셋은 가인과 아벨로 상징되는 증오와 죽음을 대신하는 아들이다. 그렇기에 아담과 하우와가 아들을 낳은 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그 증오와 죽음을 넘어서서 새로운 사랑과 삶으로 나아가는 사건이다.

 

9. 셋이 태어난 것은 증오와 죽음의 현장, 증오와 죽음의 시대를 넘어서 사랑과 삶의 시대로 나아가는 사건이다. 만약 셋이 탄생해서 에노스로 그 계보가 이어지지 않았다면, 증오와 죽음이 세계를 지배하고 비극의 역사가 계속되었을 것이다. 가인에서부터 라멕까지 이어지는 증오와 죽음의 역사를 문학적으로 단절하는 것이 바로 ‘셋’의 탄생이다.

 

10. 창세기 4장의 구성을 보면, 증오와 죽음의 역사는 셋의 탄생으로 일단 끊어지는 구조를 보인다. 4장 3절부터 15절까지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이야기이고, 16절부터 24절까지는 가인과 그의 후손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야기는 라멕이 부르는 증오와 죽음의 노래로 종결된다. 그래서 4장 3절부터 24절까지가 증오와 죽음의 이야기이다. 이 비극적인 이야기들을 감싸는 것이 바로 아들들의 탄생과 하우와의 신앙고백이다.

 

 

이종록/한일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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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2)

 

하우와, 믿음으로 실패와 아픔을 이겨내다(1)

 

 

 

1.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뭘까? 뭘 보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이런 의문이 들 때가 많다. 성서학자로서 내가 하는 일은 이런 의문들을 통해서 성서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를 강력하게 지배하는 그릇된 고정관념들이 참 많고, 그것들을 파악해서 넘어서는 게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읽든, 대다수 경우 결국은 우리에게 굳게 박힌 고정관념을 보고 그것을 읽어내는 것 이상이 아님을 새삼 깨닫는다.

 

2. 하우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우와는 인류 최초의 여자라고 하는 하와를 히브리어그대로 읽은 이름이다. 하우와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동사 하야에서 왔다고 하는데, “하야살다” “살아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하우와의 뜻은 생명또는 이다. 창세기 기자는 하우와를 모든 산 자의 어머니로 풀이한다.

 

3. 이 하우와를 영어식으로 이브”(Eve)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브는 도대체 하우와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히브리어 성경을 70인 역이라는 헬라어 성경으로 번역하면서, 번역자들이 하우와라는 히브리어를 맨 처음에 딱 한 번 그 의미를 살려서 헬라어 조에”(생명)로 옮겼는데, 그 다음부터는 에우와로 음역했다. 이것이 영어식으로는 이브가 된 것이다. 그러니 이브는 하우와라는 히브리어의 헬라어 음역을 흉내 낸 것일 뿐이다. 그러다보니 이브에는 생명이라는 의미가 전혀 담기지 않았다. 그리고 원명이 하우와인데, 왜 헬라어 음역에서 파생한 이브라는 이름을 사용하는가? 제 이름 그대로 불러주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 아닌가? 여성신학자들마저도 하우와를 이브라고 칭하는 것은 한심해 보인다. 이것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고정관념을 넘어서 하우와를 제대로 평가하는 일은 하우와를 하우와로 부르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4. 하우와라는 이름은 아담이 지어주었다. 하나님이 아니고 아담이 지어준 이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그 시점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아담이 자기 아내에게 하우와라는 이름을 지어준 때는 그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사실을 하나님이 아시고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각각 벌을 내리신 바로 다음이다. 어떻게 해서 아담이 아내의 이름을 하우와라고 지어주는 구절이 거기에 자리를 잡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자리를 잡고 있는 형태는 큰 의미를 갖는다. 본문을 쓴 사람은 아담이 아내를 하우와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언급한 바로 다음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3:21)는 자기 진술을 첨부하는데, 아담과 하우와라고 하지 않고 아담과 그의 아내로 부르는 것에서 그가 아직 하우와라는 이름에 익숙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출처: pcstratman (https://www.flickr.com/photos/32495192@N07)

 

 

5. 우리는 아담과 그의 아내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추궁을 받는 동안 잘못을 서로에게 전가했기 때문에, 그들이 벌 받은 이후에 관계가 원만치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현재 본문 구성을 보면, 그렇게 볼 근거가 전혀 없다. 만약 아담과 그의 아내가 서로 원망하고 증오했다면, 아담이 아내 이름을 하우와라고, 즉 모든 산자의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우와라고, 즉 생명이라고 부르는 대신, 증오, 저주, 죽음, 이런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붙여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아담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우와, 즉 생명이라는 귀중하고 의미심장한 이름으로 아내를 불렀다.

 

6. 아담이 아내를 하우와라고 부르는 것을 아담이 아내를, 즉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인간관계형태를 반영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꼭 그럴까? 이것은 전체적으로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한 결과로 보인다. 아담과 하우와는 사건 이후에 더 성숙해지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아담이 아내에 대한 지배권을 확증하기 위해서 아내를 하우와라고 부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매사에 아담보다 하우와가 주도적이기에 결코 그럴 리가 없다.

 

7. 사람들은 하우와를 정죄하고 낙인찍기를 좋아하는 듯하다.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고 여기는데, 그 까닭을 하우와 때문인 것으로 본다. 하우와가 유혹하는 뱀에게 넘어가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그것을 남편에게도 주었기 때문에, 인류가 이처럼 타락해서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도대체 하우와가 죄를 지었다고 하자. 그것이 그토록 엄청난 일이었던가? 그리고 그것이 하우와 개인에게 그치지 않고, 온 인류에게 전달되는 무시무시한 유전자로 변형되어서 생물학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유전될 수 있는가?

 

8. 밀턴은 자신이 쓴 책 실낙원에서 하우와가 아름답고 탁월하긴 하지만, 결정적인 게 2퍼센트 부족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부족한 2 퍼센트로 인해 심각한 잘못을 저지를지 몰라 아담은 항상 노심초사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홀로 밭에 나가서 일하겠다는 것을 막지 못해서, 하우와가 뱀에게 유혹당해 죄를 범하고 결국 온 인류를 죄에 빠지게 했다는 것이다.

 

9. 오래된 유대 전설은 하우와가 아담의 첫째 아내가 아니고 둘째 아내라고 한다. 첫째 아내는 너무 고집이 세서 아담이 이혼을 했고, 그래서 하나님이 둘째 부인인 하우와를 순둥이로 창조하셨는데, 하우와가 예상을 깨고 아담에게, 하나님에게 불순종함으로써 그 엄청난 사단, 인류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10. 이렇듯 하우와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게 고정관념으로 전달되고 전파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하우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상당히 강력한 차별과 억압의 이데올로기가 작동한다. 그런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하우와를 바르게 읽어내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여기서는 특히 하우와가 세 아들을 낳고 키운 어머니였음에 주목하려 한다.

 

이종록/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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