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2)

우리를 뛰어 넘는 하나님의 생각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臨)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腹中)에 짓기 전(前)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胎)에서 나오기 전(前)에 너를 구별(區別)하였고 너를 열방(列邦)의 선지자(先知者)로 세웠노라 하시기로”(예레미야 1:4-5).

예레미야를 부르시며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를 오래 전부터 알았다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전부터.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을 알게 된 뒤부터 시작되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때부터 시작이 된다.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그의 어머니 태중에 생기기도 전부터 아셨다. 말을 할 줄 알고, 생각을 할 줄 알고, 하나님을 믿기 시작할 때부터가 아니었다.

그를 ‘복중’(腹中)에 짓기 전부터 아셨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이라 하심으로 그를 지은 것이, 생기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밝히신다. 그는 결코 사람에 의해 우연히 생긴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다.

‘복’(腹)이란 말은 ‘몸 육’(月=肉)에 ‘거듭 복’(㚆)을 짝지은 글자로 ‘배, 창자, 마음’의 뜻을 가지고 있다. ‘복안’(腹案)이란 말을 우리가 쓰거니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이르는 말이다. 한문의 의미로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지은 것은 그의 어머니 배 안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서부터 시작이 된 것이다.

예레미야가 알지도 못할 때부터 그를 지으신 것은 그를 통해 하실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그를 구별하신다. 쓰시기 전에, 쓰시기 위해 구별부터 하신다. ‘구별하다’는 말은 성서적인 의미로 ‘거룩하다’는 뜻이 된다. 하나님은 거룩한 사람을 부르셔서 쓰시는 것이 아니라, 부르신 자를 거룩하게 하셔서 쓰신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우신다. ‘열방’(列邦)은 ‘벌일 열’(列)에 ‘나라 방’(邦)을 합한 말로, ‘여러 나라’를 의미한다. 예레미야가 생기기도 전 하나님은 그를 통해 하실 일을 생각하고 계셨는데, 열방의 선지자로 쓰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아니라 열방의 선지자다.

권정생의 동화 <강아지똥>에서 달구지에서 떨어진 흙덩이가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낙심한 강아지똥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하느님은 쓸데없는 물건은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어.”

시골에서 지게를 만드는 농부도 얼렁뚱땅 만들지는 않는다. 산을 오르내릴 때마다 눈여겨 나무를 봐둔다. 지게를 만들 수 있는 나무를 찾아두는 것이다. 지게는 가지가 조금 벋어난 나무 두 개를 모아 만드는데,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은 것으로 짝을 맞춘다. 그래야 짐이 제대로 실리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무 한 쪽은 양나무여야 하고, 한 쪽은 음나무여야 한다. 양지건 음지건 같은 자리에서 자라는 나무를 쓰면 휘는 방향이 같아 지게로서의 역할을 할 수가 없게 된다. 양지에서 자란 나뭇가지 하나와 음지에서 자란 나뭇가지 하나씩을 골라 서로 대칭을 이루게 하며 지게를 만드는 것이다.

하물며 지게 하나를 만들 때도 이렇게 세밀하게 생각을 한 뒤 만드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허투루 하실까?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기억이 가 닿지 못할 만큼 오래 전부터, 예레미야의 생각이 감히 미치지 못할 만큼의 먼 미래까지, 예레미야로서는 감히 생각하지 못할 크고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예레미야를 부르셨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다.

훨씬,

무한히!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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