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23)

 

하나님이 버린 폐석

 

 

“주(主)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미 너로 내 백성(百姓) 중(中)에 살피는 자(者)와 요새(要塞)를 삼아 그들의 길을 알고 살피게 하였노라 그들은 다 심(甚)히 패역(悖逆)한 자(者)며 다니며 비방(誹謗)하는 자(者)며 그들은 놋과 철(鐵)이며 다 사악(邪惡)한 자(者)라 풀무를 맹렬(猛烈)히 불면 그 불에 납이 살라져서 단련(鍛鍊)하는 자(者)의 일이 헛되게 되느니라 이와 같이 악(惡)한 자(者)가 제(除)하여지지 아니하나니 사람들이 그들을 내어버린 은(銀)이라 칭(稱)하게 될 것은 나 여호와가 그들을 버렸음이니라”(예레미야 6:27-30).

 

자신을 쥐라고 생각하는 청년이 있었다. 어떤 연유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청년은 그런 망상으로 인하여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고, 마침내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의사는 열심히 치료를 했다. “당신이 어찌 쥐입니까? 사람이지요.” 하면 청년은 “아니에요, 나는 쥐입니다.” 하면서 쥐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청년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자 의사는 지쳐갔다. 마침내 의사는 생각을 바꿨다. “맞습니다. 당신은 쥐였습니다. 전에는 쥐였습니다.” 의사의 말에 청년은 자신을 인정해주고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났다는 안도감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의사는 청년에게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나 이젠 달라졌어요. 당신은 더 이상 쥐가 아닙니다. 당신은 마침내 사람이 되었으니까요.” 의사의 설명을 듣고 청년도 자신의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청년은 마침내 완치가 되어 퇴원을 하게 되었다. 가벼운 걸음으로 병원을 나서는 청년을 의사는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잠시 뒤 청년은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의사에게로 뛰어 왔다. “무슨 일이지요?” 의사가 놀라 물었을 때 청년은 벌벌 떨면서 말했다. “선생님, 병원 바로 앞에 고양이 한 마리가 있어요.” “그게 무슨 문제지요? 당신은 더 이상 쥐가 아니라 사람인데요. 사람이 고양이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러나 청년은 의사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저도 제가 달라졌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선생님, 고양이도 그 사실을 알까요?”

 

 

 

 

언젠지 모르게 찾아들고 한 번 찾아들면 좀체 버리기가 어려운 것, 습관이다. 그래서 그럴까 습관을 두고는 ‘들다’ 혹은 ‘배다’라는 말을 쓴다. 슬며시 찾아들어 아주 자리를 잡기 때문이다.

 

‘습’(習)이라는 글자는 ‘익히다’와 ‘습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깃 우’(羽)와 ‘흰 백’(白)이 합해졌는데, 새끼 새가 날갯죽지 밑의 흰 털을 보이면서 나는 것을 연습한다는 데서 생겨난 글자라 한다. 다른 자료에 의하면 본래 ‘깃 우’ 밑을 바치고 있는 글자는 ‘흰 백’(白)이 아니라 ‘날 일’(日)이었다고 한다. 새끼 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 매일 날갯짓을 하는 것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좋은 버릇은 들기 어렵고, 나쁜 버릇은 버리기 어렵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속담이 있다. 한 번 배면 버리기 힘든 것이 습관이니, 나쁜 버릇은 들지 않도록 좋은 버릇은 잘 배도록 애를 쓰는 것이 지혜일 것이다.

 

‘내가 이미 너로 내 백성 중에 살피는 자와 요새를 삼아 그들의 길을 알고 살피게 하였노라’(27)는 말씀을 새번역에서는 “내 백성을 시험해 보아라. 금속을 시험하듯 시험해서 도대체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혀 보아라.”로 번역을 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속마음을 몰라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백성들의 정체를 예레미야에게 알게 하신다. 백성들이 자신의 정체를 알기 원하신다. 금속을 시험하듯 시험하여 드러날 하나님 백성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여느 금속은 풀무질을 세게 하면 불이 뜨거워져서 그 뜨거운 불 속에서 온갖 불순물이 타 없어지게 된다. 뜨거운 불 속에서 납이 녹고 불순물이 사라진다. 그런데 하나님 백성들의 마음은 완악하기가 놋쇠나 무쇠와 같은데다가 속속들이 썩어 있어, 그들의 불순물인 죄악은 도무지 제거되지가 않는다. 결국 하나님 백성들의 정체는 ‘내버린 은’으로 드러난다.

 

“이제 그들은, 불순물을 제거할 수 없는 ‘내버린 은’일 뿐이다. 나 주가 그들을 내버렸기 때문이다.” <새번역>

 

“그런 자들을 나 야훼는 내버린다. 그러니 ‘내버린 은’이라고 불러주어라.” <공동번역 개정판>

 

“그들은 ‘버려진 은’이라 불리리니 주님께서 그들을 버리셨기 때문이다.” <성경>

 

“사람들은 그들을 포기하고, 그들의 하나님이 버린 ‘폐석’이라 부를 것이다.” <메시지>

 

아무리 뜨거운 불로 태워도 불순물이 사라지지 않아 내버릴 수밖에 없는 은, 그런데도 은이라고, 내 안에 은이 있다고 자부심을 느끼거나 자랑을 한다면 그것은 더욱 ‘하나님이 버린 폐석’일 뿐이다.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속을 살펴야 한다. 한 번 잘못된 생각이 찾아들면 그것을 버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쓸모없어 결국은 버려지는 폐석이 되도록.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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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3)

 

말을 할 줄 모릅니다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예레미야 1:6).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예레미야가 보인 첫 번째 반응은 슬픕니다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부르셨는데 슬프다니! 성경에 이름이 기록된 예언자가 보인 반응이라 하기에는 어이없어 보인다. 하나님의 뜻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믿음이 적고 약해 보인다.

위대한 주님의 종이라면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할렐루야!” 하며 두 손을 들든지, “영광입니다!” 하는 뜨거운 반응을 보였어야 하지 않을까.

사막 동굴에서 기도하는 한 수도자를 사탄이 찾아왔다. 빛의 천사를 가장하고서. 사탄은 수도자에게 나는 하나님이 당신에게 보내서 온 빛의 천사입니다라고 했다. 그 때 수도자는 잘못 찾아왔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천사를 보낼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자 사탄은 즉시 그를 떠나갔다고 한다.

어쩌면 예레미야의 그런 점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신 이유인지도 모른다. 정직하다는 것이야말로 진실함의 근거, 아무리 대단한 믿음을 가진 것처럼 보여도 그 마음이 진실하지 않다면 그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없다. 사람 앞에서는 잠깐 대단한 도구처럼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정직한 영을 가진 사람이다.

 

사람은 그릇의 크기를 보지만, 하나님은 그릇 됨을 보신다. 그릇의 크기는 외양의 크기가 아니라 나를 얼마나 비워냈느냐 하는 것이다.

슬픕니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하흐인데, 좋지 못한 일을 만났을 때 놀라고 당황하여 탄식하며 내뱉는 외마디 소리라 한다. 같은 말을 에스겔 414절에서는 오호라로 번역했다.

그러고 보니 히브리어 아하흐와 우리말 오호라가 비슷하게 들린다. 어느 시대나 사람의 탄식은 비슷한 유형, 비슷한 감정을 담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탄식부터 한 예레미야는 나는 말을 할 줄 모릅니다고 대답을 한다. 말을 할 줄 모른다는 말에 비춰 생각해 볼 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말을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런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하신다.

사람이 말을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그 입에 두심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 누군가가 말씀의 사람이 되는 것은 그가 말을 잘 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입에 당신의 말씀을 맡겨 주시기 때문이다.

말을 잘 하는 것과 말씀을 전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달변가를 원하시지 않는다. 어눌하더라도 당신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사람을 원하신다.

그런데 보라. 오늘날 수많은 목회자들이 사람들 앞에 말 잘하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사람들 또한 말 잘 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따른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당신의 말씀을 맡기셨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우리 시대의 비극이 여기에 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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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2)

우리를 뛰어 넘는 하나님의 생각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臨)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腹中)에 짓기 전(前)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胎)에서 나오기 전(前)에 너를 구별(區別)하였고 너를 열방(列邦)의 선지자(先知者)로 세웠노라 하시기로”(예레미야 1:4-5).

예레미야를 부르시며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를 오래 전부터 알았다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전부터.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을 알게 된 뒤부터 시작되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때부터 시작이 된다.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그의 어머니 태중에 생기기도 전부터 아셨다. 말을 할 줄 알고, 생각을 할 줄 알고, 하나님을 믿기 시작할 때부터가 아니었다.

그를 ‘복중’(腹中)에 짓기 전부터 아셨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이라 하심으로 그를 지은 것이, 생기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밝히신다. 그는 결코 사람에 의해 우연히 생긴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다.

‘복’(腹)이란 말은 ‘몸 육’(月=肉)에 ‘거듭 복’(㚆)을 짝지은 글자로 ‘배, 창자, 마음’의 뜻을 가지고 있다. ‘복안’(腹案)이란 말을 우리가 쓰거니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이르는 말이다. 한문의 의미로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지은 것은 그의 어머니 배 안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서부터 시작이 된 것이다.

예레미야가 알지도 못할 때부터 그를 지으신 것은 그를 통해 하실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그를 구별하신다. 쓰시기 전에, 쓰시기 위해 구별부터 하신다. ‘구별하다’는 말은 성서적인 의미로 ‘거룩하다’는 뜻이 된다. 하나님은 거룩한 사람을 부르셔서 쓰시는 것이 아니라, 부르신 자를 거룩하게 하셔서 쓰신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우신다. ‘열방’(列邦)은 ‘벌일 열’(列)에 ‘나라 방’(邦)을 합한 말로, ‘여러 나라’를 의미한다. 예레미야가 생기기도 전 하나님은 그를 통해 하실 일을 생각하고 계셨는데, 열방의 선지자로 쓰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아니라 열방의 선지자다.

권정생의 동화 <강아지똥>에서 달구지에서 떨어진 흙덩이가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낙심한 강아지똥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하느님은 쓸데없는 물건은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어.”

시골에서 지게를 만드는 농부도 얼렁뚱땅 만들지는 않는다. 산을 오르내릴 때마다 눈여겨 나무를 봐둔다. 지게를 만들 수 있는 나무를 찾아두는 것이다. 지게는 가지가 조금 벋어난 나무 두 개를 모아 만드는데,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은 것으로 짝을 맞춘다. 그래야 짐이 제대로 실리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무 한 쪽은 양나무여야 하고, 한 쪽은 음나무여야 한다. 양지건 음지건 같은 자리에서 자라는 나무를 쓰면 휘는 방향이 같아 지게로서의 역할을 할 수가 없게 된다. 양지에서 자란 나뭇가지 하나와 음지에서 자란 나뭇가지 하나씩을 골라 서로 대칭을 이루게 하며 지게를 만드는 것이다.

하물며 지게 하나를 만들 때도 이렇게 세밀하게 생각을 한 뒤 만드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허투루 하실까?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기억이 가 닿지 못할 만큼 오래 전부터, 예레미야의 생각이 감히 미치지 못할 만큼의 먼 미래까지, 예레미야로서는 감히 생각하지 못할 크고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예레미야를 부르셨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다.

훨씬,

무한히!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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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1)

 

 예레미야 읽기를 시작하며

 

언젠가 주보 표지에 예레미야를 만나면이라는 글을 실은 적이 있다.

 

그럴 수 있다면 언제고 예레미야를 만나 실컷 울리라

여전히 젖어 있는 그의 두 눈을 보면 왈칵 눈물이 솟으리라

당신께는 주님의 말씀 백성들에겐 귀찮고 하찮은 말

그 사이에 서서 울먹울먹 하던

다시는 주님 말씀 전하지 않으리라 다짐할 때마다

뼛속을 따라 심장이 타들어가던

당신의 뒷모습엔 늘 눈물이 어렸노라고

겨울밤 인우재에서 듣던 낙숫물처럼

어둠 속 떨구던 당신의 눈물 소리 쟁쟁했노라고

애써 적은 주님의 말씀 서걱서걱 왕의 칼에 베어질 때

내 마음도 베였노라고

마침내 당신 웅덩이에 던져졌을 때 나도 갇혔고

구스 사람 에벳멜렉이 달아 내린 헝겊쪼가리와 낡은 옷에

이게 설마 하나님의 손일까

나도 덩달아 울었노라고

언제고 예레미야를 만나면 함께 울리라

당신만큼은 아니어도 당신으로 많이 아팠노라고

그만큼 고마웠노라고

 

왜 그럴까, 예레미야를 생각하면 어떤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눈물의 근원에서 과히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은 감정이나 정서의 웅덩이가 얼핏 잇닿아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괜히 눈물겹고 괜히 가슴이 먹먹해지는, 예레미야를 읽다보면 자주 그런 마음으로 멈춰 서곤 한다.

 

그 예레미야를 다시 한 번 읽어나가기로 한다. 성경을 펼치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손가락으로 한 자 한 자 더듬거리는 심정으로 읽기로 한다. 대단하거나 특별한 것을 찾아내려는 욕심을 버리기로 한다. 다만 정직한 마음으로 읽도록, 예레미야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심정으로 읽기로 한다.

 

성경은 일부러 <국한문개역한글판>을 택했다. 아들이 신학교에 들어가는 것을 고맙고 대견하게 여긴 부모님이 사 준 책이 <국한문개역한글판> 성경이었다. 세로로 쓰인 것도 그렇고 순간순간 만나게 되는 한문도 낯설게 여겨졌지만, 그렇기 때문에 천천히 읽을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있다. 모르는 한자가 나오면 다른 성경을 찾아 비교를 하든지, 사전을 찾아야 했는데 그 또한 유익한 경험이었다.

 

<국한문개역한글판> 성경 또한 한 시대의 산물, 한문이 익숙했던 당시의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어떻게 말씀을 이해했을 지를 살피는 계기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세상은 어지럽고 어수선하다. 세상이 이렇게 혼란스러울 때 하나님의 말씀과 백성 사이에 서서 속이 타들어가던 사람 예레미야는 이 시대를 어떤 걸음으로 걸어가야 할지를 넌지시 일러줄 것이다. 터가 흔들리는 이 시대,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하나님의 방법(1:1-3)

 

"베냐민 땅 아나돗의 祭司長 中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아몬의 아들 유다 요시야의 다스린지 十三年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하였고 요시야의 아들 유다여호야김 時代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 시드기야의 第 十一年 末까지 하니라 이 해 五月에 예루살렘이 사로 잡히니라."

 

예레미야는 주전 587년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에 부름을 받아 수십 년 동안 예언자로 활동을 한다. 나라가 가장 흔들리던 때였다. 바벨론의 침공을 비롯한 정치적인 변혁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때였으니 격동기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산 셈이다. 바람 앞에 놓인 촛불처럼 흔들리던 시대, 하나님이 하신 일은 하나님의 사람을 택하는 것이었다. 누군가를 택하여 당신의 뜻을 말하게 하였다. 중심과 방향을 잃어버렸을 때 하나님은 한 사람을 택하고, 말씀을 통해 중심과 방향을 찾게 하신다.

 

예레미야는 아나돗의 제사장 가문 출신인데, 아나돗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5km쯤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이스라엘의 중심 예루살렘이 사로잡혔을 때, 하나님은 작은 마을에 사는 한 사람을 사로잡으신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눈여겨보고 계시다.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가 누구지, 하는 이를 눈여겨보신다.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을 눈여겨보시고 그를 중심으로 불러내신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방법과 다르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우리가 일하는 방식과 다르다. 결국 인간의 생각에 갇히면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할 수도 없고 따를 수도 없게 된다

 

                                                                                                                                 한희철/성지교회 목사,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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