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진의 '덤벙덤벙한 야그'(17) 


 

'전도사 총리' 약인가, 독인가?

 

다시 <기생수>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 '기생수' 관련 글 순서 [링크]

01. '아는 놈'들이 배신할 때 

02. 피곤이 쏟아질 때 눈물이 쏟아질 때 

03. 다이어트가 하고 싶을 때 

04. 솟구치는 성욕을 참을 수 없었다고? 

05. 우리는 인간의 자식이다. 

06. 잔인한 장면이 필요하다. 

07. 악당들의 사랑이 부럽다. 

 

TV로 방영된 <기생수>는 총 24회로 종영되었습니다. 원작인 만화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결말이었습니다. (이제부터 스포일러가 대방출됩니다!)

 

주인공 신이치가 막판에 만난 끝판왕은 ‘고토’입니다. 일본어 숫자 5를 뜻하는 “ご”(고)의 그 고토인데요. 다섯 마리의 기생수를 합쳐 작위적으로 만들어낸 무적 ‘무결점 기생’ 괴물입니다. 똑똑하고, 빠르고, 힘도 셉니다. 주인공 신이치는 이런 고토에 비하면 너무 약합니다. 전투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오른손에 기생하고 있는 ‘오른쪽이’의 도움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미 지난 전투에서 오른쪽이는 고토에게 먹혀버렸거든요. 오른쪽이를 잃은 외팔이 신이치고토에게 죽임당하기 직전 궁지에 몰려 집어든 것은 산속 깊은 곳 쓰레기더미에서 발견한 쇠파이프 하나. 날카롭고 강력한 칼로도 당해낼 수 없었던 고토를 그깟 쇠파이프로 상대할 수 있을까요?



‘거의 가능성 제로잖아... 하지만 해보지 않으면 확실한 제로야.’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쇠막대 한 방에 고토의 다스림 속에 일사불란하던 기생수들이 분열을 일으키고 혼란스러워 합니다. 이때를 틈타 고토의 몸속에 갇혔던 ‘오른쪽이’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탈출. 결론적으로 고토를 무찌르는 데 성공합니다. 운 좋게도 쇠파이프에 독이 묻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체내에 독이 들어온 것을 감지한 기생수들이 고토에게 반란을 일으킨 것이죠.


 




이어지는 오른쪽이신이치의 대화

 

오른쪽이 : “네가 녀석에게 쑤셔 넣은 쇠막대는 여기서 주은 거야?”

신이치 : “응, 그런데 독이라니?”

오른쪽이 :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아크릴 성분이 불에 타서 생긴 시안화수소가 포함되어 있던 건지도 몰라."

신이치 : "그건 독이야?"

오른쪽이 : "맹독."

신이치 : "그런 맹독을 이런 데 함부로 버리고 가다니!"

오른쪽이 : "하지만 그 덕분에 이겼잖아."

신이치 : "결국 인간에게는 이길 수 없다는 뜻이지."

 

그때! 고토의 부활이 시작됩니다. 자잘한 단위로 절단된 체세포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한 거죠. 더 이상 인류가 희생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씨를 말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이치는 묘한 동정심(?)을 느낍니다. 살려고 꿈틀 거리는 생명들을 죽이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뭔가 불쌍하네. (기생수는) 뭘 위해 태어난 걸까. 넘쳐나는 인간들을 죽이기 위해? 지구를 더럽힌 인간을 없애기 위해? 분명히 인간이 만들어낸 독이 생물에게 해가 되는 건 알고 있어. 이거야말로 그래. 그만큼 강했던 고토가 쇳조각에 묻어있던 독에 어이없이..’

 

“우리는 하나. 우리와 인간은 하나의 가족이다.”

 

그렇다.

 

‘생물 전체로 보면, 인간이 독이고 이 녀석들이 약인가? 생물 인간이 독이고. 누가 정하지? 인간과 그외의 생명의 가치를 누가 정하는 거지?’

 

그리곤 ‘오른쪽이’한테 말합니다.

 

“죽이고 싶지 않아. 필사적으로 살려고 하는 생명을 죽이고 싶지 않아.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보물이잖아. 죽이고 싶지 않아하는 마음은.”


인간이 독이고, 이 녀석들이 약인 걸까...


과연 결론은? - to be continue...

 

요즘은 정말 혼란스럽습니다. 누가 독이고, 누가 약일까요? 맹독을 만들어내며 지구를 더럽히는 인간이 ‘독’입니까, 그런 인류를 위협하는 것들이 ‘독’입니까? ‘(독처럼) 쓴 게 몸에 (약이 되고) 좋다’는 말이 있고, 혀에 단 것이 ‘단거’(DANGER:위험)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독과 약을 구별하기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황교안 씨가 총리가 되었습니다. 목동성일교회 전도사님입니다. 담임목사에 따르면, 고교 때부터 40년 동안 성가대 지휘자로, 13년간 청년부 설교자로 섬겼다 합니다. 교회주보에는 여전히 ‘황교안 전도사’가 찍힙니다. 그의 아내는 찬양음반을 낸 복음가수라 합니다.

 

병역비리, 돈(떡값) 비리 등 의혹종합선물세트로 불린 그는 청문회에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명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의혹을 제기하는 ‘국민’들에게 “의혹을 입증하라”며 역대 총리후보에게선 볼 수 없었던 뻔뻔함까지 보였습니다. 그가 평생을 바친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독입니까? 약입니까? 박근혜 대통령에게 공안검사 황교안은 독입니까? 당장에 단 것만을 취하다가 단거(DANGER)에 빠질 수 있습니다. 독과 약, 우리 또한, 저 역시, 명심해야 할 경계입니다.


P.S. 혹시 모를 일입니다. 쇠파이프의 '맹독'이 천하무적 고토를 끝장냈듯이, 박근혜 정권의 맹독성이 약이 되어 3대 독불장군 김정은의 붕괴를 가져올지. 어쨌든 참, 독한 놈들의 세상입니다.

 

이범진/월간 <복음과상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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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진의 '덤벙덤벙한 야그'(7)


잔인한 장면이 필요하다


만화 《기생수》를 소개하고 끊임없이 인용하면서도 쉽사리 추천 못하는 이유가 ‘잔인함’때문인데요. 기생생물에 의해 사람이 잘려지고, 으깨어지고, 핏물 낭자한 장면이 너무 많이 나옵니다. 꿈에 나올까 무서운 장면들, 눈이 절로 감기는 잔인한 순간들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비현실적’ 장면들이 역사의 진실을 가장 실감나게 폭로한다는 점입니다. (만화나 시트콤의 ‘비현실적’인 과장 및 연발하는 우연은, 종종 ‘진실’을 전달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됩니다.)

 

‘자랑스러운 태극기’나 ‘위대한 수령님’ 찬양하느라 동족상잔의 피 흥건한 역사는 가려집니다.

 

 

지난 글(우리는 인간의 '자식'이다)에 썼던 표현인데요. 더 이어가겠습니다. 평소 골육상잔의 비극, 한국전쟁을 이야기하면서도, 저는 서로가 서로를 죽인 잔인한 장면은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흑백영상이나 사진을 보고, ‘힘들었겠구나’ 생각하고 넘어가는 정도였지요. 남침이니 북침이니, 이승만이 도망쳤다느니, 당시의 국제 정세가 어땠다느니 따위의 ‘큰 담론’에는 가끔이라도 관심을 기울였으나, 정작 그 잔인한 현장에 관해서는 깊이 다가갈 생각도 안한 거지요.

 

물론 관심이 없었던 저의 불찰이 큰 책임이겠으나, 정치인 및 지식인이 명분 싸움 및 진리(이념) 대결을 하느라 정작 중요한 ‘인간 중심’의 해석은 놓친 게 아닌가 아쉬움이 남습니다. 백과사전에 ‘한국전쟁’ ‘6.25전쟁’을 찾아봐도 희생자가 몇 명인지는 잘 나오지 않고, 연도별 전세와 유엔, 중공군 언급이 주를 이룹니다. 수많은 생명이 피를 흩뿌리며 죽어갔는데, 이에 대한 기록과 성찰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듯합니다.

 

 

《기생수》의 주인공 신이치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뉴스에선 연일 정교하게 토막살해 당한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흉흉한 소식을 전했으나, 그냥 ‘뉴스’일 뿐이었죠. 나와는 상관없는 뉴스요. 우리가 지구촌 어딘가에서 사람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뉴스’를 보며 맛있는 식사를 하고, 전쟁 피해 어린이의 얼굴이 인쇄된 신문을 깔고, 그 위에 족발과 막걸리, 치킨과 맥주를 올리듯 말입니다.

 



《기생수》는 곧 영화로 개봉한다. (예고편 캡쳐화면)


 

 

신이치가 이 상황을 바로잡아야겠다고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어머니의 죽음이었습니다. 기생생물들은 사실 대도시에 주로 머물렀기 때문에 “지방으로 여행을 간 어머니는 데이터 상으로 안전하다”는 게 ‘오른쪽이’의 분석이었는데요. 빗나갔습니다. 거의 모든 만화들이 그렇듯, 불행하게도 우연과 우연의 연속으로 기생생물에 의해 어머니가 살해당한 겁니다. 게다가 어머니의 육신을 쓰고 나타난 기생생물. 멘붕에 빠진 신이치가 골육(骨肉)의 비극을 극복해가며, 전 지구적 연쇄살인사건의 해결 주체로 성장해가는 모습도 《기생수》의 관전 포인트입니다.

 

생명의 문제를 두고도 저마다 ‘끓는점’이 다르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겠지요. 먹거리 문제였던 미국산쇠고기 수입에 대해선 열정을 다 쏟았으나 정작 한미FTA에 관해선 관심이 없었고, 일본산 생선의 안전성 여부는 꼼꼼하게 체크하면서 국내 핵발전소의 안전에는 무관심한 제 모습만 돌아봐도 그렇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교양 있게’ 꾸며진 살인에 대해서도 개입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습니다. 최근 밝혀진 ‘국정원의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공작’이나 1년을 넘게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숨기고 유가족을 희롱하고 있는 행태가 바로 살인의 현장이 아니고 무엇인가요? 핏물 낭자한 살인 현장만 없을 뿐, 잔인의 극치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끓는점’은 아직 오지 않았나봅니다. 나의 일이 아니라는 ‘이기주의’, 내 가족의 일이 아니라는 ‘가족주의’, 대의를 고려해야 한다는 ‘민족주의’가 우리가 잔인함을 직면하는 것을 막고 있으며, 문제에 다가가지 않아도 되는 고상한 이유를 만들어줍니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 타인까지도 끌어안는 공동체를 기대하는 건 진정 이상주의일까요? 형제님, 자매님 하며 웃으며 인사 나누는 교회공동체는 정말 그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걸까요?

 

신학자들 말하길, 예수께서 어머니에게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고 한 말은 가족으로서의 책임 유기가 아니라, 오히려 가족의 확장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지구촌 누구나 내 어머니이고 형제라는 선언이었던 셈이지요. 주인공 신이치가 조금 더 일찍 살육문제에 개입했더라면 어머니를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우리의 현실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의 말입니다.

 

 

대한민국 교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차별금지법에 대한 교회의 반응을 볼 때 저도 교회에 불만이 많습니다. 제가 지금 소수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소수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학교폭력을 아이들에게 이해시키려 쉽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너희 반에서 제일 찌질한 학생이 30번, 짱이 1번이면 너는 몇 번이니? 30번인 아이가 전학을 가면, 29번 아이가 전학을 가면, 28번 아이가 전학을 가면…, 정말 왕따를 당하는 이가 없어지겠니?" 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17번쯤 되는 그 아이들이 사태의 심각성에 감을 잡았습니다. 지금은 왕따를 당하는 그 찌질한 학생이 이석기일수도 있고 장하나일수도 있고 표창원일 수 있지만, 다음엔 당신일 수 있습니다. (출처: 복음과상황, ‘표창원 박사 NCCK 인권상 수상’ 2013/12/10)

 

 

눈앞에 벌어지는 잔인한 참상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잔인이 익숙한 사회가 되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간의 탈을 쓴 기생생물 몇몇이 뛰어난 학습 및 생존 능력을 이용해 시의원 선거캠프를 꾸렸습니다. 선거 연설은 꽤 훌륭했으며, 사회와 인간을 위해 -기생생물의 공존을 포함한- 훌륭한 시장이 될 듯합니다. 생각에 빠집니다. 만약 기생생물에게 정치를 맡겨 모든 생명이 존중받는 세상이 온다면 나는 그들에게 투표할 것인가. 선뜻 대답할 수가 없네요.

 

보수나 진보 할 것 없이 요즘 심심찮게 ‘민족주의’ ‘애국주의’ 망령이 배회하고 있는데요. 이와 관련해 만화 같은 엉뚱한 상상을 더 이어가보겠습니다. 일본이 다시 우리나라를 침략해옵니다. 다만 그 침략의 주체는,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정의와 공평을 우리에게 선물합니다. 그들은 무흠무결인데다가, 한반도의 산적한 모든 문제들(남북분단, 쌍용차, 강정해군기지건설, 밀양 송전탑, 핵발전소 등)을 평화롭게 해결해줄 능력과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고 칩시다. 나는 독립운동을 할까요? 친일파가 될까요? 생명을 지키는 선택을 하겠지요.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요? 알고 있습니다. 다만, 만화나 시트콤의 ‘비현실적’인 과장 및 연발하는 우연은, 종종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장치로 사용됩니다.)

 

이범진/월간 <복음과상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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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진의 덤벙덤벙한 야그(4)



솟구치는 성욕을 참을 수 없었다고?


 

군 기무사령관 출신 송영근 의원(새누리당)이 지난 29일 국회 군 인권개선 및 병영문화혁신특위 전체회의에서 “들리는 얘기로는 (해당 여단장이) 지난해에 거의 외박을 안 나가고 가족도 거의 면회를 안 들어왔다”며 “나이가 40대 중반인데 성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측면을 한 번 들여다봐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입니다. 이에 덧붙여 송 의원은 “전국에 지휘관들이 한 달에 한 번씩 정상적으로 (외박을) 나가야 하는데 제때 못 나간다. 가정관리가 안 되고 본인의 그러한 섹스 문제를 포함해 관리가 안 되는 게 이런 (성군기 문란) 문제를 야기하는 측면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By Alvimann



한마디로 정기적으로 섹스를 해줘야 하는데, 열심히 일 하느라 해소할 길 없어 군대 내 성범죄가 일어난다는 논리입니다. 인간도 하나의 ‘생물체’임을 자각하여 '성폭행 여단장'을 이해하자는 관점입니다. 지난 글에서 ‘잠’과 ‘배고픔’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요. 이번 글에서는 모든 생물의 기본 중의 기본, 생식에 관해 써볼까 합니다. 역시 《기생수》를 통해 시작해봅니다.

 

기생생물 ‘오른쪽이’의 잠을 깨운 것은 신이치의 심장박동이었습니다. 신이치의 오른손에 기생하고 있는 오른쪽이는 심장 쿵쾅거리는 소리에 잠을 깬 것이죠.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걸까요? 신이치의 심장은 왜 그리 크게 뛰었을까요? 이를 감지한 ‘오른쪽이’의 말을 가져와봅니다.

신이치. 네가 저 암컷을 보고 너무 놀랐으니까. 그런 신호에는 내가 민감하거든. 신이치, 너 저 암컷이랑 사귀고 싶지? 난 알 수 있어. 혈액의 미묘한 변화로….

 

 

오른손의 모양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오른쪽이’는 힘이 단단히 들어간 남성 생식기 모양으로 모습을 바꾸어 신이치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생식활동에 흥미가 생겨서…. 신이치는 사토미랑 사귀고 싶어하면서도 직접적으로는 표현 못하고 있잖아….”라고 말합니다.

 

생식활동을 직접적으로 표현 못하는 게 ‘인간사회’라는 데에 ‘오른쪽이’는 흥미를 느낀 거죠. 그렇죠.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물은 생식활동을 할 때 누구의 눈치를 보거나, 누구에게 보였다고 수치심을 느끼거나, 윤리도덕적 기준을 떠올리지 않습니다. 그저 저마다 본연의 생명에 부여된 ‘명령’에 따르는 것뿐이죠. 그러니 혈액의 미묘한 변화이지만 생식활동의 생물학적 준비(?)를 완벽하게 끝낸 신이치가 머뭇거리는 게 ‘오른쪽이’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겁니다.

 

이쯤에서 다시 송 의원 이야기. 그럼, 우리 인간은 다 생물이기 때문에 섹스를 하고 싶을 때 참지 못한다는 그의 논리는 일견 타당한 걸까요? 송 의원의 발언을 찬찬히 훑어보면, 그리 강하게 이야기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 측면도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정도의 발언입니다. ‘인류’가 아닌 ‘생물’이었을 때 인간은 오히려 순수한 생명이었다고 주장하는 인류학자도 있으니 그의 말이 정말 일리가 있는 걸까요? 프랑스의 어느 인류학자는 “인류 문명은 근친상간에 대한 금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문명 이전에 우리는 가족이나 친척 가리지 않고 누구하고나 교배를 하였는데 근친상간을 금기로 여기게 되면서 새로운 세계로, 자연상태에서 문명으로 이행했다는 거지요. 정말일까요?

 

《착한 인류》(The Bonobo and The Atheist)를 쓴 세계적인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은 “아니다”라고 확답합니다.



착한 인류

저자
프란스 드 발 지음
출판사
미지북스 | 2014-07-1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신이 없는 세상을 말하기 전에 우리는 도덕적인 인간의 가능성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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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친교배 억제는 초파리, 설치류에서부터 영장류에 이르기까지 모든 동물에게서 나타난다. 성관계로 재생산하는 종들에게 그것은 생물학적인 명령이나 다름없다. 보노보 무리에서 아버지-딸 섹스는 암컷이 가임기가 되면 이웃 무리로 떠나버리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한 어머니-아들 섹스도 아들이 같은 무리에 있고 자주 어미와 여행을 다니는데도 관찰되지 않는다. 이들은 보노보 사회에서 유일하게 섹스와 무관한 관계이다. 이 모든 것에 강제는 없다. (109~110쪽)

 

결국 “생물학적 인간이었을 때 가장 인간다웠다”라는 급진적 주장도 힘을 잃고 마는군요. 더군다나 생물 사회에서 ‘강제’란 없습니다. 폭력적이라 알려진, 그러니까 리비도에 강력하게 추동되는 침팬지 사회조차도 ‘강간’은 무리에서의 추방 근거가 됩니다. 무리의 지도자라 하더라도 예외가 없습니다. 예외가 허락된다면 그것은 인간이 만든 동물원 우리 안에서 뿐입니다.(위의 책에 소개된 여러 실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비록 혈액이 성기에 몰리게 창조되었을망정 '강제로' 상대를 제압해 그것을 해소하는 행위까지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생물학적 측면에서 보아도, 백만보 양보해서 보아도 ‘성폭행 여단장’을 두둔할 만한 그 어떤 변명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창조 원리에 입각해서 보아도 분명 ‘명령 불복종’인 거죠. 전시였다면 사형입니다. 그러고보니 ‘여단장의 그것을 잘라버리라’는 과격한 댓글을 달고 간 사람이 어쩌면 신이 보낸 천사였을지도….

 

이범진/월간 <복음과상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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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진의 '덤벙덤벙한 야그'(3)

 

다이어트가 하고 싶을 때

 


 

지난주에 잠에 관해 이야기를 했으니 이번 주는 ‘먹는 것’으로 이야기를 꺼냅니다. 먹는 것,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어느 정도로 좋아했냐면, 토할 때까지 먹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대가족을 이뤄 살았고, 제 위로 형과 누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됩니다. 식사시간은 곧 전쟁이었죠. ‘어린이 반찬’을 집중공략! 형과 누나보다 더 많이 배에 쑤셔 넣어야 했기에 맛을 느끼는 것은 사치였죠. 이렇게 먹다 보니 새벽마다 일어나 먹은 것들을 게워야 했습니다. 위장이 단련되어서인지 어른이 되어선 토는 많이 하지 않았지만, 식성과 식습관은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최근, 어류도 고통을 느낀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동물을 깨닫는다》(2014) 참고.


 

덤벙덤벙 막 먹어대는 것. 저만의 이야기인가요? 기생생물 ‘오른쪽이’에 따르면, 인간은 다 엄청난 식욕을 지녔습니다. 넘치는 식욕은 곧 악마의 길로 가는 지름길인 듯 보입니다. 백과사전, 인터넷 정보 등으로 각종 정보를 학습한 ‘오른쪽이’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신이치…. ‘악마’라는 것을 책에서 찾아 봤는데…. 그것에 가장 가까운 생물은 역시 인간으로 판단된다…. 인간은 거의 모든 종류의 생물을 잡아먹지만, 내 ‘동족’(기생생물)들이 먹는 것은 고작 한두 종류야. 훨씬 간소하지.”




 

흉측해 보이는 기생생물조차 ‘생존’을 위해서만 도살을 하는데 인간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맛집’을 돌아다니는 동물들이니 ‘오른쪽이’의 입장에선 악마로 보일 수밖에요. 그뿐인가요? 인간은 자기 위 용량의 몇 배는 먹어치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생명체입니다. 불황의 시기를 거치는 한국사회에서 ‘뷔페 음식점’ 사업만은 호황이라는데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자유를 빼앗긴 인간들이 뷔페 음식점에 가서야 신적 자유를 누리며 “프리돔!”을 외치는 거지요.

 

과식하는 잡식동물, 닝겐! 만물의 영장이니까 괜찮다고요? 생존을 위해 필요한 만큼만 적당히 먹는 것이 모든 생물에게 주어진 신의 설계(명령)인데, 인간만이 만물의 영장이라 하여 생명 원리를 어겨도 되는 걸까요? 에일리언과 인간의 대화를 가져와 봅니다.

 

지도자 에일리언 50억 년 중 몇 백만 년이라면 정말 새 발의 피네요. 그 정도 살았다고 주인이라고 할 수 있나요? 참, 사람들이 출현하기 이전에도 지구에 다른 생명체들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

역사학자 에일리언 그럼요. 바퀴벌레가 가장 오래된 생명체 중 하나입니다. 사람은 가장 늦게 나타난 생명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도자 에일리언 그러면서 지구의 주인 행세를 하네요?

리플리 우리 인간들은 만물의 영장입니다. 도구를 사용할 줄 알고 사회를 이루고 살며, 무엇보다도 모든 생명체 중에서 가장 지능이 높아요.

역사학자 에일리언 사람만이 도구를 사용하고 사회를 이루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동물들 중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능이 가장 높다는 말은 맞습니다. 그래봐야 지능지수가 100정도 밖에는 안 되지만.

지도자 에일리언 지능이 높으니까 지구의 주인이 된다는 말씀인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지구의 주인이 된다는 말씀인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지구의 주인인 게 맞아요. 우리 뉴본 에일리언이 보기에는 당신들 지구인은 거의 닭대가리 수준이죠.

 

뉴본 에일리언의 지능은 900이다. (이어지는 대화는 중간 중간 생략했다. 원대화 전문은 아래의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

저자
최훈 지음
출판사
사월의책 | 2012-11-3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 - 고기를 굽기 전,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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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에일리언 사람들도 소나 돼지를 잡아먹으면서 왜 우리가 사람을 잡아먹는 것은 못하게 하죠?

리플리 사람과 동물은 다릅니다. (고개를 15도 정도 기울이며) 우리는 소중하니까요.

지도자 에일리언 뭐가 소중하다는 거죠?

리플리 우리는 동물보다 지능지수가 아주 높습니다.

지도자 에일리언 (지능 900인) 우리가 보기에 사람들도 지능지수 면에서는 우리들과 한참 차이가 납니다. 그러니 잡아먹어도 되겠네요.

리플리 우리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침팬지는 말을 할 줄 몰라요.

지도자 에일리언 하하하. 우리 에일리언은 텔레파시를 씁니다. 당신들은 텔레파시를 쓸 줄 모르잖아요? 텔레파시는 인간의 미개한 언어보다 훨씬 고차원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입니다.

리플리 (힘없는 목소리로) 사람과 동물은 아예 종이 다릅니다. 그러니 사람은 동물을 잡아먹어도 됩니다.

지도자 에일리언 우리 에일리언과 사람도 종이 아예 다릅니다. 그러니 우리는 사람을 잡아먹어도 됩니다.


리플리와 사람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날 그들은 지도자 에일리언의 식사 재료가 되어야 했다.

 


“인간은 고기다.”


‘오른쪽이’의 말을 듣고 고민에 빠진 주인공 신이치의 말입니다. 인간 또한 고깃덩어리일 뿐이죠. 엄격한 생명 원칙에 따르면 말이죠.

‘또다시 토막시체 발견!! 희생자는 41명으로 늘어나!’라는 신문 헤드라인을 보고 기생생물은 중얼거립니다.

“흥, 소나 돼지는 태연히 먹어치우는 인간들이 뭘 놀라고 있나.”

이들 기생생물 중 가장 학습능력이 뛰어난 타미야 료코는 말합니다.


“내 생각에는, 파리도 거미도 그저 ‘명령’에 따르고 있는 거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모두 어떤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것 같다. 인간에게는 ‘명령’이 내려지지 않았나? 내가 인간의 뇌를 장악했을 때, 하나의 ‘명령’이 내려왔다.



‘이 종(인간)을 먹어치워라!’라는 명령을 받은 기생생물. 도대체 생명 설계자는 왜 인간을 먹어치우라는 생물을 만들어낸 걸까요? <기생수>의 첫 시작 내레이션을 그대로 가져와봅니다. 기생생물의 소명을 가장 구체적으로 암시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지구에 사는 누군가가 문득 생각했다. ‘인간의 수가 절반으로 준다면 얼마나 많은 숲이 살아남을까…, 인간이 100분의 1로 준다면 쏟아내는 독도 100분의 1이 될까…’ 누군가 문득 생각했다. ‘모든 생물의 미래를 지켜야 한다!’

 

모든 생물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인간은 진정 ‘악마’인 걸까요? 메뚜기와 석청으로만 살진 못하더라도, 위장이 소화할 수 있는 만큼만 먹어야 할 텐데요. 잘 안되네요. 만물의 영장으로, 모든 생명을 다스리라 ‘명령’ 받았음에도, 이 시간, 새벽 3시, 저는 ‘보글보글 맛좋은 라면’을 끓입니다. 이른바 명령불복종…. 전시였다면 ‘사형’이죠.

 

 

이범진/ 월간 <복음과상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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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진의 '덤벙덤벙한 야그'(2)


피곤이 쏟아질 때

눈물이 쏟아질 때




지난 글에 예고한 대로, 기생생명체 ‘오른쪽이’를 소개합니다. 일본 만화 <기생수>(이와아키 히토시 作)에 등장하는 외계 생물입니다. (현재 일본 NTV에서 방영하고 있습니다. 만화책이 원작으로 1990년대에 이미 한국에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배급사가 제공하는 대략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지구상에 나타난 기생생물들. 그들은 인간의 두뇌를 차지하고 인간을 먹이로 삼는다. 그로 인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도살 사건들. 평범한 고교생 신이치에게도 기생생물이 덮쳐오지만 두뇌가 아닌 오른손을 차지하는데 그친다. 신이치는 자신의 오른손을 차지한 ‘오른쪽이’와 함께 기생생물에 대해 알아가면서 미래를 고민하는데…


 

 

‘오른쪽이’는 돌연변이에 가깝죠. 인간의 두뇌를 점령하고, 육체를 먹이삼아 기생하는 동족과는 달리 사람의 오른손에 기생하였고, 인간의 뇌는 물론 육체와의 ‘공존’을 도모하니까요. 평범한 고등학생 신이치와 그의 오른손에 기생한 ‘오른쪽이’가 서로 소통하며, 인간을 먹이로 삼는 기생생물들의 위협(?)에 대처하는 내용이 큰 얼개입니다. (잔인한 그림체가 일단 거슬리는데요. ‘19금’입니다.)

 

오른손에서 기생하는 ‘오른쪽이’는 자신의 몸인 오른손을 자유자재로 변형합니다. 그의 몸은 적들을 물리칠 때는 칼로 변하고, 잠잠히 숨어있어야 할 땐 인간의 손으로 모양을 바꿉니다. 아주 잠깐은 신이치의 몸에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내 영양을 공급받을 수 없기 때문에 분리된 행동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몇 회를 ‘오른쪽이’가 던져주는 질문을 통해 ‘기본’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가겠습니다.

 

기생생물 오른쪽이가 저에게 던져준 신선함은 바로 ‘생존 경쟁력’이었습니다. 기생생물들은 생존을 위해서 특화된 생명체입니다. 그들의 공격력과 정보처리능력은 지구인을 월등히 초월합니다. 몸을 가장 효율적으로 다루는 생물체의 표본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효율적으로 진화할 수 있었을까요? ‘오른쪽이’의 모습 중 하나가 단초를 제공합니다.

 

피곤하면 그냥 자는 것.

 

인간과 다른 점입니다. 특히 잠자는 시간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깨워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충분한 수면 시간의 확보. 사실 모든 생명체가 이것을 아는 듯합니다. 몸을 가장 효율적으로 유지하는 방법은 충분한 수면 시간을 갖는 것! 그런데 모든 생명체 중 인간만이 이 기본을 지키지 못하고 몸의 효율성을 떨어뜨립니다. 전원을 끌 때는 확실히 꺼야하는데, 자는 동안에도 ‘활성화 모드’를 유지하는 인간은 생존 경쟁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기생생물들과 붙어봐야 백전백패일 수밖에요.


 


내 몸을 생기 있게 유지해주는 것은 ‘잠’이었음에도, 돈 버는 일이나 유흥에 밀려 생존 본능을 억눌러왔습니다. 뭔가에 꽂혀 본능을 억누르고 살아왔다는 것인데, 그만큼 생존 경쟁력 떨어뜨리며 달려온 인생이라는 거지요. 언제부턴가 어제와 내일의 일을 염려하느라 몸을 비활성화시키는 법을 까먹었습니다.

 

‘오른쪽이’는 이런 인간과 공존공생하며 인간의 어리석은 모습을 하나 더 꼬집습니다. 눈물. 인간이 지닌 습성 중 ‘눈물’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며, 그것이 전투력을 약화시켜 생존 경쟁에서 뒤쳐진다는 분석입니다. 슬픔과 절망의 감정이 요동쳐 안구에 액체가 생산되는 동안, 나는 적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될 테니까요. 이제야, 세월호 사건과 같은 큰 비극 앞에서도 ‘경제’를 위하여 눈물을 그만 멈추라고 외치는 자들이 이해가 됩니다. 그들에겐 경제만이 생존의 이유라서 그렇습니다. 물질에 빌붙어 살아온 기생생물들이라 그렇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눈물과 전투력을 맞바꾼 자들입니다.

 

생물로서의 내 몸을 가장 고효율로 유지하기 위해 숙면을 취하는 것은 ‘오른쪽이’에게 배워야 할 기본 중의 기본이지만, 나 혼자 살자고 눈물까지 억누르고 싶진 않습니다. 무한생존경쟁시대에서 성공하기 위해선 ‘오른쪽이’의 눈물무용론을 지지해야 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과 괴물을 가르는 기준이 타인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는 눈물 한 방울에서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참 괴물처럼 살아왔구나 싶습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지도, 슬픈 일에 제대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했으니까요. 그것이 나의 전투력을 떨어뜨린다 굳게 세뇌당한 탓이겠지요. 얼마 전 신혼집을 청소하기 위해 가족들을 데려 갔을 때였습니다. 일곱 살 조카 태이도 함께였는데요. 처음엔 이것저것 청소를 도우며 흥미를 보이던 태이는, 급기야 지루해졌는지 이사람 저사람 촐싹거리며 방해하고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서럽게 울기 시작했습니다.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우는 이유를 물으니, 배가 고파서랍니다. 어른들은 청소에 집중하느라 저녁 끼니때가 훌쩍 지나간 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태이는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끼니때를 놓치는 사이, 그러니까 무언가에 홀려 기본을 놓치는 사이에, 우리의 생존 유지 능력이 조금씩 상실되어 간다는 것을요. 
태이는 펑펑 울었고, 나의 기본 없음이 온 동네에 울려 퍼졌습니다. 동시에 그 눈물이 나의 공감 기관을 열어주었습니다.




 
















이범진 / 월간 <복음과상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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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진의 덤벙덤벙한 야그(1)

 

'아는 놈'들이 배신할 때

 


 

앞으로 제가 시작할 이야기는 ‘덤벙덤벙한 야그’입니다. 이곳 ‘꽃자리’에 분양을 해주신 한종호 대표님이 달아준 이름입니다. 처음엔 분양받은 곳 명패(꼭지명)가 좀 유치했는데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뭐, 임대인이 ‘갑’이니까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임차인을 꿰뚫어 본 선구안에 놀랐습니다.(그는 일찍이 전병욱의 진가를 가장 먼저 알아차리지 않았습니까!/관련기사 클릭) 

그 예리함이 저의 ‘기본 없음’, 즉 기본을 생략해온 인생을 단박에 알아챈 것이죠. 하여, 앞으로 이곳에서 꺼낼 이야기는 그간 저의 덤벙덤벙한 이야기입니다. (‘덤벙덤벙’에 두 가지 뜻이 있더군요. 우리가 흔히 아는 ‘들뜬 행동으로 아무 일에나 자꾸 함부로 서툴러 뛰어드는 모양’과 더불어 ‘크고 무거운 물건이 잇따라 물에 떨어져 잠기는 소리’라는 뜻이 있습니다.)


기본 없는 한 인생의 덤벙덤벙한 이야기가, 한 번쯤은, 읽는 이들의 마음에 크고 무거운 돌처럼 묵직하게 가 닿기를 희망하면서 저의 덤벙덤벙함을 용기 내 폭로합니다. 



“수학이 너무 싫어!”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수학이 너무 싫었습니다. ‘공식’만 알면 되는 거지, 응용, 심화 문제는 왜 수십 수백씩 풀어야 하는 거죠? ‘實戰’(실전)문제는 또 뭔가요. 아이들 전쟁터에 내보내려고 실탄 장전하는 문제입니까? 공식만 알면 아는 거다! 라는 생각으로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수학 점수는 항상 달력 안의 숫자를 넘지 못했습니다. 결국 중3 때는 ‘2점’을 맞았습니다. 거의 모든 문항이 3점, 4점짜리였고, 2점짜리 문제 딱 하나 있었는데 그것 하나 맞고 전부 틀렸습니다. 분명 공식을 알고 있는데 왜 2점을 맞았을까요. 


그걸 20년 지난 최근에야 깨닫고 있습니다. 영화채널 OCN에서 <인터스텔라> 놀란 감독의 전 작품 <인셉션> 재방송을 봤을 때였습니다. 이미 영화관에서 봤던 영화여서 채널을 돌리려 했을 때! 영화의 장면 장면이 너무 낯설게 다가왔습니다. 심지어는 결론도 생각나지 않아서, 한참을 조마조마하게 영화에 몰입했습니다. 영화 한 번 봤다고, 그 영화를 ‘아는 게’ 아니었습니다. (얼마 전 인터뷰했던 우석훈 박사는 영화 한 편을 40번 넘게 본다더군요. 그래야 겨우겨우 ‘평론’을 할 수 있게 된다고요.) 수학 공식을 안다고, 수학을 할 수 있게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발정 난 강아지에게 배울까?


책장에 꽂혀 있는 책 중 ‘읽었다’고 확신하는 책 한 권 뽑아보십시오. 새롭습니다. 감화 감동 받았던 책을 뽑아 읽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줄 치어 읽은 부분마저, 새롭습니다. 물론 망각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 중 하나입니다. 잊히는 게 없으면 머리의 용량이 감당하지 못해 질병으로 이어지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너무너무 새로운 이유는, 책에는 줄을 쳤으나 인생에는 줄을 치지 못해서입니다. 공식은 외웠으나 응용하고 써먹을지 모르니 ‘2점’에 머무를 수밖에요. 


무엇을, 누군가를 ‘안다’는 것,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는 건가 봅니다. 성경에 하나님을 알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 라고 했을 때 동사가 히브리어로 ‘야다’, 헬라어로 ‘기노스코’라고 한답니다. 아담과 하와의 ‘동침’을 표현할 때, 그러니까 때때로 성적인 관계를 표현할 때 쓰인다는 거지요. 비밀스러운 곳, 질퍽질퍽한 저 밑바닥까지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안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이겠지요.


 

(출처: J.N. Stuart/Creative Commons)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배신(수학 2점)은 결국, 저의 기본 없음(알지 못함)이 가져온 당연한 결과였던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 덤벙덤벙하게 살아왔습니다. 인생에 한번쯤은 발정 난 강아지처럼, 봉평장 허생원의 노새처럼 붉으락푸르락 ‘알려고’ 달려들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정면 승부’는 피해온 소심한 인생이어서 그렇습니다. 


덤벙덤벙했던 삶을 반성하는 하나의 렌즈로 ‘앎’을 계속 활용할 것이기에 다소 장황하게 이야기를 끌어왔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외계 생명체’에 빗대어 저의 ‘기본 없는’ 사연을 이어가겠습니다. 일본만화 <기생수>에 등장하는 생명체 ‘오른쪽이’의 말과 행동을 통해 우리의 기본 없는 덤벙덤벙한 삶을 들여다보겠습니다.


    


* 사족입니다(안 읽으셔도 됩니다). 지난 여름, 숫자 하나도 허투루 사용하면 아니 되는 통계학 전공자를 만났습니다. 숫자 하나하나 신중하게 살피듯, 인생 역시 생략한 과정 없이 뚜벅뚜벅 정직한 걸음을 걸어온 사람이더군요. 덤벙덤벙 살아온 저와는 상반되는 사람이라서, 우유부단한 저에게 귀감이 되는 사람이라서, 놓칠 수 없었습니다. 그를 ‘알고’ 싶었습니다. 2월 7일 결혼합니다. 안다는 것은 이렇듯 두려우면서도 설레는 거군요! 왜, 이제야 알았을까요. 앎의 두근거림을.


이범진/ 월간 <복음과상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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