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2)

  생각지도 않은 때에 생각지도 않은 얼굴로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누가복음 12:35-48).

하느님은 도둑같이 오신다, 생각지도 않은 때에. 우리가 익히 아는 이야기다. 하느님은 도둑같이 오신다, 생각지도 않은 모습으로. 거북한 이야기다.

예수는 수천 년을 고대하던 메시아였다. 그러나 당대의 종교계 지도자인 대제관, 당대의 평신도 지도자인 바리사이, 당대의 지식과 언론을 장악하고 있던 율법학자가 합작하여 예수를 잡아 죽였다. 학식 있고, 경건하고, 하느님 뜻을 알 만한 사람들이 왜 그랬을까? 바로, 예수는 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권력과 금력과 종교 신앙까지 독점한 그 집단들은 자기네가 주장하던 이데올로기가 있었다. 성경도 율법도 하느님의 모습도 그 이데올로기에 맞추어 넣고 뜯어고치고 색칠하였다. 하느님이 자기네 이데올로기에 맞지 않게 행동하실 수도 있으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런 하느님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예수는 저주받은 땅 갈릴리 출신이었다. 천한 목수였다. 거기다 나사렛 사람은 율법(실정법)과 제사를 존중하지 않았다는 혐의가 있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아들이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십자가형을 당했다.

다볼산에서처럼 그 모습이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더라면예수가 누구라는 것을 몰라볼 바보 천치는 없다! 문제는 하느님이 사람을 시험하신다는 것이다. 입으로 주님, 주님하는 우리의 본색을 어떻게 하든지 벗겨 놓고야 마는 하느님이시다.

 

 

오늘 이 땅에서 예수는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 하느님의 수법으로 보면 우리가 제일 싫어할 부류, 가장 속기 쉬운 몰골을 하고 오시기 십상이다. 우리는 세례는 받았지만 신앙보다 반공을 앞세운다. 공산주의자라면 설령 그가 예수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일단 공안당국의 손에 넘어가면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없다. 모든 언론에게 멸시 당하고 퇴박을 맞는다. 빨갱이라 하면 모든 사람이 죄다 얼굴을 가리고 피해 가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긴다. 그가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교회 안팎에서 그 신세를 걱정해 주는 자가 어디 있는가?(이사야 53)

우리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단장하고 성자들의 기념비를 장식해 놓고는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죽이는 데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고 다짐한다”(마태복음 23:29-30). 그런데 왠지 주님은 우리더러 너희는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일을 마저 하여라”(32)라고 쏘아붙이시는 것 같다.

성염/전 바티칸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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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덕의 유대인 이야기(1)

 

유대인의 신년(1)

 

정통파 유대인들은 유대 달력으로 일곱째 달인 티슈리월의 첫째 날과 둘째 날을 신년으로 지킨다. 개혁파 유대인들은 첫째 날만을 신년으로 지킨다. 유대력의 티슈리월은 태양력의 9월 말이나 10월 초의 가을에 해당한다. ‘로쉬 하샤나라고 알려진 유대인의 신년은 두 가지 성격을 지니고 있다.

 

첫째로, 이날은 심판의 날’(욤 하딘)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날이다. 지난해 동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잘못된 것은 없었는지, 사람과의 관계에서 고칠 것은 없었는지 스스로를 살펴보면서 우선은 하나님과, 다음으로는 사람과 화해하는 날이다. 둘째로는,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는 날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날을 욤 하라트 올람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세상의 생일이라는 뜻이다. 세상의 시작을 기념하는 이날, 유대인들은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 다시 그들의 삶 속에 창조되기를 기원한다.

 

새해를 준비하는 그믐날

 

새해가 시작되기 하루 전, 새벽부터 일어나 회당으로 예배드리러 간다. 이날은 반나절만 금식하는 날이다. 사람에 따라 새벽에 간단하게 크랙커와 차 정도로 요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날이 밝으면 점심때까지는 먹는 것이 금지된다. 오후 1시에 다시 오후 예배를 드린 후 목욕을 함으로써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신년을 맞이한다. 대부분의 유대인은 목욕을 끝내고 금식을 마치는 식사를 한다. 욤 키푸르(대속죄일) 전날에도 유대인들은 목욕으로 몸을 깨끗이 한다. 새해 전날과 대속죄일 전에 목욕하는 것은 유대인이 꼭 지켜야 할 종교적인 의무이다.

 

쇼파

 

신년 첫날 유대인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쇼파(뿔나팔)를 불어 새해가 된 것을 만방에 선포한다(레위기 23:24, 민수기 29:1). 따라서 로쉬하샤나를 ‘(나팔)부는 날이라는 뜻의 욤 트루오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쇼파는 악기로 사용되었다. 또는 출전 나팔이나 백성을 전쟁에 소집하는 나팔로, 혹은 전쟁 시 적을 놀라게 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신년에 울려 퍼지는 쇼파 소리는 작년에 일어난 일들, 메시아에 대한 소망, 하나님의 거룩한 주권 선포 등 유대인들에게 많은 것들을 상기시킨다. 탈무드는 신년에 울려 퍼지는 쇼파 소리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잠에 빠져 있는 잠꾸러기들아, 잠에서 깨어나라! 선잠에 빠져 있는 잠꾸러기들아, 정신을 차려라! 너의 행위를 점검하며 하나님께 돌이켜 회개하라. 남기지도 못할 이익을 헛되이 구하며 세월을 허송하는 자여, 일상의 사사로운 일에 빠져 영원한 진리를 바라보지 못하는 자여,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너 자신을 자세히 살펴보라. 너의 삶과 행사를 높여라. 너의 악한 행위와 비천한 계획을 포기하라.

 

 

 

유대인의 전통에 의하면, 신년에 울려 퍼지는 쇼파 소리에 사탄이 혼란에 빠진다고 한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쇼파 소리와 함께 온다고 믿는다. 쇼파 소리와 함께 메시아가 오시는 날, 사탄은 산산이 부서지는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매해 신년에 울려 퍼지는 쇼파 소리에 사탄은 메시아가 오는 줄 알고 혼란에 빠져 허둥대며, 반면에 이스라엘은 최후의 승리가 메시아에게 있음을 상기하게 된다. 유대인 학자 싸디아 가온에 의하면 열 가지 이유에서 쇼파를 분다. 그 중 몇 가지만 소개한다.

 

첫째로, 로쉬 하샤나는 창조의 시작을 상징하며 하나님은 그의 창조물을 지배하십니다. 왕들은 그가 왕으로 즉위할 때 나팔을 불게하며, 해마다 같은 날 나팔을 불어 그의 즉위를 만방에 알려 축하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신년에 창조주가 모든 만물의 왕이심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팔과 호각으로 왕 여호와 앞에 즐거이 소리할지어다”(시편 98:6)라고 노래하였습니다.

 

둘째로, 신년은 경외의 날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쇼파를 부는 이유는 경외의 날이 시작된다는 것을 모든 백성에게 경고하기 위함입니다. 경외의 날을 지키기 원하는 사람은 쇼파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경건한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돌이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어려움을 당해도 변명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셋째로, 쇼파 소리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 앞에 서약한 우리의 맹세를 상기시킵니다.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출애굽기 19:19).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출애굽기 24:7).

 

여섯째로, 묶어 바친 이삭을 상기시킵니다. 우리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도록 항상 우리 자신의 삶을 성별(聖別)하여 바쳐야 합니다.

 

일곱째로, 쇼파 소리를 들을 때에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창조주 앞에 우리의 뜻을 굴복해야 합니다.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아모스 3:6)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덟째로,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이 다시 모여야 함을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날에 큰 나팔을 울려 불리니 앗수르 땅에서 파멸케 된 자와 애굽땅으로 쫓겨난 자가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산(聖山)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이사야 27:13)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년에 높이 울려 퍼지는 쇼파 소리는 과거에 대한 지카로놋’(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기억함)으로, 현재에 임하는 말쿠욧’(하나님의 주권)으로, 미래에 임할 쇼파롯’(하나님의 구속의 약속)으로 유대인의 영혼 깊이 각인된다.

 

                                           최명덕/조치원성결교회 목사, 건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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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하늘, , 사람 이야기(1)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평안하신지요?

 

아직 동이 트기 전이라 사위가 고요합니다. 건너편 아파트를 바라보니 불이 밝혀진 집이 많지 않습니다. 혼곤한 잠에 빠져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왠지 가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지 알기에 그런 마음이 드는 것 같습니다. 착한 잠을 자고 나면 새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웃으시겠지만 이런 꿈을 꾸게 된 것은 김기택 시인의 아기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잔다라는 시를 읽은 후부터입니다. 있는 힘을 다하여 잔다니요? 늦장가를 간 시인은 선물처럼 자기 가정에 찾아온 아기를 보면서 신비가가 된 것일까요? 시인은 달게 자고 난 아기가 마치 하룻밤에 이 세상을 다 살아버리고 다시 태어나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남김없이 잠을 비운 아기가 아침 햇빛을 받아 환하게 깨어난다. 밤 사이 훌쩍 자란 풀잎 같이 이불을 차고 일어난다. 밤새도록 잠에 씻기어 맑은 얼굴, 웃음 말고는 다 잊어버린 얼굴이 한들거린다. 풀잎 위에 맺힌 이슬은 아기의 목구멍에서 굴러 나와 아침 공기를 낭랑하게 울린다.”

 

, ‘남김없이 잠을 비운 아기라는 구절이 마치 아득한 시원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는 언제 그런 잠을 누렸던가요? 자고 일어나도 늘 찌뿌드드한 것은 비워야 할 잠을 말끔히 비우지 못한 때문임을 알겠습니다. 비워야 할 것을 비우지 못하는 것은 묵은 때처럼 우리 몸의 일부가 되어버린 염려와 근심 때문일까요? 시간 속을 바장이는 동안 우리 속은 이미 까맣게 타버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하나 둘 아파트 창문에 불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밝음과 어둠이 자리를 바꾸기 전, 이 잿빛 시간을 저는 참 좋아합니다.

 

 

 

 

성탄절이 지났습니다. 일 년 내내 죽음이 예기되는 땅에서 살아온 이들은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것도 저어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아직 애도의 시간을 살고 있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의 숨죽인 울음소리가 이 땅 곳곳에 배어들고 있는데, 어떻게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가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 마음이 참 고마웠습니다. 나와 무관하다 하여 참담한 현실을 외면해 버리지 않는 이들의 존재야말로 새로운 세상의 그루터기일 겁니다.

 

하늘의 영광과 땅의 평화를 노래하던 천사들의 노랫소리가 잦아들기도 전에 우리는 비명소리를 듣습니다. 자기 안위를 위해 무고한 영아들을 학살한 헤롯의 시간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생활고를 비관한 한 가장이 세상을 버렸다는 소식도 들려오고, 부당 해고에 맞서기 위해 오체투지로 겨울 거리를 달구다가 방패 앞에서 멈춰선 이들도 있습니다. 굴뚝이나 전광판에 올라 함께 살고 싶다고 외칠 수밖에 없는 사람들, 삶의 터전에서 밀려나고 있는 밀양이나 강정 사람들, 그리고 골프장 건설로 몸살을 앓고 있는 산하의 피울음도 헤롯의 시간이 빚어내는 살풍경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가끔 세상에 희망이 있냐?’고 묻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그 질문 속에 담긴 좌절과 무기력이 느껴져 안쓰럽습니다. 그러나 희망은 우리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그들도 알고 있을 겁니다. 루쉰은 길이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걸으면서 생긴다고 했지요? 옳은 말입니다. 희망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정글도를 들고 덩굴숲을 헤치고 나가는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마치 베어진 풀과 나무의 상처에서 피어나는 상큼한 향을 맡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길을 만드는 이들에게 주어진 선물일까요? 얼음을 깨고 나가는 쇄빙선이 떠오를 때도 있습니다. 쩡쩡 갈라지는 얼음의 파열음이 들리는 듯 합니다. 희망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관념의 감옥에서 벗어나 실천의 벌판에 서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실천의 벌판이 꼭 투쟁의 자리일 필요는 없을 겁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갈라진 세상을 고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또한 희망을 일구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2이사야는 그의 백성들이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 주고,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고,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고, 굶주린 사람에게 먹거리를 나눠 주고,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혀 주고,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을 때에 이 땅에 비쳐 올 빛에 대해 증언합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햇살처럼 비칠 것이며, 네 상처가 빨리 나을 것이다”(이사야 58:7) .

 

빛 혹은 희망이 어떻게 도래하는지를 알 것 같습니다. 이사야는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을 가리켜 갈라진 벽을 고친 왕!’ ‘길거리를 고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한 왕!’이라고 부를 것이라고 말하네요. 이 마음으로 살아야겠지요? 모색하고, 돌진하고,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용기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티쿤 올람’(tikkun olam)이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세상을 고친다는 뜻으로 유대인들이 자녀들에게 제시하는 삶의 목표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 세상보다 내가 떠날 때의 세상이 더 나은 곳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지요. 지금의 유대인들이 하는 짓을 보면 이 말의 진정성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지만 목표 자체를 나무랄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삶의 곤고함은 사람들의 시선을 좁아지게 만듭니다. 자기 욕망 주위를 맴도는 동안 점점 작은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먼 데를 바라볼 수 있는 여백만 있어도 눈앞의 일 때문에 시난고난 애끓이지는 않을 겁니다.

 

보들레르는 아름다운 암고양이 펠린의 눈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읽는다고 말했습니다.

 

항상 같은 시간을, 공간처럼 무한하고 엄숙한 시간을, 분으로도 초로도 나누어지지 않은시계 위에도 표시되지 않은 정지된 시간을, 그러나 한숨처럼 가볍고, 깜빡이는 일별처럼 재빠른 시간을.”

 

훼방꾼이 나타나서 너는 시간을 읽느냐?” 하고 물으면 그렇다, 나는 시간을 읽고 있다. 시간은 지금 영원이다!”라고 대답하겠다고 말합니다(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16 시계중에서). 시간 속에서 영원을 보고, 영원 속에서 시간을 볼 수 있다면, 분초 단위로 우리를 몰아대는 시간의 폭력에 맞설 수 있을 겁니다.

 

객적은 말이 많았습니다. 투덜거려도 웃음 띤 얼굴로 들어주시리라는 확신을 핑계삼아 부끄러운 속내를 드러내 본 것입니다. 눈 내린 산길을 하염없이 걷고 싶습니다. 후줄근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찬 기운을 한껏 들이마시고 싶습니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외치든 메아리처럼 응답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올 한 해 내내 하나의 중심을 향한 여정이 흥에 겨우시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세요.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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