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호의 '전병욱 그 병폐의 프리즘'(2)

, 섹스, 권력’ - 말씀의 타락

 

한때 청년들에게 존경하고 따르는 목사의 아이콘이었다가, 성문제로 파문을 일으켰던 전병욱 목사가 다시 교회 개척에 나선지 3년이 흐르고 있다. 현재 그가 속한 합동측 평양노회에서 거론되고 있는 목사직 면직 문제는 일반 법정에 고소 고발까지 가는 사태에 이르렀다. 문제는 그가 이 사안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죄하고 자숙하기보다는 사건 자체가 일어나 본 적도 없는 듯이 여기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원래 시무하던 삼일교회에서 물러날 때 상당한 액수(10억대)의 전별금을 챙겨나갔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충격을 주기도 했다.

결국 전병욱 목사는 그의 설교 메시지가 담고 있는 문제를 넘어서서 한국교회의 성과 권력, 그리고 돈문제에 대해 어떤 자세를 보이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생생한 실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사안은 단지 윤리적 논란거리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권력을 잡고 있는 세력이 몰두하거나 빠져 있는 현실이라는 점에서 전병욱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은 전병욱 개인에 한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의 주류 권력의 문제해결에 접근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자면, 전병욱 목사가 그동안 청년들에게 강조해왔던 성공주의의 정체가 명확하게 밝혀진다.

그것은 전병욱 목사가 어떻게든 한국사회의 권력 내지 주류의 중심에 진입하는 것을 성공으로 이해해왔고,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스트레스가 성 중독이라는 방식으로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다. 전 목사의 성취주의는 바로 이렇게 인간에게 자신이 추구해야 할 가치에 대한 성찰보다는 맹목적 성취주의에 빠져들게 하고, 그에 인한 여러 가지 긴장과 심리적 압박을 성 도착이라는 방식으로 돌파하려는 모습을 그 자신의 삶으로 입증했다고 하겠다. 아니었다면, 그는 그 자신이 성 문제에 대해 반복적으로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해 보다 근원적 성찰을 통해 삶의 전환을 가져오려 했거나 또는 목회를 그만두는 방식으로 그 책임을 지는 선택을 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에 대해 한국교회가 도리어 침묵하거나 별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지 않는 것 또한 보통 문제가 아니다. 그런 결단과 자세 변화의 기초 위에 전병욱 목사의 삶이 전개되기 보다는 그와는 반대로 나가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으면서도 이에 대해 정면으로 문제 삼거나 논란을 벌이지 않고 있는 것은 교계의 수치일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한국교회에 보내고 있는 경멸의 눈길에 대해서도 윤리적 민감성을 전혀 보이고 있지 않는 상태를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한국 교계는 이미 너무 많이 이런 사안에 접해 있다보니 전병욱 사건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자기 구린 데가 있어어쩌지 못하고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싶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일단 그의 문제에 대한 논란을 결론짓기 이전에 그가 새로 개척한 교회에서 했다는 설교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앞에서 언급했듯이 전병욱 목사와 관련해서 할 말은 많지만, 그의 성추행 논란 이전에 그가 하는 설교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인가? 그가 목회하는 교회에는 여전히 청년세대들이 몰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 목사는 어떤 메시지를 통해 소위 은혜를 받게하고 있을까?

우선, <선명한 기준과 거침없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출애굽기 121-14절을 본문으로 삼은 설교를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자(이 설교는 지난 20127월에 전병욱 사건을 통해 보는 한국교회 토론회에서 발제하기도 했다). 골자는 기독교인들이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살면서 거침없는 용기를 뿜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출애굽기의 본문은 유월절 본문으로 당시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곧바로 애굽을 떠난 사건을 중심에 놓았다.

그런데 그의 설교는 곳곳에 얼토당토하지 않은 해석과 주장이 남발되고 있어 이게 과연 설교이긴 한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게다가 이런 메시지를 어떻게 교인들에게 전하고 있을까 하는 질문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가령 이런 식이다. 히브리인들이 유월절 식량을 먹고 즉각 그 땅을 떠나라는 대목에 대한 예화는 다음과 같다. 그는 급히 먹고 움직이라는, 즉각적인 순종을 이런 보기로 교인들에게 해설하고 있다.

옛날에 제가 일본 전산 이야기 책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 전산이라는 회사가 있는데, 여기는 교토에 있는 회사입니다. 동경같이 수도가 아니기 때문에 인재들이 잘 올 수 없죠. 여기는 독특하게 인재를 뽑는 방법이 있습니다. 오래 달리기를 하는 겁니다. 오래 달리기를 잘 하면 투지력이 있다고 뽑고. 제일 인상적이었던 게 뭐냐. 밥 빨리 먹는 사람을 뽑았어요. 실제로 보니까 명문 대학을 나온 사람보다도 밥 빨리 먹는 사람이 회사 일을 훨씬 더 잘 하더라는 거예요. 다 맞는 건 아니지만, 저도 사람을 겪어보니까 뭔가 일을 의욕적으로 잘 하는 사람이 밥을 빨리 먹어요. 어느 분야에서 성공이 단지 좋은 건 아니겠지만, 부각을 나타내는 사람을 보면 밥을 느리게 먹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요. 밥을 느리게 먹는 사람들의 특징은 건강해요. 건강한데, 회사가 망하죠.”

밥을 급히 먹도록 촉구하는 것은 야만이다. 유월절의 상황은 탈출이 전제되어 있다. 그런데 이걸 유월절과 동일한 기준에 놓고 말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게다가 사람의 건강과 회사의 흥망을 서로 연결해서 건강한데, 회사가 망하죠라고 하면 회사가 흥하기 위해 건강을 해쳐도 된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그걸 의식해서인지 그 다음은 이렇게 논리를 펴고 있다.

이 이야기와 딱 맞는 건 아니겠지만, 급하게 먹으라는 얘기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유목민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으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는 것을 머뭇거리지 않고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이예요.”

더는 옛 삶에 미련을 갖지 말고 대탈출을 향한 고도의 긴장감을 예비하게 하시는 말씀이 급하게 먹으라는 식으로 저열하게 해석되고 있다. 말씀의 타락도 이런 지경이 있을까 싶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놓고 사람의 생각을 따르지 말라는 논리가 또 이렇게 토로된다.

민심에 대해 너무 예민한 건. 그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민심이 천심이다는 말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데, 그런 말처럼 웃기는 말이 없어요. 민심에도 죄성이 녹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민심이 뭐예요. 사람들에게서 모여진 의견 아니예요? 사람들이 죄인이잖아요. 민심 속에도 죄가 녹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민심이라는 이름의 여론이 가지고 있는 허구와 오류는 분명 있다. 그러나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은 민심의 절대성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사람들을 짓밟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상황에서 나온 경고이다. 권력자 자신의 자의(恣意)가 민심을 억압하고 역행해나갈 때, 세상은 고통스럽게 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는 것을 일깨우는 말씀이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 속에 담긴 뜻이다. 권력자들이 방자해지고 오만에 차서 군림하기만 하려 할 때, 하나님은 백성들의 한에 찬 아우성 속에서 역사하시기 마련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셔서 내 백성들의 울부짓는 소리를 듣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에 대한 응답이 바로 모세의 파견이었다.

이런 식으로 민심의 의미를 폄하하고 뭉개면서 자신에 대한 세간의 비판을 막아보려는 것 아닐까 하는 혐의가 엿보이는 대목은 아닐까?

그래서 결국 전 목사가 도달하는 것은 순종론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가 할 사명이 무엇입니까? 명확하게 선을 그어 주는 것이예요. 하나님 말씀의 선을 그어 주는 거예요. 많은 성도들이 순종할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근데 왜 순종이 안 되느냐.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순종이 힘든 거예요. 명확한 하나님 말씀의 기준이 있으면 순종이 쉽습니다.”

유월절을 다룬 출애굽기의 본문은 이들이 무참하게 억압받고 살면서도 구각(舊脚)을 벗지 못한 채 노예적 의식과 삶을 살아가는 것에서 돌이키라는 말씀이 그 핵심이다. 따라서 여기서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에서 거대한 저항과 삶의 혁명적 변화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는 교회에서 순종하는 자를 만들어 자신의 말에 복종하도록 하는 식이다. 그런 까닭에, 새로운 비전과 목표를 제시하는 예화도 자신을 노예화시키는 물신에 대한 거부와 전혀 다른 삶의 선택이 아니다. 그는 뭐라고 했을까?

제 주변에 사람들 중 한 형제가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예요. 젊은 남자들이 참 자동차를 좋아하는 것 같아. 앉아가지고 자동차를 얘기하고, 자동차에 대한 꿈을 꾸고. 저는 그런 젊은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저는 자동차를 별로 안 좋아해요. 자전거를 좋아하죠. 그 형제 입장에 한 번 들어가 봤어요. 그 형제가 원하는 자동차가 좋은 차예요. 벤츠 E클래스를 갖고 싶대요. 우리 교회 어떤 김 집사님이 계시는데, 그 차를 타고 다녀요. 그것을 탐내고 있어요. 그 형제는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내가 저 차를 타면 얼마나 좋을까. 저 차를 타고 다니면 얼마나 멋있어 보일까. 미래에 대한 기대를 하고 있겠죠. 요즘 젊은이들은 그렇대요. 홍대 클럽 같은 데 가면요. 젊은 여자들이 좋은 차 타고 오는 남자들을 그렇게 좋아한대요. 테이블에 앉으면 차 키를 올려 놓는대요. 그런 걸 상상할 거 아니예요. 자기가 타고 다니는 차가 싫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차가 불편해지기 시작해요. 왜냐하면 다른 것에 대한 꿈을 꾸니까. 옳고 그름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게 아니예요. 그 젊은이 입장에서 한 번 상상을 해 보는 거라고. 어떤 것에 대해 마음을 빼앗기고, 기대감이 생기면 나중에는 자기가 살고 있는 모습들이 불편해져요.”

어떻게 예를 들어도 이런 식일까?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라면서 벤츠에 마음을 빼앗겨 지금의 자신의 차와 처지에 불만을 갖게 되는 것을 보기로 드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할까? 유월절의 메시지는 그런 욕망과 결별하고 새로운 차원의 삶을 향해 가는 거대한 여정인데 그 위대한 메시지를 이렇게 졸렬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결론은 이렇게 마무리 된다. 교회가 유월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면서 말이다.

말씀 때문에 불편한 인생이 됩시다. 절대 평탄하지 않는, 그들에게 가장 큰 보험의 1순위가 됩시다. 보험이라는 것이 헬프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거예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온다. 우리가 그런 작은 하나님이 되어서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믿음의 신자가 되길 바랍니다.”

믿음이 뭔가 계속 보험료를 내면 언젠가 타 쓸 수 있는 보험인가? 악한 권세와 마주해서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는 용기는 인생에 대한 보험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의 가치를 달리 만드는 것이다. 이렇듯 철저하게 자본주의 체제의 용어로 말씀을 해석하고 그걸 메시지화 하고 있는 전병욱 목사와 홍대새교회는 도대체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그들은 출애굽기의 말씀대로 그 욕망의 땅을 속히 떠나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진정한 해방의 길에 눈뜰 수 있을까.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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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 마당(6)

온 나라가 팽목항이 될 것이다

 

회색빛 바다의 팽목항, 바람은 여전히 거칠었다. 그건 인간이 겪는 고통과 슬픔에는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투였다. 물론 어디 그럴 리가 있겠는가? 본래 잿빛 하늘과 흐린 날의 바닷바람이 다 그러한 것을….

문제는 이 거칠고 비정한 바람이 인간의 내면에 불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월호 참사 1년이 다 되어가면서 겨우 만들어가는 조사위를 놓고 여당의 한 중진이라는 이는 “세금 도둑”이라고 규탄하고 나섰다. 규모가 장난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소 규모의 여성가족부와 방송통신위와 비교하면서 거의 입에 거품을 문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과거사 조사위원회보다 작은 규모인데다가 최소규모 부서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추악한 냄새가 난다.

세월호 참사는 국가 비상 사태였다. 3백여 명의 목숨이 몰살당한 일 앞에서 세금도둑 운운하면서 진상에 접근하는 노력들을 차단하려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폭거 아닌가. 억울한 생명의 문제를 다루는 일에 세금을 디밀고, 규모 축소를 외치는 자의 목소리에는 팽목항의 바람보다 더 차갑고 거친 바람이 내내 불고 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세월호 참사의 진상은 수면 위에 떠오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왜 그런 사건이 생겼는지, 왜 구조가 이루어지지 못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대통령이 어찌해서 아무런 기능도 발휘하지 못했는지는 완전히 암전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호 참사 이후 유가족들과 우리 사회의 의지는 꺾어지지 않았다. 유가족들이 똘똘 뭉쳐서 권력의 훼방과 언론의 책동을 모두 이겨낸 과정은 경이롭다. 어디 그 뿐인가? 이들이 사안마다 내놓는 논리와 행동은 이 비극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지 일깨우고 있다. 여기에 우리 사회 도처에서 나온 목소리와 움직임은 우리가 아직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해주는 대단히 소중한 버팀목이다.

유가족들과는 달리 실종자들은 이미 유가족이나 실종자라는 미묘한 처지에 놓여 있다. 9명의 실종자들 영정 자리에 있는  실종자 가족들의 애절함을 그 누가 알겠는가?

“현철아! 엄마 아빠는 숨 쉬는 것도 미안해”

“영인아! 배 올리자! 보고 싶어 미치겠다”

“여보!! 그립고, 보고 싶어요”

“여보! 배 좀 들어 올려요”

엄마를 찾아야 아들 가슴에 여한이 없죠“

“혁규야! 지연이가 너를 기다리고 있어”

“아빠!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은화야! 너랑나랑 바꿀 수만 있다면”

“내 사랑 다윤아! 엄마는 너를 끝까지 기다릴께”

그런 가운데 이들을 지원하고 위로하는 적지 않은 이름 없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세월호를 통해 발견하게 된 우리 사회의 고마운 면모이다. 하여 “마지막 한 명이 돌아오는 날까지 팽목항 가족과 함께 하겠다”는 다짐은 형형한 깃발로 나부낀다.

“하얗게 웃고 있구나 죄 없이 눈부시구나”

“너는 거기 함박꽃나무 희디 흰 얼굴로 앉아서”

“그대들 당도하지 못한 사월의 귀착지 거긴 꽃과 나비가 있는 곳”

‘이 생애 못다 한 말 자줏빛 꽃술로 품고“

“올해는 천 개의 꽃으로 피어나소서”

“아직은 모든 곳이 검은 바다 속, 여전히 세월호입니다”

“실종자 9명이 세상의 중심입니다”

 

 

말없이 이들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을 도운 이들은 고통에 대한 공감을 온 몸으로 보여준 이들이다. 지금도 끊임없이 개인으로 가족 단위로 단체에서 아파하는 유가족들과 세월호를 잊지 않기 위한 위로의 행렬은 계속되고 있다. 세월호 조사위를 향해 “세금 도둑”이라고 몰아세운 자와는 하늘과 땅의 차이다. 그렇게 말하는 자가 도리어 국민들의 세금으로 유가족들을 비난하고 있는 “세금 도둑”이 아닐까?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에서 정치인들의 정체에 대해 많은 것을 폭로해주고 있다.

세월호 조사위 내에 참여한 인사들을 자세히 보면, 아니 이런 사람이 왜 여기에 끼어 있지? 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세월호 참사 진상 조사에 대해 쌍수를 들고 가로막고 나선 자들이 여기저기에 박혀 있다. 이걸 보면 갈 길이 참 험난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방해를 뚫고 드러나는 것이 본래 진리의 숙명 아닌가.

이제 세월호 1주기가 다가오면서, 자연스럽게 세월호 진상과 관련한 논쟁들이 펼쳐질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유가족들은 또 얼마나 아파하게 될까? 하지만 그래도 그런 논쟁을 통해 우리는 진실에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설 수 있게 될 것이다. 게다가 4월 재보선이 겹쳐 있다. 세월호 문제가 어디로든 비켜나갈 도리는 없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리스트에 오른 이들과 비망록이 폭로되면서 신뢰도가 급격하게 추락하고 있는 박근혜 정권의 운명도 이런 상황과 맞물려 돌아가게 될 것이다. 어떻게든 조사와 수사의 권한을 주지 않고 덮고 나가려 했지만,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본과 권력이 어떻게 인간의 생명을 유린하고 죽음으로 몰아갔는지 자세히 알게 될 것이다.

지난 해 4월 16일, 어찌해서 그토록 많은 아이들이 물속에 잠겨 세상과 하직하게 되었던가? 우리의 구조 능력이 부족해서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국가의 최고 장비와 인원을 투입하고 작동하게 할 수 있는 조직의 의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핵심이 있다.

어떤 이유에서 그 의지가 실종되었을까? 사람이 바로 눈앞에서 죽어 가는데 필사적으로 구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건 아무리 좋게 봐줘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다. 그 많은 수를 떠올리면 학살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이다. 무섭다. 아닌 게 아니라 팽목항에서 만난 유가족들은 “아이들이 죽었다”가 아니라 “아이들을 죽였다”고 믿고 있다. 허위사실 유포와 유언비어의 차원에서 생각할 일이 아니다. 현실은 그런 생각을 충분히 갖게 했기 때문이다. 아니, 해경이 구조 현장에 바로 들어가 사람들을 밖으로 나오지 못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절대적 책임을 진 정부는 지금까자 이에 대해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고 있지 못하다.

팽목항에는 노란 리본이 나부낀다. 어느새 그 노란 리본은 우리에게 정치적 구호처럼 되었다. 그래서 권력은 노란 리본을 경계하고 있다. 교육 현장에서도 그건 경계의 대상이다. 이런 비정할 데가 잇는가. 사람이 죽은 아픔에 함께 공감하는 행위가 권력의 공격을 받는 사회가 정상일까?

그러나 노란 리본은 우리에게 이제 그저 리본이 아니다. 그건 깃발이다. 생명이 무엇보다 귀하고, 이를 지켜내는 일 앞에서 그 어떤 것도 우선권을 가질 수 없다는 확신에 찬 깃발이다. 2015년 4월 16일, 우리는 다시 팽목항에 올 것이다. 아니 그 전에도 갈 것이다. 온 나라가 팽목항이 될 것이다. 그래서 가라앉은 이 나라가 다시 떠올라 바다를 가르고 우리가 원하는 항구에 정박할 날을 꿈꾸게 될 것이다.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나에게는 꿈이 있다고 노래한 아이들의 저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여기는 팽목항, 우리는 세월호를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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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 마당(5)

마종기의 '우화의 강'에 붙여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서로 물길이 튼다

한 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이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 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 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 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마종기 <우화의 강>

 

 

오늘, 우리는 깊은 인연, 오래가는 우정

그리고 늘 서로를 일깨우는 그런 벗들에 대한 소중함을

얼마나 절감하면서 살아갈까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여겼던 마음들은

어느새 퇴색해 버린 지 한참인 것 같습니다.

그와는 달리, 아무리 정겹게 얽혔어도 이해관계가 틀어지면

갑자기 모든 것이 소멸되는 것에 익숙해져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서양은 논리가 통하면 그것으로 일을 꾸며나갑니다.

그러나 인간의 논리라는 것은 얼마나 위선적인지...

또한 그것은 귀에 걸면 귀거리 코에 걸면 코거리가 되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말 잘하는 자도 거짓도 진실로 둔갑시키고 진실도 거짓으로 몰아갑니다.


우리네 본래 정서는 마음이 통하는 것에 주력했습니다.

일단 마음이 서로 통하면 논리를 뛰어 넘을 줄 압니다.

그건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마음에 내켜야 하고 마음도 “먹습니다.”

먹는 것은 곧 몸이 됩니다.

그 마음이 내 오장육부에 파고 들어 내 몸이 되면

행동은 그대로 이어지는 법입니다.


시인 마종기는 그런 우리네 정서의 정곡을 드러내 보입니다.

벗이 되면 서로의 마음에 물결이 트인다는 것입니다.

그건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그 물살이 때로 느리고 때로 빠르고 하는 차이가 있다 해도

그것은 이 쪽 끝과 저 쪽 끝이 하나가 되어 있는 물결입니다.

마음의 강이 흐르는 곳에 생명이 태어나고

우정의 숲이 우거지며 삶의 기쁨은 시들지 않습니다.

 
그 강이 적시는 땅은 옥토가 되어 갑니다.

맑고 깨끗한 강이 흐르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굳이 인사를 나누지 않아도

우린 상대의 마음에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 따뜻하게 감지할 수 있겠지요.


서울에 다시 청계천이 흐르고 사람들은 그곳을 즐겨 찾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마음에 어떤 강이 흐르고 있는지,

어떤 물길이 트이고 있는지는 돌아보려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홀로 이 막연한 세상을 살아가며 외로울 때,

그 마음을 위로해주고 때로 힘겨워 하소연 할 때가 없어도

그를 떠올리면 다시 마음에 평안이 오는

그런 인연, 그런 우정, 그런 사랑, 그런 축복이

다만 아득히 먼 옛날의 우화로 남지 않고 생생한 이야기로 남기를 빕니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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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 마당(3)

 

권력의 묘지가 따로 없다

- ‘땅콩 회항조현아와 박근혜 대통령 -

 

 

힘을 가지면 그 힘을 쓰고 싶게 되어 있다. 그런데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그 힘의 가치는 달라진다. 생살여탈권을 가진 권력자가 사형수를 살려준다면 그것은 생명을 향한 권력이 된다. 링컨 대통령이 그렇게 했다. 그러나 그 반대는 잔인한 권력이 된다. 이런 예는 들지 않아도 너무나 많다.

 

권력의 오만

 

권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이 어떻게 행사되는가에 따라 살게 되는 사람과 죽게 되는 사람의 수는 많아진다. 최근 박근혜 정권 내부의 권력 암투나 대한항공 전 부사장이 된 조현아의 기내 난동사건은 모두 권력자가 자기 권력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확실하게 보여준다.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압살한 장본인이다.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했던 인물이니만큼 그 권력의 물리력은 대단히 강도가 높았다. 박정희의 부당한 정치에 맞서는 일은 그래서 목숨을 거는 일이 되었다. 인간의 목숨을 쉽게 짓밟고 죽이는 권력이었으니, 얼마나 살벌한 대통령이었는지는 되풀이 할 필요도 없다.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을 모두 하루아침에 사형장으로 보내 죽인 권력자였으니, 그의 권력은 무소불위하게 보였다.

 

 

(출처: InSapphoWeTrust (https://www.flickr.com/photos/skinnylawyer)

 

 

그러나 바로 그 무소불위한 권력이기에 박정희는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힘이 강하면 세상에 안 되는 것이 없다고 여긴 그였기에 만사에 무리를 했고, 그 무리가 하나하나 쌓여 결국 자신을 향한 칼날이 된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만하고 잔혹한 권력자일수록 자신의 권력이 영원할 것처럼 믿는다. 그러나 그 믿음이 거꾸로 함정이 되어,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박탈하고,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대가를 치른다.

 

예수의 비유 가운데 포도원의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까지 죽인 사건은 포도원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차지하려던 자들의 잔혹함과 죄를 보여준다(마태복음 21).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자기의 힘을 과시한 일들이 자신들의 죄의 증거가 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점이다. 아들까지 죽이면 모두가 벌벌 떨고 무서워 꼼짝 못할 줄 알았지만, 결국 주인은 이들을 모두 제압하고 포도원을 경작할 농부들을 교체해버리고 만다. 역사의 주도권은 이렇게 바뀌어 왔다.

 

사유화 된 권력의 최후

 

그 아버지에 그 딸인가? 대통령 박근혜의 권력 운용방식은 오늘날의 민주주의 사회와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방식을 보이고 있다. 권력자에게 비선(秘線)조직이 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 비선조직이 공조직을 대신해서 전횡하기 시작하면, 사태는 겉잡지 못하게 된다. 공조직은 무력해지고 좌절하게 된다. 국가의 기능을 감당하고 있는 공조직이 무력해지면 그 여파는 모든 국민들의 삶에 미친다. 그러기에 공조직을 장악해버리는 권력자의 비선조직은 단지 권력자의 조직을 넘어, 국민적 차원에서 중대한 문제를 일으킨다.

 

그렇게 해서 불거지고 있는 일들은 오늘날 우리 국민들에게, 이 정부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며 어떻게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지를 깨닫게 하고 있다. 대통령은 공적 판단과 결정을 이들 비선조직에 의존하고 있으며, 인사까지 그런 식으로 하고 있으니 공적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은 대통령 자신이 된다. 이건 공적 최고 책임자가 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박근혜 대통령은 이런 의식 자체가 없어 보인다. 그런 까닭에 골탕을 먹는 것은 국민들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그 공화국의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따라서 정부의 권력은 철저하게 국민들을 위해 사용돼야 한다.

 

현실은 어떻게 되고 있는가? 권력의 사유화가 더욱 철저하게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시스템은 사라지고, 대통령 개인의 판단과 결정에 대해 그 어떤 시스템의 검토나 교정과정은 이렇게 해서 삭제 당한다. 이는 매우 위험한 상태이다. 대통령과 사적 관계의 밀도가 높은 인물들이 국가권력을 자기 것처럼 여긴다면, 국민들의 삶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의해 농락당하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그런 현실을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권력의 사유화는 이렇게 해서 정치를 말아먹는다. 권력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지를 망각해버린 자들이 흔히 하는 짓이다. 하늘의 뜻을 받아 왕이 된 사울도 권력을 자기 것으로 여기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선지자 사무엘의 경고가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게 되었고, 마침내 나라와 그 자신 모두를 구렁텅이로 밀어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땅콩 회항과 조현아의 좌절

 

이른바 땅콩 회항으로 나라 안팎을 시끄럽게 한 대한항공의 전 부사장 조현아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 대한항공은 사기업이기는 하지만, 그 성장과정은 국민적 기반 위에서 가능했다. 그뿐 아니라 항공기 운행은 승객 모두의 안전과 생명이 달려 있는 문제이기에 전문가가 아닌 임원 누군가가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좌우할 일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애초에 우리는 사태를 조현아의 이른바 갑질이라고 이해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것은 단순한 갑질이 아니라 거의 난동 수준의 패악질이었다. 비행기나 배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그것은 승객 모두의 안전에 직결되는 사안이 되어 즉각 체포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자신이 그 모든 것의 주인인양 굴었고, 승무원과 사무장을 자기 하인정도로 여기고 모욕주고 짓밟았으니 이는 국제망신이 아닐 수 없었다.

 

장본인이 다른 누구도 아닌, 대한항공 사주의 딸이자 대한항공 임원이라는 점에서 권력 휘두르는 것만 알았지, 항공기와 승객 안전을 위해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 인물이라는 점만 온 세상에 드러나고 말았다. 당연히 그녀는 사법처리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며, 대한항공은 국민 앞에서 사죄만이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그 이미지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매우 특별한 조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힘을 가지고 있다고 힘없는 이들을 그토록 함부로 짓밟고, 전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거짓말까지 했는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 모든 것이 부메랑이 되어 조현아 자신에게 돌아갔고, 그녀는 지금 그녀의 40년 생애에서 가장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이런 것을 보고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하는 것이다.

 

조현아 사건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힘 가진 자들에게 중대한 경고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드라마 <미생>으로 해서, 힘없는 이들의 분노가 확산되고 공유되고 있는 마당에 그런 사회심리에 불을 지른 것이 바로 조현아 자신이다. 그런데 언제나 자기가 갑이고, 상대는 을인 줄로 알았다가 이렇게 상황이 반전되고 보니 얼마나 무서운가? 조현아는 세상에 무서운 것 없이 살아왔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어떤 일을 겪고 있는가? 국민들의 시선 망에서 벗어날 길이 없게 되었고, 평생을 통해 이 낙인을 떨어내려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자신의 아름다운 머리칼을 내세우며 자랑하고 아버지에 대한 반란과 함께 권세를 누리려 했지만, 압살롬은 바로 그 머리칼이 나무에 걸리는 바람에 창에 찔려 죽고 만다. 힘으로 여긴 것이 거꾸로 자신을 치는 칼이 되는 일은 이렇게 일어난다. 조현아도 그렇게 땅콩 하나로 아랫것들의 기를 잡고 자기가 엄한 주인임을 보이고 싶었는지 모르겠으나 정작 엄한 주인은 국민이었던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그 뒤늦은 깨달음의 대가는 혹독하다. 카메라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죄송하다는 말을 낼 수밖에 없게 된 처지의 그녀는 처음에야 분노하고 잠시 겪고 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제는 자신을 보호해주고 막아줄 그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겪고, 그 짐을 모두가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세상과 만나고 있다. 홀로 뉴욕 공항에 내려져 비참한 기분에 좌절했을 승무장의 심정이 무엇이었을지 그제야 알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권력의 묘지

 

그나마 조현아의 경우는 일찍 그 죄가 노출되어 그녀에게 인생전환의 기회가 주어진 셈이라고 할 수 있다. 더는 오만하게 굴면서 상전노릇 하며 살기는 쉽지 않게 되었을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상전들의 버릇을 고치는 계기가 되기도 했을 테니까 말이다.

 

문제는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 박근혜 대통령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그 까닭은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국민들에게 가한 고통이 무엇이었는지 잠시라도 성찰할 수 있다면, 권력의 사유화는 멀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도리어 그 교훈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채 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박대통령의 경우는 그 잘못된 생각과 피해가 조현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조현아의 경우는 그녀에게 반면교사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어떤 전조라는 점을 그녀는 여전히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국민들은 이제 그런 권력의 횡포와 부당한 처사에 대해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보수신문들도 핵심지지 세력까지 이탈하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됐지만 우리는 무척 어두운 마음에 짓눌려 있다. 어디를 봐도 희망의 단초를 찾을 길이 없는 것 같다. 새 시대를 여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곳곳에서 목격하고 있다. 나라를 이끄는 사람들에게서 여전히 횡행하는 거짓과 폭력을 본다. 낡은 시대의 모든 기득권은 여전히 힘쓰고 있고 미래의 희망 대신 두려움이나 불안이 더 크게 자리 잡아 간다.

 

이러한 오늘의 모습에서 우리의 옛이야기인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 나오는 분칠한 호랑이를 본다. 아무리 두텁게 분칠을 하고 목소리를 바꾸어도 호랑이가 어머니로 바뀌지는 않는다. 그 호랑이는 여전히 모든 것을 움켜쥐려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과 폭력의 모습이다. 작은 폭력은 쉽게 눈에 띄기에 민감하게 느끼고 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시대나 국가의 폭력은 너무 크기에 쉽게 알아볼 수도, 단박에 시정할 수도 없다. 헌정사상 초유로 한 정당을 해산시킨 결정이 그렇다. 그러한 폭력은 불의와 거짓과 함께 엉키어 나름대로 체계화, 합리화되어 있다. 그것은 항상 정의와 평화, 진실을 풍선처럼 높이 띄어 놓을 뿐, 현실에 발붙일 틈을 주지 않는다. 폭력의 짝이 거짓과 불의이듯, 그것의 가장 무서운 적은 정의와 평화,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정의와 진실에 대한 믿음을, 거짓과 폭력에 대한 싸움을 멈출 수 없다. 그 길고 지리한 싸움을, 한 에디오피아 옛이야기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진실은 거짓과 싸울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진실이 이길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은 돌아 올 것입니다. 진실은 다시 싸워야 합니다. 시간이 멈추지 않는 한, 진실은 거짓과 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원히 패배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누가 교묘한 온갖 형태의 폭력과 거짓으로 분칠한 호랑이인지를 두 눈 부릅 뜨고 지켜 볼 일이다.

 

다시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떠올리게 된다. 포도원의 주인은 자기 아들을 죽인 농부들을 내어 쫓고 새로운 세력을 내세운다. 역사는 그렇게 바뀐다. 그럴 날이 점점 더 가까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권력의 묘지가 따로 없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 이글은 <복음과 상황> 1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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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 마당(2)

법의 칼날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법에 호소하기 보다는 주먹으로 해결하는 편이 속 시원하고 결과도 분명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폭력이 해결책이 되고 그 결과 우리는 폭력의 만성적 희생자가 될 수 있습니다. 법은 주먹보다 가까워야 합니다. 그러나 법은 너무 멀리 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법도 가깝고 주먹도 가깝다, 입니다. 법이 주먹이 되어버릴 경우입니다. 법에 호소해봐야 그것이 도리어 우리에게 주먹이 되어 날아오면 그 법은 곧 폭력이 되고 맙니다. 과거 우리는 군사독재 시절 법이 주먹인 역사를 겪어냈습니다. 긴급조치다, 비상조치다, 해서 법이 양산되고 그 법은 주먹으로 다스리는 역할을 고스란히 했습니다. 아니 맨손 주먹보다 더 센 주먹이었습니다.

사법부가 사회적 약자들을 법으로 지켜내지 못하면 그 법은 강자들의 무기가 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강자들의 무기가 되고 있는 법에 대해 법질서 운운 하게 되면, 강자의 요구에 굴종하라는 소리 밖에 더 되지 않습니다. 이들 강자가 규정하는 불법은 자기들에 대한 반대와 저항을 불법으로 모는 것 외에 다름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법질서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은 정작 이들이 됩니다. 그런 법을 왜 지키는가 하는 회의와 불신을 낳는 근본에 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법 지켜라하면 법이 우스운 꼴을 겪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돈이 있으면 무죄고, 돈이 없으면 유죄가 된다는 현실의 경험법칙을 사람들은 너무나 뼈저리게 압니다. 재벌들은 대충 봐주는 게 우리 나라 법입니다. 올해도 예외 없이 경제를 살리기 위해 재벌 총수를 사면하자는 이야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조그만 죄를 저질러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법은 그러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하는 질문이 이어지게 됩니다. 헌법재판소가 휘두른 칼날에 한 정당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강자들의 권력과 기득권을 위한 철옹성이 법이라면 그런 법은 조만간 저항에 직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역사는 이미 그런 법칙을 무수히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법이 정의에 기초해 있지 않으면 그것은 결단코 악한 법입니다. 악한 법은 폐기되거나 고쳐져야 하거나 지킬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그들의 권리를 짓밟는 법을 법이라는 이름으로 존중해줄 까닭이 없는 것이지요. 악한 법은 사라져야 마땅합니다. 그걸 법이라고 우겨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것은 못할 짓입니다. 신분질서를 법으로 묶어 놓고 그걸로 인간차별을 하는 법을 우리가 지금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런 법이 사라졌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러나 현실에서는 아직도 이 법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신분에 따라 법 적용이 달라지니 말입니다.

법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하지만, 실제는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평등하다는 것은 원칙이 그렇다는 것이지 적용이 언제나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보장해주진 않습니다. 이러면서 사회는 갈등과 대립을 겪고, 있는 자와 없는 자들의 적대적 긴장이 발생합니다. 대체로 문제의 원인제공자들은 있는 자, 강자들입니다. 이들이 기득권을 누리면서 남들의 권리를 짓밟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법은 그걸 막고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이들의 존엄성을 지켜낼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바로 그런 정신의 핵심입니다. 과부와 고아, 나그네를 지켜라, 이런 이야기는 바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 법의 중심에 있음을 일깨우는 대목입니다. 추수할 때 모조리 다 걷지 말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이삭을 남기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법 이외에는 호소할 데가 없는 이들에게 그 법이 피난처요, 호소를 듣는 곳이며 문제를 풀어주는 자리가 되지 못하면 법외의 방식이 동원되어가기 시작합니다. 혁명도 그렇게 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라, 평화를 위해 나서라, 애통하는 이들과 함께 애통하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 이렇게 말씀하신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법에 들어 있는 정신적 요체입니다. 인간의 법은 이런 하나님의 법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법은 반드시 인간의 욕망과 죄를 옹호하는 무기가 되고 맙니다. 실정법임을 내세워 온갖 탐욕과 기만을 은폐하고 정당화하는 일이 일상으로 벌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법 현실이 이런 각성과 반성적 성찰 없이 그대로 존속되어 가면 억울한 사람들이 자꾸 생겨나지 않겠습니까? 그런 억울한 이들의 아픔과 한을 풀어주는 것이 교회가 맡은 사명일 것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교회는 사법부가 아니라고.’ 그렇지요. 사법부가 아니지요. 그러나 사법부가, 권력이, 재력이 법 위에 군림해서 약자들을 능멸하고 한을 품게 하면 이를 질타하고 문제를 제기할 책임은 있지요. 그걸 우리는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모순된 법 현실에 침묵하는 것은 교회가 교회답지 못함을 뜻합니다. 모순된 법 현실에 입을 여는 것, 그래서 이 사회가 진정한 법의 정의를 세우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이들의 책무일 것입니다. 이 책무를 잊은 교회는 소금이 맛을 잃으면 길에 버려지듯이 버려지지 않을까요? 법의 폭력은 죄입니다. 이 죄에 눈을 감는 교회는 하나님의 법이 주신 양심을 버린 집단이 되고 말 것입니다. 부디, 현실의 법이 하나님의 법을 담는 그릇인가 아닌가 고뇌하면서 그런 그릇을 만드는 일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일조했으면 하는 마음 가득합니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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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욱, 그 병폐의 프리즘(1)

 

전병욱, 한국교회의 욕망과 죄를 보여주는 열쇠 말

 

<꽃자리>는 왜 다시 전병욱에 대해 글을 쓰려는 것일까?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계실 듯 합니다. 10여 년 전, 그의 설교와 신학적 사고에 깊이 스며 있고 거기에서 드러나는 문제점에 대해 비판했었습니다. 우리는 그를 통해 한국교회의 모순과 한계가 매우 뿌리 깊게 투영되어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았습니다. 꽤 시간이 흐른 이 시점에도 동일한 병폐와 오류가 압축되어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병욱 말고도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병욱의 경우. 성추행이라는 매우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법적 처벌도 받지 않았고, 그 자신이 이에 대해 본질적인 성찰과 반성도 없는 채로 다시 목회를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비리와 부패

 

한국교회의 비리와 부패를 폭로한 다큐멘터리 영화 <쿼바디스>에 등장하는 사랑의 교회를 비롯해서 이른바 적지 않은 목회자들의 반윤리적 작태는 한국 기독교를 끊임없이 수치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거대한 기업체도 아닌데 그렇게 큰 건물을 짓고 소유하고 거기에 교회라는 간판을 붙이고 있는 것도 기가 막힐 뿐만 아니라, 논문표절이라는 도둑질을 해놓고도 버젓이 계속 목회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의 모습은 샤르트르의 작품 구토의 제목을 연상시킵니다. 횡령과 성추행을 비롯해서 권력의 편에 붙어 이 나라 민주주의를 망가뜨리는데 일조한 이들은 또 어떤가요?

 

이런 한국교회의 몰골은 기독교 자체에 대한 회의와 환멸을 낳고 있으며, 한국교회는 그로써 비난의 대상이 되어온 지 오래입니다. 오죽하면, 원로 목회자 일부는 이제 교회 나가지 않기 운동을 벌여야 할 판이 되었다고 탄식하겠습니까?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성전에 가셔서 그 부패와 독선, 그리고 민중 위에 군림하고 있는 현실을 보시고 강도의 소굴이라고 일갈하시고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라고 경고하신 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의 대형교회 대부분은 강도의 소굴이 되었으며, 알만 한 사람은 알고 있는 소위 진보라는 일부 진영도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예수와는 하등 관련이 없는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자리 나눠먹기, 권력 차지하기 등 욕망과 지배의 성채가 되었습니다(이 부분은 차후에 다른 꼭지로 면밀히 다루고자 합니다). 그러면서도 복음을 선포한다며, 오랜 역사와 전통 있는 한국교회 연합기관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는 거창한 슬로건을 내걸고 기만행위를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오해와 기만의 중심에 자리 잡은 전병욱 현상

 

우리가 날로 경악하고 절망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은, 교회를 다니는 젊은 세대마저도 이에 대하여 저항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 보다는 그에 휩쓸려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현실이 너무도 힘들고 좌절을 겪게 하고 있기에, 위로와 격려가 절실하다는 이유 때문에 복음 아닌 것이 복음 행세를 하면서 이들을 빨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진정 예수의 길이며,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깨닫는 것은 신앙의 기본적인 각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출세주의를 부추기고 물질적 성취라는 목표를 위해 요구되는 전략과 전술을 제공해주는 곳으로 타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젊은 세대는 이를 마치 복음이 공급해주는 삶의 에너지처럼 오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오해와 기만의 중심에는 전병욱 현상이 있습니다. 성추행범이 목회자로 다시 등장해서 젊은 기독교인들을 그렇게 불러 모으고 있는 것입니다.

 

성추행범으로 삼일교회에서 물러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홍대새교회를 개척한 후, 2012619일 새벽기도회에서 전병욱은 잘못된 결정은 즉각 돌이키라는 제목의 설교를 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니다가 사울의 적진에 도주해서 목숨을 건지는 사무엘상 2110절에서 15절의 대목을 본문으로 삼았습니다. 여기서 그가 주목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적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사울이 왕인데, 적은 자신을 왕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듣고, “아 내가 왕이지하는 깨우침으로 본래의 사명을 회복하고 돌아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설교를 합니다. 좀 길지만 인용해보겠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고 하다 보면 우리 사명이 무엇인지, 우리가 이 땅에 왜 존재하는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다 잊어버릴 수 있어요. 근데 어느 순간에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때도 있지만,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정신 차릴 때가 있어요. ! 이거구나. 그때 깨달을 수 있는 거죠. 세상이 얼마나 정확한지 아십니까? 예를 들어 거지들도 잘 알아요. 누가 동정심을 가지고 구제를 하는지. 거지들을 보면 구걸할 때 불경을 외우는 거지 봤습니까? 나는 우리나라에서 한 번도 못 봤어요. 지하철에서 불경을 외우면서 도는 것 봤어요? 없는 것 같아요. 하다못해 그레고리안 성가를 부르면서 구걸하는 것을 못 본 것 같아요. 제가 본 것만 얘기하면 거의 다 찬송가였어요. 어제 본 거지는 복음성가를 부르더라고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익숙하지 않은 노래를 트는 건 거의 못 봤어요. 가요를 불러도 되잖아요. 버스커버스커의 여수 밤바다를 불러도 되잖아요. 근데 그건 것도 못 봤어요. 거의 대부분 찬송가를 부르더라고요. 거지도 알아요. 성도들에게서만 돈이 나온다는 것을. 성도들에게서만 구제가 가능할 수 있다라는 것. 세상이 더 잘 알잖아요.”

 

구걸하는 걸인들에 대한 일말의 동정이나 이들의 삶에 대한 아픔은 없습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단지 걸인들조차도 기독교에 대해 알고 있다는 투입니다. 이렇게 타자에 의해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이어지는 대목은 이렇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교회가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 누가 더 잘 아느냐. 그 지역에 있는 부동산 중개업자가 더 잘 알아요. 그 교회가 싹수가 좀 노랗고, 안 될 교회 같다고 그러면 그 동네 상권이 무너지고 오히려 매물이 쏟아지고 그래요. 갑자기 상가가 동이 나기 시작하고 오겠다는 사람이 많아지고 그러면 더 잘 알죠. 홍대새교회가 잘 될지 안 될지는 주변의 부동산 중개업자에게 물어봐요. 이 동네 요즘 상가 시세가 어떻게 되나. 점점 빈 방이 없어진다 하면 되는 교회이고, 빈 방이 늘고 있다면 힘든 것이고. 무슨 얘기인지 아시겠죠. 세상이 더 잘 안다고. 세상이.”

 

죄로 들어서는 문

 

참으로 어이없고 정말 허접하기 짝이 없습니다. 교회의 생명과 부동산 가격이 그에게는 한 몸이 되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곳에 가서 교회가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주는 사명에 대한 깨우침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윗의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왕인가요? 아니올시다,입니다. 다윗은 아둘람굴에서 당대의 고난 받은 이들이 모여들었을 때, 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지도자의 역할을 각성하게 됩니다. 따라서 다윗이 다윗인 것은 그가 왕인가 아닌가의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누구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고 살려 하는가에 있습니다. 그렇게 보자면, 걸인의 이야기를 꺼낼 때도 우리는 그렇게 살게 되는 이들이 없는 세상을 어떻게든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다지는 쪽이 되어야 합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을 온통 껴안고 그걸 풀어가는 이들이 되고자 할 때 우리는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되는 것입니다. 부동산 가격 운운도 다르지 않습니다. 전병욱 식이라면 우리는 교회가 고난의 땅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로 이어짐을 보게 됩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보자라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하는 자의 설교입니다.

 

전병욱은 그래서 한 개인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한국교회의 욕망과 죄를 보여주는 열쇠 말이 된 격이 되었습니다. 이런 현실은 종식되어야 합니다. 아니면 우리는 다윗이 왕이 된 이후 그의 진정한 사명을 잊고 욕망의 인간이 되어 죄의 늪에 빠지게 되는 까닭과 그 의미를 모르게 됩니다. 다윗이 왕은 되었지만,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에는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도 그런 전철을 밟을 수 있습니다. 전병욱은 그 전철을 밟게 하는 길로 젊은이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죄로 들어서는 문이 그 앞에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전병욱을 버리는 한국교회, 아니 합동측 교단이 될 수 있기를 새해인사로 드립니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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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선한이여

이 땅을 불쌍히 여기소서.

어지신 분이여, 우리 죄를 없애주소서.

허물을 말끔히 씻어주시고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주시고

꿋꿋한 뜻을 새로 세워주소서.

그리하여 이 땅에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며

땅에서는 진실이 돋아나고

하늘에선 정의가 굽어보게 하소서.

그리하면

정의가 당신 앞을 걸어나가고

평화가 그 발자취를 따라 가리이다.

 

 

(시편 51:1-2, 10: 85: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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