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두런두런(3)

 

이 땅 이 시대가 피워 올리는 눈물의 봉화

 

 

언젠가 저 남쪽 끝에 있는 교회를 찾아가 말씀을 나눈 일이 있습니다.

잘 아는 후배가 섬기고 있던 교회였지요.

점심을 먹고 쉬는 시간 후배와 길을 나섰습니다.

답답하고 힘들 때 자신이 찾는 곳을 보여주고 싶다 했습니다.

바다와 섬이 그림처럼 어울리는 아름다운 풍광이 한 눈에 들어오는 언덕이었습니다.

감탄이 절로 나왔지요.

하지만 후배가 찾는 곳은 빼어난 조망대가 아니었습니다.

언덕 위엔 돌을 쌓아 만든 봉화대가 있었습니다.

위험한 일이 생기면 불을 피워 다급한 상황을 알리는 봉화대였습니다.

마음 답답하고 힘들 땐 그 봉화대 위에 올라 무릎을 꿇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봉화를 피워 올리듯 드리는 기도,

세상에 그만한 기도가 어디 흔할까 눈시울이 뜨거웠습니다.

그 때 그 시간 떠올랐던 것은 이 엄동설한 굴뚝 위로 올라간 사람들 때문입니다.

쌍용 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이 70미터 굴뚝에 올라 여기도 사람 있다 외치고 있습니다.

칼바람 에는 까마득한 꼭대기, 거기야 말로 하늘로 향하는 봉화대네요.

이 땅 이 시대가 피워 올리는 눈물의 봉화입니다.

모든 기도 들으시는 주님, 봉화대 위에서 드리는 기도 더욱 들으소서.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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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3)

 

말을 할 줄 모릅니다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예레미야 1:6).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예레미야가 보인 첫 번째 반응은 슬픕니다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부르셨는데 슬프다니! 성경에 이름이 기록된 예언자가 보인 반응이라 하기에는 어이없어 보인다. 하나님의 뜻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믿음이 적고 약해 보인다.

위대한 주님의 종이라면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할렐루야!” 하며 두 손을 들든지, “영광입니다!” 하는 뜨거운 반응을 보였어야 하지 않을까.

사막 동굴에서 기도하는 한 수도자를 사탄이 찾아왔다. 빛의 천사를 가장하고서. 사탄은 수도자에게 나는 하나님이 당신에게 보내서 온 빛의 천사입니다라고 했다. 그 때 수도자는 잘못 찾아왔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천사를 보낼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자 사탄은 즉시 그를 떠나갔다고 한다.

어쩌면 예레미야의 그런 점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신 이유인지도 모른다. 정직하다는 것이야말로 진실함의 근거, 아무리 대단한 믿음을 가진 것처럼 보여도 그 마음이 진실하지 않다면 그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없다. 사람 앞에서는 잠깐 대단한 도구처럼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정직한 영을 가진 사람이다.

 

사람은 그릇의 크기를 보지만, 하나님은 그릇 됨을 보신다. 그릇의 크기는 외양의 크기가 아니라 나를 얼마나 비워냈느냐 하는 것이다.

슬픕니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하흐인데, 좋지 못한 일을 만났을 때 놀라고 당황하여 탄식하며 내뱉는 외마디 소리라 한다. 같은 말을 에스겔 414절에서는 오호라로 번역했다.

그러고 보니 히브리어 아하흐와 우리말 오호라가 비슷하게 들린다. 어느 시대나 사람의 탄식은 비슷한 유형, 비슷한 감정을 담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탄식부터 한 예레미야는 나는 말을 할 줄 모릅니다고 대답을 한다. 말을 할 줄 모른다는 말에 비춰 생각해 볼 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말을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런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하신다.

사람이 말을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그 입에 두심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 누군가가 말씀의 사람이 되는 것은 그가 말을 잘 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입에 당신의 말씀을 맡겨 주시기 때문이다.

말을 잘 하는 것과 말씀을 전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달변가를 원하시지 않는다. 어눌하더라도 당신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사람을 원하신다.

그런데 보라. 오늘날 수많은 목회자들이 사람들 앞에 말 잘하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사람들 또한 말 잘 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따른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당신의 말씀을 맡기셨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우리 시대의 비극이 여기에 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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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2) 

개구리 함정

 

종례 시간에 들어온 선생님 얼굴은 무서웠다.

오늘은 집에 늦게 가야겠다며 지금부터 밖에 나가 개구리를 한 마리씩 잡아오라 했다. 이유를 묻지도 못한 채 우리들은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매운, 땅이 얼어붙은 그 때 웬 개구릴까, 도무지 영문을 모르는 채 우리는 각기 흩어져 학교 주변을 헤집고 다녔다.

날이 어둑해질 무렵 우리는 다시 교실로 모였다. 교탁 위에는 무엇인가 시커먼 보자기에 덮인 것이 놓여 있었다.

어항이었는데 어항 속엔 우리가 잡아온 개구리 중(세 마리를 잡았다 했다) 제일 큰 놈 한 마리를 넣었다고 선생님이 설명을 했다.

그리고는 한 사람씩 차례대로 나와서 어항 속에 손을 넣으라 했다. 검지가 어항 바닥에 닿도록 끝까지 쑥 넣으라고 했다.

(출처:Oliver Tacke (http://www.flickr.com/photos/otacke))

 

며칠 전 납부금을 잃어버린 반 친구가 있었는데, 가져간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었다. 개구리는 영물이라 누가 가져갔는지를 알아 그 손이 들어오면 꽉 깨물 거라 했다.

나 말고도 대여섯 명이 걸렸다. 어항에 차례대로 손을 넣게 한 후 선생님은 한 사람씩 손가락 검사를 해 몇 명을 잡아냈다.

개구리가 잘못 알고 내 손가락을 깨물면 어떡하나, 개구리가 손가락을 깨물다니, 나는 두려움에 손가락을 바닥까지 넣지 못했다. 행여 개구리가 깨물까 싶어 넣는 척을 하다가 얼른 손을 들어올렸다.

나중에 짐작해낸 일이지만 그 때 어항 밑에 개구린 없었다. 어항 밑바닥에 먹물만 깔아놓고선 우리에게 개구리 이야기를 했던 것이었다.

다행히 다음날 돈을 잃어버렸던 친구가 자기 전과 책갈피에서 잃은 줄 알았던 돈을 찾아내어 누명은 벗었지만, 개구리 일로 마음에 남은 두려움과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어항은 작았지만 내겐 깊은 함정처럼 남아 있다.

누군가를 함정을 숨기고 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하는 것을 초등학교 5학년 그 때 나는 개구리 함정을 통해 배운 셈이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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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2)

우리를 뛰어 넘는 하나님의 생각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臨)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腹中)에 짓기 전(前)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胎)에서 나오기 전(前)에 너를 구별(區別)하였고 너를 열방(列邦)의 선지자(先知者)로 세웠노라 하시기로”(예레미야 1:4-5).

예레미야를 부르시며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를 오래 전부터 알았다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전부터.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을 알게 된 뒤부터 시작되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때부터 시작이 된다.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그의 어머니 태중에 생기기도 전부터 아셨다. 말을 할 줄 알고, 생각을 할 줄 알고, 하나님을 믿기 시작할 때부터가 아니었다.

그를 ‘복중’(腹中)에 짓기 전부터 아셨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이라 하심으로 그를 지은 것이, 생기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밝히신다. 그는 결코 사람에 의해 우연히 생긴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다.

‘복’(腹)이란 말은 ‘몸 육’(月=肉)에 ‘거듭 복’(㚆)을 짝지은 글자로 ‘배, 창자, 마음’의 뜻을 가지고 있다. ‘복안’(腹案)이란 말을 우리가 쓰거니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이르는 말이다. 한문의 의미로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지은 것은 그의 어머니 배 안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서부터 시작이 된 것이다.

예레미야가 알지도 못할 때부터 그를 지으신 것은 그를 통해 하실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그를 구별하신다. 쓰시기 전에, 쓰시기 위해 구별부터 하신다. ‘구별하다’는 말은 성서적인 의미로 ‘거룩하다’는 뜻이 된다. 하나님은 거룩한 사람을 부르셔서 쓰시는 것이 아니라, 부르신 자를 거룩하게 하셔서 쓰신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우신다. ‘열방’(列邦)은 ‘벌일 열’(列)에 ‘나라 방’(邦)을 합한 말로, ‘여러 나라’를 의미한다. 예레미야가 생기기도 전 하나님은 그를 통해 하실 일을 생각하고 계셨는데, 열방의 선지자로 쓰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아니라 열방의 선지자다.

권정생의 동화 <강아지똥>에서 달구지에서 떨어진 흙덩이가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낙심한 강아지똥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하느님은 쓸데없는 물건은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어.”

시골에서 지게를 만드는 농부도 얼렁뚱땅 만들지는 않는다. 산을 오르내릴 때마다 눈여겨 나무를 봐둔다. 지게를 만들 수 있는 나무를 찾아두는 것이다. 지게는 가지가 조금 벋어난 나무 두 개를 모아 만드는데,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은 것으로 짝을 맞춘다. 그래야 짐이 제대로 실리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무 한 쪽은 양나무여야 하고, 한 쪽은 음나무여야 한다. 양지건 음지건 같은 자리에서 자라는 나무를 쓰면 휘는 방향이 같아 지게로서의 역할을 할 수가 없게 된다. 양지에서 자란 나뭇가지 하나와 음지에서 자란 나뭇가지 하나씩을 골라 서로 대칭을 이루게 하며 지게를 만드는 것이다.

하물며 지게 하나를 만들 때도 이렇게 세밀하게 생각을 한 뒤 만드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허투루 하실까?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기억이 가 닿지 못할 만큼 오래 전부터, 예레미야의 생각이 감히 미치지 못할 만큼의 먼 미래까지, 예레미야로서는 감히 생각하지 못할 크고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예레미야를 부르셨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다.

훨씬,

무한히!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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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관의 노래 신학(3)

저 아이 좀 봐

홍순관 글 / 백창우 곡
- 2003년 만듦, ‘나처럼 사는 건 나밖에 없지’ 음반수록 -

 

디디담담 디디담담∼

저 새들 좀 봐
자유로이 하나님도 볼 수 있겠네
저 흐르는 강을 봐
너무 깊어 하나님도 건널 수 없겠네
저 나무를 봐
빛깔 고운 과일을 태어나게 하네

저 아이 좀 봐
이 세상을 넘어 가네
꽃과 말하며 신神과 말하며 생명을 말하며
쉬운 말 툭툭 던지며
쉽게도 넘어 가네
어지런 세상 참 쉽게도 넘어 가네

디디담담 디디담담∼

“저 강은 너무 깊어 하나님도 건널 수 없겠네!” 어느 날 아빠는 일기를 쓰다 잠든 딸, ‘소리’의 일기를 봅니다. 이 조그만 아이가 시골 목사로 사는 아빠가 힘들게 보인 겁니다. 집 앞에 내(川)가 흐르고 있는데 그걸 보고 강江으로 압니다. 아이의 일기에 흐르는 강과 아빠가 겹쳐진 겁니다.

단강이라는 곳에서 목회를 했던 한희철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농촌 목회이니 가난한 살림이었을 테지요. ‘소리’는 타고난 시인입니다. ‘강이 너무 깊다니’ 그래서 하나님도 ‘건널 수 없다니’ 기막힌 표현이요, 이입移入입니다. 어떤 시인도 가난한 목회 사정을 이보다 깔끔하고 깊이 있게 다루지는 못할 겁니다.

 

 

얼마 후, 신기하게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어린 아이들이 통했는지, 같은 시기에 이런 말을 동시에 들려줍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던 길, 여덟 살 다빈이가 아빠에게 말합니다.
“아빠, 새들은 날면서 하나님도 볼 수 있겠다. 그치?”
동생인 여섯 살 다솔이는 덩달아 호기심 많은 눈으로 열매열린 나무를 보며,
“아빠, 아빠, 저 과일은 나무가 태어나게 하지?” 그럽니다.

아둔한 세상에 급했나봅니다. 하늘의 언어들이 비처럼 나립니다. 주워 담기도 벅찹니다. 어김없이 아이들은 어른의 스승입니다. 어렵게 말을 꾸며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난 것을 그대로 말하니, ‘제 말’이 되고 ‘제 세상’이 됩니다.

쉬우니 통합니다. 누굴 속이려면 꾀를 부리고, 편법便法을 쓰니 어렵고 복잡해집니다.


예수는 죽음을 향해 정면으로 걸었습니다.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비뚤어진 세상에게 조금도 숨기지 않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성서를 다시 들여다보니 예수에게는 광야도 쉬웠고, 물 위도 쉬웠습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지도 않았고, 언덕에서 뛰어내리지도 않았고, 뭘 준다고 받지도 않았습니다. 가만히 있었습니다. 구주 예수의 완성은 그랬습니다. 싱겁도록 쉬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쉬운 것은 어려움을 넘어 있습니다. 가만히 서있는 나무가 그렇고, 흐르는 시간이 그렇습니다.

하늘의 길은 이 땅에서의 번민과 갈등도 쉽게 만드는 신비가 있습니다. 광야도 버티고, 물 위도 걸으며, 뱃머리에서도 잠들 수 있습니다.

어울려 사는 세상에 옳은 말하기 어렵고, 남들 가는 쉬운 길 버리기가 어렵습니다. 신자라면 마음과 영혼이 흐려지는 길은 걷지 말아야 합니다. 절로, 쉬운 길이 옳은 길이 되어야 합니다.

바늘구멍을 어떻게 쉽게 들어가며, 저 너머의 세상을 어떻게 가뿐히 건너갈 수 있을까요. 어린아이처럼 꽃과 말하고 하나님과 말하며 생명과 말하고 자연과 말한다면 천국은 쉬운 것이 되겠지요.

“저 아이를 좀 보라”는 것은, 아이가 바라보는 자연과 세상을 보라는 것이요, 아이 속에 숨어있는 신비한 언어를 들으라는 것이요, 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천국을 보라는 것입니다.

아이처럼 되라는 것은 순진하게 되라는 것만 아니요, 이 세상을 넘어 있으라는 말씀이겠지요. 복잡한 세상에 잡혀 살지 말고 훌훌 털어 쉽게 살라는 말씀일 겁니다.

홍순관/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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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1)

 

마지못해 구한 은총

 

 

옛날에 믿음이 매우 깊은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하늘에서도 그를 보고 몹시 기뻐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거룩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은 자신이 거룩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을 대하되 그의 과거를 잊어버리고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보았고, 사람의 겉모습에 머물지 않고 그의 깊은 곳을 살폈으며, 누구를 만나든 그를 용서했고 사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 날 천사가 그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에게 보내셨다. 무엇이든 청하기만 하면 당신에게 주어질 것이다. 치유의 능력을 받고 싶은가?”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하느님께서 친히 치유하시기를 바랍니다.”

 

죄인들을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고 싶은가?”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은 저의 일이 아닙니다. 그건 천사들의 일입니다.”

 

덕행의 모범이 되어 사람들이 본받고 싶게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관심의 중심이 될 테니까요.”

 

그러면 너는 무엇을 바라느냐?”

 

하느님의 은총을요. 은총만 있다면 저는 제가 바라는 모든 것을 가진 것입니다.”

 

안 된다. 어떤 기적을 원해야 한다. 안 그러면 한 가지를 억지로라도 떠맡겨야겠다.”

 

정 그러시다면 이걸 청하겠습니다. 저를 통해서 좋은 일들이 이루어지되, 제 자신이 알아차리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그래서 그 거룩한 사람의 그림자가 그의 뒤에 생길 때마다 그곳이 치유의 땅이 되도록 결정이 되었습니다. 그의 그림자가 생기는 곳마다 그가 그 그림자에 등을 돌리고 있다는 조건으로 병자들이 치유되고, 땅이 기름지게 되고, 샘들이 다시 솟고, 삶에 지친 이들의 얼굴에 기쁨이 감돌게 되었습니다.

 

류연복 판화

 

 

사람들은 성인을 통해 수많은 은총을 경험하게 되었지만 성인은 그것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는 잊힌 채 자기를 통해서 좋은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성인의 소원은 충분히 성취가 되었습니다.

 

마지못해 구하였던 마지막 은총, 자신을 통해 좋은 일들이 이루어지되 저 자신이 알아차리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는 요청이 더없이 귀하게 여겨집니다. 그 그윽한 경지에 우리는 언제쯤 어떻게 이를 수 있는 것일 지요? 있을 곳에 말없이 있어 모든 것이 넉넉해지는 복된 삶, 그 은총어린 삶을 꿈꿔봅니다.

 

어느 날의 기도

 

감나무 까치밥을 참새가 먹습니다

주님

하늘 양식으로 우릴 먹이십시오

 

 

한희철/성지교회 목사, 동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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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22)

하나님의 유머

강원도 단강에서 시작된 나의 첫 목회는 하나님의 유머를 생각하게 한다. ‘하나님을 크게 웃기려거든 너의 계획을 이야기하라고 했던. 

원주 근교에서 목회를 하고 있던 친구를 찾아간 것이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서울에서 성경공부를 하던 이들과 함께 청량리에서 저녁 기차를 타고 만종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성경공부도 하고, 다음날 동네 주민들에게 전도를 하고 돌아오는 12일의 일정이었다. 일정을 마치고 역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를 기다릴 때 너도 목회를 시작해야 하지 않니?” 친구는 내게 물었고, “기회가 주어지면 해야지.” 쉽게 대답을 했는데, 결국은 그 대답이 나를 단강으로 이끈 셈이었다.

단강으로 향하기 전 나는 나를 아프게 돌아보아야 했다. 처음부터 단강에서 목회를 시작하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친구가 나에게 추천한 교회는 신학 후배가 목회하고 있던, 부론면에 있는 다른 교회였다. 군목으로 떠나게 된 후배의 후임으로 나를 추천한 것이었다.

강원도로 목회를 떠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고향교회 장로님이 듣고서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너무 외진 곳으로 간다며, 수원 외곽에 개척교회를 시작할 수 있도록 주선하겠노라 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나를 추천한 곳에 다른 이를 소개하면 좋겠노라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면 한 사람이 더 목회를 할 기회를 갖게 되지 않겠냐 했지만, 사실 마음으로는 수원 쪽에서 목회를 시작하는 것이 더 좋게 여겨졌다. 강원도 구석진 곳으로 가는 것보다는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는 것이 더 좋게 여겨졌고, 그러면 서울에서 인도하고 있는 성경공부도 계속 이어갈 수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친구의 대답은 내 생각과 달랐다. 이미 나를 추천하였기에 내가 오지 않으면 자기도 신의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들었지만 친구는 가까운 곳에서 함께 목회를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는 고향교회 장로님의 제안을 송구함으로 물렸다. 그리고는 친구에게 내려가겠노라 연락을 했다. 맡고 있던 몇 가지 일들도 정리를 했다.

 

꿈에도 그리던 첫 목회를 드디어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아뿔싸,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강원도로 내려가기로 한 며칠 전,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내가 가기로 한 교회에 다른 교역자가 이미 이삿짐을 풀었다는 것이다.

이런 일도 다 있구나, 맥이 탁 풀렸다. 강원도행을 위해 포기했던 일들이 큰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그런 생각 끝 마음을 찔러오는 것이 있었는데, 나는 나를 아프게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시골교회로 가 준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 생각은 자책으로 이어졌다. 나는 아직도 시골에 있는 작은 교회조차 섬길 자격이 없는 것이구나, 마음이 참 아팠다.

어지럽고 힘든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무조건 길을 떠나 어디라도 떠돌아다닐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친구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단강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예배당이 없는 마을이라고 했다. 거기에서 시작하면 어떻겠냐는 이야기였다. 아프고 혼란스러운 마음에 친구의 이야기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작정 길을 나서기로 한 아침, 결정을 바꾸었다. 점점 또렷해지는 생각이 있었다. 단강은 꼭 가야 하는 곳이었다. 내가 가지 않으면 친구는 내게 평생 미안한 마음을 가질 터인데, 그것은 친구로서의 도리가 아니다 싶었다. 그 하나만으로도 단강은 외면해선 안 될 곳이었다. 무조건 가겠다고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서둘러 날을 정해 원주로 내려갔다. 단강마을을 보고 싶었다. 어떤 마을인지를 알아야 어떤 목회를 할지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단강이 어디쯤 있는지, 어떻게 가는 것인지, 어떤 모습인지를 보고 싶었다. 교제를 시작하고 결혼을 생각하고 있던 지금의 아내와 함께 원주행 시외버스를 탔다.

우리는 그 날 단강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돌아오고 말았다. 친구가 반대를 했는데, 단강으로 들어가는 버스는 하루에 네 대 밖에 없다고 했다. 단강에 들어가면 버스가 끊겨 돌아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또한 나중에 알았지만, 단강의 모습을 보면 어느 누구도 단강에 내려오지 않을 것이 뻔해 보였기에 아예 단강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결국은 창립예배를 드리던 날 단강에 첫 발을 디뎠다. 애지중지 사랑으로 곱게 키운 딸을 시골교회 전도사의 아내로 보내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그런데 딸을 데리고 살 사위는 첫 목회지로 가는 길조차 알지를 못하니 얼마나 혼란스러우셨을까? 창립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단강으로 가는 길을 물었을 때 나는 대답을 못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원주, 문막, 후용, 노림, 부론, 정산, 단강. 지금이야 손금처럼 훤하지만 당시로서는 처음 듣는 지명을 받아 적어 마을 이름을 약도처럼 전해드렸다. 그 때의 어색함과 송구함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렇게 단강에서의 목회는 시작이 되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땅으로 하나님은 나를 거칠게 이끄셨다. 그야말로 땅 끝’, 단강에서 보낸 15년의 시간은 내내 아릿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혹시 아릿한이라는 표현이 맞는가 싶어 사전을 찾으니, ‘조금 아린 느낌이 들다고 풀고 있다. 있는 그대로를 말하자면 조금이 아니라 많이아리다. 단강의 시간은 퇴색한 흑백사진처럼 여겨지다가도 막상 떠올리면 울컥 뜨거움으로 되살아난다.

아무 준비 없이 찾아간 단강에서 한 일 중에는 단강에서 일어난 일들을 적는 것이 있었다. 탄광촌에서 목회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고흐가 목회 대신 그림을 택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가갔던 것처럼, 껍질처럼 남은 그 작고 외진 마을에서 무얼 해야 좋을지 모르는 막막함을 나는 그렇게 견디어냈다.

그 때 적은 글들이 그동안 몇 권의 책으로 묶여 나오기도 했고, <낮은 울타리>에 연재되기도 했다. 몇 안 되는 교우들과 마을 분들과 나눠보던 소식지를 나중에는 칠백 명 정도 나눠보게도 되었다.

지렁이 글씨로 쓴 글을 아내가 옮겨 적었다. 오랫동안 단강에서 쓴 글을 읽지 않았다. 왜 그럴까, 읽을라치면 또다시 마음이 아프고 미어지곤 했다. 오랫동안 구석진 곳에 처박아두었을 뿐이었다.

문득 그 글을 지금 다시 읽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빛깔로,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오래 전 흘러간 물을 되돌리려는 어리석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 때 적은 글은 그 땅에 살 때 의미를 가질 뿐, 그곳을 떠나 이만큼 세월이 지난 지금은 더더욱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옛 기억에 마음을 기대려는 약한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주저함으로 옛 글을 꺼내드는 것은 그 때의 글 안에는 여전히 땀과 눈물이 남아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땅 끝에 그래도 발붙여 서려던 안간힘이 담겨 있다. 시절과 상황은 다르지만 여전히 땅 끝에 서야 하는 것은 우리의 숙제 아닐까 싶다.

지금도 여전히 그리운 단강,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마음의 고향으로 남은 그 때 그 시절을 통해 끝내 외면할 수 없는 땅 끝에 어떻게 서야 하는지 다시 한 번 발끝을 살피고 싶다. 여전히 나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유머 앞에 내 삶을 맡기면서.

한희철/성지교회 목사,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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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관의 노래 신학(1)

나처럼 사는 건

 

한희철, 홍순관 글 / 한경수 곡

(1993년 만듦, ‘나처럼 사는 건 나밖에 없지음반수록)

 

 

들의 꽃이

산의 나무가 가르쳐줬어요.

그 흔한 꽃이 산의 나무가

가르쳐줬어요.

나처럼 사는 건 나밖에 없다고

 

강아지풀도 흔들리고 있어요 바람에 음~

 

저 긴 강이

넓은 바다가 가르쳐 줬어요

세월의 강이 침묵의 바다가

가르쳐 줬어요

나처럼 사는 건 나밖에 없다고

 

강아지풀도 흔들리고 있어요 바람에 음~

 

 

 

 

주어진 삶을 산다는 것은 고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것은 매여 있다거나, 한정된 장소, 정해진 운명, 일상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요, 창조의 숨을 간직한 채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주 작은 생명체들이 세상이 모르는 사이, 땅과 물을 건강하게 만들고 있지요. 조그만 생명체들이 제 숨을 쉬지 않게 된다면, 땅도 물도 망가지고 이내 썩게 됩니다.

 

생각하면, 이 지구상에서 제 숨을 쉬지 않고 사는 생명체는 인간밖에 없는듯합니다. 착취와 약탈과 파괴를 일상으로 사는 인간은 잔인하고 포악한 짓에 빠져 자신들이 하는 짓을 도무지 모르고 사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어떤 나쁜 무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산업사회에 사는 모두를 말합니다. 심각한 문제는 모른다는 것에 있습니다.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망각과 폭력의 중독성에 있습니다.

 

폭력을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것으로 이해하기 쉬우나, 인간의 법과 제도와 룰 속에서도 얼마든지 약자에게 폭력적일 수 있습니다. ‘무한 경쟁이라는 너무나 폭력적인 시스템은 언뜻, 마치 민주주의나 자유를 연상케 합니다. 가리지 말고, 층을 두지 말고 마음대로 경쟁을 하라는 것이니까요. 예컨대 대학생과 초등학생의 대결이 이치에 맞는 경쟁일 리가 없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에 겨뤄보라면 공정한 경쟁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강대국과 약소국이 자본을 무기로 하는 경쟁은 무한폭력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는 제 숨더 잘 쉬려고 남의 숨마저 교묘히 빼앗아 쉬는 잔인한 구도입니다.

 

제 숨 쉬지 않는 세상은 평화가 깨진 세상입니다. 더불어 살라는 창조의 숨이 멎어지면 인간은 이 지구상에서 살 수 없게 되겠지요. 그것은 창조를 행하신 그 분의 뜻이 아니요, 인간의 문명으로 인한 참담한 결과일 테지요. 그것은 자본주의의 스포츠카를 타고 끝 간 데 없이 치닫는 어리석음의 끝일 테지요. 대량생산과 마구잡이 소비로 이어지는 쓰레기 만들기와, 과학기술의 오만함으로 빚어지는 유전자 조작은 지구와 인류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갑니다.

 

발전과 혜택이라는 유혹의 문패를 걸어놓고 온갖 형태의 스피드를 추구하지만, 대형마켓과 백화점에선 물건과 사람으로, 고속도로에서는 각종 자동차들로 꽉꽉 막혀 꼼짝도 못하는 우스꽝스런 장면을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나게 됩니다. 온갖 오물을 흘려보내며 썩을 시간도 주지 않는 잔인한 횡포는 인간만이 행하는 물에 대한 야만이요, 땅에 대한 만행입니다.

 

흙으로 지어져 그 분의 생기()를 받아 살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갈 존재인 인간이 어떤 인생을 살아야할지는 조금만 묵상을 해봐도 알 일입니다. 끝내 종교의 행위만 드러내고, 만드신(주신) 이의 목적을 잃는다면, 그 결과는 생각보다 훨씬 참담할 것임이 분명합니다.

 

오늘도, 들의 꽃이 산의 나무가 말합니다. 세월의 강이 침묵의 바다가 들려줍니다. 제 숨 쉬고 살라고 합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자연만물이 (아직은) 입을 완전히 다물지는 않았으니 말입니다.

 

1991년 즈음입니다. 집으로 <얘기마을>이라는 쪽지 글이 꼬박꼬박 배달되었습니다.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에 있는 단강교회가 매주 발행하는 주보였습니다. 맨 앞장에는 늘 시가 있었고 예배순서와 성도들의 서툰 기도 그리고 뒷장에는 교회와 마을소식까지, 손으로 쓴 글이 빼곡히 실려 있었지요. 삐뚤고 정감어린 한희철 목사의 글씨는 검소하고도 알뜰한 살림 같았습니다. 단강마을 사람들의 가감 없고 꾸밈없는 일기였습니다. 목양일념牧羊一念, 양떼를 살피는 선한 목자의 연민이 담긴 애가哀歌였습니다. 눈물은 글씨를 자주 젖게 하였습니다. 거기 앞에 실렸던 이 글(1절 노랫말)은 단아하고 깔끔하여 단숨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서정적이면서 회화적이었고, 고요하면서 풍요로웠습니다.

 

한경수의 솜씨로 만들어진 피아노 선율은 바람이 불고 물결이 일고 들판이 일렁입니다. 음악이 그림이 됩니다. 높낮이의 폭이 적고 몰아치는 대목도 없으며 절정도 없는, 게다가 다소 긴 이 노래는 그만그만한 인생들을 상징하지만 잠잠히 삶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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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1)

 

 예레미야 읽기를 시작하며

 

언젠가 주보 표지에 예레미야를 만나면이라는 글을 실은 적이 있다.

 

그럴 수 있다면 언제고 예레미야를 만나 실컷 울리라

여전히 젖어 있는 그의 두 눈을 보면 왈칵 눈물이 솟으리라

당신께는 주님의 말씀 백성들에겐 귀찮고 하찮은 말

그 사이에 서서 울먹울먹 하던

다시는 주님 말씀 전하지 않으리라 다짐할 때마다

뼛속을 따라 심장이 타들어가던

당신의 뒷모습엔 늘 눈물이 어렸노라고

겨울밤 인우재에서 듣던 낙숫물처럼

어둠 속 떨구던 당신의 눈물 소리 쟁쟁했노라고

애써 적은 주님의 말씀 서걱서걱 왕의 칼에 베어질 때

내 마음도 베였노라고

마침내 당신 웅덩이에 던져졌을 때 나도 갇혔고

구스 사람 에벳멜렉이 달아 내린 헝겊쪼가리와 낡은 옷에

이게 설마 하나님의 손일까

나도 덩달아 울었노라고

언제고 예레미야를 만나면 함께 울리라

당신만큼은 아니어도 당신으로 많이 아팠노라고

그만큼 고마웠노라고

 

왜 그럴까, 예레미야를 생각하면 어떤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눈물의 근원에서 과히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은 감정이나 정서의 웅덩이가 얼핏 잇닿아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괜히 눈물겹고 괜히 가슴이 먹먹해지는, 예레미야를 읽다보면 자주 그런 마음으로 멈춰 서곤 한다.

 

그 예레미야를 다시 한 번 읽어나가기로 한다. 성경을 펼치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손가락으로 한 자 한 자 더듬거리는 심정으로 읽기로 한다. 대단하거나 특별한 것을 찾아내려는 욕심을 버리기로 한다. 다만 정직한 마음으로 읽도록, 예레미야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심정으로 읽기로 한다.

 

성경은 일부러 <국한문개역한글판>을 택했다. 아들이 신학교에 들어가는 것을 고맙고 대견하게 여긴 부모님이 사 준 책이 <국한문개역한글판> 성경이었다. 세로로 쓰인 것도 그렇고 순간순간 만나게 되는 한문도 낯설게 여겨졌지만, 그렇기 때문에 천천히 읽을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있다. 모르는 한자가 나오면 다른 성경을 찾아 비교를 하든지, 사전을 찾아야 했는데 그 또한 유익한 경험이었다.

 

<국한문개역한글판> 성경 또한 한 시대의 산물, 한문이 익숙했던 당시의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어떻게 말씀을 이해했을 지를 살피는 계기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세상은 어지럽고 어수선하다. 세상이 이렇게 혼란스러울 때 하나님의 말씀과 백성 사이에 서서 속이 타들어가던 사람 예레미야는 이 시대를 어떤 걸음으로 걸어가야 할지를 넌지시 일러줄 것이다. 터가 흔들리는 이 시대,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하나님의 방법(1:1-3)

 

"베냐민 땅 아나돗의 祭司長 中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아몬의 아들 유다 요시야의 다스린지 十三年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하였고 요시야의 아들 유다여호야김 時代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 시드기야의 第 十一年 末까지 하니라 이 해 五月에 예루살렘이 사로 잡히니라."

 

예레미야는 주전 587년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에 부름을 받아 수십 년 동안 예언자로 활동을 한다. 나라가 가장 흔들리던 때였다. 바벨론의 침공을 비롯한 정치적인 변혁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때였으니 격동기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산 셈이다. 바람 앞에 놓인 촛불처럼 흔들리던 시대, 하나님이 하신 일은 하나님의 사람을 택하는 것이었다. 누군가를 택하여 당신의 뜻을 말하게 하였다. 중심과 방향을 잃어버렸을 때 하나님은 한 사람을 택하고, 말씀을 통해 중심과 방향을 찾게 하신다.

 

예레미야는 아나돗의 제사장 가문 출신인데, 아나돗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5km쯤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이스라엘의 중심 예루살렘이 사로잡혔을 때, 하나님은 작은 마을에 사는 한 사람을 사로잡으신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눈여겨보고 계시다.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가 누구지, 하는 이를 눈여겨보신다.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을 눈여겨보시고 그를 중심으로 불러내신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방법과 다르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우리가 일하는 방식과 다르다. 결국 인간의 생각에 갇히면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할 수도 없고 따를 수도 없게 된다

 

                                                                                                                                 한희철/성지교회 목사,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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