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나무처럼 느렸으면 좋겠어

 

 

공포정치가, 무자비한 폭력이, 교묘한 억압과 악마적 술수가 난무하는 시대다. 그렇다고 모두가 거리에 나가 손을 들고 몸을 쓰며 싸울 수는 없다. 그러나 지은이는 숨죽이게 하는 세상에 내 숨을 떳떳하고 고요하게 쉬는 것이 아름다운 저항임을 제 숨을 포기하지 않을 삶을 선택할 수는 있음을 보여준다. 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면 숨 쉴 자격을 잃는 것이다. 노랫말 곳곳에 자연과 더불어 쉬지 못하는 인간의 숨은 창조의 동산을 떠난 폭력의 숨이며 인간다운 숨을 쉬는 것은, 하늘의 숨을 민감하게 느끼고 무딘 양심을 세밀하게 하며 지구의 수준을 아프게 지켜보며 예언자다운 자세를 가지는 것임을 역설한다.

 

 

 

 

 

김기석 목사(청파교회)는 그의 글에 대해 이렇게 덧붙인다.

 

작고 사소한 것들에 다정한 눈길을 보내고,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고, 자연과의 접촉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그렇기에 자연에 대한 깊은 외경심을 품고 있는 홍순관의 노랫말에 담긴 영적 지향은 자유이다. 그의 낮고 슬픈 목소리가 우리 영혼을 고요하게 만든다. 그리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인다. 단순하고 소박한 언어 속에 담긴 깊은 뜻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비종교적인 언어를 통해 가장 깊은 비의의 세계를 열어 보인다. 그의 시선은 예수를 닮았다.”

 

<대지의 눈물>을 듣고 또 들으면서 빼앗긴 소녀들의 한 서린 날숨이, 그 숨을 아프게 들이마시고 다시 위로의 날숨으로 토해낸 노래꾼의 노래가, 내 안으로 낯설게들어와 내 마음을, 내 영혼을 깊이 그리고 아프게 헤집는다.”고 토로하는 백소영 교수(이화여대)보물을 발견한 기쁨으로 논두렁 한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생기 있게 나물을 캤을 그녀들이 환영처럼 눈앞에 펼쳐진다.”고 읊조린다.

 

쌀 한 톨에서 우주의 무게를 보는 사람의 슬픔을 간파한 김영봉 목사(와싱톤한인교회)는 홍순관의 슬픔의 정체를 이렇게 묘사한다. ”작은 생명의 고통을 보면서 온 우주의 신음을 보는 슬픔이며, 어린 소녀의 눈물에서 인류의 고난을 보는 슬픔이다. 한 사람의 불의에서 온 세상의 죄악을 보는 슬픔이며, 아침 뉴스에서 인류 역사를 보는 슬픔이다. 온 우주에 가득한 하나님의 흥겨운 춤에 눈 감고 죽음의 광란에 도취해 있는 인류를 보는 슬픔이다. 그 슬픔이 오늘도 그를 흔들어 깨워 기타를 치고 노래하게 한다. 슬픔만이 슬픔을 치유할 수 있으므로!“

 

사람을 향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향한다는 연민의 정에 있음을 강조하는 저자는 일상의 노래를 부르려고 많은 것을 버렸다. 대중보다는 소외된 사람들, 생색보다는 뜻이었다. 하여 이 책은 성서와 예수를 노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 시대에 불러야 하는 노래는 어떤 것인지 오롯이 담고 있다.

 

 

 

 

이 책의 구성

 

저자의 노랫말에 붙인 내면의 글 22꼭지

양화진선임연구원 지강유철과의 속 깊은 인터뷰

저자의 글에 대한 김기석, 김영봉 목사와 백소영 교수의 착하고 슬프면서 따뜻한 글

 

 

지은이 홍순관은

 

10살에 서예를 배웠고 대학에선 조소를 전공했다. 11살에 화실과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기타를 쳤으며 중학교 때 부산콩쿠르에서 1등을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고, 고아원 양로원을 찾아가며 공연을 했다. 대학 때는 부산 대구지역 각 대학축제에 불려 다니며 노래를 했다. 그동안 무용무대미술, 뮤지컬배우, 라디오와 TV방송진행, 공연연출, 기획, 가스펠, 동요, 국악노래, 민중가요, 시노래 등 매우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며 활동했다. 대추리, 용산참사현장, 강정마을, 팽목항, 광화문광장, 필리핀빈민촌, 베트남학살현장, 오키나와미군기지 등 아픈 현장에서부터 초···일반대학과 신학대학 그리고 관공서, , 시민단체에서 강의와 공연을 했다. 일본군성노예, 결식학생, 노인, 노숙자, 장애인, 노동자 등 국내문제와 기후온난화, 전쟁 등 국제문제에 이르기까지 지구촌이 맞닥뜨린 예민하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며 기획 및 초청 공연을 했다. 또한 광장으로 불리는 길거리공연에서부터 세종문화회관, 예술의 전당, KBS, 아르코예술극장, 뉴욕링컨센터에 이르는 무대에서 현장성과 예술성을 버리지 않았다. 세 권의 책과 10장의 음반을 발표했다.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이사와 기독교환경운동연대 홍보대사로 일하고 있다. 현재 평화센터를 지으려는 꿈을 가지고 새 음반 <시간은 나무처럼 느렸으면 좋겠어>를 녹음 중이다.

 

목차

 

들어가는 말 | 독자에게 띄우는 편지 셋 | 홍순관 4

 

새의 날개

 

새의 날개 12

천국의 춤 17

나무 21

은혜의 강가로 28

십자가 32

 

신의 정원

 

 

어떤 바람 38

산 밑으로 44

여행 51

민들레 날고 56

성모 형 65

 

나처럼 사는 건 나밖에 없지

 

나처럼 사는 건 70

저 아이 좀 봐 75

벽 없이 80

바람의 말 82

나는 내 숨을 쉰다 85

깊은 인생 90

푸른 춤 95

대지의 눈물 98

 

춤추는 평화

 

소리 104

낯선 땅 여기는 내 고향 107

쌀 한 톨의 무게 111

또 다른 숲을 시작하세요 115

 

시간은 나무처럼 느렸으면 좋겠어

 

내가 드린 기도로 아침이 오진 않는다 122

큰 나무만으론 산을 이룰 수 없네 126

평화는 아침에 피어난 꽃처럼 오리니 129

지강유철의 선택과 옹호 | 부박(浮薄)한 시대에 부는 바람처럼 133

낯선 땅을 고향으로 바꾸기 | 김기석 229

슬픔으로 슬픔을 치유하다 | 김영봉 248

노래로 나타나신 하나님 | 백소영 259

 

 

 

밑줄긋기

 

, ‘이란 얼마나 좋은 것인가. ‘은 곧, 목숨이다. 이토록 아름답고 귀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깨끗한 숨을 쉴수 있는 맑은 공기가 없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위로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고백은 계절의 풍요에서 그치는 감상이 아니요, 공멸로 떨어지는 지구를 향한 절실한 연민이요, 통회다.

 

                                                                                              <나는 내 숨을 쉰다> 중에서

 

 

하나님과 하나 된 교회는 얼마나 아름다운 춤을 출까. 이웃과 하나가 된 교회는 얼마나 든든한 춤을 출까. 말씀과 하나 된 신자는 얼마나 거룩한 춤을 출까. 하나님과 하나 된 인간은 얼마나 어른스러운 춤을 출까. 자유의 춤이요, 천국의 춤이다.

 

<천국의 춤> 중에서

 

나무가 노래고, 냇물이 노래다. 큰 산이 노래며 바다가 노래다. 만물이 노래요, 이 세상 사람들이 노래다. 내 눈 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들이 노래다. 흔들리는 나뭇잎보다 더한 춤이 어디 있을 것이요, 바람소리보다 더한 노래가 어디 있겠는가.

 

<나무> 중에서

 

은혜 속에 산다는 것은 그 분이 필요할 때 수도꼭지처럼 틀었다 잠그는 편리함에 있지 않다. 매일을 그 분의 강물에 들어가 사는 삶이다.

 

<은혜의 강가로> 중에서

 

이 부박한 시대를 건너가는 바람은 어떤 바람이 될까? 역사와 시대의 쭉정이는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안다. 오래 걸리지만 확연히 드러난다. 연민과 진심으로 흐르는 눈물의 코드나 리듬은 국경과 시대를 넘어 다르지 않다. 이 눈물이 이 시대를 지나갔으면 좋겠다. 일 할 밖에, 농부처럼 입 다물고 허리 굽혀 일 할 밖에. , 방금 나를 지나간 바람은 어떤 바람이 됐을까?

 

<어떤 바람> 중에서

 

<산 밑으로>는 정을 떼는 슬픔이 아니요, 있던 곳(익숙한 곳)을 떠나 저 아래 땅(낯선 곳)에 사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러 가는 학생의 발걸음이다.

 

<산 밑으로> 중에서

 

바다를 건너간 조선민들레. 흙 한줌이면 뿌리를 내리는 민들레. 흰색 갓털처럼 가벼운 삶을 사신 예수. 바람은 성령이요, 뿌리는 말씀이다. 민들레 날고 예수가 날고~ 민들레 날고 자유가 날고~!

 

<민들레 날고> 중에서

 

오늘도, 들의 꽃이 산의 나무가 말한다. 세월의 강이 침묵의 바다가 인류의 귀에 들려준다. 제 숨 쉬며 살라고 말한다. 강아지풀이 바람에 흔들린다. 다행이다. 자연만물이 (아직은)입을 완전히 다물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나처럼 사는 건> 중에서

 

 

저 아이를 좀 보라는 것은, 아이가 바라보는 자연과 세상을 보라는 것이요, 아이 속에 숨어있는 신비한 언어를 들으라는 것이요, 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천국을 보라는 것이다.

 

 <저 아이 좀 봐> 중에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고통과 역사에서 맞닥뜨리는 분노를 느낄 수 없다면 이미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통증을 모르니 병이 깊어질 것이요, 신경세포는 무디어져 죽음에 이를 것이다. 고통에 중독된다면 온전한 삶은 포기해야 한다. 고통과 깊은 번민을 알아차리는 것이 도리어 살 수 있는 길이다. 국가는 백성의 소리를 들어야 하며, 지구는 우주의 눈물을 보아야 한다.

 

<깊은 인생> 중에서

 

대지의 눈물은 어쩌면 평화. 유머란 무릇 실컷 울고 난 후에 머금은 미소를 말하는 것이니, 눈물은 평화로 건너가는 강이다. 결국 이 세상은 눈물이 구원할 것이다. 깊은 연민과 가없는 자비를 품은 눈물 없이는 결코 구원은 없을 것이다.

 

<대지의 눈물> 중에서

 

개미가 지나가는 소리,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는 사람의 귀에 들리지 않는다. 너무 작고 너무 큰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인간은 그래서 어리석을 수 있다. 그러나 오늘도 꽃은 열리고 나무는 자란다. 역사는 흐르고 성령은 움직이신다. 마음과 영혼의 귀가 열렸을 때, 우주를 운행하시는 그 분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소리> 중에서

 

내가 드린 기도로 아침이 오진 않는다. 내가 드린 기도로 해가 뜨진 않는다. 내가 드리는 기도는 노동처럼 오래 걸리니 무심히 기다릴 뿐이다. 이 세상 가장 짙은 그늘 속으로 말없이 들어가는 일인 것을 알 뿐이다. 내가 드리는 기도는 노을처럼 아침을 기다릴 뿐이다.

 

-<내가 드린 기도로 아침이 오진 않는다> 중에서

 

평화를 살지 않으면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무릇 주름진 얼굴과 거친 손이 없다면 평화는 없을 터, 우리의 흘린 눈물 없이 평화는 없다. 겨울을 지나간 시간 없이 평화는 오지 않을 것이다.

 

 <평화는 아침에 피어난 꽃처럼 오리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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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관의 노래 신학(5)

 

나는 내 숨을 쉰다

홍순관 글 / 백창우 곡

- 2002년 만듦, ‘나처럼 사는 건 나밖에 없지음반수록 -

 

 

숨 쉰다 숨을 쉰다

꽃은 꽃 숨을 쉬고

나무는 나무 숨을 쉰다

 

숨 쉰다 숨을 쉰다

아침은 아침 숨을 쉬고

저녁은 저녁 숨을 쉰다

나는 내 숨을 신다 내 숨을

 

숨 쉰다 숨을 쉰다

별은 별 숨을 쉬고

해는 해 숨을 쉰다

 

숨 쉰다 숨을 쉰다

바람은 지나가는 숨을 쉬고

신은 침묵의 숨을 쉰다

나는 내 숨을 쉰다 내 숨을

 

은 인간에겐 영원한 테마요, 화두입니다. 숨처럼 강하고 고운 것도 없습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강요받으려고 태어난 게 아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숨 쉴 것이다. 누가 강한지는 두고 보도록 하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시민 불복종에 나오는 글입니다. 사람뿐 아니라, ‘제 숨을 쉬며 사는 생명이 가장 평화요, 가장 강한 것입니다. 제 숨을 쉬어야 건강하고 당당한 것이니까요 

어른 때문에 아이가, 학교 때문에 학생이, 남자 때문에 여자가, 정부 때문에 백성이, 강대국가 때문에 약소국가가 제 숨을 쉬지 못한다면 평화는 아닙니다. 과거 때문에 지금이, 지금 우리가 산 것 때문에 내일(미래), 사람 때문에 자연이 제 숨을 쉬지 못한다면 평화는 어렵습니다.

자유롭게 살기 위해 굳세게 서라는 성경의 말씀(갈라디아서 5:1), ‘은 쉬운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숨보다 자유로운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숨을 쉬기 위해서는 다른 이도 숨을 쉬어야 됩니다. 나의 숨과 너의 숨은 따로가 아닙니다.

종교의 숨이 거짓이 되면 세상은 깊은 상처를 받고 심각한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신자의 숨이 가식假飾이 되면 이웃은 멀어지고 하나님은 세상에 통로를 그만큼 잃어버리게 됩니다.

나의 프로필은 84해프닝(happening 또는, performance art)으로 시작합니다. 그 행위미술의 제목은 이용하는 것과 이용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당돌한 미대생의 행위는 무대와 객석, 모두에게 낯선 것이었습니다.

당시 대학가에 즐비하게 들어서있던 복사 가게를 연상하며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한 집 걸러 보이던 복사 가게는 80년대 초. ‘무엇이든 복사하여 살던 시대의 상징 같은 것이었습니다.

주제는 확연합니다. 그것은 제 숨(자기 색깔)’없이 만들어 내놓는 미술, 노래, 광고, , 건축, 드라마, 영화를 보며 천박한 카피를 비판했던 것이지요. 80년대 즈음, 유럽 쪽에 유학 갔던 학생들에게 특이한 아르바이트가 있었답니다. 그 나라에서 방영되는 CF(광고)를 녹화(복사)하여 그 일을 부탁한 방송국(혹은, PD)에 보내는 일입니다.

베껴먹는 일이 예사가 되면, 거짓은 중독이 됩니다. 대학에서는 베낀 논문이 통과되고, 예술가들은 카피를 심지어 기술로 여기게 됩니다. 창작을 뒤로하게 되지요. 숨처럼 깊은 번민은 사라집니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체면도 사라집니다. 그런 세상은 내 것 네 것이 없고, 국경이 없어지고, 경계가 사라지고, 소유가 무의미해지는 천국이 아니라, 거짓과 음모와 술수가 설치는 이성을 잃은 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제 숨이란, 진지한 삶과 성실한 일상에서 우러나오는 산제사같은 겁니다. 정직하게 일하고 땀 흘리는 삶입니다.

, ‘이란 얼마나 좋은 것인가요. ‘은 곧, 목숨입니다. 이토록 아름답고 귀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요. 깨끗한 숨을 쉴 수 있는 맑은 공기가 없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이런 고백은 계절의 풍요에서 그치는 감상이 아니요, 시인의 감성도 아닌 공멸로 떨어지는 지구를 향한 절실한 연민이요, 통회痛悔입니다.

꽃이 시들면 꽃이 진다!”고 하고, 사람도 목숨이 다하면 숨진다!’고 합니다. 숨과 더불어 함께하지 못하고 지는 것입니다. 자연이 숨지면 사람도 숨집니다. 나무가 숨을 쉬어야 사람도 숨을 쉽니다. 우주가 숨을 쉬어야 지구도 자연도 사람도 숨 쉴 수 있습니다.

묘혈墓穴로 빠져드는 문명을 바라보면서도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류의 문명이 무덤으로 바뀌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바람은 지나가는 숨을 쉬고 하나님은 침묵의 숨을 쉬기 때문일까요?

 

홍순관/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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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관의 노래 신학(4)

쌀 한 톨의 무게
홍순관 글 / 신현정 곡
(2008년 만듦,  ‘춤추는 평화’ 음반수록)

 


 
쌀 한 톨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무게를 잰다
바람과 천둥과 비와 햇살과
외로운 별 빛도 그 안에 스몄네
농부의 새벽도 그 안에 숨었네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었네
버려진 쌀 한 톨 우주의 무게를
쌀 한 톨의 무게를 재어본다
세상의 노래가 그 안에 울리네

쌀 한 톨의 무게는 생명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평화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농부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세월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우주의 무게
      
이 곡은 처음에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추모음악회에 초청이 되어 쓴 노랫말입니다. <나락 한 알속의 우주> 이야기를 들려주신 분을 추모하는 공연이었으니 마땅히 나올 노랫말입니다.

(출처: Toshiyuki IMAI (http://www.flickr.com/photos/matsuyuki)

 

이 노래가 실린 <춤추는 평화> 음반이 나온 후, 국회의사당 안에서 처음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2008년에 있었던 ‘사형제 폐지국가기념식’이라는 생소한 행사였습니다. 한 나라에서 10년 동안 사형 집행이 없었으면 자동적으로 사형제폐지국가가 되는 국제적 관례가 있다고 합니다. 97년 YS정부 때, 27명의 처형자가 있었고, 그 후로는 단 한 번도 사형집행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MB정부에서 대법원이 내놓은 결과는 사형제 ‘유지’였습니다. 국제단체나 전문가들은 이 의아한 판단에 계속해서 반대를 표명하고 한국정부를 설득하고 있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3년 동안 현장을 나가 노래를 불렀습니다. 생명을 죽일 권리는 어떤 이유에서도 없다는 것이 그 까닭입니다. 게다가 ‘사형제’로 범죄가 없어지기도 어렵거니와, 더욱이 인간의 갱신은 어렵게 됩니다. 무엇보다 죄 없는 이들의 억울한 죽음이 있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입니다.

그 날, 국회에 들어가 정치인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남한의 무게는 얼마나 됩니까? 북한의 무게는요? 쌀 한 톨의 무게는 얼마나 됩니까?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무게를 알았다면, 이렇게 정치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무게를 헤아려 정치해 주십시오.”

이런 장면은 노래꾼의 보람이기도 합니다. 마이크를 잡고 무대에 섰을 때에는 그만한 자유는 주어집니다. 서툰 노래이지만 그들의 가슴에 남기를 바라며 열심히 불렀습니다.
노래가 끝나고 행사가 끝나면 또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그 분은 살아계셔서 언젠가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시리라 믿는 마음뿐이었습니다.

나무 한 그루나 산이나, 냇물이나 바다나, 미국이나 이라크나, 아프리카나 유럽이나, 남한이나 북한이나, 너나 나나 어차피 하나의 무게입니다. 하나뿐인 이 둥근 지구에 모두 붙어살기 때문입니다.

남극에 얼음이 녹아도 걱정이요, 몽골에 사막이 늘어나도 걱정이요, 아마존에 밀림이 줄어도 걱정인 것은 지구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무게입니다. 그래서 이웃은 내 몸입니다. 내 몸이니 사랑하는 겁니다.
 
풍요가 넘치는 이 시대에 쌀 한 톨의 무게를 재어보기를 빌 뿐입니다.

홍순관/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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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인문학 산책(3)

“미생(未生)을 위한 철학”

 

비정규직의 모멸감과 격차사회의 모순을 드러낸 드라마 <미생(未生)>은 끝났지만, 현실의 미생은 여전히 미생인 채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정도일까? 이 드라마를 패러디한 방송 프로의 이름은 <미생물(微生物)>이었다. 아예 육안(肉眼)으로는 보이지도 않는 존재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시인 이문재의 <어떤 경우>라는 시의 전문이다. 어쩌면 이리도 고마운 시가 있는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한 “나”라는 존재가, 어느 한 사람에게는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는 깨달음은 누가 뭐래도 뜨거운 사랑이다. 그 “나”는 우리 모두다. 이걸 모르거나 무시하면, 우리는 누군가를 그저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쉽게 보거나 짓밟던지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모독한다. 그건 누군가에게는 세상 전부인 존재를 사소하게 여기거나 그 존재감을 소멸시키는 것이 된다.

그렇지 않아도 장일순 선생이 살아생전에 쌀 한 톨 앞에 담긴 무게를 일깨웠을 때, 사람들은 그 안에도 웅장한 우주가 움직이고 있다는 걸 보게 되었다. 가수 홍순관이 지은 “쌀 한 톨의 무게”는 그런 눈뜸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쌀 한 톨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무게를 잰다
바람과 천둥과 비와 햇살과
외로운 별빛도 그 안에 스몄네
농부의 새벽도 그 안에 숨었네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었네

버려진 쌀 한 톨 우주의 무게를
쌀 한 톨의 무게를 재어본다
세상의 노래가 그 안에 울리네
쌀 한 톨의 무게는 생명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평화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농부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세월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우주의 무게

그런데 쌀 한 톨과 사람을 같은 저울추에 올려놓고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 무게는 아무래도 다를 듯하다. 담겨진 우주가 각기 다르기 때문일까? 하나는 태양계이고 다른 하나는 은하계? 물론 그건 아니다. 사람은 쌀 한 톨 안에도 우주가 스며들도록 햇살과 별빛 못지않게 한 몫을 하기 때문이다. 쌀 한 톨은 우주창조의 “결과물”이라고 한다면, 사람은 거듭 매 순간 창조되는 우주의 한 “주역”인 셈이다. 그 쌀 한 톨이 이 주역을 길러내는 힘이 되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할 바이나, 사람의 노고는 쌀 한 톨의 터이다.

문제는 인간이 그런 주역에게 주어졌던 본래의 기능을 오늘날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주 이야기》를 쓴 토마스 베리 신부는 이렇게 그 상실을 짚어낸다.

“각기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은 자연세계의 소리를 듣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인간은 더 이상 산이나 계곡, 강이나 바다, 태양, 달, 별들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었다. 인간은 더 이상 동물들과 의사소통하는 경험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일몰과 일출의 언어는 영혼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일어나는 변환이었다.”

“동창(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라는 우리의 옛 시조는, 태양과 비조(飛鳥)의 세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노을은 또 어떤가?

저녁노을 붉은 하늘 누군가 할퀸 자국
하느님 나라에도 얼굴 붉힐 일 있는지요?
슬픈 일 속상한 일 하 그리 많은지요?
나사는 세상엔 답답한 일 많고 많기에 …

시인 나태주의 <노을>이란 시다. 석양의 붉은 빛 속에서, 하루를 마치고 이리 저리 상처받아 고단해진 인간사를 본다. 저물어가는 노을에서 여유로운 낭만만 보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일몰과 일출의 언어는 우리의 삶에서 어느 새 사라져 가고 있다.

이렇게 살아가다보니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토마스 베리 신부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지구를 산업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성취되는 경이로운 세계, 그것을 향한 진보는 결국 우주의 모든 존재를 가능케 했던 진화과정을 파괴시킨다.”

황폐해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생명의 원천을 고갈시키고 있다는 뜻이다. 왜 그런가?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이 서로 분리되어 존재한 결과다. 이런 현실에서 자연이 피 흘리는 소리와 인간이 치러내는 고통을 느낄 수 있겠는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일체감, 인간과 우주와의 일체감은 인간이 인간되는 근본이다. 그렇지 못하면, 인간이 매일 호흡하고 자신을 만들어가는 질료는 인간 자신을 파괴하고 해체하는 것들이 대부분이 되기 마련이다. 이기심, 지배욕, 오만, 거짓 등은 모두 사람의 영혼을 부패시키고 끝내는 자신을 실종시킨다. 자연을 약탈하고, 인간을 유린하면서 행복해지겠다는 생각과 행위는 마침내는 인간 자신을 향한 공격이 될 뿐이다.

어떻게 하면 될까? 인간은 풀잎 하나, 나비 한 마리도 만들지 못하지만 그걸 지켜내는 것은 인간 자신이게 달려 있다. 그건 풀 한 포기, 나비 한 마리가 태어나고 살아가는 우주 전체와 우리 자신이 하나로 연결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걸 깨우치는 마음에서 진정 이루어질 수 있는 능력이다.

이어져 있다는 것은 서로 간에 생명의 기운이 넘나들고 있다는 걸 느끼는 기쁨이다. 사랑의 핵심이다. 단절은 이 기쁨을 봉쇄해버리는 폭력이다.

미생의 삶을 보다 낫게 바꾸게 하려는 노력들은 현실에서 진압되기 일쑤이다. 비정규직의 현실을 다룬 영화 <카트>도 그런 진압의 현장을 보여준다. 누군가에게는 세상 전부인 사람들이 그렇게 짓밟히고, 누군가에게는 우주의 무게로 존재하는 이들이 상처받고 고립 당한다. 서로 간에 뜨겁게 이어지는 감격이 이렇게 해서 조롱당하고 능멸의 대상이 되고 만다.

이어짐의 관계를 복원할 때 비로소 미생에게 완생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 만나고 느끼고 공감하고 끄덕이며 손을 잡고 함께 나가는 순간들이 우리에게 힘이 된다. 그로써 우주의 기운이 그런 우리에게 벅차게 스며들 것이다. 폐허가 되살아난다.

어떤 경우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서로에게 세상 전부인 사람들이다. 이 믿음에서 한 발자국도 후퇴할 생각이 전혀 없다.

 

김민웅/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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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관의 노래 신학(3)

저 아이 좀 봐

홍순관 글 / 백창우 곡
- 2003년 만듦, ‘나처럼 사는 건 나밖에 없지’ 음반수록 -

 

디디담담 디디담담∼

저 새들 좀 봐
자유로이 하나님도 볼 수 있겠네
저 흐르는 강을 봐
너무 깊어 하나님도 건널 수 없겠네
저 나무를 봐
빛깔 고운 과일을 태어나게 하네

저 아이 좀 봐
이 세상을 넘어 가네
꽃과 말하며 신神과 말하며 생명을 말하며
쉬운 말 툭툭 던지며
쉽게도 넘어 가네
어지런 세상 참 쉽게도 넘어 가네

디디담담 디디담담∼

“저 강은 너무 깊어 하나님도 건널 수 없겠네!” 어느 날 아빠는 일기를 쓰다 잠든 딸, ‘소리’의 일기를 봅니다. 이 조그만 아이가 시골 목사로 사는 아빠가 힘들게 보인 겁니다. 집 앞에 내(川)가 흐르고 있는데 그걸 보고 강江으로 압니다. 아이의 일기에 흐르는 강과 아빠가 겹쳐진 겁니다.

단강이라는 곳에서 목회를 했던 한희철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농촌 목회이니 가난한 살림이었을 테지요. ‘소리’는 타고난 시인입니다. ‘강이 너무 깊다니’ 그래서 하나님도 ‘건널 수 없다니’ 기막힌 표현이요, 이입移入입니다. 어떤 시인도 가난한 목회 사정을 이보다 깔끔하고 깊이 있게 다루지는 못할 겁니다.

 

 

얼마 후, 신기하게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어린 아이들이 통했는지, 같은 시기에 이런 말을 동시에 들려줍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던 길, 여덟 살 다빈이가 아빠에게 말합니다.
“아빠, 새들은 날면서 하나님도 볼 수 있겠다. 그치?”
동생인 여섯 살 다솔이는 덩달아 호기심 많은 눈으로 열매열린 나무를 보며,
“아빠, 아빠, 저 과일은 나무가 태어나게 하지?” 그럽니다.

아둔한 세상에 급했나봅니다. 하늘의 언어들이 비처럼 나립니다. 주워 담기도 벅찹니다. 어김없이 아이들은 어른의 스승입니다. 어렵게 말을 꾸며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난 것을 그대로 말하니, ‘제 말’이 되고 ‘제 세상’이 됩니다.

쉬우니 통합니다. 누굴 속이려면 꾀를 부리고, 편법便法을 쓰니 어렵고 복잡해집니다.


예수는 죽음을 향해 정면으로 걸었습니다.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비뚤어진 세상에게 조금도 숨기지 않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성서를 다시 들여다보니 예수에게는 광야도 쉬웠고, 물 위도 쉬웠습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지도 않았고, 언덕에서 뛰어내리지도 않았고, 뭘 준다고 받지도 않았습니다. 가만히 있었습니다. 구주 예수의 완성은 그랬습니다. 싱겁도록 쉬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쉬운 것은 어려움을 넘어 있습니다. 가만히 서있는 나무가 그렇고, 흐르는 시간이 그렇습니다.

하늘의 길은 이 땅에서의 번민과 갈등도 쉽게 만드는 신비가 있습니다. 광야도 버티고, 물 위도 걸으며, 뱃머리에서도 잠들 수 있습니다.

어울려 사는 세상에 옳은 말하기 어렵고, 남들 가는 쉬운 길 버리기가 어렵습니다. 신자라면 마음과 영혼이 흐려지는 길은 걷지 말아야 합니다. 절로, 쉬운 길이 옳은 길이 되어야 합니다.

바늘구멍을 어떻게 쉽게 들어가며, 저 너머의 세상을 어떻게 가뿐히 건너갈 수 있을까요. 어린아이처럼 꽃과 말하고 하나님과 말하며 생명과 말하고 자연과 말한다면 천국은 쉬운 것이 되겠지요.

“저 아이를 좀 보라”는 것은, 아이가 바라보는 자연과 세상을 보라는 것이요, 아이 속에 숨어있는 신비한 언어를 들으라는 것이요, 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천국을 보라는 것입니다.

아이처럼 되라는 것은 순진하게 되라는 것만 아니요, 이 세상을 넘어 있으라는 말씀이겠지요. 복잡한 세상에 잡혀 살지 말고 훌훌 털어 쉽게 살라는 말씀일 겁니다.

홍순관/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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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없이

홍순관의 '노래 신학' 2015.01.08 11:13

홍순관의 노래 신학(2)

벽 없이

 

홍순관 글 / 한경수 곡

(2002년 만듦, ‘나처럼 사는 건음반수록)

 

 

 

자연은 때를 따라 옷을 입네

소녀 같은 나물냄새

초록의 춤과 바람과 태양

흙보다도 더 붉은 산하

 

봄여름가을겨울 따로 사는 게 아니지

벽 없이 금 없이 오가며

서로에게 생명을 내어주고 살지

님을 따라 부르는 노래야

 

 

 

 

겨울은 봄 안에 있고 여름은 가을 안에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은 또 겨울 안에 있습니다.

 

제 계절을 떠나는 자연은 그래서 살아 있습니다. 치열한 생존으로 세월을 살지만, 조금도 미련 없이 다음 계절에게 모든 것을 내어줍니다. 남김없이 제 것을 내어 주었기에 다음 계절은 살아납니다. 서로에게 생명을 내어주니 또 살아나는 것입니다. 경계가 없으니 생명이 오고갑니다.

 

죽어야 사는 비논리와 역설을 계절은 철마다 보여줍니다. 끊임없이 살아나는 계절은 늘 돌아갈 곳을 알기에 가능합니다. 저가 돌아갈 곳을 알고산다는 것은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말씀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벽도 없고, ()도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 어려운 것은 자본주의에 온통 젖어 있어섭니다. 소유욕의 비만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글 한 줄 남기지 않으신 예수는 이토록 무거운 미련과 어리석은 욕심을 안고 사는 이 세상에 분명, 역설입니다.

 

그 분을 따라 부르는 노래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처럼 살아날 것입니다. 서로에게 생명을 내어주며 살아간다면 이웃은 어느새 내 몸이 되어 있을 겁니다.

 

홍순관/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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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관의 노래 신학(1)

나처럼 사는 건

 

한희철, 홍순관 글 / 한경수 곡

(1993년 만듦, ‘나처럼 사는 건 나밖에 없지음반수록)

 

 

들의 꽃이

산의 나무가 가르쳐줬어요.

그 흔한 꽃이 산의 나무가

가르쳐줬어요.

나처럼 사는 건 나밖에 없다고

 

강아지풀도 흔들리고 있어요 바람에 음~

 

저 긴 강이

넓은 바다가 가르쳐 줬어요

세월의 강이 침묵의 바다가

가르쳐 줬어요

나처럼 사는 건 나밖에 없다고

 

강아지풀도 흔들리고 있어요 바람에 음~

 

 

 

 

주어진 삶을 산다는 것은 고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것은 매여 있다거나, 한정된 장소, 정해진 운명, 일상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요, 창조의 숨을 간직한 채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주 작은 생명체들이 세상이 모르는 사이, 땅과 물을 건강하게 만들고 있지요. 조그만 생명체들이 제 숨을 쉬지 않게 된다면, 땅도 물도 망가지고 이내 썩게 됩니다.

 

생각하면, 이 지구상에서 제 숨을 쉬지 않고 사는 생명체는 인간밖에 없는듯합니다. 착취와 약탈과 파괴를 일상으로 사는 인간은 잔인하고 포악한 짓에 빠져 자신들이 하는 짓을 도무지 모르고 사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어떤 나쁜 무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산업사회에 사는 모두를 말합니다. 심각한 문제는 모른다는 것에 있습니다.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망각과 폭력의 중독성에 있습니다.

 

폭력을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것으로 이해하기 쉬우나, 인간의 법과 제도와 룰 속에서도 얼마든지 약자에게 폭력적일 수 있습니다. ‘무한 경쟁이라는 너무나 폭력적인 시스템은 언뜻, 마치 민주주의나 자유를 연상케 합니다. 가리지 말고, 층을 두지 말고 마음대로 경쟁을 하라는 것이니까요. 예컨대 대학생과 초등학생의 대결이 이치에 맞는 경쟁일 리가 없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에 겨뤄보라면 공정한 경쟁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강대국과 약소국이 자본을 무기로 하는 경쟁은 무한폭력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는 제 숨더 잘 쉬려고 남의 숨마저 교묘히 빼앗아 쉬는 잔인한 구도입니다.

 

제 숨 쉬지 않는 세상은 평화가 깨진 세상입니다. 더불어 살라는 창조의 숨이 멎어지면 인간은 이 지구상에서 살 수 없게 되겠지요. 그것은 창조를 행하신 그 분의 뜻이 아니요, 인간의 문명으로 인한 참담한 결과일 테지요. 그것은 자본주의의 스포츠카를 타고 끝 간 데 없이 치닫는 어리석음의 끝일 테지요. 대량생산과 마구잡이 소비로 이어지는 쓰레기 만들기와, 과학기술의 오만함으로 빚어지는 유전자 조작은 지구와 인류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갑니다.

 

발전과 혜택이라는 유혹의 문패를 걸어놓고 온갖 형태의 스피드를 추구하지만, 대형마켓과 백화점에선 물건과 사람으로, 고속도로에서는 각종 자동차들로 꽉꽉 막혀 꼼짝도 못하는 우스꽝스런 장면을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나게 됩니다. 온갖 오물을 흘려보내며 썩을 시간도 주지 않는 잔인한 횡포는 인간만이 행하는 물에 대한 야만이요, 땅에 대한 만행입니다.

 

흙으로 지어져 그 분의 생기()를 받아 살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갈 존재인 인간이 어떤 인생을 살아야할지는 조금만 묵상을 해봐도 알 일입니다. 끝내 종교의 행위만 드러내고, 만드신(주신) 이의 목적을 잃는다면, 그 결과는 생각보다 훨씬 참담할 것임이 분명합니다.

 

오늘도, 들의 꽃이 산의 나무가 말합니다. 세월의 강이 침묵의 바다가 들려줍니다. 제 숨 쉬고 살라고 합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자연만물이 (아직은) 입을 완전히 다물지는 않았으니 말입니다.

 

1991년 즈음입니다. 집으로 <얘기마을>이라는 쪽지 글이 꼬박꼬박 배달되었습니다.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에 있는 단강교회가 매주 발행하는 주보였습니다. 맨 앞장에는 늘 시가 있었고 예배순서와 성도들의 서툰 기도 그리고 뒷장에는 교회와 마을소식까지, 손으로 쓴 글이 빼곡히 실려 있었지요. 삐뚤고 정감어린 한희철 목사의 글씨는 검소하고도 알뜰한 살림 같았습니다. 단강마을 사람들의 가감 없고 꾸밈없는 일기였습니다. 목양일념牧羊一念, 양떼를 살피는 선한 목자의 연민이 담긴 애가哀歌였습니다. 눈물은 글씨를 자주 젖게 하였습니다. 거기 앞에 실렸던 이 글(1절 노랫말)은 단아하고 깔끔하여 단숨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서정적이면서 회화적이었고, 고요하면서 풍요로웠습니다.

 

한경수의 솜씨로 만들어진 피아노 선율은 바람이 불고 물결이 일고 들판이 일렁입니다. 음악이 그림이 됩니다. 높낮이의 폭이 적고 몰아치는 대목도 없으며 절정도 없는, 게다가 다소 긴 이 노래는 그만그만한 인생들을 상징하지만 잠잠히 삶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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