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15)

 

경계선을 넘는다는 것

 

그 밤에 야곱은 일어나서,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데리고, 얍복 나루를 건넜다. 야곱은 이렇게 식구들을 인도하여 개울을 건너 보내고, 자기에게 딸린 모든 소유도 건너 보내고 난 다음에, 뒤에 홀로 남았는데, 어떤 이가 나타나 야곱을 붙잡고 동이 틀 때까지 씨름을 하였다. 그는 도저히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다가 엉덩이뼈를 다쳤다. 그가, 날이 새려고 하니 놓아 달라고 하였지만, 야곱은 자기에게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그가 야곱에게 물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야곱입니다.” 그 사람이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야곱이 말하였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나 그는 “어찌하여 나의 이름을 묻느냐?” 하면서, 그 자리에서 야곱에게 축복하여 주었다.(창세기 32:22-29)

 

사이 공간 혹은 점이지대라는 게 있다. 어둠과 빛, 도시와 시골, 안과 밖, 성과 속이 교차하는 장소 말이다. 비무장지대나 문지방도 일종의 사이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옛 어른들은 문지방을 밟지 말라고 엄히 이르셨다. 성경의 제사장들의 직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정결한 것과 불결한 것의 경계를 분별하는 일이었다. 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수의 괴물들이 불길한 까닭은 그들이 인간과 동물의 구별을 무색하게 하기 때문이다. 경계선을 넘는다는 것은 늘 위험을 동반한다.

 

20년 동안의 객지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야곱은 얍복 강이라는 경계선 앞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가족들과 모든 소유를 먼저 건너보낸 후 그는 뒤에 홀로 남았던 것이다. 고향이 지척이건만 그는 선뜻 그 강을 건너지 못한다. 강은 일종의 심리적 장벽이  되어 그를 가로막는다. 형에게 돌아갈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챘던 기억과 아울러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는 대로 동생을 죽이고 말겠다는 형의 노기 찬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어느덧 밤이 다가왔다. 갑자기 어떤 이가 나타나 야곱을 붙잡았고 목숨을 건 씨름이 시작되었다. 엉덩이뼈를 다쳤지만 절박한 야곱은 앙버티며 그 밤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동이 틀 무렵 그가 놓아 달라고 하였지만 야곱은 “자기에게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그러자 그는 야곱에게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야곱입니다.” 야곱의 문자적 이미는 ‘발뒤꿈치를 잡다’이지만 그 속뜻은 ‘속이는 자’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라 곤 하지만 야곱은 그동안 속이는 자로 살았다. 자기 이름을 발설함으로 그는 자기 삶을 드러낸다. 그러자 그가 말한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새로운 이름이 주어졌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말은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했다는 말일 것이다. 얍복 강이라는 경계선에서 야곱은 죽었고 이스라엘로 재탄생했다. 비로소 경계선을 넘을 준비가 된 것이다. 

 

호렙산 떨기나무 아래 엎드렸던 모세가 그러했던 것처럼 야곱은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한다. 히브리인들에게 이름과 존재는 분리되지 않는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여실히 안다는 뜻이다. 신적 존재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는 “어찌하여 나의 이름을 묻느냐?”라고 되물으신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야곱을 축복하여 주었다. 축복하심이 곧 그분의 존재이다. 야곱의 밤은 지나갔다. 비록 절름거릴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죽고 다시 산 자의 표징일 뿐이다. 경계를 넘어 그는 은총의 세계로 들어갔다.  

 

*기도*

 

하나님, 사도들은 우리가 땅에 살고 있지만 땅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도 말합니다. 그러한 자각이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질척거리는 욕망의 벌판에서 사는 동안 하늘을 잊을 때가 많아 우리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야곱’처럼 살고 있습니다. 절름거리면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걸었던 야곱이 누린 복을 우리에게도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멘

 

-김기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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