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45)

 

나귀를 타신 왕

 

예수와 그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러, 올리브 산에 있는 벳바게 마을에 들어섰다. 그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가서 보면,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고, 그 곁에 새끼가 있을 것이다. 풀어서, 나에게로 끌고 오너라. 누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거든, ‘주님께서 쓰려고 하십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리하면 곧 내어줄 것이다.” 이것은, 예언자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시온의 딸에게 말하여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온유하시어, 나귀를 타셨으니,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다.”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대로, 어미 나귀와 새끼 나귀를 끌어다가, 그 위에 겉옷을 얹으니, 예수께서 올라타셨다. 큰 무리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가 폈으며, 다른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다.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무리와 뒤따라오는 무리가 외쳤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에, 온 도시가 들떠서 물었다. “이 사람이 누구냐?” 사람들은 그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신 예언자 예수라고 말하였다.(마태복음 21:1-11)

 

세상에 급할 게 뭐가 있냐는 듯 느릿느릿 걷는 나귀를 본다. 무거운 짐을 등에 얹고도 태연자약하다. 주인의 바쁜 마음 아랑곳 없이 제 속도로 걸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이스라엘의 왕들은 나귀 혹은 노새를 타고 도성에 들어갔다. 다윗은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 그리고 측근인 브나야로 하여금 솔로몬을 자기가 타던 노새에 태워 기혼으로 인도한 후, 거기서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라고 명령했다.(열왕기상 1:33-34) 

 

왜 말이 아니고 노새인가? 말은 전쟁을 연상시킨다. 말을 길들임으로 인간은 이동 거리와 속도를 늘릴 수 있었다. 말에 오르거나 균형을 잡기 위해 안장에 부착한 등자(鐙子)의 발명은 전쟁 역사를 바꾸었다고 한다. 이스라엘은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힘겨운 생존을 이어가야 했다. ‘병거’와 ‘기병대’는 공포 그 자체였다. 성경에서 가장 오랜 층에 속하는 미리암의 노래는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지없이 높으신 분, 말과 기병을 바다에 던져 넣으셨다”(출애굽기 15:21))고 고백한다.

 

토라는 왕들이라 해도 군마를 많이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신명기 17:16)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렀던 다윗은 “르홉의 아들, 소바 왕 하닷에셀이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자기 세력을 되찾으려고 출정하였을 때에, 다윗이 그를 치고, 그에게서 기마병 천칠백 명과 보병 이만 명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다윗은 또 병거를 끄는 말 가운데서도 백 필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모조리 다리의 힘줄을 끊어 버렸다.”(사무엘하 8:3-4) 그들이 일어설 수 없도록 조치한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에도 말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치빙전렵영인심발광馳騁畋獵令人心發狂’, 말을 타고 사냥질 하는 것이 사람 마음을 미치게 만든다는 말이다. 문명은 속도를 자랑하지만, 가속의 시간은 우리에게 평화를 안겨주지 못한다. 시인 정지용이 ‘다락처럼 높다’고 했던 말이 아니라, 만만해 보이는 나귀 혹은 노새를 탄 왕의 모습은 평화의 상징으로 적합하지 않은가? 

 

 

 

 

제자들이 어미 나귀와 새끼 나귀를 끌어다가 그 위에 겉옷을 얹자 예수님은 그 위에 올라타셨다. 길가에 있던 사람들도 겉옷을 길에다 펴고, 어떤 이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다. 흥분한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며 그를 맞아들였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태복음 21:9) 이 행렬은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로마군의 위풍당당한 행진과 대비된다. 로마의 점령군은 자기들의 위세를 드러내는 동시에 피식민지 백성들의 가슴에 공포심을 주입하기 위해 깃발을 앞세운 채 말을 타고 위풍당당하게 행진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모습은 공포가 아니라 사랑이, 위세가 아니라 겸허함이 영원함을 보여준다. 지금, 우리는 어느 행렬을 따라가고 있는가?  

 

*기도*

 

하나님, 가속의 시간에 적응하느라 우리는 늘 숨이 가쁩니다. 평안을 희구하면서도 늘 불안에 시달립니다. 질주하지 않으면 남에게 추월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우리는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나귀를 타고 느릿느릿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는 주님의 모습을 머리에 그려봅니다. 그 속도는 사랑의 속도이고, 함께 함의 속도입니다. 어쩌면 생명이 자라는 속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속에 일고 있는 불안의 광풍을 잠잠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속도에 맞춰 살아갈 지혜와 용기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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