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47)

 

죽음의 강에 뛰어들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에 생긴 일은, 아담 한 사람이 범죄 했을 때에 생긴 일과 같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더욱더 넘쳐나게 되었습니다.(로마서 5:15)

 

바울은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그 죄의 결과 모든 사람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한다. 죄의 유전을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게 사실이다. 의문이 생긴다. 우리의 의사와 관계없이 자행된 첫 사람의 죄에 대해 우리가 공동책임을 져야 하는가? 조금 억울하다. 하지만 아담은 인류의 첫 사람인 동시에 모든 사람이다. 흙으로 빚어진 모든 존재는 아담이다. 어느 시인은 흙에 불안을 더한 게 인간이라 말했다. ‘네가 신처럼 될 것’이라는 뱀의 말은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선악과를 먹는 순간 신적 지혜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원망과 경계심이 발생했다. 선악과를 따먹은 사람은 누구나 자기 기준에 따라 선과 악을 판별하려 한다. 각자 기준이 다르니 갈등이 없을 수 없다. 지금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소음은 각자의 옳음이 충돌하는 데서 빚어진 것이다.

  

바울은 율법을 통해 죄가 죄로 명명되기 전에도 이미 죽음이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었다고 말한다.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르쳐주었지만, 우리 속에 깊이 또아리 틀고 앉은 죄의 경향성을 없애지는 못한다.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은혜 밖에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에 생긴 일은, 아담 한 사람이 범죄 했을 때에 생긴 일과 같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더욱더 넘쳐나게 되었습니다”(로마서 5:15)

 

 

 

 

‘동물의 왕국’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장면이 있다. 아프리카 사바나 지역에 사는 누 떼는 건기가 되면 새로운 풀을 찾아 무려 1,600km를 이동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여정이 순탄치만은 않다. 커다란 강 앞에 당도했을 때 누 떼는 자기들 앞에 있는 위험을 감지한다. 강에는 포식자인 악어가 도사리고 있다. 누 떼는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선뜻 뛰어들지 못한다. 그러나 그 건너편으로 가지 않으면 생존을 이어갈 수 없다. 그때 어느 한 마리가 힘차게 강에 뛰어든다. 뒤를 이어 수많은 누 떼가 강을 건넌다. 희생당하는 개체들도 있지만 그들 대다수는 결국 건너편에 당도했고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한 마리가 앞서 죽음의 강에 뛰어듦으로 누 떼는 존속될 수 있었다. 

 

예수님도 죽음과 공포의 도도한 물결 속에 몸을 던져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여셨다. 주님이 앞서 가신 그 길을 따라 걷지 않고 주춤주춤 망설이다 보면 정신의 죽음을 면할 길이 없다. 예수님을 길이라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길을 걸어야 한다. 그 십자가 길을.

 

*기도*

 

하나님, 에덴 이후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늘 뭔가에 쫓기며 삽니다. 느긋한 평화를 꿈꾸지만, 우리 마음을 뒤흔드는 일이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집니다. 처리해야 할 문제들은 또 어찌나 많은지 도무지 삶의 여백을 마련할 수도 없습니다. 복잡하게 뒤엉킨 우리 마음, 찌그러지고 멍든 우리 마음을 주님께 바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새롭게 빚어주십시오. 그래서 허망한 열정에 사로잡혀 살기보다는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기쁨을 누리며 사는 참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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