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자가 아니라 친구가 되라

김기석의 새로봄(67)

 

해석자가 아니라 친구가 되라

 

욥이 대답하였다. 그런 말은 전부터 많이 들었다. 나를 위로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너희는 하나같이 나를 괴롭힐 뿐이다. 너희는 이런 헛된 소리를 끝도 없이 계속할 테냐? 무엇에 홀려서, 그렇게 말끝마다 나를 괴롭히느냐? 너희가 내 처지가 되면,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너희에게 마구 말을 퍼부으며, 가엾다는 듯이 머리를 내저을 것이다. 내가 입을 열어 여러 가지 말로 너희를 격려하며, 입에 발린 말로 너희를 위로하였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말을 해도, 이 고통 줄어들지 않습니다. 입을 다물어 보아도 이 아픔이 떠나가지 않습니다.(욥기 16:1-6)

 

불행에 직면한 사람을 보면 일단은 그들 곁에 다가가, 함께 아파하고, 보살피고, 부축해 일으켜 세워주는 일이 우선이다. 해석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다. 고통을 겪는 사람들 곁에 다가선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삶은 복잡하고 모호하기 이를 데 없다. 옳고 그름의 잣대로 재단하기 어렵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마태복음 7:1) 하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타자를 판단하는 자리에 서려는 태도를 일러 근본주의라 한다. 모든 근본주의는 기본적으로 폭력적이다.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던 세 친구는 욥이 자기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듯한 말을 내뱉자 돌연 공격적인 태도로 돌변한다. 그들은 욥이 겪고 있는 고난이 그가 저지른 죄에 따른 벌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며 참회를 권고한다. “인생이 무엇이기에 깨끗하다고 할 수 있겠으며,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무엇이기에 의롭다고 할 수 있겠느냐”(욥기 15:14)는 엘리바스의 말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삶의 쓰라림 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이들에게 하는 이런 입바른 소리는 오히려 상처를 덧나게 할 뿐이지 않던가? 그들의 말은 괴로움을 더하게 만드는 ‘헛된 소리’일 뿐이다.

 

욥은 친구들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처지가 되면,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너희에게 마구 말을 퍼부으며, 가엾다는 듯이 머리를 내저을 것이다.”(욥기 16:4) 서 있는 자리가 다르면 온전한 이해는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해석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섬이다. 다가설 때 닫힌 마음이 열리는 법이다.

 

 

 

 

장애인들의 집인 라르슈 공동체를 세운 쟝 바니에가 한번은 아이티에 있는 교도소를 방문했다. 그곳에는 아주 거칠고 원시적이며 난폭한 사람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죄수들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벽 앞에 선듯 난감한 상황이었다. 어느 순간 바니에는 그들에게 ‘아이’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 각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아이와, 애정을 갈구하는 그 아이의 목마름, 그리고 그들과 자신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말한 후에 이런 말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여러분 중 아무도 이곳에서 나갈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나가더라도 몇 주 만에 다시 돌아올지도 모릅니다.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을 외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희망은 언젠가 세계가 여러분의 존재 깊은 곳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가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여러분의 존재의 아름다움이 빛을 발하여 전 세계에 알려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마음 깊은 곳에, 갈라진 모든 틈보다 더 깊은 그곳에, 애정을 추구하는 어린아이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희망의 사람들 라르슈』, 82-3쪽)

 

바니에는 그때 그들의 얼굴에 긴장이 풀리고 미소가 번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 사이에 깊은 일치의 감정이 솟아난 것이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정죄의 언어, 판단의 언어가 아니라, 이해와 공감과 애정이 담긴 말이다. 바른 소리를 한다는 자의식만 줄어들어도 우리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기도*

 

하나님,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말이 때로는 흉기가 되어 사람들을 해치기도 합니다. 회초리를 맞은 자국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혀로 맞은 상처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프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이웃들의 삶에 대한 해석자를 자처했습니다. 이러쿵저러쿵 해석을 늘어놓고 스스로의 혜안에 만족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이웃들의 마음은 굳게 닫히곤 했습니다. 이제는 해석자가 아니라 아픔에 다가서는 사람, 누군가의 설 땅이 되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의 성육신의 신비를 우리에게 늘 깨우쳐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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