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자국이 있는가?

김기석의 새로봄(107)

 

상처 자국이 있는가?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표준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평화와 자비가 있기를 빕니다. 이제부터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내 몸에 예수의 상처 자국을 지고 다닙니다.(갈라디아서 6:15-17)

 

십자가를 꼭 붙잡은 바울에게 유대인들이 자랑거리로 여기는 육체의 할례는 정말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할례 받는 것과 안 받는 것이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할례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유대인들이 민족적인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강조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유대인이라는 외적인 표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은 “겉모양으로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유대 사람이 아니요, 겉모양으로 살갗에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할례가 아닙니다”(로마서 2:28)라고 말했다. 예레미야 역시 “너희 마음의 포피를 잘라 내어라”(예레미야 4:4)라고 말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언제나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당신네 조상들이 한 그대로 당신들도 하고 있습니다”(사도행전 7:51)라고 책망했다. 본질과 비본질의 착종이 심각하다.

 

바울은 할례를 받은 사람이지만, 갈라디아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유대계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나는 내 몸에 예수의 상처 자국을 지고 다닙니다”(갈라디아서 6:17)라고 말한다.  여기서 예수의 상처 자국(ta stigmata tou Iesou)이란 말은 ‘예수의 스티그마’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이다. 스티그마는 불에 달군 쇠로 소나 말의 엉덩이에 찍어 그 주인을 나타내는 표식을 가리킨다. 바울의 몸에 예수의 상처 자국이 있다는 말은 물론 주님의 뜻을 행하는 과정에서 바울 사도가 겪은 고난의 흔적을 가리키는 말이다. 매를 맞고, 돌에 맞고, 폭동에 휘말리고, 감옥에 갇히고, 굶주리고, 잠을 자지 못하고, 배척 당하고… 이루 말로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그는 많은 고생을 했다.(고린도후서 11:18-33 참조) 

 

입신양명을 노려서가 아니었다. 바울은 왜 이런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고린도후서 4:10) 그가 기꺼이 고난의 길을 걸은 것은 예수의 생명, 시들 수 없고, 더럽혀질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생명을 다른 이들에게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바울의 몸에 난 고난의 흔적들은 그가 누구에게 소속된 사람인지, 그가 무엇을 위해 사는 사람인지를 확연히 드러내준다.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도마에게 당신 몸에 난 상처 자국을 보여주셨다. 그 상처는 죄악의 골짜기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하늘로 이끌기 위해 당하신 고난의 흔적이었다. 상처를 내 보이시는 주님 앞에서 우리는 영광만을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죽어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가 주님께 내보일 상처는 무엇인가. 그 상처가 없다면, 이웃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 징표가 없다면 어떻게 고개를 들고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 

 

*기도*

 

하나님, 본질적인 것에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비본질적인 것에 집착합니다. 주님은 박하와 근채와 회향의 십일조를 바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정의와 자비와 신의는 소홀히 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리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행하다가 입은 상처가 믿는 이의 표식이라는 사실을 두려움으로 기억하겠습니다. 이제는 힘겹더라도 자아의 한계를 벗어나 더 큰 세계로 나아가겠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의지가 연약해지지 않도록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사로잡아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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