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114)

 

아름다운 순간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충실하고, 지극히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불의하다.(누가복음 16:10)

 

개울을 건너는데 징검다리가 필요하듯이, 우리가 시간의 강물을 건너는 데도 징검다리가 필요하다. 살아온 나날을 돌아보면 우리의 기억 속에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있는 순간들이 있다. 슬픔과 기쁨이 갈마드는 인생이지만, 대부분의 일들은 세월과 더불어 잊혀진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가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 어쩌면 점점 더 생생해지는 기억이 있다. 그것은 가슴 뿌듯한 순간일 수도 있고, 남에게 밝히기 어려운 부끄러운 순간일 수도 있다. 그런 기억들은 알게 모르게 삶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끼쳐서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짓곤 한다. 

 

 

 

 

콜택시 기사였던 토니는 어느 해 크리스마스 날 새벽에 시내 어떤 주소로 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도어벨을 누르니 한참 있다가 문이 열렸고, 거기에는 마치 40년대 영화에서 막 걸어 나온 듯한 복장에 모자까지 단정히 쓴 연세 지긋한 할머니가 서 있었다. 그 뒤로 보이는 방에는 가구가 다 흰색 천으로 덮여 있었다. 차에 탄 할머니는 주소를 내밀면서 시내를 가로질러 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 돌아서 가는 건데요. 할머니.” “괜찮아요. 난 시간이 아주 많아. 호스피스 병원으로 가고 있는 중이거든. 난 식구도 없고, 의사선생님 말씀이 이젠 갈 때가 얼마 안 남았다더군요.” 

 

어둠 속에서 할머니 눈에 이슬이 반짝였다. 토니는 요금 미터기를 껐다. 그로부터 두 시간 동안 토니와 할머니는 함께 조용한 크리스마스 새벽 거리를 드라이브 했다. 그녀가 젊은 시절 엘리베이터걸로 일하던 빌딩, 처음으로 댄스파티에 갔던 무도회장, 신혼 때 살던 동네 등을 천천히 지났다. 때로는 어떤 건물 앞에 차를 세우고 그냥 오랫동안 어둠 속을 쳐다보기도 했다. 어슴프레 날이 밝아오자 할머니는 “이제 피곤해, 그만 갑시다”라고 말했다. 병원에 도착하자 토니는 몸을 굽혀 할머니를 안아 작별인사를 했다. “자네는 늙은이에게 마지막 행복을 줬어. 아주 행복했다우.” 할머니의 말씀이었다. 노인이 된 토니는 그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난 그날 밤 한참동안을 할머니를 생각하며 돌아다녔지. 그 때 내가 그냥 경적만 몇 번 울리고 떠났다면? 그래서 크리스마스 날 당번이 걸려 심술 난 다른 기사가 가서 할머니에게 불친절하게 대했더라면…. 돌이켜보건대 난 내 일생에 그렇게 위대한 일을 해 본적이 없어. 내가 대통령이었다 해도 아마 그렇게 중요한 일은 하지 못했을지 몰라.”(2002년 8월 24일자 중앙일보 「삶과 문화」에 실린 장영희 칼럼 중에서)

 

토니가 요금 미터기를 끈 그 순간이야말로 위대한 순간이었다. 자기 속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존재를 불러낸 순간이었으니 말이다. 이윤 동기에서 일하던 그가 한 할머니의 외로움과 쓸쓸함에 공감하는 사람으로 바뀐 그 변화의 순간은 또한 은총의 순간이기도 했다.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충실하고, 지극히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불의하다.”(누가복음 16:10)

 

*기도*

 

하나님, 큰 일을 꿈꾸면서도 작은 일은 소홀히 하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기독교인들은 온 세상을 사랑하지만 정작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지적이 통렬하게 다가옵니다. 사랑은 누군가와 연루되는 것이고, 수고를 통해서만 입증되는 것임을 잘 압니다. 이제는 말로만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고 싶습니다. 할 수 있는 한 모든 이들에게, 할 수 있는 한 모든 순간에, 할 수 있는 한 모든 방법으로, 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사랑하며 살도록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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