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과 화 사이

김기석의 새로봄

 

복과 화 사이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너희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인자 때문에 너희를 배척하고, 욕하고, 너희의 이름을 악하다고 내칠 때에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아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다. 그들의 조상들이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 그러나 너희,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너희의 위안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굶주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웃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할 때에, 너희는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누가복음 6:20-26)

 

“복이 있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 너희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헬라어의 어순에 따라 재구성한 것이다. ‘복이 있다’는 선언이 앞에 나오고 그 대상 혹은 이유가 뒤에 나온다. 단언적일 뿐만 아니라, 같은 구가 반복되기에 강렬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런데 ‘복’이라는 단어가 한국 교회에서 너무 낡은 말이 되어 버려서 원문의 뜻을 담아내기에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다. ‘복’으로 번역된 ‘마카리오스’를 일제 치하 우리 민족의 큰 스승이셨던 김교신 선생은 “환경이 지배할 수 없는 영혼 속에서 용출하는 내적 환희의 샘”으로 설명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정당한 관계 안에서 사람 된 자의 진정한 도를 따르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다.(김교신 전집4, <성서연구>, 노평구 편, 32쪽)

 

 

 

 

 

 

주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요즘으로 치면 영 복 같지 않은 복이다.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슬피 우는 사람’, ‘배척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니? 이것은 오히려 화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지금 정말 어려운 시기를 지나는 이들은 이 말씀에서 은혜를 받기보다는 상처를 받게 마련이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에 화를 내기도 한다. 마치 주님이 불의한 현실을 그냥 받아들이도록 권고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칼 마르크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말했다. 엄연한 고통의 현실에 눈을 뜨고 또 저항하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영혼을 몽롱하게 만드는 마약이라는 것이다. 사실 역사 속에서 종교가 그런 역할을 한 때도 있었기에 마르크스의 말은 전적으로 그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난이나 굶주림을 미화하실 생각이 없다. 네 가지의 복은 24절부터 나오는 네 가지 화에 대한 선포를 배경으로 해서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

 

“그러나 너희,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너희의 위안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굶주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웃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할 때에, 너희는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눅6:24-26)

 

이 대목 역시 원문에는 ‘화가 있다’는 구절이 맨 앞에 나온다. 그리고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나온다. ‘부요한 사람’, ‘배부른 사람’, ‘웃는 사람’, ‘모든 이에게 좋은 평판을 듣는 사람.’ 이 구절도 얼핏 이해가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혼신의 힘을 다하여 구하는 것이 아닌가. 이 말에 담겨 있는 속뜻을 헤아리려면 상상력이 조금 필요하다. 여기서 화가 있다고 선언된 사람들은 '타자' 혹은 '이웃'의 고통이나 불행에는 아랑곳없이 홀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 자기 의를 내세우는 사람들, 우월감에 들떠 남을 무시하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좋은 평판을 듣기 원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공감할 줄 모른다.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울 줄도 모르고, 그들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몸을 낮출 줄도 모른다. 복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화일 때가 많다.

 

*기도

 

하나님, 주님의 말씀은 가끔 우리의 일상적 판단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풍요로움을 구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말씀하십니다. 슬픔을 한사코 피하려는 이들에게 지금 슬퍼하는 자가 복이 있다 말씀하십니다. 이 전복적 진실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십시오. 믿음은 관념도 이론도 아닌 현실임을 깨우쳐주십시오. 지금 가난한 사람, 배고픈 사람, 슬퍼하는 사람, 배척받는 사람들 곁에 다가가 그들의 이웃이 되어줄 용기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 가운데서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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