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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연의 '아기자기'

괜시리 울적한 결혼기념일에 쓴 편지

by 한종호 2015. 5. 9.

이종연의 아기자기(17)

 

괜시리 울적한 결혼기념일에 쓴 편지

 

 

남편에게.

 

오늘로 우리가 결혼한 지 5년이 되었어요. (불필요한 가정이겠으나) 이루가 없었다면 오늘 우리는 휴가를 내고 여행을 떠났거나 여의치 않으면 근사한 저녁을 먹고 선선한 밤거리를 걷다가 어느 호젓한 카페에 들어가 마주 앉아, 결혼기념일마다 해 오던 대로 서로를 향해 편지 한 장씩 썼겠지요?

 

하지만 오늘 우리는 새벽 4시 반에 깬 이루가 우는 탓에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일어나 나랑 결혼해 줘서 고마워요.” 한마디씩 하고는, 자는 것도 아니고 안 자는 것도 아닌 상태로 이루랑 놀아주다가 오전 7시에 이루를 재우고 뻗어 버렸어요. “어서 일어나라는 당신의 재촉에 못이겨 겨우 눈을 떴을 때는 좀더 자게 두지 않는다며 섭섭해하기까지 했죠. 이루가 일찍 자니까 저녁은 무리고 점심에 외식이라도 하자고 했지만, 이루가 12시부터 졸려하다가 1시에 낮잠이 들어버렸고 어영부영 시간이 흘러 외식도 물 건너가고, 저녁에 치킨 한 마리 시켜 먹은 게 전부네요. , 그리고 방금 우리가 결혼기념일마다 편지를 써 왔다는 사실을 당신이 잊고 있었음을 확인했어요.

 

 

 

 

한 아이의 존재가 이 많은 걸 바꿔놓은 것인지, 결혼하고 5년이나 지났으니 이제는 별일 없이 지나가도 괜찮은 때가 온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괜시리 울적해요. 흑흑.

 

다행히 울적하기만 한 건 아니에요. 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오늘 하루가 의미 있는 날이 되려면, 나머지 364일을 잘 보내야 한다는아주 기특한 생각이요. 그런 관점에서라면 우리는 지난 1년을 아주 의미 있게 또 행복하게 지냈잖아요? 그 나날들이 그래, 지난 1년 너희 참 잘 살았다고 말해주고 있을 거예요.

 

결혼 관계에서 잘 산다는 건 뭘까요? 나는 나 자신에게 또 당신에게 솔직해지는 것그리고 상대를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 두 가지는 내가 잘 못하는 것이고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배운 것이기도 해요.

 

가끔 당신에게 4의 섭섭함을 느끼면 9만큼 섭섭한 척을 하곤 했어요. 감정을 과하게 표출해 당신이 내 마음을 풀어주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결혼 관계에서는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나는 당신을 보면서 배웠답니다. 빨리 마음을 풀고 빨리 웃을수록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는데, 그동안 참 못나게 군 적이 많아요. (그래도 요즘은 좀 나아졌죠?^^)

 

이루를 함께 돌보며 24시간을 같이 지내니, 서로의 성격을 훨씬 자세히 볼 수 있게 되었어요. 서로의 습관이나 생각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됐고요. 그러니 우리가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때도 거의 정해져 있더라고요. 집안일을 하면서 내가 자주 당신에게 하는 말을 당신도 잘 알고 있지요. ‘꼼꼼하지 못하고 게으르다는 말 말이에요. 그런데 그건 내 기준, 내 욕심에서 비롯한 말이라는 사실을 나는 또 당신을 보면서 깨달았어요. (칭찬이라면 모를까) 당신은 나에게 그런 식으로 판단을 섞어 말하지 않거든요. 당신은 내 기준에서 조금 느린 사람이고, 내 기준에서 섬세하지 못한 것일 뿐, 그게 본래의 당신임을 인정해요. (그래도 가끔 신경질 섞인 짜증이 툭툭 튀어나와 미안해요.)

 

며칠 전 이루가 태어난 지 300일 되던 날, 우리는 네팔 지진 구호금을 이루 이름으로 보냈어요. 그때는 이루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대로, 영원한 기쁨이 되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살기를, 또 힘들고 어려운 이들에게 이루 역시 기댈 언덕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는데, 곰곰 돌아보면서 마음의 소원을 담아 이름을 지어주는 것까지는 부모로서 할 수 있지만 이루가 실제로 어떻게 살든, 그 삶 자체를 인정하고 축복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아니면 이루에게도 역시 내 바람을 잣대로 삼아 평가를 내리게 되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당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겠다는 다짐과 마찬가지로, 이루의 생각, 행동에 따라 감사의 조건을 채우려 들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네요.

 

오래 전 내가 사랑이 뭘까요?” 하고 물었을 때 당신이 했던 말 기억하죠? “사랑은 하는 거예요라고 대답했잖아요. 그 말은 지금도 내 가슴에 머물며, 내가 사랑하지 못할 때마다 메시지를 보내요. “사랑은 하는 거라고 했잖아.” 오늘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이유가 나는 저 말에 있다고 생각해요. 저 한마디가 내 스승이 되어 나를 일깨워 온 셈이죠.

 

사랑이 명사가 아닌 동사라는 것, 좀더 구체적으로는 서로에게 솔직하고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이라는 걸 가르쳐 준 당신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내일 또 이루가 새벽같이 일어나 엄마아빠를 피곤으로 몰고, 이루랑 놀아주다가 뒤늦게 잠이 들어 조금이라도 더 자려고 고집 피우는, 그런 일상이 반복되더라도, 아니 그런 반복이 곧 인생이기도 할 텐데, 그럴 때 오늘보다 조금 더 성숙한 모습으로 서로를 대하기를 기대해요. 혹시 그렇지 못하더라도 다시 심기일전할 수 있도록 서로 기다려 주기를 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한 가지만 더 부탁할게요. 결혼기념일마다 우리가 해 온 소박한 의식은 계속 지키는 게 좋지 않겠어요? 게다가 내가 편지 받는 거 무척 좋아하는 거 알잖아요.^^ 그러니 이 편지 받고 답장 꼭 써 주기예요. 호호.

 

이종연/IVP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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