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보아야 할 별 하나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20)

 

바라보아야 할 별 하나

 

 

안녕하세요?

어제 만남은 참 반갑고 유익하고 흐뭇했습니다. 사실 그 며칠 전, 알지 못하는 분으로부터 온 메일, 그것도 ‘커피 한 잔 내려달라’는 제목을 달고 온 메일을 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쳤습니다. 제법 따뜻하고 친밀한 인사말로 시작되는 메일이 대개는 광고인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메일을 열었습니다. 어쩌면 ‘이번에도 금방 삭제 버튼을 눌러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메일을 읽은 동안 글을 쓰신 분이 참 겸손하신 분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강박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널음새가 절로 드러났던 까닭입니다. 글에도 그 사람의 존재가 오롯이 드러나는 법이지요. 무작스런 말본새와 태도로 남의 속을 건드리는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요? 그런데 목사님의 글 속에서 나는 어떤 그리움과 외로움의 자취를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분주하다고 핑계를 대지 않고 선뜻 뵙고 싶다고 말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약속된 시간이 조금 지나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서시는 모습이 참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말끔한 차림과 선선한 미소, 그리고 향토색이 느껴지는 억양의 꾸밈없는 목소리는 저절로 저를 무장해제 시켰습니다. 죄송스런 말씀입니다만 마치 집에 놀러온 막내 동생을 대하는 것 같은 따뜻함이 제 몸과 마음으로 번지더군요. 지금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걸어온 삶의 내력을 들려주면서도 자신을 미화하거나 짐짓 겸손하게 보이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 넘너리성 덕분에 우리는 마치 오래 사귀어온 사람처럼 참 많이 웃었습니다. 하지만 함께 나눈 이야기가 썩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유명짜한 목회자들을 만나면서 느꼈던 씁쓸함, 영광의 신학과 번영의 신학에 도취된 교회 중직자들의 이중적인 모습에 대한 안타까움, 자신의 입장을 결정해야 하는 순간 느꼈던 그 아득함, 출신학교와 출신지에 따른 차별의 현실에 맞닥뜨렸을 때 느꼈던 굴욕감 …. 실제로 교회 현장에서는 소명을 무색하게 하는 일들이 참 많이 벌어집니다.

 

 

                                                            류연복 판화

 

바라보고 나아갈 이정표 혹은 기준을 찾기가 어려웠다며 몇 번씩이나 이야기를 하실 때, 저는 목사님을 뒤흔들었던 혼돈을 아령칙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답답해질 때마다 제가 상기하는 한 문장이 있습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길을 갈 수가 있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헝가리의 철학자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 첫머리에 쓴 글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별을 보고 길을 찾지 않습니다. 구글 지도로 찾습니다. 너무 썰렁한가요? 별을 보고 길을 찾는다는 것은 어쩌면 자기 삶을 무한 혹은 영원의 세계와 관련시켜 조망한다는 말이 아닐까요? 세상은 점점 땅의 현실에만 눈을 돌리도록 만듭니다. 우리는 하늘을 잊고 살아갑니다. 큰 정신이 나오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요? 있음 그 자체로 다른 이들의 좁장한 마음을 넓혀주고, 시야를 확장시켜 주는 사람이 몹시도 그리운 시대입니다. 비노바 바베의 바가바드기타 풀이를 읽다 보니 이런 구절이 나오더군요.

 

“태양은 큰 소리로 소리쳐 부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양을 보면서 새가 노래하고, 어린 양이 뛰어놀며, 소들이 숲으로 풀을 뜯으러 가고, 상인들은 가게를 열고, 농부들은 들로 나가며, 온 세상이 바쁘게 돌아갑니다. 태양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으로부터 무수히 많은 행동들이 발생합니다. 아카르마의 상태는 무한한 행동을 일으킬 수 있는 힘으로 충만해 있으며, 무한한 힘이 가득 차 있지요.”(비노바 바베, 《천상의 노래》, 김문호 옮김, 실천문학사, p.116-7)

 

‘아카르마’는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행동 즉 무위를 이르는 말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존재자들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힘이요 충만함이라는 뜻일 겁니다. 무력한 아기는 존재 그 자체로 어른들의 행동을 이끌어냅니다. 아기는 그런 의미에서 아카르마의 원형이라 할 수 있겠네요. 정진규 선생의 시 가운데 <옹알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아기 천사께서 옹알이를 시작하신 아침 나와 모든 것들의 사이가 한결 좋아졌다 無事通過다 옹알이는 의미도 무의미도 다 통한다 하느님은 그것만 가르쳐 보내셨다 나의 말씀들을 잠시 반납했다”

 

참 좋지요? 제법 근엄한 척하던 저도 손자 손녀들 앞에서는 가볍게 무장해제를 당하고 맙니다. 옹알이는 무의미한 소리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소리가 ‘나’와 ‘모든 것들’ 사이를 평화롭게 만들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말을 재배치하여 의미를 빚어내고 영원성의 편린을 드러내는 시인도 아기의 옹알이를 능가하는 언어를 구사할 수 없음을 알기에 잠시 말씀을 반납했다고 말하네요.

 

많은 목회자들이 해야 할 많은 일들 앞에서 전전긍긍합니다. 할 일이 없으면 불안해하는 이들도 많더군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교회에 머무는 것을 자랑삼아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많은 할 일들 속에서 버둥거리다 보면 존재의 빈곤으로 귀착할 수밖에 없다는 데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많은 데 ‘있음 그 자체’로 길을 찾는 이들에게 이정표가 되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바라볼 사람이 없다는 것, 마음 깊이 존경할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 시대의 영적 빈곤의 실상입니다.

 

지난 시절에는 우리 의식 속에 둥두렷이 떠오르는 별들이 있었습니다. 시절이 아무리 어두워도 그분들이 계시기에 절망 속에 유폐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 방울에 마른 목을 축이는 새들처럼 그분들의 말씀을 경청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그런 권위에 값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큰 정신이 사라졌다는 증거로 볼 수도 있지만, 들으려는 마음이 사라진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중력에 이끌릴 뿐 하늘을 향해 비상하려는 마음이 망실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욕망의 전장은 우리에게서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이웃을 앗아갑니다. 과도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시선은 메두사를 닮아 바라보는 모든 대상을 돌처럼 굳게 만듭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실한 사랑이 아닌 욕망이 개입하는 순간 인간은 타자화 되고, 타자화가 더 진행되면 인간은 언제든 교체 가능한 사물로 변합니다. 사물들의 세상, 그곳은 생명의 온기가 사라진 죽음의 벌판이 되겠지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차가운 세상에 온기를 나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동원의 대상으로 삼지 않습니다. 그를 자기 뜻에 따라 바꿔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금지와 강요가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비자발적인 동참은 오류의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 전가하는 태도를 만들어냅니다. 몰주체적인 존재의 탄생입니다.

 

지금 우리가 혼신의 힘으로 붙들어야 하는 것은 세상의 물화를 거스를 수 있는 힘으로서의 사랑입니다. 우리 시대의 사랑은 아낌 속에서 구현된다고 생각합니다. 서로를 귀히 여기고 아낄 줄 아는 이들이 늘어나야 합니다. 언제든 찾아가 기댈 수 있는 언덕이 있다면 그런대로 살만하지 않겠습니까? 환속한 시인 김달진은 이런 소망을 피력했더군요.

 

“내 몸을 완전히 기댈만한 든든한 벽을 가지고 싶다. 참 마음으로 나를 안아 주는 크고 안전한 가슴을 가지고 싶다. 나를 속이는 내 마음의 괴로움을 숨김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랑을 가지고 싶다.”

 

교회가 바로 그런 곳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가야 할 길이 참 멀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해 허수해진 마음에 바라보아야 할 별 하나가 떠오른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목사님은 교회 중직들과 교인들에게 번영 신학과 외형적 교회 성장이라는 목표를 버리자고 제안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년도 교인 수 증가 목표를 묻는 교회 중직들의 질문에 그렇게 대답하셨다는 말을 듣고 좀 놀랐습니다. 그런 질문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고, 부임한지 얼마 안 된 분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관습에 도전했다는 사실 또한 놀라웠습니다. 저는 그런 압박을 별로 받아보지 않아 말할 자격도 없지만 실제로 많은 목회자들이 유형 무형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더군요. 문득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예수 정신을 꼭 붙드는 본을 바로 세우기보다는 늘 교회성장이라는 지엽말단에 집착하도록 하는 것이 사탄의 전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너무 극단적인 생각인가요? 급하다고 서두를 것도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잠시 동안 그분의 일을 하다 가는 것이니까요. 속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이가 가까이 와서 참 좋습니다. 일하다가 문득 생각이 나거든 자장면이라도 함께 나누자고, 혹은 공원을 함께 걷자고 연락해 주세요. 평안.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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