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문을 여는 마음

한종호의 '너른마당' 2015. 5. 10. 15:41

한종호의 너른 마당(19)

 

성서의 문을 여는 마음

 

 

최근 차정식 교수의 《거꾸로 읽는 신약성서》를 읽으면서 그리고 <꽃자리> 웹진에 “곽건용 목사의 짭조름한 구약 이야기” 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서 신앙인들에게 성서해석의 바른 관점을 세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런데 이 문제만큼 어려움을 주는 일 또한 없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부요를 누가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샘에서 물을 마시는 목마른 사슴처럼 말씀에서 마시는 분량보다 거기다 남겨두는 것이 훨씬 많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성서는 말씀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많은 견해와 상황에 따라 여러 가닥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주님은 당신의 말씀을 여러 색깔로 채색하시어 그 말씀을 고찰하는 사람마다 그 안에서 주시고자 하는 말씀을 볼 수 있게 하신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거기서 풍성하게 찾을 수 있도록 주님은 그 안에 많은 보화를 숨겨 놓았다고 할까.

 

 

 

 

그렇다. 고정적 관점이나 도식적인 이해, 등으로 구성되는 성서읽기가 될 경우, 성서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구태의연한 해석과 초보적 낱말풀이에서 그칠 경우 성서의 세계가 펼쳐주는 ‘점입가경’(漸入佳境)의 진면목을 가리는 일이 될 수 있다. 성서독법의 기본 결말에 대하여 전혀 예상이 불가능하고, 결론적 메시지에 대하여 속단하지 않는 성서읽기가 될 때 우리의 삶에 영적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것은 단지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다. 성서 자체가 본질적으로 인간의 논리를 거스르는 반전과 역설의 충격으로 존재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성서를 이미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성서를 늘 새롭게 읽고, 재해석하는 일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물론 지금까지 이해하고 알아온 성서에 대한 지식과 깨달음이 더 깊은 깨우침을 얻는 일에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전혀 새로 대하듯 성서를 읽어나가는 자세를 갖추지 않는 한 성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내면풍경을 보여주지 않는다. 내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한 내게는 그 알고 있는 부분만 보일 뿐이다. 성서가 우리들에게 보여주려는 깊고 깊은 세계에 대해서는 눈이 멀게 되는 것이다.

 

성서는 아무리 퍼 올리고 퍼 올려도 결코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아서 미리 판단해버리는 예단(禮斷)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의 기성관념과 관점을 기습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힘을 지닌 책이라는 점을 기억하여 나의 맹점(blind spot)이 어디에 있는지 성령으로부터 일깨움 받는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한 가지 사건의 기록을 놓고도 무수한 관점에서 그 의미의 지층(地層)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 자신의 제한된 시각과 관점을 고정시켜 성서를 해석하고 그것을 율법주의적으로 혹은 교과서적으로 정형화하는 것이 얼마나 성서에 대해 우(愚)를 범하는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성서는 이미 죽어 박물화(博物化)되어버린 기록이 아니다. 성서를 대하는 이와 함께 살아 움직이고 자라나는 책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다면, 성서 독자가 성서와 어떤 관계를 맺어나갈 것인가가 관건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기록되어 있는 문자의 표면적 세계 밑바닥에 숨겨져 있고, 쌓여 있는 놀라운 사연들이 한 올 한 올 풀려나올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며 체험하기를 바라시는 세계의 무궁무진함을 비로소 깨달아가는 것이다.

 

“나의 길은 너의 길과 다르다”고 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파격’(破格)으로 다가오신다. 예기치 않은 각도에서 날아드는 화살처럼 우리들의 영혼을 찌르셔서 ‘전환(轉換)과 전복(顚覆)의 역설적 논리’로 우리가 이제껏 안심하고 디뎌왔던 대지를 뒤엎어 새 기초를 세우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서 앞에서 결코 안심하고 있을 수 없다. 나의 믿음과 생각, 그리고 결론을 지지해주고 증명해주는 책이라는 안이한 생각에서 그 반대의 관점으로 이동해야 한다. 나는 언제나 성서 앞에서 처음 서 있는 자이며, 어떤 결론에 직면하게 될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성서읽기는 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음성을 난생 처음으로 듣는 기회이며, 전에 보지 못했던 장면을 자신의 생애에 최초로 목격하게 되는 사건으로서의 의미를 가져야 한다.

 

이런 뜻에서 성서는 그야말로 우리에게 치열하게 도전해오는 책이다. 그 도전으로 낡고 헛된 껍데기가 벗겨지고 무너지게 하는 힘을 지닌 존재다. 그래서 나를 지탱했다고 여겼던 것이 소멸하고 지금까지 생각해볼 수 없었던 새 것이 생기는 그런 체험을 이루어내는 성서읽기가 될 때 성서는 우리의 영혼에 살을 붙여주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파격과 역설, 불시의 반전과 허점이 보이지 않는 도전, 인간이 만들어낸 형식논리의 완벽성을 깨는 대안 등이 성서에 잠복해 있다. 그런 점에서 일체의 편견과 선입관을 버리고 성서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요구되는 것이다.

 

성서에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온갖 종류의 비극과 절망, 희망과 재기, 갈등과 화해, 원한과 용서가 있다. 영광과 파멸, 배신과 우정, 전쟁과 평화, 타락과 공의, 탄압과 저항, 외로움과 사랑, 만남과 헤어짐, 위장과 생존, 약탈과 복수, 순결과 변질이 있다. 그리고 삶과 죽음에 얽힌 사연들이 녹아 있다. 그리고 이 사연에 얽힌 아픔과 기쁨들이 하나님의 영혼과 결합하여 인간을 바로세우는 섭리의 흐름을 증언해주고 있다.

 

이 대하드라마가 담아내는 인간의 모습이 수천 년을 두고 영적 고뇌와 묵상 가운데서 삭고 삭아져서 역사의 풍파에 마모되지 않는 정수(精髓)만이 남아 인간의 심령을 치고, 일깨우며 하나님의 기르심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되면서 성서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힘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성서를 대하는 우리들은, 먼저 성서에 등장하는 인간들의 내면에 깊숙이 들어가서 이들이 어떤 문제에 직면해 있었고 어떤 선택을 하려 했는지 함께 호흡하는 추체험(推體驗)의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 그러려면 성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이 무슨 도전에 둘러싸였는지, 그리고 어떤 유형의 고뇌와 희망 사이에서 오갔는지 그 마음의 밑바닥과 객관적 상황에 대한 이해력을 높여야 한다.

 

이런 전이해(前理解)와 특히 상상력은 성서의 인간과 사건을 살아 있는 현실로서 오늘에 현장화 하는 과정이라는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다시 말해서 성서가 오늘의 현실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와 만나는 접점을 발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오늘의 나의 삶과 우리의 공동체의 운명에 직격탄과 같은 발언권을 지닌 책으로서의 성서가 아니라면, 그것은 이미 영적 감동의 저수지로서의 위상을 갖지 못한다. 성서를 쓴 기자들도 자신들이 삶의 현장에서 대면한 문제들이 성서의 고백 속에 흡수되어, 이 책을 읽게 될 얼굴 모를 무수한 인류의 후예들이 생명적 지침을 발견하기를 기원했다는 점은 성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여기서, 덧붙여 꼭 언급하고 싶은 것은, 성서읽기의 목적은 성서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성서는 인간의 운명과 하나님의 움직임이 한데 뒤엉켜 이루어내는 섭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행로를 담아낸 지도이자 화살표일 뿐이다. 정작 문제는 우리네 삶이다. 삶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성서이다. 삶이 겪어내는 갖가지의 사연들이 일차적이고, 그 사연에 담긴 뜻의 신앙적 해석은 그 다음 단계다. 삶을 치열하게 살아내고 그 가운데서 직면하게 되는 문제들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조밀하게 가늠하는 일이 앞서지 않으면, 성서는 우리들에게 그 안에 담겨 있는 놀라운 음성을 돌려주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성서의 내면에 있는 배신의 골짜기와 탐욕의 봉우리, 특권의 아집과 파멸의 고독 등 갖가지 삶의 결을 만져내야 한다. 이 삶이 손에 잡힐 때 우리는 성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더욱 분명하게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성서는 본질적으로 이 같은 삶의 한복판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질문에 대답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인간의 고뇌와 아픔, 진퇴양난, 혼돈 등에 예민한 사람에게 자신을 스스럼없이 열어 보인다. 이러한 자리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하시고, 어떤 길을 뚫어내시는지 성서는 증언해주고 있다. 따라서 성서를 대하는 자는 성서 속에 등장하는 인간과 역사의 정황을 조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정황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접근하시는지 기대하면서 읽게 되면 우리는 마침내 성서의 중심 메시지를 직시하게 될 것이다.

 

성서해석의 예

 

그럼 같이 성서의 문을 열어보자. 먼저, 마가복음 10장 31절의 “그러나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살펴보자.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겸허함을 강조한 말씀이 어떠한 모습으로 다가오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우리의 무엇을 기습하고 있는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 대목은 우선 부자 청년의 등장과 관련이 있다. 그는 가진 것으로 보나, 교육수준으로 보나 또는 가정환경이나 그 개인의 성품과 자세로 보나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인격으로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는 영생에 대한 길을 묻는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의외이다. 왜냐하면 그만한 정도면 누가 보아도 영생의 조건을 이미 지니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과의 문답과정에서 우리는 이 부자청년이 율법의 정도(正道)에 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실로 연소한 청년이 존경할 만한 믿음과 인품을 드러내는 모습에서 예수께서는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신다. 보기 드문 합격품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예수께서는 세상이 그 청년에게 가장 부럽게 여기는 것이 사실은 영생으로 가는 길에서 그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결정적 약점임을 지적하신다.

 

“이보게 청년, 이제 재물과 연을 끊으시게. 그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게.”

 

영생을 질문한 그에게 실상 최고의 우선권은 영생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근심하면서 자리를 뜨고 만다. 재물을 유지하는 일이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일보다 앞서기에 그는 영생의 길을 포기하고 돌아서버린 것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재물을 가진 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충격이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더욱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다. 들어가기 어려운 정도가 어느 정도냐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 이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뜻이나 다름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성공하고 재물 많은 것이 축복의 징표요, 세상의 부러움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판국에 그것이 영생을 가로막고 있다는 선언은 결코 반가운 소리가 아니었다. 제자들은 자신들과 비교해볼 때 어느 면에서도 뛰어나고 존경스러운 청년이 영생과 인연이 없다고 한다면, “과연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자신들의 처지를 돌아본다. 자기들은 재물이 없으니 합격일까 하는 생각이 들 만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 율법의 모든 것을 지킨다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었다. 먹고 살려면 때로 거짓말도 해야 되고, 피치 못하게 속일 때도 있고 없는 살림에 부모님 공양하기가 벅찰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베드로가 돌파구를 연다. ‘다른 것은 그 청년과 비교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 한가지만큼은 우리가 자신이 있다’는 식의 발언이었다.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라 왔습니다.” 영생의 길에 들어서는 자격을 그래도 예수님, 당신을 따라 다니는 제자들은 획득하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인 동시에, 이를 스승의 입으로 직접 확인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바로 이 현장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마가복음 10장 13절 본문의 대목이다. 도대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서 무엇을 보셨길래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

 

한마디로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 희생했다는 것, 고난을 당했다는 것, 그런 것들이 이들에게 이미 ‘기득권’이 되고 있음을 목격하신 것이다. 재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이 기득권이 아니다. 재물을 포기했다는 것 또한 ‘배타적 기득권’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여기서 보게 된다. 부자청년의 경우와는 또 다른 반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포기가 어느새 어떤 것을 획득할 수 있는 특별한 권리로 내세워지는 순간, 그것은 거꾸로 영생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로 돌변하고 만다는 것을 단호하게 짚어내신다.

 

헌신과 봉사, 투쟁과 고난, 양보와 인내 등은 참으로 아무나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다. 칭찬받기에 족한 행위들이지만, 그런 것들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특권의 위치를 주는 조건으로 작용해야 한다고 스스로 주장한다면, 즉시 그 첫째 되는 삶의 모습은 꼴찌가 되는 조건으로 변질한다는 매서운 경고가 여기에 담겨 있다. 가령, 독립항쟁을 한 것이 자기도 모르게 기득권으로 여겨질 때 독립의 영웅들이 비극적으로 타락했고,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고난 받은 이들이 그 고난의 열매를 기득권화시킬 때 무너진 것을 우리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 그대로 목격하고 있다. 만사를 제쳐놓고 희생적으로 헌신했던 선한 신앙인들이 그 헌신의 삶이 차츰차츰 교회 안의 기득권이 되어서 신앙공동체에 깊은 상처와 괴로움을 주는 일을 우리는 곧잘 보고 있지 않은가.

 

갖은 핍박과 고난 속에서 선교공동체의 지휘본부가 되었던 초대 제자공동체가 바로 그러한 배타적 기득권의 향유라는 “먼저 되었던 자가 나중 되는 위기”에 직면했던 것을 마가는 제자 중의 제자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고백적으로 증언했던 것이다. 잘 참아놓고 그 참은 것을 내세우는 순간, 기껏 마음 넓게 양보해 놓고 양보한 것을 무언가 획득하기 위한 조건으로 삼는 순간, 순수한 뜻으로 겪은 고난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순간,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은 결국 패망하고 만다는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전율해야 한다. 내가 버린 것을 그렇게 하지 못한 남과 비교해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기득권의 징표가 된다고 여기는 마음을 일거에 격파해버리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특히 한국교회의 교권주의적 위계질서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로 전혀 가볍지 않다.

 

움켜쥐고 있는 것도 하나님 나라를 가는 길을 가로막는 기득권이요, 버린 것도 그와 다를 바 없는 영생의 장애일 뿐인 기득권이 될 수 있다는 이 말씀이 오늘날 모든 한국교회의 가슴을 뜨겁게 내리치는 음성으로 들린다면 이 도전은 우리를 마침내 살리는 생명의 말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약성서의 한 구절을 더 보도록 하자. 출애굽기 4장 13절에 보면, 모세가 머뭇거리며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주님, 죄송합니다. 제발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 대목은 호렙산 떨기불꽃 앞에 선 모세가 하나님의 파견명령에 대하여 거듭거듭 따를 수 없음을 밝히는 장면이다. 그는 자신이 여러 가지로 능력이 없어서 맡기신 일을 수행할 수 없다고 하나님께 고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이 소명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진정 그의 능력 부족에 대한 겸허함 때문일까? 그는 애굽으로 돌아가서도 그렇고, 이후 광야에서도 백성들의 불평과 반란, 그리고 배신을 수없이 겪게 된다. 이것은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아니었다.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낼 것을 요구하여 도리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역이 심해지면서 그 비난의 화살이 모두 모세에게로 집중되자, 모세는 하나님께 “아니, 이럴 것을 뻔히 아셨으면서 왜 나를 이곳에 보내셨습니까”라고 항변한다.

 

훨씬 이후에, 물 때문에 고생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능멸과 질타를 당하자, 하나님에게 지시받은 대로 바위에서 물을 내게 하면서 모세는 자신의 마음속에 그동안 엉켰던 부화를 있는 대로 다 터뜨린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는 인간에 대하여 깊은 환멸을 경험했던 것이다. 모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애굽 감독관을 해치우고 동족을 구했다. 하지만 그것이 빌미가 되어, 그것도 다른 이가 아닌 동족의 밀고로 쫓기는 신세가 되었던 때가 있었다. 그런 지경에서 광야에서 수십 년의 기막힌 이방인의 삶을 살아야 했던 그의 내면에, 자신의 동족이 고난을 겪고 있다고 했을 때 무슨 마음이 들었을까? ‘아, 속히 달려가야지’ 하였을까? 아니면, ‘그런 종자들은 고생을 더 해야 정신을 차려’ 했을까? 혹여 고난의 자리에서 동족을 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하더라도 그가 인간에게 겪은 환멸의 상처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그는 자기종족으로부터 배신당했던 사람이다.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깊이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무언가 의로운 일을 했다고 여겼지만 바로 그들로부터 배반당했다. 그로 말미암은 환멸의 상처로 울분을 삭이며 광야로 떠나야 했던 모세의 모습을 먼저 떠올리지 못한다면, 이 호렙산에서의 모세의 거절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도대체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가장 아끼고 사랑했다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배신당하고, 그로써 인간에 대한 환멸의 경험이 존재한다면 이 모세의 심사를 헤아리고도 남지 않을까?

 

이런 일을 겪었을지 모르겠지만, 결국 신앙은 인간에 대한 신뢰에서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환멸에서 정작 출발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 환멸의 강을 사랑으로 넘을 때 신앙은 우리 안에서 새롭게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수한 신앙인들이 목회자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받고 있는가? 이 인간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했다가 예기치 않게 당하는 좌절과 고난, 그리고 상처는 이렇게 해서 새로운 성숙의 단계로 진입하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

 

사실 따져보자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은 실로 얼마나 환멸스러운 존재인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용서에 용서를 거듭하시면서, 새로운 존재로 만드시기 위해 지금도 역사하심을 믿고 고백한다. 신앙인은 바로 그런 역사에 부름 받은 자들이다. 인간에 대한 환멸로 신앙의 의욕이 꺾이고, 주저앉고 싶을 때 호렙산의 모세가 지녔을 심사를 떠올리면서 그가 하나님의 끊임없는 격려와 능력주심으로 마침내 환멸의 골짜기를 건너 하나님의 사람으로 섰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오늘날 교회의 현실 앞에서 절망하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을 새롭게 일으켜 세울 수 있지 않을까? 성서가 이렇게 읽어질 때 우리는 성서에서 한없는 용기와 지혜, 그리고 생명의 꺾을 수 없는 소생력을 피와 살로 얻게 되리라 생각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부요를 누가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목회자이든, 신학자이든, 말씀을 깊이 연구하는 평신도이든, 누구라도 말씀의 보화의 한 부분을 접하게 될 때, 자기가 발견한 것이 그 말씀에 담겨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안에 담긴 여러 보화 중에 한 가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온전히 찾아낼 수 없었던 그 말씀의 부요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때를 따라 주시는 말씀에 대해 감사하고 뒤에 남겨둔 풍요에 대해 믿음으로 기다리는, 그리하여 항시 말씀에 영혼의 두레박을 내려 영적 양식을 얻어야 하지 않을까.

 

정보화 시대라 그런지 스마트폰과 인터넷 매체와 더 많이 쏟아지는 종이쪽과 그 밖의 각종 전파와 영상들이 유용한 것이라며 쉴새 없이 정보를 토해내고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 지식과 정보들은 우리의 실체를 드러내기보다 허세와 허상을 키워주고, 우리의 상처를 건성으로 치료해주면서 ‘괜찮다’(예레미야 6:14) 할 뿐이다. 다들 뱃속 비어가는 것 걱정하며 ‘뱃속을 살찌우는 데’ 열심이라면 그리스도인은 ‘뼛속을 살찌우는’ 말씀에(잠언 15:30) 더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사야서가 말씀하듯이 어떤 영화와 영광을 누릴지라도 “모든 인생은 한낱 풀포기, … 풀은 시들고 꽃은 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기”(이사야 40:6, 8) 때문이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posted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