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의 용기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35)

 

만남의 용기

 

 

평안하신지요?

 

엊그제 보름달 보셨어요? 어떤 모임에 가서 강연을 마치고 나오는데, 산 위에 걸린 달이 마치 세수라도 하고 나온 것 같이 청신한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슬프도록 깨끗한 달이었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들려주는 프란체스코의 일화가 떠올랐습니다. 아씨시의 거리를 배회하던 그는 허공 위로 두둥실 떠오른 보름달을 보았습니다. 온 세상이 마치 공중에 떠서 흘러가는 것 같았습니다. 유현하고 미묘하기 이를데 없는 절대의 세계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예기치 못한 기적과 마주친 것 같은 황홀감이 그의 가슴으로 흘러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그 기적을 즐기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로 달려가 종탑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종을 울렸습니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사람들은 불이라도 난 줄 알고 옷도 제대로 챙겨입지 못한 채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들은 교회로 달려갔고, 종탑에 있는 프란체스코에게 물었습니다. “왜 종을 치는 거요? 무슨 일이라도 있소?” 프란체스코는 태연하게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세요. 하늘에 떠 있는 저 달 좀 보시라구요!”

 

성인들은 어린아이를 닮는가 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살아 있는 정신은 ‘낙타, 사자, 어린이’라는 세 단계를 거친다고 말했습니다. 낙타의 단계는 자기 어깨 위에 가장 무거운 짐이 얹히기를 기다리는 정신입니다. 허약한 정신은 무거운 짐을 회피하려 하지만 살아있는 정신은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실재의 사막을 건널 용기를 냅니다. 사자의 단계는 스스로 주체가 되는 단계입니다. 이때 살아 있는 정신은 타자의 평가나 유혹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어린이의 단계는 세상과 천진하게 하나되는 단계입니다. 어린이는 배움을 향해 자기를 개방할 뿐만 아니라, 낯선 이들과 사귀는 일에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말이 있습니다. 군자는 그릇처럼 자기 동일성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말일 겁니다. 군자는 고집스러운 자아가 없기에 능소능대하게 자기를 바꿀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유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같이 되고, 율법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율법 없이 사는 사람이 되고,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자기중심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내적 자유로움을 누리며 살았던 것입니다.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네요. 그 밤의 맑은 보름달이 제 마음 속에 있는 맑음에 대한 근원적 그리움을 자극했던 모양입니다. 오탁汚濁의 세상 속에 사는 동안 제 마음도 어지간히 흐려진 것 같습니다. 윤동주의 <참회록>을 기억하시지요? 시인은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남아 있는 자기 얼굴을 어느 왕조의 유물인양 아주 낯설게 바라봅니다. 시인은 그 얼굴이 '욕되다'고 말합니다. 시를 쓰던 당시(1942년 1월 24일) 만 24년 1개월을 살았을 뿐인 그이지만 시대의 어둠과 자기 삶의 무게를 주체하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어 보자”고 스스로를 격려합니다. 돌이켜 보면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는 그 정성스러움을 잊은 지 이미 오래입니다. 눈빛 맑은 사람을 볼 때마다 예토穢土에서 바장이느라 참 삶의 길에서 멀어진 나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아뜩해집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인간은 자유를 위해 싸우는 신의 도구라고 말합니다. 자유를 생의 목적으로 삼은 사람다운 표현입니다. 문제는 그 인간이 ‘위기에 처해 있는 본질’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백척간두로 우리를 인도하는 자유보다는 들큼한 예속을 더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채 육체로 전락한 인간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습니다. 저는 조금 세상사에 지쳐 있습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코헬렛의 말이 몸과 맘으로 실감되는 나날입니다. 자기 욕망에 충실하게 복무하는 이들이나, 진보적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나 자기 이익 앞에서는 별로 양보가 없습니다. 그들이 자기 삶의 근본인양 내세웠던 공적 가치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곤 합니다. 나 또한 다를 바 없으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한 조직이나 공동체 속에서 오랫동안 함께 살아왔던 이들이 앙숙이 되어 서로 미워하고 백안시하는 것을 보면 고통스럽습니다. 그들은 서로 피해자라고 말합니다. ‘우리’와 ‘그들’을 가르면서 문제는 늘 ‘그들’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지성인들의 모임에서도 이것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성이란 반성적 사유의 능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상처입은 마음은 성찰적 거리를 확보하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렘브란트의  <직물상 길드 조합원들>

 

 

타자 속에서 자기를 상실할 수도 있음을 인정할 때 진정한 만남이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자기 동일성 속에 포섭되지 않는 이들을 비난하거나 배제함으로 자기를 지키려 합니다. 하지만 동일성만 고집한다면 성숙이나 성장은 불가능합니다. 낯선 타자와의 만남은 우리 삶의 안정성을 뒤흔들기도 하지만,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스의 궁벽진 시골 마을 마니 사람들은 나그네를 극진히 환대했다고 합니다. 고립되어 살던 그들에게 나그네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가져오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펠로폰네소스 남부 여행기를 쓴 패트릭 리 퍼머는 “고립된 산골 마을에 새로운 농담을 퍼뜨린 나그네는 곧 은인이자 연인으로 등극한다”고 말합니다(《그리스의 끝 마니》, 강경이 옮김, 봄날의책, 2014년 7월 21일, p.335). 멋지지 않습니까? 만남은 삶을 풍성하게 합니다. 만남 자체를 거부하면서 서로를 비난하는 것은 비겁함의 소산입니다.

 

벤자민 J. 카플란의 책을 읽다가 전에는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렘브란트의 그림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화가가 1662년에 그린 <직물상 길드 조합원들>이라는 그림입니다. 그림에는 여섯 사람이 등장합니다. 탁자 위에는 커다란 책이 펼쳐져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은 책에서 눈을 뗀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모자를 쓴 다섯 사람은 직물의 품질을 조사하는 조합원들입니다. 하얀 색 컬러가 달린 검은 옷을 입은 그들은 아주 진지한 표정입니다. 뒤에 선 채 모자를 쓰지 않은 사람은 그들의 허드렛일을 맡아 해주는 하인입니다. 그림만 보아서는 더 이상의 정보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카플란은 그 그림 속의 인물들이 각기 다른 종파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들 5명은 4개의 상이한 종파에 속해 있었다. 책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조합장은 칼뱅파였다. 왼쪽에서 두 번째 반쯤 서 있는 사람은 엄격한 올드 프리지안 언어를 사용하는 메노파로서 회중의 대표였다. 다른 두 조합원은 자기 집에 비밀교회를 가지고 있는 가톨릭이었다. 다섯 번째 사람은 청원파였다.(벤자민 J. 카플란, 《유럽은 어떻게 관용사회가 되었나》, 김응종 옮김, 푸른역사, 2015년 7월 29일, p.365)

 

16세기와 17세기의 유럽은 종파간의 갈등과 전쟁으로 여일이 없었습니다. 서로 죽고 죽이고, 박해하고 파괴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하지만 17세기 중반의 네덜란드 사회는 아무런 편견이나 사회적 차별이 없는 사회를 지향했다고 합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은 바로 그런 네덜란드 사회의 관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로 적대감을 느낄 수도 있는 이들이 어울려 함께 일합니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준 것은 휴머니즘이라는 공통의 유대였습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 그림을 바라보았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들을 동화시키려 하거나 도외시하는 한 평화는 없습니다.

 

선생님께 괜히 푸념만 늘어놓은 것 같습니다. 요즘은 ‘부질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세상사가 득돌같이 이루어지기야 하겠습니까만 그래도 이런저런 일들로 마음이 적잖이 무거운 나날입니다. 보드기 주제에 누구를 탓하느냐고 나무라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 마음이 조금씩 타자를 향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진영 논리에 빠진 이들은 회색지대를 허용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도 비난을 무릅쓰고 끝끝내 중재자로 서보려 하는 선생님의 노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가끔 보여주시는 헛헛한 웃음이 안타깝지만 그래도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엊그제 보았던 맑은 달은 맑음이 곧 본질임을 일깨워주는 것 같습니다. 그 맑음을 향한 여정에서 부디 지치시지 마세요. 청안청락하시기를 빕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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