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오늘’의 점철點綴

김기석의 하늘, , 사람이야기(48)

 

인생은 오늘의 점철點綴

 

평안하신지요?

 

이제 소설 절기에 이르렀네요. 교회력으로는 일 년의 마지막 주일을 막 지냈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대림절의 촛불을 하나하나 밝혀 나가면서 또 다시 기도를 올려야 하겠습니다. 시대가 빚어내는 어둠과 혼돈이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윤동주는 19426월에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쉽게 씌어진 시> 중에서)라고 노래했지요. 그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이 나라는 국제사회에서 노골적으로 조롱받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외국 유수의 언론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후퇴를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그렇게도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 왜 우리 국민들의 눈에는 안 보이는 걸까요? 내면화된 공포심 때문일까요? 아니면 숭배할 우상 없이는 기다리지 못하는 허약함 때문일까요?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하고 탄식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이사야는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하고 응답했습니다. 그때 주님이 이사야에게 주신 말씀 기억하시지요?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너희가 듣기는 늘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못한다. 너희가 보기는 늘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못한다하고 일러라.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그 귀가 막히고, 그 눈이 감기게 하여라. 그리하여 그들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또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게 하여라. 그들이 보고 듣고 깨달았다가는 내게로 돌이켜서 고침을 받게 될까 걱정이다(이사야 6:9-10).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예언자가 말씀을 전하는 까닭은 둔감해진 영혼에 타격을 가해 그들을 화들짝 깨어나도록 하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들을 마음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듣지 않을 뿐더러 그 마음을 더욱 완고하게 닫을 것임을 주님은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재앙이 거듭되는 데도 완고함의 껍질을 깨지 못해서 더 큰 재앙을 자초했던 바로는 어쩌면 우리들 속에 있는 어리석음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충격과 공포에 사로잡힌 이사야가 주님! 언제까지 그렇게 하실 것입니까?” 하고 묻자 주님은 성읍들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어질 때까지, 사람이 없어서 집마다 빈 집이 될 때까지, 밭마다 모두 황무지가 될 때까지, 나 주가 사람들을 먼 나라로 흩어서 이곳 땅이 온통 버려질 때까지 그렇게 하겠다”(이사야 6:11b-12)고 하십니다. 바닥까지 내려가기 전에는 돌이키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란 종내기의 버릇이라는 말인가요?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의 몫을 챙겨 먼 곳으로 이주해서 방탕한 생활을 했던 둘째 아들을 보면 그런 것도 같습니다(누가복음 15).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를 먹으며 연명하다가 마침내 제 정신이 들어 아버지 집을 떠올리게 되었다지요?

 

 

 

 

누군가의 호된 꾸지람을 듣고 돌이킬 줄 아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는 큰 사람입니다. 아무리 맞아도 돌이킬 줄 모르는 이들이 더 많으니 말입니다. 제가 전하는 말씀이 가끔은 장군 죽비가 되어 어깨를 후려치는 것 같았고, 때로는 싸리비로 마당을 정갈하게 쓸어내는 것 같기도 했고, 때로는 양철북 소리처럼 쟁쟁하게 들려왔다고 하셨지요? 세월이 흘러도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다며 얼굴을 붉히실 때, 오히려 제가 부끄러워졌습니다. 저의 말과 삶의 괴리를 누구보다 제가 잘 알기 때문입니다. 물론 말씀을 따라 살아보려고 애는 쓰지만 그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배는 그만 먹으라고 하는 데도 숟가락질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몸과 마음에 밴 습기(習氣)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삽니다. 그렇다고 하여 지레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엘리 비젤의 자전적 소설인 팔티엘의 비망록서문에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의인 한 사람이 소돔에 찾아갔습니다. 그는 밤낮으로 거리와 시장을 오가며 욕심과 도둑질, 거짓과 무관심을 버리라고 외쳤습니다. 소돔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코웃음을 쳤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조차 없어졌습니다. 살인자는 여전히 살인을 했고, 현명한 사람들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습니다. 의인의 존재는 그저 풍경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 날 한 아이가 그에게 다가와서 말합니다. “가련한 분, 아무리 외쳐보아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모르시겠어요?” 의인은 알고 있단다라고 답합니다. “그런데도 왜 계속하세요?” “왜냐고? 처음에는 내가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단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지. 내가 지금도 외치고 있는 것은 그들이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란다.”

 

엘리 비젤은 2차 세계 대전의 격랑 속에서 세상이 온통 광기에 휘몰리고 있을 때 인간의 인간됨에 대해서 끊임없이 물은 작가입니다. 나찌의 만행으로 깊은 상처를 입었던 유럽의 지식인들 가운데는 소련의 공산주의 실험에 많은 기대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스탈린의 공포정치는 그들의 기대를 다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위의 작품에서 러시아로 귀환했던 주인공 팔티엘도 증오를 부추기는 현실 속에서 깊은 절망감을 맛봅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은 아무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뼈저리게 느끼는 것이지요. 작가의 의무는 끊임없이 그 시대의 광기를 폭로하고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는 바람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엘리 비젤은 소돔에 간 의인 이야기를 통해 작가의 의무를 환기시키려 했습니다. 듣는 이가 없어도 외쳐야만 한다는 것, 그것은 작가만의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의 슬픈 숙명입니다. 듣지 않는다 하여 외치지도 않는다면 결국 타성의 늪에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네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당장 자신의 삶에 변화가 없다 하여 자책하거나 지레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변화는 내가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갈망하는 자에게 위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물론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줄탁동시啄同時라는 말 아시지요?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려면 새끼와 어미 닭이 안팎에서 서로 껍질을 쪼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병아리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껍질을 깰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미 닭이 껍질을 쪼는 것은 안에서 밖으로 나오려는 노력이 무르익었을 때입니다. 성경은 그런 때를 카이로스라고 말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자주 말씀하시던 나의 때가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다마스커스에서의 체험이 그의 카이로스였습니다. 종교개혁도,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혁명도 마찬가지입니다. 혁명은 어느 천재적인 개인의 기획으로 도래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도둑같이 찾아옵니다. 물론 매개 역할을 하는 이들이 있어야 하겠지만요. 아직 때가 무르익지도 않았는데 어떤 일을 무리하게 추진하다보면 지치고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내가 필요합니다.

 

변화에의 갈망이 깊어지면 때가 오지 않겠습니까?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기도시집>지금 시간이 기울어가며 나를/맑은 금속성 울림으로 가볍게 톡 칩니다”(기도시집, 김재혁 옮김, 세계사, 19921210, p.11)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시간이 가볍게 톡 친다는 표현이 참 감칠맛나지 않습니까? 시인은 그 가벼운 터치에 감각이 바르르 떨며 깨어난다면서 그럴 때라야 비로소 조형의 날을 손에 쥔다고 말합니다. 예술가들은 그런 때를 기다리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다림의 시간은 막연하지만 긴장된 시간이기도 합니다. 때가 오지 않는다 하여 조바심칠 것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입니다. 자아의 중력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성인일 겁니다. 범인凡人들은 안간힘을 다해 욕망의 중력에 저항해보지만 번번이 실패하곤 합니다. 어쩌다 한 두 번 성공할 때도 있지요. 그럴 때면 자신을 격려하고 칭찬할 필요가 있습니다. 잘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다 보면 낙심하기 쉽습니다.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넘어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며 사는 거지요. 지향만 잃지 않으면 됩니다. 위를 바라보며 한 걸음씩만 바로 내디디면 됩니다. 인생이란 오늘의 점철點綴이라지 않습니까? 우리는 울 줄도 알아야 하지만 웃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끔 우리들의 못난 짓 때문에 웃으시지만, 그 웃음은 비웃음이 아니라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아시기에 짓는 포용의 웃음입니다. 그 웃음 때문에 우리는 넘어진 자리를 딛고 다시 일어서곤 합니다.

 

가을에 거두어들인 것들을 갈무리하느라 분주하시지요? 토종 종자들을 지키려는 그 노력이 참 귀합니다. 생각처럼 일이 간단하지 않더라며 고개를 가로 저으시던 모습이 떠오르네요. 그래도 그것이 꼭 해야 할 일이라 여기기에 더디더라도 그 일을 하시려는 것이겠지요. 배추를 잘라낸 후에 흙속에 남은 배추 꼬랑지는 긴 겨울 추위를 견디고 난 후에 노란 장다리꽃과 더불어 되살아나겠지요? 거기서 얻어진 씨앗이라야 튼실한 배추로 환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씨도리배추는 비록 초라해 보이지만 안으로 생명을 감추고 있기에 장엄한 생명입니다. 말없이 전개되는 자연의 법칙처럼 우리도 엄살하지 않고 주어진 세월을 살아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늘 마음으로 하시는 일을 응원합니다.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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