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가 창이다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75)

 

혀가 창이다

 

사순절을 앞두고 묵상집 원고를 썼다.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주관하고 한국YWCA연합회, 한국 YMCA전국연맹, 기독교방송이 연합하여 만드는 묵상집이다.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발간하는 고난주간 묵상집 원고는 이번에 세 번째로 쓰는 원고였다. 처음엔 공동 저자로 참여했고, 다음번엔 혼자서, 이번에도 혼자서 쓰게 되었다.


같은 기관에서 만드는 묵상집에 같은 주제로 거듭 참여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생각의 한계가 있고, 표현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원고 청탁을 다시 받으며 같은 주제에 대해 어떤 글을 써야 할지 생각이 많았다. 그러던 중 딸 소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림 이야기를 했다. 글에 그림을 접목하면 어떨까 싶었던 것인데, 딸에게 의견을 물었던 것은 소리가 독일에서 미술사를 공부했기 때문이었다.


한 번 생각해 볼게요 하더니 며칠 뒤 한 가지 의견을 제시했다. ‘아르마 크리스티’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아르마 크리스티’(Arma Cristi)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할 때 썼던 고난의 도구들, 즉 형구(刑具)들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소리가 보내준 그림 중에는 장 부시코(Jean Boucicaut, 1366-1421년)의 성무일과서에 등장하는 <그리스도 수난의 도구>도 있었다. 그림 속에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온갖 수난의 도구들이 마치 대장간의 연장들처럼 십자가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 도구들이 가한 고통을 생각하면 예수가 당한 끔찍한 고난이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한 번도 다룬 적 없는 주제, 흔쾌한 마음으로 아르마 크리스티에 등장하는 도구들을 하나씩 묵상하기로 했다.

 

그림 속에 담긴 다른 도구들은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게 뭘까 싶은 것이 있었다. 십자가 아래 타원형으로 넓게 자리 잡고 있는 분홍색 형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소리의 의견을 물었더니 대개는 창에 찔린 예수의 옆구리로 이해를 한다는 것이었다. 옆구리에 난 창 자국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림을 보며 고민을 하는 동안 내게 떠오른 생각은 달랐다. 그림이 담고 있는 것이 형구라면 오히려 사람들의 입술이 맞겠다 싶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겪었던 고통 중 그 중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 사람들이 함부로 쏟아낸 거친 말들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대뜸 이어지는 생각이 있었다. 혀가 창이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함부로 하는 말은 누군가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는 것과 진배없는 일이다. 창을 들고 휘두르지 않는다고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닌 것은,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누군가의 속을 창보다도 더 깊이 찌르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아르마 크리스티가 전해준 하나의 생각, 혀는 창이었다.

 

-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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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노의 팔을 붙드는 손

김기석의 새로봄(16)

 

진노의 팔을 붙드는 손

 

나는 그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지키려고 성벽을 쌓고, 무너진 성벽의 틈에 서서, 내가 이 땅을 멸망시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이 있는가 찾아보았으나, 나는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내 분노를 쏟아 부었고, 내 격노의 불길로 그들을 멸절시켰다. 나는 그들의 행실을 따라 그들의 머리 위에 갚아 주었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에스겔 22:30-31)

 

세상의 타락은 불의한 권력자들의 공모를 통해 진행된다. 하나님은 유다 땅을 가리켜 ‘더러움을 벗지 못한 땅’, ‘비를 얻지 못한 땅’(에스겔 22:24)이라 하신다. 억울한 사람들의 피가 흐른 땅, 나그네를 학대하고, 고아와 과부를 구박하는 땅, 남을 헐뜯는 이들이 늘어나고 부끄러움이나 죄책감 없이 음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많은 땅은 저주받은 땅이다.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품고 사는 이스라엘을 보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속이 내게는 쓸모도 없는 쇠찌꺼기’(에스겔 22:18)라고 말씀하신다. 기가 막힌 전락이다.

 

누구의 잘못인가? 모두의 잘못이라고 말함으로 사태를 두루뭉수리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한 나라의 타락은 지도자들의 죄악 때문이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소위 지도자연하는 이들을 통렬하게 비판하신다. 제사장들은 율법을 위반할 뿐 아니라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도 않는다. 지도자들은 불의한 이득을 얻으려고 사람을 죽이고 생명을 파멸로 이끈다. 예언자들은 그들의 죄악을 회칠하여 덮어 주고, 거짓된 신비로 사람들의 마음을 호린다. 지도자들이 그 모양이니 백성들의 삶이 온전할 리 없다. 폭력과 강탈이 판을 친다. 하나님은 그런 세상을 안타까워하며 무너지고 있는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투신하는 한 사람을 찾으신다. 무너진 성벽의 틈에 서서, 하나님이 땅을 멸망시키지 못하도록 막는 사람 말이다. 그런데 그런 이들을 하나도 찾을 수 없다고 하신다. 한결같이 썩어버린 것이다. 

 

 

 

 

프랑스의 리옹 미술관에는 루벤스(Pierre-Paul Rubens, 1577-1640)의 <그리스도의 진노로부터 세상을 지키는 성 도미니크와 성 프란체스코 >라는 그림이 있다. 종교 개혁의 여파로 유럽 세계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을 때 그린 그림이다. 화면의 상단에는 죄악에 가득 찬 세상을 보고 진노하여 손에 갈대로 만든 채찍을 들고 서 계신 예수님의 모습이 보인다. 주님의 왼편에는 당혹스런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며 마치 그의 손을 잡으려는 듯이 다가서고 있는 성모의 모습이 보인다. 오른편에는 근심스런 표정의 성부와 비둘기로 형상화된 성령이 있다. 화면의 하단에는 뱀이 휘감고 있는 지구본 위에 걸터앉은 도미니크 성인과 그 위에 손을 얹고 있는 프란체스코 성인이 등장한다. 둘은 아주 간절한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프란체스코는 맨발에 누더기 차림이다. 그들의 팔은 마치 내리치는 그리스도의 팔을 막으려는 듯 위로 치켜올려져 있다. 지금 주님의 진노의 팔을 붙들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기도*

 

하나님, 사방을 둘러보아도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습니다. 돈이라는 하나의 가치가 다른 모든 가치를 삼키고 있습니다. 초월의 관점에서 역사의 방향을 제시해야 할 종교조차 욕망의 벌판을 질주할 뿐입니다. 주님의 몸이어야 할 교회는 자기 확장에 몰두할 뿐입니다.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두리번거리지 않겠습니다. 부족할망정 우리가 먼저 바로 서겠습니다. 이런 우리의 결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우리를 붙들어주십시오. 아멘. 

 

-김기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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