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들은 모릅니다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77)

 

저들은 모릅니다

 

불가능한 조항 하나만 아니라면 자신도 기꺼이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가입하여 엄격하고 원시적인 그 모든 규정을 지켰을 거라고, 작가 폴 갤리코(Paul Gallico)가 말한 적이 있다. 성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규정에는 갤리코가 정말로 원하는 유일한 낙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수준 이하의 그리스도인을 향한 불손한 경멸과 넘치는 멸시였다.

 

브레넌 매닝의 <어리석은 자는 복이 있나니>에 보면 매닝이 1969년 새해 첫날을 ‘예수의 작은 형제들’과 함께 보낼 때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7명의 ‘작은 형제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몽마르 마을에서 하고 있는 노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근처 포도원에서 일하는 형제도 있었고, 목공과 석공 일을 하는 형제도 있었고, 그런 재주가 없는 형제들은 보다 단순한 일터로 갔다. 매닝은 역전 호텔에서 설거지도 하고 근처 농장에서 거름도 폈다.

 

 

 


자신들의 노임이 기준 이하라는 독일인 형제의 말과, 노동의 시간도 주먹구구라는 스페인 형제의 맞장구로 식탁의 대화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매닝은 자신의 고용주들을 교회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음을 지적했고, 프랑스인 형제는 그들이 위선자라는 뜻으로 말했다. 성토에 열이 오르면서 말투도 더욱 신랄해져 갔다.


그들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자신들의 고용주들은 일요일이면 온종일 잠이나 자고, 생각 없이 돈을 쓰고, 삶과 믿음과 가정과 수확 등에 대해 마음과 생각을 받들어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는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이다.

 

모두가 고용주를 성토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도미니크 봐이욤 형제는 식탁 끝에 앉아 한 번도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순간 매닝은 그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왜 그러나, 도미니크?”


다들 놀라서 물었을 때 그는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한 마디 짧은 말을 했다.


“저들은 모릅니다.”

 

그 이야기를 전하며 매닝은 ‘저들은 모릅니다’ 그 한 문장 때문에 자신의 분노가 긍휼로 바뀐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고 고백을 한다.


이해하기 힘들고 받아들이기 힘든 일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온다. 그럴 때면 우리는 흥분하고 분노하고 성토를 한다. 혼자일 때도 그렇지만 여럿이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봐이욤처럼, 봐이욤의 말을 의미 있게 새기고 있는 매닝처럼 숨을 고르며 ‘저들은 모릅니다’ 할 수 있다면, 극심한 분노가 긍휼로 바뀌는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많은 순간 우리의 분노 앞에서는 그런 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없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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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뵙는 주님

  • 오늘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저도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게 해 주시옵소서!

    이진구 2019.09.04 08:53

김기석의 새로봄(177)

 

눈으로 뵙는 주님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욥기 42:1-6)

 

하나님은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질문을 던지시며 대장부답게 허리를 동이고 일어서서 대답해 보라 하셨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유구무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문은 집요하다. 하늘과 땅과 바다에 있는 모든 것들, 모든 생명들에 대해 네가 아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욥은 아무 것도 대답할 수 없었다. 자연 현상은 물론이고 따오기, 산에 사는 염소, 들사슴, 들나귀, 들소, 타조, 말, 매, 독수리의 생태에 대해서도 욥은 대답하지 못한다. 그는 자기의 무지함을 절감했다. 세상은 우리 이해를 뛰어넘는 신비의 공간이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고,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言者不知 知者不言)지 않던가. 욥은 비로소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내려놓는다. 피조 세계도 다 알지 못하는 데 하물며 창조주의 신비를 누가 다 안다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속성이나 행태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욥의 고백은 적실하다.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욥기 42:2-3)

 

삶의 터전이 흔들리기 전까지 하나님은 그의 삶의 모든 것이었다. 하지만 교통사고처럼 느닷없이 찾아온 시련은 그의 삶 전체를 뒤바꿔놓았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흔들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도 흔들렸다. 하나님은 졸지에 낯선 분이 되었다. 욥에게 있어 하나님은 임마누엘 칸트가 말했듯이 ‘도덕적 요청’으로 존재하는 분이었다. 친밀하다고 여겼지만 그분은 귀로만 듣던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고난의 용광로를 거친 후 그는 새로운 인식의 세계로 안내되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욥기 42:5) 사람들의 가르침 혹은 전통에 의지해 알아온 하나님이 낯설어진 자리에서 새로운 인식의 싹이 움터 나왔다. 인간의 생각을 한없이 뛰어넘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 경외심 없이는 그 앞에 설 수 없는 하나님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 속에서 숨 쉬고 살 뿐이다.

 

*기도

 

하나님, 느닷없이 닥쳐오는 견디기 어려운 고난 앞에서는 모든 이론과 신학이 잿빛으로 변합니다. 마음의 중심이 무너지고 나면 세상은 온통 낯선 곳으로 변하고, 삶의 희망은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응시하다보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일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무한합니다. 유한한 인간이 그 무한의 세계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넓고 광활한 세계에 그저 안길 따름입니다. 우리 눈을 여시고,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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