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이라는 호

  • 감사합니다. 그런데, 장로님 호 가 왜 폭염이래요 ?

    이진구 2019.09.06 08:58
  • 설마,
    농담하시는 거죠?

    물러가는 폭염을 장로님의 호로 착각한 것은 그만큼 놀라고 당황스러웠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한희철 2019.09.06 16:47
  • 죄송합니다. 저도 농담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09.07 07:44
  • 가벼운 농이라 생각했습니다.

    한희철 2019.09.07 10:58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79)

 

폭염이라는 호

 

 

다급한 목소리였다. 전화를 받자 대뜸 소식을 들었느냐고 먼저 물으셨다. 성격이 급하신 분이 아니기에 더욱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원로 장로님 한 분이 우리나라를 떠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소식을 접한 장로님은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라고 했다. 아침에 통화를 할 때도 그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데 그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리 생각을 해도 느닷없이 우리나라를 떠날 일이 떠오르질 않아 당황스럽기만 했다.

 

황망한 마음으로 전화를 거신 원로장로님은 당신이 받은 문자를 내게 보내주겠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는 사이, 떠나겠다는 뜻을 밝혔다는 장로님께 전화를 드렸다. 어찌된 영문이지를 여쭙자 문자를 드릴 테니 읽어보라고만 하신다. 생각하지 못한 다급한 일이 생긴 것일까 싶어 쿵, 가슴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 장로님이 보낸 문자가 왔다. 

 

 

 

 

 

*작별 인사 올립니다

아쉽지만 여러분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뒤로 하고 저는 이제 한국을 떠나려 합니다. 그래도 짧은 시간이지만 오랜 여운을 간직한 채 다음을 기약하고 저 역시 다른 모습 다른 얼굴로 찾아뵐 수 있는 그 날을 기약하며 떠날 준비를 하렵니다. 저 때문에 본의 아니게 힘들고 괴롭고 지친 여러분들에게 무한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올리는 바입니다. 모두들 건승 하시고 저 떠난다고 너무 마음 아파하거나 아쉬워하지 말아 주세요. 저도 막상 떠나려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습니다만 어쩔 수 없이 떠나야만 하는 이 심정 아프기만 합니다. 자~ 그럼 모두들 안녕히...

 

한 줄 한 줄을 읽으며 나도 심각해졌다. 가슴이 떨렸다. 장로님께 무슨 일이 생겼구나 싶었다. 하지만 마지막 한 구절에 폭소가 터졌다. 마지막 구절은 이랬다.


-2019년 "폭염" 올림

 

물러가는 폭염을 두고 한 이야기였다. 장로님의 유머가 지나쳤다며 웃고 있는데 조금 전에 전화를 걸었던 장로님이 다시 전화를 했다. 장로님은 당신이 받은 문자를 어떻게 내게 보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며, 어떻게 알려야 할지 안타까워했다. 그런 장로님께 그런 일 절대로 없을 것이니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라 말씀을 드렸지만, 장로님의 생각은 요지부동이었다. 떠난다는 장로님의 호가 ‘폭염’ 아니냐며, 진지하게 묻기까지 했다.

 

나중에 만나 식사를 하는 자리, 여러 사람 심장을 떨어뜨릴 뻔 했으니 식사를 대접할 만하다고 문자를 보낸 장로님께 말했다. 장로님도 기분 좋게 웃으며 기꺼이 그러겠다고 했다. 그런 교우들의 모습이 소중하고 아름다워 덕담 삼아 한 마디를 했다.

 

“저도 놀라긴 했지만 다함께 놀란 여러분의 모습이 보기에 좋습니다. 누가 떠난다고 하니 이리도 마음 아파하며 당황하는 모습이 말이지요. 우리나라를 떠난다 해도 이리 놀라고 서운했으니 이 세상 떠날 때는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요. 함께 지내는 시간 시간이 그만큼 서로에게 소중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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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우상숭배

김기석의 새로봄(179)

 

내면의 우상숭배

 

아버지께서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우리는 그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골로새서 1:13-14)

 

하나님께서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는 말 속에 신앙의 신비가 다 들어있다. 암흑의 권세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은인으로 행세하지만 자기들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가혹하게 대한다. ‘자른다’, ‘계약을 해지한다’, ‘구속한다’고 말하며 굴복을 강요하고, 약자들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약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굴욕을 감수해야 했다. 이게 옛 세계의 풍경이다. 하지만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기독교인들은 이런 세상에 저항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우리 생명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믿기에 비인간이 되기를 강요하는 세상을 향해 당당한 음성으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어떤 경우에도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저명한 신학자인 랭돈 길키가 일본군에 의해 중국의 한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2년 반 동안의 경험을 『산둥 수용소』라는 책으로 엮어냈다. 그 책에서 랭돈은 라인홀드 니버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은 내면의 우상숭배(즉 자기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그룹을 숭배하는 것)가 사회적 결과로 드러난 것이다.”(랭돈 길키, 『산둥 수용소』, 새물결플러스, 432쪽)

 

다른 이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야말로 우상숭배의 결과라는 말에 크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사람을 함부로 대한다면 그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믿고 있음이 분명하다. 랭돈 길키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경험한 사람의 삶, 곧 구원받은 이의 삶을 이렇게 설명한다. 

 

“구원은 영혼의 내적인 평안이고, 다른 사람과 건강하고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며, 주위 세상과 이웃을 향한 창조적인 관심으로 정의될 수 있다.”(앞의 책, 436쪽)

 

다른 이들과 건강하고 진정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그를 이해하고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이 망가지고, 이웃이 고통당하고 있는 데도 나와 무관한 것처럼 여기며 산다면 우리는 아직 구원받은 삶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적인 영역에서는 아주 경건해 보이는 데, 공적인 영역에서는 무책임한 사람들이 많다. 사탄은 그런 이들을 누구보다도 좋아한다.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하여 창조된 존재이다. 또한 주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이루신 평화를 누리라고, 또 그 평화를 만들라고 초대받은 존재이다.

 

*기도

 

하나님, 바르고 따뜻한 마음으로 이웃들을 대하는 이들이 그립습니다. 거칠고 사나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 마음 곳곳에는 깊은 상처가 새겨졌습니다. 작은 자극에도 비명을 지르는 것은 내면에 새겨진 공포의 기억 때문입니다. 이제는 그 아픔과 상실의 기억에서 벗어나 생을 마음껏 경축하며 살고 싶습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정성을 다해 대하고, 그들과 함께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협력하고 싶습니다. 주님의 영으로 우리를 새롭게 빚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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