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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44

말 안 하기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92) 말 안 하기 며칠 전 ‘더욱 어려운 일’이란 제목으로 짧은 글을 쓴 적이 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다면, 제 입이 모르게 하는 것 아닐까 싶었다. 세상이 놀랄 만한 좋은 일을 남모르게 하는 일도 어렵지만, 그 일을 하고서 입을 다문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그 글을 읽고 누군가가 댓글을 달았다. “제 입이 모르게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이었다. 질문을 대하는 순간 오래 전에 읽었던 글 하나가 떠올랐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었으면 좋겠다. 세 명의 수도자가 기도를 드리기 위해 동굴로 들어가며 한 가지 서약을 했다. 일 년 동안 기도를 드리되 기도를 마치는 날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한 것이.. 2019. 9. 14.
바보여뀌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90) 바보여뀌 누구 따로 눈길 주지 않으니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일부러 멈춰 손길 주지 않으니 얼마나 자유로운지 졸졸졸 흐르는 개울가 풀숲이나 벼 자라는 논둑 흔한 곳 사소하게 피어 매운 맛조차 버린 나를 두고 바보라 부르지만 아무려면 어떨까 나는 괜찮다 은은하고 눈부신 누가 알까 내가 얼마나 예쁜지를 하늘의 별만큼 별자리만큼 예쁜 걸 사랑하는 이에게 걸어줄 목걸이로는 사랑하는 사람 기다리는 등불로는 이보다 더 어울릴 것 어디에도 없는데 아무도 눈여겨보는 이 없어 아무도 모르는 몰라서 더 예쁜 이름조차 예쁜 바보여뀌 2019. 9. 14.
무임승차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8) 무임승차 몇 번 KTX를 탄 적이 있는데, 몇 가지 점에서 놀란다. 운행하는 횟수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 그런데도 이용하는 승객이 많다는 것, 달리는 기차의 속도가 엄청나다는 것 등이다. 오후에 떠나도 부산 다녀오는 일이 가능해졌으니 말이다. 또 하나 놀라게 되는 것이 있는데, 기차를 이용하는 과정이다.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면 창구에서 따로 표를 끊지 않아도 된다. 기차를 타러 나갈 때 ‘개찰’을 하는 일도 없어, 플랫폼에서 기다렸다가 알아서 타면 된다.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표 검사를 하는 일도 없고(물론 승무원들이 왔다 갔다 하며 체크를 한다 싶지만), 목적지에서 내렸을 때도 표를 검사하지 않은 채 역을 빠져나간다. 표를 괜히 구매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중고.. 2019. 9. 14.
묻는 자와 품는 자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97) 묻는 자와 품는 자 가을이 되면 습관처럼 꺼내 읽는 책이 있다. 릴케의 이다. 겹겹이 친 밑줄들 중 대번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다. “묻는 자는 당신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드러운 눈길로 당신은, 당신을 가슴에 품은 자를 바라봅니다.” 이 가을엔 물음을 멈추고 다만 품게 해달라고, 같은 기도를 바친다. 2019. 9.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