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22)

 

신앙은 주체적 결단

 

주님을 섬기고 싶지 않거든, 조상들이 강 저쪽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아니면 당신들이 살고 있는 땅 아모리 사람들의 신들이든지, 당신들이 어떤 신들을 섬길 것인지를 오늘 선택하십시오. 나와 나의 집안은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여호수아 24:15)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 내내 여호수아는 모세 곁을 지켰다. 모세의 비범한 용기에 경탄했고, 지도자의 고뇌와 외로움도 절절하게 느꼈을 것이다. 온 백성들의 운명을 어깨에 지고 나아간다고 하는 것이 어찌 힘겨운 일이 아니겠는가? 홍해를 건너 오아시스 지대인 르비딤에 도착했을 때 아말렉이 쳐들어왔고, 그는 모세의 지시에 따라 장정들을 뽑아 아말렉에 맞서 싸웠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 이스라엘을 이끈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손길이었다. 아말렉과의 전투는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민이 되기 위해 겪어야 할 통과제의였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회막 안에 들어가면 그는 밖에서 회막을 지켰고 모세가 진으로 돌아가도 그는 장막을 떠나지 않았다. 강직한 사람이다. 정탐꾼이 되어 가나안 땅을 살피고 온 후에 그는 갈렙과 더불어 소수 의견을 제출했다. 다른 정탐꾼들이 가나안 사람들의 위용을 보고 겁에 질려 그들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며 손사래를 칠 때, 여호수아는 갈렙과 함께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그들의 방어력은 사라졌습니다”(민수기 14:9)라고 말했다.

 

 

모세가 벧브올 맞은편에 있는 골짜기에 묻힌 후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로 삼으시며 당부하셨다.  

 

“내가 모세와 함께 하였던 것과 같이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겠다. 굳세고 용감하여라. 내가 이 백성의 조상에에 주기로 맹세한 땅을, 이 백성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사람이 바로 너다”(여호수아 1:5b-6).

 

두려웠지만 그는 소명을 받아들였고, 가나안 땅 정복이라는 대업을 이뤘다. 땅의 분배까지 다 마친 후 그는 마침내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가 이르렀음을 알고 백성들에게 고별사를 남긴다. 그때까지 그들을 인도하고 또 그들 편에서 싸우신 하나님의 은총을 잊지 말고,  율법의 말씀을 담대하게 지키고 행하라는 것이 고별사의 요점이었다. 오직 주님만 섬기라고 신신당부하던 여호수아는 돌연 그들을 선택 앞에 세운다.

   

“주님을 섬기고 싶지 않거든, 조상들이 강 저쪽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아니면 당신들이 살고 있는 땅 아모리 사람들의 신들이든지, 당신들이 어떤 신들을 섬길 것인지를 오늘 선택하십시오. 나와 나의 집안은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여호수아 24:15)

 

신앙은 두길마보기가 아니라 주체적 결단이다. ‘이것도 저것도’가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라는 말이다.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선택 가능성을 내려놓는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시면서 돈과 주님을 더불어 섬길 수는 없다고 하셨다. 여호수아는 형편이 어떠하든 그와 그의 집안은 오직 주님만을 섬길 것이라며 주체적 결단의 본을 보인다. 견결한 믿음이란 이런 것이다.

 

*기도*

 

하나님,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곤 합니다.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길을 잃기 일쑤입니다. 여호수아는 참 한결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내적인 고뇌가 왜 없었겠습니까만 그는 주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그 말씀을 살아내는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응석받이 신앙생활에서 이제는 벗어나고 싶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뜻을 수행하는 전사가 되게 해주십시오. 우리 속에 주님의 숨을 불어넣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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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하나님!

 

예전에 독서캠프를 통해 만난 분 중에 나태주 시인이 있습니다. ‘풀꽃’이란 시로 널리 알려진 시인이지요. 시골초등학교 교장으로 은퇴하신 분답게 중절모가 잘 어울리는 시골 할아버지의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그분을 처음 뵙는데, 그 분은 나를 알고 있었습니다. 한 신문에 쓰고 있는 칼럼을 눈여겨 읽어오고 있다 했는데, 금방 친숙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나태주 시인이 쓴 시 중에 최근에 알게 된 시가 있습니다. 병원 중환자실에서 시한부 삶을 선고받을 만큼 중병을 앓고 있을 때, 곁에서 간호하는 아내가 안쓰러워 썼다는 시였습니다.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라는 제목의 시였는데, 아내를 위해 하나님께 하소연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너무 섭섭하게 그러지 마시어요. 하나님!

 

저에게가 아니에요.

저의 아내 되는 여자에게 그렇게 하지 말아 달라는 말씀이어요.

이 여자는 젊어서부터 병과 함께 약과 함께 산 여자예요.

세상에 대한 꿈도 없고 그 어떤 사람보다도 죄를 안 만든 여자예요.

신발장에 구두도 많지 않은 여자구요.

한 남자 아내로서 그림자로 살았고

두 아이 엄마로서 울면서 기도하는 능력밖엔 없었던 여자이지요.

 

자기의 이름으로 꽃밭 한 평 채전밭 한 뙈기 가지지 않은 여자예요.

남편 되는 사람이 운전조차 할 줄 모르고 쑥맥이라서

언제나 버스만 타고 다닌 여자예요.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가난한 자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

저의 아내 되는 사람에게 너무 섭섭하게 하지 마시어요!

 

 

아내를 위한 간절한 마음이 뭉뚝뭉뚝 묻어나는데, 더 감동적이었던 것은 남편의 글에 화답하여 쓴 아내의 글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남편이 드린 기도보다 더 간절한 기도, 시인 아내의 절창이었습니다.

 

너무 고마워요,

남편의 병상 밑에서 잠을 청하며

사랑의 낮은 자리를 깨우쳐주신 하나님!

 

이제는 저이를 다시는 아프게 하지 마시어요.

우리가 모르는 우리의 죄로 한 번의 고통이 더 남아 있다면,

그게 피할 수 없는 우리의 것이라면, 이제는 제가 병상에 누울게요.

하나님!

 

저 남자는 젊어서부터 분필과 함께,

몽당연필과 함께 산, 시골 초등학교 선생이었어요.

시에 대한 꿈 하나만으로 염소와 노을과 풀꽃만 욕심내온 남자예요.

시 외의 것으로는 화를 내지 않은 사람이에요.

책꽂이에 경영이니 주식이니 돈 버는 책은 하나도 없는 남자고요.

제일 아끼는 거라곤 제자가 선물한 만년필과

그간 받은 편지들과 외갓집에 대한 추억뿐이에요.

한 여자 남편으로 토방처럼 배고프게 살아왔고,

두 아이 아빠로서 우는 모습 숨기는 능력밖에 없었던 남자지요.

공주 금강의 아름다운 물결과 금학동 뒷산의

푸른 그늘만이 재산인 사람이에요.

운전조차 할 줄 몰라 언제나 버스만 타고 다닌 남자예요.

승용차라도 얻어 탄 날이면

꼭 그 사람 큰 덕 봤다고 먼 산 보던 사람이에요.

 

하나님!

저의 남편 나태주 시인에게 너무 섭섭하게 그러지 마시어요.

좀만 시간을 더 주시면 아름다운 시로 당신 사랑을 꼭 갚을 사람이에요.

 

부부가 나누는 지극한 사랑이 따뜻한 감동으로 전해졌습니다. ‘한 번의 고통이 더 남아 있는 것이라면 이제는 제가 병상에 누울게요.’라는 기도 앞에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만, 이만한 기도를 물리치시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토록 순박하고 아름다운 사랑은 우리 곁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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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14)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14 겟세마네

 

마태 수난곡 1부 24번

마태복음 26:36~38

음악듣기 : https://youtu.be/R-AEzm3v630

내러티브

18(24)

에반겔리스트

36. Da kam Jesus mit ihnen zu einem Hofe, der hieß Gethsemane, und sprach zu seinen Jüngern:

36.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대사

예수

Setzet euch hier, bis daß ich dorthin gehe und bete.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37. Und nahm zu sich Petrum und die zween Söhne Zebedäi, und fing an zu trauern und zu zagen. 38. Da sprach Jesus zu ihnen:

37.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이에 말씀하시되

대사

예수

Meine Seele ist betrübt bis an den Tod, bleibet hie, und wachet mit mir.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겟세마네와 아인잠카이트(Einsamkeit)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렀습니다. 특별한 날 특별한 목적으로 그곳에 가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머무르실 때면 습관처럼 매일 밤 그 곳을 찾아가셨습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누가복음 22:39)

 

왜 예수께서는 그곳을 그렇게 자주 찾아가셨을까요? 쉬러 가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무가 우거지고 조용한 그 곳을 좋아하셨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라는 강렬한 사건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열광주의적 선입관 때문에 우리는 예수께서 매일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뜨거운 철야 산기도를 했으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겟세마네는 예수께 있어 쉼과 평화와 고요함의 장소였습니다. 복음서, 특히 예수 수난 이야기는 사건의 나열입니다. 예수의 말씀과 성경의 기록을 통해 사건과 사건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그 사이의 일상을 읽을 수 있어야 우리는 예수를 제대로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누가복음 21:37)

 

반면, 우리들의 교회와 우리들의 삶에는 쉼과 평화와 고요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위기 상황에는 목 놓아 부르짖어야 하고 영적 전쟁과도 같은 신앙 여정에서 긴장과 간절함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이 그러하셨듯이 하나님 안에서 세상의 그 무엇도 침해 할 수 없는 쉼과 평화와 고요함을 매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는 언제나 프로그램이 가득하고 우리는 저마다 맡은 일들과 인간관계와 표정관리로 분주합니다. 예배 중에도 말이 끊기거나 소리가 끊기면 불안함을 느낍니다. 통성기도, 방언기도만 제대로 된 기도처럼 느껴지고 기도를 할 때도 음악이 없으면 허전함을 느낍니다. 언제든지 울부짖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고 울부짖는 기도가 끝나자마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고조됨과 여운이 없는 이러한 기도가 진정한 기도인지, 집단적 히스테리인지, 혹은 우리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만나는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는 세상의 모든 기도 중에서 가장 깊이 있고 가장 강렬한 기도였습니다.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누가복음 22:43~44)

 

하지만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는 마태복음 26장 시작부터 준비되어 그 여운이 십자가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는 강렬한 기도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리 내어 외치는 기도는 아니었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소리를 치시며 기도했다면 지척에 있던 세 제자들이 단잠에 빠져들 수 없었겠지요. 예수께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부르짖는 기도, 성대가 아닌 마음을 찢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홀로 기도하셨고 그러한 기도의 모범을 보이심으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쉼과 평화와 고요함이 그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예수의 겟세마네의 기도와 같은 고조됨과 여운이 있는 깊이 있고 강렬한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쉼과 평화와 고요함을 얼마만큼 누리고 있을까요? 대부분의 교인들에게 주일은 가장 피곤하고 가장 분주한 날이 되어버렸습니다. 가뜩이나 피곤하고 분주한 삶 속에서 쉼과 평화와 고요함은 그렇게 우리와 멀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매일 밤 누리셨듯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바탕이 되는 도화지는 쉼과 평화와 고요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신뢰의 관계에서 우러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입니다. 그러므로 쉼과 평화와 고요함은 또 다른 강렬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소리들이 모여 음악이 되었다고 쉽게 생각하고 소리가 크거나 많을수록 멋진 음악이라고 생각하지만 소리의 바탕은 침묵입니다. 음표가 없는 곳에 쉼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쉼표가 있어야 할 곳에 쉼표가 있는 것이지요. 또한 우리는 음악을 누구에게 들려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 심연의 고독과 연결되지 않고는 음악의 깊은 맛을 누릴 수 없습니다. 소리로서의 음악뿐만이 아닙니다. 어떤 이의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연주자와 작곡자가 나누는 대화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아무리 화려한 연주라 하더라도 그 연주를 들려주기 위해 홀로 고민하고 연습한 연주자의 고독과 투쟁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독일어 ‘Einsamkeit/아인잠카이트’는 ‘고독’이라고 번역하기에는 그 충만함과 지금 머물고 있는 배경이 소외되기에 부족하고, 누군가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홀로됨’이나 ‘외로움’이라고 번역하기도 어려운 묘한 단어입니다. ‘숲, 바다, 공간, 우주, 하나님의 품 등 커다란 실존 안에서 먼지만큼 작은 나를 발견하고 그런 나를 충만하게 느끼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인잠카이트’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사람들 사이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셨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깊은 ‘아인잠카이트’를 누리셨습니다.

 

바흐의 음악도 그 바탕에는 침묵과 아인잠카이트가 서려 있습니다. 일전에도 마태수난곡의 곡과 곡사이의 침묵의 미학에 대해 말씀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언어가 없는 기악곡에서 ‘침묵의 소리’를 더 가까이 들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가 연주한 평균율 1권을 들어보시면 이 음악의 바탕이 차라리 우주의 침묵이며, 울려 퍼지는 소리는 바흐와 연주자의 대화요, 듣는 우리를 포함하여 이 음악과 연결된 모두가 ‘아인잠카이트’에 깊이 빠져들게 됨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https://youtu.be/Dkt75juxvxw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산에 오르는 또 다른 이유는 먼 곳을 바라보기 위함이기도 하지요. 예수께서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사랑하셨고 감람산에서 조용히 예루살렘을 바라보시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날 제자들도 그분의 조용함에 압도 되어 ‘조용히’ 예수께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감람 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묻되(마가복음 13:3)

 

예수께서는 때로, 감람산에서 이미 무너지고 있는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슬퍼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태복음 23:37, 누가복음 13:34)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가장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곳은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아직 예루살렘에 가 보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예루살렘에 가게 된다면 감람산 올리브나무 우거진 동산에 하루 종일 조용히 앉아 있고 싶습니다. 평화롭게 쉬며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아마 그곳에서는 그 어떤 종교적인 것도 사족이 되어버릴 것 같습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그가 쉼을 누렸던 그 곳에서 그와 함께이고 싶습니다.

 

                                            겟세마네, Walter Mittelholzer, 1934년

 

고민하고 슬퍼하신 예수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세베데의 두 아들인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기도하러 나아가셨을 때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왜 다른 제자들은 앉아 기다리라고 하시고 세 제자만 데리고 가셨을까요? 아마 예수께서는 최대한 자신이 당하실 고난을 숨기시고 홀로 감당하려 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홀로 지고 가시기에는 십자가는 너무나도 큰 무게였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또한 완전한 인간이셨기에 위로가 필요했고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변화산 사건,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 등 보다 깊은 것을 나누었던 세 명의 제자들을 대동하셨습니다.

 

마태수난곡의 대본에 쓰인 루터 성경은 이 부분을 'und fing an zu trauern und zu zagen/고민하고 슬퍼하시기를 시작하셨다’라고 번역했는데 이 번역이 원문(에르사토/ἤρξατο/시작하다)에 더 가깝고 그렇게 읽을 때 세 명의 제자만 데리고 가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 앞에서는 간신히 참고 있었지만 한적한 곳에서 홀로 되어 기도하려니 고민과 슬픔이 엄습하듯 다가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것이 다 준비된 상태에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완전한 인성을 지녔던 예수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아야 하는 십자가는 고민과 슬픔이었습니다. 또한 완전한 하나님으로써 그의 유일한 연약함은 인간을 너무나 사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들과 분리되어 십자가에서 겪어야 할 완전한 외로움은 예수의 고민이었고 슬픔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십자가의 순간이 다가오고 막상 홀로됨이 시작하게 되자 고민과 슬픔이 갑작스레 밀려오고 있습니다.

 

마태 수난곡에서 이 구절은 베드로의 배신 장면과 함께 에반겔리스트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고민하고 슬퍼하다’라는 뜻의 ‘zu trauern und zu zagen'을 어떻게 노래하는지 유심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음악적으로 ’trauern‘은 고민과 슬픔의 감정을 쏟아 놓는 표현으로 ’zagen'은 그 감정을 다시금 누르고 참아내는 표현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토록 애절하게 작곡한 바흐도 놀랍지만 그 오선지를 소리로 펼쳐낸 에반겔리스트의 노래는 임방울의 ’쑥대머리 구신형공‘에 비견될 서양 성악 예술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여러분이 듣고 계신 음반의 에른스트 해플리거는 마태 수난곡 녹음 역사상 최고의 에반겔리스트이며 제가 이 음반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합니다.

 

우리는 복음서의 내러티브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만, 마태 수난곡을 듣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무성영화에서의 변사처럼, 판소리에서의 아니리처럼 에반겔리스트는 이 이야기의 흐름을 쥐고 있습니다. 우리가 분석하고 깨달으려는 의도를 내려놓고 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에반겔리스트의 아니리’에 마음을 맡길 때 우리는 이야기에 빠져 들며 예수의 수난을 더 깊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장면에서 두 번 등장하는 예수의 음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앞선 대사에서는 마지막 단어 ‘bete’에 주목해야합니다. 이 단어는 ‘기도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beten/베텐’의 2인칭 복수 명령형으로 ‘(너희는)기도하라’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가사로 표현되는 순간 모든 악기들은 엄숙하고 간절한 느낌으로 기도를 함께 표현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대사는 반주가 보다 적극적으로 받쳐주고 있습니다. “Meine Seele ist betrübt bis an den Tod/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말씀하시는 부분부터 현악 모든 파트가 8분 음표 연음을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이 8분 음표 연음들은 고민하고 슬퍼하는 가운데 요동치기 시작하는 예수의 마음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 만나게 될 테너의 레치타티보 ‘O schmerz!/오 그 고통이여!’로 이어지면서 8분 음표 연음은 16분 음표로 바뀌어 두 배 의 속도로 빨라집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를 주님의 고민과 슬픔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합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하늘결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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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21)

 

있는 힘껏 선을 행하라

 

너의 손에 선을 행할 힘이 있거든,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 주저하지 말고 선을 행하여라. 네가 가진 것이 있으면서도, 너의 이웃에게 “갔다가 다시 오시오. 내일 주겠소” 말하지 말아라. 너를 의지하며 살고 있는 너의 이웃에게 해를 끼칠 계획은 꾸미지 말아라.(잠언 3:27-29)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 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한용운 〈당신을 보았습니다〉 부분)

 

시는 이어서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자에게 무슨 정조냐”며 능욕하려는 장군을 고발한다. 시인은 조국을 잃고 유랑하는 이의 신산스러운 삶을 이런 시어를 통해 아프게 드러내고 있다. 떠도는 이들은 일쑤 인격도 인권도 없는 존재로 여김을 받는다. 필요한 것을 얻지 못한 아픔도 아픔이려니와 비인간 취급을 받는 것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쏟아진다. 그런데 그 눈물 속에서 시인은 ‘당신’을 본다.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가난한 이를 멸시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멸시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토라는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들도 이방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으니 그들의 고통을 잘 이해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주 노동자들이 처음 배우는 한국어가 “사장님, 때리지 마세요.”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불법 체류자의 신분을 악용하여 품삯을 떼먹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비단 이주 노동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하청 노동자들 역시 똑같은 취급을 받는다. 위험을 외주하 하는 대기업들의 횡포가 가련한 노동자들을 사지에 몰아넣기도 한다.

 

너의 손에 선을 행할 힘이 있거든,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 주저하지 말고 선을 행하여라. 네가 가진 것이 있으면서도, 너의 이웃에게 “갔다가 다시 오시오. 내일 주겠소” 말하지 말아라. 너를 의지하며 살고 있는 너의 이웃에게 해를 끼칠 계획은 꾸미지 말아라.

 

신실하다는 기독교인조차 ‘베푼다’는 말을 별다른 반성 없이 사용한다. ‘베푼다’는 말 속에는 시혜자의 오만함이 담겨 있다. 베풂의 대상으로 전락한 수혜자들의 마음 깊은 곳에 굴욕감이 스며들 수도 있다. 시혜자와 수혜자로 나뉠 때 묘한 계급 관계가 발생한다. 누군가에게 주면서 묘한 쾌감을 느끼는 이들이 있다. 그 쾌감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받는 이들의 모욕감을 대가로 한 것이다. 제대로 줄 수 있기 위해서는 받는 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섬세한 마음을 훈련해야 한다.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이는 아무도 없다. 물질이 없다면 따뜻한 말 한 마디, 선선한 미소라도 건네면 된다. 남에게 선을 행할 마음이 없다면 최소한 해를 끼치지는 말아야 한다. 나의 ‘있음’이 누군가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조심 살아갈 일이다.

 

*기도*

 

하나님, 능력 있는 이웃과 잘 지내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늘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과 함께 지내는 것은 참 고단합니다. 그들의 배고픔을 외면하기 어려우니 말입니다. 우리는 일쑤 그들을 외면하며 삽니다. 차라리 모르면 양심의 괴로움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니 이런 우리 모습이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모른 체 지나쳤던 이들과 다를 바 없음을 알겠습니다. 위선과 무정함의 수렁에서 우리를 건져주십시오. 있는 힘껏 선을 행하며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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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80)

 

부르지 말아야 할 이름

 

50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뉴질랜드 총격테러 사건은 하필이면 크라이스트처치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의 이슬람 사원에서 일어났다.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 자부했던 뉴질랜드가 큰 슬픔에 빠진 가운데 아던 뉴질랜드 총리의 리더십이 조명을 받고 있다. 대형사건이 일어났음에도 뉴질랜드가 크게 동요하지 않은 이유는 아던 총리의 기민한 대응 덕분이라고 외신들은 분석한다.

 
무엇보다도 아던 총리가 검은 히잡을 쓴 채 진심 어린 표정으로 유족의 슬픔을 위로하는 모습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포용과 평등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충분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아던 총리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의회 연설을 하면서 “더 이상 크라이스트처치 총격범 이름을 언급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총격범의 이름을 부름으로 그의 악명이 높아지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악명을 떨치길 원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에게 이름조차 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테러리스트이고 범죄자이며 극단주의자다. 하지만 내가 말할 땐 이름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 간청한다. 희생자들을 데려간 사람의 이름보다는 우리가 잃은 사람들 이름을 말해 달라.”

 

희생자들을 데려간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느라 정작 희생자들의 이름을 잊어버리는 일이 우리에게는 있다.  맞다, 우리에게는 부르지 말아야 할 이름이 있다. 부르지 말아야 할 이름 대신, 기억해야 할 이름을 불러야 한다. 

 

-한희철 목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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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82)

 

방으로 들어온 500년을 산 느티나무

 

원주 귀래면에 사시는 윤형로 교수님이 서울로 올라오며 전화를 했다. 시간이 되면 잠깐 들르시겠다는 것이었다. 둘째 손자가 태어났는데, 동생을 봄으로 형이 된 큰 손자가 마음이 허전할 때면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교회로 찾아오신 교수님은 멋진 선물을 전해 주셨다. 알맞은 크기의 탁자로 마주앉아 차를 마시기에 좋은 용도였다. 나무에 붉은 빛이 감돌아 차를 마실 때 분위기가 그윽하겠다 싶었다. 전해주신 탁자가 더없이 반갑고 고마웠던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이태 전이었다. 오랜만에 인우재를 찾아 언덕길을 오르며 느티나무 아래를 지날 때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 느티나무 굵은 가지 하나가 땅에 떨어져 서너 조각으로 잘린 채 나무 주변에 나뒹굴고 있었다. 단오에는 그네가 달려 동네 아낙네들에게 큰 기쁨을 전해주었다던, 동네 어른들 이야기로는 500년을 훌쩍 넘긴 느티나무다. 가장 단순한 모습으로 섰다 싶었는데도 세월의 무게인 양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굵은 가지 하나를 떨군 것이었다. 떨어진 가지가 길을 막고 있으니 누군가가 가지를 움직일 수 있을 만큼씩 잘라 길옆으로 치워 놓은 것이었다.

 


감당하기 힘든 무게가 나무에게도 있구나 하며 지나치려다 문득 나무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견뎌온 세월이 얼만데 싶었다. 이병철 씨에게 물었더니 누가 떨어진 가지를 챙기겠냐며 필요하면 얼마든지 가져가라고 했다. 병철 씨가 끌고 온 트랙터의 도움을 받아 나무 몇 토막을 인우재 처마 아래로 옮겼다.

 

어느 날 처마 아래 있는 나무를 보다가 윤 교수님 생각이 났던 것은 교수님이 공방을 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퇴직을 한 뒤 집 한 켠에 공방을 만들고 이런저런 가구들과 소품들을 만들고 있었는데, 취미 이상의 작품들을 만들고 있었다. 특히 버려진 나무들을 가지고 작품을 만드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보관하고 있던 느티나무의 용도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지난해 가을, 교수님을 제재소에서 만나기로 하고 병철 씨와 함께 느티나무를 트럭에 싣고 나갔다. 제재소 주인은 이리저리 나무를 살펴보더니 속이 많이 비어있어 생각보다는 나무판이 많이 나오지 않을 수 있겠노라고 했다. 실제로 나무를 켜보니 쓸모 있는 부분이 많지 않았다고 했다. 처음에 짐작했던 대로 속이 많이 비어있더라는 것이었다.


 


나무속이 비고 속에 까만색이 남게 된 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병철 씨가 어렸을 적 그 느티나무는 동네 아이들의 좋은 놀이터였다고 한다. 나무가 하도 커서 나무 밑동 부분은 아이 서너 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병철 씨의 이실직고에 의하면 언젠가 한 번은 나무속에서 불장난을 하다가 나무를 태운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 때 낸 불이 나무를 태워 나무속이 더 비고 까만 기운이 남게 되었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어릴 적 불을 낸 장본인이 불을 낸 나무를 싣고 제재소를 찾아 나무를 켜게 될 줄이야.

 

여섯 장인가 얻은 나무판 중의 하나로 교수님은 탁자를 만들 생각을 했고, 나무판에 숭숭 뚫린 구멍들을 기술과 수고로 메워 멋진 탁자를 만든 것이었다. 결국 교수님이 전한 탁자는 단강에서 오백년 이상을 살아온 느티나무로 만든 탁자였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탁자가 전혀 낯설지 않고 오히려 친숙하게 여겨졌다. 인우재 아래 그 늠름하고 우람한 느티나무가 내 방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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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택하는 용기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랑 받는 거룩한 사람답게, 동정심과 친절함과 겸손함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을 옷 입듯이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는 띠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이 평화를 누리도록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여러분은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풍성히 살아 있게 하십시오. 온갖 지혜로 서로 가르치고 권고하십시오. 감사한 마음으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여러분의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십시오. 그리고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에게서 힘을 얻어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골로새서 3:12-17)

 

골로새서는 성도를 가리켜 ‘택하심을 받은 사람’, ‘사랑 받는 사람’, ‘거룩한 사람’이라 말한다. 마땅히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존재 자체가 그렇게 바뀌었다는 선언이다. 문제는 선언 이후이다. 그런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이름하여 성도다운 삶 말이다. ‘~답다’는 단어는 체언에 붙어 성질이나 특징이 있다는 뜻을 나타내는 접미사이다. 공자의 정명(正名) 사상은 명칭과 실질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 사회를 바루는 길이라고 가르친다. 정명 사상은 지배질서를 공고히 하기 위해 지배자들이 부여한 질서라는 비판이 따르지만, 지금처럼 이름과 실질이 부합하지 않는 시대에는 다시 한 번 가려 써도 괜찮은 사상이다. 

 

성도다운 삶이란 어떤 것일까? “동정심과 친절함과 겸손함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을 옷 입듯이 입고,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는 사랑이다. 무골호인이 되라는 말은 물론 아니다. 잘못을 잘못이라 말하지 않는 것은 악을 행하는 이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을 수도 있다. 믿는 이들은 거짓과 위선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말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다. 불의한 이들이 더 이상 불의를 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그가 악을 행할 기회를 빼앗는 것이니 말이다.

 

 

                               사진/송진규

 

하지만 믿는 이들의 삶이 늘 순조롭지는 않다. 강한 저항에 부딪힐 때가 많다. 불의에 타협하기를 거절하면 ‘너만 홀로 의로우냐’는 타박을 듣기도 한다. 불의를 불의로 폭로하면 ‘배신자’의 낙인을 찍기도 한다. 그 때문에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는 이들이 많다. 어두운 세상과 맞서 싸우다 보면 우리 마음에도 어둠의 흔적이 남게 된다. 거칠고 야비한 세상을 사랑으로 돌파하려다가 마음에 멍이 든 이들이 많다. 음울하고 심각한 사람은 평화를 만들 수 없다. 어려움 속에서도 생명과 평화 세상을 열기 위해 명랑하게 헌신하는 이들이라야 평화의 일꾼이 될 수 있다.  

 

‘평화에 이르는 길은 없다. 평화가 곧 길’이라는 말이 있지만, 평화를 선택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평화를 포기할 수 없다. 평화를 만들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평화를 만드는 일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소명의 중심에 속해 있다. 평화를 만드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전적으로 헌신해야 할 의무이다”(헨리 나웬). 그렇기에 우리는 이 말씀을 붙들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이 평화를 누리도록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여러분은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골로새서 3:15)

 

*기도*

 

하나님, 우리는 성도답게 살기를 갈망하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번번이 넘어지곤 합니다. 이제는 넘어진 자리를 딛고 일어나 다시금 평화 세상을 열기 위해 땀 흘리겠습니다. 미움보다 사랑이 강하다는 것을 몸으로 입증하며 살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현실이 어렵다고 하여 투덜거리기보다는 뿌리 깊은 세상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주님, 우리 속에 평화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심어주십시오. 아멘. 

 

-김기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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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9)

 

예루살렘을 향해 난 창문

 

다니엘은, 왕이 금령 문서에 도장을 찍은 것을 알고도,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서,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그 다락방은 예루살렘 쪽으로 창문이 나 있었다. 그는 늘 하듯이, 하루에 세 번씩 그의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감사를 드렸다.(다니엘 6:10)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지만 그것은 떠도는 자들의 슬픈 자기 위안일 뿐 사실은 아니다. 모어가 아닌 다른 나라 말을 사용해야 하고, 문화와 습속이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참 고단한 일이다. 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유랑하는 사람의 신산스런 처지를 절절하게 노래한다. “어느 사이네 나는 내도 없고, 또/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그리고 살뜰한 부모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타향은 꼭 필요한 것들의 부재를 의미한다. 부재는 쓸쓸함과 두려움을 낳는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의 처지는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망해 버린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 돌아갈 고국이 없다는 것, 그처럼 처량한 게 또 있을까? 그래도 삶은 계속되어야 하기에 포로민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았다. 더러는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식민 지배자들의 눈에 들어 요직에 등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하여 삶이 절로 편안해지는 것은 아니다. 높은 자리에 오른 피식민지 백성들은 질시의 대상이 되곤 했다.

 

 

 

다니엘은 아무도 풀지 못한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하면서 바빌로니아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로 인정받았고, 바빌론 지역의 통치자로 임명받았다. 바빌로니아가 메대에 의해 무너진 후에도 다니엘의 지위에는 변함이 없었다. 메대의 개국공신들은 다니엘을 눈엣가시처럼 대했다. 그리고 그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다리우스 왕에게 “앞으로 삼십 일 동안에, 임금님 말고, 다른 신이나 사람에게 무엇을 간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자 굴에 집어넣기로 한다”(다니엘 6:7)는 금령을 내려달라고 한다. 그 제안이 다리우스의 허영심을 자극했다. 금령이 내려졌고, 음모를 꾸민 자들은 다니엘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왕의 금령 문서에 도장이 찍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니엘은 자기 집 다락방에 올라 늘 하던 대로 예루살렘 쪽으로 난 창문가에 앉아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호시탐탐, 사자굴에 갇히기 전 다니엘은 이미 야수들의 시선에 포박되어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그는 기도를 중지하지 않았다. 그것을 포기하는 순간 안전할 수는 있겠지만 자기 부정이라는 모멸감에 사로잡힐 수도 있었다. 다니엘은 기꺼이 사자굴을 택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경험했다. 예루살렘을 향해 난 창문, 구원의 바람은 그 창문을 통해 불어온다. 우리에게도 그런 창문이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기도*

 

하나님, 윤동주 시인은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이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 채 세상 길을 배회합니다. 마음의 중심을 잃어 우리는 욕망 주위를 그저 맴돌며 그것이 삶인 줄로 여기고 있습니다. 온유하지만 정신의 날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다니엘과 그 친구들의 모습은 안일에 길들여진 우리 삶의 누추함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주님, 하나님을 경외함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믿음 없음을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아멘.

 

-김기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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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78)

 

덤으로 사는 인생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혈루증 걸린 여인 이야기를 대할 때마다 떠오르는 말이 있다. ‘덤’이라는 말이다. 물건을 사고팔 때, 제 값어치 외에 조금 더 얹어 주거나 받는 물건을 이르는 말이다.


여인에게는 병이 낫는 것보다 더 절박한 것은 없었다. 혈루증은 부정하다 여겨져서 성전을 찾는 일도,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불가능했다. 건강한 사람들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제도와 법이라는 벽을 만들어 놓았다. 병을 고치지 못하는 한 여인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삶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마침내 여인은 병이 낫는다. 예수의 옷자락을 몰래 붙잡았더니 정말로 병이 나은 것이었다. 기적 같은 일이 거기서 끝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당시 예수는 죽어가는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는 길이었고, 여인으로서는 누구에게라도 자신의 병이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설마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을 예수가 알았으리라는 생각할 수 없었을 뿐더러, 혹시 알았다 해도 주변을 둘러보며 한 번 환하게 웃으며 갈 길을 재촉했다면 참 좋을 일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걸음을 멈춰 서서 옷에 손을 댄 이를 찾으신다. 자신의 능력이 몸에서 빠져나간 것을 몸으로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흔들리는’ 것이다. 사랑을 전한 이가 휘청, 자신의 능력이 빠져나간 것을 몸으로 느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 것이다.


여인은 더 이상 숨길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두려워하여 떨며 예수께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이야기한다. 그러자 예수가 여인에게 말한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

 

옷자락을 붙잡았을 때 ‘병’이 나았다.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이야기 했을 때 여인에게 주어진 것은 ‘구원’이었다. 그 순간 여인은 깨닫지 않았을까? 그동안 자신이 가져왔던 가장 간절한 갈망, 병이 낫는 것이 주님 앞에서는 ‘덤’이었다는 사실을. 내가 바라고 내게 필요한 것이 유일한 것인 줄 알았는데 주님 앞에서는 그것조차도 ‘덤’이었다는 것을.

 

 

 

남의 일로만 알았던 ‘환갑’을 맞는다.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라는, 하도 많이 들어 닳고 닳았지 싶은 말을 나도 이쯤에서 하게 되었다.


단강에 살 때 한 노인이 그랬다. 사람은 환갑이 지나면 ‘덤’으로 사는 거라고. 100세 시대를 말하는 요즘으로 보자면 그 말은 고쳐져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올라선 환갑이라는 고개,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기로 한다. 이제부터의 삶은 ‘덤’이라고. 

 

-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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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은 철회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마운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습니다.(로마서 11:29)

 

사람은 누구나 삶의 전모를 미리 알지 못한다. 순간순간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불확실한 시간을 살아내야 하니 번민이 없을 수 없다. 선택은 다른 가능성에 대한 배제를 뜻하기에 선택은 신중할 수밖에 없다. 신중하게 생각한다 하여 늘 최고의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벼 고르려다 뉘 고른다는 말이 있듯이, 신중함이 자칫 판단을 그르칠 수도 있다. 그러나 가리산지리산 헤맨 것처럼 보여도 세월이 어느 정도 지난 후에 돌아보면 우리 삶의 지향이 드러나기도 한다. 검질기게 붙들고 가는 삶의 원리가 조금씩 형성되기 때문일 것이다.

 

삶은 신비이다. 우리의 의도대로 되지 않는다. 실패처럼 보이던 일이 시간이 지난 후에 우리를 세워준 계기가 될 때도 있고, 성공처럼 보이던 일 때문에 우리 삶이 어그러지기도 한다. 그러나 씁쓸한 실패의 기억과 달콤한 성공의 기억이 날줄과 씨줄로 얽혀 우리 인생이라는 피륙을 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서 8:28).

 

바울 사도의 이 말은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된다. ‘모든 일’에는 우리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일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일들이 다 내포된다. 죄와 허물과 실수투성이 삶이라 해도 그것을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은 그 삶을 통해 새로운 현실을 빚으신다. 

 

 

 

 

대인들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 속에서 살았다. 그 자부심은 그들이 곤고한 생을 지탱해주는 내적 힘이었다. 그러나 그 자부심에 고착되어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퇴행이 시작된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가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수많은 표징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전 체제를 부정하는 듯한 예수의 행태를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과거가 그들의 발목을 붙들어 현재를 오롯이 살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복음이 시들어버린 것은 아니다. 복음은 이방인에게 흘러갔고, 이방인 가운데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은 구원의 신비를 맛보며 살았다. 그 모습이 유대인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거룩함에 이르는 질투가 있다. 어거스틴의 회심도 거룩한 질투에서 촉발되었다. 그는 지인들이 복음을 위해 세속의 유혹을 뿌리쳤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인 알리삐우스에게 말한다.

 

“우린 어찌 된다? 너도 들었지? 도대체 이게 뭐냐? 무식꾼들이 불쑥 일어나서 하늘을 쟁취하는데, 그래 우리 학식을 가지고도 마음 하나가 없어서 이렇게 피와 살 속에 뒹굴고 있구나!”(『고백록』, 최민순 역, 210쪽)  

 

결국 복음은 유대인 가운데 거룩한 불꽃을 일으켰다. 바울은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를 이렇게 요약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마운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습니다.”(롬11:29) 이 가없는 은총이 우리 삶의 든든한 방패이다. 

 

*기도*

 

하나님, 푯대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걷는다 하면서도 한눈을 팔 때가 많습니다. 방심한 사이에 우리는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벗어나 엉뚱한 길로 나아가곤 합니다. 어느 순간 화들짝 놀라 삶의 방향을 되돌려 보려 하지만, 이미 몸과 마음에 밴 습성이 우리를 놓아주질 않습니다. 우리를 바른 길로 되돌려주실 분은 주님뿐이십니다. 가시나무로 길을 막고 담을 둘러쳐서라도 우리가 헛된 것들을 따라가지 않도록 지켜주십시오. 주님, 더디더라도 주님을 따라 걷고 싶습니다. 우리를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아멘.

 

-김기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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